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열대의 바닷바람이 해변가 카페 안으로 스며들어 처마 밑에 걸린 조개껍데기 풍경을 맑게 울렸다.
싱그럽게 우거진 초록 식물들 사이로 은은한 커피 향이 감돌았고, 여행객들이 나지막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여유로운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창가에 놓인 라탄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시원한 코코넛 워터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탁자 위로 가벼운 진동이 전해지더니 백기의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순간 가슴이 살짝 조여들어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화면에 뜬 것은 별자리 관측 앱에서 보내온 평범한 알림일 뿐이었다.
휴가가 벌써 절반 가까이 지났지만, 그 '야근' 전화는 아직 한 번도 걸려 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멀지 않은 해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부신 햇살이 바다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수많은 서퍼들이 바다 끝을 향해 파도 꼭대기에 올라타며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시선은 거의 순식간에 너무나 익숙한 한 사람의 모습에 머물렀다——
막 서핑을 마친 백기가 고운 모래를 밟으며 해변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아무렇게나 고개를 털자 젖은 머리카락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시원하게 튀었다.
물기를 머금은 피부는 건강한 구릿빛으로 빛났고, 온몸에서는 활기차고 자유분방한 소년 같은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계속 이렇게 여유롭게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턱을 괴고 멍하니 백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패들보드를 해변의 나무 거치대에 걸어 놓았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청년 몇 명이 농구공을 안고 그에게 다가갔다.
백기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람들 너머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청년들도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더니, 무언가 알아들었다는 듯 백기를 향해 OK 표시를 해 보였다.
유연
……?
백기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궁금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유연
저 사람들이 선배한테 같이 농구하자고 했어요?
백기
응. 근처에 사는 애들인데, 그저께 아침에도 같이 농구했어.
백기
오늘 마침 또 마주쳤는데, 3대 3 경기에 한 명이 부족하다고 물어보더라.
백기는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화면을 흘끗 확인하더니, 곧바로 화면을 껐다.
백기
그런데 여자친구랑 같이 놀러 온 거라고 말했어.
백기
먼저 여자친구한테 허락받아야 한다고.
백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내가 건네준 차가운 코코넛 워터를 받아 크게 한 모금 마셨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유연
선배 여자친구는 반대하기는커녕 엄청 보고 싶어 하는데요~
백기
그럼 이거 다 마시고 가자.
백기의 눈에 흥미가 가득한 것을 보자 나도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마른 수건을 집어 들어 아직 축축한 그의 머리 위에 덮어주었다.
유연
어쩐지 선배는 이번 휴가를 운동 캠프처럼 보내는 것 같아요.
유연
이렇게 계속 운동하면 안 피곤해요?
백기
네가 예약해 준 마사지랑 얼음 목욕이 꽤 효과가 좋더라.
백기
몸이 개운해지니까 자꾸 움직이고 싶어져. 게다가……
백기는 입꼬리를 올렸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백기
내가 운동할 때마다 네가 항상 날 쳐다보잖아.
유연
……
내가 바라보는 모습을 백기가 진작부터 전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귓가가 조금 뜨거워졌다.
유연
잘생긴 사람은 원래 좀 봐줘야 하는 거잖아요……
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오히려 그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백기
그럼 많이 봐. 어떻게 봐도 상관없어.
백기
어차피 난 네 거니까.
그때 탁자 위의 휴대전화가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선명하게 '류 부장'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순간 주변의 공기가 살짝 굳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백기는 이미 전화를 받고 있었다.
통화가 길어질수록 그의 미간은 점점 깊게 찌푸려졌고, 나중에는 눈까지 가늘게 뜨고 있었다.
마침내 백기는 수건을 어깨에 아무렇게나 걸치며 간결하게 대답했다.
백기
알았어. 이해했어.
하지만 전화 너머에서는 여전히 무언가를 당부하는 모양이었다.
백기는 조금 난처한 듯 입꼬리를 씰룩였다.
백기
걱정하지 마. 나도 적당히 할 줄 알아.
2장
백기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잦아지는 연락과 이따금 찾아오는 현지 경찰관들을 통해 그가 말없이 바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백기는 미리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일정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눈앞에는 동굴처럼 생긴 높은 돔 천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 들어서자 바깥세상의 온갖 소란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유연
선배, 정말 시간 괜찮아요?
백기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하고 있어.
백기는 자연스럽게 대답하며 내 손끝을 살짝 쥐었다.
우리는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푹신한 방석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돔 천장 한가운데로 한 줄기 햇살이 쏟아져 내려 부드러운 질감의 둥근 벽면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크고 작은 징과 싱잉볼, 핸드팬 같은 악기들이 주변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들을 깨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앞쪽에는 세 명의 힐링 테라피스트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참가자들에게 체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테라피스트
오래되고 신비로운 선율이 울려 퍼지면……
테라피스트
여러분의 의식은 그 경계를 서서히 열게 될 것입니다.
테라피스트
이곳에서 경험하는 여정은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테라피스트
어쩌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될 수도 있고,
테라피스트
어쩌면 영혼에 아득히 남아 있는 기억과 마주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테라피스트
혹은 그저 깊고 편안한 잠에 빠져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될지도 모르죠.
때로는 아득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공간 안에 길게 울려 퍼졌다. 그럴수록 눈앞의 모든 것에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가 드리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옆에 앉은 백기는 이런 신비주의적인 설명에 별다른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소리 없이 하품을 하더니 아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싱잉볼을 천천히 두드리자 길고 낮은 울림이 공기 중으로 서서히 퍼져 나갔다.
부드럽게 튕겨지는 기타 선율 몇 가닥이 밀려드는 조수처럼 흘러가며, 맑고 신비로운 핸드팬의 배음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 소리에는 경계도, 끝도 없는 것 같았다.
공간 전체가 울림으로 가득 찬 하나의 그릇이 된 듯했다.
모든 소리를 부드럽게 받아 올리고, 그 울림이 평온하게 의식 위로 번져갔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계속 걸리는 일이 있어서일까.
이토록 평화로운 소리 속에 앉아 있는데도 머릿속은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백기를 바라보았다.
백기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방석에 기대어 있었다. 평소 날카롭게 치켜올라가 있던 눈썹도 편안하게 풀려 있었다.
돔 천장에서 새어 들어오는 은은한 빛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원래도 아름다운 얼굴의 윤곽이 한층 더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조용히 잠든 백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희미하게 팽팽해져 있던 무언가가 나도 모르게 조금씩 느슨해졌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나도 덩달아 졸음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백기와 함께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길게 이어지는 울림 속에서 의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빛을 지나고, 소리를 지나——
축축하고 후텁지근한 열대의 바람이 갑자기 품 안으로 세차게 밀려들었다.
귓가에는 대형 오토바이 엔진의 포효가 울려 퍼졌고, 발아래에서는 배기관이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시야 앞쪽에서는 지프차 여러 대가 진흙투성이 열대우림을 가로질러 거칠게 질주하고 있었다.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은 나는 익숙하게 상체를 낮추고 앞에 앉은 사람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옷감 너머로도 그의 탄탄한 허리와 복부 근육이 호흡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길고 곧은 두 손은 핸들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가속과 방향을 정확하게 조절하며 앞차와의 거리를 끈질기게 유지했다.
차창 밖으로 험악하게 웃는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시커먼 총구를 우리에게 겨눴다——
백기
꽉 잡아.
그의 목소리는 느긋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다.
마치 눈앞의 위기조차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게임에 불과하다는 듯했다.
바로 다음 순간, 눈앞의 세상이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오토바이는 거의 한계에 가까운 각도로 진흙 바닥을 스치듯 기울어지며 날아오는 총알을 피했다.
뜨거운 총탄이 차체를 스치고 지나가 등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터뜨렸다.
흙과 자갈이 사방으로 날아오르고 석양빛마저 흔들리는 와중에도 백기는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는 그가 어떻게 움직였는지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은 권총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이어지는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총을 들어 올리고,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지프차의 뒷바퀴에 총알이 정확히 명중했다.
차량은 통제력을 잃고 산비탈의 암벽을 스치며 연달아 불꽃을 튀겼지만, 여전히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런데 시야 속 지평선이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졌다.
앞쪽 지형이 돌연 끊겨 있었다——
절벽인 것 같았다.
지프차는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산길 밖으로 돌진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
백기가 오토바이 뒷바퀴를 날렵하게 미끄러뜨리며 방향을 틀었고, 우리는 가까스로 절벽 끝에서 멈춰 섰다.
깊은 계곡 아래에서는 지프차들이 이미 논밭까지 굴러떨어져 뒤집히고 나뒹굴고 있었다. 그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백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마침내 덫에 걸린 사냥감을 느긋하게 내려다보았다.
백기
가자. 이제 잡으러 가야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긴 다리로 땅을 지탱하고 손목을 돌려 스로틀을 끝까지 당겼다.
심장이 목에 걸린 것 같았고, 피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나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닻을 붙잡듯 그의 허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오토바이는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향해, 절벽 끝에서 굉음을 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순간 몸이 붕 뜨는 감각과 함께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심장은 여전히 가슴속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어스름한 빛 속에서 주변의 윤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절벽도 없고, 거센 바람도 없었다.
오직 고요한 돔 천장과 공기 속에서 은은하게 코끝으로 스며드는 백단향만이 있었다.
귓가에 남아 있던 싱잉볼의 여운도 점차 멀어지더니 마침내 고요 속으로 사라졌다.
테라피스트가 차분하게 마무리 인사를 전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몽롱한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체험이 거의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둘씩 셋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지막한 대화 소리가 하나둘 들려올 무렵이었다.
옆에 있던 백기는 한참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몸을 기울여 다가왔다.
백기
악몽 꿨어?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꿈속에서 악당들이 처참하게 도망치던 장면이 떠오르자 다시 고개를 저었다.
백기는 그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긴 팔로 나를 감싸 자연스럽게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백기
말 안 해도 돼.
백기
나중에 내가 직접 알아내면 그땐 뒷감당할 생각하고.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가벼웠다.
하지만 그의 눈은 한순간도 내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도망칠 곳이 없어진 나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유연
알겠어요, 경관님. 다 털어놓을게요. 그냥 선배랑 같이 용의자를 추격하는 꿈을 꿨어요.
백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유연
열대우림에서 오토바이로 질주하고 총격전도 벌이고요. 꼭 액션 영화에 나오는 장면 같았어요.
백기
용의자는 몇 명이었는데?
유연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조금 전의 꿈을 천천히 떠올려 보았다.
유연
열 명 정도요. 백 경관님이 혼자서 열 명을 가볍게 상대했는데, 정말 엄청 멋있었어요!
유연
이제 제가 악몽을 꾼 게 아니라는 거 믿겠죠~
백기
왜 악몽이 아니야. 고작 열 명 상대하는데 그렇게 고생했잖아.
백기
나 고등학교 때는 혼자서 쉰 명을 상대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백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어.
백기가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는 척했다.
유연
그러게요. 제 남자친구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깜빡할 뻔했네요.
내가 사뭇 진지하게 말하자 백기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돔 천장 아래로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던 소란까지 모두 덮어주는 것 같았다.
나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속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유연
그럼 선배는요? 아까 잠들었을 때 꿈 꿨어요?
백기
아니. 음악이 너무 졸리게 만들어서 아무 생각 없이 푹 잤어.
백기
그런데 잠들기 전에 한 가지 생각이 들긴 했어.
내가 궁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백기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백기
내가 연주하는 기타가 더 듣기 좋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었어.
3장
백기는 전보다 더 바빠진 듯했다. 하루 종일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는 날이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마침 외출을 준비하던 백기와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달려갔다.
백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를 품에 끌어안고, 내 정수리에 턱을 살며시 얹었다.
백기
내가 깨웠어?
유연
흥흥, 오히려 좀 더 자주 깨워줬으면 좋겠는데요.
유연
그래야 선배가 나갈 때마다 인사라도 할 수 있잖아요.
백기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네가 자고 있을 때 이미 인사하고 나갔으니까.
백기는 웃으며 몸을 숙여 다정하게 내 코끝에 자신의 코를 비볐다.
백기
오늘 저녁엔 숙소에서 국수 끓여 먹을까?
백기
나온 지 꽤 됐더니 갑자기 매콤한 게 당기네.
백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했지만, 동시에 말없이 무언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그와 함께 웃음을 지었다.
유연
선배가 가져온 그 칠리소스, 혹시 오늘을 위해 챙긴 거예요?
백기
그 사람들 일 처리하는 속도를 내가 너무 잘 알거든.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십중팔구 제때 끝내지 못할 테니까.
유연
하하하, 알겠어요, 알겠어. 오늘 저녁에는 고생한 우리 백 경관님이 실컷 드실 수 있게 해드릴게요~
백기가 조금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을 보자, 나는 웃으며 참지 못하고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유연
하지만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도록 안 돌아오면……
유연
제가 전부 먹어버릴 거예요. 선배는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거죠.
백기는 낮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백기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장관님.
어느새 서로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일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녹아들어, 더없이 평범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휴가는 섬의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서두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조금씩 끝을 향해 흘러갔다.
어떤 날에는 길모퉁이의 공예 공방에 들러 삐뚤빼뚤한 도자기 항아리를 만들었고, 또 어떤 날에는 카페에 들어가 바닷바람을 쐬며 느긋하게 일을 처리했다.
매일 잠들기 전에는 백기를 위해 작은 등불 하나와 따뜻한 식사를 남겨두었다. 늦은 밤 돌아온 그의 온몸에 쌓인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리기를 바라면서.
한밤중에 비몽사몽 잠들어 있을 때면 언제나 옆자리가 살짝 꺼지는 느낌과 이마에 내려앉는 가벼운 입맞춤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익숙한 온기를 따라 백기와 함께 다시 달콤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촘촘히 쌓여가는 그리움과 애틋한 마음은 말없이 서로에게 포개어졌고, 우리 둘 다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모처럼 백기가 외출하지 않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침 일찍부터 서재에 들어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오후의 찬란한 햇살이 나무 격자창을 통과해 들어왔고, 공기에는 한여름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조금 감돌았다.
나는 내내 닫혀 있는 서재 문을 바라보다가 차갑게 식혀둔 수박을 한 접시 썰어 조심조심 가져갔다.
나무문은 방음이 그리 잘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문틈으로 백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백기
……이번 작전은 포위 작전이야. 서로 협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해.
백기
주도권은 우리한테 있지만, 어쨌든 상대 쪽 관할에서 진행하는 일이니까 지켜줘야 할 체면은 지켜줘.
간결하고 단호하게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잠시 생각하다가 과일 접시를 든 채 발소리를 죽이고 다시 거실로 돌아가려 했다.
백기
유연아?
그때 갑자기 문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백기는 누군가에게 몇 마디를 더 빠르게 지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다시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백기
들어와.
나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쌉싸래한 커피 향이 코끝으로 밀려왔다.
두툼한 서류철들이 여러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 펼쳐진 사건 기록들이 책상 위를 거의 가득 메우고 있었다.
종이 모서리는 살짝 말려 있었으며, 빼곡하게 적힌 메모들로 보아 이미 수없이 들춰본 자료인 듯했다.
백기의 업무가 이곳을 조금씩 차지하기 시작한 뒤로, 원래는 휑하던 공간이 온갖 서류로 가득 차 분주하고 어수선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백기는 느긋하게 사건 기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긴 다리도 편안하게 포개고 있었다.
몸에 잘 맞게 재단된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목깃의 단추는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상태였다.
그 모습에서는 모든 상황을 손안에 쥐고 있는 사람 특유의 여유가 느껴졌다.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고 팔을 들어 올리자, 팔뚝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근육선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다 문득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여러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백기의 화상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손에 든 과일 접시를 살짝 들어 보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연
방금 차갑게 식혀둔 과일 좀 먹어보라고 가져온 것뿐인데…… 왜요?
백기
마침 잘 왔어.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백기는 태연하게 헤드셋을 벗고 다시 옆에 놓인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기
다들 인사해.
유연
……?
대원들
형수님, 안녕하세요!
대원들
형수님, 오랜만이에요!
열정적이고 거리낌 없는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귓가로 밀려들었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어렴풋이 무슨 상황인지 짐작하고 서둘러 몇 걸음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에는 특별행동팀의 익숙한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모두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반가운 마음에 화면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유연
와, 여러분도 여기 왔어요——
당조
중요한 임무인데 저희가 빠지면 백 팀장님이 어떻게 하시겠어요.
당조
저희도 며칠 전에 도착했거든요. 원래는 인사드리러 가려고 했는데, 백 팀장님이 못 가게 하셨어요. 뭐라더라,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 해서 곤란하다나?
당조가 눈썹을 씰룩이며 능청스럽게 카메라 앞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백기는 느긋하게 수박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백기
그렇게 말할 기운이 넘치면 오늘 밤엔 네가 선두에 서.
당조
둘만의 시간 좋죠! 둘만의 시간은 정말 좋습니다! 당연히 방해하면 안 되죠!
당조는 순식간에 웃음을 거두더니 과장되게 경례까지 붙였다.
그 모습에 모두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 참지 못하고 함께 웃었다.
화기애애한 웃음소리 속에서 마음 전체가 부드럽게 녹아드는 것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백기를 바라보았고, 마침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호박색 눈동자에는 생기 넘치면서도 확신에 찬 웃음이 가득했다.
그 눈빛은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으며 마음을 놓이게 해주었다.
백기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어.
4장
베개 옆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더듬어 집어 들자 화면이 서서히 밝아졌다.
새벽 3시였다.
창밖에서는 파도가 지칠 줄도 모르고 해안을 두드리고 있었다. 고요한 밤이라 그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몸을 뒤척였다. 어느새 잠기운이 서서히 달아난 것을 느끼고는 아예 얇은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에 앉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국제 뉴스 페이지를 열었다.
검색창 아래에는 이미 수많은 검색 기록이 남아 있었다——
'국제 공조 작전', '합동 검거', '해외 법 집행'……
나는 다시 한번 검색어들을 눌러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화면에 나타난 것은 몇 달 전의 오래된 기사나 별다른 관련이 없는 과거 발표 자료뿐이었다.
이젠 익숙한 일이라는 듯 입술을 살짝 다문 나는 화면을 몇 페이지 더 내려보다가 그대로 빠져나왔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던 순간, 손바닥에 짧은 진동이 전해졌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갑자기 밝아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백기
"끝났어. 전부 순조롭게 마무리됐어."
짧은 메시지는 마치 지극히 평범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마음 한편은 묵직했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생각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유연
"백 팀장님, 임무 무사히 마치신 거 축하드려요! 집에서 기다릴게요."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백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귓가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몰래 안 자고 있었어?
유연
보고합니다! 잤어요! 자다가 중간에 잠깐 깬 것뿐이에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낮은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가 귓가를 타고 더없이 부드럽게 퍼졌다.
백기
여긴 아직 인계해야 할 일이 좀 남아서 당장은 출발 못 해.
백기
말 잘 듣고 조금 더 자.
전화 너머에서는 발소리와 중국어, 영어가 뒤섞인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마 아직 마무리 작업이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유연
알겠어요.
백기
말로만 알겠다고 하지 말고, 지금 바로 가서 누워.
백기
네가 잠들면 끊을게.
그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유연
그래도 잠이 안 오면 어떡해요?
백기
그럼 어떻게든 재워줘야지.
말투는 분명 느긋했지만, 어쩐지 거절할 수 없는 명령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유연
그런데 선배 쪽은 굉장히 분주한 것 같은데요. 외국 동료들도 옆에 있는 거 아니에요?
백기
다들 자기 일 하느라 바빠. 나한테 신경 쓸 겨를 없어.
수화기 너머로도 그가 의기양양하게 눈썹 끝을 치켜올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탁자 위에 엎드렸다.
휴대전화에 머리를 기댄 채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가까웠다.
유연
알겠어요. 더는 일하는 거 방해하지 않을게요. 선배 가족은 이제 정말 자려고요.
유연
제가 깨어날 때쯤이면 선배도 집에 와 있겠죠?
백기가 낮게 응, 하고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웃음기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백기
눈뜨자마자 제일 먼저 날 볼 수 있게 해줄게.
유연
그럼 얼른 눈 감아야겠네요.
나는 나지막하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시야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자 오히려 그의 숨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귓가에 닿는 따뜻하고 안정된 숨결은 마치 일부러 속도를 늦춘 것처럼 느리고 부드러웠다.
어느새 세상에는 그의 숨소리와 내 숨소리만 남은 듯했다.
때로는 엇갈리고, 때로는 같은 박자로 포개지는 두 사람의 숨결.
깨어 있는 의식과 몽롱한 잠결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졌다.
오직 그 편안한 숨결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마치 평범한 어느 날, 그에게 안겨 잠들던 순간처럼.
백기
잘 자.
***
백기가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식탁 옆에 웅크리고 잠든 그녀의 모습이었다.
주변은 온통 고요했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몸 위로 내려앉아, 마치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빛나는 자리인 것 같았다.
공기에는 달큰한 쌀죽 향이 감돌았다.
주방 한쪽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전기밥솥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백기는 문가에 선 채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너무 졸려서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참지 못하고 주방으로 걸어가 전기밥솥에서 죽을 작은 그릇에 조금 떠 담았다.
따뜻한 김과 함께 쌀 향이 천천히 퍼져 나왔다.
그 온기가 속까지 포근하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분명 낯선 외국 땅에 와 있었는데도, 백기는 자신이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며 죽을 다 먹은 뒤,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릇을 씻었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여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녀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긴 속눈썹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고, 얼굴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뺨에는 식탁 모서리에 눌려 생긴 희미한 붉은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백기는 한동안 그 자리에 시선을 머물렀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숙여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옆에 놓인 휴대전화 화면은 아직 켜져 있었다.
통화가 끝난 뒤에도 국제 뉴스 페이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
백기는 한동안 그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몇 번이고 페이지를 새로고침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두 사람은 언제나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백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겉옷 가슴께에 넣어둔 사진은 가볍지만 동시에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선물해 준 군번줄도 옷 안에 소중히 감춰두고 있었다.
그리움은 이렇게 구체적이고도 다정한 모습으로 이어져 그를 떠받쳤다.
마치 몸 전체가 가벼워져 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백기는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다른 손끝으로 애틋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너무나 따뜻한 세상이어서 졸음이 한층 더 밀려왔다.
하지만 도저히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너를 바라보고 싶어.
네가 너무 좋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역시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의 손끝이 다시 그녀를 어루만졌고, 몸도 조금 더 가까워졌다.
유연
……백기.
그녀가 잠결에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백기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꿈속에서 그녀의 손가락이 살짝 움츠러드는 것을 보자,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조금 서늘한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감싸 쥐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백기
응, 나 왔어.
너무나 평범한 말이었다.
백기는 이미 수천 번, 수만 번도 더 그 말을 해왔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경건함에 가까운 평온함과 확신이 새롭게 피어났다.
그때 갑자기 옆에 놓인 휴대전화 화면이 반짝였다.
방금 게시된 국제 뉴스 기사 하나가 알림창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공안부: 대규모 초국경 도박·사기 범죄 조직 두목, 인도네시아에서 국내로 성공적으로 압송."
백기는 화면을 담담하게 흘끗 바라본 뒤 휴대전화 옆면의 무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한 팔을 그녀의 무릎 뒤로 넣고, 다른 팔로는 등을 단단히 받쳤다.
그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소파로 옮겼다.
그녀는 마침내 그리워하던 안식처를 찾은 사람처럼 그의 품에 편안하게 파고들었다.
백기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살며시 기댔다.
창밖의 아침 햇살이 조금씩 안으로 스며들었다.
밤의 어둠은 어느새 하늘 끝으로 조용히 흩어지고 있었다.
아직 먼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과 시련은 결코 이 순간 때문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직 닥치지 않은 먼 훗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감싼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서로의 숨결과 심장박동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까지.
백기는 생각했다.
이제 자신은 이와 다른 삶의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