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내용: 2025 무장해제 ur
(대문일러)
1장
엷은 구름 안개가 산자락 사이를 가득 메우며 희고 맑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 한 대문을 지나자, 평탄한 녹색 풍경이 시야에 넓게 펼쳐졌고 오토바이는 곧 속도를 늦췄다.
작은 개울이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고, 멀리서 낮은 건물들이 어우러져 자리 잡은 채 광활한 땅 위에서 여유롭고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선 블랙이에서 뛰어내려 신기한 듯이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신기한듯이 한참을 둘러본 뒤, 나는 블랙이를 세워두고 있는 남자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백기
피곤해?
내 시선을 눈치챈 듯 백기는 자연스럽게 나를 품에 안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코와 뺨을 찔렀다.
유연
그냥 좀 현실감이 없어서요.
우리가 여기 온 게 정말 임무때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올해 설을 맞아 백기는 일찌감치 휴가에 들어갔다.
어떤 임무도 없었고, 해외 출국도 없었으며, 갑작스러운 특수 작전이나 귀찮은 접대도 없었다.
우리가 함께한 이 몇 년 동안 이런 일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기쁘면서도 놀라운 마음 한편으로, 어딘가 여전히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내 질문에 담긴 불안이 전해졌는지, 그는 나를 더 꼭 안으며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백기
류 형에게 작은 도움만 주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전부 우리 거야.
유연
좋아요! 올해 설엔 선배도 드디어 푹 쉴 수 있겠네요~
그를 몇 번이고 눈에 담은 뒤, 나는 그의 몸에 걸쳐진 정장 재킷을 다시 한 번 가지런히 정리해 주었다. 말끔하게 정돈된 옷깃을 보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유연
그런데 이렇게 차려입은 걸 보니 류 부장님께서 부탁한 일이 꽤 만만치 않나 보네요.
그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 하더니 안경 케이스를 하나 꺼냈다.
백기
씌워줘.
유연
또 무슨 새로운 위장 작전이라도 하는 거예요?
백기
그냥 이 옷과 같은 이유라고 보면 돼.
백기는 몸을 살짝 숙인 채, 얌전히 내가 금테 안경을 씌워 주도록 했다.
렌즈에 은은한 빛이 반사되며 그 날카로운 눈동자를 가리자, 순식간에 세련되면서도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가 더해졌다.
그는 느긋하게 목을 돌리더니 내 손을 잡고 로비 쪽으로 걸어갔다——
백기
이건 봉인이야. 괜히 사람 패고 싶어지는 걸 막으려고.
유연
……
나른하게 속삭이듯 들려온 목소리엔 은근한 기대감까지 묻어 있어,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백 장관님이 또 '겸사겸사' 누군가를 처리하러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은 계속 설렜다.
그는 긴장한 기색도 별로 없었고,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백기와 내가 함께 보내는, 이 좀처럼 없는 평온한 설날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유연
이따가 내가 어떻게 맞춰주면 돼요?
백기
우린 놀러온 거야.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없어. 넌 하고 싶은 대로 해.
우리가 다가가자 직원이 공손히 다가왔다.
백기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무언가 말하자, 그는 잠시 멈칫한 듯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별장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나는 궁금해서 그의 귀에 바싹 다가갔다.
유연
뭐라고 했어요?
백기
안에 누가 있는지 다 안다고 했지. 괜히 묻지 말고 길이나 안내하라고.
유연
그게 다예요?
백기
중요한 건 기세야.
그와 동시에 방종한 웃음소리와 떠들썩한 소리가 점점 더 뚜렷해졌다.
짙은 술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우며 저속한 말들까지 함께 흘러왔다.
??
*, 저 꼴사납게 취한 꼴 좀 봐라, 병째로 다 들이켜게 해!
병째로 원샷은 재미없잖아, 사람도 많은데 한 잔씩 돌아가면서 먹여야지?
병풍 하나를 지나자 더 넓은 홀에서 젋은 남녀들이 파티장처럼 풀어져 떠들며 놀아대고 있었다.
선두에 선 청년은 술기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흥분한 채 사람들을 몰아 한 사람에게 계속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야유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술기운에 눅진하고 역한 냄새가 사방에 퍼져 있었다.
청년
하하하, 다음은 누구야, 쟈오밍 , 너지……응……?
그는 우리를 눈치챈 듯, 흐느적거리는 시선을 몇 번이나 흔들며 고개를 앞으로 내밀더니 마지막엔 느끼한 웃음을 비집고 지어 보였다.
청년
어이쿠, 이거 백기 형님 아니십니까?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오셨대요, 형수님까지 모시고?
이러면 내가 손님 대접도 못하는 놈처럼 보이잖아. 너희들은 얼른 꺼지고, 우리 백기 형님 자리나 만들어 드려.
그는 말과 동시에 다리를 들어 옆 사람들을 거칠게 걷어찼고, 그 바람에 주변에선 천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백기
꽤 시끄럽네?
술도 잘 마시고.
백기는 건들거리듯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긴 다리를 들어 아무 거리낌 없이 나를 끌어당겨 방금 비워진 소파에 비스듬히 함께 앉았다.
번들거리는 구두 끝이 가볍게 흔들리고, 팔을 등받이에 걸친 그의 자세가 말없이 공간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청년
백기 형님, 이거 맛 좀 보십쇼.
청년
이게 연모시에서 딱 한 병뿐이라고 장담합니다. 오늘 왜 이 물건이 들어왔나 했더니, 우리가 다 백기 형 덕을 좀 본 거네요.
그의 아첨에도 백기는 그저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나른하게 술잔을 받아 들었다.
술빛이 호박빛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그는 가볍게 한 모금만 머금고는, 다음 순간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쏟아버렸다.
백기
맛이 없네.
2장
청년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그는 누군가 쓰다 만 듯한 술잔 하나를 집어 들었고, 확 퍼져 나오는 술기운이 코를 찌를 만큼 독했다.
그는 보기 흉한 웃음을 지은 채 비틀거리며 그 술잔을 내게 내밀었다.
청년
형수님, 이거 술 좀 판단해주세요.
하지만 그가 손을 뻗는 순간, 바람이 거세게 일더니 다음 순간에는 이미 한 실루엣이 그대로 멀리 있는 수영장으로 날아가 곤두박질쳤다.
거대한 물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었고 그 여파가 공간 전체를 덮쳤다.
백기
가서 건져 올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백기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나른하게 한 마디 던졌다.
……직접 때리지만 않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그는 그 방탕한 풍경 속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그는 허공에 굳어 있던 웨이터의 메뉴판을 받아, 정작 자신은 보지도 않은 채 내 앞에 펼쳐 보였다.
백기
마시고 싶은 거 있어?
그가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태도를 보자, 나는 눈을 깜빡이고 더는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복잡하면서도 고급진 술 이름들이 빼곡히 나열돼 있었고, 한눈에 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몇 페이지를 넘겼는데도 메뉴의 끝이 보이지 않자, 나는 다시 백기를 바라보았다.
유연
뭐 마시고 싶어요?
백기
마음대로 골라, 난 네 걸 마실게.
유연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 대담한 행동이 오히려 더 묘하고 친밀한 공기를 만들었다.
주변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커다란 손 하나가 계속 내 뒤를 감싸듯 얹혀 있었고 손끝이 이따금 나를 쓰다듬었다.
한 번, 또 한번. 달래는 듯하면서도 부추기는 손길.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강렬한 눈동자 속에서 모든 무언의 대답을 읽어냈다.
유연
그럼 기분 내키는 대로 고를게요.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건져 올려졌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얼굴엔 아직 공포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백기는 그를 무심하게 흘끗 쳐다보더니 손에 낀 반지를 빙글 돌렸다.
백기
판자오밍, 술은 깼나?
판자오
깨,깼습니다.
청년이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이자 백기는 가볍게 웃음을 띠고 수건을 툭 던졌다.
백기
그럼 계속해, 내 앞에서 벌 서 있지 말고.
술판은 돌아가야겠지만, 술은 천천히 마셔야지.
다 놀러 온 거잖아. 그렇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물론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모두 여전히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술을 계속 마셔야 하는 건지, 아니면 백기 앞에서 그대로 '벌'을 서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였다.
백기
루퉁, 판을 벌였으면 끝은 봐야지.
'지명'당한 사람은 어색하게 두어 번 웃더니, 잠깐의 침묵 뒤 곧바로 눈치를 보며 비굴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루퉁
뭐하고 서 있어! 백기 형이 우리랑 같이 놀자잖아!
형님, 저 녀석들이 세상 물정을 몰라서요. 형님이 오셨다고 너무 설쳐대니 제가 다 민망하네요.
형님이 오늘 뭐 하실지, 어떻게 놀지 동생들에게 말씀만 주세요. 다 준비하겠습니다.
백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원한다면 부모님들 찾아가서 류종민 쪽에 한마디 해도 되잖아. 내가 너희들 흥을 망쳤다고.
백기의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말 한마디로 그는 그 자리에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고, 그들은 떠날 수도, 그렇다고 놀 수도 없는 처지가 됐다.
결국 누군가가 체면을 차리며 침묵을 깼다. 웃는 척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만 자세가 지나치게 반듯해 오히려 얌전히 주스를 마시는 '어린아이'같았다.
이윽고 '아이들'은 한 줄로 나란히 앉아 이따금 눈치를 주고받으며 말하는 척만 했다.
나는 눈앞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방금 백기의 말을 떠올려 이번에 그가 말한 '작은 도움'의 정체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류 부장님을 대신해 몇몇 자식들 앞에서는 악역을 맡고, 그 뒤에 있는 자들에게 경고를 던지는 역할이었다.
확실히 백기가 늘 잘해 오던 일이었다.
젊은 남녀들 위를 훑던 시선은 이내 말없이 백기에게로 돌아왔다.
나이는 비슷했지만 눈앞의 그는 오래전부터 훨씬 더 힘든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다.
그가 맞은 편 사람들을 건성으로 짚어 가며 말을 잇는 동안, 나는 그 자리에 끼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장갑에 가려진 굳은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서빙 직원
아가씨, 주문하신 술입니다.
호박색 액체가 잔 속에서 얼음과 함께 부드러운 빛을 반사했다.
향은 살짝 코를 찔렀지만 입에 머금자 의외로 매끄러웠고 알코올 특유의 매운 기운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은은한 단맛이 남았다.
복잡한 풍미가 입에 퍼졌다. 꽃향기인지 과일향기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지만, 가볍고도 깊은 맛에 나도 모르게 한 모금 더 마시게 됐다.
백기
그렇게 맛있어?
유연
다른 사람과 얘기하면서도 내가 술을 더 마셨다는 걸 알아챘어요?
백기
다른 사람과 말하고 있었지만……난 너만 보고 있었어.
그의 숨결이 귓가에 살며시 스쳤다. 낮은 목소리의 말과 웃음이 섞이며 부드럽게 다가왔다.
백기
오히려 너는 내 손을 가지고 놀고, 내 술을 마시면서도, 나를 보지도 않았잖아.
유연
이건 내 술이니까 이제 더 이상 안 줄 거예요.
그의 말에 귀가 간질거려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돌렸다.
??
백기 형님, 형수님, 제가 대표로 한 잔 올리겠습니다.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까 떠들던 무리 중 하나였다.
백기
네가 뭘 대표한다고?
백기가 게으르게 한마디 내뱉었지만, 상대는 전혀 말투의 냉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제멋대로 친한 척 하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장위
백기 형님, 여기 이렇게 많은 친구들이 있잖아요. 다들 제가 어릴 때 형님이랑 같은 관사 단지(大院)에서 살았다는 걸 다들 알고 있어요.
그리고 보세요, 지금 형님이 얼마나 위풍당당하신지! 특파팀 지휘관이시잖아요!
형님은 저 장위의 롤모델이자, 제가 가진 유일한 특수 경찰 인맥입니다! 아 그런데 말이죠……
그는 갑자기 무게를 잡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장웨이
밖에서 이런 소문이 도는 건 알고 계시죠. "백기는 류종민의 개" 라는 말이요.
퉤, 그런 소리 퍼뜨리는 놈들은 다 잡것들이에요.
백기 형님 정도면 세상 돌아가는 거 잘 아시잖아요. 류종민 그 늙은이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라는 걸 설마 못 알아보실 리가 있겠어요?
여기저기 '숲'을 옮겨 다니는 그런 늙은이가 지금 같은 판에서 몇 년이나 더 버티겠습니까.
제 생각엔 형님도 그냥 상황에 맞춰 연기하신 것뿐인데, 그걸 두고 남들이 괜히 형님 걱정이나 하고 있으니 참**쓸데없는 오지랖이죠.
그래도 형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렇죠?
백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둡고 흐릿한 빛이 담담한 얼굴 위에 내려앉아, 입가에 걸린 경멸 어린 미소만 희미하게 비칠 뿐이었다.
술빛이 그 안에 스며들자, 그 미소는 상대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고, 그는 손짓까지 섞어 가며 한층 더 거리낌없이 떠들어댔다.
그 날카로운 눈동자는 안경 렌즈 뒤에 가려져 있어 당장은 어떤 속내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가 오만하게 끓어오르며 요동치는 것을 어렴풋이 보았다.
그의 손끝이 술잔 가장자리에 걸리자 고요하던 술 표면에 조용히 잔물결이 일렁였다.
나는 손에 들린 호박빛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유연
선배.
백기의 눈동자는 내가 부르자마자 즉각 나를 향했고, 내가 술을 한 모금 머금은 채 입을 맞추자 서서히 커졌다.
향기로운 술이 그의 입안으로 전해지자, 그 순간 주변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
백기와 나의 시선은 마치 서로 이어진 술처럼 맞닿아 있었다. 잠시 후, 입술은 떨어졌지만 시선은 오히려 더 단단히 얽혀 좀처럼 떼어낼 수 없었다.
그의 깊은 응시 속에서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유연
나랑 놀아 준다더니 왜 눈은 자꾸 다른 데만 가?
나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며,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유연
난 저 사람들 싫어. 말도 많고, 시끄러워. 전부 다 꺼지라고 해.
사실 나도 백기가 여기 와서 목적을 달성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면, 나도 다른 얼굴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남자의 얼굴은 순간 굳었지만, 백기는 조용히 웃으며 나를 한 걸음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끝없는 암류가 마치 고요한 파도처럼, 그 깊고 깊은 눈동자 속에서 끝없이 소리치며 휘몰아쳤다.
백기
이왕 다 들은 거, 그대로 하지.
그의 입술은 나와 같은 술 향기와 온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내뱉는 말은 소름끼칠 만큼 차가웠다.
동시에 술이 깰 만큼 충분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백기를 향해 돌아섰고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백기
맞다.
모두가 허둥지둥 자리를 뜨기 전에 백기의 목소리가 다시 느릿하게 울려 퍼졌다.
백기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오늘 일어난 일 꼭 전해.
내가 나타난 순간부터. 한 마디, 한 마디 빠짐없이.
3장
세상이 마침내 고요해졌다.
공기에는 여전히 진한 술냄새가 감돌고 있었고, 내가 입을 열려던 순간, 곧바로 온몸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졌다.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감싸 안은 채, 나는 그에게 안겨 복도를 지나 더 은밀한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향기가 스쳐 오며 우리 몸에 배인 술 냄새를 살며시 씻어냈다.
그는 나를 안은 채 그대로 소파에 앉았고, 넓고 두터운 손바닥이 거부할 수 없게 내 허리를 감싸며 내 몸을 그의 몸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맑고 투명한 호박빛이 코앞에서 또렷이 빛나며, 마치 내 눈을 담아놓은 듯했다.
백기
아까는 냄새가 너무 지독했어. 이제 계속해도 되겠네.
그의 눈동자에 아직도 남아 있는 사나운 기운을 보며,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마를 그의 이마에 대었다. 그 말없이 숨겨진 감정들이 더 또렷이 보였다.
유연
류 부장님, 인심이 썩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네요.
작년 초에 선배가 붙잡았던 그 사람도 그가 꽤 음흉하다고 했어요. 방금 장웨이가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집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 같고요.
거기다 듣기 안 좋은 소문들도, 선배 귀에 꽤 들어갔겠죠?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깊이 응시하며, 단 한 순간도 숨을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내 시선과 얽히더니, 마침내 그는 항복하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백기
그 사람들은 이쪽 사람들이 아니야.
류 형님 일은 내가 관여할 수 없고, 소문은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더 쉽게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뿐이야.
방금 그들에게 한 말도, 몇 가지 일을 수면 위로 올려놓은 것뿐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류 형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겠지.
그의 말투는 느긋했지만, 눈빛에는 날카로운 사냥 본능이 서려 있었다.
유연
선배는 생각보다 이미 나설 생각으로 가득했었네요.
백기
어떤 일들은 결국 드러내서 깔끔히 정리해야 하니까.
그를 바라보며, 나는 그의 눈썹과 눈가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유연
그렇다면 선배는 류 부장님의 사람인 거예요?
백기
내가 그럴 것 같아?
내 모든 시선이 그의 눈빛에 잠겨 있었고, 손끝이 그의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 마치 따뜻한 피부 너머로 야수의 송곳니를 어루만지는 듯했다.
나는 몇 번이고 생각하다가, 그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유연
만약 류 부장님이 정말 문제가 있는 자라면, 가장 먼저 그를 물어뜯어 죽일 사람은 바로 선배잖아요.
백기는 결코 그런 온순한 동물이 아니었고, 또 누구의 사람이 될 수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주인이었다.
유연
지금은 그를 이길 수 있겠어요?
백기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 상대가 아니었어.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내 손가락 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백기
하지만 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믿은 거라면 어떡하지?
그의 질문은 무심했지만, 그 속에는 더 깊은 말이 소리 없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그는 그토록 진실되고 자부심 강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은 늘 회색 모래밭처럼 황량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똑바로 그의 눈을 응시했다.
유연
선배가 사람을 잘못 믿었을 리 없어요.
만약 정말로, 그런 극히 낮은 가능성이 만에 하나 현실이 된다면 내가 함께 싸워줄게요.
선배가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설령 끝에 돌이킬 수 없는 실패가 남는다고 해도……
나는 몸을 숙여 그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유연
그럼 나도 선배랑 함께 '지옥'에 내려갈게요, 어때요?
백기는 더 이상 웃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내 몸에서 드리운 그림자가 온전히 그의 몸을 덮자, 그의 눈동자가 더욱 빛나며 마치 맹렬한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백기
누구도 그런 기회와 능력이 없을 거야.
그는 고개를 반쯤 젖힌 채 얇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말은 거칠고 도발적이었지만, 키스는 부드러웠다.
한 번 또 한 번, 부드럽게 빨며 스치듯 이어지는 키스가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뜨거운 숨결이 안경 위에 하얀 안개를 맺히게 하며 나를 사로잡은 그 눈동자를 흐리게 만들었다.
백기
네가 씌워준 안경이잖아. 좀 벗겨 줘.
숨결에 밀착된 목소리에 촉촉한 물기가 배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봉인'이라고 말한 대로 끝까지 지키고 있는 모습이, 지금은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올라와, 방금 전의 불쾌한 순간들을 덮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유연
안 돼.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몸 양옆에 다리를 펴고 그 위에 앉았다.
손끝이 그의 눈가에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와 턱을 스치고, 그의 얼굴을 더욱 높이 들어 올리듯 끌어올려 목덜미까지 쓸어올렸다. 정돈되고 날카로운 턱선이 귀 뒤에서부터 서서히 조여들며, 빛이 그 위로 숨길 수 없는 위험한 분위기를 덧씌우고 있었다.
유연
선배의 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드문데, 아직 충분히 못 봤어요.
게다가 지금부터 내 곁에 있어주기로 했으니, 아직 선배 말을 들을 순 없어요.
깃을 단정히 잠그고, 금테 안경이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마치 야수가 단정히 옷을 입은 듯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은근한 흥분이 일었고, 숨결은 뜨거웠으며 눈빛은 위험해 보였다. 마치 내가 포착된 사냥감인 듯했다.
백기
보기만 할 필요는 없잖아.
유연
그럼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백기
가볍게 입맞춰도 좋고, 깊게 키스해도 돼.
넌 다 좋아하게 될 걸.

백기는 더욱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마치 모든 경계를 내려놓은 듯했다.
지금 그는 사람을 휘감아 끌어당기는 바람처럼, 눈동자에 타오르는 관능적인 불꽃을 품고 내 마음속에 화려한 불꽃들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늘 차갑고 단단하던 사람이, 내 앞에서는 끝내 아무런 경계 없이 목덜미와 목선을 드러내다니, 정말 너무나도 반칙이었다.
유연
내가 아무것도 안 한다면요?
나는 그의 목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빛과 그림자 속에서 그의 목젖이 천천히 오르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백기
그럼 내가 먼저 보여줄 수밖에 없겠네.
한 손은 내 목에 얹힌 손을 잡아당겼고, 다른 손은 내 뒷목으로 미끄러져 나를 그에게 끌어당겼다.
맞닿은 입술은 자연스레 얽혀들었고, 그의 입맞춤은 부드럽게 시작해 서로 얽히며 깊어져 갔다.
그의 입술이 한 번 또 한 번 내 입술을 빨아 들이며, 밀착된 입술 너머로 관능적이고 촉촉한 소리가 끈적하게 커져 갔다.
살짝 차가웠던 안경테는 서서히 온기를 머금었고 이따금 나와 그의 사이에 닿았다.
가장자리에 피어올랐다 흩어지는 하얀 안개와 끊어졌다 이어지는 젖은 소리가 점점 예민해지는 내 감각 속에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의해 느려지고, 동시에 더욱 크게 느껴졌다.
천천히 그는 고개를 기울여, 우리를 더욱 맞물린 채 서로의 깊은 속으로 가라앉혔다.
이때 오히려 내가 그의 목구멍 깊숙이 밀려 들어간 사람인 듯했다.
민첩한 혀끝이 내 이 사이로 파고들어 나와 얽히며, 더욱 길고 끈적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얽히고 스치는 입술과 혀의 감촉이 더욱 선명해졌고,
힘이 빠져 미끄러져 내려갈수록 우리 둘은 오히려 더 밀착될 뿐이었다.
내 온몸이 가벼운 떨림을 멈출 수 없게 되었을 때서야, 그는 애무하듯 내가 억누르지 못한 숨결을 가볍게 빨아들이고, 마지막에야 천천히 손을 놓았다.
맞은편에 있는 그는 여전히 단정한 옷매무새를 유지하고 있었고, 안경테에 맺혀 있던 하얀 안개도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다만 눈동자에는 어두운 빛이 가득 차 있었고, 눈꼬리에는 탐닉에 젖은 붉은 빛이 은근히 어려 있었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미세한 삼킴 소리와 함께 목젖이 내가 얹어 둔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저 가볍게 한 번 움직였을 뿐인데 그 모습은 지극히 관능적으로 보였다.
분명 내가 그를 밀어붙인 쪽인데 오히려 내 무언가가 그에게 삼켜진 기분이었다.
강렬한 전율이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치솟았고, 나는 차마 다시 그를 바라보지 못한 채 시선을 피하듯 돌리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유연
……항복, 항복. 이제 그만할게요.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나를 다시 끌어당겨 소파 위로 눌러버렸다.
그는 양손을 내 양옆에 짚은 채,안경은 얌전히 그 나른한 얼굴에 걸려 있었지만그 뒤에 숨은 길들여지지 않은 장난스러운 시선까지는 가리지 못했다.
백기
이걸로 된 거야?
유연
선배는 제대로 보여줄 생각조차 없었잖아요!
백기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그는 몸을 숙여 뜨거운 숨결을 내 목덜미에 떨어뜨리더니 곧이어 잔잔하면서도 촘촘한 접촉이 이어졌다.
그는 내 목을 가볍게 깨물고는, 점점 힘을 실어 빨아들이며 마치 야수가 입안의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듯했다.
내 몸은 그의 몸에 밀착된 채 그 전율이 점점 커져 통제할 수 없이 뛰었고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다시 빠져들고 말았다.
유연
분명……계속 유혹한 건 선배였는데, 내가 조금만 건드려도 선배는 바로 더 세게 나오잖아.
백기
그저 먼저 보여준 것뿐이야.
그는 천천히 앞으로 한 치 더 밀어붙이며, 끊임없이 가볍게 스치며 사람을 괴롭히는 불꽃을 일으켰다.
백기
게다가 나는 취했잖아.
유연
……처음에 선배가 쏟아버린 한 모금 말고는 내 술 한 모금밖에 안 마셨잖아요.
백기
그 한 모금으로도 충분했어.
그는 내 입술에 얼굴을 맞대며 '취했다' 고 말하는 모습조차 당당했다.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활활 타올라 입술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데도 옷깃은 여전히 반듯했고 깔끔한 재킷은 그대로 그의 몸에 걸쳐 있었다.
셔츠에는 옅게 땀이 배어 있었지만 여전히 단정하게 몸에 밀착돼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오히려 눈앞의 그를 더 위험하고 선정적으로 만들어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끌어안고 말았다.
유연
좋아요, 인정할게요. 선배가 보여주는 거 꽤 마음에 들어요.
백기
그럼 조금만 더 좋아해 봐.
4장
백기가 그저 잠깐 도움을 주러 온 줄 알았는데, 곧바로 이곳을 연말까지 통째로 빌려 두었다고 알려주었다.
세상이 평온한 지금, 이 별장은 확실히 한가롭게 쉬기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하지만 백기가 이곳에 머물기로 한 이유는, 그런 단순한 휴가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오후의 발코니에서 나는 느슨하게 백기의 품에 안겨, 몽롱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외선 전화가 울렸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나를 감싸고 있던 그의 팔이 살짝 조여 왔다.
가볍고 느린 바람이 ‘명령을 받은 듯’ 흔들거리며 무선 수화기를 그의 귀로 가져다 주었다.
백기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잠시 뒤 느릿한 대답만이 흘러나왔다.
백기
안 봐. 돌려보내.
바람이 수화기를 옆 탁자에 내려놓자,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한가롭게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눈매에 서려 있던 날카로움은 모두 거두어지고,
부드러운 빛이 또렷한 속눈썹 위에 내려앉자 나는 손가락으로 살며시 건드렸다.
유연
아직도 선배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도 있어요?
백기
알고 싶은 사람은 자연히 알게 될 거야. 누군가는 알려주겠지.
말하며 그는 느슨하게 눈을 떴다. 그 안에는 사냥을 앞둔 기색이 가득했다.
백기
이 기간 동안 내가 사람들을 좀 만나도 개의치 않겠어?
한 명을 만나면, 자연히 다음이 생겨날 거야.
그가 진지하게 묻자, 맑고 투명한 호박빛이 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진 빛의 파편을 지나 내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백기가 모처럼 한가롭게 여유를 누리는 설날인 만큼 그를 찾아올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연
이런 일이 생길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집에 머물지도 않고 연모시를 떠나지도 않은 거구나.
그의 침묵은 묵인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몸을 숙여 내 눈썹과 눈가를 살며시 훑듯 입맞추었을 뿐이었다.
백기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말 행동이 빠르네.
네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나도 당장은 그들이 아는 걸 개의치 않겠어.
유연
당장은?
백기
진짜로 우리를 방해하기 전까지는, 내가 입 다물 수 있어.
설 전에는 전부 처리해둘게.
유연
정말 만나지 않아도 되겠어요?
백기
만나든 안 만나든, 그 자체로 답이야.
그가 말할 때 입가에는 여전히 뚜렷한 나른함이 걸려 있었지만, 듣기엔 지나치게도 태연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점점 더 잘생겨지는 거지.
나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흘리며 다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유연
괜찮아요, 선배가 원래 할 일이 많다는 거 알고 있고, 게다가 그냥 앉아만 있으면 좀 심심할까 봐 걱정됐어요.
백기
너랑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
이때 옆에 있던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백기는 이 전화가 다시 울릴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마침내 담담하게 대답했다.
백기
기다리게 놔둬.
전화가 끊기자 백기는 움직이지도 않은 채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슨 생각에 잠긴 듯했다.
유연
무슨 생각해요?
백기
……
그는 시선을 느릿느릿 내 쪽으로 옮기며 입가에 장난기 섞인 관능적인 미소를 띠었다.
백기
어제 안경을 어디에 두고 왔는지 생각 중이야.
내가 쓰는 건 그거 하나뿐이잖아.
그의 말에 숨은 뜻이 느껴지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린 채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침대 옆 탁자로 달려가 금테 안경을 집어 그의 얼굴에 얹어주었다.
유연
'봉인'됐어요! 빨리 가요, 빨리!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백기는 그를 바 구역에서 보기로 했고, 나도 이 시간을 이용해 별장을 이곳저곳 둘러볼 생각이었다.
내가 2층 전망대에 올라섰을 때 멀지 않은 복도에서 단정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남자가 지나갔다.
그러나 내가 숨기도 전에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
그 웃음이 어딘가 음산해 보여 나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채 재빨리 돌아섰다.
유연
확실히 집에 있으면 더 번거로웠을 거야……
흑과 백이든, 지위 또한 제각각일 것이다. 이곳은 충분히 조용하고 은밀해 수많은 비밀을 숨기기에 알맞았다.
나는 바 구역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고요했지만 보이지 않는 암류는 끊임없이 꿈틀대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조용히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바람만이 세상의 유일한 소리가 되었다.
왠지 모르게, 내 머릿속에 이틀 동안 백기가 느긋하면서도 짙은 공격성을 품은 여유를 보였던 모습이 떠올랐다.
연말에 드물게 찾아온 한가함 속에서 그는 이전과는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이것은 그가 혼자 유유자적 거닐며 벌이는 사냥이었다.
나는 그 날카롭고 예리한 두 눈이 보이는 듯했고 발걸음도 저절로 바 구역을 향해 살며시 옮겨졌다.
갑자기 내 앞에 없는 백기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졌다.
웨이터는 내 모습을 보고도 막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허락을 이미 받은 듯했다.
두껍고 부드러운 카펫이 내가 다가가는 발소리를 삼켜버렸고 널찍한 바 공간 옆에는 오락을 즐기기 위한 볼링장까지 마련돼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곧 희미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손촨예는 워낙 무자비한 자니 네가 그를 당해내지 못하는 거지.
너희들 사이의 원한엔 관심 없어. 당분간 서쪽 일에 손댈 생각도 없고.
나를 찾아와 봤자 소용없어.
그를 볼 수는 없었지만 숨이 막힐 듯한 냉기가 순식간에 전해져 왔다.
나는 멀리 드리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거의 다음 순간, 나는 곧장 그 깊고도 짙은 호박색 속으로 빠져들었다.

백기는 이미 나를 발견한 지 오래였다.
거두어 두었던 경계심은 곧 새 사냥감을 발견한 작은 짐승처럼 탐색하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그는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술기운이 표면에 살짝 올라와 있었다. 뺨 한쪽에 은은한 홍조가 번져 번져가는 입맞춤 같았다.
그는 안락의자에 느슨하게 기대어 한쪽 다리를 게으르게 세우고 있었다.
흐릿하고 은은한 빛이 암류처럼 흘러 그의 몸 위에 선명한 명암을 그려냈다.
안경테에 장식된 가시들이 반짝이며 빛을 튕겨 날카롭게 망막을 찌르는 듯했다. 마치 렌즈 뒤에 숨은 그의 눈동자처럼.
그는 술잔을 무심하게 쥐고 있었고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 끝이 잔 벽을 스치며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
그는 살며시 잔을 흔들며 마치 나에게 인사하는 듯했다.
??
서쪽에는 계속해서 특별한 ‘물류 노선’이 있었고, 초소에도 사람을 꽤 심어 놨습니다.
손촨예는 이 일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고.
??
백 대장님이 관심 없을 리는 없겠죠.
백기
네 아버지와 누나는 줄곧 성실하게 돈을 깨끗이 세탁해 왔는데, 넌 그들을 등지고 나를 찾아왔군.
그렇게까지 이 자들을 죽이고 싶은 건가?
낮고 깊은 그의 목소리가 알코올의 차가운 기운 속에서 가라앉아 울리자,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떨어질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
연모시의 모범 시민으로서, 그들의 일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지만 백 대장님을 위해 힘을 조금 더 보탤 수는 있죠.
언제든 제 사업장에 들러 주셔도 환영입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말투는 평온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음흉함과 질투가 감돌았다.
다만 그는 백기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한 듯 그 눈동자가 무심하게 한 번 스쳐 지나가더니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백기
그건 네 실력에 달렸지.
그의 손이 소파 팔걸이에 무심히 얹혀 있었고 길고 곧은 손가락 끝이 가볍게 두드렸다.
움직임이 이어질 때마다 반장갑의 주름이 조용히 깊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내 마음속엔 어두운 파도가 일었다.
백기는 아마도 이 사람이 무엇을 쥐고 있는지 또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눈앞의 모든 것은 그저 불을 지피는 과정일 뿐이었다.
어쩌면 이 무미건조한 흥미마저도 그 일부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내 등장은 오히려 그의 시선을 붙잡게 된 뜻밖의 변수였다.
그는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정말 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나는 그림자에서 벗어나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희미한 술기운이 전해져 왔고, 점점 더 짙어지는 그의 흥분과 함께 마치 불꽃처럼 번져갔다.
유연
술, 맛있어요?
나는 더 설명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물었다.
아마 나 자신조차 이런 유혹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소용돌이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뿐이었다.
백기
맛없어.
유연
나도 한모금 할래요.
나는 몸을 숙여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짚고 목을 내밀어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불꽃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듯했다. 술빛과 내가 섞여 그의 눈동자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술잔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기울였다.
알코올이 혀끝에 닿자 연쇄적인 자극과 뜨거움이 퍼졌다. 술이 모두 지나간 뒤 입안에는 진한 술 향만 남았다.
유연
꽤 괜찮은데요?
백기
그건 전에 있던 사람이 시시해서였겠지.
유연
내가 같이 마실게요.
앉아만 있긴 좀 지루한데, 옆에 볼링장 있는 것 같으니, 우리 놀면서 한잔씩 하는 건 어때요?
조금쯤은 괜찮잖아요.
나는 당분간 이 유혹적인 게임을 그와 함께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아마,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볼링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나무 바닥은 여러 번 갈아낸 듯 부드러운 광택을 띠고, 희미하게 천장 조명의 윤곽을 비추고 있었다.
백기
해본 적 있어?
유연
전에 몇 번 해봤는데, 곧 손맛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백기
한번 해보자.
그는 이 말을 하며 옷깃을 느슨하게 풀고 장갑을 벗어 던진 뒤 몇 가지 동작과 자세를 간단히 짚어 주며 공을 몇 번 던졌다.
하지만 몇 번 던진 뒤에는 내 뒤쪽 자리에 앉아 혼자 연습하며 도전해 보게 했다.
공은 레인을 따라 굴러가면서도 궤적이 자꾸 한쪽으로 틀어졌다.
멀리 있는 볼링핀들은 여전히 가지런히 서서 나와 마주 보며 멀뚱히 버티고 있었지만 나는 짜증내지 않고 힘과 각도를 계속 바꿔 가며 시도했다.
동시에, 등 뒤에서는 인내심 가득한 시선이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볼링공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마치 잔잔한 술잔이 흔들리는 듯한 부드러운 물결음이 은은히 섞였다.
다섯 번째 공을 집어 들었을 때 손가락이 구멍에 들어가자 숨이 저절로 느려졌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몸을 낮추고 팔을 자연스레 휘둘렀다.
공을 놓는 순간은 짧았다. 손끝을 떠난 공이 바닥을 스치며 굴러나갔고 낮은 소리가 밀폐된 공간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공이 레인을 따라 곧장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섯 개의 핀이 쓰러지며 짧고 경쾌한 충돌음이 터졌다.
유연
와! 맞췄어!
나는 웃으며 잔을 들어 백기 곁으로 다가가 그의 잔과 부딪쳤다.
유연
여섯 개나 쓰러뜨린 걸 기념하며 건배~
백기
멋있어.
그는 웃으며 나와 함께 잔을 비우고는 일어나 볼 테이블로 걸어가 곁에 있던 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거의 멈춤 없이 백기의 샷은 극히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다.
손을 떠난 볼은 곧장 바닥을 따라 굴러갔고 분명한 힘이 실린 채 궤적은 거의 흔들림 없이 곧게 이어졌다.
레인 끝에서는 결과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맑고 단단한 충돌음과 함께 모든 볼링핀이 같은 순간에 쓸려 나갔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그는 한 번 흘끗 볼 뿐, 아무 표정도 덧붙이지 않은 채 묵직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유연
선배, 너무 멋있는 거 아니에요?
테이블 위의 술잔은 이미 비어 있었고, 나는 그의 시선을 받아들인 채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앞에 서서 발끝을 들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은은한 술 향이 내 입술에 묻어 지금 그의 향이 되었다.
유연
술병을 같이 가져오는 걸 깜빡했어요. 지금은 술이 없으니까, 이번 판은 이런 식으로 ‘건배’해요.
유연
내가 몇 번 더 던져야 저 핀들을 전부 쓰러뜨릴 수 있는지 봐요. 그때는 가서 술병도 같이 가져올게요.
그는 나를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저릿하게 피부를 스치는 시선을 느꼈고 온몸의 피가 더 빠르게 흐르는 듯했다.
마치 이 순간, ‘백기’라는 이름의 술을 한 잔 더 들이킨 것만 같았다.
내가 몸을 숙여 다음 공을 집으려는 그때, 한 손이 먼저 공을 들어 올려 그대로 던져 버렸다.
볼링핀이 전부 쓰러지는 소리와 그의 입맞춤이 동시에 내려앉았다.
입술과 혀가 얽혀들며 더 진하고 사랑스러운 술을 서로 나누어 마시는 듯했다.
불길이 목구멍을 타고 강하게 쏟아져 내려가듯 강렬하고 짙은 열기가 거침없이 모든 감각을 잠식하며 온몸으로 번져 갔다.
나는 그 안에서 유독 짙은 맛을 느꼈다——
흥분이었다.
5장
여유롭고 나른하게 가라앉은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백기를 찾아오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때로는 만나고, 때로는 만나지 않았다.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일부러 기다리게 하기도 했다.
그의 남은 시간은 모두 내 것이었다. 산책을 하고, 야외 온천에 몸을 담근 채 밤하늘의 별을 세고, 근처 시골 마을에 들러 설날 장을 보고, 새로 담근 술을 맛보곤 했다.
그는 심지어 나를 데리고 별장에 있는 말을 타고 달리기도 했고, 산과 들을 가로질러 잠든 대지를 지나, 달빛 아래에서 입맞춤을 나누기도 했다.
이곳은 백기가 말없이 만들어 둔 사냥터였고, 동시에 나와 그의 휴가 시간을 채워 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점점 자신의 성향과 방식으로 지휘관이라는 신분을 자연스럽게 융합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해질 무렵, 석양의 빛이 서서히 사라지며 밤이 내려앉을 즈음 백기는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러 나갔고, 나는 발코니에 엎드린 채 무심히 휴대폰을 넘기며 설날 장보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러운 굉음이 울려 퍼지며, 손에 쥔 휴대폰이 떨어질 뻔했다.
유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오른쪽 앞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나는 걱정스레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고,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건물 하나가 이미 절반쯤 무너져 있는 것을 보았다.
회색 연기 속에서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튀어나왔다. 팔을 부여잡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는 무너진 쪽을 향해 일그러진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그 모습이 잔해 사이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구두가 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밟을 때마다 맑고 또렷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여전히 안경을 쓰고 있었고, 두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바람은 그의 가장 요란한 파트너처럼 허리띠와 목걸이를 높이 들어 올리며, 묵직한 압박감을 만들어 냈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고 다시 안락의자에 몸을 맡겼다. 허공에 매달려 있던 마음도 그제야 차분히 가라앉았다.
??
나…… 특파팀……
……물건……
거리가 너무 멀고 바람 소리도 거세서 남자의 말은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휩쓸려 흩어졌다.
하지만 그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입을 일그러뜨리고 있었고, 그럼에도 백기의 냉혹한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산속의 밤은 언제나 빠르게 내려앉았다. 어둠이 순식간에 대지를 잠식하고, 달빛만이 희미하게 반짝일 뿐이었다.
백기
패배를 인정해.
백기
넌 이미 나설 자리도 없었어.
바람이 멎었다. 산야의 적막한 밤, 그의 간결하고 직설적인 목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그 말은 남자에게 또 한 자루 칼처럼 꽂혀, 얼굴빛을 더 새파랗게 만들었다.
달빛이 백기 주위에 내려앉아, 맑은 빛의 흰 윤곽을 그려냈다.
그의 시선은 사냥처럼 날카로웠다. 상대 손에 은빛 칼날이 번뜩이자, 백기의 눈에 마침내 흥미가 스쳤다.
바람이 높이 치솟자, 그는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더니, 한 번 몸을 틀어 그대로 밤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끝났다. 그는 어둠 속에 서서, 마지막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시선과 맞닿았다.
달빛 아래, 아름다운 늑대가 있었다.
그는 옷을 단정히 갖춰 입고, 눈빛도 렌즈 뒤에 숨겨 두었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방금 먹이의 목을 물었던 뒤의 차갑게 드러난 이빨과, 선명하게 튀어 오른 피를.
그런 시선에 붙들린 채, 낯설고도 거대한 전율이 다시 한 번 온몸을 휩쓸었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날카로운 이빨이 내 목을 물어붙이는 그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짧은 정적 속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나타나 처리된 사람을 데려간 듯했고, 백기 역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야수가 밤의 대지를 가볍게 딛고 지나가며, 극히 미세한 마찰음을 남겼다. 그와 함께 심장 박동과 달아오른 숨결 역시 내 귓가를 맴돌았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백기는 이미 내 뒤에 서 있었다.
얼굴의 안경은 언제 벗었는지 모르게 사라져 있었고, 단정하던 옷깃도 풀려 있었다.
커다란 그림자가 나를 빈틈없이 덮치며, 주변 공간을 소리 없이 압박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몸을 낮춰 내 앞에 반쯤 무릎을 꿇었다.
미묘하게 서늘한 그의 손끝에는 아직도 냉랭하고 단단한 감촉이 남아 있었고, 그는 몸을 조금 기울여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백기
무서웠어? (我吓到你了吗? 내가 널 놀라게 했어?)
야수가 앞다리를 접고 엎드린 듯, 오히려 그가 내 사냥감처럼 보였다.
나는 그가 올려다보는 시선에 잠겨, 본능적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유연
그럴 리가요.
방금 선배의 모습은……
오히려 좋았어요.
아마 이런 말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해서는 안 됐을지도 모른다.
백기는 그 말을 듣고 난 뒤, 밤새도록 조용히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한순간도 떼지 않았다.
내가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늘 그 시선이 따라붙었다.
온천탕에 김이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잠시 쉬고 난 뒤 그는 평소처럼 나를 끌어당겨 자연스럽게 뜨거운 물속에 앉히고는,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너무 노골적이고 대담해서,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발끝을 오므리게 됐다.
어느새 세상은 온통 은빛으로 덮여 있었다.
유연
언제부터 눈 내렸어요?
백기
좀 전부터 내렸어.
보고 싶다면, 내가 불을 꺼줄게. 더 예쁠 거야.
유연
내가 끌게요.
그의 시선에 두피가 저릿하고 귀까지 달아올라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 뭐라도 하고 싶었다.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몇 개의 촛불만이 은은하게 남아 작은 눈송이들이 빛 속에서 떠다니며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뒤쪽 방의 따뜻한 조명이 반쯤 열린 테라스로 비스듬히 떨어져 선명한 명암의 경계를 그려냈다.
유연
뭐 좀 먹을래요?
대답 대신 그는 단숨에 나를 끌어안아 당겼다.
뜨거운 체온이 온천수보다 더 가까이 내 몸에 밀착되었고, 백기는 한 손으로 나를 감싸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옆의 연못 벽을 짚으며 나를 완전히 그의 그림자 속에 가두었다.
백기
계속 돌아다니기만 하고, 난 안 보네.
아깐 거짓말이었지.
내가 싫은 거야.
유연
그럴리가요!
나는 즉시 반박하며 고개를 들어, 그 짙은 호박색 시선과 마주쳤다.
유연
난 그냥…… 좀 긴장했을 뿐이에요.
백기
왜 긴장한 거야?
유연
……알면서 묻는 거잖아요.
백기
난 모르겠어. 네가 직접 말해줘.
따뜻한 입술이 내 목 옆에 닿은 채 위로 올라갔다. 이빨이 귓불을 스치고, 귀의 윤곽을 따라 더듬듯 움직이며, 연달아 간지러움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는 어디로도 피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그의 품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더 짙고 뜨거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연
평소에 휴가일 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잖아요.
최근 들어서는 가끔, 선배가……꽤 공격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래, 공격성이었어. 눈을 마주친 다음 순간, 그대로 목을 세게 물어뜯길 것만 같은 이 감각.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백기는 거의 이런 얼굴을 내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는 강하고 물러설 줄 모르는, 소년처럼 밝고 거침없는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일까? 올해의 설날은 뭐가 다른 걸까?
백기
난 그냥 네게 더 다가가고 싶을 뿐이야, 계속 너를 바라보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
분명 늘 함께 있는데도, 미칠 것 같아.
그의 입맞춤은 내 입가를 따라 스며들었고, 그 속삭임은 이빨 사이에 머금어진 채 숨결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 갔다. 신경의 말단 하나하나까지 그의 갈망이 전해질 만큼.
문득,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내 손가락이 그의 쇄골 위 흉터를 가늘게 훑었다. 그 위엔 미세한 울퉁불퉁함과 단단함이 배어 있었고, 마치 시간이 거듭 다져 놓은 흔적 같았다.
유연
선배도 사실 나처럼……
올해 설날이 좀 실감이 안 나지 않아요?
그의 숨이 순간 멎은 듯했다. 동공이 거의 눈치채기 힘들 만큼 가늘어졌고, 동공 깊은 곳에서 어두운 흐름이 조용히 요동쳤다.
유연
모든 게 어딘가 가볍게 떠 있는 느낌이에요. 분명 조용한데…… 너무 조용해서.
그렇죠?
마치 지금 조용히 내려앉은 잔눈처럼, 총알의 날카로운 소리도,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가식도 없다.
신경은 더 이상 곤두서 있지 않지만, 가끔은 맥박의 뛰는 소리조차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백기
너무 조용하지. 그런데 가끔은 너무 시끄러워.
아직도 너무 많은 소리들이 있고,
계속해서 나를 네 곁에서 떼어놓을 것만 같아.
그래서 그는 방문을 거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발에 맞설 때면 더 큰 흥미를 느꼈고,
위험한 무엇인가가 그의 혈관을 가로질러 흘렀다. 그의 살과 뼈와 교감하며——그에게 익숙함을 주었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안겼다.
가슴이 저려오는 듯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입가에 입맞춤을 했다.
유연
그럼 나를 떠날 거예요?
백기
아니.
유연
그럼 어떤 소리도 듣지 말고, 생각하지 마요.
나만 생각하고, 나만 봐요.
피어오르는 열기가 그의 눈을 감싸고, 나는 물방울 하나가 스치듯 그의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유연
조각 케이크 하나 먹여줄까요?
백기
그건 말고.
유연
한 번만 먹어봐요. 일부러 남겨 둔 거예요, 정말 맛있어요.
나는 살짝 일어서며, 일부러 그의 드러난 가슴을 스쳤다.
공기의 차가움보다 이 순간의 전율이 훨씬 더 강렬했다. 내 얼굴은 이미 새빨개졌을 테고, 온몸이 가벼운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더는 그런 것들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한쪽에 오랫동안 놓여 있던 케이크를 집어 들어, 그의 맞은편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위에 있던 크림은 이미 조금씩 녹아 내려, 흐물흐물해진 상태로 백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유연
한번 먹어 봐요. 선배가 싫어하는 그런 느끼한 단맛은 아니에요.
그는 거의 한 입에 다 먹어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부드러워진 크림 몇 가닥만이 내 손끝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유연
맛있어요?
백기
맛있어.
유연
한 입에 다 삼켜 버렸잖아요.
백기
아직 가장 맛있는 부분은 먹지 않았어.
그 말과 함께 그는 내 손을 꽉 붙잡고 혀를 내밀어 손가락 마디를 가볍게 핥았다.
촉촉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온기가 교묘하게 손가락을 휘감으며 몇번이고 오갔고, 그 하얀 크림을 머금고 안팎으로 집요하게 핥아냈다.
얼굴이 뜨거워질만큼 달아오르고 심장이 뛰는 광경에 손끝이 저절로 떨렸지만, 그는 오히려 더 세게 움켜쥐고 천천히 제쪽으로 눌러왔다.
다른 한 손은 온천수 아래에서 함께 내 몸을 더듬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와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짓궂은 혀는 나를 구석구석을 훑어낸 뒤, 내 손가락을 한 마디 한 마디 입속으로 삼켜버렸다.
유연
……!
이중의 자극이 순식간에 내 대뇌피질을 휩쓸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더 세게 물어 붙잡았다.
뜨겁게 어루만지는 감각이 눈앞에 흐릿한 안개처럼 번졌고, 혀가 거리낌 없이 손가락 마디를 핥아내며 둔탁한 물소리를 냈다. 그에 따라 온천 수면에는 층층이 은은한 물결이 번져갔다.
혀끝이 내 손가락을 따라 윤곽을 그려냈지만, 나는 오히려 그의 형태를 더 또렷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밀어붙였고, 손끝에서 겹쳐지는 물소리가 한층 선명하게 귀에 스며들었다.
세상은 불타오를 듯이 뜨거워졌고, 모든 소리는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흐릿하게 울렸다.
점점 비어 가는 의식 속에서 내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오므라들자, 그제야 그는 천천히 내 손가락을 빼내어, 내 손과 열 손가락을 맞물려 깍지 꼈다.
그의 오른손에는 따뜻한 물기가 남아 있었고, 반짝이는 물방울이 손등과 손가락 마디를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물기를 백기가 가볍게 핥아냈다.
백기
맛있어.
더 원해.
눈꼬리에 번진 붉은 기운이 그의 반쪽 뺨을 가득 물들이고,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내 눈속까지 번져 들어왔다.
유연
하지만…… 케이크는 그거 하나뿐인데?
백기
아니.
너한테는 아직 많이 남아 있잖아.
촉촉하게 미끄러지는 입맞춤과 함께 타오르는 열기가 거침없이 나를 덮쳐 왔고, 입술과 혀는 거침없이 뒤엉키며 뼛속 깊이 스며드는 숨결을 끊임없이 흘려냈다.
온천수는 그의 움직임마다 밀려나며 부딪혀 흩어졌고, 잔잔하던 수면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품은 바다처럼 출렁였다.
얽히고 뒤집히며 제어 없이 흘러나오던 모든 소리는 겹쳐 오르내리는 격렬한 물소리로 바뀌어 내 세계를 가득 채웠다.
숨결에는 수증기가 배어 있었고 차가운 공기 속으로 급히 흩어지며 촉촉한 열기를 연달아 뿜어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은 거꾸로 흩날리는 눈처럼그의 움직임마다 어지러운 흰 안개 속으로 떨어졌고,
나 역시 또 하나의 녹아드는 눈이 되어 그의 온기 속으로 스며들며 그와 하나가 되었다.
그의 치솟은 욕망 속에서, 나는 한층 더 진실한 무언가를 보았다——
늑대는 결코 길들여진 짐승이 아니다. 태생부터 사냥감을 좇는 피의 본능을 지닌 존재다.
그는 너무 오래, 온 힘을 다해 살아왔다. 위험과 고통은 이미 그의 삶에 함께 새겨진 흔적이 되었고,
온화한 시간들이 그를 감싸 길러 왔지만 그는 여전히 위험과 추적에 익숙한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더 세게 그를 끌어안으며, 그의 모든 폭렬하고도 탐욕적인 갈망과 확인에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유연
백기, 나는 오직 너만의 사냥감이야.
5장 교차하는 마음
백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고급스럽고 두터운 차광 커튼이 시간을 바깥으로 몰아내 버려, 그는 한동안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세상은 무척 고요했다. 그의 귀에 닿는 것은, 가볍게 흐르는 숨소리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이렇게 오래, 제대로 잠을 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모든 것이 뒤범벅된 채 제멋대로 흘러가고, 때로는 고요하거나 시끄럽기도 한 세계 속에서 그는 유독 그녀의 목소리와 입맞춤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여름의 ‘이변’이 시작된 이후로, 그는 자신의 몸이나 의지 어딘가에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떤 존재가 자리하고 있음을 점점 더 분명히 자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때때로 그의 혈액 속에서 북받치듯 떠들어 대며, 마치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려는 것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게도, 그는 온몸이 서서히 아파오는 것만 같았다.
팔에서부터 가슴 앞쪽까지, 쇄골에서 등 뒤로, 심지어는 귀에 난 구멍마저도 은근한 통증이 번져 오는 것 같았다.
분명 이미 아프지 않아야 할 곳들이었다. 수많은 상처들 역시 오래전에 사라졌을 터였다.
그는 그토록 많은 생과 사의 순간을 지나왔고, 재활을 위해 버텨 온 시간들 또한 그 아픔에 익숙해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드물게 찾아온 평온한 설날에 이르러서까지 그것들은 끊임없이 그를 흔들어 놓는 걸까.
올해에야 비로소 그녀와 함께 조용하고 안정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는데——
마치 지금 이 순간, 그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백기는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라면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방식으로 그를 시험해 볼지 정리하거나, 아니면 밖으로 나가 10킬로미터쯤을 달리며 머리를 식혀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세계는 너무도 따뜻하고, 너무도 고요해서, 그는 그 안에서 몸을 빼내 차가운 공기 속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부드러운 두 손이 살며시 그를 끌어안았다.
백기
……!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고,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이 그대로 그녀의 눈에 담겼다.
유연
아파보여요.
백기
몸에 상처는 없어.
유연
보이는 상처만이 아픔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는 그녀가 달래듯 그의 눈썹과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심장이 그의 가슴에 밀착된 채, 한 번, 또 한 번 뛰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바로 자신의 심장인 것처럼.
백기
난 분명히 집에 돌아왔어…… 바로 네 곁에.
유연
응, 선배는 지금 내 곁에 있어.
백기
나는 늘 이런 시간을 위해 버텨 왔어.
유연
응, 알아요.
백기
이런 내가……조금 무서워졌어. (是我……有些怕了。)
그는 마침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자신의 동요와 두려움을 인정하면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나 선명한 현실이라는 게, 이렇게 작고 조용한 행복이, 왜인지 모르게 그를 두렵게 하고 있었다.
그는 수없이 생사를 오가며 익숙해진 일상이, 자신을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만들까 봐 두려웠다.
이런 명절 같은 시간이, 갑자기 찾아온 이 평온함을 더 낯설게 키워 버릴까 봐 두려웠고,
무엇보다 그녀가 언젠가는 자신의 행동을 두려워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는 무섭지 않다고 말해줬는데.
그녀 때문에 그는 점점 더 겁많은 겁쟁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유연
선배, 올해 설에는 뭐 하고 싶어?
부드럽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눈을 한 번 깜빡이며, 거칠게 잠긴 목소리로 마음속에 오래 품어 두었던 갈망을 하나씩 꺼냈다.
백기
너랑 같이 설날 저녁(年夜飯)을 먹고 싶어. 밤 여덟 시엔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설날 특집 방송 첫 무대를 보는 거야.
백기
폭죽 소리는 꽤 시끄러울 거야. 그럼 만담이나 콩트는 아마 잘 안 들릴지도 몰라.
그래도 보면서 단톡방에서 홍바오도 받고, 조금 기다렸다가 만두를 빚으면 돼.
열한 시쯤 되면 같이 밖으로 나가 폭죽을 터뜨리자. 자정이 되면 내가 너한테 홍바오를 보내면서 “새해 복 많이 받아”라고 말할게.
설날 첫날부터는 그냥 집에 있으면서 텔레비전으로 설날 특집 재방송 틀어 놓고, 고 선생님 집에 가서 카드를 쳐도 되고.
그는 말을 띄엄띄엄 이어나갔다.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순간들을 하나, 하나 꺼내놓듯이 말하면서, 눈가가 은근히 뜨거워지고 있었다.
정말로 전부 너무 사소한 일들뿐인데, 이런 것들마저도 마치 빚을 진 것처럼 느껴졌다.
백기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미안하다는 말도 전하고 싶어.
그래도, 사랑한단 말은 하고 싶어.
유연
그럼 우리, 하나씩 하나씩 다 이뤄 가면 되잖아요.
우리 같이 시끌벅적하게 한 해를 보내요, 응?
어두운 방 안, 빛은 거의 없었지만 그녀는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달을 바라보듯이.
서서히, 그를 괴롭히던 통증들은 밀물처럼 빠져나가듯 사라져 갔다. 그와 함께 그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심장 소리와 나란히 겹쳐서.
그래서 그는 그녀를 더 꽉 끌어안은 채, 아침과 밤의 경계조차 흐려지는 세계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6장
설을 이틀 앞둔 날(大年二十八), 어떤 방문객도 없었고, 우리를 방해할 만한 일도 아무것도 없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기 전, 백기가 아직 잠들어 있는 틈을 타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서비스 직원들에게 한 상 가득 음식을 준비하게 하고, 별장에서 가장 좋은 술 몇 병을 골라 두었다.
그리고 잠시 정리한 뒤, 오랜만에 그와 휴가를 보내기 위해 마련해 두었던 작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창가에 앉자 하룻밤 새 내린 눈이 하늘을 말끔히 씻어낸 듯했다. 푸른 하늘은 맑고도 차가웠으며,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희미한 공기를 가르며 내려앉은 햇살이 두꺼운 눈으로 덮인 지붕과 땅 위에 닿아 눈부신 반짝임을 만들어냈다.
마치 수많은 작은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마음속은 고요했고, 오직 내 사랑하는 사람이 기꺼이 내 사냥터로 걸어 들어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윽고, 복도 끝에서 단단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이 열리자, 헐렁한 셔츠와 외투가 백기의 몸에 느슨하게 걸쳐져 있었다. 마치 이제야 그의 자유를 한껏 풀어놓은 것처럼.
그는 나를 한참 깊게 바라보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길게 뻗은 다리가 아무 거리낌 없이 내 다리를 스쳤고, 곧 테이블 아래에서 서로 얽혀 겹쳐졌다.
나는 숨을 고르고, 그에게 잔을 들어 올렸다.
유연
여기 떠나기 전에, 우리 아직 제대로 된 ‘성대한 만찬’ 한 번을 못 했잖아요.
어차피 연말이기도 하고, 어떻게든 한 번쯤은 제대로 축하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앞으로 맞이할 모든 설날과, 매일매일이 올해처럼 늘 평안하고, 하는 일도 순조롭기를.
백기
그럼 우리 프로듀서님도 올해는 하는 일마다 순조롭고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들 수 있기를.
늘 건강하고, 늘 행복하기를.
늘 나만 생각해 주기를.
테이블 위에는 아직 김이 오르는 요리들이 조명 아래에서 유혹적인 색을 띠고 있었다.
정갈한 차림과 코끝을 스치는 향기까지, 한 접시 한 접시가 마치 ‘단란함(团团圆圆)’을 예고하는 듯했다.
옆에 열어 둔 술에서는 은은한 향이 번져 나왔고, 그의 시선과 겹쳐지며 내 피와 심장 박동을 점점 더 빠르게 만들었다.
우리는 가장 사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모레 있을 섣달그믐 저녁(年夜飯) 메뉴를 상의하고, 미리 사 둔 불꽃놀이 이야기를 하고, 설이 지나고 나서의 계획도 이야기했다.
다만, 그의 시선만은 내게 머물 때마다 묘하게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고 나자(*분위기가 무르익을 만큼 마신 상태), 테이블 위에는 흩어진 향기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백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다가와 몸을 숙이며 내 쪽으로 기울었지만, 다음 순간 내 손끝에 가볍게 제지당했다.
유연
아직은 안 돼요.
아직은.
나는 술잔을 들어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대고,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모금을 살며시 먹여주었다.
유연
오늘도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이 있어서요. 선배는 자유롭게 다녀요.
백기
……
그의 눈빛이 한순간 어두워졌고, 눈썹이 억누르지 못한 듯 미세하게 치켜올라갔다.
유연
자기야, 조금 이따 봐.
내가 돌아서는 순간, 뼈마디가 또렷한 손가락이 내 귀 옆 머리칼을 살짝 걸 듯 스쳤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흘러내렸다.
나는 그대로 홀을 빠져나와 별장의 긴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공기에는 눈이 내린 뒤에만 남는 특유의 맑고 차가운 기운이 배어 있었다.
나는 별장 안팎을 크게 한 바퀴 돌며, 지난 며칠간 우리가 남겼던 사소한 순간들 사이를 지나갔다.
바람은 몇 번이고 내 곁을 스쳐 갔다. 소리 없이 내 손끝을 휘감았다가, 나는 가볍게 그 바람을 분명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쓰는 거실의 문을 열었다.
누가 있을 리가 없지. 나는 소파에 앉아, 아무 기척도 없는 그 문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건 그저, 그의 사냥터를 내 것으로 바꿔 놓는— 아주 사소한 장난에 불과했다.
그는 언제쯤 알아차릴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어딘가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나는 다 좋았다.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졌다.
잠시 뒤, 거실 문 손잡이가 천천히 내려가고, 백기가 들어왔다.
유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백기
난 그냥 네 초대를 받아들여서, 네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따라 걸었을 뿐이야.
그의 손이 내 등 뒤의 의자 등받이를 짚었다. 호박색의 바다는 이미, 아주 조용히 밀물처럼 차올라 있었다.
백기
네가 말했잖아. 너는 나만의 사냥감이라고.
유연
맞아요. 하지만 잊었나봐요. 선배도 마찬가지예요. 선배 역시, 나만의 사냥감인 걸요.
그리고 나는 운명의 손아귀에서, 선배를 빼앗아 올 거예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그의 모습이 내 시야를 완전히 채우게 했다.
유연
사냥은 사냥감에게 고통을 줘야 한다고 들었어요. 기억하게 하고, 복종하게 하려면 말이죠.
고통이 그를 살아 있게 만들테니까요.
나는 그가 전에 말을 달릴 때 쓰던 짧은 채찍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었다. 손목을 한 번 뒤집자, 채찍이 공중에서 부드럽고 느린 곡선을 그렸다.
손바닥을 움츠리자 채찍은 순순히 되돌아왔다.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채찍 손잡이의 매끈한 질감이 손끝에 닿자,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죽으로 된 채찍 끝이 소리 없이 그의 가슴을 스치고, 오른쪽 어깨를 지나 마지막에는 그의 얼굴에 가볍게 닿았다.
마치 똬리를 튼 방울뱀이 천천히, 유영하듯 움직이며 사냥감의 외피를 한 겹씩 벗겨내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혀는 분명 선홍빛일 것이다. 채찍 끝에 부딪혀 튀어 오른 그의 심장 박동이 미세한 진동이 되어 내 손바닥으로 되돌아왔다.
백기는 시선을 내려 가슴 위에 남은 그 작은 검은 흔적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들었을 때, 그의 미소에는 이미 위험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백기
그래.
백기
나는 그것으로 오래 살아왔어.
유연
그럼 더더욱, 내가 선배를 빼앗아야겠네요.
백기
어떻게?
그의 깊숙한 시선 속에서 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따라 백기가 운명과 맞서 싸워 온 흔적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너무나 많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어 왔다. 수없이 마주한 위험과 고통은 그 안에서 왕성한 생명력을 끌어올리며 그를 한 번 또 한 번,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위험은 늘 그를 향해 다가왔고, 그 또한 본능처럼 위험 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상관없다. 그에게는 그만의 신념과 책임이 있고, 나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한 그를 끌어안고 싶을 뿐이니까.
억눌린 낮은 신음이 내 귓가를 스쳤다. 마지막 입맞춤을 떨어뜨리고서야 내가 언제부터인가 백기 위에 걸터앉아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부끄러워할 틈도 없이, 내 허리 뒤로 감긴 팔이 예고 없이 단단히 조여 왔다. 다음 순간, 밀려드는 듯한 무중력이 나를 덮쳤다가 곧바로 다시 붙잡혔다.
백기의 무게가 그대로 내려앉으며, 나는 완전히 소파 속으로 눌려 들어갔다.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던 장식용 벨트가 누구의 움직임 때문인지 어느새 풀려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보았고, 그러자 눈앞의 사람이 내 손을 잡아 그 벨트를 완전히 풀어버렸다.
백기
그건 신경 쓰지 마.
그는 느긋하게 내 종아리를 받쳐 쥐고, 손끝으로 무심코 쓸어내리듯 문질러 잔잔한 간지러움을 일으켰다.
백기
계속해.
유연
간지러워요.
백기
그럼 참아.
공기가 우리에게 밀려나 작은 소용돌이를 이루고, 뒤엉킨 호흡과 심장 소리를 함께 감쌌다.
백기의 시선은 내내 내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몸을 숙이고 코끝이 거의 내 피부를 스칠만큼 가까이 다가와, 짓궂게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순간, 그에게서 느껴지는 숨결과 온기가 혈관 속으로 스며든 듯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지를 관통했고, 나는 내 몸이 웅웅거리는 울림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바람은 가슴 한가운데 머물렀다.
온몸이 달아올랐다가, 상쾌한 바람에 씻기며 마치 공중에 떠오른 듯한 감각이 들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손에 쥔 가죽 끈을 그의 살짝 숙인 목에 돌려 감은 다음, 다시 내 허벅지 안쪽으로 끌어와 우리를 하나의 곡선 안에 가두었다.
그와 너무 가까워, 나조차 그 밝고 거세게 넘실대는 호박빛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유연
선배, 정말 못됐어.
그토록 조용하고, 그토록 아무렇지 않게 굴어서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면 너무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
상처는 아물어도 여전히 조용히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운명과 생사의 경계에서 수없이 맞붙어 왔다는 것도, 영혼이 늘 저도 모르게 들끓고 있다는 것도.
그는 지나치게 위험하고 또 영혼은 너무도 아름다워, 한 번 마주친 순간부터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但他太过恶劣,灵魂又太美丽,叫人只看过一眼,就再 也无法忘记。)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손을 놓을 수 없고, 더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백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느긋하게 웃었다.
백기
그럼 내가 멈춰야 해?
유연
아니.
나는 그 호박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금속 버클에 걸려 있던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죽의 차가움이 피부를 눌렀지만 맥박이 뛰며 그 위로 뜨거운 떨림이 번져갔다.
유연
선배의 목을 물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야.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내 종아리를 받치고 있던 손가락 마디가 서서히 조여들며, 차갑고 단단한 반지의 감촉이 덮여와 미세한 통증과 부풀어 오르는듯한 감각을 안겼다. 나는 그 형태를 느끼며, 마치 그의 존재까지 선명하게 느끼는 것만 같았다.
백기
명령대로.
백기
내 모든 피와 살은, 오직 너만의 것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다리를 깨물었다. 끝없이 쫓아오던 사냥감을 마침내 붙잡은 것처럼, 입맞춤은 위로 이어졌다. 마치 피와 살에 새겨진 맹세처럼.
지나간 자리마다 짙고 옅은 흔적이 남았다. 그것은 선언이자 낙인이었다.
새벽빛이 모든 것을 비추었다. 나와 그의 전부를.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바라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백기
유연……
키스 속에 묻힌 이름은 유난히도 관능적으로 울렸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온 힘을 빼앗긴 듯했다.
계속 받쳐지고 있던 종아리가 점점 저리기 시작하자, 나는 무릎을 굽혔고, 곧바로 그는 다시 끌어당겼다. 심지어 벌주듯 한 번 더 깨물면서.
백기
이제 너에게 키스해도 될까?
유연
내가 안 된다고 하면요?
백기
그럼 나도 네 말을 따라야지.
그는 내 말에 맞춰 우리 사이에 살짝 간격을 두었다. 손가락이 무심코 내 종아리의 드러난 살결을 따라 천천히 위로 훑어 올라갔다.
다시 내려앉은 입맞춤은 아까보다 더 촘촘하고 유혹적이었지만, 매번 적절한 순간에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내 안의 모든 욕망을 이끌어냈다.
그의 가슴에 늘어진 목걸이가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며, 간질이듯 사람을 괴롭히는 궤적을 그렸다.
은은한 후광이 얽혀 있는 우리의 형상을 하나의 그림자로 녹여들어가게 할 때까지, 무언가가 공기를 스며들고 있었다. 소리 없이, 은밀하게. 마치 애초부터 떼어낼 수 없었던 것처럼.
나는 진작 알았어야 했다. 그는 결코 모범생인 적이 없었다는 걸.
유연
선배……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지만 내 목소리는 물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흐릿하게 번지며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백기는 내 애원하는 신호를 전혀 들은 체도 안했다.
그는 유혹하고, 인내하며, 마치 늑대처럼 나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노골적인 욕망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그가 나를 바라볼 때마다, 숨결이 더 거칠어질 때마다, 나는 그것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유연
선배, 정말……!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나는 우리를 감싸고 있던 가죽 띠를 힘주어 끌어당겼다. 그의 장난을 멈추게 하고서야 겨우 숨을 돌릴 틈을 얻었다.
백기
더 크게 말해.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지.
난 네 말만 들을 테니까.
말해봐,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반짝이는 눈동자에 유혹적인 빛이 스치며, 그는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으로 보였다.
나는 시선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 속에 빠져들어 기꺼이 복종하고 싶었다.
유연
선배, 나에게 키스해요.
내 목을 물어요.
거기가 내 약점이에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순식간에 나를 휘감았고, 짙은 욕정이 서로 엉켜 들끓었다.
그의 송곳니가 나의 목덜미에 걸리듯 닿아 서서히 조여들며, 마치 함께 내 안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미세한 압박감이 목덜미로 퍼져 나갔고, 마치 해일이 밀려오듯 거대한 전율을 일으켰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힘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한참을 어루만지다 조심스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백기
역시 못하겠어.

백기가 내 위에 몸을 기대고 있었고, 땀방울이 각진 턱선을 타고 내려와 애매모호한 은빛 선을 그렸다.
백기
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 어떤 고통도 네 몸에 닿지 않게 할 거야.
뒤이어 이어지는 것은 한층 더 탐욕스러운 갈망이었다. 밀려오는 파도처럼 거세게 몰아치며, 억누를 수 없는 숨소리와 낮은 신음을 쏟아냈다.
유연
이 바보야.
의식은 흔들리며 점점 흩어져 갔지만, 나는 여전히 본능적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유연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도, 선배가 책임져야 해요.
그런 점에선, 선배 늘 나쁜 놈이었잖아.
백기
하지만 난 널 사랑해.
유연
알아요.
나는 몸을 기울여 그의 목덜미에 남은 흉터에 입을 맞췄다.
햇빛 아래서 흔들리며 반짝이던 그의 귀걸이를 바라보다가,
그곳에도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유연
그러니까 그런 아픔들 숨기지 말고 전부 나한테 줘요.
내가 대신 안고, 계속 곁에 있을게요.
세상이 한순간에 가득 차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영혼은 점점 더 벌거벗겨졌고, 넘쳐난 심장은 고스란히 내 영혼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의 시선에는 더 이상 어떤 숨김도 없었다. 백기는 천천히 귀걸이를 빼냈다.
작고 은밀한 귀 구멍이 내 앞에 드러났다.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백기의 무언가가 벗겨져 나가는 것을 이토록 생생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백기
연아, 그곳에… 내게…키스해 줘. (悠然, 亲亲它……亲亲我。)
그의 눈동자에는 헤아릴 수 없이 격렬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그 여파에 내 심장까지 떨려 멈출 줄을 몰랐다.
나는 몸을 기울여, 그의 작고 은밀한 귀걸이 자국에 입을 맞췄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마치 그가 숨겨 온 또 하나의 상처에 키스하듯이.
그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팔이 더욱 세게 조여오면서 그 안에서 희미한 통증마저 전해졌다.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나는 마치 그 귀걸이 자국처럼 관통당한 기분이었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를 ‘가진’ 것 같기도 했다.
유연
선배, 사랑해.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받들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 안의 모든 갈등과 고통을 들여다보았다.
백기
이제야 알겠어. 네가 내 생명이었다는 걸.
고통이 나에게 계속해서 ‘살아 있음’을 증명해 줄 때, 나는 그것을 잊고 싶지도, 잊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 모든 것들이 네 웃음이 되고, 네 입맞춤이 되었고—
네가 되어버렸어.
유연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나는 그를 바라보며, 그의 숨을 내쉬고, 그의 입맞춤에 답했다.
백기
나는……
백기
영원히 너를 쫓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