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의역 많음
29-1 아주 사소한 고집
나는 곧 샘플 필름의 심사 결과를 받았다.
"……통과가 안됐다고요?"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말을 되뇌었다.
"실례지만 어떤 부분이 문제일까요?"
"유연 씨 지금 홍보실로 와주실 수 있나요? 저희 역시 면담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내가 의기소침하게 전화를 끊고 사무실을 나가자 자연스러운 척 문 앞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표님, 저희가 찍은 샘플 다 보셨나요?"
모두가 기대하는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니 방금 전에 받은 심사 결과를 입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홍보실에 잠깐 다녀올게요. 그분들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고 해서요."
"걱정 마세요. 우리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으니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나는 모두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격려했다.
*
나는 서둘러 홍보실에 가서 정중하게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 오세요."
*
문 안에서 남성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내가 생각없이 문을 밀어젖히자 양기준이 책상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차가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안녕하세요. 유연 씨."
"안녕하세요."
다시 되돌아온 이 세상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와 만났다.
그로 인해 일어난 예전 세상의 모든 일들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어떤 일들은 이미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제가 연모시 재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입니다. 유연 씨가 이렇게 여기까지 방문하셨으니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는 앞에 있는 컴퓨터를 돌리면서 우리 회사에서 건네준 샘플 영상을 화면에 띄웠다.
"괜찮은 샘플입니다. 당신과 당신네 팀이 아주 훌륭하게 작업해냈어요."
"하지만 나타나서는 안되는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화면이 갑자기 어떤 글자에서 멈췄다.
'제야의 변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
"4년 전 한정된 범위 내에서 일어난 Evolver 폭동이었지만 진압 방식으로 인한 여파가 큰 사건이었습니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쉽지만 없애는 건 아주 어려운 법입니다."
"이 점은 이번 프로그램을 촬영한 당신이 저보다 더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같은 때에 다시 거론하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을 뿐이죠."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제야의 변화' 에 대해서 전혀 묘사하지 않았고, 촬영된 것도 모두 그 당시의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이에요."
나는 몸을 곧게 펴고 그가 주시하고 있는 것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지금은 4년 전 상황과 아주 비슷해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4년이라는 시간을 써서 도시가 천천히 평화와 안정을 되찾도록 도왔어요."
"평화를 깨는 데에는 하나의 총알만으로도 충분하지만, 평화를 유지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에요."
"프로그램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건 평화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선택해야 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노력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럴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말한 이야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으면서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냉정하게 내가 말한 이유를 공기 중에 녹여 버렸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삭제하더라도 프로그램의 취지에는 영향이 크게 가지 않겠습니까?"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프로그램의 완전성이 깨질 겁니다……"
"저희도 저희 나름대로 고려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가 조용히 내 말을 끊었다. 심판관은 차분하게 오싹한 빛이 감도는 칼날로 나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당신 스스로 '창작의 예술성'을 고집하시겠다면 저도 이 프로그램의 방영 가능성을 다시 따져봐야할 것 같네요."
"물론 전 여전히 이 프로그램의 내용을 아주 좋아합니다. 방송 이후에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믿어요."
"당신이 제 뜻을 이해할 거라고 믿습니다."
물론 나는 그의 말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
'제야의 변화'를 남겨두려면 이번 방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홍보실 로비로 나와 새로 개관한 건물을 돌아보았다.
연모시 재건 프로젝트의 중점 지표의 한 곳으로, 일반인과 Evolver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은 모두 이곳에서 와서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었다.
이 도시가 재건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지금, 나는 이 도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나의 개인적인 고집은 이런 거대한 정세 속에서 너무나 사소해보였다.
타협도 당연한 선택인 것처럼 보였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들어보니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고진 씨였다.
"유연 씨, 바쁘세요?"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시간에 쫓기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좀 바빠요. 오늘까지 수정해서 심사에 보낼 프로그램들이 좀 있어서요. 끝나면 시간이 날 것 같아요."
"알겠어요. 그럼 일 끝나고……"
"우리 쪽 대장님과 데이트할 시간 있으세요?"
29-2 갑작스런 데이트
회사로 복귀한 뒤, 기존의 표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심사평대로 조정해보기 위해 메인 편집을 맡고 있는 시아 오빠와 의견을 나눴다. *의역
"먼저 전에 쓰지 않던 장면을 몇 개 골라서 넣어볼게. 대사 중에 언급된 부분은 어떻게 처리할까?"
"그냥 잘라내고, 내가 다시 인터뷰해서 쓸 수 있는 대사들을 찾아볼게."
"나는 우리의 취지가 최대한 지켜지길 바라고 있어요."
만일 방송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
*
5시간 후, 시아 오빠와 내가 편집실에서 나가보니 밖에 퇴근하지 않고 마지막 편집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걱정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지친 상황에도 따뜻한 마음이 감돌았다.
"됐어요, 수정된 필름은 사람을 불러서 보냈으니 이번에는 큰 문제가 없을 거예요."
"빨리 집에 가서 주무세요!"
*
샘플이 홍보실에 배달된 것을 확인한 나는 마침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사무실은 조용하고 회의실의 화이트보드에는 각종 취재 자료와 메모들로 가득했다.
이 순간 뜻밖에도 굉장히 안정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단단하게 땅을 밟고 있는 감각은 오랫동안 받지 못했던 것 같았다.
*
나는 웃으면서 가방을 들고 회사 정문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특파서를 향해 가는데 고진 씨가 곧 눈에 띄었다.
"고진 씨, 왜……"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할게요."
*
내가 더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나를 곧장 특파서 내부에 있는 선배의 사무실 문 앞까지 밀고 나아갔다.
고진은 먼저 시치미를 떼고 문을 두드렸고 방안에서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문을 밀고 들어갔다.
*
"백 대장, 퇴근하고 데이트 하러 가야지."
"고진, 말했지, 난……"
백기는 정신산만한 책상을 앞에 두고 고개를 들었고 성가시다는 눈빛이 나를 스치는 순간 놀라움으로 휩싸였다.
그리고는 곧 매서운 눈빛이 고진을 향했다.
"너 그녀를 왜 찾아 간 거야?"
왜인지 좋지 않은 사무실 분위기에 나는 입을 오므리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
백기의 냉담한 질문에도 고진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데이트 하러 가야하니까 퇴근하라고."

"……" 백기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손에 쥔 사인펜을 살며시 닫고 책상 위에 두고는 침착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미안해. 고진이 너에게 폐를 끼쳤네."
"난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서 우선 너를 먼저 집으로 데려달라고 할게."
"전……"
"너 지금 며칠동안 사무실에서 살고 있는 줄 알아? 네 일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야."
이 말을 듣고 나는 어리둥절하며 선배를 쳐다보았다. 선배 눈밑의 다크서클이 어슴푸레 보이는 것 같았다.
설마 선배가 며칠 동안 퇴근하지 않았다느는 건가?
최근 특파서 쪽으로 가해지는 압박이 아주 크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재건 프로젝트는 물론이고, 최근에 발생한 사냥꾼 게임을 포함해서, 관련된 악질 사건들을 모두 수사하고, 모든 진행 상황과 결과를 공개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복잡하고 은밀한 사건들이 한데 겹쳐져 있으니 틀림없이 적지 않은 부담일 것이다.
고진은 직접 앞으로 걸어가서 두 손으로 책상 위의 서류를 내리쳤다.
"너야말로 지금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잖아?"
"그래서? 조사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이젠 나를 사무실에서도 내보내겠다고?"
"내가 못하게 한다고?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를 쳐다보고 있는지 알아?"
고진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삐죽 내밀고 있는 자신의 입꼬리를 억지로 위로 올리려고 애썼다.
"지금이 어느 때인지 잊지 말라는 거야."
"또 지금 네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아직은 네가 일깨워줄 필요가 없어."
백기는 이를 악물고는 간신히 말을 짜내는 듯 보였다.
그가 냉정하게 일어서서 고진을 뚫어지게 쳐다봄과 동시에 목젖도 함께 미끄러졌다.
곧 그는 초조하게 눈길을 피하더니 즉시 외투를 집어들고는 나를 이끌고 사무실을 나갔다.
"유연아, 가자."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는 유난히 손가락에 힘을 주고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조금만 입김을 더 불면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나는 말없이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
특파서 정문을 나와 모퉁이를 돌다가 뭔가 음흉해 보이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
우리를 보고 놀란 그는 백기에게 시선을 가져가더니, 그가 내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재빨리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자꾸만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백기를 바라보았다.
백기는 이미 익숙한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담한 표정만 지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그 사람이 나타난 덕분에 유난히 조급하게 걷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녁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가볍게 스치면서 계속해서 힘껏 쥐고 있던 손가락이 느슨해졌다.
"유연아, 미안해."
"고진이 생각없이 나몰래 널 불렀네."
그가 입가를 치켜 올리자 모든 감정을 다 뽑아낸 것처럼 평온한 이름의 가면만 남았다.
"집까지 바래다 줄게."
이런 선배가 좀 낯설어서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지난번에 급하게 만난 뒤부터 좀처럼 그를 만나지 못했다.
간만에 그와 만났으니 지난번 그와 했던 약속과 그가 언급한 CORE의 행방에 대해 물어봐야만 했다.
"그럼 절 집에 데려다 주고 어디로 갈 거예요?"
내가 이렇게 묻자 그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자조하며 웃기 시작했다.
"집에 가야지."
"아니면 어딜 가겠어."
그가 가볍게 또 한번 웃고는 내 손을 잡고 앞으로 가려고 했지만 나는 제자리에 서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망설였지만 나는 이런 선배가 걱정이 되었다.
"나온 김에 우리 데이트나 할까요?"
29-4 진퇴양난
사실 나도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저 백기를 이끌고 거리를 걸었다. 머나먼 하늘에서부터 구름은 찬란하게 타올랐고 부드러운 빛이 도시 주위로 내려앉으면서 점점 밝아지는 가로등이 분주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가는 길을 밝혀주었다.
센터 체육관을 지나갈 때 백기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나도 뒤돌아보았다. 커다란 크레인이 석양 빛을 받으며 매달려 있었고 귀를 울리는 전기 드릴 소리도 이따금씩 먼 곳에서 들려왔다.
이전의 폭탄 테러로 인해 폐쇠되었던 경기장들도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담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으면 벽을 뛰어넘는다." 라는 큰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몰래 백기를 바라보니 조금도 안정되지 않는 불안정한 감정들이 그를 계속해서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선배, 가고 싶은 곳 없어요?"
내가 이렇게 묻자, 그는 무언가 망설이는 눈치로 입을 오므리고 아래를 보았다.
"왜 그래요? 선배가 가고 싶은 곳에 가요! 제가 데리고 갈게요!"
한참 후, 그는 마침내 고개를 들고 굳은 결심으로 가득찬 호박색 눈동자를 하고 말했다.
"새로……지은 기념비 광장에 가보고 싶어."
*
엄숙한 기념비 광장 한복판에는 크고 광활한 흰색 기념비가 서 있었다. 비석 한면에는 이름들이 조용히 새겨져있고 다른 면에는 글자가 없었다.
비석의 두 면은 '바늘통' 사건부터 시작해서 악질적인 사건에 휘말려 사망한 모든 희생자들을 함께 기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 사람들에게는 이 기념비는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어슴푸레 들려오고 새하얀 국화꽃이 저녁 바람에 흩날리며 침묵으로 그리움을 하소연하고 있었다.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이 너무 미약해서 이렇게 평온하고 그리움에 휩싸여있는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가 있는 곳을 쳐다보고는 옆에 있는 사람들과 속삭였다.
“저 사람들은……?”
“전에 기자회견에 참석한 적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내 얼굴을 알고 있어.”
“최근에 이런 일들이 아주 잦아.”
선배의 이런 말에 사연이 있는 것처럼 들려와서 나는 잠시 멍해졌다. 아마도 그는 처음으로 기념비 광장에 왔을테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백기는 조용히 앞을 응시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들은 모두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야.”
백기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가볍게 울리면서 가슴이 쥐어짜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내가 선배더러 자신을 탓하지 말라고 해도 선배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배가 구한 사람들도 많아요.”
나는 광장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선배에게 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은 바로 이 광장에도, 우리가 방금 지나온 경기장 옆에도 있었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 속에서도요.”
백기가 내 말에 고개를 돌리자 머나먼 곳에서부터 가득히 넘쳐 흐르는 저녁빛이 서서히 그의 눈동자를 밝게 비추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 죄책감을 가지실 수 있어요.”
“하지만 선배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아셔야해요.”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볼을 가볍게 매만졌다.
“고마워, 유연아.”
“사실은……”
“거기! 거기 너 말이야 너! 내가 부르고 있잖아!”
적막하던 광장 한가운데에 갑자기 성이 난 목소리가 울리면서 한 소년이 빈 맥주병을 손에 들고 백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분홍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교복 겉옷을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불량 고등학생 같았다.
“너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온 거야?”
그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방금 선배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고 있다는 게 생각났다.
어쩐지 일이 커질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당신들이 언급한 방사능 사건 때문에 돌아가셨어!”
“애초에 네가 기자회견에서 범인을 잡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 네가!”
“뭐하나 잡힌 사람도 없는데 여긴 왜 온거야? 대체 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봐봐! 근데 여자랑 데이트할 시간은 있다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소년의 울부짖는 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분노와 억울함이 하늘 저편에 제멋대로 타오르는 구름과 한데 어우러져 침묵으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태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오해와 시기만 깊어질 뿐이다. 백기는 소년을 조용히 쳐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사건은 아직 조사 중인만큼 수사 진행 상황과 결과를 가장 먼저 공개할거야.”
“네 여자친구가 헛소리 하는 걸 들었어! 차라리 우리 일반인더러 살 자격이 없다고 말해버리라고!”
“Evol 특경이라고? 내가 보기엔 넌 Evolver를 위해 봉사하는 것 같은데?”
“너희들은 지금 모든 사람들이 평안하게 보내고 모든 일들을 없던 일로 하고 평화롭게 생활하기를 바라고 있는 거 아니야?”
그는 빈 맥주병을 높이 들고는 땅에 세게 내동댕이쳤다.
“너에게 알려줄게, 난 절대로 그렇지 않아!”
“세상의 모든 Evolver는 다 나가죽어야 해!”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바닥에 울러펴지자 백기는 피하지도 않고 숨지도 않았다. 유리조각은 백기의 볼을 스치면서 옅은 혈흔을 남겼다.
“선배……!”
침묵하는 시선이 갈수록 많아지는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소년이 호소한 건 바로 지금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이었다.
특파서는 피해자들에게 합당한 결과를 주지 않았기에 소년의 공격적인 행동은 이해되고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특파서 행동대장인 백기는 기념비 앞에서 공공연히 일반인과 충돌해서는 안 된다.
만약 상대하지도 않으면 거만하고 무례해보일 수도 있고 또 소양이 부족해보일 수도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고요하게 일관하고 있는 백기를 바라보았다.
굴러떨어지는 핏방울이 그의 옆태를 타고 턱 주위까지 내려왔다.
“말해보라고!”
늦어지는 대답에 더욱더 화가 난 소년이 오른팔을 들어올리는 순간 백기의 목소리가 덤덤하게 들려왔다.
“만일 네가 지금 주먹을 휘두른다면 네 할아버지처럼 소리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길지도 몰라.”
29-6 깨지기 쉬운 희망
순식간에 주위의 공기에 압력이 가해지는 것처럼 소년이 들어올리려던 팔을 막아버렸다.
“변명하지 마!”
(*의역)
“특파서에서 합당한 결과를 내놓지 않았으니 우린 마땅히 시민들의 분노를 감내해야만 해.”
백기는 진지한 태도로 말하면서 소리를 살짝 낮추고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지금 연모시 전체가 재건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만큼 모든 희생이 어제에 그치고 더이상 싸움으로 인한 비극이 없었으면 해. 모든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의 일원이고, 동시에 모든 개개인이 집단 전체의 입장을 대표해."
"너는 Evolver를 미워해도 돼. 그게 네 권리야."
"그렇지만 네가 지나치게 충동적으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소동이 일어날만한 상황을 조성하게 된다면 점차 안정되고 있는 지금의 정세를 파괴하게 될 거야."
"그렇다면 네 할아버지처럼 이유 없이 희생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겠지."
백기는 이미 마음속으로 수없이 생각한 것처럼 한마디 한마디 온화하고도 솔직하게 말을 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정세이며, 미래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인내하고 억울해 하면서도 지켜내야 하는 정세였다.
그가 마주보고 있는 사람이 소년이라고 해서 그는 건성으로 대하지 않았다.
"Evol 특경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너에게 장담할게. 방사능 사건의 배후를 잡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진상을 낱낱이 알리겠다고."
그 소년이 우두커니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허공에 들고있던 팔을 천천히 내리자 나는 안도감이 들었다.
소년은 거칠어 보이지만 할아버지와의 이별로 슬퍼하고 또 백기의 말에도 귀를 귀울인다면 철이 든 아이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고개를 들고는 팔을 휘둘러 주먹으로 백기의 얼굴을 때렸다.
"!"
"됐다고 해! 꺼져버려!(ㅈ까라고 해!)"
"우리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잖아!"
그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고통스럽게 흐느끼며 하소연하는 그로 인해 현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침통한 듯 고개를 숙였다.
"대체 왜 내가 다른 사람의 미래를 신경써야 해? 이 도시가 어떻게 되든 우리 할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는데!!"
장내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저녁 바람은 한숨을 쉬는 것처럼 광장에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불어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백기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소년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의 판단 아래, 그가 선택해야 했던 결과였을 것이다.
"주먹은 괜찮지만 방법이 틀렸어."
백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들더니 예상 외로 웃어보였다.
"네가 화를 낸 건 우리 특파서를 믿기 때문이지."
"우리는 당연히 내놓아야할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어. 그러니 너나 여기 계신 그 어떤 분들도 화를 내는 건 당연해."
마지막 말에 백기는 단단하면서도,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회피하지도 않고 움츠러들지도 않고 담담하게 소년을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 용감하지만 잘못 말한 부분이 하나 있어."
"네가 신경써야 하는 건 다른 사람의 미래가 아니야."
"그건 네 자신의 미래야."
백기는 쪼그리고 앉아 소년이 바닥에 내동댕이 친 맥주병 조각들을 주웠다.
석양은 청록색의 파편에 금빛을 한겹 도금하였다.
백기는 깨어진 마음들을 움켜쥐는 것처럼 조각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특파서가 기필코 너에게, 그리고 네 할아버지에게, 이 기념비에 있는 이름이 적혀진 모든 사람들과 또 이름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려줄게."
"내 목숨을 걸고 너에게 보증할게."
*
"미안해, 방금 전엔 놀랬지."
"전 괜찮아요, 선배는……괜찮아요?"
나는 선배의 부어오른 오른쪽 얼굴을 안타깝게 쳐다보았지만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입을 움직였다.
"별거 아니야."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처럼 대답하고는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비탈길로 걸어갔다. 때마침 하교시간과 퇴근 시간이어서 적잖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요리하는 냄새가 온 거리에 가득했다.
고등학생들은 낡은 운동장 바닥에 가방을 던져놓고 농구를 했다.
방금 전의 선배는 그런 예민한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마주하고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사람에게 그 어떤 빌미도 주지 않았다.
명령을 엄격하게 수행하는 기계처럼 빈틈없고, 숙련되며, 침착했다.
전혀 문제될 게 없었지만 오히려 나는 그래서 더욱 괴로웠다.
한 바퀴 둘러보니 근처에는 우리가 앉을 의자가 별로 없는 것 같아 옆쪽 난간까지 달려가서 앉고는 선배를 향해 손짓했다. "
선배, 우리 여기에 잠깐 앉을까요?"
찬란하게 불타는 노을 아래에서 선배와 나는 오솔길 난간에 앉아서 즐겁다는 듯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주위를 가득 메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배는 이 세상에 Evol이 없기를 바라세요?"
"나에겐 별 차이는 없어."
"Evol이 있으니 Evol 특경이 됐지만. Evol이 없었더라면 그냥 보통 특경이 됐을 거야."
"사람들의 손에는 언제나 힘이 있어. Evol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해."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뒤덮으면서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불길이 그의 눈에서도 타오르는 것 같았다.
"사실 아까 그 아이가 부럽기도 했어."
그는 유난히 괴로워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무거운 족쇄가 그의 온몸을 단단히 감싸고 천천히 그의 날카로움을 깎아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지금 선배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 걸까?
내 손가락이 손바닥 안에 닿았다. 이런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반드시 무슨 말을 해야할지는 잘 알고 있었다.
"선배, 제가 최근에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을 찍었는데 '제야의 변화'를 언급해서 심의에 통과하지 못했어요. 그 사람들이 '제야의 변화'에 관한 내용을 모두 삭제해야만 프로그램이 방영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저는 결국 받아들였어요. 선배는 잘했다고 생각하세요?"
선배는 눈을 깜빡거리고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틀린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다.
그는 나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름모를 무언가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속으로 꾹 삼키고, 침묵하게 했다. 농구공이 골대에 들어가고 환호성이 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지금 연모시 전체가 이렇게 평온한데 선배는 도대체 무엇에 대해 신경쓰고 있는 걸까?
나는 순간 멍해졌다.
연모시가 평온한가? 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분명 연모시 재건 프로젝트는 시작되었을 때부터 가지각색의 공격과, 추적과 위협을 받았다.
진행 중인 재건 프로젝트는 분명…… 수십 개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 중에 있는데 어떤 언론사나 플랫폼도 누군가 고의적으로 프로젝트를 방해하고 있다고 보도하지 않았다.
나는 즉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멀리 경기장의 높은 외관으로 '연모시 재건' 이라는 다섯 글자가 붉은 깃발 위에 높이 솟아 있었다.
"선배, 설마 지금 연모시에서……여전히 공격적인 사건들이……많이 일어나고 있나요?"
바람이 갑자기 날리면서 나뭇가지에 새로 나온 나뭇잎들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맞아."
29-7 먼지가 덮인 칼날
(ㅇㅅㅇ... 흐린눈 하고 본 챕터)
"허위 정보 유포자가 309명, 비방과 협박, 위협, 악의적으로 타인을 상해한 자가 93명."
"불법 무기 및 유해 물질 소지자가 64명."
"원인 불명의 사망자가 4명."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털어놓는 듯한 그의 말은 굉음이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이전에 절벽 산장에서 폭탄을 터뜨리려고 했던 사람, 회사에 협박 편지와 허위 동영상을 보낸 사람, 그리고 나를 불법 촬영하고 미행한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들 말고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재건 프로젝트의 진행을 막고 있었던 거였다.
"그 사람들이……GR의 사람들이라는 건가요? 아니면 BS 출신?"

순간 비웃음으로 가득한 웃음이 울리면서 스스로를 비웃는 듯한 미소가 백기의 얼굴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그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아, 그저 평범한 연모시 시민일 뿐이야." (떨고 있는 듯한 디렉팅와 연기 굳)
"평범한 회사원, 신념 있는 교사, 미성년인 학생, 공공장소에서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불법 촬영하고 유포하는 무직자야."
"……"
서서히 가슴에 맺혀오는 알 수 없는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선택을 하고 있었다.
분명 어떤 자세로 이 도시의 미래를 맞이할 것인지 선택하고 있는 거였다.
"……왜 이런 소식들을 통제해야 하는 거예요?"
"'이상적인 도시'로서…… 갖추어야 할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그가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저 하늘 멀리서 붉게 타오르는 하늘이 그의 옷자락을 태웠다.
"'희망'은 조성될 수 있어."
"모두가 도시를 원상태로 회복하고 삶이 지속되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 재건 프로젝트는 그 사명을 완수해낼 거야."
"나머지는 특파서와 경찰의 노력에 맡기면 돼."
어렴풋이 선배가 타오르는 불꽃 속에 녹아내려 삼켜진 것처럼 순식간에 투명해진 것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선배의 손을 잡고 손바닥의 차가운 온도를 느꼈다.
"비밀리에…… 사람을 잡을 수밖에 없어도, 선배는 그런 악질적인 사건들을 정상적으로 수사하실 수 있는 거죠?"
"가능하지만 내가 갈 수는 없어."
선배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잡고 무엇인가 힘주어 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특파서 대표라서 일거수일투족이 쉼없이 주목받고 있어."
"만약 내가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각양각색의 낙인이 붙을 거야."
"특파서도 마찬가지야."
"사전에 발생한 악질적인 사건들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너무 서두르다 보면 계속 눈여겨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어쩌면 Evolver 관련 범죄는 비밀리에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될 거야."
"그렇게 초래된 여론은 지금 서서히 안정되고 있는 정세에 영향을 주게 될 거야."
"헛소문을 퍼뜨린다면 그 사람들을 잡으세요!"
내가 화가 나서 말을 내뱉자 선배가 치켜뜬 눈을 보고 그의 뜻을 곧 깨달았다.
특파서든, 홍보실이든, 모든 사람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네가 다음에 말하게 될 사람이 누가 될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바람이 살며시 그의 눈썹 끝을 스치며 호박색 눈동자 속으로 숨어 들어, 속으로 발버둥치고 있는 그가 애써 참고 견디고 있단 사실을 감추었다. 그때 나는 마침내 백기의 몸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도대체 무엇인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전과 다름없는 '커다란 정세' 였다.
(원문은 ‘대국’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잘못을 저지르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가 목소리를 내어 상황을 조성하기를 바랬다.
백기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당연히 이렇게 해야한다.
아마 그도 수없이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풀이해왔을 것이다.
조급한 마음과 감정의 억제는 계속해서 높아져만 가는 괴로움과 함께 더욱 뚜렷해졌다.
나는 일어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백기를 바라보며 그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었다.
"……!"
"선배, 그냥 하세요!"
백기는 눈앞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리둥절하며 그저 눈만 크게 떴다.
"선배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게 옳아요."
"선배는……백기잖아요."
나는 그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조바심을 내면서 그의 손을 잡고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 제멋대로라는 걸 알지만요. 선배, 저는 항상 선배를 부러워했어요."
"선배는 제가 감히 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고 선배의 태도를 고수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어떤 유언비어도, 어떤 비방도 신경쓰지 않고, 자신과 상관없는 시선과 평론에도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꿋꿋이 자신의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나가는 사람이잖아요."

나는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그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알려주고 싶었다.
"선배가 그게 옳다고 믿는다면 하세요."
"저는 그런 용기도, 그런 능력도 없어요. 오직 선택할 수 있는 부분에서만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하지만 선배는 달라요." 선배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또 이 세상에 마모되어서도 안 돼요.
내 말에 선배의 동공이 저절로 수축되면서 세상은 침묵에 빠지고 바람소리만 남았다.
"사실 난 두려웠던 거였어."
"무엇인가 잘못될까봐, 그리고 그걸 만회할 시간이 없을까봐 걱정했어."
고요한 가운데 그는 입가를 살짝 올리고 내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면 반드시 실패한다는 걸 잊어버렸어."
백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마 남지 않은 석양빛이 그의 몸에 떨어지면서 그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
마치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무언가가 그에게로 되돌아와 겹겹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쇠사슬을 다시 쪼개면서, 그의 숨통을 자유롭게 한 것처럼 그는 똑바로 서 있었다.
그는 내 이마에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대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유연아. 이제 내가 뭘 해야 할지 알겠어."
29-9 형태가 없는 족쇄
선배의 모습은 황혼 속으로 사라졌고 나도 다음날 홍보실의 전화를 받았다.
저녁 8시, 《기적의 발견》의 오프닝이 제시간에 방영됐다.
화면 속에서는 익숙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우린 이미 잘 기억하고 있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재잘재잘 화면을 보면서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화면 속의 서체는 여전히 문제가 있고, 저쪽 음향도 좀 느린 것 같다면서. 이러한 장면에 눈시울이 시큰해져서 휴대 전화 대화창을 열어서 주기락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제 프로그램이 오늘 방영돼요.'
그가 볼지는 몰라도 내가 내린 선택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
프로그램 반응은 좋았고 부정적인 여론도 거의 없었다.
그 중에는 프로그램의 이상화(理想化)에 대해 비꼬는 평도 적지 않았지만 나는 이게 그 종착지를 향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웹 페이지를 클릭하고는 '특파서'에 대한 키워드를 검색했다.
대부분 특파서가 아직 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재촉에 대한 글이었고 그 외에는 다른 특이사항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안심하고 회사를 떠나 특파서로 갔다.
앞서 Zehn에게 붙잡힌 스토커는 Evolver로, 상황이 특수하기 떄문에 내게 후속 조사에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
"이건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입니다. 떠나신 후에 공개석상에서 너무 지나치게 많은 묘사는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적극적인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특경의 듬직한 말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아마 이런 말들을 귀찮은 기색 없이 여러 번 해왔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고 나는 복도를 따라 나섰다.
이때까지도 선배가 바쁠 거라고 생각해서 당분간 그를 방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선배에겐 저녁에 다시 전화해볼까……”
내가 중얼거리던 찰나, 복도 쪽 끝방에서 무척이나 맹렬한 굉음이 들려왔다.
(효과음)
내 앞에 있던 특경은 나를 방 안으로 홱 밀어넣었다.
복도 바깥의 모든 특경들은 순간적으로 몸을 굽히며 복도의 벙커와 벽 안으로 뛰어들고는 재빨리 권총을 빼들었다.
“북 4 구역 습격이 의심되니 전원 경비.”
‘찰칵’
문을 열리는 순간 이런 바깥의 상황을 인지한 듯한 한 사람이 허둥지둥 방 밖으로 나왔다.
“저예요!”
“……”
“습격 아닙니다!”
당조는 그 어떤 이유도 말하지 않았지만 복도에 있는 특경들을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즉시 제자리로 돌려보내기에는 충분했다.
당조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무심코 내 시선과 마주쳤다.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머뭇거리면서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유연 씨, 백 대장님이 돌연 움직이셨는데 혹시 당신과 관련이 있나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내가 모르는 곳에서 선배의 움직임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천천히 주먹을 꽉 쥐었다.
“맞아요. 제가 선배에게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길 바란다고 했어요.”
그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한숨을 내쉬며 피곤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래요, 어쨌든 백 대장님은 자기 생각대로 움직였어요.”
“따라오세요.”
당조를 따라 들어선 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소규모 훈련장이었다.
문 부근에는 특파서 제복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남녀 가리지 않고 점잖게 서 있었다.
몇몇은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궁금증을 품고 나를 쳐다보았지만 결국엔 시선을 서서히 거두어들였다.
'쿵——‘ 갑자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몸에 부상을 입은 두 사람이 마치 분풀이를 하듯 상대방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매우 날쌔고 까다롭게 공격을 하고 있었다.
선배와 고진 씨가…… 싸우고 있다고?!
“당조 씨, 이 상황은……?”
“싸움이요.”
“……”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고진이 오른쪽 주먹으로 가슴팍을 가격당했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약간 움츠리며 일어서더니 바로 중심을 낮추고 긴 다리로 쓸어버렸다.
그 각도는 때마침 백기의 사각지대였다. 백기는 의식하며 경계하려고 했지만 곧 동시에 주먹이 그의 왼쪽 얼굴을 강하게 가격했다.
“……!”
고진은 사정없이 백기의 동작이 경직되는 순간을 노려 그의 가슴팍을 가차없이 발로 걷어차면서 백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밥 안 먹은 거야? 어서 일어나!”
고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차갑게 백기를 바라봤다.
백기는 냉정하게 피가 나고 있는 코를 손등으로 쓱 문지르고는 일어섰다.
“힘들면 한 손으로도 상대해줄 수 있어.”
그러자 백기는 고진의 말에 답하지 않고 몸을 굽혀 빠른 속도로 주먹을 휘둘렀다. 온 몸이 쉽사리 풀리지 않을 분노로 똘똘 뭉친 것처럼 보였다.
고진이 막아내는 순간 그는 무릎을 들어 옆구리를 쳤다.
하지만 백기의 수법을 익히 잘 알고 있는 고진은 살짝 뒤로 피헀고 백기가 미처 방어하지 못한 그 순간——
그는 백기의 팔을 잡고 한바퀴 회전시켜 그를 어깨 너머로 내던졌다.
“그렇게 대단한 놈이!”
그는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백기의 옷자락을 잡고 그의 얼굴을 자신의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얼마나 많은 눈들이 너를 주시하고 있는 줄 알아?”
“그때 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네가 BS 빌딩에 몰래 숨어들어간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됐을 것 같아?!”
“그때가 되면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거야! 더이상 지휘관 노릇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지휘관?!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옆에 있던 당조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늘어져 백기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더니 곧이어 고진의 머리에 힘껏 부딪쳤다. 고진이 고통스러워하며 손을 놓자 백기는 떨어지는 그 순간에 발을 들어 그의 복부를 걷어차는 동시에 그 관성을 이용해 왼손을 바닥에 받치고 재빨리 일어났다.
그리고는 고진이 일어서려고 하자 주먹으로 그의 왼쪽 얼굴을 가격했다.
“나는 지금까지 지휘관이라는 자리에 신경써본 적이 없어.”
“내가 오늘까지 노력했던 건 어떤 사람이 되려고 했던 게 아니야!”
그는 분노에 차서 이를 악물고 한 손으로는 고진의 옷깃을 들어올렸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악질적인 사건들이 마무리가 되기를, 연모시의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내가 배후에 있는 그 사람들을 잡을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려줄 수 있을 거야!”
“내가 하면 되잖아!”
목에 푸른 힘줄을 세우고 핏발이 가득 선 눈을 한 고진이 백기의 손목을 붙들었다.
“정말로 너의 그 *개인 영웅주의는 이미 참을만큼 참았어!”
(중궈에서는 어떤 의미인지 찾아보니깐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큰 듯?)
“너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라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줄 알아?! 형제들도 수사하고 있잖아?”
“그럼 사람들은!” (ㄹㅇ 빡친듯한 디렉팅)
백기의 목소리는 무섭도록 차가웠다. 화가 나서 뽑아낸 칼날처럼 매섭고 또 날카로웠다.
“이렇게 많은 날이 지났는데, 방사능 사건의 배후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양평과 유주임의 살인범이 누군지! Evolver 암살 사건이 누군지!”
백기는 이 시점에서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 바람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쉴 새없이 울렸고, 자꾸만 몸이 투명해지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 범위도 커져만 갔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일단 시작한 이상, 다시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조급함, 불만, 분노…… 모든 감정들이 전부 한데 얽혀 짙고 탁한 검은 물이 되어 그를 향해 쏟아졌다.
“너희들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잡은 사람 있어?” (듣자마자 피가 싹가시는 디렉팅 덜덜덜)
말소리가 끝나자마자 그는 진노를 가득 머금은 주먹이 자신의 얼굴에 세게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훈련실 전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고진이 담담하게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야 백기, 다시 한 번 말해 봐.”
*야는 원래 없는데 분위기상 그래야할 것 같아서 추가함.
이전의 노성보다는 가볍게 울렸다. 마치 금이 잔뜩 간 유리구슬처럼 툭 건드리기만 하면 곧바로 깨질 것처럼.
나는 선배가 벽에 기대어 앉아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진은 틀리지 않았고, 선배 역시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인지 고진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피가 나고 있는 코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몸을 돌아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도 모르게 수축되어 있는 동공은 아마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한 것에 대해 의식한 탓일 것이다.
“방금은 화가 나서 한 말들이니 모두 마음에 두지 말고 이 문을 나서면 방금 전의 일들은 없었던 걸로 치자.”
그러면서 고진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말없이 함께 방을 나섰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선배는 여전히 그곳에 기대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다가가 마음 아파하며 쪼그리며 앉았다. 직위와 책임감이야말로 사실 가장 무거운 족쇄이다.
때로는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다.
나는 지금은 어떤 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백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연아,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29-10 풍경의 속삭임
나는 선배를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가서 고집을 부리며 한동안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모든 것을 정리한 후에 그는 일어서서 나에게 차가운 빛의 금속 수갑을 건네주었다. 그 수갑 위에는 빨간색의 금지 표식이 새겨져있었다.
“생각해 볼 시간이 좀 필요해.”
“집에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부족해.”
사실 이렇게 된 이상 선배에게 밥은 어떻게 먹고, 또 어떻게 푹 쉬는지 묻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모두 목이 메여서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도 선배의 뜻은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가 충분히 조용히 있을 만한 공간이 필요했다.
나는 쭉 공중에 붕 떠 있는 그의 두 손을 바라보면서, 이 순간 더없이 고요한 방 안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그의 두 손을 잡았다.
“선배, 잠깐만 기다리세요!”
*
이 말과 함께 나는 거리의 잡화점을 찾아 빠른 걸음으로 뛰어 나갔다.
“안녕하세요, 여기 풍경 있나요?”
나는 단념하지 않고 열심히 근처에 있는 여러 가게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한 여행 기념품 가게에서 작은 풍경을 하나 샀다.
*
나는 집으로 달려간 후,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는 선배의 시선을 받으면서 구매한 풍경을 창턱에 걸었다.
부드러운 봄바람에 파란새들이 살랑살랑 날아올랐고, 풍경은 맑고 깨끗한 방울 소리를 냈다.
“비록 저는 여기에 없지만 이렇게 바람이 불어올 때 풍경이 저를 대신해서 선배에게 이야기를 해줄 거예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면 풍경에게 물어봐도 돼요.”
“어떻게 물어보면 돼?”
백기는 그 자그마한 풍경을 보고 살며시 웃었다.
“생각해볼게요……여기 아래에 있는 파란새를 밀면서 말하는 거예요. ‘유연아, 내가 이래도 될까?’”
“만약 풍경이 짝수로 울린다면 괜찮다는 거예요.”
“만약 홀수로 울렸다면 안된다는 거예요.”
“이해하셨어요?”
간만에 살며시 입가를 올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선배를 보고 나는 살짝 안심하고는 내가 감싸고 있어서 진즉 온기가 생긴 수갑을 만지작거렸다.
“선배, 기억하세요. 저는 선배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선배 앞에 나타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걸.”
*의역
“절대로 선배만 노력 중인 게 아니에요.”
“알아.”
호박색 눈동자에 미소가 만개하면서 그는 나에게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진 씨에게 사과하는 것도 잊지 마세요.”
“그럴게.”
*
그는 눈을 감고 온종일 바닥에 앉아 있었다.
세상이 맑고 투명해지고, 낮게 울리는 풍경 소리가 방 안의 유일한 소리가 되었다.
그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봄바람을 따라 간 것처럼 보였다.
조각 구름층이 그의 주위를 뒤덮었고 온 도시가 그의 발 밑에 있었다.
그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유가 가슴 속에 가득히 차 있는 것처럼 몸이 홀가분했다.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처럼.
‘댕——‘
별안간 청아한 풍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
그 순간 숨을 헐떡거리며 눈을 뜬 백기는 자신이 여전히 거실 바닥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자 아이가 손목에 채운 수갑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넋을 잃고 멍하니 두 손을 들고 차츰 옅어지고 있는 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풍경이 울리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사라졌을까?
이미 몸에 힘이 다 빠진 상태인데도 그는 원치 않다는 듯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백기는 손가락을 구부려 무언가를 꽉 쥐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손바닥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은 그가 사라질 때가 아니었다. 온몸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바닥을 걷는 느낌을 상상하며 이를 악물고 풍경이 걸려있는 앞으로 걸어갔다.
투명해진 손가락이 풍경의 파란새를 계속해서 뚫고 지나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손을 뻗었다.
수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유연아, 나에게 시간을 좀더 줘.”
거의 투명해진 손가락이 공기에 동화되는 순간, 손가락이 파란새에 닿으면서 풍경이 살짝 흔들렸다.
‘댕——‘
‘댕——‘
그 순간 온기가 천천히 몸 속으로 흐르면서 그는 정말 그녀의 손에 쥐여진 것처럼 느껴졌다.
백기는 숨쉬는 것도 잊고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에 맺혀있던 모든 의심과 고민이 순식간에 걷어졌다.
그는 도박을 하고자 했다.
지금, 그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응당한 처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무수한 단서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고 그 전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보이던 글자들이 한데 모여 점점 뚜렷해지고 분명해졌다.
그의 마음에 응답하듯 바람이 살며시 지나가면서 다시 풍경을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울리자 백기는 설핏 웃었다.

그는 무언가를 깨닫고 외투를 걸치고 종이와 펜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작별 인사 없이 떠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할 것 같았다.
백기는 고개를 살짝 들어 멀리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마치 멈춘 것처럼 아스라이 7년 전의 자신과 겹쳐보였다.
이 복잡하고도 단순한 감정을 어떻게 펜끝에 담아 너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다신 너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백기가 멍하니 생각하는 동안 바깥의 하늘에 모여있던 구름들이 흩어졌다.
긴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펜을 들었다.
*
백기는 편지지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바닥에 방치되어 있는 수갑을 바라보면서 휴대전화기로 전화번호를 하나 눌렀다.
"고진, 지금 수갑 차고 있어. 와서 좀 도와줘."
"누가 너에게 수갑을 채웠건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전화기 너머로 '뚜뚜뚜'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기는 서두르지 않고 일어나 문을 연 뒤 눈을 감고 베란다에 기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으로 발자국 소리가 황급하게 들려왔다.
고진이 열려져있는 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내팽겨져 있는 수갑을 보고 아무런 말이 없더니 옆에 앉아 있는 백기를 바라보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니 결국 백기마저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피차일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진, 너에게 말할 계획이 있어."
29-12 때늦은 편지
선배와 헤어진 후, 그를 계속 걱정했지만 지금은 그를 믿어줘야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나만의 방식으로 그를 돕기 위해 눈앞에 있는 연모시를 안정시킬 수 있을만한 방법을 다분히 찾아내야만 했다.
정리해놓은 방송 데이터를 켜놓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 가운데에는 '이택언'이라는 이름이 떠있었다.
"아직도 회사인가요?"
"맞아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방송 데이터가 있어서 좀더 힘써보려고요. 왜 그러세요?"
전화기 너머에서도 서류가 넘겨지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택언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방송된 당신의 프로그램 봤어요.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더군요."
"……대표님, 설마 저에게 전화한 이유가 절 칭찬하기 위해서였어요?"
"끊을게요."
나는 전화기 너머를 향해 헤헤 웃으면서 흐뭇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괜찮나요? 사실 아직 부족하다고 느낀 부분이 많아서요."
"알고 있으면 다음에 좀더 개선하세요."
"저도 알아요!"
입을 삐죽거리며 허공을 향해 투덜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택언에게 물어보고 싶은 일이 생각났다.
"대표님, 일반인과 Evolver 과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사치들이 중요시하는 건 투기죠."
이택언은 긋고 있던 펜을 멈추고 의자 등받에 몸을 기댄 듯 보였다.
"현재 상황으로 판단했을 땐, Evolver의 존재가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언제나 이런 선택을 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내 마음속에 가라앉으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일반인과 Evolver가 공존하는 때가 이익이 가장 극대화되는 때라는 생각을 하게 해드리겠어요."
이 답안이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듯이 가볍게 웃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부터 들려왔다.
"처음처럼 겁이 없던 모습을 조금은 되찾았나 보네요."
"큰소리만 치지 마세요."
이택언과의 전화를 끊고 나는 씩씩하게 총결산보고서를 모두 써내려갔다.
내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태세를 가다듬으려고 이택언에게서 받은 기계 장치를 꺼냈다.
이미 사용이 된 박스를 몇 번이고 살펴보니 이전에 머릿속에서 보았던 흰색 무늬가 떠올랐다.
만약 그게 정말 일반인을 Evolver로 만들 수 있다면 박스 안의 물건이 높은 확률로 CORE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선배 말론 CORE가 자기 손에 있다고 했는데 설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CORE가 여러 개가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CORE 말고도 Evol 유전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다른 요인이 있다는 건가?
머리는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지만 내가 놓친 정보가 판단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작스레 전화벨이 재차 울렸다. 이번에는 알 수 없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였다.
"접니다."
나는 어리둥절하다가 전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이 프로그램 촬영 전에 나와 대화를 나누다 스스로 자신이 GR과의 소통을 맡고 있다고 했던 사람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죠?"
"상부에서 당신이 급히 참여해야 할 임무를 알려줬어."
"누군가가 CORE를 찾아서 오늘 밤 기념비 광장 앞에서 파괴할 계획이라는 말이 있어."
누가 CORE를 부순다고? 그건 선배의 손에 있다고 했지 않나?
나는 놀랐지만 티가 나지 않게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 아닌가요?"
"……물론 좋은 소식이지만. 그건 이 소문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있어. 그러니 가서 사실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지."
*
집결 장소와 시간을 듣고는, 눈앞에 있는 기계 장치를 보면서 일어나 회사를 뛰쳐나갔다.
정문을 나서자마자 생각지도 않은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백기는 차가운 달빛 아래 정문을 등지고 계단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그가 이미 오랜 시간동안 이곳에 서 있었던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내 발자국 소리가 들렸는지 선배는 몸을 살짝 돌리며 입가를 치켜 올렸다.
"선배 왜 여기에 서 있는 거예요?"
"아까까진 일에 대해서 생각 중이었는데 방금 너에 대한 생각을 하자마자 네가 내려왔어."
달빛이 조용히 그의 몸에 내려앉으면서 그가 한결 부드러워보였다.
그는 눈을 살짝 내려뜨리고는 손을 들어 외투 주머니에서 밀봉한 편지 봉투를 꺼냈다.
"전에는 기회를 놓쳤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직접 너에게 건넬게."
나는 멍하니 편지 봉투를 바라보았다. 세상이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한없이 고요했다.
나는 우물쭈물대며 손을 뻗었다.
이미 수없이 이것의 무게에 대해 상상은 했었지만 정말로 받아보게 될 줄은 몰랐었다.
원랜 이렇게 가벼웠구나.
내가 물끄러미 고개를 들자 선배는 미소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왜……"
"내일 다시 열어봐, 그럼 이유를 알려줄게."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가슴 위로 받쳐들고는 마음이 찡해져서 선배에게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선배, 방금 전에 누가 CORE를 찾았다고 들었어요. 기념비 광장 앞에서 파괴할 거라고 하던데요."
"소문이 빨리 퍼진 것 같네."
밤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모처럼 단정하게 매여진 넥타이를 달빛 아래에서 높이 휘날렸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그 소문은 내가 퍼뜨린 거야."
*
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광장 구석에 도착해 방금 전에 선배가 말했던 말을 떠올렸다.
*
"이 작전은 정보를 흘릴 때부터 이미 시작됐어."
"우리는 정보의 흐름 속에서 정보를 읽고 전달하는 모든 사람들을 추적하고 감시할 거야."
"이번 소각 작전으로 '이목'을 끌면서 내가 낚으려는 건 그저 대어 한마리만이 아니야."
*
백기가 기념비 광장 중앙에 서 있는 이 순간, 거대한 기념비는 침묵하며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별들이 반짝거렸지만 그 어떤 유성우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외투 속 주머니에서 새까만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틈 사이로 다채로운 빛이 숨을 쉬는 것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며 어두운 밤빛 아래에서 화려하고도 눈부신 아우리를 발했다.
……저기 안에 있는 게 CORE인가?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머리를 살짝 내밀다 순간 다른 그림자 너머로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머리가 차가워졌다.
오늘밤 이곳을 찾아온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가 보다.
백기는 그 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기념비를 향해 세 번 경건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고인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하면서 기림)
갑자기 불어오는 밤바람의 영향을 받아 상자가 번쩍번쩍 빛을 내는 빈도가 더욱 늘어났다.
"이걸 중심으로 모든 분쟁이 발생했으니 당신들을 증인삼아서 이걸 없애버리겠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맹렬하게 그의 손아귀로 모여들면서,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상자를 베어버렸다——
삽시간에 검은 그림자가 백기의 뒤에서 나타나 비수를 휘두르면서 그에게 돌진했다.
백기는 예상이라도 한 듯 살짝 옆으로 피하면서, 상대방의 손목을 잡고 몸을 뒤로 젖히면서 무릎을 비틀어 등뒤로 바싹 붙이자 관절이 나가는 소리가 고요한 밤을 깨뜨렸다.
"다음."
백기가 도발하자 순식간에 얼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게 뒤덮인 검은 그림자들이 동시에 광장에 우르르 나타났다.
"……이 사람들은?"
CORE가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정보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백기는 이 점을 이용해서 CORE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을 끌여들였다. 어쩌면 정말 뜻밖의 답을 얻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BS 사람일지도 모르니 서두르지 말고 좀더 지켜봐." (GR 간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택언은 이 일과 관련된 소식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에 나는 여전히 이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광장 전체가 스산하고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백기는 눈앞의 형세가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이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은 그의 가장 충실한 사냥개가 되어 그의 뒤에서 맹렬하게 포효하고 있었다.
"일부러 연막을 친 거야."
백기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속에 서 있었다. 계속해서 허공에 걸려 있던 검은 상자는 끊임없이 빛을 발하면서 그의 그림자를 더욱 비추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나와."
"그럴 필요 없습니다. 백대장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한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푸른 머리카락이 어두운 달빛에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Dionysus."
나는 눈을 크게 뜨고 Dionysus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정갈한 외투를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넘어왔다.
"여러분 앉아서 얘기해도 될까요?"
29-13 자신을 칼날로 삼다
백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계단 위에 올라서서 턱을 살짝 들어 앞에 있는 불청객을 흘겨보았다.
Dionysus가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발걸음하며 계속 앞으로 다가오자 백기는 갑자기 손목을 살짝 비틀어, Dionysus를 향해 칼날같이 날카로운 바람을 휘둘렀다.
칼날같은 바람은 그의 볼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 즉시 눈에 띄게 날카로운 핏자국을 남겼다.
"너——!"
"난 쓸데없는 말이 싫어."
백기는 그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몇 번이나 칼날같은 바람을 Dionysus의 몸 위에서 발까지 빈틈없이 휘날렸다.
백기가 칼날같은 바람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한걸음씩 다가가자 Dionysus는 힘은 없어 보였지만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먼 곳에 있던 폐기물들이 떨면서 윙윙 소리를 내더니 다음 순간 모든 금속들이 일제히 흡수되면서 광장 한복판에 있는 백기에게로 날아갔다.
"!"
심장이 순간 빠르게 뛰었지만 다행히 백기가 곧바로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휘두르자 갑자기 소용돌이치는 구름들이 공중에 나타났다. 쏜살같이 날아가던 금속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서 마치 보이지 않는 짐승이 씹어 삼키는 것마냥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 금속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바람으로 만든 그물 속에서 재빠르게 몇 바퀴 돌았고 거대한 힘이 두갈래로 갈라지면서 공중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칼날같은 바람이 매섭게 금속을 잘랐고, Dionysus의 발끝에 떨어지면서 깊은 균열을 새겼다.
잘린 수많은 금속들은 백기의 발 양쪽에도 가로로 어긋나게 꽂히면서 차갑게 부딪치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백대장님은 얼마 전에 일어난 방사능 사건의 진짜 원인이 알고 싶지 않나요?"
"당신이 흥미만 있다면 제가 당신에게 내부 정보를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백기는 눈앞의 사람을 차분하게 쳐다보더니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입을 벌려 들릴 듯 말듯 소리내어 비웃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신비한 상자를 위로 가볍게 던지고 또 손에 꼭 쥐었다.
"좋아."
"재미만 있다면 이 상자를 당신에게 주지."
그는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다른 사람들도 노리고 있다는 물건이라는 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차갑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다.
"아 참——"
그는 무슨 생각이 났다는 듯 목소리를 높게 키우며 광장 전체에 들리도록 쩌렁쩌렁 말했다.
"당신 BS 소속 맞지?"
백기의 질문은 Dionysus가 화가 나게 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곳은 내가 있을 만한 곳이 못 되지."
"그렇지만 내겐 확실히 내부 정보가 있어. 그러니 장소를 바꿔서 이야기 해보는 건 어때?"
"여긴 내가 선택한 장소야. 아직 네가 지휘할 차례가 아니야."
Dionysus는 인내심이 바닥난 듯 화가 나서 백기에게 다가갔다.
그가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광장에 총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탄흔은 Dionysus 발밑으로 살벌하게 새겨지면서 그의 앞길을 막았다.
놀랍지 않다는 듯 백기는 손에 들고 있는 상자를 들고 Dionysus를 향해 경멸로 가득 담긴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는 당신과 말하고 싶은 맘이 없는 것 같은데."
백기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남겨진 탄흔을 보면서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방금 사격을 명령한 GR 간부를 남몰래 노려보았다.
"저격수는 계속 숨어서 다음 명령을 기다려."
Dionysus는 이를 갈며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더니 냉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금속 덩어리들이 공중에서 밀집하면서 장벽을 이루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그가 금속을 방패 삼아서 저격을 막으려고 해! 백기가 저 상자를 BS 사람에게 넘기게 해선 안 돼!"
"전원 준비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가 숨어있는 장소로부터 누군가가 광장 주위로 연막탄을 던졌다.
주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수많은 인원이 총기를 꺼내 백기와 Dionysus쪽으로 돌진했고 나 역시 한숨을 내쉬며 이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광장에 순식간에 끊임없이 총격 소리가 울려 퍼지자 나는 황급히 짙게 피어 오르는 흰 연기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백기를 향해 다가갔다.
숨도 돌리기 전에 짙은 연기 사이로 GR의 사람들이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심장이 심장 밖으로 뛰어나올 것처럼 놀란 나는 황급히 마취총을 꺼내 횃불의 안개 속에 숨어 백기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향해 끊임없이 쏘아덌다.
"짜증나——사람이 너무 많아!"
분노로 가득한 바람이 계속해서 미친듯이 몰아치면서 사람들은 한쪽으로 방치되었고 광장의 연기도 바람의 영향으로 점점 사라졌다.
눈을 똑바로 뜨고 보니 백기가 쓰러뜨린 사람들 중에는 이택언에게 쫓겨난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이 사람들 모두 스스로 원해서든 아니었든 Dionysus 수하로 들어온 걸로 보였다.
보일듯 말듯한 연기 사이로 선배의 몸도 마치 바람과 하나가 된 것처럼 투명해졌다.
"……선배?!"
내가 반사적으로 두 발을 앞으로 내디뎠지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선배가 갑자기 사라진 탓에 머리가 멍해진 나는 그 순간 다른 쪽에서 백기가 이미 다른 사람과 맞붙어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설마 이건 선배의 새로운 기술인가?
나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백기와 싸우는 사람을 똑똑히 보고선 가슴이 철렁했다.
그 사람은 늘씬한 키에 무표정한 사람으로 긴 칼을 들고 있었다. 비록 평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진 할아버지의 이공간에서 나를 NW감옥으로 강제 이송한 시공계 Evolver였다! 그렇단 말은 이곳에 NW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무겁고 묵직해보이는 도검 한 자루를 가볍게 휘둘렀다. 백기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보였지만 그는 백기가 들고 있는 상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백기는 빠르게 공격을 피하면서 사방에서 달려드는 여러 세력들의 공격에 전력을 다해 대응했다.
그는 평소보다 동작이 느렸고 옷은 이미 땀에 젖어 있었다.
계속해서 걱정이 밀려 들어와 나는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계속 싸우는 것만이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선배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거라고 믿지만 그는 동작을 결코 가속시키거나 가속시키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주먹을 휘두르는 힘은 모두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을 상대한다기보다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먼 곳의 그늘진 고층 빌딩에서 희미하게 빛이 반짝이고 있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박자를 타면서 반짝이는 걸로 보아 어떤 신호처럼 보였다.
"저건……?"
광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반짝임을 알아차리고는 여러 세력들의 사람들이 초목의 병사처럼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기는 이 망설임을 이용해서 싸우고 있던 NW 대원을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맞받아쳐 응수했다.
멀리서 빛이 강렬하게 반짝임과 동시에 백기는 손을 들어 칼날같은 바람을 다시 또 새롭게 모아 NW 대원에게 내리쳤다.
"피곤해."
(수신호처럼 들림)
NW대원은 여세를 몰아 날렵하게 돌진했고 다음 순간 백기는 모든 바람을 거두고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반댓편 손으로 허리춤에 있는 수갑을 손가락으로 한바퀴 돌렀다——
그는 빛처럼 빠르게 그의 두 손에 수갑을 채우고 다른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 신비한 상자를 공중에 던져버렸다.
"모두 잘 봐."
제멋대로 비웃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칼날같은 바람이 공중에 나타나 소리를 내며 그 신비한 상자를 갈랐다——
쾅!!
마치 상자 안에 작은 우주가 들어있는 것처럼 가르는 순간 뜨거운 파도와 함께 지면이 순식간에 요동쳤다.
공기가 크게 물결치며 진동하면서 나는 똑바로 서기 어려웠고 결국 무릎을 꿇고 앉아있어야만 했다.
한바탕 귀가 울린 후 광장은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나는 황급히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는 광장 한복판에 똑바로 서 있었다. 무수하게 깨진 조각들이 그의 주위에서 떨어졌고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파열음을 아름답게 울리고 있었다.
"사라졌어……"
고요한 광장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향해 바라보니 GR 간부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폭발이 일어난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CORE가 사라졌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어!!"
웬 미친 헛소리가 사람들을 정신차리게 해준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무언인가를 하려고 하자 주위는 갑자기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로 둘러싸였다.
일렬로 늘어선 특파서 대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면서 광장 주위를 빈틈없이 메웠다.
"모두 움직이지 마!"
29-14 소리 없는 작별인사
대규모의 사람들이 무장 차량으로 압송되었다. 나는 붙잡힌 GR의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들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늦게까지 사람들을 모아서 뭐하는 거야? 다들 조사받으셔야 하니 절 따라오세요."
그러면서 고진은 차갑게 날 쳐다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경찰봉을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이 여성 분은 딱 봐도 선량한 시민인데 이것도 구분이 안 돼?"
"됐다. 넌 그냥 저기 앞에 있는 차에 가서 얌전히 좀 앉아있어."
*
나는 '고분고분' 하게 지시를 따라 무장 차량에서 뛰어내려 바로 앞에 있는 경찰차에 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한기로 뒤덮인 건지 땀으로 뒤덮인 건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내 곁에 앉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가쁘게 내쉬고 있던 숨을 자제하려고 했지만 유난히 차가운 손가락이 그를 배반했다.
"선배, 어때요?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다 생각이 있는 거야."
"그랬으면 좋겠지만요……"
얼마 지나지 않아 고진이 비집고 들어와 운전석에 앉았다.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잡아 넣다보니까 어떻게든 요리해먹을 수가 있어! 심지어 NW 사람도 있다고! 절대로 심문하기엔 충분할 거야. 이번에도 그 사람들의 약점을 잡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험을 감수하고 이번 계획을 세웠다는 걸.
크게는 사냥꾼 놀이부터 작게는 손소남의 사망 사건까지, 그렇게 해결하기 어려워 보였던 사건들은 범행 동기 측면에서 적지 않은 핵심고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너무 많은 증거들이 사라졌다.
그들은 기필코 또다른 방법을 찾아 핵심 고리를 다시 찾아내야만 했다.
이 길에는 약간의 자극이 필요했다.
그들이 서로 마주보면서 웃는 것을 보면서 나는 살짝 안심했다. 이젠 이 두 사람도 화해한 것처럼 보였다.
방금 전 격렬한 싸움으로 선배는 많이 지쳐보여서 창가에 기대어 잠이 든 줄로만 알았다.
차는 곧 우리 집 아래층에 도착했고 나는 피곤해보이는 그의 옆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손으로 살짝 그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살며시 떠날 준비를 하려고 할때 갑자기 팔을 붙잡혔다.
선배가 천천히 눈을 뜨면서 조용히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살짝 뒤를 보면서 백미러 속의 고진과 시선을 마주쳤다.
"고진, 물 한 병 사와."
"물은 우리집에도 있잖아요. 같이 위층으로 올라갈래요?"
"괜찮아. 좀 피곤해서. 그냥 여기 좀 앉아 있어주면 돼."
*
분위기를 파악한 듯 운전석의 차문은 진즉 닫혔고 고진은 눈깜짝할 사이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희미한 빛이 백기의 눈에 비치자 그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며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는 듯 이를 꽉 물었다.
그는 내가 내뻗으려고 했던 팔을 밀어내면서 천천히 몸을 곧게 펴고 다시 힘껏 숨을 내뱉었다.
"유연아, 넌 지금도…… 여전히 작별인사 하지 않고 떠나는 사람이 싫어?"
나는 그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어서 멍하니 있었다. 삽시간에 불안감이 덩굴처럼 내 마음을 휘감았다.
"왜 이걸 묻는 거예요?"
"그냥 단순히 네가 싫어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시 확인해보려는 거야."
그는 정말 이 질문이 평범한 확인이라는 것처럼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간절하게 말했다.
"……확실히 좋아하진 않아요."
백기가 살며시 웃자 쏜살같이 달리는 차의 전조등이 그의 뒤를 순식간에 지나가면서 밝게 밝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난……"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천천히 입을 벌리다가 갑자기 경직됐다.
백기는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입술을 살며서 움직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몇번 그렇게 시도를 하더니 어떤 화면이 눈앞에서 스쳐지나간 것처럼 그의 입술은 살짝 떨리더니 마침내 다시 수평선처럼 가라앉았다.
"선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거예요?"
선배는 내 질문에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만졌다.
내 얼굴에 닿고 있는 손길이 너무나 약해서 이 손길이 내 착각인 것처럼 느껴졌다. (*의역)
"저녁에 준 편지는 안 봐도 돼."
미련에 가득 찬 손길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조금은 거칠지만 아쉬움을 남기면서.
(원문이 이별에 대해서 아쉬워한다는 뜻이 있음)
내 앞에 있는 선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았다.
"선배, 저랑 병원에 같이 갈까요? 아니면 심문이 끝나고 저에게 연락해주시겠어요?"
"저는 선배가 걱정돼요."
그 부드러운 호박색 눈동자 속에서 정지한 모습의 작은 내가 보였다.
"잘자, 유연아."
이 말은 선배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
고진은 안전하게 차를 몰고 있었다. 번쩍이던 녹색 등이 천천히 빨갛게 변하면서 그는 크게 하품을 했다.
"아쉽지만……Joker는 붙잡지 못했어. 그녀석……침착하네……"
백기는 너무 졸려서 눈을 뜰 수가 없었고 고진이 하는 말들도 점점 희미하게 들렸다.
*
붉은 빛은 눈부시게 그의 눈을 비췄지만 빛의 번짐은 점점 작아졌다.
세상은 어두움으로 둘러싸였고 그 경계너머로부터 검은 물결이 천천히 밀려들어왔다.
그렇게 몇번을 거듭하면서 그의 눈으로 스며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처럼 고동치는 작은 빛이 있었다.
그는 여자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선배, 저는 선배가 걱정돼요.
그는 그 스스로 그녀가 싫어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다음을 기약한다는 뜻도 있음)
하지만 그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앞에서 그가 준비했던 모든 마음가짐은 모두 쉽게 무너졌다.
내가 너에게 그 편지를 쓰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네가 그것을 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검은 물결이 그의 머리를 덮치면서 그 고요한 가운데에서 백기는 조용히 생각했다.
최후에 가까스로 그는 깜짝놀란 고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전에 이야기했던 것을 잊지 마.
"반드시……모든 범인은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해."
*
자동차 뒷좌석은 아무도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
나는 침대에 누워서 몸을 뒤척였지만 어떻게 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동이 막 틀 무렵, 나는 고민하면서 일어나 선배가 내게 건네준 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는 나에게 열지 말라고 말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선배의 마지막 표정으로 가득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찢어서 열어보니 안에는 접혀진 편지지가 있었다——
'유연이에게,'
'내일 오전 9시에, 학교 도서관에서 기다릴게.'
'백기가.'
(기울어진 세월 외전 참고)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편지에 적힌 깔끔한 글씨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어쩐지 눈시울이 살짝 시큰거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시계를 보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

8시 50분 경, 나는 선생님께 프로그램 촬영을 한다는 이유로 미리 말씀을 드리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내가 걷는 발걸음에 따라 보이지 않는 바람이 한숨을 쉬는 것처럼 내 볼을 가볍게 스쳤다.
주말의 도서관은 아주 고요했다. 공기 중에는 잉크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있고, 먼지가 천천히 빛 속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기억 속의 장면과 별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의자를 빼서 창가에 앉아 창밖으로 넘실대는 구름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올까?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선배가 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쾌한 봄바람은 어쩐지 친근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내 앞과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아주 오래 전에 선배가 썼던 편지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그는 약속 시간이 되기 전에 이미 떠났다고 했다. 그도 어디선가 지금처럼 나를 기다린 적이 있었을까?
그때의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고 턱을 괴고 조용히 기다렸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가와 바람에 살짝 날리는 머리카락과 같이 그가 기다릴 때의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우리들 사이에서 있었던 사소한 이야기들을 생각하면서.
선배가 여기서 약속을 잡은 거라면 내게 무슨 말을 할까?
이따금씩 가볍고 부드러운 바람이 나의 손등과 얼굴에 내려앉으면서 마치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단 생각이 계속 들었다.
*

시간은 살그머니 흘러, 해를 지평선 반대편으로 몰래 끌어당겼고 부드러운 달빛은 어느새 들어와 있었다.
내 휴대 전화에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설마 정말 내가 오해한 걸까?
그가 내게 그 편지를 보지 말라고 한 것부터 이미 그가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선배가 나타나지 않을까?
*

천천히 무수히 많은 별들이 어둠 위에 걸리면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
아마도 선배는 일찍이 자신의 방식으로 약속을 취소했을 것이다. 이건 순전히 내 바람이었던 거야.
흐려진 시선을 앞에 두고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창문을 닫았다.
의자를 밀고 몸을 돌려 정문으로 향하려던 찰나, 어디선가 바람이 휙휙 소리를 내며 왔다.
그것은 때에 맞지 않게 내곁으로 다가와 나를 온전히 바람 속에 가두었다.
마치 포옹하는 것처럼.
"……선배?"
나는 잠시 어리둥절하면서 선배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유연아, 너 아직 안 갔니?"
갑자기 문이 순식간에 열리면서 도서관 안의 전등이 켜지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희미한 바람이 내 볼을 살며시 익숙한 기운으로 스치고는 말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 바람이 지금껏 불어왔던 바람과는 달랐다는 생각이 들어 텅 빈 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실험실이 폐쇄됐다.
쉴새 없이 세차게 흐르는 거대하고도 투명한 의료실 바깥으로 모두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속에 거의 투명한 듯한 사람의 그림자 위로 둥실둥실 기포가 떠다녔다.
샤오위에는 커다란 유리벽 뒤에 서서 보일 듯 말 듯 비웃음을 머금고 실험대 위의 마이크 앞으로 다가섰다.
"CORE를 망가뜨렸다면서?"
"알고 싶으면 날 죽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백기의 목소리는 쇠약하게 들렸지만 차가운 칼날처럼 조금도 인정사정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비밀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될 거야."
"실험을 시작하지."
이름 모를 액체가 여러 개의 파이프를 따라 의료실로 주입되면서 관측 화면의 심전도선이 갑자기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일직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