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종말의 재현

NW 로고가 새겨진 복도에는 차가운 빛이 비춰지고, 커다란 건물에는 나의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만 들려올 뿐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정적에 휩싸였다. 나는 신중하게 벽에 바싹 붙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지만 앞은 더할 나위없이 익히 알고 있는 장면 외에는 어떤 기이한 현상조차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끊임없이 연산값이 산출되던 기계들은 모두 작동을 멈추었고 가뜩이나 밀폐된 건물에는 빛 한 점도 들어오지 못해 더욱 숨이 막혔다. 세상은 마치 멈춘 듯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허묵의 말에 따르면 CORE는 각성한 뒤 여전히 이 세계에 또 다른 영향을 끼쳤고.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공간의 중첩이 발생한 이 구역으로 들어왔다.
앞에 있는 이 NW 연구소와 똑같이 생긴 건물은 뭘까?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허묵이 남긴 정보를 정리하면서 어떤 단서가 있을지 보고 싶었기에 한 실험실로 신중하게 들어갔다.

책상 위는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지만 A4용지가 책상 위에 정신없이 펼쳐져 있는 걸로 보아선 방금 전까지 누군가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흔적임에 분명했다.
"……뭐라고 썼는지 도통 모르겠어."
빼곡하게 쓰여져 뜻을 알아보기 힘든 영어와 도형 때문에 나는 문서를 내려놓고 방 안에 있는 다른 시설들을 둘러보았다.
곧 디스플레이의 빛이 내 시선을 끌었다. 기계 상의 마이크로 조작 스크린인 듯 화면 위로 무언가 희미하게 떠오르는게 보였고, 순간 무엇인가 생각나 서둘러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모니터 내용을 똑똑히 들여다보고는 순간 숨을 죽였다——
19:17.
희미하게 빛을 내던 숫자는 조용히 눈부시게 빛을 발했고 가운데의 기호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서있었다.
나도 그 순간 이 적막한 공간 속에서 함께 굳어버린 것처럼 꽤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어째서……이 시간인거지?
내가 깨어난 뒤에 소위 '시공간 중첩 구역'에 들어간 시간이든, 내 마음대로 걸어다니다 눈앞에 나타난 시간이든간에……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나에게는 이 숫자들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나는 요행을 바라면서 스크린 상의 시간이 다음 숫자로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곳에서 멈춘 것만 같았다.
*
나는 왠지 모를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허겁지겁 실험실을 나와 연구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유 없이 터무니없는 추측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모퉁이를 돌자 두꺼운 기계문이 끝에서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위를 쭉 둘러보았지만 내가 가장 최근에 지나다녔던 이 긴 복도에는 이런 기계문이 있었던 기억이 없었다.
"정말 다른 점이 있긴 하나 봐."
내가 중얼거리며 빠르게 앞으로 걸어가자 그 사이로 곧장 아래로 통하는 계단이 선명하게 보이면서 이따금씩 흙먼지를 머금은 공기가 날아올랐다.
"……지하로 통하는 길인가?"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계단을 따라 깊숙히 걸어갔다.
계단은 유난히 어둡고 길었지만 아래에 희미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발끝을 세우고 계단을 내려와 또다시 깊은 아치형 터널을 통과한 후 방공호 같은 거대한 공간을 발견했다.
온 공간은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입구 양 옆으로 나무 상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나는 망설이며 몇 걸음 다가가 상자에는 통조림이 가득 차 있고 바닥에는 군수용 특수 식품이란 글자가 작게 인쇄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군용 통조림?"
나는 몇 상자 살펴보다가 상자에는 통조림과 압축 비상식량 외에도 생필품과 구급용품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설마 이게 NW의 지하 창고인가? 그런돼 왜 이렇게 크게 설계한 거지?
굉장히 의아해 하며 좀더 깊숙히 들어가는데 구석에서 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던 철문이 내 주의를 끌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가가서 문을 밀어젖힌 후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곳은 거대한 지휘실처럼 어수선하게 배치되어 있는 컴퓨터가 눈부시게 붉은 빛을 발하며 WARNING 이라는 거대한 글자가 화면 전체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정문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디스플레이가 내 망막을 핏빛 색깔로 물들였다——
"X1917 혜성이 강림하기까지:"
"……0초."
영원한 밤하늘과 만신창이가 된 연모시가 불꽃처럼 내 머릿속에서 터졌다.
몸이 심하게 떨려왔다. 그 기억들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와 이 황당무계한 생각들을 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즉시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올라 수많은 복도를 통과해 NW 연구소의 문을 급히 밀어젖혔다——

유성들이 빼곡하게 생기가 없는 어두캄캄한 밤을 가로지르고 있고, 거대한 혜성이 눈부신 빛을 감싸고 하늘을 태우며 긴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궤도 위에 걸쳐져 거대하고 영원한 밤하늘 속에서 공허하게 백주 대낮을 밝혔다.
공터에는 군용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고 '재난 구호 물자'라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입을 살짝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중첩 구역의 공간은……
17년 전 혜성이 오던 그날의 공간이야.

특파서 모니터링 로비.
"백 대장님, 긴급 상황입니다. 10분 전 연모시 서쪽 교외에서 52km 떨어진 곳에서 엄청난 에너지 파동이 발생했습니다. 지속 시간은 49초, Evol 에너지 데이터는 관측 가능한 수치를 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감시 불가 구역인데 저희가 필요할까요……?"
루일의 미묘한 신호에 백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거의 100개에 달하는 프로젝션 스크린에서 시선을 거두었고, 옆에 있던 고진도 소리를 듣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거기도 정신없이 바쁠테니 NW도 끼어들길 원할 거야."
"투입해."
화면에는 순식간에 확대된 격자 모양의 지도가 튀어나와 Evol 에너지를 나타내는 물결이 격렬하고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검붉은 색의 경고등이 쉴 새 없이 번쩍이며 백기의 표정을 더욱 차갑게 보이게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한 뒤에 무선 이어폰을 끼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밖으로 걸어갔다.
"모두 계속 밀고 나가. 루일, 비슷한 상황이 재차 나타나면 즉시 내게 위치를 보고해."
35-3 소란스러운 바람
황야를 얼마나 걸었을까. 어두컴컴한 하늘빛으로 온 대지는 더욱 황폐하게 보였고 만신창이가 된 도시는 시야 끝에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나뭇잎은 바람에 이끌려 뒤틀린 자세로 공중에 떠 있었고 유성도 밤의 장막 위의 장식 같았다.
"도대체 왜……"
마음은 무겁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그 어린 소년은 세상이 멈춘 게 아니라 후퇴하는 방식으로 17년 전 그날까지 '전진' 했다고 했다.
그렇담 사람 한 명 없고 고정된 정지화면 같은 이 세계는 또 뭐라 해야할까?
만약 이게 정말 CORE의 각성 때문이라면, 이것은 시공간의 중첩으로 지금의 연모시에 강림했다……
이 모든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이 마음에 맴돌자 나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서 하늘에 멈춰 선 혜성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이 갑작스러운 현상들이 모두 CORE 때문에 나타난 거라면 혹시 내가 CORE의 힘을 이용해서 이 모든 것을 멈출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손바닥을 펴고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체내에서 무엇인가 요동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솔직히 실험 중일 때조차도 실감이 많이 되지 않았다.
아마 허묵의 계획에 따르면 지금도 시작 단계에 불과했다.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 몸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에너지를 느꼈다.
"야!"
……
"……아!"
세상은 고요했다.
얼굴이 좀 화끈거리는 걸 제외하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서 손을 거두었다. 당연한 거라는 걸 알지만 여전히 좌절감이 들었다.
나는 입을 오므리고는 고개를 들어 NW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은 내가 갑자기 허공으로 사라진 걸 알고 어떻게 속임수를 쓴 건지 의논하고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곳을 떠날 궁리를 해서 CORE의 분석 연구 실험을 계속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혈액병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갑자기 살짝 현기증이 엄습하면서 눈앞의 화면은 공허한 그림자로 변했다.

황량한 대지는 때때로 울창한 잔디밭으로 변했고 하늘도 어두컴컴하게 빛이 났다.

세상은 마치 한순간에 잘못된 기계로 변한 것처럼 다른 화면을 번갈아 비추며 번쩍였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수십 미터가 떨어진 곳에 대낮의 하늘과 영원한 밤의 하늘이 인접해 있고 황량한 들판은 울창한 강둑과 이어져 있었다.
앞의 모든 것들이 전혀 맞닿지 않는 퍼즐처럼 억지로 끼워맞춰졌다.
나는 모르게 어두컴컴한 밤과 황량한 곳을 지나 햇빛 속으로 걸어갔다.
머리를 돌리자 그림자가 공허하게 흔들거리며 뒤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그저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대지로부터 이어진 선이 곧게 뻗어 멀리까지 퍼져나가며 종말의 광경이 명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공간이 중첩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서 나도 모르게 그림자가 있는 공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내가 다시 건드리기도 전에 공간이 순간 사라지면서.

방금 전의 화면은 여지껏 나타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눈부신 햇빛이 울창한 풀밭에 내려앉았다.
100미터 떨어진 NW 연구소는 차갑게 바라보는 것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방금 전의 이상한 공간에 대해서 많은 의문점이 들었다. 그 공간이 CORE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상 나는 아마 NW로 돌아가 관련된 많은 정보를 얻어야 했다……하지만 모처럼 NW를 떠날 기회가 생겼으니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생각에 집중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맹렬한 굉음이 들려왔다. 질주하던 검은 오토바이가 먼지와 모래를 내 앞에서 휘날리며 멈추었다. 나는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오토바이에 탄 사람은 번개처럼 헬멧을 벗어 던지며, 날카롭고 단단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선배!? 여긴 어쩐 일이에요?"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우리는 이구동성 질문을 던졌지만 다음 순간 그의 눈동자는 매우 빠르게 차가워졌다.
그러더니 그는 눈에 띄게, 화가 나보였다.
백기는 아래로 시선을 내리더니,
잔뜩 찌푸린 미간을 더욱 굳혔다.
백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의 시선을 따라 나도 고개를 숙여 몸을 바라봤다.
푸른색과 흰색이 섞인 실험복 위——가슴팍에는 **"A022"**라고 쓰인 숫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고,
발에는 방전 방지용 신발을,손목에는 아직도 수액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아차.
백기의 시선이 점점 더 차가워져, 나는 머리가 저릿할 정도로 긴장했다.
입술을 꾹 다물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급히 생각했다.
그러나——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을 귀 옆으로 가져갔다.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를 급히 붙잡고 소리쳤다.
유연:
선배, 뭐 하는 거예요!?
백기:
강제로 묻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모든 걸 밝혀낼 거야.
백기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너무나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로.
백기:
곧 사람을 부를 거야.
너는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어.
백기:
모든 건 내가 처리할게.
유연:
잠, 잠깐만!
나는 백기의 팔을 꽉 껴안았다.
그가 성급히 NW에 쳐들어갈까봐 두려웠다.
백기:
……내가 그놈들 못 이길 거 같아?
유연:
아니, 그런 뜻은 아니야!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백기의 온몸이 쭈뼛 솟아 있는 걸 보자, 오히려 더 꼭 껴안고 싶어졌다.
백기:
그럼 내게 맡겨.
백기:
이 세상에——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백기: 네가 누구든, 어떤 존재든——이런 일을 겪게 해선 안 되는 거야.
가슴이 저릿했다. 뜨거운 눈물이 금세 차올랐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조금은 불안한 듯, 하지만 단단하게 백기를 바라보았다.
늘——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쉽게 화내지 않는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는 이렇게까지 분노하고 있었다.
기뻤고, 가슴이 아팠다.
유연:
……하지만, 그 사람은 NW 사령관이에요. 선배는 특파서 지휘관이고…… 이렇게 맞붙으면, 상황이 복잡해져요.
백기:
그럼 가면 쓰고 때리면 되지.
그리고 더 세게 때리면 되고.
유연:
……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가벼운 바람이 가을빛 햇살 사이를 스쳐 지나갔고, 내 주저하는 말들도 함께 실려 나왔다.
유연:
……사실 나는, 스스로 NW와 협력해서 실험에 참여한 거야.
NW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어. 내 몸 안에—— CORE가 있다는 걸.
나는 평온히 선배를 바라보다가,
그 두 눈동자 속을 스쳐 지나간 미묘한 감정을 알아차렸다.
유연:
내가 CORE를 몸 안에 품은 존재라는 것을……
선배는 알고 있었지?
35-4 뒤늦은 해명
아마도 눈 내리던 그 밤에, 선배가 CORE가 자기 손에 있다고 하면서
더는 나를 어떤 위험에도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했던 그때.
혹은, 재건 프로젝트가 한창일 때——선배가 CORE의 단서를 일부러 흘려 여러 세력의 시선을 끌었던 그때.
그가 복잡하고 억눌린 눈빛을 드러낼 때마다.
아무 말 없이 나를 오래 바라보던 그 순간마다.
나는, 좀 더 생각했어야 했다.
왜 선배는 언제나 그렇게 확신에 찬 태도로 CORE를 대할 수 있었던 걸까.
왜 모두에게, CORE는 자신의 손에 있다고 당당히 말했던 걸까.
선배는 늘 자신의 방식으로, 조용히 나를 보호하고 있었던 거다.
거센 바람이 강둑을 스치고 지나갔다. 휘몰아치는 소리에 풀잎들이 들썩였다.
선배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앞머리가 그의 눈을 가리며,모든 감정은 바람 속에 조용히 녹아내렸다.
백기:
"……널 속이려던 건 아니야."
오랫동안 말이 없던 끝에, 선배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유연:
"알아요."
"선배가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라는 것도,
나를 위험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도."
나는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그의 팔에 얹었다.
이 무거운 침묵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풀어주고 싶었다.
유연:
"하지만 어떤 일은 결국 내가 마주해야 하는 걸요."
"조금 늦긴 했지만,
저도 이제야 제 방향을 찾았어요."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마음을 다잡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죠."
선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팽팽하게 긴장된 그의 몸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유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본질적으로는 저도 자발적으로 실험에 참여한 거예요."
"그리고 NW와 거래도 했어요. 저⋯⋯"
백기:
"……너는 달라!"
휘몰아치던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선배의 목소리에는 억누를 수 없는 떨림이 섞여 있었다.
선배는 거칠게 고개를 들었다.
그 눈동자엔
수없이 얽힌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그의 강한 기세에 숨을 삼키고,
그의 목젖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지켜보았다.
잠시 후, 선배는 다시 고개를 숙였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기:
"……너는 달라."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나는 조용히 눈앞의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목구멍이 아프게 막혀왔다.
백기:
"NW 놈들은 절대 약속을 지키지 않아."
"그들에게는 NW 프로젝트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 중요해."
"너는 아직 몰라. 네가 어떤 놈들을 상대하게 될지……"
선배의 말은 툭툭 끊겼다.
감정을 다 쏟아버린 것처럼, 조금의 온기도 없이 메마른 목소리였다.
유연:
"……"
마치 머리 위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현실감은 선명했지만,
그만큼 억울하고 아쉬운 마음도 깊게 퍼져갔다.
유연:
"선배가 나를 걱정하는 걸 알지만 저도 NW의 실험 대상이 될 만큼 바보는 아니에요."
감정이 담긴 내 말에, 선배는 고개를 들어 진지하고 단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유연:
"……전 샤오위에를 협박했어요."
"내가 CORE를 영구히 봉인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죠."
"그 대신 그들은 내 연구에 협조하고, 혈액 바이러스 문제 해결에 협력해야 해요."
"……이걸 일방적인 거래라고 생각해요?"
나는 선배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배는 잠깐 입을 열 듯했지만,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초조하게 머리를 쓸어올리는 손짓이, 그의 복잡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마, 내가 말한 걸 전부 받아들이진 못했겠지만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어색한 정적 속에서 선배의 이어폰 너머로 작은 잡음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백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이어폰을 두드리며 짧게 말했다.
백기:
"……알겠어. 모니터링 계속해."
이어폰을 한 번 더 누른 뒤, 선배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아까 네가 갑자기 공터에 나타난 것 같았어."
"그리고 동시에 이 지역에서 엄청난 Evol 에너지 파동이 감지됐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짙게 밀려왔다.
유연:
"……CORE의 각성 때문이에요. 시공간 중첩 현상이 일어난 거죠."
"아까는 우연히 그 시공간이 엉킨 구역에 들어갔다가, 겨우 빠져나왔어요."
"그리고……선배를 만났어요."
내 이야기를 들은 선배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NW 연구소 쪽에서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시야가 번쩍 어두워졌다.
선배가 내 머리에 오토바이 헬멧을 씌운 것이다.
그리고는, 내 손을 확 잡아
자신의 허리에 끌어당겼다. 거칠게 시동을 걸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백기: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
"꽉 잡아."
오토바이는 큰 원을 그리며 땅을 긁었다. 거칠게 드리프트를 그리며 도망쳤다.
풍경이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바람이 거세게 불며, 나는 백미러 너머, 몇몇 검은 그림자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어렴풋이 보았다.
백기:
"루일, 내 위치 확인해."
"나 대신 모든 카메라를 피해줘"
선배는 오토바이를 거칠게 몰아
폭발하는 엔진 소리 속을 가로질렀다.
아마 NW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도 함께 떨쳐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유연:
"……선배,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센 바람 소리만이 귓가를 스쳤다.
유연:
"……우리가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샤오위에와 아직 협상할 여지가 있을지도 몰라요!"
샤오위에가 했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백기와 NW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단 하나, 선배가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
선배는 이미 온몸에 쇠사슬처럼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유연:
"선배!"
백기:
"……그냥 이렇게 생각해. 내가 널 빼앗아 온거라고"
휘몰아치던 바람 소리가 천천히 멀어지고, 남은 것은 선배의 조용한 목소리뿐이었다.
선배는 숨 가쁘게 골목길과 뒷길을 빠르게 누비며 나를 데리고 도심을 빠져나갔다.
우리는 비밀 통로를 지나 그가 몸담고 있는 특파서 본부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방 안은 엉망이었다. 화이트보드에는 빽빽하게 파일과 사진이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두껍게 쌓인 서류들과 기록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 한켠이 쓰라렸다.
선배의 어깨는 단 한순간도 가벼웠던 적이 없었다.
'소형 주사기 사건', 'Evolver 암살 사건', '방사능 오염 사건', '재건 프로젝트 뒤에 숨겨진 시위자들', '기계 상자 사건', '혈액 바이러스 문제'…… 너무 많아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들은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농담처럼, 그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때리고,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 단단한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 역시, 그를 짓누르고 있는 수많은 짐들 중 하나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백기:
"……유연아."
선배는 등을 돌린 채 조용히 이어폰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흘러들어온 저녁 노을이 블라인드 사이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마치 굵고 무거운 쇠사슬처럼 선배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백기:
"……네가 이미 결심한 거 알아.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줘."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억눌린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백기:
"……나도 조금만 더 생각해볼게."
주황색 저녁빛이 점점 어두워지며, 세상은 천천히 밤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백기:
"……아직은 널 NW의 실험체로 내버려 둘 수 없어."
"……적어도 지금은."
"여기 있어줘."
35-6 무거운 책임
나는 선배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너무 잘 알기에, 오히려 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곳 사무실에 머무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반 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우리는 훨씬 더 조용해져 있었다.
선배는 내 행동을 일절 제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라도 더 많은 서류 속에 자신을 파묻는 것 같았다.
조용히 닫혀 있는 사무실 문. 말없이 서 있는 그 문 너머의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구석에 있는 작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몰래 시선을 보내던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선배는 쿨럭거리며 두어 번 헛기침하더니, 부랴부랴 시선을 빽빽한 화이트보드 쪽으로 돌렸다.
이런 모습이, 내가 이곳에 머문 이틀 동안의 대부분이었다.
서류를 정리하거나, 연모시의 최신 뉴스들을 조금 훑어보는 것 말고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선배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가라앉히기를 바랐다.
물론, 이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서로에게 다시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최근 극단적인 총격 사건을 막기 위해, 시청은 발병한 Evolver들을 지정 병원으로 이송하고,
시 전체 Evolver들에게 건강 검진을 받으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온라인에서는 부정적인 여론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선배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고, 나는 단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고진:
"백 대장, 여기 오늘 나온 수질 보고서."
고진은 식판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쪽 팔에 끼운 문서를 건네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고진:
"유연씨, 이거 먼저 뜨거울 때 먹어요."
"백 대장은, 식사 먼저 할 거야? 아니면 들으면서 같이 먹을 거야?"
백기:
"……먼저 보고부터."
선배는 신속하게 기존 서류를 정리하고, 고진이 가져온 문서를 펼쳐들었다.
그의 눈빛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나도 손짓으로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먼저 일부터 보라고.
이틀 전 고진은 내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대해 별다른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듯 한 번 힐끗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이럴 때일수록 고진은 누구보다 어른스럽다는 것을.
고진:
"우리가 예상한 대로야.
지금 몇몇 수에서 수질 문제가 확인됐고,
전부 검체를 보내 추가 조사를 기다리고 있어."
"상수도……?"
나는 잠깐 멍해졌다.
왜 선배가 수질을 조사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무언가 수상한 사건에 물을 이용하는 음모라도 있는 걸까?
고진:
"좀더 시간이 필요해.
"
선배는 짧게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문서를 훑어내려갔다.
곧바로 전자지도를 펼치더니,
전자펜으로 몇몇 지역을 빠르게 표시했다.
백기:
"8팀에게 계속 조사 맡겨.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특히 이 공장들, 집중적으로 감시해."
"그리고…… 연모시 전체의 저수지 상황도 확인해."
그때, 선배 책상 위 전화기가 울렸다.
선배는 가볍게 손짓한 뒤, 빠르게 수화기를 들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그의 미간이 즉시 깊게 찌푸려졌다.
선배는 스피커폰 버튼을 누르고, 곁에 있던 두툼한 파일 하나를 꺼냈다.
백기:
"아선, 말해. 문서 열었어."
아선(阿先):
"백 대장님, 막 도착한 분석 결과입니다."
"기계 상자 내부 성분을 분석한 결과——
'소형 주사기'에 쓰였던 물질 외에도,
소량의 Y원소가 추가로 들어간 걸 확인했어요."
선:
"Y원소는 남미 지역 특산 식물에서만 발견되는
희귀 방사성 물질입니다."
"우리가 연모시 및 인근 지역을 조사한 결과,
최근 반년 사이 여러 가명을 이용해, 이 식물을 대량으로 수입한 용의자를 특정했습니다."
"지금은 그 사람이 소유한 공장 몇 곳을 조사할 예정입니다.
현재까지 보고된 이상 징후는 전기 사용량이 비정상적으로 많다는 점 정도네요."
백기:
"……물었네."
선배는 잠시 고민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백기:
"몇몇 눈치 빠른 사람들 골라서 같이 가."
"그리고 기계 상자 분석은 계속 진행해. 일주일 안에 확실한 결과 가져와야해."
아선:
"알겠습니다!"
짧은 통화가 끊기고, 선배는 뒤쪽 화이트보드를 젖혔다.
그 안에는 연모시의 지도. 서쪽 외곽이 이미 크고 작은 원으로 표시돼 있었다.
선배는 조용히 나를 흘끗 바라봤다가, 고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백기:
"……계속하지."
"지금 시공간 중첩 구역 상황은?"
나는 숨을 삼킨 채, 고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진:
"파동 구역의 발생 빈도가 급격히 늘고 있어."
"영향 범위도 확장 중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반경 5km였던 게, 오늘 아침 10시 기준 10km로 늘었어."
"파동 지점도 3개에서 7개로 증가했고."
"발생 원인도, 영향도 지금은 아직 파악이 안 되고 있어."
"오늘 조사팀이 파동구역 내부를 확인했는데……"
고진은 말을 멈추고,
표정이 점점 무거워졌다.
고진:
"……그 안의 연모시가 뭔가…… 달라."
나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혹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입을 열었다.
유연:
"그 연모시 안은……"
하지만 내 목소리는 기묘한 잡음에 삼켜져버렸다.
순식간에, 거대한 힘이 내 입을 틀어막은 듯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백기와 고진도 동시에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고진:
"유연 씨, 방금 연모시에 대해 뭐라고 했어요?"
유연:
"……어?"
나는 손끝이 떨렸다.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연:
"……아뇨, 그냥……저도 그 공간에 들어간 적이 있어서요.
그 안 모습이…… 좀 이상했어요."
선배는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백기:
"지금 추세라면, 며칠 안에 시내까지 영향이 번질 거야."
고진:
"맞아.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이 실종될 수도 있어.
이후의 영향은 예측조차 어려울 거야."
유연:
"……"
나는 손끝에 온 힘을 주어 주먹을 꼭 쥐었다.
가슴속에서는 다시 조급한 불안이 솟구쳤다.
알고 있었다.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심지어, 나는 선배의 눈을 바로 쳐다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백기:
"……Evol 파동 상태, 24시간 지속 감시.억제기를 배치해 구역별로 테스트. 억제 효과를 확인해."
"억제율이 80% 미만일 경우, 즉시 영향 반응을 예측하고, 홍보국에 연락해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선배는 거침없이 명령을 내렸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자 그를 둘러싼 긴장감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는, 곧 몰아칠 폭풍을 억지로 짓누르는 새벽처럼 들렸다.
고진:
"알겠어. 조금 있다가 당조에게 예비 대응 방안 만들어서 보내게 할게."
백기:
"……오후에 파동 구역 다녀올 거야. 그리고 시청에도 얼굴 좀 비춰야지."
고진은 눈을 굴리더니,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끝내고, 고진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
고진:
"참, 유연 씨."
"백 대장 밥 먹는 거 좀 챙겨줘."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밥 한 끼 먹는 것도 누가 봐야 해."
백기가 화낼 틈을 가지기도 전에, 고진은 쏜살같이 나가 문을 닫았다.
조용해진 방 안. 나는 선배의 책상으로 다가가,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꺼냈다.
마음을 가다듬고,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었다.
유연:
"큰일이에요. 아까 그 고진 삼촌에 웃음거리 됐잖아요.
우리, 다음에는 제대로 보여줘야죠."
백기:
"……고진 삼촌?"
유연:
"그럼요. 유치원 중반반, 백기 어린이."
내 작은 농담에, 선배의 굳었던 입가가 살짝 풀렸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유연:
"앞으로는 시간 맞춰 밥 먹어야 해요.
그래야 고진 삼촌이 우리 몇 살인지 제대로 알 거 아니에요."
백기:
"내가 몇 살이든 고진이 알 바 아니야."
투덜거리면서도, 선배는 도시락을 열고 젓가락 두 쌍을 꺼내
하나는 내 앞에 조심스레 놓아주었다. 그리고 제야 자신의 도시락을 들었다.
백기:
"……그럼, 너한테는 내가 언제쯤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유연:
"그건, 백 경관님의 앞으로의 활약에 따라 다르죠."
백기:
"……하루에 여덟 끼 먹으면 빨리 클 수 있어?"
유연:
"그건 모종을 억지로 뽑아 올리는 거랑 똑같아요. 오히려 키 안 클걸요?"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우리는 태연하게, 아무 일도 없는 듯 시간을 나누었다.
서로 다 알고 있었지만, 단지 상대를 위해, 물러서지 않을 뿐이었다.
선배의 걱정은 틀리지 않았다.
NW 계획은 여전히 불투명했고, 그들과 협력하는 건 언제나 위험을 동반했다.
하지만, 혈액 바이러스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문제였고, 특파서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NW는 최첨단 연구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는 상황.
CORE의 존재 또한, 함부로 세상에 알려선 안 됐다. 극소수만 알고 있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선배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망설이는 이유를 나 역시 알았다.
백기:
"……유연아, 미안해."
오랫동안 침묵하던 끝에,
선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유연:
"……무엇 때문에요?"
백기:
"많이."
선배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햇살이 그의 속눈썹 위에 내려앉아,
드물게 드러난 그의 망설임과 흔들림을 비췄다.
이 세상엔 어쩌면 진짜로 '최선의 선택'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상대가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유연:
"……선배."
"가끔은, 선배 동료들이 부러워요."
선배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황금빛 눈동자가 조용히 빛났다.
나는 깊은 감정이 북받치는 걸 느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연:
"……그들은 선배에게 보호받을 뿐만 아니라, 같이 위험을 마주하고, 같이 상처 입을 수도 있잖아요."
그날 밤, 백기가 모니터링 센터에서 루일과 마지막 데이터를 확인하고 돌아왔을 때——
이미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사무실 문 앞에 서서, 낮에 여자아이가 했던 마지막 말이 다시 귀에 울렸다.
그는 잠시 문손잡이를 움켜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 사이로, 고요히 잠든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백기는 자신이 안심해야 할지, 아니면 스스로를 미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올라가,특파서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밤하늘은 깊었고, 멀리 흩어진 네온 불빛들이 검은 하늘을 흐드러지게 수놓고 있었다.
백기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마치 바람 속에 자신을 녹여버릴 듯, 조용히 서 있었다.
옥상 문이 열렸다. 고진이 탄산수 두 캔을 들고 다가와, 백기 옆에 툭 앉았다.
고진:
"하아…… 맥주가 그립네.
당번 근무는 참 끝도 없지."
백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캔의 탭을 당기자, '톡' 하고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고진은 탄산수 한 모금을 넘기더니, 건조하게 말했다.
고진:
"요 며칠 널 보니까……이걸 성장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여전히 답답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백기:
"……그럼 천천히 생각해."
백기는 무심하게 탄산수를 들이켰다.
고진: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졌어.
드디어 자신이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는 법도 배웠고, 인내심도 많이 늘었어,"
"반년 전 같았으면 벌써 폭발했을걸.
이렇게 참고 있는 거, 솔직히 대단하긴 해."
백기:
"……그래서?"
고진:
"그래도 아직 멀었어."
"그 애를 특파서에 계속 붙들어 둘 생각이야? 평생?"
백기:
"……지킬 수만 있다면, 평생이라도."
고진:
"하지만 지금 네 방식으로는 아니야."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에 쥔 캔은 힘으로 살짝 찌그러져 있었다.
백기:
"……나는, 그냥……"
말끝을 삼키고,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고진:
"그래서 네가 바보라는 거야."
"네가 매번 그렇게 뛰어들 때마다,
그 애 기분도 똑같이 휘청이는 거 몰라?"
백기:
"……!"
고진:
"네가 평소에 얼마나 걱정 끼치는지도 좀 알아야지."
고진은 백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진:
"아직 유치원 중반반 수준이야."
그는 장난스럽게 빈 캔을 들어올려, 백기의 머리 위로 툭 던졌다.
캔이 머리 위에 '톡' 하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밤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고진은 재빨리 몸을 굽혀 옥상에서 뛰어내렸지만, 백기가 날린 주먹은 피하지 못했다.
백기:
"……지금 당장 유치원으로 다시 보내줄까?"
고진:
"됐어. 너 같은 애랑 동급생 되는 건 딱 질색이거든."
서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주고받으며,
밤하늘 끝에는 서서히 여명이 번지기 시작했다.
35-7 함께 싸우다
하룻밤 내내, 선배가 그 말을 들었을 때의 표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으로 연모시 뉴스 속보를 훑어보다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허락해 준다면 좋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틈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시간을 얻었으니까.
NW를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희미하게 하나의 방향이 떠올랐다.
오후, 선배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잠깐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머뭇거리며 책상 뒤에 앉았다.
그러나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까지 걸어왔다.
유연:
"……왜요?"
내 질문에, 선배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동안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한 공기 속, 작은 소리 하나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다그치지 않고 기다렸다.
백기:
"유연아…… 묻고 싶은 게 있어."
유연:
"……말해요."
선배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기계 상자 조사하던 중, 오늘 중요한 정보를 하나 찾았어."
"어제 아선이 보고했던 내용, 기억하지? 방금, 우리가 주목했던 식품 가공 공장을 발견했어."
백기:
"탐사 결과, 그 공장 지하에 비밀 구역이 있을 가능성이 높대."
백기:
"아마, 기계 상자의 생산 라인이 거기에 있을지도 몰라."
그는 서류와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공장에 대한 정보와 지하구조 모의도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백기:
"그 구역 특성상, 이번엔 무인 드론을 써서 나랑 같이 조사할 거야."
유연:
"같이? ……그럼, 선배가 직접 잠입하겠다는 거예요?"
백기:
"그래. 난 그 지역 지형에 익숙해. 이번엔 정찰이 목적이니까, 인원은 적을수록 좋아."
나는 고개를 숙였다가, 꾹 참고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내밀며, 선배를 째려봤다.
유연:
"……선배, 나한테는 가만히 있으라면서."
백기:
"……그래서, 널 이 작전에 참여시키고 싶어."
유연:
"……네?"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유연:
"……지금, 뭐라고 했어요?"
백기:
"……내가, 네 도움이 필요해."
"이번 작전, 네가 있으면 완성할 수 있어."
백기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백기:
"조사한 결과, 그 공장은 BLACK SWAN 소속이야."
"……Hades라는 이름, 들어봤지?"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기계 상자와 BS가 연관되어 있었다니.
충격에 휩싸이면서도, 다시 생각해보았다.
극단파라면 분명 이런 짓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계 상자는, 결국 사람들의 생명을 갉아먹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다시 시작된 후, Hades는 디오니소스 같은 자들처럼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무언가가 달라진 줄만 알았다.
설마, 이 모든 것이 이 기계 상자를 위한 잠복이었다니.
유연: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요?"
백기:
"지하 입구를 찾는 데 시간이 필요해."
"너라면, BS 소속이니까 수상하게 보이지 않을 거야."
백기는 숨을 들이쉬고, 결심한 듯 말했다.
백기:
"……시간을 벌어줘."
짙은 햇살이 쏟아졌다.
조용히, 조심스럽게.
그 사람의 마음이, 조금 앞으로 나아간 순간이었다.
선배는 내가 BS를 떠난 걸 모를 테지만——
잠시 고민한 끝에, 해결책이 떠올랐다.
나는 선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그 순간, 선배는 잠깐 어쩔 줄 몰라했다.
백기:
"……NW가 널 찾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난 준비해왔어."
"거절해도 돼. 난……"
유연: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선배."
"……선배 옆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기뻐요."
나는 손을 뻗어, 선배의 따뜻한 손바닥을 단단히 잡았다.
유연:
"……이번 작전 끝나고, 시간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백기:
"……나도."
잠시 뒤, 작전 시작까지 39분.
나는 백기와 함께, 고층 탑 위에 자리 잡았다.
백기는 모자를 눌러쓰고, 벽에 기대어 한쪽 다리를 난간에 걸쳤다.
조용히, 아래 펼쳐진 불빛 가득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주변에는 무인 드론들이 낮게 떠 있었다.
검은 밤 속, 붉은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별빛이 흩뿌려진 하늘.
거센 바람이 탑 위를 휘감았다.
백기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네온빛을 지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별빛을 올려다보았다.
유연:
"……오늘은 별이 많네요."
백기:
"……내일은 좋은 날씨겠지."
백기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얇았다.
달빛처럼 은은했다.
유연:
"선배, 혹시……"
"지금 하는 일 말고, 진짜 하고 싶은 거 있어요?"
백기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말을 고쳐 이어갔다.
유연:
"……이 도시를 지키거나, 악당을 잡는 것 말고요."
"그냥, '백기'라는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거."
"……예를 들면, 우주를 여행한다든지, 블랙홀을 연구한다든지."
백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단단한 눈빛으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백기:
"……지금 이걸 하고 있는 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야."
"물론, 가끔은 힘들고, 쉬고 싶기도 해."
"그래도, 난 이 일이 좋아."
네온빛이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흔들림 없는 그 시선을 비추면서.
백기:
"……우주를 누비는 것도 멋지긴 해."
"언젠간 도전해볼지도 몰라."
"하지만……난 지금도 충분히 멋진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마치 별빛처럼, 그의 눈동자 속에 빠져들 것 같았다.
유연:
"……맞아요. 정말 멋져요."
"……근데, 저도 꽤 멋진 일 하고 있어요."
나는 웃으며 선배 옆에 섰다.
함께, 이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백기의 깊은 눈빛이 조용히 나를 향했다.
오래도록.
조금은 쑥스럽게——
백기:
"……알아."
그 말을 듣지 못했다면, 바람에 실려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잠시 후, 신호음이 울렸다.
백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기:
"……준비됐어?"
유연:
"보고합니다, 지휘관님.——언제든 출동 가능합니다!"
백기의 손짓에, 주변에 대기하던 드론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마치 훈련된 병사들처럼.
검은 어둠 속으로 조용히 퍼져나갔다.
백기:
"……작전 개시."
35-9 은밀한 행동
밤바람이 사각거리며 불어왔다.
날카롭게 솟은 울타리는 마치 어둠 속에 숨은 이빨처럼, 싸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정문 옆 경비실로 향했다.
속으로는 계속해서 암호를 되뇌었다.
BS 소속의 시설이라면, 신분 확인을 위한 공통 암호가 있을 터였다.
사전에 젠과 몇 번이나 공장 관련 정보를 확인했던 것도, 이런 실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경비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노인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손을 들 준비를 했다.
노인:
"관계자 외 출입 금지."
눈도 뜨지 않은 채 노인이 중얼거렸다.
나는 침착하게, 창턱에 놓인 먼지 낀 낡은 동전을 뒤집으며 입을 열었다.
유연:
"What's past is prologue."
노인:
"The future is in sight."
그제야 노인이 눈을 떴다.
차가운 시선이 내 얼굴을 꿰뚫었다.
다음 순간, 그가 버튼을 누르자 멀리서 붉은 레이저 선이 순식간에 쏘아져 왔다.
'망했다.'
나는 속으로 중얼쳤다.
BS를 떠난 그날, 나에 대한 모든 내부 정보는 이미 삭제됐을 텐데.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벽에 등을 붙이고, 옆눈으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유연:
"나는 이번에 비밀리에 온 거야."
유연:
"이렇게 기록을 남기면, 여기 온 의미가 없잖아."
노인의 의심은 매우 신중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유연:
"나는 NoX야."
노인:
"……NoX는 BS를 떠난 걸로 아는데?"
유연:
"그래. 비밀은 아니지."
유연:
"하지만 그래서야말로, 이번 방문은 극비야.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어."
유연:
"지금은 네가 그냥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돼.
그렇지 않으면, 책임을 질 사람은 너도, 나도 아니야."
노인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 떠올랐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노인:
"혹시…… 보스가 보내셨습니까?
요즘 이 공장에 대해 뒤를 캐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나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태연하게 답했다.
유연:
"그건 답해줄 수 없어.
1분 줄게, 스스로 판단해."
정적이 무겁게 내리깔렸다.
잠시 후, 노인은 경비실을 나와 철문을 열었다.
노인:
"따라오시죠."
노인은 능숙하게 나를 공장 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슬쩍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귀에 낀 초소형 이어피스를 가볍게 눌렀다.
— 성공적으로 침투했다는 신호였다.
백기:
"A조는 계획대로, C9에서 W1 구역까지 수색한다.
B조는 나를 따라."
백기:
"루일, 모니터링 계속 유지해."
백기의 침착한 명령이 귀에 들려왔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노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연:
"Hades는?"
노인:
"……Hades님은 반년 넘게 이곳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유연:
"거짓말하지 마."
만약 이 밑에 정말 기계 상자 생산라인이 있다면,
Hades가 이렇게 오래 안 올 리가 없었다.
혹시 여기도, 그저 수많은 위장 공장 중 하나일 뿐인가?
백기:
"유연, 복도 앞에서 오른쪽으로 유도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주위를 둘러보고, 오른쪽 복도를 가리켰다.
유연:
"저쪽은 뭐지?"
노인:
"아, 저쪽은 정제 작업장입니다."
노인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무심한 듯 말을 이었다.
유연:
"공장 일만 신경 쓴다고?
'지하' 쪽은 아예 관심도 없는 거야?"
노인은 걸음을 늦추며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
"지하……요? 무슨 말씀인지……"
나는 짧게 숨을 삼켰지만 곧 표정을 고치고 딱 멈춰섰다.
유연:
"내가 뭘 말하는지 정말 모르는 거야?"
유연:
"그럼 좀 더 명확히 말해줄게.
너희 지하공장에서 만드는 그 물건들 말이야."
유연:
"괜히 번거롭게 만들지 말라고."
노인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노인:
"……여긴 정말 없습니다.
최근 반년간 식품 가공만 해왔어요.
너무 바빠서 일이 넘칠 정도였다고요."
노인:
"나는 이 공장에서 20년을 일했습니다.
여기서 모르는 일은 없습니다."
노인의 말투에는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그럼, 지난 반년간 재무자료와 관련 기록을 복사해줘.
나는 그걸로 보고하면 돼."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작업장 쪽으로 이끌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대부분이 자동화 기계로 채워져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는 빵이 줄지어 있었고,
잼을 바르고, 포장하고, 절단한 뒤, 자동 카트에 실려 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백기:
"유연, 철수 준비해."
백기:
"합류 지점에서 대기 중이다."
노인에게서 복사한 USB를 받은 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오늘 내가 여기 온 일은 절대 말하지 마."
공장을 빠져나온 나는, 아무 일 없는 듯 몇 백 미터를 걸은 뒤, 작은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골목 끝에는 검은색 차량이 서 있었다.
차량 뒷램프가 몇 번 깜빡이자,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올라탔다.
유연:
"백기, 상황 어때?"
백기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백기:
"……지하공장 같은 건 없었어."
유연:
"혹시 정보가 잘못된 거야?"
백기:
"아니, 오히려 의심스러워."
백기는 태블릿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식품 공장의 3D 구조도가 펼쳐져 있었다.
백기:
"서남쪽 구역에서 드론이 아주 미세한 Evol 파동을 감지했어."
백기:
"이런 현상은 세 가지 경우가 있어."
백기:
"하나는, 과거에 Evol 충격이 크게 일어나 잔여 에너지가 남은 경우."
백기:
"또 하나는, Evol 에너지를 지닌 물건이 묻혀 있는 경우."
백기:
"마지막은…… 지하에 다른 공간이 숨겨져 있는 경우."
유연:
"……그럼, 여긴?"
백기:
"잔류 에너지나 매장 가능성은 거의 없어."
백기:
"결국, 파내기 전까진 확실히 알 수 없어."
백기는 평온하게 태블릿을 접고, 차를 몰았다.
백기:
"오늘은 일단 철수. 돌아가서 다시 정리하자."
유연:
"……헛수고했네."
백기:
"그럴 수도 있어."
백기:
"하지만 단서라는 건 원래 열 번 중 아홉 번은 헛걸음이야.
그렇다고 아홉 번이 무의미한 건 아니지."
그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나 역시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Hades를 먼저 찾아야 할지도 몰라.'
그가 공장에 안 나타난 것도 단순히 조심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때, 차량 디스플레이가 깜빡이며 루일의 얼굴이 나타났다.
루일:
"백 대장님, 발견이 하나 있어요."
루일:
"방금 드론 데이터 정리하다가,
연모시 내 Evol 데이터 중 아까랑 똑같은 수치를 가진 곳을 찾았어요."
루일:
"모두 6.143입니다."
루일:
"자료는 전송해뒀어요."
차량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서고,
백기는 태블릿으로 전송된 지도를 펼쳤다.
6.143이라는 수치를 띄운 두 개의 붉은 점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하나는 우리가 떠난 식품 공장,
다른 하나는 그 대각선 방향 3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루일:
"거긴…… 담배 공장이에요."
루일:
"연모시에서는 매일 수천 건의 Evol 파동이 일어나는데,
완전히 동일한 수치는 매우 드물어요."
루일:
"모니터링 시스템은 보통 10 이하 수치는 자동 무시하는데……"
백기:
"……누군가 그걸 노린 거군."
루일:
"네. 그래서 두 공장의 반년간 기록을 비교했는데,
파동 발생 시간과 수치가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백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백기:
"……잘했어, 루일."
그는 곧장 엑셀러레이터를 밟으며 귀에 이어폰을 눌렀다.
백기:
"지금부터 담배 공장 3D 구조도,
1년간 인원 이동 내역, 주변 상황까지 전부 조사해."
백기:
"최적 경로도 분석해. 30분 안에 도착한다."
창밖 풍경이 순식간에 뒷걸음쳤다.
이윽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허름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기는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내가 뭐라 말하려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백기:
"걱정 마. 금방 돌아올게."
백기:
"여기서 기다려."
긴 기다림 끝에, 낯선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백기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차 안 조명이 그의 눈동자에 빛을 띠웠다.
백기:
"찾았다."
35-10 예상 중량
백기:
"들키지 않게 계속 식품 공장 쪽 추적해. 일부러 눈에 띄게 약한 구멍도 남겨두고."
백기:
"아선, 너는 두 명 데리고 담배 공장으로 가. 조심해서 움직여."
백기는 특파서로 돌아오자마자 쉴 틈 없이 임무를 지시했다.
나와 백기 모두 숨 돌릴 새도 없이, 새벽은 약속이나 한 듯 찾아왔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고진:
"연모시 내 36개 정수장 수질 보고서 결과 나왔어.
예상대로, 전부 바이러스 검출됐어."
고진:
"이 바이러스는 인공 합성 바이러스로 보이는데, 자세한 연구 결과는 내일쯤 나와."
백기:
"노송 시켜서 이웃 도시로 가게 해. 구체적인 내용은 니가 설명하고, 눈치껏 움직이게 해."
아선:
"보고합니다. 담배 공장 관련 상황인데, 어떤 '투영'형 Evolver 능력을 사용한 흔적이 있어요."
아선:
"그 사람 능력은 특정 상태를 다른 장소에 '그대로 투영'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 BS 소속입니다. 현재 위치 추적 중입니다."
백기:
"계속 추적해. 성급하게 굴지 말고."
루일:
"백 대장님, 에너지 파동 구역이 연모시 외곽까지 퍼졌습니다.
몇 시간 내로 서쪽 구역에 도달할 예정입니다."
루일:
"예상 영향 인구, 6,302명입니다."
백기:
"미리 준비해뒀던 공고 바로 내보내.
TV 방송국하고도 협조해서 최대한 퍼뜨리게 해."
루일:
"진행 중입니다. 15분 후 아침 뉴스부터 송출될 예정입니다."
특파서 내부는 바쁘면서도 질서정연했다.
모두 무거운 표정이었지만, 그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지휘실 한 구석에 서서, 굳은 결심을 품은 특수 요원들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들의 뒷모습을 경건히 바라보며.
잠시 후, 대형 스크린에 아침 뉴스 화면이 송출됐다.
아나운서:
"시민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특파서는 연모시 내 발생할 공간 이상 현상에 대해 사전 경고를 발령합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침착하게 대응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나운서:
"이상 현상은, 현재 공간에 '겹쳐 보이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겹쳐진 화면이 보이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아나운서:
"겹침 현상은 몇 분 안에 사라지며, 인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아나운서:
"멀리서 겹쳐진 공간을 발견한 경우, 절대 다가가지 말고 즉시 멀리 피하세요."
아나운서:
"만약 이상 구역에 잘못 들어가더라도,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으세요.
특파서가 바로 출동할 것입니다."
뉴스 송출과 함께, 명령을 받은 요원들은 차례차례 현장을 향해 움직였다.
지휘실 중앙, 백기는 여전히 모든 명령과 지시의 중심에 서 있었다.
뉴스가 퍼지자 동시에, 의심과 불만도 거세게 밀려들었다.
그럼에도 백기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지휘를 이어갔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단단한 눈빛을 지닌 채.
마치, 바람조차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백기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조용하고 단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큰 폭풍을 일으킬 준비를 하듯.
그리고, 그런 그와 내 시선이 우연히 스쳤다.
시끌벅적한 소리들 속, 깜빡이는 화면 불빛 아래서,
우리는 잠시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다.
그 짧은 몇 초 동안, 수많은 말하지 못한 감정이 오간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무수한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백기는 내 곁으로 걸어왔다.
내 시선을 따라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온갖 음모론과 불만들을 함께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백기:
"무슨 생각해?"
유연:
"……기계 상자, 혈액 바이러스.
그걸 만든 사람들이 몇 달, 어쩌면 몇 년을 준비했겠죠."
"조심스럽게 틈을 찾아내고, 절대적인 타이밍을 기다렸을 테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경찰이 완벽한 범죄를 단숨에 꿰뚫고 범인을 잡길 기대해요."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백기:
"……그래.
하지만 그게 바로 특파서가 짊어진 책임이다."
백기는 미소를 지었다. 그 차분한 미소 안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백기:
"우리는 시민들의 평안을 지키는 사람들이야.
모든 노력과 무장은, 결국 그 하나를 위한 거지."
그 기대의 무게는 엄청나지만, 등짐을 짊어진 순간부터 우리는 가시밭길을 걷기로 선택한 것이다.
유연:
"……만약, 해내지 못하면?"
백기:
"그런 일은 없어."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백기:
"우리는 반드시 해낼 거야.
반드시 모든 범죄자들을 잡을 거야."
백기:
"악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거야.
희생당한 이들에게 반드시 응답할 수 있도록."
백기:
"……항상 누군가는, 그들 앞에 서서 지킬 거라는 걸 믿게 해야 해."
백기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백기:
"공평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우린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아."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휴대폰 화면을 끄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연:
"……그럼, 내가 대신 화내도 돼요?"
백기:
"그래."
"난 네가 내 대신 화내주는 거 좋아."
"……근데, 너무 오래는 안 돼. 다섯 분만."
작은 침묵이 흐르고,
백기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백기:
"유연아.
오늘 밤 9시에, 모의실에서 보자."
"반년 전, 우리 유성 방사선 사건 해결했던 그곳이야."
나는 잠깐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 어제 약속했던 걸 떠올렸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그를 바라봤다.
유연:
"……알겠어요."
8시 55분.
나는 복도에 서서, 하얀 문을 바라봤다.
문을 지나자 머리 위로 푸른 빛이 번쩍이며,
차가운 기계음이 들려왔다.
기계음:
"설정 완료. 입장 허가."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바람소리만이 귀를 스쳤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끝에 아득히 빛나는 장소——익숙한 옥외 격투장이 보였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 아래, 백기가 힘껏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나는 링 아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묵직하게 내리치는 주먹 소리가 정적을 찢으며 퍼졌다.
침착함 속에 묻어나는 불안한 조급함이 은밀히 새어 나왔다.
그 무거운 압박은 항상 선배의 머리 위에 있었다.
마치 이미 다 타버린 벌판에 서 있는 것처럼,
백색의 불꽃은 여전히 땅을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불꽃 속에서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삼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서서,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
한 걸음 한 걸음 더 단단해지는 그의 발걸음을 바라보았다.
마치 마음속 깊이 억눌러온 감정을 거칠게 분출하듯,
조금도 자신에게 여지를 남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손에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그런 집념 하나.
천천히, 선배가 움직임을 멈췄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 내가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겠지.
나는 천천히 링 위로 올라가,
그의 손에 감긴 붕대를 하나하나 풀었다.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나를 받아들였다.
유연:
"이봐요, 붕대가 아주 엉망진창이잖아요."
나는 붕대를 들고 슬쩍 웃으며,
이번엔 내 손에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꽉 쥔 주먹을 만들어, 선배 눈앞에 쑥 내밀었다.
유연:
"백기, 나 NW랑 얘기할 거야."
백기:
"……얘기?"
유연:
"CORE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당신 말대로 NW는 믿을 수 없어.
하지만, 그들의 기술은 필요해."
"혈액 바이러스 해결을 위해서라도,
난 그들과 대화해야 해."
"그리고, 그들이 내놓는 결과를 보고, 다음을 판단할 거야."
백기:
"……약 연구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백기:
"만약 그들이 약 개발을 핑계로 또 CORE를 연구하려 든다면?"
선배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예리한 경계가 배어 있었다.
유연:
"나, 전에 NW에서 일주일 있었어."
내 말이 떨어지자, 선배의 얼굴 근육이 뚜렷이 경직됐다.
그의 눈빛은 차가운 서리처럼 가라앉았다.
하지만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았다.
유연:
"그때 이미 내 CORE 유전자 샘플은 가져갔을 거야."
"그래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어."
나는 힘을 주어 주먹을 더 꽉 쥐었다.
유연:
"그 대신, 바이러스 치료 방법을 먼저 요구할 거야."
백기:
"……만약 그들이 그 방법을 내놓는다면?"
유연:
"그럼 나도 CORE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겠지."
"NW만 속이는 건 아니야.
우리도 얼마든지 그 틈을 이용할 수 있어."
백기의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했다.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
내 주먹을 천천히 감쌌다.
백기:
"……그럼 내가 막으면?"
유연:
"당신은 막지 않을 거야."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유연: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아니까."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그리고 지금,
내가 왜 이 결정을 내리는지도."
백기는 한참 나를 바라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링 끝에 등을 기댔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그 아래 숨겨진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백기:
"……이 시간 동안, 계속 너를 생각했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을 못 찾겠더라."
"나는…… 너를 막을 자격이 없어."
"그래서, 네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모든 걸 끝내고 싶었어."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백기:
"……근데, 너무 어렵더라."
"……정말, 너무 어려워."
그 말은, 처음이었다.
선배가 그렇게 솔직하게 무너져 보여준 것은.
유연:
"……알아."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니까, 당신 옆에 있어주고 싶어."
링 위,
강한 조명은 무대 가장자리만 밝힐 뿐,
우리 주변은 여전히 짙은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백기:
"가능하다면,
너 대신 내가 다 짊어지고 싶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너무 조심스러웠다.
백기:
"……사실, 샤오위에가 했던 말도 전부 틀린 건 아니야."
"나 하나만 특별한 것도 아니고,
나만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려는 것도 아니야."
"……너도 마찬가지야."
"남을 위해, 스스로를 던질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 못하겠어."
"……네가, 그렇게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걸 그냥 보기만 하는 건."
그 고백은, 조용히 공간을 울렸다.
백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백기:
"……이기적이고, 유치한 생각인 거 알아."
"그래도…… 난 못 하겠어."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차가운 손을 덥석 감쌌다.
처음에는 미약하게 움찔였지만,
곧 그 손이 내 손을 덮었다.
백기:
"……너, 매번 나 떠나보낼 때도 이랬구나."
유연:
"응."
"가고 싶게 해주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보내야 하니까."
"이해하면서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
나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손을 끼워 넣었다.
서로의 온기가 닿은 순간,
백기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백기:
"……나는, 그렇게 걱정되게 만드는 놈이었구나."
유연:
"맞아요. 사랑하는 우리 백 경관님."
백기:
"유연,
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하구나."
"……나는 널 믿어."
"하지만…… 정말 많이 걱정돼."
"……그래도,
널 믿어."
그 서툰 고백을 나는 조용히 웃으며 받아들였다.
유연:
"나도 그래."
"믿고, 걱정하고, 또 믿고."
"그게 우리가 가진 공생체야."
믿음과 걱정은,
항상 함께였다.
유연:
"백기,
당신은…… 모든 걸 짊어지는 걸 후회해?"
나는 살짝 웃으며 물었다.
백기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나는 그런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유연:
"그러니까, 내가 옆에 있을게."
"이 험한 길, 나 혼자 두지 마."
"함께 걸어가자."
백기는 말없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로를 꽉 끌어안으며,
우리는 이 고된 길을, 함께 걷기로 했다.
백기:
"……옆에 있어줘."
아침 햇살이 천천히 도시를 깨우기 시작했다.
차들이 오가는 소리와 사람들의 분주한 기운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백기는 휴대폰을 열어 어떤 번호를 찾아냈다.
나는 살짝 숨을 고른 뒤, 그 번호를 가볍게 눌렀다.
깊게 숨을 들이쉰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조용한 소음과 함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유연:
"……샤오 장관, 저예요."
짧은 순간, 상대방은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곧 짜증 섞인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샤오위에(萧越):
"유연 양. 난 또 네가 영영 다른 사람 뒤에 숨어 쥐 죽은 듯 살 줄 알았는데?"
유연: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갈게요."
"혈액 바이러스 문제 해결하면,
나, 다시 돌아갈게요."
샤오위에:
"허, 일은 별로 안 했으면서 요구는 많네."
"애초에 혈액 바이러스 해결은 원래부터 우리가 약속했던 거였어.
근데 네가 무단으로 이탈해서 일이 꼬였잖아."
"그 책임은 누가 질 건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손끝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백기도 곁에서 긴장한 듯 몸을 굳혔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게 받아쳤다.
유연:
"NW에서 일주일이나 있었어요. 남긴 데이터도 적지 않을 텐데요."
"아니면, NW 기술력이 생각보다 별로라서 아직도 처리 못 한 건가요?"
"그렇다면…… 다른 의료 기관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더 좋은 조건에, 제 건강까지 걱정해주는 데가 있을지도 모르죠."
샤오위에:
"유연 양, 평생 고양이 쫓는 쥐처럼 숨바꼭질할 생각인가?"
유연:
"괜찮아요. 시간 낭비하는 건 제 쪽이 아니니까."
살짝 웃음소리가 흘렀다.
샤오위에는 화를 누르려 애쓰는 듯했지만, 목소리 끝에 이를 갈듯한 느낌이 묻어났다.
나는 백기를 향해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유연:
"봐요, 저 잘했죠? 완전 빡치게 만들었어!"
백기는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고는,
살짝 입 모양으로 답했다.
백기:
"다음엔 내가 더 화나게 해줄게."
샤오위에:
"……유연 양, 협력이란 건 어느 쪽에도 진심이 필요해."
"NW는 그냥 공짜로 일해주지 않아."
그는 다시 현실적인 계산을 꺼내 들었다.
샤오위에:
"그러니까 서로 조건을 맞추자고."
유연:
"……예를 들면?"
샤오위에:
"우린 반달 안에 혈액 바이러스 특효약을 개발할 거야."
"대신, 네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어야 해."
"간단하게, 위치추적 칩 같은 걸 심는 거지. 서로 안심하자고."
유연:
"……좋아요."
심장이 요동쳤지만, 나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이 반달 동안 시간을 벌어야 했다.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니까.
유연:
"하지만 NW 내부에서 당신들이 설치하는 칩은 거절할게요."
"장소는 연모시 중심가에 있는 유리 스카이워크에서 하죠."
"사방이 유리고, 사람도 많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여론이 들끓을 테니까."
샤오위에:
"좋아. 그럼 오늘 밤 9시 30분."
유연:
"……그리고, 나 당신은 만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슬쩍 백기를 바라봤다.
서로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그 눈빛 속에서,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유연:
"……전에 당신이 말했잖아요.
백기 선배도 NW 사람이었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을 보내."
샤오위에:
"좋아."
"아마 지금 네 옆에 있겠지?"
나는 눈을 껌뻑였다.
백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다.
샤오위에:
"그럼 백기를 NW 본부로 보내. 칩은 거기서 받아가."
"……이번 거래, 서로 윈윈하자고."
밤이 깊어지면서 거리마다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혔다.
나는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스카이워크 아래에 도착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들 사이로,
투명한 유리 다리가 어둠 위에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나는 허리에 찬 마취총과 단검을 확인한 뒤,
숨을 크게 들이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스카이워크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싸늘한 긴장감이 공기 속에 스며 있었다.
발아래 수백 미터 아래로 이어진 차량의 불빛들이
붉고 초록빛 점들처럼 반짝였다.
——다음엔, 이런 높은 데는 고르지 말자.
아니, 아예 이런 일 자체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 순간, 쾅—하고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퍼졌다.
???
"유연 양, 좋은 저녁이네요."
나는 소리 난 쪽을 향해 돌아봤다.
벽에 설치된 스피커와, 까맣게 숨은 CCTV 하나.
유연:
"샤오 장관, 누가 보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
이렇게 나타나는 것도 무례한 거 아세요?"
샤오위에:
"하하, 난 나타난 적 없는데요?"
……진짜, 끈질기다.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노려보며
주머니 속 마취총을 조심스레 쥐었다.
유연:
"서로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끝내죠."
샤오위에:
"걱정 마요, 곧 도착할 테니까."
그때, 유리 다리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살벌한 기운이 검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서늘한 조명 아래,
나는 점점 다가오는 백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무표정했다.
그 깊고 서늘한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살짝 몸을 뒤로 뺐다.
유연:
"백기, 괜찮아?"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백기:
"걱정 마.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어."
혼자서?
그 말에 의아해하며 바라보았다.
불빛 아래 백기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웠다.
유연:
"……내가 도와줄 건 없어?"
백기:
"……나를 믿어."
"내가, 널 지킬게."
그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금속 상자를 꺼내 내게 다가왔다.
유연:
"그 안에…… 정말 다른 건 없는 거지?"
샤오위에:
"백 대장이 직접 확인했잖아?
그게 바로 네가 원하는 거야."
나는 백기가 다가오는 모습을 주시했다.
유연:
"……샤오위에, 정말 백기한테 아무 짓도 안 한 거지?"
백기:
"……쟤는 그런 짓, 못해."
유연:
"……정말?"
나는 순식간에 주머니에서 마취총을 꺼내,
백기의 이마에 겨눴다.
유연:
"……하지만 난 못 믿겠어."
그 순간——
유리 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정확한 저격탄이 내 손에 든 마취총을 튕겨냈다.
손목이 저릿할 만큼 강한 충격이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내 손목 위에 얇은 레이저 포인터가 스쳤다.
백기:
"!"
거의 동시에, 백기가 내 허리를 움켜쥐어,
나를 쓰러뜨리듯 유리 바닥에 눕혔다.
그는 내 귀를 감싸 쥐며,
슬쩍 틀어진 자세로 반사적으로 총을 쐈다.
따뜻하고 단단한 가슴에 포옥 안긴 채,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스피커 너머로 샤오위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오위에:
"……유연 양, 내 인내심은 한계가 있어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백기를 바라봤다.
투명한 호박색 눈동자 안에 비치는 나.
그리고——
나는 곧바로 숨겨둔 단검을 꺼내,
백기의 목덜미에 겨눴다.
유연: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죠?"
백기:
"……네 신중함, 맞는 거야."
"어떤 방법이든, 어떤 질문이든,
……다 받아들일게."
유연:
"……그럼."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수없이 많은 질문이 마음속을 스쳐갔다.
달빛 아래, 백기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마치 내가 지금껏 지켜봐 온 모든 순간들을 담은 듯.
유연:
"……선배,
선배 목숨, 나한테 맡길 수 있어요?"
휘몰아치던 밤바람조차, 순간 멈춘 것 같았다.
백기는 천천히,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쥐고 있던 총을 천천히 내려, 조용히 바닥에 놓았다.
달빛에 비친 그의 호박빛 눈동자는
희미하게 빛나며, 슬픈 기색을 담고 있었다.
백기:
"……원한다면,
지금 바로 가져가."
순간, 심장이 움찔했다.
나는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유연:
"……지금?"
스카이워크 아래로, 화려한 도시 불빛이 펼쳐져 있었다.
그 불빛들이 무언의 백기를 부드럽고도 찬란하게 비추었다.
——그것이, 내게 답을 줬다.
유연:
"……알겠어요."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슬쩍 카메라를 힐끔 본 뒤——
순식간에, 손을 들어
단숨에 내리꽂았다.
35-15 바람의 형상
내 발밑에서 아주 미약한 신음이 들려왔다.
‘백기’의 형체는 점점 투명해지더니,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유연:
"……샤오 장관, 이건 또 무슨 뜻이죠?"
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지만, 손은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방금까지의 ‘백기’는 외모도, 목소리도 완벽하게 똑같았다.
처음에는 백기가 정말 소유당했나 싶었지만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그 ‘사람’은 절대 백기가 아니다.
어쩌면 진짜 백기는,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나에게 맡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그에겐, 나보다도 더 중요한 것들이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 도시가, 이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필요로 하는지.
그는 거창한 영웅은 아니었다. 위기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멍청할 정도로 묵묵히,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사람이었다.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반드시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존재.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람을 따라 달리고, 바람이 향하는 곳을 좇아갔다.
그렇게 모인 힘이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그게 내가 아는 백기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진짜 영웅.
샤오위에:
"유연 양, 그렇게 나오면 재미없잖아요."
스르륵, 조용한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비웃듯 일어나, 통로 양쪽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바라봤다.
샤오위에의 목적은 뻔했다.
어떤 수단으로든, 백기와 똑같은 존재를 만들어내고, 약속대로 그걸 ‘보낸’ 척 하려는 것.
아마 아까 그 금속 상자 안에는 나를 통제할 장치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나를 통제하는 동시에 나와 백기 사이에 불신을 심을 수 있다.
만약 내가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면, 백기가 나를 배신했다고 믿게 만들 수 있었겠지.
그 왜곡된 그림자는 또 다시 백기의 모습을 흉내내며 다가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혐오감에 몸서리를 쳤다.
양쪽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턱을 살짝 들고, 냉정하게 고개를 들었다.
유연:
"샤오위에, 우리 내기할까요?"
고요한 달빛 아래,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가슴속은 의외로 조용했다.
유연:
"당신이 무슨 짓을 했든——
백기는 반드시 올 거예요."
유연:
"내가 아직 마음을 바꾸기 전에——
당신 사람들, 움직이지 마요."
유연:
"……그래야 우리 협력도 계속될 수 있겠죠?"
내 말이 끝나자,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금속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강한 돌풍이 몰아쳤다.
날카로운 바람결이 먼지와 잔해를 몰아 양옆을 쓸어버렸고,
중심에 선 나를 바람이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땀에 젖은 누군가의 품속으로 나는 안겨들었다.
백기:
"샤오위에, 아무리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 해도, 때와 장소는 가려야지."
차갑고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공기는 얼어붙었다.
나는 온몸을 휘감은 익숙한 체온을 껴안았다.
샤오위:
"……그냥, 작은 테스트였을 뿐입니다."
샤오위에:
"우리가 필요했거든요.당신이 진짜 유연 양인지 확인할."
나는 이 악물고, 카메라를 향해 매섭게 노려봤다. 그리고 백기의 귀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유연:
"……백기, 괜찮아?"
백기:
"샤오위에가 칩 테스트할 때 손을 썼어."
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허리를 감싼 손길에는 분명하게 긴장이 배어 있었다.
백기:
"……미안, 늦었어."
유연:
"……괜찮아요. 선배가 반드시 온다는 걸 알았으니까."
나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조심스레 몸을 뗐다. 그리고 조용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유연:
"검사한 칩, 가져왔죠?"
백기는 분노에 찬 듯 눈썹을 찌푸리고는 다소 불만스럽게 나를 노려보았다.
백기:
"진짜 괜찮겠어?"
유연:
"물론이죠. 우리 샤오 장관은 비열하지만, 전 적어도 협력할 성의는 지킬 거예요."
백기:
"……비열한 놈이랑 양심 따지는 거야?"
유연:
"그래도 '장관'쯤 되잖아요? 이 많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설마 말 바꿀까?"
유연:
"……아니면 NW 사람들은 전부 저런 비열한 상관 밑에 붙어 다니고 싶은 거야?"
NW 대원:
"……너!"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신경 쓰지 않고, 담담히 백기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백기는 한동안 나를 조용히 바라보다, 결국 금속 상자에서 은은히 빛나는 작은 칩 하나를 꺼냈다.
백기:
"……이 손 말고."
백기는 내 손목에 걸려 있던 은행나무 팔찌를 가볍게 어루만지고는, 고개를 숙여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표정은 눈에 띄게 꺼려하고 있었고, 손끝도 어색할 만큼 굳어 있었다.
그는 마치 마지막까지 망설이는 듯, 조심스럽게 그 조그마한 칩을 내 손목에 붙였다.
칩은 닿자마자 스르르 사라졌다. 역시, NW의 고급 기술이겠지.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차갑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유연:
"샤오 장관, 방금 일은 없었던 걸로 해 드릴게요.
……당신에게 개인적인 빚 하나, 진 거니까요."
유연:
"하지만, 약속은 지켜야 할 겁니다.
반 년——그 시간만 줄게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카메라 너머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유연:
"부디 올바른 결정을 내려요.
당신 스스로 그 소중한 NW 계획을 망치지 않으려면."
내 마지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내 손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어둠 속을 향해 단호히 고개를 들었다.
백기:
"비켜."
창밖 풍경은 어느새 긴 빛줄기로 변해 있었다.
나는 잠시 넋을 잃고 그 풍경을 바라봤다.
모든 일이 결국 무사히 끝났다는 것.
그러나, 유리 다리 위 그 위태로웠던 순간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걸까.
유연:
"……선배."
그는 가볍게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방향지시등을 켠 그는 조용히 차를 돌렸다.
나는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유연:
"……만약, 내가 선배 목숨을 원한다면 정말 줄 수 있어요?"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표정은 흐릿해 보였다.
백기:
"……줄 수 있어."
간단한 두 글자(我敢).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
내 심장이 조심스레, 작게 떨렸다.
백기:
"……하지만 지금은 조금 기다려야 해."
백기: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으니까."
그는 가볍게 웃었다.
아주 담담하게, 앞으로만 시선을 고정한 채.
백기:
"하지만 약속할게——
내 목숨을 네게 주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맡길게."
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정말이지, 이 사람은……바보 같다.
그리고 그 바보 같음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유연:
"선배는 정말 바보야……내가 선배 목숨을 가져서 뭐 하게요."
유연:
"아니, 만약 네 목숨이 내 거라면——그럼 이제 몰래 다치는 것도 금지에요."
백기: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줄게."
유연:
"좋아. 그럼 잘 간수해요. 안 그러면 반품할 거야."
백기:
"……그럴 기회, 안 줄 거야."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차는 서서히 멈춰섰다.
고요한 차 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유연:
"……백기. 곧 움직일 거죠?"
백기:
"……응. 아선이 찾아낸 정보로,
기계 상자 사건의 핵심 인물 하나를 거의 확정했어."
"이 사건의 주모자일 가능성이 커. 오늘 밤 작전을 준비할 거야."
유연:
"……사실, 나도 가야 할 곳이 있어요."
CORE의 비밀,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그 사람에게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백기:
"……내가 가능한 한 시간을 끌어서 NW 쪽 연구가 진행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버텨줄게."
유연:
"……나도 곧, CORE의 진실을 알게 될지도 몰라요."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마음은 이미 통하고 있었다.
말없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유연:
"……선배, 저 여기까지만 태워줘요. 그 다음은……제가 스스로 해낼게요."
백기는 핸들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잠시 머뭇거린 그는, 조심스럽게 차 문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기:
"……유연아, 힘내,"
유연:
"……선배도 힘내요."
나는 조심스럽게 안전벨트를 풀고,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내려섰다.
깜빡이는 붉은 신호등 너머로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기:
"……유연아."
나는 뒤돌아섰다. 차창 너머로 백기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가로등 빛이 그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맑고 투명하게 빛났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우리는 동시에, 천천히 웃었다.
초록 불이 켜졌다.
깊은 밤. 나는 빽빽한 나뭇잎 그림자 속에 숨어, 높이 솟은 빌딩을 올려다봤다.
세계가 거꾸로 뒤집히기 전—— Black Cabins 안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잃어버린 걸 찾아."
"그게 네 소원을 이룰 열쇠가 될 거야."
그때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BS 본부로 들어갔다.
새벽. 아무도 모르는 사이, 중앙병원 모퉁이에서 차가운 은빛 섬광이 번쩍였다.
헬리오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둠 속을 누비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를 감지한 듯 날카롭게 단검을 뽑아 들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맞섰다.
날 선 바람의 칼날이 어둠을 가르며, 주변의 풀숲을 칼로 베어낸 듯 가르는 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헬리오스는 미끄러지는 은빛 실처럼, 매끄럽게 모든 공격을 피했다.
다음 순간, 서늘한 빛을 띤 칼날이 번뜩이며, 칠흑 같은 총구에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휙——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달빛이 엷은 구름을 뚫고 두 사람 사이를 비췄다.
서로의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Helios:
"뭐하러 온 거야?"
백기:
"넌 듣기만 하면 돼."
잠시 후, 헬리오스는 무심히 검은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회의실 끝에 놓인 의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헬리오스:
"그들은 곧 도착할 거야."
긴 의자가 천천히 돌아가며, 어둑한 조명 속에 이택언의 표정이 드러났다.
이택언:
"……그럼, 계획대로 시작하지."
짙고 무거운 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은 어둠 속에 거의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BS 본부 정문 앞에는, 특파서 대원들이 빼곡하게 포진해 있었다.
차갑고 맑은 달빛이, 그들 전신의 방호복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하얀 빛을 뿜었다.
그 모습은 마치 촘촘히 짜인 정의의 그물 같았다.
특파팀 대원:
"보고합니다! 1조, 이미 담배 공장 전역 봉쇄 완료했습니다!"
특파팀 대원:
"여기는 2조입니다!
담배 공장 관련 인원, 전원 체포하여 차량에 이송 완료했습니다!"
백기는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보고를 묵묵히 들었다.
눈빛이 살짝 가라앉는다.
울부짖는 밤바람 속, 백기는 말없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백기:
"토벌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