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장
저녁 바람이 살랑대며 거실 창가의 커튼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살짝 걷어 올렸다.
두 척의 우주 전함이 화면 위에서 격렬하게 교전을 벌이고 있었고, 폭발의 불길이 화면 가득 번진다.
팝콘을 쥔 손이 공중에 멈췄다가 엔딩 크레딧이 위로 올라갈 때야 아쉬움에 백기에게 반 걸음 더 바짝 붙었다.
유연
비록 3년 전 영화이긴 하지만, 특수효과는 하나도 안 촌스럽네요.
유연
아까 함체 폭발하는 장면, 진짜 파편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어요.
백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 속에도 아직 감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기색이 남아 있다.
백기
게다가 저 신형 전투기 설계는 기존의 공기역학적 한계를 완전히 깨부쉈어.
백기
저런 기종을 현실에 도입한다면, 그 순간 기동성은 현존하는 대부분의 군용 전투기를 압도할 거야.
최근 한 SF 영화 시리즈의 속편 개봉일이 공식 발표되자, 소식이 나오자마자 나와 백기는 바로 개봉일 표를 예매했다.
그래서 며칠째 퇴근만 하면 집에 틀어박혀 전작을 다시 보고 있었다.
유연
히히, 개봉까지 앞으로 닷새밖에 안 남았네~ 이번엔 드디어 4D로 볼 수 있겠네!
유연
지난번엔 누가 갑자기 임무가 생겨서 나랑 같이 못 봤잖아. 돌아와서 영화관에 일반관밖에 안 남은 거 알고는 좀 시무룩해했으면서~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콕 찌르자 백기는 낮게 웃으며 내 손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백기
괜찮아, 어차피 이번에는 내가 놓치지 않을 테니까.
나는 그의 손을 흔들며 대답하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 표시를 확인한 나는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다급하게 쏟아지는 설명을 듣는 사이 내 얼굴의 웃음이 서서히 굳어 갔다.
유연
……알겠습니다.
유연
일단 업체 측에 모든 소품 재고 목록을 요구해서 보내 달라고 하세요. 나머지는 제가 가서 처리할게요.
전화를 끊고 난 좀 난처한 표정으로 백기에게 눈을 깜빡였다.
유연
회사 해외 프로젝트에 문제가 좀 생겨서 당장 비행기를 타고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마 일주일은 걸릴 거예요.
유연
……이번엔 내가 약속을 어기게 생겼네.
백기
그럼 내가 같이 가줄까? 특파팀도 요즘은 딱히 할 일이 없어.
마음속에 금방 따뜻한 기운이 퍼져 올랐다. 나는 얼른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거의 참지 못했지만, 끝내 입술을 깨물었다.
유연
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백 팀장님이 며칠 전에 아직 류 부장님께 ‘빚진’ 서류 작업이 몇 개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백기
……
그의 눈빛에 드문 당황함이 스쳤다. 나는 그 모습에 픽 웃음이 터져 나와 다가가 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유연
됐어요, 그래도 집에 백 경관님이 계시니까, 내가 더 힘내서 얼른 일 K.O.시키고 최대한 빨리 돌아올 수 있는 거지~
그의 시선이 진지하게 내 얼굴에 머물렀다가 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백기
그럼 네 말대로 할게.
백기
일 끝나는 날, 내가 공항으로 마중 나가서 집에 데려다줄게.
유연
Yes sir!
2장
프로젝트에서 생긴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빽빽한 일정에 휘말려, 쉴 틈도 없이 돌아가는 상태에 들어갔다.
스태프 A
사장님, 신규 협력사와의 계약서 초안이 나왔습니다.
유연
일단 저한테 보내 주세요. 나중에 확인할게요.
스태프 B
기존 소품은 이미 다 세팅해 뒀습니다. 남은 물품만 모레부터 순차적으로 도착하면 원래 예정된 촬영 일정은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유연
수고했어요. 촬영 순서 조정해서 이미 촬영 세팅 끝난 장면부터 먼저 찍도록 해 주세요.
나는 촬영장과 소품 제작 업체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손에 잡힌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니 어느새 또 저녁이 되어 있었다.
가방을 들고 스튜디오를 나서자마자 백기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연모시 시간을 속으로 계산해 본 나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고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유연
선배도 퇴근했구나~
호박빛 눈동자에 웃음이 가득 어린 채 백기는 카트를 밀며 줄지어 선 진열대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백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여?
나는 웃으며 휴대폰을 돌려 촬영장 풍경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유연
스튜디오 쪽 문제는 거의 다 해결됐어. 아직 몇몇 세트는 안 왔지만 전체적으로는 70% 정도 끝났어요.
나는 카메라를 든 채 다른 실내 세트로 들어가며 가방에서 빵 봉지를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유연
오늘 막 완성한 세트 보여 줄게요~ 저 소파는 골동품이래.
유연
그리고 벽에 걸린 저 그림, 우리 소품팀 선생님이 현장에서 직접 그린 거야. 대단하지 않아요?
내가 조잘조잘 설명하는 동안 화면 너머의 백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화면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백기
저게 저녁이야?
유연
헤헤, 일단 대충 때우는 거지 뭐.
유연
호텔 돌아가면 컵라면이라도 하나 먹을 거야. 굶진 않을게요.
그는 별말 없이 눈썹만 살짝 치켜올리더니 머리 위 구역 안내 표지판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쇼핑카트에서 덜컹 소리가 나고 그는 몸을 돌려 조미료 코너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스 한 병을 카메라 앞으로 가져왔다.
백기
그러고 보니, 전에 네가 만든 개량판 우육면 있잖아. 그거 이 소스 더 넣은 거였어?
유연
어디 보자…… 옆에 있는 초록색 거. 면 요리 할거야?
백기
응, 요 며칠 구내식당이 좀 질려서.
백기
며칠 전에 한번 해 봤는데, 그래도 네가 만든 것만큼 맛있진 않더라고.
백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좀 제대로 배워 둘 걸 그랬어.
그는 시선을 내리깔며 소스를 다시 진열대에 꽂아 넣었다. 긴 속눈썹 아래로 조명 그림자가 작게 드리워졌다.
그런 백기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부드러운 무언가에 살짝 스치는 듯 간질거렸다. 나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유연
그럼…… 내가 이번에 한 번 “실시간” 강의해 줄까?
30분 뒤, 나는 레지던스형 호텔로 돌아와 다시 백기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화면 앞 식탁 위에는 각종 신선한 재료와 양념이 가득 놓여 있었고 인덕션 위의 작은 냄비에서는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났다. 나는 카메라를 향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유연
나도 재료 다 사 왔어. 그럼 시작하자.
유연
1단계! 먼저 참기름을 조금 넣어. 그래야 면이 더 고소하고 향긋해져~
기름이 병 입구를 따라 미끄러져 국물 속으로 흘러들어가자 나는 면을 살며시 물속에 풀어 넣었다. 반대편의 백기도 소매를 걷어 올리고 내 동작을 따라 했다.
윤기 도는 면발이 물속에서 몇 분간 위아래로 출렁이자 나는 젓가락으로 면을 가볍게 풀어 준 뒤, 향을 더하기 위해 송송 썬 파를 한 줌 뿌렸다.
유연
좋아, 이제 슬슬 건져도 되겠다.
그가 내 냄비 안을 힐끗 들여다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백기
보고합니다. 반숙 계란 하나 더 넣고 싶습니다.
유연
푸훗…… 그럼 내가 시범 보여 줄게요~
나는 손을 뻗어 불 세기를 줄인 뒤 냄비 가장자리에 계란을 톡 깨서 조심스레 국물 속으로 미끄러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 양쪽에는 마침내 푸짐한 국수 그릇 두 개가 놓였다. 우리는 동시에 그릇 속 면발을 집어 올렸다.
백기는 한입에 후루룩 끝까지 빨아들이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채 내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나는 헤헤 웃으며 나도 크게 한입 먹었다.
비록 백기가 곁에 없는 건 아쉬웠지만 이렇게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으니 이국의 밤에도 어쩐지 집 같은 온기가 조금 더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먹다 보니 문득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와 비교하면, 오늘 백기가 면을 먹는 속도가…… 왠지 훨씬 느렸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유연
선배, 오늘은 평소보다 덜 맛있게 먹는 것 같은데?
백기
……그래?
유연
응, 오늘은 면 먹는 속도가 좀 이상해……
유연
그리고 선배가 삶은 양도 평소보다 적은 것 같고.
백기
영상이 좀 끊겨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콜록!
그는 재빨리 내 쪽을 한번 힐끗 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제야 단번에 눈치채고 어이없으면서도 웃겨서 화면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유연
아하! 선배 벌써 밥 먹은 거지?
그의 눈빛에 계획이 통했다는 웃음이 스쳐 갔다.
백기
내가 배고픈 상태라고는 안 했잖아.
나는 아까 그와 슈퍼에서 나눴던 대화를 곱씹다가 괜히 분한 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유연
그러니까 백 경관님이 일부러 날 유도한 거네…… 흥, 난 또 선배가 진짜로 내가 해 준 면이 너무 먹고 싶은 줄 알았지.
백기
정말 먹고 싶었어.
백기는 똑바로 화면 너머의 나를 바라보며, 보기 좋게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백기
하지만 난 그보다 너랑 같이 먹고 싶었어.
3장
저녁을 먹고 나니 하늘 끝의 달은 천천히 멀리 빌딩 사이 틈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불빛 아래 앉아 낮에 미처 답하지 못한 메일들을 처리했고 이어폰 너머로는 이따금 백기가 책장을 넘기는 잔잔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마지막 글자까지 입력하고 나서야 나는 긴장이 풀린 듯 크게 기지개를 켰다.
유연
선배, 나……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화면 너머의 그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부드러운 조명이 그의 또렷한 윤곽을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고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아래로는 너무나 고요한 얼굴이 드러나 차마 소리 내어 깨우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그를 따라 아이패드를 베개 위에 올려 두고, 쓸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가 너무 보고 싶어……
그가 곁에 없는 탓에 침대 한쪽은 유난히 더 비어 보였다.
나는 화면 너머로 그의 볼을 콕 건드리다가 손끝을 통화 종료 버튼 위에 올렸다. 하지만 차마 쉽게 누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큰 문제들은 이미 거의 다 정리됐으니……
혹시 조금 더 일찍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남은 업무 일정을 차근차근 다시 정리한 뒤 프로젝트 책임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이대로 후속 작업을 인수인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곧바로 긍정적인 답장이 돌아왔다.
책임자
문제없어요. 방금 물류 상황도 확인했는데 남은 소품은 내일 저녁부터 차례대로 도착할 예정이에요. 이후 진행은 저희가 계속 맡아서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걸 참지 못하고 연모시로 가는 가장 이른 비행기를 재빨리 예약했다.
짐을 싸고 있던 중, 휴대폰 비서가 갑자기 알림을 띄웠다. 항공편 정보를 긴급 연락처에게도 동기화할지 묻는 내용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아니오’를 눌렀다.
이번엔 그에게 깜짝 선물로 해 두자!
하지만 비행 시간이 꽤 길 텐데 백기가 깨어나 나와 연락이 안 되면 걱정할지도 몰랐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들고,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뒤 녹음 버튼을 눌렀다.
유연
보고합니다, 오늘 실수로 밤을 새워 버려서 내일은 좀 늦잠 자고 싶습니다~
유연
일어나면 바로 연락할게요, 오버!
전송 완료 알림음이 울리고 나서야 나는 만족스레 미소 지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짐을 다 챙긴 뒤에는 공항으로 가는 차량을 예약했다.
비행기는 구름층을 뚫고 올라가 밤빛 아래 잠든 드넓은 대지를 스쳐 지나갔다. 다시 착륙했을 때는, 하늘가에 옅은 새벽빛이 막 번져 나오기 시작한 참이었다.
공기에는 이른 아침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살금살금 집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헤헤, 선배가 이따 나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간신히 눌러 가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경첩에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났고, 바로 다음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백기가 현관에 앉아 있었다. 등 뒤의 부드러운 불빛이 그를 감싸 안고 있어 그의 윤곽은 깨끗하고도 포근하게 번져 보였다.
이마 위로 내려온 잔머리가 살짝 눈썹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아래의 맑고 선명한 눈빛만은 전혀 가릴 수 없었다.
기척을 듣고 그는 번쩍 눈을 들었고 얼굴 위로 놀라움과 기쁨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익숙한 체온과 향기가 순식간에 나를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백기
막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네가 먼저 와 버렸네.
나는 살짝 놀라 그 품 안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유연
내가 일찍 돌아올 줄 알았어?
백기
확신한 건 아니었어.
백기
그래도 네가 남긴 음성 메시지 톤이 무척 가벼웠어. 평소 야근할 때랑은 전혀 달랐거든. 그리고……
그는 내 캐리어를 받아 들더니, 검지를 굽혀 가방을 톡톡 두드렸다.
백기
네 음성에 캐리어 여는 소리가 들어 있었어.
백기
그래서 분명 뭔가 숨기고 있겠다고 생각했어.
유연
치사해…… 나름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몽글몽글한 달콤함이 퍼져 나갔다.
유연
근데 내가 안 돌아왔으면? 그럼 공항에서 헛걸음했을 텐데?
그의 입가에 자신만만하고도 멋진 미소가 스쳤다.
그는 몸을 숙여 나를 단단히 안아 올렸다.
백기
그랬으면 내가 직접 날아갔지.
백기
어쨌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만났을 테니까.
4장
유연
응? 선배 오늘은 출근 안 해도 돼?
그는 나를 안은 채 함께 소파에 앉았고, 손끝으로 내 귓불을 살며시 만지작거렸다.
백기
대체휴무 냈어.
백기
전에 신입들 훈련량을 좀 늘려 뒀거든. 마침 이틀 정도는 정비할 시간을 주는 게 좋겠어서.
유연
오? 이 결정에 백 경관님의 사심은 정말 없는 거 맞아요?
백기
있지. 하지만 그 사심 덕분에 너를 더 빨리 볼 수 있고, 신입들도 적당히 쉬어 갈 수 있으니 윈윈이야.
그가 너무도 당당한 얼굴을 하자 나는 풉 하고 웃으며 편안하게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유연
헤헤, 쓰리윈이지~
유연
내일 선배도 일찍 안 일어나도 되니까, 시사회 보고 나서 우리 어디 좀 더 돌아다닐까?
유연
며칠 전에 괜찮은 드라이브 코스를 봤는데, 밤에 가면 야경도 볼 수 있대~
백기
좋아. 너는 먼저 좀 자. 나갈 때 되면 내가 깨워 줄게.
백기
그래야 밤늦게까지 놀 체력이 남지.
나는 느긋하게 대답하며 눈을 감고, 그의 따뜻한 어깨에 뺨을 기댔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또렷했다.
잠시 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눈을 떴다.
유연
아무래도 잠이 잘 안 오는 것 같아…… 요즘 이 시간대가 딱 제일 바쁠 때라서 그런가 봐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내 손끝을 살짝 쥐었다.
백기
그거라면 어렵지 않아.
그는 창가로 걸어가 암막 커튼을 잡아당겼고, 거실은 순식간에 밤처럼 어두워졌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어둠에 적응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창고에서 텐트 하나를 꺼내더니 능숙하게 설치하기 시작했다.
유연
왜 갑자기……
백기
특파팀에는 따로 수면 훈련이 있어. 극한 환경을 일부러 만들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빨리 잠들고 바로 깰 수 있게 하는 훈련이지.
백기
조금만 응용하면, 지금 네 상태에도 딱 맞아.
그는 몸을 살짝 숙인 채 손에 든 몇 가지 물건을 텐트 안으로 한꺼번에 들고 들어갔다.
한참 뒤, 텐트 입구가 안에서 열리더니 그가 얼굴을 내밀고는 나를 향해 눈썹을 까딱했다.
백기
들어와 볼래?
나는 히죽 웃으며 텐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따뜻한 전구 조명이 머리 위로 둥글게 둘러져 있었고, 작은 스크린에는 가벼운 분위기의 로맨스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유연
푸훗…… 수면 훈련에 영화 감상도 들어가?
백기
원래는 아니지. 하지만 특수 상황엔 특수 대응이니까.
그는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고, 눈가에는 옅은 웃음이 어려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채고,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촛불 같은 조명의 그림자가 자잘한 소품 위에서 잔잔히 흔들리고,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와 이 작은 공간에 고요함과 여유를 더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건 백기의 품 안에 감도는 체온과 또렷하고 안정적인 심장 소리였다.
들떠 있던 기분은 조금씩 차분해졌고, ‘소속감’이라는 안도감 같은 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히 퍼져 나갔다.
유연
역시 집이 제일 최고야.
유연
출장 가는 것 자체는 괜찮지만, 그래도 역시 집에 있으면 제일 마음이 놓여~
백기는 내 어깨에 턱을 기대고 살며시 부벼 왔다. 이내 그의 가슴에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백기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의 말투에는 어딘가 조금 일렁이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우리 백 경관님, 혼자 집에 있으니까 심심했나요?
백기
심심한 건 아니야. 그냥 네가 출장 갈 때는 대부분 나도 바빴거든.
백기
그런데 이번엔 한가해지고 나니까 네가 평소에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 더 알 것 같더라.
그는 말을 하다 잠시 멈췄고, 예쁜 얇은 입술을 가볍게 다물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쉽게 그 미세하게 용솟음치는 감정을 포착했고, 그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내 허리 옆을 살짝 쓰다듬고 있음을 느꼈다.
백기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 분명 쉽지 않았을 거야.
나는 살짝 멈칫했다가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가만히 덮고 진지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연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유연
지금도 솔직히 선배가 외부랑 연락 안 되는 임무를 나갈 때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못하겠어.
유연
그래도 대부분의 순간엔 선배가 나한테 약속한 건 꼭 지킬 거라고 믿고 있어.
유연
그래서 선배가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시간은 걱정스럽고 힘들기도 하지만 사실 그만큼 기대되는 마음도 커.
유연
그리고 누가 진짜 늦게 들어오면 그 늦은 시간만큼은 다른 방식으로 꼭 보상받을 거야.
유연
예를 들면…… 다음 휴가는 통째로 전부 나한테 내주는 거지!
그는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호박빛 눈동자 안에는 내 모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잠시 뒤, 그는 손을 들어 꼭 쥐고 있던 오른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백기
그럼 이번 선물부터 먼저 줄게.
유연
원래는 내가 선물 사 와야 하는 거 아니야~?
백기
누가 집에 있는 사람은 서프라이즈 준비하면 안 된다고 했어?
그의 눈빛에는 잘게 부서진 듯한 따뜻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그의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은은하게 반짝이는 열쇠 모양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유연
와, 디자인 진짜 섬세하다!
백기는 자기 목에 걸린 자물쇠 모양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백기
게다가 나랑 커플이야.
백기
보자마자 우리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그는 내 목덜미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살며시 걷어 내고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백기
가게 직원이 그러는데 이 조합엔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가 있대. 하지만 난 다른 해석이 더 좋아.
백기
너와 함께 있어야 비로소 내가 완전해져.
서늘한 펜던트가 피부에 닿았지만 귓가를 스치는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마음속에 따뜻하게 번져 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스크린 위의 빛은 점점 희미해졌고 그 안의 허구의 이야기들도 어느새 중요하지 않은 배경으로 멀어져 갔다.
나는 편안히 그의 팔 안에 기대어 며칠 동안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그 사이에 섞여 든 웃음과 입맞춤이 텐트 안의 모든 공간을 조용히 채워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