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雨林之约 데이트 번역
1장
유연
휴, 드디어 다 쌌다!
짐으로 빵빵하게 부푼 여행 가방을 닫자 잠금장치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채워졌다. 마치 곧 여행이 시작된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옆에 있는 백기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유연
백기 학생, 앞으로 일주일 동안 잘 부탁해요~
바로 다음 순간, 백기는 내 손을 붙잡더니 그대로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백기
그렇게 좋아?
유연
헤헤, 당연하죠. 우리가 이렇게 같이 수업을 들을 기회가 흔치 않잖아요.
우리 회사에서는 새로운 자연 생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특별한 소재를 찾기 위해 나는 산림공원에서 진행하는 식물 탐사 교육 프로그램에 신청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백기는 마침 최근 별다른 일이 없기도 해서, 흥미를 보이며 함께 신청했다.
백기
그러게. 흔치 않은 기회지.
백기
아쉬운 건 기간이 너무 짧다는 거야. 겨우 일주일이라니.
말투는 담담했지만 너무나 진지한 모습에 나는 웃으며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유연
우리 남자친구, 공부에 대한 열정이 좀 대단한 것 같은데요~
백기
공부보다 너한테 열정이 넘치는 거지.
백기
여자친구가 워낙 모범생이잖아. 어쩔 수 없지.
백기는 장난을 치던 내 손을 느긋하게 감싸 쥐고, 나를 끌어안은 채 함께 소파에 편안히 파묻혔다.
유연
그래도 이번 수업은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유연
산림공원에서 지내면서 열대우림 깊숙한 곳까지 탐사할 수 있고, 희귀하고 신기한 꽃과 풀도 알아볼 수 있잖아요~
유연
게다가 식물을 돌보는 방법까지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제대로 배워서 돌아오면 우리 뾰족이도 대대로 물려줄 수 있겠죠!
내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모습을 보자 백기는 웃으며 내게 입을 맞췄다.
백기
그럼 내가 먼저 뾰족이 가족을 대신해서 감사 인사할게.
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
나를 안고 있던 백기는 긴 팔을 뻗어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이 살짝 굳어졌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목소리마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백기
알겠습니다. 바로 특파팀으로 복귀하겠습니다.
나는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고 몸을 돌려 그의 제복을 가져와 건넸다.
백기는 순식간에 능숙하게 제복을 갖춰 입었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말없이 시선을 머물렀다.
백기
연아, 미안해. 이번에는 같이 못 가겠어.
유연
백 경관님이 또 바보 같은 소리를 하시네요.
유연
조금도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백기가 허리를 숙여 신발을 갈아 신는 동안,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꼼꼼하게 바로잡아 주었다.
유연
걱정하지 마요. 뾰족이를 대대로 물려줄 수 있게 만드는 중대한 임무는 저한테 맡기세요~
유연
다만 그렇게 되면 뾰족이가 저를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
백기는 막 문을 열려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다음 순간, 더없이 가벼우면서도 깊은 애틋함이 담긴 입맞춤이 내 입술에 내려앉았다.
백기
괜찮아. 나도 널 더 좋아하니까.
2장
무성하게 우거진 나뭇가지와 잎들이 햇빛을 빽빽하게 가리고 있었다. 아래로 늘어진 덩굴은 숲속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뻗어 있었고, 눈길이 닿는 곳마다 짙푸른 녹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온 세상이 축축한 풀과 나무의 싱그러운 향기에 잠겨 있었다.
나는 탐사 교육에 참가한 일행을 따라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끊임없이 나타나는 야생 꽃과 나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느덧 수업은 나흘째에 접어들었고, 열대우림에서는 언제나 뜻밖의 새로운 발견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멀지 않은 나뭇가지 끝에 선녀파랑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치 열대우림을 찾아온 여행객들을 맞이하는 듯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열대우림이 보내준 이 작은 인사를 백기에게 전송했다.
그에게서 드문드문 짧은 답장이 돌아올 뿐이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백기 역시 잠깐씩 쉬는 틈마다 내가 보내는 이야기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천 교수
유연 씨.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행은 이미 한참 앞까지 걸어가 있었다.
식물 탐사 수업을 맡은 천 교수님의 온화한 시선과 마주치자 나는 조금 멋쩍게 웃었다.
유연
죄송해요, 교수님. 잠깐 딴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교수님은 그저 너그럽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천 교수
수업을 신청할 때 다큐멘터리 소재를 찾으러 왔다고 했지. 마음에 드는 소재는 찾았나?
유연
지금까지 몇 가지 생각해 둔 건 있는데, 아직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교수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열대우림을 바라보았다.
천 교수
그렇다면 식물들이 자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지 조금 더 귀 기울여 보게.
나는 교수님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고, 자유 활동 시간이 되자 답을 찾기 위해 홀로 열대우림 속으로 들어갔다.
축축하고 촘촘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고, 풀과 나무, 흙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향기가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걸음을 늦추고 식물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며칠 동안 수업을 들은 덕분인지 이제는 알아볼 수 있는 식물도 제법 많아졌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식물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잠시 머릿속을 비우기로 했다.
바로 그때, 숲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따라 시야를 가리고 있던 파초나무 숲을 돌아갔다.
그러자 하늘 높이 솟은 거대한 고목 한 그루가 눈앞에 나타났다.
우람한 나무줄기는 몇 사람이 팔을 벌려야 겨우 감쌀 수 있을 만큼 굵었다.
커다란 판근은 용의 등줄기처럼 불룩 솟아올랐다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을 만큼 넓게 펼쳐진 나무의 수관은 허공에 신성한 초록빛 궁륭을 떠받치고 있는 듯했다.
겹겹이 무성하게 자란 수많은 잎들은 옅은 안개 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거목은 세상 한가운데 고요히 서서, 마치 기나긴 세월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통치마를 입은 아이들 몇 명이 나무뿌리 주변에 모여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작은 돌탑들이 여러 개 높이 쌓여 있었고,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돌을 하나씩 올리고 있었다.
유연
얘들아, 뭐 하고 있어?
여자아이
소원 빌어요.
남자아이
돌을 높이높이 쌓으면 큰 나무가 소원을 들어준대요.
아이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설명하더니, 두 손을 모으고 고목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여자아이
나무 신령님, 나무 신령님. 엄마 아빠가 너무 힘들게 일하지 않게 해주세요……
남자아이
여동생 발이 얼른 나아서 같이 들꽃 따러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아이들은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빈 뒤, 가져온 들꽃을 공손하게 돌탑 위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알려준 길을 따라 근처 개울로 가서 예쁜 연한 색 조약돌을 몇 개 주워 왔다.
돌아온 나는 조약돌을 조심스럽게 쌓아 작은 돌탑을 만들고 두 손을 모았다.
유연
나무 신령님, 나무 신령님. 선배가 언제나 무사하고 안전할 수 있도록 지켜주세요.
백기
이 나무, 소원을 꽤 잘 들어주나 보네.
등 뒤에서 익숙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가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뭇가지와 잎들이 헤쳐지는 바스락거림과 함께 비스듬한 햇살 한 줄기가 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다음 순간, 날렵한 인영 하나가 가로놓인 나무에 안정적으로 발을 디디고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밤낮으로 그리워하던 얼굴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머리카락 끝이 숲속을 스치는 바람에 살짝 흩날렸다.
온몸에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당당하고 생기 넘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반짝이며 웃고 있었다.
그 안에는 조금도 감추지 않은 그리움이 가득했다.
세상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마치 내 심장 뛰는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마음속에 쌓여 있던 걱정과 불안이 한순간에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결국 바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백기의 바짓단에는 잘게 부서진 풀잎과 진흙 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다.
분명 숲속을 한참이나 걸어온 모양이었다.
유연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됐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웃으며 그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거의 동시에 백기도 가볍게 뛰어내려 내 쪽으로 달려왔다.
백기
임무는 무사히 끝났어.
백기
그러니까 원래 계획했던 휴가를 빨리 다시 시작해야지.
백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며 내가 내민 팔을 따라 자연스럽게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유연
안 피곤해요?
백기
널 보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
백기는 두 팔에 힘을 주어 나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안도한 듯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오랫동안 떠돌던 여행자가 마침내 유일한 안식처에 도착한 것 같았다.
백기
게다가 바람이 그러더라. 누군가 계속 날 그리워하고 있었다고.
3장
오후 수업이 시작되기 전, 천 교수님은 새로 합류한 백기에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질문하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그래서 남부 열대우림에 들어선 뒤로는 내가 자청해서 '편입생'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로 했다. 우리는 일행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대열의 맨 뒤를 따라갔다.
유연
저렇게 잎이 우산만큼 커다란 식물은 알로카시아예요. 독성이 아주 강해요.
유연
저쪽에 있는 건 신기한 춤추는 풀이에요. 소리가 들리면 잎이 흔들린대요!
백기는 조용히 내 설명을 들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길을 가로막고 늘어진 덩굴을 손으로 걷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오후의 공기는 무덥고 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기의 눈에 옅은 졸음이 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턱에 살짝 힘을 주며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크게 하품을 했다.
아마 요 며칠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나는 마음이 쓰여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백기가 먼저 말을 걸었다.
백기
이 꽃, 낯이 익은데.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단단한 나무껍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연한 색의 작은 꽃 한 송이가 보였다.
유연
이건 저도 알아요. 며칠 전에 교수님이 설명해 주셨거든요. 이름이, 이름이……
분명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고 있었는데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백기는 웃음을 참지 못하더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말을 이어받았다.
백기
착생란이야.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를 놀려주고 싶어졌다.
유연
그럼 선배, 이제 안 졸려요?
백기
……
내 얼굴에 장난기 어린 웃음이 훤히 드러나자 그의 눈빛에 아주 잠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백기는 앞쪽으로 멀어져 가는 일행을 흘끗 바라보더니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그리고 재빨리 내 입술에 입맞춤을 훔쳤다.
백기
이제 잠 깼어.
입술 위로 산들바람 한 줄기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 가벼운 감촉이 마음속에 달콤한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백기와 함께 걸음을 재촉해 일행을 따라잡았다.
조금 전의 걱정이 가라앉아서일까.
다시 열대우림을 바라보니 어쩐지 전과는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거목들이 구름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었다.
굵은 덩굴들은 나무의 결을 따라 구불구불 뻗어 올라가며 가지와 잎을 햇살 쪽으로 부드럽게 떠받치고 있었다.
공중에 매달린 새둥지양치식물은 넓게 잎을 펼쳐 빗물을 모아 맑은 샘을 이루고, 그 안에 깃들어 살아가는 생명들을 보듬어 주었다.
생명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얽히며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천 교수
식물들은 저마다 따로 자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으로 홀로 존재하는 생명은 없네.
천 교수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흔적을 남기지. 뿌리는 서로 이어지고, 덩굴은 다른 식물을 타고 올라가네. 서로 얽히고 공생하는 것이 바로 열대우림의 법칙이야.
천 교수님의 목소리가 습기 어린 숲속 골짜기에 퍼져 나갔다.
그 여운은 따뜻하고도 아득했다.
천 교수
하지만 지나치게 얽히면 다른 생명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지. 여기 있는 이 교살무화과나무가 대표적인 사례라네.
교수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자 기묘한 형태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우뚝 솟아 있던 본래의 나무는 이미 말라 죽어 속이 텅 빈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반면 그 나무를 빈틈없이 휘감은 교살무화과나무는 제멋대로 가지를 뻗으며 자라고 있었다. 놀라울 만큼 왕성한 생명력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서로 뒤얽힌 두 생명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구불구불 얽힌 뿌리를 따라 마음속에서도 무언가 조금씩 답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내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백기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백기
무슨 생각 해?
유연
그냥……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도 때로는 이렇게 공생하는 식물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에게 기대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로 자라나는 거죠.
유연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두 사람의 삶이 이미 깊이 얽혀 있어서, 이제는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게 된 거예요.
너무 솔직하게 말한 탓일까.
뒤늦게 조금 쑥스러워졌다.
하지만 백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맞닿은 손바닥 사이로 마음을 놓이게 하는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갔다.
백기
꽤 괜찮은 주제 같은데. 다만 조금 짧네.
유연
갑자기 생각난 거니까요~ 나중에 좀 더 고민해 봐야죠.
유연
선배는 더 보태고 싶은 말 없어요~?
백기는 잠시 진지하게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백기
난 그렇게 복잡한 건 잘 모르겠어.
백기
식물들은 본능적으로 햇빛과 양분이 있는 곳을 향해 자라잖아.
백기는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마음속에 품은 모든 것을 숨김없이 내보이는 것처럼 순수했다.
백기
내가 그저 네 곁에 있고 싶은 것처럼.
4장
수업이 끝난 뒤, 우리는 캠프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다큐멘터리 기획안을 겨우 몇 줄 작성했을 무렵, 맞은편 나무 탁자에 엎드린 백기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그의 얼굴에 자잘한 빛과 그림자를 드리웠고, 고르고 긴 숨소리가 편안한 꿈속으로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백기는 팔을 베고 얼굴을 옆으로 기댄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눈썹 사이도 편안하게 풀려 있어, 며칠 동안 쌓인 긴장과 피로를 모두 내려놓은 것 같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죽이고 그의 평온한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모처럼 찾아온 이 고요한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조금 전까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도, 얼마나 먼 길을 달려 내 곁에 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고집스럽고 조금은 바보 같은 그의 선택도 어느새 내가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오후의 시간이 흘러갔다.
마지막 글자까지 입력하고 나니 햇살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나는 어깨를 주무르며 기지개를 켜다가 느닷없이 느긋한 시선과 마주쳤다.
백기는 언제 깨어났는지 팔을 베고 누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는데, 오히려 그 모습이 유난히 부드럽고 편안해 보였다.
다만 눈동자에는 아직 졸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막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잠이 부족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유연
조금 더 잘래요?
백기
이제 안 잘래.
백기
잠도 실컷 잤으니까, 이제 널 보고 싶어.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노트북을 덮은 뒤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유연
그럼 저 많이 봐요. 저 보고 있으면 피곤하지도 않을 거예요.
유연
몸 좀 움직이고 싶어요?
백기
뭐든 좋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유연
이것도 제 마음대로 하라고요?
백기
전부 너한테 맞출게.
백기는 느긋하게 말하며 기분 좋은 듯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선택지가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백기가 아직 충분히 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곧바로 그 선택지들을 하나씩 지워버렸다.
역시 캠프 안에서 즐길 수 있는 놀이를 찾는 게 좋겠어.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탁자 한쪽에 놓인 보드게임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여러 번 사용한 듯 상자들이 제법 낡아 있었다.
유연
우리 보드게임 할래요?
백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흘끗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듯했다.
백기
좋아. 그럼 이걸로 하자.
옆에 있던 백기가 긴 팔을 뻗어 'Jenga'라고 적힌 나무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의 나무 덮개를 밀어 열더니 길쭉한 나무 블록들을 탁자 위에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리고 블록들을 차곡차곡 쌓아 높은 탑을 만들었다.
유연
블록 쌓기 게임 같은데요?
백기
응. 블록을 하나씩 빼서 맨 위에 올리는 거야. 먼저 무너뜨리는 사람이 지는 거고.
유연
듣기에는 꽤 간단한 것 같은데요~
백기
그럼 난도를 좀 높여볼까?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는 거야.
백기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나무 상자에서 작은 망치 두 개를 꺼냈다.
그중 하나를 내 앞으로 밀어주며 먼저 시작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나무 탑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있는 블록 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망치로 살짝 두드렸다.
블록을 빼내 맨 위에 올려놓을 때까지도 탑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유연
이제 선배 차례——
탁!
짧고 경쾌한 소리가 내 말을 끊었다.
무언가 휙 스쳐 지나가더니 튕겨 나온 나무 블록이 허공에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며 탁자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탑 맨 아래층의 가운데에 이미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백기는 작은 망치를 느긋하게 까딱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몇 차례 게임을 진행하고 나서야 나는 이것이 백기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일부러 가장 위험한 블록만 골라 빼내면서 게임의 진행 속도를 빠르게 높이고 있었다.
그러다 나무 탑 전체가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유연
자, 자, 잠깐만요! 혹시 저한테 들어달라고 할 소원이 있는 거예요?
유연
아무리 그래도 너무 봐주지 않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내 항의에도 백기는 그저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백기
푹 잤으니까 몸 좀 움직여야지.
말투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어쩐지 다른 뜻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곧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바라보았다.
유연
그렇다면 이제 저도 실력을 전부 발휘해야겠네요. 더는 봐주지 않을 거예요.
백기
그래? 그럼 어디 해봐.
다음 순간, 나는 백기를 따라 위험해 보이는 블록 하나를 망치로 쳐냈다.
속도가 충분히 빠르지 않았던 걸까.
블록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지만, 힘을 받는 지점이 달라진 탓에 나무 탑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몇 초가 지나자 흔들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의기양양해졌다.
백기도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는 탑이 아직 흔들리고 있는데도 망설임 없이 망치를 휘둘러 하중을 지탱하던 블록 하나를 쳐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예상했던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무 탑은 한층 더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놀랍게도 다시 균형을 되찾았다.
문제는 내가 작은 망치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그제야 모든 블록이 절묘하게 균형의 한계에 걸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뒤늦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전부 막혀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유연
……이,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백기
그럼 지금 항복해도 돼.
백기는 방금 빼낸 블록을 느긋하게 탑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그 얼굴에는 승리를 확신하는 여유가 가득했다.

바로 다음 순간,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나무 탑이 한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정교하게 맞물려 있던 블록들의 지지 구조가 갑자기 어긋나면서 간신히 유지되고 있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백기의 두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맑은 눈동자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당혹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와르르——!
결국 나무 블록들이 요란하게 무너져 내리며 탁자 위로 사방에 흩어졌다.
백기
……
백기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은 아직도 허공에 멈춰 있었다. 조금 전 블록을 올려놓던 자세 그대로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백기도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백기
역시 바람은 여전히 네 편이네.
유연
헤헤, 바람만 그런 게 아니잖아요. 선배도 저한테 한없이 약하면서~
여름 바람이 부드럽게 휘몰아쳐 지나갔다.
마치 소년의 설레는 마음까지 몰래 실어 온 것 같았다.
백기
내기를 했으니 졌으면 따라야지. 뭐가 갖고 싶어?
백기는 편안하게 미소 지으며 느긋하게 탁자 가장자리를 짚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일부러 진지하게 한참 고민하는 척했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휘며 웃었다.
유연
선배가 저랑 한 번 더 놀아줬으면 좋겠어요.
백기
그거야 쉽지.
담담한 대답이었지만, 어쩐지 더없이 진지한 약속을 건네는 것 같았다.
백기
천 번이든 만 번이든 얼마든지 함께해 줄게.
그렇게 젠가 탑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흔들리는 가운데 새로운 균형을 찾아내면서.
가끔 균형을 찾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어차피 운명은 이미 우리를 서로 얽어놓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