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초반 스토리인 놀이공원 데이트 관련)
1장
햇살이 유원지에 내리쬐고, 푸른 하늘 아래 성은 한층 더 생생한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달콤한 선율을 실어 나르며, 놀이공원 전체를 눈부시고 뜨겁게 밝혀 주었다.
관람차의 곤돌라가 천천히 올라가고, 발아래 풍경이 조금씩 작아지는 걸 바라보며 나는 유리창에 손끝을 대고 계속 이것저것 가리키며 그림을 그렸다.
유연
선배, 빨리 봐요! 저기 우리가 서커스 보던 곳이에요!
성은 여전히 예쁘네요. 근데 그때 불꽃놀이 봤던 테라스는 왜 안 보이지?
갑자기 어깨 위로 무게가 실리며, 상쾌한 바닷소금 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백기는 내 어깨에 턱을 얹고 손을 들어 성 반대편을 가리켰다.
백기
테라스는 그대로 있어. 그냥 꽃에 가려진 것뿐이야.
유리창엔 웃음을 머금은 그의 눈동자를 보고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유연
너무 흥분했나요?
백기
오랜만에 왔잖아, 더 흥분해도 돼.
이번 설날엔, 보기 드물게도 백기가 일을 일찍 마치고 며칠간 온전한 휴가를 얻었다.
마침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갔던 놀이공원에서 발렌타인데이 축제를 연다고 해서, 우리는 서둘러 이곳으로 찾아왔다.
눈앞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을 바라보다가, 곁에 있는 사람을 힐끗 보고는 나도 모르게 더 환하게 웃고 말았다.
유연
에이~ 이번엔 누가 롤러코스터 타자고 하려나?
(*극초반에 놀이공원 데이트 내용)
백기
예전의 멍청이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누군가가 그냥 타려는 게 아니라 자기 여자친구랑 같이 타려고 해.
그는 당당하게 말하며 거침없이 나를 품으로 끌어안고, 웃고 있는 내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때, 낮은 하늘을 가르며 눈에 확 들어오는 선명한 분홍빛이 시야에 걸렸다.
유연
와— 저기 봐요! 엄청 큰 열기구에요!
알록달록한 하트 모양 열기구들이 유원지 상공에 듬성듬성 떠 있었다.
마치 사탕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것처럼, 다양한 놀이기구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백기
저건 아마 발렌타인데이 축제 이벤트 장소일 거야.
백기는 뭔가 떠올린 듯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몇 번 톡톡 누르더니, 포스터를 찾아 내게 내밀었다.
백기
여러 코스에 인증 스팟이 있대. 찍고 도장 모으면 보상도 있고.
이따 우리도 스탬프북 하나 받아서 해볼까?
내 눈이 반짝였지만, 서로 다른 모양의 도장이 열댓 개나 되는 걸 보자 살짝 망설여졌다.
유연
근데 너무 많지 않아요? 나중에 “미션 깨기”처럼 되는 건 싫은데…
백기는 내 마음을 꿰뚫어본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백기
방금 봤는데, 몇 개는 원래 우리 계획에 있던 거야.
이따 동선만 잘 짜서 나머지도 몇 개 끼워 넣으면 되지.
오늘은 발렌타인이잖아. 당연히 내 여자친구가 즐거운 게 제일 중요해.
그 말을 듣자, 나는 몸을 기울여 그의 목을 끌어안고 품 안에서 살짝 비볐다.
유연
그럼 우리 우주 최고 남자친구님께서, 이따 저 좀 데리고 출발해주시겠어요?
2장
직원
정글 횡단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느 코스를 선택하시겠어요?
관람차에서 내려 우리는 스탬프북을 받아 들고 열기구가 떠 있는 방향을 따라가다 보니 금세 가장 가까운 인증 코스에 도착했다.
여긴 놀이공원에 새로 오픈한 시설이었다. 텅 빈 잔디밭 위로 두 개의 작은 산이 우뚝 솟아 있고, 공기엔 흙과 풀내음이 떠돌아 마치 진짜 우림 속에 들어온 듯했다.
덩굴로 엮인 긴 다리가 산과 산 사이를 가로지르고, 짙은 초록빛 사이로 커플들이 안전줄을 매고 서로 의지하며 건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유연
이 코스들은 뭐가 달라요?
직원
코스마다 난이도가 달라요. 다만 중·하 난이도는 대기 인원이 많아서 한 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할 수도 있어요.
그 말을 듣고 옆에 있는 백기를 바라보니, 그는 몇 개 코스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백기
가볍게 즐겨볼래, 아니면 도전해볼래?
유연
보고합니다! 즐기면서 도전도 하고 싶어요! 도전하면서 즐기기도 할래요~
백기
좋아. 그럼 최고 난이도로 가자.
그가 너무도 아무렇지않게 결정을 내리고 내 손을 잡아 최고 난이도 코스로 걸어가는 걸 보니,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연
이렇게 쉽게 최고 난이도로 결정하는 거예요?!
백기
낮은 난이도는 너한텐 너무 쉬워.
고난이도 코스는 덩굴다리에 발판이 없거든. 네 취향에 딱이잖아.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반대편까지 곧게 이어진 굵은 덩굴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살짝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평소에 백기랑 같이 운동도 하니까, 놀이공원 코스 정도야 괜찮겠지!
안전장치를 착용하고나서 우리는 최난 코스의 출발점에 섰다.
그런데 사발만 한 굵기의 오래된 덩굴이 맞은편까지 쭉 이어져 있을 뿐, 중간엔 발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덩굴 아래는 무성한 잎들이 빽빽하게 가려 까맣기만 하고, 바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이 조금 울렁거려 무의식적으로 안전줄을 꽉 움켜쥐었다.
유연
보기보다 무서운데……
나는 까치발로 조심스레 발을 올려봤다. 덩굴은 즉시 푹 꺼지며 부드럽게 처졌고, 어디에도 힘을 실을 데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몇 걸음 옮기자마자 덩굴이 크게 흔들렸고, 두 손으로 안전줄을 꼭 잡고 있어도 균형이 잡히질 않았다.
따뜻한 손이 내 허리 옆에 닿았다. 딱 좋은 힘으로, 흔들리는 내 몸을 단단히 받쳐 줬다.
백기
아래 보지 마. 무서우면 빠르게 걸어.
유연
난 지금 걷지도 못하겠는데, 빨리 가라고요? 선배, 진짜 나빴어요… 이 철혈 교관!
안전줄을 놓을 엄두도 안 나면서, 나는 웃으면서 그를 타박했다.
백기
사람이 무서우면 제일 먼저 몸이 굳어.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면, 오히려 덜 무서워져.
그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뭔가 못된 생각이 떠오른 듯, 그는 손을 천천히 떼더니 내 손가락을 스치고는—
백기
알겠어. 5초 줄게, 혼자 앞으로 걸어가봐.
나중에 나한테 잡히면 내가 5분동안 키스할거야.
유연
……그런 자극적인 게임은 하지 마요!
백기
그럼 천천히 가. 잡히면 되지.
유연
그건 반칙이죠!
백기
5—— 4.9—— 4.8——
유연
진짜 세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상하게 내 두려움은 그의 카운트다운에 하나씩 지워져 갔다.
발아래 덩굴은 여전히 흔들렸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백기
엄청 빨리 달리네?
유연
아직 카운트 중이잖아요. 한눈팔지 말아요.
백기
그럼 3, 2, 1. 다 셌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발아래 덩굴망이 툭— 하고 크게 흔들렸다.
유연
잠깐잠깐잠깐! 시간 아직 안 됐어요!
백기
잡았다.
뜨거운 체온이 확 감싸 왔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덩굴은 마치 쿵쾅대는 내 심장 같아서, 나를 그대로 그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종점까지 몇 걸음 남지 않은 곳에서, 그 호박색 눈동자엔 ‘승리’의 미소로 가득했다.
유연
신입생한테 이 도전은 좀 너무 자극적인 거 아니에요?
백기
난 딱 좋던데. 오히려 네가 너무 빨리 느는 것 같아.
난이도 좀 더 올려도 되겠는걸.
귓가에서 나뭇잎이 사각사각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아래가 더 심하게 흔들렸다.
유연
아아악! 또 해요?!
나는 아예 저항을 포기하고 그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낮게 웃고는 팔을 자연스럽게 조여, 내 몸을 단단히 받쳐 주며 나를 데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옮겼다.
마침내 땅을 밟고 잠시 숨을 고른 뒤에야, 나는 흔들림의 감각에서 겨우 벗어났다.
직원에게서 스탬프북을 받아 시간을 확인한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팔을 꼬집듯 살짝 눌렀다.
유연
다 이 못된 바람 탓이야. 이러다간 우리 해 질 때까지도 다 못 놀겠어요.
그는 내 손을 되잡아 깍지를 꼈다.
백기
걱정 마. 다음부터는 얘가 아주 말 잘 들 거야.
백기
대신, 방금 도전 보상부터 받아야지.
3장
뜻밖에도, 백기는 그대로 '치트 모드'를 켜 버렸다.
그는 큰길의 인파를 피해 나를 데리고 옆의 가로수길로 들어가더니, 이리저리 꺾어 가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인증 코스의 간판을 찾아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을 딱 맞춰 재는 사람처럼, 언제나 줄이 잠깐 비는 타이밍에 맞춰 도착했다.
우리는 거의 줄을 서지 않고 남은 인증 코스를 전부 돌았다.
마지막 도장을 찍고 나니, 시간은 아직도 오후에 불과했다.
나는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종착점 쪽으로 걸어가며, 참지 못하고 궁금한 걸 물었다.
유연
어떻게 이런 지름길을 이렇게 많이 알아요? 몇몇 길은 안내판에도 안 적혀 있던데.
백기
너랑 처음 오기 전에 찾아봤었어. 아까 관람차에서도 겸사겸사 내려다봤는데, 크게 안 바뀌었더라.
유연
그때 그런 것까지 조사했어요?
백기
응. 너랑 처음 놀이공원 올 때, 좀 더 준비하고 싶었거든.
그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고, 말이 조금 빨라졌다.
백기
……그래서 놀이공원 건물 배치도랑 소방 안전도까지 찾아서 전부 외워뒀어.
백기
하지만 별로 쓸 일이 없었지.
유연
누가 그래요~ 오늘 다 써먹었잖아요!
아마 그때의 백기도 평소 사건 자료를 볼 때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도면을 꼼꼼히 몇 번이고 들여다봤겠지.
그 진지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금세 “카니발 사무소”라는 간판이 걸린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문을 여는 순간, 처마 밑 풍경이 살랑 흔들리고 달콤한 꽃향기가 얼굴을 감쌌다.
분홍빛이 감도는 하얀 꽃벽이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앞에는 알록달록한 풍선들이 떠 있었다. 풍선 아래에는 온갖 종류의 인형들이 빼곡했다.
직원은 우리의 스탬프북을 받아 확인한 뒤, 서랍에서 몇 가지를 꺼냈다.
하트 무늬가 찍힌 쿠폰 몇 장, 그리고 새빨간 책자 두 권. 표지에는 금박으로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최고의 커플증”.
(중국 결혼증명서인 결혼증 처럼)
직원
모든 도전을 완료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이건 상품이에요. 전 구역 어트랙션을 대기시간 없이 바로 이용할 수 있는 패스트패스입니다.
그리고 카니발 전용 기념품인 한정판 “최고의 커플증”도요~
두 분은 옆의 헤어&메이크업 존에서 정리하고 오셔도 되세요. 포토존에는 전문 사진사가 기념사진도 찍어 드립니다.
유연
이 행사, 생각보다 엄청 본격적인데요?!
나는 헤어&메이크업 존으로 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했다. 그때, 머리 위의 리본 헤어밴드가 언제 얽혔는지 서로 꼬여 있었다.
손으로 풀어 보려 했지만 오히려 머리카락이 더 단단히 엉켰다. 백기가 다급히 움직이는 내 손을 살짝 누르고, 그 엉망이 된 한 덩어리를 받아 들었다.
백기
내가 할게.
나는 편히 거울을 바라봤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긴 속눈썹이 눈 아래에 작은 그늘을 만들었다.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집어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어냈다. 숨소리마저 아주 가볍게 죽인 채로.
마지막 한 올까지 풀어내자, 그의 눈매가 조금 풀리며 거울 속 내 시선과 딱 마주쳤다.
백기
아팠어?
유연
아뇨. 하나도 안 아팠어요.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 사이를 조용히 지나가며 천천히 결을 정리했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가끔 내 귓바퀴를 스치면, 간질한 느낌이 살짝 올라왔다.
그는 손목에서 검은 고무줄 하나를 빼 내 머리를 묶어 주고, 리본을 집어 능숙하게 매듭을 지어 나비처럼 만들어 줬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갑자기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허리를 숙여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백기
잠깐. 좀 삐뚤어졌어.
나는 그의 상쾌한 향에 온몸이 잠기듯 감싸였고, 심장이 저절로 빨라졌다.
그가 이렇게 진지하고 인내심 있게 집중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난 평생 그를 보며 두근거리지 않는 날이 있을까 싶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거울 속 우리의 시선이 다시 겹쳤다.
그의 눈빛은 유난히 조심스럽고도 단정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런데 천천히, 반짝이던 호박빛에 감출 수 없는 뜨거움이 스며들어 나를 꽉 붙잡았다. 나 역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유연
다 됐어요? 왜 갑자기 말이 없어요.
백기
아까 다 됐어.
그는 웃음을 머금고, 따뜻한 숨결을 내 귓가에 살짝 흩뿌렸다.
백기
근데 네가 너무 예뻐서. 조금 더 보고 있었어.
들켜버렸네.
어떻게 못 알아채겠어.
그는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고, 너무 뜨거운 기쁨이 그의 시선으로 내 몸 구석구석에 내려앉아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뺨에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는 만족한 듯 내 머리 위의 나비리본을 톡톡 하고 건드리며 웃고는, 휴대폰을 내 앞에 내밀었다.
백기
어때?
사진 속에서, 머리 위 나비리본은 반듯하게 딱 묶여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이 휘어졌다.
유연
내 남자친구가 직접 묶어 준 머리잖아. 어떻게 봐도 예쁘지~
백기
그럼 가자. “최고의 커플증” 받으러.
4장
“커플증”을 쥔 채 오두막을 나서자, 백기가 갈림길 앞에서 나를 바라봤다.
백기
다음엔 어디 가고 싶어?
내가 입을 열어 대답하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흥분에 찬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은빛색의 궤도가 허공에 똬리를 틀듯 얽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이미 결정됐다.
유연
이제 롤러코스터 타러 출발할 시간이에요!
이벤트로 받은 패스트패스를 써서, 우리는 오래 기다리지도 않고 금세 자리에 앉았다.
롤러코스터가 천천히 출발해, 조금씩 고도를 올렸다. 시야는 점점 탁 트이고, 맑고 투명한 푸른 하늘이 온몸을 감쌌다.
열차가 꼭대기에 도착하자 나는 숨을 멈춘 채 백기의 손을 꼭 잡았다. 세상이 마치 ‘음소거’라도 된 것처럼 고요해졌다.
다음 순간, 바람이 귓가를 후려치듯 스쳐 지나갔고, 강한 무중력감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목청껏 환호했다.
지금의 내 세계에는 바람소리와 푸른 하늘,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열차가 또 한 번 거의 수직에 가깝게 급강하하던 순간, 머리카락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롤러코스터는 여전히 뒤집히고 튀어 오르며, 주변 풍경은 눈앞에서 빠르게 흔들리며 뒤로 쓸려 갔다.
그 찰나에, 시야 한쪽으로 선명한 빨간색이 스쳤다.
유연
방금 선배가 묶어준 리본이——!
겹겹이 드리운 구름 그림자 아래, 그 리본은 하늘에 예쁜 곡선을 그리며 미친 듯이 펄럭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뼈마디가 또렷한 손이 그것을 단단히 붙잡았다.
햇빛이 마침 백기의 옆얼굴 위로 떨어져, 매끈한 턱선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 호박빛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백기
날아가게 두지 않을 거야.
유연
조심해요! 잃어버려도 괜찮아—!
백기
잡을 수 있을 때라면, 절대 놓지 않을 거야.
그 순간, 소년 같은 그의 눈매가 반짝였다.
그건 그저 평범한 머리띠일 뿐인데, 그는 마치 더 특별한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는 마치 청춘의 트랙을 몇 번이고 달려, 영원히 나의 결승점을 가장 먼저 통과하던 사람처럼— 지금 이 순간처럼 승리의 리본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그리고 내 모든 기쁨을 몽땅 가져가 버렸다.
손목에 차가운 비단 같은 감촉이 스쳤다. 그는 리본을 내 손목에도 두어 번 감아 매더니, 그대로 자연스럽게 내 왼손을 잡았다.
백기
다음번엔 더 꽉 묶어줄게.
그는 제멋대로이면서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가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선홍색 리본이 우리 손목에 감긴 채 바람에 흔들렸다.
롤러코스터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지만, 내 심장은 아까보다 더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여러 번 롤러코스터를 타고 목이 좀 쉰 뒤에야, 우리는 손을 잡고 놀이공원 안을 느긋하게 떠돌며 마음 가는 대로 이것저것 즐겼다.
해가 기울고, 가로등이 켜지면서 눈부시고 따뜻한 빛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회전목마의 분홍빛이 감도는 하얀 울타리 주변엔 반짝이는 전구들이 떠 있었고, 잔잔한 왈츠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 백기를 바라보니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나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몽환적인 음악 속에서 회전목마는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백기는 하얀 말 위에 앉아, 긴 다리를 살짝 구부린 채 어딘가 어색하게 둘 곳을 못 찾는 듯했다.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은 휴대폰을 들어 나를 찍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드물게도 서툴고 귀엽게 느껴졌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멍해졌다.
유연
지난번에 이 놀이공원 왔을 때는 선배가 나랑 회전목마를 타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백기는 그때의 장면이 떠오른 듯, 셔터를 누르던 손이 잠깐 멈췄다.
백기
그땐 회전목마에 이렇게 장점이 많은 줄 몰랐거든.
유연
회전목마에 무슨 장점이 있는데요?
백기
많아. 가까이서 여자친구 웃는 얼굴도 볼 수 있고, 우리 커플 사진 앨범도 더 채울 수 있고.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문득 낮아지더니, 끝맺음이 밤바람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나는 더 잘 들으려 무의식적으로 몸을 그쪽으로 기울였다.
그때, 부드러운 그림자가 내려앉으면서 입술 위로 말랑한 감촉이 살짝 닿았다.
그 키스는 깃털이 내려앉듯 가벼웠다. 밤바람의 서늘함과 그의 향이 섞여, 내 숨을 고스란히 차지했다.
백기
이 거리면 딱 좋아. 너에게 키스할 수 있거든.
회전목마가 흔들리며 빙글빙글 도는 바람에, 나까지 어질어질해졌다. 나는 말랑한 달콤함 속에 푹 잠겨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면 그의 얼굴은 손닿을 듯 가까웠고, 나를 바라볼 때 변하지 않는 그 다정함이 내 마음을 편안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줬다.
유연
사실 입장할 때 주변이 너무 많이 달라져 있어서, 좀 멈칫했어요.
근데 선배가 손을 잡아주기만 하면, 둥둥 떠 있던 불확실함이 전부 바닥에 내려앉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쩌면 그런 변화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지도 몰라요.
우린 그때랑 똑같잖아요.
나는 선배를 좋아하고, 선배도 나를 좋아하고.
수많은 불빛들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흘러, 밤을 밝힐 만큼의 빛으로 번졌다.
백기
하지만 난 어떤 변화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유연
어?
백기는 자연스럽게 바람에 흐트러진 내 앞머리를 정리해 줬다.
백기
그땐 너랑 놀이공원 오면 긴장해서 이것저것 막 찾아보곤 했어.
네가 기분이 안 좋아보여도 왜 그런지 몰랐고.
하지만 지금의 넌 항상 웃잖아. 정말 행복하게.
그의 목소리는 놀이공원 음악에 섞여 있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내 귀에 닿았다.
백기
난 그게 좋아. 네가 내 옆에서 계속 행복해하는 게 좋아.
심장이 말랑한 무언가에 툭 하고 부딪힌 것처럼 울렸다. 그의 확신에 찬 어조가, 이 순간이 정말 끝없이 이어질 미래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유연
선배, 한 사람을 평생 좋아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찬란한 빛 속에서 백기가 살며시 웃는 게 보였다.
그는 내 손을 끌어당겼다. 마치 수많은 시간 속 순간들이 한 장면으로 고정되는 것처럼.
백기
연이 네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느낌.
왈츠 선율이 밤공기 속에 흐르며, 주변의 소란마저 부드러운 꿈으로 물들였다.
오르내리는 빛과 그림자 속에서, 오직 그의 손바닥 온기만이 너무도 선명해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아름다움이, 약속처럼 이미 도착해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