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깊은 밤의 거리엔 고요함만이 감돌고, 매미 울음에 실린 밤바람 몇 줄기만이 가볍게 스쳐갔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집으로 향했다.
그러던 찰나, 밤바람이 마치 파도를 실어 나르는 듯했다.
뜨겁고 눅눅한 바닷물 내음이 눅진하게 번지며 코끝을 때리고, 끈적하게 들러붙어 등에 땀이 배어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심장이 조용히 빨라지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 습한 기운이 오는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
……너… 윽, 악!
극도로 협소한 골목길 바닥에 깔려 있는 희미한 그림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 한 쌍과 마주쳤다.
그는 캐주얼한 사복 차림에 얼굴엔 자잘한 찰과상이 있었고, 발로는 처참히 쓰러진 남자의 목덜미를 짓밟고 있었다.
달빛에 선명히 드러난 죽음의 형체가, 이 모든 장면을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위압으로 뒤덮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협박 현장인 줄 알았을거다.
그런데 그가 나를 본 순간 머리 위의 늑대 귀가 눈에 띄지 않게 살짝 바깥으로 젖혀졌고, 꼬리는 높게 치켜올라 불안하게 흔들렸다.
목덜미에 걸린 티타늄 실버 링이 은은히 빛났고, 그 복슬복슬한 긴 꼬리는 억제된 감정이 새어 나오듯 파르르 떨렸다.
??
살……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촉촉히 젖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유연
도움이 필요하세요?
바닥에 쓰러진 남자가 기뻐하며 고개를 들려 했지만, 다음 순간 다시 처참하게 짓눌려 눌려버렸다.
백기
집에 가. 돌아보지 말고.
그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간결했다.
목구멍 깊은 곳에 억눌려 울리는 듯한, 마치 심연을 흐르는 암류처럼 낮고 깊었다.
그를 너무 잘 알기에, 나는 그 명령엔 어떤 협상 여지도 없다는 걸 첫 순간에 알아차렸다.
짠내 나는 바닷바람의 향이 지나치게 진해서 머물고 싶을 정도였지만, 나는 억지로 그리움을 삼키며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몸속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듯, 그의 향기를 조금만 더 오래 머금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향은 좀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희미하게 느껴지는 누군가의 시선, 누군가가 멀찍이서 조용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멈추면, 그도 멈췄다. 내가 웃으며 뒤로 물러서면, 그도 함께 물러섰다.
밤은 조용히 밀려들었다. 나는 가로등 그림자를 밟고, 보도블럭의 가로선을 밟으며 이 밤을 더 길게 늘이고 싶었다.
그 순간,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백기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유연
평소처럼 야근했죠. 메시지도 남겼는데요?
유연
그래도 야근하길 잘했네요. 백 형사님 야근이랑 겹쳤잖아~
백기
너무 늦었잖아.
유연
에이, 백 형사님도 집에 안 가잖아요. 저도 일로 달래는 수밖에 없어요.
아니면 집에 가도 온통 선배 냄새뿐이라 더 보고 싶어질 텐데.
나는 억울한 척하며 조심스레 떠봤지만, 돌아온 건 고요한 숨소리뿐이었다.
마르지 않은 파도 냄새가 공기 속에 스며들어, 그의 망설이고 억눌린 걸음을 막아섰다.
오랜 침묵 끝에 그의 목소리가 마침내 낮게 울렸다.
백기
이번엔 다르니까.
백기
……
백기
……너도 알고 있잖아.
그 말은 마치 불씨처럼 심장을 스치고, 한순간에 뜨거운 기억을 머릿속에 피워냈다.
온몸이 순간적으로 뜨거워졌고, 나는 무의식중에 손끝을 목덜미로 가져갔다.
백기는 어둠 속에서 조용하고 느릿하게, 마치 자신의 존재감을 완전히 숨기기라도 하듯이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도 밤은 조용히 부풀어 오르는 바다처럼, 소리 없이 밀려드는 압박으로 내 입을 막아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달빛 아래,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그 조용한 침묵 속에서, 그는 나와 함께 집으로 걸어갔다.
유연
얼굴은 왜 그래요? 다친 거예요?
백기
방금 네 냄새 맡고 잠깐 정신이 나갔어.
유연
요 며칠 일 진짜 많았죠?
백기
많았지. 요즘 사람들은 쉽게 이성을 잃으니까.
백기
다른 사건들을 처리하기엔, 지금이 좋은 시기이기도 해.
지난번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 Evol 변이는 이번엔 훨씬 더 심각했다. 도시 전체를 휩쓴 이 열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타인'을 갈구하게 됐다.
하지만 그것이 불러온 것이 전부 아름답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극단적으로 집착하며 다가가는 이들이 늘었고, 그로 인한 악성 사건들도 많아졌다.
그 결과, 변이가 사라지거나 특효약이 개발되기 전까지, 특파팀 모두는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유연
그럼 선배는 괜찮아요? 요즘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죠?
백기
컨트롤할 수 있어. 쉬었고, 잠도 잤어.
유연
지금 거짓말하는 거죠? 안 믿어요.
유연
목에 그건 뭐예요? 새 통신 장비?
백기
억제기야.
백기
우리 쪽에서 개발한 거야. 출동 중에 사고 나는 걸 막으려고.
유연
이거 엄청 첨단이네! 근데… 착용하면 불편하진 않아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바람 소리만 살짝 스쳐 지나가며, 그 침묵이 어떤 대답처럼 느껴졌다.
유연
지금 좀 불편한 거죠? 사실은 말하고 싶지 않은 거 아니에요?
백기:
응. 근데 네 목소리는 듣고 싶어.
유연:
그럼 내가 말할테니 그냥 잘 들어주면 돼요.
밤의 대화는 느릿하고 부드럽게 이어졌고, 나는 소소한 이야기를 조각조각 나눴다.
백기에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그는 거의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침묵엔 충분한 평온과 기쁨이 담겨 있었다.
길은 결국 끝이 있었고, 나는 한 바퀴를 돌아 집 앞까지 도착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귀에 걸리는 듯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나 보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끝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둠은 그의 얼굴을 감싸 윤곽을 흐리게 했지만, 그를 또 다른 밤으로 만들어 놓았다.
마치 억눌린 끝에 폭발할 듯한 감정이,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는 그 시선 따라 한 치 한 치 내게로 밀려들었다.
나는 분명히 그를 똑바로 볼 수 없었는데도, 마치 바다 아래 흐르는 거센 암류에 손끝이 스치는 듯했고
혹은, 어쩌면 그 감정이 나를 스쳐간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다 본능적으로 발걸음이 살짝 흔들리려는 찰나, 더 깊고 억눌린 바람이 갑자기 몰아쳐왔다.
그의 모습은 온전히 그 바람 속으로 사라졌고, 남은 건 귀에 아련히 맴도는 속삭임뿐이었다.
백기
잘 자.
2장
나는 잘 안다. 백기는 어떤 때는 정말 치명적일 정도로 벅차다——특히 우리 사이의 일에 관해서라면 더더욱.
현재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해, 나는 서둘러 모든 촬영 일정을 마무리하고, 전 직원에게 휴가 지시를 내려 잠시 일손을 멈추게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백기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해보려던 찰나,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낯선 택배 상자를 들고 있는 내 손 위로, 휴대폰 화면에 생소한 번호 하나가 떠올랐다.
??
안녕하세요, 유연 씨 되시죠?
늦은 밤, 특파팀 본부에는 여전히 불빛이 환했다. 나는 백기의 외투를 걸치고 차에서 내려, 손목의 은빛 반지와 체인과 스치며 작은 마찰음을 냈다.
나는 고개를 숙여 화면을 확인하고, 방금 전화에서 들은 지시에 따라 건물 모퉁이에 숨겨진 한 ‘특별 통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통로를 따라 무인 복도를 지나, 끝에 위치한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정면의 대형 스크린에 코끼리 귀 같은 장치를 머리에 단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남자
안녕하세요. 이런 방식으로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제대로 설명도 드리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의 약속을 정확히 이행해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유연
과찬이세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요.
샤워 후 백기의 외투를 입고, 최대한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도록 하며, 택배 상자 안의 손목 장치를 착용한 뒤 특별 통로를 따라 세 번째 복도의 끝까지 이동. 그게 전부였다.
차이펑
이번에 이렇게 비공식적으로 초대한 이유는 그와 관련된 상황에 대해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입니다.
차이펑
유연 씨, 혹시 피비린내 나는 장면도 괜찮으신가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백기와 관련된 일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과 동시에, 화면이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백기는 차가운 표정으로 철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몸에 밀착된 흰색 민소매 셔츠는 날렵하고 정돈된 근육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의 걸음은 묵직하면서도 느렸고, 설명이 필요 없는 위험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가 어둠 속 바닥 위에 발을 딛는 순간 공기 전체가 반 뼘 정도 꺼져 내려가는 듯한 위압감이 몰려왔다.
차이펑
지금 유연 씨가 착용하신 손목 장치는 체취를 차단하는 기능이 있어서, 그가 당신의 기척을 느끼진 못할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순간, 희미한 시선이 카메라 쪽을 스치듯 지나가더니, 내 눈과 맞닿았다.
그 눈빛은 모든 감정을 걷어낸 듯했지만, 나는 분명히 무언가에 '포착된 느낌'을 받았다.
백기
B-7, 도착.
그는 곧 시선을 돌리고, 팔을 한 번 움찔였다.
백기
투입해.
그 무심한 한마디가 어둠을 가르듯 터졌고, 거친 황야 같은 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면은 거칠게 갈라져 있었고, 그 균열은 마치 지옥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았다.
그 적막한 등줄기는 황야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고, 발밑의 모래바람이 갑자기 떨리는 순간 멀리서 날카로운 포효가 울려 퍼지자, 그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손바닥을 폈다.
유연
…이곳이 당신들의 모의 훈련장인가요?
차이펑
네, 유연 씨도 한 번은 오셨던 곳입니다.
음울한 공간 속, 사방에서 변이된 그림자들이 몰려들었다. 끝자락의 긴 꼬리는 강철 채찍처럼 휘날리며, 중앙을 향해 날뛰듯 돌진해왔다.
하지만 백기는 아무런 동요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숨결은 너무도 고르고 안정돼서, 오히려 불안감을 자아냈다. 마치 지금 막 칼집에서 튀어나올, 벼려진 날 같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괴물이 그의 눈앞까지 달려들었다. 끈적한 점액이 묻은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목을 정통으로 노렸다.
나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백기는 눈 깜짝할 틈도 없이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고, 곧바로 오른쪽 다리로 날카롭게 옆차기를 날렸다.
“크드득” 묵직한 소리와 함께, 괴물의 무릎이 반대 방향으로 꺾였고 그 거대한 몸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괴물은 온몸을 떨며 일어나려 했지만, 그 꼬리는 이미 백기의 손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백기는 팔 근육을 단단히 조이며, 그대로 뒤로 거칠게 당겼다. 순간, 괴물의 꼬리는 통째로 뜯겨 나갔다.
검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와 사방으로 튀었고, 그 차디찬 호박빛 눈동자 위로 그대로 흘러내렸다.
백기
내 중력 수치, 더 올려.
그는 그렇게 말하곤, 가시가 돋친 괴물의 꼬리를 차갑게 휘둘러, 땅에 나뒹구는 머리를 그대로 꿰뚫었다.
그다음엔 아무런 표정 없이 손에 들린 잔해를 툭 내던지고, 몸을 살짝 숙이더니—— 마치 하나의 난폭한 칼날처럼, 괴물 떼 속으로 거칠게 돌진했다.
그 순간, 생과 사의 경계는 그에게 단지 하나의 놀이처럼 보였다.
그는 일부러 적의 치명적인 공격 범위 가장자리를 스치듯 유영했고, 그 후엔 가차 없이 폭력적이면서도 정밀하게, 급소를 찔러넣었다.
그 모습은 마치 태생부터 살인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처럼, 어떤 망설임도 없이 생사의 판결을 내렸다.
백기
더 올려.
그는 뒤틀린 조직 위를 밟고 지나가며, 아무런 감정 없이 사냥감의 머리를 꿰뚫었다.
나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순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차이펑
유연 씨, 제 추측이 맞다면…혹시 백 대장이, 당신을 ‘마킹’한 적이 있습니까?
유연:
……변이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가…… 날 물었어요. 하지만 그게 ‘마킹’인지 아닌지는…… 저도 확신이 없어요.
말하면서 나는 천천히 목덜미 뒤로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손끝이 그 자리를 스칠 때마다 아직도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차이펑
흔적이 꽤 깊네요. 당시 출혈도 있었겠죠?
차이펑
억제링의 본래 목적은 대원이 임무 중 이변 상태에 빠지는 걸 막기 위해서이며, 동시에 이번처럼 특수한 신체 데이터를 기록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차이펑
그래서 우리는 대원들에게 억제링을 한 번 착용할 때 최대 10시간을 넘기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고, 교대 시에는 반드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차이펑
하지만 백 대장은 벌써 210시간 넘게 계속 착용 중입니다.
스크린 속 백기는 잔해로 쌓인 폐허 위에 서 있었다. 검게 들끓는 괴물 떼가 그를 덮치고 있음에도, 그 눈동자에 깃든 살기는 흐려지지 않았다.
부패한 공기에 젖은 학살자. 그는 침착하고 냉정한 리듬으로, 괴물 하나하나를 조각내고, 찢긴 조각들을 차가운 몸짓으로 뒤로 던졌다.
그건 단순한 전투가 아니었다. 숨결을 으스러뜨리는 파괴였고, 살을 짓이기며 조롱하듯 강을 이루는, 검고도 폭력적인 광기였다.
그 와중에도 백기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엔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는 단지,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냉정하고, 잔혹하며, 거의 기계와도 같은 원초적 집중과 파괴 본능으로.
백기
모든 수치를 최대로 올려.
차이펑
이미 한계치입니다, 백 대장님.
백기
그럼, 다시 조정하라고 해.
그는 잘려나간 팔다리와 부서진 뼈를 밟고 지나갔다. 여기가 단지 시뮬레이션일 뿐인데.
나는 그 안에서, 피와 썩은내가 뒤섞여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차이펑의 한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유연:
차이 교수님……
차이펑
억제기를 진짜 ‘억제기’답게 쓰는 사람은…… 백 대장뿐입니다.
차이펑
당신들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유일한 ‘해결책’인 당신을 스스로 포기했어요.
차이펑
억제기는 계속해서 그의 행동을 억누르고 있고,
그 결과로 그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백기는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고, 그 자리에 검은 무늬들이 남았다.
마치 죽음을 그려낸 광란의 장식처럼, 그의 얼굴을 덮어갔다.
백기
한 번 더.
차이펑
……
백기
차이펑,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다시 한 번, 그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황량한 세계가 또다시 초기화되었고 사냥의 포효가, 끝없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차이펑
사실 백 대장은 그동안 팀 내 심리 테스트에서 항상 S+ 등급이었고, 스트레스 내성 지수 역시 S+였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요.
차이펑
그만큼…… 마음이 정말 강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바로 그 강함이——
그 순간, 왜인지 모르게 수많은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끌려 들어갔던 그 방. 침묵과 어둠 속에 버려진 맥주 캔들. 좁은 바의 뒷통로. 그리고 꿈에서 본 철창 속 감옥까지——
나는, 그가 천 조각처럼 자기 팔을 찢어내는 모습을 보며 가슴 한쪽이 쓰라리게 저려왔다.
유연
이번 주 내내…… 계속 이런 상태였던 건가요?
차이펑
그렇다고 봐야죠. 일상적인 임무 수행엔 전혀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모의 훈련에만 들어가면 저렇게 됩니다.
차이펑
그 외에도 개인 훈련을 계속하고 있어요. 사격, 권투 같은 것들요. 그런데 수면 지수는 기준치를 한참 밑돌고 있습니다.
차이펑
솔직히 요즘엔 아무도 감히 그를 제어하려 하지 않아요.
나는 웃음을 삼키듯 피식 웃었다. 한참을 화면만 바라보다가, 머릿속을 정리한 듯, 손목에서 손쉽게 억제기를 떼어냈다.
그러자 그 순간 세상이 조용해졌다.
백기가 움직임을 멈췄다. 피범벅이 된 무언가를 천천히 놓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유연
차이 교수님, 선배의 사격 훈련실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제가 직접 가도 될까요?
차이펑
최근엔 전용 훈련실에서만 머물고 있어요.
루일이 문 열어줄 겁니다. 그가 도와줄 거예요.
차이펑
다만, 미리 말씀드려야 할 상황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결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유연
괜찮아요. 알고 있어요.
차이펑
고맙습니다, 유연 씨.
유연:
별말씀을요. 그 사람은 여러분에겐 지휘관일지 몰라도, 저한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방을 나선 나는, 전화로 들은 루일의 안내에 따라 작은 사격 훈련장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짙고 진한 바다소금 향이 마치 날 한 걸음씩 바다 속으로 이끌었다.
나는 안쪽 벽에 등을 기대어, 아무렇지 않게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 향기에, 그 공기에, 천천히 몸을 맡긴 채.
멀리 조용히 서 있는 표적을 바라보며, 문득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유연
……원래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한참이 지난 뒤, 열려 있는 그 문을 바라보며 나는 또 한 번 생각했다.
3장
마치 방금 전의 어둠에서 떨어져 나온 그림자처럼, 백기는 천천히 걸어왔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로 훈련실은 단숨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입고 있던 민소매 셔츠는 이미 땀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어선 근육의 결마다 주름지고, 붙었다가 다시 팽팽히 당겨졌다.
그는 말없이, 내게서 몇 걸음 떨어진 지점에 멈췄다. 긴 꼬리는 바닥을 끌며 늘어졌고.
눈꼬리의 붉음이 얼굴 전체로 번졌다. 금빛에 짙은 그을음을 품은 호박색 눈동자 속에는, 초점이 흐릿한 어둠이 번져 있었다.
습하고, 억눌린 듯하며, 위태롭고 위험한 기운. 한순간 스치기만 해도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묵직한 감정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백기
네 향이 갑자기 짙어졌어…… 손목 밴드 때문이야?
백기
그건 특별 허가 사항인데, 넌 샤워도 했고, 내 외투도 걸쳤네.
백기
차이펑이 널 불렀군. 너한테선 그의 냄새가 안 나.
백기
그가 널 데려와서, 뭘 보여줬지?
유연
……
곧 정신이 끊어질 것 같은 열기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 열기는 내게도 옮아붙었고, 나는 더 이상 감추려 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유연
선배가 괴물들의 꼬리를 찢고, 머리를 짓이기는 모습.
유연
이렇게 묻는 걸 보니 알겠지만, 사실 내가 특파팀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미 눈치챘잖아.
유연
그래서 난 그게…… 나 보라고 한 줄 알았어.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 속에서,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백기
그냥 추측이었을 수도 있어. 착각이었을 수도 있고.
유연
선배의 직감은 늘 맞았지. 게다가 선배는 멈추지 않았어. 수치까지 높이려 했잖아.
유연
그런 충동…… 나한테도 느낀 거야?
백기
내가 진짜로 죽어서 악귀가 된다 해도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스스로를 끝냈을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거의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바닥을 스치는 긴 꼬리는 살짝 곤두선 털끝을 드러내며, 어둠 속에서 더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백기
하지만 넌 봤잖아.
출구 없이 터져버릴 듯한 폭력성과 분출, 마치 그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은 원초적인 죄를.
백기
넌 그 손목 밴드를 벗었으면 안 됐어.
그는 천천히 다가왔다. 숨결마저 뜨거운 열기를 밟으며.
이제 나와의 거리는 그림자 반 뼘 정도. 하지만 그 존재는 마치, 나를 완전히 덮쳐 오는 것 같았다.
백기:
설령 벗었다 해도…… 여기에 남았으면 안 됐어.
그는 무릎 한 쪽을 꿇으며 자세를 낮췄고, 목소리 또한 낮게 깔렸다.
귀가 살짝 뒤로 젖혀진 모습은, 마치 앞발을 낮게 붙인 맹수와도 닮아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선을 따라 목덜미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를 감싸던 그림자는 어느새 무게를 가지기 시작했고, 차가웠던 그의 시선은 거칠고도 광적인 포옹으로 변모해 나를 휘감았다.
몸을 감싸 안은 실루엣은 격렬한 키스와 얽히며 타올랐고, 변이가 막 시작됐던 그 순간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잊은 듯 오직 짙고 점착된 욕망의 마찰만이 남았다.
원초적인 본능이 모든 걸 지배했고, 그 안에서 오직 하나—서로에게 미치도록 빠져드는 감각뿐이었다.
뜨거운 파도가 끊임없이 몸을 휘감았고, 해풍과 햇살의 향기는 벗겨진 채 더욱 진하고 무모한 바다로, 나를 완전히 휩쓸었다.
백기
……!
그 순간, 뒷목에 날카롭고 격렬한 통증이 퍼졌고 그 고통이 쾌감으로 치환되어 퍼져나가는 와중에도, 그의 눈동자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선명히 깃들어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피에 젖은 목덜미를 물었다. 모든 어지럽고 불안정한 감각이, 그 순간 완전히 지워졌다.
그는 거의 한순간 만에 모든 걸 정리해냈고, 스스로도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눈앞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바보 같아서—그런데도 자꾸 웃음이 났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체온 탓인지, 나 역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마 차이펑 교수가 말했던 증상이 내게도 나타난 걸지도 모르겠다.
유연
선배, 내가 오늘 여기 온 이상 돌아갈 생각은 없어.
유연
선배가 열나는 거 알아. 그리고 선배도 알잖아, 나도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니야.
유연
이렇게 버티기만 해선 아무것도 해결 안 돼. 우리 사격 시합하자. 이기는 쪽 말 듣기. 어때?
백기는 나를 힐끗 보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어떤 스위치를 눌렀고, 튀어나온 거치대에서 총을 집어 들었다.
“탕.”
“탕.”
“탕.”
그 황금빛 눈동자는 살짝 흐트러졌지만, 오히려 무서울 만큼 고요했다. 마치 과열됐으나 꺼지지 않는 무기처럼.
갑자기 나타난 표적 앞에서도,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 없이도 정확했다. 모든 총알이 중심을 꿰뚫었고, 정갈하게 뚫린 탄흔은 중심부에만 겹쳐 있었다.
유연
……와.
나는 그만 감탄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그 털북숭이 꼬리 끝이 살짝 들려올랐다.
아마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겠지. 고요히, 과녁 앞에 서서 단조롭고 조용하게, 계속해서 반복하는.
왜인지, 갑자기 묘하게 매혹적인 향이 스쳤다. 몸의 온도도 함께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유연
선배, 이런 땐 살짝 져주는 게 매너 아냐?
백기
넌 이길 가능성 없어.
그는 일부러 날 보지 않으려는 듯, 쿨하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자리를 비켰다.
유연:
그래? 그건 해봐야 아는 거지.
나는 총을 집어 들고, 과녁을 향해 휴대폰 화면의 버튼을 눌렀다.
다음 순간, 멀리 있던 타깃이 내 앞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그의 가늘게 좁힌 시선 아래, 나는 정확히 과녁 한가운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유연
어라~ 백 대장님, 딱 10점이에요~
그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롭고 불편해졌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유연
너무 빨리 쐈잖아.
유연
내가 규칙을 정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도 없었잖아?
그러곤 나는 다음 순간, 표적 바깥을 향해 몇 발을 더 쐈다.
결과는 0점. 백기는 그대로 멈춰 서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연
이게 내 대답이에요.
유연:
마치 선배가 언제든지 나를 이기게 해줄 수 있었던 것처럼, 나도 똑같이 그럴 수 있어.
나는 총을 내려놓고 돌아서며 말했다.
유연:
그러니까 선배 말 들어줄게요. 설령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해도 말이야.
그 순간, 눈을 깜빡일 틈도 없이 세상이 휘청였고 나는 벽에 밀착되었다.
넓은 손이 내 등을 단단히 떠받쳐, 거친 충돌의 통증을 지워냈다.
거칠어진 숨결이 귀를 타고 흘렀고, 그 커다란 그림자가 날 완전히 품 안에 가두었다.
이토록 가까이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그의 체온이 무서울 만큼 뜨겁다는 걸.
백기
……다른 사람 냄새가 나.
유연:
지금, 선배 외투 입고 있는데?
백기
내 말은, 나한테서.
백기
네 걸로 덮어줘.
뜨겁게 달아오른 숨결이 부드러운 입맞춤을 타고 흘러, 내 귓끝에서 이마, 이어 눈썹과 눈가, 코끝까지 조심스레 스쳤다.
무릎 위의 은색 고리가 반짝였고, 그 끈적한 호박빛 눈동자와 함께 내 시야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유연
안 풀어줄 거야?
백기
내 말 먼저 들어.

그의 입맞춤이 천천히 내 입술까지 닿아오자, 뜨거운 숨결이 천천히, 그리고 오래도록 스며들었다.
이따금 스치듯 얽히는 혀끝과 젖어 있는 숨결이 하나로 엉겨 들며, 모든 것이 마치 느리게 재생되는 듯 천천히 풀어졌다.
그 전처럼 격정적으로 치닫는 감정이 아니라, 이번 키스는 애틋하고도 부드럽게, 길게 이어졌다.
매우 천천히 얽히고 끌어당기는 움직임이 길게 이어지며, 짙고도 끈적한 숨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숨결은 억눌린 숨과 겹쳐져 더 깊은 울림이 되었다.
그의 입술과 혀가 더 깊이 파고드는 걸 따라가며, 내 발은 무의식중에 그의 꼬리 밑동을 밟았고, 자연스럽게 높이 치켜든 긴 꼬리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거칠고 마른 꼬리털이 자꾸만 내 몸을 스치며 휘감았고, 때로는 나를 푹 감싸 안으며, 온몸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백기
너한테서 내 냄새가 가득 나…… 좋아.
짭조름한 바닷내음에 달콤하고 짙은 기운이 섞여, 부드럽게 밀착된 움직임을 따라 우리 둘을 흠뻑 적셔왔다.
그가 다시 벽 위로 손을 짚는 순간, 나는 거의 그의 몸과 벽 사이에 끼이다시피 했다. 그는 나를 가두고선,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내 이마에 이마를 살짝 대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유연
그럼, 내가 먼저……
백기
내 말 듣기로 했잖아.
낮고 쉰 목소리가 키스에 얹혀 입속으로 파고들었다.
부드럽게 울리는 물소리와 함께 목울대 아래로 스며들었다.
백기:
말 들어.
4장
내가 눈을 떴을 때, 백기의 사무실 안쪽 방에 누워 있는 것을 깨달았다.
몸 안의 불편함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지만, 정작 그 모든 일의 주범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느새 오후가 되어 있었고, 4시간 전에 온 차이 교수가 남긴 메세지를 확인했다.
차이펑
유연 씨, 백 대장의 데이터는 좀 안정됐지만, 여전히 고열은 가시지 않았어요.
그는 오늘 퇴근 후 처리할 일 끝나면 연락 준다고 했습니다.
차이펑
유연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 아직 특파팀에 있으신가요?
가능하다면 당신도 건강검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백 대장의 상태가 혹시라도 당신에게 영향을 줄까 걱정되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고, 간단히 정돈한 뒤 방을 나섰다.
창밖에는 언제부터인가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빗줄기는 옥상 끝에 고여 있던 물기를 따라 한 줄기 탁한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백기는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았다.
그걸 보니, 아마도 나를 자유롭게 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유연
역시 처음부터 묶어놨어야 했나……
무력 차이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외투를 걸치고 우선 식당에 가서 밥부터 먹기로 했다.
그런데 몇 걸음 나가지도 않았을 때, 마침 귀환하던 고진과 팀원들이랑 딱 마주쳤다.
전원 임무를 막 마친 듯,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런데 나를 본 순간, 그들 전부가 동시에 깜짝 놀라 한 걸음에 훌쩍 물러서더니, 눈을 크게 뜨고는 각양각색의 꼬리들을 정신없이 흔들기 시작했다.
일행들
……?!
유연
……?
고진
유연 씨, 여기서 뭐 해요? 백기 그 자식, 귀환하면 당신을 찾으러 간다더니?!
유연
…네? 어제 선배를 만나러 온 거라 선배도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는데……
그 말을 들은 순간 멍해졌다. 가슴이 턱 막히더니,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바로 그때, 누군가 빠르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인물이 급히 나타났다.
차이펑
고 대장, 백 대장의 제한링이 세 가지 전부 비활성 상태예요. 위치 추적도 꺼진 것 같습니다… 임무 중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고진
아니, 별일 없었는데… 혹시 방금 체포하면서 뭔가 건드린 건가?
고진
하, 진짜 골치 아프네. 그냥 일찍 처리하게 둘걸. 임무 빠진 지 최소 한 시간은 됐을 거야. 이런 비 오는 날에 숨기라도 하면, 그놈 진짜 못 찾지.
고진은 욕을 내뱉으며 골치 아픈 듯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결국엔 전부 나를 바라봤다.
내 눈앞에 자꾸만 떠오르는 건, 그 고집스럽던 눈빛이었다.
답답함이 가슴 가득 차오르고,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이 스며들었다.
유연
자기 상태를 모를 리가 없어. 말하지 않는 건, 결국 혼자 짊어지겠단 거지.
백기가 먼저 다가오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매번 내가 밀어붙이고 강제로 마음의 벽을 넘게 만들 순 없었다.
고요한 휴대폰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백기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들려오던 빗소리는 차단되고, 방 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소파에 앉아 옆에 놓인 백기의 외투를 바라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몇 번 세게 두드렸다.
유연
알았더라면, 그냥 안 져줄 걸……
마치 그 말을 들은 듯,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며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거센 숨소리와 함께, 빗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거칠고, 빠르며, 온통 뒤섞여 어지럽게 흔들리는 숨소리. 마치 어느 벼랑 끝에서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는 듯한, 위태로운 진동.
유연
……선배.
백기
……
그는 마치 크게 숨을 들이쉬려 한 듯했지만, 떨림을 억누르지 못했다.
백기
연아.
백기
……내 옆으로 와 줘.
백기
내 곁에 있어 줘.
그가 짧게 남긴 주소를 듣고, 나는 곧장 택시를 불렀다. 동시에 간단히 차이 교수에게 연락을 남기고, 거의 달리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연
기다려! 비도 많이 오고 차도 좀 느려…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내가 도착하면……
백기
전화 끊지 마.
백기
네 목소리를 듣게 해 줘.
습한 공기가 속눈썹까지 스며들 듯 번져왔다. 나는 살짝 입가를 문질렀다.
유연
그럼 다음엔 좀 더 일찍 전화해 줘야 해.
백기
얼마나 일찍?
유연
아주 일찍… 그러니까 아예 전화를 걸 필요도 없고, 집을 나올 필요조차 없는 그런 때였으면 좋겠어.
백기
……
그는 잠시 숨을 죽인 듯했지만, 곧 거칠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 빗소리와 함께 섞여서.
30분쯤 후, 나는 반쯤 영업을 멈춘 듯한 낡은 단칸주택 앞에 도착했다.
폭우가 철제 처마 위를 때리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차가운 불빛이 간헐적으로 깜빡이며 먼지 낀 창틀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 틈에 어렴풋한 그림자가 비쳤다.
비의 기운은 희미한 바다 소금 냄새를 머금고, 어두운 복도와 계단 사이를 파고들었다.
귓가에는 점점 더 깊어진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그걸 따라 본능적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빗속의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길게 이어진 계단 앞에 멈춰 섰을 때, 구석을 막고 있는 상자 더미들이 보였다.
나는 백기의 냄새를 맡았고, 그가 견디지 못하고 내뱉는 숨결을 느꼈다. 그리고 비를 타고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백기
……
나는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 걸음씩 그에게로 다가갔다.
종이 상자들을 하나하나 옮기고 나서야, 나는 비 속에 숨겨진 고립된 작은 섬 같은 공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단정했던 그의 옷은 모두 흐트러져 있었고, 흐느적거리듯 어깨에 걸쳐진 채 어딘가 혼란스럽고 조급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텅 빈 거리 위를 두드리며, 그의 어깨와 젖은 머리끝, 충혈된 눈가, 그리고 살짝 엎드려 있는 두 귀 위로 세차게 내리꽂혔다.
젖은 옷자락 사이로 물방울이 흘러내렸고, 그 물은 그의 쇄골을 타고, 거칠게 드러난 탄탄한 가슴을 지나, 숨겨진 복부 선 안으로 스며들었다.
백기는 젖은 넥타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 축축한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마치 무의식적으로 뜨거운 체온을 따라 몸 위를 더듬었고, 차갑고 단단한 금속 장식이 피부를 스치며 옅은 붉은 자국들을 남겼다.
긴 꼬리는 견디지 못한 듯 이리저리 스치듯 휘날렸고, 그 움직임은 공기를 은근하게 문질러 모래가 긁히는 듯한 미세한 소음을 만들었다.
그 속에는 억제된, 그러나 지울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
백기
우산은 왜 안 썼어?
초점 없는 그 눈동자는 거의 동시에 나를 인식하더니, 곧장 나를 응시했다. 마치 집요하게 억누르듯 시선을 놓지 않았다.
목줄이 끊긴 듯, 넘쳐오르는 욕망이 그의 눈 안을 가득 메웠다.
마치 어둠 속에 숨은, 위험하면서도 아름다운 야수 같았다.
유연
까먹었어.
유연
필요해?
백기
난 너만 있으면 돼.
그는 여전히 앉은 채였고, 안달 난 듯 휘젓던 꼬리는 어느새 내 신발 밑에 깔려 멈춰 있었다.
백기
잠깐, 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드물게 그를 내려다보는 위치였다.
그의 호흡이 즉시 흐트러졌고, 턱을 본능적으로 움츠린 채 낮고 거친 숨을 흘렸다.
백기
더러워.
유연
더럽지 않아.
나는 그의 입술 가까이 다가가, 넥타이를 물고 있던 입술을 살짝 핥았다. 괜히 웃음이 피어올랐다.
유연
선배가 나보고 오라고 했잖아. 말했으면 지켜야지.
유연
난 선배를 만나러 왔어. 백기, 나 여기 있어.
빗물이 그의 뜨거운 체온에 스며들 듯 퍼지고, 그의 손이 본능적이고도 강하게 나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백기
…미안해.
그 목소리는 아주 작았고, 마지막 남은 이성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듯했다.
백기
……미안해.
그가 내 입술 가까이에 고개를 묻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짙고 격렬한 눈빛 속에서 마침내 모든 게 드러났다.
욕망, 광기, 집착, 그리고 아주 희미한 좌절과 자기 혐오까지.
유연
차이 교수님이 그랬어. 선배의 심리 테스트는 늘 S+, 압박감에 대한 저항도 S+, 그만큼 선배의 마음은 정말 정말 강하다고.
백기
…미안해.
백기
나, 널 상처 입히는 일밖에 못 하는 것 같아.
백기
매번… 매번… 항상 너야.
나는 조심스레 백기의 얼굴을 쓰다듬고, 그 머리를 다시 한 번 다정히 만졌다.
유연
그때 우리가 차이 교수님 말 듣고 생각했지.
선배는 정말 강하긴 해. 하지만 그거 말고는……
유연
선배는 그냥 더 잘 참는 거야.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 익숙해진 거고.
가끔 너무 조용하고 용감해서, 선배도 아프고 힘들다는 걸… 사람들이 자꾸 잊는다.
백기
그런데도… 너만큼은, 정말로 상처 주기 싫었어.
우리는 마치 대화를 나누는 듯했고, 또 마치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뜨거운 온기가 서로의 몸에 얽히며 퍼졌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이마를 그의 이마에 살짝 기대며, 그의 눈동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유연
하지만 선배는 분명, 날 사랑하잖아.
백기
사랑해.
그의 입술이 내게 닿았다. 빗물과 엷은 땀이 뒤섞여 그를 적셨고, 그 열기는 점점 더 짙어져 눈가까지 붉게 물들였다.
유연
그럼 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다 변이 탓인 걸로 하자.
유연
무서워하지 마. 우리 그냥 다 그 탓으로 돌려버리자.
그의 미소가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들려왔다.
백기
변이가 막 시작됐을 때도 그런 생각 했었어.
백기
많은 문제를 처리할 때, 그건 꽤 괜찮은 변명이 되니까.
백기
그리고… 나중에도 그랬지.
그는 마침내 뭔가를 내려놓은 듯 보였고, 거칠고 뜨거운 손끝이 내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백기
하지만, 넌… 달라.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고, 곧 그의 혀가 내 입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서로의 입술 안에서 맴돌고 얽혔다.
끈적한 빗소리가 마치 귓가에 속삭이듯 퍼졌고, 물방울들이 서로 부딪히고 뒤섞이며 마침내 하나로 섞여들며 흐릿한 젖은 소리를 냈다.
그의 눈은 단 한순간도 나를 놓치지 않았고, 사랑에 탐닉하는 키스 속에서 그의 동공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수축되었다.
거센 파도가 갑자기 몰아닥치듯, 그의 감정이 나를 단숨에 삼켜버렸다.
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 내 숨결마저 전부 빨아들이며, 우리는 서로에게서 벗어날 틈조차 없었다.
백기
완전히 젖었네…
백기
비가… 너무 많이 와.
그의 목소리는 이제 더는 억누를 수 없는 떨림으로 번졌고, 며칠간 유지해오던 평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뜨거운 물결이 거칠게 몰아치며 우리 사이를 뒤덮었다.
백기
춥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건지조차 모를 만큼, 내 머릿속은 이미 흐릿했고, 나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더욱 깊이 품에 안았다.
그의 손끝이 내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스치며 끊임없이 닿고 또 닿았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간, 뜨겁게 달아오른 숨결이 닿았고, 격렬하게 밀려오던 파도와는 다른,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살짝 날카로운 송곳니가 장난치듯 살짝살짝 스치며 손끝과 함께 내 피부 위를 오갔다.
그 자극에 머리끝이 찌릿하게 떨리며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백기
내 흔적이…… 아주 뚜렷하게 보여.
백기
아직도 아파?
유연
……처음부터… 아프지 않았어.
나는 거의 모든 정신을 다 짜내야 그의 요구 속에서 간신히 내 목소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순간, 마치 바닷물이 한순간에 들이닥친 듯 짙은 바다 안개와 축축한 짠내가 뒤섞여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더 짜릿한 자극은 뒷목을 타고 번져왔고, 신경 하나하나가 떨리는 감각에영혼이 울리는 듯한 진동이 퍼져나갔다.
백기
정말… 영원히 너의 것이 되고 싶어.
5장
다음 날, 백기의 수치는 한결 안정되어 보였지만, 열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이번에는 채 교수뿐 아니라, 무섭기로 유명한 맹 주임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매년 받아야 하는 정기검사 시기였고, 연초에 한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긴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연모시에 돌연히 나타난 변이 현상 때문에 검진도 미룬 상태였다.
유연
맹 주임님 전화는 선배가 직접 받아! 딱 봐도 그냥 도망치는 거잖아. 그분이 선배가 일주일 내내 앓은 거 알면 또 혼낼까 봐! 또 한바탕 혼날까 봐 무서운 거 아니야?
백기
……다음에 전화 오기 전에 먼저 걸게……
유연
그 전에 당장 채 교수님부터 어떻게 마주할지 생각해.
우여곡절 끝에, 결국 모든 이들이 한마음으로 결정을 내렸다. 백기의 업무 권한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고, 채 교수의 검사를 최우선으로 하게 하자는 것.
모두
이건 특파팀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백기
……
나는 유리창 너머로 백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테스트 장비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때 그가 투덜대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차이펑
죄송합니다, 유연 씨.
유연
……갑자기 왜 저한테 사과하세요?
채이펑
백대장의 상태를 고려하면, 우리는 앞으로도 그에게 더 자주, 더 정밀한 검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차이펑
제한 링도 일정 시간 착용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가 그의 상태를 점검하고 기록할 수 있으니까요.
차이펑
사실 예전에 저희가 잠깐 마주친 적이 있어요. 다만 그땐 상황이 급박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죠.
차이펑
백 대장 일로, 여기까지 오셔서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유연
그건 그의 선택이었고, 물론 저의 선택이기도 했어요. 저흰 불만 없어요.
유리창 너머, 평소와는 다르게 얌전하고 차분한 백기의 얼굴이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할 감정이 담겨 있었다.
차이펑
예전에 Z6X 약물 외에도, 우린 백 대장에게 수많은 약물 반응 실험과 내성 훈련을 시켜왔습니다.
차이펑
그 과정들은 정말 고됐습니다.
유연
……알고 있어요.
차이펑
당신 같은 사람이 곁에 있어줘서 정말 감사하면서도… 부끄럽기도 합니다.
차이펑
우린 우리 이상을 백 대장의 어깨 위에 함부로 올려놨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전에 가볍게 했던 말들이, 지금은 무겁게 마음을 눌러왔다.
그래도 그 누구도 멈추지 않았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맞은편 방 안의 백기가 조용히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바라봤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귀가 살짝 흔들렸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보다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바람만 불어도, 나는 언제나 이상적인 세상을 꿈꿀 용기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의 눈을 보기만 해도,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차이펑을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그는 내가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을 다 알아챈 것 같았다.
차이펑
백 대장의 상황에 대해 하나 짐작되는 게 있어요.
백기
아까 차이펑이 뭐라고 했어?
검사가 끝난 뒤, 백기는 날 안은 채 사무실 소파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두 다리는 내 양옆을 감싸고 있었고, 그 푹신한 큼지막한 꼬리까지 동원돼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과 함께 날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유연
백 지휘관이 그렇게 대단한데, 보면 바로 알 수 있잖아요?
백기
보고 있었지. 근데 다른 생각도 하고 있었어.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가 곧게 바라보는 호박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고요하고도 짙은 빛이 그 안에서 끝없이 밀려오듯 일렁이고 있었고, 가려지지 않은 애정과 욕심이 눈부시게 담겨 있었다.
그 말 한마디에 온몸이 다시금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고, 얼굴이 달아오른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기
왜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었는지 안 물어봐?
유연
안 물어볼래.
그의 유혹을 더는 견디지 못한 나는 시선을 피했지만, 바로 다음 순간, 웃음기 어린 입술이 다가와 내 숨을 앗아갔다.
백기
계속… 너한테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유연
어이, 이 경찰관님—열이 심해서 정신이 살짝 나가신 거 같은데요?
백기
맞아. 지금은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그의 꼬리는 내 몸을 이리저리 스치며, 입맞춤과 함께 내 심장을 거칠게 두드렸다. 나는 그의 미간을 콕 찔렀다.
유연
진작 이렇게 굴었으면, 이렇게까지 고생 안 했을 수도 있었잖아.
예상치 못하게, 백기가 문득 멍해졌다. 뭔가를 떠올린 듯, 귀가 살짝 움찔하더니 손가락이 조용히 내 옷 단추에 닿았다.
유연
……잠, 잠깐만! 또 어디 안 좋아? 갑자기 왜 이래?
백기
검사하려고.
그가 날 꼭 끌어안고 있는 바람에, 나는 옷깃을 꽉 쥐고 몸을 틀어 목덜미를 가릴 수밖에 없었다.
유연
검사할 거 없다니까. 차이 교수님도 내 데이터 이상 없다고 하셨어.
백기
나 예전에 다쳐서 집에 왔을 땐, 이렇게 숨기진 않았잖아.
유연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잖아.
백기
내 말 듣겠다고 했잖아.
유연
그건 게임할 때 얘기고! 이제 안 들어—— 아야! 선배 진짜!
예상대로 백기는 아예 내 말을 무시했다.
나는 당연히 그 힘을 이길 수 없었고, 게다가 온몸이 욱신거리기까지 해서, 그의 시선과 햇살이 함께 떨어지는 걸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소용돌이 같은 깊은 감정이 물러간 자리에 남겨진 건, 셀 수 없이 많은 흔적들이었다.
세상은 한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소파에 누운 채로, 위에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백기를 바라보며, 마음속이 뒤섞인 감정으로 가득 찼다.
그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는 어떤 말도 덧붙이기 어려웠다.
그의 귀가 살짝 늘어졌고, 그는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내게 입을 맞췄다.
그 부드러운 닿음은 너무도 가볍고 연약해서, 신경 말단을 따라 내 몸 안 깊숙이 파고드는 듯했다.
나는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처음으로, 백기가 부상당한 채 집에 돌아왔을 때의 그 숨막힘을 온전히 느낀 순간이었다.
흐트러진 손끝과 입맞춤이 끊임없이 쏟아졌고, 나는 마치 얇은 바다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지만, 그 바다는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유연
……나, 이렇게까지 정밀 검사는 안 했거든!?
백기
정말?
그의 대담한 시선이 오래된 기억을 끌어올렸고,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예전에 집에서 내가 그를 ‘검사’하던 모습을 떠올린 듯했다.
유연
선배 기억력 좀 꺼줄래? 내 발뺌을 위한 공식 요청이야.
백기
요청 반려.
그는 웃으면서 나를 껴안아 품에 가뒀다. 머리를 내 목덜미에 파묻더니, 말없이 입술을 부드럽게 눌렀다.
유연
근데 말이야, 이건 상처가 아니야.
백기
……그럼 뭐야?
잠시 말이 끊겼고, 나는 그의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마음속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그의 얼굴을 감싸쥐고, 목에 걸려 있는 제한 고리를 살며시 쓸어내리며 살짝 찌푸려진 그의 눈매를 바라보았다.
유연
굳이 말해야 한다면, 내가 선배 곁에 다가가서, 선배를 더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었어.
어떤 건 이렇게 흔적이 되었고, 어떤 건 가끔 시큰한 마음으로, 어떤 건 어쩔 수 없는 고통이 스친 뒷모습으로, 어떤 건 말없이 스쳐간 조용한 순간으로 남았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모서리가 부딪히고, 당연히 아픔도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그가 스스로 감춰온 그 모서리들, 그 안에 쌓아온 생각들을 조금씩 볼 수 있었다.
유연
그런 아픔을 느꼈기 때문에 난 오히려 선배에게 더 가까워진 것 같아.
유연
차이 교수님이 말했어. 선배가 제한 링을 풀었는데도 열이 안 내리는 건, 무의식 중에 여전히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유연:
그분 말로는, 선배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억누른다는 걸 알아챘대.
유연:
선배, 사실 가끔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껴.
유연
늘 선배만 나를 꿰뚫어보고, 나의 모든 모서리를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도 선배가 더 필요해.
백기
난…내 사랑이 너를 다치게 하는 건 견딜 수 없어.
유연
하지만 선배가 해주는 모든 건… 나한텐 정말 행복한 일이야……!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백기가 그대로 굳어버렸고, 나도 한 박자 늦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내 시선을 똑바로 붙잡은 채, 애틋하고도 뜨거운 숨결로 내 입술에 닿았다.
백기
왜 그게 기뻐?
유연
……
유연
그게…… 그러니까, 선배가 나만 좋아하고, 나한테만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거잖아……
유연
정말… 그렇게 많이 날 사랑해…?
나도 백기한테 전염된 건지, 열에 들떠서 도무지 부끄러운 말들만 내뱉고 말았다.
잠시의 고요 끝에, 백기가 결국 작게 웃었다.
백기
그래. 맞아.
백기
난 그저…… 널 보고 싶고, 널 좋아하고, 널 사랑할 뿐이야.
그의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 사이로 파고들며, 마치 그렇게 하면 자신의 마음이 내 머리와 가슴 속에 더 깊이, 더 빠르게 스며들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백기
나는 너에게만 위로 받을 수 있고……너에게만 위로받고 싶을 뿐이야.
백기
네 손길만 원하고, 네 입맞춤만 원해. 너의 사랑만 원해.
백기
오직 너만을 사랑하고 싶어…… 너와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
그의 흩어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자꾸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그 안에는 그가 얼마나 집요하게, 이기적일 정도로 날 원하고 있는지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 욕심은 너무도 진실했고, 사랑스러웠다.
유연
그럼 우리 앞으로는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고, 최대한 건강하게 지내보자, 응?
백기
응… 내가 잘못했어.
나는 그 이마에 흘러내린 땀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기고, 그의 앞머리를 살짝 만졌다. 손끝은 조심스럽게 그 복슬한 귀를 쓰다듬었다.
유연
열나면… 많이 불편하지?
백기
응… 너무 힘들어.
그는 내 어깨에 파고들 듯 품 안으로 더 바짝 안겼다.
백기
몸이 이렇게 무거운 건 오랜만이야. 작년 이맘때도 그랬고… 진짜 지긋지긋해.
백기
올해는 아프고 싶지 않아… 정말로.
5장 기억회상
병이 나고 다치는 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건 백기가 언제부터인가 마음속 깊이 당연하게 여겨온 사실이었다.
무뎌진 감각과 반응, 무거운 몸, 모든 지체와 번거로움은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진정한 우수한 병사란 어떤 위기와 도전도 감당할 수 있는 신체 조건을 갖춰야 하고,
자신의 몸을 언제나 완벽한 상태로 유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설날 때와는 달랐다. 이번엔 전부,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가끔 그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할 때가 있다.
그녀를 걱정시키지 않으면서도, 그녀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도 이렇게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 없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백기는 또다시 낙담한 듯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너무 세게 안아 그녀가 아파할까 봐, 조심스럽게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멍했고, 목에 찬 제한 링의 전류가 간헐적으로 그를 자극했다.
그 전류는 마치 그의 억누를 수 없는 집착과 갈망을 계속 상기시키는 듯했다.
하지만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허락되지 않아.
그는 그저 그녀의 뺨에 얼굴을 부비며, 그녀의 숨결이 주는 안정된 기운으로 자신을 달래려 했다.
열기와 불안으로 요동치는 영혼을, 잠시나마 진정시키기 위해.
백기
앞으로는 꼭… 아프지 않도록 할게.
유연
아프지 않으면 물론 좋지.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부드러운 손끝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그의 이마 앞머리를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유연
하지만 우리 앞으로도 오래오래 살아야 하잖아.
감기나 열 같은 자잘한 병은 언제든 생길 수 있어.
그녀는 눈을 구부리며 웃었고, 그 눈 안에는 온통 자기 자신이 담겨 있었다.
유연
그러니까 걱정 마, 아파도 괜찮아.
그녀는 전에도 분명 여러 번 그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 순간 백기는 문득, 그녀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사실 원래 자신은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릴 적부터 늘 혼자서, 누구보다 강하게 살아왔다고.
생사 앞에서도 두려워한 적 없다고.
하지만 막상 말이 입 끝까지 차오르자, 그는 멍하니 깨달았다.
사실, 그는 무서웠다.
그는 늘 그녀의 눈에서 그런 감정을 마주할까 봐 두려웠다.
걱정, 안타까움, 애써 참고 있는 그 표정들.
그녀의 눈물도, 자신이 그녀에게 충분하지 못할까 봐도 두려웠다.
그녀가 너무 강인해서, 자신이 끝내 그녀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까 봐.
지금의 백기는, 마치 모든 두려움과 불안이 그녀에게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운명과 생사의 찰나 속에서도 이토록 망설여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그는 머뭇거렸다.
백기
나, 겁 많은 사람 아니야.
조금 고민하더니, 결국 그는 그렇게 말했다.
유연
알아요, 우리 백 경관님은 세상에서 제일 용감하시니까요.
유연
그러니까 더더욱,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뜨겁고도 차가웠고, 아프면서도 벅찼다. 답답하고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 모든 것이 여전한데, 그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백기
나 너무 바보 같지?
유연
선배는 그냥 너무 철이 들어서 그래요.
유연
철든 아이일수록 아픈 게 더 두렵대.
백기
난 이제 아이도 아닌데.
유연
그래서 더 애써 버티는 거잖아.
그 말에 백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이 가볍게 떠오르는 듯 했다. 마치 그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진 것처럼.
백기는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끝이 마치 그의 영혼까지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는 처음으로 그 작은 손이 전해주는, 그 순간, 늘 외면하던 마음 깊숙한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프더라도, 이젠 곁에 그녀가 있다는 것.
더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곧게 세울 필요도 없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눈을 뜨면, 그녀가 곁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것.
백기
키스하고 싶어.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백기
전염 안 될 거야.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게 좋았다.
자신의 뜨거워진 체온에 그녀가 물들어 가는 그 느낌이, 참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머리가 멍하고 뜨거워지며 그녀가 슬쩍 시선을 피하는 걸 느꼈다.
유연
……차이 교수님이 그러셨거든요……
유연
선배는 아직도 저한테 영향을 준다고……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래요.
그 순간, 백기는 당황이나 미안함보다는 차라리 기쁨과 충만한 만족감이 더 먼저 찾아왔다.
그녀는 오직 자기에게만 영향을 받고, 자기와 같은 온도를 공유하고, 자신의 집착에 함께 빠져들어 준다.
자신이 조금 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피가 한순간에 쏴 하고 치솟고, 목덜미에 닿은 경고음은 오히려 간지러울 만큼 짜릿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껴안은 채로, 그저 조용히 그녀가 마음 놓고 기대는 ‘철없는 선배’가 되어주기로 했다.
6장
백기는 차이 교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와 함께 있는 동안, 약물로 상태를 유지했고, 컨디션이 비교적 안정된 시점에, 약효를 자극하여 극단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다음 단계를 진행했다.
사흘 후, 차이 교수는 외부로 흩어지는 모든 냄새를 차단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하고 은밀한 방을 따로 준비해 주셨다. 범위 외 영향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유연
다들 모르는 거예요?
백기
굳이 알릴 필요는 없어.
백기는 담담히 소매를 정리하고, 나를 품 안으로 끌어안더니 코끝으로 내 코끝을 부드럽게 스쳤다.
백기
그들에게는, 나랑 네가 데이트하러 간다고 말했어.
은은한 바닷바람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고, 나는 곧장 그가 무엇을 의식했는지 알아챘다.
유연
나 그런 거 신경 안 쓴다는 거, 알잖아.
백기
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나만 신경 쓰면 돼.
백기
나랑 데이트하기 싫어?
그는 물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실크 셔츠를 입고 있었다. 몇 가닥의 정교한 은빛 체인과 보석이 함께 어우러져, 그의 움직임에 따라 짙푸른 광채를 흩날렸다.
목에 걸려 있는 구속용 링마저도 마치 장식처럼, 은빛으로 반짝이며 아무렇지 않은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유연
…그래서, 오늘 이렇게 멋부린 거예요?
백기
너랑 데이트하는 거니까.
우리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차이펑 교수가 준비된 보호 장비와 구속 장비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바로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백기
이건 내가 요청한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 위로 입마개를 씌우고, 침대 위에 누웠다.
백기
시작하자.
문이 닫히기 전까지 나는 점적되는 약물에서 시선을 거두어, 침대 양옆에 묶인 백기의 손목을 거쳐 마지막엔 그의 얼굴에 시선을 멈췄다.
곧 그의 근육이 저절로 긴장했고, 옅은 푸른 정맥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졌고, 목 깊은 곳에서 쉰 숨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고르게 들썩이는 가슴, 목덜미를 따라 흐르는 땀이 서서히 천으로 스며들며, 아름답던 셔츠 위로 진한 얼룩을 퍼뜨렸다.
입마개는 그의 입 전체를 가리고 있었고, 어둑한 조명 아래 검은 금속은 차갑고 단단한 빛을 반사했다.
마치 그를 옭아맨 구속 띠처럼, 내 심장도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마치 말 못 하게 된 야수 하나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손을 들자마자 그의 시선에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그의 호박빛 눈동자는 마치 어둠 속에서 불타는 불꽃처럼, 곧바로 내 눈 깊숙이 파고들었다.
백기
거기 서 있어.
명백히 구속된 사람은 그였지만, 명령을 내리는 쪽도 그였다.
백기의 온몸은 거의 완전히 결박되어 있었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팽팽히 조여진 몸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만이 낮고 억눌린 마찰음처럼 흘러나왔다.
그의 시선은 모든 것을 대신했고, 어느새 모든 것이 되었다.
숨이 멎을 듯한 손끝이 되었고, 뜨겁게 타오르는 키스가 되었으며, 나조차 본능적으로 숨을 삼키고 시선을 떼고 싶어졌다.
백기
나를 봐.
그의 거친 숨소리가 귀에 닿는 것만 같았고, 그의 향기가 피 속으로 스며들어 마치 내가 결박된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간마저 그 호박빛 속에 응고된 듯했고,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깊은 바다 속으로 발을 디딘 듯했다.
백기
내 한 손만 풀어줘.
유연
……정말 한 손뿐이에요?
백기
한 손만.
거칠게 낮게 깔린 숨결과 달리, 그의 말투에는 서늘하면서도 묘하게 섹시한 기운이 실려 있었다.
내 손은 떨릴 듯했고, 단단히 조여진 구속 띠를 몇 번이나 당기고 비틀어 겨우 조금씩 풀어냈다.
하지만 백기는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고, 그저 묵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마침내 마지막 고리를 떨리는 손끝으로 풀어냈을 때, 단 한순간—눈을 깜박할 사이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려 침대 위로 넘어갔다.
그의 들썩이는 가슴에 밀착된 채, 뜨거운 바다의 기운이 내 주위를 가득 채웠다.
백기는 살짝 몸을 일으키며 내 허리로 팔을 감아 올렸고, 한 번 닿은 이상 더는 떨어질 수 없는 듯 계속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미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철제 프레임이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고, 억눌린 숨결은 가죽 속에서 터져 나와 내 귓가에 되풀이되어 속삭였다.
백기
연아, 나에게 키스해줘.
세상이 무한히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젠 그의 숨결만이 남아 내 모든 의지를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키스라기보단, 난 그를 물어버린 것 같았다.
날 애타게 만들면서도, 왜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만들까.
난 그의 어깨를 세게 물었고, 그의 향이 이 사이를 스치며 더 짙은 바다의 내음으로 퍼져나갔다.
유연
…이 순간, 내가 널 아프게 하고 있다고 느껴지진 않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개만 약간 돌리며 목젖이 살짝 위아래로 움직였다.
백기
내 나머지 손도 풀어줘.
백기
널 안고 싶어.
세상의 압박이 한층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아니 조금은 나쁘게, 끊임없이 내게 스쳐왔다.
솟은 귀에서부터 내 발목을 감싼 그의 다리까지—모든 감각이 그로 가득 찼다.
그의 긴 꼬리는 나를 꼭 끌어안듯 조여왔고, 점점 가까워지는 우리의 움직임 속에서, 그의 체취와 체온이 뚜렷하게 나를 휘감았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그의 손길과 포옹을 갈망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온 힘과 의지를 다해 떨리는 손으로 그의 또 다른 속박 고리를 풀어냈다.
“촤악—!” 금속 소리가 크게 울리고, 백기는 단숨에 남은 구속을 전부 떼어내더니, 그대로 일어나 나를 힘껏 품에 끌어안았다.
이미 자유를 얻었을 텐데도, 그 거센 파도 같은 기세는 그 순간 멈춘 듯 고요해졌다.
그는 그저 날 힘껏 안고 있었다. 마치 나를 억누르려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스스로를 꽉 묶어둔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에는 타오르는 불길이 가득했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이 가라앉지 않고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백기
연아… 나는, 절대 널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입가에 닿아 있는 입틀막 장치 아래에서, 그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던 검은 파도가 결국 모든 억제를 뚫고 넘쳐흘렀다. 그의 뜨거운 숨결에 실린 속삭임이 내게로 스며들었다.
백기
비록 모든 걸 안다 해도, 난 네가 조금이라도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백기
네가 나 때문에 무언가를 참아내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
비록 지금 이 순간 그의 이성이 무너질 듯 위태롭고, 내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해왔고, 예전의 그가 얼마나 단호하고 결단력 있던 사람이었어도,
그는 마지막 남은 이성마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끝끝내 또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마치 나에게 끝없이 물러설 수 있는 길과 핑계를 남겨주려는 듯이.
나는 어딘가 멍한 기분에 빠졌다. 그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번뜩이는 억제기의 금속빛을 따라 흘러내리는 그것이, 유난히도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이 사람을 이미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매번 새롭게 알아가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 많은 상처와 공격을 받아왔다. 그에게 있어서 '상처'라는 개념은, 마치 짙고 어두운 영혼의 그림자 같은 협소한 의미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 '인내'는 곧 ‘희생’으로, 그것은 그의 투쟁의 근원이었다.
백기
난 너랑 평생 함께하고 싶어……
백기
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유연
하지만 난, 행복해지려고 선배 곁에 있는 게 아니에요.
나는 살며시 웃으며 그의 눈에 입을 맞췄고, 손끝으로 그의 목에 있는 은색 억제기를 쓸어내렸다.
유연
행복해지려고 선배를 사랑한 것도 아니에요.
유연
나는 선배를 사랑해서… 선배의 사랑을 느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낀 거예요.
유연
그러니까 선배가 신경 쓰는 그런 것들,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오직 선배만 중요하니까요.
“찰칵.”

억제 장치가 벗겨지는 소리와 함께, 백기의 동공이 아주 미세하게 수축했다.
유연
갑자기 깨달았어요…… 우리, 한 가지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유연
목덜미가 표시의 자리인 건 맞지만, 우리에게 있어 진짜 단 하나의 표시 자리는—다른 곳이어야 해요.
나는 마침내 그의 입을 가리고 있던 마지막 구속을 벗겨냈고, 경건하게 고개를 들어 내 목덜미를 드러냈다—
나의 아름다운 늑대왕에게, 나의 목을 내보였다.
유연
선배, 물어줘요.
그에게 바치는 단 하나의 복종과 충성. 내 모든 것을 넘겨주는 순간이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단숨에 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그런데 고통보다도 훨씬 더 짜릿하고 아찔한 쾌감이 더 거세게 뇌를 자극했다.
세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힘을 더욱 조여왔고, 본능과 집착이 뒤섞인 몸짓으로 나를 물고 있었다.
백기
전에 네가, 다 그 변이 탓이라고 했을 때…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 했어.
백기
하지만 아니야, 그게 아니란 걸 알아.
뜨겁고 축축한 숨결과 혀끝이 내 피부 위를 맴돌고, 위로, 더 위로 퍼져나간다.
거대한 바다가 모든 걸 덮쳐왔다. 내 전신을 휘감고 들어올렸다가, 다시 깊은 심해로 휩쓸어버리는 듯한 감각.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고, 어디선가 파도 부딪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건 내 숨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백기
이 모든 감정은 전부 내 거야.
그 어떤 과장도 없고……
백기
전부, 다 내 거야.
내 모든 흐트러진 시선과 호흡은 그와 눈앞에서 맞닿은 눈동자에 고스란히 빨려 들어갔다.
그 눈 속에 가득 찬 감정과 집착은 너무도 짙었고, 그 안엔 내 모습이 겹겹이 겹쳐 있었다.
그건 그의 것이기도 하고, 내 것이기도 했다.
백기
널 원해…… 미칠 만큼……
백기
모든 걸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백기
매 순간,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본능적인 이끌림과 탐욕이 점점 더 우리를 밀착시켰다.
그는 내 목을 입맞추며 쓸고 지나가다 장난처럼 살짝 물기도 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 커다란 꼬리도 함께 날 간질이고 감싸 안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가 점점 키워가는 욕망과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감각이 너무도 선명하게 내게 전해졌다.
힘이 빠져 나가는 듯한 감각에, 나는 그의 목에 걸린 가죽 목걸이를 부여잡았다.
그게 오히려 그를 나에게 더 가까이, 더 깊숙이 다가오게 만들었고, 우리는 함께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유연
잠, 잠깐만……
백기
떨어지지 않게 할게.
그의 동작은 거칠고도 압도적이었다. 나를 더 깊이 안아 끌어안고, 다시 그의 품 안에 완전히 가둬버렸다.
백기
내 모든 걸…… 전부 너에게 줄게.
백기
모든 건 다, 오직 너만의 거야.
영혼 깊은 곳까지 뭔가가 차오른 듯, 단단하게 꼭 맞물려 틈 하나 없이 서로를 껴안은 채.
바다는 너무도 거세게 밀려들고, 그저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몸 전체가 젖어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백기가 나에게 키스했다.
흥분에 달뜬 혀끝이 엉켜들고, 서로를 부딪치고, 감싸 안으며 하나로 뒤섞였다.
너무도 생생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으려 했지만, 날카롭게 다가온 손길이 내 턱을 받쳐 올렸다.
백기
눈 감지 마.
백기
우린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그는 너무 가까웠고, 너무 뜨거웠으며, 눈부시게 밝았다.
마치 불꽃처럼, 그리고 그 불길은 어느새 나에게로 번져 들었다.
백기
계속 날 봐. 나를, 똑바로 봐.
백기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걸 똑똑히 지켜봐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