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지하 통로의 조명이 깜빡이며 창고의 음산하고 차가운 윤곽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철문에 바짝 붙어 선 채 뒤에 있는 경찰관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소리 없이 숫자를 세며 손가락 세 개를 차례로 접었다. 마침내 주먹을 쥐는 순간, 경찰관 몇 명이 쾅 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문을 들이받아 열었다.
경찰관
전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다급한 발소리와 호령이 어두컴컴한 창고 안으로 밀려들었다.
나도 경찰관들을 따라 재빨리 안으로 뛰어들어 권총을 단단히 쥐고 정면을 겨눴다.
창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경찰이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깐의 혼란과 욕설이 오간 뒤, 그들은 마지못해 몽둥이를 휘둘러 저항하려던 행동을 멈췄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의 얼굴을 훑으며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유연
너희 두목도 여기 있지? 무기 내려놓고 나와!
몇 초 뒤, 카운터 뒤편에서 두 손이 불쑥 올라왔다.
허리가 구부정한 남자가 엄폐물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는 그의 음침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정보가 틀리지 않았다면, 이 남자가 바로 백기와 내가 수락한 【평화의 사자】 임무의 표적——비엔토(Viento)였다.
게임을 시작한 지 겨우 2주가 지났을 무렵, 나와 백기는 벌써 여러 업적을 달성했고, 시스템 포인트를 모아 최상층에 있는 호화 아파트까지 교환해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서 밖 게시판을 지나던 나는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수배 전단에 무심코 시선을 빼앗겼다.
유연
일, 십, 백, 천…… 백만?!
유연
선배, 이것 좀 봐요! 이 사람한테 걸린 현상금이 이렇게나 많아요!
백기는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생각에 잠긴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백기
무장 강도에 연쇄 범행까지…… 확실히 죄질이 아주 나쁘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아래쪽 내용을 두어 줄 더 읽었다. 그러다 문득 눈빛에 흥미가 어렸다.
백기
이 사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유연
네?
백기
지난 세기에 일어난 도로 연쇄 강도 사건이 원형이야. 제작진이 그 사건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썼네.
백기
당시에는 수사 과정이 꽤 까다로웠어. 그래도 나라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은데.
백기는 수배 전단을 톡톡 두드렸다. 입가에는 당장이라도 도전해 보고 싶어 하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유연
백 경관님, 지금 관심을 두는 부분이 좀 엉뚱한 거 아니에요?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귓가에 익숙한 시스템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시스템
특수 임무 【평화의 사자】가 발동되었습니다.
시스템
임무 내용: '3개월 이내에 거리의 모든 갱단 세력을 소탕할 것.' 수락하시겠습니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임무 창을 보며 나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표시된 푸짐한 임무 보상을 보자 마음이 솔깃해졌다.
옆에 있던 백기도 임무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백기
해보고 싶어?
유연
조금 끌리긴 하는데……
유연
그래도 꽤 복잡한 임무 같아요. 어쩌면 엄청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요?
백기는 가볍게 웃으며 임무 창을 닫았다.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백기
얼마나 복잡하든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어.
백기
게다가 네가 옆에서 지켜봐 주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기와 함께 경찰서의 신입 등록처로 향했고, 우리는 서로 다른 작전팀에 배치되었다.
갑자기 백기와 동료 경찰관이 되었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함이 있었다.
예전에 학교에 다닐 때면 운동장에서 상급생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가끔 보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언젠가 백기와 나란히 대열에 서서 함께 현장으로 달려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야 그의 평소 세계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그가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복귀하던 날들이나 이따금 몸에 상처를 입고 돌아오던 순간들 뒤에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들이 있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백기와 오랫동안 쌓아온 호흡 덕분에 나는 새로운 신분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몇 주 동안 임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는 벌써 임무 보상을 받으면 백기와 어디로 놀러 가서 여유를 즐길지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경찰서의 작전 회의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이름이 갑자기 나타났다.
——비엔토(Viento).
마치 일부러 임무의 난도를 높이려고 나타난 것 같았다.
이미 소탕한 구역의 세력권에는 새로운 주인이 들어섰고, 한창 추적 중이던 불법 거래도 검거 직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중단되었다.
결국 나와 백기는 커피를 들고 사무실 지도 앞으로 모여 비엔토의 이동 경로를 몇 번이고 다시 추론해야 했다.
하지만 연이어 진행된 체포 작전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천천히 걸어 나오는 남자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왼쪽 다리를 미세하게 멈칫거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무의식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보원이 비엔토는 몸놀림이 매우 날렵하고, 움직이는 속도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빠르다고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유연
……! 너 비엔토 아니지! 그 사람 어디 있어?!
마치 내 외침에 반응하기라도 한 듯 창고 천장에 매달린 전등이 갑자기 산산조각 났다.
시야가 어두워지는 순간, 통로 쪽으로 날씬한 그림자 하나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다급히 두어 걸음 뒤쫓다가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유연
……백기, 비엔토가 뒷문 쪽으로 도망치고 있어요!
하지만 무전기에서는 다급하게 지직거리는 잡음만 들려왔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유연
조심해요! 정면 출입구는 이미 봉쇄했으니까, 분명 선배가 있는 통로로 갈 거예요!
몇 차례 희미한 잡음이 들린 뒤, 마침내 백기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백기
확인했어. 하지만 이쪽에는 누가 지나간 흔적도 없어.
백기
……뭐지? 설마 사람이 허공에서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건가?
유연
하지만 방금 창고 불이 꺼졌을 때 분명 그림자 하나가 통로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요.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고요……
백기
알겠어. 넌 입구를 지키고 있어. 난 뒷문 바깥쪽을 따라 수색할게.
무전기가 몇 번 더 지직거리더니, 마침내 벽에 설치된 비상등이 다시 켜졌다.
나는 무전기를 집어넣고 동료들과 함께 남자를 창고 밖으로 연행했다.
그러다 몸을 돌렸을 때, 통로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조명이 백기의 길고 곧은 실루엣을 따라 스쳐 지나갔다.
그는 한 손으로 권총을 허리춤에 집어넣고 있었고, 눈매에는 아직 차갑고 날카로운 기색이 남아 있었다.
백기는 어지럽혀진 창고 너머로 나를 발견하고서야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 분해.
정말로 그 비엔토를 놓쳐버렸다.
2장
경찰서 구내식당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했다. 식판이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나는 시큰둥하게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창고에서 있었던 일이 맴돌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네. 그 비엔토는 대체 어떻게 도망친 걸까……
다른 출구가 있었다면 나중에 현장을 수색할 때 발견했어야 하는데.
게다가 체포해 온 그 중년 남자도 문제였다. 경찰서에서는 내가 속한 작전팀에 심문을 맡겼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아아, 정말 모르겠어! 으으, 이 게임 임무는 난도가 너무 높은 거 아니야?
그때 갑자기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따뜻한 숨결도 느껴졌다.
눈을 깜빡이며 옆을 바라보니, 갈색 머리 하나가 내가 들고 있던 감자튀김을 입에 물고 '강탈'해 가고 있었다.
유연
와! 이 감자튀김 도둑!
백기
이왕 이렇게 된 거, 감자튀김만이 아니라 그 갱단 두목 사건도 내가 전부 빼앗아 올까 봐.
백기
네가 매일 그놈 생각만 하지 않게.
백기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었다. 표정은 이미 승리를 확신한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유연
그럴 리가요—— 저는 백 경관님이랑 놀러 온 거잖아요. 그동안 선배한테 배운 실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싶을 뿐이라니까요.
유연
게다가 선배도 맡은 임무가 엄청 많으면서! 누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해요!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감자튀김 하나로 그의 입술을 콕 찔렀다.
그러자 백기가 냉큼 입으로 물어버렸다.
백기
후회되네.
유연
임무 수락한 게 후회돼요?
백기
그냥 내가 임무를 전부 맡을걸 그랬어. 넌 나하고만 놀게 하고.
유연
그럼 제가 당장 비엔토를 잡아 와서 선배한테 제대로 사과하게 만들게요!
백기
난 그놈 필요 없어. 너만 있으면 돼.
백기는 웃으며 내 감자튀김을 전부 가져갔다.
나는 웃기면서도 얄미운 마음에 그의 몸으로 달려들었고, 그러자 이번에는 백기가 감자튀김으로 내 뺨을 콕콕 찔렀다.
백기
그렇게 골치 아파?
나는 가볍게 흥 하고 콧소리를 낸 뒤 감자튀김을 받아먹었다.
그러자 잔뜩 긴장했던 마음도 조금 풀려서, 나도 모르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유연
당연하죠…… 임무 진행이 얼마나 오랫동안 막혀 있었는데요!
유연
겨우 부하 하나를 잡아 왔더니 입까지 그렇게 무겁지 뭐예요. 뭘 물어봐도 모른다, 본 적 없다…… 이젠 그 사람 대답을 통째로 외울 지경이에요.
유연
특파팀이었다면 저 사람들도 감히 저렇게 뻔뻔하게 굴지 못했을 텐데.
백기
특파팀에서도 저런 놈들이랑 머리싸움을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야.
백기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호박색 눈동자에 웃음기가 일렁였다.
백기
지금은 기술이 더 발전했으니까, 놈들을 상대할 수 있는 수사 방법과 수단이 많아졌을 뿐이지.
백기
하지만 어느 시대든 범죄자도 결국 사람이야.
백기
사람인 이상 반드시 약점도 있고, 파고들 틈도 있어.
백기
심리적인 방어선은 분명히 존재해. 넌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돼.
백기는 손에 든 탄산음료 캔을 천천히 돌리며 미소 지었다.
유연
선배, 굉장히 즐거워 보이네요.
백기
예전에는 지금처럼 좋은 기술이 없었잖아. 많은 선배 경찰관들이 오직 두 발과 두 손으로 뛰어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단서를 찾아냈어.
백기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사람들이지.
유연
두고 봐요. 저도 반드시 저 사람들 입을 열게 만들고, 비엔토까지 잡아낼 테니까요!
마음속에서 다시 의욕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나도 모르게 움직임이 느려졌다.
……요 며칠 게임 속에서는 작전 일정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우리는 언제나 서로 다른 곳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몇 마디라도 나눌 수 있는 건 식사 시간뿐이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백기 쪽으로 조금 더 바짝 다가갔다.
유연
백 경관님, 오늘 밤에는 다른 일정 없으시죠? 그럼 저랑 그 범인 한번 더 만나러 가주실래요?
유연
단서를 알아내면 제가 야식 사드릴게요~
백기는 내가 꼭 끌어안고 있는 자신의 팔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백기
야식 한 끼로 날 데려가려고?
유연
어머, 경관님께서 갑자기 값을 올리시려는 건가요?
나는 떼를 쓰듯 그의 팔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백기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었다.
그는 내 손을 자신의 팔에서 떼어내더니, 익숙하게 손바닥 안으로 끌어와 손가락을 맞잡았다.
백기
그럼 일단 빚으로 남겨둬.
백기
어차피 오늘 밤은 나도 너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
심문실 문이 등 뒤에서 천천히 닫혔다.
복도에서 들려오던 발소리와 대화 소리가 한꺼번에 차단되었다.
긴 책상 맞은편에는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와 백기가 들어오자 그의 시선이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아래로 향했다.
나는 정리해 온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남자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유연
충분히 쉬었을 텐데, 이제 뭐라도 할 말이 생겼어요?
남자
없습니다. 전 그냥 갑자기 오라고 해서 갔을 뿐이에요.
유연
그럼 비엔토는요?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겠죠?
남자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예요. 경관님들도 입만 열면 그 사람 얘기잖습니까?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질문하려 했다.
그때 옆에서 종이를 넘기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백기는 심문용 책상 뒤에 앉는 대신, 옆에 있던 의자를 아무렇게나 끌어와 범인 맞은편에 앉았다.
제복은 여전히 단정하게 갖춰 입고 있었지만, 지금의 그에게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거침없는 기세가 느껴졌다.
백기
누가 창고에 가서 물건을 확인하라고 했다고 했지? 그게 누구야?
남자
……모릅니다. 그냥 길거리에서 말을 걸어온 사람이에요.
백기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는 왜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나오지 않았어?
남자
다리가 불편해서 움직이기 힘들었습니다.
백기는 절뚝거리는 남자의 왼쪽 다리를 훑어보더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백기
이상하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네 다리가 불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일을 시켰다고? 그런데 넌 그 사람을 믿고 따라갔어?
백기
정말 아무 의심도 안 한 거야, 아니면 거기 남아 있다가 죄를 뒤집어쓰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남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남자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아까만큼 태연하지 못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백기가 차갑게 질문을 이어가는 것을 들었다.
백기
그럼 질문을 바꾸지. 놈들이 무슨 조건을 걸었길래 네가 여기 앉아 있는 거야?
백기
잘 생각하고 대답해. 잡혀 온 사람이 너 하나뿐인 건 아니니까.
백기
다른 놈들이 먼저 입을 열면 넌 아무것도 얻지 못해.
남자의 호흡이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그는 몇 번이고 백기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가 황급히 피했다.
백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집어 들어 아무렇게나 펼쳐 들었다. 맞은편 남자의 시선이 그 자료에 가려졌다.
백기
이제부터는 네게 맡길게, 장관님.
유연
……저요?
백기
이미 흔들리고 있어. 여기서 더 몰아붙이면 역효과가 날 거야. 이제는 말투를 좀 부드럽게 바꾸고, 적당한 조건도 제시해 봐.
유연
하지만 전에 심문할 때도 저희는 부드럽게 설득하는 방식을 썼는데……
백기
그때와는 달라.
백기
자기가 직접 얻어낸 조건이어야 안심할 테니까.
백기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남자를 차갑게 흘끗 바라본 뒤 심문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남자의 어깨가 조금 느슨해진 듯했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백기의 말을 곱씹으며 손에 든 자료를 정리했다.
유연
사실 저도 대충 짐작은 가요…… 당신도 감옥에 가는 게 무섭지 않은 건 아니겠죠.
유연
다만 비엔토를 배신했을 때 겪을 일에 비하면, 며칠 더 갇혀 있는 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남자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나는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연
하지만 비엔토가 체포되기만 하면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유연
그런데 지금까지 버티는 게 형량만 늘어나는 것 말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천장의 조명이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얼굴에 어려 있던 완강한 거부감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듯했다.
남자
……당신들은 그 사람을 못 잡을 겁니다.
유연
3개월 전만 해도 경찰이 이 거리의 모든 갱단을 소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들만 남았고, 나머지는 전부 자취를 감췄죠.
남자
……
유연
어때요? 이제 생각나는 게 좀 있나요?
남자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두고 치열하게 갈등하는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
……다음 주 월요일, 비엔토가 부하들을 데리고 교외에 있는 리조트로 갈 겁니다.
남자
그 사람 말로는 그게 우리 조직에서 올해 가장 큰 '거래'라고 했습니다.
3장
오후의 햇살이 가릴 것 없이 해변 전체에 쏟아져 내렸고,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 위로 눈부신 빛의 조각들이 반짝였다.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렌즈 너머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리조트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그 근처에는 체격이 건장한 남자 몇 명이 서 있었다. 이따금 관광객이 가까이 다가가면 험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이,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서핑보드를 닦는 척하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무전기를 입가로 가져갔다.
백기
A팀, 위치 확보 완료.
경찰관
확인했습니다. A팀의 신호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날 범인의 자백을 받아낸 뒤, 경찰은 곧바로 체포 작전을 세웠다.
나와 백기가 먼저 관광객으로 위장해 거래 장소에 접근한 다음, 주요 경비 인력들을 유인하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대원들이 진입해 비엔토와 부하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이었다.
나는 느긋한 척 음료를 한 모금 마셨지만,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리조트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유연
왜 웃어요? 제 옷차림에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요?
백기
아니. 하지만 너무 긴장했어.
백기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몸을 숙였다.
그리고 한쪽 팔을 내 무릎 뒤로 넣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질렀고,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백기는 가볍게 웃으며 바닷가로 걸어갔다.
햇살 아래에서 호박색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백기
가자. 우리 좀 놀아볼까.
촤르륵 소리와 함께 새하얀 물보라가 등 뒤로 펼쳐졌다.
백기는 내가 서핑보드 위에 설 수 있도록 도와준 뒤, 자신도 뒤따라 보드에 올라섰다.
귓가에 바닷바람이 가득 밀려들었다.
햇살과 파도 소리, 해변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멀어지고, 발아래에서 끊임없이 출렁이는 파도만 남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백기의 어깨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백기는 파도의 움직임에 맞춰 능숙하게 무게중심을 조절하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무서워?
유연
아니거든요. 그냥 감을 좀 되찾아야 해서 그래요.
유연
저도 전에 선배한테 서핑 제대로 배웠잖아요.
백기도 그때의 거침없이 몰아치던 파도를 떠올린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백기
아쉽게도 여기서는 Evol을 사용할 수 없네. 바람으로 널 지켜주지는 못하겠어.
유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래도 선배가 저를 받아줄 수 있잖아요.
호박색 눈동자에 밝은 웃음이 스쳤다.
백기는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받치고 함께 자세를 조금 조정했다.
백기
그럼 나한테 조금 더 가까이 와.
마주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그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몇 번 연습하자 몸이 점차 서핑하던 감각을 되찾았고, 움직임에도 한결 여유가 생겼다.
파도의 방향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백기를 따라 무게중심을 옮겼다.
앞쪽에서 파도가 높이 솟아오르고 백기가 팔을 들어 올리면, 나는 말하지 않아도 그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유연
어때요? 제가 백 코치님한테 아주 잘 배웠다고 했잖아요~
백기
내 제자가 워낙 빨리 배우는 거지.
백기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다음 파도가 밀려오는 순간 서핑보드를 비스듬히 틀어, 나와 함께 물의 장막 사이를 가로질렀다.
솟구쳤던 물보라가 떨어지자 리조트 건물이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아마 조금 전까지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웃고 장난쳤기 때문일 것이다.
해변에 서 있던 경비원들은 서로 고개를 돌려 이야기를 나눌 뿐, 우리 두 '평범한 관광객'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그들의 겉옷 그늘에 숨겨진 총까지 보일 정도였다.
백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에는 내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집중력이 어려 있었다.
백기
잠시 후에 소란을 크게 일으켜. 외곽에 있는 놈들을 전부 끌어내는 거야.
유연
저만 믿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백기가 방향을 바꾸는 틈을 타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탕!
날카로운 총성이 순식간에 느긋한 분위기를 찢어놓았다.
리조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소란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제트스키에 올라타 우리를 향해 추격해 왔다.
백기
꽉 잡아.
눈을 깜빡일 틈도 없이 백기는 자세를 낮추고 나와 함께 파도 사이로 비스듬히 파고들었다.
거센 바닷물이 굉음을 내며 옆으로 휘몰아쳤다.
동시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엔진 소리도 빠르게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제트스키 여러 대가 끈질기게 뒤쫓아 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 있던 남자가 팔을 들어 올렸다.
총성이 바닷바람을 스치며 울린 순간, 백기는 갑자기 나를 데리고 방향을 틀었다.
서핑보드가 파도의 능선을 타고 순식간에 높이 솟아올랐다가, 가장 높은 지점에서 가볍게 아래로 기울어졌다.
짧은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이미 파도 꼭대기 반대편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뒤쫓던 제트스키들이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을 들어 추격자들을 향해 연달아 총을 쏘았다.
은빛 물보라가 등 뒤에서 요란하게 부서지면서, 쫓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지만 긴장되기는커녕 묘한 흥분이 심장박동을 따라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서로 호흡을 맞추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햇살과 튀어 오르는 물보라가 눈앞에서 끊임없이 뒤섞였고, 백기의 밤색 머리카락 끝도 바람에 흐트러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줄곧 여유로웠다.
거칠게 밀려오는 파도조차 혼란 속에서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심장도 더욱 빠르게 뛰었다.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백기가 속도를 조금 늦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추격전이 무척 즐거웠던 모양인지, 그의 눈동자에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백기
사격 솜씨 좋은데.
나는 의기양양하게 손에 든 총을 흔들며 그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유연
흥흥, 백 경관님. 저도 과녁에서 10점을 여러 번 맞힌 사람이라는 거 잊지 마세요.
바람 속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백기는 확신에 찬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
응. 내 여자친구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하지.
등 뒤의 총성이 점차 바람과 파도 소리에 묻혀 멀어지고 나서야 나와 백기는 재빨리 해변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미리 사람들을 대피시켜 둔 차량 개조점으로 돌아 들어갔다.
등 뒤에서 셔터가 내려오자 눈부신 햇살이 서서히 사라졌다.
백기는 블라인드를 살짝 젖혀 바깥을 확인한 뒤, 물자 상자 옆으로 걸어가 다른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내가 여전히 긴장한 표정으로 문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안심시키듯 말했다.
백기
걱정하지 마.
백기
여기까지 쫓아온 놈들은 스무 명 남짓이야. 우리 둘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백기는 그렇게 말하며 탄창을 능숙하게 총에 밀어 넣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허리 뒤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언제 그랬는지, 무전기 외부에는 스쳐 지나간 총탄 때문에 선명한 금이 가 있었다.
통신 버튼을 누르자 귀를 찌르는 듯한 잡음이 울렸다.
유연
A팀에서 작전팀 호출합니다. 들리나요?
경찰관
치직…… 수신…… 이미…… 리조트에…… 진입……
잡음 사이로 목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나는 서둘러 음량을 최대로 높였다.
경찰관
한 차례 교전이 있었습니다…… 갱단 조직원들은 지하 구역으로 철수했습니다……
백기
우리 쪽 사상자는?
경찰관
아군 부상자는 없습니다.
경찰관
적의 숫자가 많지 않아 소규모 교전만 있었습니다…… 다음 단계에서는 지하로 진입해 계속 추격할 예정입니다……
통신이 다시 날카로운 잡음에 묻혀버렸다.
나는 무전기를 두어 번 세게 두드렸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방금 들은 보고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유연
선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등 뒤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백기는 방금 교체한 탄창을 점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말을 듣고 짧게 대답했다.
백기
뭐가?
유연
밖에서 저희를 포위했던 갱단 조직원들은 예상했던 숫자의 절반도 안 됐잖아요. 경찰관들 말로는 리조트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별로 없었대요.
유연
그런데 이렇게 큰 거래를 하면서 비엔토가 고작 이 정도 인원만 데려왔을 리는 없잖아요?
그 말을 들은 백기도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백기
비엔토가 경찰의 감시를 예상하고 거래 장소를 이미 옮겼을 가능성도 있어.
백기
하지만 그랬다면 경찰이 허탕을 치게 만들면 그만이지. 굳이 사람을 남겨둘 필요는 없잖아.
나는 망가진 무전기를 무심코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유연
그 범인이 자백할 때, 이번 거래에는 금괴뿐만 아니라 대량의 무기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유연
제 기억으로는 임무 보상인 '사설 무장 조직'과 거의 비슷한 규모였던 것 같은데요.
백기
기억해. 그런데?
백기가 내 말을 부정하지 않자,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연
만약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무언가를 지키려고 있었던 게 아니라, 경찰을 유인하려고 남아 있었던 거라면요?
유연
그렇다면 경찰관들이 경계를 늦추고 지하로 진입하는 순간, 숨어 있던 대규모 갱단 조직원들의 총격을 받게 될 수도 있잖아요……
백기
심하면 전멸할 수도 있겠지.
차량 개조점 밖에서는 누군가 수색하며 돌아다니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가게 안은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했다.
나는 다급하게 무전기의 통신 버튼을 다시 눌렀다.
그러나 아까보다 훨씬 날카로운 잡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유연
통신 장비가 고장 났어요…… 선배, 빨리 리조트로 가요!
그렇게 말하며 무전기를 집어넣고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백기의 발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바로 다음 순간.
탕!
좁은 차량 개조점 안에서 갑작스럽게 총성이 터져 나왔다.
총알이 내 몸 옆을 스쳐 지나가 정확히 문 잠금장치에 명중했다.
문손잡이가 쾅그랑 소리를 내며 내 발치로 떨어졌다.
나는 몸을 돌렸다.
백기의 입가에는 가볍고도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백기
추리 잘했네.
백기
그러니까 이제 널 보내줄 수 없겠어.
4장

백기는 검은색 오토바이 옆에 느긋하게 기대어 있었다. 물에 젖은 앞머리는 아직 어지럽게 흘러내린 채였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햇살이 그의 얼굴과 손에 들린 총을 함께 비추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나와 함께 파도를 가르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백기에게서는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몇 초 동안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등 뒤로 감춘 손에 몰래 힘을 주었다.
유연
……거봐요. 역시 선배였네요.
백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백기
언제 알았어?
유연
같이 심문실에 들어갔던 날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머릿속에는 그 남자가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굳히던 모습과, 백기가 심문실을 나서기 전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유연
제가 창고에서 그 사람을 체포할 때 선배는 통로에서 비엔토의 행방을 찾고 있었잖아요. 원래대로라면 두 사람은 마주친 적이 없으니까, 그 남자가 선배를 알아볼 리 없어요.
유연
그런데 선배가 심문실에 들어오자 굉장히 긴장한 것처럼 보였어요. 계속 선배 반응을 살피고 있었고요.
백기
그게 다야?
백기
그냥 겁이 너무 많아서 고개도 못 들 만큼 무서웠던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어?
유연
저도 선배가 너무 위압적이어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뒤로도 계속 몰래 지켜봤죠.
유연
그런데 어느 첩자님께서 연기를 너무 잘하시더라고요. 임무를 수행할 때도, 사건을 분석할 때도 뭔가 숨기는 사람 같지 않아서 하마터면 제가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할 뻔했어요.
유연
그래서 방금 마지막으로 한번 떠봤어요.
오토바이 안장에 올려놓은 백기의 손이 미세하게 멈칫한 것 같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유연
【평화의 사자】 임무 보상은 애초에 '사설 무장 조직'이 아니에요…… 아까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건 선배 반응을 보려고 그랬던 거예요.
유연
그런데 선배는 틀렸다고 하지도 않고 제 말에 맞춰 계속 분석했잖아요. 마치 보상이 뭔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요.
백기는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기대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던 추측을 마침내 입 밖으로 꺼냈다.
유연
백기, 선배랑 제가 받은 임무는 애초에 서로 다른 거죠?
셔터 너머로 파도 소리가 연이어 밀려왔다.
백기는 아무렇지 않게 총을 허벅지 위에 걸쳐 놓더니 입꼬리를 서서히 올렸다.
백기
응, 맞혔어.
백기
그날 네가 【평화의 사자】 임무를 확인하고 있을 때, 내 시스템에 뜬 임무는 【복수위우(覆手为雨)】였어.
백기
내 임무는 3개월 안에 이 거리에서 가장 강력한 범죄 조직을 만드는 거야.
유연
……그런데 저랑 같이 경찰서에 들어간 거예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백기와 함께 밤낮없이 범죄 조직을 추적하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백기는 너무나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
경찰서에 있으면 모든 세력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 편리하잖아.
백기
게다가 네가 경찰서에 있는데, 당연히 나도 너랑 같이 있고 싶지.
백기
임무야 들키기 전까지 각자 하면 되는 거고.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유연
흥, 선배도 결국 자기 임무를 최대한 빨리 끝내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백기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백기
내 정체를 알아차리기 전까지 너도 즐겁게 놀았잖아?
창밖의 햇살이 그의 옆얼굴을 따라 내려앉았다.
그 빛은 눈동자에 담긴 느긋한 웃음까지 환하게 비추었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어쩌면 지금의 모습이야말로 이 게임에서 '경찰'이라는 신분 뒤에 숨겨져 있던 백기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몰랐다.
자유롭고, 위험하며, 누구도 진정으로 안중에 두지 않는 모습.
백기
다시 자기소개할게. 난 뉴시 마피아의 두목, 비엔토(Viento)야.
백기
항복할래, 여자친구?
나는 몇 초 동안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줄곧 등 뒤로 감추고 있던 손을 꺼냈다.
외장이 갈라진 무전기에서는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희미한 표시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나는 통신 버튼을 누른 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백기를 바라보았다.
유연
A팀에서 작전팀 호출합니다. 리조트 지하 구역에 매복이 의심됩니다. 즉시 진입을 중단하고 전원 외곽으로 철수해 경계 태세를 유지하십시오. 지원 병력을 기다려 주십시오.
유연
B팀은 저희 위치로 이동해 주십시오. 차량 개조점에서 용의자를 발견했습니다. 합동 제압이 필요합니다.
몇 차례 끊어지는 잡음이 들리더니 곧 또렷한 응답이 돌아왔다.
나는 임무를 다한 무전기를 옆으로 던져놓았다.
그리고 그제야 생긋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자연스럽게 단검을 집어 들었다.
유연
방금 잘 못 들었는데요.
유연
저한테 항복하고 선처를 부탁하겠다는 뜻인가요, 자기야?
백기
……
우리는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나는 공구함을 엄폐물 삼아 재빨리 거리를 좁혔고, 팔을 뻗어 그의 어깨 옆쪽을 공격했다.
백기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상체를 뒤로 젖혀 자연스럽게 공격을 피했다.
나는 지지 않고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유연
선배, 이건 좀 반칙 아니에요?
유연
제가 선배를 쉽게 의심하지 않을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 제 곁에 숨어 있었잖아요. 그렇게 이기면 너무 시시하지 않아요?
백기는 내가 옆으로 휘두른 칼날을 몸을 틀어 피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흥분으로 떠오른 빛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백기
정말 쉽게 끝내고 싶었다면 네 곁에 있지도 않았겠지.
탕!
갑자기 문밖에서 연달아 총성이 터져 나왔다.
아마 경찰 병력이 차량 개조점 근처까지 도착하면서 백기의 부하인 갱단 조직원들과 맞닥뜨린 모양이었다.
나는 공격을 거두는 동작을 이용해 셔터 쪽으로 달려갔다. 경찰 병력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걸음도 채 내딛기 전에 백기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내가 휘두른 단검을 막아내고, 그대로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재빨리 손에 힘을 풀어 단검을 반대쪽 손으로 옮겼다.
백기
좋아. 반응이 빠른데.
유연
백 경관님이 워낙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조금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틈을 타 다시 붙잡힌 손을 빼내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상대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과연 장점일까?
너무나 쉽게 나를 따라잡는 백기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빠져나가는 걸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가 어느 방향에서 퇴로를 차단하는 데 익숙한지 알고 있었다.
나란히 싸우며 조금씩 쌓아온 익숙함이 이제는 서로에게 가장 넘어서기 어려운 장애물이 되어 있었다.
다시 한번 서로의 몸이 스쳐 지나간 뒤, 나는 그 움직임을 이용해 백기를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백기는 잠깐 칼날을 내려다보더니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백기
예전에 가르쳐 준 기술들이 하나도 헛되지 않았나 보네.
유연
제가 배운 건 그것뿐이 아닌걸요.
유연
선배가 제게 가르쳐 준 것도 훈련장에서 배운 것만이 아니고요.
위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굳은 의지.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떻게든 반격할 방법을 찾아내는 결단력……
그리고 승산이 희박하다는 걸 알면서도 결코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까지.
백기는 내게 그런 것들을 일부러 가르치려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몇 번이고 그의 상처를 어루만졌고, 그와 함께 눈에 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는 적들을 마주해 왔다.
그에게 속해 있던 고집과 용기는 오랜 시간 서로 사랑하는 동안 조금씩 내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내 본능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예기치 못한 상황 앞에서 당황하던 때를 지나, 그의 임무에 함께하며 점차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파도 속에서도 그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창밖에서 다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하지만 백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눈동자에 서린 위험한 기운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온기도 함께 어려 있었다.
백기
알아.
백기
그러니까 너라고 해서 일부러 이기게 해주지는 않을 거야.
백기
내 여자친구는 내가 전력을 다해 상대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백기는 내가 잠시 자세를 가다듬는 틈을 타 귓바퀴에 재빨리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곧바로 뒤로 물러나 다시 나와 거리를 벌렸다.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와 그를 흘겨보았다.
뜨거워진 귓가를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공격할 기회를 찾았다.
문밖에서는 여전히 교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셔터는 바람에 흔들리며 가볍게 떨렸다.
백기는 점점 가까워지는 바깥의 소란을 한번 바라보더니 느긋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풀었다.
백기
마지막에 이 문으로 들어오는 건 어느 쪽 사람들일 것 같아?
유연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유연
이기든 지든, 이번 게임은 처음 임무를 받았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어졌으니까요.
유연
선배는 재미있어요?
백기는 나를 바라보며 거리낌 없이 환하고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백기
전에는 너와 나란히 서 있는 게 좋다고만 생각했어.
백기
그런데 지금 이렇게 네가 내 반대편에 서 있으니까, 이것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좋네.
마음속에서 문득 달콤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분명 지금 우리는 서로 반대편에 서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 역시 웃음을 지으며 손에 든 무기를 다시 단단히 움켜쥐었다.
유연
그럼 끝까지 신나게 놀아봐요. 미리 말해두는데, 저도 봐주지 않을 거예요.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똑같이 거침없는 웃음으로 빛났다.
셔터가 거칠게 들어 올려졌다.
문밖의 어지러운 파도 소리와 발소리가 한꺼번에 귓가로 밀려들었다.
하지만 백기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며 다시 몸을 기울여 다가왔다.
백기
얼마든지 덤벼.
백기
난 네 모든 모습에 매료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