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유연
짜자잔~ 도착했어!
햇살은 환하고 따뜻했다. 마치 색온도를 정교하게 조절한 필터처럼, 피부에 닿는 느낌이 딱 좋았다.
나는 백기의 손을 꼭 잡고 들뜬 마음으로 워터파크 입구로 달려갔다. 시원한 물안개와 웃음소리가 얼굴을 스치며, 여름만의 특별한 환영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미끄럼틀은 높게 세워져 있고, 트랙은 얽히고설켜 있었다. 형형색색의 튜브가 나선처럼 내려가고, 멀지 않은 곳엔 인공 파도를 일으키는 거대한 풀장이 있었다. 파도는 연달아 밀려와 해안 쪽으로 부드럽게 퍼져갔다.
백기
막 개장했는데도 사람이 많네.
그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보며, 살짝 웃음을 머금는다. 맑고 활기찬 분위기에 그의 기분도 어느새 물든 듯했다.
유연
그럼요~ 이 워터파크는 외곽에 있긴 하지만 오픈 전부터 엄청 홍보했거든요. SNS에서도 반응 폭발이었고!
백기
지금 국내에서 제일 큰 워터파크지?
백기
네가 전에 홍보 영상 공유했던 거, 기억나.
우리는 나무로 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발밑의 타일은 햇볕에 데워져 따끈했고, 귓가엔 웃음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어우러진 여름의 교향곡이 흐른다.
유연
노노노—— 백 경관님, 조사를 덜 하셨네요——
여긴 연모시에서 제일 크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시설을 갖춘 워터파크라고요!
나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앞에서 흔들었다.
유연
여기 있는 놀이기구 중에 국내 최초로 들여온 것도 많다구요!
백기
하나 배웠네.
그가 얌전히 더 듣겠다는 표정을 짓자, 나는 피식 웃으며 워터파크 곳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유연
저기 저 멀리 깔때기처럼 생긴 대형 미끄럼틀 보여요? 지름이 무려 20미터가 넘는다구요!
유연
왼쪽에 있는 이 워터 롤러코스터는 처음 올라갈 때 거의 90도 각도로 올라가서, 곧바로 수직 낙하하고……
유연
그리고 또 저거! 저거도요!
백기의 머리는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 결국 웃는 눈길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백기
내 여자친구, 전문가 다 됐는데?
유연
그럼요~ 선배가 임무 다녀오는 동안 그냥 놀고만 있었던 거 아니라구요~
그의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고, 괜히 뿌듯해져서 가슴을 쭉 내밀었다.
유연
이번에 우리 꼭 같이 오자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저 정말 열심히 조사했어요!
유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워터파크 다녀온 게 벌써 몇 년 전 여름이잖아요. 이번엔 진짜 신나게 놀 거예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수영장 쪽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더니, 바람을 타고 몇 줄기 물방울이 내 얼굴 위로 살짝 흩어졌다.
햇빛 아래 물방울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며 흩날리고, 그 사이로 백기 선배가 웃음 머금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기
나도 같은 마음이야.
그가 먼저 내 손을 잡았다. 살짝 올라간 눈썹엔 소년다운 가벼움과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백기
이제부터는 봐주지 않을 거야.
2장
경주용 슬라이드, 초고속 워터 래프팅, 수상 롤러코스터……
나와 백기는 하나하나 빠짐없이 체험하며, 튀어 오르는 물살 속에서 껴안고, 소리 지르며 즐겼다.
미끄러운 경사로를 백기의 품에 안긴 채 쏜살같이 내려올 때마다, 나는 마치 무중력 속에 휘말릴 듯 아찔해졌지만 등 뒤에서 단단히 감싸안아 주는 그의 안정감 덕분에, 나는 마음껏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다.
또다시 빠른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온 뒤, 나는 물기 묻은 머리끝을 꼬아 물을 짠 뒤, 숨을 고르며 막 물 밖으로 올라온 백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연
후—— 선배, 우리 좀 쉬어요.
유연
계속 이렇게 놀다간, 제 심장이 제자리로 못 돌아올지도 몰라요……
백기는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려 물가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내 슬리퍼에 고인 물을 툭툭 털어내고, 가지런히 내 발 앞에 놓아주었다.
백기
아까 미끄러질 때 보니까 얕은 물 구역 있더라. 거기로 가자.
유연
……선배 눈썰미가 좋네요.
나는 슬리퍼를 신고, 습관처럼 그의 손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방향으로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아직 개장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사람들은 전부 자극적인 놀이기구에 몰려 있었고, 조용한 풀장 쪽은 거의 비어 있었다. 우리 둘만이 물속에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있었다.
나는 꽃잎 모양의 플로팅 보드 위에 엎드린 채 이리저리 떠다녔고, 가끔 수영장 가장자리에 기대 앉은 백기 곁을 지나칠 땐 물을 살짝 튀겨 장난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반격도 하지 않고, 그저 느긋하게 거기에 기대선 채 웃으며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살짝 붙고, 튀는 물방울이 머리끝을 타고 어깨로 흐르며 단단한 윤곽을 그려냈다.
잔잔한 물안개가 그의 어깨를 감싸며 흩어질 때, 나는 마치 한여름 해변의 광고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져 절로 눈길이 자꾸만 그에게로 향했다.
그 풍경이 너무도 평화롭고 완벽해서 나도 모르게 긴 숨을 쉬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 일정 정말 잘 짰다.’ 서로 바쁜 삶 속에서 이렇게 한가롭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우리 둘에게 얼마나 귀한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속으로 조용히 감탄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수영장 한편에 젊은이들이 잔뜩 모여 있고, 사회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는 손짓을 섞어가며 열정적으로 무슨 규칙을 설명하고 있었다. 자유형 수영 경주가 열릴 모양이었다.
나는 슬슬 흥미가 생겨 그쪽을 바라보며 구경하고 있는데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내 머리 위에 바스락, 비치 타월을 살짝 얹었다.
백기
나도 한번 해볼까?
너무 진지한 말투에 웃음이 터져버린 나는, 장난스럽게 그의 턱을 발끝으로 살짝 툭 찼다.
유연
너무 치사한 거 아니에요?
유연
오늘은 그냥 편하게 쉬러 온 거니까, 괜히 힘쓰고 그러지 마요~
백기
그냥 재미로 해보는 거야.
유연
와~ 우리 백 경관님, 자신감 장난 아닌데요?
나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놀리다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백기의 눈빛과 딱 마주쳤다.
그 짧은 눈 맞춤만으로도,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금세 알아챘다.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유연
진짜로 저 사람들이랑 겨뤄보고 싶은 거예요?
백기
응~.
콧소리에 살짝 실린 대답에, 나는 웃음을 꾹 참을 수가 없었다.
유연
그럼 누가 1등 할 것 같아요?
백기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는 있어.
그가 그렇게 말하며 내 플로팅 보드를 슬쩍 돌리더니 내 시선을 자기에게만 집중되도록 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유연
선배, 진짜 유치하다니까——
백기
여자친구의 관심이 자기한테만 가게 하고 싶은 게 유치한 거야?
그는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느긋하게 턱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 장난기 어린, 약간은 거만한 소년 같은 표정을 보자 마음이 살짝 간질거렸고,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꽃잎 플로팅 보드의 균형 한계를 간과한 탓에, 몸을 세우는 순간 보드가 한쪽으로 휙 기울어졌다.
유연
선배!!
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균형 좀 잡아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그가 나를 재빨리 받아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그의 얼굴에 스치는 짓궂은 미소를 봤고 그는 슬쩍, 플로팅 보드의 한쪽 끝을 다시 눌렀다.
물은 깊지 않아 금방 다시 올라올 수 있었지만, 사람이 중심을 잃는 그 찰나에는 본능적으로 가장 믿는 사람에게 몸을 던지게 된다.
——나는 그대로 백기의 품에 안겼고, 마침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터지려던 비명은, 그와 살짝 부딪힌 입술 사이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살짝 스친 그 입맞춤은 예상치 못한 떨림을 안겼다.
물기와 따스함이 뒤섞인 그 순간은, 마치 온몸을 타고 흐르는 부드러운 전류 같았다.
당황한 나는 얼굴을 붉히며, 바로 눈앞의 그의 턱을 가볍게 밀었다.
유연
여기 사람 많단 말이에요…!
백기
괜찮아, 다들 경기 보느라 바쁘잖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촉촉한 감촉이 다시 한 번 입술 위로 스며들었다.
마치 조용히 밀려오는 파도처럼, 부드럽고도 느릿하게.
세상은 마치 음소거 버튼이 눌린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리고 우리가 천천히 떨어져 나올 때쯤, 멀리서 들려오던 환호성이 서서히 귀에 돌아왔다.
그제야 나는, 방금 전까지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백기
미안. 누가 1등 했는지 알려주지도 못했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어딘가 장난스러운, 이긴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나는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겨우 목소리를 찾아냈다.
유연
……지금 당장 가서 경기나 해요!
3장
물론 그건 그냥 내가 잠깐 부끄러움에 욱해서 한 농담이었을 뿐, 백기를 진짜로 수영 대회에 보내려던 건 아니었다.
이번 워터파크 나들이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약속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바랐던 건 백기가 바깥 임무로 쌓인 피로를 푹 풀고,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거였다.
주변의 소란이 잦아들고, 우리는 다시 조용한 수영장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며 햇볕을 즐겼다.
잠시 쉬고 난 뒤, 백기는 두 손으로 물가를 짚고 가볍게 몸을 튕기더니 펄쩍, 수영장 옆 플랫폼 위로 뛰어올랐다.
유연
어? 수영 좀 하려는 거예요?
백기
응, 오랜만이라서.
그가 팔을 들어 부드럽고도 단단한 준비 운동을 몇 번 해 보이자, 괜히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유연
선배, 특파팀 훈련할 때는 특별한 수영 기술 같은 거 배우기도 해요?
유연
예를 들면, 슝— 하고 백 미터 한 번에 가버린다든가, 숨 한 번 쉬고 물속에서 5분 이상 버틴다든가… 그런 거요?
그는 잠깐 웃음이 터질 뻔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진지하게 반박하지도 않고 그대로 몇 초간 생각에 잠겼다.
백기
그렇게 화려하진 않아.
방법이 뭐든, 제일 빠르면 그게 최고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기는 수영장 가장자리를 톡 차고 단숨에 물속으로 몸을 날렸다.
몸은 한 마리의 화살처럼 물속으로 가볍게 뛰어들었고, 잔잔한 물 위엔 깔끔한 물보라만이 일었다.
수면 위에는 단 한 줄의 잔물결만이 맴돌았고, 그의 몸은 마치 한 방울의 물처럼, 말없이 조용히 수면 아래로 녹아들었다.
깔끔하고, 날렵하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백기는 한 번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수영장의 반대편을 돌아 어느새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그저 날카롭고 또렷하게.
유연
와— 선배,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유연
1등~!
내 환호 속에서 백기가 수면 위로 일어서자, 방금 전의 날카로운 모습은 사라지고, 오히려 작은 늑대처럼 고개를 털어 물을 튀겼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고, 마치 그의 눈빛에서 반짝이는 빛처럼 흩날렸다.
그 일련의 멋진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면서, 슬슬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연
물속을 좀 더 깊게 잠수하면 더 빨리 헤엄칠 수 있어요?
백기
물속에 완전히 잠기면 파도 저항이 없어서 좀 더 빨라지긴 하지.
유연
그럼 나도 해볼래요!
유연
예전에 우리 바닷가 촬영 갔을 때, 편집하면서 바닷속에서 수면 쪽을 올려다보는 장면 진짜 예뻤거든요.
유연
지금 아까 백기 선배가 수영할 때도, 혹시 그런 풍경이 있었어요?
백기
그건 잘 모르겠어. 그냥 빨리 너한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무심한 듯 툭 내뱉은 말투였지만, 그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말이어서 나는 괜히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입꼬리를 꾹 눌렀다.
유연
알겠어요, 그럼 저도 빨리 선배한테 돌아가도록 해볼게요~
유연
이런 수영 방식은 거의 처음이라 좀 걱정되긴 하지만…
백 교관님이 옆에 있으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배워서 써먹을 수 있겠죠?
그렇게 말하고 나는 숨을 참은 채 몸을 물속으로 낮췄다. 손발을 뻗고 잠수하려 했지만, 힘을 살짝만 풀어도 몸이 물 위로 튀어 오르듯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매번 수면 위로 올라올 때면, 백기가 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마치 마른 오리처럼 물속에서 버둥거렸고, 그 모습에 그는 어깨를 살짝 떨며 웃었다.
백기
이쯤 되면 백 교관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유연
……아직 도움 요청 안 했거든요!
나는 볼을 부풀리며 괜히 억울한 척하고, 깊게 숨을 들이쉰 다음 풍덩, 다시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뜻밖에도, 이번엔 정말로 몸이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물속은 훨씬 부드럽고 따스했다.
햇살이 수면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리며, 금빛 잔물결이 원을 그리며 번져 나갔다.
그 빛은 내 눈앞에서 흔들리며, 마치 꿈속으로 떨어진 빛 같았다.
그때, 옆에서부터 파장이 번져 왔다.
무언가 조용히 다가오는 듯했고 다음 순간, 익숙한 실루엣이 물안개 속에서 서서히 떠올랐다.
백기가 잔잔한 물속을 헤엄쳐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동작은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유려했고, 물 위를 거의 흔들지 않은 채, 빛의 흐름을 따라 유영하는 물고기 같았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방금 전에 본 흔들리는 빛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부드러운 미소만 지으며, 내게 팔을 뻗어 다가왔다.
그리고, 익숙한 숨결이 조용히 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물속은 고요했다. 심장 소리조차 부드러운 물결 속에 감싸인 듯 아득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고, 물의 촉촉함과 따스한 온기가 뒤섞여 내 피부를 따라 번져갔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이게 물의 부력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입맞춤이 준 아찔함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숨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몸에 더 바짝 다가붙어, 남은 공기를 그의 품에서 찾으려 했다.
산소가 부족해져 어지러움이 퍼지려던 찰나, 그가 나를 단단히 안고 물 위로 솟아올랐다.

백기
……
햇살이 얼굴을 덮쳤고, 서로의 숨소리만이 귀를 가득 채웠다.
유연
저, 저 방금은 그냥… 수면 아래에서 햇빛 보여주고 싶었던 건데…근데 선배는 갑자기 기습을……
백기는 고개를 살짝 숙여 웃었다. 방금 닿았던 입술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그의 콧등은 내 머리카락을 스치며, 마치 그 키스의 여운을 놓지 않으려는 듯했다.
백기
봤어. 정말 예뻤어.
유연
거짓말, 선배는 제대로 보지도 않았잖아요……
내 시선 끝에 들어온 그의 호박빛 눈동자가, 밝은 웃음기와 함께 반짝였다.
그 눈빛에 괜히 말문이 막혀버렸고, 나는 일부러 그의 머리칼을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유연
어차피 선배는 또 그러겠죠. ‘너만 옆에 있으면, 어떤 풍경이든 다 예뻐 보여’ 맞죠?
백기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백기
네가 곁에 있으면, 어떤 풍경을 보든, 뭘 하든 그 자체로 기분이 좋아져.
백기
네가 그걸 좋게 만들어줘서, 자연스럽게 다 예뻐 보이는 거야.
그 말에 마음이 포근하게 덮였다. 달콤함이 가볍게 퍼졌고, 손끝마저 따뜻해졌다.
유연
그럼 내가 선배 옆에 없을 땐요?
백기는 눈을 내리깔고, 살짝 습기 어린 공기 속에서 반사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조용하고 단단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백기
네가 곁에 없을 때도 풍경은 여전히 예쁠 거야.
백기
하지만 계속 생각나겠지. ‘이걸 너랑 같이 보고 싶다’고.
백기
네가 그걸 함께 봐줘야, 그 풍경이 완성되는 것 같거든.
그 말에 또다시 마음이 말랑해졌다.
그리고 나는 안다. 사실 나도, 백기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일 때문에 바빠서 어쩔 수 없이 둘만의 시간을 잠시 멈출 때마다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전부 ‘미완성’으로 느껴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재미있는 장소를 찾을 때도,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때도 그 순간들을 온전히 즐기면서도,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것들을 마음속 어딘가에 저장해두곤 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서로의 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조각들을 함께 채워 ‘완성’으로 만들어가는 것. 그게 나와 그의 사이를 다시 온전히 채워주는 일이기도 했다.
해 질 무렵, 우리는 워터파크에서 나와 미리 예약해둔 외곽의 민숙으로 향했다.
작은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이동했는데, 물론 그 속도는 백기의 ‘블랙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녁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천천히 달리는 그 여유로움은 그 나름대로 무척이나 평화롭고 좋았다.
노을빛은 해변 도로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고, 하늘과 바다는 하나로 이어진 듯 따뜻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어갔다.
나는 백기의 허리를 감싸 안고, 살짝 웃으며 턱을 그의 등에 기대었다.
유연
선배, 여기 풍경은 여행 유튜버들 브이로그보다 훨씬 예쁜 거 알아요?
백기
그럼 우리도 천천히 가면서, 천천히 보자.
그의 말과 함께 오토바이 속도는 느려졌고,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의 체온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 계절의 모든 것이 딱 알맞게 완벽하다.
뜨거움은 지나치지 않고, 사랑마저도 풍경처럼 은은하게 스며들어, 조용히 오래도록 번져간다.
그렇게 우리는, 한편으로는 뜨겁게 사랑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천천히 서로에게 물들어 간다.
(可以让人一边热恋, 一边又慢慢相爱。)
4장
유연
리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별이 보이는 방도 절대 거짓말이 아니야—— 진짜 별이 엄청 많이 보여!
나는 바닥에 깔린 침구 위에 누워, 머리 위로 투명에 가까운 천장을 올려다봤다.
끝없이 펼쳐진 별빛이 바로 눈앞에 가득했고, 손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또렷했다.
세안을 마친 백기가 욕실에서 나와 내 옆에 누워, 자연스럽게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식물 향이 은은하게 배인 샴푸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고, 나는 그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진지하게 별빛을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유연
선배, 저기 유난히 밝은 세 개 별 있잖아요. 우리가 전에 봤던 ‘여름철 대삼각형’ 맞죠?
백기
응, 직녀성, 견우성, 그리고 데네브.
백기
여름 밤하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세 개의 별. 여름 하늘의 좌표 같은 존재지.
유연
진짜 예쁘다… 오늘은 별이 유난히 더 많이 보이는 것 같아.
유연
그런데 선배. 평소엔 안 보이던 저 많은 별들은 대체 어디 숨어 있다가 오늘 다 나온 걸까?
나는 장난스레 툭 던지듯 물었고, 백기는 내가 아무렇게나 가리키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자기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었다.
백기
별들은 어디 간 게 아니야. 계속 거기 있었지.
백기
하늘이 충분히 맑아졌을 때, 우리가 비로소 볼 수 있게 되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맑고 부드러웠다. 별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는 그의 말에, 마치 고요한 밤에도 맥박이 생긴 듯했다.
끝없이 펼쳐진 별빛 아래 나는 백기의 품에 느긋하게 기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조용히 들었다.
초지구형 행성의 발견, 올버스 역설의 신비로움, 그리고 우주의 차갑지만 경이로운 현상들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했다.
(올버스 역설: '밤하늘은 왜 어두운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천문학적 역설)
우주는 너무나도 넓고, 머나먼 별들은 오래된 빛을 반짝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주위는 조용해졌고, 나도 백기도 더는 아무 말 없이 이 고요함이 주는 평온함에 마음을 가만히 맡기고 있었다.
수많은 별이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 서로에게 기대는 순간 삶 속의 모든 ‘로맨틱한 순간’이란, 어쩌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백기
내가 임무 나가 있을 때나, 특수팀 일로 바쁠 때, 넌 늘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던 거야?
유연
응…? 어떤 거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을 때, 그 물음이 뜻하는 바를 나는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백기
밤하늘의 별, 해변의 석양길, 워터파크 같은 곳들 말이야.
유연
아, 그 얘기구나.
나는 백기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살짝 끌어안듯 조였다. 그러자 그의 손끝이 내 허리를 따라 부드럽게 쓸었다.
유연
이건 그냥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이잖아요.
유연
오늘은 어떤 맛집이 맛있어 보였고, 내일은 저 풍경이 예뻐 보이고…
유연
이 민박은 참 특별하다 싶고, 저기는 분명히 꼭 가보고 싶어진다든가……
유연
그럴 땐 일단 나 혼자, 아니면 친구랑 먼저 가서 그 특별함을 체험해보는 거예요.
유연
정말 특별해서, 선배와 함께 가야 할 곳이라면, 그런 곳은 꼭 따로 기록해 둬요.
유연
근데 만약 타이밍이 안 맞거나 상황이 안 되면, 그건 일단 마음속에 저장해두고 선배가 돌아오면, 그때 같이 가는 거예요.
나는 몸을 돌려 그의 가슴에 살짝 엎드렸고, 그의 호박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마쳤다.
밤의 방 안은 은은하게 어두웠고,
그 속에서 유독 또렷했던 건——
별빛을 담은 듯한 백기의 눈동자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끌리듯 다가가, 그의 눈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겼다.
유연
선배, 전 선배가 없는 시간을 한 번도 낭비한 적 없어요.
유연
물론 자주 그리웠지만, 그 그리움은 나를 괴롭히기보단 오히려 매일을 기대하게 만들어줬어요.
유연
다시 선배 곁으로 돌아가, 내가 새롭게 발견한 세상을 하나씩 보여주고 싶다는 기대.
선배는 임무를 따라 수많은 풍경을 마주하고, 나는 이 도시가 만들어가는 작고 소중한 변화들을 곁에서 지켜본다.
그렇게 결국 그 모든 장면들 속에, 우리 둘의 모습이 조금씩 새겨지겠지.
백기는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시선과 손끝이 동시에 내 눈썹과 이마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숨소리마저 조용해졌다.
백기
다음엔 내가 예전에 봤던 그곳으로 가자.
유연
알겠습니다, 백 장관님.
따뜻한 손끝이 내 눈가를 스쳤고, 별빛은 그의 눈동자에 반짝였지만 그 순간, 나는 마치 그가 바라보는 유일한 별하늘이 된 것 같았다.
백기
너 없는 동안, 나도 스스로 잘 챙겼어. 내 자신을 아끼고, 돌봤어.
백기
임무 중 만난 사람들, 마주한 풍경들. 전부 소홀히 하지 않고 제대로 바라봤어.
유연
당연히 알고 있어요.
유연
정말로 잘 알고 있어.
그가 바라보는 세상도, 그가 주는 사랑도.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건, 결국 그 사람을 위한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백기
다음번에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유연
안 돼요, 다음에도 제 차례예요. 제가 가고 싶은 데 아직 한참 줄 서 있단 말이에요.
백기
안 돼. 전부 다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야 해.
유연
그건 더 안 돼요——
서로 웃고, 장난을 주고받으며 포옹과 입맞춤, 그리고 그 모든 따뜻한 감정들이 하나로 조용히 섞여 흘러갔다.
별빛은 눈부시게 쏟아졌고, 서로 맞닿은 온기를 따라, 두 사람의 심장은 마치 하나가 된 듯 같은 박동으로 뛰고 있었다.
짙어진 밤색 아래, 은하수는 우리 머리 위를 조용히 흘렀고 창가엔 바람이 살며시 스쳐 지나갔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는 서로를 중심으로 각자의 궤도를 돌고 있었다.
그를 위해, 그의 밤하늘에 별이 밀려오고 물러가는 것을 함께 바라보며.
창문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살짝 비집고 들어와, 침대 끝에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들어온 건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백기의 등.
그는 웃옷을 입지 않은 채, 한 손을 어깨 너머로 올려 무언가를 누르듯 하고 있었고, 표정엔 어딘가 어색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유연
음…… 왜 그래요?
백기
……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고, 그로인해 나는 조금씩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등 위엔 얇고 가는 붉은 자국들이 몇 줄, 아침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순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나는 얼른 헛기침을 하며, 그 순간의 부끄러움을 애써 감췄다.
유연
읏…… 이거 왜 이래요?
백기
전에 임무 중에, 등 쪽을 한번 부딪혔었어.
백기
그땐 별일 아니겠거니 했는데 어제 수영장에서 너랑 놀다가, 아마 그때 난간에 살짝 부딪혔나 봐.
백기
어제는 전혀 몰랐는데, 방금 스치니까… 좀 살짝 아프더라고.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는데, 그 모습이 괜히 귀여워 보였다. 게다가 내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살짝'에 힘을 주어 말한 게 느껴졌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백기는 머쓱해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백기
잘못했어.
유연
푸흡——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맞다, 맞아요!
유연
백기 씨, 봐요! 그렇게 부주의하게 굴다가 다쳤잖아요!
다음부터는 진짜 그러면 안 돼요!
그가 먼저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자, 괜히 내가 조금 찔리는 기분이 들어, 급히 예전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기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롭게 바뀌었고, 눈썹까지 살짝 치켜올라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려는 척을 했다.
유연
왜, 왜요…… 또 뭐예요?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가 조용히 내 손목을 붙잡았다. 세지는 않았지만, 도망가기엔 충분히 단단했다.
백기
뭔가 수상해. 진술 내용에 오류가 있어.
그의 예리함과 확신에 찬 말투에, 나는 괜히 더 당황했고,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유연
무슨 오류요! 선배야말로… 그, 잘못해놓고, 또 딴 잘못 만들고 있잖아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내 눈을 깊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 반짝이는 눈빛이 마치 심문이라도 받는 듯한 압박감을 줘서 내 볼이 점점 뜨거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백기
그럼 말해봐. 내 등에 있는 상처, 그거 어떻게 생긴 건지 묘사해 봐.
유연
…그냥… 그냥 일반적인 멍이잖아요. 그냥 좀, 작고, 평범한… 이만한 거?
나는 말하면서 손으로 어설프게 여기저기 가리켰고, 그는 그 말에 눈썹을 한번 치켜올리더니, 곧바로 거울 쪽으로 향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붙잡았고, 입에 나오는 대로 말을 뱉기 시작했다.
유연
알았어 알았어요~! 이번엔, 선배가 다친 거 그냥 눈감아줄게요~
어차피 작은 상처잖아요! 우리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말고——오늘은 우리 그냥……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허리를 강하게 감싸안는 힘이 느껴졌고, 그 다음 순간, 시야가 휙 하고 뒤집혔다.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백기가 나를 그대로 번쩍 들어 어깨에 메어버렸다는 걸.
유연
서,선,선배—— 내려놔요!
그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그대로 안은 채 전신 거울 앞까지 걸어갔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고, 손으로 가리고 또 가렸다.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백기의 눈에는 웃음기가 점점 더 짙어져갔다. 심지어는 그 웃음 속에 담긴 만족감까지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다시 부드러운 이불 위에 내려졌다.
투명한 아침 햇살이 커튼 틈을 따라 흘러들어와, 딱 내 눈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햇빛을 손으로 가렸고, 그보다 더 빨리,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까지 덮어버렸다.
그러면서도, 말은 또 기어코 뻔뻔하게 뱉었다.
유연
……그, 그런 거—— 전에 한두 번 있던 일인데, 왜 그렇게 유난이에요.
유연
그리고…… 이건 선배가 찔려서 그런 거죠! 그러니까 괜히 다른 이유라고 생각한 거잖아요!
유연
봐요—— 임무 나가서 등 부딪힌 거, 그거 나한테 말 안 했잖아요?
내가 어설프게 변명하듯 중얼거리며 버둥거릴수록, 백기의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번져갔다.
입꼬리는 말릴 틈도 없이 올라가, 이제 막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직전이었다.
백기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아주 사소한 것도 전부 말할게.
백기
가는 길에 본 꽃 한 송이, 스쳐간 풍경 하나하나까지——전부 보고할게.
백기
다만, 지금 이 '상처'에 대해서는…
백기
비슷한 일이 예전에도 있었지만,
아직은 내가 그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몸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가까워지고, 그가 나를 마주한 그 순간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 울릴 정도였다.
백기
오늘은 나가고 싶지 않아.
네가 남긴 이 ‘흔적’이 너무 적거든.
백기
모든 곳에, 하나도 빠짐없이 남겨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