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갈 거야."
"넌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고, 또 내가 평생을 좋아할 사람이야."
1장
창밖엔 밤공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고, 나는 거실 바닥에 대자 모양으로 널브러져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누워 있었다.
백기
왜 그래?
유연:
그냥… 이렇게 퍼져있게 둬요……
그 말에 가볍게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단단한 팔이 등 뒤로 돌아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뽀송하고 산뜻한 비누 향이 살짝 눅눅한 공기 속에 스며들어, 그의 체온과 함께 내 등 뒤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반응할 틈도 없이, 나는 어느새 뒤집힌 채 그의 목을 반사적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백기:
그럼 내 위에 퍼져 있어.
유연:
이런 식의 심문 방식은 반칙이잖아요.
백기:
심문하는 거 아니야, 네가 직접 말하길 바라는 거지.
그는 웃으며 내 이마와 눈썹 사이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막 샤워를 마친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미처 마르지 않은 습기와 따뜻한 체온이 내 마음까지 말랑하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며, 고개를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
유연:
연말이잖아요. 업계에서 또 ‘스타 총출동’ 식의 연말 파티를 연다더라구요.
연예인, 제작사, 미디어 쪽 주요 인물들은 다 초청됐대요.
유연:
그런 자리는 생각만 해도 피곤해요.
연예계는 정말 가지각색이라, 사람마다 성격도 다르고 겉과 속도 천차만별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들 전부 똑같은 웃는 얼굴로 뒤섞여 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눈치 봐야 하고, 사람마다 다른 ‘룰’과 체면을 챙기려면 어딜 가든 불투명한 심해를 걷는 기분이 든다.
백기:
그래도 안 갈 수는 없는 거지?
유연:
응, 안 갈 수는 없죠.
회사가 굴러가려면 결국 더 많은 루트와 시장이 필요한 법이고, 그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얽힌 인간관계는 피할 수는 없다.
유연:
선배 말대로 각자 다른 속내를 감추고,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진 어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거잖아요.
유연:
사실 모두가 그런 자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나쁜 사람인 것도 아니에요.
그냥 각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뿐이죠.
유연:
어른이 된다는 건, 참 피곤한 일이야...
그런 나의 말에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유연:
웃지 마요. 선배도 나랑 다를 바 없으면서.
백기:
나도 같이 갈까?
유연:
싫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바로 거절했다.
유연:
선배는 지휘관이잖아요? 선배를 지켜보는 사람도 많은데.
백기:
되게 공적인 이유네.
그가 슬며시 입가에 웃음을 머금자, 나도 손끝으로 그의 입꼬리를 따라 그 아름다운 눈썹과 눈매를 가볍게 훑었다.
달빛을 머금은 투명한 호박빛 눈동자는 세상 어떤 옥이나 보석보다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유연:
알겠어요, 그냥 선배가 그런, 선배도 좋아하지 않을만한 곳에 있는 게 싫은 거예요.
유연:
일은 일이잖아요. 그냥 일이라고 생각하고 다녀오면 돼.
유연:
전에 예뻐 보인다고 생각했던 드레스도 결국 다른 걸로 교체했어요.
굳이 그렇게 예쁘게 입을 필요 없는 자리잖아요.
백기:
그 드레스, 얼마나 예뻤는데?
유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백기:
샀어?
유연:
…선배 화제 돌리려는 거죠?
백기:
네가 말하는 동안 계속 너 생각만 하느라, 솔직히 잘 못 들었거든.
백기: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해줄래?
유연:
선배 정말!
그가 뭔가 꿍꿍이를 품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자, 나는 상체를 일으켜 그에게 덮치듯 달려들었다.
유연:
오지 마요! 진짜 오지 말라니까… 읏!
못된 경찰관이 키스로 내 모든 말문을 단숨에 막아버리면서 내 저항은 한순간에 '제압'당했다.
백기:
됐어, 그런 귀찮은 사람들 생각하지 말고… 나만 생각해.
2장
머리 위로 거대한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흐르는 빛의 장막처럼 펼쳐져 있고, 그 불빛이 금빛 벽면에 드리워져 공간 전체를 고급스럽고 또렷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있던 촬영 카메라가 이따금 행사장을 스쳐 지나가며, 드레스 위로 번지는 빛의 흔적을 프레임 속에 담아냈다.
술잔이 부딪히고, 인사가 오가며, 모든 얼굴들이 적당히 웃고, 대화는 가볍게 오갔다.
하지만 대화를 바꾸는 속도는 너무 빠르고, 웃음은 너무 계산되어 있었다.
가끔 던져지는 말 속엔 은근한 의도가 담겨 있었고, 그 말들은 조용히 누군가의 마음을 툭 건드렸다가, 곧 아무렇지 않은 미소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예전에 한 번 얼굴을 본 적 있는 프로듀서와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또 다른 플랫폼 관계자들과 이어지는 대화에 휩쓸렸다.
몇 번의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야, 나는 겨우 입구 쪽 계단 근처의 테이블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고선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 중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유연:
휴......
나는 대충 음식을 집어 먹는 척하며, 몰래 한숨을 쉬었다.
슬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으로 사람들을 훑었다.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출발할 때 그가 지었던 살짝 올라간 미소가 떠올라, 왠지 모르게 마음 한켠이 불안했다.
유연:
지금까지 안 나타난 거 보면…… 정말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케이크 위의 딸기를 포크로 툭 찔러 입에 넣었다.
하지만 딱 베어 문 순간, 예상보다 강한 신맛이 혀끝을 강타하면서 내 얼굴이 찌푸러졌다.
??:
이게 누구야, 우리 유연 씨 아니야? 오랜만이네.
등 뒤에서 낯선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표정을 다 가다듬기도 전에, 그는 벌써 다가와 내 얼굴을 힐끔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중년 남성:
보아하니, 유연씬 내가 반갑진 않은가 봐? 얼굴이 다 찌푸려졌네.
유연:
그럴리가요, 호 선생님.
딸기가 너무 신 탓인데.
속으로는 한숨을 쉬며, 눈앞에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이 고집 센 중년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이제 막 시작된 예술제 프로젝트를 자랑하고 있었고, 우리 회사가 참여할 가능성을 떠보는 중이었다.
호 선생님:
그래도 요즘은 너희 같은 젊은 친구들이 대단하지.
요즘 나오는 인기 프로그램들은 다 너희 손에서 나온 거잖아?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이제 너희한테 좀 배워야지.
호 선생님:
근데 말이야, 물을 마시면 우물을 판 사람을 잊지 말라잖아. 길을 여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
호 선생님:
그러니까 너희 같은 신세대들도 바통을 잘 이어받아야 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바닥에 내팽겨치면 안 되지 않겠어?
??:
바닥까지 떨어질 실력이면, 원래도 별볼일 없던 거겠죠.

익숙하면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담담하게 날아왔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더는 저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쪽을 바라보았다.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나무 조각 난 난간 위로, 찬란한 샹들리에 빛이 쏟아졌다.
그 빛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며 나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 속에 스며들었다.
그가 걷는 발끝마다 옷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그 바람마저 그의 기운을 담은 듯, 주변 공간의 분위기를 단숨에 휘감았다.
짙은색 외투가 그의 어깨 위에 무심하게 걸쳐져 있었고, 호박빛 눈동자는 날카롭고 오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백기는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왔다. 서두르지도, 멈추지도 않으며, 그가 걸어올수록 공기마저 긴장감으로 조여들었다.
실버 라인이 정갈하게 박힌 수트는 촘촘한 주름 하나 없이 깔끔했고, 샹들리에 아래에서 차가운 광택을 반사했다.
목선엔 커다란 에메랄드 브로치가 박혀 있어, 그의 기품을 더더욱 돋보이게 했다.
주변의 대화 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얼마나 많은 시선이 그 차가운 기운을 따라 끌려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그가 내 모든 주의와 의지를 앗아가는 걸 허락해버렸다. 남은 건 오직,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뿐이었다.
호 선생님:
……누구시지?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대단하단 말야. 하는 말이 아주 거침없는 걸 보면.
유연: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호 선생님:
내가 말한 건……
백기:
죄송합니다. 제가 업계 사람은 아니라서, 그런 ‘룰’이란 건 잘 모릅니다.
백기:
그렇긴 해도… 눈앞에 계시는 ‘선배’라는 분은—
아무래도 그렇게 ‘바닥에 떨어질’ 분으로는 안 보여서요.
그가 살짝 눈썹을 올리며 나를 바라봤다.
백기:
제가 뭔가 착각한 걸까요?
나는 잠깐 멈칫했지만, 곧바로 그의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유연:
그럴 리가요. 호 선생님은 예술계의 대선배시고, 다양한 실험 예술에 대한 안목도 정말 깊으세요.
유연:
저희가 항상 배우고 있어요.
백기:
그렇게 대단하신 분인가요?
백기:
제가 예술 쪽은 잘 모르지만…호 선생님께서 더 넓은 길을 개척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존경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는 날카로우면서도 당당한 기운을 그대로 품은 채 내 옆에 섰다.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다정하게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느긋하게 몸을 숙여 내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백기:
늦어서 미안.
그 말과는 달리, 그림자 아래 그의 눈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나는 슬며시 그의 손바닥을 살짝 꼬집고,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팔을 끼웠다.
유연:
호 선생님, 소개해 드릴게요. 제 배우자(爱人), 백기입니다.
호 아저씨: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백기:
그거 좋은 일이네요. 제 이름은 안 들어보는 게 더 나은 일이니까요.
결국, 호 선생님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
백기:
방금 그 사람, 마음에 안 들어?
유연:
업계에서 나이드신 분들은 원래 다 그래서 괜찮아요.
백기:
근데 아까 얼굴은 찌푸리고 있던데?
유연:
……아, 딸기가 너무 셔서 그랬어요. 정신 차리기도 전에 벌써 앞에 와 계시더라구요.
방금 전의 민망했던 상황이 떠올라, 나는 백기에게 귓속말하듯 조용히 속삭였고, 그 말에 그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백기:
그렇게 셨어?
유연:
엄청 셨어!
그 순간, 그의 입술이 갑작스레 다가와 내 입술을 덮쳤고, 날렵한 혀끝이 한 바퀴 스치듯 맴돌고는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백기:
꽤 달콤한데?
유연:
……! 맛은 진작에 사라졌죠!
백기:
그럼 다음에 내가 네 앞에 나서기 전에, 네가 신 딸기를 먹었는지 먼저 물어봐야겠네.
눈부신 빛이 백기 주변을 흠뻑 적셨고, 그는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술잔을 들어 올린 채, 거리낌 없이, 그러나 소리 없이 주위의 공기를 짓눌렀다.
마치 조용하지만 울부짖는 폭풍처럼—모든 것을 무시하고 휩쓸고 지나가며, 그는 이 공간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수많은 시선이 그를 향해 쏟아졌지만, '접근 금지'를 알리는 은빛 아우라가 감히 그 누구도 그의 공간에 들어설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내가 집을 나서기 전, 그가 지었던 그 의미심장한 미소는 바로 이걸 위한 거였다는 걸.
그는 정확히 어떤 순간을 노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 만큼 눈에 띄게 등장했고,
현장에 있는 모두가 누가 왔고, 그리고 그가 누구를 향해 다가갔는지 확실히 알게 하려 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잊을 뻔했다.
내 모든 사랑의 심장 소리를 그가 송두리째 앗아가게 놔둔 채, 그저 그 순간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의 자유롭고 거침없는 성격을 사랑하면서도, 그가 딱딱한 정장 안에 자신을 가둔 채, 일부러 시선을 끌며 누군가의 ‘표적’이 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유연:
……왜 자꾸, 성격에 안 맞는 짓만 골라서 해요.
나는 입을 삐죽이며 그의 셔츠 깃을 느슨하게 풀어주고는, 불만스러우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포도 한 알을 그의 입에 쑥 밀어 넣었다.
백기:
이런 자리에선 이런 짓을 해야지.
백기: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야.
그는 웃으며 포도를 삼키더니, 짓궂게 내 손끝을 살짝 깨물었다.
백기:
오기 전에 충분히 생각했고, 류 형한테도 미리 말해놔서 그도 알고 있어.
유연:
그럴 거면 나한테도 한마디 해주지~
백기:
류 형이 뭐라 했는지 알아?
유연:
설마… 내가 데려왔다고 생각한 거 아니죠?
백기:
그 형이 그랬어.
“넌 첫인상 때부터 딱 알아봤다. 절대 남의 말 안들을 놈이라고. 니 맘대로 해라. 대신 나 귀찮게만 하지 마."
백기:
즉, 문제될 건 없다는 얘기지.
유연:
그러다 진짜 문제가 생기면?
백기:
모르지. 그 형은 그 형대로, 난 내 갈 길 가는 거니까.
유연:
진짜… '남의 말 안듣는 놈 맞네요——'
나는 웃으며 그의 가슴을 쿡 찔렀고, 그는 그 손을 자연스럽게 자기 손 안에 감싸쥐었다.
백기:
휴가도 며칠 안 되는데,
이딴 자리까지 네 시간을 뺏어가니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유연:
선배는 원래 이런 자리 싫어하잖아요.
백기:
하지만 난 너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아.
그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다음에 하려던 어떤 핑계도 꺼낼 수 없었다.
백기:
나는 이 자리에서, 내가 너랑 얼마나 깊은 관계인지,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거야.
백기의 눈빛이 반짝였다.
화려한 빛이 그의 등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건 마치 나 하나만을 위해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얼마나 많은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백기:
그리고 너무 불공평하잖아.
유연:
불공평……? 내가? 무슨 말이에요?
갑작스러운 그의 지적에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채 생각에 잠겼다.
백기:
넌 ‘지휘관의 배우자(爱人)’라는 이유로 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잖아.
그럼 난 왜, ‘유명 프로듀서의 배우자(爱人)’’으로 나타나면 안되는 거야?
유연:
……
나는 당장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자, 나도 어쩔 수 없이 웃어버렸다.
백기는 반 발짝 물러서며 도발적이고 매력적인 미소를 띠고 내게 팔을 내밀었다.
백기:
가자. 여기 있는 모두가 알게 해줘. 내가 누구의 사람인지.
3장
백기는 내 곁을 나란히 걸었다. 곳곳에서 슬쩍 던지는 탐색의 눈빛에도, 그는 가볍게 인사만 건넨 뒤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중심을 나에게로 되돌려주었다.
차분하고, 빈틈없으며, 심지어는 능숙하기까지 했다.
아직은 그를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오늘 밤이 끝나고 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의 등장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자꾸만 몰래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는 복잡하고도 벅찬 감정들이 끝도 없이 밀려왔고,
그 모든 마음은 결국——그가 나를 바라보는 맑은 호박빛 눈동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단단히 잡았다.
유연
아……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는지, 다리가 조금씩 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몰래 그의 품에 살짝 기대어 조그맣게 하품을 했다.
백기
갈까?
유연
아직은 안 돼요.
마지막에 단체 사진 찍는 일정이 남아 있어서… 아마도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할 거에요.
유연
괜찮아, 아직은 버틸 수 있어요.
백기
굳이 이럴 때까지 애쓸 필요 없어.
그는 거의 힘을 들이지도 않고 나를 인파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끌었고, 우리는 조용히 2층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조금 더 넓고 탁 트인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며,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유연
그럼 우리 그냥 여기저기 산책이나 하면서 시간이나 때울까요?
백기
아니, 네가 좀 쉴 만한 더 좋은 장소가 있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유연
……! 선배, 지금 뭐——
백기
가만 있어봐.
그는 장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결국 눈에 띄지 않는 문 하나를 열었다.
순간, 눈앞에 펼쳐진 샴페인 골드빛과 은은한 꽃향기가 한꺼번에 몰려들며 밤공기마저 황금빛으로 물든 듯했고, 내 치맛자락을 부드럽게 스쳐갔다.
문이 조용히 닫히자, 세상의 모든 인사치레와 겉치레가 사라지고 그곳엔 오직 고요함만이 남았다.
이곳은 아마 작은 별실인 듯했다. 장식은 단정하면서도 격식을 갖추고 있었고, 마치 곧 누군가의 맹세가 이뤄질 장소처럼 느껴졌다.
백기는 나를 안은 채 그 안으로 들어섰고, 그 모습은 마치 소녀의 환상이 가득한 시 한 편의 가장 아름다운 한 페이지 같았다.
유연
어떻게 이런 데가 있는 걸 알았어요?
백기
아까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었어.
그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무릎을 반쯤 꿇은 채 자연스럽게 내 신발을 벗기며, 발에 남아 있던 답답함을 풀어주었다.
백기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너를 생각하고 있었지.
유연
그럼 호 선생님이 나에게 함정을 놓으려고 온 것도 알 수 있었겠네요.
백기
응, 계단 입구에서 잠시 기다렸지.
나는 그의 눈매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애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유연
선배는 정말 바보야.
백기
사랑하는 게 바보라면, 난 인정 못 해.
그는 고개를 살짝 젖히더니, 웃으며 내 손목에 입을 맞췄다.
유연
아까도 여기 앉아 있었던 거에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계단 앞쪽까지 걸어가서는, 느긋하게 걸터앉았다.
부드러운 금빛 조명이 그를 감싸며, 소년은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유연
그때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요?
백기
오늘 네가, 얼마나 예쁠까 생각했어.
백기
그리고 네가 날 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몇 시간 전쯤, 그는 바로 저 자리에 앉아 있었겠지. 쓸데없는 고민이나 어두운 감정은 모두 뒤로한 채, 오로지 맑고 단순한 마음으로 나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입은 흰 정장과 순백의 셔츠를 입고 있던 소년의 모습은 지금 내 눈에는 별반 다를게 없어 보였다.
유연
선배는 정말 흔들리지 않네요.
백기
그건 내가 이미 선택을 했기 때문이야.
날카로운 기색을 감추면서도, 그는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말했다.
백기
나는 권력이라는 가시 돋친 검을 쥐었어.
그래야 더 멀고 넓은 길을 닦아, 너를 포함한 내가 지키고 싶은 모든 것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백기
무언가를 얻는다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희생이 있어.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유연
그래도… 난 선배가 지치진 않을까 자꾸 걱정돼요.
책임과 권력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직솔적으로 말한 적이 많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생과 사의 순간을 넘었고, 수없이 많은 어둠과 죄를 베어냈다.
그의 마음은 너무 단단해서,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힘들다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그가 말하지 않은 모든 서러움이 마치 내 마음에 자라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자꾸만 그를 안아주고 싶어졌고, 심지어는 그를 세상 어딘가에 숨겨두고 싶었다.
그가 일하는 세상 밖에서는 어떤 나쁜 것도 그를 찾지 못하게.
백기는 한참을 생각한 듯하다가, 결국 아주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미소를 지었다.
백기
이건 내가 반드시 거쳐가야할 길이야. 무엇을 얻든, 결국은 우리 삶에 붙어 있는 부수물에 불과해.
백기
하지만 난 그 부수물조차 놓지 않을 거야.
백기
더이상 내가 가진 권력,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것들에서 도망치지 않을 거야. 이게 내가 지난 수년간 끝내 배운 것 중 하나야.
그의 눈빛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마치 온몸이 빛을 내는 것 같았다.
눈앞의 이 소년은 수많은 굴곡을 지나, 마침내 어둡고도 황금빛으로 물든 영광의 길 위에 서 있었다.
그 길은 싸움과 죄악이 얽히고설켜 있고, 끝없는 진흙과 복잡하고 무거운 덤불로 가득한 길이었다.
그가 걸어온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수많은 이들의 온갖 계산과 끝없는 피와 눈물이 얽혀 있었고, 그 한 걸음 한 걸음에는 셀 수 없는 사람들의 기대와 미래가 걸려 있었다.
그는 때때로 비틀거렸지만,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높이, 점점 더 멀리 나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왜일까—내가 선배를 바라볼 때면, 여전히 그 눈빛엔 소년의 눈매와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앞의 그를 바라보며, 나는 가슴 깊이 동경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그저 기쁘게 미소 지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백기니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백기.
가슴속에 너무 많은 감정이 차올라 목이 메었지만, 그 모든 마음을 담아낼 말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저 서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그럼, 내가 선배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백기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어줘. (和我一起拥有它 의역)
백기
그리고 영원히 나와 함께 해줘. (和我永远绑在一起 )
모두가 알게 될 거야. 내가 너의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네가 오직 내 사람이라는 것도.
금빛 찬란한 빛 속에서, 백기는 길 끝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마디 한마디 단단하고도 확고했다. 마치 생과 영혼 깊은 곳에 새겨 넣는 맹세처럼.
그리고 이 순간엔, 어떤 사람도, 신의 증인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맹세와 신념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었고, 그 자신처럼, 나만의 것이었다.
거의 동시에, 나는 그를 향해 달려갔다.
어쩌면 너무 경솔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조심스럽고 격식을 갖췄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단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그의 손을 잡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 나의 대답을 전하고 싶었다.
유연
"기꺼이."
아마 많은 소녀들의 어린 시절엔, 어느 순간에 대한 막연하면서도 가슴 설레는 환상이 있지 않았을까.
낭만적이고도 경건한 공간에서,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그 길지 않으면서도 짧지 않은 길의 끝에 서 있는 모습을.
그의 눈빛은 참으로 아름답고, 그의 이상은 너무나도 찬란하며, 그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로 걸어가, 그의 손을 잡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삶이 이어지고, 나는 세상에 대한 내 모든 꿈을 그에게 건네고——그 또한 내게 그럴 것이다.
유연
"미래가 지옥이든, 천국이든, 나는 선배와 함께 갈 거예요."
나는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나의 소녀 시절이라고.
4장
한낮의 산들바람은 느긋하게 불고, 흰 구름은 나른하게 흘러간다.
백기는 자전거 페달을 밟고, 나는 그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그의 허리를 감싼 채, 도시의 풍경이 우리 곁을 조용히 스쳐 지나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백기는 능숙하게 검지와 중지를 모아 경비원 아저씨에게 멋지게 손짓을 건넸다.
자전거를 운동장 옆 자전거 보관소에 세운 뒤에서야,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유연
나를 데리고 나왔을 땐, 어디로 데려가는 줄 알았는데.
백기
어른 되는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백기
그럼 학교 가야지.
그의 호박빛 눈동자엔 생기가 넘쳤다. 백기는 내 손을 잡고 연모 고등학교의 운동장을 걸으며, 세상이 조용하고 순수한 구석으로 숨어드는 듯한 착각마저 안겨주었다.
멀리서, 동아리 활동을 하는 남학생들이 공을 차며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은행나무 잎은 살랑살랑 흔들리고, 조용한 교실 창 너머로는 깨끗한 빛이 스며들었다.
마치 아직 시작되지 않은 꿈들이 거기 머물고 있는 것처럼.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백기와 열 손가락을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어보았다.
유연
가끔은, 학교도 참 괜찮다고 느껴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으니까.
유연
공부만 하면 되니까. 노력하고 열심히 하면, 대부분 보답이 따르잖아요.
유연
무엇이 맞고 틀린지도 책 뒤에 정답이 있고, 점수가 그 답을 대신해 주고.
고통스러웠지만 단순하고, 압박감이 가득하지만 여전히 순수한 시절이었다.
어스름하게 흘러내리는 빛과 그림자가 백기의 어깨 위로 스며들었다. 그 역시 잔잔하게 풍경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의 눈매는 예전보다 많이 달라진 것 같기도 했지만, 어쩌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유연
근데 점수라는 게 꼭 그렇게 정확하지도 않네요. 예를 들어, 우리 백기 선배(白起学长) 같은 사람은 그 점수 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백기
……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시선을 내게로 떨구었다.
백기
그럼, 나는 어디에 있는 건데?
유연
음……
나는 머릿속에서 수많은 장면과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참을 생각하다, 결국 안도하듯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내가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나의 청춘 속에.
내 완벽한 아쉬움 속에, 내가 놓쳐버린 이야기들 속에,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 속에도, 그가 있었다.
바람이 그의 옷자락과 내 눈앞의 머리카락을 스치자,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그 순간이, 내 청춘 속 가장 찬란한 한 줄을 그리는 듯했다.
이윽고, 그는 검지로 내 미간을 툭 튕기며 한껏 웃어 보였다.
백기
너의 선배(你的学长)는 그 대답에 만족 못 하겠는데.
백기
다시 생각해 봐.
그 말투는 한없이 가볍고 장난스럽지만, 그 순간 나는 마치 한순간에 열여섯 살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유연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나 진심이었는데, 선배는 너무 까다로워요.
백기
난 모르겠는데.
유연
나도 몰라요——
우리는 여기저기 걸어 다니다가, 마침내 피아노실 문을 열었다.
창밖의 은행잎이 교실 전체를 물들였고, 햇살은 부드럽게 구석구석을 스치며 찬란한 빛을 남겼다.
겉보기엔 여전히 평범한 공간이었지만, 수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은 마치 내 청춘을 비추는, 다시는 어두워지 않을 한 줄기 빛이 된 듯했다.
나는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검고 하얀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 조심스럽게 눌러 보았다.
피아노에서 맑은 음이 울리자, 나는 고개를 돌려 백기를 바라보았다.
유연
선배(学长), 곡 하나 연주해 줄게요.
유연
…우리 정말 연주해도 되겠죠? 안 되면, 살짝만 소리 내서 할게요~”
나는 뒤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도, 꼭 ‘나쁜 짓’을 하고 싶어진다.
백기
괜찮아. 공 선생님한테 미리 보고했어.
유연
…언제 그렇게 몰래 여러 사람들에게 다 보고한 거에요! 왜 나만 몰랐어요?”
백기
그러니까 내가 선배고, 넌 후배잖아.
그가 웃을 때는 눈빛까지 반짝인다. 제멋대로이면서도 생기 넘치고, 그 속엔 오직 소년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백기
하지만, 네가 옷을 갈아입고 나서 연주해 줬으면 좋겠어.
유연
왜 이렇게까지 분위기 잡는 거에요?
그는 대답 대신 웃기만 하며, 옆 캐비닛에서 큼지막한 쇼핑백 두 개를 꺼냈다.
내가 궁금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순간 익숙하고 우아한 초록빛이 눈에 들어오며,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유연
…이거, 전에 내가 갈아입었던 그 드레스잖아요. 대체 이걸 어떻게…
백기
나한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
유연
하지만 이건 너무 민망한데요… 게다가, 여기서…
백기
입어보면, 알게 될 거야.
유연
......
소년은 마치 나에게 환상적인 초대를 건네는 것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건넨 봉투를 단단히 받아들었다.
유연
나, 갈아입었어요.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규칙적인 발걸음이 내 빠르게 뛰는 심장 박자와 함께 다가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가 내 앞에 다다랐다.
선배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선배가 예쁘다고 생각해 줄까?
내 마음은 불안하고 부끄러워서 계속 쿵쾅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단단한 손이 내 손목을 감싸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내 손을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백기를 마주했다.
지금의 그는 복잡하고 무거운 정장과도 어느 정도 화해한 듯 보였다.
겹겹의 옷감이 단정하게 몸을 감싸고 있었고, 그 안에 숨겨진 탄탄한 근육과 골격은 몇 군데 무심한 주름 사이로 슬쩍 드러났다.
그는 깔끔하게 넥타이를 매고, 짙은 파란빛 보석이 목선에서 반짝이며 맑은 빛을 뿜어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빛은 그의 눈동자 속까지도 환하게 비췄다.
백기
정말 아름다워.
백기의 시선이 내 모든 시선을 끌어안았고, 기쁨으로 가득한 그의 눈을 통해 호박빛을 띤 나 자신을 보았다.
유연
너무 화려하잖아요. 게다가 여기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나는 이렇게 화려한 옷이 이 기억 속의 풋풋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깨버릴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다시는 열여섯 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백기
유연아, 우리는 이제 다 자랐어.
지금의 우리가 되어, 다시 이곳에 돌아온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활짝 열고, 창가에 바짝 붙어 있는 은행나무를 가리켰다.
백기
그때, 나는 바로 저기 앉아서 너를 몰래 바라봤어.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간, 그는 나무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앉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고, 흩날리는 잔잔한 머리카락 사이로 맑고도 뜨거운 눈빛이 드러났다.
그 눈동자엔 내가 청춘 속에서 놓쳐버렸던 장면들이 비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눈은 한때 무심했고, 차가웠고, 길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변함없이, 언제나 나를 향한 좋아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백기
예전에 내가 몰래 바라보던 그 소녀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착하고 예뻐. 아니……
백기
과거보다 더 아름다워졌어. 내가 매번 그녀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녀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있어.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어설프지만, 진심 어린 진지함만이 남아 있었다.
백기
지금, 너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모습이야?
유연
……꿈속에서처럼 멋진 모습이지만, 그보다 더 멋져졌어요.
유연
연회장에서 선배를 봤을 때, 내가 회사의 프로듀서라는 것도 잊어버릴 뻔했어요. 꼭 어린 소녀처럼 말이에요.
유연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시선을 뗄 수가 없잖아요.
백기
그럼 지금의 너는, 나를 위해 특별히 한 곡 연주해줄 수 있어?
그가 말할 때의 목소리는 조금은 낮았고, 살짝 긴장된 모습과 고집스러움, 그리고 감추지 못한 애정이 묻어 있었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내미는 것처럼.
세월이 흘러 다시 이곳에 온 우리는, 그저 추억을 떠올리거나 재현하려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로서, 다시 시작점에 선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곧바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손가락이 건반 위에 한 음을 누르자마자 멈췄다.
고개를 들어 백기를 바라보았다. 마치 청춘의 한 페이지가 조용히 펼쳐진 듯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청춘은 단지 추억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창가로 걸어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유연
선배, 나랑 같이 연주해요.
왜냐면, 선배는 이미 이 곡의 없어서는 안 될 일부니까요.


바람이 은행나무의 선율을 흥얼거리고, 우리의 흑백 건반 위에도 우리만의 악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백기도 드물게 어색해하며, 처음엔 손이 건반 위에서 굳어 있다가, 우리의 웃음에 녹아 부드러워졌다.
음표들은 폴짝폴짝, 비틀비틀. 어느 순간엔 조화를 이루고, 또 어느 순간엔 상대의 박자를 애타게 좇았다——
마치 우리가 걸어온 긴 길처럼.
서툴고 어설펐지만, 진심만은 가득한 길.
나는 참을 수 없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옆에 있는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다음 순간, 비뚤어진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는 찡그린 얼굴을 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온몸 가득 생기 넘치는 소년의 기운이 감돌았다.
백기
나 보지 마.
유연
왜?
백기
네가 보면, 긴장돼.
유연
그럼 안 볼게요.
백기
그것도 안 돼.
그는 떼쓰듯 단호하게 말했고, 눈빛은 또렷하게 빛났다.
유연
그럼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예요?
백기
보고 싶기도 하고, 또 보고 싶지 않기도 해.
너한테 가까이 가고 싶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심장이 뛰어나올 것 같아.
백기
수없이 많이 좋아한다고 말했고, 너랑 오래 사랑해왔고, 많은 길을 함께 걸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널 의식하게 돼......
백기
너를 좋아해. 매 순간 너를 바라보고 싶어.
그의 말도 마치 음표를 따라 내 마음속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래서 내 손끝에서 흐르던 음표도 뒤엉켜 버리고, 그의 웃음 속으로 함께 빠져들었다.
백기
너도 틀렸어.
유연
그건 선배가 그런 말을 해서 그렇잖아요.
백기
그럼 말 안 할게.
유연
안 돼요——
어른이 되는 건 참 어렵고, 어른들의 세상은 너무 복잡하지만, 그의 시선 안에서는, 나는 언제나 첫사랑의 소녀가 되는 것 같다.
온 마음이 그의 다가섬과 눈길, 웃음과 가벼운 입맞춤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우리가 아무리 많은 역할과 책임, 사명과 권력을 짊어지고 있어도……
그와 나는 서로의 앞에서는, 그저 ‘우리 자신’일 뿐이다.
그저 서로를 좋아하는 소년과 소녀일 뿐이다.
그는 내가 지키고 싶은 유일한 순수함이다.
유연
고마워요, 선배.
유연
언제나, 계속해서 날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소년이 내게 모든 기쁨을 주었으니까.
그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티 없는 구석을 가질 수 있었다.
유연
고마워요, 내가 열여섯 살이었을 때도, 지금 이 순간마다도 나를 좋아해 줘서.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흐르고, 바람에 풍경이 울리는 가운데,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백기
사람들은 처음처럼 사랑하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백기
나는 예전보다 지금의 너를 더 좋아하고, 더 사랑할 거야.
백기
나는 너에게 다가가고, 너를 품고, 너에게 입을 맞출 거야……
백기
너의 사랑도 원하면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7반 백기야. 나는 널 좋아해."
"넌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고, 또 내가 평생을 좋아할 사람이야."
(피비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