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4 업로드, 오역의역 주의
*원래도 믿고 듣는 아지에 성우지만 이건 원문과 꼭 들어보는 걸 추천……디렉팅 장난아닌데 연기력도 최고인 외전.
2부 vol.9 제로섬게임 백기 외전 — 죄(罪)
그는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1장
잿빛 하늘에 구름이 뭉게뭉게 모여,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았다.
딩동——
전자 도어벨이 울리자, 백기 등 뒤로 편의점 자동문이 천천히 닫혔다.
그가 걸음을 내딛다가 방심하는 사이 옆 웅덩이를 밟았다. 더러운 물이 그래도 아직 하얀 운동화에 튀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른 발도 빠르게 따라나와 이번에는 바짓가랑이까지 젖었다. 그렇게 숙소 문 앞까지 걸어가 바지 주머니를 마구 뒤지더니, 열쇠를 꺼내 자물쇠 구멍을 찔렀다.
한 번, 두 번.
열쇠가 도무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초조해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더 들어갔다.
찰칵——
열쇠가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며 낭랑한 소리를 냈다.
백기가 고개를 숙이자, 스크래치투성이의 낡은 열쇠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자신이 왜 아직도 이걸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문 뒤에 있던 모든 것들은 거의 다 불길 속에서 재로 변해버렸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백기는 마침내 열쇠를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새 열쇠를 꺼냈다.
둘의 윤곽은 아주 비슷했다. 다만 낡은 열쇠는 이제 쓸모가 없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새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눈에 들어온 건 어둡고 텅 빈 거실이었다. 필요한 가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기는 집이 아니었다. 그저 그 남자가 제공한 숙소일 뿐이었다.
그의 집은 그 큰 불 속에서 진작 모조리 타버렸다.
하지만 이곳에 돌아올 때마다, 백기는 그 차갑고 슬픔이라곤 없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남자에게 처음으로 간곡히 부탁했던 때가 생각났다. 시종일관 무심했던 표정과, 침묵으로 이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던 것이.
"네가 너무 무능한 탓이야! 네 엄마를 구하지 못한 건 너야!"
백기는 진작 알았어야 했다.
자신이 잡으려던 것은 물 위에 떠 있는 갈대뿐이었다는 걸.
편의점에서 사온 인스턴트 식품을 냉장고에 대충 쑤셔넣고, 발걸음을 이끌어 방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유일하게 놓인 종이 상자를 천천히 바라봤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감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백기……(小起)"
어렴풋이, 그 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손끝이 저절로 떨리고, 불바다가 홍수처럼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이 기억 저편으로부터 짙은 먼지 연기를 휘감아 올리는 것 같았다. 강렬한 붉은색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검은 잔영 하나가 맹렬히 타오르는 불 속에서 뒤틀렸다. 구조를 요청하는 것 같기도, 달래는 것 같기도 했다.
백기는 멍하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그 잔영에 손을 뻗으려 했다.
다음 순간, 불꽃이 그의 마음에 응하기라도 하듯 한쪽으로 기울더니, 절망에 잠긴 두 눈이 불 속에서 곧장 그에게로 향했다.
"안 돼!"
백기가 손을 뻗었지만 허공만 잡아당겼다. 온몸이 마룻바닥에 부딪혔다.
불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끝없는 어둠만 남았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떨면서 쉰 목소리를 냈다.
"엄마, 제가 엄마를 죽였어요."
2장
"서둘러, 늦겠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시끄러운 소리에 백기는 무감각하게 눈을 떴다.
학교 갈 시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바닥에서 일어나 기계적으로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 교복을 입었다.
그에게 있어 학교에 가는 것은 이미 본래의 의미를 잃었다. 지금은 그저 본능에 이끌려, 어머니가 남기신 마지막 바람을 완성시키는 것 같았다.
"어머, 우리 백기가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되는구나. 오늘 엄마랑 밖에서 밥 먹자. 축하해야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어머니는 언제나 귀찮아하지도 않고 성장의 모든 순간을 함께 기념해주셨다.
그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날씨가 아주 좋았고, 어머니와 함께 한껏 차려진 밥을 먹으며 곧 시작될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은 기억났다. 그날 어머니는 유난히 즐거우셨는지 끊임없이 많은 말씀을 하셨다. 어렴풋이 백기도 고등학생이 된다는 게 진짜 새로운 출발점에 들어서는 것 같아서, 모든 게 달라질 것 같다고 느꼈다.
"백기야. 고등학교에 가면 이제 작은 어른이 되는 거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만이 아니라, 친구도 많이 사귀어야 해."
"마음에 드는 여자애가 생기면, 꼭 엄마한테 말해주고."
백기는 말문이 막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자꾸 그렇게 딱딱한 얼굴만 하지 말고, 좀 많이 웃어야 해. 안 그러면 사람들이 놀라서 도망가겠어."
"……엄마."
눈앞의 어머니가 따뜻한 저녁 노을 아래에서 웃으시며, 가장 부드러운 쇠고기를 그의 그릇에 올려주셨다.
백기는 고개를 숙이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겨, 마침내 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것이 확실히 달라졌다. 그 맹렬한 불길이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모든 아름다움도, 모든 가능성도, 그 불길과 함께 사라졌다.
백기는 냉장고를 세게 닫고, 주먹밥 포장지를 뜯어 아무렇게나 입에 쑤셔넣었다.
"띵——"
그의 동작이 잠시 멈추더니, 소리를 따라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바라봤다. 정확한 시간에 들어온 계좌이체 알림이었다.
순간, 방금 삼킨 주먹밥이 위 속에서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집이든, 지금처럼 산 송장 같은 생활이든 전부 그의 돈에 기대어야만 구차하게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더욱 혐오스러웠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이 모든 것에 기댄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생각에 그는 휴대폰을 꽉 쥐고 힘껏 문을 열어젖히며, 머릿속의 생각들을 전부 내팽개치려 했다.
창밖은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건너편 건물도 흐릿하게 보였다. 귓가를 울리는 우렁찬 낭독 소리가 백기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그냥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학교에서 백기는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자신은 마치 세상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 같았다.
불 속에서 죽지 않은 그는, 죽어야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살아 있어도 안 되는 사람 같았다.
갑자기 시험지 한 장이 책상 위에 가볍게 내려놓였다. 힐끗 보니 지난번 시험지였다. 눈에 띄는 낙제 표시와 새빨갛게 그려진 채점 표시들이 선명했다.
우렁찬 낭독 소리가 여전히 귀를 두드렸다. 그런 소음이 갑자기 지긋지긋해졌다. 그는 성가신 시험지를 구겨 쥐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등 뒤의 격앙된 낭독 소리가 이 순간 놀란 듯 반 박자 멈췄다.
마침내 조용해졌다.
수업 종이 울리자, 백기는 곧장 옥상 철문을 밀어 열었다.
안개 속에 자취를 감춘 건물들을 배경 삼아, 그는 학교 옥상에 등을 대고 누워 존재하지도 않는 하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엄마, 저 이번에 시험에서 낙제했어요. 지금 수업도 빼먹고 있고요."
공기는 조용했다.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이 세상은 아마 영원히 이렇게 침묵할 것이다.
백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예 눈을 감았다.
3장
선생님이 옥상에서 백기를 찾아냈을 때는 이미 방과 후였다.
그는 학교 규칙과 교칙을 들먹이며 백기를 한참 훈계한 뒤, 구두 경고와 벌칙을 내렸다.
"방과 후에 네가 반 청소를 해."
하교 종이 울리자 교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명밖에 남지 않았다.
백기가 무심히 바닥의 쓰레기를 치우다가 쓰레기통 옆에 갔을 때, 쏟아진 쓰레기가 미끄러져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왕타오라는 이름이 쓰인 교과서가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이게 여기에 왜 있지. 백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렴풋이 왕타오가 같은 반 친구고, 평소에 말이 많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강아지 짖는 소리 내보라고 했을 뿐인데. 어렵지도 않잖아. 듣기 좋게만 해주면 이 돈은 없던 걸로 하지."
"어차피 다 친구 사이인데, 서로 좀 봐주고 살아야지."
고개를 돌려보니, 왕타오의 얼굴은 금테 안경을 쓴 남학생의 손에 이리저리 잡혀,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여러 번 일그러지고 있었다.
왕타오는 입술만 꽉 깨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백기는 저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옆 반의 우등생으로, 묘인걸이라고 불리는 애였다.
"싫어?"
묘인걸이 손을 들어 때리려 하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손 하나가 그 행동을 막았다.
"교과서."
백기가 교과서를 책상 위에 던져놓고 돌아서 다시 청소를 하려 했다.
그 순간 한 발이 갑자기 그의 손에 들린 빗자루를 걷어찼다. 빗자루 위의 나무 가시가 손바닥을 따라 상처를 냈다.
“거기 학우님은 누구세요? 좋은 일 하고 이름 남기지 않는 영웅 역할이라도 하는 건가?”
묘인걸이 웃으면서 안경을 고쳐 올렸다.
방금 분을 이기지 못해 걷어찬 발이 마치 자기 발이 아닌 것처럼.
백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난 얕은 핏자국을 슬쩍 보더니 몸을 돌려 멀지 않은 곳의 빗자루를 주웠다.
하지만 다음 순간 등 뒤에서 책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 뭉치들이 하나씩 그의 발끝까지 굴러왔다.
"청소 그렇게 하고 싶으면 실컷 해. 만족하지?"
"다 치우기 전까지 집에 가지 마."
교과서를 찢어 만든 종이 뭉치가 끊임없이 바닥에 떨어지고, 여기저기 널린 종이 부스러기들이 이미 가라앉아 있던 마음속에 던져지는 것 같아 잔물결을 일으켰다.
"주워. 왜 안 움직여?"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 귀라도 먹었어?"
귓가에서 거슬리는 소리들이 오랫동안 팽팽하게 조여오던 백기의 신경을 건드렸다.
"시끄러워."
"뭐라고?"
등 뒤의 발걸음이 가까워지면서 그림자가 덮이는 순간, 백기가 몸을 돌려 상대방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동시에 금테 안경이 저녁노을 빛을 받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렌즈가 깨졌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묘인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입가를 문지르며 독살스럽게 백기를 노려봤다.
“아…… 미친놈을 만났네.”
“좋게 말해서는 내가 버린 쓰레기를 안 주울 모양이지?”
그러면서 묘인걸도 백기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무거운 울림이 교실에 퍼지는 순간, 피비린내가 백기의 입 안에 퍼졌다.
그는 마침내 시종일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날카로운 호박빛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팽팽하게 버텨오던 신경이, 마침내 끊어지고 말았다.
짙은 안개가 저녁 무렵 서서히 걷혔다. 교무실 안에서는 교감이 두 담임교사와 함께, 규칙을 어긴 학생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백기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가끔 자신에 관한 단어들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부어오른 손마디만 바라보며, 방금 주먹을 휘두르면서 느낀 분출감과, 그보다 더 깊어진 공허함을 느꼈다.
"백기! 듣고 있어?"
교감이 책상을 힘껏 두드렸다. 불만이 넘쳐흘렀다.
"……"
"내일부터 3일 동안 정학이야. 반성문도 써와!"
“왕타오, 너는 이번엔 구두 경고로 끝내겠다. 반성문 한 장 써오고, 부모님도 한 번 오시라고 해.”
"묘인걸, 우선 집에 돌아가서 상처 치료하고 스스로 잘 반성해. 이 일 때문에 공부에 지장 없도록 해. 됐으니 다들 나가봐."
선생님이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세 사람이 교무실을 나갔다.
“백기라고 했지. 두고 봐.”
묘인걸이 한마디 던지고 사라졌다. 왕타오는 겁에 질려 백기를 한 번 흘끗 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계단 입구로 사라졌다.
텅 빈 학교에 백기만 혼자 남아, 온몸의 상처와 피로를 이끌고 교문을 나섰다.
숙소로 돌아와 소파에 풀썩 쓰러졌다. 몸의 상처가 그 충격에 뒤늦게 통증을 전해왔다.
그는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엄마, 저 싸웠어요."
텅 빈 방 안에는 꾸짖음도, 위로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고개를 들어 한 번도 닫히지 않은 창문을 바라봤다.
"엄마, 저 싸웠다고요!"
목소리를 높여 다시 한 번 반복했다. 하지만 끝소리가 방 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사방은 여전히 고요했다.
더 이상 그를 신경 써주는 사람이 없었다.
백기는 몸을 움츠려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꽉 쥔 주먹 때문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핏방울이 소리 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천천히 굳어갔다. 마치 마른 눈물처럼.
4장
불과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반 분위기는 이미 예전과 달랐다.
백기가 학교에 돌아오자, 어딘가에서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면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었다.
마지막 체육 시간. 장거리 달리기를 마친 백기가 건물 기둥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다음 순간, 머리 위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순간, 가득 찬 오수가 온몸을 흠뻑 적셨다. 더러운 물이 머리카락 끝을 타고 흘러내려 시야를 흐렸다.
눈에 낀 모래를 걷어내고 올려다봤지만, 놀란 눈빛의 학생들 몇 명 외에는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담담하게 얼굴의 더러운 물을 닦아내고 몸을 돌려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당황한 눈빛의 학생 몇 명이 서둘러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별 생각 없이 걷다가,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그의 교과서가 물통 속에 잠겨 있었다. 좌석의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백기는 저도 모르게 쓰레기통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의 책가방은 그 안에 누워 있었다. 시큼하고 썩은 냄새가 났다.
그는 곧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마음에는 그다지 큰 파문이 일지 않았다.
그냥 물통 속의 교과서를 꺼내 털더니 서랍에 던져 넣었다. 막 자리를 뜨려는 순간, 교실 한쪽에서 겁 많은 목소리가 들렸다.
"넌 싸움도 잘하잖아. 왜 걔들한테 찾아가서 따지지 않아?"
소리를 따라 눈을 들었다. 왕타오가 어두운 구석에 앉아 있었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걔들을 다시는 날뛰지 못하게 만들 수 있잖아."
왕타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투에 참기 어려운 분노가 섞여 있었다.
"계속 주먹을 휘두르면 걔를 죽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되면……우리 모두 다시는 괴롭힘 안 당해도 되잖아."
짧은 침묵 끝에, 왕타오의 나약한 눈빛에 잠깐 짜증이 스쳤다.
"혹시 진짜 걔들 말대로, 네 엄마가 죽어서 너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눈빛이 왕타오에게 꽂혔다. 그는 저절로 몸이 움찔하더니 서둘러 목을 움츠리고 다시 겁을 냈다.
“이,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야. 묘인걸 걔들이 한 말이야……”
“걔들이 뭐라고 했어?”
“걔, 걔들이…… 네가 이렇게 의기소침한 건 네 엄마를 네가 죽였기 때문이고, 그래서 네 아버지도 너를 신경 쓰지 않는 거라고……”
“……걔들 아직 후문 뒤 골목에 모여 있을 거야! 지금 가면 만날 수 있어.”
백기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창밖에는 짙은 구름이 어두운 하늘 위에 걸쳐 있었다.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5장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웅덩이에 잔잔한 물결을 만들자마자, 백기의 발걸음이 밟아 흩어뜨렸다.
그는 말없이 앞을 응시한 채, 어두운 골목 어귀를 하나씩 돌아가다가 무리 지어 서 있는 실루엣들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상대방도 골목 끝의 기척을 눈치챈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는 사이 한가운데 서 있던 묘인걸이 웃었다.
“왜 왔어? 설마 여기까지 쓰레기 주우러 온 건 아니지?”
그는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차 바닥에 쏟았다. 습하고 썩은 냄새가 골목 안에 확 퍼졌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소리 없이 백기를 에워쌌다.
“주워. 다 줍기 전에는 집에 가지 마. 아, 그런데 너 집은 있냐?”
"사과해."
백기가 묘인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아무 감정 없이 입을 열었다.
“사과? 네 엄마한테나 해!”
에워싸고 있던 남자 하나가 욕을 내뱉으며 백기의 몸을 걷어찼다.
다음 순간, 사방에서 맹렬한 주먹이 숨돌릴 틈도 없이 쏟아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여러 차례 제압 속에서도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세웠다. 팔의 피가 손끝을 따라 웅덩이에 떨어졌다.
"사과해."
묘인걸이 백기 앞으로 걸어와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무슨 사과?”
백기가 눈을 들어 묘인걸을 응시했다.
"우리 어머니께 사과해."
묘인걸이 잠깐 굳었다가, 이내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네 엄마는 불에 타 죽었잖아. 내가 어디 가서 네 엄마한테 사과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기의 주먹이 묘인걸의 얼굴을 강타했다. 묵직한 타격음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아악!!"
참혹한 비명이 허공으로 치솟는 순간, 백기는 또 한 번 상대의 가슴과 배를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큰 소리가 났다.
이어서 한 번, 또 한 번. 묵직한 타격음이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울렸다.
마침내 누군가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백기를 떼어냈다.촘촘한 주먹이 다시 그에게 쏟아졌다.
발끈한 것처럼 백기는 더욱 맹렬하게 반격했다. 비가 점점 세차게 내렸다.
귓가에 들리는 게 빗소리인지 살과 뼈의 둔탁한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주먹을 휘두르다가, 상대방이 하나씩 달아났을 때 마침내 무표정하게 멈췄다.
그래도 부족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백기는 빗줄기를 향해 울부짖듯 소리쳤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묘인걸 앞으로 걸어가 쪼그려 앉더니, 그의 옷깃을 붙잡아 끌어올렸다.
“야, 너한테 말하고 있잖아.”
"미, 미안해……"
백기는 코웃음을 치고, 상대의 얼굴에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늦었어."
다시 한 번 주먹을 내리쳤다. 묘인걸이 주체할 수 없이 떨기 시작했다.
“때, 때리지 마.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다음에 또 이러면, 다시 찾아올 거야.”
“알아들었어?”
묘인걸이 용서를 비는 듯 계속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백기는 마침내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비 장막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얼마나 지났는지, 다시 눈을 떴을 때 백기는 자신이 숙소 바닥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지가 마비되어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그는 상처에서 밀려오는 통증이 칼날처럼 자신을 한 번씩 베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속죄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때, 밤바람 한 줄기가 창밖에서 불어와 그의 몸을 부드럽게 스쳤다.
감싸 안는 것 같기도, 한숨 쉬는 것 같기도 했다.
백기의 몸이 갑자기 세게 떨렸다. 그는 손을 뻗어 그 바람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바닥이 텅 비어 있다는 것만 깨달았다.
마지막에, 그는 절망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엄마,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 비오는 밤이 지나고 맞이한 것은, 고요한 새벽이었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백기를 찾지 않았다. 이 일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알면서도 덮어버린 것 같았다.
마치 하룻밤 사이에 전교생이 말없이 합의라도 한 것처럼, 더 이상 아무도 백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묘인걸도 전학을 갔다. 그날 비오는 밤의 이야기는 더욱 두려운 전설이 됐다.
그러나 바로 그때부터, 이름을 듣고 찾아온 양아치들이 더 많이 백기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저 차갑게 주먹을 들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모든 사람에게 휘둘렀다.
그 순간, 백기는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영원히 이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계속 이렇게, 아무 생각도 없이 넋이 빠진 채 살아가게 될 것 같았다.
죄인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