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바람이 산봉우리에서 불어와 평원을 훑고 지나갔다.
01
진 선생님은 행복한 보통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안정적인 체육 교사라는 직업이 있었고, 평범하지만 따뜻한 가정이 있었다. 가끔 혈압이 높아져 가족들의 걱정을 사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조용하고 평온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비슷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던 그는 사실 Evol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변에서 Evol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그저 생활이 평온하고 학생들이 건강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느닷없이 닥친 재앙과도 같은 ‘사냥꾼 게임’에 휘말리고 말았다.
다행히 그와 가족들은 특파팀 대원들에게 구조되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는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터무니없는 ‘게임’을 직접 겪으며 입은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눈앞에 펼쳐진,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 도시처럼.
삶의 궤도가 송두리째 뒤바뀐 가운데, 누군가는 의심하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분노했다. 누군가는 깊이 생각했고, 또 누군가는 변화를 선택했다.
반면 진 선생님은 예전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서 연모시 재건을 돕는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상처 입은 연모시를 보살피는 동안, 그 역시 마음속에 남아 있던 고통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이어 갈 수 있게 된 삶이라면,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그 도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많았다.
재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는 Evolver도 있었고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 선생님은 한 가지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절망과 비통함 앞에서는 어떤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벽을 만드는 것은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차이였다.
물론 ‘재건’이라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진 선생, 소문 들었어? 또 다른 공사 현장에서 누가 난동을 부렸다더라고.”
함께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던 친구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번에는 또 어디서 그런 뜬소문을 듣고 온 거야?”
“에이, 못 믿겠다는 표정 짓지 마. 지난번 황 씨가 일하던 현장 있잖아. 거기에 젊은 녀석 몇 명이 자꾸 기웃거렸다더라고. 그러다가 어느 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
“무슨 일인데?”
“낮에 멀쩡하게 쌓아 놓은 시멘트 구조물이 다음 날 가 보니까 전부 물렁한 진흙으로 변해 있었다는 거야!”
“그게 무슨…….”
“이 정도면 양반이지. 견 씨네 아들 동창의 장인이 담당하는 구역에서는 사람까지 다치는 사건이 벌어졌다더라!”
“방 씨, 소문만 듣고 덮어놓고 믿지 좀 마. 어디에도 그런 일이 보도된 적이 없잖아. 잘못 전해진 소문일 수도 있지.”
“이런 일은 사실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다니까. 경계해서 나쁠 건 없잖아…….”
친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진 선생님은 멀지 않은 곳에서 몇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험악했다. 게다가 그중 한 사람의 손에는 무언가가 희미한 빛을 발하며 응집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좋은 의도로 찾아온 사람들은 아니었다.
설마 저 입방정 때문에 정말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진 선생님은 바짝 긴장했다. 친구의 말대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곧바로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던 순간,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불안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02
목소리의 주인은 제법 날렵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는 수수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눈에 띄는 차림은 아니었지만, 자세만큼은 곧고 당당했다.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여 정체 모를 무리를 바라보는 그의 호박빛 눈동자는 날카로우면서도 맑고 선명했다.
“자원봉사자 등록은 저쪽에서 받는데.”
청년은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멀지 않은 곳의 등록대를 가리켰다. “아니면 심심해서 어디 몸 좀 풀 만한 곳을 찾는 거라면, 내가 상대해 줄 수도 있고. 마침 옆에 공공 농구장이 있으니까 거기서 한 게임 할까?”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목과 어깨를 가볍게 풀었다. 그러고는 양손을 깍지 낀 채 손가락을 꾹 눌러 우두둑 소리를 냈다.
아무리 봐도 농구를 하기 위한 준비 운동 같지는 않았다. 때마침 거리 모퉁이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또렷해졌고, 아무래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어때?”
청년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여유로운 태도로 몇 사람과 대치했다.
그 무리는 확실히 기세에 눌린 모양이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분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는 몹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일행과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결국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났다.
청년은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자원봉사자들 사이로 걸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별다른 봉사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빠르게 한 바퀴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점검하는 것처럼.
진 선생님과 일행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청년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떠나 버렸다.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고맙다는 인사조차 건네지 못한 참이었다.
“아, 맞다. 진 선생, 저 친구 며칠 전에도 왔었나? 우리 조에 저런 사람이 있었어?”
진 선생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이상하게도 그 청년이 몹시 낯익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디에서 본 사람인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게. 나도 자꾸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마음이라도 통한 듯, 오랜 친구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어쩌면 정말로 자원봉사자 중 한 명인데 자신이 미처 눈여겨보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조원들 모두가 그를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 청년은 외모부터 남달랐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어도 단번에 눈에 띌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이 찜찜한 느낌은 마치 ‘꽃이 봄바람 속에 피어나는 것 같아’라는 구절까지는 기억나는데, 그다음 가사가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답답해서 속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진 선생님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평소처럼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며, 배경음 삼아 텔레비전을 켰다.
“특파팀은 모든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각이 잡힌 흰색 제복. 단정하고 깔끔한 갈색 짧은 머리. 그리고 호박빛 눈동자. 화면 속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낮에 보았던 사복 차림의 청년과 겹쳐졌다.
진 선생님은 무릎을 탁 쳤다.
그 청년은 바로 현재 특파팀의 대외 대변인이었다.
그리고 한때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 백기였다.
03
사실 한때 자신의 학생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그리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다.
진 선생님은 백기를 직접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저 다른 동료 교사들이 이따금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그 학생에 관한 소문을 조금씩 들었을 뿐이었다——규칙 위반, 싸움, 소란, 금품 갈취…….지나치게 많은 부정적인 이야기 탓에 진 선생님 역시 무의식적으로 그 학생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백기가 교내 체육대회에서 여러 종목의 기록을 경신했다는 사실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장래가 기대되는 학생이었다—— 다만 문제아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것이 오랫동안 진 선생님이 백기에게 붙여 두었던 꼬리표였다.
그러던 어느 해 저녁, 그는 뜻밖에도 그 학생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날은 체육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평소보다 하교 시간이 훨씬 빨랐기 때문에, 해가 저물 무렵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진 선생님도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교실들을 돌아본 뒤 느긋하게 실내 체육관의 문을 잠갔다.
이제 운동장만 정리하면 기분 좋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집에 가서 아내의 저녁 준비를 도우며 채소를 다듬고, 딸아이의 숙제도 봐줄 생각이었다. 날씨도 좋은 날이니 저녁을 먹고 나서는 가족과 함께 산책을 나가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농구장에는 아직도 공을 튀기고 있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백기였다.
아마 혼자서 꽤 오랫동안 농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 위로 축 늘어져 있었다. 교복 외투와 책가방은 아무렇게나 한쪽에 내던져져 농구대의 그림자 속에 묻혀 있었다.
진 선생님은 다가가서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던 그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
소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에 든 농구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지만, 어딘가 기계적으로 느껴질 만큼 반복적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발산하려는 것 같기도 했고, 운동을 하면서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수많은 소문에 휩싸인 그 학생은 석양이 내려앉은 운동장에서 홀로 농구공을 튀기고 있었다. 드리블하고, 슛을 던지고, 뛰어오르고, 리바운드를 잡고, 착지한 뒤 다시 드리블하고, 또 슛을 던졌다…….
낮게 드리운 구름은 그렇지 않아도 힘없이 비치던 햇빛을 더욱 답답하게 짓눌렀다. 그 무거운 구름이 소년의 가느다란 어깨 위로 겹겹이 내려앉는 듯했다. 붉게 기운 저녁 햇살은 소년의 옅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끊임없이 달리고 뛰어오르는 움직임은 마치 소년의 말없는 외침 같았다. 그 외침은 손에 쥔 농구공을 통해 바닥에 부딪히며 메아리쳤다. 마침내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자, 기진맥진한 소년도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누운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진 선생님은 다가가 이제 학교를 비워야 할 시간이니 서둘러 돌아가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동시에 백기가 문제아라는 소문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오히려 소년에게 묻고 싶은 말들이 생겨났다.
왜 이곳에서 혼자 농구를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닌지. 혹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는지.
그러나 백기의 주위에는 외부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진 선생님은 결국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저 멀리서 소년을 지켜볼 뿐이었다. 백기는 비틀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물을 마셔 수분을 보충한 뒤에는 마지막 남은 빛에 의지해 또다시 끝날 줄 모르는 슛 연습을 시작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진 선생님이 원래 집에 돌아가려던 시간도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전기실로 향했다. 운동장의 조명을 켜기 위해서였다. 학교를 나서기 전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정문과 후문에 있는 경비 초소까지 차례로 들렀다.
그는 경비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출입문 하나를 열어 두어 달라고 부탁했다. 구태여 자세한 사정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아직 운동장에서 농구를 연습하는 학생이 있으니, 수고스럽겠지만 잘 살펴봐 달라고 가볍게 부탁했을 뿐이었다.
백기를 둘러싼 소문이 얼마나 많든, 지금 진 선생님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운동장에서 홀로 농구를 하는 아이 한 명이었다.
그리고 어른으로서 자신이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적어도 어두운 밤을 밝혀 줄 등불 하나쯤은 켜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일방적인 인연은 그날로 끝이 났다.
04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도시는 천천히 생기를 되찾으며 다시 질서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평온한 삶을 가장 평범하고 기본적인 것으로 여기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평범함’ 뒤에는 말없이 쏟아부은 수많은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사냥꾼 게임에서 특파팀 대원들에게 구조된 데 대한 고마움 때문이든, 자원봉사 활동 중 우연히 백기와 마주쳤기 때문이든, 진 선생님은 어느새 특파팀과 관련된 보도에 전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제 뉴스는 식사할 때 틀어 놓는 배경음에 불과하지 않았다. 고작 몇 줄의 짧은 기사 뒤에는 백기와 그의 동료들이 며칠 밤낮을 잠도 자지 못하고 분투한 결과가 담겨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관심을 기울일수록 사냥꾼 게임이 끝난 뒤부터 지금까지 특파팀 대원들이 얼마나 바쁘게 지냈고, 또 얼마나 많은 일을 처리해 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뉴스에서 백기에 관한 소식이 자취를 감춘 듯했다.
“진 선생,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딸이 또 수학 시험을 망쳤어? 내가 학원 하나 추천해 줄까? 옛날 동창이 운영하는 곳인데 효과가 아주 좋다더라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우리 딸 성적은 아주 좋아. 그보다 하나 물어보자. 요즘 특파팀 관련 소식이 별로 없는 것 같지 않아?”
“자네가 언제부터 시사 문제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그래? 아…… 전에 말했던 그 대변인 때문인가? 자네 학교에 다녔던 학생이라고 했지?”
“맞아.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바로 알아보지도 못했고, 그 녀석한테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거든.”
“그러고 보니 자네 말대로 요즘은 관련 뉴스가 확실히 많이 줄어든 것 같네. 게다가 특파팀 대변인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지 않았나?”
“그렇지?”
“그런데 대변인이 바뀌는 건 흔한 일이잖아? 우리가 요즘 자원봉사를 하니까 뉴스에 관심이 많아진 거지. 예전 같았으면 난 대변인이 누군지 구별도 못 했을걸.”
“아, 그런데 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소문 들었어? 얼마 전에 특파팀에서 무슨 큰 작전이 있었던 모양이야. 왕 씨가 그쪽에서 제복 입은 사람들이 여럿 급하게 대열을 맞춰 출동하는 걸 봤다더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무서운 분위기였다나 봐.”
“……방 씨.”
“응?”
“그런 근거 없는 소문 좀 그만 믿어.”
“아니, 이게 왜 근거 없는 소문이야? 옛말에도 있잖아. 사람들 눈은 못 속인다고…….”
“됐어, 됐어. 차라리 아까 말한 수학 학원 이야기나 더 해 봐.”
진 선생님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떨쳐 낼 수 없는 불안이 남아 있었다.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돌아다니는 곳이 많아졌고, 곁에는 늘 여기저기서 소식을 물어 오는 친구까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최근 연모시의 분위기가 어딘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불안 속에서 흘러갔다. 방사능, 혈액 질환…….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건들은 아직 기반조차 제대로 다지지 못한 도시를 연이어 뒤흔들었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따스한 햇살조차 이 도시에 깊이 내려앉은 그림자와 냉기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재건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무너뜨리는 데는 한순간이면 충분했다.
멀리 사는 친척 중에는 진 선생님에게 이 시끄러운 도시를 떠나 이사하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일들 때문에 그 역시 가끔씩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진심으로 이 도시를 아꼈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가족들의 안전까지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또 하루의 자원봉사 활동을 마친 뒤, 진 선생님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언제나 시끌벅적했던 공공 농구장에는 이제 공을 던지는 청년 몇 명만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텅 빈 농구장에 간간이 울려 퍼지는 공 소리는 오히려 적막함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참 대단하지 않아? 이런 상황에 밖에 나와서 농구를 하고 있다니.”
청년들이 두서없이 나누는 이야기가 진 선생님의 귓가에 흘러들어 왔다.
“요즘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것 같아. 별의별 일이 계속 터지잖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세상이라도 멸망할 줄 알겠어.”
“하아…… 특파팀 사람들은 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제대로 해결한 게 하나도 없잖아…….”
그 말을 듣자 진 선생님은 상당히 불쾌해졌다.
탁——!
농구공이 백보드의 옆 가장자리에 부딪히더니 멀리 튕겨 나갔다.
청년들이 공을 주우러 가기도 전에, 누군가가 두 손으로 공을 안정적으로 받아 냈다.
그 사람은 흰색 제복을 입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한동안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백기였다.
그는 진 선생님의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수척하고 초췌해져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에는 조금도 낙담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눈매에는 예전보다 더욱 확고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너희들 공이지.”
백기는 그렇게 말하며 다가가 농구공을 내밀었다.
청년들은 백기가 입은 제복을 보고 눈에 띄게 굳어 버렸다.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의논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결국 어색하게 몇 번 웃더니 황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 버렸다. 백기가 건네는 농구공조차 받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허둥지둥 달아나는 모습을 보자 진 선생님은 더욱더 앞으로 나서서 그 청년들을 한바탕 훈계하고 싶어졌다.
최근 특파팀에 관한 보도가 많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상대방이 친절하게 공까지 주워 주었는데,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조차 하지 못하다니.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 소문보다 훨씬 설득력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입을 열려던 순간, 진 선생님은 자신에게도 남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교사였던 자신조차 한 학생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바라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우연히 마주친 청년 몇 명을 함부로 훈계할 수 있겠는가.
정작 백기 본인은 손에 든 농구공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공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는 듯했다.
농구공이 그의 손끝에서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아갔다. 마침내 백기는 공을 안정적으로 받아 쥐었다.
백기는 가볍게 한 걸음 앞으로 달려 나갔다. 드리블하고, 몸을 돌리고, 레이업 슛을 올렸다.
슛은 예전과 다름없이 정확했다.
05
운동이란 참 신기한 것이었다.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주고, 주변의 어지러운 소음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움직임은 비슷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가장 익숙한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자신은 여전히 자신이며, 지금 이곳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백기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농구공은 그의 뜻에 순순히 따르듯, 그가 원하는 궤적을 그리며 부드럽게 골망을 통과했다. 진 선생님은 농구장 밖에 서서 그런 백기를 바라보았다.
석양 아래에서 몇 번이고 슛을 던지는 백기의 모습이 어느 순간, 그 시절의 소년과 겹쳐졌다. 여전히 무언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뒷모습에는 여전히 조금쯤 쓸쓸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진 선생님은 백기에게 다가가 말해 주고 싶었다. 그 못된 녀석들이 한 말에 화를 내도 괜찮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일들에 굳이 익숙해질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 선생님이 백기에게 묻고 싶은 말도 있었다.
그동안 한참이나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별일 없이 잘 지냈느냐고.
특파팀이 이 도시의 모든 사람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고.
그러니 부디 당신들도 반드시 몸조심하라고.
하지만 그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백기가 몇 번이고 드리블하고, 뛰어오르고, 슛을 던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지금 당장 마음속 의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백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진 선생님은 오래전 품었던 의문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답을 얻은 것 같았다. 더는 무겁지 않은 백기의 발걸음에서. 굳은 의지로 빛나는 두 눈에서.
그리고 바람을 맞아 힘차게 펄럭이는 반듯한 제복에서.
삐삐—— 삐삐——
갑작스러운 소리가 농구장에 울려 퍼졌다.
백기는 더 이상 리바운드를 잡으러 가지 않았다. 대신 귀에 걸린 이어폰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의 것이 아닌 농구공은 골대에서 떨어져 바닥에 몇 번 튀어 오르더니 데구루루 한쪽으로 굴러갔다.
“나야.”
“응. 조금 있다가 특파팀으로 갈게.”
“다른 건 일단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고 생각해.”
“…….”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백기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녀…… 그녀는 아직 몰라.”
“지금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내가 연락할게.”
백기는 고개를 조금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았다. 어느새 하늘에는 가느다란 초승달 하나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문득 자신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산들바람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멎자 백기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자신감 넘치고 날카로운 평소의 말투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속전속결로 끝내자.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 줘. 나 돌아왔다고. 곧 도착할 테니까.”
백기는 이어폰을 한 번 더 두드리고 몸을 돌려 농구장을 떠났다.
진 선생님은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백기의 모습이 석양 속에 녹아들었다. 흰색 제복마저 온통 붉은 기운이 감도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농구장으로 걸어가 허리를 숙이고 바닥에 남겨진 농구공을 주웠다. 그는 일단 이 공을 보관해 둘 생각이었다. 나중에 농구를 하던 청년들과 다시 마주칠 수 있다면 공을 돌려주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더욱 기다리고 싶은 것은 백기와 다시 만날 기회였다.
정말로 다음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때는 반드시 먼저 다가가 말을 걸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백기와 일방적으로 마주쳤던 세 번의 인연을 이야기해 줄 것이다.
그리고 함께 농구 한 게임을 하자고 청해, 백기라는 사람을 다시 한번 제대로 알아가고 싶었다.
단순히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어쩌면 이런 방식이 두 사람 모두에게 더욱 진솔하고 직접적으로 다가올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진 선생님은 조금 전 백기가 서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그는 제자리에서 농구공을 몇 번 튀긴 뒤 자세를 잡고 슛을 던졌다.
농구공은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리고 조금도 빗나가지 않은 채 정확히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