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남자
저쪽 경치가 괜찮아 보이는데, 한번 가볼까요?
여자
좋아요~
눈부신 햇살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진 두 사람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가, 하나로 겹쳐진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낭만적인 화음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지만,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멍하고 굳은 표정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일동
음……
모두가 화면에 재생되는 촬영본을 바라보며 함께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유영
이상하네. 분명 다들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인데. 혹시 몰라서 예비 대본까지 따로 준비해 뒀잖아요……
유영
그런데 왜 둘 사이에 아무런 설렘도 안 느껴지는 걸까요?
연출 A
현장에서 봤을 때는 분명 괜찮았는데……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 역시 고민스러운 마음에 턱을 괴었다.
유연
이대로는 확실히 안 되겠어요. 출연자들끼리 좀 더 시간을 보내면서 감정을 쌓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제작 담당
시간은 좀 더 낼 수 있어요. 어차피 촬영 장소도 저희가 직접 꾸민 곳이니까요. 다만 장소 대관료나 장비 문제는 고려해야 해요.
연출 B
뭐라고 해야 하지……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미묘하게 얽히는 느낌이 없어요. 보는 사람까지 끌어당기는 그런 묘한 설렘이랄까.
한예준
아, 뭔지 알아요! 눈빛이 막 서로 끈적하게 이어지는 거! 불꽃이 튀는 느낌 있잖아요! 한국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배경음악이 쫙 깔리는 그런 순간이요!
연출 A
QAQ 사실 저희도 음악은 충분히 깔았는데……
일동
출연자들은 일반인이잖아요!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아니라구요!
연출 C
그런데 저희 프로그램은 일반인 연애 관찰 예능이잖아요. 사실 그런 게 꼭 없어도 되지 않을까요?
고은
하지만 재미없어서는 안 되죠.
일동
……
결국 회의에서는 일단 일반인 출연자들이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하고, 그동안 좋은 장면을 더 찾아보자는 임시 방안이 나왔다.
동시에 각자 다른 해결책도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백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백기
난 이쪽 일 끝났어. 아직 퇴근 안 했지? 조금 있다가 데리러 갈게.
유연
좋아요. 저도 오늘은 야근 안 하려고요.
유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안 떠올라서……
백기
너무 조급해하지 마. 언젠가는 생각날 거야. 그럼 이따 봐.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을 계산해 평소보다 조금 일찍 건물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모두가 이야기했던 그 '불꽃'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곱씹으며 백기를 기다렸다.
주황빛 석양이 멀리 늘어선 건물 끝자락에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너머로는 옅고 흐릿한 분홍빛 노을이 번져 나왔다.
노을빛은 구름으로 짠 얇은 비단처럼 아직 푸른빛이 가시지 않은 하늘 아래에서 구름과 서로 뒤엉켰다.
분홍빛과 주황빛, 푸른빛과 남빛이 어우러져 저물어 가는 하루를 위한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는 듯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물결처럼 오가고 있었다.
얼굴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노을빛을 걸친 채 바삐 걸어가거나 느긋하게 지나갔다.
멀리서는 붉은 신호등이 석양 속에서 끊임없이 반짝였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량들도 서서히 내려앉는 밤빛에 물들어, 윤곽이 흐릿한 작은 점들로 변해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작은 검은 점 하나가 있었다.
그는 헬멧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흐릿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하게도 그 사람만이 마지막으로 남은 석양빛을 모조리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역시 나를 발견했는지, 멀리서 헬멧의 바이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내게 멋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로 그 순간, 맑고 아름다운 불꽃 하나가 갑자기 피어오른 것 같았다.
마치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진 것처럼.
2장
백기
촬영본이 별로였어?
백기
……눈빛이 끈적하게 이어지는 느낌? 불꽃?
서서히 내려앉는 밤빛을 가르며 블랙이가 우리 둘을 태우고 느긋하게 달려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설명을 들은 백기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목소리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의아함이 묻어났다.
유연
맞아요. 굉장히 추상적인 느낌이죠.
유연
오후에 촬영본을 확인하는데 분위기가 전혀 안 살아서, 보는 재미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백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백기
그런데 분위기가 안 산다는 건 서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 아니야? 둘이 잘 안 맞는 거겠지.
유연
그렇긴 하죠. 하지만 처음에 일반인 출연자를 모집할 때부터 좋아하는 이성의 유형이나 취향 같은 걸 전부 적게 했거든요.
유연
그래서 뽑힌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의 이상형에 잘 맞는 편이에요. 다들 예쁘고 잘생기기도 했고요.
유연
게다가 촬영할 때도 다들 카메라에 잘 나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서로 교류하거나 함께 행동하는 장면도 꽤 많고요.
생각할수록 답답해진 나는 고개를 들어 시야 속을 구름처럼 흘러가는 빛과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유연
그런데도 영상에서는 아무런 느낌이 안 나요. 보는 재미도 없고, 누가 누구랑 이어질지 궁금하지도 않고요.
백기
꼭 이어져야 해?
유연
저희 프로그램은 일반인 연애 관찰 예능이잖아요. 아무도 안 이어질 수는 없지 않을까요?
백기
그런데 지금 얘기를 들어보면 억지로 이어주려는 것 같은데.
유연
……지금은 억지로 이어주려고 해도 안 될까 봐 걱정이에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백기는 어느새 아파트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잠금장치를 채운 뒤에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는 아파트 입구로 걸어갔다.
백기
넌 어떤 느낌을 원하는 건데?
유연
음……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에게 호감이 있을 때 눈빛이 묘하게 이어지는 그런 느낌이요……
유연
두 사람 사이에 작고 보이지 않는 불씨가 맴도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계속 지켜보고 싶어지는 그런 거 있잖아요.
백기
방송에 나오는 것도 참 쉽지 않네.
유연
그래도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아닌가요?
어쩐지 나도 그런 장면을 자주 봤던 것 같은데.
나는 주변에서 썸을 타던 연인들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 백기가 이끄는 대로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내렸다.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시선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백기의 몸에는 아직 여름의 열기가 조금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열고 얼음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얼음이 유리잔 안으로 떨어지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투명한 유리잔의 차가운 기운이 그의 손가락 끝에 닿아 희미하게 서늘한 흰빛을 띠었다.
백기가 물을 마시는 동안, 관자놀이에 맺혀 있던 땀방울 하나가 턱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살짝 뒤로 젖혀진 목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며 움직이는 목울대를 지나갔다.
내가 너무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땀방울 하나가 다른 땀방울과 만나 스며드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나지막하게 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자, 이상하게도 내 목까지 조금 마르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했다.
백기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여전히 이런 모습 하나에 정신을 빼앗기다니.
그저 매력적이고 멋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내 빈약한 자제력을 탓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백기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
그 역시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알아챈 듯, 내 시선을 똑바로 붙잡았다.
조금 전 퇴근하는 나를 데리러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노골적이면서도 무언가를 빼앗아 가려는 듯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맑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는 은은한 조명 아래 반쯤 가려져 있었고, 그 속에도 어쩐지 묘한 색기가 어려 있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뒤통수가 찌릿찌릿 저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기가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살짝 숙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코앞에 있는 것처럼 가까운 내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방금 그가 삼킨 얼음물의 서늘한 기운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냉기는 곧 한층 뜨거운 열기에 뒤덮여, 두 사람 사이에 묘하고도 야릇한 숨결로 뒤엉켰다.
나는 몰래 한 걸음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허리 뒤로 둘러진 팔은 이미 내 속셈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백기는 단숨에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서로의 코끝이 맞닿았다.
거의 닿을 듯 가까워진 입술 사이로 같은 숨결이 오갔다.
그토록 짙은 시선에 사로잡혀 있자니, 백기는 분명 입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이미 온몸 구석구석에 입맞춤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연
……항복. 백 경관님, 항복할게요.
백기
그냥 바라보기만 했는데 무슨 항복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백기는 오히려 짓궂게 더욱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숨결과 함께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은근히 정신이 아찔해졌다.
유연
……평소에는 이런 눈으로 안 보잖아요.
그 말이 오히려 백기의 흥미를 더욱 자극한 듯했다.
그는 까치발을 들고 있던 내 발을 아예 바닥에서 떼어놓듯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덕분에 우리의 시선이 완전히 같은 높이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백기
그럼 똑똑히 봐둬.
백기
난 매일 널 이런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
3장
백기는 언제나 말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아주 오랫동안 자신을 '똑똑히' 바라보게 했고, 거의 한순간도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나는 그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온통 얽혀 들었고, 그가 피워낸 '불꽃'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유연
선배 때문에 오히려 더 어려워질 것 같은데요……
옆에서 느긋하게 누워 있는 장본인을 바라보다가, 나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꼬집었다.
백기
내가 아주 잘했다는 뜻인가 보네.
유연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몸을 돌려 그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내게 익숙한 그 모든 설레는 분위기가 사실은 이 눈동자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몹시 궁금한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유연
백기, 만약 우리 생활에도 일반인 연애 예능처럼 카메라가 잔뜩 설치되어 있다면 어떤 모습들이 찍힐까요?
백기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이라면 뭐든 괜찮아.
유연
정말 어떤 모습이든 괜찮아요?
느긋하게 풀려 있던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한층 솔직한 미소가 떠올랐다.
백기
좋아. 사실 나도 좀 궁금하긴 하네.
다음 날, 나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일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었지만, 일상 속에서 백기와 우리 사이의 재미있는 모습들을 찾아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았다.
어차피 프로그램 제작은 막혀 있었고, 당장은 마땅한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장비 보관실에서 카메라 몇 대와 고프로를 빌려 집 안 곳곳에 설치했다.
처음에는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이 계속 신경 쓰여서, 가끔은 어색하게 카메라 쪽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백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를 다시 일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눈동자와 입맞춤 속으로 데려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점차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집 안에 크고 작은 전자기기가 몇 개 더 생겼을 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열흘 남짓 지난 뒤, 새로 촬영한 프로그램의 한 회차 가편집본을 확인하고 나서 백기와 나의 일상을 담은 영상들도 골라냈다.
유연
좀 천천히 해요. 저는 아직 제 쪽의 4분의 1도 다 못 맞췄는데——
백기
시합하기로 했잖아. 봐주는 건 없어.
거실에서 백기는 웃으며 마지막 퍼즐 조각을 제자리에 끼워 넣었다.
반듯하게 완성된 그의 부분과 비교하니 내 쪽은 유난히 어수선해 보였다.
유연
아, 치사해!
백기는 웃고 있는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내 어깨에 턱을 얹고는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백기
그럼 이제 이 치사한 사람이 네가 퍼즐 맞추는 거 구경해야겠네.
유연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더 못 찾잖아요!
유연
응? 벌써 집에 도착했어요?
어두컴컴한 거실을 비추는 영상 속에서 나는 백기의 등에 업혀 있었다.
나는 그의 목을 감싼 팔에 느긋하게 힘을 주며 조금 더 매달렸다.
유연
너무 편하다. 선배랑 조금만 더 걷고 싶은데……
백기
괜찮아. 아직 집에 안 왔어. 조금 더 걸을 수 있어.
그러자 어둠 속에서 백기가 나를 업은 채 거실을 천천히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보였다.
수없이 많은 일상의 조각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떤 날에는 소파에 나란히 파묻혀 각자 책을 읽었고, 어떤 날에는 주방에서 평소에 만들지 않던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기도 했다.
늦은 밤이면 백기는 창틀을 넘어와 느긋하게 깊은 잠에 빠진 내 꿈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침이면 그가 드물게 늦잠을 부리는 틈에 내가 살며시 몸을 일으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런 일상은 너무나 사소하고 평범했다.
마치 우리가 함께하는 모든 순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서, 특별할 것 없이 단순하고 평범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 속에서 나는 언제나 서로를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용하고, 말없이,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향하는 시선들.
백기가 틈틈이 나를 바라보는 것보다 더 놀라웠던 건, 나 역시 그토록 여러 번 눈으로 그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피곤해서 고개를 들었을 때일 수도 있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해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순간일 수도 있었다.
심지어 나 자신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순간에 나는 백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깊고도 자연스러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모든 말들이 그 안에 적혀 있는 듯했다.
영상 속에서 백기는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영상을 끄려 했지만, 바로 다음 순간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백기
내가 키스할 때 너 이런 표정도 짓는구나.
백기
다음부터는 눈 안 감아야겠어. 그동안 다 놓쳤네.
유연
일부러 그러는 거죠!
백기는 짓궂고도 당당하게 웃으며 나를 품에 완전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영상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눈가와 눈썹에 입을 맞췄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서로를 더욱 깊이 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조차 우리 사이의 열정을 조금도 식히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붉힌 채 남은 영상들을 서둘러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묵직하고도 든든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유연
백기, 이렇게 보니까 우리 정말 오랫동안 함께했네요.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더욱 꼭 끌어안는 팔이 또 하나의 말없는 대답처럼 느껴졌다.
우리 사이에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일상과 습관들이 우리를 빈틈없이 맞물리게 했다——
그렇게 '좋아한다'는 마음과 '사랑한다'는 감정이 우리의 일상 속에 새겨져 있었다.
4장
결국 나는 지금까지 촬영한 분량을 전부 폐기하고 출연자를 새로 뽑기로 결정했다.
예능 프로그램인 만큼 어느 정도 방송적인 재미가 필요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이든,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이든——
그 과정에서 조금 더 진실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저녁 무렵, 회의를 마친 나는 촬영을 위해 꾸며 놓은 집을 다시 찾았다. 내부 공간을 새롭게 꾸밀 필요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촬영이 잠시 중단되면서 늘 사람들로 북적이던 공간도 모처럼 조용해졌다. 따뜻한 노란빛 조명이 밤의 풍경을 부드러운 온기로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새 창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방 안에 서서 이전에 출연자들이 이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얼굴이 점차 흐릿해지더니, 마침내 익숙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연인이 되기 전의 백기와 그 시절의 내가 이곳에 있었다면, 그는 내게 어떤 말을 했을까?
아마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신구와 선물을 신중하게 고르고, 가장 예쁜 꽃다발도 하나 골랐을 것이다.
내가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살짝 눈을 내리깔지도 모른다. 귓가가 매력적인 붉은빛으로 물들겠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는 다시 나를 똑바로 바라볼 것이다.
백기
크흠……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
백기
내 것도 하나 골라줄래?
백기
마음에 들어?
때로는 나지막하게, 때로는 조금 강한 어조로 말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이런저런 상상들이 마치 빗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작고 찬란한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피워냈다.
그리고 그 모든 상상 속에서 백기의 시선은 언제나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백기는 나를 좋아할 거야'라는 확신은 어느새 내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되어 있었다.
백기는 수없이 많은 순간에 내게 말해주고, 또 거듭 확인시켜 주었다.
오래도록, 변함없이, 영원히.
그러고 보면 사람은 왜 서로를 좋아하게 되는 걸까?
나는 혼잣말처럼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지금의 우리에게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득, 빗소리에 묻혀 문밖에서 희미하게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해진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빗물에 푹 젖어 흐물흐물해진 종이 상자 하나가 놓여 있는 듯했다.
소리가 그쪽에서 나는 것 같아 황급히 우산을 쓰고 다가갔다.
그런데 상자 안에는 온몸이 흠뻑 젖은 강아지 두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녀석들은 손바닥만 한 크기였고,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상태였다. 작고 여린 몸을 끊임없이 떨면서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기대어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우리 머리 위로 우산을 받쳐 들었다.
내가 다가온 것을 알아챘는지, 분홍빛 작은 앞발 하나가 허공으로 들려 올라왔다. 목에서는 가느다란 낑낑거림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유연
……세상에, 누가 너희를 이런 곳에 버린 거야……
걱정과 함께 화가 치밀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뿐이었다.
집 안에는 장비와 전선이 많았고, 곳곳에 촬영용 소품도 배치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비를 맞아가며 간신히 상자를 집 옆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좁은 처마로는 비를 완전히 막아줄 수 없어, 우선 강아지들 머리 위에 우산을 받쳐 두었다.
유연
얘들아, 얌전히 있어야 해. 조금만 기다려 줘.
나는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새 수건 몇 장을 꺼냈다.
그리고 강아지들의 몸을 최대한 말려준 뒤, 새 수건으로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유연
조금만 참아줘. 이따가 단톡방에 물어보고 너희를 데려갈 사람이 있는지 알아볼게.
유연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응?
강아지들은 내 말을 모두 알아들은 것처럼 얌전히 있었다.
두 마리 모두 수건 속에 편안하게 웅크린 채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동안 내가 비를 맞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그러고도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해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강아지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시야 한쪽에 누군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나는 그 사람이 백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백기는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손에는 접이식 우산 하나를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내게 우산을 가져다주려고 급하게 달려왔으면서, 정작 자신은 우산을 쓰기 귀찮아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생각하니 왠지 바보 같아서, 나는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고, 바닥에는 잘게 부서진 빛을 머금은 물꽃들이 피어났다.
빗속에서 백기가 조용히 내 앞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눈앞에 조금 더 풋풋했던 시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다만 이번에는 당황한 듯 겉옷을 벗어놓고 달아나는 대신, 내 손을 잡아주었다.
백기
만약 지금이 우리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라 해도, 난 이 순간부터 널 좋아하게 됐을 거야.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터지는 소리가 지금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꼭 닮아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유연
……왜요?
백기
몰라. 이유는 없어.
어쩐지 막무가내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기꺼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백기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네가 내 운명에 나타난 순간이기 때문이겠지.
그게 새끼 고양이든 강아지든 상관없었다.
그때의 내가 열여덟 살이든 스물네 살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향해 미소 짓는 모든 순간,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주하는 모든 순간마다 내 마음은 통제를 벗어나, 마침내 내려앉고 싶은 곳을 찾았다.
우리 주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점점 좁아져 오직 백기와 나,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았다.
유연
그럼 그때도 제게 겉옷을 벗어주고, 비를 피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백기가 살며시 웃는 모습이 보였다.
호박색 눈동자에 아름다운 빛의 조각들이 반짝이며 흘렀고, 그 안에 내 모습이 온전히 담겼다.
백기
지금의 나라면 다른 방법으로 널 비에서 지켜줄 거야.

대답 대신 뜨거운 입맞춤이 순식간에 내려앉아 내 숨결을 모조리 앗아갔다.
세상은 흐릿하고 뜨거웠다.
백기는 비를 대신해 나를 온전히 감싸 안았지만, 동시에 나를 흠뻑 적시는 또 하나의 폭우가 되었다.
거침없이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파고들어, 구석구석 자신의 숨결과 흔적을 남겼다.
그의 자유분방하고 길들지 않은 영혼은 한 번도 온순해진 적이 없었다.
다만 언제 다가가야 할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을 뿐이었다.
유연
선배는 처음 만난 여자한테도 이렇게 키스할 거예요?
백기
너라면 그러고 싶어.
백기
오직 너뿐일 테니까, 그러고 싶은 거야.
낮고도 솔직한 말에는 숨김없는 욕망이 섞여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웃음마저 그의 숨결 속으로 삼켜졌다.
유연
그러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이미 키스하고 있잖아요.
백기
네가 허락해 줬으니까.
네 삶에 들어갈 수 있도록, 네 아름다움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네게 사랑을 바라며 다가갈 수 있도록.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빗방울이 터져 나오는 소리가 온 세상에 남은 유일한 소리처럼 울려 퍼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백기의 입맞춤이 점점 깊어지자, 나도 참지 못하고 까치발을 들어 그 거침없는 기쁨에 화답하고 싶어졌다.
유연
만약 지금이 우리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라면…… 저도 선배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유연
저도 선배 손을 꼭 잡고 싶어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요.
내 말은 입맞춤 속에 담겨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백기의 팔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층 더 거침없이 자신의 마음을 전해오는 것도.
모든 것이 낭만적이면서도 강렬했다.
마치 바람 같았고, 또 백기 같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백기는 우리를 가리고 있던 후드의 앞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백기와 함께, 그에게 속한 이 빗속에 온전히 잠겨 있고 싶었다.
백기
그럼 이제 우리 사랑이 시작된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