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백 대장님? 도착했습니다……."
관리소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기는 차 안쪽 벽에 몸을 기댄 채 의식이 유난히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분명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무기력함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백기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이 마침내 흐릿해진 감각을 일깨웠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친 것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대원들이었다.
그중 한 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백 대장님, 먼저 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찮아."
백기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조금 전의 상태에서 벗어나 평정을 되찾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차에서 내렸다.
눈앞에는 익숙한 건물이 서 있었다.
백기는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성큼성큼 기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에게 경례했다.
그들의 눈빛은 저마다 달랐다. 누군가는 거리를 두었고, 누군가는 경외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모든 시선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백기가 최상층의 방으로 들어서자, 안에 있던 남자가 목소리를 듣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일찍 죽고 싶지 않으면 몸 상태에 좀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조금도 봐주지 않는 말투였다.
그러나 백기는 듣지 못하기라도 한 듯 자신의 용건부터 꺼냈다. 목소리가 약간 잠겨 있었다.
"제가 특파팀을 떠나기 전에 진화 캡슐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건 이미 보고받았어."
책상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읽던 서류를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던졌다.
그는 스물여덟이나 스물아홉쯤 되어 보였다. 선이 굵고 강인한 인상이었지만, 얼굴에는 전장을 누빈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태도에서도 어딘가 느긋한 기색이 묻어났다.
"지난번 생방송 사건 때문에 일이 훨씬 심각해졌어. 윗선에서 진화 캡슐 관련 임무의 등급을 최고 수준으로 올렸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기 앞으로 걸어왔다.
백기보다 키는 조금 작았지만, 기세만큼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백기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인원을 한 팀 더 지원해 주겠어. 이 일은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해."
"필요 없습니다."
백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
"이 일은 제가 혼자 조사하는 편이 더 적합합니다. 게다가 제 팀은 이미 정원이 찼습니다."
"명령이야."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줄곧 무표정하던 백기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제게는 당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남자는 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몇 초간 침묵하던 그는 아예 책상으로 돌아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어쨌든 이 조직의 핵심은 너니까. 하지만 이 일에도 정해진 기한이 있다는 건 알아 둬."
백기는 남자의 마지막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방을 나와 얼마 걷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비틀거렸다.
백기는 황급히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 전에 곧바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안정된 걸음으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복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창문을 지날 때마다 백기의 몸이 잠시 빛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의식도 조금씩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백기는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온 소녀를 떠올렸다.
그의 눈빛에 부드러운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다시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자 차가운 공기가 흐트러진 의식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백기는 또 다른 사실을 떠올렸다.
고진이 다음 차례의 실험체로서 가속 진화 캡슐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사실이었다.
02
백기가 고진과 연락이 닿은 것은 며칠이 더 지나서였다.
밤이 내려앉은 공원에는 드문드문 가로등 불빛만이 켜져 있었다.
백기가 도착했을 때 고진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그는 특파팀 제복을 입지 않은 채 평범한 사람처럼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개비가 끼워져 있었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러다 백기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평소의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고진은 손을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하필 여기서 만나자고 하면 어떡해. 누가 보고 오해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여긴 다른 사람 없어."
백기는 이런 고진의 말투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나저나 이번엔 웬일로 제시간에 왔네."
"그야 이번이 어쩌면——"
고진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손을 내저으며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건데?"
"이미 결정한 거야?"
백기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진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고진은 고개를 들어 백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소식 한번 빠르네. 이 일은 아직 기밀일 텐데."
백기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뭐,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백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말에 넘어가지 않고 다시 물었다.
"왜 이런 선택을 한 거야?"
"넌 그때 왜 특파팀을 떠났는데?"
고진은 오히려 백기의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백기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작은 불빛이 붉은 점처럼 반짝였다.
고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위험이라는 건 우리한테 가장 익숙한 일이잖아. 안 그래?"
백기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 뒤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백기는 원래 그런 일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고진이 모든 것을 너무나 잘 감추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의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곧 실험이 시작될 거야. 어쩌면 이번이 우리가 만나는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
고진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백기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쉽게 포기하겠다는 거야?"
고진은 말을 멈췄다.
그는 벤치에서 일어나 담배를 비벼 끈 뒤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니. 나한테도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게 있어."
그의 목소리에서 마침내 평소의 느긋함과 가벼움이 사라졌다.
고진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종역이든, 너든, 나든. 언젠가는 모두 이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도 좋은 일 아니겠어?"
고진은 이제 떠날 생각인 듯했다.
그가 손을 들어 백기의 어깨에 얹었다. 그러고는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괜히 감상적인 말은 하지 말자. 또 보자."
고진은 마치 백기가 무슨 감상적인 말이라도 꺼낼까 두려운 사람처럼 서둘러 공원을 떠났다.
백기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담배 끝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빛은 조금씩 타들어 가다가 마침내 사그라들었다.
작고 희미한 불빛이라도 언젠가는 어둠을 밝힐 수 있을지 모른다.
03
그 후로는 잠을 자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 버렸다.
백기는 피로가 역력한 대원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음 행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들은 가속 진화 캡슐의 행방에 관한 정보를 여러 차례 입수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서둘러 현장에 도착해 보면 이미 버려진 빈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백기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단 하나였다.
특파팀이 알 수 없는 목적으로 진화 캡슐의 위치를 계속 옮기고 있다는 것.
게다가 그들 외에도 몇몇 세력이 동시에 진화 캡슐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기지로 돌아온 백기는 대원들을 해산시키고 반드시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혼자 보고를 하러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복도에서 제복 모자를 머리에 쓰며 걸어오는 남자와 마주쳤다.
남자도 백기를 발견한 듯 모자챙을 바로잡으며 말을 걸었다.
"백기, 마침 잘 왔어. 나랑 실험실에 좀 가자."
느닷없이 실험실이라는 말을 듣자 백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는 눈앞의 남자를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남자는 백기의 시선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느긋하면서도 어딘가 경고가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진화 캡슐 조사에 새로운 진전이 있었어. 너도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싶지는 않을 텐데."
백기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의 뒤를 따랐다.
가속 진화 캡슐에 관한 정보를 하루빨리 알아내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QUEEN의 유전자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실험실에 들어서는 순간,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냉기가 백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우선 네가 먼저 보고해 봐."
남자가 돌아서서 백기를 바라보았다.
백기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곧바로 대답했다.
"저희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임무 대상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상태였습니다."
남자는 예상했다는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연구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백기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 눈빛에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탐구심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이내 연구원의 노골적인 관심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윗선과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새로운 진전이 있었습니다……."
연구원의 입에서 온갖 수치와 이론적 근거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그의 말을 끊었다.
"됐어. 결론만 말해."
"우리가 먼저 그 가속 진화 캡슐을 확보해야 합니다!"
연구원이 어지럽게 쌓인 서류 더미 위에 양손을 내리쳤다.
그의 눈에서는 비정상적일 만큼 광적인 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만 있으면 우리 연구에 엄청난 참고 자료가 될 겁니다!"
백기는 고개를 들어 연구원과 차갑게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속 진화 캡슐은 반드시 파괴해야 합니다."
"그건 귀중한 것을 함부로 낭비하는 짓입니다!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기나 합니까?"
"유전자 사슬을 파괴하고 인류의 발전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모두가 합의한 것 아닙니까!"
백기는 두 손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백기의 시선에 연구원은 다소 위축된 기색을 보였다.
그때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화면에 표시된 몇 글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가속 진화 캡슐의 '진화핵'이 확인됐어?"
백기는 반사적으로 연구원이 더 말하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
하지만 연구원은 기다렸다는 듯 그 답을 입 밖으로 내놓았다.
"여러 방면에서 확인한 결과, 이 '핵'은 QUEEN의 Evol인 것으로 확정됐습니다."
결국 그 사실이 확인되고 말았다.
백기는 책상에서 손을 거두어 몸 옆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백기는 그 모든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모든 열쇠를 한 사람의 손에 쥐여 주다니. 참으로 경솔한 방식이군."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그는 연구원의 말에 동의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남자는 백기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에 거부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이미 충분한 시간을 줬어. 그래도 일을 끝내지 못한다면 내가 직접 행동에 나서는 방안을 고려하겠어."
백기는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반박하지도, 논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결국 백기가 한 일은 단 하나였다.
낮은 목소리로 그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04
이번에도 수색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백기는 지친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한동안 숨을 고른 뒤에야 휴대전화를 꺼내 소녀에게 무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휴대전화를 집어넣기도 전에 화면에 전화가 걸려 왔다는 표시가 떴다.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백기의 눈에 의외라는 기색이 스쳤다.
"알았어."
짧은 통화를 마친 백기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태연하게 행동했다. 차를 길가에 세우게 한 뒤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뒤에서 대원 하나가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백기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전화로 고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눈빛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위기가 닥친 순간, 백기는 마침내 이 모든 일이 함정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고진에게서 그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이미 함정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함정은 '진화 캡슐'의 핵심인 소녀를 노린 것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자신을 노린 것일 수도 있었다.
찰나의 순간, 백기는 고진의 전화를 믿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화 속 고진의 말투가 분명 평소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백기는 그런 생각을 떨쳐 냈다.
려엽이 죽었을 때, 그는 어떤 전우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러나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백기는 허둥지둥 달아나는 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굳게 닫힌 문 아래로 주저앉았다.
문 너머에서는 자신을 걱정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는 입을 벌렸지만, 고통 때문에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두어 번 거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제야 겨우 평온한 목소리로 자신은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다.
백기는 갈라진 벽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바로 그때, 바람 소리 사이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갈 만큼 짧은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찰나에 백기는 결정을 내렸다.
"기다려."
굉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 백기는 남아 있는 마지막 힘까지 끌어모았다.
그는 바람을 한데 모아 문 뒤에 있던 소녀를 위험한 구역 밖으로 밀어냈다.
순식간에 하늘과 땅이 뒤흔들렸다.
온 하늘을 뒤덮은 먼지와 연기가 무너져 내리는 교사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다.
Evol의 보호를 잃은 백기는 꺼져 내려앉는 지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부서진 벽과 건물 잔해들이 사방에서 그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극심한 통증에 백기의 의식이 순간 끊어졌다.
무너진 폐허 속에서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기류는 끊임없이 찢겨 나갔다가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했다.
사방이 어두워 눈앞의 광경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백기는 가볍게 몇 차례 기침했다.
그러자 목구멍에서 피비린내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무엇에 찔렸는지도 알 수 없는 복부의 상처를 손으로 감쌌다.
상처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피와 함께 체온도, 의식도 조금씩 빠져나갔다.
아직은 정신을 잃을 때가 아니었다.
그때 몸에 지니고 있던 통신기에서 갑자기 치직거리는 소리가 몇 차례 울렸다.
곧이어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위치를 보고하십시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현재 위치를 보고하십시오."
하지만 백기는 이미 그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주위를 맴돌던 바람이 서서히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주변의 어둠과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 바람이 다시 어둠을 완전히 찢어 버렸다.
겹겹이 쌓여 있던 부서진 벽과 건물 잔해들이 한꺼번에 걷혀 나갔다.
마침내 백기의 시야에 다시 햇빛이 들어왔다.
눈앞에 비치는 빛은 여전히 흐릿했다.
백기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의 희미한 형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무사할까?
05
어둑한 방 안에 갑작스러운 방문객이 찾아오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백기는 눈앞에 서 있는 어딘가 낯선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아버지와 마주한 횟수를 모두 합쳐도, 실험을 받은 이후의 짧은 기간 동안 만난 횟수보다 적을 것 같았다.
"다음부터는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마라."
남자는 백기가 앞서 했던 행동을 단번에 '쓸데없는 일'로 규정했다.
그의 말투는 마치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다.
"네 멋대로 행동한 탓에 이곳의 책임자가 경고를 받게 될 거다."
백기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그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넌 NW에 소속된 '병기'다.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면 관련된 인원은 모두 해임시키겠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반박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남자는 갑자기 나타났을 때처럼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백기는 아버지가 사라진 방향을 몇 초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제복 외투를 집어 입고 의무실을 나섰다.
붕대로 감싼 복부의 상처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때 어떤 신념이 그를 지탱해 주지 않았다면, 본능적으로 Evol을 사용하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상은 지금보다 훨씬 심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기는 십여 시간에 걸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저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백기의 행동 때문에 책임을 떠안게 된 상급자는 그가 갑자기 사무실 문 앞에 나타나자 늘 침착하던 표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남자는 몇 차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데, 부상자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폭동 사태를 처리하기 위해 복귀를 요청합니다."
백기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밝혔다.
하지만 남자는 의외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앞에 놓인 화면을 백기 쪽으로 돌려 보여 주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현장의 최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을 마친 남자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몸 상태는 어때?"
백기는 성의라고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 그의 표정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냉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강등당할 정도는 아닙니다."
"백기, 넌 이런 '쓸데없는' 행동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해?"
남자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백기는 뜻밖의 질문에 조금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대의 눈에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확고한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것을 보고, 드물게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다른 사람에게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백기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대원들을 소집해 사고 현장으로 향했다.
헬리콥터의 회전 날개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가운데, 백기는 각지에서 전해지는 보고를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면서 선발대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휘했다.
파괴된 대교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도시의 하늘에는 화염과 검은 연기가 가득 퍼져 있었다.
백기는 헬리콥터를 고층 건물 옥상에 착륙시키도록 지시한 뒤, 위기가 발생한 현장으로 서둘러 향했다.
황혼의 빛이 하늘에 겹겹이 쌓인 구름을 불태우듯 물들이고 있었다.
백기는 통제된 거리 한가운데 서서 전화번호 하나를 눌렀다.
전화가 연결되자 그는 상대방에게 말했다.
"나머지는 너한테 맡길게."
그의 눈앞에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이 있었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경보음과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특파팀의 흰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
백기는 그곳에 서 있었다.
마치 그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장벽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