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4 업로드, 오역의역 주의
*원래도 믿고 듣는 아지에 성우지만 이건 원문과 꼭 들어보는 걸 추천……디렉팅 장난아닌데 연기력도 최고인 외전.
2부 vol.9 제로섬게임 백기 외전 — 죄(罪)
그는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죄 罪 번역
01
잿빛 하늘에 먹구름이 주름진 듯 겹겹이 뭉쳐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딩동——
전자 출입문에서 알림음이 울리고, 백기의 등 뒤로 편의점 자동문이 천천히 닫혔다.
백기는 걸음을 내딛다가 무심코 옆에 있던 물웅덩이를 밟았다. 더러운 물이 아직 제법 하얀 운동화 위로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곧이어 다른 발도 웅덩이를 밟았고, 이번에는 바짓단까지 젖어 버렸다.
백기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거처 앞에 도착했다. 바지 주머니를 한참이나 뒤적이던 그는 열쇠를 꺼내 자물쇠 구멍에 밀어 넣었다.
한 번, 두 번. 열쇠는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백기는 점점 짜증이 치밀어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달그락——열쇠가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며 맑은 소리를 냈다.
백기는 고개를 숙였다.
수많은 흠집이 난 낡은 열쇠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자신이 왜 아직도 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열쇠로 열 수 있었던 문 너머의 모든 것은 이미 거센 불길에 휩싸여 거의 잿더미가 되어 버렸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백기는 몸을 숙여 열쇠를 주웠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새 열쇠 하나를 꺼냈다.
두 열쇠의 모양은 무척 닮아 있었다. 다만 낡은 열쇠는 이제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곧바로 새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에는 어둡고 휑한 거실이 펼쳐져 있었다. 생활에 꼭 필요한 가구 몇 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백기는 개의치 않았다.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그저 그 남자가 마련해 준 거처일 뿐이었다.
그의 집은 이미 그날의 화재로 모조리 타 버렸으니까.
그런데도 이곳에 돌아올 때마다 백기는 그 얼굴을 떠올렸다.
차갑고, 슬픔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던 얼굴.
처음으로 그 남자에게 간절히 애원했던 순간이 생각났다.
끝내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던 그의 표정과, 침묵 속에서 그 모든 일의 책임을 백기에게 돌리던 모습까지.
“네가 무능해서 그런 거야! 네 엄마를 구하지 못한 건 너라고!”
백기는 진작 알았어야 했다. 자신이 그토록 붙잡으려 했던 것은 물 위에 떠 있는 갈대 한 줄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백기는 편의점에서 사 온 즉석식품들을 한꺼번에 냉장고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책상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종이 상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백기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차마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샤오치(小起)……”
그 순간, 희미한 의식 속에서 상자 안으로부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곧이어 온통 불길에 휩싸인 광경이 거센 홍수처럼 그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이 기억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짙은 연기까지 휘몰아 올리는 듯했다.
눈이 시릴 만큼 강렬한 붉은빛이 백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검은 형체 하나가 뒤틀리고 있었다.
마치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를 달래려는 것 같기도 했다.
백기는 넋을 잃은 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 형체에 손을 뻗고 싶었다.
바로 다음 순간, 그의 마음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불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절망에 잠긴 두 눈이 불길 속에서 백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 돼……!”
백기는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고, 그의 몸은 그대로 바닥에 부딪혔다.
순식간에 불길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끝없는 어둠만이 그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백기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몸을 떨며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 제가 엄마를 죽였어요.”
02
“빨리! 이러다 지각하겠어!”
창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외침에 백기는 무감각하게 눈을 떴다.
학교에 갈 시간이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늘 하던 대로 이를 닦고 세수를 한 뒤 교복을 입었다.
백기에게 학교에 간다는 것은 이미 본래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이제는 그저 본능에 이끌려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마음에 두었던 바람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 우리 샤오치가 벌써 고등학생이 되는구나! 오늘은 엄마랑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축하해야지.”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백기가 성장하는 순간마다 잊지 않고 축하해 주곤 했다.
그날이 언제였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날씨가 무척 좋았다는 것, 어머니와 함께 근사한 식사를 하며 곧 시작될 고등학교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어머니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쉴 새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백기도 어느새 고등학생이 된다는 것이 정말 새로운 출발점에 서는 일처럼 느껴졌다.
앞으로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만 같았다.
“샤오치,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되어 가는 거야.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친구도 많이 사귀어야 해.”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기면 꼭 엄마한테 말해 줘야 한다?”
백기는 순간 음식이 목에 걸릴 뻔했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너도 참, 그렇게 맨날 무뚝뚝한 얼굴만 하고 있지 말고 좀 웃어야지. 안 그러면 여자애가 무서워서 도망가 버릴지도 몰라……”
“……엄마.”
따스한 주황빛 노을 아래에서 어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가장 부드러운 쇠고기 한 점을 집어 백기의 그릇에 올려 주었다.
백기는 고개를 숙였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움직이던 그는 마침내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정말로 달라졌다. 그날의 거센 불길이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아름다웠던 모든 순간도, 앞으로 펼쳐질 수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도 그 화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백기는 냉장고 문을 거칠게 닫았다. 주먹밥의 포장지를 뜯어 아무렇게나 입에 밀어 넣었다.
딩——
그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도착하는 입금 알림이었다.
그 순간, 방금 삼킨 주먹밥이 뱃속에서 마구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집도, 산 송장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생활도 모두 그 남자의 돈이 있기에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릴수록 백기는 자기 자신이 더욱 혐오스러워졌다.
그는 이렇게나 한심하게도 그 모든 것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
백기는 휴대전화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조리 떨쳐 버리려는 듯 거칠게 문을 밀어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창밖에는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길 건너편 건물조차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귓가에 우렁찬 낭독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백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개의치 않았다.
지금의 자신은 마치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 같았다.
그날 불길 속에서 죽지 않은 자신은 죽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어서도 안 되는 사람 같았다.
그때, 앞쪽에서 시험지 한 장이 가볍게 날아와 백기의 책상 위에 놓였다.
흘끗 내려다보니 지난번에 치른 시험지였다. 선명하게 적힌 낙제 점수와 붉은색으로 표시된 정오표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낭독 소리는 여전히 쉴 새 없이 백기의 귓가를 때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 소음이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그는 성가신 시험지를 한 움큼 구겨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등 뒤에서 열정적으로 이어지던 낭독 소리가 그 순간 놀란 듯 반 박자쯤 멎었다.
이제야 조용해졌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백기는 곧장 옥상으로 향해 철문을 밀어 열었다.
우뚝 솟아 있던 건물들은 짙은 안개에 가려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는 학교 옥상에 반듯이 누워, 안개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저 이번 시험에서 낙제했어요. 지금은 수업도 빼먹고 있고요.”
주위는 고요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아마 이 세상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렇게 침묵하겠지.
백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03
선생님이 옥상에 있는 백기를 찾아냈을 때는 이미 하교 시간이 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교칙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한바탕 훈계를 한 뒤, 구두 경고와 함께 벌을 내렸다.
“오늘 방과 후 교실 청소는 네가 맡아.”
하교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교실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학생 몇 명만이 남았다. 백기는 별다른 생각 없이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쓰레받기에 쓸어 담았다.
그런데 쓰레기통에 다가가 쓰레기를 버리려는 순간, 안에 있던 것들이 도로 밖으로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쓰레기통 안에는 교과서가 잔뜩 들어 있었다. 표지에는 왕타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런 걸 왜 여기에 버린 거지? 백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왕타오는 같은 반 학생이었고,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는 아이였다.
“그냥 개 짖는 소리 좀 내보라는 거잖아. 어려운 것도 아닌데. 네가 그럴듯하게 짖기만 하면 그 돈은 없던 일로 해줄게.”
“우리 친구 사이잖아.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그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테 안경을 쓴 남학생이 왕타오의 얼굴을 제멋대로 주무르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왕타오는 입술을 세게 깨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백기는 저 남학생을 본 적이 있었다. 옆 반의 우등생으로, 이름이 아마 묘인걸이었던 것 같았다.
“싫다는 거야?”
묘인걸이 손을 들어 왕타오의 뺨을 때리려던 순간, 불쑥 나타난 손 하나가 그의 팔을 막아섰다.
“네 교과서.”
백기는 왕타오의 책상 위에 교과서를 내려놓고 다시 청소를 하러 돌아섰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발로 빗자루를 세차게 걷어찼다. 빗자루가 손에서 튕겨 나가면서 나무 가시가 손바닥을 스쳐 길게 상처를 냈다.
“이봐, 넌 누구냐? 이름도 밝히지 않고 선행을 베푸는 영웅이라도 흉내 내는 거야?”
묘인걸은 싱글벙글 웃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방금 전 화를 참지 못하고 빗자루를 걷어찬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백기는 대꾸하지 않았다. 손바닥에 얕게 번진 핏자국을 한번 내려다본 뒤, 몸을 돌려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빗자루를 주웠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책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구겨진 종이 뭉치들이 하나둘 백기의 발치로 굴러왔다.
“그렇게 청소가 하고 싶어? 좋아, 소원대로 해줄게.”
“여기 깨끗이 치우기 전에는 집에 갈 생각도 하지 마.”
찢어낸 교과서를 구겨 만든 종이 뭉치가 계속해서 바닥에 떨어졌다.
교실 바닥을 뒤덮은 종잇조각들은 오래도록 가라앉아 있던 백기의 마음속에도 하나둘 던져져,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듯했다.
“주우라니까. 왜 가만히 있어?”
“너한테 말하잖아. 귀 먹었어?”
귓가를 파고드는 소음이 오랫동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백기의 신경을 거칠게 건드렸다.
“시끄러워.”
“뭐라고?”
등 뒤에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림자가 백기의 몸 위로 드리워지는 순간, 그는 몸을 돌려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동시에 금테 안경이 석양빛을 반사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렌즈가 산산조각 났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마침내 묘인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입가를 문지르더니 사나운 눈빛으로 백기를 노려보았다.
“하…… 미친놈을 만났네.”
“좋은 말로 해서는 내가 버린 쓰레기를 주울 생각이 없다는 거지?”
말을 마친 묘인걸이 백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지는 순간, 백기의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그제야 줄곧 아래로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날카로운 빛을 띤 호박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오랫동안 팽팽하게 버티고 있던 마지막 신경이 마침내 끊어졌다.
저녁이 되자 짙게 깔려 있던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교무실에서는 학생부장과 두 담임 선생님이 교칙을 어긴 학생들을 어떻게 처분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백기는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간간이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소리가 들렸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 마디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조금 전 주먹을 휘두르며 쌓여 있던 감정을 쏟아냈을 때의 후련함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깊은 공허함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백기! 내 말 듣고 있어?”
학생부장이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
“넌 내일부터 사흘간 정학이야. 반성문도 써서 제출하도록 해!”
“왕타오, 너는 이번에 구두 경고와 반성문 제출로 끝내겠다. 부모님도 학교로 모시고 와.”
“묘인걸, 너는 일단 집에 가서 푹 쉬면서 상처부터 치료해. 스스로 잘 반성하고, 이번 일 때문에 공부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해라. 됐어. 다 들었으면 이제 나가 봐.”
선생님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세 사람은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백기라고 했지? 두고 보자.”
묘인걸은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왕타오도 겁먹은 눈으로 백기를 한번 바라보더니 서둘러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텅 빈 학교에는 백기 혼자만 남았다.
그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지친 몸을 이끌고 교문을 나섰다.
거처로 돌아온 백기는 곧장 소파에 몸을 내던졌다. 소파에 몸이 부딪히자 그제야 상처 난 곳들이 뒤늦게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기는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엄마, 저 싸웠어요.”
텅 빈 방 안에서는 꾸짖는 소리도, 위로하는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백기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한 번도 닫힌 적 없는 창문으로 향했다.
“엄마, 저 싸웠다고요!”
이번에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한번 말했다. 하지만 마지막 말소리마저 방 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신경 써 줄 사람이 없었다.
백기는 몸을 웅크리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꽉 움켜쥔 주먹 때문에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핏방울이 소리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떨어진 핏방울은 천천히 굳어 갔다. 마치 말라붙은 눈물처럼.
04
불과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반 분위기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학교에 돌아온 백기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하지만 그쪽을 똑바로 바라보면,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그날의 마지막 수업은 체육이었다.
오래달리기를 마친 백기는 숨을 고르며 교사 건물의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온몸을 흠뻑 적셨다.
더러운 물이 머리카락 끝을 타고 흘러내리며 시야를 흐렸다.
백기는 모래가 들어간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 몇 명만 보일 뿐, 정작 이런 짓을 벌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얼굴에 묻은 오물을 닦아내고 몸을 돌려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몇몇 학생이 당황한 눈빛으로 황급히 빠져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백기는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곧 걸음이 멈췄다.
그의 교과서들이 물통 안에 잠겨 있었고, 자리에 놓아두었던 책가방도 사라져 있었다.
백기는 저도 모르게 쓰레기통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그 안에는 자신의 책가방이 처박혀 있었다. 시큼하게 썩은 냄새가 풍겨 나왔다.
백기는 곧바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마음에는 별다른 동요가 일지 않았다. 그저 물통에서 교과서를 꺼내 몇 번 털어 낸 뒤 책상 서랍에 던져 넣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교하려던 순간, 교실 안에서 주눅 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싸움 잘하잖아. 그런데 왜 걔들한테 복수하지 않는 거야?”
백기는 소리가 난 쪽으로 눈을 들었다.
왕타오가 어두컴컴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늘에 가려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너라면 걔들이 다시는 까불지 못하게 두들겨 팰 수 있잖아……”
왕타오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말투에는 참기 힘든 분노까지 조금씩 섞여 들었다.
“계속 주먹을 휘두르면 되잖아. 아예 그 자식을 때려죽일 수도 있을 텐데. 그러면…… 우리 모두 더는 괴롭힘당하지 않아도 되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백기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왕타오의 나약한 눈빛에 순간 짜증이 스쳤다.
“설마 걔들이 말한 게 진짜야? 네 엄마가 죽어서 네가 그렇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이 왕타오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왕타오는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황급히 목을 움츠리더니 다시 겁먹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내, 내가 한 말이 아니야. 묘인걸이랑 걔들이 그렇게 말한 거라고……”
“걔들이 뭐라고 했는데?”
“그, 그게…… 네가 그렇게 의기소침하게 지내는 건…… 네 엄마를 죽게 만든 게 너라서 그렇대. 그래서 네 아빠도 널 돌보지 않는 거라고……”
“……걔들 아마 아직 뒷문 골목에 모여 있을 거야! 지금 가면 만날 수 있을걸.”
백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창밖에는 먹구름이 잿빛 하늘을 무겁게 뒤덮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05
보슬보슬 내리는 빗방울이 물웅덩이 위에 동심원을 그렸다. 하지만 그 잔잔한 물결은 이내 백기의 발길에 짓밟혀 흩어졌다.
백기는 말없이 앞을 응시하며 어두컴컴한 골목을 하나씩 돌아 나갔다. 그렇게 몇 개의 골목을 지나 한데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상대방도 골목 끝에서 들려온 인기척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하나둘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들 한가운데 서 있던 묘인걸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설마 여기까지 쓰레기를 주우러 온 거야?”
그렇게 말하며 묘인걸은 옆에 놓인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다. 쓰레기통이 바닥에 나뒹굴자 축축하고 썩은 냄새가 순식간에 골목 안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다른 녀석들이 말없이 백기를 에워쌌다.
“어디 한번 주워 봐. 다 줍기 전에는 집에 갈 생각도 하지 말고. 아, 그러고 보니 너한테 아직 집이라는 게 있긴 하냐?”
“사과해.”
백기는 묘인걸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 사과는 무슨 개소리야!”
백기를 둘러싼 녀석 중 하나가 욕설을 내뱉으며 그의 몸을 걷어찼다.
바로 다음 순간, 사방에서 거센 주먹이 날아들었다.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쏟아지는 주먹들이 백기의 몸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하지만 백기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여러 손아귀를 버텨 내며 다시 두 다리로 몸을 곧게 세웠다.
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손가락 끝에 맺혔다가 물웅덩이로 뚝뚝 떨어졌다.
“사과해.”
묘인걸이 백기의 앞으로 다가와 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뭘 사과하라는 거야?”
백기는 눈을 들어 묘인걸을 응시했다.
“우리 어머니께 사과해.”
묘인걸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곧 전보다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백기, 네 엄마는 불에 타 죽었잖아? 내가 어디 가서 사과를 하라는 거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기의 주먹이 묘인걸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묵직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채 허공으로 퍼지기도 전에 백기의 주먹이 다시 상대의 가슴과 배를 강타했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또 한 번, 다시 한 번.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 사이로 둔탁한 타격음이 유난히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황급히 백기를 붙잡아 떼어 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수많은 주먹이 다시 백기의 몸 위로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백기는 마치 가슴속에 쌓인 모든 것을 토해 내기라도 하듯 더욱 맹렬하게 반격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빗소리인지, 살과 뼈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상대들이 하나둘 겁에 질려 달아나고 나서야 백기는 마침내 무표정한 얼굴로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아직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백기가 빗속을 향해 울부짖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묘인걸에게 다가간 그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멱살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야, 너한테 말하고 있잖아.”
“미, 미안해……”
백기는 코웃음을 치더니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늦었어.”
그 말을 내뱉고 다시 한번 주먹을 내리꽂자 묘인걸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만 때려! 내가 잘못했어. 다, 다시는…… 다시는 안 그럴게.”
“앞으로 또 이런 짓을 하면 내가 다시 찾아올 거야.”
“알아들었어?”
묘인걸이 살려 달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백기는 마침내 그의 멱살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빗줄기가 쏟아지는 골목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어느새 자신의 거처 바닥에 누워 있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팔다리는 완전히 마비된 듯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백기는 상처에서 밀려오는 통증이 칼날처럼 몇 번이고 자신의 몸을 베어 내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것으로 죗값을 치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창밖에서 한 줄기 밤바람이 불어와 그의 몸을 부드럽게 스쳤다.
누군가 자신을 품에 안아 주는 것 같기도 했고,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는 것 같기도 했다.
백기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그는 다급히 손을 뻗어 그 바람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백기는 절망에 잠긴 채 몸을 웅크렸다.
“엄마,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 비 내리던 밤이 지나고, 고요한 새벽이 찾아왔다.
학교에서는 어떤 선생님도 백기를 찾아오지 않았다. 마치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이 암묵적으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그날의 일은 그대로 묻혀 버렸다.
하룻밤 사이에 전교생이 말없이 하나의 약속을 나눈 것 같았다.
이제 누구도 감히 백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묘인걸도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일로 비 내리던 밤의 소문은 더욱 두려운 이야기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때부터 또 다른 일이 시작되었다.
백기의 소문을 듣고 일부러 그에게 싸움을 걸러 찾아오는 불량배들이 점점 늘어난 것이다.
그럴 때마다 백기는 차가운 얼굴로 주먹을 들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휘둘렀다.
그 순간 백기는 자신의 인생이 앞으로도 영원히 이렇게 흘러가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흐리멍덩한 의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겠지.
죄인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