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의 죽음
세계는 금이 간 거울이 되어, 너와 나의 결핍을 비춰냈다.
1-1 往日如常 지난날처럼
维持世界向前的力量,需要的是比你想象中更重要且更为根基的事物。
세상을 앞으로 움직이
게 하는 힘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들이다.

거실에 들어섰을 때, 온몸에는 여전히 커다란 비현실감이 감돌았다.
창밖에선 차들이 거리를 바삐 오가고 있었다. 맑고 화창한 하늘 아래, 고요한 풍경은 내가 꿈꾸던 평범한 일상 그대로였다.
공기 속엔 찌개의 열기와 기름기 냄새가 그윽하게 퍼져 있었다. 따뜻한 온기가 얼굴을 감싸며 배 속 깊은 곳의 허기까지 깨우는 듯했다.
식탁 위의 달력은 마치 반 년을 단숨에 넘긴 것처럼, 흐릿한 내 시야 속에서 숫자는 어느새 가을의 중심, 9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정말 성공한 걸까? 세상은 정말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걸까?
눈앞에 펼쳐진 이 부드럽고 평온한 풍경은 마치 하얗게 퍼진 안개처럼 현실과의 경계를 흐리고 있었다.
나는 차마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버지
어디가 불편하니? 왜 그대로 서 있니?
유연
……!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걸어오자, 나는 본능적으로 놀라서 반 걸음 물러섰다.
그는 눈치챈 듯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버지
괜찮니?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이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종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나는 이제 어떤 말투로 이야기해야 할지도 잊은 것 같았다.
수년간의 추적 끝에 닿은 이 존재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웠지만, 오히려 혼란이 더 짙어졌다.
유연
……아빠?
아버지
바보야,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아빠도 못 알아보겠니?
부드러운 빛이 한 조각의 얇은 천처럼 그의 웃는 얼굴 뒤로 흩날리며, 마치 무언의 위로가 되어주었다.
유연
아빠…… 왜 여기 있어요?
유연
……정말 아빠 맞아요?
아버지
앉아서 이야기하자. 네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을 거라는 거, 아빠도 안단다.
아버지
방금 깨어나서 많은 힘을 썼을 거야. 먼저 뭘 좀 먹어야 힘을 낼 수 있지.
그는 웃으며 식탁 앞으로 걸어가 자연스럽게 내 의자를 빼주었다.
아버지
밥 식겠다.
나는 식탁에 앉으면서도 여전히 긴장된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유연
……언제 돌아오신 거예요?
아버지
세 달 전쯤이다.
순간 멍해졌다. 그에게는 제법 길었을 그 시간이, 내겐 한순간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야 그 시간이 진짜 내 앞에 도착한 것만 같았다.
유연
그럼 회사엔…… 돌아가보셨나요?
아버지
생각은 해봤지만, 이렇게 몇 년 만에 불쑥 나타나는 것도 좀 그렇잖니.
아버지
지금 회사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나를 모를지도 모르고.
그는 자연스럽게 내 앞에 따끈한 찌개 한 그릇을 내놓았다. 옥수수의 고소한 향이 김과 함께 피어올랐다.
아버지
그동안 나에 대해서든, BLACK SWAN에 대해서든 꽤 많은 걸 조사했겠지.
내 그릇에 반찬을 덜어주며 무심하게 꺼낸 그 한마디는, 그 내용과 무게만큼이나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버지
그때부터 Evol에 발을 들이면서 앞으로 많은 일이 닥칠 거란 건 알고 있었단다.
아버지
하지만 네가 그 안에 끌려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구나.
유연
그럼 아빠 지금은……
아버지
내가 해야 할 일들 중 일부는 어느 정도 마무리된 단계에 도달했어.
아버지
널 이 일에 끌어들여 미안하다. 하지만 어떤 답은 네가 직접 찾아야 한다고 아빠는 생각해.
아버지
아빠는 언제나 믿고 있어. 내 딸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그는 명확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내가 기억하는 그때 그대로였다.
어릴 적부터 아빠는 항상 내 결정을 존중해줬고, 어떤 선택을 하든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말했다. “나는 늘 네 뒤에 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지금 이 순간, 아빠 앞에 선 나는 또다시 어린 시절의 그 아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 오랜 재회가 혹시 꿈이 아닐까, 불안감이 밀려올 정도로.
아버지
이 바보야, 왜 눈이 빨개졌니.
유연
아빠……
아빠의 실종을 추적하기 시작하면서 Evol은 내 인생 속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세계 속, B.S. 실험실에서 본 아빠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가 했던 일들, 그가 끝냈다는 그 일들 속에도 혹시 나와 같은 길이 있었던 건 아닐까——
유연
그 일들…… 아빠가 끝낸 건, 혹시 나 때문이에요?
그는 당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마지막에 가볍게 웃었다.
아버지
우리 유연이는, 언제나 아빠의 자랑이야.
그건 대답이 아니었지만, 그 한마디만으로도 내 불안과 의문은 잠시 멈춰섰다.

소년
변화에는 결과가 따른다.
소년
욕심 많은 자들은 그것을 ‘대가’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의 결과일 뿐이야.
유연
……그럼 이번에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잃게 되는 걸까요?
소년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에는,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더 근본적인 것이 필요하지.
소년
그리고 그것이 바로 네가 마주해야 할 ‘결과’야.

소년의 말은 차가운 바늘처럼 가슴 깊이 파고들었고, 그 부드럽고 평온했던 장면의 색조를 단번에 지워냈다.
나는 반사적으로 힘을 모았다. 몸속에서 익숙한 울림이 되살아났고, 그 감각이 안도인지 불안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가 말한 건 Evol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그게 대체 뭘까? 세계의 규칙?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무언가?
휴대폰 화면 위엔 지난 6개월간의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선 익숙하면서도 낯선 아빠를 다시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 끝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연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아버지
그래, 바람 좀 쐬는 것도 좋지. 짐은 정리할 필요 없단다, 내가 하면 되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을 가득 채운 채, 서늘한 가을바람과 함께 나는 대문 앞에 섰다.
이 세계가 이전보다 더 진실된 모습으로 나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가슴 가득 채운 공기를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날카롭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에게 닿았고,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 낯선 젊은 남자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아주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금세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마치 스쳐 지나간, 우연한 시선처럼.
가을바람은 여전하고, 햇살도 여전하고, 세상도 여전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단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 그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전화
뚜—— 뚜——
전화
뚜—— 뚜——
전화
죄송합니다. 현재 연결할 수 없는 번호입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차가운 기계음이 귀를 스치고, 나는 통화를 끊는 동시에 하늘 위로 흩어지는 새 떼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나는 마치 수많은 눈과 눈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1-2 微妙变迁 미묘한 변화
城市会在不经意之间,更换它的容貌。
도시는 어느새 불쑥, 그 얼굴을 바꾸곤 한다.
01
유기 동물 관리 강화
아파트 환경은 모두의 책임입니다.
유기동물 관리 강화에 관한 안내
존경하는 입주민 여러분께:
최근 단지 내에서 잦은 반려동물 유기 행위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환경 위생과 도시 미관을 해칠 뿐만 아니라, 공공 안전과 이웃 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에 따라 단지 관리를 강화하고 반려동물 문화를 높이기 위해, 다음과 같이 안내드립니다.
본 단지는 관련 부서와 협력해 ‘유기동물 수거처’를 설치하여 주민들에게 통합된 처리 경로를 제공합니다.
유기된 동물을 발견할 경우, 즉시 관리사무소 내 유기동물 관리 전담자에게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직원이 직접 방문해 수거 및 처리를 진행합니다.
모든 주민은 법과 규정을 자발적으로 준수하고, 반려동물을 복도·엘리베이터·녹지 등 공공장소에 유기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해야 합니다.
상황이 심각하거나 결과를 초래할 경우, 관련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유기동물 처리 전담 연락처:
210‑82478888 (매일 9:00~18:00)
모든 주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리며, 함께 단지의 문명·청결·안전한 거주 환경을 지켜갑시다.
2025년 6월 14일
관리사무소
02
물도, 사람도 예전 같지 않다.
녹영광장은…… 뭔가 달라진 걸까?
유연
……응?
유연
여기…… 왜 이렇게 달라 보이지?
행인
야, 길 막지 마.
유연
실례지만, 저 건물이 녹영광장 맞나요?
행인
맞아.
유연
언제 리모델링한 거예요?
행인
무슨 소리야? 원래부터 이랬어.
유연
그럴 리가…… 난 분명히 기억이—
행인
길 잃었으면 경찰에 가서 물어봐. 나 출근해야 해.
노인
젊은이, 외지에서 왔지?
녹영광장 기념 냉장고 자석 하나 살래? 20위안이야.
유연
어르신, 여기 정말 공사한 적이 없나요?
노인
없어 없어, 나 여기서 몇 년째 장사해.
자석 살래? 예쁘고 몇 년 써도 색이 안 바랜다.
유연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인
안 살 거면 저쪽으로 좀 비켜. 장사해야 하니까.
03
자살토론
때로 생명은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행인A
야, 들었어? 어젯밤 중앙병원에서 간호사 한 명이 약 먹고 자살했대.
행인B
못 들었는데, 왜?
행인A
몰라, 의료사고든 집안일이든 뭐 그런 거겠지.
행인A
지금같이 스트레스 심하면, 죽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행인B
……
행인A
근데 너 그 간호사 좀 멍청하지 않냐?
행인A
죽는 게 무서운 것도 아닌데, 왜 자살하기 전에 몇 명이라도 같이 데려가지 않았을까?
행인A
어차피 이렇게 몰렸으면, 차라리 원수들을 한꺼번에 데려가는 게 낫잖아.
행인B
그게 그렇게 쉽냐? 사람들 가만히 있겠어?
행인A
방법이 있지. 병원엔 마취제 같은 약도 많잖아.
행인A
마음만 먹으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행인A
어차피 내가 그런 상황이면 그렇게 할 거야. 내가 못 사는 데, 날 괴롭힌 놈들도 편하게 못 살게 할 거거든.
행인B
그만해라, 시간 됐다. 지하철 오기 전에 쿠폰이나 빨리 챙기자.
행인B
나중에 잊어버리거나 신호 안 터지면 또 내 탓할 거잖아.
행인A
맞아 맞아, 할인부터 챙기는 게 제일 중요하지.
1-3 无根之所 뿌리 없는 곳
世界从未停下脚步,好像只是把我遗落在了原地。
세상은 결코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고, 마치 나만 원래 자리에 버려진 듯하다.
온갖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며, 묘하게 떨어져 있는 듯한 이질감을 풍기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은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고, 태양은 성실히 떠올랐지만 나를 더 환하게 비추어 주진 못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던 그 힘이 모든 것을 단단히 받쳐주는 듯 보였지만, 오직 나만이 그 힘이 사라져 만들어질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연결되지 않는 번호를 바라보자, 마음이 또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택시 앱을 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업데이트가 필요했다.
돌아가는 진행률 바가 마치 말없이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내가 없던 6개월 동안도, 이 도시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업데이트가 끝나자 그의 주소를 입력했다.
(선택지 뭘 해도 특파팀으로 돌아감)
곧, 차는 황량하게 버려진 평지 앞에 멈췄다.
커다란 회색 담장에는 날카로운 철조망이 뒤얽혀 있었다.
익숙한 장소를 마주하며 나는 늘 하던 대로 담장을 향해 걸어갔다.
눈부신 빛 한 줄기를 지나자, 익숙한 밀폐된 통로가 어제와 다름없이 내 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천장에 차가운 불빛이 켜지며, 멀리 검은 바닥의 끝자락에 경고의 붉은 불빛이 켜졌다.
수많은 레이저가 내 몸 위로 집중되며, 마치 엄중한 경고처럼 내려앉았다.
유연
……잠깐만요, 저는 침입자가 아니에요!
내 당황스러운 외침에,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고진
오랜만이네요, 유연 씨. 특파팀에는 갑자기 무슨 일로 온거죠?
유연
……방금 선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유연
그냥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고진
지휘관의 행동은 본인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타인에게 알릴 수 없습니다.
그의 시선은 차갑고 멀게 느껴졌다. 그 안엔 규칙이라는 이름의 심문 같은 압박이 담겨 있었다.
고진
그래도 당신에게 악의는 없어 보이니, 알려드리죠. 그는 무사합니다.
고진
이정도면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은 되겠죠.
고진
이제 돌아가 주세요.
유연
……
그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낯선 사람 대하듯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속에 깃든 냉정함과 거리감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분명 익숙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까.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이 이 순간, 낯선 경계선으로 변해 나와의 거리를 분명히 그어버렸다.
혹시 24의 계획이 성공한 건가……?
아니, 소년은 분명히 ‘등대’ 계획이 실패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미묘한 어긋남은 그 사라진 무언가와 관련 있는 걸까?
하지만 아빠는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인다…… 아니면, 우리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기에 내가 놓친 작은 변화가 있는 걸까?
수많은 의문이 가슴을 채웠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어느새 다시 회사 건물 앞에 서 있었다.
풍경은 그대로였지만, 모든 것이 말하고 있었다.
세상은 결코 멈추지 않았고, 단지 나만 이 자리에 남겨진 것 같다고.
충동과 불안이 동시에 나를 감싸며,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무언가를 확인해야만 했다.
유영
……사장님!
마치 운명이 내 손에 답을 쥐여주려는 듯,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영이 내 앞에 나타났다.
유연
……유영 씨.
유영
일이 잘 끝나신 것 같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유영
나연 언니에게는 말씀드렸나요? 요즘 엄청 바쁘셨어요.
유연
아…… 아직 안 했어요.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왔거든요.
가벼운 인사 속에서도 특별히 들뜬 기색은 없었다.
유영은 내 대답을 듣자 매우 적극적으로 모두에게 소식을 전했다.
곧 낯익은 직원들이 내 앞에 모여들었다.
각자의 얼굴에 정중한 미소를 띠고, 예의바르고 소박하게 나를 맞이했다.
안나연
돌아온 걸 환영해요, 유연 씨.
안나연은 나와 함께 내 사무실로 향했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6개월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안나연
당신이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이 없는 동안에도 유연 회사는 모두의 노력으로 정상적으로 운영돼 왔습니다.
유연
……고마워요, 나연 언니.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안나연
이건 우리가 최근에 받은 의뢰와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이에요. 언제든 바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내 감사 인사에 안나연은 아주 전문적이고 단정하게 현재 회사 상황을 설명하고, 마지막엔 내게 조용히 시선을 주었다.
안나연
하지만 유연 씨, 유연 회사는 당신의 회사잖아요. 사장으로서 좀 더 책임감을 보여줬으면 해요.
안나연
다음에 개인적인 일 때문에 갑자기 ‘사라지기’ 전에, 미리 한마디 알려주고 준비할 시간을 주세요.
유연
……
안나연은 상당히 절제된 어조였지만, 그 속에 담긴 드문 꾸짖음을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안나연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나연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매번 사장이 ‘사라져도’ 회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건 분명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유연
정말 죄송해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최대한 조심할게요.
유연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꼭 말씀드릴게요.
유연
정말 감사해요, 나연 언니. 수고 많으셨어요.
안나연
이건 제 업무에 포함되는 일이니까요. 게다가 우리 회사는 업계 내 위상도 높아서, 이렇게 큰 회사를 맡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곁에 쌓인 서류 더미를 열어보였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문서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아이디어 개발 초기 단계부터 심지어는 촬영 준비까지 마친 기획안들을 보며 나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대학생 취업난이 점점 낮아지는 개인 역량과 관계가 있을까?"
"월 100위안과 1,000위안짜리 요양원의 차이점 탐방"
"글과 아이디어 도용의 경계, 인기 작품 속의 회색 논란은?"
‘인터넷 실명제’, ‘정보 유출’, ‘학교 폭력’……
다큐멘터리 섹션에는 자극적인 키워드들이 가득했다.
곧 촬영을 앞둔 예능 대본 역시 치밀하게 계산된 갈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경쟁 예능마저도 수많은 회색 계약 아래, 순서와 구성, 클리셰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유연
……이게 뭐야? 왜…… 전부 이런 콘텐츠야?
안나연
사람들이 좋아하니까요?
안나연은 내가 상식 밖의 질문을 한 것처럼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안나연
요즘은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요.
이런 프로그램들이 당연히 더 눈길을 끌죠.
안나연
우린 그 흐름에 맞춰서, 요즘 몇몇 히트작도 만들어냈고요.
유연
하지만 시청자가 뭘 보고 싶어한다고 해서, 그걸 무조건 찍는 건 아니에요.
유연
시장을 참고하긴 해야겠지만, 시청자의 시선을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몰아가선 안 되죠.
안나연
하지만 사람들은 그 ‘교육’ 같은 건 원하지 않잖아요?
유연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에요.
유연
저는 그냥, 우리가 만드는 프로그램이
각자가 더 긍정적이고 열린 시선으로 어떤 사실이나 결과를 바라보고……
유연
그 속에서 스스로의 답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해요.
안나연은 나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안나연
유연 씨, 여긴 학교가 아니야. 당신…… 너무 이상적인 거 아니에요?
유연
……
안나연의 진지하고 프로페셔널한 눈빛을 마주하자, 너무 많은 감정이 한순간에 목을 막았다. 결국,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침묵만이 흘렀다.
뭔가 잘못됐다.
안나연, 유영, 직원들…… 그리고 유연 회사조차도, 원래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유연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요. 이 프로젝트들, 일단 전부 중단해주세요.
안나연
그럼 회사는……?
유연
걱정 마요. 유연 회사가 잠시 멈춰도 나는 그 위험을 감당할 수 있어요.
그리고 다시 굴릴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든 기획안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 순간, 눈을 찌푸릴 만큼 선명한 키워드 하나가 시야를 가로질렀다.
“연모고등학교 집단 자살.”
1-5 不可理解之事 이해할 수 없는 일
他也淹在雨下,似乎看了我很久。
그도 빗속에 잠겨, 오랫동안 나를 바라본 듯했다.
내가 그 키워드를 꺼냈을 때, 안나연은 어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곧바로 기획팀과 크리에이티브팀 직원들을 불렀고, 몇 명이 함께 내 책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유영
아! 그건 아마 일주일 전에 일어난 사건일 거예요. 고등학생 네 명이었나?
같이 연모고등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렸죠.
한예준
그게 첫 사건은 아닐 거예요.
다섯 달 전엔 제3고등학교에서도 고등학생 두 명이 자살했고, 두 달 전엔 사범대 부속 중학교에서도 몇 명이 같이 화학약품을 마셨고요.
고은
그냥 학생 자살 아닌가요?
별로 특별할 것도 없잖아요. 술 마시고 강가에 뛰어드는 사람이랑 비슷한 거죠, 뭐.
안나연
응, 데이터로 보면 오히려 다섯 달 전쯤에만 잠깐 관심이 있었고, 이후 사건들은 거의 주목도 못 받았어요.
한예준
맞아요, 사장님. 그건 굳이 신경 쓸 일 아니에요.
우리 진짜 괜찮은 소재들 많이 찾았거든요.
그는 옆에 쌓인 기획서를 내게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내가 아까 안나연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전혀 모르는 듯,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한예준
Evolver랑 일반인 시점 논쟁이 요즘 더 치열해졌어요.
거의 매일 관련된 논쟁이나 충돌이 벌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Evol 구역'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어요.
한예준
그리고 이거 보세요, 여섯 달 전부터 도시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거든요.
실험 대상이 된 거 아니냐, 아니면 ‘헌터 게임’이나 ‘오디세이 게임’처럼 더 위험한 데 끌려갔다 온 거다, 그런 말도 있고요.
유영
우리가 주기락을 위한 초대형 특집 다큐나 인터뷰도 만들 수 있어요.
이번에 새로 낸 싱글이 전 세계 각종 차트를 갈아치웠잖아요.
고은
사장님이 여전히 고등학생 이슈를 다루고 싶으시다면, 자살 말고 더 신선한 요소를 넣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고은
예를 들어 자살한 학생들 가족이 학교나 사회를 상대로 책임을 묻는 문제라든가, 아니면 아예 틀을 바꿔서
‘고등학생 사이비’, ‘청소년 정보보안과 딥웹 유출’ 같은 식으로요?
유연
……
나는 여전히 이 집단 자살 사건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관련된 상황을 추적해 보도해보고 싶었다.
‘고등학생’, ‘집단’, ‘자살’——이 몇 개의 매우 특이한 단어들이 한데 엮여 있다.
게다가 이건 단 한 건의 특별한 사고가 아니었다.
이처럼 지금 사회의 어떤 시각과 청소년의 심리 건강 문제를 반영해줄 수 있는 내용인데,왜 오히려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직감적으로, 이 안에는 반드시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느껴졌다.
——그게 이 사건 자체든, 혹은 대중이 주목하지 않은 이 ‘사실’이든.
어쩌면 나는 천천히 알게 될지도 모른다.
왜 내 앞의 이 동료들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한예준
굳이요? 해도 아무도 안 볼 텐데요. 전에 나연 누나가……
안나연
예준 씨, 유연 씨는 지금 회사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지금 이 회사의 책임자는 유연 씨에요.
안나연은 한예준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냉정하고 프로페셔널한 태도로, 마치 모든 관계를 깔끔히 떼어낸 듯했다.
유연
마침 다들 계시니, 방금 저와 나연 언니가 나눈 얘기를 여러분과도 공유하고 싶습니다.
유연
제가 현재 손에 쥔 프로젝트들은 전부 중단하고, 당분간은 기존 예능과 활동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주력할 겁니다.
유연
여기 제가 봤을 때 문제가 없는 기획안들은 계속 진행해 주세요.
앞으로의 프로그램 일정은 제가 정리해서 여러분과 회의 후 확정하겠습니다.
유영
……하지만 요즘 프로젝트랑 콘텐츠를 두고 경쟁하는 미디어 회사들이 많아서,
경쟁이 굉장히 치열한데요.
유영
만약 우리가 잠시 멈춘다면……
유연
유연 회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나는 모처럼 강하게 고개를 들어, 내 동료들을 깊이 바라보았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이 우리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손바닥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야 그들의 과거 그림자를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유연
걱정 마세요. 우리는 그동안 해온 노력에 부끄럽지 않을 겁니다.
나는 이 세상이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차갑거나, 지나가거나, 의심과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
그 모두가 오히려 이 세계의 진실성을 내게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연
만약 그게 탁이(卓以) 같은 힘이라면, 한 걸음 한 걸음 가보는 수밖에 없겠지.
결국 ‘세계의 진실성’이란 것도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무언가일지도 모르잖아.
언제부터인가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 퍼져 빛을 거의 다 가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의혹으로 가득한 수많은 생각들을 애써 털어내려 했다.
내가 자료를 들고 연모고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하교 시간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경비실 쪽으로 다가가 익숙한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경비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중년의 경비원이 방에서 나와 딱딱하게 나를 바라봤다.
유연
안녕하세요, 저는 연모고 졸업생이자, 유연 회사의——
경비
죄송하지만, 저희는 언론 인터뷰는 일절 받지 않습니다.
유연
저는 관련된 정보를 조금만 여쭤보려는 건데……
경비
언론 인터뷰는 받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미디어의 관심이나 부정적인 여론이 부담스러운 걸까?
그는 매우 딱딱한 태도로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나를 철저히 문밖에 세워뒀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눈을 깜빡였다.
설마 첫걸음부터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유연
그럼…… 혹시 공 선생님을 좀 연결해 주실 수 있을까요?
경비
공 선생님이요? 그 영어 가르치시던 분 말씀인가요?
경비
그분은 사직하셨어요. 이제 학교에 안 계십니다.
용건이 있으시면 직접 연락해 보세요.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손을 한 번 내저으며 다시 경비실 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미묘한 어긋남의 감각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무언가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순간,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끝도 없는 피로감이 한순간에 몰려와,
나는 길모퉁이 골목 어귀에 기대어 한숨을 쉬며 멍하니 서 있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 우울한 기분 위에 다시 한 겹 옅은 쓸쓸함이 덧씌워졌다.
유연
별일도 아닌데, 다시 방법을 생각해보면 되지……
유연
걱정할 것도 없잖아……
나는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듯 그렇게 말했다.
스스로에게 기운을 불어넣고 싶었지만, 그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마치 고인 물 웅덩이에 가라앉듯 사라져버려 내 얼굴마저 희미하게 번져가는 것 같았다.
빗방울이 어깨를 천천히 적셨고,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괜한 감정에 젖지 않기로 결심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몸을 돌린 그 순간, 짙고도 사람을 압도하는 호박빛 시선과 마주쳤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비를 맞은 채 서 있었다.
그 역시 비를 맞으며,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했다.
1-6 熟悉的陌生人 낯익은 낯선 사람
明明距离他只有几步之遥,但好像我怎么都走不到他的面前。
분명 그와의 거리는 몇 걸음도 안 되는데, 아무리 걸어도 그의 앞에 닿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유연
……선배……
유연
……선배!
나는 들뜬 마음에 흥분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의식적으로 그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그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과 함께 거센 바람이 갑자기 몰아쳤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믿고 있는 듯이 눈을 감았다.
무슨 긴급한 일이 생긴 건가?!
희미한 어둠 속, 그저 옅은 바람 소리만이 두껍지만 안도감을 주는 장막처럼 모든 걸 가로막았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뜨자, 작은 바람덩어리가 내 주위에 맴돌고 있는 게 보였다.
어느새 비가 굵어졌지만, 내 주변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바람의 결계가 비를 막아내고 있었고, 그 안에서는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만이 유독 또렷했다.
그런데 시야의 끝에서, 백기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나는 의아해하며 멍하니 서 있었지만, 어느새 다리는 스스로 움직여 그가 가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유연
……선배…… 잠깐! 잠깐만요!
거센 바람이 커다란 빗방울을 휘날리며 세상을 흐릿한 빛과 그림자 속에 집어넣었고, 백기의 실루엣도 그 빗줄기 속에 사라져갔다.
그는 너무 빨리 걷고 있었고, 내가 아무리 달려도 그의 손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른 채, 결국 맥이 빠져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선배는 왜 떠나는 걸까?
정말 급한 일이 있는 건가? 그럼 나한테 한마디쯤 해줄 수도 있었잖아?
그가 이 바람의 결계를 남겨둔 건 또 대체 왜……?
혹시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더 이상 그 생각을 이어가기조차 두려웠다.
비가 세상을 점점 더 희미하게 만들었지만, 오히려 두려움의 윤곽이 더욱 선명해졌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 안나연을 비롯한 동료들과의 갈등, 공 선생님의 사직, 선배의 뒷모습……
마치 생활을 이루던 하얀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씩 뜯겨나가며, 빈틈을 드러내는 듯했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모든 것과 어긋난 그 틈들은, ‘생활’이라 불리던 풍경을 완전히 다른 조각들로 갈라놓았다.
분명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것 같은데, 기억 속 모습으로는 도무지 맞춰지지 않는 그림.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 자리에 서서, 더는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반짝이는 검은 군화 한 켤레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는 냉담한 기색이 가득했고, 보기 좋은 눈썹과 눈매는 줄곧 찌푸려져 있어 마치 풀리지 않는 매듭 같았다.
백기는 일부러 비를 피하려는 것 같지도 않았고, 전체적으로 어딘가 초조하고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내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호박빛 눈동자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초조함과 압박감이 갑자기 더 짙어졌다.
유연
선배 아직……
내 말을 가로막은 것은, 그가 무의식적의 손길이었다.
하지만 그 큰 손바닥은 허공에서 멈춰 섰다. 마치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어떤 망설임 같았다.
마지막엔, 그는 자신의 외투를 거칠게 잡아당겨 내 얼굴을 한 번 훑듯이 닦아냈고, 그 동작은 심지어 약간 아프기까지 했다.
백기
왜 울고 있어.
그의 질문은 거칠게 내뱉는 듯했지만, 어딘가 아련한 기억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유연
왜 떠났어요……?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잠시 멍해진 듯 보였다.
그는 빗속에 서 있었고, 나를 보호해주던 바람의 장막 너머에 있었지만,
정작 고립된 사람은 나인 것만 같았다.
그의 미간은 점점 더 깊게 찡그러졌고, 마침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시선을 피했다.
백기
비는 이미 네 쪽을 막아줬어. 그래서 그냥 갔을 뿐이야.
백기
또 내가 해주길 바라는 일이라도 있어?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가워서, 나는 불안하게 눈을 크게 뜬 채, 눈앞의 그를 어쩔 줄 몰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유연
……나는 선배에게 뭘 바란 게 아니에요.
유연
저는 그냥…… 선배 나한테 해줄 말은 없어요?”
백기
네가 돌아온 상황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았어.
백기
넌 또 한 번 이 세계를 계속 나아가게 만들었지. 대단해.
백기
하지만 지금 너 상태를 보니, 그런 걸 묻기엔 적절하지 않아 보이네.
익숙했던 무언가가 점점 멀어지는 느낌. 눈앞의 백기가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다.
유연
선배는…… 왜 예전이랑 달라 보이는 거죠?
백기
난 원래 이랬어
유연
……그럼 왜 그런 말투로 말하는 거예요?
백기
말투?
그는 그 말을 담담히 되뇌었다.
단정한 군화가 앞으로 성큼 다가오고,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등이 약간 축축한 벽에 닿을 때까지 물러나자,
비를 막아주던 바람의 보호막은 완전히 걷혀버렸고, 그 끝자락을 따라 들이닥친 그림자가 거대한 위협감을 안고 나를 덮쳐왔다.
백기
그럼 나는 어떤 말투로 말해야 하지?
백기
기억 속의 그 알 수 없는 모습들은 나는 흉내 낼 수 없어.
유연
……
차가운 호박빛 눈동자가 내 눈앞을 짓누르듯 내려앉고,
그 속엔 짙고도 끈적한 갈등과 초조함이 뒤섞여 있었다.
유연
……왜 선배는 기억 속의 모습이 ‘알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유연
우리 사이의 일……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백기
나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어.
유연
그럼 뭘 그렇게 초조해하는 거예요? 혹시 선배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거예요?
백기
그렇다면 네가 떠난 후 뭘 했는지 말해봐.
유연
……선배, 지금 나 심문하는 거예요?
백기
그건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렸어.
공기는 한순간 그대로 얼어붙었고, 나는 마치 더욱 거세진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에 뭔가 팽팽히 당겨져 있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깊게 들여다보려 해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었고, 그 마음속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그 눈은 너무도 아름답고, 또 너무 날카로워서, 누구도 이렇게 흡사하게 흉내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 그는 분명히 ‘백기’였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유연
저는 선배와 헤어진 후, 나는 BLACKCABIN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공간에 도착했어요.
유연
세계의 궤적은 제가 지난번 톱니바퀴를 파괴한 이후 완전히 불안정한 상태로 들어갔고, 등대 폭발이 그 붕괴를 더욱 가속시켰어요.
유연
그것을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면,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얻어야 했죠.
유연
그건 바로, 과거에 궤적이 정해졌던 미래와 지금의 세계를 융합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궤적을 만들어내는 거였어요.
유연
하지만 그에 필요한 힘이 너무 커서, 내 힘만으로는 부족했어요.그래서 저는 이 모든 걸 이루기 위해,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다른 힘을 빌렸어.
백기
이전에 말했던 ‘기억’의 힘 같은 건가?
유연
아마도요. 그건 아마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무언가일 거예요. 하지만 정확히 뭔지는 확신하지 못해요.
백기
……이해했어.
그는 반 발짝 물러섰지만, 여전히 나를 그림자 안에 가둔 채였다.
백기
네가 한 일은, 아무에게나 쉽게 말하지 마.
유연
당연히 알아요.
유연
내가 선배에게 말한 건, 단지 선배가 '백기'이기 때문이에요.
백기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그는 담담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말했다.
차가운 금속빛 은광이 그의 눈동자에 스며들며, 그를 더욱 날카롭고 위협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유연
물론이죠.
유연
기억 속의 선배도, 지금 내 앞의 선배도, 모두 ‘백기’이고, 내가 바라보는 선배의 모습이에요.
유연
저는 그저 선배가 뭘 의심하고, 뭘 초조해하는지, 왜 갑자기 내가 알던 태도와 달라졌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말을 하면서 내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그의 앞에서 똑바로 서 있으려 했다.
유연
저는 분명히 선배에게서 어떤 걸 찾고 싶어하긴 해요, 그렇다고 해서 선배가 어떤 모습이 되길 바란 건 결코 아니에요.
백기
……
무언가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그를 감싸는 듯했고, 그는 순간 멍하니 멈칫했지만,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빗속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무겁게 빗속에 서 있었고, 결국 손바닥만을 꼭 움켜쥐었다.
백기
Evol의 힘이 약해졌어.
백기
그 외에도, 그냥 많은 일들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조사 중이야.
유연
이번 고등학생 자살 사건도 포함돼요?
그는 살짝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고, 약간 탐색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유연
선배가 갑자기 연모고 정문 앞에 나타날 리는 없잖아요.
백기
너를 만나러 온 걸 수도 있지.
유연
……저도 원래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분명 그와의 거리는 몇 걸음밖에 안 되는데, 나는 도무지 그의 앞에 다가설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연
하지만 선배랑 막 대화를 나누고 나니까,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말을 인정하는 듯 했다.
백기
네 행동을 제한하진 않아. 하지만 조심해.
백기
네 안전을 위해서 사람을 붙일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바람이 조용히 그의 옷자락을 들어 올렸고, 내 손목에 매달려 있던 은행잎도 함께 날려 올랐다.
그 소리는 아주 가볍지만, 마음 깊숙이까지 스며들었다.
유연
선배, 아까는…… 왜 돌아왔던 거예요?
점점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빗속으로 나아가 그에게 물었다.
그 모습은 멀지 않은 곳에서 멈췄고, 그 침묵은 하나하나 떨어지는 빗물 자국처럼 남았다.
백기
나도 몰라.
바람이 살며시 그의 목소리를 실어 보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빗속의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1-8 错而不舍 틀렸어도 포기하지 않아
因为我没那么在乎规矩。以及,我喜欢你。
난 규칙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널 좋아해.
모든 의문이 이 순간에 주석처럼 남겨졌다.
백기를 포함해서, 내가 익숙하던 사람들에게 어떤 더 미묘한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방금 전 낯설게 느껴졌던 백기의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은 텅 빈 듯 공허해졌고, 커다란 상실감과 의심이 내 안에서 충돌했다.
조금 전 그가 언급한 ‘Evol의 약화’ 그것도 이 모든 일과 관련이 있을까?
나는 고개를 들어, 먹구름에 가려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는 그저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할 뿐, 나는 이렇게 오만한 압박을 견디며,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만 할 것 같았다.
제자리에 머무르기 위해서도 죽을 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면, 나는 더 빨리 달려야 한다.
나는 정신을 다잡듯 힘껏 얼굴을 한 번 치고,
빗속의 연모고등학교를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백기가 떠난 방향을 향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유연
……잠깐만!
그가 막 블랙이에 올라타려는 순간, 나는 급히 오토바이 뒤쪽 트렁크를 붙잡았다.
백기
……예전엔 이렇게 '끈질기진' 않았던 것 같은데.
유연
저도 선배가 이렇게 ‘쿨’한 모습은 잘 못 봤어요.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꼭 붙잡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유연
선배에게 복잡한 거 묻지 않을거예요. 마음속에 의심이 있다면 직접 조사해도 좋아요.
나에게 말해주기 싫다면, 그것도 괜찮아요.
유연
하지만 연모고등학교 집단 자살 사건에 대해,
그 일에 대해서는 선배랑 조금 더 얘기하고 싶어요.
백기
그건 특파팀 수사 기밀이야.
유연
그치만 예전에는 다 말해줬잖아요.
백기
너도 말했잖아, ‘예전’이라고.
그는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오토바이 헬멧을 끌어안듯 들었다.
백기
그때 했던 일들은 다 규칙에 어긋나는 실수였고, 특권이었을 뿐이야.
유연
……
유연
그걸 알면서도, 나에게는 말해줬잖아요.
백기
규칙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널 좋아하니까.
그의 목소리는 너무 담담해서, 세상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저 텅 빈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평온하고도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헐렁한 교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창문을 스쳐 달려가는 것처럼 스쳐 지나가고, 그 맑은 눈동자에 비친 기쁨은 순수하고도 솔직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빛만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왜 지금 당신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순간, 나는 이렇게 슬픈 걸까.
그 다음 순간, 머리 위가 갑자기 무거워졌고, 시야는 갑작스레 검은 곡면으로 덮였다. 귀가 먹먹해지는 듯, 둔탁하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울지 마.
유연
……
……정말 너무 비합리적이야, 선배.
백기
원래 난 그렇게 이치 따지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유연
……됐어요, 이제 말하지 마요……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세상은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그의 얼굴도 점점 흐려졌고, 내 마음도 축축하게 젖어갔다.
나는 애써 나 자신을 설득하며, 머릿속에 있는 '모든 이치'들을 되뇌었다.
내가 이 세계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무엇을 대가로 치렀는지. 그게 ‘기억’처럼 그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를 깊이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서러움과 슬픔은, 빗물처럼 내 마음에 떨어져 눈앞의 모든 것을 모호하고 흐릿하게 만들었다.
유연
……그래도,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나는 이를 악물고, 그가 눌러준 헬멧을 들어 올리며 정면으로 그를 바라봤다.
유연
저는 반드시 그 영향의 원인을 찾아낼 거고, 반드시 방법을 찾을 거에요.
백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동공이 아주 살짝 수축했지만, 끝내는 고요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유연
……서, 선배 뭐라도 말 좀 해봐요!
백기
아까는 나더러 말하지 말라며?
유연
이럴 땐 또 이렇게 말을 잘 들어요?
그럼 선배가 느끼는 이상한 점, 그리고 그 집단 자살 사건도 말해줘요!
백기
안 가르쳐 줄 거야.
그는 마침내 가볍게 웃으며 입가에 멋지고도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렸다.
백기
알고 싶으면 네가 직접 방법을 찾아봐.
유연
그럼 계속 선배를 따라다닐 거에요. 내가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내 손에서 헬멧을 빼앗으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온도가 스치듯 맞닿는 순간,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백기
넌 아직도 나를 조금은 무서워하는 거지?
유연
아뇨, 전 선배 안 무서워해요. 선배도 나를 날려버리고 싶진 않잖아요.
백기
특경에게 ‘협박’하지 마.
순간 바람이 일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 위가 다시금 익숙한 무게로 눌린 듯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벗기려 했지만, 다음 순간 내 옆을 스쳐 지나간 바람과 함께 엔진의 굉음이 길게 이어졌다.
백기는 어느새 예비 헬멧을 쓰고, 나는 그의 검은 헬멧을 안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다.
유연
이거 안 돌려줄 거예요!
내 분노 섞인 외침에 돌아온 건, 오직 그의 오토바이가 멀어지며 남긴 웅웅거리는 잔향뿐이었다.
그 엔진 소리가 시야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세계는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손에 든 헬멧을 바라보며, 손끝으로 세게 콕콕 찌르고 또 찔렀다. 그러다가, 결국 그것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미묘한 어긋남이 모든 걸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백기는 여전히 약간의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곳의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어렴풋이, BLACKCABIN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몇 아이들의 생명이 가을잎처럼 흩어졌고, 백기 또한 그 사건을 조사 중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이 혼란스러운 안개 속에서 나만의 윤곽을 그리려면 무언가를 확실히 붙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운명의 선물인지, 혹은 시험인지.
학교와도 당분간은 시간과의 조율이 필요했고, 백기 쪽에서도 별다른 정보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유연
그럼 그 몇몇 자살한 아이들의 부모부터 조사해볼까.
1-9 消失的孩子 사라진 아이들
他们来到了世界,却们开世界。
그들은 세상에 왔지만, 결국 세상에서 사라졌다.
01
외할머니의 일기, 앞으로도 그녀의 이름이 다시 기록될까.
2025년 9월 22일, 맑음.
아이의 자살 이후 필요한 절차들은 모두 끝냈다. 사인할 서류에도 다 도장을 찍었다.
딸과 사위는 바쁘니, 결국은 내가 몇 번 더 뛰어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부터 아이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새로 산 크레파스는 이제 막 봉지를 뜯은 참이었는데, 미술 시간에 쓸 거라며 아이가 기뻐했었다.
이제 더는 필요 없다.
나는 글씨를 쓸 때도 크레파스 따위는 좋아하지 않는다.
집 안의 화분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동덩굴은 3년 전에 산 건데, 매번 꽃을 피워 물에 우리면 맛도 좋았다.
삼각매는 처음 살 땐 작은 모종이었는데, 지금은 창문 한쪽을 거의 다 덮을 정도로 자랐다.
그리고 이름도 다 기억 못 하는 진달래 화분들이 몇 개 더 있다. 매해 차례차례 꽃을 피워 집에 들어서기 전부터 화려하게 눈에 들어오곤 했다.
원래는 늘 춘잉(春莹)이가 관리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베란다로 달려가 꽃을 챙겼다.
흙이며, 거름이며, 보조 조명까지 따로 사 와 가꾸던 애지중지하던 꽃들이었다. 덕분에 우리에겐 손댈 일이 없었다.
이제 와서는…… 정말로 돌볼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나는 혼자 집에서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불현듯 서글퍼졌다.
그 애가 언제 무슨 꽃을 샀는지, 용돈을 얼마나 아껴 모아 샀는지, 나는 다 기억한다.
앞으로 어떤 새 꽃을 사고 싶다고, 자신이 모아둔 작은 묘목들을 보여주던 것도, 다 기억한다.
그런데 이제 아이가 떠나고 나니……
왜 나는, 아이를 위해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걸까.
02
어디가 돌아갈 곳일까
불꽃아, 그래도 아직은 그녀를 받아주어 다행이다.
직원
혹시 고인 톈징(田晶) 양의 아버님, 톈리(田理) 씨 맞으신가요?
톈리
무슨 일이죠?
직원
따님은 이미 저희가 모셔와서 장례식장에 안치해 두었습니다. 언제 서비스 홀로 오셔서 절차를 진행하시겠습니까?
톈리
나 지금 지방 출장이에요. 그거, 애 엄마한테 물어보세요.
직원
시 씨(施女士)와는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톈리
그 여자를 당신네가 못 찾는다고, 내가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죠.
톈리
……이렇게 하죠. 당신네가 위임 처리도 받는다던데?
톈리
그냥 다 당신이 처리하세요. 돈은 나중에 보내줄 테니까.
톈리
비용은 전부 최저 단계로. 제일 싼 걸로요. 나 지금 다 녹음하고 있으니까, 수작 부리지 마.
직원
……그럼 화장 뒤 유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톈리
버리면 되죠. 번거롭게 하지 말고.
톈리
됐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03
장례식
눈물은 무엇을 위해 흐르는 걸까.
자오양(赵阳)의 상가 잔치에는 애도의 음악 대신, 소란과 싸구려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멘트뿐이었다.
“내빈 여러분, 입구 테이블에서 먼저 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하나 담담하거나 무감한 얼굴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 중 누가 그 소년과 어떤 관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친척? 친구? 혹은 그냥 낯선 사람?
모두 불분명했다.
“야, 여보—— 너 말이야, 자오양이 대체 왜 그런 거래? 혹시 연애 같은 거 하다가?”
“내가 네 조카 죽은 사정을 뭘 신경 써. 이따가 밥만 먹고 바로 가자고. 안 그러면 네 누나 또 돈 빌려달라고 할 거잖아.”
“사람들 이렇게 많이 왔는데, 한 사람만 백 위안씩만 줘도 돈 세느라 손 아프겠다?”
“아니 이게 무슨 꼴이야? 아들이 죽었는데, 네 누나는 꼭 그런 허름한 술집에서 자리를 차리고, 호텔에는 차마 장례식이라고도 밝히지 못했잖아. 안에는 지난번 결혼식에서 쓰다 남은 등롱이 그대로 걸려 있더라."
자오양의 어머니는 검은 치파오 차림이었고, 지나치게 화려한 장신구는 하나도 없었다.
그 얼굴엔 고통의 흔적조차 없었고, 오직 체면과 품위를 지키려는 미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 속에서, 마침내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하나의 늦게 시작된 연극처럼 성대히 무대 위에 올랐다.
그녀는 연단에 서서, 열 장이 훌쩍 넘는 연설문을 손에 들고 있었다.
따스한 노란 조명이 그녀의 눈물을 맑고 투명하게 비추었고, 울음소리도 날카롭거나 거슬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딱 알맞게 조율된 듯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이 어머니에게로 쏠렸다.
무대 한가운데 놓인 영정 사진을 바라보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곳에는, 맑고 단정한 얼굴의 소년이 있었다.
1-10 缺失的家 잃어버린 집
忍不了,就斗。더는 참을 수 없어, 싸울 거야.
아빠
복직하자마자 이렇게 바쁜 거니?
아빠
그래도 몸은 잘 챙겨야 한다.
아침에 내가 막 집을 나서려던 순간, 아빠에게서 다정한 안부 전화가 걸려왔다.
사실 그는 요 며칠은 집에 머물지 않았는데, 아마 내가 익숙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나름의 ‘일상’을 남겨두려는 듯했다.
근처에 작은 방을 얻어 두고는 가끔 들러서 안부를 전했다.
어느 날은 집밥 한 끼, 또 어느 날은 이렇게 짧은 전화처럼.
이 기묘한 세계 속에서, 아빠의 따뜻한 말은 오히려 더욱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유연
전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유연
아빠, 저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붙잡고 싶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귓가엔 온화한 목소리가 맴돌고, 눈앞엔 어두운 대문이 가로막혀 있었다.
문을 밀어 열자, 눈부신 빛이 망막을 스치며 현기증이 밀려왔다.
유연
……아빠, 왜 여기 계신 거예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떤 의문은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왔다.
전화기 너머, 한동안의 침묵 끝에 익숙하고 부드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빠
아빠 일이 이제 일단락되었으니까.
아빠
집에 돌아오고 나니, 여전히 네가 어린애처럼 느껴지는구나.
아이의 아버지
그 빌어먹을 학교, 날 애 취급하면서 가지고 논 거지!
유연
……자료를 보니, 자오양 군은 참 사려 깊은 아이 같았습니다. 혹시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아이의 아버지
왜? 당연히 학교 탓이지!
아이의 아버지
내가 우리 아들한테 얼마를 쏟아부었는지 너희는 알아? 애가 성공하라고 분유며 영양제 전부 최고급으로 사줬다니까!
아이의 아버지
학원비도 한 번도 밀린 적 없어. 이제 사람이 죽었는데, 학교가 보상 안 해?
아이의 아버지
쳇! 등록금 받을 땐 누구보다도 빨리 챙기더니, 일 터지니까 토해내라고? 안 하겠다고?
아이의 아버지
이따가 내가 이 몇 년간 쓴 돈 전부 목록 만들어서, 전부 두 배로 배상받을 거야.
유연
……두 배요?
아이의 아버지
내가 다시 애를 낳아야겠냐? 공짜로? 이게 다 비용이 아니냐고?
아이의 아버지
내가 말하는 건 보상만이 아니야. 그들은 내 노후와 장례까지 책임져야 해. 이건 학교가 나한테 빚진 거야.
유연
그럼, 아이가 뛰어내린 이유에 관해서는……
아이의 아버지
죽었으면 끝이지, 그게 뭐가 중요하냐?!
아이의 아버지
당신 기자 맞지? 네가 시키는 건 뭐든 다 해줄게. 돈만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다면, 무슨 말이든 해 줄 수 있어!
아이의 아버지
걱정 마. 학교는 돈 많아, 못 물어줄 리가 없어!
그의 격앙되고 흉한 말소리는 눈동자 가득한 핏발로 변해, 며칠 동안 내가 보아온 차갑거나 일그러진 얼굴들을 한데 겹쳐놓은 듯했다.
숨 막히게 무겁고, 달구어진 쇳덩이 같은 기운이 가슴에서 솟구쳐 목울대까지 치밀어 올랐다.
온몸은 무언가를 억누르듯 떨려왔고, 관자놀이가 쿵쿵 뛰며, 흐릿한 영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소년이 부모에게 받은 푼돈을 모조리 모아둔다. 그는 빵 조각 하나를 먹으며, 크고 작은 학원을 오가고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
걱정 마라. 아빠, 엄마가 뭐든 최고로 해줄 테니. 넌 아직 어리니까, 괜한 생각 하지 마라. 이런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아이의 아버지
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널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낼 거다. 남들한테 절대 뒤지지 않게!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무겁고도 자랑스러운 기대를 담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동시에 투지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
……돈 쏟아부은 게 다 헛수고였어.
어떤 것이 순식간에 증발해 사라졌다. 소년은 차가운 말에 내리눌려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표정은 이미 무감각해져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책과 점수표는 곧 벽이자 칼날이 되었고, 남자는 그를 구석에 몰아넣어 끊임없이 칼끝으로 베고, 그의 눈동자에까지 찔러 넣었다.
수많은 억눌린 순간들이 뒤엉켜 눈앞을 스쳐갔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마치 죽은 아이가 남긴 모든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듯했다.
유연
……당신 아이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유연
혹시 당신 같은 태도도, 아이를 그런 선택으로 몰아넣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아이의 아버지
빌어먹을, 내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공부까지 시켰어! 그런데 애가 죽어버렸잖아! 아직 내가 손해 봤다는 말도 안 했다고!
유연
……아이를 잃고도, 당신 머릿속엔 ‘손해’니 ‘배상’이니 하는 것밖에 없는 겁니까?
유연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죠?
아이의 아버지
이게 무슨 소리야? 애 사정을 묻겠다면서, 내가 다 학교 문제라 했잖아! 그런데 날 비난한다고?
아이의 아버지
안 찍어! 그만 찍어!
그가 벌떡 일어나 옆에 세워둔 카메라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막아섰지만, 그는 위협하듯 손을 휘둘러 나를 밀쳐내려 했다.
아이의 아버지
뭐 하는 거야! 조심해, 고소할 거야!
그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 손은 허공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백기가 차갑게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검은 가죽 장갑이 서늘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전부터 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백기의 시선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가더니, 결국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그 남자의 얼굴에 멈췄다.
백기
말 똑바로 해.
아이의 아버지
아이고, 경찰관님! 오셨군요. 사실은 저 여자가 먼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은 겁니다.
아이의 아버지
지난번에 저더러 아이의 친구 관계 조사해보라 하셨잖아요? 다 알아봤습니다.
아이의 아버지
말할 것도 없이, 전부 좋지 않은 애들이에요! 분명 누군가 부추겼을 겁니다! 학교를 고소하고 나면, 그 부모들도 다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는 두툼하게 쌓인 서류뭉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백기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마치 “이제 그만 나가라”는 듯한 신호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눈길을 아무렇지 않은 듯 피했다.
백기
특파팀에서 수사 중이야.
유연
……하지만 지금은 우리 회사가 취재 중이에요. 아무리 봐도 제가 먼저 왔잖아요.
백기
그는 방금, 안 찍겠다고 했어.
유연
그런데 선배가 막아주셨잖아요. 그래서 촬영은 아직 계속되고 있어요.
내 말을 듣자, 그는 미간을 살짝 올렸다. 긴 다리를 내디뎌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더니, 촬영 기사가 반응하기도 전에 까만 장갑 낀 손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꺼버렸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 얼굴엔 오히려 뻔뻔할 만큼 당당한 기세가 어려 있었다.
내가 막 변명하려 입을 떼려는 순간, 들뜬 목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아이의 아버지
찾았다, 경찰관님! 이거 보세요.
아이의 아버지
애가 쓰던 뭐 QQ라던지, 웨이보니, 도우인 계정, 아, 그리고 일기까지—다 애 엄마 시켜서 몽땅 뒤져봤습니다.
더 적나라하고 더 자극적인 것들이 피 묻은 사진처럼 종이 위에 펼쳐졌다. 마치 살갗을 벗겨낸 뒤 뼈와 신경까지 잡아 끌어내는 듯한 기록이었다.
아이의 아버지
이걸 전부 인터넷에 뿌릴 겁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거예요!
유연
……당신, 어떻게 아이가 남긴 걸 그렇게 다룰 수 있죠?!
유연
이미 떠난 아이의 마음까지 그렇게 짓밟으려는 겁니까?
아이의 아버지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네가 찍기 싫으면 딴 데 가서 찍으라지. 연모시에 네 회사 하나만 있는 줄 아냐?
아이의 아버지
분명히 말해두는데, 오늘 찍은 건 내가 절대 동의 못 해! 한 글자라도 내보내면……
백기
그 기록이 다인가?
백기
네가 말했던, 아이가 차고 다니던 전자시계는 찾았나?
차가운 목소리에 말이 끊기자, 남자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공손하게 백기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아버지
그건 아직 못 찾았습니다. 원래라면 늘 차고 다녔어야 하는데……
아이의 아버지
어쩌면 학교에서 숨긴 걸지도 모르죠! 안에 결정적인 증거가 있을지도!
백기
알았다.
백기
협조해줘서 고맙다.
그는 몸을 돌려 나가려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내 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경고 같았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촬영기자에게 눈짓을 보낸 뒤, 그 남자에게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오늘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의 아버지
어서 꺼져!
유연
……
나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성큼 문 쪽까지 걸어갔다. 하지만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유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아이를 그리워한 적이 있습니까?
돌아온 건, 너무도 단호한 문 닫히는 소리였다.
나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 속 어떤 결핍은 더욱 크게 벌어져, 차가운 공허만을 남겼다. 그 안엔 따뜻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이 비극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이유들이 겹쳐 있었다.
내 눈앞의 이 모든 것이 원래부터 그런 것이었는지, 아니면 역시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결과인지는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 아이, 그리고 그 몇몇 아이들이 삼켜져버린 순간은.
아파트 단지를 나오자, 촬영 기사는 눈치껏 먼저 차에 올라탔다. 나만 대문 앞에 홀로 남겨졌다.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옆에서 블랙이에 걸터앉았다.
유연
……선배, 그 아이…… 그렇게 대우받을 아이가 아니에요.
백기
각자의 집마다,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있어.
백기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유연
하지만……!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분노보다 더 앞서 느껴진 건 그 호박빛 눈동자의 섬뜩한 고요였다. 그 눈빛은 한순간에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손잡이를 움켜쥔 그의 손등은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고,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기
아무도 자신의 부모를 선택할 수 없어.
백기
참지 못하겠다면, 싸워.
백기
싸울 수 없다면, 도망쳐.
유연
……
나는 거의 처음 보는 듯한 백기의 모습에 낯설음을 느끼면서도, 왠지 모르게 익숙하기도 했다.
그는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진 채 홀로 서 있었지만, 온몸에 날카로운 가시를 돋운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 가시는 바깥으로만 향하는 게 아니라, 안으로도 자라나 그의 몸까지 찔러대는 듯했다.
유연
그렇다면…… 싸워 이길 수도 없고, 도망칠 용기도 없다면요?
백기는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침묵하는 한 채의 탑처럼. 찰나의 순간, 그는 금방이라도 시동을 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거의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바람이 스치며 그의 앞머리를 흔들었고, 그 눈빛은 마치 열여덟 살 때와 다름없었다.
분노하고, 몸부림치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외면하고 싶어하는 눈빛.
백기
그렇다면 강해지면 돼.
백기
강해져서, 어떤 선택이든 할 용기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유연
……그 용기, 정말 단지 ‘스스로 강해진다’는 것에서만 비롯되는 걸까요?
나는 더 정확한 말을 찾지 못했다. 아마 ‘강해짐’ 그 자체 외에도, 불행한 아이들을 떠받쳐 주는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불타는 약속, 따뜻한 곁, 올려다보며 의지할 수 있는 시선, 혹은 애정을 머금은 찰나의 순간.
백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내 물음에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고, 핸들을 쥔 손에 더 큰 힘이 들어갔다.
유연
선배 눈에는…… 자오양이, 스스로 선택을 한 걸로 보이나요?
백기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야. 그 답은 내가 반드시 찾아낼 거야.
그럼, 선배는요?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결국 그 질문은 삼켜버렸다.
그가 고개를 살짝 떨구더니, 헬멧을 집어 들어 머리에 씌우려 했다.
유연
……선배, 우리도 아이들을 그렇게 가혹하게 대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요?
유연
꼭…… 아주 강인한 아이가 되어야만 하나요?
백기는 등을 굽힌 채,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유연
부모의 기대와 실망, 그 모든 걸 한 아이가 짊어지고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어요.
유연
나도 알아요. 이렇게 말하는 게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고, 무책임한 부모들을 단번에 바꿀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아요.
유연
하지만 그래도 저는 계속할 거예요. 말할 거예요. 제가 옳다고 믿는 말들을.
유연
모든 아이들에게 알려줄 거예요. 너희는 잘못된 게 아니라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혼자가 아니라고.
유연
그리고 나는 너희와 함께 분노할 거라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럽게 어둠이 시야를 덮쳤다.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눈을 가려, 그의 모습마저 삼켜버렸다.
마치 피하는 듯, 백기는 다시 한 번 강하게 헬멧을 내 머리에 눌러 씌웠다.
유연
……뭐 하는 거예요?
백기
……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정작 본인조차 지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몇 마디를 짜내듯 내뱉었다.
백기
……나 보지 마.
그의 목소리는 경고처럼 들렸지만, 결코 단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딱딱하게 긋는 한 줄의 평평한 선 같았다.
백기
……네가 뭘 하든, 그건 네 일이야.
백기
나한테 들려줄 필요 없어.
1-12 记忆重回 기억의 회귀
我的记忆Evol又再次回到我的身体了。
내 기억의 Evol이 다시 한 번 내 몸으로 돌아왔다.
학교 밖에서 얻은 모든 단서들과 부모들이 내민 자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몇몇 고등학생들은 자살한 것 같다고.
유연
……역시 이것도 단지 가정교육 때문에 벌어진 비극일 뿐일까?
며칠 동안 찾아갔던 부모들의 얼굴이 떠올라,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회사 사람들에게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정리해 달라고 지시하며, 동시에 연모고등학교로 향했다.
수차례의 설득과 끈질긴 부탁 끝에, 내가 이 학교의 우수 졸업생이라는 점을 감안한 교감은 아주 작은 인터뷰와 조사를 허락했다.
물론, 학교에 불필요한 부정적인 여론이 생기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였다.
나는 캠퍼스를 걸으며 묵묵히 강의동 건물을 바라보았다.
설령 이 사건이 평범한 사회 사건에 불과하더라도, 끝까지 매듭을 지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사흘 전 백기가 차를 몰고 떠나던 뒷모습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그러던 중, 경비원과 스치듯 지나가던 순간——갑작스러운 어지럼증이 내 머릿속을 세차게 휘몰아치며, 나는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
바로……여기……나는……없었……
??
신고……경찰……잠금……현장……
??
열쇠……잠갔다……
낯설고 흐릿한 영상 위로 수많은 목소리가 흘러넘쳤다. 뒤엉킨 말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도, 그 속엔 어쩐지 익숙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이게……뭐지? 이 사람들은……누구지?
나는 크게 숨을 몰아쉬며, 옆의 은행나무 줄기를 붙잡았다. 눈을 크게 뜬 채, 당황스러움에 몸이 굳었다.
그때 맑디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한 장의 은행잎이 내 손바닥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는 것처럼.
백기
당신이 사건의 첫 발견자 맞습니까?
백기
특파팀입니다. 상황을 좀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는 내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장면이 서서히 흩어져, 녹아내리며 낙엽이 된 듯 땅에 쌓였다.
눈앞에는 다시 고요한 캠퍼스의 풍경만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방금의 모든 것이 한낱 꿈이었던 것처럼.
아니…… 아니야.
나는 문득 자오양의 집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게 떠올랐다.
유연
설마……
믿을 수 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방금의 그 흐릿한 조각들을 되짚어 보았다.
순간, 무언가를 깨닫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멀지 않은 곳의 경비원에게 달려갔다.
경비
조사 끝났어요?
방금 전 조각 속에서 유일하게 익숙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내 추측을 어느 정도 확인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마지막 확인까지는…… 아직 한 걸음 남아 있었다.
유연
아니요, 저는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요.
유연
기다리는 동안, 이 학교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도 좀 들어보고 싶어요.
어쨌든 여기서 일하시는 건 연모고등학교의 ‘수호자’ 같은 역할이잖아요.
경비
허허, 무슨 수호자예요, 일일 뿐인데요.
그는 손을 휘저었지만, 얼굴에는 칭찬이 은근히 기분 좋은 듯한 빛이 스쳤다.
유연
그런데…… 혹시 그 아이들 사건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
경비
그건 더 이상 묻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그 경찰 분께 약속했거든요. 사건 관련 정보는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고.
경비
안 그러면 정보 누설죄로 잡아간다고 하더라고요!
유연
그럼요, 그럼요. 제가 괜히 폐 끼치진 않을 겁니다. 대신 연모고에 대해 말씀 좀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학교의 현 상황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가볍게 던졌다.
이야기를 마무리할 즈음, 나는 일부러 뜨겁게 그의 손을 잡았고 본능적으로 힘이 흘러나갔다.
——역시, 그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의 기억 Evol이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온 것이다.
순간, 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과거, 소망 호텔에서 션둥에게 빼앗겼던 그 능력이 이렇게 다시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혹시 내가 세상을 바꾼 영향 때문일까?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의문이 밀려들었지만, 지금은 곱씹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흩어지려던 생각을 거두고, 눈앞의 경비원의 기억에 집중했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능력인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곧바로 내가 원하던 장면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백기
당신이 사건의 첫 발견자 맞습니까?
백기
특파팀입니다. 상황을 좀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는 방금 스쳐 지나간 기억 조각 속 모습 그대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얼음처럼 차가운 호박빛 눈동자가 가득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경비원
아, 예예, 경찰관님.
백기
18일 당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세요.
경비
그게… 저, 저는 아침 다섯 시쯤 운동장을 순찰하다가 발견했습니다……
경비
그때 너무 놀라서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요.
백기
17일 저녁에도 당신이 순찰을 돌았습니까?
경비
네, 우리 학교는 밤 여덟 시에 정식으로 하교라서, 대략 여덟 시 반쯤이면 학생들이 다 나갑니다.
경비
그리고 우리는 여덟 시 오십 분쯤부터 일괄적으로 점검을 시작해요. 밤에 학생이 교내에 남아 있지 않은지 확인하는 거죠.
경비
저는 그때 동쪽 구역 담당이었는데, 아주 분명히 기억합니다.
경비
제 휴대폰에 고정된 아홉 시 알람이 있는데, 마침 동쪽 쪽 작은 농구장을 지나갈 때 울렸습니다. 그 길로 곧장 추락 지점까지 갔죠.
경비
그때 그렇게 넓은 공터에, 시신은커녕 사람 그림자조차 없었습니다.
백기
그 구역을 지나가는 데 몇 분이나 걸렸죠?
경비
……아무리 길어도 5분은 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백기
옥상 열쇠는 당신이 가지고 있습니까?
경비
맞습니다. 옥상 열쇠는 총 두 개뿐인데, 하나는 외부 대여용이고, 다른 하나는 예비용인데 둘 다 경비실에 있습니다.
백기
제출된 CCTV 영상에 따르면, 17일 밤 9시 3분에 벽 모퉁이에 학생의 손이 찍혔습니다.
경비
그럴 리가요! 조사할 때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아홉 시에 제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사람은 전혀 없었다고요!
경비
학생이 네 명이나 뛰어내렸는데, 제가 귀머거리도 아니고 소리를 못 들을 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피도 그렇게 많았는데!
경비
저도 그 뭐냐… 뇌 검사까지 받았어요. 결과도 이상 없다고 했습니다!
백기는 그저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곁에서 당조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경비
하지만 뭐, 특파팀까지 나섰다는 건…… 역시 Evol 때문이겠죠? 그 애들, 그 괴물들이 사고 친 거 아닌가요?
백기
협조해줘서 감사합니다.
백기
추후 필요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백기
그리고 사건 조사 보안 규정상, 오늘 포함해 이전에 진술했던 내용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바람처럼 매끄럽게 몸을 돌려 떠났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찌푸려진 그의 눈매가 내 시야에 남았다.
깊고 어두운 호박빛 눈동자 속에는, 마치 곧 폭풍이 일어나려는 기운이 서려 있었다.
나는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경비원의 당시 기억을 살펴보았다.
정시에 울린 알람 소리, 텅 빈 구석. 모든 것은 그가 말한 대로였다.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던 장면은 단 한순간 스쳐갔을 뿐인데도 너무 선명해, 차마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러나 흐릿한 시야 속에서, 나는 아주 미묘한 왜곡을 발견했다.
투명한 불길이 스쳐간 듯, 벽 모서리 부분이 기묘하게 흐르는 것처럼 일렁였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 짧아,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의문만 더 짙어질 뿐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모순된 기운을 풍겼지만, 이 남자의 기억에는 누군가가 수정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역시 Evol과 관련이 있는 걸까?
나는 태연한 척하며 경비원의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감사 인사를 전하는 동시에, 마침 점심 종이 울려 퍼졌다.
점차 소란스러워지는 강의동을 바라보다가, 나는 조금 전 기억 속에 비친 백기의 얼굴을 떠올렸다.
백기…… 단지 이 자살 사건 때문만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절박한 표정을 지은 걸까?
학생A
왕샹위? 난 걔랑 안 친해. 걔도 다른 애들이랑 말하려 하지 않았어.
학생B
전에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지난 학기쯤부터인가 갑자기 이상해졌어. 뭐만 하면 폭발하듯 굴더라고. 마치 세상이 전부 자기만 공격하는 것처럼.
학생A
피해망상증 아니야? 세상이 다 자길 주목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신경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학생C
자오양? 응, 걔 내 짝이었어. 그냥 보통이었지. 수업 들을 땐 수업 듣고, 복습할 땐 복습하고.
학생C
맞아, 친구라고 할 수 있긴 한데, 우리 나이에 무슨 맨날 “오늘 기분 어때?” 이런 걸 묻고 다니냐? 전에는 잘만 지냈잖아.
학생D
근데 난 진짜 쩌우츈잉이 뛰어내릴 줄은 몰랐어! 그렇게 조그맣고, 말도 조용조용하게 하던 애였는데…… 의외로 대단했네.
학생E
에이, 언니! 그래서 톈징 진짜 자살한 거 맞아? 혹시 속보 같은 거 없어요? 반 애들한테 떠벌릴 거리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요즘 재밌는 게 없거든요.
학생F
난 그 애들 전혀 모르는데, 어차피 지금 지구에 사람도 너무 많고, 세상은 곧 망할 텐데, 몇 명 죽는 게 뭐가 대수야. 게다가 자기가 선택한 거잖아.
학생G
그러고 보니 우리 반 완여우(万游)도 며칠째 학교 안 나오는데, 혹시 걔도 요즘 유행 따라가는 거 아냐?
교무주임
이 애들은 그냥 평범한 학생들인데, 성적도 반에서 중간 수준 정도고, 특별히 눈에 띄는 것도 없었어.
교무주임
대체 왜 갑자기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두에게 민폐만 끼치고, 참 철없구나 싶다.
유연
……
온갖 목소리들이 물처럼 내 곁을 스쳐 흘러갔다.
그 말들은 검은 암초에 부딪혀 하얀 거품을 튀기며 온몸을 덮쳐와, 차가운 소름을 안겨주었다.
어딘가 더없이 냉담하고, 멀리 떨어진 듯한 공기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아이들의 눈은 하나같이 텅 비어 보였다.
고3 7반 교실 앞을 지나던 나는 무심코 발걸음을 멈췄다.
창가 쪽 자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고르듯 멈춰섰다.
여기는 내가 기억하는 연모고등학교가 맞았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낯설었다——
마치 이 세계처럼, 마치 백기처럼.
한때 이 자리에 앉아 있던, 서툴고 거칠며 길들여지지 않던 그 소년도…… 지금의 나처럼 의심과 혼란으로 가득했을까.
세상이 고립의 울타리를 드리워도, 나는 과연 그때의 당신처럼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그러나 바람은 가볍게 스쳐갔을 뿐. 고요한 자리에는, 차갑고 무심한 그 소년이 고개를 돌려 대답해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
갑자기, 누군가의 시선이 내게 꽂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눈에 들어온 건 그저 오가는 학생들의 무리일 뿐. 특별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연
……그만 생각하자.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번 백기의 자리로 시선을 흘긴 뒤, 발걸음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작은 농구장을 지나자, 시야에 한가운데 빈 공간이 펼쳐졌다.
늘 그늘진 듯한 이곳은 계절 탓에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땅바닥은 깨끗했고, 은행잎 몇 장이 소리 없이 흩날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벽 모서리를 유심히 살폈지만, 경비원의 기억 속에서 본 것 같은 미묘한 왜곡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세상은 지독하게 고요했고, 구름 한 점이 다른 구름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날카롭고, 피할 틈조차 없는 시선이 내 눈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천장의 끝자락, 백기가 옥상 난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13 天台的你 옥상의 너
现在我们在同一个位置了,白起。
이제 우리 같은 자리에 있네, 선배.
내 머릿속이 순간 텅 비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거의 모든 힘을 쥐어짜내 옥상 문을 밀어 열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하늘은 마치 한 장의 유리처럼 펼쳐져, 아득하고도 눈부신 빛을 흘려보냈다.
가을 햇살은 서쪽으로 기울며, 백기의 그림자를 길지도 짧지도 않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나와 달리,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죽어간 아이들을 떠올리며 사색에 잠긴 듯했다.
유연
선배……
백기
뭐가 무서워?
내 불안함을 눈치챈 그는 그렇게 말하며, 태연하게 허공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백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공중에 정지해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휘날리며, 외롭게 선 하나의 실루엣을 그려냈다.
공중에 매달린 다섯 번째 아이 같았다.
나는 그 실루엣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앞으로 걸음을 내디뎌 그의 시선과 마주했다.
유연
선배 괜찮아요?
백기
……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바로 다음 순간 옥상 철 난간 위로 발을 옮겨 서서 가을빛의 대부분을 가려버렸다.
백기
걱정 마. 나 예전에 여기서 떨어진 적 있어.
백기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거야.
유연
선배, 왜 여기서 떨어진 거예요?
백기
과거 얘기는 할 가치가 없어.
유연
그래도 알고 싶어요.
백기
난 네 동정이 필요하지 않아.
그는 철책 위로 우뚝 서서, 마치 수년 전과 다름없이, 한 사람의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는 냉담하고, 길들여지지 않는 오만함으로 얼굴을 채우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한때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눈부셔서—그가 어떻게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를 무장하며 이 세상과 맞서 싸워왔는지를 나는 잊고 있었다.
그는 너무 강했고, 또 너무 자유로워 보여서, 그 마음속에 여전히 풀리지 못한 매듭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때 깊이 새겨진 상처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나는 거의 잊을 뻔했다.
그 길들여지지 않는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처럼 그의 고집스럽고도 위험한 눈빛을 똑바로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벅찬 감정이 격렬하게 치밀어 올라,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철제 난간을 꽉 붙잡은 채 계속 위로 올라갔다.
백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상관하지 않고 한 발, 또 한 발. 마침내 난간 꼭대기에 올라서자, 그 가느다란 난간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아슬하게 흔들렸다.
그 철제 난간은 너무도 가늘어서, 바람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아슬아슬하게 떨려왔다.
나는 그 아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저 위까지 올라갔을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떨어졌다’고 말한 백기가, 어떻게 저 옥상 가장자리를 밟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거대한 현기증이 마음을 집어삼켰고,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손이 내 손바닥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백기
너 지금 뭐 하려는 짓이야……! *아까보다 더 강한 어조
유연
이제 우린,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거예요, 선배.
그는 순간 숨을 멈춘 듯했다.
유연
여기…… 너무 높아서 벌써 무서워 죽겠어요. 그 아이들도, 그리고…… 분명 다 무서웠겠죠?
백기
나는 싸움 때문에 떨어진 거야. 그 아이들과는 달라.
유연
싸우다 누군가를 밀어 떨어뜨린 거라면…… 그게 더 끔찍한 거잖아.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불편한 듯 시선을 슬쩍 피했다.
유연
그때 다치진 않았어요?
그는 잠시 멍하니 굳더니, 내 손끝을 무의식적으로 더 세게 움켜쥐었다. 마치 무언가를 꼭 붙잡고 있는 듯.
백기
……아니.
난……
운이 좋았던 거야.
유연
……정말 다행이에요.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금세 놓였고, 나도 그의 손을 힘주어 되잡았다.
유연
저는 선배를 동정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선배를 알고 싶고, 더 많은 걸 알고 싶고, 선배 곁에 서 있고 싶어요.
유연
말해줘서 고마워요, 선배
백기
말 안 하면 네가 더 시끄럽게 굴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고, 그는 드물게 난처한 기색을 보이더니, 내 손을 잡아끌어 함께 옥상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유연
선배, 정말 누군가가 그 아이들을 해친 거라고 생각해요?
백기
너희 회사에서 낸 보도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냥 평범한 자살 사건일 뿐이야.
유연
에이, 우리 기사까지 챙겨 본 거예요? 요즘 조회수도 별로 안 나오던데.
백기
……
그는 한동안 말없이 숨을 억누르며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이 오히려 내 웃음을 더 깊게 만들었다.
유연
내가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으로는 그래요, 자살 사건이 맞는 것 같아. 하지만 그건 전체의 일부일 뿐이에요.
유연
오늘 또 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게다가 선배는 여기 있었고.
백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유연
만약 이게 정말 단순한 자살 사건이라면, 선배가 이렇게 오래 매달려 조사할 리가 없잖아. 선배는 의심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전…… 선배의 직감을 믿어요.
그는 순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가, 곧 무심하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백기
네 마음대로 해.
곧이어 그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옥상 출입문 쪽으로 향하려는 듯했다.
차가움과 거리감이 다시 바람처럼 그를 감쌌고, 그 바람은 내 마음을 시리게 훑고 지나갔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나는 억지로 쓴웃음을 지어냈다.
유연
내가 돌아온 뒤로…… 선배는 날 볼 때마다 항상 떠나려 하네요.
백기
난 그런 적 없어.
거의 같은 순간, 그는 즉각 부정했다. 너무 빠른 대답이었기에, 그 말은 오히려 그 자신조차 놀라게 한 듯했다.
결국 백기는 군화로 바닥을 세게 눌러 밟으며, 마치 초조함을 삭이지 못한 채 문을 세게 닫아버리더니, 성급하게 내 손목을 잡아끌어 함께 계단에 주저앉혔다.
백기
……난 그냥 문 닫으러 간 거야.
투박하고 퉁명스러운 말투에, 온몸은 뻣뻣했으며, 얼굴은 옆으로 돌린 채 내 시선을 피했다.
주위는 고요해졌다. 바람조차 고요히 멎은 듯. 백기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순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백기
난…… 단지 모르겠어.
네 옆에 어떻게 있어야 할지를.
내 손끝과의 거리를 어느 정도로 둬야 할지,
내 시선을 네 위에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
내 걸음을 어떤 속도로 너와 맞춰야 할지,
내 말을 어떤 어조로 네게 건네야 할지……
네 눈물을 어떻게 받아내야 하고,
네 웃음을 어떻게 품어야 할지.
기억 속의 나는 단순히 ‘지켜주는 존재’였는데,
그때는 어째서 자연스럽게 네 손을 잡고,
네 눈을 바라볼 수 있었던 걸까.
이제는 과거처럼 널 대할 수 없어진 내가, 과연 여전히 네 앞에 당당히 다가갈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왜 나는 여전히 여기, 네 곁에 머물러 있는 걸까.
내가 반드시 네 옆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조차 이제는 알 수 없어졌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채우고,
네가 다시 나타난 뒤, 모든 것이 더 혼란스럽고 모순투성이가 되었다.
——난 널 좋아해.
하지만 단지 ‘좋아한다’는 두 글자로는
내 망설임과 괴로움을 다 담을 수 없어.
유연
선배는…… 우리가 과거에 겪었던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요?
백기
난 약속을 제대로 지켰다고 생각해. 널 다치지 않게, 지켜냈으니까.
백기
……하지만 그건, 내 온실 속에서의 일이었어.
찬란했던 여름방학, 환한 보름달, 스쳐가는 한 줄기 바람 같은 거였다.
그녀는 날 위로해 주고, 밝혀주고…… 그리고 스쳐갔을 뿐이다.
흔들리고, 나약했던 건 바로 나였다.
유연
……선배는 오히려 저에게 보호받고 있었다고 느낀 거예요?
백기
내가 강하지 못했으니까.
기억 속의 나는 너무 무르고, 너무 망설이며, 너무 약해서……
그저 그녀의 예쁜 눈에 오래 머물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백기
그래서, 내 여름방학은 이제 끝내야 해.
그는 다시 폭풍 속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말로 내뱉었을 뿐인데, 그는 오히려 더 괴로워 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백기
……그래도, 난 답을 찾아낼 거야.
나는 그가 한 손으로 뒷목을 감싼 채, 반쯤 고개를 젖히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괴롭고도 솔직했으며, 턱선마저 너무도 아름다웠다.
나는 살짝 웃었다.
무슨 일이 있었든, 그래도 나는 알고 있었다. 백기는 여전히 백기였다.
유연
선배는 내가 어떤 모습이 되길 바라요? 선배랑 함께할 때.
백기
너는 그냥 너 자신이면 돼.
유연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유연
선배, 나도 바라는 게 있어요. 선배도 선배 자신이었으면 해요.
선배가 어떤 모습으로든 — 우리가 상상하는 그 어떤 틀에 맞출 필요 없어요.
유연
전에 책에서 본 말이 하나 있어요. ‘여름방학은 시간의 사치품이다, 구름을 보며 꿈꾸는 소년들의 것’이라고.
나는 일어서서 백기 앞에 섰다.
유연
선배는 이미 가야 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렇죠?
백기
난 이제 열여덟이 아니야.
유연
나도 그래요. 열여섯의 나는 감히 이렇게 네 앞에 서 있지 못했을 거야.
나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손을 들어 마치 도전장을 내미는 것처럼 그를 가리켰다.
유연
나는 선배의 ‘여름방학’이 아니에요.
유연
나는 선배와 함께 답을 찾아내고,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에요.
1-15 “偷袭”与调查 “기습”과 조사
白起,你说这算不算也是命运给我们另一个角度认识彼此呢?
선배, 이게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운명이 준 건 아니라고 생각 안해요?
유연
그러니까, 선배 수사한 내용 좀 나랑 공유해줄래요?
백기
그건 특파팀 기밀이야.
잠깐 눈을 깜박였을 뿐인데, 그는 바로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철망에 몸을 기대, 다시금 쿨한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유연
기밀 맞죠. 하지만 저도 선배한테 숨길 생각은 없어요.
방금 Evol을 써서, 문지기의 기억에서 몇 가지 단서를 봤거든요. 선배랑 그가 나눈 대화까지.
백기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를 입 다물게 한 것도, 쓸데없는 추측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하려던 거야.
유연
맞아요, 선배 말대로예요. 하지만 그날 밤 그의 기억을 보니까, 아주 특별한 장면이 있더라고요
백기
지금 애 태우는 거야?
유연
그건 백 형사님의 ‘성의’에 달렸죠.
백기
난 흥정 같은 건 안 해.
주고 싶으면 주고, 싫으면 말고. 어차피 나는 결국 알아낼 거니까.
백기는 미묘하게 눈썹을 올리더니, 두 팔을 가슴에 꼰 채, 기세 당당한 얼굴로 서 있었다.
유연
…선배, 이거 너무 매정한 거 아니에요?
백기
네가 말했잖아. ‘있는 그대로 하라’고.
그럼 잘 생각해. 난 인내심이 많지 않으니까.
전에 이렇게 고집 센 줄은 몰랐는데.
그가 살짝 올린 입꼬리를 보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풀려 버렸다.
선배, 이게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운명이 준 건 아니라고 생각 안해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결국 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유연
그 사람의 기억을 확인했어요. 수정된 흔적은 전혀 없었어요.
유연
하지만, 그가 막 현장에 도착했을 때 시야 구석의 벽에서 뒤틀려있는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났어요.”
백기
벽에 뒤틀린 흔적이 있었다고?
백기
그런 얘기는 전에 못 들었는데.
유연
아마 본인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예요. 기억의 한 구석 같은 거니까요.
유연
기억은 주관적인 의식보다 더 많은 걸 기록할 수 있잖아요.
그 순간, 백기의 눈빛에 잠시 알 수 없는 깊은 기색이 스쳤지만, 곧 감춰졌다.
백기
그 뒤틀린 흔적, 어떤 모습이었지?
유연
마치… 불꽃 위로 보이는 풍경처럼 흔들리면서 일렁이는 느낌이었어요.
유연
하지만 근처에는 불이 난 흔적은 전혀 없었어요.
백기
그 위치, 나한테 직접 가리켜 줘.
그는 문제의 심각성을 눈치챈 듯,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연
좋아요, 따라 와요.
나는 옥상 출입문 쪽으로 달려가려 몸을 돌렸다.
하지만 갑자기 한 줄기 바람이 휩쓸리듯 다가와, 나를 차갑지만 동시에 따스한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의 팔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왔지만, 바로 다음 순간 굳어버려 우리 둘은 눈을 마주치고 얼떨떨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유연
……?
백기
……
백기
뛰어 내려가는 건 너무 느려.
그의 귓불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백기
참, 만약 네가 기습한 거라면 내가 말한 건 무효야.
유연
……응?
내가 반응할 틈도 없이, 백기는 나를 꽉 안은 채 바람을 밟고 크게 뛰어올라, 철책을 넘어 곧장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 무척이나 밝고 선명한 눈동자 속엔 호박색으로 가득 찬 ‘나’가 비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백기가 은밀히 전하고 있던 의미를.
빠르게 떨어지는 순간,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나는 곧바로 그를 다시 끌어안으며 Evol을 발동시켰다.
법의관
이 시신들은 모두 전형적인 추락사입니다. 다른 폭행 흔적은 없어요.
법의관
사망 시간은 어젯밤 10시 전후로 추정됩니다.
백기
…열 시라고?
법의관
시반 정도와 강직 상태를 봤을 때, 사망 시각은 7시간을 넘지 않았습니다.
고진
조사한 결과, 쟈오양이 사라진 손목시계가 마지막으로 신호를 보낸 건 17일 저녁 8시 15분, 학교 정문 근처 버스정류장이었어.
그 시계는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신호를 남기는데, 당시 버스를 이용했던 승객 전원을 확인했지만 시계는 발견되지 않았고.
고진
모순점이 너무 많아. 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쟈오양의 시계를 가져간 걸꺼야.
고진
게다가 쟈오양의 몸에는 어떤 폭행 흔적도 없었어. 도난일 수도 있고, 쟈오양이 스스로 건넸을 가능성도 있지.
백기
만약 도난이라면,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셈이고.
백기
게다가 사라진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신호가 한 번도 다시 잡히지 않았어.
마치 상대가 그 시계가 추적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고진
어차피 자살 사건은 이미 뉴스에까지 나갔으니까.
백기
하지만 정말 자살이라면, 굳이 시계가 조사되는 걸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 그가 걱정하는 건 뭘까……?
고진
그 시계 안에 뭔가 드러나선 안 될 기록이 있었고, 누군가가 그걸 빼앗아 간 거라면
……하지만 이상하잖아. 만약 쟈오양이 뭔가를 발견했다면, 그 아이 혼자만 자살로 위장시키면 충분했을 거야. 굳이 집단 자살로 꾸밀 이유가 없어.
고진
오히려 일이 더 복잡해졌어. 몰래 빼앗으려면 은밀해야 하는데, 집단 자살은 너무 눈에 띄어. 앞뒤가 맞지 않아.
게다가 조사해본 결과, 그 아이들이 실제로 생활에 큰 불만이 있었고, 자살 성향도 일부 확인됐어.
백기
……
백기
학교 CCTV에는…… 그 아이들이 옥상으로 올라간 장면은 찍히지 않았지?
고진
맞아. 그 구역엔 CCTV가 없었어. 복도 카메라에만, 아이들이 하교 후 교실을 나서는 장면만 찍혔어.
백기
……
이 집단 자살 사건에 연루된 게…… 정말 네 명의 아이들뿐인걸까?
백기
시신에선 Evol 파장이 검출됐나?
소위
네, 백 대장님. 하지만 농도가 극히 미약해서, Evolver가 직접 개입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소위
아마 Evol 구동 장치 같은 게 남긴 잔여 흔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Evol 지문도 전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조해본 결과…… 아주 이상한 점이 하나 발견됐습니다.
수많은 파편 같은 장면들이 내 머릿속으로 들이닥쳤다.
그 안에 담긴 정보량이 너무 거대해, 나는 그저 무력하게 그것들을 의식 속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추락하는 순간, 거센 바람이 휘몰아쳐 우리를 안전하게 지면 위에 내려놓았다.
어지럼증이 몰려오자,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몸에 기대고 말았다.
백기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오래 침묵하다가,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기
……이렇게 계속 매달리면, 이번엔 정말 기습으로 간주할 거야.
유연
내가 정말 백 형사의 새끼손가락까지 기습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나는 아쉬운 듯 손을 풀고 반걸음 물러섰다.
백기
만약 그 아이들이 정말 여기서 떨어진 거라면,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이야.
유연
이 1~2초 동안에 시간이 10시에서 9시 03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어요. 분명 뭔가가 있었고, 그게 이 아이들의 죽음과 시간 기록을 바꿔놓은 거예요.
유연
Evol 지문이 뭐예요?
백기:
그건 특파팀 기밀, 아니……
백기
너 뭐 하는 거야?
내가 또다시 코알라처럼 달라붙자,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 귀가 또 빨개졌다.
유연:
괜찮아요, 제가 한 번 더 '기습'하면 돼요.
백기
……
백기
전엔 이러지 않았잖아.
유연:
아마 전에는 선배가 항상 내 말을 들어줬기 때문일 거예요.
나는 웃음을 지었고, 그러자 어쩐지 과거에 살며시 떠받쳐진 용기가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유연
그러니까 선배는 아직도 내가 얼마나 고집스러운건지 모르는 거라구요.
백기
알고 있어.
백기
그게 아니었으면 네가 그런 책임을 떠맡지도 않았을 거야.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내 눈을 곧이곧대로 들여다보았다. 이어 손을 크게 휘저어 내 뒤통수를 잡아끌어 내렸다.
백기
Evol 지문은 특파팀 특수연구과에서 Evol 범죄를 공략하기 위해 새로 연구하는 분석 방식이야.
백기
세상이 다시 앞서나가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Evol의 공개로 우리가 더 많은 연구 경로와 표본을 확보하게 됐지.
백기
Evol 관련 특수 범죄에 대해, 우리는 더 많은 물증화된 정보를 확보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지.
백기
그러다 점차, Evol을 에너지 파장의 형태로 정의하고 기록할 수 있게 됐어.
백기
동시에, 서로 다른 Evolver들이 Evol을 사용할 때 생겨나는 에너지 파장은 전부 고유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유연
사람의 지문처럼요?
백기
그래서 그것을 'Evol 지문'이라고 부르는 거야.
유연
……그럼 이 연구, 꽤 오래된 건가요?
백기
세계가 ‘다시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로, 시간을 반복해 계산하면 최소한 10년 전부터는 진행된 셈이지.
백기
다만 지금의 이 검출 장치는 아직 최종 테스트 단계라서, 증거로 바로 적용되긴 어려워.
유연
그럼 왜 전엔 한 번도 얘기 안 해줬어요……
백기
아직 성공하지 않았을 때는, 확실히 특파팀 1급 기밀이었으니까.
그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과거의 자신과 교감이라도 하듯, 드물게 장난스러운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백기
네가 말한 그 ‘뒤틀린 벽’은 어디지?
유연
이쪽이에요.
나는 그를 이끌어 시신이 떨어진 지점과 대각선으로 마주하는 벽 앞으로 갔다. 기억 속에서 본 방향을 가리켰다.
유연
바로 여기예요.
내 손끝을 따라, 백기는 아주 꼼꼼히 벽을 살폈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불길에 탄 흔적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유연
내가 잘못 본 건 아닐 텐데……
백기
난 널 믿어.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만큼 더 확고했다.
백기
만약 정말로 특수연구과가 추측한 것처럼, 어떤 Evol 구동 장치가 개입한 거라면…… 그걸로 모든 게 설명될 수도 있어.
백기
하지만 확인이 필요해. 난 특파팀에 돌아가서 물건을 하나 가져와야 해.
서쪽으로 지는 석양이 진 가을 햇살이 그의 곁으로 떨어져, 밝은 빛의 윤곽선을 그려냈다.
유연
선배, 만약 특파팀의 장비가 정식으로 투입된다면…… Evol 특수 장치까지도 전부 탐지할 수 있는 거죠?
유연
그럼 많은 사건들이 미리 막힐 수도 있겠네요.
그는 몸을 돌려, 불꽃 같은 시선을 나에게 꽂았다.
백기
순조롭게만 진행된다면…… ‘헌터 게임’ 같은, 기계를 통해 Evol 에너지를 수집하는 존재도 빠르게 추적할 수 있을 거야.
백기
Evolver 암살, 혈액병, 심지어 오디세이로 촉발된 사건들까지 모두 더 정밀한 해결 경로를 갖게 되겠지.
백기
그게 바로 특수연구과가 수많은 심혈을 기울여 온 의미야.
백기가 떠나 있는 동안, 나 역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를 계속 돌며 더 많은 아이들을 인터뷰했다.
기억 Evol을 이용해, 나는 수많은 아이들의 차갑고 무심한 시선 속을 헤매었다.
계속해서 힘을 짜내어 능력을 발동했다. 꽤 버거웠지만, 결국 그들조차 무심히 흘려보냈던 기억 속에서 공통점을 하나 찾아냈다——
왕샹위
난 체육관 쪽에 가볼게…… 다시는 너희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쟈오양
그 농구공, 내가 체육관에 돌려놓을게. 지난번에 수업 필기 빌려줘서 고마웠어.
톈징
학생회에서 내일 체육관 점검한대. 며칠 뒤 행사도 있고…… 그래서 잠깐 도와야 해. 앞으로는 더 이상 돕고 싶지 않아.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길.
춘잉
너희 먼저 가. 나 체육 시간에 머리핀을 체육관에 두고 와서, 찾으러 가야 돼…… 잘 있어.”
완여우
기말에 또 농구 슛 시험 보잖아. 낙제는 정말 싫어…… 체육관에서 연습 좀 해야지. 안 그러면 엄마한테 또 혼날 거야. 제발 이번엔 안 혼났으면.
창백하거나, 억지로 웃음을 띠거나, 아직은 앳된 얼굴들이 하나하나 내 눈앞에 스쳐 갔다.
나는 그들의 손을 붙잡고 싶었지만, 그저 눈을 뜬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조각난 기억은 결국 바래진 먼지로 흩어져 사라졌다.
등교하지 않은 그 아이까지 포함해, 모두가 하나같이 “체육관”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체육관에 모이기로 한 걸까? 하지만 옥상에서 뛰어내릴 거라면, 왜 굳이 체육관에 갔던 걸까?
그때는 이미 거의 하교 시간, 학생들이 하나둘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나도 기억을 따라 학교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눈앞에 서서히 드러난 건물이 나를 멈춰 세웠다. 내 기억 속 모습과 달랐다. 정방형 건물, 커다란 통유리창들이 유리벽처럼 경계를 그어내고 있었다.
유연
……어? 이게 우리 학교 체육관 맞아……?
이런 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의 기억조차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 시각, 체육관 안에는 학생이 이미 아무도 없었다. 높이 걸린 조명이 바닥을 환하게 비추고, 광택마저 반짝였다.
나는 체육관을 한 바퀴 돌며 필사적으로 힘을 짜내 Evol을 발동했지만, 역시 아무런 흔적도 감지되지 않았다.
……설마 이 안에 비밀통로라도 있는 걸까?
오르락내리락하며 이리저리 뒤져봤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다.
그저 반들반들한 마룻바닥이 허탈한 내 얼굴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유연
휴…… 역시 너무 상상만 한 건가……
오늘 하루, 능력을 여러 번 무리해서 쓴 탓일까. 발걸음이 휘청거리고, 머리가 멍해졌다.
잠시 머리를 흔들며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까 생각하던 찰나——
뒤돌아서는 순간, 체육관 입구에 낯선 얼굴이 보였다.
??
이 체육관, 마음에 드나요?
남자는 베이지색 린넨 셔츠를 헐렁하게 걸치고 있었다.
소매는 아무렇게나 두 번 접혀, 선명한 손목선이 드러나 있었다.
까마득한 푸른빛 눈동자는 다정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고,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요하고도 부드러웠다. 정교하진 않지만 온화한 빛을 머금은 옥돌처럼.
유연
……저도 여기 처음 와봤어요. 좋아한다, 싫어한다…… 딱히 말하기 어렵네요.
??
그래요? 전 당신도 이 학교 졸업생인 줄 알았는데.
유연
어라? 당신도…… 졸업생인가요?
남자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마치 그렇다고 인정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머릿속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호기심 때문에 나는 그 남자와 대화를 이어갔다.
유연
이 체육관…… 예전부터 이 모습이었나요?
??
그렇지. 꽤 오래됐을 거야.
??
오랜만에 보네. 놀랍게도 나처럼, 전혀 변하지 않았군.
……설마 세계의 영향이 건축물에도 미치는 걸까?
멍하니 생각하던 내 머리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눈꺼풀은 천근만근으로 내려앉았다.
유연
그럼…… 방해는 안 할게요. 저는 이만……
?? (백기)
움직이지 마.
순간, 문 쪽에서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둔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백기가 서 있었다.
얼어붙은 시선이 내 몸을 스쳐, 곧장 남자의 등 뒤에 꽂혔다.
백기
넌 누구지?
??
안녕하세요, 경찰관님. 저는 그저 옛 추억을 돌아보며, 이 아가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입니다.
백기
그래?
백기
단순히 대화라면…… 왜 Evol을 쓴 거지?
나는 백기의 손에 들린 장치가 연신 번쩍이는 걸 보았다.
곧이어 체육관의 정체된 공기를 가르며 강풍이 몰아쳤다.
바람과 빛줄기를 따라, 가느다란 실선들이 거미줄처럼 내 주위를 둘러싸면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를 그 안에 가둬버렸다.
그중 하나는 내 목덜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1-17 记忆的枷锁 기억의 족쇄
总有人妄图锁细风暴,但风暴是困不住的。
세상에는 늘 폭풍을 가두려 드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폭풍은 결코 가둘 수 없다.
백기
한 번 더 묻겠다.
백기
넌 누구지?
하지만 그는, 그 남자에게서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바람이 일었고 백기의 몸이 이미 남자 앞에 번쩍 나타났다.
그의 긴 다리가 휘둘러져 상대를 향해 사정없이 뻗어졌다.
??
백 경관님, 정말 나타나는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군요.
남자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지극히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곧 손끝을 움켜쥐자, 얇아 보이지만 끈질기게 질긴 몇 가닥의 실선이 모여 완벽한 방패를 형성했다. 그리고 단숨에 백기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는 그 반동을 이용해 백기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더니, 거센 바람이 다시 몰아치기 전, 두 팔을 가슴 앞에서 빠르게 교차시켰다.
유연
……읏!
바로 다음 순간, 체육관의 불빛이 와락 꺼졌다. 희미한 달빛만이 스며들어, 무수한 실선이 경기장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음을 드러냈다.
끈적한 거미줄이라기보다는, 질기고 단단한 고치 같은 실들이 계속 조여오며 자라나, 나와 백기를 완전히 묶어버렸다.
동시에, 지쳐 있던 내 머릿속으로 뭔가가 파고들어 왔다. 개미가 신경을 갉아먹는 듯한 미세한 통증과 구역질이 몰려와, 참을 수 없이 속이 뒤집혔다.
나는 마치 영사기가 된 듯, 머릿속에서 과거의 기억들이 기계적으로, 멈추지 않고 재생되고 있었다.
백기
꺼져!
내 시야 끝자락에서, 백기의 얼굴이 바짝 굳어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끊임없이 실선을 찢어내려 했지만, 새로 자라난 고치 같은 실들이 겹겹이 덮쳐와 그의 몸을 완전히 옭아맸다.
??
백 경관, 난 특파팀과 척 질 생각은 없어.”
??
괜히 버둥거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네가 저항할수록 속박은 더 단단해지고, 더 깊이 네 손발을 묶을 테니까.
??
기억이란 원래 그런 거야.
??
그렇지, Queen?
그가 내게 가볍게 웃어 보이는 순간, 머릿속 통증은 더 날카로워졌다.
뭔가가 끊임없이 내 두뇌 속을 뒤집고 파고들어, 마치 전부 쪼개 내어 그 안에서 무언가 특별한 걸 골라내려는 듯했다.
고통이 점점 깊어지자, 본능적으로 그는 뭔가를 찾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몸부림쳤다.
유연
당신, 뭘 하려는 거야……?!
??
하루 종일 능력을 쓴 주제에, 아직도 남아 있나 보네?
그의 눈 속에 잠깐 감탄이 스쳤다. 더 많은 실선이 내 몸에 휘감기며, 호흡조차 막아오려는 듯 죄어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목덜미를 조이던 모든 실선이, 보이지 않는 명령에 조종된 듯, ‘싹둑’ 하고 한순간에 끊겨 나갔다.
이어진 건, 공기가 잘린 자리에서 늦게 울려 퍼진 아주 미세한 절단음. 차갑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고, 그곳에는 한기 어린 호박빛 눈동자가 서늘히 빛나고 있었다.
백기
그녀에게 손대지 마.
어둠조차 가릴 수 없는 기세. 백기는 끊임없이 달라붙는 실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입을 막고 손발을 묶는 혈빛 구속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체육관 안에 바람이 팽창하듯 불어올랐다. 그는 몸을 낮게 숙여, 거친 칼날처럼 몸을 세워 바람과 함께 남자에게 돌진했다.
??
……백 경관, 꽤 성가신 상대로군.
남자의 얼굴에도 이제는 처음의 여유가 사라지고, 미소가 접혔다. 그는 두 손을 동시에 움켜쥐며 주먹을 쥐었다.
순간, 실선들이 더 굵고 더 많은 형태로 변하며 차가운 은빛을 띠었다. 그리고 그 빛나는 실들이 백기를 제자리에 꽁꽁 묶어버렸다.
정체불명의 목소리
넌 네 어머니조차 구하지 못했잖아.
정체불명의 목소리
스스로가 쓸모없는 인간인 걸 알았다면, 고개 숙이고 살아라.
정체불명의 목소리
너 같은 놈은 머지않아 감옥에 처넣어질 거다.
정체불명의 목소리
누가 너같은 학생의 말을 믿겠니.
정체불명의 목소리
넌 이곳에 속하지 않아. 이곳도 결코 네 것이 되지 않아.
정체불명의 목소리
빽으로 들어온 주제에. 백혼(白焜)의 아들.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도련님.
정체불명의 목소리
넌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어.
정체불명의 목소리
넌 네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지.
수많은 말들이 기억 속 장면을 헤집고 다니며, 시끄럽고 거슬리는 소음처럼 얽혀들었다.
그 목소리들은 뒤엉켜 결국엔 그 자신의 목소리로 변해버렸다.
백기
너는 대체 뭐가 되고 싶은 거지?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두드리며, 책망하며, 고개 숙이길 강요했다.
??
기억은 거대한 둥지이자 새장이야. 그 영향에 순응하고, 그 성장에 복종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야.
백기는 그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속으로 비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걸어온 길은 너무도 선명했다.
어둠 속에서 뼈가 짓이겨질 때마다, 맑고도 잔혹한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이미 산산이 부서졌어야 했다. 진작에 먼지로 흩어졌어야 했다.
백기
왜 그래야 하지?
그는 필사적으로 팔을 뻗어, 목을 조이고, 숨을 막고, 앞길마저 끊어버리려는 기억들을 움켜쥐었다.
그러나……왜?!
백기
…나는 그 따위 것들에 휘둘리지 않아.
내 앞길을 정하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야……
내가 앞으로 나아갈지, 어디로 갈지는…… 내가 정해!
그는 팔을 높이 치켜들어, 자신을 옭아매려는 모든 족쇄를 사납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눈부신 핏빛이 터져 나왔다.
백기
이따위 것들이 날 가둘 순 없어.
나는 그의 고개가 고집스럽게 치켜들린 모습을 보았다.
그 눈은 너무도 맑고 밝아서, 아무리 길이 멀고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도, 결국 어디로 나아갈지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백기는 자신의 영혼을 덮친 먼지 같은 속박과, 피빛의 사슬을 힘껏 잡아채어——
마치 썩어 문드러진 뼛조각을 뜯어내듯, 모조리 찢어내고 흩날렸다.
붉은 안개가 날카롭게 흩어지는 순간, 새들이 훨훨 날아올랐다. 마치 그에게 새 날개가 돋은 듯.
세상에는 늘 폭풍을 가두려 드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폭풍은 결코 가둘 수 없다.
백기는 모든 속박을 끊어냈고, 동시에 그 모든 짐을 짊어졌다. 바람이 모든 것을 휩쓸며 나까지 그의 등 뒤로 휘말려 끌어당겼다.
백기
네 수법도 이제 다 드러난 것 같군.
그는 싸늘하게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내 앞에 서서 모든 위협적인 시선을 가로막았다.
아마도 백기는 많은 면에서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여전히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뜻밖에도 그 남자는 전혀 싸움을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 발끝을 힘껏 들어, 이미 폭풍에 깨져버린 창틀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
말했잖나, 난 백 경관과 척 질 뜻은 없다고. 일이 끝났으니 더 방해할 이유도 없지.
나는 순간 멍해졌다. 내 손목 옆에서 마지막 남아 있던 은빛 실 한 가닥이, 그의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회수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남자의 얼굴엔 더 이상 웃음이 없었다. 그 대신 깊은 시선이 내 쪽으로 파고들었다.
??
바라건대, 이 모든 게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일이길.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순식간에 밤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백기
……!
백기는 즉시 바람을 타고 추격하려 했으나, 갑자기 비틀거리며 반 걸음 휘청였고, 무의식적으로 날카로운 숨을 들이켰다.
유연
잠깐……! 선배!”
이미 내 몸은 힘이 빠져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다.
유연
상처가 너무 심해, 쫓아가면 안 돼!
백기
죽진 않아.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 순간, 미처 다 삼키지 못한 분노와 내적 갈등이 함께 흘러넘쳤다.
유연
죽을 지경이 되어야만 멈출 거야?! 그럴 필요는 없잖아!
나는 조급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백기
……
……넌 지금 상태는 어때?
유연
나? 나는……아마 괜찮을 거야.
다만 아까 기억들이 막 뒤섞여 날아다니는 것 같았어……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없는 것 같아.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듯, 나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유연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선배도 상처가 심하잖아. 우리 같이 특파팀으로 돌아가자.”
백기
이미 연락해 놨어.
곧 사람들이 도착할 거야.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얼굴의 핏자국을 쓸어내고, 대충 터진 상처를 감싸 매만진 뒤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기
여기서 기다려. 곧 누가 널 데리러 올 거야.
바람이 또다시 일어나, 가슴 깊숙한 곳까지 저리게 스쳐갔다. 그의 모습은 그대로 어둠 속에 삼켜졌다.
그는 자신의 이정표를 누구보다 똑똑히 알고 있었다.
가야 할 곳과 향해야 할 길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에, 자신에게조차 잔혹할 만큼 집요했다.
바람은 때로 너무 빠르게 흘러가, 멈추는 법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1-18 奥论脱缰 억눌린 굴레를 벗다
我只知道,我要对得起我自己。
다만,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건 알아.
특파팀 사람들은, 백기가 말한 대로 그가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아 내 앞에 나타났다.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지만, 예전의 친밀함은 이미 옅어져 있었다.
특파팀으로 이송된 뒤, 나는 온갖 신체·뇌 검사를 받았고, 백기가 말했던 ‘Evol 지문’ 기록도 진행된 듯했다.
막 조서를 시작하려는데, 고진이 펜을 빙그르르 굴렸다.
고진
사실 먼저 가서 쉬어도 됩니다. 무섭다면 사람 붙여서 보호해 줄 수도 있고요.
그렇게 무리할 필요 없습니다. 여긴 ‘피해자 학대’ 같은 전통은 없으니까.
유연
괜찮아요. 지금이 제일 또렷이 기억나서요. 빠뜨리는 게 없게 지금 하는 게 좋아요.
물론, 핑계였다.
이곳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은 조서뿐이었으니까. 다친 그를 다시 마주칠 기회를 얻으려면.
고진의 질문은 끝까지 세밀하고 치밀했다. 나는 생각을 붙들고 천천히 대답했지만, 점점 더 지쳐가는 몸은 눈꺼풀조차 버티기 힘들었다.
마지막 Evol 장비 스캔까지 마친 뒤, 복도에서 돌아서며 나는 고진을 바라봤다.
유연
선배를 만나야 해요. 크게 다쳤잖아요.
꼭 그를 봐야 해요!
고진
지휘관의 행동은 본인 책임입니다. 뭘 언제 해야 하는지, 그는 스스로 가장 잘 알아요.
고진
우린 그저 그의 지시만 따를 뿐입니다.
유연
그럼 최소한 그가 치료받는 모습이라도 보게 해 주세요.
고진
당신은 자신 몸도 제대로 못 챙기고, 걸음걸이도 비틀비틀한데, 그걸 걱정할 여유가 있나요?
그는 철저히 업무적인 표정이었지만, 내 고집스러운 태도를 보며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고진
그의 상처는 본인이 가장 잘 알아요. 죽지 않는다고 하면 진짜 안 죽습니다.
고진
당신이 왜 그렇게까지 집착하는지 난 잘 모르겠네요.
고진
저도 나가봐야 하니까, 잘나신 프로듀서님(大制作人小姐), 내 업무량 좀 늘리지 말아줘요.
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어딘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나는 오히려 내가 괜히 떼를 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곧 특파팀 대원이 내 옆으로 다가와, 다음에 해야 할 행동을 안내하듯 서 있었다.
나는 차갑기만 한 눈앞의 모든 것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느리고 무기력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백기
난 괜찮아.
단 두 글자.
모든 고통의 과정을 도려내고, 건조한 결과만 남긴 듯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단 두 글자뿐인 그 결과가, 늘 불안에 뒤흔들리던 내 마음을 잠시 가라앉혀 주었다.
그럼에도 백기를 직접 보지 못한 이상, 걱정은 계속해서 나를 파고들었고, 결국은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조용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그 익숙한 번호를 눌러야 할지 망설였다.
그에게는 이게 ‘걱정’일까, 아니면 ‘방해’일까?
숫자들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씁쓸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입으로는 더 이상 열여섯 살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지금 내 모습은 고등학생 때와 다를 게 뭔가.
그의 마음을 확신할 수도 없고, 언제 말을 걸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다. 혹은 계단 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마치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며야만 할까.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회사로 향했다.
그리고 반나절 동안, 최근에 벌어진 고등학생 집단 자살 사건에서 공개 가능한 모든 정보를 하나하나 정리했다.
각 아이의 가정환경, 각 반의 ‘사회적 분위기’.
차갑게 적힌 말들과 장면들을 마주하면서, 강렬한 무력감과 숨 막힘이 밀려왔다.
그 의심은 점점 더 선명해져, 내가 본 것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손에 쥔 펜을 꽉 움켜쥐게 될 만큼.
내가 만난 사람들 마음속에는 모두 커다란 결핍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결핍은 은밀하게 한 사람을, 그리고 이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약자를 고립시키고, 실패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아직 그 정체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 꼬마 아이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분명 중요한 무언가, 세상의 ‘뿌리’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도덕감? 공감 능력? 감정 이입? 감정? 따뜻함?
아니면 타인과의 인연으로 맺어진 유대감?
머리를 긁적이며, 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 앞에서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갑자기 나타난 그 남자와 그의 Evol 역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연
설마 또 어디서 튀어나온 새로운 적은 아니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고, 다시 눈앞의 조사에 집중했다.
앞서 벌어진 집단 자살 사건은, 기묘한 사망 시각만 빼면 연모고에서의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번 조사를 통해, 마치 이 도시의 수많은 굵고 무거운 혈맥 중 하나로 발을 들여, 그 변화의 어떤 모습을 또렷이 목격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후 나는 정리한 정보와 다른 사람들이 조사한 사건들을 함께 취합해 배포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여론이 폭발해버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뒤에 깔린 가정 문제, 학교 문제, 사회 문제보다는, 오히려 이 불가사의한 '집단 자살 사건'에 더 흥미를 느꼈다.
체육관에 함께 가기로 했다는 약속, 옥상으로 향하는 장면이 남아 있지 않은 감시 화면, 수업에 결석한 채 사라진 다섯 번째 아이……
나는 백기의 기억에서 얻은 조사 내용은 전혀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 키워드들만으로도 네티즌들은 질리지 않고 떠들며, 심지어 추리까지 즐기기 시작했다.
[댓글들]
먹을래말래
@아랫침대야, 빨리 와서 먹을거리 구경해라! 이거 웬만한 스릴러 영화보다 재밌잖아?
다정한척하는냉혈안
하늘이 내린 소재네! 이걸 미스터리 소설로 쓰려는 작가는 없나? 작가님, 필기구 드리겠습니다!
자리비움금지
내기한다, 3일 안에 또 한 번 일 터질 거라고. 혹시 다섯 번째 아이가…… 진짜 범인 아냐?
미레마라쾅
숨기고 돌려 말하는 거 재미없어. 차라리 더 크게 터져서, 온 도시가 휴교령이라도 내려지면 좋겠다, 헤헤.
한예준
역시 사장님이에요! 이렇게 멀리 내다보고 있었을 줄이야!
유영
이런 각도로 접근하다니, 대단해요! 어쩜 이렇게 대단할 수가!
안나연
잘했어요, 유연 씨.
몇몇 동료들은 얼굴에 흥분과 존경이 가득한 채 나를 응원했고, 회사 다른 직원들도 들떠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 화제를 더 뜨겁게 달궜다.
유연
…그만해요.
유연
여론을 이렇게 오락거리에 몰아가게 하지 마세요. 이건 사람들한테 그렇게 즐겁게 떠들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순식간에 뜨겁던 분위기는 억지로 목이 졸린 듯 끊겼고, 공중에 걸린 채, 싸늘하고 어색한 침묵으로 바뀌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까맣고 깊은 눈동자들이 작은 블랙홀처럼 느껴졌다.
유연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마치, 잘못된 건 나 혼자뿐인 듯했다.
지시를 내린 뒤, 나는 거의 도망치듯 사무실로 돌아왔다.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으니, 모든 게 너무나도 우스꽝스럽고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건 정말 이렇게 되어선 안 됐는데.
나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러다 문득, 등 뒤에서 시선 하나가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마치 한 조각의 호박빛 달이 눈앞에 떠오른 듯했다.
백기가 창가에 조용히 서 있었다. 맑은 달빛이 얇은 베일처럼 그의 등 뒤를 감싸며, 차갑게 날카롭던 선을 부드럽게 덮어 주고 있었다.
얼굴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그 두 눈은 맑고 투명하게 빛나며 달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대충 감은 듯 삐뚤빼뚤한 붕대가 둘러져 있었지만, 적어도 성의 없이 방치한 건 아니란 게 느껴졌다.
유연
…왜 왔어요?
백기
…나도 잘 모르겠어.
살랑 부는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머리 위에 삐죽 솟은 머리카락마저 드물게 고요히 흔들릴 뿐이었다.
백기
그래도 네가 직접 한번 봐야할 것 같아서.
그래서 왔어.
그는 어쩐지 어색하게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발걸음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듯 창가에 서서, 한 손으로 뒷목을 매만졌다.
백기
너는 괜찮아?
유연
잠깐 눈 붙였더니 한결 나아졌어요. 게다가… 선배가 보낸 문자도 봤고. 그래서 더 괜찮아졌어요.”
백기
그래? 그럼 다행이네.
유연
선배는 괜찮아요?
백기
그 사람은 못 찾았지만 상처는 처리했어.
그가 괜히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자, 나도 드물게 몸이 뻣뻣해졌다.
어두운 방 안은 순간 정적에 잠겼다. 방금 전까지 나를 짓누르던 근심과 외로움이, 그가 나타나는 순간 몽땅 덮여버린 듯 사라졌다.
나는 그의 목에 감긴 붕대를 슬쩍 훔쳐보았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두 손으로 창틀을 짚고 몸을 기대었다.
백기
좀 더 제대로 보여줄까?
유연
제가 봐도 돼요?
백기
……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다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가 이렇게 묵묵히 허락한 태도를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그의 앞으로 몸을 기울여 목덜미 쪽을 살펴보았다.
그의 몸이 순간 긴장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지나치지 않게 그의 상처들을 살폈다.
정말 그가 말한 대로, 작은 찰과상 몇 군데를 제외하면 어제 베였던 자리는 모두 대충이지만 붕대로 감겨 있었다.
유연
엉망이네요, 삐뚤빼뚤하고.
백기
이 정도면 됐지.
그 말이 나한테 한 건지, 상처한테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몰래 훔쳐보듯 바라보는 내 시선 속에서 그는 턱을 살짝 들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였다.
걷어 올린 소매 사이로 단단한 근육이 드러났고, 시선은 줄곧 천장에 고정된 채, 귓불만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를 한참이나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가 뭔가를 눈치챘는지 시선을 내려 나와 마주쳤다.
유연
……인터넷 여론 봤어요?
그는 책상 위에 쌓인 문서 더미를 흘깃 보더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
내게서 들은 정보는 안 올렸구나.
유연
내가 올릴 거라 생각했어?
백기
설령 올렸어도, 대처할 방법은 있었어.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잠시 방임으로 인한 후과조차 이미 대비책 속에 포함돼 있다는 듯 태연했다.
나는 입술을 다물고, 그의 맑은 눈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유연
저도 내 일이 괜한 억측을 만들고 싶진 않아요.
선배가 나를 믿어준 만큼, 저 역시 당연히 그 믿음에 부응할 거에요.
말을 끝내고, 나는 무심히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숙였다.
유연
하지만…… 선배가 준 정보가 아니어도, 결국은 이런저런 말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유연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유연
이 모든 게, 왜 이런 건지 모르겠어. 그 집단 자살 사건도, 너도…… 그리고 이 세상도.
유연
내가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요?
백기
넌 지금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대답 대신, 담담하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백기
네 스스로도 잘못됐다고 느낀다면, 그걸 고집할 이유는 없어.
백기
하지만 네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계속해.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도덕적 강요도 없었고, 내 지난 말들을 비웃거나 비꼬는 기색도 없었다.
늘 그래왔듯, 그저 간단하고 담백하게, 옳고 그름만을 말할 뿐이었다.
달은 구름에 가려졌지만, 나는 분명 그 속의 빛을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유연
선배, 나…… 좀 유치한 질문 하나 해도 돼요?
그가 거부감 하나 보이지 않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연
선배는 외로움이 두렵지 않아요?
유연
모든 사람이 선배 맞은편에 서 있는 것 같고,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나 혼자만 동떨어져 있는 듯한 그 기분.
유연
그게 두렵지 않아요?
바람마저 발걸음을 멈춘 듯, 백기는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진지하고도 냉정하게,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 두 팔을 몸 옆에 가지런히 두며.
백기
나는 두려움이 뭔지 몰라.
백기
다만,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건 알아.
1-19 沉默旋涡 침묵의 소용돌이
每个人都有自己的烦恼与哀愁。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번민과 슬픔이 있다.
01-연모고등학교
익명 포럼의 한 게시물
도대체 몇 페이지나 뒤져서 이런 글을 본 거야?
No.254646841 - 【도시 괴담】 - 【연모고 학생 자살 사건】
무제 익명 21:23:12 ID:Cck3KNss
다들 최근 연모고의 고등학생 자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왠지 단순한 자살은 아닌 것 같아.
내가 여론 따라가는 거라고 욕해도 상관없는데, 그냥 토론 좀 해보자. 왜 예전에는 그렇게 많은 애들이 뛰어내렸을 때는 아무도 말 안 하다가, 이번엔 이렇게 시끄럽게 터진 걸까? 단순히 이슈화라고? 그럼 네 말이 맞는 건가? 🤔
무제 익명 21:33:27 ID:23BBdso2
어이~ 유행 타는 바람이 여기까지 불어온 거야? 괴담판에 올리지 말고 시사나 종합 게시판에 올려야 하는 거 아니냐?
근데 뭐, 진짜 일리가 있긴 하네.
애들이 서로 손잡고 체육관에서 만나기로 했다더니, 정작 시체는 동쪽 공터에서 투신한 걸로 발견됐다잖아.
게다가 최근 연모고 학생 한 명도 실종됐다며?
무제 익명 21:46:52 ID:BLdkha11
진짜 학교에서 뛰어내린 거 맞아?
무제 익명 22:03:09 ID:KCkeh885
아니면 어디서? 네 집? 😏
그러고 보니, 옆 스레드에서 최근에 누가 이유 없이 한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얘기하던데?
혹시 그 실종된 애도 그런 식으로 사라진 게 아닐까?
No.815483307
무제 익명 23:55:04 ID:Tac358cb
이거 진짜 묘하네. 나도 궁금해서 일부러 경비 아저씨한테 물어봤거든.
근데 학교 경비는 추락 소리를 전혀 못 들었다더라.
마치 시체가 갑자기 ‘갱신’된 것처럼 말이야.
괴담판에 올린 게 맞네. 🤔
02-나의 회사
옳음과 그름
도리는 그래. 알아도, 쉽지 않아.
선배는 내가 두렵다고 하면 넌 나를 겁쟁이라고 생각하겠지?
— 왜?
— 누구에게나 두려울 권리는 있어.
하지만 난 자꾸 의심하고, 흔들리고, 용기가 없어. 그래도 스스로 옳다고 말해줘야 해.
— 그건 충분히 옳은 게 아니지.
하지만 난 그게 옳다는 걸 알아!
—그럼 그게 옳은 거야.
세상이 그렇게 단순해?!
— 말 그대로, 그만큼 단순해.
사람들의 수많은 의심, 이해받지 못하는 시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들이 여전히 많은데.
— 그건 네가 지금 필요한 게 ‘옳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뜻이야.
03-특파팀
단체 채팅 기록
바다에서 바늘찾기, 완전 허탕쳤다.
AAA 즉각 출동
아슈(阿竖) 2025/9/x 오후 8:38:26
AppleU, 요즘 실종 사건 너무 많은 거 아냐……
내일 꼭 계란 먹기 2025/9/x 오후 9:38:06
ㅇㅇ
내일 꼭 계란전병 먹기 2025/9/x 오후 9:38:09
이거 문제네.
내일 꼭 계란지단기 2025/9/x 오후 9:38:21
왜 다들 실종 사건 때문에 바쁜데, 넌 여기서 수다 떨고 있는 거냐?
아슈 2025/9/x 오후 9:34:15
ㅋㅋㅋ 알았어, 나 지금 나간다.
아슈 2025/9/x 오후 9:34:21
진짜 피곤하다. 이게 언제 끝나려나.
아슈 2025/9/x 오후 9:34:36
예방도 못 하고, 방지도 안 되고, 맨날 이거 조사하느라 뛰어다니는 게 다야!
오늘은 꼭 집에 가기 2025/9/x 오후 10:26:36
관련 사건이 워낙 많으니까, 다들 발견한 거 있으면 최대한 공유하고 맞춰 가자. 그래야 서로 시간 아낄 수 있지.
아, 그리고 최근 새로 개발된 ‘Evol 지문’ 측정 장비 있잖아? 사용해 본 경험 있으면 피드백도 많이 줘. 연구팀에서 피드백 간절히 필요하대.
아슈 2025/9/x 오후 10:29:59
난 내 일만 끝내도 벅차다구요, Sir!
(ㄴ아슈는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불평불만이 많은 걸로 보임)
1-20 老屋 옛집
你要看的,就是我的记忆。
네가 보려는 건, 바로 나의 기억이야.
백기가 떠난 뒤,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다음 날, 회사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여론의 방향을 철저히 관리하고, 사건이 과도하게 ‘오락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비난이 결코 목적이 아니라, 중요한 건,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
동시에, 백기의 조사에 협조하기 위해 나는 또다시 특파팀을 찾았다.
거대한 기계 장치의 플랫폼에 똑바로 누운 채, 내 머리 주변을 끊임없이 맴도는 장치를 바라봤다.
유연
방금 그건 뭐예요?
백기
네 뇌를 정밀 스캔한 거야.
지금 단계론 그 남자가 너에게 뭘 했는지 확정할 수 없으니까.
유리 방을 나오며, 나는 당시의 감각을 곱씹었다.
유연
그 실들이 제 근처에 있을 땐, 분명히 머리가 아팠고, 기억이 막 뒤집히는 것 같았어요.
혹시 그 사람도 기억 관련 Evolver일까요?
백기
그럴 가능성 있어.
그리고 그는 네가 하루 종일 능력을 썼다는 걸 알고 있었어.
아마 네 곁에 계속 붙어 있었던 것 같아.
그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가고, 미간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백기
그는 내가 돌아올 줄 몰랐어.
그래서 그때가 확실히 틈을 노린 순간이었지.”
시간을 좀 잡아먹긴 했지만, 이후로는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어.
유연
그 사람, 이번 사건과 관련 있을까요?
백기
행동이 너무 깨끗해. 오히려 널 노린 것 같아.
하지만 이 일련의 사건들과 무관하다고도 단정할 수 없어.
유연
그 사람이, 자신도 이 학교 졸업생이라고 했어요.
백기
내가 조사해볼게.
그 신비로운 남자의 등장은 보이지 않는 뇌관처럼, 나와 이번 기묘한 집단 자살 사건에 더 많은 불확실성을 끼워 넣었다.
유연
그럼, 나중에 그 뒤틀린 벽에서 뭔가 찾으셨어요?
백기
아니.
모든 게 막힌 사각지대에 갇힌 듯했다.
함께 체육관에 모여 자살한 아이들, 어쩌면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Evol 장치, 순간적으로 일그러진 괴이한 벽, 정체 모를 힘과 그 남자……
그리고, 이 미묘하면서도 냉담한 이 세계.
백기
네 진술을 봤는데, 네가 체육관에 간 건, 아이들 모두가 비슷한 말을 남겼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지.
이건 네가 이볼을 사용해서 찾은 거야? 이전 조사에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이야.
유연
네, 경비원의 기억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기억은 모두의 머릿속에 있지만, 늘 빠뜨리거나 잊어버리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쉽게 사라지진 않아요.”
아마도…… 제 능력이 강해졌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나는 백기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렇게 얘기하는 동안, 우리는 이미 특파팀의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유연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나는 일부러 담담한 척, 느릿느릿 몸을 돌려 앞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백기
잠깐.
유연
네?
눈 깜짝할 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향해 다시 돌아섰다.
그 역시 내가 이렇게 재빨리 반응할 줄은 몰랐는지 순간 멈칫했고, 억지로 입꼬리를 억눌러 담으려 했지만, 입술은 오히려 어색하게 굽어졌다.
백기
……그렇게 기쁜 일이야?
유연
다음에 내가 ‘잠깐만’ 하고 불렀을 때, 그때 선배가 돌아봐 주면, 그때 말해줄게요.
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고, 다시 그의 앞에 서서 바라봤다.
유연
왜 그래요?
백기는 깊이 나를 응시했다. 주저함과 흔들림이 눈빛 주위에 조용히 얽혔다가, 마침내 낮게, 한 마디로 흘러나왔다.
백기
지금 시간 있어?”
유연
응, 있어요.
백기
시간도, 장소도, 뭐 할지도 아직 말 안 했는데?
유연
괜찮아요.
나는 그의 모든 망설임과 시선을 조용히 받아내며, 두 손을 뒤로 모으고 그를 바라봤다.
유연
만약 말하기 곤란하면, 다음에 내가 비슷한 부탁을 했을 때도 그냥 그렇게 대답해줘요.
백기
다음에도?
유연
응, 다음에도.
백기
그럼…… 다음에도.
가을 바람이 살며시 스쳐 지나가며, 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그림자와 이어진 듯 엮여갔다.
백기
가자.
그는 무심하게 멋쩍은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나를 바라봤다.
백기
내 헬멧 아직 네가 가지고 있지?
유연
내가?
백기
잡아떼는 거야?
유연
그럼, 내가 좀 잘 생각해볼게요.
백기
어서 생각해.
그의 입꼬리가 시크하게, 그러나 장난스럽게 휘어 올랐다.
백기는 자연스럽게 블랙이 위에 올라타며, 몸을 기대어 나를 바라봤다.
백기
지금 내게 예비 헬멧은 딱 하나뿐이야.
설마, 다시 들어가서 누군가한테 빌려와야 하는 거 아냐?
그저 내가 사실을 인정하길 바라는 말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헬멧을 하나 빌려오긴 했다.
차가 멈춰 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앞에는 완전히 불에 탄 듯한 이층 집이 서 있었다.
새까만 재와 잔혹한 흔적이 건물 구석구석을 뒤덮고 있었고, 마치 불길이 미친 듯이 삼켜버린 흔적 같았다.
너무나도 황폐해서, 외벽과 건축 양식을 겨우 따라가야 겨우 예전의 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방은 높다란 철판으로 단단히 둘러싸여 있었고, 철판은 이미 오래전에 녹이 슬어 빛이 바래고, 비바람에 얻어맞아 군데군데 구겨져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에 그렇게 방치된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 이렇게 보존돼 온 걸까? 왜?
혹시 지금 조사 중인 사건과도 관계가 있는 걸까?
그러나 백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한 번 둘러본 뒤, 차에서 내려 나를 안아 철조망을 넘어갔다.
유연
서… 선배, 이래도 괜찮은 거에요?
백기
신경 쓰지 마. 내가 책임질게.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엷은 먼지가 흩날리며 공기 속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새까맣고 무겁게 가라앉은 잔혹한 흔적들이 시야 가득 밀려들었다.
어쩌면 백기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의 발걸음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고, 몸은 잔뜩 긴장했으며, 손마저 무의식적으로 꽉 쥐어졌다.
백기
전에 내가 말했지? Evol 지문, 그리고 Evol 에너지 파장 연구 말이야.
유연
응, 기억해요.
백기
Evol의 잔여 에너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사라지지 않아. 아니면 누군가 인위적으로 지워버린 게 아닐 수도 있고.
백기
다른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일반 지문보다 더 쉽게 검출되기도 해.
그는 주위를 천천히 훑어본 뒤,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백기
이번에, 그 아이들 부검에서 아주 특별한 Evol 파장이 검출됐어.
유연
응, 선배의 기억에서 본 적 있어.
백기
전에 내가 조사했던 현장 하나에서, 서로 다른 세 가지 강도의 Evol 지문을 발견했어.
그리고 이번에 나온 그 Evol 파장이…… 그중 가장 미약했던 것과 같은 비율이었지.
유연
……같은 비율이라고?
백기
완전히 똑같진 않아. 하지만 비율은 정확히 일치했어. 그 안에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겠지.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다. 모든 감정을 벗겨낸 듯, 차갑게 남은 건 단 하나의 설명뿐.
백기
그 현장은…… 바로 여길 말하는 거야.
백기
나는 네 Evol로, 기억 속의 사각지대를 찾아내고 싶어.
유연
……하지만 전 물건을 통해서는 기억을 볼 수 없어요. 체육관에서도 그랬잖아요.
난 사람을 매개체로 해야 돼요.
백기
사람이라면 네 앞에 있잖아.
그 차갑고 매서운 눈빛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날 붙잡았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며, 매섭게 휘몰아쳤다.
백기
네가 봐야 할 건…… 내 기억이야.
백기
여긴…… 우리 엄마가 죽은 곳이야.
1-21 烈火焚焰 불길의 소용돌이
这个瞬间,好像他早已哭尽的眼泪也一同涌出了我的眼眶。
그 순간, 마치 그가 오래전 이미 다 흘려버린 눈물이 내 눈에서 함께 터져 나오는 듯했다.
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 백기를 바라봤지만, 그는 눈앞의 어둠처럼 너무 멀리 느껴졌다.
백기
내가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는 데 협조할 수 있어.
하지만 빠진 부분이 있을 거야. 네가 그걸 잘 봐줬으면 해.
내 감정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는 너무도 차분했다. 차갑고 냉정한 기계 같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내 말을 막아버렸다.
유연
……하지만……선배……
전 선배의 감정을 무시할 수 없어요.
백기
이게 가장 빠르고, 가장 간단한 방법이야.
그에게는 어떤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건 그를 고집스럽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것 같았다.
백기
여기가 거실, 저쪽이 베란다랑 부엌. 계단은 동쪽 모서리에 있고, 위층엔 방이 세 개 있어.
널 데려온 건 대략적인 구조를 알게 하려는 거야.
그래야 기억 속으로 들어가도 혼란스럽지 않으니까.
백기는 검게 그을린 집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잿더미가 그의 무심한 팔 움직임에 따라 흩날리며, 어둡고 흐린 궤적을 그렸다.
백기
더 물어볼 거 있어?
나는 모든 감정을 지워낸 듯한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유연
없어요,
다시 한번 확인할게요, 정말 괜찮은 거 맞죠?
백기
괜찮아.
유연
……알겠어요.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손바닥은 생각보다 차갑고 축축했다. 마치 오래도록 폭우 속에 갇혀 있던 사람처럼.
백기의 몸이 잠시 굳었지만, 이내 천천히 내 손을 되쥐었다.
유연
그럼 시작할게요.
순간, 나는 백기에 의해 한 평온한 오후로 끌려 들어갔다.
창을 통해 햇살이 비스듬히 흘러들며 바닥에 단정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공기 중에 먼지가 고요히 부유했고, 방 안은 맑고 따뜻한 기운에 잠겨 있었다.
마치 바닥의 나뭇결마저 은은히 숨 쉬는 듯했다.
도톰한 양탄자가 바닥에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화려한 꽃무늬와 기하학 문양이 겹겹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 사이를 따라가는 금빛 선들이 유려하게 굽이치며 이어졌다.
가장자리의 술 장식이 살짝 풀려 있었고, 세월에 오래 비벼진 듯 거칠고 포슬포슬한 감촉이 묻어났다.
눈앞의 세계는 너무나 소박하고 따스해서, 마치 어린 시절 낮잠에서 막 깨어난 오후 같았다.
백기
엄마, 저 농구하고 왔어요!
갑자기, 아직은 풋풋하지만 거침없는 목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어머니
왜 좀 더 놀다 오지 그랬어?
백기
집에 와서 밥 먹어야 한다고 했어요. 오후에는 또 예습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빨리 왔지!
어머니
아이고, 우리 소기(小起)가 점점 고등학생 티가 나는구나.
백기
아직 개학까지 며칠이나 남았는데요.
기억의 주인공은 머리에 맺힌 땀방울을 털어내고, 농구공을 소파 옆 구석에 던져 두더니 성큼성큼 부엌으로 달려 들어가, 어머니가 준비해둔 음식을 식탁 위로 옮겼다.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있었고, 따스한 햇살이 그녀의 온화한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어머니
맞다, 새 책가방 사놨어. 며칠 뒤 예비소집 갈 때 메고 가면 된단다.
백기
엄마, 나도 다 큰 애인데 뭘 또 책가방까지. 지금 쓰는 것도 멀쩡하잖아요. 지난달엔 새 농구공도 사줬으면서.
어머니
이건 고등학교잖아. 새로운 단계에는 당연히 새로운 모습이 필요하잖니.
그건 너무도 평범한 어느 오후였다. 소년과 여자가 햇살 가득한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저 그런 모습인데도, 그들의 웃음 어린 얼굴은 내 눈앞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나는 어떻게든 눈을 크게 뜨려 했지만, 눈가가 자꾸 젖어가며 시야를 번져버렸다.
여자
그래, 얼른 네 할 일 하렴. 저녁에 폐막식 본다 하지 않았니?
백기
Yes!
그는 마지막 한 입을 후다닥 삼키고, 빈 그릇과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달려가 재빨리 씻어낸 뒤, 다시 거실로 성큼성큼 돌아왔다.
그는 마치 군인처럼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 끝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백기
보고합니다, 원자이(温再) 동지! 저는 위층으로 올라가 예습하겠습니다!”
여자
알겠다, 백기 병사. 막 밥 먹은 뒤에는 잠깐 쉬고 책을 보렴. 무리하지 말고.”
백기
다시 한 번 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높이 날아올라 있었다. 마치 한 번도 추락한 적 없는 바람처럼,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면은 곧 소년의 시선을 따라 2층의 작은 방으로 옮겨갔다. 벽에는 농구 포스터와 각종 별자리 그림이 붙어 있었고,
책장에는 온갖 추리소설과 문제집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발코니 쪽엔 흰색 비행기 모형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침대 위 이불은 푹신했고, 책상 위에는 하얀 법랑 컵이 놓여 있었다. 새 교복은 가지런히 다려져 옆에 걸려 있었고, 책상 위 새 연습장은 이제 겨우 세 번째 장을 펼친 참이었다.
모든 게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 방은 너무나 평범해서, 청춘기의 평범한 남자아이 방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크게 웃고, 장난도 치고, 수업 시간에 졸기도 하고, 문제를 풀지 못하면 머리를 긁적거리기도 했다.
운동장에서 다른 반 아이들과 승부를 겨루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자아이 옆에 슬쩍 다가가기도 했다……
그리고 매일, 내일을 가득한 기대와 열정으로 맞이할 아이였다.
하지만 그 뒤의 일은, 나는 들었고 또 직접 보았다.
희미하던 세상은 곧 새까만 어둠으로 바뀌었다. 그 속에서 나는 백기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었다.
백기
그러다 책 보다가 피곤해서, 그대로 잠들어버렸어.
백기
그 거실이… 내 마지막 기억이야.
그의 말과 함께, 그 따스했던 장면은 사진처럼 정지해 버렸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더는 닿을 수 없는 온도였다.
유연
…그다음은요?”
하지만 백기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건 마치, 어떤 침묵의 기다림 같았다.
내가 겨우 다음 기억의 한 조각을 밀어올린 순간—붉음이 시야를 뒤덮었다.
불길이 미친 듯이 번져나가, 마치 집 전체가 불타오르는 듯했고, 맹렬한 화염이 뒤엉켜 지붕을 집어삼켰다.
뜨거움에 목재 기둥이 귀청을 찢는 폭발음을 내며 무너져내렸고, 유리창은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져 불빛을 머금은 파편이 쏟아졌다.
그건 마치 붉게 타는 빗방울 같은 불비였고, 모든 기억이 그 속에 휩쓸려 잠식되는 듯했다.
나는 불길 속에 서 있었다. 타오르는 열기가 얼굴로 몰아쳤고,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수 같았다. 무자비하게, 가차 없이, 모든 것을 붉은 심연으로 삼켜버렸다.
백기
처음엔 그냥 덥다고만 느꼈어. 눈을 뜨자마자 바람에 휩쓸려 밖으로 던져졌거든.
백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도 없었어.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온통 불바다였어.
유연
그러니까 선배는 거실에 온 적이 없다는 거죠.
백기
…응, 아니야.
유연
그럼 그 기억은…… 네가 실제로 본 게 아니잖아요.
계속 상상해 온 거네요…… 그렇죠?”
머릿속의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내 손을 세게 움켜쥐며 전해오는 고통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건 그의 마음 그대로였다.
이 불길은 오직 그에게만 속한 불꽃. 그는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끝없이 타들어가는 화염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었기를 바랐다.
그 생각이 닿는 순간, 내 가슴도 함께 죄어들며 숨이 막혀왔다.
그러다 마침내, 소년에게서 터져 나온 진짜 절규가 내 귓가를 울렸다.
백기
엄마!!!
엄마!!!!
백기
놓으라고!!! 놔!!! 놔아!!!!
소년은 수없이 불길 속으로 달려들려 했지만, 그때마다 누군가에게 거칠게 짓눌려 땅바닥에 붙잡혔다.
백기
엄마아아아!!!!!!!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어깨가 울음으로 격렬히 흔들리고 있었다.
백기
살려주세요! 누가 제발 엄마 좀 살려주세요!!!
남자
내가 구해주지 않은 게 아니라, 네가 너무 무능한 거다! 넌 네 엄마조차 구하지 못했어!!
남자는 빳빳한 군복 차림이었고, 화염 속에서 비친 그의 모습은 차갑고 무정하기만 했다.
백기의 손끝은 차가운 아스팔트를 깊이 파고들었고, 손톱이 들려 나갈 만큼, 붉은 피자국이 길게 그어졌다.
눈물은 흙과 땀에 뒤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땅에 떨어져 작은 파편 같은 소리를 냈다.
백기
제발…… 제발……
남자
애초에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넌 내 인생 최대의 실패작이야!
불길 속, 그는 떨리는 눈길을 들었다. 타오르는 창문 너머, 어머니의 절망에 잠긴 눈빛이 그와 마주쳤다.
백기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소년은 몸을 웅크린 채, 등을 구부려, 끝없는 무력감 속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불길을 향해 달려갔다. 불꽃이 터져 오르는 그 순간, 그 아름다운 여자가 마지막으로 슬프면서도 다정한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거센 화염이 그녀의 얼굴을 가려 버렸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더 이상 몸의 떨림을 억누르지 못한 채, 울부짖으며 이마를 바닥에 눌러 붙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세상에는 오직 불길만 남은 듯했다. 작열이 그의 눈과 눈물을 뒤덮었다.
내 심장도 산산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눈물이 계속하여 솟구쳤다.
나는 그 소년을 끌어안고 싶었고, 그 여자를 구해내고 싶었고, 그 냉혹한 남자에게 욕을 하고 싶었고, 이 거센 불길을 꺼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을 닦아내며, 불길 속으로 한 번 또 한 번 뛰어들 뿐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때 그가 놓쳐버린 어떤 단서를 반드시 찾아야 했다.
그래야만 그 소년의 눈물을 진정으로 멈출 수 있을테니까.
나는 화염 속에서 기억을 거듭 되감아 샅샅이 뒤집어 보고 또 뒤졌다.
내 손을 움켜쥔 손에서 전해 오는 통증이 점점 더 짙어져도, 나는 계속 불빛 속으로 달려들었다.
제발…… 제발……
나도 모르게 기도했다. 하늘이 정말 어떤 흔적을 남겨 그를 도울 수 있기를, 이 치솟는 대화재 속에서 등대가 되어 주기를.
문득, 백기가 바람에 휩쓸려 순식간에 집 밖으로 튕겨 나가던 그때, 어렴풋이 검은 그림자 하나가 함께 집 밖으로 번쩍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너무 빨랐고, 마치 착각 같았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기억을 다시 한 번 정밀하게 되감았다.
그 흐릿한 검은 그림자가 다시, 또다시 나타나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꽉 쥐며 흥분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유연
선배! 누가 있었어! 선배가 불길에 휩쓸려 집 밖으로 날려 나올 때, 또 한 사람이 뛰쳐나왔어!”
유연
나 봤어요!
유연
정말로 내가 봤어!!
순간 화면이 뚝 끊기고, 나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눈앞의 백기의 얼굴은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나 흐릿해서, 자꾸만 무언가가 눈가를 적시며 시야를 번져갔다.
백기
울지 마.
그 차갑고도 굳은 손끝이 내 얼굴 위를 세게 문질렀고, 드러난 그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유연
봤어요…… 선배…… 분명히 누가 있었어…… 하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어…… 너무 멀리 있어서……
유연
아무리 해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미안해요……
백기
그걸로 충분해.
그 순간, 마치 그가 오래전 이미 다 흘려버린 눈물이 내 눈에서 함께 터져 나오는 듯했다.
유연
왜 이제야 나한테 이런 걸 시킨 거야? 이미 오래전부터 조사하고 있었잖아요.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그가 불길을 마주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이미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모든 기억을 엿보려던 게 아니었다. 다만,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이 너무나 선명해서 그것만은 내 눈앞에 곧장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기
과거에는 네가 나를 동정하지 않았으면 했어.
백기
아니, 오히려… 그 답은 내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내 손을 놓았다.
백기
하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아. 지금 내가 더 필요한 건 바로 이 답이야.
희미한 달빛이 폐허 같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곧게 서 있었고, 그 몸에는 꺾이지 않는 고독한 용기와 집념이 서려 있었다.
그가 나를 안고 담장을 뛰어넘었을 때, 아주 단호하게 내 눈을 바라보았다.
백기
유연아, 고마워.
그 순간, 그는 마치 바람이 다시 돛을 올리고 출항하려는 찰나 같았다. 단지 이번에는, 혼자 떠나려는 바람이었다.
결국, 백기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내가 차에서 내릴 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가다가
끝내 멈춘 건——백기가 장례식장 작은 창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었다.
작은 납골함 안에는, 어린 소녀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본 적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톈징, 죽은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백기
두려워하지 마. 조금만 더 기다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 없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백기
내가 반드시 진실을 밝혀낼 거야.
백기
내가 널 집으로 데려다 줄게.
창 너머의 희미한 흰 안개가 서서히 흩어지며, 마지막에는 백기의 얼굴을 드러냈다.
유연
선배…… 혹시 톈징의 임시 안치비, 선배가 대신 내준 거예요?
백기
별거 아니야.
백기
다만 내일은… 그녀의 위패를 정식으로 모셔야 해.
유연
내일……?
나는 멍하니 굳어 버렸다. 잠시 동안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그게 내일이라면…… 그럼 방금 내가 본 장면은 뭐였던 걸까?
하지만 백기는 내 망설임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자기 멋대로 헬멧을 집어 들고 썼다.
백기
그 사람을 더 빨리 잡아낼 거야. 그리고 널 보호할 사람도 붙여둘게.
약속대로, 네 안전은 반드시 지켜낼 거야.
유연
선배, 난 그런 약속 필요 없어.
나는 곧장 그를 바라보며, 손바닥을 꼭 움켜쥐었다.
유연
정말로 나와 약속하고 싶다면…… 모든 일이 끝난 뒤, 나랑 은행나무 아래를 같이 걸어줘요.
백기
……
그는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헬멧의 바이저를 내려 잠갔다. 그리고 시동을 걸며 손목을 비틀었다.
이번에는, 그는 나와 약속하지 않았다.
굉음과 함께 엔진 소리가 멀어져 갔다. 멀리서 아버지가 살며시 커튼을 젖혔다.
달빛이 방 안으로 흘러 들어오며, 그의 얼굴 위에 옅은 냉기가 드리워졌다.
아버지
이제 가게.
그의 뒤에는 옷차림이 흐느적한 남자가 서 있었다.
헐렁한 면마 섞인 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게으르게 기지개를 켠 뒤 느릿하게 일어섰다.
아버지
다음엔 그렇게 서두르지 말게.
그들은 모두 적이 아니다. 내 딸도 포함해서.
??
아버지라는 자리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남자는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
집에 돌아가고 싶다면, 급해지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어.
직원
여기서 결제하시면 됩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백기는 곧장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삑' 소리와 함께 결제가 끝나자, 그는 작은 나무 상자와 위패를 들고 예약해둔 납골함 앞에 쪼그려 앉았다.
조심스레 상자를 밀어 넣고 정성껏 자리를 잡아준 뒤, 마지막으로 흰 위패를 앞으로 놓았다.
그는 왜 이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백기
두려워하지 마. 조금만 더 기다려.
내가 반드시 진실을 밝혀낼 거야. 내가 널 집으로 데려다 줄게.
대문을 나서며, 그는 번호 하나를 눌렀다.
곧,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허묵
백 지휘관님, 참 이른 시간이네요.
백기
어젯밤 보낸 뇌 스캔 자료, 받았겠지.
결과 나오는데 얼마나 걸리지?
허묵
그건 백 대장님이 어떤 결과를 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꽤 복잡하니까요. 어쩌면 우리가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사건 진행할때마다 사건 기록 뜨도록 업데이트 됐어요.
01장 사건기록
【연모고등학교 집단 자살 사건】
관련 인물 – 백기
연모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집단 투신 자살 사건으로, 최근 반년 사이 발생한 세 번째 학생 자살 사건이다.
사망자는 서로 다른 반에 속한 네 명의 고등학생이며, 초기 조사 결과 사인은 모두 고층 추락사로 확인되었고 타살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망자 명단:
왕샹위(王翔宇), 남, 17세
쟈오양(赵阳), 남, 17세
조춘잉(邹春莹), 여, 17세
톈징(田晶), 여, 17세
시신은 9월 18일 새벽 5시, 순찰 중이던 경비원에 의해 교내 동쪽 높은 단상폼에서 발견되었다.
경비원의 진술에 따르면, 전날 밤 9시 이곳을 지날 때는 시신이 없었으며, 당시 옥상 열쇠 두 개는 모두 경비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9월 17일 21시 03분, 감시 카메라에는 벽 모서리에서 시신이 나타나는 흔적이 포착되었다.
경비원의 기억 속에는 벽면 가장자리에 미세한 뒤틀림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시신은 모두 고낙상(高落傷, 높은 곳에서 떨어진 외상) 흔적이 뚜렷했으며, 다른 폭행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법의학 판정에 따르면, 사망 시간은 7시간을 넘지 않으며 추정 사망 시각은 9월 17일 밤 22시경이다.
복도 감시 카메라에는 하교 후 교실에서 각각 나온 4명의 학생만 촬영되었으며, 옥상으로 향하는 장면은 기록되지 않았다.
또한, 쟈오양의 손목시계가 사라졌으며, 마지막 신호는 9월 17일 20시 15분경 학교 버스 정류장에서 잡혔다.
시신에서는 매우 미약한 Evol 파동이 검출되었고, 초기 조사에서는 Evolver가 직접 능력을 사용한 흔적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다만 Evol 구동 특수 장치가 남긴 잔류 흔적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시신에서 검출된 특수 Evol 파장은 백기의 어머니, 원자이(温再)의 사망 현장에서 발견된 Evol 지문과 동일한 대역이었다.
이 단서를 발견한 이후, 백기는 사건의 배후를 꾸준히 추적했으며, 이번 사건이 어머니의 사망 원인이 된 화재와 어렴풋이 연결되어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Evol 지문】
관련 인물 – 백기
특파팀 산하 특수연구부에서 비밀리에 개발한 특별 탐지 장치를 통해 포착되는 정보 흔적.
늘어나는 Evol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특파팀은 지난 10여 년간 Evol 범죄의 가시화·물증화 연구를 추진해 왔으며, 현재는 최종 테스트 및 검증 단계에 이르렀다.
각 Evolver는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고유한 에너지 파장을 남긴다.
이를 효과적으로 기록하면, 기존의 지문처럼 Evolver를 특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추적용 "신분증"이 된다.
백기가 특파팀 지휘관에 오른 뒤, 그는 이 기술의 연구와 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추진했다. 인재를 영입하고, 기술 핵심 인력을 재고용하며, 막대한 인력과 자금을 투입해 특파팀과 군부 세력 사이에서 조율을 이어갔다.
백기는 언제나 이렇게 믿었다. Evol 범죄를 상대하려면 보다 가시적이고 과학적인 기술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만 Evol 범죄를 더 빠르고 철저하게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