第5章一颗埋骨钉
我没有参加你的葬礼。后来,我的一生都是 你的葬礼。
5장 부제목 - 저는 당신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제 삶은 온통 당신의 장례식이었습니다.
부제목 소년이 온다 글귀.......아무래도...그렇죠...
5-1 새로운 세계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우주가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도 했고, 온 우주가 내 맞은편에 자리 잡은 것 같기도 했다.
"삐——삐이이——삐이이이——"
대지는 이미 완전히 밤에 삼켜져 있었다. 귀를 찌르는 경보음이 일사불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복도 안을 끊임없이 울렸다.
차가운 철문이 천천히 열리며, 먼지 쌓인 빛 속으로 비밀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다가 다시 켜진 신호를 마주한 샤오위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샤오위에
설마……
하지만 거의 다음 순간, 그는 곧바로 동요를 가라앉히고 붉은 버튼을 눌렀다.
샤오위에
전원 경계 태세, '귀환 맞이' 준비!

대지 위에는 두텁고 검은 구름이 겹겹이 쌓여 하늘의 새로운 장막을 이루고 있었다. 울부짖는 강풍이 휩쓸고 지나가며, 뒤틀린 틈새 사이로 거대한 포효를 토해냈다.
어둠 속의 눈들이 하나둘 하늘을 올려다봤다——
폭풍우가 오고 있었다.

어둠은 밀물처럼 내 주위로 밀려들었고, 또 내 발밑을 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무수한 힘이 나를 찢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내 피부 속으로 파고들고, 혈관을 훑고 지나가며, 심장을 뒤흔들었다.
극심한 고통이 온몸으로 번져갔지만, 나는 여전히 앞을 향해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별빛처럼 흩어진 빛의 점들이 이따금 눈앞에 나타났고, 닿는 순간 가루처럼 흩어졌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누구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그 목소리도, 심지어 내 자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고집스럽게 앞을 향해 걸을 뿐이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의 점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이어서, 수많은 빛의 점들이 잇달아 솟아오르며 한 줄기 선처럼 이어지더니——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빛이 겹겹이 포개져, 망막 위로 어렸다.
소용돌이치던 어둠이 천천히 걷히고, 나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커튼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보였다.
양쪽 관자놀이에 은근한 통증이 전해졌다. 꿈이 그 희미한 빛을 따라 아득하게 흩어졌지만, 통증만은 내 몸 위에 남겨두고 간 것 같았다.
내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전에 뒤적이다 펼쳐놓은 책과 잡지들이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지금 눈앞의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고통스러운 꿈이 아니라는 걸 상기시켜 주는 듯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걷었다.
회백색의 하늘은 생기라고는 없었다. 폭풍우에 더럽혀진 흰 천 조각 같았다. 폭풍우는 이미 끝났지만, 여전히 잔뜩 음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내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세계가 “사랑”을 앞으로 나아가는 궤적의 근간으로 삼는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바꿔야 하는 걸까?
왜 또 이렇게 되는 거지? 왜 항상 이렇게 되는 거야?!
이 순간 나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 세계를 향해서든, BC 안의 정체불명의 존재를 향해서든, 아니면 그 이상한 꼬마아이를 향해서든.
왜 늘 이렇게 시험을 하나씩 마련해두고, 끊임없이 내 의지와 내가 지켜온 마음을 두드려 시험하는 걸까?
유연
……왜 이 세계가 그냥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계속 이어지게 둘 수는 없는 거야?
??
어쩌면 세계는 원래 그런 모습일지도 모르지?
불쑥,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슴이 철렁해 홱 몸을 돌렸다. 기이한 옷차림의 꼬마아이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존재의 등장은 지나치게 소리도, 흔적도 없어서, 온몸의 솜털이 순식간에 곤두섰다.
'사랑'을 잃은 이 세계에서 그의 존재가 또 어떤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가져올지.
나는 본능적으로 책상 위의 펜을 집어 손에 꽉 쥐었다. 하지만 시야 속의 그는 딱히 어떤 행동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저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꼬마아이
그렇게 긴장하지 마. 그냥 인사하러 온 것뿐이니까.
꼬마아이
사실 네가 알아차리려면 더 오래 걸릴 줄 알았거든. 너희 인간들의 유대라는 건 꽤 흥미로워.
유연
……
나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말 속에 은근히 배어 있는 의미를 눈치채고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연
너 혹시…… 세계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때부터 대가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거야?
꼬마아이
굳이 말하자면 성공할 줄 몰랐다는 쪽에 가깝지.
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을 보자, 정체 모를 분노가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유연
그럼 왜 그때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어!
유연
매번 이런 식이야! 뭉뚱그려서 알 수 없는 말만 해놓고! 당신들은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씩 던져 놓고 결국 모든 책임은 내가 짊어지게 하잖아!
유연
처음부터 대가가 '사랑'이라고 말해줬더라면……!
꼬마아이
그랬다면 너는 이 세계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걸 포기했을까?
(선택지 침묵)
나는 분노 때문에 이까지 계속 떨리는 것 같았지만, 단 한마디도 짜낼 수 없었다.
공기는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하지만 좌절감과 분노는 얌전하지 못한 아이처럼 귓가에서 계속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선택지 반박)
유연
당연하지!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을 거고, 그리고……
꼬마아이
그리고 네가 아직 찾고 있는 사이, 세계의 궤적은 네 눈앞에서 흩어져 사라졌겠지.
꼬마아이
물론, 나는 그런 일에 별로 관심 없어. 하지만 너는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꼬마아이
모든 것을 아직 그렇게 완벽하지 않은 순간에 머물게 하는 것 또한, 너희 인간이 생각하는 또 다른 형태의 완벽함일까?
유연
……
나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수많은 다정한 순간들이 뇌리를 가볍게 스치며 분노와 몸부림으로 가득한 말들을 전부 틀어막았다.
공기가 완전한 정적 속에 잠겼다. 하지만 패배감과 분노는 말을 듣지 않는 아이처럼 귓가에서 계속 크게 떠들어댔다.
//
꼬마아이
너는 늘 끝을 향해 치닫고 있는 무언가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애써왔어.
꼬마아이
혜성이 다가왔을 때도 그랬고, 세계의 규칙이 무너졌을 때도 그랬지.
꼬마아이
너는 줄곧 온 우주를 상대로 맞서 싸워왔어. 그러니……당연히 그것과 정면으로 맞서는 대가와 각오를 치러야지.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우주가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도 했고, 온 우주가 내 맞은편에 자리 잡은 것 같기도 했다.
우주가 나의 거대한 두려움이 되어, 내 머리 위와 가슴 위를 덮어눌렀다.
유연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이 세계에 “사랑”을 되돌릴 수 있어?
꼬마아이
궤적은 아직 불안정한 상태야. 네 힘과 그 힘들이 여전히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지.
꼬마아이
이 모든 것은 나도 겪어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나도 모르지!
그는 환하게 웃었다. 심지어 약간의 호기심마저 담긴,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이택언과 함께 보았던 블랙홀 같은 미래를 떠올렸다.
설마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걸어가게 될 궤적인 걸까?
꼬마아이
게다가 이것은 네가 직접 만들어낸 새로운 궤적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너뿐이야.
유연
……내가 결정한다고?
나는 그의 말을 중얼거리듯 반복하며, 거대한 막막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유연
내가 어떻게 결정해? 내가 결정하기만 하면, 궤적은 내 생각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야?
꼬마아이
그건 네 의지가 어디로 향하려 하는지에 달렸지.
그는 또다시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했고, 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번 만나다 보니,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가 지금 당장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것들은, 언젠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내 곁에 찾아온다는 것을.
'어디를 향하느냐'……이게 그가 나에게 주는 힌트일까?

한창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나연 언니였다.
안나연
5분 후에 회의 시작인데, 아직 회사 안 온 것 같아서요.
안나연
오늘 오나요?
나는 멈칫하며 휴대폰 시간을 확인했다. 출근 시간이 거의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맥없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아직 맞은편에 앉아 있는 꼬마아이를 바라보다 마음을 다잡았다.
유연
미안해요, 나연 언니. 회의 좀 대신 진행해 주실 수 있어요?
유연
갑자기 일이 생겨서, 곧 갈게요.
안나연
그래요. 다음엔 일이 생기면 미리 연락 주세요.
차가운 말과 함께 전화가 끊기며 세상이 다시 고요한 정적 속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사랑'을 잃은 세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과 마주해야 했다.
그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고 화장실로 가서 빠르게 씻었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문을 나서려는데 꼬마아이가 발코니에 서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우주의 심연 같았다.
왜인지 모르게, 나는 문득 그가 처음 나타났을 때 내게 건넸던 첫 마디가 떠올랐다.
어쩌면 세계는 원래 그런 모습일지도 모르지?
나는 그 질문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좌절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가슴 위를 감싸는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치 굉장히 단단한 어떤 힘처럼.
나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를 묵직하게 바라보았다.
유연
나는 이 세계가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왜냐하면......
유연
나는 이 세계가 아름다웠던 모습을 본 적이 있으니까.
5-2 한 줄기 빛
하늘에서 거대한 그물이 내려와, 모든 사람의 몸 위로 그림자를 덮는다.
중앙대로
하오요우라이·특색 바비큐 중앙대로점
평점 / 월 판매량 / 정시 배달
4.2 / 5000+ / 약 25분
최근 악평 99+
익명 유저 Lv3 단골 고객
만족도 ★☆☆☆☆ 맛 1점 포장 1점
저도 참 제정신이 아니죠. 얼마 전에 그 난리로 이미지가 다 무너진 거 뻔히 알면서도, 식탐 귀신이라도 씐 것처럼 또 못 참고 주문해버렸네요. 이번엔 제대로 개선했겠지 싶었는데, 오늘 음식에서 정체불명의 털이 나왔고, 소고기 꼬치에서는 소고기 맛도 하나도 안 났어요. 또 싸구려 재료로 채워 넣은 거 아닌가요?! 멀쩡한 간판을 굳이 갈수록 엉망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나요?! 다시는 안 시킵니다!! 그냥 폐업하세요!!
가게 답글
고객님, 저희의 부주의로 불쾌한 식사 경험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소중한 의견 감사드리며, 더욱 개선하고 보완하겠습니다. 다음에도 또 찾아주세요~
지하철
전쟁 “론”
대포 한 방에 황금이 쏟아진다.
행인A
이게 무슨 상황이야, 금값이 오르긴커녕 떨어지네?
행인A
저쪽에서 전쟁 난 거 아니었어? 학교랑 병원도 폭격됐다던데, 사람도 많이 죽었다며.
행인B
야, 호재가 실현되는 순간이 폭락의 시작이라는 말 못 들어봤어?
행인A
그럼 나 어떡해? 어제 최고점에 또 이십만 박아넣었는데, 씨발!
행인B
……얼마 전에 신고점 찍을 때 또 샀어? 꼭대기에 물린 거 아니야.
행인B
그냥 세계대전 빨리 터지길 바라봐. 다 같이 붙으면 금값 무조건 쭉쭉 오르지.
행인B
근데 그때 가서…… 남의 나라 전쟁으로 돈 버는 게, 양심에 걸리지 않겠어?
행인A
뭐가 걸려. 목숨보다 돈이 중요하지.
행인A
돈 없으면,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하지.
행인A
근데 네 말 듣고 생각났는데, 금이랑 은이랑 원유, 더 사놔야겠다. 본격 상승장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행인A
전 세계가 다 붙으면 최소 열 배는 오르지.
행인B
……
행인B
야, 지하철 왔다. 아직도 거기서 뭐 하냐?
행인A
금값 눌렸다. 인터넷 대출 좀 더 당겨서 몰빵해야지.
행인A
이 전쟁이 계속 크게 붙어줘야 하는데. 여러 나라가 더 뛰어들어서, 내 돈 두 배 될 때까지 싸워줬으면 좋겠다.
녹색광장
꿈과 현실
그가 죽은 뒤, 그는 그들의 상처투성이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동급생A
나 어젯밤에 자오양 꿈꿨어.
동급생B
뭐? 걔가 꿈에 어떻게 나왔는데?
동급생A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꿈에서 걔 안 죽었어. 다시 돌아온 거야.
동급생A
알고 보니까 부모님이랑 먼 여행을 간 거였대.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느라 계속 학교에 안 나온 거라고.
동급생B
그게 다야? 끝?
동급생A
그 뒤로는 기억 안 나. 그것만 기억나.
동급생A
죽은 사람이 꿈에 나오면 무슨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
동급생A
혹시 못다 한 소원이 있어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찾아온 건 아닐까……
동급생A
나 무당한테 가서 액땜이라도 해야 하나?
동급생B
혼자 쫄지 마, 히히. 어쩌면 그냥 네 얼굴이 보고 싶었던 거 아니겠어?
동급생A
야, 완전 소름……닥쳐.
동급생B
싫은데, 오늘 밤에도 또 찾아올 수도 있잖아~~
동급생A
너 진짜 미쳤어?
동급생B
왜 밀어? 씨, 그냥 농담 좀 한 거잖아.
동급생A
꺼져!
행인
야야, 그만해! 너희 어느 학교야!
동급생B
놔요!
동급생B
너 오늘 자오양이랑 같이 죽어!
5-3 진심의 한 걸음
모든 사람이 '사랑'을 잃었지만, 세계가 가져온 변화를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어젯밤 비에 흠뻑 젖은 거리가 거무스름하게 가라앉아 차가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길을 걸으며 무의식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누군가는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누군가는 공유 자전거를 한 손으로 몰며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어딘가의 단톡에서 수다를 떠는 학생, 느릿느릿 개를 끌고 걸어가는 노인.
사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음울한 하늘빛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 위에 내려앉아, 그들을 함께 조용히 잿빛 속으로 가라앉히는 듯했다.
그들의 삶에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생겼을까?
그들의 세계에는 갑작스러운 균열이 찾아왔을까?
모든 사람이 '사랑'을 잃었지만, 세계가 가져온 변화를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도 무언가를 깨닫지 못했고, 아무도 무언가를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그들의 등 뒤에 눈이 자라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의 그 눈들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무수히 죽은 듯한 시선들이 동시에 내게 쏟아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재촉했지만, 여전히 그 침묵의 시선들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한예준
연모고 사건은 이미 완전히 식은 것 같아. 새로운 게 없으니까, 요즘 스탠드업 코미디도 이 주제는 잘 안 다루더라고.
유영
우리가 '자살' 주제를 충분히 넓게 확장하지 못한 건 아닐까?
유영
연모고 사건 때 학생 자살 관련 주제로 다뤘으니까, 이번엔 '직장인 과로사'나 노인 자살로 넓혀볼 수 있지 않을까?
고은
노인 자살 주제 괜찮은데. 우리 친척이 그러는데, 얼마 전에 그 동네에서 노인이 우울증으로 투신한 사건이 있었대.
고은
사실 노인 자살 주제는 늘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거든. 포인트가 있을 것 같아.
한예준
맞아맞아, 거기다 노인 부양 문제, 부양 포기 문제까지 같이 다루면 되겠다.
한예준
근데 잘 생각해봐야 해. 요즘 숏폼 보는 젊은 애들한테는 OC 방치가 노인 부양 포기보다 클릭 수가 더 나온다고.
*OC=오리지널 캐릭터, 혹은 팬들이 창작한 캐릭터
편집자
그럼 그 OC 라는 게 자살할 수 있어요?
유영
AI로 키우는 거라면 가능할지도? 잠깐, 얘기가 너무 샜네... '연모고' 계속 이어갈까요? 데이터가……
한예준
야, 사장님이 정한 일이면 그냥 따라가면 돼. 하라는 대로 해. 선배 말 들어, 상사랑 괜히 각 세우지 마.
회사 문을 들어서자, 어렴풋이 자리에 앉은 몇몇 사람의 잡담 소리가 들려왔다. 저마다 신이 나서 화제를 끝없이 이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익숙한 얼굴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나는 말없이 사무실로 들어가 건성으로 이런저런 문서를 뒤적였다.
한예준 말대로 연모고 자살 사건 수사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특파팀에서 새로운 소식을 내놓지 않으면서, 후속 취재도 관심이 뚝 끊겼다.
실종된 만유(万游)는 어느새 실종자 관련 사건으로 묶여 처리된 것 같았다. 마치 자살 사건에 우연히 휘말린 행인 하나처럼.
선정적인 제목으로 시작된 각종 생방송도 점점 강해지는 인터넷 규제에 하나씩 폐쇄되었지만,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콘텐츠들이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기꺼이 '욕망'에 지갑을 열었고, '자기 자신'이 가장 잘 팔리는 키워드가 되었다.
반면 우리가 밀어왔던 가족 관계와 공익 관련 주제의 관심도는 갈수록 낮아지기만 했다.
카메라 앞의 사람은 영양가 없는 말을 늘어놓고 카메라 밖의 촬영자도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컴퓨터 화면의 그래프는 계속 아래로 꺾였고, 보기 좋지 않은 빨간 숫자들로 요약됐다.
검토를 기다리는 협업 콘텐츠 더미를 바라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조회수를 위해 내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것들을 찍어내는 일을.
세계는 늘 소리 없는 압박으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피해도 되고, 멀어져도 되고, 못 본 척해도 됐다.
하지만 세계는 너무 좁았다. 결국 파도처럼 발목을 적시고 온몸을 집어삼켜 우리를 그 흐름에 휩쓸린 일원으로 만들어버릴 것이었다.
유연
……균형점을 찾아야 해.
아직 '사랑'이 되돌아오는 방법을 찾지 못한 이상, 유연 제작사가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 먼저 쓸려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왜인지 모르게, 나는 문득 오래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회사가 거의 문을 닫을 뻔했던 그때로.
가슴 앞에서 거대한 위기감이 뛰놀았다. 다만 이번에는 자금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더 버텨야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연
근데 수치가 계속 나빠지면, 이택언이 투자를 철회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텐데……
쓴웃음을 지으며, 아직도 농담할 여유가 있는 내 자신이 새삼스러웠다.
이내 빠르게 마음을 정리하고, 두꺼운 서류 더미를 빠르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안나연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유연
나연 언니, 시간 있어요? 회의실에서 같이 좀 확인해볼 게 있어서요.
그녀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따라왔다.
그런 다음 나는 각 프로젝트의 핵심 담당자들을 몇 명 더 불렀다.
유연
모두 부른 건, 공유하고 싶은 상황이 있어서예요.
유연
이전에 보류된 프로젝트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하면 저 개인적으로 자극적인 내용만 쫓는 콘텐츠를 유연 제작사의 이름으로 내보내는 건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유연
하지만 지금 시장 상황이 순진한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아요. 아무리 좋은 콘텐츠도 팔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유연
그래서 오늘 이전의 여러 안건들을 다시 한번 검토해봤어요. 직접 만나서 다시 한번 같이 짚어보고 싶었어요.
유연
우리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접근 방향을 찾아보자고요.
나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바라보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회의 테이블이 우리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깊지도 얕지도 않은 경계선처럼.
누군가는 흥미 없어 보였고, “무슨 말을 하든 OK”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잔뜩 벼르며 의욕에 넘치는 사람도 있었다.
익숙한 동료들의 낯선 얼굴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래도 나는 흔들리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안나연
그럼 시작하죠. 어느 안건부터 볼까요?
적막한 회의실에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딘가 먼 곳에서 전해지는 메아리 같았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유연
Evol 신구역 설립을 제안하는 모의 생활 프로그램부터 시작하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창밖의 빛바랜 노을이 이미 하늘을 천천히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낙서로 가득한 A4 용지들을 바라보다, 나는 의자를 돌려 멀리 빌딩 사이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의 규칙과 나의 어떤 '판단 기준'에 맞는 선에서, 오후 내내 후속 촬영 주제와 프로그램 제작 방향을 다시 정리했다.
유연
……하지만 이걸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눈앞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계를 바라보며, 머릿속이 계속 돌아갔다.
전에 세계는 '기억'의 힘으로 모든 것을 17년 전으로 '되돌렸고', 내가 톱니바퀴를 부순 뒤 모든 기억을 한꺼번에 풀어놓았다.
같은 논리로 생각하면, 세계가 '사랑'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다면, '사랑'의 힘도 다시 모든 사람의 마음속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꼬마아이는 방법을 모른다고 했다. 내가 결정해야 한다고.
나는 또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 걸까?
아침부터 은근히 아프던 머리가 다시 또렷하게 욱신거려 왔다. 나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 책상에 엎드렸다.
운명에 선택받는다는 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지금에 이르러서도, 나는 여전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조용한 사무실에 불쑥 맑은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유연
……허묵?
허묵
내 전화가 꽤 의외라는 듯 들리네요.
유연
그냥……이 시간에 당신일 줄은 몰랐어서요.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생각하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담담하고 단순한 질문이 돌아왔다.
허묵
다른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나요?
유연
……아니요,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허묵
예전의 저였다면, 그래도 이렇게 의외로 느껴졌을까요?
나는 마치 그가 관찰하고 교류하는 대상이 된 것 같았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 어린 연구자처럼 냉정하고 날카롭게 탐색과 질문을 이어갔다.
유연
혹시 이 전화도 당신의 실험 중 하나인가요?
허묵
아니요. 다만 전화를 건 본래 목적에 비해, 지금 당신의 대답이 조금 더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어 보여서요.
유연
그럼 저도 궁금한데, 이 전화를 건 원래의 이유는 뭐였어요?
허묵
고아원 아이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어요.
유연
……!
귓가에 들리는 차분한 말과 달리,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연
아이들을 구해냈어요?! Poseidon이랑 거래한 거예요? 당신한테 뭔가 요구하지 않았나요?
유연
뭘 준 거예요? 혹시 약점이라도 잡힌 건 아니에요? 그 사람 아직 다른 실험도 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허묵
……
내 질문들 앞에서, 허묵은 잠시 말이 없었다.
허묵
첫 번째 질문은 이미 답했고, 나머지 질문은 전부 중요하지 않아요.
허묵
당신과 약속한 건 지켰어요. 당신도 우리 사이의 실험에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길 바랍니다.
노을이 다 져가는 시간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유독 멀게 느껴졌다.
허묵
다음번 제 전화도, 당신에게 이렇게 의외로 느껴질지 모르겠네요.
5-4
연모고등학교 자살 사건 관련 공지
사회 여론 보호 및 미성년자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연모고등학교 자살 사건 관련 내용에 대한 검토를 실시합니다.
5-5 혼란한 빛과 그림자
선배가 '백기'가 아니었으면 절대 말 안 했을 거예요.
허묵이 전화를 끊은 뒤, 나는 거의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허묵이 이런 일로 나를 속일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직접 눈으로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택시를 타고 쌍엽 고아원 문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납빛으로 흐려져 있었다.
철문 안쪽으로 켜진 창문의 불빛이 조용하고 따뜻하게 어둠 속에 흩어진 작은 불씨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막 저녁을 먹은 모양이었다. 복도에서는 이따금 장난치는 웃음소리와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지금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무언가 묵직한 것이 가슴속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안도감과 동시에, 불안함도 밀려들었다. 어느 순간, 내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다시 심연으로 떨어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는 말없이 고아원 밖 공터에 서 있었다. 그때 문을 잠그러 나온 원장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원장
유연 씨? 오랜만이네요.
원장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떻게 왔어요?
원장
무슨 일이 있으면 내일 낮에 다시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이미 문 닫을 시간이라서요.
그녀의 태도는 온화했지만 거리감이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바깥으로 떼어놓는 듯해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유연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그냥 방금 일을 마치고 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서요.
유연
그냥 인사나 드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사이,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문 앞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작은 머리들이 장난스럽게 하나둘씩 포개졌다.
유연
안녕!
여자아이A
언니다!
남자아이A
큰누나가 왔어!
결국 머리 탑이 와르르 무너지며, 아이들이 각자 달려나와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저마다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타이밍이 딱 맞았다. 나는 아이들이 옆에 모이는 틈을 타 자연스럽게 쪼그려 앉아, 그들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살며시 Evol을 구동했다——
끊어진 기억 속, 군데군데 거대한 공백이 자리하고 있었다. 각 아이의 기억 장면이 마치 손상된 테이프 조각들처럼 이어지다가, 이따금 알 수 없는 잡음이 흘러나왔다.
남자아이A
아파……아파……
여자아이C
주사 싫어……아! 으앙으앙으앙……
??
으앙으앙으앙, 집에 가고 싶어……
아이들의 팔에는 수액 장치가 연결되어 있었다. 투명한 수액 관이 당겨지며 차가운 빛 속에 자꾸자꾸 흔적을 남겼다.
부서진 목소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기억 속 장면마다 날카롭고 귀를 찌르는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그 울음소리도 뚝뚝 끊기다가, 공백 너머로 끝없는 어둠이 이어졌다. 마치 어둠이 내뱉는 진동 같았다.
여자아이B
……언니? 언니?
유연
……!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삼켰다. 눈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의 얼굴과, 기억 속의 그 공백들이 겹쳐졌다.
누군가 이 아이들의 기억에 손을 댔다. 그렇다면 그 고통스러운 장면들은 대체 무엇이지?
제대로 지워지지 않은 잔재인 걸까? 하지만 이미 공백이 됐다면, 왜 그 장면들은 그렇게 선명한 걸까?
게다가 그 장면들은……전에 텅 빈 고아원에서 봤던 것과 거의 똑같았다.
이 아이들이 이미 그런 일을 당한 걸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작은 손바닥을 꼭 쥐며, 손등을 살펴봤다. 매끄러운 피부 위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남자아이C
알았다, 언니 우리 보러 멍 때리러 온 거지!
남자아이B
멍 때리기? 나도 할 수 있어! 봐봐!
남자아이가 우스운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꼿꼿이 굳어 있자, 곧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졌다.
나도 그 웃음에 굳어있던 마음이 조금 풀리며, 아이들을 따라 함께 웃었다.
원장 선생님이 멀리서 뒷정리를 하는 틈을 타, 나는 슬며시 아이들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유연
언니한테만 살짝 말해줘. 혹시 나쁜 사람이 너희한테 나쁜 짓 한 거 있어?
여자아이A
나쁜 짓이요?
남자아이C
있어!! 그저께 샤오과가 내 초콜릿 몰래 먹었어!
남자아이B
나 안 먹었거든! 조금만, 아주 조금만 깨물었을 뿐이야!
아이들이 한바탕 뒤엉키며 서로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실험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어떤 꾸밈도 없었고, 후유증의 흔적도 없었다.
마음속 의문이 점점 더 짙어졌다. 원장 선생님이 시간이 늦었다며 선생님을 시켜 아이들을 방으로 데려갈 때까지도.
대문을 나서면서, 나는 원장 선생님을 향해 살짝 손가락을 튕겼다——
익숙하면서도 끊기고 끊기는 공백을 바라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원장 선생님의 기억도 누군가 손을 댄 것이었다. 다만 아이들의 실험과 관련된 장면은 없었다.
유연
왜……
원장 선생님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아이들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허묵은 전화에서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Poseidon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아이들이 돌아왔다고 해서, 그게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의 실험이 멈춰졌을 리 없었다. 이 아이들이 아니라면, 다른 아이들이 있는 건 아닐까?
어둠이 소리 없이 나를 내려다보며, 광대하게 하늘과 땅 모든 것을 삼켜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혼자서는 이 모든 걸 지킬 수 없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번호 하나를 눌렀다.
"뚜——"
"뚜——"
"뚜——"
긴 신호음이 결국 통화 중 소리로 바뀌었다. 연결되지 않는 화면을 바라보며, 나는 맥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될 거라 짐작은 했지만, 연결되지 않는 통화 화면을 눈앞에 두고 보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밀려왔다.
유연
그냥 특파팀에 신고하러 가는 게 나으려나……
어쩌면 평범한 시민으로서 신고하는 방법을 택해야 할지도 몰랐다. 적어도 이 사건이 지금 이 순간에 멈추지 않도록.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택시 앱을 열어 특파팀 주소를 입력하려는데——
갑자기 낮고 묵직한 엔진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밤보다 더 짙은 검은 실루엣 하나가 차가운 흰 불빛과 함께 어둠을 정면으로 가르며 내 눈에 꽂혔다.
반사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는 찰나, 짧고 단호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 뒷바퀴가 살짝 흘렀다. 그리고는 내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익숙하지만 차갑고 단단한 뒷모습이 오토바이에서 내려섰다. 온몸에는 아직도 차갑고 엄숙한 바람이 걸쳐져 있는 듯했다.
유연
……선배?
백기는 먼 길을 달려온 듯, 온몸에 차가운 바람을 두르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순간, 그 역시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저 눈을 가늘게 뜰 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아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백기
여기 있어.
바람 속에 차가운 말 한마디만 남긴 채, 그의 발걸음과 함께 그 말도 조용히 흩어졌다.
백기의 등장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혹시 그도 고아원 관련 사건을 수사 중인 걸까?
아이들이 납치된 뒤, 특파팀에도 관련 정보와 소식이 들어온 걸까?
의문이 꼬리를 물며 더 큰 막막함으로 번졌다. 살짝 뒤를 몰래 따라가고 싶었지만, 방금 백기의 분위기가 어딘가 묘하게 날카로웠던 것 같았다.
잃어버린 것이 조금 더 분명한 윤곽을 드러낼수록, 나는 지금의 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점점 알 수 없어졌다.
다가갔다가 거절당할까 봐. 하지만 멀리 있으면 멀어져가는 바람을 그냥 지켜보는 것 같아서.
나는 대문 옆 외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인 채 그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윽고,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백기가 내 앞으로 돌아왔다.
백기
이 일이랑 얼마나 엮여 있는 거야?
그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밤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가볍게 날리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호박빛 눈이 드러났다.
유연
말해주면, 선배도 알고 있는 거 나한테 말해줄 거예요?
백기
아니.
유연
……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박힌 채, 이 돌덩이 같은 사람을 참을 수 없다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백기
나한테 전화했고, 휴대폰 택시 앱에 특파팀 주소 반쯤 입력해뒀더라.
백기
원래 계획대로 발견한 상황을 말해도 되고, 아니면 나랑 같이 특파팀 가서 신고하는 방식으로 말해도 돼.
유연
……
유연
근데 나 지금도 계획 바꿀 수 있거든요. 말 안 하고, 신고도 안 하는 걸로요.
백기
그래, 그럼 더 지체하지 말고 가자.
그가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쿨하게 블랙이에 올라타려 하자, 나는 냅다 그의 손을 붙잡았다.
유연
잠깐만 잠깐만……! 선배 왜 이래요?
백기
내가 뭘 어쨌는데?
유연
방금 그게요!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누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생각났는지, 얼굴이 다시 냉랭하게 굳어버렸다.
백기
그래서, 말할 거야?
유연
선배 혹시 특파팀에서 심문할 때 쓰는 방식으로 저 상대하는 거예요?
백기
너한테는 그런 것까지 쓸 필요도 없어.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유연
선배가 '백기'가 아니었으면 절대 말 안 했을 거예요.
백기
……
말하려다 멈춘 듯한 그 눈빛이 어둠 속에 가려졌다. 동공이 아주 미세하게 수축했다.
나는 그 안에 숨겨진 폭풍을 눈치채지 못한 채 항복하듯 입을 열었다.
유연
선배가 말하는 '엮여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내가 알게 됐을 때, 아이들은 이미 납치된 뒤였던 것 같아요.
유연
그전에 여기 왔을 때 Evol 능력이 발동됐는데, Poseidon이 아이들한테 실험하는 장면을 봤어요.
유연
마치 내 예지 Evol이 발동될 때처럼요. 그래서 그때는 미래를 본 거라고 생각했어요.
백기
특정 능력 외에는 Evolver에게 능력이 하나여야 해.
백기
기억 Evol은 정상적으로 발동되고 있어?
유연
……아마 정상인 것 같아요. 방금도 사용했는데, 아이들 기억이 전부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있었어요. 원장 선생님도요.
유연
많은 장면들이 지워져 있었는데……그래도 아이들이 울부짖는 장면은 볼 수 있었어요. 근데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해요.
유연
이게 대체 뭔지 모르겠어요. 좀 뒤죽박죽으로 말하는 것 같긴 한데, 제가 본 건 이게 전부예요.
5-6 잊혀진 아이들
여러 사립 고아원이 경제 분쟁에 휘말려, 아동 처우 문제가 불거지다.
5-7 마음의 절벽
더 이상 이 일들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해.
밤바람이 잔잔하게 불었다. 백기는 내 말을 들으며 살짝 미간만 좁혔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계가 고요한 정적 속으로 잠겼다. 어둠 속에서 블랙이의 헤드라이트만이 길게 빛의 선을 뻗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뭔가 말을 해야 할지 말지 잠시 알 수 없었다.
시선 끝에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아까 내가 억지로 붙잡았던 그의 손을, 나는 아직도 놓지 않고 있었다.
넓고 큰 손바닥에는 밤의 서늘함이 배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살며시 구부러지며 내 손가락과 얽혀 있었다. 마치 이 두 손은 원래부터 이렇게 맞닿아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슬그머니 그 차갑고 단정한 얼굴 위로 옮겼다. 그러다 깊고 그윽한 눈빛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유연
……!
나쁜 짓을 들킨 사람처럼,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유연
오해하지 마요, 선배 기억 읽은 거 아니에요.
백기
알아. 읽었으면 그런 반응이 아니었겠지.
유연
그럼 선배……사실 내가 계속 손 잡고 있었던 거 알고 있었어요?
백기
……
그는 살짝 눈을 크게 떴고, 시선은 조금 허둥대듯 옆으로 비껴갔다. 어딘가 초조한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퉁명스럽게 몇 글자를 내뱉었다.
백기
……몰랐어. 나도 잊고 있었거든.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예쁜 눈썹과 눈매가 점점 더 깊이 찌푸려지는 걸 보다가, 그 곡선이 어느새 내 입가에도 번져있다는 걸 느꼈다.
바람이 가볍게 내 치마 자락을 들어올리고, 그의 머리카락도 살랑였다. 어렴풋이, 백기가 그렇게 먼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연
좋아요. 그 말은 즉, 제가 백 경관님 앞에서 정말 정직하다는 뜻이네요. 몰래 능력을 쓰지도 않았으니까요.
유연
그럼 선배도 말해줄 수 있지 않아요? 고아원 일을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백기
그것 말고, 또 알고 싶은 게 있어?
그가 입을 열려는 것 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이 반짝였다.
유연
연모고 학생 자살 사건, 다른 수사 진행 상황이 있어요?
유연
그리고……지금 연모시 전체적으로 사건이 많아진 거 아닌가요? 요즘 실종자도 많이 생기고 있는 것 같고요.
유연
그리고……선배는 괜찮아요?
사실 어머니의 사건 조사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한참을 고민해도 어떻게 입을 여는 것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백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가늘고 긴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결국 내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백기
그렇게 많았나.
유연
저도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
백기
그러면, 더 이상 이 일들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해.
유연
네?
예상했던 대답과는 전혀 달랐다. 백기의 갑작스러운 판단에 나는 순간 숨이 막혔다.
유연
……왜요?
백기
넌 이 모든 걸 해결할 능력이 없어.
백기
네가 하는 일은 너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뿐이야.
그의 말은 너무도 직설적이었다. 내 세계에 갑자기 커다란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유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유연
저도 중요한 단서들을 많이 발견했잖아요. 고아원 아이들이 돌아오는 데도 도움이 됐고요.
백기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누군가한테 기억을 읽히기도 했잖아. 아직 그 사람의 행방도 못 찾았고.
내가 억지를 부리자, 백기의 목소리는 더욱 단호하고 냉정해졌다.
백기
앞으로 또 비슷한 위험이 닥치면 어떻게 할 건데?
백기
고아원 일도 그래. Poseidon을 어떻게 해결할 거야? 만약 그의 최종 목표가 너를 잡아서 실험하는 거라면, B.S.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할 건데?
백기
연모고 아이들이 정말 자살이 아니라면, 그 배후가 네 앞에 나타났을 때——
백기
너 혼자 자신을 지킬 수 있어?
백기
너 혼자서 이 모든 걸 다 감당할 만큼 강해?
유연
……
백기의 몰아붙이는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말에는 더 이상 어떤 부드러움도 없었다. 칼날처럼 노골적으로, 내 모든 아픈 곳을 훤히 벗겨냈다.
나는 그가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고 모든 것을 해결할 능력을 갖고 싶지 않겠어. 그냥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도망쳐버리고 싶지 않겠어.
......그런데 나는 늘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약하고, 따뜻하고, 무고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그들 역시 나를 바라보고, 내 손을 잡아준다. 마치 세계의 다정한 손바닥처럼.
유연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선배도 저한테 많은 도움을 줬어요.
유연
저는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려 한 적이 없어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며, 서로를 부축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유연
……제가 강하다는 걸 선배한테 증명해야만, 선배와 함께 조사하고 다른 사람을 도울 자격이 생기는 건가요?
백기는 온몸이 순간 굳어버린 것 같았다. 길고 짙은 그림자가 높은 탑처럼 우뚝 섰다.
유연
선배한테 Evol이 없고, 싸움도 못 하고, 특파팀원도 아니고, 심지어 경찰도 아니라해도……
유연
가슴 아프거나 슬픈 일을 마주했을 때, 선배도 똑같이 움직였을 거잖아요?
나는 그 호박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폭풍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대답도.
유연
저는 그냥 선배랑 같아요.
백기
나라면 그런 내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할 거야.
그의 목소리는 매우 차갑고 단단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도 설득하는 것 같았다.
백기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자기가 먼저 수영할 줄 알아야 해.
백기
넌 혜성을 막았고, 수없이 세계를 계속 나아가게 했어. 그건 대단한 거야.
백기
하지만 그 힘은 너 자신을 지켜주지 못해!
백기
지금 네가 신경 쓰고 있는 일들은 이미 특파팀에서 따로 수사 중인 사건이야. 담당 대원들이 계속 조사하고 있어.
백기
특파팀은 연모시의 모든 사람을 보호하고, 모든 범죄자가 그에 합당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그의 목소리가 어느새 빨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을 걱정과 초조함이 그 안에 배어 있었다.
내 가슴이 시큰하게 아팠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백기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내가 그가 있는 자리에 서면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 것도 이렇게 선명하게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등을 곧게 폈다. 그 앞에서 한 치의 겁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유연
……하지만 저도 연모시를 지키고 싶어요. 내가 본 모든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요.
백기
약해서는 아무도 지킬 수 없어.
유연
그래도, 저는 선배를 지키고 싶어요.
그는 거의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짙은 호박빛이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그 불꽃 속에 열여섯 살의 소년이 서 있었다.
나는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소년도. 손바닥 안으로 손톱을 꾹 눌러 박으며.
유연
어쩌면 제 힘은 아주 약하고, 모든 일을 해결하기에는 부족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절대 약하지 않아요.
유연
나를 얕보지 마요.
나는 이를 악물며, 그에게 두 번째 선전포고를 날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집과 걱정을 품은 채.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고, 누구도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다.
세계는 '사랑'을 잃었고, 그에게는 더 이상 윤곽을 그릴 수 없는 어떤 집념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그를 태우고, 두드리고, 그를 홀로 싸우게 했다.
마침내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홧김에라도 그러는 사람처럼 블랙이에 올라탔다. 으르렁대는 엔진 소리가 그의 닫힌 입처럼 답답하게 울렸다.
백기
타.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돌덩이가 된 채로,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여분의 헬멧을 내밀었다.
백기
데려다줄게.
유연
……
유연
그냥 가요. 저 혼자 택시 부를게요.
그 태도에 나도 발끈해서 그렇게 말하며 택시 앱을 열려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검은 그림자가 내 앞을 덮쳤다. 허리를 감싸는 거역할 수 없는 힘과 함께, 나는 그대로 오토바이 뒷좌석에 눌러 앉혀졌다.
유연
선배……!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헬멧이 강제로 씌워졌다.
익숙한 등이 내 가슴에 맞닿았다. 격렬한 심장 소리가 엔진 소리를 넘어 내 세계 안에서 계속 울렸다. 그게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연
선배랑 같이 안 갈 거예요!
'돌덩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을 억지로 끌어당겨 자신의 허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 동작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그 자신도 잠깐 멈칫했다. 그러고는 더 퉁명스럽게 앞으로 당겨, 내가 더 꼭 안게 만들었다.
바람이 몰아쳤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초조함과 울분을 싣고.
백기
떨어지기 싫으면, 꽉 잡아.
5-8 어둠의 미로
우리는 이미 미래를 잃었어. 더 이상 반 발짝의 실수도 허용할 수 없어.
백기의 뒷모습이 밤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잔뜩 화가 난 채 집 문을 밀고 들어가, 분노와 서러움을 안고 소파 속에 몸을 묻었다.
그가 나를 걱정한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예전처럼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고 싶었다. 그의 곁에 서고 싶었다.
밤은 깊고 조용해서, 그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말들이 유독 또렷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백기
너 혼자 자신을 지킬 수 있어?
유연
없어.
백기
네가 하는 일은 너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뿐이야.
유연
……
나는 쿠션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백기 앞에서 억지로 버텨냈던 모든 강한 척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패배감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물론 가장 편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눈물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은 다시 다정한 눈으로 서로를,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나연 언니, 유영, 그리고 유연 제작사의 모든 사람들도 내 동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백기도……
눈앞에 그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인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고집스럽고 초조해 보였다. 더는 붙잡을 수 없는 한 줄기 바람처럼.
가슴이 꽉 조여오는 것 같아, 나는 힘없이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백기 앞에서 강한 척했지만, 나는 지금 이 세계에서 거의 혼자 싸우고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일을 계속해 나가려면, 최소한 나 자신을 지킬 만큼의 능력은 갖춰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쓰지 않았던 마취총을 꺼내 허공을 향해 겨눠보았다.
유연
……이걸로는 부족해.
Evol 능력도 어느 정도 끌어올려야 할 것 같았다. 고아원에서 봤던 장면이 기억인지 미래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했으니까.
여러 곳에서 실험을 경험했는데도, 나는 사실 내 자신에 대해 그렇게 깊이 알고 있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소파에 다시 앉아,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능력을 발동하려 했다.
일단 내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구분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장면이 떠오르기보다, 통증이 먼저 머리를 점령했다.
세계가 툭툭 끊기는 파편들로 부서졌다. 빠르게 스치는 흐릿한 빛과 그림자가 노출 과다된 사진들처럼 겹겹이 쌓였다.
수많은 빛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머리가 터질 것 같은 통증을 몰고 왔다. 그것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어떤 장면도 선명하게 볼 수 없었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를 이 팽창하는 압박 속에 가두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수천 개의 빛의 점들이 폭발했다가 하나씩 꺼져가는 과정을 그저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소파에 털썩 쓰러진 채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유연
……이게 뭐지?
말을 내뱉은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이 완전히 소진된 것처럼, 그대로 순수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어렴풋한 의식 속에서 고개를 숙이자, 곧게 선 내 두 다리가 보였다.
어딘가 가려는 걸까?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어둠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거대한 미로 같았다. 내 발걸음을 따라 끝없이 펼쳐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소리가 어떤 경계선 너머에 갇혀 있어, 세계가 완전한 정적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걸었는지 잊어버린 채, 어느 순간 무언가가 내 곁을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낯익으면서도 차가운 기운을 품은 채, 내 머리카락과 손끝을 간지럽히며 서늘함을 흘리고 갔다——
바람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바람이 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아주 희미한 빛의 점 하나가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바람이 점점 강해지더니, 마침내 어두운 빛 전체를 걷어올렸다——
끝없는 회색이 시야 전체를 채웠다. 바닥부터 벽, 천장까지, 아무런 경계 없이 한 덩어리로 갈아낸 금속 외피 같았다.
차가운 흰 빛이 수직으로 내리꽂혀 바닥을 반듯하게 잘라냈다. 홀 중앙에 매달린 문양이 그 빛 속에 차갑게 내 눈에 박혔다——
유연
……NW?!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NW는 내가 꿈에 볼 만한 곳이 아닌데.
……나 아직 꿈속에 있는 건가?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머리는 점점 더 무겁고 아파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기둥 뒤에 숨으려 했다. 하지만 막 몸을 돌리는 순간, NW 대원 한 명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유연
……!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히고, 양손을 몸 앞에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상대는 나를 보지 못한 것처럼,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 혼자만 그 자리에 멍하니 남겨졌다.
유연
나를 못 보는 건가?
유연
역시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홀 한가운데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지나치는 대원들 모두 아무런 낌새도 없이 내 곁을 통과했다.
그들을 바라보다, 나는 홀 기둥 옆으로 다가가 무심코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내가 닿은 부분이 벽에 붙은 수면처럼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 모든 게 너무 이상했다. 이런 꿈은 한 번도 꿔본 적이 없었다.
의아함에 잠겨 있는데, 날카롭고 깔끔한 발소리가 홀 안으로 들어왔다.
옷감의 가벼운 마찰음, 가죽 장갑이 조여드는 미세한 소리까지, 텅 빈 공간이 모든 것을 증폭시켜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차갑고 매서운 호박빛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차갑게 NW 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처럼, 내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나를 지나쳐 안쪽으로 향했다.
왜 백기가 여기 있는 거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거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뒷모습을 따라 뛰었다.
그는 이 건물 구조를 완벽하게 꿰고 있었다. 복잡하고 비슷비슷한 복도를 따라 능숙하게 좌우로 꺾더니, 낯선 방 하나로 들어갔다.
거대한 유리방이 넓은 방 한가운데 고요히 자리 잡고 있었다. 방 안팎이 온통 텅 비어 있었고,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
백기가 들어서는 순간, 유리방 전체에 불이 켜졌다. 그와 동시에, 낯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샤오위에
늦었군.
샤오위에가 지휘대처럼 생긴 장치 뒤에 서서 무심하게 몇 마디를 던졌다.
너무도 선명한 목소리에 나는 잠깐 멈칫했다. 세계에서 잡음이 걷히고, 두 사람이 바로 내 앞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꿈이 너무도 생생했다. 실제로 일어났던 장면 같았다.
하지만 백기는 그를 무시한 채, 조용히 장갑을 끼며 유리방 쪽으로 걸어갔다.
샤오위에
Evol 전체 능력이 약해지는 문제는, 기술팀에서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지 못했어.
샤오위에
일단 오늘 네 결과부터 보지……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백기가 이미 샤오위에 앞으로 파고들었다.
어떤 예고도, 어떤 탐색도 없었다. 거리는 순식간에 극한까지 압축된 것 같았다.
주먹에 실린 바람이 공기를 스치고 지나가며 아주 짧은 파공음을 일으켰고, 그대로 샤오위에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도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옆으로 몸을 틀어 피해냈다.
두 사람의 주먹이 순식간에 교차하며 묵직하고 날카로운 충돌음을 냈다. 공기가 완전히 갈라졌다.
샤오위에
조급해 보이는군.
그에 대한 대답은 더욱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들이었다. 포효하는 바람이 치명적인 압박감을 싣고, 백기의 움직임에 따라 샤오위에가 있는 공간을 끊임없이 조여들었다.
하지만 샤오위에의 반격도 거의 완벽했다. 발걸음은 안정적이면서 빨랐다.
내가 그의 모든 움직임을 봐왔던 것처럼, 모든 힘이 한계까지 정밀하게 조율되어 있었다. 바람 칼날을 받아내면서 그 힘을 순간 되돌려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정밀하게 맞물린 두 개의 기계 같았다.
두 사람의 움직임과 공격이 끊임없이 조정되며, 상대의 주먹을 받아낼 때마다 공격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다음 순간 다시 파고들었다.
하지만 바람의 압력이 점점 낮아지는 것 같았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 속에서, 나만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백기의 움직임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샤오위에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움직일수록 더욱 거침없어졌다. 상대의 치명적인 부위를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유연
선배……
그의 눈 속에 무언가 결연한 것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바람을 더욱 타오르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불사를 것 같은 맹렬한 불꽃처럼.
공기가 찢기는 순간마다, 숨결 속에서조차 죽음의 냉기가 느껴졌다. 바람이 검은 날개를 펼치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기류가 백기의 손바닥에 모였고, 순식간에 샤오위에의 가슴 앞으로 다가갔다.
샤오위에
……!
그는 어떤 치명적인 압박감을 느낀 듯, 가까이 들어온 바람을 억지로 피해냈다——
하지만 그 찰나의 빈틈이 다음 공격의 틈새가 됐다.
거의 같은 순간, 샤오위에의 몸이 빠른 속도로 방 반대편 벽에 처박혔다.
샤오위에
……제법인데.
몸이 비틀거렸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세우며 옷의 먼지를 털었다.
백기
네가 졌어.
백기
이제 약속을 이행할 차례야.
백기의 말을 듣고, 샤오위에는 그를 바라보며 비웃듯 웃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느릿하게 지휘대로 돌아가, 능숙하게 여러 버튼을 눌렀다.
샤오위에
방금 날 죽이려 했나?
백기
어떻게 생각해?
유달리 거칠게 내뱉는 말이 샤오위에의 입가에 냉소를 흘리게 했다. 지휘대가 그의 지문을 여러 번 반복해서 스캔했다——
그런데 눈앞의 투영 화면이 눈부신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NO ACCESS".
노골적인 거절이 샤오위에의 얼굴 위 웃음을 더욱 아이러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백기의 눈 속에 들끓는 분노를 더욱 타오르게 했다.
백기
날 속였나?
샤오위에
약속은 지켰어. 네가 나를 이기면, 내 권한 안에 있는 어떤 파일이든 열람하게 해주겠다고 했지.
샤오위에
다만, 네가 한발 늦었다고밖에 할 수 없군.
화면 위에서 내가 알 수 없는 데이터들이 깜빡이며, 차갑게 백기의 눈 속에 반사됐다.
샤오위에
사령관이 귀환했어.
샤오위에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던 “원항 계획”이 성공했다.
샤오위에
그러니 이제는 네가 알고 싶은 것들을 직접 그에게 물어볼 기회가 생긴 셈이지.
그는 화면 위의 것들을 전부 거두고, 다시 다른 버튼을 눌러 유리방 안의 불을 다시 밝혔다. 그 빛은 그의 비웃음으로 가득한 미소를 비추었다.
샤오위에
그런데 네가 감히 그럴 수 있겠나?
세계에서 메아리가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나는 백기의 분노로 가득한 눈만을 볼 수 있었다.
먼 곳의 고층 건물 위, 밤빛은 높고 낮은 두 목소리를 말없이 먹구름 아래 숨겨놓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느 고층 건물의 방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손에 든 장치가 마치 호흡하듯 어두운 초록빛을 쉬지 않고 깜빡였다.
U
내가 한 번 더 '증폭'하러 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T
발사장은 이미 가동 중이야.
T
그녀의 기억 미로가 막 펼쳐졌어. 적응할 시간을 좀 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제어 불능이 될 수 있어.
U
그럼 왜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불러들인 거야?
T
Zeus는 늘 신중하잖아. 이해해줘, Oceanus.
키 큰 실루엣이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묵직하게 어떤 미래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T
우리는 이미 미래를 잃었어. 더 이상 반 발짝의 실수도 허용할 수 없어.
5-9 새로운 탐색
생각하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의 멈춤이자 시작이다.
흐릿한 빛이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조용한 거실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아침 햇살이 이제 막 어둠에서 빠져나온 듯, 옅게 바닥 위로 내려앉아 가느다란 빛무리를 그리고 있었다.
둔해진 의식이 마침내 천천히 돌아왔다. 나는 뒤늦게 어젯밤 소파에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자, 온몸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꿈속 장면들이 흐르는 물처럼 계속 되살아나며, 유독 선명한 잔상을 남겼다.
그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꿈일까? 아니면…… 예지몽? 하지만 이렇게 길고 선명하고 이어지는 장면을 꿈에서 본 적은 없었다.
아니면……백기의 기억? 하지만 잠든 상태에서 그를 만진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상태를 보면, 그곳에 처음 간 게 아닌 건 확실했다.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허황되고 아득해서,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얼굴을 씻었다.
기죽지 마.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유연
일단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자.
회사에 도착한 뒤, 나는 지금 진행 중인 것들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지금의 연모시는 겉으로는 고요해 보였지만, 오히려 폭풍우 전의 맑은 날에 가까워 보였다.
모든 것은 암류 아래 숨겨져, 소리 없이 천천히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점점 더 무거워져, 과거 수많은 순간들처럼 임계점을 뚫고 터져 나올 것이다.
Evolver와 일반인의 갈등과 경쟁이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유연
유영 씨, 이 사건에서 '연합 시위' 부분 좀 자세하게 얘기해줄 수 있어요?
유영
아, 네네! 이거 저희가 막 연결한 라인이에요! 이걸 처음 제안한 사람이 웨이보에서 꽤 유명하거든요.
그녀는 말하면서 정리해둔 각종 자료와 데이터를 불러냈다.
유영
이전에 대학생 취업난 문제가 조회수랑 공유 수가 꽤 괜찮았거든요. 그래서 '취업 문제'를 접점으로 잡으려고요.
유영
지금 적지 않은 일반인들이 항의하고 있어요. 많은 회사들이 능력 문제 때문에 Evolver를 우선 채용한다고요.
유영
예를 들어 건설 현장이나 건축 업계 같은 데서는, 힘 계열 Evolver 한 명이 하루에 일반 노동자 15명이 할 수 있는 걸 해내거든요.
유영
AI보다 빠르고, 장비 문제도 없으니까 일반인들이 취업하기가 더 어려워진 거죠.
유연
그래도 이 세계에서 Evolver는 결국 소수잖아요?
한예준
지금은 그렇죠, 근데 나중에는 모르잖아요.
한예준
나중에 무슨 첨단 기술이 나와서, 예전 주사기 사건처럼 일반인을 Evolver로 만드는 날이 올 수도 있잖아요.
옆에 있던 한예준도 신이 나서 끼어들었다.
한예준
그 블로거는 일반인을 위한 노동조합을 미리 만들어서 취업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심지어 AI 규제처럼 관련 규정도 마련해야 한다고요.
유연
근데 그 블로거만 따라가면 시각이 좀 좁아지지 않을까요?
한예준
오, 있어요 있어요. 그 반대편에서 웨이보에서 여론 몰이 잘하는(PK) Evolver가 있거든요.
그는 마치 '이제 재밌어진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자료를 흔들었다.
한예준
이 사람은 IP가 독일인데, 공개적으로 일반인을 무시하는 걸로 유명해요.
한예준
Evolver 특별 구역 설립을 강하게 지지하면서, 서로 생활과 업무 공간을 분리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유영
맞아요, 저희가 일부러 길거리 인터뷰도 따로 진행했어요. Evol에 대한 사람들의 진짜 생각을 조사하려고요.
그와 함께, 그들의 설명에 맞춰 러프컷 인터뷰 영상이 재생됐다. 화면 속으로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Evolver의 존재에 미묘한 표정을 보이면서도, 스스로 Evolver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는 제각각 놀라울 만큼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검은 화면
Evol을 갖고 싶어요?
소녀
갖고 싶죠, 어릴 때부터 영웅이 되고 싶었고, 더 강해지고 싶었으니까요.
청년
흠, 능력을 고를 수 있나요? 아이 성별 고르듯이요.
남자아이
완전 멋있잖아요! 그러면 엄마가 다시는 저한테 숙제하라고 명령 못 하게 할 수 있어요.
노인
이미 반쯤은 관짝에 들어간 사람인데, 그런 느낌도 한번쯤 겪어보고 싶긴 하지.
아주머니
집안일 안 해도 되게 해주면 머리 아파도 일어나서 밥 안 해도 되고 뭐든 상관없죠.
소년
초능력 개쩔죠. 저도 오타쿠라서요!
각양각색의 얼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문득 아주 오래전에, 비슷한 여러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연
전에도 이런 질문을 했었죠?
유영
Bingo! '주사기 사건' 때 똑같은 질문으로 인터뷰한 적 있어요. 세상은 정말 계속 변하는 것 같아요.
유연
……그럼 여러분도 그 의견에 동의해요?
유영
대체로 그런 것 같긴 해요?
한예준
Evol 있으면 훨씬 편하지 않나요?
연출A
요즘 미디어가 다 이쪽으로 밀고 있으니까, 다들 Evol의 대단한 면만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연출B
맞아요. 어느 정도 능력 있는 Evolver 개인 미디어 블로거는 그 자체로 이미 팔로워가 몰리니까요.
한예준
결국 강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주변 편집 스태프들도 하나둘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들 왁자지껄했지만, 그 소리가 어딘가 멀게만 들렸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17년 전 실험에 관한 이야기는 여론의 형태로 다시 공론화되거나 비판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만약……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괜찮다고, 혹은 그런 방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기회가 생겼을 때, 약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강자 중에도 더 강한 강자가 있다. 다 같은 Evolver라도 능력의 차이가 있다.
강함의 끝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단지 일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약한 사람들인 걸까?
세계가 사랑을 잃은 뒤, 많은 것들이 더 차갑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강함과 약함, 힘의 크고 작음, 모든 것이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그들의 토론을 듣다가, 문득 마음속에서 어떤 특별한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유연
……우리 토론 프로그램 하나 만들어보죠.
모두
……!
순간 자리가 조용해지며,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유연
지금 사회를 겨냥한 토론형 프로그램을 만드는 거예요.
유연
논제는 클수록 좋아요. '일반인 노동조합 설립'이나 'Evol 특별 구역' 같은 것처럼요.
유연
우리는 지금 가장 뜨겁게 논의되는 주제를 전부 무대 위에 올려놓는 거예요.
유연
더 나아가, 우리가 직접 주제를 이끌어나가는 거죠.
고은
하지만 어떤 주제는 한쪽으로 너무 쏠리기 쉽지 않을까요?
유연
그러니까 더더욱 토론자의 수준과 우리의 진행 역량이 시험받는 거 아니겠어요?
유연
프로그램이 방영될 때, 네티즌들을 직접 “끌어들여”도 돼요. 그들에게도 의견을 표현할 기회를 주는 거죠.
어차피 아무리 터무니없고 이 세계와 맞지 않는 논조라고 해도——토론 대회에서는 누군가가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
관객과 토론자는 모두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상대와 더 많은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의 멈춤이자 시작이다.
유영
엄청 재밌을 것 같은데요!
많은 사람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토론의 여러 규칙과 형식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 순간, 내 마음이 이상하게도 평온해졌다.
나는 가능한 한 나만의 방식으로, 그렇게 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작자의 방식으로——이 세계를 조금씩 천천히 늦추고 싶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이 세계로 돌아온 뒤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시 생각하다, 나는 뒤쪽 화이트보드에 논제 두 가지를 적었다——
"평범한 능력의 Evolver와 강한 실력의 일반인, 어느 쪽이 되는 것이 더 나은가?"
"부모가 약자 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하는 것, 이해받아야 하는가 비난받아야 하는가."
유연
이 두 논제부터 시작해보죠.
5-10 중구난방
논쟁이란, 대부분의 경우 주도권을 갖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백기의 집
Baiiikeee
Q 상대방이 화났을 때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
Q 진심 어린 사과 방법
Q 사과하는 방법
Q 어떻게 사과할까
Baiiikeee 요약:
진심 어린 사과는 즉각적인 인정, 진솔한 표현, 해결책 제시가 필요합니다.
사과의 핵심
1. 타이밍을 잡고 미루지 않기: 잘못이 생긴 뒤 최대한 빨리 사과해 문제가 더 커지거나, 서로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2.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입장을 밝히기: 잘못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상대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경청해야 합니다.
나머지 77% 내용 펼치기 ↓
사람에게 사과하는 법? 관계 회복을 돕는 10가지 조언
20xx년 4월 2일 - #사과#. 첫 번째 단계,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지 분명히 하세요——무엇을 잘못했는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이 단계에서는 분석해야 합니다:
사과의 기술——타인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법
20xx년 8월 3일 - 사과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면, 사람들은 보통 먼저 죄책감이나 당황스러움을 느끼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 사과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 사과 방법? 소통 전문가: 충분한 공감 능력을 보여라
20xx년 12월 21일 - 효과적인 사과에서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은 “타이밍”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이성적인 태도는 새로운 문제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여기 사과의 일곱 단계를 공유합니다. 1. 진지하게 경청하기……
//
지하철역
화와 복은 한 끗 차이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승객A
하아, 너 들었어? 요즘 Evolver 때문에 실직하는 사람이 엄청 많대.
승객B
그건 그 사람들이 노력을 안 한 거지.
승객B
실력만 확실하면 Evol이 어쩌고저쩌고 따질 필요가 없어.
승객A
말은 그렇지, 너는 대체될까봐 걱정도 안 돼?
승객B
우리 쪽에 Evolver가 있다 해도, 나는 그 Evolver 관리하는 사람이거든. 나를 자르면 대동맥을 자르는 거지!
승객B
그보다 너는 철밥통 들고 있으면서 뭘 걱정해?
승객A
나야 그렇지만, 우리 애가 나중에 그 Evolver들이랑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그래.
승객B
애가 이제 중학생인데 벌써 취업 걱정이야?
승객A
이러는 게 미리 대비하는 거지 뭐.
승객A
생각해봐. 그렇게 고생해서 오래 키워놨는데, 나중에 일자리 하나 못 구하고, 내 노후도 못 책임지면……
승객B
하하하, 아직도 네 아들이 네 노후 책임져줄 거라고 기대해? 부모 돈만 안 뜯어가도 다행이지!
승객A
에이……내가 왜 애를 낳은 건지 모르겠어. 요즘 학원비도 점점 오르고……
승객B
잠깐, 나 핸드폰 울렸어.
승객B
이 시간에 무슨 업무 문자가……
승객A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승객A
“내일 정오에 회의실로 와서 이야기 나누시기 바랍니다”……
승객A
어? 혹시……?
녹색광장
시시비비
입만 열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아주 쉽다. 자, 한번 해보자!
독립 디자이너 입문\Evol로 빛의 속도로 성장하는 법
유명 디자이너 지우 선생님은 Evolver입니다. 조심하세요. Evol로 직접 디자인 무늬를 생성한다고 하네요. 알고 보니 Evol만 있으면 눈 감고도 큰돈 벌 수 있는 거였나요?
2차 수정:
업무 프로세스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소리 하지 마세요. 본인이 자기 일자리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Evolver한테 밀려나도 착한 사람인 척하고 싶다면 더 말 안 하겠습니다. 기억하세요. 지금 모든 일반인이 누리는 권리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트러블메이커” 일반인들이 당신들을 위해 쟁취한 겁니다!
3차 수정:
지우 선생님은 이미 본인이 Evolver라는 점과, 작업 중 Evol을 사용한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지우 선생님 빠순이들은 이제 와서 싸우러 오지 마세요. 저는 예전에 지우 선생님에게 일을 맡겼던 클라이언트고, 이 글을 올릴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삭제하지 않겠습니다.
#Evolver #지우디자인 #일반인취업 #Evol #투표
Evol 디자이너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피해야 한다! 4589
상관없다 1732
총 댓글 1997개
찍찍이멍멍이아님
아니…… 그 사람의 Evol이 뭔지, 대체 어떻게 Evol을 쓰는지, 구체적인 작업 프로세스가 뭔지도 하나도 제대로 말 안 해놓고, 여기서 거른다니 뭘 거른다는 건데요?
🩷 179
작성자 답글: 이성적 중립러 오셨네요
🩷2689
5-11 소년의 마음
평생 안 본다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프로그램은 유난히 빠른 속도로 추진되었다. 모두가 적극적으로 제 몫을 해내며 프로그램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다들 그 일 자체를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에, 순간 나는 어떤 착각마저 들었다.
어렴풋이, 아주 오래전 회사에 서서 모두가 신나게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다만 시장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말들이 고개를 들 때면, 나는 여전히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손안의 자료와 문서는 이따금 묵직한 무게를 전해왔다.
어쩌면 적어도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는, 나 자신과 지금의 세계 사이에서 아주 작은 균형점을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지금 이 순간, 그 줄의 한쪽 끝에는 아직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쓸쓸한 기분을 감추며 고개를 들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나연 언니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유연
나연 언니, 무슨 일 있어요?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천천히, 얼굴 전체에 좀처럼 보기 드문 고민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안나연
왠지…… 이런 때에는 내가 당신에게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안나연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약간 난처한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간을 찌푸리다가, 결국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안나연
이상한 말을 했네요. 못 들은 걸로 해요.
안나연
수고했어요, 유연 씨.
그녀가 웃으며 내 곁을 지나쳤다. 창밖의 빛이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 순간, 마침내 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손에 쥔 것 같았다. 나만의 닻 같은 것을.
사무실로 돌아오자, 익숙한 통증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왔다.
통증의 파동을 따라, 영문 모를 장면 몇 개가 다시 내 앞에서 끊임없이 깜빡였다.
요 며칠 동안, 잠드는 시간 외에도 낯선 풍경들이 이따금 시야에 불쑥 나타났다.
갓난아이의 울음, 병원 안의 고통. 누군가는 향락에 빠져 있었고, 누군가는 끝없는 긴 밤 속을 떠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눈앞에 다시, 그 분노로 가득한 호박빛 눈동자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요 며칠 동안 백기에게서는 전화도, 문자 한 통도 없었다. 말없고 소리도 없는 바람 같았다.
지금의 나로는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수도, 설득할 수도 없었다.
바람이 머무는 법을 잊어버렸다면, 나는 어떻게 그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까?
유연
……
조급해하지 마. 기죽지 마.
침묵하는 바람 소리 속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그렇게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며칠간, 나는 각종 촬영 장소와 투자자들 사이를 바삐 오갔다.
'사랑'이라는 문제는 너무 방대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장면들의 근본적인 원인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 'QUEEN'으로서의 내 전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일들이 쌓여갈수록, 적어도 제작자 유연으로서의 일만큼은 잘 해내고 싶었다——먼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일부터 단단히 붙잡는 것.
유연
한 가지씩, 차근차근 가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단단한 발걸음으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무렵, 연출 담당자와 함께 투자사 건물을 막 나서는데, 멀지 않은 공터에 낯익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살짝 고개를 들고 검은 오토바이에 기대어 있었다.
노을이 하늘 절반을 붉게 물들이며, 그의 윤곽을 부드럽게 그려내고 날카로운 선을 포근하게 감쌌다.
담담한 시선이 하늘의 뭉게구름을 따라 유유히 떠돌다가, 뭔가를 느낀 듯 살짝 멈칫했다. 나는 그렇게 하늘에서 내려앉은 또 하나의 구름이 됐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백기는 반사적으로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피했다.
그의 눈썹은 순식간에 한곳으로 모였고, 얇은 입술은 아주 부자연스러운 선으로 살짝 다물렸다.
찬란한 노을빛이 소년의 얼굴을 환하게 밝혀, 그를 생생하고 선명하게 보이게 했다.
마침내, 그는 무언가 결심을 내린 듯 딱딱하게 굳은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유연
선배?
백기
…….
그의 표정은 조금 어색했다.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했다.
그런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연출 담당자가 내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연출 담당자
사장님……쉬 대표님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유연
아……
백기
……흠, 일 있으면 먼저 가서 처리해.
백기
다음에 다시 찾아올게.
백기는 뒷목을 매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단호하게 우리 대신 결정을 내려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옆에서 기다리는 동료와 협력사를 돌아보았다.
가슴에서 뭔가 확 치밀어 오르는 순간, 나는 손에 든 자료를 연출 담당자에게 넘겼다.
유연
차에서 기다려요.
그렇게 말하고는 백기를 향해 달려갔다.
짧은 몇 걸음이 어쩐지 아득하게 길게 느껴졌다. 바람이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순간, 그를 붙잡을 수 있는 이 찰나를 놓치는 게 너무도 두려웠다.
유연
선배! 잠깐만요!
백기
……!
눈 깜짝할 사이,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돌렸다.
찬란한 빛이 호박빛 눈동자 위로 쏟아지며, 온 세계가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핸드백 안을 뒤적여 집 여분 열쇠를 그의 손 안에 쥐어주었다.
백기
……?
유연
우리 집에 가서 기다려요. 할 얘기 있으면 내가 돌아간 뒤에 해요.
백기
……아니, 너 어떻게……나는 그냥……
유연
클라이언트가 기다리고 있어요. 선배랑 더 말씨름할 시간 없어요.
백기가 모처럼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하면서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몇 걸음 달리다가, 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유연
꼭 기다려요! 기다려야 해요!
승합차에 올라타면서 돌아보니, 백기가 아직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나는 귀찮을 것도 없이 차창을 내리고, 멀리서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손가락을 겨눴다.
유연
없으면 가만 안 둘 거예요! 그러면 평생 선배랑 말 안 할 거예요!
(他로 서술되긴 한데 1인칭 시점으로 할게요)
이 모든 게 너무 황당했다.
승합차 후미등이 교차로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도, 백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계속 생각했다.
경계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이거 집 열쇠 아닌가? 이렇게 그냥 자기한테 준다고? 아니면 누구한테나 이렇게 주는 건가?
백기는 손 안의 키 카드를 바라보며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설명하기 어려운 초조함이 다시 마음속으로 밀려왔다. 그녀가 방금 잡았던 자리가 석양에 달궈진 것처럼 뜨거운 것 같았다.
오늘 그녀를 찾아온 건 사실 별것도 아닌 일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굳이 그녀의 집에 가서 기다릴 필요 따위 없었다.
그리고 평생 안 본다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아무 상관 없어.
백기는 속으로 되뇌었다.
"딸깍——"
맑은 소리와 함께, 눈앞의 현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래서, 그는 왜 여기에 온 걸까?
그는 자신의 눈썹이 줄곧 펴지지 않는 것 같다고 느꼈다. 특히 그녀를 만난 뒤로 더더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그와 그녀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를 불렀을 때 무의식적으로 치솟던 그 마음도.
그는 여기 있으면 안 됐다.
그런데도 그는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장 위에 손님용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이유도 모르게 조금 어색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등을 곧게 세우며, 거실 한가운데 뻣뻣하게 서서 불을 켜야 할지 말지조차 몰랐다.
백기
……처음 온 것도 아니잖아.
참지 못하고 속으로 자신을 욕했지만, 굳어버린 발걸음은 여전히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억 속에서, 그는 이곳에 여러 번 왔었다.
문으로 들어온 적도 있고, 창문으로 날아든 적도 있었다.
그 장면 속의 자신은 더없이 자연스럽고 거리낌이 없었는데, 지금은 왜인지 도무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조금 넓은 방이 자신의 존재 때문에 훨씬 좁아진 것 같다고 느꼈다. 서 있기도, 앉기도 어색했다.
백기
……범죄 현장을 조사하거나, 정보원을 기다릴 때는 멀쩡하게 굴었잖아.
다음 순간, 그는 그녀를 그런 것들과 비교하는 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그녀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발코니로 나갔다.
가장 믿음직한 동반자가 차갑게 등을 돌렸다. 어쩌면 이렇게 하면 자신이 조금은 덜 영문 모를 상태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참지 못한 그 실루엣이 다시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휘몰아치는 밤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부풀리고, 점점 더 초조해지는 마음까지 부풀렸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자세를 바꿨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에는 억지로 몸을 1인용 소파에 욱여넣고 등을 꼿꼿이 세웠다.
어둠 속에서, 여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왜 너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여기 앉아 있을 수 있는 거지?
왜 너는 그녀의 손을 잡았지?
백기는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답답하게 생각에 잠겼다.
익숙한 분위기가 사방에 깔렸다. 한겨울 밤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담요처럼, 온몸을 가볍게 감싸왔다——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마음이 괴로웠다.
왜 이런 나조차도, 이곳에서는 안심할 수 있는 걸까?
그는 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현관 앞에 놓인 오토바이 헬멧을 바라보다, 백기는 시선을 피했다.
깊은 밤, 서둘러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어두운 거실에 내 마음이 살짝 가라앉았다.
휴대폰의 새벽 2시 18분이라는 숫자를 보며, 나는 더없이 좌절한 채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협박 같은 말을 해봤자, 역시 백기는 제멋대로 하는 스타일을 고수하는 모양이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신발을 벗으려는데, 옆에 가지런히 놓인 군화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유연
……!!
나는 기쁜 마음에 눈을 크게 뜨고,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추측을 따라 조심조심 거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밤은 소리를 낮추고, 부드러운 달빛과 소년만을 꿈속에 남겨두었다.
백기는 1인용 소파에 비좁게 몸을 구겨 넣은 채였다. 줄곧 단정하게 묶여 있던 넥타이가 마침내 느슨하게 풀려, 더 자유로운 목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몸을 숙여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둠은 충분히 부드러워서 소리 없는 모든 말을 숨겨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볼 수 있을 만큼의 달빛은 남겨두었다.
한동안 이렇게 조용히 그를 바라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는 많이 야윈 것 같았다. 피로는 그 잘생긴 얼굴 위에 옅고 얕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경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줄곧 단단히 굳어 있던 미간과 눈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유연
이제 그만 찌푸려요. 못생겨지잖아요.
숨을 참으며, 살그머니 그의 눈 앞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그 찌푸러진 미간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유연
선배,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유연
……그렇게 자꾸 스스로를 몰아붙이지도 말고요.
그는 아주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침내 마음 놓을 수 있는 곳에 기댄 것처럼. 내가 가만히 어루만지자 미간이 천천히 펴지며, 평온한 얼굴로 풀어졌다.
유연
이건 기습이라고 할 수 없죠, 백 경관님?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손끝을 떼기가 아쉬워 그의 눈 위로 살그머니 손을 옮겼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나는 호박빛 속으로 그대로 빠져들었다. 굳어버린 그 빛의 일부가 된 것처럼.
이렇게 갑자기 들킬 줄은 몰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며 손을 거두려 했다.
손끝 아래의 온몸이 순식간에 긴장으로 굳는 것 같았다. 백기의 두 손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상체를 일으키더니 반사적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뭔가를 깨달은 듯, 나를 잡아채는 동시에 힘을 풀고 그 관성을 이용해 나를 1인용 소파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내 머리 위로 몸을 기울여 짚었다.
밝은 호박빛이 내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백기는 눈을 크게 뜬 채, 모든 상황의 당사자인 자신이 오히려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다.
유연
……
백기
……
잠귀신이 달아나고 나서야 의식이 돌아온 듯, 놀란 눈동자가 생생하게 깜빡이더니, 다음 순간 그는 황급히 손을 놓았다.
백기도 자신이 잠들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어색하고 민망한 얼굴로 내 앞에 섰다. 방금 막 펴졌던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다행히 방이 어두워서, 달빛이 몰래 붉게 물든 그 귀 끝을 비추는 것도, 이름 모를 바람에 쓰러진 작은 장식품도 탓할 수 없었다.
백기
크흠……잠들었었네.
유연
……응, 봤어요.
유연
아까……나도 기습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백기
……알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뭘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공기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우리 둘 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빨라진 심장 소리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그의 것도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숨이 그의 입을 열었다.
백기
너한테 온 건……사과하려고 온 거야.
나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려 달빛 아래 호박빛과 눈을 마주쳤다.
백기
저번에 내가 한 말…… 좀 심했어.
백기
……그 말들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됐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시선이 어색하게 옆으로 미끄러졌다.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백기
미안해.
유연
……
유연
저를 찾아온 게, 그냥 그것 때문이에요?
백기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밤이 너무 부드러워서, 눈앞의 소년은 진심 어리고도 정중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백기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저 이것 때문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랑'을 잃은 세계에서, 이건 너무 사소해 보였다. 너무 작아서 내 스스로도 이런 사과가 필요한 건지 확신이 없을 정도로.
내 마음 전체가 풍선이 되어,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자니, 전에 내가 삐졌던 게 조금 억울했다.
1. 사과를 받아들인다.
유연
괜찮아요, 용서했어요.
그가 정식으로 사과하는 태도에, 나 역시 진지하고 곧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선배의 사과, 받아들일게요.
그는 내가 이렇게 시원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꾹 다문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 마치 약속할 때 걸던 새끼손가락처럼.
백기
역시 그렇게 며칠씩 고민할 일이 아니었어.
백기
진작에 왔어야 했는데.
2.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를 따라 헛기침을 하며, 못마땅한 척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유연
그런데 저 그때 진짜 화났거든요. 제가 선배 사과를 받아주고 싶지 않으면 어떡하죠?
백기
……
그는 분명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또 어쩐지 예상했다는 듯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백기
알겠어, 앞으로 주의할게.
유연
뭘 주의할 건데요?
백기
말을 그렇게 직설적으로 하지 않는 거.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런 그를 보고 있으면, 결국 내가 항복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백기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장난기를 거두고 진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사실 선배 말이 틀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도 저만의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유연
그 일들은 반드시 내가 챙길 거예요. 내 안전도 챙길 방법을 생각할게요.
유연
잊지 말아요. 나는 세계도 구한 사람이잖아요.
마치 나 자신에게도 힘을 불어넣는 것처럼, 나는 그를 향해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유연
노력할게요.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들이 많지만.
애써 웃으려 했지만, 결국 어딘가 씁쓸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백기의 표정이 점점 더 묘해지기 시작했다.
세계가 그에게 커다란 둔탁한 소리를 낸 것처럼, 그는 텅 빈 눈으로 그 자리에 서서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마치 내 말을 통해, 어딘가 아주 먼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막 다시 뭔가를 말하려는데, 두 개의 맑은 소리가 밤의 고요를 갈랐다.
“꼬르륵——”
“꼬르륵——”
나와 백기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고, 두 번의 꼬르륵 소리가 나란히 울렸다.
5-12 몸부림의 흔적
어떤 변화는, 결국 자기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경찰서
경찰서
현상수배
어떤 평화도 당연하게 계속되지는 않는다.
현상수배 공고
202x년 x월 xx일, 우리 시 서쪽 구시가지에서 Evolver를 대상으로 한 고의상해 중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죄 용의자 장제, 양항, 유진화는 범행 후 도주 중입니다.
사회적 공평과 정의를 수호하고, 사회적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공안기관은 사회 각계에 사건 단서를 공개적으로 모집합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적극적으로 신고에 참여해 단서를 제공하고, 주변에 인상착의가 일치하거나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지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해당 사건의 범죄 용의자를 검거하는 데 중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공안기관의 체포에 협조한 단체 및 개인에게는 인민폐 5만~10만 위안의 포상금이 지급됩니다. 공안기관은 비밀보호 규정을 엄격히 이행하며, 신고자에 대한 보호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아울러 공안기관은 도주 중인 인원들이 정세를 분명히 인식하고, 자진 출두하여 자수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에 공고합니다.
담당자: 마 경관 136888xx12
유연 제작사
변화는 언제나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구석에서 태어난다.
회의 주제: 토론 프로그램 만들기.
토론 프로그램??
아? 토론하라고…… 뭘 토론하는데……
사장님이 말한 논제도 좀 영문 모를 느낌인데…… 으아아아아아
“부모가 약자 아동의 양육권을 포기하는 것은 이해받아야 하는가, 비난받아야 하는가” 이런 논제, 하늘만 알겠지. 비난 측은 대체 어떻게 싸우라는 거야……
아이를 포기했으면 포기한 거지…… 누구에게나 개인의 자유라는 게 있잖아. 이게 뭐가 비난받을 일인데.
그런데 비난하는 쪽에 서면 좀 더 고상해 보이려나……
?? 응? 나는 왜 포기하지 않는 게 “고상하다”고 느낀 거지????
그래도 이렇게 모두 같이 토론하고, 함께 뭔가를 한다는 건 확실히 꽤 즐거운 것 같다.
하아…… 나는 이렇게 하루하루 나한테 희망고문이나 하는 거겠지.
아무튼 일단 야근부터 끝내고, 나중에 휴가 내서 좀 쉬어야겠다.
이번 프로그램이 순조롭게 잘됐으면 좋겠다.
다음번에도 이런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
아무튼 막장 숏폼 드라마는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다. (`皿′)
유연이 집
솔직함
어떤 마음은, 말로 꺼내기가 어렵다.
유연
……
백기
……
유연
……오후부터 지금까지 기다린 거예요?
백기
……
백기
그렇게 오래 기다린 건 아니야.
백기
……
백기
가볼게.
유연
……
유연
알겠어요…… 그럼 이렇게 늦었으니까 운전할 때 천천히 가요.
백기
너도 같이 가.
유연
……네? 나도요?
유연
조사에 제가 도울 일이 필요한 거예요?
백기
o_o
유연
……알겠어요 알겠어요, 그렇게 째려보지 말아요.
백기
난 그냥 널 기다린 거야.
5-13 말없이 서로를 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일단 밥부터 제대로 먹어.
깊은 밤, 낯선 면 가게 안에 앉아 나는 잠시 멍해졌다.
심야에는 문을 연 가게가 많지 않았다. 백기는 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 맞은편에 앉아, 면을 주문한 뒤 말이 없었다.
주인장이 카운터 앞에서 졸린 듯 하품을 했다. 가게 안에는 몇몇 피곤한 사람들의 실루엣이 드문드문 있었고, 따뜻하고 습한 공기 속에 조용히 녹아들었다.
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살그머니 눈앞에서 한 손으로 턱을 반쯤 괸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유연
왜 여기 데려온 거예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눈길만 살짝 내 쪽으로 훑었다.
백기
요즘 밥을 제대로 못 먹었지.
백기
많이 말랐어.
나는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이 마음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온몸이 따뜻해졌다.
유연
그렇게 과장할 건 건 아니에요. 저 요즘 그래도 밥은 먹었어요. 협력사랑도 맛있는 것 많이 먹었고요.
유연
안 그랬으면 이렇게 많은 일정 소화하다 굶어 죽었겠죠.
유연
선배야말로 제대로 못 드셨잖아요. 나보다 훨씬 더 빠진 것 같던데.
유연
NW 훈련까지 갔으면서 더 먹어야지……
아무 생각 없이 흘러나오던 말이, 나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나는 원래 이 일을 알 수 없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는데.
하지만 백기는 그저 침묵했다. 아주 잠깐 멈칫했을 뿐, 곧 다시 그 무심하고 차가운 얼굴로 돌아갔다..
그는 내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아마 내가 왜 알게 됐는지도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묻지도 않았고, 무엇도 탓하지 않았다——그 장면을 본 것이 애초에 내 의도는 아니었는데도.
내가 막 입을 열어 설명하려던 순간, 익숙하고 진한 향이 코끝을 확 파고들었다.
사장
두 분 면 나왔습니다!
사장님이 가져온 면에서 향긋한 냄새가 올라왔다. 푹 삶아진 부드러운 소고기가 가지런히 얹혀 있고, 그 위로 푸른 채소가 덮였다. 조명 아래에서 맑고 반질반질한 윤기가 돌았다.
뜨거운 김이 피어올라 눈앞 사람의 얼굴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백기는 먼저 젓가락을 내 그릇 옆에 놓아주고, 자신은 고추기름을 한 숟갈 크게 떠서 그릇에 넣고, 옆에 있던 젓가락을 들어 고개를 숙인 채 비비기 시작했다.
첫 한 입을 건지는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렸다——
백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일단 밥부터 제대로 먹어.
내게 건넨 말은 하얀 김 속에 녹아든 것처럼, 가볍게 흩어졌다.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마음속에서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이 계속 뒤엉켰지만, 그래도 젓가락을 들어 첫 입을 먹었다.
뜨끈한 면이 입 안에 들어오는 순간, 눈가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유난히 탄력 있는 면은 겉은 부드럽고 속은 쫄깃했다. 씹을수록 소고기 기름 향 사이로 밀 향이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익숙한 맛이 혀끝에 닿으며, 텅 빈 배를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미처 몰랐던 허기를 전부 끌어당겼다.
대단할 것 없는 면 한 그릇이었다. 그런데도 이 순간에는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요 며칠 동안 이렇게 조용히, 제대로 한 끼를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리고 싶었다. 모든 의심과 흔들림이 나를 따라잡지 못하도록.
김이 눈가로 스며들었다. 어느새 그것은 다시 내 눈가에서 방울져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맞은편의 사람도 똑같이 침묵한 채 느릿느릿, 한 입 한 입, 유난히 진지하고 힘주어 씹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유연
선배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예요?
나는 내 목소리를 들었다. 맞은편에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면을 먹는 소리가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흐릿하게 고개를 숙인 윤곽만 남아 있었다.
잠시 뒤, 그도 고개를 든 것 같았다.
망설이던 손끝이 허공에 잠깐 멈추다가, 결국 내 눈을 살짝 닦아내며 그의 눈동자를 드러냈다.
맑고 투명한 그 눈동자는 놀랄 만큼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세계의 모든 몸부림이 그 안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이 순간, 우리는 왠지 모르게 작고 지친 동물 두 마리 같았다. 이렇게 작은 구석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온기를 나누는.
백기
반드시 알아내야 해.
그의 말은 가벼웠지만, 더없이 단단했다. 어쩐지 사람을 짓누르는 저주처럼 들렸다.
백기, 네가 맞서 싸우는 적은 대체 누구인거야?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그를 입 다물게 만들 또 하나의 질문이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진작에 바람의 모습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침묵은 너무 오래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너무 오래되어, 나는 그가 이미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을 만큼.
그리고 이 모든 게, 단지 “사랑”이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또 다른 자신을 감추는 법을 배워버렸던 걸까?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런데 불쑥 익숙한 두통이 다시 의식을 파고들었다.
순간, 날뛰는 불길이 내 눈앞에서 포효했다.
타오르는 불꽃이 낯선 건물을 따라 위아래로 쉬지 않고 번져나가며, 멀리 하늘을 온통 새빨갛게 물들였다.
귀를 찌르는 경보음이 쉬지 않고 울렸다. 마치 귓속을 꿰뚫는 것 같았다.
백기
……유연아……
백기
유연아……!
백기
유연!!!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백기의 다급한 얼굴이 눈앞에 다가와, 나를 단번에 그 장면에서 끌어냈다.
백기
괜찮아?
유연
방금……갑자기……어딘가 불이 난 것 같은 게 보였어요.
유연
불길이 엄청났는데, 어디인지는 모르겠어요.
유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가끔 머리가 아파오고, 그러면 많은 장면들이 보여요.
유연
전에 집에서……꿈에서 갑자기 선배가 NW 훈련실로 들어가는 걸 봤을 때처럼요. 선배랑 샤오위에가 싸우는 것도 봤고……
유연
저는 그게 예지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말에 백기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눈을 가늘게 뜨며, 사태의 심각성을 더욱 실감하는 것 같았다.
백기
그건 내가 고아원 가기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야.
유연
……네?
백기
네가 본 건, 내 기억이야.
직접 접촉도 없이, 기억이 보이기 시작한 건가?
그럼 요즘 보이는 것들도 여러 사람들의 기억인 걸까?
하지만……전에는 예지 Evol을 사용할 때만 이랬었는데.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됐다.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유연
내가 본 게 전부 기억이라면, 방금 불타는 건물은……
백기
연모시에 그런 큰 화재가 난 기억이 없어.
백기
아니면……연모시가 아닌 건가?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생각하더니, 다음 순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나를 끌고 면 가게를 뛰쳐나가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백기
눈에 띄는 건물 특징을 말해줘.
유연
……알겠어요!
깊은 밤,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백기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백기
루일, 1분 안에 연모시 지도 띄워줘.
나는 뒷좌석에 앉아 방금 본 장면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유연
고층 건물들이 많았는데……광고판이나 대형 스크린은 별로 없었어요. 업무 지구 같은 분위기였고, 파란색 광고판 몇 개만 보였어요.
유연
한쪽 도로는 3차선인 것 같았고, 반대쪽은 2차선이었어요. 도로 위에 가로로 놓인 육교가 있었어요!
유연
육교 위에 도로 표지판이 있었는데, 거기 적힌 글자는 기억이 안 나요……
백기
……!
백기
알겠어, 꽉 잡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토바이가 교차로에서 날카롭게 방향을 틀더니 빠른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내달렸다.
엔진 소리가 더욱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양옆의 도시 불빛이 흐릿한 선 하나로 뭉개졌다. 바람의 그림자만이 남았다.
나는 백기를 꽉 껴안았다. 심장이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차가 어느 교차로 옆에 멈추고, 백기가 오토바이 헬멧을 벗었다.
백기
여기야?
유연
……
나는 고개를 들어 보았다. 빌딩들이 화면 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늘 아래 조용히 서 있었고, 먼 곳의 육교는 도로 양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기억 속 장면과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오직 불길만이 없었다.
유연
……여기예요.
유연
여기……전에 불이 난 적 있었어요?
다음 순간, 나는 백기의 눈 속에서 같은 우려를 발견했다.
백기
한 번도 없어.
U
이걸로 우리가 하려는 일을 제대로 예지한 건가?
멀리 어둠 속, 세 개의 인영이 밤 속에 숨어 교차로 방향을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E
장담하기 어렵지.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어도 그곳에서 불이 났을 수 있고, 그녀도 그걸 봤을 수 있어.
E
우리가 계획하기 전에, 운명이 이미 우리가 이 일을 할 거라고 써뒀을 수도 있고.
E
그래도 그녀의 능력이 아직 너무 불규칙해. 그 녀석한테 방법을 더 생각해보라고 해야겠어.
U
그럼 우리 그냥 진행하는 거야?
마지막 인영이 어두운 물처럼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밤바람이 그들의 모습을 지우고, 운명 같은 낮은 속삭임만 남겼다.
[?]
물론이지.
[?]
QUEEN이 본 미래는 절대적이니까.
5-14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다르게 대하나요?
5-15 불꽃이 나를 삼키다
똑바로 봐. 평생 눈 돌리지 마.
깊은 밤의 고요함 속, 둥근 달 하나가 짙은 남색 하늘에 걸려 있었다.
오피스 빌딩들이 소리 없이 깊은 밤 속에 우뚝 서 있었다. 이미 잠든 것 같았고, 몇 층의 창문에만 불이 켜진 채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한 누군가를 가두고 있었다.
나는 텅 빈 거리에 서 있었다. 이따금 택시 몇 대가 우리 곁을 지나쳤다.
백기가 여기서 화재가 난 적 없다고 했으니, 내가 방금 본 불길은……예지인 건가?
그게 언제 일어나는 걸까?
만약 정말 내가 본 것처럼 저렇게 큰 화재라면, 얼마나 많은 인원을 미리 배치해서 방호하고 발화 지점을 찾아야 할까?
화재 원인을 찾는 동안, 그 원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예지한 미래는……반드시 일어나는 걸까?
순간 넋을 잃고 눈앞의 건물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본능적으로 백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굳건하고,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는 눈.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마음속의 많은 소음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유연
선배, 저 건물, 저 건물, 그리고 저쪽 몇 동까지 전부 불이 날 거예요.
유연
하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르고, 어디서 시작되는지도 몰라요. 심지어 정말로 일어날 일인지도 확신할 수 없어요.
백기
그럼 현실이 되지 않게 만들면 돼.
백기는 극히 빠른 시간 안에 특파팀, 소방서, 인근 경찰서, 구급대와 연락을 마쳤다.
그는 침착하게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며, 필요할지도 모르는 모든 인력을 움직였다.
백기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그는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흔들림 없는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먼 곳의 경보음이 점점 가까워지며 밤의 고요를 찢었다. 근처에서 잠을 깬 주민 몇 명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백기도 대열 안으로 들어가, 내가 가리킨 빌딩들을 대상으로 발화 지점 수색과 시민 대피를 위한 인원 배치를 시작했다.
소방대와 특파팀 대원들은 거의 즉시 지시를 받았다. 그들이 하나둘 각 건물 안으로 번쩍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은 점점 더 세게 조여왔다.
나는 간절히 무언가를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이를테면 대원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어떤 발화 장치를 찾아내거나, 방화범을 붙잡거나……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그저 오해였고, 빌딩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결국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는 것 같은.
나는 기도했다. 아니, 거의 빌었다.
눈을 뜨자, 이번에는 어떤 통증도 없었다. 하지만 익숙한 장면이 다시 내 눈앞에 떠올랐다.
불길, 하늘로 치솟는 불길.
마치 하나의 상영 화면처럼, 그것은 내 눈앞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며, 어둠 속에서 불이 켜진 눈앞의 빌딩들과 겹쳐졌다.
——다음 순간, 나는 불길을 보았다.
백기
사람 구해!!!
나는 백기의 포효를 들었다.
이것은 미래일까, 현실일까?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하늘로 치솟는 열기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는데도, 오히려 오싹한 한기가 들었다.
거의 순식간에, 빌딩 안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불길이 타올랐다. 마치 허공에서 생겨난 것처럼, 하늘마저 또 하나의 붉은 불바다로 태워버렸다.
미래가 현실이 됐다. 운명의 낙점이 찍히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혼잡하지만 날카로운 지시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하늘을 찌르는 물기둥이 몇 번이고 불꽃에 삼켜졌다.
나는 허공에 떠오른 백기를 보았다——하지만 바람은 불을 더 크게, 더 세게 만들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그곳에 멈춰 선 채, 맹렬한 불길에 둘러싸인 듯한 모습만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거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유연
……선배……
나는 그의 두려움을 알고 있었고, 그의 책임과 결연함도 알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그것을 마주했다. 마침내 두려움마저 자신의 칼날로 만들 때까지.
그리고 지금, 그는 불길 속으로 달려갈 만큼 충분한 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불은 너무 컸다. 악의로 가득 찬 운명처럼, 온 세상에 불이 지나간 흔적을 새기고 있었다.
다행히 심야의 업무 지구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부상자들이 계속 밖으로 실려 나왔다.
백기가 미리 불러놓은 사람들이 쉬지 않고 뛰었다. 소방관, 구급대원, 특파팀 대원들……
'사랑'을 잃은 이 세계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더 이상 내 무력함과 좌절을 꾸짖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을 뿐이라면, 그 안에서도 어떤 전환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힘을 끌어내려 애썼지만, 어떤 장면도 볼 수 없었다.
문득, 불빛 속에서 희미한 검은 무언가가 불길의 방향을 따라 계속 뻗어가는 것이 보였다.
긴 뱀처럼 생긴 그것이 불꽃을 잡아먹으며 나아갔다. 하지만 불안정했다. 불씨는 몇 번이고 다시 타올랐다.
그런데 다음 순간, 창문 하나가 폭발하듯 산산조각 났다. 검음과 불의 바람이 뒤섞이더니, 한 사람의 몸을 그대로 튕겨냈다.
유연
……!
나는 다급하게 바람이 향하는 방향으로 달렸다. 멀지 않은 공터에서 검은 소용돌이에 둘러싸인 그 사람을 찾아냈다.
특파팀 대원 몇 명도 내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망설임 없는 지시가 떨어졌다——
백기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불 꺼!
혼란스러운 검은 악몽이 그의 주변에 무질서하게 몰려들었다. 서로를 찢어가며, 바닥 위에 끊임없이 어지러운 균열을 새겨냈다.
백기는 일어서려 했지만, 한 걸음도 내딛기 전에 몸이 떨리며 반쯤 무릎을 꿇었다.
유연
선배!
나는 그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가 내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그의 손바닥에는 불꽃에 데인 열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제어를 잃고 날뛰는 검은 기류가 백기를 또 다른 불꽃처럼 보이게 했다.
백기
움직이지 마.
그는 차갑게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어떤 힘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듯, 멈추지 않고 떨리고 있었다.
백기
방금 내가 있던 자리, 불이 꺼지는 거 봤어?
유연
봤어요! 근데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고, 금방 다시 불이 붙었어요.
백기
정밀도가 부족해.
검은 폭풍이 계속 번져나갔다. 닿는 것마다 허공에 삼켜지듯, 군데군데 돌출된 균열만 남겼다.
백기
건물들을 전부 통째로 지워버릴 수는 없어.
유연
일단 제가 선배 힘을 안정시켜줄게요!
백기
아니, 이대로 둬.
그의 얼굴이 불꽃의 그림자 속에 가려졌다. 눈 속에 결연함이 가득했다.
백기
Evol 능력이 약해졌어. 이래야만 힘이 나와.
백기
더 강하고, 더 혼란스러워야 해.
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도움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를 멈춰 세우고, 미온적으로 만들 뿐이었다.
바로 이런 때야말로, 그가 모든 시간을 붙잡고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지금처럼,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야 했다.
손바닥 아래의 지나치게 따뜻한 온도가 그의 온몸을 다림질하듯 스쳐 지나가, 혼란스럽고 무감각한 정신이 마치 위로를 얻는 것 같았다.
유연
그럼 선배는 어떻게 해요?
백기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백기
결국엔, 반드시 그것들이 내 말을 듣게 만들 거야.
그래, 반드시 이 힘들을 제어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옥과 가시밭을 밟고 지나가며 그것들을 끊임없이 키우고, 단단히 손 안에 쥘 것이다.
유연
어떻게 상관없다는 거예요!!
그녀 역시 그를 붙잡은 것 같았다. 지나치게 다정한 품으로 그를 감싸 안으면서.
그 순간, 그는 불꽃과는 다른 또 하나의 타는 듯한 감각을 느낀 것 같았다. 그의 마음 전체가 아파오는 듯했다.
무언가가 그 통증을 따라 계속 번져가며, 더 날카롭고 혼란스러운 힘을 미친 듯이 쏟아냈다——
그는 몸을 일으켰고, 그녀를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실 정말로 상관없었다.
이건 애초부터 그가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그 지나간 시간들은 절대적인 오류였다.
하늘을 덮는 불길이 그의 주변에서 거세게 일렁였다. 그런데 그것은 이상하게도 그를 안심시켰다.
그는 본래 줄곧 이곳에 있어야 했다.
그는 분명 언제나 이곳에 서 있었다.
백기
너는 왜 두려워하는 거지?
불길 속에서, 백기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이 괴롭게 반쯤 무릎을 꿇은 채 눈앞에 있는 걸 보는 것 같았다.
백기
네가 너무 약하기 때문이야.
그는 불꽃이 자신의 몸을 따라 번져오는 걸 느꼈다. 그 박동을 들었다. 마치 자신의 혈류처럼.
백기
똑바로 봐. 평생 눈 돌리지 마.
백기
잊지 마.
그 자신도 불꽃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온몸이 아픈 듯했지만, 그것은 바로 호흡을 느끼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검은 불꽃을 보았다.
5-16 재난 대피 훈련
도시 재난에 맞서는 법을 배우는 것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익혀야 할 필수 과목이다.
5-17 분노가 칼날이 되다
백기는 한 손으로 검은 바람의 꼬리를 움켜쥐었다. 어둠이 흩어지며 소년의 영혼 안에서 날카로운 칼날로 담금질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검은 악몽이 불꽃을 삼킨 뒤 남은 형태였다..
방금 나의 분노와 마주하면서도, 백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체육관에서 멀어지던 그 뒷모습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는 맹렬한 바람이 되어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는 들판으로 걸어 들어간 듯했다.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내 익숙한 실루엣이 한 창문 옆에 나타났다가, 또 다른 거대한 불길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아주 맑은 군화 소리가 땅에 닿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마치 찰나의 순간만으로 모든 불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했다. 남은 것은 하나하나의 새까만 구멍뿐이었다.
세계가 숨을 죽였다. 구조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어떤 압도적인 힘에 짓눌린 듯, 전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 있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새까맣게 늘어선 대원들이 빌딩 앞에 나타났고, 그 사이로 낯설지만 익숙한 윤곽 하나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그 순간, 나는 숨 쉬는 법마저 잊은 것 같았다.
바람이 그 사람의 망토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 앞에 서 있었고,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공중의 그림자 역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했다. 곁에서는 점점 더 짙어지는 검은 바람이 희미하게 포효하고 있었다.
거의 다음 순간, 백기의 온몸이 두터운 어둠으로 뒤덮이더니 그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백기
당신은 분명 한순간에 할 수 있었으면서…… 왜!!
백기
왜!!!!!!
세계는 백기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운명은 지극히 잔혹하고도 현실적인 방식으로,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소년의 마음을 두들겨 팼다.
하지만 그 남자는 어떤 힘을 쓴 것인지, 순식간에 백기를 튕겨냈다.
동시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
네 부하들에게 네가 이렇게 볼품없는 꼴을 보이는 건 원치 않을 텐데.
그에 대한 대답은 더욱 거센 검은 광풍이었다.
백기
나는 그런 거 신경 쓴 적 없어.
덮쳐오는 바람의 칼날을 마주하고도, 남자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담담히 한마디를 말했다.
??
그러면 나는 그날 죽은 사람이 네가 아니었다는 걸 후회하게 될 뿐이다.
유연
닥쳐!!
나는 거의 온몸의 힘을 다해, 분노 가득찬 말로 그 말을 끊어냈다.
남자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무정한 시선과 눈매에는, 내가 너무도 잘 아는 그 사람과 가장 닮은 모습이 어려 있었다.
세계는 죽은 듯 고요해졌고, 백기는 텅 빈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마침내 다시 그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 아득한 과거로부터, 백기의 기억 바깥으로부터——
백기의 아버지, 백혼.
하얀 형광등이 실험실을 환하게 밝혔다. 빛 속에서 금속이 숨 막히는 한기를 조용히 내뿜었다.
한가운데 자리한 유리방은 어떤 사각지대도 차단막도 없는 짐승의 우리 같았다.
백기는 다리를 세운 채 유리방 중앙에 앉아 있었다. 내가 훈련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의 시선이 내 눈과 마주쳤다.
공간 전체에 완전한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모니터링 장비만이 규칙적으로 삐 소리를 냈다. 마치 어떤 카운트다운 같았다.
검은 바람이 무질서하게 그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텅 비고 고요한 그림자로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앞으로 걸어가자, 그의 손끝이 흔들리듯 살짝 떨렸다.
백기
그 사람이 널 곤란하게 하진 않았어?
사실 그 남자는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샤오위에가 이미 내 관한 충분한 정보를 그에게 보고한 모양이었다.
내가 NW 대원을 따라 특별한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끝없는 분노가 여전히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책상 뒤에 앉은 남자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가능하다면 주먹질이라도 발길질이라도 하고, 온갖 험한 말을 그에게 퍼붓고 싶었다
유연
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
백혼
네 자료를 봤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방 전체에 거의 물리적인 압박감이 퍼져나왔다.
백혼
불이 날 걸 언제 알았지?
유연
……
온몸이 거부감으로 가득했다. 이를 악물며, 내가 아는 어떤 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백혼
침묵은 가장 저열한 버팀이다. 아무도 구할 수 없어.
백혼
그리고 그 애가 오늘처럼 항상 운이 좋을 수는 없어.
유연
……
그 순간, 나는 마치 그해 백기가 그를 마주했던 위치에 서서, 같은 씁쓸한 맛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마침내, 천천히 그것을 풀었다.
나는 면 가게에서 보았던 장면을 간결하게 그에게 말했다. 미래가 두 번째로 나타났을 때의 상황까지 포함해서.
그는 듣고 나서 그저 턱을 살짝 들더니, 곧 내 뒤에 서 있는 대원에게 눈짓했다. 나를 데리고 나가라는 신호 같았다.
백혼
네 안전은 사람을 붙여 보장하지.
돌아서서 문 앞까지 걸어가다, 나는 참지 못하고 분노에 차서 몸을 돌렸다. 백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연
……순식간에 저렇게 큰 불을 다 끌 수 있었다면, 왜 그때는 그녀를 구하지 않았어요?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파문도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조각상 같았다.
그렇게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을 보자,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슴 아픔이 나를 삼켰다.
유연
당신 같은 아버지가……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아들한테 그런 말을 해요?!
유연
그 사람은 그냥 제가 전에 화재를 봤을 때의 상황을 물었고, 사람을 붙여 저를 보호하겠다고 했어요.
유연
그리고 나서 그에게 욕했어요.
그 말에 백기가 잠깐 멍해지는 것 같았다.
백기
네가 왜 그를 욕해?
유연
선배에 대해 그런 말을 하는 걸 듣기 싫었으니까요.
백기
그게 뭐라고.
나는 그가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런 차가운 유리방 안에 머무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나는 몸을 돌려 조작대로 달려가, 기억 속에서 샤오위에가 눌렀던 위치를 떠올리며 버튼을 눌렀다.
백기
뭐 하는 거야.
유연
이걸 끄고, 선배를 나오게 할 거예요.
역시 기억은 이미 흐릿해졌지만, 나는 정확하게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백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이것이 애초에 그가 스스로 선택한 또 다른 감옥인 것처럼.
유연
선배……
백기
유연아, 괜찮아.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유리방 쪽으로 걸어갔다. 손바닥을 유리 위에 대자, 그의 너무도 차분한 눈이 똑똑히 보였다——
조금 전 분노하던 모습과는 딴사람 같았다.
유연
선배……
내 마음속에 문득 하나의 생각이 파고들었고, 그는 그것을 전부 눈으로 읽어낸 듯했다.
백기
내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모습인지는 상관없어.
백기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든 신경 안 써.
"그러면 나는 그날 죽은 사람이 네가 아니었다는 걸 후회하게 될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그 말에는 미처 말해지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유연
……어쩌면 그건 그냥 홧김에 한 말이었을지도 몰라요.
백기
그 사람은 자기가 사실이라고 판단한 것만 말해.
백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를 사이에 두고 내 앞에 섰다. 세계와 나에게서 잘려 떨어진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 안에는 끝없는 불꽃과 흩날리는 재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마치 그것들을 억누르는 것처럼.
그는 그를 깊이 이해하는 만큼, 그만큼 깊이 혐오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는 분명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노만 있었던 게 아니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분노를 무기로 바꾸었다. 그런데 왜 나는 슬퍼지는 걸까?
백기는 손바닥을 내 손바닥에 가져다 댔다. 마치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만지는 것처럼.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불과 재는 이미 그의 영혼 속으로 숨겨진 뒤였다.
백기
내 미래를 볼 수 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힘껏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두려워졌다. 무언가를 보게 될까 봐. 그것이 그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될까 봐.
백기
걱정 마. 답을 찾기 전까지, 나는 죽지 않아.
그는 내 두려움을 꿰뚫어 보았다. 두려움도 없고, 거리낌도 없었다.
그럼 답을 찾은 뒤에는?
나는 묻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백기는 한 손으로 검은 바람의 꼬리를 움켜쥐었다. 어둠이 흩어지며, 소년의 영혼 안에서 날카로운 칼날로 담금질됐다.
백기
네가 본 운명이라 해도, 나를 막을 수는 없어.
그는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5-18 옛 그림자가 드리우다
죽지 않는 것이라면, 반드시 되찾을 기회가 있으니까.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하늘은 이제 막 밝아오는 것 같았다.
밤새 잠들지 못한 피로 때문에 머리까지 조금 마비된 것 같았다. 백기가 마지막 검사를 받으러 간 사이, 다른 NW 대원이 나를 기지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문밖으로 나섰을 때, 먹구름은 지난밤 흩어지지 못한 짙은 연기처럼 온 하늘을 음울하게 채우고 있었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누구의 한숨인지 알 수 없는 비였다.
공터에는 특파팀 대원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고, 백혼은 멀리서 기지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빗속을 걸어왔다. 흐릿한 빗안개가 등 뒤에 드리워, 마치 그가 일부러 감춰온 수많은 비밀 같았다.
그는 아버지가 되는 것도, 남편이 되는 것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쩌면 그 두 이름보다 앞에 쓰인 무수한 것들이 있었고, 그래서 그 이름들은 쉽게 버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길은 높은 산이 되고, 어둠으로 깔리고, 아이가 등 뒤에 짊어진 비석이 되었다.
그래서 높은 산은 한때 동경이었고, 어둠은 영혼 속으로 흘러들었으며, 아이는 언제나 그 비석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희생하는 사람과 희생당한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는 결코 같지 않으니까.
나는 이렇게까지 백기와 함께 한 사람을 이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백혼은 단순히 '아버지'라는 이름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리 없는 권력이었다——
“나”라는 존재 자체에 관한 전쟁.
나는 고집스럽게 그를 보지 않으며, 특파팀 대원들 쪽으로 걸어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익숙한 발소리는 묵직하고 확고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게 뒤돌아보았다.
백기는 이미 단정한 군복으로 갈아입어 있었다. 층층이 차갑고 단단한 천이 모든 감정까지 단단히 옭아매는 것 같았다.
멀리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빗물의 서늘함이 얼굴을 때렸다.
그는 곧게 큰 걸음으로 걸어왔다. 어깨와 등이 꼿꼿하게 펴진 채, 칼집에서 빠져나온 칼처럼. 문밖의 차가운 빗속으로, 빗속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그리고 피할 수 없이 정면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을 향해 나아갔다.
비가 더 굵어진 것 같았다.
바람을 휘감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며 땅에 부딪혀 잘게 흰 물거품을 튀겼다.
눈앞의 빗발을 바라보며 백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반드시 이 뒤덮인 비바람 속으로 결연히 걸어 들어가겠다는 듯했다.
두 사람은 누구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각자 자신만의 긴 길 위를 집요하게 밟아 나아갔다.
뒤돌아보지도 않았고, 옆으로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백혼
네 임무를 수행해라.
백기
내 임무는 당신 하나만이 아니야.
짙은 먹구름 속, 교차하는 군복 자락이 더 이상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자챙 아래 감춰진 그 눈빛은 여전히 또렷하게 빛났다.
그 눈에는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었다. 오직 앞만 바라보았다. 마치 눈앞에는 그를 가로막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마침내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비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반드시 이 비바람 뒤에 숨어 있는 모든 침묵의 검은 안개를 뒤엎을 것이다.
물줄기가 백기의 어깨선을 따라 굽이쳐 흘렀고, 거의 고집스러울 만큼 곧게 선 그 뒷모습을 따라 떨어져 내렸다.
희박한 하늘빛이 그의 눈가를 스치며 그 눈 속에서 꺼지지 않는 봉화를 지폈다.
백기
집합!
특파팀 대원
예!
일사불란한 목소리가 빗줄기 속에 울려 퍼졌다. 나도 그 속에 서서, 내 폭풍을 선택했다.
백기
해산!
마치 서로 마음이 통한 것처럼 저 멀리 바람 소리가 갑자기 귓가에 가까이 들렸다.
그래,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바람이 있었다.
바람은 그의 옷자락을 부풀리고 그의 구호를 멀리 날렸다. 바람은 그의 의지를 목격하고 재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을 깨워냈다.
그는 운명을 향해 높이 쳐든 군기였다——
절대 흔들리지 않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와 백기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닫힌 차창은 바람 소리를 밖에 가두었고 안에는 답답한 빗소리만 남았다.
오는 내내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밤새 못 잔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연 언니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나는 차창에 기댔다.
흐릿한 그림자가 뿌연 유리 위에 반사됐다. 또 하나의 멈추지 않는 장마 같았다.
그도 나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꺼풀을 늘어뜨린 채 몰래 바라보며, 그가 언제쯤 얼굴을 돌릴지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동안 불안과 공황에서 도망치듯 이곳저곳을 뛰어다닌 일, 한밤중 화재 현장에서의 분주함, 여러 번 사용한 힘과 방금 NW에서 받은 검사……
쌓이고 쌓인 모든 것이 이 순간 거대한 피로감으로 밀려와, 점점 거세지는 이 비처럼 나를 삼켜버렸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눈이 스르르 감겼다.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는 생각했다.
내 힘이 완전히 바닥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바람이 정말 이루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아주 푹 잠을 잔 것 같았다.
어렴풋이, 내가 아직 차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나는 흐릿한 의식으로 조금 전 기대고 있던 곳에 그대로 기대어 있었다. 익숙하고도 따뜻한 체온이 내 몸 옆을 덮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매번 늦잠을 잘 때처럼.
나는 본능적으로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손끝 아래 누군가의 몸이 거의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살짝 굳는 게 느껴졌다.
……응?
순간 잠이 확 깼다.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거두며 등을 세웠다. 옆에 있는 사람이 무슨 서류를 들고 나를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햇살이 쏟아져 내려, 비가 갠 뒤의 맑은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차 안에는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고, 차는 이미 우리 집 아래에 멈춰 있었다.
차가 언제 도착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백기가 나를 전혀 깨우지 않았을 줄도 몰랐다.
내 잠든 자세가 대체 어땠을지, 방금도 완전히 그의 몸에 매달려 있었다는 걸 떠올리자,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유연
……왜 안 깨웠어요?
백기
잤으면 된 거지.
담담한 말투였다. 목소리에도 약간의 여유로움이 배어 있었다. 마치 그 역시 같은 시간 동안 쉰 사람 같았다.
백기
그래서 이제 깼어?
유연
……깼어요.
백기
네 능력 문제는 특연과에 계속 조사하게 할게.
백기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메시지 남겨도 돼.
백기
항상 바로 볼 수는 없지만, 보면 답장할게.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접으며 진지하게 모든 것을 정리했다.
백기
특파팀 쪽에도 미리 얘기해뒀어.
백기
내가 늘 있을 수는 없지만, 네 연락을 받으면 심각한 문제일 때 그쪽에서 조건 없이 우선 처리할 거야.
백기
너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그 사람과 관련된 일도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백기
밥 잘 챙겨 먹어.
유연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기가 침묵에 잠겼다. 어떤 작별의 신호 같았다.
입을 열었다 닫다가, 결국 꾹 다물었다. 그를 슬쩍 보며, 손을 문손잡이에 올렸다.
유연
그럼 저 갈게요?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그냥 가라는 뜻인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린 뒤, 나는 또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다.
그때 백기도 뒷자리에서 나와 운전석에 탔다. 나를 한 번 보더니,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가득 찼다.
나를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는 정말 자기가 말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걸까?
휴대폰을 보니 이미 오후 4시였다. 나는 또 왠지 모르게 먹먹해졌다.
선배는 또 어떤 마음으로 나를 지금까지 기다렸던 걸까.
몇 시간 뒤 집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특연과와 NW의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나는 원래부터 내 자신을 알아갈 시간을 조금 가지려 했다.
통증과 힘이 나타나는 빈도를 알고 싶었고, 나 자신이 이따금 혼란에 빠지는 상태를 막고 싶었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소파에 누워, 그것이 찾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러 나와 맞서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이렇게 기다릴 때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연
얄미워.
허공을 향해 투덜대며 주먹을 한 번 휘두르고 눈을 감았다. 화면은 온통 백기의 얼굴뿐이었다.
유연
내 것인 힘이라면, 나도 완전히 정복해낼 거야.
유연
백기, 나도 선배한테 지지 않을 거야.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몽롱한 사이에 또 잠이 들어버렸다.
무모하게 뛰어다니고 밤을 새운 탓에, 몸이 의지를 등지고 제멋대로 휴식 모드에 들어갔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꿈은 꾸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다시 상쾌하게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이미 별빛으로 가득했다.
휴대폰을 보니 새벽 두 시였다. 나는 참지 못하고 피식 쓴웃음을 흘렸다.
유연
이 엉망진창인 생체 시계, 아직 고칠 수 있을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이 자연스럽게 백기가 아까 몸을 구겨 넣었던 1인용 소파 위에 머물렀다.
선배도......제대로 자고 있을까?
왜인지 모르게 그가 그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 속 불꽃은 줄곧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집을 나서고 있었다. 택시 앱을 보다가, 홀린 것처럼 주소 하나를 입력했다.
택시 기사님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차에서 내렸을 때, 눈앞의 텅 빈 깊은 밤 산길을 바라보며 나 자신도 좀 말이 안 된다고 느꼈다.
예전에도 백기는 종종 이곳에 와서 질주하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기까지 와버렸다.
어쩌면 와본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는 지금쯤 집에서 잘 자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희미한 굉음을 실어왔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눈을 찌르는 헤드라이트가 밤길을 환하게 밝혔다.
오토바이 속도가 극한까지 올라간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며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타이어가 지면을 문지르며 내는 급격한 브레이크 소리가 귀를 찢을 듯 터져 나왔다. 거의 내 고막을 꿰뚫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오토바이 위에서 몇 초간 굳어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렸다. 발소리가 빠르게 땅을 밟았다. 온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 앞으로 달려와 헬멧을 벗어던졌다.
새빨간 핏줄이 그의 눈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내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초조하고 걱정 가득한 외침이 터졌다.
백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백기
또 뭔가 보인 거야?!
나는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초조함으로 들끓는 눈동자를 보고, 요 며칠 동안 그가 줄곧 참고 있던 얼굴을 떠올리자, 더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유연
왜 그렇게 화를 내요!
유연
저는 아무것도 안 봤어요. 그냥 선배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유연
그냥 선배가 절대 제대로 자지 않고, 계속 몰래 강한 척하고 있을 것 같아서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의 미간과 눈매가 저도 모르게 더 세게 일그러졌다. 그 때문에 그의 표정은 더욱 알 수 없게 변했다.
백기
난 괜찮아. 내 상태는 내가 잘 알아.
백기
아무 일도 없는데, 내가 뭘 강한 척한다는 거야!
뭔가를 필사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유연
그럼 선배는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백기
심심해서, 바람 쐬러, 야경 보러.
백기
아무 이유나 갖다 붙여도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돼!
유연
그만 자신을 속여요!
바람이 쉬지 않고 몰아쳤다. 흔들리는 마음 같았다.
바람이 겹겹이 벗겨져 나갈 때, 비로소 그것은 더 피투성이인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예전의 그는 너무도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이 웃었기에, 나는 이런 마음을 본 적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 남긴 상처로 가득 그어진 마음을.
유연
언제까지 자신을 속일 거예요!
유연
선배, 하나도 괜찮지 않잖아요!
백기
아니야!
유연
분명 괴로워하고 있잖아요. 누구보다 신경 쓰고 있으면서!
밤하늘 아래, 나는 그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를 악문 듯했고, 온몸이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연
말해요! 왜 인정하지 못하는 거예요!
유연
분명 화가 난 거잖아요.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잖아요! 자기 자신도 미워하고 있잖아요!!
백기
그래서 뭐!
백기
나는 화나면 안 돼? 미워하면 안 돼?!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고통으로 뛰는 심장처럼.
(他는 백혼을 가리키지만, 정작 그 화살의 방향은 백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번역했습니다)
백기
그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백기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둘 수 있는 건데!
백기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질질 끌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자기 어머니의 무덤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잖아!
백기
무슨 자격으로 계속 그렇게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거야!
백기
무슨 자격으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거야.
무슨 자격으로,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잊어버리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그 사람은 계속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계속 후회해야 했다. 계속 강해지는 길 위를 걸어가야 했다.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과거의 순간순간 스쳐간 빛과 그림자를 떠올릴 때마다, 그는 그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떠올리는 모든 ‘그’는, 결코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증오하는 모든 ‘그’는, 사실 전부 자기 자신이었다.
바람은 검은 그늘에 물들어 그의 주위를 감쌌고, 남은 것은 그의 낮은 중얼거림뿐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피를 토하는 듯했지만, 그 비난과 원망이 끝내 향하는 곳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백기
......나한테 신경 꺼.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그에게 몸을 날려 그를 끌어안았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내게 부딪혀 몸이 기울었고, 바람이 반사적으로 그를 떠받쳤다.
우리는 어젯밤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늘도 불꽃이었고, 땅도 불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가 혼자 불꽃 속에 서 있는 걸 두고 싶지 않았다.
유연
그럼 선배도 앞으로 나 신경 쓰지 마요.
유연
내가 무슨 걸 보든, 무슨 일이 생기든, 신경 쓰지 마요.
유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도, 밥을 제대로 못 먹어도 잠을 제대로 못 자도.
유연
제 Evol이 엉망진창이 돼서 미래인지 과거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되더라도요.
백기는 침묵한 듯했다. 허공에는 바람 소리만 있었다. 흐르지 못하는 눈물처럼.
한참 뒤, 세계가 그의 답답하게 잠긴 목소리를 전해왔다.
백기
나는 네 곁에 있으면 안 돼.
——나는 너를 안아서는 안 되고, 네게 안길 이유도 없어.
네게 불렸을 때 무의식적으로 느낀 기쁨, 말을 잘못한 뒤의 괴로움, 차창 유리에 비친 옆얼굴을 몰래 바라보던 순간, 네가 기대어 왔을 때의 안도감……
나는 네게 말할 수 없어. 이 세계와 싸우고 타협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 전부 너였다는 걸.
그 순간,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불분명해졌다. 나는 마침내 내 후회를 선명하게 만졌다.
세계는 사랑을 잃었다. 그리고 백기가 가장 먼저 잊어버린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유연
……미안해요, 선배.
그는 오랜 세월을 들여, 수많은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며 겨우겨우 자신을 조금씩 채워왔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렇게 나 때문에 다시 한 번 흩어져버렸다.
백기
왜 네가 나한테 사과해.
그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웠다. 마치 모든 힘이 빠져나간 뒤에야, 겨우 나를 살며시 마주 안을 이유를 얻은 사람처럼.
백기
넌 지금까지 아무것도 잘못한 적 없어.
유연
하지만 내가 '사랑'을 잃어버렸잖아요.
그리고 소중한 너까지 잃어버렸어.
그가 “사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잠시 멈칫한 것 같았다. 하늘과 땅 사이로 밤바람이 끝없이 불어와, 마치 맹렬한 불길을 흩어내는 듯했다.
백기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랑)”은 죽었어?
나는 그 자리에 굳었다.
계속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서로 가까이 맞닿은 가슴 앞에서, 마치 생명처럼.
——그 순간 나는 힘껏 백기를 끌어안았다.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단단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유연
아니, '사랑'은 죽지 않아.
백기
그럼 두려워할 것 없어.
그가 고개를 들어 멀리 달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백기
죽지 않는 것이라면, 반드시 되찾을 기회가 있으니까.
5-19 마음속의 목소리
떠들썩한 도시 속에서, 때로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5-20 오래된 인연의 귀환
바람이 날개를 펼쳤지만 도착할 곳을 잃은 것 같았다.
백기가 나를 집에 데려다줬을 때, 하늘은 다시 새벽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큰비는 결국 모든 것을 씻어냈고, 맑게 갠 하늘에는 별빛이 숨어 있었으며, 여명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백기는 새벽빛 아래 서 있었다. 금빛으로 찬란한 아침 햇살을 걸친 채.
나는 그가 분명 계속 강한 척할 것이고, 흔들림 없이 NW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며, 계속 자신을 몰아붙이며 앞으로 걸어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아직 이 세계에 '사랑'을 돌려놓을 수 없었다.
아름답고도 순수한 그 호박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유연 & 백기
밥 잘 챙겨먹어요. / 밥 잘 챙겨먹어.
그 말은 그의 목소리와 함께 동시에 떨어졌다.
백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리고, 내 미간을 가볍게 콕 찔렀다.
백기
잠도 잘 자야 해.
말을 마친 그는 블랙이에 올라타, 오토바이 손잡이를 가볍게 비틀었다.
유연
아, 맞다. 선배, 말하는 걸 깜빡했어요.
나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유연
제 프로그램은 전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고 있어요.
유연
나도 멈추지 않을 거예요.
여명이 그의 눈동자 속에 내려앉았다. 그 안에 비친 내 모습도 빛나는 것 같았다.
유연
그건 절대 선배가 저를 몰아붙여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선배는 저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저도 기꺼이 선배에게 영향을 받고 싶어요.
유연
선배 뒤에 남겨지지 않을 거예요.
그가 살짝 멈칫하는 눈빛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부탁을 꺼냈다.
유연
그래서 선배의 도움이 또 필요해요. 한 사람을 조사해줬으면 해요.
백기
누굴?
유연
내 아버지요.
유연
그가 돌아왔어요.
백기는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한 뒤 다시 특파팀으로 향했다.
그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감히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런 부끄러운 말들을 해버린 탓에 자기한테 한 대 날릴 것 같았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해버린 걸까?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마 정말 조금 피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특파팀은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전날 화재 현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에게 떠보는 시선을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 너무도 익숙한 곳에, 역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때 누가 와서 한마디 건네준다면, 조금은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연모고등학교 사건 조사는 줄곧 진전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정보에 따르면, 그 체육관에 있던 사람의 행적도 어딘가 이상했다.
게다가 어제의 화재 역시 유난히 기이한 부분이 있었다. 이후 기술 인력의 조사 보고에 따르면, 발화 지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건물이 순식간에 불타오른 것 같았다.
그는 섣불리 상대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어떤 같은 지점에서 막혀 있는 듯했다.
대체 무엇일까?
그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때 고진이 안으로 들어왔고, 그를 보더니 잠시 멈칫한 듯했다.
고진
어……백 대장, 괜찮아?
그는 당연히 괜찮았다. 하지만 그 말이 입가까지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다시 삼켜버렸다.
백기
오늘 일 많아?
고진
음……사건이 없진 않은데, 대장이 직접 나설 건 거의 없어.
고진
어젯밤 화재 분석은 시간이 좀 걸려서, 아마 모레쯤? 더 세부적인 결과가 순차적으로 나올 것 같아.
그것은 어떤 말 없는 권유 같기도 하고, 말 없는 암시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듣고 있자니 몹시 어색했다. 뭔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기
하고 싶은 말 있어?
고진
……
고진
그 질문, 지휘관으로 하는 거야? 아니면 '나레이션' 자격으로?
백기
차이가 있나?
고진
엄청 많지.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궁금해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백기
'나레이션' 자격으로.
고진
자고 싶으면 자.
백기
……
대답할 새도 없이, 눈앞의 사람은 경보를 받은 척하며 재빨리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방금 대화의 어느 순간, 그는 다시 그 '맞다'는 느낌을 찾은 것 같았다.
물론, 그는 그래도 자지는 않았다. 아직 신경 써서 확인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중에는 그녀가 갑자기 부탁한, 그녀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쁘게 하루가 또 지나갔다. 그는 먼 곳의 석양을 바라보다가, 홀린 듯 오토바이가 달리는 방향을 바꾸었다.
황혼이 가까워질 무렵의 묘원은 조용했고, 떠도는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둔 듯했다.
그는 익숙하게 계단을 넘어, 한 묘비 앞에 쪼그려 앉았다.
'려엽(厉晔)'.
(몽심호 외전: 욕망에서 언급, 경찰학교 임무 중에 사망함)
사진 속 사람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유난히 활기차게 웃고 있었다.
그는 미리 준비해둔 깨끗한 물과 휴지를 꺼내, 조용히 묘비 위의 먼지를 천천히 닦아냈다.
그는 사진 속 사람을 바라보았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음 묘비로 향했다.
'옌강(严刚)'.
(2부 언급)
그는 천천히 묘비 위의 이름을 눈으로 읽고, 아까와 똑같이 반복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그는 그들을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그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저 말없이 그 묘비 위의 먼지를 털어내, 밝은 모습으로 돌려놓았다.
마침내 백기는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의 묘비를 깨끗이 정리한 뒤, 계단에 앉았다.
찬란한 노을구름은 세상에 파멸을 가져오지 않는 불꽃 같았다. 그것은 오늘 하루만을 태워 없애고, 사람을 내일로 데려갈 뿐이었다.
백기
당신들은…… 그냥 바람이 나를 밀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백기
분명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래서 죽은 사람이 엄마였던 거겠지.
백기
그는 그 일을 알고 있었어. 사고가 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럼 엄마는? 엄마도 알고 있었을까?
백기
“원항 계획”은 뭐지? 왜 그는 제야의 변으로부터 2년 뒤에 사망을 선언했을까. 그전의 일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백기
이 모든 것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막막함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통해, 그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에는 하나의 의식이 있다고 들었다. 재든 흙이든 좋다. 지난날이 가볍게 증발하는 것을 바라보지만, 무언가 묵직하게 남아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그렇다면 무언가가 가라앉아, 어딘가에 남아 있는 걸까?
그는 처음으로 그들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입을 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지 못했다.
백기
엄마, 어디에 있어요?
백기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하는 거죠?
바람이 날개를 펼쳤지만, 도착할 곳을 잃은 것 같았다.
눈앞에는 그가 해야 할 일, 조사해야 할 일, 답을 찾아야 할 일이 아주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묘지 안에 그대로 앉아, 하늘 끝의 저녁 해가 천천히 기울어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잠시 당신들 곁에 있게 해줘…… 이곳에 머무를 이유로 삼을 수 있게.
백기는 조용히 그렇게 생각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한 무언가를 느꼈다.
밤이 내려앉자 백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문득, 귓가에 왜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울린 듯했다.
숨이 순간 멎었다. 멍해진 바로 그때, 전화가 울렸다.
샤오위에
사령관이 널 보자고 한다.
밤바람이 잔잔하게 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계단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백기
밥 먹으러 갈 거야. 기다리라고 해.
오늘 밤도 우육면 면 한 그릇을 먹자.
제5장
【원항 계획】
관련 인물
NW 내의 극비 계획. 위험도가 매우 높으며, '절대 실패하는 임무'로 여겨졌다.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과 목적은 불명. 담당자 및 핵심 실행 인물은 사망 선고를 받았던 전 NW 사령관, 백기의 아버지——백혼.
백혼이 연모시로 성공적으로 귀환하면서, 이 계획의 후속 임무가 공식적으로 가동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