恋与制作人 2부 vol.9 零和游戏 32장 燃烧的心
2022.09.26 업로드
*관련 외전:
외전 죄(9시즌 卡); 지난 날에 극복하지 못한 상처
/ 극과 극(10시즌 卡); 샤오위에 시점 + 2부 사건의 내막
*추천 데이트: 2022 백기 생일 스토리
32-1
이택언과 헤어지고 난 뒤 부두에서의 이야기~
부두가 시야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면서 바닷바람이 많이 잦아들었다. 나는 심호흡을 힘껏 여러번 하면서 진정하려고 애썼다.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많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웹 페이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Poseidon의 말과 마찬가지로 모든 헤드라인에는 '상자'를 퍼뜨리고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겠다는 경찰 공문이 걸려있었다.
동시에 '상자'를 사용하면 신체의 쇠약을 초래한다는 것도 여러 과학 연구 팀에 의해서 증명이 되었다.
두문이 약속을 하건 하지 않았던 간에 적어도 이 일은 확실히 널리 퍼졌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계 상자의 힘에 매료되어서 은연중에 '신Evolver' 로서의 능력을 과시하는 이들이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즉시 두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신호가 내 마음을 계속해서 내려놓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벨소리가 갑자기 울리더니 화면이 갑자기 밝아졌다.
나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믿을 수 없이 눈을 크게 뜨고 통화버튼을 천천히 눌렀다.
"……선배?"
전화기 너머는 유난히 조용했다. 세상이 마치 정지 버튼에 눌린 것 처럼 모든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는 사라져버리고 내 심장박동이 빠르게 뛰는 소리만 남았다.
"응. 나야."
32-2
"……선배?"
"응, 나 여기 있어."
지난번에 헤어진 이후로 나는 그의 목소리를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 하지만 막상 생생하게 듣고나니 깨닫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앞서 특파서는 바늘통 사건, Evolver 암살 사건 등에 대한 여러 건의 사건 발생 통보를 경찰에서 공표했지만 선배는 끝내 나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Evolver 가 열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되고, 현재 범람하고 있는 기계 상자가 등장했을 때도. 그의 책임이 또 얼마나 더 무거워졌을까?
나는 핸드폰을 꼭 잡고 시큰해진 입을 오므렸다.
"선배, 푹 쉬었어요?"
"그럼."
"거짓말. 선배, 이런 상황엔 잠도 잘 못자잖아요."
대놓고 화를 자아내는 말투가 선배의 웃음을 자아냈다.
"정말이야. 널 속이지 않을 거야. 잠을 정말로 오랫동안 잤는데… 너를 꿈에서 본 것 같아."
"제 꿈을 꿨다구요?"
선배는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는 침묵을 지키면서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꿈에서 네가 창가에……앉아있는 것을 봤어. 너에게 말을 했지만 너는 들을 수도, 내가 너의 손을 잡아당겨도 만질 수가 없었어. 난 너와 함께 그곳에 앉아서 별이 떨어질 때까지 앉아있었어."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순간 나는 선배가 말한 것이 내가 도서관에서 선배를 기다리던 그때의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히 오지 않았는데도. 선배가 정말로 왔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었을텐데.
"……그리고요?"
"그리고 넌 울었어. 하지만 내가 눈물을 닦아줄 겨를도 없이 또 다른 꿈에 휘말렸어. 그 꿈에선 모든 게 불로 뒤덮이고 끝이 없을 것처럼 끊임없이 타올랐어. 하지만 난 빨리 떠나고 싶었어. 너의 눈물을 닦아줘야 했으니까. 결국엔 내가 조급함을 느끼자마자 깨어났어."
그의 서술은 평범한 악몽인 것처럼 유난히 평범했다.
"걱정 마세요. 꿈은 모두 가짜예요! 분명 최근에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서 그런거니 푹 쉬셔야 해요!"
이게 다 바보 같은 소리인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선배가 어떻게 쉴 수 있겠어?
하지만 나는 세상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숨돌릴 시간을 주기를 기도하곤 했다.
그가 편안하게 눈을 감고 즐겁고 부드러운 꿈을 꿀 수 있도록.
나는 마음 속의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웃음을 지었다.
"제가 다음에 향초를 가져다 드릴게요. 그럼 다시는 악몽을 꾸지 않을 거예요."
전화기 너머로 선배가 웃는 것 같았다. 약속은 바닷바람 속에서 자욱하고, 아름다운 소망이 자라나길 기다린다.
"연아,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줘서 고마워."
선배가 너무 정중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얼마 안 됐잖아요. 그보단 선배 일이 더 중요해요. 선배가 지금 전화를 한 건 심문이 모두 끝나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응, 아직 조사를 계속하고 있어. 곧 결과가 있을 거라고 믿어."
짧은 설명 후에 그의 말투가 변했다.
"지금 연모시는 결코 안정되지 않았어."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조사할 거란 걸 알지만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심각한 일들이 많을 거야."
"그 혈액 바이러스와 기계 상자…… 말고도 또 다른 속사정이 있나요?"
"네가 이미 바이러스에 대해 알고 있으니 많은 일들은 설명하기가 쉽겠네."
"먼저 안심해. 나는 아무 일도 없었어. 하지만 현재 이 특수 바이러스는 아직 그 어떠한 전파 경로도 찾지 못했어."
"바이러스의 전파 범위는 아주 광범위해서 예방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온 도시의 혈액은행은 아마 곧 혈액 수급 문제에 봉착하게 될 거야."
"……"
그 장면만 상상했을 뿐인데 등에서 식은 땀이 흘러 나왔다.
"상자 사용으로 생명이 쇠약해지고 결국은 사망한 사례가 이미 여러 건 나왔어."
"전에 내가 말한 원인불명으로 4명이 죽었던 일에 대해 기억하고 있어?"
"설마……"
"맞아. 비교 결과에 따르면 그 네 사람은 상자로 인해 죽었어."
"몇달 전부터 이런 상자가 유포되고 있었단 이야기야."
"이렇게 정밀하게 설계되었단 건 제작자는 반드시 상당히 높은 기술을 습득하고 있다는 뜻일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광범위하게 투입하려면 공장과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할 거야."
내 머리가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이렇게 많은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대상을 찾았다……
GR일까? 하지만 그날 Helios와 두문이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두문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한 그들과는 별로 관계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양기준의 말은…… 그가 직접 연출하고 연기한 것이니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머뭇거리며 난간 아래로 내려갔다. 이건 마치 유성사건처럼 보통 사람들의 존재를 깎아내렸다.
하지만 급진주의자들은 추방되었고, Dionysus 는 체포되었으니 BS 내부에 다른 사람들이 있을까?
하지만 또 누가?
"걱정하지 마. 특파서는 이미 초기에 세운 목표가 있으니까. 곧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누구든지 그가 뜻대로 하도록 두지 않을 거야."
목소리를 통해서 나는 그의 자신감 있고 굳센 표정을 본 것 같았다.
"선배를 믿어요."
"그럼 장관님, 제 보고는 끝났습니다."
"풉, 그래요 백 형사님. 적당히 쉬세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요."
"이행하겠습니다."
"그럼 내가 바쁠 동안 너도 부디 조심해."
*
나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지점 재단으로 향했다.
끝내 연락이 닿지 않은 두문으로 인해 나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자동차가 질주하는 동시에 핸드폰 화면이 깜빡거렸다. 하얀 화면에 다시 한줄의 검은 글자가 입력됐다.
"연모시에서 상자의 침식률: 14.8%"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의 문자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또 KEY가 보낸 건가?"
그는 왜 이런 방식으로 나에게 이런 소식을 알려주는 걸까?
하지만 나는 깊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만약 이 소식이 사실이라면 단 이틀만에 기계상자를 사용하는 인원수는 이미 상상을 훨씬 초과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거였다.
마음속에서 자꾸만 켜저 가는 막연함을 무시하려고 애쓰는 순간,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안나)
"유연아, 너 어디야? 웨이보에서 올라온 동영상 봤어?"
"무슨 동영상이요?"
전화기 너머의 사무실이 너무 시끄러워서 내가 영문도 모른 채 웨이보를 여니 많은 사람들이 동영상을 전송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휠체어를 탄 남자는 온화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두문?!"
내가 화면을 누르자 두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점 기금회의 책임자, 두문입니다,"
"이런 방식은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었지만 다만 그동안 가려져 있던 진실을 이제는 밝혀내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손은 다리에 덮인 얇은 담요를 가볍게 문질렀고 그는 오랜 추억에 빠진 것 같았다.
"4년 전 이 도시에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을 그 일을 '제야의 변화'라고 불렀지요."
"제가 바로 그 생존자입니다."
"사람들은 그 일을 'Evolver' 사이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폭동을 진압한 '정의의 전쟁'이라고 알고 있지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포장된 거짓말일 뿐입니다."
"그것의 실상은 살인이었습니다! 저의를 알 수 없는 실험!"
내가 놀라서 화면을 보고 있는데 화면에서 두문은 손가락 세 개를 세웠다.
"이 모든 것은 세가지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첫번째 비밀은 지금 모두가 알고 있는 모든 Evolver들에게서 나타나는 열화 현상입니다."
"이 일은 이미 4년 전 발견되어 증명도 되었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이 예방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나머지 두 가지 비밀은 따로 녹화해 두었습니다."
"지금 저에겐 두 가지 요구가 있습니다."
"한 시간 안에 저는 그 작전 뒤의 책임자를 만나야겠습니다."
"동시에 저는 유연회사의 책임자인 유연씨와 특파서의 백기대장이 동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는 휠체어 스패너를 가볍게 두드렸다. 온화한 표정이 이때는 아주 무감각해 보였다.
"만약 저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는 즉시 나머지 두 개의 비디오를 유포할 것입니다."
32-4
동영상이 끝날 때까지 나는 멍하니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내가 안나 언니를 진정시키는 척하며 안심시켰지만 링크를 다시 클릭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링크가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많은 네티즌들이 이를 저장하고 전파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동시에 나는 수많은 질의와 질문을 보았다.
두문은 왜 이러는 걸까? 그가 말한 게 사실일까? 남은 비밀은 뭘까? 왜 나와 선배가 이 일에 참여해야하는 걸까?
물론 두문의 요구를 신경쓰지 않고 남은 영상을 즉각 내놓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았다.
자동차가 천천히 멈추자 나는 재단 대문 앞에 줄지어 모여드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바람과 함께 길모퉁이로 숨었다.
왜 날까? 내가 나타나도 되는 걸까?
제야의 변화의 비밀, 그것이 백기와 엄 형사가 애써 찾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밝혀져야 하지 않을까?

차가운 손가락이 나를 잡으면서 한바탕 바람이 빠르게 불더니 나를 순식간에 감싸고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햇빛이 그의 몸에 금빛 테두리를 그려내고 거의 같은 순간에 그 사람의 눈빛이 나와 부딪혔다.
"……선배?"
선배는……많이 수척해진 것 같았다.
선배는 매끈하게 뻗은 제복을 입고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마치 발밑의 모든 울부짖음과 소란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온몸에서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무언가 억지로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나의 외침에 어떤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제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바람 속에만 있으면 난 널 느낄 수 있어." (1부 2챕 대사)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에 나는 우두커니 앞에 있는 사람만 보고 있었다.
하늘에 가득한 구름이 발밑에 밟혔다. 지금 나는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감사하면서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를 숨겼다.
"왜 그래?"
예쁜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기억 속의 그 화면과는 달리 비슷한 바람소리와 함께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얼굴이 있었다.
아마, 나는 이런 순간을 위해서 쉬지 않고 지금까지 버텼을 것이다.
나는 그를 보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그냥 이러면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아서요."
"내가 있으니까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선배는 팔을 꽉 조이면서 나를 그의 가슴팍에 붙이려고 했다. 순식간에 귓가에는 그의 심장 박동과 바람 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선배가 저를 찾아온 건 두문의 동영상 때문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발밑에 모여든 거센 바람이 우리를 머나먼 곳으로 밀려보냈다.
"NW 사람들이 분명히 찾아올 거야."
"숨기보단 차라리 내 옆에 있어줘."
"두문이 어떤 비밀을 폭로하건 나는 신경쓰지 않을 거야. 내가 샤오위에 스스로 이 일을 해결하도록 요구할 거야."
"좋아요."
내가 조용히 답을 하자 백기가 고개를 숙였다.
"다른 건 물어보고 싶지 않아?"
"이건 우리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나는 엄정한 태도로 백기를 바라보며 굳게 미소를 지었다.
"설령 있다고 한들 두문과 샤오위에에게 물어봐야 해요."
"그럼 같이 가서 확인해 보자."
*
대화가 끝나마자마자 눈에 띄는 건물이 교외의 광활한 땅에 나타났고 백기는 조심스럽게 나를 건물 꼭대기 위에 놓았다.
우리가 막 몸을 똑바로 세우자 정면에 NW 대원 한 명이 걸어왔다.
"사령관님이 응접실에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나는 백기 뒤를 따라 곧장 어떤 응접실로 들어갔다. 이렇게 큰 공간은 온통 먼지로 가득찼을뿐 아무런 장식이나 장식품도 없었다. 책상 뒤의 사내는 손에 어떤 서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리를 듣고도 눈꺼풀을 치켜 올리기만 할 뿐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덮었다.
나는 그 CORE 실험을 하던 때의 유리창을 회상한 뒤 처음으로 샤오위에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에는 그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NW 의 사령관이 될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백 대장님은 아직 NW의 규칙을 배우지 못한 것 같군요."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음에는 먼저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걸 기억하세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은 얼굴이었고 되려 의미심장한 눈빛이 백기에게서 나로 옮겨갔다.
"또 만났네요. 유연 씨."
"저도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좀 있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잡담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침묵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공기는 마치 굳은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백대장님은 이미 결정하신 건가요?"
"내 결정은 여지껏 하나밖에 없었어."
백기는 이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나와 서늘한 한기가 스며든 두 눈을 하고는 책상 위에 두 손을 받쳐 놓았다.
"난 네가 계획한 바에 따라서 계획을 실행할 수 있어."
"하지만 그녀는 안 돼."
백기는 거만한 표정으로 샤오위에를 내려다보았는데 말하는 매 글자마다 경고하는 것 같았다.
차가운 명령과 함께 짧지만 날카로운 검은 바람이 그의 온몸을 휘감으며 지나가면서 데스크톱, 서류 용지 위에 날카롭게 자국을 남겼다.
가슴이 철렁해서 나는 눈을 반짝 들어 백기를 바라보았다.
이 익숙한 검은 바람은……매우 익숙하고 눈에 거슬렸다.
과거에 나도 백기 곁에서 이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설마 그 혈액 바이러스가 또 다른 영향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그동안 선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내가 입술을 오므리고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맞은편의 샤오위에가 내 생각을 끊었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 때가 아닙니다. 두문의 요구는 당신도 들었겠죠."
"그가 당신들 두 사람이 함께 참여하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빠질 수 없어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백기는 비꼬면서 웃었다.
"나는 너희들이 무엇을 숨겼는지 전혀 신경쓰이지 않아. 스스로 만든 난장판은 스스로 수습해야지."
"그동안엔 내가 '제야의 변화'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공개하는 게 아무래도 더 좋은 방법같은걸."
"안 그래, 샤오 사령관?"
샤오위에는 가만히 백기를 보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네 말이 맞아. 확실히 공개할 수 있는 사안이지. Evol의 열화 현상이 공개된 건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니까."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게 있어."
샤오위에는 전혀 난처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협박 받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침착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했다.
"두문이 말한 건 사실이야."
"그가 '제야의 변화'에 관한 두 가지 비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가져온 영향은 너와 내가 지금 해결할 수 없는 일이지. 더 많은 사람의 죽음을 초래할 가능성이 아주 크고. 피해 단위는 아마도 '억'단위일 거야."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검은 칼날도 미세하게 떨렸다.
샤오위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의 미소도 느껴지지 않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 비밀이 공개되면 일반인이든 Evolver든 더 큰 음모를 꾸미는데 쓰일 거야."
"이것도 '제야의 변화'가 계속 감추고 있는 가장 중요한 비밀이지."
샤오위에는 천천히 일어나 멱살을 잡았다.
그는 두 손을 똑같이 책상 위에 받쳐놓고 칼날같은 바람이 두 팔에 예리한 상처를 남기는 건 신경쓰지도 않고 백기를 향해 턱을 쳐들었다.
"네가 두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는 있지만 나와 내기는 할 수 있잖아?"
"내가 방금 한 말이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내기할까?"
"백기, 네가 감히 수많은 사상자가 날 수도 있는 미래를 가지고 나와 내기를 하겠냐만은!"
샤오위에의 차가운 질문은 공기를 멈추게 하는 것 같았고 백기는 침묵에 빠지면서 굳은 뒷모습을 하고 있었다.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었지만 도저히 휘두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책상 위에 받쳐든 주먹을 세게 쥐고 허탈함과 분노를 드러냈다.
"당신에게 약속할게요. 당신들의 계획에 따를 거라고."(유연)
팽팽하던 신경이 갑자기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백기의 모습이 갑자기 흔들렸고 샤오위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백기 곁으로 가서 그가 책상 위에 받쳐놓은, 경직된 손을 들어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더러 이 사무실로 들어가게 하는 것부터 샤오위에의 진짜 목적이었겠지.
그런 말은 백기에게만 들린 것이 아니었다.
백기가 나를 찾든 찾지 않든 NW 사람들은 나와 백기를 동시에 그의 앞에 나오게 했다.
그는 백기의 성격으로는 틀림없이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나의 존재는 스스로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연 씨, 옳은 결정을 내리셨네요."
라면서 그는 쪽지 한 장과 헤드셋 두 개를 책상 위에 놓았다.
"두문에게 약속 장소를 바로 여기라고 말하세요."
"어떻게 연락하죠?"
"그가 동영상을 발표한 순간부터 당신은 그에게 연락할 수 있어요."
"지금 1시간 18분 남았어요."
샤오위에는 눈도 들지 않고 의자에 앉아 천천히 이전에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열었다.
내가 막 손을 내밀려고 했지만 백기가 먼저 헤드셋과 종이를 들었다.
"너의 가르침은 필요없어."
그가 톡 쏘아붙이더니 나를 끌고 사무실 입구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아 맞아 백 대장님. 당신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깜빡했네요."
갑자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실은 말이에요. 저는 항상 당신은 상관의 재능을 물려받을만한 자질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네요."
32-6
눈부신 햇살이 곧장 내리쬐면서 말없이 백기의 그림자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지면으로 끄집어냈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게 나를 차에 태웠다. 차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만이 그가 긴장하고 분노한 상태라는 것을 살짝 드러냈다.
우리는 차 안에 있었지만 그는 시동도 걸지 않았고 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사실 그에게 방금 그 검은 바람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선배의 이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 듯 했지만 애써 참아 삼키는 얼굴을 보았고, 결국 다시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돌아갔다.
사실 그는 항상 다른 선택권이 있었다.
더 자유롭고 더 좋아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하지만 그는 언제나 고집을 부렸다.
고집스럽게 모든 것을 짊어지고, 모든 것을 지키며,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선택이었고 그가 아마 유일하게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안에 나도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선배, 있잖아요. 만약에 말이에요. 하느님이 선배 앞에 나타나서요……"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이봐, 젊은이. 쓸데없이 굴지 마. 세상이 이렇게나 추악하잖아."
"한다면 그에게 무슨 말을 하실 거예요?"
백기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내가 이런 때에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약간 들어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는 창밖으로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을 내다보았다.
"당신……마음 속에서 세상이 그렇다면 당신은 하느님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할 거야."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너희 사람들은 항상 싸우고, 항상 생명을 거래의 수단으로 삼잖아."
"일부 사람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이 세상을 대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는 움직이는 실루엣을 만질 수 있을 것처럼 가볍게 손바닥을 들어 차창을 어루만졌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이 거리는 햇빛 아래에서 부드러운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더없이 나약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없었어."
"그들의 눈에는 많은 사람들이 숫자나 기호에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저 같은 이름과 흐릿한 얼굴만이 가질 수 있을 뿐이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명을 거래의 저울로 보는 거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 말에 그는 담담하게 시선을 거두고 두 손을 핸들에 깍지를 끼고 머리를 위에 기댄 채 얼굴을 옆으로 돌려 나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유연아, 나랑 같이 두문을 만나러 갈래?"
분명히 방금 사무실에서 이미 대답을 했었는데.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는 내가 샤오위에의 협박 때문도 아니고, 그 자신의 침묵이 맘아파서 승낙한 게 아니길 바랬다.
분명히 스트레스를 받을 텐데도 더 많은 정보를 알게 한 뒤 자신만의 선택을 하게 했다.
아마도 내가 그를 거절하길 선택했다면 그도 해결 방법을 찾을 것이다.
나는 금방이라도 눈시울을 적실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가슴을 타고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눈을 깜빡이면서 그에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와 함께 하게 해주세요. 저도 두문을 만나서 똑똑히 물어보고 싶어요."
저 아름다운 거품들을, 선배와 함께 할 것이라고--
이 나약함을 지키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연모시 구석구석에 끝없이 퍼지게 할 것이라고.
*
그동안 연결이 되지 않던 번호가 아니나 다를까 다시 전화를 거니 연결이 되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유연 씨."
"제가 당신들의 요구에 동의했다는 걸 알려드리려고요."
"당신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알아요. 그러니 우리 서로 시간낭비 말도록 하죠. 다음은 우리가 뭘 해야 하나요?"
귓가에는 부드럽고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만날 장소는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그가 말을 마치자 마이크에서 '뚜뚜뚜'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음 순간 익명의 메일이 내 메일함에 들어왔다.
'평안리'라는 낯선 단어를 보고 나는 좀 막막해졌다.
"두문이 우리를 '평안리'에서 만나자고 하는데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백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말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나서야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그곳은 '제야의 변화' 사건 때 처음으로 폭동이 일어났던 곳이야. 지금은 이미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었어. 그 거리의 옛 이름이 '평안리'야."
백기는 나를 안고 봉쇄된 철조망을 능숙하게 뛰어넘었고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하마터면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눈길이 닿는 곳은 온통 하얗고 아득했다. 허름한 인형과 찢어진 옷자락이 불에 탄 땅 위에 누워있었다.
석양 아래서 나는 모든 말을 잃고 그저 백기 손에 이끌려 웅장하고 잔인하게 쇠퇴한 곳을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 넓어보이는 공터에서 비로소 나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그 남자를 보았다.
계속해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는 마침내 반응을 보이더니 그리워하면 쓸쓸해보이는 얼굴을 했다.
그는 여기서 무엇을 잃었을까? 그리고 그는 누구에게 무엇을 잃게 할 것인가?
"여기는 어떤가요?"
나는 심경복잡하게 두문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주변에선 끊임없이 울부짖는 바람 소리와 구석진 곳에서 쥐가 먹이를 갉아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원래 작은 광장이어서 평소에 많은 아이들이 이곳에서 놀곤 했어요."
"여기는 Evolver만 활동했던 곳일 거예요."
"확실히. 처음에는 제 은사님이 이곳에 사셨죠."
"그때엔 저도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그는 고개를 약간 들고 그리운 것 마냥 시선을 멀리 두고 바라보았다.
"당신은 과거만 바라보며 살았네요."(원래 倒退 후퇴 란 말을 씀)
“인생에 그렇게 전진과 후퇴가 많았는데 어느 것이 전진인지 어느 것이 후퇴인지 누가 알겠나요."
비꼬면서 말하는 백기의 발언에 두문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평화롭게 웃기만 했다.
"Evol를 싫어하는 사람은 Evolver 친구를 가질 수 없을 거예요."
"음모에 박해받은 사람은 음모를 일으키지 말아야 해요."
"당신의 마음 속 세계는 그렇게 단일하고 좁다는 건가요?"
"당신이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두문이 바라보는 백기의 얼굴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당신 자신입니까, 아니면 NW 사람입니까?"
"……어쩌면 사실 저도 그들과 같을지도 모르겠네요."
두문은 힐문하는 가운데 아주 솔직하게 웃었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원망하는 거겠죠."
그는 휠체어를 조종하고 서두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우리 쪽으로 몇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
"백 대장님, 당신을 저의 증인 중 하나로 선택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사실 엄 형사님도 좋았어요."
"어쩌면 세상은 당신 같은 사람들을 더 필요로 할지도 몰라요."
두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을 듣고 나는 잠시 멍해졌다.
"당신은 엄 형사가 계속 진상을 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계속 입을 열지 않았죠?"
"말해봤자 그는 그 자신도 못 지키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저 NW 사람들을 모두 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요? 아니면 이 두 다리를 돌려줄 수 있겠어요?"
두문은 차분하게 고개를 들었다. 흐린 눈빛 속에는 아무런 빛도 섞이지 않았다.
"백 대장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정말 얼마나 될 것 같나요?"
"그들의 독선적인 관심과 호기심, 탐구가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두문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면서 동영상과 같은 무감각과 절망을 드러냈다.
"그들은 언제나 타인의 고통에 방관자일 뿐이에요. 10일 혹은 20일만 지나도 그들은 잊어버릴 거예요."
"그것들은 그들에게 상처도, 그들의 삶도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한테는 중요한 협상 카드예요. 그래서 NW가 당신들과 나를 만나게 한 거고요."
"저는 저의 고통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위선으로 포장되도록 두지 않을 겁니다."
두문은 모든 말을 단호하고도 느리게 말을 하였지만 그 평온한 말들은 내 눈에선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 비극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세계는 계속해서 침묵하는데도 나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복수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유연 씨, 원한과 절망을 얕보지 마세요."
"그것들은 저를 지탱해왔고 GR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탄생시켰습니다.
두문은 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설령 지금 제가 죽을 수도 있는 상자의 소식을 퍼뜨려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열광하고 있지 않나요?"
"지난 번에 찻집에서 만났던 그 소년 같은 사람이 얼마나 더 있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심장이 두근거려서 손끝이 떨렸지만 곧 따뜻한 손바닥에 둘러싸였다.
"두문, 제가 당신을 데리고 그 사람과 만나게 할게요."
우리의 대화에 끼어든 백기의 목소리. 그는 침착하게 두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틀렸어요."
"처음부터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당신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을 거예요."
"그들은 당신을 도왔을 거고, 그들이 당신에게 힘을 빌려줬을 것이고, 당신에게 힘이 되어줬을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
백기는 조금 유감스럽기도 하고 괴로워보였지만 그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아직 당신에게 선택할 기회가 있으니 제가 도와줄게요."
32-8
그 순간 한숨을 내뱉는 것처럼 바람이 가벼워졌다. 두문은 백기를 주시하면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나는 상황을 보면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 간절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저도 당신을 도울 수 있지만 저는……"
"너무 늦었어요."
"당신과 제가 상상하는 것보다 영원히 세상은 빠르게 변할거예요."
"저도……그리고 당신들도, 더이상 기다릴 수는 없어요."
온화하고 단호한 두문의 말투는 끊임없이 빠져드는 늪 속에서 고집스럽게 멈추어 섰다.
"그리고 저는 이미 아래로 추락했어요."
나는 그가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듯이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을 보았다.
"백 대장님, 저는 운이 아주 나쁜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번에 당신들을 선택했다는 것은 일종의 마지막 은혜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휠체어는 천천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저의 다음 요구는 NW 계획의 본부 실험실에서 그 사령관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
"무엇을 하려고요?"
"당연히 제가 생각한 바가 있으니 백 대장님은 가능한 한 빨리 저를 대신해서 전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백기는 입을 오므리고 냉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나와 백기가 숨겨온 이어폰에서 동시에 샤오위에의 무심한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요."
"백기, 당신이 위치를 알고 있으니 그를 데려오세요."
"……"
이때 나는 샤오위에의 태도를 알 수가 없었다. 두문이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돌발상황에 대해서도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백 대장님, 시간이 아직 3분 남았습니다."
백기의 눈빛이 갑자기 굳어지자 그는 필사적으로 손바닥을 꽉 잡고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두문, 저를 한 번 믿어보세요."
"당신을 도울 수 있게 해주세요."
"백 대장님, 2분 남았습니다."
백기의 몸은 곧게 퍼져 있었다. 그의 눈에는 햇빛이 스며들었지만 옅은 먼지가 덮여있었다.
"1분 남았습니다."
"……"
"…… 제가 그곳으로 안내해드리죠."
몇 글자가 억지로 입에서 짜여져나왔다. 백기는 고개를 숙이고 늘어진 머리카락으로 내키지 않은 듯한 눈동자를 덮어버렸다.
한순간 끝없는 좌절이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왔지만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두문은 마치 답안이 그의 예상 안에 있는 것처럼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을 대비해서 미리 한마디 귀뜸해줄게요."
"저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즉시 신호를 보내고, 제 동료가 신호를 받은 즉시 동영상을 공개할 거예요."
두문은 휠체어를 움직여서 담담하게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그림자가 드리우는 방향으로 단호하게 움직였다.
"두문!"
나는 씁쓸하게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만약…… 우리가 4년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저희가 당신을 도울 수 있도록 할 건가요?"
휠체어가 느릿느릿 멈추었고 세상은 바람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나긋나긋한 그 되물음은 나에게 아무런 답도 주지 않고 석양과 잔해 속에서 조용히 흩어졌다.
*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교외에 우뚝 솟은 건물들을 점점 시야로 끌어들이면서 나는 몹시 낯익은 광경을 보고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곳은 내가 CORE 발사 실험을 받은 곳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멀리 모퉁이에 있는 건물에는 눈에 띄게 파손된 흔적이 있었다.
차에서 내린 후 나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백기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만 감았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여기로 옮겨졌네요?"
두문은 평온하게 앞에 있는 건물을 쳐다보면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휠체어를 움직여 천천히 나아갔다.
샤오위에 팀의 NW 대원이 문 양쪽에 서서 신원을 확인한 뒤 한 대원이 우리들을 문 안으로 안내했다.
*
끊임없이 돌아가는 회색 복도를 지나 마침내 우리는 결국 거대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누구보다 오래 기다린 사람이 있었다.
"당신이 나를 보고싶어 했다고요?"
32-9
백열등이 좀 눈이 부신 가운데 두문을 잠시 살펴보니 감회가 새로운 듯 보였다.
"당신의 모습은 예전과 별 다를 게 없네요."
"생각지도 못했네요. 당신이 책임자가 다 되었다니."
"그런가요?"
샤오위에는 서류철을 들고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두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데 전에 뵙던 적이 있을까요?"
두문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순간 굳어졌지만 그는 재빨리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살짝 웃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웃던 그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 방 전체에 가득 찼다.
분명히 웃고 있지만 슬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손톱을 손바닥에 대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온몸으로 떨었다.
샤오위에에게 두문은 수많은 실험자의 일원이었을 뿐, 즉 성공이나 실패의 코드명일 뿐이었을 뿐이었다.
피해자들에게는 평생동안 각인된 아픔들이 샤오위에에게는 무엇이였을까?
그가 이렇게 쉽게 잊어버리다니?!
나는 샤오위에의 무관심한 얼굴을 죽어라 쳐다보았고 거의 온몸의 힘을 다해서야 겨우 그의 앞으로 돌진하는 것을 참을 수가 있었다. 옆에서 자꾸 쌓여만 가는 우울한 분위기가 조용히 나에게도 백기에게도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샤오위에는 눈앞의 분위기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손끝을 들어 백기가 서있는 곳으로 살짝 다가갔다.
"당신이 저 사람들을 증인으로 뽑았다던데 가는 김에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줄게요."
"백 대장도 지금 NW 계획의 일원이고 프로젝트를 완성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선배가 NW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왜?
백기는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살짝 드러워진 속눈썹이 그의 눈에 있는 모든 어두운 감정들을 가렸다.
"그런가요?"
두문은 충혈된 눈으로 백기를 바라보았지만 믿어지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눈빛이었다.
잠시 후 그는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백 대장님, 그래도 아까는 못 믿어서 다행이네요."
그렇게 가벼운 말이었지만 날카로운 칼날처럼 마지막 밧줄을 단호히 끊어버렸다.
“……"
"……아니야! 선밴……"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그만 팔을 잡히고 말았다.
통증이 끊임없이 팔에서 들려왔지만 죽은 듯이 고요한 백기의 눈에는 마치 짙고 검은 물이 번져나오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백 대장님.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힘에 집착하고 당신은 그 중의 평범한 일원에 불과한 것뿐이죠."
두문은 담담하게 입을 떼고는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NW 대장님, 운 좋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찾으면 무엇을 하실 겁니까?"
"세상이라도 정복하시려고요?"
"괜찮은 질문이네요."
샤오위에는 조금 깊은 뜻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일찍이 능청스럽게 웃었던 얼굴보다는 좀더 진지해진 얼굴을 했다.
“당신은 사람에게 힘이 가장 필요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여러가지 답이 있을 거에요. 다만 우리 입장에서는 한 가지 이유만 있을 뿐이죠."
"나머지는 더이상 말하기 곤란합니다."
"이젠 사람도 만나고 대화도 했네요."
샤오위에는 조금도 온도를 띠지 않은 눈빛으로 두문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여기로 나타나기로 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겠지요?"
샤오위에가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칼같은 바람이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가면서 철판 바닥에 깊은 균열은 남겼다.
백기가 차갑게 앞을 쳐다보면서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샤오위에는 이 모습을 보고 두손을 벌리고 가식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백 대장님은 아직 모르지. 앞에 있는 이 '두 선생님'이 누구신지."
내가 잠시 멍하니 있자 백기의 눈동자도 저도 모르게 수축되었다.
이 순간 느리게 샤오위에의 웃음이 깊어지자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서류철을 백기가 있는 쪽으로 던져버렸다.
그냥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서류철은 아주 빠르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백기 얼굴 옆의 벽에 박혀버렸다.
"이 두문 선생님은 사실 GR 조직의 표면적인 우두머리인데다 이름도 가명이에요."
"제 말이 맞죠? 허화 선생님?"
"뭐라고요?"
나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비록 여러번 의심했지만 샤오위에의 단호한 말을 듣고 여전히 얼떨떨해졌다.
두문의 평온한 얼굴은 아무런 균열도 없었다. 마치 앞에 나타날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어떤 동요와 감정도 이미 오래전에 포기한 듯 보였다.
"저는 그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장관은 저를 두문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는 쳐다도 보지 않고 상체를 곧게 폈다.
"그들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지 않은 것 같네요. 그렇다면 다른 비밀은 말했나요?"
"예를 들어 '바늘통' 의 전파를 유도하고 박해를 받은 Evovler 들을 조직해 GR를 도와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는 건요?"
"흠…… 전에 지하철에서 죽은 아이의 이름이 뭐였죠, 손소남 씨 맞죠?"
"경기장의 폭발도 당신 작품이죠?"
"이번에 연모시 전체에 퍼진 혈액 바이러스가 당신들과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샤오위에의 말에는 즐거움이 느껴졌지만 두문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장관님은 더 빨리 조사하셔야 하실 겁니다. 지금 모든 Evolver에게 증상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당신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수혈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죠?"
두문이 태산처럼 안정된 얼굴을 하자 샤오위에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가볍게 흥얼거리더니 백기를 향해 두문을 가리켰다.
"백대장, 들었어?"
"당신이 이 범죄자를 동정한다고?"
나는 백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감히 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문은 폭력의 피해자인데…… 어째서 그 고통을 다른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지기 했을지.
샤오위에에게 대답한 건 또 다른 칼날과도 같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백기가 다음 순간에 휘두른 주먹에 몇 걸음 물러났다.
"당신들 모두 죄인이야."
"당신들이 한 일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고 미화될 수도 없어."
"나는 그를 동정하지 않아. 하지만 그가 입은 상처는 누군가가 그를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
"포기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백기가 한마디 한마디 대답이 짧을지라도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말했다.
"백대장의 말은 정말 정의롭고 늠름하네요."
"하지만 이건 장관이 가져야할 태도가 아니에요."
그는 차가운 눈으로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자 백기의 몸은 다움 순간 바로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 근육이 은근히 움직이더니 백기는 갑자기 몸을 숙이고 머리를 감싸고 무겁게 신음소리를 냈다.
"선배?!"
나는 황급히 달려가 백기를 부축했고 고통을 참는 백기의 얼굴을 보았다.
"당신 선배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있어야 했던 제재였을 뿐이에요."
그는 차갑게 우리 곁을 지나가면서 두문 앞으로 걸어갔다.
"좋아요. 저도 충분히 놀았어요."
"이제 이 소동을 끝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두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핏발로 가득찬 두문의 눈동자는 조용히 나와 백기를 훑어보고는 마지막에 샤오위에를 응시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연 씨, 백대장님. 당신들의 임무는 끝났으니 떠나셔도 됩니다."
"저는 그와 단독으로 할 이야기가 있어요."
32-10
"내가 거절한다면요?"
백기가 아래턱을 꽉 조이면서 힘겹게 말을 쥐어짜냈다.
"그러면 나는 신호를 보내서 동료에게 즉시 동영상을 공개하라고 할 거예요."
두문은 침착하고 평온한 표정을 지었지만 샤오위에는 눈썹을 치켜들고 홀가분한 얼굴을 했다.
"저 두사람을 데리고 나가."
샤오위에의 명령에 따라서 한 NW 대원이 우리 앞에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두문,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 당신이 그 사람들에게 설명해줘야 해요."
백기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면서 강렬하게 불쾌한 기운을 온몸으로 내뿜었다.
"당신이 원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NW가 필요한 것처럼!"
"저도 알아요."
"당신은 몰라요!"
오랫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마침내 이 순간에 드러났다. 백기는 이를 악물어 이마에는 핏줄이 살짝 튀어나왔다.
"원한은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더 많은 원한만 불러일으킬 뿐이에요."
"우리에겐 아직 갈 길이 많아요!"
"시간을 좀더 주세요. 제가 꼭 증명해 줄게요!"
다시 한 번 나는 백기를 보고 또 한번 손을 내밀었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으로.
"유연 씨, 그를 데리고 이 연구소를 떠나세요."
"다시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두문은 이순간 흐뭇한 듯 웃었는데 이때 샤오위에는 오히려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돌려 몇 마디 중얼거렸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백기의 싸늘한 손을 잡았다.
나는 이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아직 두문의 손으로 비극을 일으킬 수 있는 비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
대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무인가 함께 닫혔다.
우리가 NW 대원들을 따라 정문을 향해 걸어가자 곧 멀지 않은 곳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NW 대원 여러 명과 연구원들이 바쁘게 왔다갔다 하면서 서류나 자료 한 무더기를 손에 안고 엄숙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그 사람들은 정밀한 기기의 부품들처럼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도 나와 백기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무슨 일이 생겼나……"
눈앞의 모든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누군가와 뒤에서 부딪혔다.
"비켜!"
NW대원 한 명이 굳은 표정으로 우리 반댓편으로 초조하게 달려갔다. 나는 뒤돌아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일었다. 그는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달려간 것 같았는데 방금 샤오위에가 낮은 목소리로 부른 사람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두문은 우리에게 자신을 증명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는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서야 연구소에 와서 샤오위에를 만날 수 있었다…… 단지 그저 그런 대화를 위해서였다고?
"안 돼!"
백기는 나보다 더 빨리 반응하면서 갑자기 눈을 크게 떴고 복도 깊숙한 곳으로 뛰어갔다.
'쾅——'
커다란 폭발음이 갑자기 전방에서 울리면서 건물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급하게 벽을 붙잡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머리에서는 현기증이 났고 세상은 끊임없이 굉음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이게 두문이 한 거라고?
하지만 우리가 NW에 들어갔을 때 분명히 수색을 당했는데……?
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복도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멀리서 연구원들이 몸으로 책상 위의 기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확고하게 보였다.
나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고 백기가 향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
내가 빠르게 그 방에 이르렀을 때 입구에서 그의 모습을 찾았는데 백기가 방 한 구석에서 시퍼런 얼굴로 서 있었다.
주위가 온통 아수라장이었고 철벽은 폭발로 온통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NW대원이 백기의 발 옆에 누워있었고 지독한 피비린내가 순식간에 내 콧속을 가득 채웠다.
아까 우리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청년 같았다.
샤오위에 역시 어느정도 충격을 받은 것 같았고 몸에는 군데군데 터진 피와 찢어진 살이 경악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얼굴에 튄 핏자국을 태연히 닦아내고 있었다.
속속들이 들어온 NW 대원은 들 것을 들고 백기 발 옆에 피범벅이 된 사람을 데리고 나가자 그는 다시 바쁘게 내 곁을 지나갔다.
다만 이번에는 숨이 멎은 듯 보였다.
"보고합니다. 범인의 신체신호의 시작점을 추적하여 공범들을 모두 체포했다고 합니다."
"모든 동영상이 회수되었습니다."
샤오위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무심코 나를 한번 보았다.
"유연 씨는 왜 돌아왔나요?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나요?"
"두문은?"
입도 떼기도 전에 백기의 말이 차갑게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은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어둡고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배어있었다.
"폭파됐겠지?"
"Evol을 사용할 줄은 몰랐는데 아마 박스를 썼나봐?"
샤오위에는 눈을 치켜뜨고 경멸하듯이 웃으면서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위력이 대단했는데 백 대장이 날 도와줘서 고마웠어."
"당신이 그렇게 고상하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그 두 선생을 감동시킬 뻔 했을텐데. 그렇다면 그는 마지막까지 허점을 드러내지 않을 거야."
샤오위에는 끼어들었지만 내 손끝은 점점 차가워졌다.
"'그를 데리고 이 연구소를 떠나세요.' 그가 이렇게 말한 건 너희들도 같이 희생당하기를 원치 않았던 거겠지."
샤오위에는 비꼬는 말투로 말하고 있어서 귀에 거슬렸다.
나는 두문이 이 말을 한 후 샤오위에가 얼굴을 돌려 낮은 목소리로 말했던 그 때가 문득 생각이 났다.
설마 그 사소한 한 마디가 그의 신경을 끌었단 말인가?
"사람은 말이지, 마음이 약해서는 안 돼. 마음이 약해지면 빈틈이 생기잖아."
"정말 안타깝네요. 하마터면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킬 뻔 했는데."
그는 고개를 저었지만 얼굴에는 조금의 안타까움도 보이지 않았다.
내 몸은 충격과 분노로 억제할 수 없이 떨렸고 곁눈질로 검은 바람이 갑자기 치솟는 것을 보았다.
백기의 온몸이 검은 소용돌이로 둘러싸여 있어 온 공간이 순식간에 스산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사람의 목숨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얼음으로 얼어붙은 것 같았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텅 비어있는 분노로 가득했다.
"난 그냥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야."
“안타깝지만 연모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어."
"미래?"
백기의 목소리는 무섭도록 차가웠다. 터무니없고 가소로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두문이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수많은 두문이 탄생한 거야!"
32-12
"당신들이 무슨 근거로 누구를 희생시키고 누구를 구할지 결정한다는 거야?"
"그 사람들 모두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자신만의 삶을 가지고 있어."
"당신들의 이런 잘못된 방법은 영원히 미래로 이어지지 못하고 비극으로만 이어질 뿐이야!"
백기의 눈에서는 분노와 혐오감이 뿜어져 나왔다. 남아있던 바람들도 그의 말에 따라서 점점 짙어지고 검은 바람이 그를 휘감았다.
눈을 살짝 돌린 샤오위에는 손으로 헤드셋을 두번 두드리다가 웃음을 거두었다.
"백기,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너의 분노를 필요로 하지 않아."
"두문이든, 그 NW 대원이든."
"그 사람들 모두 자원한 거야. 알겠어?"
샤오위에가 턱을 살짝 치켜들면서 점점 백기 앞으로 다가가 그의 목덜미를 들어올렸다.
"네가 자원해서 스스로를 희생하고 이 도시의 사람들을 구하려는 것처럼."
"너는 왜 이런 때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거야? 그 사람들도 기꺼히 스스로 선택한 일을 하려는 거잖아."
"이 세상에서 너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오직 너만이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 자신의 신념을 이루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디 지껄여봐."
백기는 두 손으로 샤오위에의 손목을 매섭게 움켜쥐었고 칼과 같은 바람은 끊임없이 철벽에 흉악한 흔적을 남겼다.
"네가 독하지 못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거야."
"다른 사람을 희생해서는 안된다고? 웃기지 마."
샤오위에가 이를 악물며 웃자 걸쭉한 핏물이 그의 옷에 스며들었다.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의 목숨도 우리와 함께 무수한 피를 짓밟은 거나 마찬가지야!"
"뭐라고요……?!"
나는 내 귀에 들리는 말이 믿기지 않아서 멍하니 눈을 떴다.
살아남았다고?
선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숨을 죽이고 멍하니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새파랬고 얼굴은 경련을 일으키며 눈에는 핏발로 가득섰다.
하지만 그는 침묵만 지키고 귀를 찌르는 바람소리만 끊임없이 삼키고 있었다.
"나는 지금 NW 계획의 총책임자야.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나는 이 계획을 성공시킬 거야."
"이건 내 장관이 나에게 남긴 사명이니까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실행에 옮길 거야."
백기의 눈꺼풀은 무언가에 쏘인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살인자가 되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악인이 되든 나는 신경쓰지 않을 거야."
"나는 그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칠 거야."
샤오위에의 말은 차가운 벽과 같아서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영원히 나의 장관을 존경할 거고 그의 신념을 믿을 거야."
"나는 확실히 이 길이 향하는 미래를 볼 수 없지만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미래를 누구보다도 믿을 거야."
"나뿐만 아니라 NW의 모든 사람들이 그래."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경멸하듯이 손을 놓아 백기의 몸이 멍하니 제자리에서 굳어지도록 내버려두었다.
"너는 그분의 아들이니까 나는 네가 아직 나를 훈겨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흉포한 검은 바람이 순식간에 폭발하면서 소리없이 으르렁거렸다.
동시에 NW 제복을 입은 사람들 여러 명이 순식간에 벌 떼처럼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폭발한 기류는 매우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직진하면서 그 사람들을 매섭게 벽으로 던졌다.
나는 벽을 꼭 움켜쥐고 눈을 뜨려고 애를 썼다.
샤오위에의 결연한 얼굴이 곧 검은 바람덩어리 속에서 나타났다. 그는 나를 한번 바라보았지만 순간 나는 등이 싸늘해졌다.
그것은 물건을 어떻게 시험하거나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계산하는 것처럼 취급하고 관찰하는 모양새였다.
이런 불쾌한 눈빛은 그가 뒤에 있는 바람덩어리를 힐끗 보았을 때 뒤로 거두어들이고 입구 쪽의 연구원들에게 돌아갔다.
"그의 능력은 억누를 필요가 없어. 시시각각 능력 수치를 측정해서 후속 실험의 관찰과 기록으로 남겨둬야 해."
"유연 씨도…… 제 역할을 해봐요."
나는 머릿속에서 윙윙 소리가 나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샤오위에를 바라보았다.
"샤오위에, 당신은 미쳤어."
그는 못 들은 척 내 앞을 스쳐 지나가더니 닫힌 철문 뒤로 사라졌다.
바람이 끊임없이 심해지면서 공중에서 걷잡을 수 없는 궤적을 그렸다.
백기가 고개를 숙이고 제자리에 서서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선배."
갑자기 코가 시큰거려서 나는 그 검은 바람이 만들어낸 벽으로 가까이 다가서려고 했지만 바람벽은 소리없이 나를 거절했다.
"가까이 오지 마."
그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워서 자세히 듣지 않으면 바람 소리에 묻혀 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 한 번 이 말을 듣고는 나는 가슴이 아파서 하마터면 발을 똑바로 세우지 못할 뻔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칼과도 같은 바람이 내 옷을 찢고 날카롭고 작은 아픔이 내 팔과 다리 옆으로부터 느껴졌다.
"나한테서 떨어져! 내가……"
백기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백기는 마치 궁지에 몰려 발버둥치는 짐승처럼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듯 보였다.
"너마저 말려들게……"
"싫어요!"
나는 힘겹게 앞으로 걸어가면서 그 칼같은 바람이 내 앞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
"싫어!!!"
나는 다시는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더 이상 내가 어쩔 수 없이 그의 옆에 서 있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바람 소리가 마치 고통스러운 비명처럼 윙윙 소리를 냈다.
내 몸은 이미 감각을 잃었지만 나는 여전히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향해 걸어갔다.
마침내 나는 백기를 보았다.
제복은 이미 매우 거칠어져서 무수히 많은 긁힌 자국과 찢어진 틈으로 피가 스며들고 있었따.
그는 그저 텅 빈 채 망연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그의 앞으로 다가가 저도 모르게 수축된 눈동자를 보고 그를 껴안았다.
무슨 일이 있던지간에 백기의 생명이 정말로 희생 위에 세워졌다면 그는 누구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짊어지고서라도 살아야 한다.
그는 아마 끊임없이 자신을 질책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살아남은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닐 거야."
그의 두 손은 약간 떨리더니 천천히 내 허리에 감겼다. 뒤이어 백기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내 팔을 꽉 껴안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마침내 부판을 잡은 것처럼.
"선배, 이건 선배 잘못이 아니에요."
내 눈에선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여전히 단호했다.
"선배가 없었어도 누군가가 그 실험을 도와서 완성시켰을 거예요."
"두문의 죽음은 선배 잘못이 아니에요. 그 NW 대원의 죽음도 선배 잘못이 아니에요!"
"선배는 근본적으로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나는 폭풍 속에서 부서진 마음을 껴안으려 했다.
"선배는 아주 잘하고 있어요!"
"선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나는 얼굴을 들어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선배, 잊었어요? 선배는 한번도 혼자가 된 적이 없었어요."
"선배에겐 제가 있고, 한예준이 있고, 당조가 있고, 고진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선배 뒤에 있어요."
"선배가 힘들어하고 어쩔 수가 없을 때 우리가 선배의 힘이 되어줄거예요."
"선배가 필요하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저는 선배 앞에 나타날 거예요."
*
머리 위의 백열등이 갑자기 두 번 깜빡거리면서 갑자기 휘몰아치는 검은 바람 속에서 '탁' 하고 꺼졌다.
빛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백기의 심장 소리를 더욱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이마를 맞대면서 그의 숨결이 세상을 뒤덮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아."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백기의 목소리는 유난히 잠겨 있어 몸이 힘든 상태라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깰 때까지 계속 내 곁에 있어줄 수 있어?"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그의 두 팔을 꽉 껴안으며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는 항상 있었어요."
"고마워…… 내 곁에 와줘서."
중얼중얼 남긴 말은 아득히 먼 시간으로부터 이어져서 내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 몸을 덮었던 무게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백기가 마침내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람도 잠잠해졌다.
32-14
나는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백기를 안고 들어오는 NW 대원들을 죽어라 쳐다보았다.
"사령관님의 지시에 따라 백 대장님은 치료가 필요합니다."
나는 온몸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지만 여전히 이를 악물고 백기의 손을 잡았다.
"그래요. 하지만 저는 반드시 그 사람 곁에 있어야 해요."
"사령관님이 허락한 일입니다."
나는 아픔을 견디며 계속 백기의 곁에서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NW에는 확실히 여러 방면으로 우수한 사람들이 있어서 백기의 상처는 아주 빨리 치료되었다.
나는 나를 좀먹는 피로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백기의 상태가 잘 호전되자 우리는 장원의 방으로 옮겨졌다.
*
우리를 데려온 대원들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 사람들 입에서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더이상 묻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깊이 잠든 백기를 보면서 나는 길게 숨을 뱉었다.
몸의 핏자국은 이미 말라 있었고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윤곽이 뚜렷한 그의 얼굴에 빛과 그림자가 비춰지자 이전의 분노하고 괴로워하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불안한 악몽에 휩싸인 듯 잠을 자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당분간 깨어나지 못할 테니 당신들은 오늘 밤 여기서 쉬세요."
"내일 저녁에 이곳에서 축하연이 열리는데 그는 기대를 한껏 받고 있는 주인공이에요."
"지금 여기에는 아직 사람들이 없으니까 당신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여기있어야 덜 번거롭기도 하니까요."
대문에서 짜증내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고개를 돌아보기도 귀찮았다.
"당신들 그런 일을 벌였으면서 축하연을 열 자격이 있나요?"
나는 조금도 마음속의 혐오감을 숨기고 싶지 않았고 샤오위에도 자연히 나의 태도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NW계획이 기념비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니 당연히 축하해야죠."
"……NW 사령관님이 이렇게 한가할 줄은 몰랐네요."
내가 샤오위에를 바라보며 비꼬며 웃었다.
"지금의 연모시는 여전히 그렇게 많은 문제를 마주하고 있어요."
"그건 분명히 이 도시에 시시각각 영향을 주고 있을 텐데 당신들은 어쨰서 마음 편히 내버려둘 수 있는 거죠?"
"모두가 죽는다면 당신들의 그 장기적인 플랜이 또 무슨 소용이 있는데요?"
내가 차갑게 고개를 돌리자 샤오위에가 두손을 가슴 위에 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여전히 구름처럼 엷고 바람처럼 가벼운 얼굴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우리의 목표를 관철하는 거야.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의 '임무'고."
"그들이 우리의 결과를 믿고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지."
"결국 그렇게 돌아가는 게 이 세상이야."
"아무도 당신들을 기다리지 않아요."
샤오위에는 내 말을 듣고 깊은 뜻이 있는 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덜컹하고 문 닫는 소리에 나는 힘이 다 빠져서 백기 몸 위에 힘없이 엎드렸다.
백기의 손을 잡자 거기에서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배, 도대체 나 몰래 얼마나 억지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을 해낸 거예요?
저는 또 어떻게 해야만 선배의 마음 속의 상처를 모두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요?
가슴이 아파서 나는 손을 내밀어 백기의 잔 머리카락들을 털어내며 조금씩 찌푸려진 그의 눈살을 조금씩 쓰다듬었다.
"선배…… 어떻게 하면 선배를 도울 수 있을까요?"
나는 중얼거리며 피곤하게 눈을 감았다.
*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고 몸의 상처는 삐뚤삐뚤한 붕대로 감싸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배는 방에 없었다.
몸 구석구석에 통증이 천천히 찾아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선배 아직도 여기 있어요? 아니면 또 무슨 임무를 수행하러 간 건가요?
*
나는 복도 쪽에서 그 모습을 볼 때까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굼뜨게 생각했다.
선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계단에 앉아 넋을 잃고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석양노을은 부드러운 손처럼 창밖에서 들어와 그의 넓고 두터운 등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찬란하지만 눈부시지 않은 색깔을 칠했다.
나는 이 적막함을 뚫고 가야 할지 몰라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사실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선배는 언제 NW 계획을 받아들인 건가요? 혹시 선배에게 상처가 된 건 아닌가요?
샤오위에가 말한 '너만 살아남아'는 무슨 뜻인가요? 그 검은 바람들은 또 뭐예요? 선배 몸은 정말로 괜찮나요?
하지만 나는 말문이 막힌 듯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기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내 눈빛과 마주쳤다.
그의 눈에는 당황이 일면서 입이 약간 벌어졌다.
"……내가 정말……"
"사과하지 말아요."
나는 가볍게 그의 말을 끊고 그의 뒤에 있는 계단으로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갔다.
"선배는 잘 쉬었어요?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다리가좀 아파서 계단을 내려가기가 좀 힘들지만 선배 옆에 앉고 싶어요."
내가 그에게 미소를 짓자 백기는 멍하니 일어서서 나를 천천히 품에 앉았다.
귓가로 튼튼한 심장 박동 소리가 침묵으로 많은 아픔을 달래주었고 백기는 나를 조심스럽게 감싸면서 그의 옆 계단 위에 편안하게 놓아주었다.
"방으로 갈까? 너 상처가……"
"여기가 좋아요."
"그리고 선배가 방금 저를 안아줬을 때 조금도 아프지 않았어요!"
내가 웃으면서 머리를 흔들자 그의 눈빛이 살짝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미안하단 말도 하지 말고, 고맙다는 말도 하지 말고, 제가 여기서 선배와 함께 있게 해주세요."
나는 그의 허리띠에 수갑이 채워진 것을 보고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백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몸을 돌려 그것을 풀고 나와 백기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
백기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나고 눈에는 놀라움이 스쳤다.
"이번에는 풍령이 저를 대신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얼굴을 펴고 백기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금빛 찬란한 빛줄기 속에서 호박색 눈동자는 조금씩 따뜻한 빛으로 물들었다.
"선배가 이해하지 못한 말, 창피해서 못한 말들은 모두 저에게 맡겨주세요."
"우리 같이 고민해볼까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수갑으로 이어진 우리의 손을 흔들었다.
백기의 눈동자는 내 말에 따라 수축되었다. 그는 눈을 들어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부드러운 빛으로 도금된 수갑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순식간에 수많은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더니 그 순간만큼은 한없이 고요해졌다.
"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면 어떡하지?"
"그럼 제가 선배와 함께 침묵할게요."
한참동안 백기는 입가를 치켜들고는 가볍게 웃었다.
내가 오늘 백기를 본 순간부터 그가 처음 드러낸 미소였다.
그는 유유히 손을 내밀어 내 눈앞에 있는 머리카락을 스치더니 미련이 담긴 손끝은 내 볼에 닿았다.
"어째서 너 같은 사람이 내 곁에 있는 거야?"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마치 그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처럼 들려서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았다.
"선배가 백기라서요." (因为你是白起啊)
이것은 어떠한 사고도 필요 없는 답안이었다.
선배가 수도 없이 내 앞에 찾아온 만큼 나도 망설임 없이 선배에게 다가갈 뿐이다.
후회도 망설임도 하지 않을 것이다.
*
백기는 긴 한숨을 내쉬며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수갑을 채운 두 손을 꽉 잡은 채로.
우리는 계단에 서로 기대어 앉아서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두문의 행동은 근거가 있었어."
텅 빈 홀에 백기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렸다.
"GR은 처음부터……사람들의 가슴 속에 있는 원한과 아픔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였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자신이 시간이 없으니 그 사람도, 그 사람들도 기다릴 수 없다고 했어."
"아마도 그들도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고자 하는 갈망을 잘못 짐작한 것 같아."
"그 '그들'이 가리키는 것은 GR인가요?"
"두문이 그들의 명백한 책임자인 이상 이번 행동은 틀림없이 심사숙고를 거쳤을 거야."
"그는 분명 자신의 무모함으로 그토록 많은 공을 들여온 노력을 망치게 하지 않았을 거야."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전히 온화한 얼굴을 하던 남자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도 계획 속에 있었을까?
두 다리를 잃고 인생이 거의 망가진 사람은 비극에 의해 탄생하고 비극을 창조하며 결국엔 자신을 비극으로 전락시켰다.
나는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긍정적이었다.
"선배, 저는 선배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잘못된 방법은 영원히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비극으로 이어질 뿐이에요."
백기는 내 팔을 끌어안고 살짝 조이더니 한참 후에야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좌절했었어."
이 한마디에도 그는 무척 애를 쓰는 듯 했다.
이 말을 던진 후 세상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제자리에서 기다렸다.
"나는 내가 무엇에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 사람들 마음 속에서 그 사람이 그렇게 가치 있는 사람일까?"
"그런 사람이 그 사람의 신임과 인정을 받을 수 있던 걸까?"
백기는 그가 누구인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대충은 알고 있었다.
Golden Apple2의 기억 화면 속에서 백기의 긴장된 얼굴이 떠올랐다.
뒤에 있는 그는 평소의 날카로움과 오만함에서 벗어나 마치 이 순간만큼은 고집스럽게 답을 얻고자 하는 평범한 소년일 뿐이었다.
"나는 내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 또 어쩌면……"
"그는 근본적으로 나에게 어떤 기회도 준 적이 없었다는 걸."
나는 가슴이 찡해서 눈을 내리깔았다.
미풍이 가볍게 우리의 머리 끝을 스치면서 소년의 오랜 쓰라림을 날려 주었다.
나는 감히 그더러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계속해서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백기도…… 보통 사람이었다.
아마 많은 근심과 갈망은 이미 긴 세월 속에 묻혀져 먼지 구석에 가려져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는 그 목표를 위해 아마 여러번 노력했을 것이며 남들 모르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을지라도 갑자기 어느 짧은 순간에……
그는 여전히 그 사람이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할 것이다.
시간은 상처를 희석시킬 뿐이지만 진정으로 아물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증명하러 가요."
나는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실은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사람의 품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아마도 선배는 사실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만약 시간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스스로 창조했을 것이다.
내가 단호하게 백기를 쳐다보자 그는 짧고 긴 침묵 뒤에 입꼬리를 끌어당겨 쓴 웃음을 지었다.
"아마…… 그런 기회는 없을 거야."
32-15
마지막까지 백기는 나에게 그 말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방으로 데리고 가서 일찍 쉬록 당부한 뒤에 떠났고 나도 너무 피곤해서 깊이 잠들었다.
다음날 깨어났을 때 몸에 갑자기 따끔거리는 통증이 찾아왔다.
"헉!"
내가 아파서 몸을 웅크리자 이마에는 식은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전신을 휘감고 지나가는 이런 통증은 기계 상자를 사용했을 때와 아주 비슷했다.
'똑똑'.
"연아, 있어?"
나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며 문을 열었다. 나를 보는 순간 평온하던 백기의 눈살이 갑자기 찌푸러졌다.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상처가 아직도 아파?"
나를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서둘러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그냥 머리가 좀 어지러운 거에요. 집에 가서 좀 누워 있으면 돼요."
"저녁에 선배가 축하연을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요."
내가 미안해하며 그를 쳐다보았지만 백기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건 별거 아니야."
차가운 빛이 눈을 스쳤지만 나와 마주친 시선에서는 따뜻함이 번졌다.
"병원에 가볼까?"
"저 정말로 괜찮아요. 병원에는 지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더 힘들지도 몰라요."
*
30분 후에 백기가 차를 몰고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는 침대 옆에 서서 여전히 좀 불안하다는 듯이 나를 살펴보았다.
"정말로 괜찮아?"
그가 또 허리를 굽히려는 것 같아서 나는 급히 손을 흔들면서 안심시키는 김에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백 형사님. 사람이 늙어간다는 말을 계속하시네요."
"이틀 동안 누워있으면 다 나을 거예요! 정말로!"
"……그럼 푹 쉬어. 무슨 일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 줘."
"알겠습니다."
나는 경례하는 시늉을 하면서 그에게 검지를 내밀었다.
"백 형사님이야말로 그 검은 바람들……"
"안심해, 괜찮아."
더이상 알아채기 싫다는 듯 백기는 내 말을 아예 잘라버렸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내 방식대로 철저하게 조사를 해봐야겠어.
"선배가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예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처럼 느껴져서 입을 삐죽거렸다.
선배도 이점을 깨달은 듯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갈게."
그의 그림자가 시야 끝에서 사라지면서 나는 억지로 버티고 있던 웃음을 마침내 지우고 고통스럽게 침대에 쓰러졌다.
*
어둠이 내리자 금빛 찬란한 공원에서는 여러가지 예복을 입은 남녀들이 가득 모여있었다.
제복을 벗자 그들은 차가운 가면을 벗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고 생동감 있어 보였다.
백기는 특수파견서 제복을 입고 구석에 서서 모든 시선을 무시했다.
이때 한 중년이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참지 못했는지 옆으로 숨어서 피곤한 듯 어깨를 비틀었다.
백기는 그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대방도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평화롭게 웃었다.
"백 대장님, 뭐 어쭤보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당신도 백곤(白焜; 백개비)과 같이 일한 적이 있나요?"
중년은 분명히 멍한 얼굴을 했지만 재빨리 눈을 몇 번 깜빡거리며 허리를 굽혀 어깨, 팔을 천천히 폈다.
"그럼요. 그 장관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제 영광입니다."
"그런가요."
"질문에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기는 차분에게 답변을 남기고 술잔이 오고가는 사람들을 지나 샤오위에 앞에 도착했다.
"백대장님이 저하고 할 말이 있으신가요?"

샤오위에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백기를 바라보았지만 백기는 쟁반 위의 술병을 슬쩍 집어들었다.
"샤오 장관님께 술 한 잔 올리러 왔습니다."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눈부신 빛으로 반짝이며 그는 한 손에 주머니를 꽂고 잔에 천천히 술을 따르는 동시에 무심코 눈을 치켜들었다.
"이 도시와 당신들이 말하는 미래가 당신들의 거대한 야망을 담을 수 있길 바랍니다."
백기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보이지 않는 압박이 있었다.
"백 대장님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어요. 결국 '일은 사람 하기에 따라 달렸으니까요'."
"특히 백 대장님의 실험 성공은 저희에게 많은 자신감을 더해 주었습니다."
샤오위에는 말하면서 시선을 백기 몸에 한바퀴 두른 뒤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백대장님은 꽤 회복한 것 같네요. 어제 연구소에서 당신의 Evol 수치가 또 새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윈-윈하는 결말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되네요."
백기의 눈빛은 조금 더 차가워졌지만 미약한 입술에는 한기가 스며드는 듯 했으며 술을 따르던 동작도 멈추었다.
"샤오위에, 너와 돌려서 말하기 귀찮아."
"나는 제야에 일어난 일에 대해 계속 조사할 거야."
백기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단호하게 샤오위에를 바라보았다.
"나는 감춰진 비밀들을 찾아낼 거야. 더 큰 비극이 벌어지더라도 발생하기 전에 막을 거야."
"너희들이 소위 말하는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야."
"만약 어떤 사람이라도 연모시의 평화를 파괴하려고 한다면 나는 허락하지 않을 거야."
*
말을 마치자 백기는 술병을 옆으로 놓고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샤오위에는 잠시 멍해 있다가 곧 웃었다.
"자, 백 대장님이 이렇게 솔직해진 이상 저도 한 가지 물어볼게요."
"CORE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백기는 덤덤한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파괴했어."
샤오위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저는 믿지 않아요."
"비밀이 있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걸로 보이네요."
"안그래요, 허 교수님?"
백기는 얼떨결에 샤오위에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검은색 정장을 입은 허묵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샤오 장관이 무슨 말을 한 지 모르겠네요."
허묵의 말투에는 온기가 없었고 시선은 백기에게 멈추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백 대장님의 실험이 무사히 끝난 것을 축하한다는 말을 잊었네요."
그는 백기 옆에 있는 빈 술잔을 훑어보더니 싱겁게 웃으며 귀뜸해주었다.
"하지만 음식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신경쓰는 편이 가장 좋아요. 백 대장님은 아직 혈액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테니까요."
허묵이 바이러스 이야기를 꺼내자 술을 마시던 샤워웨이가 한바탕 움직였다.
"허교수님. 진척은 있으신가요?"
허묵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최종적으로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번 바이러스의 확산 경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할 거라고 봅니다…… 그만큼 더 악의적이기도 하고요."
*
어지러운 가운데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끊임없이 밀려왔고 추위와 열기가 번갈아가며 내 몸을 휘감았다.
어렴풋이 나는 꿈을 꾸었다.
한 소녀가 순백의 공간에 서 있었는데 그녀의 그림자는 매우 희미했지만 또 나에게는 더욱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픔을 참고 앞으로 걸어갔다. 물이 퍼져나가면서 천천히 모이는 것처럼 그녀의 그림자는 점점 선명해졌다.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