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송진과 시트러스 향을 풍기는 진과 부드러운 색감의 벨벳과 비단 의상들이 오갔다.
보석으로 만든 술(자수실)이 사람들의 스텝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눈이 어지러웠다.
"휴……"
술을 바꾸는 때를 틈타서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가씨, 춤 한 곡 추시겠어요?"
대대로 부를 쌓아온 '기존 상류층(올드머니)' 집안의 딸인 나는 이런 지루한 말들을 매일같이 듣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시끌벅적한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익숙함을 느낀 나는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죄송해요, 제가 좀 피곤해서……"
춤을 제안한 사람이 선명하게 보이는 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말끝을 어설프게 삼켰다.
호박색 눈동자가 조명 아래에서 나와 마주쳤고, 그의 정장은 흠잡을 데 없이 세탁되어 그의 곧게 뻗은 등과 딱 어울렸다.
눈을 마주친 찰나의 순간, 그의 입술 언저리에선 미소가 번졌지만 눈 밑까진 닿지 못했고, 그는 나처럼 예의 바르고 공적인 말투를 구사했다.
"저는 그간 해외에서 사업을 하다가 이제 막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백기라고 합니다. 유연 씨가 제 체면을 살려주시지 않겠어요?"
웃음소리와 재즈 음악은 순식간에 나에게서 멀어지면서 쿵쾅대는 심장박동 소리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어떻게……!"
나는 입을 열었지만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내 기억 속의 소년은 수년 전 전쟁이 시작된 후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지금 이런 식으로 불쑥 내 앞에 나타나다니……
나는 백기가 허리를 굽히고 자상하게 나에게 손을 내밀 때까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乐意至极 원문은 너어무 행복해요. 춤 제안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고 의역)
나는 얼른 자칫 못 볼 꼴을 보였던 방금 전의 추태를 거둬들이고 아까와 변함없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애매한 자세로 술자리에서 댄스 플로어까지 가서 중앙에 섰다. 재즈 밴드가 때맞춰 음악을 연주하고, 등 뒤로 탐색하는 듯한 관중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백기는 음악이 바뀌는 순간마다 스텝을 바꾸었고 차가운 오 드 코롱 향수가 코에 맴돌자 나는 살짝 씩씩거리며 입을 열었다.
"백기 씨는 춤을 정말 잘 추시네요."
"그런가요? 전 아직 서툴다고 생각하는데요."
"오히려 전 당신이 '신흥부자(뉴머니)'의 초대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더욱 영광인걸요."
뉴머니?…… 확실히 지난 한 달 동안 귀국한 부자들이 이 도시에 많이 정착한 것 같았다.
그들은 밤새도록 방탕하게 놀고 먹었지만 지금까지 우리 같은 '올드머니'들을 파티에 초대한 적은 없었다.
시간이 오랜 시간 지나면서 올드머니 사이에서는 이 사람들이 해외에서 불법적으로 사업을 운영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혹시 백기도 이런 사람들 중 한 명일까?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갑자기 허리가 백기에게 이끌려 아래로 휘어졌다. 어쩔 수 없이 눈에는 그의 얼굴만 담겼는데, 그의 얼굴은 잘생겼지만 불분명한 거리감이 존재했다.
"……왜 안되겠어요? 당신처럼 정장 차림의 멋진 신사 분이라면 제가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는 낮은 소리로 웃기 시작하더니 나를 잡고 있던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내 치마의 허리띠를 붙잡았다.
"……!"
그의 손바닥의 열기가 살갗에 닿아 하마터면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품에 거의 안겼다. 그의 가는 속눈썹을 쳐다보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그럼 당신은요? 이토록 아무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너무 많이 변한 차림으로 내 파티에 왔으면서……"
나는 손끝으로 그가 입고 있는 값비싼 캐시미어 정장을 어루만졌다. 이런 옷은 지난날 그가 가장 비웃었던 옷차림이었다.
"난 그냥 너와 춤추고 싶었던 것뿐이야."
(분위기상 반말 아닐 것 같은데 제가 좋아서요)
그는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눈빛에 날카로움이 더해지면서 흥미롭다는 듯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만약 유연 씨가 만족하지 못했다면 배팅을 한번 걸어보고 싶은데요."
"……"
백기가 언급한 배팅은 내가 최근 여러 대형 신문과 잡지에 게재한 광고이다.
전쟁 후,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뜨자 나는 여러 대에 걸쳐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상황에서 재산을 흥청망청 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술과 파티를 제외하고 나의 가장 최근 즐거움은 바로 이 광고였다.
나와 러시안 룰렛을 해서 세 발을 쏘고도 조금도 다치지 않으면 백만 달러를 벌 수 있었다.
이 광고를 걸자마자 많은 구설수에 올랐지만 나는 여전히 신문 헤드라인을 차지할 수 있도록 신문사에 돈을 뿌리고 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나 자신만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손 하나를 떼어내고 춤을 추며 그를 포커 테이블로 끌고 가서 탁자 밑에서 권총을 꺼내 탁자를 두드렸다.
"정말 저와 도박을 해볼 건가요?"
사람들은 내 행동에 놀라워하며 모여들었고, 술병을 든 몇몇 사람들은 특히나 걱정을 하면서 거칠게 맨 앞까지 파고들었다.
"백기, 자네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지?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그렇지, 그렇게 과격하게 놀면 못 써!"
백기는 그런 시선을 무시하고 한 손으로 테이블을 기대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장 옆자락을 걷어 올린 그는 마치 도박꾼처럼 보였다.
"당연히 농담이 아니지, 다만 판돈을 더 올리고 싶어."
그는 여전히 한 손으론 애틋하게 나를 잡고 있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을 향해 위험하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다음 파티에는 돈을 제외하고 내가 (너의) 유일한 손님이 되겠어."
"……문제없어요."
그리하여 백기는 나를 보고 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2장
*(과거장면)*
맑은 여름밤, 서재 창문 앞의 린넨 거즈 소재의 커튼이 밤바람에 날리고, 빗방울처럼 작은 울림이 미세하게 들렸다.
내가 살금살금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어 올리자, 작은 돌멩이 몇 개가 창가에 흩어져 있었고, 아래층에서 한 줄기 후광이 비춰졌다. 백기가 등잔을 들고 창문 밑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밤하늘 아래서 그 불빛이 그의 눈썹을 유난히 온화하게 비추었다. 고민도 없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그는 창가의 나무를 날렵하게 밟고 올라와 있었다.
"유연아, 뒤로 물러서."
옆쪽 커튼이 백기의 몸의 바람에 따라 걷히자 여름밤의 향기와 벌레 울음소리가 그와 함께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나선 그가 내 위로 쓰러졌다.
"앗!!"
나는 갑작스러운 무게에 밀려 넘어질 뻔했지만 백기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꽉 껴안았다.
"일부러 물러난 건 아니지?"
나는 그의 포옹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의 심장박동도 나처럼 살짝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반겨주는 것도 좋잖아요~ 그나저나 보여줄 게 있어요."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백기를 끌고 수납장으로 가서 시집 한 권을 꺼냈다.
"유럽에서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서 두 달 만에 받았어요~"
*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면서 나는 책에서 눈을 뗐고,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죠사마(아가씨; 죗삼다) 파티 준비가 끝났습니다. 백기 님께서 지금 앞뜰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날 밤, 백기가 내기에서 이겼고, 오늘은 그 내기를 기념하는 날이다.
"알겠어요."
손에 잡힌 저속한 로맨스 소설을 덮고 일어나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정리한 나는 외모가 단정하고 완벽한 것을 확인했다. 이어 서둘러 서재를 나와 복도를 따라 계단, 홀, 그리고 저택 정원의 앞뜰을 향해 달려갔다.
뜰 앞에는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정원사와 채화 장인이 정성껏 다듬은 화초 앞에 스포츠카 한 대가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차 안에는 푸른색과 흰색으로 겹겹이 쌓여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꽃다발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리고 차주인은 그 옆에 서 있었다.
백기는 차 문에 기대어 정원 안에 무성하게 피어있는 화초를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백기 씨, 무슨 생각하세요?"
내가 백기 앞에서 손을 흔드니 그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듯 내 손목을 덥석 잡으며 웃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났어."
나는 웃으며 손을 빼고 그와 나란히 서서 그가 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원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죠?"
"많이 달라졌지만 놀랄 일은 아니야. 게다가 신문까지 실렸으니까."
나는 그가 나를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손끝으로 그의 팔을 쿡쿡 찔렀다.
(말 텄으니 늘 하던 대로 선배라고 지칭할게요...)
"그러면 안 돼요? 예전에는 선배가 저에게 러시안룰렛 마술 보여주는 걸 가장 좋아했었잖아요."
"그래서 제가 소란을 피운다면 어쩌면 이 소식이 훨씬 더 먼 거리를 넘어서 선배의 귀에 전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선배도 알게 되겠죠…… 제가 선배를 찾고 있다는 걸."
"만약 내가 못 봤다면?"
"……그렇담 유명한 골프 스타가 되어서 선배가 매일 신문을 펼칠 때마다 저를 볼 수 있게 할 거예요!"
"그럼 아마도 골프 대회뿐만 아니라 너의 기량을 평가할 수 있는 모든 언론 매체들을 사야 할 것 같네."
그가 웃으며 내 약점을 찌르자 나는 작게 툴툴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백기 씨, 서서 하는 파티는 없으니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반질반질 윤이 나는 구두가 부드러운 양탄자를 밟자 백기는 나를 따라다니며 집안의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감지했다. 최신형 독일 승용차, 유럽 황실로부터 옮겨 심은 푸른 수국, 황실 장인들이 만든 거대한 곡선형 바……
전시장의 수백 년 역사를 가진 보석들, 정교하게 제작된 크리스탈 샹들리에와 잘 어울리는 벽면 장식……
마치 거대한 박물관처럼 세계에서 가장 새롭고, 사치스럽고, 한정판 아이템들을 모두 이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의 소장품을 보면 누구나 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지만 백기의 눈빛은 이런 눈부신 물건들로 인해 암담해진 것 같았다.
"집이 많이 변했네."
"당연하죠. 만약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면 전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나 다름없잖아요."
"돈을 낭비하고 있잖아."
그는 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의문의 말투도, 비판의 말투도 아닌 현재에 대한 정의만으로.
"맞아요."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요. 전쟁이 몇 년 동안 벌어진다 한들, 아무도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잖아요."
나는 닥치는 대로 보석들을 집어 들고 만지작거렸다. 주로 가지고 노는 보석들은 호박색 보석이었는데, 이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그때그때 즐기는 게 나아요. 제가 좋아하는 모든 걸 곁에 두고 싶어요."
'내가 '좋아하는'이라고 말할 때 나는 보석을 백기의 앞가슴에 있는 행거치프 위에 달아주었다.
호박색 보석이 흔들거리다 내 손가락에 짓눌리면서 의미심장한 느낌이 들었다.
보석 아래로 나는 그의 심장이 뛰는 빈도수를 거의 느낄 수 있었다.
백기는 안절부절못하는 내 손을 그의 입술 아래로 가져갔고, 그의 맑은 숨결이 나를 쓸어내렸다.
그는 확인이라도 하듯 나를 쳐다보더니 차디찬 나의 손끝에 키스했다.
추억 속의 여름밤 향기는 희미해지고, 그 대신 향기롭고 사치스러운 오 드 코롱 향수의 혼란스럽고 낯선 느낌에 취해버리는 듯했다. 서로의 숨결이 한순간 굳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감추기 위해 우리는 함께 책장을 바라보았다.
"<My Fair Lady>, <로맨스의 비밀>, <세 명의 정부>……"
(원제는 《窈窕淑女的烦恼》、《风月秘事》、《三位情人女郎》인데 내용이 이상한 게 있긴 함...아닐 수)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책 제목을 읽어 내려갔고, 그의 눈빛에는 장난기보다는 진위를 구별하기 어려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모두 소설책이네, 책장엔 시집이 없나 봐."
"선배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지만 전쟁이 끝나고 뉴욕에선 돈과 술, 사랑 이야기가 가장 유행했어요."
나는 시치미를 떼고 손을 뻗어 그의 손에서 노골적인 로맨스 소설을 빼내고는 가늘게 뜬 그의 두 눈과 마주쳤다.
죄책감이 한 켠에 스치고 지나가고,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선배는요?…… 전쟁이 끝난 지금도 여전히 시를 읽고 있나요?"
우리 사이에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항상 상기시켜 주는 일들이 있다. 나는 그가 무심코 고개를 흔들거나 과거의 일들을 비웃을까 봐 두려웠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숨이 멎었다. 과거의 일들이 깃털처럼 머릿속으로 밀려오자 나도 모르게 그의 소매를 다급하게 잡아당겼다.
"그럼 군대 가기 전에 제가 선물한 그 시집은…… 지금도 가지고 있나요?"
백기는 잠시 침묵을 지켰고,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다소 쓸쓸해 보였다.
"전쟁터에서 한 번 의식을 잃었는데……그때 나와 함께 캠프로 돌아오지 못했어."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전쟁터에서 책 한 권이 참호 밑에 묻히는 것쯤은 별일 아니라고, 나는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그냥 책일 뿐이잖아요, 몸 외의 물건보다 선배가 무사히 돌아오는 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해요."
"그러고난 뒤에는요?"
"전쟁터에는 정보가 점점 늦어져서, 우리 부대는 전쟁이 끝난 줄도 몰랐는데다 귀국할 배도 타지 못했어."
"모두가 경축하기 시작하기까지 우리가 승전했다는 걸 알지 못했지."
"우리는 당시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유럽에 남아서 살아남아야(发展인데 의역) 했어."
말 몇 마디로 몇 년 간의 고통과 시련을 정리한 그는 내 표정이 슬퍼 보이자 말투가 경쾌해졌다.
"맞아, 내가 있는 곳에는 출판사가 많이 있었는데, 새로운 시집이 모두 그곳에서 발간됐어. 사업을 시작한 후에 출판사에 자금을 투입해서 우리가 존경하는 시인들을 많이 만났어."
"하하, 많은 시인들은 성격이 괴팍하다던데 혹시 선배를 괴롭힌 사람도 있었던 거 아니에요?"
백기는 내가 농담으로 묻는 말에 재미난 추억이라도 생각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하지만 예상은 했어. 그래서 '벼락부자'처럼 보이지 않게 언어를 몇 개 배워뒀어."
"아, 그리고 네가 준 시집의 시인도 만났어."
그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그 사람 옆에 앉았을 때 내가 너와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 느꼈어."
그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내 마음 깊은 속의 외로움도 그의 풍요로운 삶 속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멋지고 충실한 생활을 보내는 그와 온종일 술에 취해 사치스러운 삶을 보내는 나는 완전히 달랐다.
"유럽에서의 선배는 아주 근사하게 생활하고 있네요, 사업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면서요 ……"
나는 외로운 마음을 억누르고 숨을 들이마시면서 그에게 진심으로 부러움을 말했다.
"세상은 드넓고, 선배가 있어서 저는 행복해요."
(선배찾아서+부러움 섞인 마음인듯)
"행복하기만 해?"
백기는 차분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3장
단순한 질문이 나를 쉽사리 구속했다.
"전……"
농담 섞인 말이 입가에서 맴돌기만 할 뿐 좀처럼 뱉을 수는 없었지만, 솔직한 고백은 더더욱 표현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침묵했고, 화려한 향수 냄새조차도 공기 중에 정체되어 있었다. 백기도 마음을 정한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를 여러 번 상상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손바닥으로 재려는 듯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가 많이 짧아졌네."
"요즘 유……"
백기는 머리를 헝끌어뜨린 내 손가락을 붙잡고 웃으며 치켜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알아,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인 거. 하지만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든 다 똑같이 예뻐."
그의 손끝은 헐렁한 내 미니스커트의 허리선을 따라 위로 어루만지면서 진정으로 감정하고 있었다.
"옷도 최근 유행하고 있는 점퍼 블라우스잖아."
나는 눈썹을 치켜들고 손을 뻗어 그가 단정하게 매어놓은 넥타이를 붙잡았다.
"선배도 이제 여자 헤어스타일이든, 옷 트렌드든 지식이 풍부한 신사가 되셨네요——"
"아니면 유혹적인 오 드 코롱 향수와 함께 능숙한 댄스 스텝 등 모든 것이 세련되고, 격식에도 맞고, 우아해요."
"......우리 모두 더 행복해지고 풍족해진 게 맞겠죠?"
우리는 이 시대에 떠밀려 가는 두 개의 먼지 알갱이에 불과했다.
백기가 '뉴머니'가 되어 돌아올 것을 짐작하고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신문에 게재하여 그를 찾으려 했을 때——지금의 변화를 일찌감치 예견하고 그와 함께, 과거와 작별을 고했어야 하지 않았을까?그런데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나도 모르게 상상하게 된다. 그가 새로운 스텝을 배우고 연미복을 고를 때—— 내가 진을 음미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서로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할까?
나는 씁쓸하게 눈을 떨구었지만 백기는 내 얼굴을 손으로 감싸 안고, 따뜻하고 부드럽게 내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이거 정말 네가 원하는 거라면…… 왜 이렇게 슬퍼 보이는 거야?"
나는 순간 멍해져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반박하려 했지만 그럴듯한 이유로는 도저히 스스로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줄곧 위장해 왔던 것이 그에게 쉽게 들통이 난 것 같아 나는 갑자기 피로를 느꼈다. 예의 바른 가문의 여자 아이 역을 맡느라 지쳐있고, 술이 들려있으면 술에 취해있는 여자 역을 맡느라 지쳐 있고(원문은 疲于扮演今朝有酒今朝 醉的女郎 오늘 아침에 술이 있으면 오늘 아침에 술에 취해있는 여자 역... 인데 의역), 내가 되어야 할 모습이 되기 위해 지쳐 있었다. 하지만 백기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야 지금 이 순간이라도, 나는 마침내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바라보니 두 눈이 시큰거렸다.
"너무 힘드네요……선배, 우리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백기는 나를 보며 긴 숨을 한 번 내쉬다가 벌떡 일어섰다.
"여기 앉아서 기다려, 내가 가서 할 게 있어."
"……?"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바람처럼 황급히 떠나고 나는 텅 빈 방에 혼자 남겨졌다.창밖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자 나는 무의식 중에 달려갔다. 자갈 몇 알이 창틀 밖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들어가도 돼?"
창문 밑에 있던 소년은 이젠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더없이 그리워하던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 순간 여름밤의 벌레 소리와 그날의 등잔불도 다시 돌아온 것 같아 시큼한 눈물이 순식간에 쏟아졌다.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커튼을 젖히고, 백기가 소년 시절처럼 키 큰 나무를 밟고 창문 안으로 뛰어들어와 나를 껴안았다. 창문은 그가 몰고 온 바람에 휩쓸려 우리를 함께 감쌌고, 오 드 코롱 향수는 습기에 가려져 그때와 같았다.
"네가 불안해하는 건 내가 올바른 방식으로 방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 돌아왔어, 유연아. 잘 확인해 봐."
그가 나를 거울 앞으로 데려갔고, 거울 속에는 우리의 성숙한 모습이 비춰졌다.


"네가 본 플란넬 정장, 실크 넥타이, 긴 장갑 같은 것들 말이야……"
"이것들은 나를 춤만 추는 멍청이로 한정시키지 않을 거야."
나는 그의 말에 웃고 말았다. 웃으면서 그쳤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는데 요 몇 년 동안의 한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던 것 같다.
"……선배는 돌아왔으면서 왜 저에게 알리지 않았어요?"
"선배 그거 알아요? 신문에 싣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용기가 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걸요."
백기는 진지하고 결심에 찬 표정으로 거울 속에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고 있어. 그래서 네가 이렇게 해줘서 기뻤어."
"그때 나도 망설이고 있었어."
백기가 정장 주머니에서 편지지를 몇 장 꺼내자 나는 한눈에 그게 내가 이번 달에 보낸 모든 파티 초대장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다. 다만 이 초대장들은 마치 누군가 수만 번을 머뭇거리듯 쓰다듬은 것 같이 주름투성이가 되어 종이면이 부드럽게 변해있었다.
"나는 줄곧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어, 내 사업이 안정되기를, 더 여유로워지기를, 내가 너의 앞에 설 수 있을 때를……"
"그런데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고 그동안 인내했던 모든 시간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게 됐어."
"난 더 이상 1분 1초도 기다리고 싶지 않아."
나는 눈을 감고 그에게 다가가 키스로 그의 못다 한 말들을 막았다. 오랜 그리움과 공허함이 이 순간 폭발했다. 서로 호흡과 체온을 교환하면서 우리는 전쟁 때부터 헤어져 못다 한 사랑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나는 살며시 눈을 뜨고 그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4개의 눈동자가 마주치자,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기 시작했고 한참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백기는 눈썹을 치켜뜨고 내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며 놀려댔다.
"책장에 있는 저속한 소설들 모두 새것 같은데, 사실 한 번도 읽어본 적 없지?"
"어떻게 생각해요?"
책상 아래 자물쇠가 채워진 서랍을 열었더니 우리가 함께 읽었던 시집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오랫동안 간직해 온 공통의 추억이 지금 이 순간에 되살아났다.바깥세상에서는 더 이상 시집이 유행하지 않지만 나의 세상에서는 영원히 유행 중이고,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4장
휙휙——
광풍이 불어오자 나는 오토바이에 앉아 여러 대의 오토바이가 옆에서 쏜살같이 지나가는 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백기를 꼭 껴안았다.
"이 오토바이들은 제가 뉴욕에서 본 그 어떤 오토바이들보다 빠른데 정말로 달리다가 부서지지 않을까요?"
백기는 긴장한 내 손등을 두드리며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얜 이미 많은 도로를 달렸으니까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많은 부잣집 자제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 한복판에서 로드 레이스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전쟁 후에도 넘쳐나는 에너지를 발산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나는 유럽에서 보았던 로드 레이스를 뉴욕에 들여와서 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했지."
참가자들 중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였는데, 알코올에서 벗어나 대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생기발랄해 보였다.
"파티보다 훨씬 건강하고 재밌어 보여요! 그런데 저를 태우고 시합에 나갈 수 있어요?"
"내가 오늘 안전 바이크가 되는 김에 너를 데리고 한 바퀴 돌아줄게."
"꽉 잡아!"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나자 우리는 앞의 운전자를 따라 저녁 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질주했다.빛의 향연의 거리가 차 옆을 쏜살같이 지나갔고, 다시 우리 뒤로 밀려났다.
"……재밌어?"
백기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혔고, 나는 띄엄띄엄 들리는 말들을 들으며 큰 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재밌어요! 너무 재밌어요!"
"오토바이 운전한 지 얼마나 된 거예요?——정말 능숙하네요——"
"……3년……하지만 그 이전에도……"
백기는 가는 내내 계속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그의 목소리는 밤바람과 엔진 소리에 녹아들어 나는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렇게 나와 이야기하고, 서로의 마음을 바람 속에 마음껏 녹아들게 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레이스가 끝난 후 백기는 멈춰 선 운전자들을 곧장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오토바이는 큰 공장 건물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여기는 내 양조장인데 지금은 지하로 바꿨어. 네가 자주 마시는 그 진은 바로 여기서 만든 거야."
"그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술인데……아!"
밤바람이 진의 향기를 머금은 것 같았다. 내가 감탄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시동을 걸고 바람처럼 떠나갔다.
"여기는 내가 운영하는 승마장이야! 매주 경마가 열리는데 관심 있어?"
"선배가 제 돈을 다 벌어간 거였군요!"
"여기는 경기장인데, 지난주에 업셋 되었던 축구 경기에 대해 들은 적 있어?"
"그럼요! 선배가 있었으면 흥분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그리고 여기, 지난달에 새로 오픈한 백화점은 그저께 영업액이 최고치를 기록했어."
"가요가요!"
오보타이가 달리고 서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마치 작은 보트에 앉아 지난 몇 년 간 백기가 이룩한 사업의 강을 누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내 앞에 별을 올려놓은 것처럼 자신이 이뤄낸 공을 마음껏 뽐내는 예전의 소년이었 모습 그대로였다.
오토바이는 처음 타본 나는 세차게 부는 밤바람에 어지러웠지만 그가 웃는 걸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그저 따라 웃었다.
그는 너무나 의기양양하고 너무나 쾌활한 데다, 마치 내 기분에 유일하게 영향을 주는 진토닉 같았고, 매혹적이고 자유로운 영혼 같았다. 우리는 잠들지 않는 도시 곳곳을 나는 듯이 달려서 어느 저택 앞에 멈춰 섰고, 나는 그에게 안겨져 오토바이에서 내려왔다.
"종착지인 우리 집이야."
"빨리 안내해 주세요~"
나는 머리를 흔들며 폭주하는 오토바이의 멀미를 날려버리고 그를 따라 정원으로 들어갔다. 백기가 나를 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내가 그를 잡아당겼다.
"처음 방문하는 집인데 불법 노선으로 들가도 될까요?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요."
백기는 내 눈을 따라 집 앞의 울창한 큰 나무를 바라보며 이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있겠어?"
"으음…… 확실치는 않아요."
나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헐렁한 치맛자락을 들고 눈썹을 치켜들고 윙크를 했다.
"하지만 선배가 위에서 저를 끌어당긴다면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정 안 되면 다시 내려와서 절 데리러 와……"
백기는 오래 망설이지 않고 곧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놀라운 솜씨로 두세 걸음 만에 2층으로 올라가 창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갔다.
"제 차례예요!"
"나는 심호흡을 하고 이미 내 머릿속에 각인된 그의 동작을 따라 나무를 밟았다.
"……!"
창가의 백기는 놀란 듯 숨을 들이마시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았다."
그는 몸을 반쯤 내밀어 한 손으로는 내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감싸고 나를 안정되게 침실로 끌고 들어갔다.
"조심해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의 몸 위로 쓰러졌고, 산뜻하고 촉촉한 향기가 코를 가득 채우면서 창가의 커튼이 높이 솟아올랐다.
와르르——
수많은 종이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눈송이처럼 펑펑 우리 몸을 덮었고, 그 아래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물러난 건 아니죠?"
"맞아, 그냥 네 기분을 느끼고 싶었어."
"그럼 기분은 어때요?"
백기는 손을 내밀어 미풍에 스치는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더니 내 귓가를 스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행복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몸을 숙여 그의 입술에 쉴 새 없이 키스를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는 일어나서 난장판이 된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늘 항상 선배의 침실이 눈에 익었어요. 벽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색상이고, 가구들은 저에게 익숙한 스타일이고……"
"나에겐 이 집이 네가 자물쇠를 채운 서랍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굽혀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주었다.
"그럼 저를 환영해 주는 이 종이조각은 뭔가요?"
"땅문서와 공장 건물 계약서야."
내가 힐끗 살펴보니 바닥에 널려있는 다른 종이들도 예외 없이 몇 만 평이 넘는 토지 계약서와 공장 건물 계약서였다.
"이, 이거 모두 거액의 계약서인데 멋대로 포기하면 어떡해요?"
"멋대로 포기한 게 아니라 원래 너에게 주려고 했던 거야."
백기는 모든 계약서를 일일이 주워 내 손에 쥐어줬다.


이어서 그는 가볍게 내 손을 들어 내 오른손 약지에 입을 맞추었다.
"요 몇 년 동안 계속 정신이 멍해있었는데, 귀국 후에 중부와 서부에 있는 땅을 좀 샀어."
나를 바라보는 백기의 눈빛이 가을 햇살처럼 따스했다.
"이건 너에게 영감을 받은 거야."
"저요?"
"네가 비밀리에 신문사와 의류 산업, 제과점에 투자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짐작컨대, 너도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욕망으로 가득 찬 이 도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
그가 다시 한번 내 걱정과 계획을 꿰뚫어 보자, 나는 화가 난 척하면 입을 내밀었다.
"와, 선배는 모든 걸 알고 있었군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언젠가 제가 여기서 살기 싫으면 서부로 따라갈게요~"
"좋아,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만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을 거야."
그는 나를 가볍게 끌어내리고, 입술에 깊게 키스를 하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 키스를 우리의 약속이라고 치자."
"계약상 키스 한 번으로는 부족해요."
불빛이 밝아지자 빛이 수정을 통해 굴절되면서 불꽃처럼 찬란한 빛을 냈다. 우리는 이렇게 큰 수정등 아래에서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게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키스인지, 아니면 백 번의 키스였는지 이미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아래층에서는 재즈가 흘러나오고 널브러진 땅문서와 계약서는 가장 높은 금액의 매트리스가 되었다.
젊고 광란했던 시절의 열정적인 사랑은 들풀처럼 미래의 나날에 만연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모든 희망찬 전망은 바로 우리의 발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