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장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빛의 기둥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꿰뚫었다.
핏빛으로 물든 저녁 햇살 너머로, 나는 백기를 보았다.
연기와 먼지가 그의 몸 대부분을 덮고 있었다. 그는 폐허의 그늘 속에 숨어, 한 방향만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심장은 미친 듯 뛰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잊은 채, 비틀거리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거의 동시에, 차가운 총구가 경계하듯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나는 아득한 눈빛을 보았다.
그의 동공이 순간 크게 열리고,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잿빛의 황량함과 살벌함 속에서, 시간은 마치 멈춘 듯했다.
하지만 그건 한순간뿐이었다. 그는 곧 고개를 돌려,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멀리로 걸음을 옮겼다.
유연
……!
유연
선배!!
터져나가는 포격과 비명이 내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울음과 불타는 분노가 뒤엉켜 세상을 덮었다.
모든 공격이 백기에게만 집중된 듯해, 나는 그 틈을 타 간신히 엄폐물 사이를 파고들며 움직일 수 있었다.
옆에서 불길이 치솟을 때마다, 공포가 본능적으로 온몸을 덮쳐 나를 떨게 했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른 채, 평생의 운을 다 쓴 듯한 끝에야 폐허의 한 구석, 그의 뒤에 도착했다.
우리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동공이 격렬하게 수축했다. 빠르게 몸을 돌리는 찰나, 들고 있던 총구가 비틀리듯 비껴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차갑고 날카로운 탄환의 궤적이 귓가를 스쳤다. 세상은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가슴을 찢듯 뛰는 심장 소리만 남았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총을 쥔 손에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백기
너 도대체 왜……!
그는 거의 분노에 찬 듯 외쳤지만, 말은 목구멍에서 멈췄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고개를 저으며, 마침내 지독히도 힘겨운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백기
……미쳤어, 정말.
그는 온몸이 너덜너덜했고, 상처투성이였다. 마치 경계심을 풀지 못하는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내 마음은 옥죄어왔다. 그의 어두운 눈빛 속 경계심을 마주하며, 나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와 그의 숨결이 함께 밀려왔다.
총구는 여전히 나를 겨누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단단히 나를 붙잡았다.
나는 차마 그의 상처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나는 떨리는 손을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따뜻하고 끈적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그는 내 손길에 잠시 움찔했지만, 곧 그 손길을 탐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유연
아파요?
백기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로잡는 시선이 곧게 내게 꽂혔고, 그 안에는 어둡고 침잠한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백기
……너 여기 오면 안 됐어.
유연
하지만, 선배가 여기에 있잖아.
유연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니까, 내가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갑자기 건물 밖에서 거대한 바람의 벽이 솟구쳤다.
거센 바람이 울부짖듯 하늘과 땅을 흔들며, 연기마저 휩쓸어 어두운 벽을 만들어냈다.
그 음울한 장막 안에서, 백기가 나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는 팔에 더욱더 힘을 주어, 내 몸이 아플 정도로 죄어왔다.
그건 ‘포옹’이라기보다는, 나를 자신과 하나로 만들고 싶어 하는 듯한 절박함이었다.
유연
선……
내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그는 거칠게 내 뒤통수를 눌렀다.
거칠고 갈망이 뒤섞인 키스가 쏟아졌다.
그는 아무런 주저 없이 파고들어, 치아가 부딪히며 작은 소리가 났다.
짙은 쇠맛 같은 비린내와 그의 숨결이 함께 혀끝에서 혀뿌리까지 뒤엉켜,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는 끊임없이 팔을 조이며 나를 세차게 끌어당겼다.
나는 이 광란 속에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휘청거렸다.
거친 숨결이 뒤섞이는 사이, 그는 마침내 조금 몸을 떼어냈다.
우리 사이에는 가느다란 반투명한 은빛 실 같은 것이 이어져 있었지만,
너무 연약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했다.
바람소리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그럼 조금만 더 나랑 있어 줘.
02장
밤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터져 오르는 불빛이 간헐적으로 세상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백기는 나를 감싸 안고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구석구석을 확인한 뒤, 내 손을 끌어 벽 쪽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는 군용 위성 전화를 꺼냈다.
백기
B-7, 제3단계 지정 좌표 도착. 이상 없음.
잠시 후, 그의 이어폰 너머로 무언가가 전해졌다. 그는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아, 몸을 바짝 긴장시킨 채 숨결을 억누르고 있었다.
유연
……괜찮아요?
그는 눈을 깜빡이며, 둔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분명히 나만이 비쳤는데 왠지 초점이 흐려진 듯, 아득한 안개가 깔려 있었다.
백기
괜찮아.
백기
모든 게 순조롭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그는 손을 들어, 예전처럼 내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손끝이 공중에서 잠시 멈췄다가, 아주 살며시 내려왔다.
곧 백기는 손을 거두고, 허리에 걸린 물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꽂아둔 작은 칼도 꺼냈다.
그는 먼저 상처 주변, 피로 더러워진 옷자락을 조심스레 잘라내어 드디어 상처를 온전히 드러냈다.
그 흉터들은 더 또렷하게 내 눈에 박혔다. 팔, 어깨, 허리, 허벅지……
나는 손끝을 손바닥 깊숙이 파묻듯 쥐고,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터져 나오지 않게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어서 그는 아끼듯 물통 속의 물을 조금씩 직접 부어 상처 주변에 박힌 모래와 파편들을 씻어냈다.
팽팽한 근육이 숨결과 함께 본능적으로 수축하고 떨렸고,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며 어두운 자국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잘생긴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차분하고 능숙하게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는 손발을 가볍게 움직여 보기도 했다. 상처에서 더 많은 피가 흘러나왔지만, 오히려 만족스럽다는 듯 스스로 아직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 그는 벌에 쏘인 듯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다음 순간, 그는 손을 들어 내 눈을 가렸다.
백기
보지 마.
백기
보기 흉해.
유연
……그런 거 아니야, 보기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 손길 너머로 심장이 아프게 쿵쿵거렸다.
백기
내가 잘못 말했어. ……보기 싫다기보단, 좀 무서울 거야.
유연
……하지만 난 안 무서워.
백기
……내가 무서운 거야.
네가 나를 보고 마음 아파할까 봐, 꿈과 그리움이 너무 생생할까 봐, 내가 너에게 너무 깊이 빠져버릴까 봐……
귓가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의 손을 들어 올려 치우고, 그가 스스로 상처에 대충 붕대를 감고 있는 걸 보았다.
유연
내가 해줄게요, 응?
그의 손가락 사이로, 우리 시선이 마주쳤다. 수많은 감정이 뒤엉켜 진득하게 섞이다가, 마침내 그가 느리게 붕대를 내밀며 타협하듯 팔을 펼쳐 보였다.
나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지만, 그럼에도 상처를 감쌀 때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사실 이렇게까지 여기 남아 이런 일을 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가 이렇게 앉아 있는 모습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가 이미 상처투성이란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유연
……선배,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아?
백기
널 집에 데려가야 하니까. 아까도 그렇게 말했잖아.
유연
아니야. 내 말은…… 내가 왜 여기 올 수 있었는지, 왜 네 앞에 설 수 있었는지 그걸 묻는 거에요.
평소라면 내 행동 하나하나만 보고도 결과를 짚어낼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냉정하고 신중한 눈빛 속에서, 왜 지금 이 순간 내 등장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 거야?
백기
……왜냐면, 내가 널 여기 오게 하고 싶었으니까.
백기
내가…… 널 보고 싶었으니까.
유연
선배는 내가 선배 앞에 있다는 걸 믿지 않는구나.
백기
……믿지 못하는 건 오히려 너야.
백기
나 말고는 아무도 널 이곳으로 데려올 자격이 없어…… 아니, 나조차도 없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기
……너는 지금 우리의 집의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해. 오늘 날씨는 참 좋을 거야. 아래 과일 가게에서 사온 과일 화채를 먹으면서, 방금 업데이트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어야 해.
백기
여기 있는 게 아니라.
유연
그럼…… 나는 지금 뭐야?
백기
너는 모든 것이고,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말은 가볍지만 단호했고,
마치 혼자서 하는 황망한 독백 같았다.
유연
그럼…… 이제 선배는 무엇을 하려는 거야?
백기
고립된 평화유지군 대원 3명을 찾으러 가야 해.
백기
……현지 주민들을 대피시키다 고립된 평화유지 부대를 구해야 하고.
백기
그리고…… 본부대와 합류해야 해.
백기
……철수 경로에서 일부러 화력을 끌어내, 모든 인원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엄호해야 해.
그의 말은 끊어졌다 이어지며 제멋대로 건너뛰는 것 같았다. 마치 서로 다른 시간대의 임무를 설명하다가, 이어 붙이지 못한 조각들이 흩어진 듯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뺨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연
그럼 다른 사람들은? 선배 말고,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
백기
대장…… 아니, 방 형은 10시 방향에 있어. 시 공은 루일과 함께 앞쪽에 있고, 항졔와 아률은 2시 방향 저격 지점에서 천천히 철수 준비 중이야.
백기
……그리고 부대장…… 나는 방 영장과 합류했고, 소국은 그 옆에 있어.
백기
다들…… 다들 있어.
그가 길게 숨을 내쉬자, 그의 눈매가 조금씩 풀어지며 옅은 미소가 번졌다.
유연
다행이야…… 그럼 우리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유연
이제 이곳을 떠나자.
백기는 눈을 떼지 않고 나를 바라보다가, 방금의 미소를 조금 더 깊게 지었다.
백기
응, 집으로 가자.
백기
네 곁으로.
그는 나를 더 꼭 끌어안고, 얼굴을 내 뺨에 스치듯 붙이며 가만히 비볐다.
백기
연아, 날 그리워했어?
유연
했죠. 매일, 매 순간 선배만 생각했어요.
유연
선배가 무사한지, 잘 쉬고 있는지, 다치진 않았는지……
백기
그런데 왜 내가 널 생각했는지는 안 물어봐?
유연
굳이 말 안 해도 돼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턱에 살짝 입을 맞췄다.
유연
나는 선배가 내 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돼. 내 앞에서, 천천히 나를 생각해 주면 돼.
백기
앞의 건 지킬 수 있지만…… 뒤의 건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냐. 그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백기
……어쨌든, 나는 꼭 네 곁으로 돌아갈 거야.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살짝 고개를 숙여 내가 방금 키스한 그의 윗입술에 이마를 기댔다.
백기
유연아, 안아 줘.
붕대에 다시 피가 스며드는 걸 보면서, 나는 그의 등을 살짝 끌어안았다.
백기
아무 느낌도 나지 않잖아. 너무 성의 없어.
유연
난 선배가 아플까 봐 그런 거야!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화가 나, 그를 째려보며 조금 더 힘을 주어 우리 몸이 더 가까워지게 했다.
백기
그럼…… 한 번 더 키스해 줘.
그의 입술은 이미 내 것에 닿아 있었고, 말끝에도 촉촉한 기운이 묻어 있었지만, 그는 굳이 그렇게 말했다.
그의 깊은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그가 하던 대로 그의 혀끝을 살며시 물고, 애틋하게 구석구석을 빨았다.
유연
……이렇게?
백기
부족해.
백기
조금만 더, 오래 키스해 줘.
내가 더 깊이 그에게 몸을 밀착시킬 때,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마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맑으면서도 몽롱했다.
그 모순된 시선 속에서, 나는 모든 것이 벗겨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어둡고도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보였지만, 내가 들어올 때마다 그 감정은 끊임없이 퍼지고, 부풀어 올랐다. 순간조차 멈출 수 없을 만큼.
언제부턴가 그는 이미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 휩싸여 서서히 모든 주도권을 되찾았다. 손끝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그것은 통제불능이라기보단, 오히려 의식적인 방종에 가까웠다.
빛 없는 구석에서, 우리의 그림자가 서로 얽혔다.
고요 속에는 겹겹이 쌓여 흐르는 물소리 같은 숨결만 남아, 마치 강물 위에 달빛이 잔물결로 번져가는 듯했다.
바람이 수면을 스치자, 달빛은 물결에 흔들려, 마치 달이 구겨진 듯 일그러졌다.
억누를 수 없는 거친 숨결은 결국 입속에서 삼켜졌다.
그러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짙어진 욕망이 차올라, 참다 못한 몇 마디 낮고 떨리는 신음으로 흘러나왔다.
백기
……너무 보고 싶었어. 정말…… 너무.
그의 말은 거친 숨결과 함께 터져 나왔다가, 곧 내 목 깊숙이 삼켜졌다. 그와 함께.
이대로라면, 그가 눈앞의 폐허와 잿더미를 잊을 수도 있겠지……
나는 거의 넋을 잃은 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찌릿한 통증이 가슴께에서 퍼져 나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 내 가슴을 꿰뚫고 나온 단검의 날끝이었다.
그것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칼은 너무나도 떨리고, 너무 깊이 박힌 탓에 백기의 가슴까지 스치며 지나갔다. 칼끝에 맺힌 피방울이, 그의 피와 뒤섞여 하나가 되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나를 끌어안은 채, 내 뒤에서 단검을 꽂아 넣었다는 사실을.
거대한 충격이, 바로 그 순간 나를 집어삼켰다.
유연
……왜……?
백기의 눈빛에는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아쉬움이 어린 동시에, 옅은 자기혐오가 서서히 번져 올라왔다.
백기
여기는…… 내가 널 상상해서는 안 되는 곳이야.
백기
내가 진짜로 널 다시 만났을 때…… 그때 내 나약함을 받아 줘.
백기
지금은…… 내가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내 동료들, 그리고…… 너도……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마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아득히 사라져갔다.
백기
……나는 다시…… 네 곁으로 돌아가야 해.
그 누구보다도 단호한 맹세가, 곧이어 어둠이 그의 전부를 삼켜 버리도록 내몰았다.
3장
날카로운 경보음이 귀를 찔렀다. 강렬한 구역질이 올라와, 나는 몸을 웅크린 채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
……들을 수 있어…… 유연……
주위에는 하얀 그림자들이 가득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도, 목소리도 멀리서 들려오는 듯 아득했다.
사람들 사이 틈으로, 나는 둔하게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 침대 위, 고요히 누워 있는 그 얼굴이 보였다.
세상은 잡음 가득한 혼란 속에 잠겨 있었지만, 그 얼굴만은 또렷했다.
그의 속눈썹 한 올 한 올까지 보였다. 고요하고 부드럽게, 아래로 드리워져 눈두덩에 작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차가운 액체가 혈관 속으로 스며들면서, 내 시야는 점점 흐릿해졌다.
마지막으로 초점이 머문 곳은, 멀지 않은 그 얼굴이었다.
류부장
유연 씨, 내 목소리 들려?
나는 그를 안심시키듯 살짝 미소 지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새까맣게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모두의 눈에는 불안과 죄책감이 가득했고, 공기 속에는 억눌린 침묵이 감돌았다.
늘 웃음을 잃지 않던 류부장님조차 이 순간만큼은 어쩐지 불편해 보였다.
류부장님
너……
유연
저, 선배를 봤어요.
그 순간, 커다란 환희가 사람들 눈에 일제히 번져 나갔다. 그중 몇몇은 더는 참지 못하고, 억눌러 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맹 주임이 내 옆에 서서, 차분히 내가 본 장면을 말해 보라고 했다.
유연
……나는 전쟁에 휩싸인 땅을 보았어요……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그 속에서 오직 우리 둘만의 기억은 빼놓고 전했다.
내가 말하는 동안, 맹 주임은 이따금 세세한 부분에서 내 말을 끊고, 자세히 묻거나 내 진술에 따라 판정을 내렸다.
맹 주임
그러니까, 그는 끝까지 정신이 지나치게 긴장되어서 환각을 본 거라고 생각한 거군요.
유연
……네. 아마 그는 아직도 자신이 임무 중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아요.
지역 분쟁은 갈수록 격화되며, 폭력과 대립은 점점 더 흉악한 얼굴을 드러냈다.
연말의 따뜻한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백기는 군에서 내려온 긴급 출동 명령을 받았다.
이번 작전은 극도의 기밀 속에서 진행된 긴급 구출 작전이었다.
그러나 철수 과정은 위험천만했다. 총격전. 폭발. 구출 임무 완료.
백기는 귀국 후 응급치료를 했지만 혼수 상태에 빠졌고 깊은 잠에 들었다.
분명 얼마 전 일인데도,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편적인 문장들로만 남아 있었다.
아무리 이어 붙이려 해도, 그것들은 도무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지 않았다.
마치 창백한 뉴스 속보처럼, 내 신경을 모두 끌어당겨 찢어놓고, 그 자리에 거대한 공백만 남았다.
류부장님
그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더 고용량의 약물과 극한의 치유 Evol을 사용했습니다. 그로 인해 부작용이 나타난 건 피할 수 없었어요.
류부장님
지금은…… 그의 생리적 생명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부 신경은 손상되었습니다.
류부장님
우리가 많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그를 깨울 수 없었어요…… 그는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류부장님
유연 씨, 어쩌면 당신만이 가능할지도 몰라요.
이후 맹 주임도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 역시 백기의 상태 때문에 긴급히 불려온 것 같았다.
그 뒤에도 그들은 내게 많은 얘기를 했다. 잠입이니, 내 뇌에 가해지는 부작용이니……
하지만 나는 거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연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거예요.
유연
맹 주임님, 저…… 다시 한 번 할 수 있을까요?
맹 주임
그의 정신 방어선은 원래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합니다. 방금의 거부 반응만으로도 당신에게 큰 충격을 줬어요.
맹 주임
이런 고강도의 정신 잠입은 마치 바늘끝을 걸어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의 뇌와 신경에는 반드시 일정한 완충 시간이 필요해요.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고, 어떤 것으로도 꺾을 수 없는 믿음과 결심이 서려 있었다.
맹 주임
포기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인내해야 합니다.
맹 주임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류부장님의 눈짓에 따라, 병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옆에 조용히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켜 그의 곁에 앉았다.
공기 속에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체온이 포개진 손바닥을 따라 스며들어왔다. 그의 눈앞으로 떨어진 앞머리는 조금 길어져, 긴 속눈썹과 겹쳐져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몸을 숙여, 내 이마를 그의 이마에 맞댔다.
유연
……선배, 나 진짜 따져야겠어.
어떻게 나를 그렇게 “쫓아내듯” 내보낼 수가 있어……
유연
하지만 괜찮아요. 난 너그러우니까.
그러니까 선배가 빨리 눈만 뜨기만 하면, 나는 뭐든 다 용서해 줄 거야.
유연
맞다, 아까 선배가 잘못 말했어요.
선배가 떠난 뒤로, 나 과일 화채도 안 먹었고, 예능 프로그램도 안 봤어.
유연
선배가 사주길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런 프로그램들은 선배가 옆에 있어야 재미있죠, 혼자서는 재미없어요.
유연
밖에 사람들이 많이 와 있어요.
아무도 떠나지 않고, 다들 선배를 기다리고 있어요.
유연
그러니 선배, 포기하지 마……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 많은 말을 쏟아냈다.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백기에게도 기운을 불어넣듯이.
그는 아직도 그 불타는 땅 위에 머물러 있었다.
포연과 총성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그곳에서, 그는 모두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자신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단단한 눈빛과 단호한 말들이, 나에게 한 그의 맹세를 분명히 전하고 있었는데.
유연
전 선배를 믿어요, 백기.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나는 그에게 찬란히 빛나는 바다를 그려 보였고, 우리가 함께 갔던 눈의 마을, 정글, 불빛으로 가득한 고성, 그리고 찬란한 은행잎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내내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그의 머릿속에 더 많은 아름다운 풍경이 떠오르길 바랐다. 잠시라도 그의 영혼이 쉴 수 있기를 바라며.
부디, 전쟁의 불길이 사라지기를.
다섯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다시 장비를 착용하고 침대에 몸을 누였다.
맹 주임
우리는 그의 뇌의 몇몇 관련 영역이, 당신이 준 자극에 뚜렷하게 반응한 걸 관찰했어요. 아마도 좋은 변화일지 몰라요.
맹 주임
하지만 이번 시도에서도, 절대로 무모한 행동은 하지 마세요.
맹 주임
구체적인 상태가 아직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건 되돌릴 수 없는 손상을 일으킬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손상은…… 당신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어.
맹 주임
준비됐어요, 유연 씨?
유연
……준비됐어요.
나는 눈을 감고, 느리고 가벼운 숨결 속에서 의식이 점점 더 깊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내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백기의 이름을 되뇌고, 그의 웃는 얼굴과 찡그린 얼굴을 떠올렸다.
세상은 차갑고 숨 막혔지만——시야 속에 하나의 흰 점이 점점 커져 갔다.
빛의 얼룩이 내 눈꺼풀 위를 스치듯 지나갔고, 눈을 뜨자 전쟁과 폐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온통 황금빛이 가득했고, 찬란한 햇살이 폭포처럼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내리며 황금빛 긴 길을 환히 밝혀 주었다.
세상은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부드럽게 사각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
왜 말이 없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백기가 한가롭게 내 옆 풀밭에 누워 있었다.
그는 마음껏 웃었고, 바람이 그의 얼굴 위 머리카락을 스치며, 그 맑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백기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내가 한참 말이 없자, 그는 아예 나를 자기 품으로 끌어안았다.
따뜻한 숨결이 내 얼굴에 닿고, 슬쩍 스쳐오는 키스가 몰래 다가왔다. 그렇게 작은 접촉만으로도 내 심장은 금세 벅차올랐다.
나는 눈을 힘주어 깜빡이며, 눈앞의 그를 더 똑똑히 보려 했다.
유연
……내 말 들렸어?
백기
난 계속 네 말을 듣고 있었잖아.
백기는 진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말했다. 마치 늘 이렇게 내 모든 말을 들어왔던 것처럼.
마치 그 깊은 잠 속의 장면은 내가 피하려 해도 피해지지 않는 악몽일 뿐인 것처럼.
나는 눈을 감았다. 자신이 어떤 몽롱함에 빠지지 않도록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치밀어 올랐다. 이 모든 게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 같았으니까.
유연
내가 잠깐 딴생각했나 봐요……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죠?
백기
아까 말하던 건, 우리가 무사히 본대를 철수시켰다는 거야.
백기
방 부대장은 가벼운 상처만 입었어. 여전히 예전 그대로인데, 피부만 좀 더 까매졌지.
백기
넌 몰랐을 거야. 우리가 나타났을 때, 그 사람 표정이 완전히 굳어 버렸어. 자기가 타임슬립이라도 한 줄 알았대.
백기
솔직히 말하면, 나도 좀 그랬어. 마치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으니까.
백기
소욱은 무전기에서 부대장이랑 인사 나누더니, 뜬금없이 그 사람에게 “만두 먹을래요?”라고 묻더라. 이런 데서 무슨 수로 만두를 구해 오겠어?
백기
그리고 대장도 참 심했어. 이번 작전에서 그는 대원이었거든. 지휘는 전부 나한테 맡겨 놓고, 게으름 피울 틈도 안 줬지.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지만, 그 전신에서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말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진심으로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기뻤다.
피와 눈물, 황폐함이 가득한 그 땅에서도, 적어도 이렇게 좋은 일들이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유연
선배 정말 행복해보여요.
그는 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며, 애틋하고도 고요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백기
그래, 행복해.
백기
비록 이렇게 다시 만나는 이유가 달갑진 않지만…… 우린 결국, 이런 방식으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었잖아.
백기
그러니까…… 이렇게면 된 거야.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더욱 편안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백기
지금 작전은 제2단계까지 진행됐어. 모든 게 순조롭고…… 곧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곧, 널 다시 볼 수 있어.
그 순간, 마치 무엇인가에 쏘인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지금 선배가 말한 게…… 제2단계라 했지? 그럼 지금, 저랑 선배가 있는 여긴…… 어디에요?
백기
내 꿈속이지.
그는 너무도 단호하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 말에 내 시야의 빛이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
흔들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유연
그럼 빨리 꿈에서 나와서, 나를 만나러 와여.
백기
걱정 마. 나는 꿈에서만 널 생각할 거야. 나머지 작전 시간에는 온전히 임무에 집중할 거고.
백기
사람들도 많아서 내가 잠깐 쉬어도 괜찮아.
백기
그러니까,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줘.
그는 자연스럽게 내 뒤통수에 얹은 손을 더 눌러 나를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당겼다.
백기
겨우 시간을 내서 잠든 건데……겨우 꿈에서 널 본 건데……
그의 목소리는 입술 사이로 스치며,뜨거운 숨결을 타고 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백기
그래도, 이렇게 널 보는 게 좋아.
백기
아직 서두르지 말고…… 나한테 조금만 더 키스해 줘.
그의 말은 엉킨 우리의 입술과 혀 사이에서 속삭이듯 이어졌다. 나조차도 이 순간에 빠져들어 헤어나올 수 없었다.
유연
나는 떠나지 않을거야. 언제나 선배 곁에 있을 거야.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 격렬하게 출렁이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유연
하지만 선배는 쉬어야 해. 너무 지쳤잖아.
백기
내가 그렇게 피곤해 보여?
유연
아니, 내가 선배를 잘 아니까.
함께한 시간 속에서, 나는 마침내 선배가 감추고 있던 더 많은 침묵과 마음을 보게 됐어.
유연
선배는 누구 앞에서든 강한 척해도 돼. 하지만 내 앞에서는 그럴 필요 없어.
유연
선배가 강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는 오래도록 나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백기
그럼…… 내가 깨어났을 때도 널 볼 수 있을까?
유연
물론이지.
백기
거짓말…… 소대 안에는 네가 없잖아.
유연
그럼 그냥 속아 주는 척이라도 해 줘.
유연
어쩌면 밖의 전쟁도 전부 꿈일지도 모르잖아?
백기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그렇게 중얼이며 눈을 감았다.
바람은 고요히 스쳤고, 나는 그를 안은 채, 이 달콤한 꿈의 위로를 함께 맛보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모든 것이 멀어져 갔다. 세상은 끝없는 어둠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04
시간이 이 순간에 멈춘 듯,끝없는 어둠이 모든 소리와 풍경을 삼켜 버리고 죽음 같은 정적만 남았다.
유연
……선배? 선배!!
유연
선배, 내 목소리 들려?
그의 의식이 또다시 요동쳐 나를 밀어내지 않을까 두려워 나는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
……
희미한 혼란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들은 듯했다. 바다 속 모래알처럼 아득한 심장 소리가 어렴풋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유연
선배, 내 말 들리지? 어디 있어?
유연
……나 혼자 여기 두고 가지 마.
그 숨결과 심장 소리는 내가 부르는 소리와 함께 점점 더 뚜렷해졌다.
마지막에,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거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두 팔을 벌려 그 거센 바람을 맞이했다.
그 바람도 나처럼 참지 못한 듯, 엄청난 힘으로 나를 끌어안고 어딘가로 데려가듯 감싸 안았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짐승 우리 안에 서 있었다.
밖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검붉은 액체가 철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들어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그저 모든 것이 아득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린 순간,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백기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손에는 온통 상처가 나 있었고, 그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분명 고요했지만, 그 주위에는 뭔가를 억누르는 듯한 거칠고 날 선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더는 생각할 틈도 없이 그에게 달려갔다.
유연
선배…… 괜찮아?
백기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숨을 꾹 참았다.
그 시선 속에는 낯설고도 짙은 감정들이 미친 듯이 자라나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침묵 속에 억눌러 버렸다. 그 탓에 나 역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순간 나도 조금 당황했지만, 손바닥을 꼭 쥐어 진정하려 애쓰며, 괜히 태연한 척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유연
괜찮아. 내가 출구를 찾아볼게. 내가 선배를 여기서 데리고 나갈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는 철창으로 달려가 살펴보았다.
한 바퀴를 다 돌자, 등줄기로 서늘한 땀이 흘렀다.
이 우리에는 출구가 없었다.
사방의 철창은 차가운 빛을 내며 거대한 해골처럼 우뚝 서서, 냉혹하고 단단한 장벽을 이루고 있었다.
들어오는 자를 거부하고, 나가려는 자 역시 철저히 막아내는 벽.
그때, 중얼거리듯 백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미안해.
백기
……정말, 미안해.
그의 말은 마치 이를 악물고 억지로 짜내듯 튀어나왔다. 그 안에는 미세하지만 분명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공기 속에서 날카롭고도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지며, 조금씩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직전인 것처럼.
나는 주먹을 세게 움켜쥔 채, 그를 돌아보았다.
유연
……나는 선배의 사과를 들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야.
백기
알아.
백기
하지만……
잘생긴 그의 눈썹과 눈매가 깊이 일그러졌다. 언제나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기던 그 손가락이 지금은 제어하지 못한 채 떨리고 있었다.
그의 온몸에는 마치 거대한 그림자가 덮여 있는 듯했고, 그 속에서 들리지 않는, 그러나 꺾이지 않는 울부짖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백기
……난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백기
난 이미 죽었어.
그의 얼굴이 마치 새까만 공허로 변해 버린 듯했다. 나는 숨쉬는 것조차 잊고,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유연
……선배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백기
연아, 나…… 난 죽었어…… 죽었다고!
원래는 입속에서 으깨듯 뱉던 말이 점점 더 높은 목소리로 튀어나왔다. 마치 그 말을 스스로에게 들려주려는 듯.
그의 주먹이 절망스럽게 쥐어지고, 피가 방울방울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연
……선배가 이미 죽었다면, 그럼 나는…… 나는 대체 뭐야?
내 대답을 대신한 건 거칠고도 난폭한 한 줄기 바람이었다. 그 바람이 나를 휘감아, 순식간에 끌어당겼다.
차갑고 끈적한 손끝이 내 얼굴에 닿았다. 느리게, 내 눈썹과 눈가, 코끝과 입술을 스치며 목덜미 아래로까지 내려갔다.
그의 시선은 똑바로 나를 꿰뚫어 보며 거의 붙잡듯 내 숨결까지 틀어쥐었다.
백기
……나는 정말 네가 진짜였으면 좋겠어.
백기
그래야 네가 몰래 우는 모습을 내가 못 보는 일도 없을 테니까.
백기
그래야…… 너도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을 테니까……
백기
그리고…… 나도 다시는 널 잃지 않을 테니까.
부서지는 듯한 낮은 울음이 그의 목구멍을 짓눌렀다. 죄책감과 폭발적인 감정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미친 듯이 번져 갔다.
나는 한 번도 이런 백기를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가 나를 철창에 몰아붙이고, 절망적으로 키스해 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끝은 무서울 만큼 차가웠다. 짙은 피비랜내가 내 손가락 사이, 머리칼 사이, 그리고 아무에게도 내보인 적 없는 깊숙한 곳까지 거칠게 파고들었다.
그는 나와 얽혀들며, 아주 거칠고 잔혹한 방식으로 숨을 토해냈다.
때로는 젖은 혀끝으로 핥다가, 또 때로는사납게 빨아들이며, 공격적인 기세로 내 온몸에 자신의 짙은 흔적을 남겼다.
내가 하려던 말들은 모두 떨림과 거친 숨결로 부서져 버렸다. 이미 제대로 설 수도 없을 만큼 휘청였지만, 그는 내게 단 한 치의 거절도 허락하지 않은 채,
내 허리를 끌어올려 더 깊이 키스했다.
등 뒤의 끈적하고 싸늘한 철창이 내 몸을 짓눌렀다. 공기마저 얼어붙을 듯 차가웠지만, 그만은 뜨거웠다. 아니, 불처럼 뜨거워 내 영혼을 태워 버릴 만큼.
유연
……잠깐……
백기
……날 원망해?
백기
……차라리 날 미워해.
그는 내 모든 숨결을 삼켜 버렸다. 우리 몸에 배어든 땀방울들이 맞닿은 피부를 타고 함께 흘러내렸다.
내가 매번 벗어나려 할 때마다, 그는 강제로 나를 끌어당겨 더 노골적이고 거친 침입으로 맞닥뜨리게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늘 몇 발짝 모자랐다. 무언가가 우리 사이를 막아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걸 끝내 방해하는 것 같았다.
매번 깊숙이 뒤엉킬 때마다,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소유욕이 자꾸만 퍼져 나가며, 끝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결국 더는 거부할 수도, 감출 수도 없게 되었다.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나는 마치 무수한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끝없는 추궁처럼, 울부짖는 외침처럼.
(백기의 절규 꼭 음성으로 들어야합니다)
백기
난 죽었어.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왜 내가 죽어야 했지.
나는 죽을 수 없어.
내가 왜 죽어야 하지.
나는 이렇게 죽을 수 없어.
백기
나는 죽으면 안 돼!!
그런데 나는 죽었어!!
어쩌면 좋지……
나는 이제 너가 없어……
백기
……넌,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까?
백기
……넌, 울 거야?
떠다니는 그 목소리들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며, 마치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이 철창 속에서 몇 번이고 벽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모습을 본 것만 같았다.
포기하지 못한, 분노와 좌절이 깃든 눈빛은 먼지로 흐려졌지만, 그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검고 짙은 모든 감정들이 사방으로 날뛰며 막다른 길에 몰린 듯 부딪혔다.
결국 그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자신조차 의심하기 시작했다.
유연
……내가 왜 선배를 미워해야 해요?
백기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어느새 나는 정신을 잃은 듯 바닥에 누워 있었고, 백기는 내 위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땀이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다, 피방울과 섞여 조용히 떨어졌다. 마치 소리 없는 핏물의 눈물처럼.
유연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나는 선배를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을 거야.
백기
……그럼, 넌 날 잊을 거야?
유연
……선배는 내가 잊길 바라?
백기
……싫어.
그의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고, 내 손가락을 꼭 잡은 그의 손끝이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유연
……왜?
백기
……난 비열한 놈이니까.
백기
죽어서도, 네가 영원히 나를 기억하고, 나를 사랑하길 바라니까……
백기
내가 다시는 네 곁으로 돌아갈 수 없어도, 네가 평생 나를 기억해 주길……
너의 매 순간, 매 초마다 내 그림자가 함께하길 바라니까.
그 노골적인 시선 속에는 더 이상 어떤 숨김도 없었다. 깊고 은밀하며 삐뚤어진 욕망과 갈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가 있었다.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고, 끝내 사라지지 않는 죄책과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확신할 수 없는 어둠이 언제나 그를 둘러싸고, 팽팽히 긴장된 신경이 늘 그를 조여왔다.
하지만 그는 모두의 버팀목이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해서도, 절망해서도 안 되었다.
그러나 백기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피와 살을 가진 보통 사람이었다.
유연
……그거 말고, 그 외에는?
유연
만약 진짜 내가 지금 네 앞에 있다면…… 그럼 선배는 나한테 마지막 키스를 하고, 날 떠나보낼 거야……?
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그의 손바닥이 점점 더 힘주어 내 손을 조여 오면서 마치 심장까지 아프게 움켜쥐는 듯했다.
백기
……아니.
그는 나를 죽어라 바라보았다. 온몸의 힘을 다 쥐어짜야 그 세 글자를 겨우 내뱉을 수 있는 듯했다.
유연
거짓말.
유연
선배는 애초에 거짓말 못 하잖아.
백기
……그럼, 네가 듣고 싶은 건 뭔데?
유연
그건 선배가 나한테 말해 줘야 하는 거잖아.
나도 똑같이 그를 바라보았다.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않고, 내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모든 갈망을 말해 주기를 오로지 바라면서.
백기
……여기 있어 줘.
백기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바로 여기! 내 곁에 있어줘!
백기
영원히 날 떠나지 마!
백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는 정말 그럴 수 있어?
유연
좋아요.
백기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호박빛 눈동자가 심하게 수축하며 그 안에 내 모습이 온전히 비쳤다.
그가 너무 강하게 눌러서 나는 두 팔을 들어 그를 꼭 안아줄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그의 손을 힘껏 꼭 쥐었다.
유연
……늘 생각했어요. 매번 선배가 무사히 내 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유연
이 세상에는 선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선배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유연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선배……
유연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만큼 힘들어서, 더는 버틸 수 없을 때가 온다면……두려워하지 마.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유연
선배가 살아 있고 싶다면,
나는 선배와 함께 살아 있을 거야.
선배가 계속 걸어가고 싶다면,
선배가 포기하지 않는 한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배 곁에 있을 거야.
유연
하지만 선배가 이 어둠 속에 머물러야 한다면, 나도 기꺼이 그 어둠 속에서 선배와 함께할 거예요.
유연
그러니까…… 선배, 두려워하지 말아요.
내가 눈앞의 이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는, 떠올리기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는 사람이고, 말이 많지 않아도 모든 걸 다 전해 주는 사람이다.
그는 나의 밝고 환한 달빛, 내 소매를 스치는 맑은 바람, 내가 닿을 수 있는 순간들과 닿을 수 없는 모든 순간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내 피 속에 스며들어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영혼이 되었고, 내 아름다운 폭풍이 되었다.
그래서 바람은 내 숨결이 되었고,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어 서로의 몸속에서 살고, 희미한 운명이 되어,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유연
……비록 이렇게까지 선밸 사랑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정말 선배를 사랑해요.
백기
……다시 말해 줘.
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고, 목소리는 낮고 쉰 듯했다.
유연
……백기, 사랑해. 선배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선배를 사랑해.
유연
……나는 그저 선배와 함께 있고 싶어.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가 몸을 숙여 내 입술을 막았다. 모든 말이 그 부드러운 키스 속에 스며들었다.
그는 나를 품에 있는 힘껏 끌어안아 마치 내 몸을 자신의 몸속에 새겨 넣으려는 듯 했다.
백기
……넌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유연
……그럼 선배는 어째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백기
……왜냐면, 너는 내 운명이니까.
백기
……왜냐면…… 내가 널 사랑하니까.
이젠 다시는 놓을 수가 없으니까.
유연
……그렇다면 더 세게 날 안아 줘요.
유연
……선배가 여기 있다는 걸, 내 곁에 있다는 걸 나에게 말해 줘……
나도 선배만큼 그게 필요하니까.
이 순간, 나는 더 이상 이것이 그의 욕망인지, 아니면 나의 욕망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건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분노와 절망, 떨림과 두려움……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이곳에는 나와 백기만이 남았다.
나는 그가 나를 더욱 세게 껴안고 거듭해서 나를 키스하는 것만을 느낄 수 있었다.
밀려드는 거센 파도가 뜨겁고도 뜨거운 시선과 입맞춤으로 변해 내 입술과 치아 사이에 부서져 내렸다.
백기
……연아.
어둠 속에서,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백기
……난 죽고 싶지 않아.
백기
……나는 너와 함께 살아가고 싶어.
05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다시 그 불타고 황폐한 땅 위에 서 있었다.
폭발과 굉음이 몰아쳤고, 수많은 군용기가 하늘을 뒤덮으며 연기와 피비린내를 휘몰아 올렸다.
겹겹의 검은 연기 너머로, 더없이 선명하게 폐허가 눈에 들어왔다.
무너져 내린 건물들 사이로 휘어지고 일그러진 철근이 삐죽이 솟아 있었다.
나는 길가에 스쳐 지나간 수많은 눈동자들을 보았다.
그 눈빛은 절망에 잠겨 무감각하거나, 핏빛으로 충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다시, 백기를 보았다.

핏빛으로 물든 세계 속에서, 그는 흰색 재킷을 걸친 채, 무너진 잔해 위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호박빛 눈동자에는 자욱한 연기가 드리워져 어두움이 번졌지만, 그 깊은 곳에는 여전히 불길이 일렁이며, 마음속 모든 불굴을 태워 없애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며, 점점 거리가 좁혀질수록 깨달았다. 저 하늘보다도 더 맑아 보이는 ‘그 흰 빛’은——
가짜였다.
드러난 목과 가슴은 상처투성이로 얼룩져 있었고, 찢겨진 검은 옷은 스며드는 피에 젖어, 점점 더 짙게 물들어 갔다. 마치 영원히 아물지 않는 피딱지처럼.
그는 온몸이 무언가에 붙들린 듯 굳어 있었고, 오직 가슴만이 크게 들썩이며 죽을힘을 다해 공기를 탐하고 있었다.
그 공기 속에 더러운 먼지가 가득해도 상관없이.
그러다 백기는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들어, 자욱한 연기를 넘어 내 시선을 마주했다.
그 순간, 크게 들썩이던 가슴이 멈췄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숨을 내쉬듯 어깨를 조금 내려놓으며,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백기
유연아, 나랑 얘기 좀 해 줘.
백기
뭐든 괜찮아.
순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유연
……왜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거야?
백기
움직일 수가 없어.
그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더니, 머리를 괴고 있던 팔을 살짝 들어 보였다. 목소리는 차분했고, 담담했다.
백기
이쪽은 아무 감각이 없어. 누우면 바로 잠들 것 같은 기분이야.
백기
근데 아직은 잘 수 없어. 그들이 날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유연
그들은 올 거야, 반드시 올 거야…… 그러니까, 제발 잠들면 안 돼!
백기
알아.
그의 확신에 찬 말투는 나를 안도하게 하면서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게 만들었다.
나는 손끝을 내밀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몸을 피했다.
백기
만지지 마. 네 손을 더럽힐 거야.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라와 눈가를 뜨겁게 달궜다.
나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일부러 못마땅한 척 입술을 삐죽였다.
유연
……난 선배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내가 방금 뛰어와서, 온몸에 먼지가 뒤덮였거든.
유연
그래서 선배, 내가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는 순간 멍해졌다. 오랜 침묵 끝에, 내게 손을 뻗어왔다.
그의 손과 몸에 묻은 피가 그 품에 안긴 나의 얼굴과 온몸에 그대로 묻어났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의 온 등은 이미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찢겨진 살점은 불에 탄 천처럼 말려 올라가 있었고, 보이지 않는 불길이 드러난 신경 하나하나를 끊임없이 핥아 태우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두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조차 몰랐다.
병원에서 백기를 보았을 때는, 상처들이 모두 치료되어 깨끗한 흰 붕대로 감겨 있었고, 마치 한낮의 평온한 낮잠처럼 고요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순간 그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던 건지를 처음으로 이렇게 선명하게 깨달았다.
그제야, 더는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눈가에서 흘러내렸다.
나는 무너진 채, 그저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백기
어쩌지, 내년 여름에 또 맹 주임한테 혼나겠네.
유연
아니야. 분명 차마 못 혼내고, 아주 다정하게 대해주실 거야.
백기
그 말 들으니까 더 무섭네. 그냥 차라리 혼내는 게 낫겠어.
백기
……그땐 네가 내 옆에 꼭 있어야 돼. 도망치면 안 돼.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새어나왔다. 어느 순간, 총성도 폭발음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어렴풋이 노랫소리가 흘러왔다. 희망이 묻어나는, 아주 잔잔하고 부드러운 노래였다.
유연
선배, 여기에 꽃이 피면 참 좋을 텐데.
백기
곧 피게 될 거야.
그 순간, 바람이 일었다. 나는 바람에 떠밀리듯 들어 올려졌다.
시야가 멀어지면서, 연기 속을 헤치고 달려오는 몇몇 다급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내가 가장 잘 아는 그 불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백기
나를 집으로 데려가 줘.
그다음, 나는 어디론가 끌려가는 듯했다.
수없이 부서진 조각 같은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와 그가 함께한 순간들이 겹치고 겹쳐, 마침내 하나의 눈부신 흰 빛으로 번져 나갔다.
철로는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고요히 멀리, 멀리 사라져 갔다.
백기는 철길의 갈림길 위에 서 있었다. 조용히, 그 자리에서 멈춰 서 있었다.
햇살은 한없이 맑고 고요했고, 바람은 부드럽게 스쳐 갔다. 마치 다음 순간이면 그를 산산이 흩어버릴 것만 같았다.
왜인지 나는 계속 이곳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연
……선배!
그는 무언가를 들은 듯,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끝내 내게 닿지 않았다.
힘을 잃은 조급함과 두려움이 내 온몸을 채웠다.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건 오직 바람뿐이었다.
나는 그의 발걸음을 더는 따라잡지 못할까 봐 두려웠지만,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을.
유연
……선배…… 어디 가는 거야……!
백기
……나는 네 곁으로 돌아가야 해.
그의 담담한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 그는 나를 볼 수 없었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내가 있었다.
백기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뭔가 잘못된 것 같아.
백기
아무리 걸어도, 너에게 닿지 못해.
백기
나는 어떻게 가야 하지……?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물었다.
그는 마치 신앙에 바친 맹세를 끝내고, 모든 고통과 외로움과 몸부림을 건너온 뒤, 이제 마지막 선택 앞에 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바람이 흘러가는 궤적을 보았다.
유연
……그렇다면, 걷지 말자.
유연
우리, 날아가자요.
그는 순간 멍해지더니,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백기
나는 날지 못해.
백기
나를 날게 해 준 건…… 바로 너야.
유연
아니야!!
나는 거의 온 힘을 다 짜내며,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유연
그 신념과 자유의 시작은…… 언제나 선배 자신이었어.
유연
처음부터 끝까지, 이 바람은 선배 자신의 것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리고 더 크고, 더 자유롭고, 더 호방한 바람이 세상의 모든 구석을 휘돌아 그의 앞에 모여들도록 기도했다.
광활한 들판 위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는 부드러운 속삭임이 섞여 있었고, 마치 오랜 벗이 건네는 부름처럼, 조용히 그러나 굳건하게, 그의 눈빛을 천천히 밝히고 있었다.
백기는 팔을 힘껏 위로 뻗었다. 그는 나를 붙잡고, 바람을 붙잡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붙잡으려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궤적을 따라, 그의 생명은 바람 속에서 뻗어나가며, 하늘의 끝까지 흘러갔다.
그는 날아올랐다.
그 순간, 그는 생과 사를 넘어섰다. 끝없이 무겁고 길었던 밤을 넘어, 수많은 악몽과 멈추지 않던 불길까지 넘어섰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눈 속에서, 오롯이 나 자신을 다시 보았다.
멀리서 기계의 낮은 윙윙거림이 내 신경을 서서히 끌어당겼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어딘가에서 터져 나온 뜨거운 울음과 흐느낌이 들려왔다.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반쯤 밝고 반쯤 어두운 눈빛과 마주쳤다.
꿈속이든 꿈 밖이든, 수없이 반복되던 그 장면처럼——
그가 천천히,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05 기억회상
겨울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 병실을 물들이고, 나란히 놓인 두 침대를 같은 따스한 빛으로 감쌌다.
백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옆 침대에 누운 소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른 숨결, 길게 드리운 속눈썹, 눈가와 머리칼 위로 내려앉는 햇살까지.
그녀는 깊고 편안한 잠에 빠져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잘 수 있게 된 듯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백기의 가슴은 알 수 없는 뭉클함으로 꽉 차올랐다.
머릿속에는 선명하거나 아득한 장면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걸, 끝없이 상기시키는 듯했다.
그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지려 했다. 그 순간, 불쑥 눈을 뜬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백기는 거의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아버렸다.
유연
선배 깬 거 다 봤어요. 이제 자는 척하기 없기야.
가슴속 어딘가가 간질거려, 백기는 나른하게 한쪽 눈만 가늘게 떴다.
백기
왜 갑자기 깬 거야?
유연
계속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거든요.
백기
내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유연
마음속 목소리도 포함돼.
그녀의 단호한 말투는 마치 백기의 마음을 그대로 꿰뚫어본 듯했다. 아니면, 애초에 그의 속마음은 이미 전부 그녀에게 들켜 있었는지도 몰랐다.
백기는 아예 손을 뻗어 그녀를 자기 침대로 확 끌어안았다.
백기
그럼, 이번엔 더 똑똑히 들어봐.
품 속의 온기는 익숙하면서도 따뜻했다. 백기는 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살짝 기댄 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잠시 후, 그의 품에서 고개를 쏙 내민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유연
선배, 머리 좀 자란 것 같아. 내가 잘라줄까요?
백기
지금?
유연
전부터 길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나도 잠이 안 오니까, 깨어있는 겸 운동 삼아서요~
그는 그녀의 실행력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이미 의자에 앉아 있었고, 목에는 여분의 베개 수건이 둘러져 있었다.
그녀는 대충 머리를 하나로 묶고는, 살짝 몸을 숙였다. 조심스럽게 그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집어 올리더니, 빌려온 가위를 들어 몇 번 가늠해 보고는 “싹둑” 잘라내렸다.
슥슥- 하는 소리가 바람 속으로 스며들었고,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수건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손놀림은 부드러우면서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 순간, 백기는 불현듯 떠올렸다. 이게 처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자신을 위해 머리를 잘라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걸.
유연
눈 감아요. 안 그러면 머리카락 들어가요.
백기
난 그냥 널 보고 싶어.
유연
참나, 그러다 눈에 들어가도 전 몰라요?
백기
그럼 평생 날 책임져 줘야지.
어느새, 너무도 자연스러워진 투정과 억지. 그 모든 게, 그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특권이 되어 있었다.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머리 손질은 끝이 났다. 간단히 치우고 있던 백기의 시선이 침대 머리맡 탁자 위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소박한 제본의 갈색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유연
그건 시 선생님(奚老师)이 두고 가신 거예요,
자신의 말이 끊긴 걸 눈치 챈 듯, 그녀는 몸을 기울여 설명을 덧붙였다.
유연
그날 선배 보러 오셨는데, 한참 기다려도 깨어나지 않으니까 깨우지 말라 하시고, 그냥 저걸 두고 가셨어요.
유연
그리고, 차 안에서 선배가 물었던 그 질문은 이거 보면 알 거라고 하셨어요.
백기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 구원 작전 중 차 안에서 나눴던 잡담을 떠올렸다.
처음 받았던 검진 얘기, 습기 가득했던 여름날의 기억, 시인은 지금도 글을 쓰고 있을까 하는 말.
그리고 무사히 귀환하면 모두를 위해 시 한 편 지어야 한다는 약속까지.
백기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갈색 노트를 펼쳐 들었다.
10년 여름 끝, 장갑차에서.
15년 늦봄, 어두운 방에서.
17년 7월, 산비탈에서.
20년 가을, S시에서.
24년 동지, 연구 기지에서.
……
곧 그는 마지막 장에 닿았다.
마치 아무렇게나 끼워 넣은 듯한 종이 한 장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25년 겨울, 병실 복도에서.
백기는 잠시 멍해졌다.
글씨는 진하고 옅은 흔적이 뒤섞인 채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 다른 시간에 띄엄띄엄 써 내려간 듯 보였다.
몇몇 글자는 먹물이 번져 있었고, 군데군데 지운 흔적도 있었다.
보기에는 그다지 예쁘지 않았고, 어딘가 조급하고 서툴렀다.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가 이 얇은 종이를 묵직하게 만들고 있었다.
백기는 웃음을 흘렸다. 창가로 평화롭고 고요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가슴은 시리도록 아렸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한없이 잔잔했다.
——다시 세상에 꽃이 만발하기를.
오늘 밤, 은하수는 찬란히 빛나고, 나는 그 풍경을 너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너는 끝내, 네가 어디로 가려는지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불빛을 볼 수 없어,
대신 고개를 들어 은하수를 바라본다.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는 오가지만,
네가 없으니, 나 혼자 갈 마음도 없다.
오늘 밤, 마땅히 불꽃이 찬란해야 하는데,
나는 그 풍경을 네 곁에 전하지 못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는 말아라.
네가 내 꿈속에 잠시 찾아와 준다면,
그곳에는 온 들판의 꽃과 날아드는 비둘기가 있다.
내가 너를 위해 수놓은 꽃바다를 본다면,
제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네가 마음에 드는 꽃 한 송이를 꺾어주기를.
그리고 간절히 바라노니——
새벽의 빛과 함께, 나와 함께 깨어나 주기를.
만약 그보다 더 좋을 수 있다면,
그 꽃씨까지 함께 가져가기를.
그래서 이곳도 꽃으로 가득 덮이면,
나는 너의 손을 잡고 기차에 올라,
밤새 잠들지 않고, 쌓여온 이야기를 모두 다 털어놓을 거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붉은빛은 너무 짙고,
밤은 너무 아득하다.
아직 나는 너의 목소리와 얼굴을 찾지 못했고,
불꽃을 붙잡지 못했고,
돌아오는 새를 맞이하지도 못했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나는 이곳에 반드시 꽃을 만발하게 할 것이다.
언젠가는——
이곳에도 다시 꽃이 가득 피어나리라.
06
백기가 깨어난 뒤, 그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회복해 갔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지쳐 있던 나는, 팽팽히 당겨져 있던 끈이 한순간에 풀린 듯 며칠 동안 곯아떨어지듯 잠만 잤다.
피곤함은 물밀듯 끊임없이 밀려왔지만, 언제나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 손은 단 한 번도 나를 놓지 않았다.
내가 천천히 제정신을 되찾고 나서도, 그는 안심하지 못한 듯 내 상태를 몇 번이고 꼼꼼히 확인했다.
병원 정문에 새해를 알리는 ‘福(복)’ 자와 붉은 대련이 붙고, 휴대폰에 설 인사 문자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아, 벌써 새해가 다가왔구나.
하지만 우리는 모두 류부장님의 명령으로 병실에 묶여 있었다.
백기는 여전히 경과 관찰과 요양이 필요했고, 심지어 먹는 것도 제한되었다.
고진은 고기 먹방을 틀어주며 백기를 유혹하다가, 차가운 눈빛 한 방에 병실에서 쫓겨났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병문안을 왔다.
낯익은 얼굴, 혹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 꽃과 눈물을 들고 찾아와 그의 손을 잡았다.
마치 꼭 한번은 그를 만나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어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는 듯이.
유연
선배, 나 뭐 사 왔게~
백기
……왜 날 부르지도 않고 혼자 나갔어.
유연
방금 누가 선배 찾길래, 어차피 멀지도 않아서 다녀왔지.
나는 병실로 들어가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순식간에 퍼지는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들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고, 옅은 밀가루 빛을 감싼 피 사이로 속 재료의 색이 은근히 비쳐 나왔다.
유연
오늘은 설날이잖아. 우리도 만두 먹자!
백기
……나도 먹을 수 있어?
유연
당연히 안 되지! 그래서 내가 준비했잖아~
나는 뿌듯하게 두 개의 국물 용기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유연
사장님한테 일부러 만두국 가득 퍼 달라고 했고, 게다가 선배한테는 방금 끓인 시금치 살코기 죽까지 챙겨왔어!
백기
……그러니까……
그가 천천히 눈썹을 치켜올리며, 국물통에서 내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백기
……결국 내가 마시는 건 만두국 국물이고, 넌 만두를 먹는 거네?
유연
맞아. 조금만 더 참아봐요. 맹 주임이 그러는데 앞으로 보름만 더 음식 조심하면 된대.
백기
안 할래.
유연
어제 주임님이 선배 아주 착하다고 칭찬했는데, 몰래 먹다 걸리면 혼난다구!
백기
상관없어.
유연
……정말이지, 이 사람은. 그럼 나도 안 먹을게요. 선배랑 같이 국이랑 죽만 먹으면 되잖아?
백기
그것도 안 돼. 오늘은 설날인데, 그래도 먹어야지.
백기
네가 방법 좀 생각해 봐.
유연
이건 그냥 떼쓰는 거잖아……!
백기
네가 그렇다 하면 그런 거지.
그는 입꼬리를 건방지게 올리며, 다정하게 날 품에 안아버렸다. 완전히 독차지하려는 태세였다.
나는 도저히 어쩔 수 없어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만두를 보다가, 문득 얼굴이 달아오르는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고개를 숙여 그를 보더니, 결국 항복하듯 그의 뺨을 꼬집었다.
유연
그럼 일어나요. 이러면 우리 못 먹잖아요.
그가 팔을 풀자, 나는 도시락을 집어 만두 반 쪽을 먹었다.
그의 시선이 너무도 솔직하고 집중돼 있어서, 도무지 맛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겨우겨우 억지로 삼키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억눌러 몸을 기울여, 그의 얇은 입술에 입맞췄다.
그는 단번에 만족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내가 물러나자 혀끝을 내밀어 내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백기
맛있네.
백기
난 더 먹고 싶은데, 아직 만두가 많이 남았잖아.
유연
……
나는 도대체 어떻게 그 만두를 다 먹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저녁 무렵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심지어 꽤 “통 크다”는 듯 자기 만두국까지 내게 나눠줬다.
결국 나는 이번 식사에서 그의 맛 말고는 다른 어떤 맛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가 슬쩍 나를 끌어들여 ‘식후 운동’을 시작하려는 순간, 병실 문이 두드려졌다.
내가 문을 열자, 그곳에는 평화유지부대의 영장님과 시(奚) 주임, 그리고 몇 년 전 케이블카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순간, 백기 역시 무척이나 진지한 태도로 다가왔다.
대대장
이 녀석, 얼른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어라.
시 공
백기 형…… 어서 누워요……!
백기
난 아직 그렇게 약하지 않아.
남자
아홉 날이나 누워 있던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묘하게 힘이 있었다. 덕분에 늘 거칠고 오만한 백기의 얼굴에도 약간의 난처함이 스쳤다.
방 안에는 두어 번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마치 남몰래 간직해온 지난날의 장면처럼.
그리고 백기가 무척이나 정중하게 나를 그들에게 소개하자, 따스하고 깊은 시선들이 내게로 향했다.
마치 세월이 아낌없이 베풀어준 선물을 바라보는 듯했다.
짧은 인사를 나눈 뒤, 그들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나는 검진을 핑계 삼아 병실을 빠져나왔다.
잠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던 찰나,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류부장님과 마주쳤다.
류부장님
유연 씨, 왜 혼자 있어? 백기 그 자식은?
유연
누가 찾아와서, 전 그냥 잠깐 나왔어요.
나는 무심코 방금 찾아온 사람들을 언급했는데, 류부장님은 의미심장하게 눈을 굴리더니 공문 서류봉투 하나를 내게 건넸다.
류부장님
그 친구들이 왔었구나. 그럼 난 안 들어갈게. 이건 그 녀석 물건인데, 유연 씨가 좀 전해줘요.
봉투는 묵직했다. 무심코 만져보자, 날렵하고 차가운 금속의 윤곽이 손끝에 닿았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고, 류부장님이 눈짓으로 전하는 뜻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배웅한 뒤, 아직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에 급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유영
사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유연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유영 씨. 무슨 일이에요?
유영
흑흑, 사실 저는 설날 밤에 사장님 귀찮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요…… 혹시 잊으신 건 아니죠……
설날 다음날에 방송되는 시상식에서, 사장님이 불참하신 거 보충할 영상이 필요하다는 거요——
병원을 함부로 나갈 수가 없어서, 결국 당조를 부탁해 다이웨가 집에서 내 드레스를 가져오게 했다.
백기는 아직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테니, 나는 간호사에게 잠깐 외출을 알리고 옥상 온실로 향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지나가며 가지와 잎사귀들이 사르륵 속삭였다.
새하얀 빛이 베일처럼 드리워져, 울창한 초록으로 가득한 이 유리집 안을 은은하고 은밀한 색으로 물들였다.
맹 주임 말로는, 이곳의 환경이 백기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 해서 특별히 그에게만 쓰도록 마련된 곳이었다.
나는 간단히 정돈을 하고, 드레스와 외투를 걸쳤다.
빛과 그림자가 알맞게 드리워진 곳, 멀리서 폭죽이 화려하게 터지고 있었다. 적당한 배경을 골라 휴대폰을 세워 녹화를 시작했다.
유연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유연입니다……”
이 멘트는 원래 현장에서 하려고 준비해둔 원고였다.
하지만 급히 병원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나머지 일들은 전부 뒤로 미뤄야만 했다.
지금은 어떤 스포트라이트도 없고, 그 어떤 시선도 느껴지지 않지만, 오히려 말할 수 없이 편안하고 든든했다.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설령 지금 이 결과를 얻기 위해, 이보다 천 배, 만 배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해도,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녹화를 멈추고, 나는 안도하며 숨을 고르고 영상을 유영에게 전송했다.
그런데 문득 고개를 들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싸늘한 겨울밤, 멀리서 백기가 서 있었다. 그는 대충 외투만 하나 걸쳤을 뿐, 절반 가까운 맨살이 아무렇지도 않게 차가운 공기에 드러나 있었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미간은 단단히 모여 있었다.
유연
“벌써 얘기 다 끝났어요? 근데 왜 이렇게 뛰쳐나온 거예요?”
그가 한 발짝씩 다가올 때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나는 순간 숨 막히는 위압감과 위태로움을 느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절박한 감정이 침묵 속에 가득 차, 그 은밀한 시선 속으로 쏟아졌다.
그 시선을 따라 내려다본 나는, 아직도 내 다리에 환자복 바지가 그대로 걸려 있는 걸 보고 괜히 민망해졌다.
유연
“영상은 위쪽만 찍었으니까… 밑에는 그냥…… 백, 백기, 너 지금… 지금 뭐 하는 거야?!”
눈앞의 그는 갑자기 내 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차가운 공기가 훅 하고 들이닥쳤고, 그 순간 그의 손끝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백기
“움직이지 마.”
그는 목소리를 낮게 억누르며, 옆에 있던 스타킹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반쯤 무릎을 꿇고 내 발바닥을 들어 올렸다.
분명 익숙한 체온인데, 지금은 도저히 뜨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스치고 지나간 곳마다 간질거림과 열기가 퍼져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발을 빼려 했지만, 더 거칠게 누르는 힘에 결국 꼼짝없이 붙잡혔다.
그렇게 그는 천천히 내 발에 스타킹을 신겨주었고, 그 감각은 파도처럼 퍼져 올라 뒷머리까지 짜릿하게 번져갔다.
시간은 유난히 길게 흘렀고, 그의 뜨거운 손길은 차디찬 공기마저도 데워 버리는 듯했다.
그의 손길은 유난히도 진지했다. 지막으로 내 스타킹을 다 신겨준 뒤, 내 허벅지 안쪽에 장식 끈을 단단히 묶어주었다.
백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호박색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나, 마치 가둔 짐승이 결국 우리를 찢고 나와 모든 복종을 내어주면서도, 여전히 사냥자의 자세를 간직한 듯했다.
백기
“이게 더 예뻐.”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내 전신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이 사람이 분명 어딘가에 숨어서 전부 보고 있었겠지.
이 며칠 동안 우리가 서로 회피하고 말하지 않았던 감정들을, 결국 이렇게 다 꺼내놓게 만들었다.
유연
“아직도 죄책감 느껴요?”
백기
“응.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내 조심스러운 질문 앞에서 그는 너무도 담담했다.
백기
“내가 널 지켜줄게. 네가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도록, 누구보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어떤 일이 있어도 난 네 곁으로 돌아올 거야.”
“이 약속들,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하지만 내 인생엔…… 너무 많은 불확실함이 있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
그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충성스럽고도 간절한 그 모습 속에서, 슴 깊숙이 숨겨놓았던 의심과 방황이 순간적으로 불꽃에 비친 듯 드러나, 게 오직 그에게만 있는 그 투명한 마음을 보게 했다.
유연
“응, 그래서 지금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내 목이 메인 듯한 리를 듣자,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백기
“앞으로 내가 어디로 가든, 널 반드시 나와 함께 데려갈 거야.”
나는 멍해졌다.
그가 말하는 건, 임무 수행 때마다 나를 데려가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유연
“……그럼 이제 다시는 나를 밀어내지 않을 거야? 나를 두고 가지도 않을 거야?”
“나를 혼자 그 자리에 남겨두지도 않을 거지?”
백기
“밤이든 낮이든, 절대 널 방치하지 않아.”
그는 언제나처럼 굳게 약속했다. 하지만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이 찾아오는 법이다.
이제 그는 그 예상치 못한 것들조차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목숨에 변수가 생기더라도, 운명이 그를 굴복시키려 하더라도, 그는 결코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내가 옆에 두었던 공문 봉투를 집어 들었다.
가죽 총집이 달빛 아래서 은은한 빛을 띠었다. 백기는 그것을 내 등에 매어 주었다.
백기
“이제 완벽해.”
유연
“사실 내가 이렇게 있는 게 더 예쁜 것 같지 않아요? 나도 이제 너랑 같이 불바다와 총알을 뚫고 나온 초특급 프로듀서니까.”
백기
“……아주 예뻐.”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큰 손으로 나를 들어 올려 곧장 안아 올렸다.
내 몸이 갑자기 뒤로 젖혀지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에 걸었다.
그의 힘에 의해 아무런 저항도 못 한 채, 단숨에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외투는 그 순간 바닥으로 흘러내렸고, 차가운 공기와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이 동시에 몰려왔다.
거친 거즈의 질감이 손바닥을 스치며, 나는 급히 몸을 곧추세웠다.
유연
“선배……! 선배 몸에 상처가 있어요!”
백기
“그럼 함부로 움직이지 마.”
그는 한 손만 비워 옆에 있는 선반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받침은 너무 불안했고, 눈앞의 사람은 온몸이 상처투성이.
나는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굳은 채로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가 무리해서 움직인 탓인지, 몇 군데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스며나오는 게 보였다.
걱정스레 몇 번 곁눈질하다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내 몸을 받치고 있던 그의 손이 살짝 떨렸다.
백기
“유연아, 네가 말해 줘. 나 정말 깨어난 게 맞아?”
“분명 아프고, 분명 너무도 현실적인데…… 많은 사람들도 봤는데…… 이 모든 게 너무 아름다워.”
“너무 아름다워서, 마치 내 의식 속에서 꾸어낸 환상 같아.”
그 빛을 머금은 호박빛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그 안에서 그가 끝내 지우지 못한 두려움을 보았다.
수없이 혼자 견뎌온 침묵과 순간들 속에서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뒤, 그는 얼마나 후덜덜 떨며 손을 움켜쥐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애틋하게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유연
“깨어났어요. 선밴 살아 있어. 그리고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어.”
백기
“그걸…… 나한테 증명해 줘.”
유연
“어떻게 증명해요?”
백기
“난 많은, 아주 많은 증거가 필요해.”
얇은 드레스 너머로 전해지는 낯선 간질거림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새어 나올 듯한 신음을 억눌렀다.
하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뜨겁고 거친 숨결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며, 내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백기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증명해 줘. 네가…… 정말 내 곁에 있다는 걸 증명해 줘.”

온몸의 열기가 더욱 높아졌다. 나는 참지 못하고 무릎으로 그의 옆구리를 스치듯 밀었다.
그 순간, 그의 허리 근육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다시 한층 가까이 다가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가 살짝 고개를 젖히자, 날카로운 선이 뚜렷한 옆얼굴이 섹시하고도 아찔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눈 속엔 가려지지 않은 뜨거운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백기
“……유연아, 키스해줘.”
나는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었다.
나는 그의 뒷머리를 감싸 쥐고, 살짝 건조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는 더 깊게, 더 많이 느끼고 싶었는지 혀끝을 엉키게 해왔고, 우리는 천천히 서로를 더듬으며 탐했다.
입맞춤이 이어질 때마다 물기 어린 소리가 끈적하게 늘어져, 마치 밀려왔다 가라앉는 파도처럼, 본능적인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온몸을 그의 품에 기대었고, 매번 힘없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그는 한층 더 깊게 나를 끌어안았다.
온몸을 그의 품에 기대고, 힘없이 떨어질 때마다 그는 나를 더욱 깊숙이 끌어당겼다.
뜨겁게 달아오른 세계 속에서, 나는 오직 그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울린 벨소리에 정신이 퍼뜩 돌아오며 몸이 굳었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품을 꽉 껴안았다.
귓가에서 그가 낮게 신음하더니, 복수라도 하듯 내 목덜미를 살짝 물어왔다.
유
“잠깐만…… 전화 온 것 같아요.”
백기
“신경 쓰지 마.”
아직 감도는 그의 목소리는 눅진한 숨결에 젖어 있었고, 뜨겁게 내 귀가에 스치며 젖은 앞머리를 불어 흩뜨린 뒤, 내 오른쪽 귓불을 물었다.
흘끗 본 시야 속, 휴대폰 화면에 선명히 뜬 “류 부장” 세 글자가 눈에 박혔다.
유
“그, 그런데…… 류 부장님 같아……!”
백기
“그럼, 받고 싶으면 받아.”
축축한 혀끝이 귀 속을 훑으며 파고들자, 그의 목소리마저 물소리를 타고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다.
그러나 집요하게 울려대는 벨소리에 더는 버틸 수 없어, 나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류 부장
“유연 씨, 백기 그 자식…… 어디로…… 간 거야?”
“병원에서…… 안 보이네…… 옥상은…… 잠겨 있고.”
어눌하게 이어지는 말이, 목덜미 위에 드리운 그의 숨결과 섞여 흐려졌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아예 휴대폰을 그의 귀에 갖다 댔다.
유연
“선배! 류 부장님이 찾아요!!”
그제야 들려온 건, 장난스럽고 게으른 듯한 웃음. 그러나 입술은 여전히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백기
“류 형, 저 병원에 있어요. 도망간 거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지만, 눈빛은 위험할 만큼 뜨거워서 오히려 더 농염하게 들렸다.
백기
“저에겐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그러니 당분간은 방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는 다시 뜨겁게 파고들며 숨결과 손길을 더해왔다.
백기
“이제 끊어야지.”
“난 계속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