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한예준의 비망록
"백기의 작은 비밀을 발견한 그 사람,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01
비망록 제1편
두들겨 맞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호기롭게 학교 내 '비행 청소년'들의 도시락통 위에 '악령 퇴치'라는 도전장을 붙였다. 그 결과, 다섯 명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골목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꼿꼿이 세워봤지만 등골은 여전히 서늘했다. 그리고는 첫 줄에 적은 대로… 두들겨 맞았다. 코가 멍들고 얼굴이 팅팅 부울 정도로. 역시, 이 시대에 영웅이란 없나 보다… 나 같은 열혈 소년도 이런 꼴을 당하다니…
돌연, 하얀 운동화가 내 눈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핏발이 선 눈을 힘겹게 들어 올려 보았다.
비행 청소년 중 한 명의 목을 잡은 채 서 있는 그가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와우… 백! 기! 선! 배!였다.
오늘 나는 드디어 진정한 1대5의 싸움을 목격했다. 백기 선배는 손에 묻은 먼지를 후 불어내더니, 고개를 숙여 나를 힐끗 보고는 그대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선배는 정말 소문대로 싸늘했다. 여태까지 꺼지라는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멋있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작은 목표 하나가 생겼다. 선배의 그 1대5의 필살기를 꼭 전수 받으리라!
비망록 제2편
나는 여러 번 선배를 찾아갔지만 매번 매정하게 무시당했다… 그는 늘 물 마시는 데 집중한다든지, 잠에 빠져있다든지 했다… 나는 선제공격을 하기기로 결심했고, 선배를 완벽하게 알아가기 계획을 세웠다!
흠흠.
그리하여 나는 선배의 무미건조한 생활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선배는 매일 7시 반에 정확하게 교문 앞에 나타난다. 납작한 가방을 들쳐 메고 말이다. 안에 책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가? 아니!
선배가 학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바로 매점에 가서 아! 침! 밥! 을 사는 것이다. 그가 이리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다니? 선배는 이슬만 먹고사는 줄 알았는데! 아아아! 의외로 어묵을 좋아하시나 보다? 연속 사흘째 먹고 있다!!! 다른 걸로 바꿔 먹을 때도 되지 않았나?!!!
수업 들으러 갈 때면 고층에 위치한 고3 교실을 애돌아 일부러 선배가 있는 창가 쪽을 지나간다. 물론, 선배는 교실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거기에 있다!!!!
내 예상대로 역시나 선배는 맨 뒤 줄에서 거리낌 없이 자고 있다…
뭐라 하는 사람 없나?! 뭐지, 나의 이 부러운 기분은?
하교 후, 요리조리 돌아 어디로 향할지 알 길이 없는 선배. 마침내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정말 마음 내키는 대로구나…
엥?! 잠깐만! 비행 청소년 선배가 어떻게 도서관에를?!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선배가 우리 반 여신을 위해 책을 집어준 것이다! 게다가 그가 웃… 웃었다…
내가 잘 못 봣나? 제멋대로에 쌀쌀맞기로 유명해 여학생들을 벌벌 떨게 하는 선배는 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02
비망록 제3편
난 또 맞았다… 쓰고 보니 아프네. 난 대체 왜 그 멍청하고 어눌하고 의리도 없는 안경잡이 자식을 구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이 죽일 놈의 오지랖! 하지만, 영웅이 뭐 별거인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게 바로 나 같은 영웅이지 않나!
…그런데 어쩌면 이 시대는 나 같이 약해빠진 영웅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때 비행 청소년에게 깔려 두들겨 맞으면서 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 신념마저 무너져 내리려던 순간 백기 선배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올랐다. 지금 이럴 때 선배가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진짜 선배가 하늘에서 똑 떨어져 나타났다! 그는 멋진 레프트 훅 한방으로 상대를 납작 엎드리게 만들었다. 나는 감동한 나머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선배가 물었다. 왜 항상 맞을 일을 만드냐고… 난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 영웅이 되고 싶어서요, 일진들이 약자를 괴롭히는 꼴을 못 보겠거든요 라고. 선배가 또 물었다. 개네들이 날 학교 악당이라고 부르는 거 몰라?
나는 마음속의 ‘당연히 알죠’라는 대답을 애써 외면하고, 꿋꿋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 신기함이 더해졌다… 꼭 마치… 바보? 를 보는 듯한…
선배는 참 알기 어려운 사람이다. 게다가 나에게 진정한 영웅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철문처럼 무거운 입으로 무려 두 마디씩이나!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이…
뭐, 상관없어! 내가 생각하는 영웅주의는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서슴없이 나서는 거니까!
비망록 제4편
오늘은 내가! 영! 웅!
오늘이 선배를 몰래 따라다닌 지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나는 뜻밖에도 선배가 비행 청소년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을 목격했다! 바로 일전에 나를 두들겨 팼던 그 무리들이었다! 족히 열 명은 돼 보였다! 젠장! 아주 작정을 했구만! 여러 명이 한 명을 괴롭히는 걸 이 한예준이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나는 주저 없이 선배를 도우러 뛰어들었다! 물론, 당연히 또 또 맞았다… 하지만 난 선배의 엄청난 파워를 발견했다…
1대10! 너무 멋있다! 나는 슈퍼맨, X맨, 아이언맨도 이렇게까지 멋있지는 않았다! 선배야말로 내 마음속에 신 같은 존재다!
하지만 제대로 쌀쌀맞은 선배는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 한 마디를 던졌다 : “죽으려고 환장했냐.”
억울한 나는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영웅주의라고 대꾸했다.
선배는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이제 몰래 나 따라다니지 마, 귀찮아.
뭐뭐뭐라고? 내 완벽한 계획이 일찌감치 들켰다는 거야?!
왜 하필 그 시점에 그 얘기를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했다 : 선배, 선배가 우리 반 여신에게 책 건네는 거 봤어요… 선배 설마…
당황한 선배는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손을 뻗어 입을 막았다… 어, 얼굴까지 붉어진 거야!!!!? 내가 뭘 본 거지? 선배 얼굴이 붉어지다니! 잘못 소문냈다가 나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겠지?!!
03
비망록 제5편
선배의, 아니 백기 형의 동생이 된 첫날. 히히. 날아갈 것만 같다. 드디어 당당하게 백기 형이랑 나란히 걷게 되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 바람이 이는 느낌이다. 하하하하하!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도! 아~주~막~ 그렇다!
그런데 백기 형이 그렇게 엄격할 줄이야… 우리 반 여신이 또 누군가의 연애편지를 받은 것 같다고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에 백기 형이 갑자기 화를 내더니, 나더러 그놈들을 잡아 오라고 한다.
사람을 잡아 오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다. 여럿 교실을 돌아다녀야 하는 데다 여럿을 귀찮게 해야 하는 정말 번거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백기 형은 그들을 휘끗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나서야 하나?? 교감 선생님께 혼나던 순간을 떠올리며 나는 선생님을 흉내 내 그들을 훈계했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신경을 공부에 써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허튼짓이야 허튼짓은”
그들이 전전긍긍하는 걸 보고 있자니, 나는 더욱 신이 났다.
내가 한참 신 나 있을 때, 백기 형이 걸어와 한마디를 건넸다.
‘편지를 다시 가져와. 단, 그 애를 놀라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으응, 역시 백기 형은 멋있어! 혹시 내가 알아선 안 될 비밀을 발견한 건 아니겠지?! 예를 들면, 실은 백기 형이 우리 반 그 여자애를…
비망록 제6편
내 생각엔… 백기 형이 어쩌면 분명 사랑에 빠진 것 같다. 그리고 난 요즘 백기 형의 사설탐정 역할을 맡았다. 우리 반 최고의 미녀를 전달하는 뭐 그런… 나중엔 그 여자애를 형수님이라 부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휴, 역시 영웅은 미인을 좋아하나 봐!
요즘의 백기 형은 도무지 원래의 백기 형이 아니다…
형은 매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다. 만약 형을 찾고 싶다면 우리 반 그 애를 찾으면 될 정도라니까… 형은 이제 싸움도 안 하고, 운동장도 안 나가고, 농구도 하지 않는다. 마치 날개를 잃은 작은 새를 보는 것 같다… 더 어이없는 건 형이 <수능 모의고사 모음집> 따위를 본다는 것이다… 난 울고 싶다.
점심 무렵, 함께 체육 수업을 하던 중, 나는 형수님이 농구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백기 형에게 보고했다!
나는 당연히 형이 농구장으로 갈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백기 형은 나를 농구장 옆의 배구장으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형은 여기가 좋겠다고 말했다. 뭐가? 뭐가 좋다는 거야? …내 농구 실력을 뽐낼 기회였는데!
조금 뒤 난 깨달았다. 쯧쯧… 백기 형은 정말이지 교활한 남자라니까…
알고 보니 배구장이 다른 농구장보다 형수님이 있는 곳과 더 가까이 붙어있던 것이었다!!!
내가 실수로 형수님의 얼굴을 향해 공을 날린 그 때! 뜻밖에도 저 멀리에 있던 형이 달려와 공을 가로막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어떻게 한순간에 배구장을 대각선을 가로질러 올 수 있었지?!
무슨 특수한 능력이라도 있는 거야? 순간 이동이라도 한 건가?!
하지만 백기 형은 낭만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형수님이 백기 형에게 고맙다고 말하는데, 형의 표정은 나를 볼 때보다 더 싸늘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한 번 ‘실수로’ 형수님을 백기 형 쪽으로 밀쳤을 때! 뜻밖에도 형은 나에게 눈빛 레이저를 발사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정말 사람 마음을 몰라준다니까… 흑흑흑.
04
비망록 제7편
오늘 운동회에서 새로운 모습의 백기 형을 봤다! 너무 멋있다! 운동장 열 바퀴를 도는 장거리 마라톤에서 뜻밖에도 백기 형이 1등을 했다. 그것도 2등보다 세 바퀴나 앞서고 있어도 숨찬 기색 하나 없이! 이건 또 무슨 필살기지? 나는 백기 형이 그저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아직 형에게 배울 게 엄청 많은 것 같다!
나는 오늘에야… 백기 형이 그렇게 무서운 데다 폭력배고 어쩌고 하는 소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 여자애들이 백기 형에게 눈을 못 떼는 광경 좀 보라고——
휴. 쯧쯧쯧.
백기 형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내가 형에게 1 대 10으로 싸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형은 모른 척 또다시 나에게 사설탐정 일을 맡겼다…
백기 형의 관심은 저쪽에서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형수님에게 쏠려있었다. 뭐가 부끄러운지 형은 직접 가지 않고, 기어이 날 보내면서 자기 휴대폰을 내게 던져줬다.
이건 무슨 뜻이지? 나보고 대신 다녀오라고?
나는 형수님을 불렀고, 그녀가 돌아보며 활짝 미소를 짓는 아름다운 옆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음, 사진이 정말 잘 나왔으니 이번에는 형도 나에게 1 대 10의 싸움법을 가르쳐 주겠지?
결과는! 아! 니! 었다.
형수님만 좋아하고! 동생은 하대하다니!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냐고? 그저 구석에 쭈그려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괴상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백기 형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세상에! 백기 형이 또 웃었다! 무섭다!!
사랑이 사람 하나를 버려놨다니까!
05
비망록 제8편
요즘 백기 형은 매우 의기소침해 있다. 예전의 날개 잃은 작은 새일 때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달까… 형은 하루 종일 멍만 때리고 있다.
피아노실에서도 도서관에서도 형은 형수님이 앉았던 빈자리를 쳐다보고만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모르겠다.
내가 정말 알 수 없는 건, 수업 시간에는 내내 잠만 자는 사람이 오후에는 도서관으로 가서 내내 멍만 때린다는 것이다… 설마 백기 형이랑 형수님이 다투기라도 한 걸까?
호기심에 여기저기 알아보니, 왜 때문인지 요즘 형수님은 수업이 끝나면 더는 도서관에도 안 가고 피아노 연습실에도 안 간다고 한다. 듣자 하니 진급 시험 준비도 집에서 한다는데… 설마 형수가 일부러 백기 형을 피하는 걸까?
세상에, 나에게 이런 상상력이 있었다니! 황금시간대 일일드라마로 방영되면 시청률이 폭발하겠는걸!
아무튼… 나는 이 사실을 백기 형한테 알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만약 백기 형도 형수님이 자길 피한다고 생각하면 꽤 상처받을 텐데 어쩌지?
걱정이네…
비망록 제9편
꽤 오랫동안 사라졌던 백기 형이 오늘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형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니 더 걱정이 되잖아! 형은 나에게 편지 봉투를 건네주며 형수님에게 전해주라고 말했다. 편지 봉투는 반듯했지만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백기 형, 무슨 위험한 일에 손을 댔길래 이렇게 피를 흘린 거야! 형에게 병원에 가보라고 했지만 도무지 말을 듣질 않는다…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그런데 오늘은 정말로 느낌이 이상하다. 나는 왜 나에게 뒷일을 맡기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아니야! 아닐 거야!
백기 형은 다음에 날 다시 만나면 그때는 싸움의 기술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드디어!!! 형이 다치지만 않았어도 달려들어 뽀뽀를 했을 텐데! 백기 형! 너무 멋져! 형 최고야!
말하자면 백기 형도 수능은 봐야 한다. 졸업반 선배들은 요즘 슬픔에 잠겨있다. 형이 말한 다시 만날 때란 여름방학을 말하는 걸까? 헤헤, 벌써 기대된다!
백기 형이 없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이 내가 형수님 곁을 맴도는 남자들을 막아내야겠다!
이것들아, 우리 형수님에게 접근할 꿈도 꾸지 마!
비망록 마지막 편
여름방학 내내... 백기 형을 못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