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장
달이 떠올라 환히 빛나네. 코뿔소는 달을 바라보고, 처녀는 임을 바라보네—
높이 떠오른 밝은 달은 노랫말처럼 산봉우리들을 부드럽게 감싸고, 졸졸 흐르는 강물은 선율에 맞춰 박자를 두드렸다.
농가에서 직접 빚은 과실주의 달콤한 향기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은 사람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올해 우리 회사에서 단독으로 제작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자마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나는 직원들과 함께 이 고성으로 여행을 왔다.
그러면서 배려심 넘치게 한마디 덧붙였다——가족을 동반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라고.
유연
총각도 마음이 있고 처녀도 뜻이 있으니, 두 마음이 만나 한 쌍을 이루네~
나는 어설프게 산가를 흉내 내며 서툰 춤을 추다가, 내 ‘가족’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기는 웃으며 내 손을 잡더니 흔쾌히 한 바퀴 빙글 돌아 주었다.
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던 시간이 끝나자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무용수의 독무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백기
오늘 유난히 신나 보이는데?
유연
선배랑 같이 놀러 와서 춤까지 추는데 당연히 신나죠!
유연
백 경관님이 사교댄스뿐만 아니라 모닥불 앞에서 추는 춤까지 이렇게 잘 추실 줄은 몰랐어요!
백기
방금처럼 빙글빙글 돌고 다리 몇 번 뻗는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지.
백기
하지만 지금 저기서 춤추는 사람처럼 하려면 나도 특훈을 좀 받아야겠는데.
나는 어느새 불붙은 고리를 들고 온갖 화려한 묘기를 선보이기 시작한 무용수를 바라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민속 의상을 입은 아가씨들이 차례로 우리에게 과실주를 따라 주었다.
나는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돌려 백기를 바라보았다.
유연
그럼 선배는요? 오늘 즐거워요?
백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기
당연히 즐겁지. 갑자기 왜 물어봐?
유연
그게…… 여기 온 뒤로 선배가 어쩐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요.
나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얼굴을 치켜들고 백기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러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턱선을 따라 위쪽까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유연
아침에 고성에 도착했을 때부터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잖아요. 나중에 작은 가게들을 구경할 때는 주인아저씨가 하는 사투리까지 알아듣고요.
유연
오후에 강가로 놀러 가려고 했을 때도 그래요. 우리는 아직 지도를 보고 있었는데 선배는 곧장 길을 찾아냈잖아요.
유연
솔직히 말해 봐요. 혹시 저 몰래 예전에 여기 와 본 적 있는 거 아니에요?
백기는 나를 마주 보며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백기
보고드립니다. 유연 장관님 몰래 온 건 아닙니다.
백기
십여 년 전에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요양하러 가던 길에 들른 적이 있어.
유연
고향으로 요양하러…… 잠깐만요. 여기가 선배 고향이에요? 왜 한 번도 얘기해 준 적 없어요?
백기
그렇다고 하긴 어렵지.
백기는 잠시 말을 멈췄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할 방법을 생각하는 듯했다.
백기
정확히 말하면 외할머니의 고향이야.
백기
외할머니는 근처에 있는 청수제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어. 엄마와 나는 둘 다 연모시에서 나고 자랐고.
백기
그때 이곳을 지나면서 하루 묵었거든. 그래서 좀 낯익게 느껴졌던 거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백기의 표정은 한결 편안했다. 말투에도 자기도 모르게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유연
그럼 청수제가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우리도 한번 가 볼까요?
백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백기
그만두자. 가는 게 좀 번거로워.
백기
사실 아주 평범한 곳이야. 기억으로는 길도 꽤 험했고. 관광지도 아니라서 특별히 볼 것도 없어.
유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백기는 그곳에 갔다가 내가 지루해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을 백기에게 전하고 싶었다.
유연
저는 길이 험해도 괜찮고, 관광지인지 아닌지도 상관없어요……
유연
제게는 선배와 인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평범한 곳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가 보고 싶은 거예요.
유연
안 될까요?
멀지 않은 곳에서 흥겨운 인파가 다시 한번 환호성을 터뜨렸다.
경쾌한 북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며 백기의 대답을 재촉하는 듯했다.
백기는 입술을 살짝 달싹였다. 일렁이는 모닥불이 그의 눈동자를 환하게 밝혔다.
백기
당연히 되지. 내일 바로 가자.
02장
다음 날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회사 직원 몇 명의 일정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모두의 일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오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당연히 백기가 나를 데리고 정류장으로 갈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내 손을 잡고 고성의 선착장으로 향했다.
유연
우리 배 타고 가는 거예요?
백기
응. 내 기억으로는 청수제로 가는 길이 상당히 험했어. 차를 타면 엄청나게 흔들리니까 물길로 가는 게 나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사공 아저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젊은이, 그게 대체 몇 년 전 얘기야?
아저씨
요즘은 산길도 아주 잘 닦여 있어. 우리도 커다란 트럭을 몰고 거뜬히 지나갈 수 있다니까!
유연
그래요? 그럼 차를 태워 줄 기사님을 찾아보는 게……
아저씨
어어, 잠깐만! 산길이 좋아진 건 맞지만, 우리 물길은 경치가 좋잖아! 특히 도화폭포를 지나는 구간은 차를 타면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라고!
자기 손으로 손님을 놓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저씨가 황급히 우리를 붙잡았다.
백기는 웃음을 참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백기
넌 어느 쪽이 좋아?
유연
어차피 선배가 어렸을 때 차에서 덜컹거리던 재미는 경험할 수 없게 됐으니까, 우리 둘 다 한 번도 못 본 도화폭포를 같이 구경하는 건 어때요?
숲속의 마른 가지에는 아직 겨울 끝자락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새롭게 돋아난 푸른 잎사귀는 이미 봄의 활기를 불러오고 있었다.
작은 배는 겹겹이 물결을 일으키며 고요한 수면 위를 부드럽게 나아갔다.
아저씨는 익숙한 솜씨로 대나무 장대를 저으며 우리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아저씨
보통 관광객들은 이쪽 고성에서 놀다 가는데, 두 사람은 어쩌다 청수제까지 가려고 하는 거야?
유연
남자 친구가 예전에 와 본 곳이거든요. 그래서 저도 같이 옛 추억을 따라가 보고 싶어서요.
아저씨
오호—
아저씨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우리를 향해 엄지를 세워 보였다.
백기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백기
요즘 청수제는 많이 달라졌나요?
아저씨
아주 크게 바뀐 건 아니지만, 자네가 어렸을 때랑은 분명 다를 거야.
아저씨
그러고 보니 그게 다 높으신 분 한 분 덕분이지!
유연
높으신 분이요?
아저씨
십여 년 전에 그분이 청수제에 길을 하나 닦아 줬거든. 그 덕분에 마을도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한 거야.
아저씨
그분 이름이…… 뭐였더라……
아저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참 생각에 잠겼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 하지만 그 길을 그분이 자기 아내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줬다는 얘기는 들었어!
유연
우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길 하나를 만들어 주다니. 어떻게 들어도 낭만적인 이야기였다.
나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쥔 채 동경 어린 눈으로 백기를 바라보았다.
유연
선배, 이따 시간 있으면 우리도 그 길에 한번 가 볼까요?
백기
응……? 그래.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백기의 표정이 조금 복잡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그 표정은 미소 속에 감춰졌다.
백기
저 앞이 도화폭포 아니야?
나는 백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과연 양쪽 강변의 울창한 녹음 사이로 길고 가느다란 은빛 비단 같은 폭포가 숨어 있었다.
유연
맞는 것 같아요! 복숭아나무가 보여요!
강 양쪽의 복숭아나무 숲은 향긋한 봄바람을 품은 채 산속에 거리낌 없이 흐드러져 있었다.
산꽃에 둘러싸인 폭포가 쏴아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흩날리던 분홍빛과 흰빛 꽃잎들도 물줄기에 섞여 흘러갔다.
복숭아꽃을 품은 물보라가 바위에 부딪히며 커다란 강줄기로 합류하자, 그 물살에 우리가 탄 작은 배도 옆으로 조금 밀려났다.
나는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물을 한 움큼 떠 올렸다. 그러고는 그 안에 섞인 꽃잎을 백기에게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다.
유연
봐요. 이게 제 유람선 기념품이에요~
백기
그게 기념품으로 갖고 싶다면 더 많이 줄 수도 있는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얼굴을 스치던 산들바람이 갑자기 거세졌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꽃잎들이 느닷없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마치 의식이라도 생긴 것처럼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돌며 우리가 탄 배를 향해 날아왔다.
장난기 가득한 꽃잎들은 백기의 뜻에 따라 내 뺨을 스치더니 가랑비처럼 사르르 쏟아져 내렸다.
백기
기념품 더 필요해?
유연
하하하하! 이제 충분해요!
배를 몰던 아저씨는 장난치는 우리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지, 놀란 나머지 손에 쥐고 있던 대나무 장대까지 놓쳐 버렸다.
백기는 웃으며 바람으로 장대를 들어 아저씨의 손에 돌려주었다.
그러자 배가 갑자기 더 큰 물결을 가르며 나아갔다.
백기
아저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남은 길은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흐드러진 꽃과 봄바람을 벗 삼아 강을 따라 나아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청수제에 도착했다.
번화한 고성과는 전혀 달랐다. 청수제는 과연 외지인의 발길이 드문 곳이었고, 여전히 고요한 오후의 시간 속에 잠겨 있었다.
백기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백기
정말 많이 달라졌네.
백기
내 기억에는 선착장 옆에 작은 약국이 있었어. 여기 왔을 때 외할머니 약을 사러 간 적도 있었거든.
나는 백기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
지금 선착장 옆에는 택배 취급소 하나만 자리하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종이 상자 몇 개가 듬성듬성 쌓여 있었다.
백기
그리고 이쪽에는 원래 계산대 하나밖에 없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지금은 슈퍼마켓이 됐네.
슈퍼마켓 계산대를 지키던 어린 남자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수줍게 몸을 숨겼다.
처음에는 백기라는 ‘가이드’가 있으니 든든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우리 둘 다 이 작은 마을에 불쑥 찾아온 낯선 관광객이나 다름없었다.
유연
그래도 전부 달라진 건 아니겠죠? 어딘가 한 곳쯤은 예전 그대로이지 않을까요?
백기는 내가 어디를 말하는지 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그가 앞쪽을 가리켰다.
백기
지금 외할머니 옛집으로 가는 길이야. 다만 밖에서 구경만 할 수 있을 거야.
유연
네?
백기
열쇠가 없거든.
백기
게다가 이번에는 손을 넣어 뒤져 볼 담장 구멍도 없고.
백기는 그렇게 말하며 아쉽다는 듯 어깨까지 으쓱했다.
그 모습을 보자 지난번 백기의 생일을 맞아 연모시 교외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갔던 일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유연
그럼 밖에서 구경만 하고, 우리가 ‘여기 다녀갔다’는 증거로 사진도 한 장 찍어요!
내 들뜬 기분이 백기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그는 더욱 재빠르게 카메라를 꺼냈다.
백기
한 장으론 부족하지. 여러 장 찍자.
백기
걱정 마. 오기 전에 특훈도 받았거든. 평범한 관광 사진이라도 찍는 족족 잘 나오게 할 자신 있어. 망한 사진은 한 장도 없을 거야.
백기가 사뭇 진지하게 장담하는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발끝을 들어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유연
그럼 저도 포즈는 완벽하게, 표정은 실감 나게 짓겠다고 약속할게요! 백 대사진가님의 최고의 전속 모델이 되어 드릴게요!
우리는 웃고 장난치며 외할머니의 옛집에 도착했다.
민들레가 흐드러진 작은 마당이 있는 집과는 달리, 이곳은 전형적인 물가 마을의 이층집이었다.
굳게 닫힌 대문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벽에도 세월의 흔적이 얼룩덜룩 남아 있었다. 고성에서 보았던 유명한 관광 명소의 건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백기가 한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사실만 떠올려도 가슴속에서 따스한 기운이 밀려왔다.
백기가 카메라를 들어 나와 옛집을 하나의 화면에 담았을 때, 나는 어제 이곳에 오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던 것이 더없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비록 이곳이 백기가 과거에 잠시 지나간 장소에 불과하더라도, 나는 훗날 그가 걸어온 길과 내 발자취를 겹쳐 놓을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그 순간 마음속에 작은 결심 하나가 생겨났다.
—앞으로는 백기가 걸어온 길에 더 많이 함께하고 싶어.
우리는 목조 건물 주위를 돌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이제 다른 곳도 구경하러 가려던 참에,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혹시…… 백기 아니니?
03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통통한 남자 한 명이 망설이는 눈빛으로 백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백기
제가 백기인데, 혹시……
???
정말 맞네!
???
아까 창가에서 한참을 지켜봤는데 확신이 안 서더라고. 그래도 눈매는 어릴 때랑 똑같아. 정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잘생겼구나!
???
백 대장(白老大), 설마 나 기억 못 하는 거야? 나 손장이야. 이제 생각나?
백기는 처음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백 대장이라는 호칭을 듣자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스쳤다.
오래전의 기억은 떠올랐지만, 눈앞의 남자를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와 선뜻 연결 짓지 못하는 듯했다.
백기
크흠…… 생각났어.
백기
정말 오랜만이네. 장…… 아니, 장 형.
손장
아니, 아니! 대장님이 나한테 형이라니. 그냥 손이라고 불러.
손장
전에 텔레비전에서도 널 봤거든. 그래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거지. 지금 무슨…… 지휘관이랬나?
백기
연모시 특파팀 지휘관이야.
손장
역시! 내가 따르던 대장답게 대단하다니까!
손장은 마치 자기 일인 양 자랑스럽게 손뼉을 치더니,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았다.
유연
안녕하세요, 손장 씨. 저는 유연이라고 해요. 백기 선배의……
내가 미처 소개를 끝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손장
알지, 알아! 분명 백 대장의 연인이겠지! 아까 창가에서 두 사람을 봤을 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은 처음 봤어!
백기
크흠, 손장. 이제 그만……
손장 씨가 워낙 열정적으로 반겨 주는 바람에 우리 둘 다 조금 쑥스러워졌다. 백기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백기
너랑 원숭이는 아직도 여기 살아?
손장
그럼! 다만 원숭이는 요 며칠 마을에 없는데…… 마침 오늘 내가 한가하거든. 두 사람, 우리 집에 잠깐 들렀다 갈래?
우리가 거절했다가는 또 한바탕 열렬한 권유가 이어질 기세였다. 그 호의를 차마 뿌리칠 수 없었던 백기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
그럼 잠깐 신세 좀 지고, 다른 곳도 둘러보러 갈게.
손장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는 틈을 타, 나는 슬쩍 백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유연
백 대장?
유연
우리 백 경관님은 어릴 때부터 대장이셨구나~
백기
아니야. 난 대장 노릇하는 거 별로 안 좋아했어. 애들이 멋대로 그렇게 부른 거지.
백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장난을 치던 내 손가락을 붙잡았다.
백기
굳이 따지자면 우리 집 대장은 유연, 너잖아.
손장
여기 간식 있으니까 편하게들 먹어. 난 차 좀 끓여 올게.
우리는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손장의 집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무척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새하얀 벽에는 세 식구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오래된 사진도 여러 장 붙어 있었다.
나는 무심코 지난날의 풍경이 담긴 사진들을 훑어보다가, 문득 눈길을 사로잡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유연
어? 선배, 이거 선배 아니에요?
손장의 어린 시절에 찍은 듯한 사진이었다. 사진 속 통통한 남자아이는 수영복을 입고 마른 체격의 남자아이와 물총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이 향한 곳은 사진 한구석이었다.
그곳에는 웃통을 벗은 남자아이 하나가 잔뜩 폼을 잡은 채 물총을 치켜들고, 사방으로 물을 쏘아 대며 위풍당당한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백기도 내 옆으로 다가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단번에 손을 뻗어 사진을 가려 버렸다.
백기
……이런 사진이 왜 아직도 있는 거야?!
유연
에이, 가리지 말아요. 백 대장의 늠름한 모습을 좀 더 보자고요!
나는 백기의 손을 붙잡고 끈질기게 아래로 끌어내렸다. 백기는 부끄러우면서도 웃음이 나는지 귀 끝까지 새빨개졌다.
백기
그만 봐. 웃통까지 벗고 있어서 좀 민망하잖아……
유연
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선배는……
손장
두 사람, 백 대장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고 있는 거야?
어느새 찻잔을 들고 나온 손장의 목소리에 우리는 황급히 서로의 손을 놓았다.
유연
이 사진은 선배가 예전에 여기 왔을 때 찍은 거예요?
손장
맞아. 그때 백 대장이 우리랑 같이 강가에 놀러 갔거든. 그날 물총싸움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몰라!
손장
백 대장이 우리 편이 돼서 날 이끌어 줬는데, 상대편 어른들을 아주 혼쭐내 줬다니까!
유연
정말요?
손장
그럼, 거짓말이겠어? 사진도 있다니까!
손장 씨는 서랍에서 두툼한 앨범 한 권을 꺼내 내게 건넸다.
앨범을 몇 장 넘기지 않아 벽에 걸려 있던 사진과 비슷한 시기에 찍은 사진들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백기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 곁에는 통통한 아이와 마른 아이가 나란히 서 있었고, 아이들 뒤로는 군복을 입은 남녀 몇 명이 보였다.
유연
이건……?
백기
아, 그날 NW 대원들이 우리 가족을 찾아왔었거든. 그래서 다 같이 사진을 찍었어.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사진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폈다.
역시 그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머지 사진들의 주인공은 당연히 통통한 꼬마 손장이었지만, 내 눈에는 언제나 사진 한쪽에 있는 훨씬 눈에 띄는 꼬마가 들어왔다.
눈을 비비는 백기, 물총싸움을 하는 백기, 무선 조종 장난감 비행기를 조종하는 백기……
앨범을 한 장 더 넘긴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이 튀어나왔다.
유연
——너무 귀엽잖아!

그 페이지에는 어린 백기의 단독 사진 한 장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막 수영을 마친 듯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있었다.
한 손으로 튜브를 붙잡고, 다른 통통한 손으로는 물안경을 들어 올린 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란한 햇살이 어린 티가 가득한 백기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잔뜩 부풀린 볼 사이로 뿜어져 나온 가느다란 물줄기에도 햇빛이 반짝였다.
마침 강물 위로 뛰어오른 작은 물고기 한 마리까지 절묘하게 카메라에 포착되어, 생동감 넘치는 그 순간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유연
이것도 그날 찍은 거예요?
백기
응. 그날 내가 강에서 수영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 엄마가 걱정돼서 전우 아저씨에게 우리를 데리고 놀아 달라고 부탁하셨거든.
백기
그때는 물에 들어갈 때 튜브까지 써야 했구나…… 크흠.
유연
풉……
백기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못마땅하다는 듯 평가하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나는 한동안 신이 나서 사진 속 꼬마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눈앞의 다 큰 백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백기
……
백기
……그 눈빛은 뭐야?
유연
너무 귀여워서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요!
백기
그럼 큰 쪽이 더 귀여워, 작은 쪽이 더 귀여워?
유연
둘 다 귀엽다고 하면, 둘 다 한꺼번에 포장해서 집에 데려가도 돼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백기가 조금이라도 나온 사진'은 모조리 찍어 두었다.
아직도 아쉬운 마음을 안고 손장 씨에게 앨범을 돌려주려는데, 갑자기 백기가 나를 막아섰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사진 몇 장을 가리켰다.
백기
손장, 이 사진들 좀 빌려서 스캔해도 될까?
손장
당연하지! 얼마든지 가져가. 둑길을 따라 끝까지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복사집이 있어.
유연
정말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나는 어린 백기가 나온 사진 몇 장을 조심스럽게 꺼낸 뒤, 백기와 함께 복사집으로 향했다.
강변 길을 따라 쭉 걷다가 갈림길에 다다르자, 높이 솟은 도로 표지판이 우리를 맞이했다.
유연
오른쪽으로…… 그러니까 이 온정로로 가면 되는 거죠?
하지만 곁에 있던 백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걸음을 멈춘 듯한 기척에 고개를 돌려 보니,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도로 표지판 아래의 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시선을 따라 비석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였고, 그 위에는 한 줄의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 도로 건설 기부자, 백혼(白焜).
04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배를 타고 오면서 뱃사공 아저씨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어린 백기가 이곳에 요양을 왔던 일이, 그 이름 하나로 모두 이어졌다.
나는 그 이름이 백기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그를 그곳에서 데리고 벗어나려 했다.
유연
선배, 그 사람이……
백기
난 괜찮아.
백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났는지 차갑게 비웃었다.
백기
그냥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
백기
이곳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이 아내의 고향에 보답하려고 이 길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잖아. 듣기만 해도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겠지.
백기
하지만 실제로는 예전에 사람을 보내서 엄마를 만나게 했던 것처럼, 이 길을 만들 때도 직접 찾아올 생각조차 없었을 거야.
백기
엄마와 외할머니는 그 사람이 이 길을 만드는 데 돈을 냈다는 사실조차 모르셨으니까.
백기의 목소리는 무척 담담했지만, 그 말끝에는 어딘가 쓸쓸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나도 그 사람을 직접 마주한 적은 몇 번뿐이었다. 하지만 백기가 가끔 들려주던 지난날의 기억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냉정한 사람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고, 온정이라는 이름까지 붙인 이 길은 지금 이 순간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백기
……자기 이상과 가정 사이에서 이미 가정을 버린 사람이잖아. 이제 와서 이런 걸 하는 건 대체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
백기의 물음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는 비석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백기
그래도…… 청수제가 실제로 발전한 건 사실이니까. 그 사람의 보여 주기식 사업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 된 셈이겠지.
백기가 그 사람에 대해 직접 평가하는 일은 드물었다.
우리 역시 지금까지 백기의 가족사에 드리운 어두운 부분을 되도록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유연
그러니까…… 그 사람은 선배 어머니를 사랑해서 이 길을 만든 게 아니라는 거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 사람'의 흔적을 마주할 때마다 백기의 마음에 무언가 걸린 듯한 아픔이 남는다면, 나는 줄곧 그를 찔러 온 그 가시를 뽑아 주고 싶었다.
그러니 조금 무모하더라도 백기가 먼저 꺼내지 않았던 마음속 응어리에 더 깊이 다가가고 싶었다.
단순히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마주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두 사람의 마음도 조금은 더 깊이 맞닿을 수 있지 않을까.
백기
맞아. 난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사랑을 굳이 그렇게 비뚤어진 방식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으니까.
백기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단호했다. 그가 내뱉은 한 글자 한 글자가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마음 한구석이 시큰하고 쓰라렸다.
백기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는 엄마의 사랑을 직접 봐 왔다는 거야.
백기
엄마는 그토록 우리 가족을 사랑했고, 그 사람도 그렇게 사랑했어. 그래서 나는……
순간 백기의 목이 메었다. 그의 얼굴에 날카롭고 매서운 기색이 스쳤다.
백기
그래서 그 사람이 보여 주는 그런 '사랑'은…… 엄마한테 너무 불공평해.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백기의 목소리가 한층 격해졌다. 마치 그 역시 언젠가 그 다정하고 아름다웠던 여인을 대신해, 그녀가 겪은 수많은 서러움과 억울함을 토해 내고 싶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 사람의 침묵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는 일처럼 느껴졌으리라.
유연
선배……
나는 먼저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았다. 결국 맞잡았던 손을 놓고 그의 품으로 뛰어들어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부재했던 백기의 어린 시절,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가족들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아부어야 했을까.
그렇게 백기가 지금의 백기로 자라기까지——얼마나 힘겨웠을지. 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을지.
유연
선배 말이 맞아요.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나는 진지하게 입을 열어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그에게 전했다.
유연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테니까요. 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반면교사예요!
백기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덜미에 닿는 그의 숨결이 조금씩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유연
뭐가 그렇게 웃겨요…… 꺅?!
갑자기 발밑이 허공에 뜨는 느낌이 들었다. 백기가 한 손으로 내 무릎 뒤를 받치더니 단숨에 나를 안아 올린 것이다.

어느새 태양은 조용히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멀리 강 위를 떠가는 고깃배에서는 저녁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강바람이 실어 온 황혼의 금빛이 백기의 수려한 눈매와 얼굴선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는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눈을 깜빡이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백기
방금 웃은 건 널 놀리려던 게 아니야. 네 말이 정말 좋았고, 또 옳은 말이라서 기뻤던 거야.
백기
약속할게. 그런 잘못된 본보기는 절대 따라 하지 않고, 좋은 본보기가 되도록 노력할게.
백기
그러니까 앞으로도 네가 바라는 모든 것에 응답할 거야.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백기
네 앞으로의 삶이 온통 사랑으로 가득하도록.
그의 마지막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입술 위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방금 그가 했던 맹세에 결코 바꿀 수 없는 인장을 찍는 것 같았다.
그 입맞춤 속에서 오랜 세월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 하나가 풀려나간 듯했다. 백기의 숨결은 부드럽게 얽혀 들었고,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도 더 많은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물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입맞춤을 끝냈다.
유연
백 경관님, 방금 선배가 한 말에는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백기
어떤 부분이 부족한데?
유연
채울 수 있는 건 미래만이 아니잖아요. 과거도 채울 수 있다고요.
백기
과거는 어떻게 채우려고?
유연
아주 간단하죠. 우선 우리가 각자 가 봤던 곳들을 다시 한번 같이 가는 거예요.
유연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면 아까처럼 먼저 사진을 한 장…… 아니, 여러 장 찍는 거죠!
백기
그다음은?
유연
그다음이야 더 쉽죠!
유연
지금의 백기 선배도, 제가 함께하지 못했던 과거의 꼬마 백기도, 아주아주 어린 백기도…… 모두 함께 그 빈자리에 채워 넣는 거예요.
나는 백기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백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두 팔로 나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의 가슴팍 주머니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심장이 뜨겁게 뛰며 하나로 포개졌다.
석양 아래 부드럽게 펴진 그의 눈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앞으로 백 년을 더 바라본대도 질리지 않을 모습.
백기는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백기
이렇게 생각하니까 꼬마 백기랑 아주 어린 백기는 정말 손해가 크네. 다 같이 모여 있으면 분명 날 엄청 부러워할 거야.
유연
왜요?
백기
지금의 백기에게는 네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