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이 원극, 신극 엔딩으로 나눠져있어요.
신극 보셨으면 바로 4장부터 봐도 됩니다.
1장
《맥베스》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가 세 마녀에게서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야망과 아내의 부추김에 떠밀린 맥베스는 국왕 덩컨을 암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죄책감과 환상에 시달리던 그는 곧 폭군으로 타락하고, 끝내 부부는 함께 파멸을 맞는다.
*본문에 언급되는 소장품, 전시 및 관련 내용은 모두 게임 내 픽션 설정으로, 스토리 전개를 위한 장치일 뿐 현실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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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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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어서 내 곁으로 돌아와요. 내가 그대의 귀에 내 정신을 불어넣어 주겠어요.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힘 있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그 소리의 근원을 가려내려 했다.
??
“내 혀끝의 날카로움으로 모든 장애물을 쓸어내고, 그대를 저 왕좌 위에 올려놓겠어요—”
우렁차고도 묵직한 말들이 마치 내 가슴속까지 함께 울려 퍼지며, 낯설면서도 강렬한 격정과 흥분을 일으켰다.
누가 말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이 감정들은 또 뭐지?
당장은 그것들을 명확히 분간해내기 어려웠지만, 동시에 본능적으로 그 안에 빠져들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마치 왕성하고도 광기 어린 들불 한 줌처럼.
불길은 한 번 치솟으면 재가 될 때까지 타오를 수밖에 없다. 모든 허상과 가면을 태워버리며, 그 소리는 더욱 선명해져 나에게 익숙하기 그지없는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유연
“운명이 이미 그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으니!”
나는 자신도 모르게 들어 올린 내 팔뚝을 바라보았다. 낯선 편지가 손아귀에 꼭 쥐어져 있었고, 빽빽하게 금이 가 듯 접힌 자국이 생겨 있었다.
방금…… 말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천천히 정신을 차렸지만, 내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무엇인가가 내 몸을 장악하여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굳어버린 몸을 통해, 나는 내가 낡았지만 화려한 방 안에 있는 것임을 감지했다.
희미한 불빛이 내 눈을 스쳐 지나갔고, 또 다른 ‘나’는 여전히 어떤 거센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혼란과 흥분, 불안과 기대.
서로 상반되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한 감정들이 끝없이 들끓어, 내 머릿속은 순간 새하얘질 정도였다. 이 감정들이 대체 누구의 마음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분명 바로 전까지만 해도 나와 백기는 셰익스피어 전시를 함께 보고 있었는데, 왜 지금 나는 여기에 있는 거지?
이것도 특별 전시 연출의 일부인 걸까? 아니면 또 다른 Evol?
엄청난 의문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지만, 나는 자유롭게 입을 열 수도 없었고, 누구도 내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때 낯선 사람이 들어와 “오늘 밤 왕께서 오십니다” 같은, 어딘가 익숙한 말들을 전했다.
그때, 낯선 사람이 들어와 “왕께서 오늘밤 방문하신다”는 등 다소 익숙한 말들을 전했다.
‘나’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는 듯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응수하며 ‘나의 독백’을 이어갔다.
피가 빠르게 움직이고, 무언가가 계속해서 자라고 무성해지며, 내 영혼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백기를 보았다.
그는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얼굴에는 내가 익숙하지 않은 다급함과 당혹감이 어려 있었고, 눈빛에는 은은한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앞으로 다가와, 선배답지 않은 말들을 내게 건넸다.
나의 마지막 ‘대사’가 끝나자, 「Act I, Scene V」 라는 글자가 허공에 스쳐 지나가며 모든 것을 정적 속으로 빠뜨렸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럽게 팔을 흔들어 보았다. 그것이 내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제야 이 순간 다시 내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힘껏 끌어안겼다.
유연
선……
백기
다친 데는 없어? 어디 불편한 곳은?
그가 말하며 곧바로 나를 놓아주었고, 눈썹을 찌푸리며 내 몸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백기
억지로 버티지도 말고, 나한테 거짓말도 하지 마.
백기의 상황도 아마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역시 몸이 완전히 제멋대로 움직이고, 거기서 벗어날 수도 없는 이런 일을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었을 것이다. 평소와 달리 긴장하고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앞에서 계속해서 확인하려는 사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고,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유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유연
오히려 선배야말로…… 내가 있었던 곳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아 보여.
백기
난 괜찮아. 하지만 이곳은 너무 이상해. 우선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 다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그에 화답하듯 거대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은 정적 속, 아까 신비한 문자가 떠올랐던 자리 위로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맥베스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 이야기가 막을 내리기 전까지, 당신들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특별 면책 조항: 이 세계에서 당신들은 진짜 죽음을 맞이하지 않습니다.”
맥베스의 세계?
나와 백기는 서로를 마주 본 채 동시에 눈을 깜빡였다. 순간 둘 다 얼떨떨해졌다.
방금 전 ‘내’ 독백과 장면을 떠올리자, 머릿속에 어떤 의심이 천천히 떠올랐다.
유연
선배, 아까 세 명의 마녀를 봤어?
백기
응? 맞아. 눈 뜨자마자 여자 셋을 봤어.
백기
셋 다 이상한 말투로 뜬금없이 내가 왕이 될 거라고 말했어.
백기
그러고는 나도 영문도 모른 채 몇 마디를 했고.
그의 말과 함께 잘생긴 눈썹과 눈매는 더욱 찌푸려졌고, 무언가가 빠르게 그의 눈빛 속에 스쳐 지나가 호박색 속으로 사라졌다.
백기
급하게 널 찾았는데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이 많지 않았어.
백기
그래도 널 찾아서 다행이야.
그는 아직도 아찔했던 모양인지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튼튼한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조금 전 내 가슴속에서 미쳐 날뛰던 낯선 심장 소리를 천천히 덮어주는 것 같아서, 나도 안심한 채 그를 마주 안았다.
방금 백기가 했던 말과 하늘의 문구를 떠올리며, 나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그렇게 들어 보니까 선배는 ‘맥베스’가 된 것 같고, 나는 맥베스 부인이 된 모양이네.
백기
그래? 그것도 괜찮네, 부인.
그가 고개를 숙여 내 입가에 살짝 입을 맞추자, 나는 가볍게 그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유연
전시 보러 오기 전에는 이런 체험이 있다는 얘기 못 들었는데…… 정말 이상하네.
유연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위대한 셰익스피어 선생님의 고전 작품을 직접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신기하다.
백기
저런 안내 문구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조심해야 해.
백기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나는 《맥베스》의 이후 전개를 떠올리며 그 단호한 시선을 마주한 채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유연
솔직히 말해봐요. 그저께 오후에 책 읽을 때, 선배 제대로 안 읽었죠?
굳건하던 시선이 순간 멈췄고, 어떤 사람은 조용히 눈길을 피했다. 정적 속에서 작게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열심히 읽긴 했어. 다만 오후 햇살이 너무 좋았을 뿐이야.
백기
……반쯤 읽다가 잠들었어.
유연
반쯤?
백기
크흠…… 4분의 1? 5분의 1?
간신히 기억해내려 애쓰는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자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혹시라도 앞으로 긴급한 상황이 생길까 봐 나는 맥베스의 이후 이야기를 대략 백기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가 점점 깊어질수록 백기는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고, 나 역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연
진짜 죽음을 겪진 않는다고 했지만……
두툼한 손이 내 손끝을 단단히 감싸 쥐며 내가 못다 말한 불안을 모두 받아주었다.
백기
무서워하지 마. 우리에게 어떤 사고도 일어나게 두지 않을게.
2장
《맥베스》의 내용대로라면 이후에 일어날 사건들은 비교적 촘촘하게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숨 돌릴 틈 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연극처럼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현실의 시간처럼 천천히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에게는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시간도 충분히 주어졌다.
왕은 이미 이곳으로 오고 있고 머지않아 나와 백기 모두 극의 장면이 펼쳐지는 순간 다시 강제로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백기는 계단에 앉아 손에 든 장검을 조용히 쓸어내리고 있었다.
원래도 자유분방한 편인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감추기 힘든 냉기가 묻어나와 나는 조용히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유연
선배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이네.
백기
누군가 정해놓은 게임에 끌려가는 느낌이라 썩 유쾌하진 않아.
백기
그래도 이렇게 대단한 작품이라면 조금쯤은 참아줄 수 있어.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런데 왜인지 방금 전 ‘맥베스 부인’이 되었을 때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그 격렬한 감정이 자꾸 떠올랐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무언가가 내 안에서 계속 용솟음쳤다.
야망은 타오르고, 욕망은 부풀어 오르며, 찬란하게 빛나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이런 강렬한 감정을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걸 백기에게 말하려던 순간 고개를 돌리자 백기는 한 손으로 검을 쥔 채 바로 다음 순간 차가운 빛을 띠는 칼날 위로 손바닥을 가져갔다.
유연
……?!
나는 놀라 급히 그를 말리려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 칼날은 투명해졌다. 백기는 손가락을 구부려 칼날을 그대로 통과했고 결국 움켜쥔 것은 허공뿐이었다.
유연
선배 뭐 하는 거야!
백기
작은 실험 좀 해본 거야.
내가 놀라서 따져 묻자, 그는 그저 담담한 얼굴로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손목을 돌려 검을 휙 돌렸다. 그리고 긴 검끝은 곧장 그의 심장을 향했다——
유연
선배!
내 본능적인 외침과 함께 긴 검은 다시 환영으로 변해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백기
보아하니 극 바깥에서는 이야기 전개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있는 것 같아. 동시에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게 하고.
백기
그렇다면 바뀌는 건 없겠네.
유연
갑자기 그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실험하지 말라고요!
백기
저 글자들이 하는 보장을 난 완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씩씩거리며 그의 볼을 잡아당겼다. 아직도 가슴이 철렁한 채로 그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 뒤, 코까지 세게 꼬집었다.
유연
그래도 안 돼!
백기
알겠습니다, 부인.
그가 달래듯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하자 나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쉬며 감시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방 전체를 세심하게 살폈고 심지어 문밖으로 나가 보려고까지 했다.
흐릿한 불빛 아래, 그의 머리카락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긴 머리칼이 때때로 시야를 가리면 그는 짜증스럽게 그것을 옆으로 쓸어넘겼다.
이 환경에 갇혀 있다는 압박감 말고도 어쩐지 더 음침하고 가라앉은 무언가가 은근히 그의 몸 위를 덮고 있는 듯했다.
그를 낯설게 만들고, 동시에 불편하게 만드는 무언가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유연
……선배는 왕을 죽이는 전개를 막고 싶은 거야?
그래, 규칙이 어떻든 선배가 어떻게 자신의 야망 때문에 직접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존재가 되는 걸 견딜 수 있겠어?
그는 그림자 속에 서서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백기
맥베스는 왜 왕이 되고 싶어 했을까?
백기
정말 마녀의 예언 때문이었을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혼란과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배어 있었다.
백기
내가 그가 되었을 때, 어떤 충동을 느꼈어.
백기
그 충동은 분명 마녀들 때문에 생긴 거였지만, 그렇다고 마녀들 때문만은 아니었어……
백기
너 때문만은 아니고.
그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무언가가 그의 눈을 스치고 지나가며 고결한 영혼이 처음으로 뼛속 깊은 틈에서부터 어떤 음침하고도 미쳐 자라나는 것을 직접 체감하게 만든 것만 같았다.
유연
……하지만 선배는 그런 야망을 여러 번 목격해왔잖아?
가시덤불이 우거지고 음울하게 뒤덮인 세계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이 야망의 냄새에 익숙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고 대답하지 않는 그 침묵은 마치 긍정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는 평생 끝내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를 감정들을 막이 오를 때마다 직접 몸으로 오염당하듯 겪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마음 한쪽이 저릴 만큼 아파왔다.
유연
괜찮아?
백기
나는 이런 느낌이 싫어.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댔다.
유연
선배, 말해봐. 만약 내가 오래전에 선배가 훗날 특파팀 지휘관이 될 거라고 말해줬다면, 선배는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백기
귀찮으니까 나한테 오지마.
유연
그럼 내가 아주 자신만만하게 선배가 아무리 귀찮은 걸 싫어해도 결국 반드시 그 자리에 오를 거라고 말하면?
백기
그것도 내가 그 자리에 앉고 싶어서 앉는 거지, 미래가 그렇게 말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
그의 말에는 숨길 수 없는 오만함이 묻어났고, 다시 떠오른 호박빛 눈동자에는 반항적이고도 당당한 빛이 가득했다.
나는 그 모습에 심장이 멈출 듯이 두근거려 발끝을 세우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유연
그러니까 선배는 맥베스가 아니야. 그리고 선배는 맥베스가 되지도 않을 거야.
백기
나는 그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을 거야.
유연
애초에 그런 걸 이해할 필요도 없어.
유연
차라리 우리 도망칠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때? 저 글자는 이야기를 진행해야 한다고 했지만,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생각하면 할수록 백기가 결코 그의 것이 될 수 없는 이 이야기를 계속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를 데리고 문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오히려 한순간에 그의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백기
괜찮아. 우리가 굳이 도망칠 필요는 없어.
백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들었다.
백기
맥베스는 결국 왕을 죽일 거야.
유연
……그렇지.
차가운 빛이 그의 눈동자에 스며들며 호박빛을 서늘한 살기로 물들였다.
그의 손끝은 칼끝 쪽으로 모여들었고 마치 또 하나의 날카로운 단검처럼 겹쳐 지나가다가 결연하게 주먹으로 움켜쥐어졌다.
백기
그럼 죽이면 돼.
과연, 일의 전개는 《맥베스》의 극본과 완전히 똑같이 흘러갔다.
나는 왕을 맞이하고 만찬을 준비하고 백기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일 때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결국 이야기를 앞으로 밀고 나가야만 한다는 걸. 그래야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예 다른 생각을 비워버리고 맥베스 부인에게 어울리는 그 웅장한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비난과 선동의 말을 힘주어 내뱉었고 점점 더 결심을 굳혀가는 ‘백기’를 바라보았다.
백기
이 끔찍한 대업을 이루기 위해 내 뜻을 굳혔다!
백기
전심전력으로 모든 것을 바쳐, 가장 완벽한 연기로 세상을 속이는 환영이 되어 위선의 얼굴로 가장 사악한 마음을 감추리라.
끝없는 불꽃이 우리 눈동자 속에서 교차하고 타올랐다. 이윽고 거대한 화염이 되어 들판을 휩쓸 듯 치솟아 오르며—
마침내 우리 둘 모두를 재로 만들 때까지.
하늘의 저녁빛이 내려앉자, 나와 백기는 동시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너무도 짙고 격한 감정들이 내 안에서 크게 흔들려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나는 그저 백기가 한 걸음씩 내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그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드는 것을 느꼈다.
백기
괜찮아?
유연
아마…… 선배랑 비슷할 거야.
백기
그럼 우리 둘 다 별로 안 괜찮은 거네.
이 순간만큼은 이렇게 솔직하게 인정하는 말이 오히려 우리를 조금은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유연
선배는 어떤 기분이야?
백기
네 목소리가 분명 나를 부추기고 있었어.
백기
모든 게...... 다 나를 부추기고 있었어.
내 마음속 깊이 감춰둔 어떤 것들을 너를 통해 내 영혼 속에서 끌어올려낸 것처럼.
불을 붙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그런데 그 것들은…… 과연 네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 것이었을까?
백기의 중얼거림은 그 순간 나마저도 멍해지게 만들었다.
맥베스 부인에게는 그녀 자신의 욕망과 야심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맥베스보다도 더 단단하고 더 야심만만한 욕망이.
맥베스의 마음속에도 분명 그 자신의 망상이 있었지만, 그 여자는 그것을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백기를 바라볼 때,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내 안의 어떤 바람까지도 그에게 걸어두고 있었던 걸까?
백기
잠시만 나를 보지마.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숨길 수 없는 갈등 속에서 나지막이 명령하듯 말했다.
유연
극본에는 맥베스 부인이 맥베스가 살인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장면은 없던 것 같은데.
백기
맥베스 부인은 아니야.
백기
너야.
그의 눈빛이 나를 꿰뚫으며 곧장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를 마주 바라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웃으며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희미한 불빛이 그 순간은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졌, 그 빛은 오롯이 백기 한 사람 위로만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얼굴을 분명히 볼 수 없었다. 칼날의 그림자가 엇갈려 스치는 사이로 그저 백기가 단검을 떨어뜨리는 모습만 보였다.
튀어 오른 핏방울은 빛과 어둠의 틈새를 가르며 날아들어 그의 손등에도, 내 눈에도 묻었다.
맥베스가 고개를 들고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기 역시 어둠 속 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백기
"맥베스 또한 다시는 편히 잠들지 못하리라."
나는 마치 영혼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한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의 잠도 살해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일부 역시 함께 죽었다는 것을.
나 역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피 묻은 단검을 제자리에 두고, 그를 마주하며 묻고, 그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꾸짖고, 그의 절규를 들었다.
백기
그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이제 잠들 수 없다!”
글래미스가 이미 잠을 죽여버렸으니, 코더는 다시는 잠들 수 없고, 맥베스는 이제부터 평안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똑같이 죄를 마주한 공범의 결의가 마치 흩날리는 불씨처럼 내 온몸 위로 쏟아졌고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유연
내 손도 선배 손과 똑같은 색이야.
3장
야망은 한 번 시작되면 더는 쉽게 멈출 수 없다. 한번 무너져 가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오직 완전한 파멸을 향해 굴러갈 뿐이다.
위장과 속임수. 나는 백기와 함께 부풀어 오르고 광기에 젖은 영혼을 짊어진 채 한 걸음씩 왕좌로 올라섰다.
연속되는 극의 장면들은 마치 제어를 잃고 앞으로 내달리는 바퀴 같았고, 나는 그 안에 휩쓸려 들어가 극이 잠시 멎는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백기
괜찮아?
백기가 또 한 번 내게 물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한 채 그의 얼굴에 볼을 살짝 스쳤다. 가까워진 시선이 맞닿았고 곧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어버렸다.
유연
이렇게까지 강렬한 감정을 느껴본 건 처음인 것 같아.
유연
뭐랄까…… 유난히 왕성하고, 또 단호한 야망 같은 거?
위대한 작품은 단 몇 줄의 글만으로도 복잡한 한 사람의 마음을 그려낼 수 있다. 예술은 인간성을 과장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냉정함과 광기, 사랑과 욕망.
나는 그녀가 되어, 매번 누군가를 몰아붙이고 질책하는 말들 속에서 영혼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고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유연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맥베스 욕망의 형상화라고 말하지만, 내가 직접 그녀가 되어보니 그녀의 심장이 뛰고, 피가 타오르는 게 느껴졌어.
유연
그녀는 극 속 인물일 뿐이고, 이름조차 없어서 사람들은 그저 ‘맥베스 부인’이라고만 부르지만……
유연
그런데도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마다, 난 정말 그녀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져.
유연
물론 그녀를 흔히 말하는 ‘좋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바로 그 복잡함 때문에 그녀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
유연
기회가 된다면, 셰익스피어에게 맥베스 부인의 진짜 이름이 뭔지 물어보고 싶어.
나는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히 꺼내며, 천천히 백기에게 내 감상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몸 안에 맥베스 부인 역시 또 하나의 청중처럼 함께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유연
내가 이런 삶을, 이렇게 진짜처럼 직접 겪어보게 될 줄은 한 번도 상상 못 했어.
백기
나도 그래.
백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채, 머릿속에서 서로 싸우는 기분이야.
그는 조금 웃음 섞인 얼굴로 먼 곳의 텅 빈 왕좌를 바라보았다.
백기
나는 그의 모든 걸 이해할 수 없어. 그의 감정에도 공감할 수 없고.
백기
범죄는 범죄일 뿐이야. 나는 이런 범죄자 같은 심정을이해하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백기의 목소리가 느리게 멎었다. 전혀 다른 영혼이 같은 몸 안에서 완전히 다른 마음을 공유하며 전혀 다른 시야에서의 성찰이 이어지게 했다.
백기
네 말이 맞아. 저 사람들은 모두 복잡해.
백기
전부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들이야.
망설이는 비겁함, 무언가에 끊임없이 두드려 맞는 마음, 거대한 야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용기, 새카만 영혼 속에 끝내 조금 남아 있는 희미한 흰빛.
그의 시선은 몇 번이고 허공을 맴돌다가, 내 손을 잡고 왕좌를 마주 보는 바닥에 함께 앉았다.
백기
저런 게, 그렇게 좋은 걸까?
백기
그런데 이미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면, 왜 또 두려워하는 거지?
백기의 영혼은 너무도 맑아서, 세상의 많은 것들을 이미 분명하게 선을 그어 구분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 길을 걸어오며 영혼 깊은 곳에서 얼마나 많은 단련과 고통을 견뎌왔는지.
그래서야말로, 백기만의 ‘왕도’는 그렇게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그 길을 위해 수없이 많은 피와 눈물, 그리고 대가를 치러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혼, 이런 백기는,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일 것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백기
왜 웃는 거야?
나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고, 되려 그에게 되물었다.
유연
지금도 여전히 저 ‘왕좌’가 마음에 안 들어요?
백기
별로라고 할 수는 없지.
그는 자기 머리를 내 머리에 기대었다. 달빛 아래, 저 왕좌는 아름답고도 허망하게 보였다.
백기
반드시 저 자리에 앉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내 앞에 놓인 길이 이미 펼쳐졌다면 난 그 길을 끝까지 이어가야 해.
백기
그 점만큼은 맥베스랑 좀 닮았을지도 모르겠네.
유연
하지만 왕관은 무겁잖아. 그렇지?
그의 목소리가 잠시 멎더니, 천천히 웃음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백기
무겁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훨씬 더 번거로워.
백기
사실 너는 네 야망을 위해 무엇을 대가로 치르게 될지 알지 못할 거야.
백기
그리고 네가 바라는 결과를 정말 감당할 수 있을지도 전혀 알 수 없지.
그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단호했다. 마치 맥베스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 같기도 했다.
유연
그건 선배도 포함이야?
백기
나도 물론이지.
그가 마침내 그 핏빛으로 물든 긴 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는 신중하고도 진실되게 걸어갔다.
아마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저 핏빛 폭포 같은 길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망설이는 이든 극단으로 치닫는 이든, 아무 소리 없이 집어삼켜 버리는지를.
나는 본능적으로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고, 그는 내 손가락을 더 단단히 감싸 쥐었다.
유연
그럼 두려워하지 마.
유연
선배에게는 내가 있잖아.
백기
그러네, 나한텐 네가 있지.
백기
그러니까 무엇이 오든 전부 내가 받아낼 거야.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이미 끝없는 용기를 손에 넣은 사람처럼.
유연
그럼 만약 모든 게 평온하고 아름다워서, 선배가 짊어져야 할 책임도 하나 없다면, 그래도 저 자리에 앉을 거야?
내 질문에 백기는 작게 웃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고, 달빛이 그의 눈동자에 스며들어 또 하나의 찬란한 호박빛 달을 만들어냈다.
백기
우리 소대장님은 마음에 드나요?
유연
아주아주아주 자그만한 대원도 가장 좋아해.
내 대답은 그의 웃음 섞인 입맞춤 속에 삼켜졌다. 부드러운 밤빛은 더 말하지 않아도 되는 모든 이야기를 달빛과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 고이 감춰두었다.
백기
이제 맥베스는 분명 더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거야.
백기
내가 뒤이어 일어날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결코 뱅코 한 사람으로 끝날 리는 없어.
백기
“무도한 길에서 시작되었으니, 끝 또한 무도함으로 이어지리라.”
그는 이 대사를 되풀이하며 무겁게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나라면, 네가 나와 함께 걷게 두진 않을 거야.
유연
……
나는 피하지 않는 그의 시선을 가만히 마주보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그도, 이런 문제 앞에서만큼은 몇 번이고 망설이고 괴로워한다.
유연
하지만 우리의 욕망은 이미 하나로 섞여버렸는걸.
유연
우린 이미 함께 출발했어. 이제 와서 나한테 떠나라고 해도 늦었어.
유연
나는 유연이야. 선배 부인.
유연
그리고 선배는 나 유연의 남편이야.
백기는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끝내 입가에 체념한 듯하면서도 설레는 웃음을 그리며 나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백기
그래도 널 잃는 게 더 두려워.
백기
그러니까 약속해. ‘나’를 막을 수 있는 행동이 있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그가 늘 그랬듯 또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음을 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바꾸고 싶어 한다.
그는 결코 이런 일을 인정할 수 없었고, 언제나 더 많은 비극을 막고 싶어 한다——
비록 흔들 수 없는 규칙일지라도, 막을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어떤 기회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그는 결국 한번 해보는 것이다.
백기
“나와 함께 동행하겠소.”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으며 시선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기꺼이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만찬 자리에서 ‘백기’는 당황한 채 죽은 반코의 혼령을 본 것처럼 굴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만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나는 곁에 서서, 영혼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빠르게 이야기를 앞으로 밀어붙여 이 모든 이야기를 끝까지 완성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영혼이 맥베스 부인의 발걸음을 따르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녀가 축하연 속을 오가며 사람들 사이를 정리하고, 남자의 무례함을 꾸짖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갔다.
유연
“당신은 잠을 잃었어, 그 모든 생명의 좋은 약을.”
그녀는 광기 속에서도 또렷했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그보다도 먼저 잠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세 마녀를 다시 만나러 가는 길에 오를 것이고, 나 역시 맥베스 부인과 함께 그녀의 몽유 속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다.
‘내가’ 말을 하는 순간, 나는 깨끗해야 할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면서도 거기에 새빨간 핏자국이 가득 번져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 모두 편히 잠들 수 없다.
안타깝게도, 영혼 속에는 항상 그 작은 빛 하나가 괴롭히기를 멈추지 않는다——
끊임없이 무겁고도 슬픈 탄식을 내뱉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