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고진, 한예준, 당조 등이 단톡방에 차례로 “OK”를 올리는 걸 보고, 난 만족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백기 생일을 위해 만든 이 단톡방은 며칠째 활발했고, 다들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었다.
백기: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기분이 좋아?
맑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샤워를 마친 백기가 다가와 내 옆에 바짝 붙더니, 턱을 자연스럽게 내 머리 위에 얹었다.
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테이블에 엎어 놓고, 수건을 들고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말했다.
유연: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선배는 왜 발소리도 없이 걸어다녀요?
백기:
뭔가 숨기고 있는 사람 같아서.
후덥지근한 공기가 방 안에 가득한 가운데, 그의 밝은 호박빛 눈동자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백기:
단톡방이네? 고진 프로필 사진도 보이던데.
백기:
무슨 얘기 중이야?
유연:
묻지 마요, 뭐가 됐든 절대 안 알려줄 거예요!
내가 '결의에 찬' 표정을 짓자, 그는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터뜨리며 내 옆에 더 바짝 붙었다.
백기:
그래, 안 물을게.
유연:
아, 맞다. 선배, 저 앞으로 며칠은 가끔 나갔다 올 수도 있어요.
유연:
그러니까 집 잘 지켜줘야 해요.
백기:
어디 가는지도 말 못 해?
유연:
응, 비밀이에요~
그는 나를 바라보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백기:
그럼 나는 앞으로 며칠 동안 네가 신나게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물어보지도 못하겠네?
백기: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유연:
푸흐……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유연:
하지만 가장 좋은 선물을 받으려면 가끔은 기다림도 필요하잖아요.
백기:
상관없어.
난 원래 인내심 별로 없거든. 뭔가 보상이 있어야 협조하지.
유연:
선배가 인내심이 없다고요? 누가 믿겠어요~!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그의 눈썹 끝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 맑은 눈동자가 더 선명하게 빛났고, 그는 손을뻗어 나를 품에 안았다.
백기:
그럼, 한번 협조해볼게.
휴대폰이 조용히 진동했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 안기면서, 한 손으로 그의 등 뒤에서 화면을 쓸어 넘겼다.
단톡방에 당조가 새 메시지를 보냈다.
“백 대장님 바이크랑 비슷한 모델로 골라뒀어요.
유연 씨 면허도 방금 나왔다면서요? 그날 바로 연습장으로 가서 타면 되겠네요.”
“다른 준비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말하세요.”
“근데 진짜진짜 백대장님 한텐 비밀입니다. 그 쪼잔한 성격에 , 우리가 이런 거 도와준 거 알면 한 명씩 잡고 뭐라고 할걸요.”
나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슬며시 미소 지으며, 이 “쪼잔한” 우리 지휘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리고 단톡방에 ‘알았습니다’ 이모티콘을 꾹 눌렀다.
그 순간, 살짝 늘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입맞춤이 내 귓가에 닿았다.
백기:
이제 다 끝났어? 나 좀 봐도 돼?
유연:
응——
그는 휴대폰을 옆으로 밀어두고, 이번엔 더 확실한 키스로 답하듯 만족스럽게 내 입술을 눌렀다.
잠금 화면 위로는 여전히 단톡방 메시지 알림이 하나둘씩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그처럼 나 역시, 곧 다가올 그의 생일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1장
모두:
“Woo——오늘의 생일 스타 등장——!”
내가 백기를 밀어넣으며 예약해 둔 룸의 문을 여는 순간, 작은 폭죽과 꽃가루가 ‘팡’ 하고 터지며, 환호성이 그를 에워쌌다.
백기는 북적이는 룸 안을 훑어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백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모두:
작전 성공!
몇몇 사람들이 승리의 세리머니를 취했고, 고진도 당당하게 백기 옆으로 걸어왔다.
고진:
미리 말해두는데, 전원 자발적 참여야.
이거 단체 회식 자리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
맞아요 백기 형, 여기에 특파팀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한예준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서는 작은 파티용 모자를 들고 백기에게 씌우려 했다.
한예준:
뭐, 저 빼고는 전부 다 맞긴 하지만요. 좀 민망하네요 하하!
한예준:
백기 형, 딱 좋은 타이밍이에요.
제가 막 형 고등학교 때 V50 기록 얘기하고 있었거든요!
고진:
얘 지금 거의 너를 전설처럼 포장하던데.
한예준:
아니 그게 다들 형 고등학교 시절의 간지폭발 모습을 못 봤으니까 그렇죠!
백기 형, 여기서 한 번 보여주시죠!
백기:
넌 하나도 안 민망한 거 같은데.
룸 안은 또다시 한바탕 웃음으로 가득 찼다.
마치 한여름 햇살에 데워진 거품처럼, 소리 없는 행복이 공기 중에 퍼졌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던 백기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백기:
또 비밀작전이었어?
유연:
백 경관님한테 배운 거죠, 뭐.
그의 앞머리가 미소에 맞춰 살랑거리며 흔들렸지만, 그 반짝이는 호박색 눈빛은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빛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사회를 맡은 당조가 마이크를 들고 무대에 올라섰다.
당조:
친애하는 형자 자매 여러분, 오늘은 긴급 소집도, 작전 코드명도 없습니다.
당조:
오늘 우리는 진심을 담아—
전 세계에서 가장 멋지고 위대한, 백 지휘관님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당조: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홍보팀 여러분의 전폭적인 지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조의 열정적인 오프닝 멘트가 이어지는 동안, 스크린 위로 한 실루엣이 비춰졌다.
역광 속에서 또렷한 실루엣이 천천히 다가오고, 그 발걸음은 단단하고 흔들림 없었다.
곧 화면이 전환되며 장면들이 빠르게 이어졌다.
폭우 속을 달리고, 폐허 속을 은밀히 잠입하며, 사격장에서 총을 정확히 조준하는 장면까지—
날카롭고 멋진 액션들이 군더더기 없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화면 위엔 백기가 멍하니 있는 귀여운 모습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보고서 앞에서 하품을 하거나, 식판 속 채소를 젓는 장면 등.
마지막엔 수많은 생생한 장면들이 모여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글자를 완성했다.
— 백기.
당조: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백기 동지의 생일 축하 파티를 정!식!으!로! 시작합니다!
백기는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민망하게 찌푸리더니
결국은 나를 향해 '째려보는' 시선을 보냈다.
백기:
이거… 너도 알고 있었던 거야?
나도 입을 삐죽 내밀며, 화면에서 다시 반복 재생되는 영상을 보다가 조금 질투가 솟아올랐다.
유연:
아니 근데, 왜 선배 영상이 나보다 훨씬 많은거지?
이따 당조 씨에게 꼭 따질 거야.
(영상도 달라할듯)
백기:
……
2장
분위기는 금세 활기를 띠었다.
이 순간, 모두는 제복을 벗고 단지 백기의 친구로서 그와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었다.
루일:
노래 시작은 백기 형이 해줘야죠.
소정:
백 대장님한테 <청장고원> 시켜요!
백기:
나 오늘 생일인데?
백기:
고진 시켜.
고진:
좋은 일 좀 생기면, 그땐 나도 한 번 떠올려줄 수 없냐?
소국:
제가 할게요. 백 대장님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요.
항상 차분하던 소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끌벅적하던 공간이 순간 조용해졌고, 나도 숨을 멈추고 지켜보게 됐다.
잔잔한 반주가 깔리자 그는 마이크를 들고, 묵직한 눈빛으로 백기를 바라보며 노래를 시작했다.
소국:
“누가 가져왔나~~ 아득한 그~ 부름~~”
모두:
……
모두:
국전평! 한 글자라도 음 맞춰서 부르면 안 되냐고!!
나는 백기의 어깨에 기대 웃음을 참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 주변 사람들도 들썩이며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게 보였다.
그렇게 정말 ‘대담한’ 오프닝 이후, 사람들은 앞다투어 노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무대에 올랐다.
한쪽에선 몇몇이 지옥의 “I형 인간 게임”을 하고 있었고, 또 다른 쪽에선 여전히 한예준이 백기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백기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옆 사람들과 가볍게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곁에 앉아, 왁자지껄한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 앉은 백기를 바라보다,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포근한 행복을 느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백기가 고개를 돌렸다.
살짝 어두운 룸 안에서 웃음소리와 기쁨이 가득 차 있었고,
그의 눈 속에도 웃음이 고여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내렸다.
유연:
즐거워요?
백기:
즐거워.
팀원 A:
어라? 항졔가 졌다고?
팀원 B:
다시 하자 다시 하자——아악——!!
“I형 인간 게임”의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한 여성이 단정한 걸음으로 무대 앞으로 걸어 나가 마이크를 들고 백기를 바라보았다.
항졔:
백 대장님, 저희 아까 게임 했는데요.
진 사람이 대표로 나가서 백 대장님께 진심 고백을 하기로 했어요.
백기:
……?
팀원들:
안 돼에에에——!!
항졔는 굳은 표정으로 어두운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남자 팀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항졔:
백 대장님, 저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정말 대장님을 엄청 좋아한대요.
대장님이 있으면 왠지 든든해지고,
다들 대장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대요.
항졔:
백 대장님 없으면 안 된대요.
특파팀에도, 거기다 이 지구에도 대장님은 없어선 안 된다고요.
들으셨어요?
백기:
……
비명 같은 신음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여서,
도대체 어느 쪽이 더 시끄러운지 모를 정도였다.
어떤 사람은 아예 큰소리로 고백 릴레이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항졔:
백 대장님, 아직 대답 안 하셨어요.
들으셨어요?
백기:
……들었어!
그 순간, 무언가 무겁고 뜨거운 감정이 백기를 조용히 감쌌다.
그조차도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그 많은 웃음소리 속에서도 백기의 시선은 곧장 나에게 향했다.
붉어진 귀끝을 숨기려는 듯 그는 가볍게 기침을 한 번 하고, 내 볼을 손으로 살짝 꼬집었다.
백기:
너도 웃어.
유연:
그럼요, 백 대장님.
저도… 선배가 없으면 안 돼요!
분위기에 휩쓸린 나도 모르게 그를 힘껏 끌어안았고, 주변에선 또 한 번 환호가 터졌다.
그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는 내 어깨에 감았던 팔을 풀고 조용히 탁자 앞에 앉아,
룸 안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서 아래까지, 2층에서 1층까지 그는 모두를 진심으로 바라봤고, 그 눈빛에는 따뜻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마침내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탄산음료 병을 높이 들었다.
백기:
길게 말 안 할게.
고마워, 모두.
백기:
건배.
유연 & 모두:
건배——!!
부딪히는 잔의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구호 같기도 하고, 이름 같기도 했고, 함께 걸어온 수많은 그림자 같기도 했다.
아직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끝을 향해 우리는 서로를 지켜내며, 찬란한 순간들을 함께하고 있었다.
고진:
이 분위기에… 노래 하나쯤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러자 익숙하고 부드러운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렇게 바랜 어제를 지나, 이제는 모두가 함께할 내일로 이어지는 노래였다.
( 노래 제목은 오월천 건배 五月天-乾杯 노래 테마가 이번 생일 테마 전체를 아우르고 있으니 가사 한번 찾아보시는 걸 추천, 브금 카테고리에 가사 넣어두긴 했습니다)
고진:
“언젠가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너와 나의 돌아갈 수 조차 없는 아득히 머나먼 세월로…”
한예준:
“만약 언젠가 세상이 종점에 다다른대도 너와 추억으로 빚은 달콤함으로 너와 다시 건배하리…”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노래에 함께했고, 나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사람들이 서로 껴안는 틈 사이로 작은 폭죽을 팡 터뜨렸다.
고진은 백기의 어깨에 팔을 걸었고, 무대 조명이 백기의 얼굴을 비추며 소년 같은 웃음을 그려냈다.
수많은 찬란한 색색의 테이프가 축복처럼 그의 위로 쏟아졌다.
마치 사랑으로 물든 눈부신 눈송이 같았다.
백기는 손에 든 작은 방울을 흔들며, 모두와 함께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모든 축복이 그에게 향하던 순간— 당조가 마이크를 백기에게 건넸다.
백기:
언젠가 바로 지금, 지금 바로 언젠가——”
백기:
“지금껏 말하지 못했던 고마움을 전하며——”
백기:
“너와 다시 건배하리 영원을 위해 다시 건배하리——”
백기:
“천년 만년 영원할 수 있도록——”
그 순간, 당조가 타이밍 맞춰 생일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
모두가 잔을 높이 들고 룸 한가운데에 선 백기를 향해 외쳤다.
유연 & 전원:
백 대장님(백기, 백기 형), 생——일——축——하——해——요——!
우르르 쏟아지는 축하의 말들이 형형색색의 폭죽처럼 백기를 향해 터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백기가 눈을 감고 소원을 빌던 순간—내 눈엔 어린 시절의 백기가 겹쳐 보였다.
그때의 선배는 이런 순간을 상상해 본 적 있을까?
그리고 지금, 선배 곁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다.
그들은 선배를 잃을 뻔했던 그 시간을 누구보다 두려워했고, 무엇보다 당신을 지키고,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부드러운 촛불이 그의 얼굴을 비추며 그 날카로운 선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눈을 뜬 백기가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가볍게 웃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
한예준:
백기 형도 노래 한 곡 해야죠!
여러 사람의 응원 속에서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무대로 올랐다.
잠시 생각하더니, 키보드 위에 무언가를 또각또각 입력했다.
낯설지 않고, 조금은 로맨틱한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그는 웃으며 나를 바라보며,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3장
모두:
“미소가 아무리 예쁘고 달콤해도, 당신 것이 아니면 의미 없어~~
눈물이 아무리 쓰고 짜도, 당신이 위로해 주면 또 맑은 날이죠~”
당조:
아니, 우리 백 대장님 노래 왜 이렇게 잘해요?
고진:
몰라서 그래. 사랑의 힘이지 뭐~
백기:
개그는 집에 가서 해. 얼른 꺼져.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한 건 겨우 오후 네 시가 좀 지난 시각.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다들 이른 시간에 파티를 끝내고, 나와 백기에게 시간을 내어주기 위해 슬쩍 물러난 거란 걸.
금세 북적이던 공간은 조용해졌고, 백기는 모두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마치 세상이 그에게 주는 가장 따뜻하고 특별한 애정처럼, 이글거리는 햇살이 머뭇거림 없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의 옷자락과 머리카락까지도 빛에 물들어 반짝였다.
백기:
이제부턴 그냥 따라가면 되는 거지?
유연:
벌써 들켰어요?
백기:
들킬 게 어딨어. 분명히 뭔가 준비돼 있을 테니까.
그 말투엔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 그리고 사랑받고 있다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
그 확신이 전해지는 듯, 내 마음도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백기가 헬멧을 쓰려던 순간, 나는 그를 말렸다.
놀란 듯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앞에서, 나는 미리 가방에 넣어 둔 운전면허증을 꺼내 흔들고는 자신 있게 헬멧을 쓰고, 먼저 블랙이에 올라탔다.
유연:
자, 이쪽으로 오세요, 잘생긴 분~
오늘은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가 눈을 깜빡이더니, 곧 놀란 듯하면서도 설렘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백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헬멧을 쓴 뒤 내 뒤에 올라탔다.
백기:
이거… 신선한데?
유연:
……저도요.
처음으로 누굴 태우는 거라 좀 색다르네요.
백기:
그래서 요 며칠 나 몰래 이거 연습한 거였구나?
유연:
어때? 뒤에 타니까 좀 민망하지 않아요?
백기:
내 여자친구가 이렇게 멋진데, 뭐가 민망해.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꼭 안았다.
오히려 나보다 더 자랑스럽고 뿌듯해 보였다.
아직 바람은 불지 않았고, 엔진도 잠잠했지만 내 심장은 이미 소리 내며 뛰고 있었다.
유연:
그럼, 출발할게요!
등 뒤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내 손바닥에도 열기가 퍼져갔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수없이 연습했던 대로 천천히 오토바이 손잡이를 돌렸다.
바람이 갑자기 일어났다. 길이 발밑에서 펼쳐졌고, 그 끝은 저 멀리 은빛 하늘로 이어졌다.
세상은 자유로운 질주 속에 빠르게 뒤로 흘러가고, 우리는 찬란한 그림자 속으로 달려 나갔다.
유연:
어때, 긴장돼요?
백기:
굉장히 특별한 기분이야.
단순히 감정을 쏟아내는 드라이브도 아니고, 그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길도 아닌—
지금의 그는, 훨씬 편안한 얼굴로 도시를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백기:
근데 너무 긴장한 거 같아.
근육이 잔뜩 긴장돼 있는데?
유연:
아, 그거 말하지 마요—— 민망하잖아!
도시의 그림자가 우리 뒤로 천천히 흘러가고, 우리는 탁 트인 길을 따라 여름 햇살 아래, 나무 그늘 사이로 달렸다.
유연:
어때? 여기 풍경 괜찮죠?
백기:
좋네. 새로 생긴 도로야? 전에 못 봤던 길인데.
나는 미소 지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곧 오토바이를 멈춰 세웠다.
도시 외곽의 작은 언덕. 그 위엔 거대한 관람차가 햇빛을 받으며 조용히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익숙한 손길로 행동하자, 백기는 눈치챈 듯 미소 지었다.
백기:
이거, 시에서 최근 몇 년간 세운 대표 랜드마크잖아.
백기:
혹시… 이것도 내 여자친구가 제안한 거야?
나는 슬며시 웃으며 입꼬리를 올리고, 예약해 둔 스태프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백기를 이끌고 캐빈 안으로 올라탔다.
유연:
그냥 제안만 했을 뿐이야~
관람차가 서서히 올라가면서 도시의 풍경이 점점 넓게 펼쳐졌다.
유연:
여기 위치가 딱 좋아요.
도시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어요.
유연:
제가 선배를 데리고 하늘을 날 순 없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같이 이 도시를 보고 싶었어요.
백기는 내 옆에 앉아, 아득히 펼쳐진 저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손이 조용히 내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고 우리 손은 빈틈 없이 꼭 맞닿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머리 위로 무게가 느껴졌고, 그가 조용히 고개를 기대왔다.
백기:
난 이 도시가 정말 좋아.
유연:
알아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온 거잖아요.
백기:
……열심히, 했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유연:
당연하죠.
더 강해지려고, 더 현명해지려고, 골치 아픈 일도 다 배우고 해내려고, 계속 노력했잖아요.
유연:
좋아하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은데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고요.
유연:
생각해보면, 선배의 많은 것들은 고통을 대가로 얻어낸 거였어요.
말을 하다 보니 그가 걸어온 지난 시간이 하나둘 떠올랐다.
마음이 먹먹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짠했다.
결국 나는 그의 눈가와 뺨을 손끝으로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곧 밝고 단단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백기:
훈련하지 않고, 힘들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어.
하품도 참고 기술도 익히고,
보고서를 제출해야하지.
백기:
다치지 않으면
다음엔 어떻게 피해야 할지도 못 배우니까.
싫은 걸 경험하지 않으면, 그것을 완전히 없애는 법도 배우지 못해.
백기:
그 어둠들을 이겨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그의 삶은 언제나 ‘통증의 수업’ 같았다.
하나하나 상처를 겪어내고
그 안에서 더 깊고 강한 존재로 자라났다.
백기:
…이것도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연:
당연하죠.
유연:
선배는 그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모든 걸 스스로 감당해낸 거잖아요.
햇살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었다.
결심과 고집이 엿보이는 그 눈동자를 더욱 또렷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백기: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난 앞으로 나아가고 싶으니까.
유연:
응, 저도 알아요.
그 순간, 관람차는 꼭대기에서 멈췄고 나는 살짝 리모컨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도시의 풍경이 아래로 끝없이 펼쳐졌다.
수많은 일상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유연: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사실 이 도시, 그냥 평범한 도시잖아요.
유연:
근데 문득 그런 생각도 들어요.
이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지켜낸 도시라는 거라는걸.
유연:
그래서 이 도시는 조용하고, 평화롭고,
가끔은 기적 같아요.
전… 정말 자랑스러워요.
도시는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너머에서 백기는 하나의 실루엣처럼 그 안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어쩌면 내 너머로 우리가 함께 지켜온 이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백기:
…나, 충분히 잘해온 걸까?
이 순간만큼은, 그는 마침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말하지 않았다.
의심도 핑계도 없이, 그저 담담히, 마치 세상에 던지는 질문과도 같았다.
유연:
정말 잘해왔어요.
이보다 더 잘할 순 없었어요.
백기:
내가 여기서
하나, 소원을 남겨도 될까?
…너무 욕심일까?
유연:
그럴 리가요.
그의 조용한 물음에 나도 함께 눈을 감았다.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
여름은 길었다. 이 도시를, 그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빛나게 하기 위해.
그리고 나의 소년은 눈을 감고, 그의 소원과… 그의 입맞춤을 남겼다.
4장
태양은 낮게 걸려 있었고, 온 하늘 가장자리를 부드러운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시간마저 느려진 듯, 길은 한없이 길어졌고 황혼의 실을 뽑아내듯 저녁바람 속으로 스며들었다.
흰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흩날리며 하늘 위에 부드러운 금빛 실선을 그렸다.
반짝이는, 마치 세상 속 작은 빛 같았다.
돌아가는 길엔 운 좋게도 차량이 거의 없었다.
나는 새로 난 도로 한가운데 오토바이를 세우고, 미소를 머금은 채 도시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연:
선배, 이 길의 저 방향으로 가면 연모시로 이어져요.
유연:
반대로 약 1킬로미터쯤 가면 갈림길이 나오고,
그 중 하나는 고속도로로, 다른 하나는 강가로 이어져요.
유연:
이 길로는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드라이브하기에도 너무 좋은 길이에요.
유연:
나는 앞으로 이 길을 지나는 차들이 점점 많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각자 자기만의 목적지를 향해서 말이에요.
백기:
마음에 들어.
길 외우는 거 자신 있으니까,
이제 나도 자주 올게.
그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슬쩍 핸드폰을 보았다.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결국 설렘을 참지 못하고 두어 걸음 앞으로 달려가, 도로 한복판에 섰다.
그가 의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두 팔을 높이 들고 외쳤다.
유연:
3——
2——
1——!
내 카운트다운이 끝남과 동시에, 가로등들이 일제히 켜졌고 도시의 불빛이 순식간에 반짝이며 피어올랐다.
황혼과 나란히, 마치 타오르는 촛불처럼 따스하게 빛났다.
유연:
선배——이 길 이름은——‘기복로’에요——!
유연:
이게 진짜,
제가 선배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이에요——!
백기는 멈춰 서서 나를 바라봤다.
잠시 멍한 얼굴이었다.
유연:
2년 전 랜드마크 공모가 시작됐을 때였어요.
어느 날 이 길을 지나가다가
문득 도시를 돌아봤는데…
그 순간 선배 생각이 났어요.
선배가 걸어온 긴 길,
그리고 선배의 시작과 끝.
유연:
그래서, 이 도로 이름을 신청했어요.
그리고— 정식으로 승인받았죠.
그는 가로수 그림자 아래 서 있었다.
바람이 잎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잎이 그의 눈빛을 잠시 가려주었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없던 그가, 조용히 한 마디를 꺼냈다.
백기:
이건…
내가 뭔가를 잘해서 받은 선물일까?
백기:
아니면—
이걸로 뭔가를 증명하고 싶었던 거야?
그는 고요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 질문은 누군가를 탓하거나, 세상에 반항하려는 게 아니었다.
아마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유연:
사실 이건,
지휘관인 백기에게 주는 선물도 아니고
특파팀인 백기에게 주는 것도 아니야.
유연:
굳이 말하자면…
유연:
그저 계속 길 위를 달려온 선배,
그 누구도 아닌 백기—
그 자체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유연: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도 아니고,
무언가에 대한 보상도 아니에요.
유연:
그냥, 백기니까.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흔들었고, 그의 뒤편으론 이 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도— 빛으로 만들어진 길이 쭉 뻗어 있었다.
유연:
인생이란 길은 오르내림이 많잖아요.
나는 선배가 언제나,
다시 길 위로 나설 용기를 갖고 있기를 바래요.
유연:
멈춰도 돼요.
뒤돌아가도 돼요.
유연: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어요.
유연:
그리고 이 일은,
아무도 몰라요.
유연:
이 도로의 이름만 사람들이 기억할 거고,
이 모든 비밀은—
오직 선배에게만 알려줄게요.
백기:
……나한테만?
유연:
그럼~
이름 붙인 사람이 나라는 거,
오직 선배만 아는 비밀이에요!
서쪽으로 기운 해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그는 당황한 듯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백기:
왜?
그가 작게 물었다.
유연:
제가 좀 이기적이라서 그래요.
유연:
우리는 언젠가 ‘어제’가 될 테니까—
나는 내 사랑과 축복을
이 길 위에 영원히 남기고 싶었어요.
유연:
시간이 얼마나 흘러도,
선배는 이 길을 볼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세상도 마찬가지로.
유연:
‘기(起)’는 백기의 기.
‘복(福)’은 백기의 복.
유연:
이 길은 선배만의 길이에요.
어떻게 걷든,
그건 다 선배 몫이에요.
석양 속에서 그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아주 느릿느릿, 마치 지난 시간들을 모두 되짚으며 모든 침묵과 성장의 조각을 지나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나를 꼭 껴안았다.
유연:
세상이 항상 고통으로 선배를 떠밀어 성장케 한다면
우리 모두의 사랑으로, 선배와 함께 성장할게요.
유연:
제가 알려줄게요, 사랑은 어떤 고통과도 바꿀 수 없는 보상이에요.
백기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것을 들었다.
그 순간, 그는 문득 깨달았다.
사실 많은 것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달라져 있었다는 걸.
그녀에게 다가가는 모든 걸음은 단 한 번도 고통이 아니었다.
그 불편하고 모순된 순간들, 그녀가 그에게 하나하나 벗겨내게 했던 껍질들은, 결국 그가 진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해준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이끌고 아주 긴 길을 함께 걸어왔다.
그는 줄곧 그 여정의 끝엔 그녀만이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끝에는 그녀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백기’로 만들어줬고, 그를 ‘자신 그대로의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그 사람과는 달랐다.
그녀가 그에게 건넨 이 길은—오직 그만 알고 있는, 그에게만 속한 길이었다.
사실 그 길은, 그녀가 이미 오래전에 조용히 건네준 것이었다.
백기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마치, 자신의 영혼을 안고 있는 것처럼.
유연:
선배, 출발해요.
선배는 어디든 갈 수 있어요.
그 누구도 널 가둬둘 수 없어요.
엔진 소리가 울렸고,
백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금, 나는 길 위에 있다’는 확신을 느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고, 그녀는 그의 등 뒤에 있었고, 길은 저 하늘까지 이어져 있었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여름밤은 눈부셨고, 밤바람은 다정했으며, 네온사인은 젖은 도로 위에 형형색색의 빛을 뿌렸다.
유연:
선배——우리 집에 갈까요——?
백기:
…안 가고 싶어.
유연:
좋아요, 그럼 어디로 갈까요?
백기:
모르겠어. 어떡하지?
교차로 앞, 백기는 헬멧을 벗고 오토바이에 기댄 채 맑고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나도 덩달아 웃으며 헬멧을 벗고, 바람에 머리를 맡겼다.
백기:
하지만 어디든,
너랑 같이 갈 거야.
유연:
물론이죠.
백기:
노래 부르러 가자.
유연:
지금이라도 부를 수 있어~!
나는 그를 안고, 두 팔을 높이 들며 외쳤다.
유연: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그의 귀 옆에서 온 우주의 축복이 그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그는 웃으며 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오토바이의 손잡이를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백기:
출발하자.
깜빡이는 빨간 신호등이 그의 눈동자에 비쳐 투명하고 밝은 초록빛 그림자로 바뀌었다.
마치 삶이 출발을 환영하며 내민 따스한 손바닥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