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낯선 복도에 정체 모를 수업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좁은 교실 문과 창문 너머로 고개를 숙이고 수업을 듣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비치고 있었고, 뒤쪽 칠판에는 흐릿한 글자들이 빽빽하게 가득 채워져 있었다.
복도 창밖으로는 음울한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당혹스럽고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굳어 섰다.
유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방금 전까지 백기와 함께 교문 앞에 서 있었는데, 어째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나는 일단 사방을 둘러보며 백기를 찾으려 했다. 그러다 시야 끝에 뭔가 걸리는 것이 있어, 뒤늦게 퍼뜩 고개를 내려다봤다.
몸에 걸쳐진 옷은 파란빛과 흰빛이 섞인 교복이었다. 여러 번 세탁되어 군데군데 살짝 바랜 흔적까지 있었다.
교실 안의 그림자들과 똑같은 디자인, 똑같은 색. 그것은 마치 순식간에 나를 이 공간의 일부로 밀어 넣은 것 같았다.
오싹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며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유연
선배…… 선배?
대답 대신 창밖에서 한 줄기 바람이 스치고, 나뭇잎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다물고, 일단 냉정하게 지금 상황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
거기 앞에 학생, 몇 반이야?
거의 동시에, 등 뒤에서 불시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어느새 길게 늘어진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내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중년 남자 선생님 한 명이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유연이? 지금 수업 시간인데, 복도에서 뭐 하고 있는 거니?
유연
……
그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이미 이곳 전체에 감돌던 기묘한 기운이 한층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일단 조심하는 게 낫겠다 싶어, 나는 얌전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그냥 화장실 다녀오는 길이에요. 이미 허락도 받았어요.
그가 의심스러운 듯 살짝 몸을 기울였다. 발 옆의 그림자도 더욱 어둡게, 소리 없이 번져왔다.
선생님
학교 규정상, 선생님한테 거짓말하면 안 돼.
유연
……
학교에 그런 규정도 있나?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어차피 아까 한 행동도 규정 위반이었을 테니, 그냥 밀어붙이기로 했다.
유연
……거짓말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선생님
그래, 가봐. 얼른 들어가서 수업 들어.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최대한 빠르게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머릿속이 점점 이상해지던 그때, 복도 창밖에서 갑자기 함성 소리가 터져나왔다.
저 멀리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무리 지어 모여 있었다. 농구장에서는 두 팀이 치열하게 맞붙고 있었다. 음울한 하늘 아래, 유독 한 점의 파란빛이 눈에 들어왔다.
인파 사이에서, 그가 멋지게 가로채고, 돌아서고, 레이업을 성공시켰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모든 득점과 시선을 한 몸에 가져갔다.
굳게 닫힌 교실들을 한 번 돌아보고 나서, 나는 다시 바깥에 모인 학생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쩌면 체육 수업 중인 것 같았다. 가서 물어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계단을 따라 운동장으로 내려가, 시끌벅적한 인파 뒤쪽으로 다가갔다.
유연
저기, 혹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농구공이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함성이 터져 나왔다.
흩어지는 인파 사이로, 낯익은 실루엣이 점점 선명하게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나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소매는 아무렇게나 걷어 올려 단단한 팔뚝이 드러나 있었다.
눈 앞에 걸친 머리카락 몇 가닥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는 멋대로 고개를 털고, 무심한 태도로 상대편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상대가 그들의 진영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그가 순식간에 몸을 스쳐 상대 앞에 나타났다.
농구공은 마치 강자에게만 복종하는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 갔고, 다음 순간 높이 치솟아 올랐다.
공이 깔끔하게 그물을 가르며 들어갔다. 환호성만이 득점을 증명하는 유일한 소리가 되었다.
그는 마치 학원물 만화의 절대적인 중심이자 주인공 같았다. 얼굴 가득 내게는 낯설 만큼 익숙한 표정을 띠고서, 제멋대로 번지는 웃음 속에서 팀원과 가볍게 손뼉을 마주쳤다.
유연
……선배……?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팔뚝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느긋하게 공을 튕기며 옅은 웃음으로 상대를 도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
미*, 얘들아! 백기 저 자식 진짜 너무 잘난 척하잖아. 오늘은 반드시 조져야 돼!!
백기
겨우 이 정도로?
나는 찾고 싶었던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마치 원래부터 이 학교에 다니던 학생 같았다.
혹시 백기도 이곳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일부러 녹아드는 척하는 걸까?
하지만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 자유분방한 모습 속에서 본능적으로 어떤 불협화음과 이질감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그의 느긋한 호박빛 눈동자가 무심코 인파를 스쳐 지나갔다——
'쿵'!
농구공이 바닥에 튀어 오르는 소리와 함께,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내 시선 속으로 빨려들었다.
상대편이 그 틈을 타 공을 낚아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숨을 몰아쉬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이 살짝 커지며 빛을 발하더니,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로 스르르 녹아들었다.
거칠고, 제멋대로이고, 마치 내 어떤 비밀을 꿰뚫어 본 것 같은 웃음이었다.
바람이 쏴아아쏴아아 쉬지 않고 불었다. 분명히 백기인데, 왜인지 모르게 묘하게 위험한 시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낯선 듯 길들지 않은 짐승에게 목표물로 낙점된 것 같았다. 심장이 점점 더 요란스럽게 울리며,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이 모든 게 너무 이상했다.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순식간에 삼켜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척, 강의동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마저 내 결심에 호응하듯 등 뒤에서 쉬지 않고 불어왔다.
그런데 막 계단에 발을 올려놓으려던 순간, 다리 하나가 느릿하게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다리의 바짓단이 아무렇게나 조금 걷혀 있어, 선이 또렷한 발목이 드러나 있었다.
그림자가 내 몸 위로 덮여왔다. 땀 냄새와 후텁지근한 열기가 뒤섞이며, 순간 온몸이 묘한 열기에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백기는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가에 흩어진 웃음기는 흐릿하고 희미했지만, 그 안에는 약간의 짓궂음이 어려 있었다.
그러더니 그 조금 나쁘면서도 낯익은 목소리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백기
왜 도망가.
02
??
백기, 너 뭐 하는 거야……! 누가 네 혼이라도 빼앗아가기라도 한 거야??
백기
난 빠진다. 너희끼리 해.
백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느긋하게 한마디 던지며 자리를 떴다. 그러자 뒤쪽에서 웃음 섞인 욕설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흔적도 없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비켜서며 내 몸 전체를 자신의 앞으로 가렸다.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전부 차단하면서.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뜨거운 눈빛만은 줄곧 나를 똑바로 꿰뚫고 있었다.
낯익은 윤곽과 눈매를 바라보면서도, 낯설고 온몸을 긴장하게 만드는 위험한 기운이 끊임없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도망칠 수 없게 된 이상, 나는 살며시 입술을 다물고 눈앞의 사람을 떠보기로 했다.
유연
선배, 나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게 좀 이상하다고 느껴져서요.
유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요?
그의 눈썹 끝이 가볍게 올라갔다. 눈이 순간 반짝이더니, 그는 무심한 듯 되물었다.
백기
나를 알아?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머릿속에서 웅 하는 소리가 났다.
주변의 나무 그림자들이 시야 끝에서 흐릿한 잔상으로 늘어졌고, 거대한 비현실감이 순식간에 나를 뒤덮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선배가 기억을 잃은 건가?!
나는 저도 모르게 초조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대로 말을 내뱉었다.
유연
당연히 알죠, 선배는 백기잖아요.
백기
……
내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자, 그의 눈빛에 맺힌 길들지 않은 웃음기가 더 선명하게 밝아졌다.
??
저 애는 누구야?
??
오,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멀지 않은 곳에서 몇몇 시선과 떠들썩한 소리가 날아들었다. 내가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기도 전에, 백기가 먼저 내 손목을 잡아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긴 다리를 성큼 내딛으며 나를 그 시선들 한가운데에서 곧장 끌고 나갔다.
??
오오오, 우리한테는 보여주지도 않네.
??
오오오, 누가 부끄러워하는 거야?
백기
닥쳐, 시끄러워.
그의 목소리가 인파를 향해 꽂혔지만 돌아온 건 더 신이 난 휘파람 소리뿐이었다.
백기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나를 이끌어 근처의 인적 없는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내 손목을 놓았다.
잘게 부서지는 빛이 그의 몸 위로 내려앉아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그가 손을 바지 옆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살짝 고개를 내리깔고 입꼬리를 올렸다.
백기
수업 시간에 뛰쳐나와서 날 찾은 거야?
소년의 시선은 피하지 않고 곧장 나를 향해 있었다. 마지막 한마디는 애써 눌러 말한 듯했지만, 그 안에는 나를 떠보는 듯한 기색과 감출 수 없는 관심이 어려 있었다.
마음속에 의문이 점점 커지며,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떠보듯 바라보았다.
유연
찾으려고 한 건 맞아요.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선배는…… 원래부터 이 학교에 있었어요?
백기
무슨 뜻이야?
유연
말 그대로예요. 선배는…… 전에 있었던 일 기억해요?
유연
우리가 이 학교 교문 앞에 같이 있었는데, 그다음에 갑자기 여기에 오게 됐잖아요.
유연
여기가 뭔가 이상한 것 같고, 선배도…… 조금 이상해진 것 같고요. 스스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아요?
하지만 내 말이 이어질수록, 백기의 웃음은 천천히 사라졌다. 그의 눈썹이 점점 불쾌한 듯 살짝 올라갔다.
백기
나는 고등학교 3학년 7반 백기야. 방금 눈이 마주친 걸 포함하면, 이게 우리 두 번째 만남이고.
백기
네가 묻는 일은 몰라. 딱히 신경 쓰이지도 않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살짝 낮췄다. 조금 강압적으로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히며, 자신의 모습을 더 많이 내 시야 안에 채워 넣었다.
백기
질문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야.
유연
네? 하지만 선배도 제대로 대답한 건 없잖아요!
백기
그건 중요하지 않아
.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제멋대로인거야!
눈앞의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심통이 났지만, 그가 무엇을 물으려는지도 궁금해졌다.
어쨌든 눈앞의 ‘백기’는 어딘가 특별했고, 나 역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연
그럼 물어봐요.
백기
좋아하는 사람 있어?
유연
……!
설마 그가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분명 우리는 이미 오래 함께해왔는데도, 그 직선적인 시선 앞에서 내 얼굴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그는 방금 나와 두 번째로 만났다고 말해놓고,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묻는 거야?
가슴속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있어요.
백기
그거 나야?
유연
……!
그의 질문은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동시에 어떤 소년의 마음을 말없이 내 앞에 드러내놓는 것 같아, 내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유연
선배가 그랬잖아요…… 이게 우리 두 번째 만남이라고요.
백기
두 번째 만난 사이면 물어보면 안 돼?
백기
나 아니야?
유연
……
그는 너무나 순수하게 물었다. 마치 그저 ‘맞다’와 ‘아니다’ 중 하나를 확인하고 싶을 뿐인 사람처럼.
나는 당연히 그 사람이라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눈앞의 ‘백기’는 어쩐지 내가 아는 백기와 조금 달랐다.
그의 시선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대담했다. 뜨겁고 거침없이 파고드는 기세가 어려 있어, 마치 한여름의 거센 바람이 짧은 순간 열기를 휩쓸고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분명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달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얼굴을 붉힌 채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바람이 그의 눈앞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게 된 침묵 속에서 나를 그대로 담아낸 호박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멀리서 느릿한 수업 종료 종소리가 들려왔다. 백기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강의동 방향으로 두 걸음 걸어가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백기
가자, 교실까지 데려다줄게.
그의 말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이 숨어 있었다. 그 한마디는 나를 교실로 데려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세계 안쪽으로까지 이끌어 들이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결국 따라나섰다.
나는 백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사실 나 역시 그를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는 길 내내 놀라움과 호기심이 섞인 시선들이 내 몸 위로 꽤 많이 쏟아졌다.
하지만 내 곁의 사람은 여전히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야말로 그가 바란 모습인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낯선 교실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을 때 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내 몸 위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또 살짝 몸을 굽혀 내 눈높이와 시선을 맞췄다.
백기
갈게.
유연
……네.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심장은 그로 인해 쉬지 않고 뛰었다.
??
백기, 너 저학년 복도에서 뭐 하는 거야!
??
교칙 제37조, 고학년 학생은 저학년 복도에 머무를 수 없어.
??
이게 몇 번째 교칙 위반이야? 당장 교무실로 따라와!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백기는 이미 익숙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저 나른하게 꾸짖는 선생님을 한 번 바라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품을 하며 상대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실루엣이 복도 끝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는 순간, 백기가 불현듯 뒤를 돌아봤다.
내 시선도 여전히 그에게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백기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의 입술이 열리고 닫혔다. 분명 입 모양만 움직였을 뿐인데, 목소리는 마치 내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백기
"바로 너야."
갑작스럽고 또 규칙에서 벗어난 말이, 소리 없이도 뜨겁게 내 세계를 거세게 휩쓸고 지나갔다.
나는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음울한 세계 속에서 소년이 거침없는 웃음을 활짝 피워 올리는 것만이 보였다.
나는 숨 쉬는 것마저 잊은 것처럼 그가 멋대로 고개를 돌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진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은 낯선 내 선배는, 방금 내게 고백했다.
03
내가 어떻게 교실 안으로 들어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주변에는 호기심 가득한 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내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며 재잘재잘 궁금한 것들을 쏟아냈다. 온갖 질문에 나는 모처럼 조금 쑥스러워졌다.
유연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학생 B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우린 친구잖아.
학생 B
교칙 제3조에도 적혀 있잖아. “친구 사이에는 비밀을 가져서는 안 되며, 반드시 제때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유연
……학교에서 그런 것까지 정해?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규칙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무슨 “선생님께 거짓말하면 안 된다”, “다른 학년 학생은 다른 학년 복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같은 것들……
전에도 하나둘 등장했던 것들이 이미 충분히 황당했는데, 이제는 친구 사이에도 비밀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학생 C
그게 뭐가 이상해? 예전부터 저기 뒤에 다 써 있었잖아.
그의 시선을 따라 나는 교실 뒷벽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빽빽한 글씨들은 틈 하나 없는 그물처럼 엉켜 있었고, 그 순간 마침내 내게 선명하게 제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반드시 적극적으로 학우들과 일상적인 교류에 참여할 것”, “반드시 학교 및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 “반드시 선생님과 적극적으로 소통을 유지할 것”……
“반드시 주도적으로 학우들과 관계를 맺을 것”, “반드시 단체 관계 속에 녹아들 것”, “반드시 집단 속 역할을 맡을 것”……
“한 명의 학우와만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혼자 떨어져 고립되는 것을 금지한다”……
서로 다른 색, 서로 다른 필체의 글자들이 빈틈없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마치 각기 다른 개인들이 끝내 같은 생각을 인정하고 그것이 공통된 규칙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눈앞의 칠판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주변에 서 있는 친구들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확신이 가득했고, 미소와 함께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칠판 쪽에서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등골이 서늘해졌다.
또 무언가가 그 위에 적힌 것 같았다.
이곳의 모든 사람이, 마치 규칙의 제정자인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답답한 벽처럼 나를 에워싸고, ‘학교’라는 이름의 세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유연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그 침묵 자체가, 이른바 대답이라는 듯이.
그때 수업 예비종이 울렸다. 몇 번의 떠보기와 질문 끝에, 나는 마침내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낯선 자리였지만, 책상 서랍 안에는 내 이름이 적힌 노트와 교과서 몇 권이 쌓여 있었다. 텅 빈 줄노트가 마치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가득 적어둔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한 것은, 교실 안의 모든 자리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 옆자리도 비어 있었다.
내가 느끼는 의문과 달리 주변의 모든 학생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 앞자리에 앉은 학생은 여전히 호기심을 참지 못한 듯 몰래 고개를 돌려 백기에 대한 일을 계속 물어왔다.
유연
……사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그 사람을 이제 두 번째로 본 것뿐이야.
유연
그 사람, 학교에서 유명해?
말도 안 되는 교칙들을 생각하며 나는 적당히 말을 둘러대고 백기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전히 말을 잘 안 듣고 수업을 빠지거나 싸움도 잘 하는 불량 학생으로 보였다.
그래도 농구를 잘 하고 얼굴도 잘 생겼으며, 학교 행사도 참가만 하면 대부분 1등을 차지하는 말하자면, 풍운아였다.
듣기에는 백기 그 자체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 전, 나와 두 번째로 만난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교탁 위에서 끊임없이 수업을 이어갔지만, 내 생각은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 있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일주일 뒤 열리는 연설 대회에 참가할 사람 있나요?
촤락, 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 안 대부분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몇몇 여학생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화장실로 향했고, 또 몇몇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주제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나는 혼자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내 옆자리 의자를 끌어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털썩 앉았다.
수많은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서도 백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책상 위의 책을 대충 넘겨보았다.
유연
……선배 방금 교칙 위반으로 교무실에 끌려가지 않았어요?
백기
그게 뭐?
그가 분명 조금 전 그런 말을 해놓고도 지금 이렇게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유연
그럼 저를 찾아온 건……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그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다가,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슬쩍 훑고는 그 시선들을 핑계 삼듯 조금 더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의 한 올 한 올 또렷한 속눈썹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따뜻한 숨결은 더 침범하듯 내 뺨을 스쳐왔다.
기억 속의 백기와 비교하면, 눈앞의 백기는 훨씬 더 솔직하고 거침없었다. 아직 자신을 눌러 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소년의 기세가 지금 그의 몸 안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백기
여기서 들을 거야?
아직 수습되지 않은 무언가가 공기 속에서 끊임없이 번져나갔다.
심장이 다음 순간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부끄러워져 그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
유연
일단 나가요.
그렇게 말하던 중, 누군가 선생님에게 일러바친 듯 교실 문 앞에 엄격한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선생님
백기, 또 너냐!
이번에는 백기가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내 손을 잡고 교실 뒷문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밝게 빛나는 복도 끝을 향해 내달렸다.
유연
이렇게 대놓고 교칙을 어겨도 되는 거예요?
백기
내 규칙은 그렇게 안 쓰여 있어.
음울한 세계 속에서, 오직 소년만이 거침없이 날아올랐다.
그런데 이런 백기가, 대체 왜 내 앞에 나타난 걸까?
백기
네가 보고 싶어서.
그는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 말은 이 황당하고도 꿈같은 청춘 이야기 속에 모든 것을 적어 넣는 것 같았다.
그는 점점 더 거리낌 없이 쉬는 시간마다 내 교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게 되었다. 친구들이 “여자친구 생기더니 친구를 버렸네” 하고 놀려도, 당당하게 내 쪽으로 걸어왔다.
시합이 있을 때는 자기 교복 겉옷을 내게 들고 있으라 하고 최고 점수를 따냈을 때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습실에서 그는 내 옆에 앉아 드물게 얌전하고 조용하게 시험지를 풀었다. 하지만 팔꿈치는 살짝 맞닿아 있었다.
이 기이한 세계에는 하교가 없었다. 눈을 깜빡이면 바로 다음 날이 되어 있는 것 같았고 모든 아이들에게는 오직 ‘학교’만이 존재했다.
그들은 이 작은 사회를 운영하며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맞춰주었다.
하지만 그런 풍경 속에서도 백기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딘가 달라졌어도 이 점만큼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숨김없이 내보이는 기쁨에 조금씩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백기가 나를 어떤 방향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것도 깨닫고 있었다.
옥상에서 그는 웃음을 띤 채 몸을 숙여 내 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백기
키스해도 돼?
바람이 쏴아아 하고 불었다. 나는 얼굴을 붉힌 채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유연
안 된다고 하면요?
백기
그럼 질문을 바꿀게. 내 여자친구 할래?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났다. 그를 바라보다가, 괜히 그를 놀려보고 싶어져 나도 그의 얼굴 쪽으로 살짝 다가갔다.
유연
그렇게 묻기만 할 거예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내 모습이 호박빛 눈동자 속에서 조금씩 크게 번져갔다.
따뜻한 감촉이 내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진중하고도 조심스러웠다. 마치 심장이 처음으로 뛰기 시작할 때 전해지는 떨림 같았다——첫 키스였다.
백기
물어볼 게 아니었어. 내 여자친구 해.
그는 확신에 차 있고 제멋대로인 어조로 말했다. 마치 영원을 말하는 것처럼.
유연
그래도 되는 거예요?
백기
안 좋을 게 뭐 있어.
그는 내 손을 붙잡고 내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 넣었다.
유연
하지만 선배는 계속 나를 데리고 온갖 규칙을 어기고 있잖아요.
유연
이건 착실하게 학교생활하는 모습은 아닌데요.
그는 나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어두운 하늘도 소년의 눈동자 속에 날아오르는 거침없는 오만함을 가릴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끌어안고 다시 한 번 내게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백기가 교복을 입은 채 조심스럽고도 무거운 얼굴로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백기
유연아?! 내 목소리 들려?
유연
……? 선배 나 여기 있어요!
그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초조하게 나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내 흔적을 찾지 못했다. 섣불리 행동할 수도 없었던 그는 조급함을 억누르고 규칙의 경계를 더듬으며 학생들 사이에서 정보를 모았다.
그는 끊임없이 여러 교칙을 어겼고 각종 활동에서 눈에 띄는 행동도 많이 했다.
모두가 ‘백기’를 알게 되었다. 그의 존재는 하나의 이름이자 기호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하는 척했지만 그는 어떤 예외가 되었다.
그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피할 수 없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 나는 검게 물든 복도 위에 서 있었다.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낮은 속삭임들이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
……그 애는 아무하고도 말을 안 해……
??
……그 애는 학교 활동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아……
??
……그 애는 우리 토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
……우리가 걔 욕할 때도 혼자만 가만히 있더라고……
수많은 목소리가 내 주변을 가득 메웠다. 동시에 핏빛 자국들이 하나둘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며 자라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또 마치 자기 자신을 찢어내고 있는 것처럼.
??
하지만 난 정말 싫은데……
??
정말 나도 저들한테 끼어야 하는 걸까……
중얼거림이 붉은빛 속으로 흩어졌다. 그들에게는 형체가 없었다. 마치 공기와 한데 녹아버린 것 같았다.
그들은 곧 공기였다. 환경에 의해 아무래도 상관없는 존재로 변해버린 공기.
복도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핏자국은 점점 더 늘어났다.
그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밝혀졌다. 나는 그 빛을 따라 달려갔고, 백기의 무거운 눈빛을 보았다.
그는 어딘가에서 촛불을 건네받은 것 같았다. 붉은 손자국들이 그의 주변과 등 뒤에 남아 있었다.
??
나 좀 봐줘, 나 사라지고 싶지 않아. 사라지고 싶지 않아……
??
살려줘, 난 변하고 싶지 않아. 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주변은 몸부림치는 절규와 울음소리 때문에 섬뜩하게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수도꼭지를 튼 듯 새빨간 피가 다시 흘러내렸다. 그것은 누군가가 끝까지 버티며 흘린 피눈물 같았다.
백기
누군가 사라지고 있어…… 규칙을 어겨서인가…… 여기에서?
그의 추측에 응답하듯 주변의 핏자국은 점점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몸부림이라기보다 그마저 어둠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흐느끼는 듯한 낮은 속삭임이 심연의 메아리처럼 조금씩 주위를 집어삼켰다.

백기
너희는 나를 볼 수 있고, 나와 대화할 수 있어.
백기
그 말은 너희가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거야. 너희는 너희가 있고 싶은 세계에서 살 수 있어. 이 규칙들이 너희를 판정할 수 없어.
그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여전히 어둠의 침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백기
대답해줘. 너희, 여자애 한 명 본 적 있어? 그 애도 너희 세계로 끌려 들어온 거야?
유연
선배! 나 여기 있어요!
나는 힘껏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막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백기"
그는 널 볼 수 없어. 이때의 너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촛불에 비친 거울 속에서 나는 백기의 그림자가 저 혼자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백기"
그런데 그도 이제 곧 공기가 될 거야.
그는 손바닥을 펼쳐 거울 밖의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백기"
그리고 이제, 내가 대신할 차례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거울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눈앞의 백기와 하나로 겹쳐졌다.
흐릿한 감각 속에서 나는 다시 옥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소년의 입맞춤이 가볍게 떨어졌다.
백기
걱정 마. 날 좋아한 걸 후회하게 하진 않을게. (의역: 放心,你没喜欢错人。원문은 날 좋아한 건 틀리지 않았어 에 가까움)
백기
난 줄곧 너랑 같이 제대로 학교생활을 해볼 기회를 붙잡고 있었어.
04
그러니까…… 내 앞에 있던 ‘백기’는 사실 백기에게서 비쳐 나온 또 다른 모습(倒影)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의 장면들이 또 하나의 기괴한 광경이었을 뿐인 것처럼.
시간표 위의 과목들이 하나씩 지나갔고 반 아이들은 점점 내 존재를 신경 쓰지 않게 됐다.
내 목소리는 서서히 그들에게 들리지 않게 되었고 복도를 걸을 때도 나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이 생겼다.
세계 가장자리의 어두운 구석은 점점 늘어났다. 마치 내 세계를 계속 조여오며 모든 것을 점점 더 좁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게 내가 계속해서 교칙을 어긴 결과일 것이다.
나도 규칙에 의해 학교의 공기가 되어버리는 걸까?
그럼 나보다 먼저 이곳에 온 백기는? 그는 규칙에 삼켜진 뒤, 왜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낸 걸까?
쉬는 시간, 생각에 잠겨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또 누군가 내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나와 부딪혀 지나갔다.
상대의 얼굴에는 악의라고는 없었다. 그는 그저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을 지나간 것뿐인 듯했다.
분명 나는 아직 교실 안에 있는데, 정말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사라진 아이들도 지금의 나처럼 규칙으로 짜인 세계에서 밀려나 어둠 속으로 내던져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교실 문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백기가 여느 때처럼 복도에 서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탐색의 시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고 있었다.
나는 교차하는 실루엣들 뒤에서 멀리 그를 바라봤다.
음울한 하늘 아래 그 반듯한 실루엣은 마치 유일한 빛같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직 그만의 폭풍을 일으키는.
순간, 혹시 백기마저 나를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 발걸음이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다음 순간, 낯익은 호박빛 눈동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의 입꼬리도 따라서 거침없이 올라갔다.
그가 다시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와 내 앞에 멈춰 섰다.
학생
백기 선배……? 저 사람, 무슨 일이지?
백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내 얼굴에 시선을 내렸다.
유연
선배…… 아직 내가 보여요?
백기
왜 안 보이는데?
학생 J
……미*, 쟤 왜 허공에 대고 말해?
학생 W
우리 반에 귀신 나오는 거야!
작게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마치 내 추측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백기 말고는 모두가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유연
……왜 선배는 내가 보이는 거예요?
백기
좋아하니까.
소년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오직 그 짧은 한마디만으로 제 진심을 직설적이고도 투명하게 말했다.
분명 나를 지금의 모습으로 몰아간 건 그이면서, 그는 또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세계 안에도 오직 나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수업 종이 울렸지만 백기는 여전히 그곳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곧 선생님이 들어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선생님
백기, 너 정말 갈수록 제멋대로구나!
선생님
고3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백기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자기 학생들이 다 사라진 것도 모르나요?
그는 길들여지지 않은 듯 고개를 살짝 들고 도발적인 시선으로 교실 안의 모든 사람을 훑었다.
백기
너희 하나같이, 대체 뭘 보고 있는 건데?
백기
남한테 맞춰주는 말이나 하는 게 그렇게 즐거워?
백기
다른 사람 눈에 비치는 게 그렇게 중요해?
백기
그딴 쓸모없는 규칙은 다 꺼지라고 해.
무언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점점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의 경악 어린 시선 속에서 붉은 흔적들이 천천히 빈 책상 위를 기어올랐다.
하나, 또 하나. 그것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선명히 존재했던 흔적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 위로도 깊은 붉은 자국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마치 곧 갈라져 무너질 낙인처럼.
유연
선배……
백기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세계 속에서, 백기는 오히려 웃으며 책상 위의 교과서를 집어 들고 내 손을 잡아 교실을 나와 복도에 섰다.
백기
그러고 보니 보통 수업 시간에 규칙 안 지키고 선생님한테 대들면 밖에 나가 벌서는 거 아니야?
그는 가볍게 말했지만 얼굴과 몸 위의 균열과 핏자국은 계속해서 번지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몸 위에 이별을 써 내려가는 것처럼.
하지만 백기는 왼손을 들어 일부러 교과서로 희미한 햇빛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내게 입꼬리를 올렸다.
백기
벌서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이렇게?
쓸모없는 규칙 같은 건 다 꺼지라고 말해놓고도, 그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어떤 평범한 일상의 길 위에 서서 우리가 해보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조여드는 것은 물론이고, 눈가까지 슬며시 뜨거워졌다.
유연
……아마 이런 느낌일 거예요. 그래도 여기 온 뒤로 나도 벌서본 적은 없지만.
백기
그럼 이것도 우리한텐 처음이겠네.
그가 웃으며, 눈에 내 모습을 가득 담았다.
유연
……사실 선배는 백기가 아니죠?
내 질문을 마주한 그는, 멋지고도 솔직하게 웃었다.
백기
사람 안에 있는 어떤 생각, 어두운 면, 후회…… 그런 것도 그 사람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백기
처음부터 말했잖아. 나는 고등학교 3학년 7반 백기야.
백기
네가 있어서, 내가 나타날 수 있었어.

백기
나 정말 너 좋아해. 정말 많이 좋아해.
이번에는 마음 깊이 감춰져 있던 어두운 무언가도 열여덟 살의 일부가 되어, 그 소년이 진짜로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지금 이 순간의 영원을 전부 내 이름으로 가득 채우고 모든 기쁨을 남김없이 말해주면서.
그는 웃으며 입꼬리를 올리고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백기
그리고 너도 평생 내 여자친구 해. 내 아내도 하고.
새빨간 빛이 그의 반쪽 얼굴을 삼켜가고 있었다. 선홍색 피가 그의 손끝을 따라 계속 흘러내렸다.
그가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마음이 꽉 죄어들었다. 시선이 그가 내민 새끼손가락에서 그의 얼굴로 옮겨갔다.
백기
빨리 약속해. 안 그러면 “나”를 못 돌아오게 할 거야.
세계가 어둠을 펼치며 저 멀리 흐릿하고도 낯익은 실루엣의 윤곽을 그려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바보 같은 말을 하다니.
유연
그런 말 안 해도 대답할 거예요.
유연
나를 너무 얕보지 말아요.
나는 내 새끼손가락을 그의 손가락에 걸었다. 단순하지만, 단단하게.
백기
하지만 울고 있잖아.
백기
이런 나도, 네 눈물을 가질 수는 있나 보네.
유연
……선배가 사라질 것처럼 보이니까.
나는 이미 선홍빛으로 물든 그의 눈을 바라보며 눈앞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려 애썼다.
백기
처음엔 여기서 너랑 계속 이렇게 지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백기
규칙을 부수지 않으면 아마 아주 오래, 아주 오래 함께 있을 수 있었을 테니까.
유연
그럼 선배는…… 왜 이렇게까지 한 거예요?
백기
너 때문이야.
핏자국이 그의 팔을 가로질렀다. 마치 세계가 그를 한 겹씩 벗겨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년은 누구보다도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백기
네가 원래의 나를 좋아해줬으면 했어. 나는 저 사람들처럼 될 수 없고, 배울 수도 없어.
백기
나는 너 때문에 나타날 수 있었지만, 너 때문에 사라질 수도 있어.
백기
어쨌든 너는 여기 남으면 안 되니까.
그 거침없는 호박빛 눈동자가 다시 한번 내 눈 속으로 닿아왔다. 그 안에는 그의 진심이 가득 차 있었다.
백기
열여덟의 나는 너한테 많은 말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도 열여덟이야.
백기
그가 너한테 말하지 못했던 말을, 나는 말할 수 있어.
그의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바람이 가볍게 일어났다. 세계는 빛을 닫아버리고 모든 것을 어둡고 투명하게 만들었다.
다음 순간, 따뜻한 두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소리 없이 거세게 일렁이던 모든 감정이 전부 눈 밑으로 거두어져 있었다. 마치 그가 자신에 대해 감춰둔 수많은 침묵의 말들처럼.
그의 손끝이 내 눈물을 닦아냈다. 얼굴에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이 가득해서, 나는 참지 못하고 웃으며 그의 뺨을 꼬집었다.
유연
계속 여기 있었어요?
백기
그건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그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더니 못내 아쉬운 듯 나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백기
이곳의 규칙은 적극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투명하게 만들어. 하지만 본질은 다른 사람 눈에 남는 인상과 존재감을 강화하는 거야.
백기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는 드물어.
유연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딱 그렇지 않아요?
백기
그래서 나는 사라져야 하면서도, 또 사라지면 안 되는 존재였던 거야.
백기
그래서 '그'가 나타난 거야.
하지만 왜 하필 그런 집착과 그리움의 집합체였는지는, 백기조차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이 기이한 세계 안에서, 작고 허망한 진실 하나가 태어난 것처럼.
유연
그래도 백 경관님한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내 농담을 들은 그는 작게 흥, 하는 소리를 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단순하게 팔에 힘을 더했다.
백기
일단 여기서 나가자.
유연
나갈 방법을 알아요?
어둠 속에서 그는 묘하게 익숙한 듯 내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백기
사람은 환경에 갇히면, 온 세상의 규칙이 전부 거기에 있는 것처럼 착각해.
백기
하지만 세계는 여기만 있는 게 아니야.
고집스러운 바람이 일어나는 듯했다. 어둠은 암류처럼 우리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듯 우리 뒤로 물러났다.
빛은 점점 더 밝아졌다. 마침내 나와 백기는 함께 학교 옥상에 서 있었다. 지평선은 저 멀리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끝이 없는 먼 곳처럼.
백기
모든 어두운 곳에서, 오직 여기만 빛나고 있었어.
백기
하늘과 저 멀리를 볼 수 있으니까.
문득, 나는 왜 이전에 이곳에서 “백기”를 통해 그 장면들을 볼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조차도 소년은 말없이 세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내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백기를 바라봤다.
유연
'그'는 정말 사라진 걸까요?
백기는 잠시 멈칫한 듯했다. 그의 눈빛은 깊고 짙었다. 그리고 하늘 아래에서, 오직 그만의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백기
사라지지 않아.
그는 내 손을 잡고, 옥상의 계단을 밟아 나아갔다——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치듯.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학교 정문 밖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곁에 선 백기도 더 이상 그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안심한 듯 숨을 내쉬더니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유연
누구한테 전화해요?
백기
고진한테. 당장 여기 봉쇄하라고.
그 분한 듯한 말투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백기가 다시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른 주머니에서 그 학생증을 꺼냈다.
우리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나도 가방 안에서 그것을 꺼냈다.
계속 가려져 있던 첫 번째 교칙. 그 위를 어지럽게 뒤덮고 있던 낙서들이, 이 순간 씻겨 내려가듯 사라지고 그 흔적을 드러냈다.
"자신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마음에 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