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기울어진 세월
"은행잎과 눈에 가득 찬 무지갯빛, 모두 그 시집이 풀지 못한 수수께끼다."
01
"걱정 말고 나한테 맡겨요 형!"
한예준은 중대한 임무를 맡기라도 한 듯 진지하게 핏자국으로 얼룩진 편지봉투를 집었다가 이내 걱정 어린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형, 정말로 병원에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화가 끝나기도 전, '형'이라 불린 소년은 이미 그는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은 온통 멍과 상처로 가득했고 아래턱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한예준을 힐끗 쳐다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
"나 대신 다시 베껴 써줘. 그 아이가 놀라지 않게."
한예준은 그 진지하지도 않은 얼굴로 정색하며 약속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꽤 멋져 보였다. 이건 마치 전장 속에 피어난 사랑 같았다! 뼛속부터 풍겨져 나오는 중2병의 기운!
저녁노을이 교실을 비스듬히 비출 무렵, 그는 슬그머니 편지 봉투에 적힌 여학생의 자리로 가 서랍 속에 편지를 넣었다.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는 펜을 꺼내 들어 핏자국으로 가득했던 편지에 큼지막한 두 글자를 써두었다.
편지는 내일 주인의 열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서랍 안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봉투는 붉은색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지만, 어쩐지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두 글자는 공적을 가로챈 듯 자랑스럽고 또렷하게도 봉투 위에 새겨져 있었다.
"백기"
02
첫 만남은 정말이지 위험한 상황이었다.
백기가 공 선생님을 도와 책상과 의자를 옮기던 날, 공교롭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백기가 교무실에서 나오던 순간 거침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백기는 우산을 가져가라는 공 선생님의 말씀을 못 들은 척, 곧장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그 소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골목을 지나가던 중, 그는 마치 버섯처럼 담 모퉁이에 웅크려있는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우산도 없이 다 깨진 지붕 밑에 기대어 비를 피하고 있었다.
종이 상자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백기가 호기심에 발걸음을 멈추고 보니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소녀의 옷과 머리카락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물방울이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선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종이 상자 속의 새끼 고양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새끼 고양이는 손수건을 두른 채 이따금 ‘야옹’하는 소리를 내었다. 소녀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배고프니?’
백기는 순간적으로 소녀가 자신에게 묻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소녀는 책가방에서 간식을 꺼내 조그맣게 뜯어 새끼 고양이에게 먹여주었다.
길가의 어슴푸레한 조명이 보슬비와 함께 소녀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떨어졌다. 그곳엔 백기가 전에 본 적 없었던 무지갯빛이 펼쳐져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백기는 소녀가 고개를 들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언제부터인지 골목 어귀에 서 있는 백기를 발견하고 놀라서 허둥댔다.
그의 몸에서는 빗방울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연한 색의 축축하게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드리워져 있었다. 두 사람은 몇 초간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놀란 표정은 이내 싱그럽고 따뜻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막무가내로 백기의 마음속으로 뛰어들어왔다.
백기는 초조하게 발 옆의 깡통을 찼다. 그러곤 재빨리 외투를 벗어 소녀의 머리 위에 걸쳐주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요!’
백기는 곧장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몸에 걸친 흰 셔츠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고, 옷깃 위로 반쯤 드러난 목에는 빗방울이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처럼, 소녀의 눈에는 백기의 남다른 색채가 보였다.
소녀가 이 사실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하자, 친구는 놀라서 소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너 괜찮아?’.
소녀는 의아했다.
소녀의 친구가 말했다. ‘그 성질 사납다는 선배 말이야, 이름이 백기래. 절대로 그 사람 가까이 가지 마’.
왜냐하면 그는 ‘조직 폭력배 선배’니까.
03
백기가 다시 소녀를 만났을 때는 사흘 후, 해 질 무렵이었다. 도서관을 지나가던 그는 우연히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 따라 들어갔다.
소녀는 책장 앞에서 미간을 찌푸리며 책장 맨 위에 놓인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2m가 넘는 높이. 아무리 발꿈치를 들어 올려 보아도 닿지 않아 의자를 가져와 밟고 올라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기의 손이 소녀의 머리를 가뿐히 넘어 그 책을 집더니 소녀의 손에 건네주었다.
그건 먼지로 뒤덮인 《바이런 시집》이었다. 백기는 속으로 조용히 외웠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작은 재빨랐고 일사천리로 끝났다.
석양이 창문을 꿰뚫고 들어와 가지런히 세워진 책장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누렇게 색이 바랜 책들은 잉크향을 풍겼고, 공기 중에 떠 있는 먼지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혼합되어 남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소녀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역광 속에서 손 한쪽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입꼬리를 올리고 서 있는 백기가 있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수십 번 연습했던 대사를 꺼내기도 전, 소녀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선 재빨리 자리를 떴다.
얼마 후, 한예준이 신이 나서 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형. 내가 형 대신 다 알아봤어요. 그 아이는 매일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자습해요! 아, 자리도 항상 같은 곳이에요. 어딘지도 다 그려놨어요!'
햇볕이 한예준이 그에게 건넨 종이 위로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백기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기분이 스쳤다.
그는 소녀와 멀리 떨어진 구석에 앉아서 예전에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아니, 아주 싫어했던 교과서를 조용히 펼쳤다. 소녀는 매일 오후 5시가 되면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떠났다. 가는 길에 익숙한 친구를 만나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백기는 책가방을 메고 두 손으로 뒤통수를 받친 채 그녀와 십여 미터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갔다.
때때로 한예준도 그를 따라갔다. 가끔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백기의 눈치를 보고 다시 조용해지면서 말했다.
'백기 형, 형은 진짜 멋있어요. 묵묵히 공주를 지켜주는 기사 같달까요?'
백기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담담하게 한예준을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
04
10월 말이 되면 이 도시는 낮은 짧고 밤이 길어진다.
날씨도 함께 추워진다. 특히 비가 오거나 산 너머로 해가 지면,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서 하루 동안 두 개의 계절을 체감할 정도다.
곁에 있던 한예준이 추워서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재채기를 한 후,
백기는 인도 한편에서 서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두 손을 모아 호호 입김을 불어 넣고 있었다.
소녀는 추위에 코가 빨개졌지만 뽀얀 피부색과 더불어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예뻤다.
백기는 옆에 있는 한예준에게 말했다.
'너, 가서 쟤한테 따뜻한 음료수 하나 사다 줘.'
한예준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네…?'
백기는 여전히 담담한 말투였다.
'날씨가 춥잖아. …그리고, 내가 줬다고는 말하지 마.'
한예준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왜…’라는 말을 삼켰다.
그는 백기 형이 또 형수님을 화나게 만들어 직접 사과를 건네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한예준은 음료를 건네며 깍듯하게 인사했고, 소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한예준을 바라보았다.
우연히 만난 횟수가 많아선지 소녀도 모퉁이나 창가 같은 곳에서 백기를 볼 수 있음을 주의 깊게 느끼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때때로 그의 앞에는 교과서나 문제집, 혹은 과외책 같은 여러 가지 책들이 놓여있었다.
하지만 그는 늘 두어 페이지만 넘기고 내려놓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잠을 자고 있었다. 소녀가 자세히 보니 그는 뜻밖에도 <바이런 시집>을 베고 있었다.
연습실에서 그녀가 악기를 조율할 때면 그가 입은 흰 셔츠의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춤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조금씩, 그가 '조직 폭력배'라는 소문이 있긴 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매점에서 마주칠 때면 그는 마지막 남은 물 한 병을 그녀에게 건넸고 책장 위 손이 닿지 않는 책을 대신 집어주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때도 그는 항상 차가운 표정이긴 했지만.
그녀는 백기와 마주칠 때면 미소를 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하게 입술을 아주 살짝 올린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눈이 반달이 되도록 방긋 웃었다.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의 미소가 곤경에 처한 백기가 마주한 가장 큰 따뜻함이라는 것을.
그러다 어느 날 소녀는 어느 골목에서 소문과 똑같은 백기를 보게 되었다.
05
졸업시즌이 시작될 무렵. 졸업식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짧은 몇 마디 말로 백기가 특수훈련에 참여하길 바란다는 생각을 전달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에게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너에게 정녕 그러한 능력이 있느냐?’
‘백기야, 그 아이도 너처럼 특별하단다. 그 애는 평범하게 살지 못할 운명이야. 지금의 너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스스로 잘 생각해보거라.’
소녀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눈빛 속에 들어있던 놀라움과 경악함이 떠오르자 백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시절은 백기의 일생 중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 과정을 거치며 그는 이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가졌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그가 짧은 순간의 자유를 얻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곰돌이 생각해봐도 무엇을 써야 할지, 쓰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 비 오는 날의 첫 만남부터, 대체 어디서부터 소녀와 멀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하지만 결국——
그는 이름, 시간, 장소밖에 적지 못했다.
'토요일 오전 9시, 학교 도서관에서 널 기다릴게.'
'백기.'
마침 주말이어서 학교는 텅 빈 듯했다. 가끔 자전거나 전동 킥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바람이 여름의 기류와 교차하며 더욱이 청량하게 느껴졌다.
백기는 얼마가 지났는지도 모른 채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토요일 오전 9시'는 벌써 14시간이 지나있었다. 태양이 솟아날 때부터 별이 수놓아질 때까지의 시간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몇 번이나 빈 도서관을 돌며 부드러운 별빛이 창문을 애써 벗어나 비스듬히 책상 위로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자신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그 <바이런 시집>을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노랗게 시든 은행잎을 조심스럽게 책 안에 끼워 넣었다. 문득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는 몸을 일으켜 마지막으로 도서관 출입 카드를 긁고, 카드는 관리자에 둔 후 밤의 장막을 향해 걸어갔다. 청춘의 흔적이 남은 추억의 장소에서, 영원히 기울어져 버린 시절 속에서… 빠져나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