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ur 진실을 담은 입맞춤 予吻以真实 번역
1장
조명 담당
이 방안으로 진행하려면 낮에는 효과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걸 감수해야 해요……!
연출 A
음향 감독님! 이 일렉트릭 기타 몇 대의 소리를 다시 한번 들어보고 싶어요. 고음역대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요!
제작 담당
Jipiter 레이싱팀 쪽은 전부 준비됐으니까, 단톡방에서 바로 불러주시면……
연출 B
뭐라고요?! 잠깐만요, 여기서는 하나도 안 들려요! 지금 D4에 계세요?
무대미술 담당
바닷바람이 너무 세요! 저쪽은 전부 보강해야 해요. 안 그러면 다 날아가겠어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 안 그래도 떠들썩한 잔디밭을 한층 더 달아오르게 했다.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뜨거운 열기를 몰고 와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귓가를 가득 채웠다.
각 부스에서는 마지막 점검이 한창이었고, 드넓은 행사장 곳곳에는 이리저리 '출몰'하며 현장을 살피는 내 모습도 있었다.
여러 무대에서 쏟아지는 소리에 한바탕 시달리고 나니, 아직 오전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는 여기저기서 뒤섞여 들려오는 드럼 비트에 발을 맞추며 중계 부스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골랐다.
연출
아, 진짜 못 버티겠어요, 여러분…… 유연 언니, 맹세하는데 다음에는 이런 대규모 음악 페스티벌 프로젝트 절대 같이 안 할 거예요……
연출
규모는 크지, 관리하기는 어렵지…… 지난 이틀 동안 아주 살이 열 겹은 벗겨진 기분이에요. 며칠 뒤에 관객들까지 몰려오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안 가요.
유연
하하, 그만 투덜거려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니까요.
올여름의 대형 프로젝트인 이번 음악 페스티벌은 시 당국에서 유연 회사에 주요 주최·운영을 맡아달라고 제안한 행사였다. 여러 언론사와 기업도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몇 달 전 백기가 임무를 수행하러 떠난 뒤라 혼자 집에 있는 것도 조금 심심하던 참이었다.
다만 음악 페스티벌의 규모가 내 상상을 완전히 뛰어넘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런 초대형 음악 페스티벌을 운영해 본 경험도 많지 않았기에, 지난 몇 달간의 업무는 마치 블랙홀처럼 내 모든 시간과 정신을 집어삼켰다——
어쩌면 바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몰랐다.
적어도 그리움이 머릿속을 지나치게 차지할 틈은 없으니까.
나는 기지개를 켜고 다음 부스의 장비 상태를 확인하러 가려 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린 순간, 멀지 않은 잔디밭에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흐릿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햇살은 그에게만 유난히 관대한 듯 아낌없이 쏟아져 내렸다. 온몸을 감싼 빛 때문에 마치 그 자체로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걸어오며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한 손으로 느슨하게 붙잡은 채,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스쳤다.
주변에서는 음악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오히려 점점 빨라지는 심장박동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연출
왜 그래요? 언니도 너무 피곤해서 영혼이 빠져나갔어요?
유연
……그런가 봐요. 심지어 환각까지 보이네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환각'이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잊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익숙한 체온과 생생한 감촉이 모든 감각을 되살렸다. 맞닿은 몸 너머로 전해지는 단단한 심장박동이 내 심장과 함께 빨라지며 같은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놀랍고도 기쁜 마음에 그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러고도 믿기지 않아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확인했다.
유연
선배! 돌아왔어요?
백기
살 빠졌네. 또 밥 제대로 안 챙겨 먹었지.
유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백기
내 판단이 정확해.
그의 입술이 내 눈가에서 뺨까지 차례로 입을 맞췄다.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듯 촘촘하게 돋아난 수염까지 뺨을 스쳐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덕분에 잠시 멀리 달아났던 이성도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새 등 뒤에서 수많은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 사람이 웃으며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모두 눈을 가늘게 휘고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동
오오~
유연
'오오~' 하지 마요!
백기
잠깐 실례할게요. 몇 분만 저한테 빌려주세요.
일동
방해 안 해요, 안 해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동료들을 보니 웃기면서도 민망했다.
나는 서둘러 백기를 잡아끌고 천막 그늘 아래로 향했다.
사람이 없는 구석에 다다르자 다급한 힘이 나를 단숨에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애써 절제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거세고도 탐욕스러운 입맞춤으로 바뀌었다.
서로 얽힌 입술과 혀가 조금의 빈틈도 남기지 않고 그리움을 탐하듯 맞물렸다.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애틋한 마음을 주고받으며,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시간을 되찾으려는 듯 몇 번이고 강하게 입술을 포개왔다.
내가 내쉬는 모든 한숨을 그가 남김없이 삼켰다.
몸이 거의 하나로 포개질 만큼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은 욕심을 참을 수 없었다.
바쁘게 지내는 건 결국 그리움을 잠시 잊기 위한 마취에 불과했구나.
나는 이토록 그가 보고 싶었던 거구나.
서로를 확인하듯 탐욕스럽고 거침없이 이어지던 입맞춤이 점차 입가를 가볍게 쪼는 다정한 키스로 바뀌고 나서야, 나는 겨우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촘촘한 수염이 조금 따끔했다.
백기는 먼 길을 서둘러 돌아온 기색이 역력했다. 눈 밑에 짙게 내려앉은 그늘은 그동안 얼마나 피곤하고 바쁘게 지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몸을 돌볼 겨를조차 없었던 모습이었다.
유연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백기
바람이 알려줬어. 그대로 따라왔더니 찾았네.
유연
이렇게 피곤하면 일단 집으로 가지 그랬어요.
백기
집에는 네가 없잖아.
그저 웃기만 하는 백기가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워, 나는 그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유연
그럼 이제 얼굴도 봤으니까 집에 가서 좀 자요.
유연
아, 그런데 여기서 집까지는 좀 멀죠. 날씨도 이렇게 더운데, 제가 임시로 마련해 둔 숙소에서 쉴래요?
백기
싫어.
백기는 더없이 당당하게 대답하더니, 내 어깨와 목 사이에 느긋하게 얼굴을 파묻고 자는 척했다.
바로 그때 허리춤에 찬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반대편에서는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것 같던 어떤 사람은 커다란 손으로 자연스럽게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버튼을 누른 채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유연
……
유연
네, 네! 확인했어요. 바로 갈게요.
내가 무전기를 다시 허리춤에 꽂자 백기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목을 가볍게 돌렸다.
백기
네 옆에 따라다니는 사람 하나 더 있어도 될까?
백기
말은 안 하고, 그냥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 사람.
나는 거의 즉시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기에, 나는 어렴풋이 무언가를 눈치챘다.
유연
따라다니는 사람 하나쯤은 괜찮죠. 하지만 '채용'되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해요.
백기는 웃더니 짓궂게 내 손을 잡아끌고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가지고 온 가방을 중계 부스 뒤편의 빈터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멀리서 동료 한 명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기가 고개를 돌려 몸을 숙이고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백기
너희 음악 페스티벌에서 사고를 치려는 '쥐새끼'들이 있거든.
2장
머리가 지끈거렸다.
쉴 새 없이 분주한 행사장에서는 바삐 오가는 발걸음과 장비를 확인하는 목소리들이 보이지 않는 열기를 타고 퍼져나가, 음악과는 또 다른 끊임없는 선율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어느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한 남자가 작업용 천막 안쪽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쪽 발목을 다른 쪽 다리 위에 느슨하게 걸치고, 한 손으로 머리를 괸 채 손에 든 자료를 무심히 넘겨보고 있었다.
그의 몸은 거의 온통 그늘에 잠겨 있었다. 살짝 내리깐 눈꺼풀에 위압적인 호박색 눈동자도 가려져 있었고, 손목에 찬 음악 페스티벌 입장 팔찌만이 이따금 형광 녹색 빛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곳은 마치 폭풍의 중심 같았다.
주변의 뜨거운 열기를 소리 없이 휘어잡으며, 근처를 지나거나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 옆에 있던 협력사 관계자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프로듀서
유연 씨, 솔직히 말해봐요—— 남자친구분이 유연 씨때문에 오신 거예요…… 아니면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프로듀서
이 음악 페스티벌, 무사히 열 수 있는 거 맞죠?
유연
열 수 있죠. 당연히 열 수 있어요. 구 언니, 괜한 걱정하지 말고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프로듀서
세상에, 누가 감히 지휘관님을 없는 사람 취급하겠어요.
그녀의 탄식에 나도 다시 멀리 백기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저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인데도, 공간 전체를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아직 칼집에서 뽑히지 않은 군도 같았다.
군더더기 없이 날카롭고 고요하지만, 당장 다음 순간 누군가의 목을 베어버릴 것만 같은.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가 고개를 들어 멀리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백기가 턱을 살짝 들어 올리자,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따뜻한 바람이 내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은 손끝을 따라 장난스럽게 맴돌며 남몰래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나도 모르게 설레는 마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다음 일정을 확인하고 다시 작업용 천막으로 돌아갔다.
유연
자, 저쪽도 점검 끝났어요! 다들 잠깐 쉬세요!
일동
만세——!
사람들은 마치 '해방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의자 하나를 가져와 백기 옆에 앉았다.
유연
'현장 감독'은 잘하고 계세요?
백기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대단하다는 건 알겠어.
백기는 입꼬리를 올리며 자연스럽게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백기
어디서든 널 불러서 확인받으려고 하고, 그렇게 복잡한 장비들도 전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잖아. 심지어 어느 선이 잘못 연결됐는지도 찾아내고.
유연
헤헤, 그동안 프로그램을 그렇게 많이 만들었는데, 옆에서 보고 배운 게 많죠.
유연
전에 장비 담당자 한 분이 저한테 특별히 '개인 과외'까지 해주셨거든요. 덕분에 정말 많이 배웠어요.
유연
선배가 집에 없을 때, 저는……
무심코 꺼낸 말이 입가에서 멈췄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왠지 그다음에 하려던 말은 지금 꺼내기에 미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백기가 눈을 내리깔고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응?
유연
……아, 아! 선배가 집에 없을 때 제가 엄청 바빴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나는 그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이고, 잠깐 스쳐 지나간 그 미묘한 순간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
화제를 돌리고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생겼다.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백기의 귓가로 몸을 기울였다.
유연
자, 이제 선배 얘기를 해볼까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혹시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어요?
백기
왜 그렇게 생각해?
유연
누군가를 잡으러 온 거라면 이렇게 대놓고 앉아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유연
지금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선배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평소 선배답지 않아요.
내 추리를 듣자 백기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그 미소에는 반드시 뜻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날카로운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백기
일부러 그러는 거야.
백기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았으면, 놈들이 제 굴속에 얌전히 처박혀 있는 게 좋겠지.
유연
잡을 생각은 없어요?
백기
지금은 안 잡아. 뒤에 더 있거든. 일단 좀 더 키워두려고.
그는 목소리를 살짝 높여 느긋하면서도 오만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이미 전원이 꺼진 옆쪽의 중앙 제어 장치를 향해 무심한 듯 흘러갔다.
나는 백기를 한번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방금 한 말들이 나에게만 들으라고 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옆에 놓인 장비들을 살펴보았다.
그중 작은 표시등 하나에서 무슨 이유인지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백기를 돌아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상대방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백기가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내 추측이 맞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해 주었다——
도청 장치가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런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어본 터라 거의 곧바로 침착함을 되찾았다.
백기가 현장 상황을 이렇게 훤히 꿰뚫고 있다는 건 지금 모든 일이 그의 통제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우리 백 경관님은 사냥감들과 심리전을 벌일 생각인가 보다.
귓가에는 단단한 심장박동이 들려왔다.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안쓰러워, 나는 그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백기
걱정하지 마.
유연
선배가 여기 있는데 제가 뭘 걱정하겠어요.
유연
그냥 선배가 피곤할까 봐 그러죠.
나는 고요한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렇게 큰 행사인 만큼 정말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서는 안 됐다.
그런데 문득, 그 생각 사이에 설명하기 어려운 작은 틈이 생기면서 마음속에서 조그만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이것 때문에 백기가 그렇게 먼 길을 서둘러 돌아온 걸까?
하지만 그 의문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괜한 생각이라 여기며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유연
그러니까 제 말 듣고 조금만 쉬어요. 네?
백기
그럼 네가 같이 있어 줘.
유연
같이 있어 줄게요—— 저도 오전 내내 일했으니까 점심시간에는 좀 쉬어야죠.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백기는 마침내 내 말을 받아들였다.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우리는 임시로 마련해 둔 작은 숙소로 돌아갔다.
그제야 백기는 지금까지 유지하던 경계심과 억지로 버티던 긴장을 모두 내려놓은 듯했다.
그는 나를 끌어안고 함께 침대에 길게 누웠다.
유연
그러게 왜 그렇게 무리해요.
백기
널 보고 나니까 잠이 안 오더라.
유연
제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내 말에 대한 대답은 다시 가까워지는 그의 입술이었다.
아까의 탐욕스러운 입맞춤과는 달리, 이번에는 느리고 세심하게 서로를 확인하며 제 보금자리로 돌아온 듯한 입맞춤이었다.
촉촉한 혀가 내 혀에 얽혀 들었다. 그러면서도 애틋하게 입안 구석구석을 훑으며 오직 자신만의 흔적과 숨결을 남겼다.
백기
……그래도 너무 오래됐잖아.
백기
정말 보고 싶었어……
미처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 흐릿하게 흩어졌다.
오랫동안 쌓인 그리움은 몇 번이고 입술을 머금고 다시 입맞춤을 조르는 행동으로 바뀌어, 짙고 은밀하게 뒤섞이는 젖은 소리 속에 가득 넘쳐흘렀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 같았다.
그는 입을 맞추면서 서서히 내 위로 몸을 기울였다.
커다란 손바닥이 내 뒤통수를 감싸자 나는 그의 입술과 침대 사이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느릿하게 이어지는 입맞춤에서는 이따금 끈적하고 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입술을 떼는 것조차 아쉬운 듯 몇 번이고 다시 깊이 머금었고, 그 소리마저 서로의 숨결 속으로 삼켜졌다.
온몸이 오직 그에게서 비롯된 뜨거운 열기 속에 잠긴 것 같았다.
지금의 백기는 한없이 끈기 있으면서도 집요했다.
끊임없이 더 깊은 곳을 향해—— 다가왔다.
아직 에어컨도 켜지 않은 방 안에는 어느새 축축하고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열기가 온몸을 뜨겁게 감쌌다.
너무나 익숙하고, 또 그토록 그리웠던 감각에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때 옆쪽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몽롱하고 어리둥절한 채 눈을 떴지만, 눈앞에는 여전히 나에게 온통 빠져 있는 그의 얼굴만이 보였다.
백기
……네 전화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조차 너무나 가까워서, 마치 내 머릿속에서 직접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이 몽롱한 채 손을 더듬어 마지막 남은 정신력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화면에 뜬 전화번호를 보는 순간, 거의 즉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본능적으로 새어 나온 낮은 신음이 뜨거운 숨결을 타고 내 얼굴에 닿았다.
내 몸이 무의식적으로 보인 반응은 그에게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백기의 시선도 한층 깊어졌다.
백기
안 받아?
유연
……지금은 쉬는 시간이잖아요. 급한 일도 아니고요.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백기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내 위로 몸을 기울여, 내 모든 신경이 오직 자신에게만 향하도록 만들었다.
백기
그럼 나만 생각해.
3장
남자
……괜찮아. 점심때 전화를 끊길래 바쁜가 보다 했지.
남자
전에 네가 알아봐 달라고 했던 그 공급업체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뭔가 있더라고.
남자
몇 단계나 거슬러 올라가 봤더니 결국 물자보장국 국장의 둘째 사위와 연결돼 있었어. 쯧쯧, 그런 사람이니까 굳이 몇 겹씩 관계를 숨겨둔 거겠지.
전화 너머의 목소리에는 장난스러움과 비웃음이 뒤섞여 있었다.
태양은 눈이 부실 만큼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고, 내 마음속에도 한숨 섞인 공허함이 드리워졌다.
유연
알겠어요. 고마워요, 역 오빠. 다음에 밥 한번 살게요.
남자
뭘 그런 걸 가지고. 지난번에 네가 형수님 장비 문제 해결해 준 게 훨씬 큰 도움이 됐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은 뒤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잠시 생각하다가 관련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유연
마 언니, 전에 계속 적극적으로 저희랑 협업하고 싶다고 했던 공급업체 있잖아요. '진명'이라는 곳이요. 그냥 거절하는 게 좋겠어요.
담당자
정말요? 제가 보기엔 가격도 꽤 저렴하고 협업하려는 태도도 좋던데요. 앞으로 거래를 이어가 봐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유연
괜찮아요.
나는 더 설명하지 않고 결정을 전달한 뒤 전화를 끊었다.
사실 반년쯤 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나에게 접근하거나 유연 회사와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 상당수는 은근슬쩍 백기의 이름을 암시하거나 직접 언급했고, 백기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여러 가지 편의를 봐줄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난처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제안을 거절했고 유연 회사 자체가 그런 인맥과 지나치게 엮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폭풍의 중심에 서게 된 이상, 이런 일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백기에게 꺼낸 적은 없었다——
그의 성격상 분명 불쾌해할 테고 자신 때문에 내게 귀찮은 일이 생겼다고 생각할 테니까.
솔직히 나 역시 그가 원치 않는 복잡한 인간관계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금 지친 마음으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숙소로 돌아가려던 순간, 뜻밖에도 조용한 시선 하나와 마주쳤다.
백기가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멀지 않은 처마 밑 그늘에 서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고요한 시선은 또 하나의 뜨거운 태양처럼 내 모든 것을 속속들이 비춰 그의 눈앞에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시선을 받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유연
왜 좀 더 안 잤어요?
백기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무언가가 응어리져 있었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 바다 위에 겹겹이 쌓인 먹구름 같았다.
하지만 곧 그 먹구름은 착각이었던 것처럼 투명하게 걷혔다.
백기는 눈을 살짝 내리깔더니 자연스럽고도 느긋한 모습으로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백기
네가 몰래 도망갈까 봐. 계속 '수행원' 노릇도 하고 싶고.
밴드들이 하나둘 현장에 도착하면서 리허설도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백기는 첫날 그렇게 대놓고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과 달리, 그 뒤로는 오히려 훨씬 조용히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조절하는 데 너무나 능숙했다.
마치 바람처럼, 스스로 허락한 순간에만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만들었다.
리허설 도중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물놀이 구역 담당자들이 마지막으로 시설과 배수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현장 진행요원
쉬고 계신 스태프분들, 물놀이 구역에 오셔서 한번 체험해 보세요!
현장 진행요원
물총이랑 물 호스도 마음껏 사용하셔도 됩니다! 샤워실에는 따뜻한 물도 준비해 뒀어요——!
현장 진행요원
직원들끼리 물총 싸움도 미리 연습해 보세요—— 내일 적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도록요——!
활기찬 외침이 계속 울려 퍼지자, 호기심이 생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다들 조금 쑥스러워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머리에 물이 뿌려진 순간, 곧바로 '보복'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잔디밭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어른들이 어린아이처럼 잔디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서로를 쫓고 장난치기 시작했다.
연출 A
야, 방금 누구야! 당당하면 나와 봐! 제대로 한판 붙자고!
업무에 대한 압박감이 가득했던 순간, 그 무거운 부담들이 마치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로 변한 것 같았다.
찬란한 햇살과 웃는 얼굴들 사이에서 잠시나마 증발해 버리는 듯했다.
시원한 물기가 사방에 퍼졌다.
나도 가장자리에 서서 구경하며 사람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거센 물줄기가 백기의 머리를 정통으로 맞히는 순간, 현장 전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있던 백기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젖어 있었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 끝을 따라 커다란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졌다.
백기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머리를 가볍게 털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나 괴롭힘당한 것 같은데?
유연
……
유연
하하하, 누가 감히 선배를 괴롭혀요!
그의 가벼운 한마디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단숨에 풀어졌다.
나도 옆에 놓인 물총을 집어 들고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유연
방금 누구야! 당장 나와요!
스태프
우와, 특파팀 사람보다 더 무서운데?!
현장은 다시 한번 웃음과 함성으로 떠들썩해졌다.
백기도 함께 물총 싸움에 뛰어들었다.
다만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주로 나를 엄호해 주는 역할이었다.
누구보다 민첩하고 강한 사람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의 공격적인 면모를 모두 거두고 나와 함께 장난스러운 물보라 속에 녹아들었다.
페스티벌 개막을 하루 앞둔 날, 모두가 마음껏 쌓인 스트레스를 풀며 여름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한참을 뛰어놀다 보니 나도 조금 지쳤다.
나는 백기와 함께 멀리 떨어진, 아무도 없는 에어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젖은 옷이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게 불편했는지, 백기는 아예 셔츠를 벗어버렸다.
완전히 흠뻑 젖은 그의 셔츠를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숙여 거의 젖지 않은 내 옷을 힐끗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유연
누가 몰래 반칙했네~
백기
정당방위야.
그는 너무나 당당하게 대답했다.
찬란한 햇살 아래, 맑은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는 웃으며 그의 뺨을 콕 찔렀다.
그러다 다시 멀리서 떠들썩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열심히 일하고, 저마다 조금씩 고집도 있지만, 언제나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들.
우리의 여름과 음악 페스티벌.
이대로 계속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백기가 말했던 위험한 존재들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난 며칠 동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고, 백기도 줄곧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긴장하며 숨을 들이켰다.
“푸슉——!”
바로 다음 순간, 물줄기 하나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덕분에 내 시선과 정신은 온통 그에게로 돌아갔다.
백기
내일도 잘될 거야.
물총을 쏜 장본인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 밝았다.
마치 순식간에 내 마음속 모든 먹구름을 밝혀주고, 오직 나만을 위한 여름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유연
좋아, 기습했다 이거죠——!
나는 웃으며 옆에 놓인 물총을 집어 들고 소소하게 '반격'했다.

백기는 내 물총의 총구를 바라보며 일부러 손을 들어 피하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정작 몸은 당당하게 그 자리에 남아, 내가 자신의 드러난 가슴을 마음껏 '공격'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그의 단단한 팔뚝과 몸에 부딪히자 곧바로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흩어지는 물방울들은 한층 더 선명하고 눈부신 빛을 만들어 냈다.
백기
반격을 신청합니다.
유연
신청 기각——! 백기 병사, 어서 벌을 받도록 하세요——!
백기
그럼 미리 항복해도 될까?
유연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나는 일부러 그가 간지럼을 타는 부위를 조준했다.
그를 계속 괴롭히자 백기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였을까.
아니면 주변의 분위기가 너무나 활기차서였을까.
그 역시 눈부시게 부서지는 햇빛 속에 완전히 녹아든 듯했다——
마치 한여름의 또 다른 찬란한 빛깔이 된 것처럼, 그에게는 한 점의 그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겹겹이 맺힌 물방울들은 내 뜻을 따르기라도 하듯 그의 몸 위를 이리저리 흘러내렸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간 허리와 복부를 향해 흘러갔다.
탄탄한 팔은 평소와 달리 물방울로 반짝였고, 선명하게 드러난 복근은 흐트러진 숨결을 따라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백기는 부드러운 에어 소파에 몸을 푹 묻은 채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살려달라는 애원인지, 아니면 나를 마음껏 응석 부리게 해주려는 다정함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음 순간 어떤 짓궂은 '반격'을 해올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이쯤에서 승리를 선언하고 제때 물러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유연
크흠, 이러고 보니까 제가 선배를 좀 괴롭힌 것 같기도 하네요.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싸움을 끝내려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백기의 긴 다리가 휘감기듯 뻗어 나와 내 몸을 통째로 끌어당겼다.
마침 내 손에 들고 있던 물총의 총구가 그의 가슴에 닿았다.
손가락이 무심코 방아쇠를 누르자 물이 튀어 그의 가슴을 적셨고, 백기는 도발하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백기
겨우 조금?
유연
아니…… 선배가 먼저 손을 썼…… 아니! 다리를 썼잖아요!
백기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그의 다리 때문에 나는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게다가 매끄러운 에어 소파 위에서 백기의 몸이 자꾸만 나를 향해 미끄러지면서, 우리는 완전히 밀착하게 됐다.
이미 그의 몸을 적셨던 물이 이제는 고스란히 내 몸으로 옮겨왔다.
거기에 뜨거운 체온까지 더해지자, 한여름의 열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뒤덮었다.
유연
이 나쁜 사람!
백기
이 나쁜 사람은 아직 물총도 안 들었는데.
백기는 일부러 에어 소파를 눌러 부풀어 오른 부분이 우리를 완전히 가리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서로에게 속수무책으로 드러난 채, 남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었다.
뜨거운 숨결이 내 입가에 닿았다.
백기는 짓궂게 팔을 더욱 조여오더니,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서로 바짝 맞닿은 피부를 흘끗 바라보았다.
백기
완전히 젖었네.
유연
아까 선배도 똑같았잖아요?
백기
내가 그렇게 만든 거면 됐어.
나는 웃으며 입을 벌려 그를 살짝 깨물었다.
그러자 백기는 그 입술마저 자신의 입술로 머금었다.
백기
아까 네 동료들 앞에서 나 잘했어?
나는 눈을 들어 그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사건이 진행 중인 만큼 여전히 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주변의 즐거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적당히 얌전하게 발톱과 이빨을 감추고, 위험한 기운까지 거두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만큼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 다시 한번 설레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이마와 눈가에 입을 맞췄다.
유연
정말 잘했어요. 사실 그렇게까지 잘하지 않아도 되는데.
백기
그럼 다음에 네가 한밤중에 회의하면 그대로 들쳐 업고 데려가야겠네.
유연
……흑흑, 저도 한밤중에 회의하고 싶지는 않다고요!
4장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땅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드럼 비트가 한 번, 또 한 번 가슴을 두드리며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를 더욱 끌어올렸다.
인파가 물결치듯 움직였고,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열기 속에서 음악에 맞춰 마음껏 몸을 흔들었다.
음악이 여름을 뜨겁게 불태우는 동안, 나는 여러 무대 뒤편을 오가며 모든 진행 과정과 공연이 정상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했다.
동시에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주변을 은밀히 살피며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백기
일은 이미 해결됐어.
유연
……네?
멀리서 일렉트릭 기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지만, 지금 내가 받은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연
……그냥…… 잡았다고요? 끝난 거예요?
백기
응. 놈은 내가 손을 쓰지 않을 거라고 믿었나 봐. 충분히 몸을 숨길 수 있다고도 생각했는지, 오히려 허를 찌르겠다고 사람들을 새로 바꿔 투입했더라고.
백기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내 손을 잡고 원래 가려던 다음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백기
덕분에 한꺼번에 다 잡을 수 있었지.
백기
사람들은 이미 조용히 데려갔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지금 이 순간의 자유롭고 눈부신 빛을 모두 눈동자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수많은 비밀 작전에 참여하며 온갖 상황에 대비해 왔는데도, 이번만큼은 나조차 놀랐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위기가 이미 막을 내렸을 줄은 몰랐으니까.
물론 잘된 일이었다.
열광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현장에서 나는 무대 뒤에 서서 음악이 몇 번이고 가슴속을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 선율에 마음이 한껏 들뜨다가도 다시 차분해졌다.
멀리서 함께 뛰고 춤추는 관객들을 바라보자 내 마음도 덩달아 설레기 시작했다.
풍선들이 날아오르며 한여름 축제의 절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백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유능하고 고생 많은 특파팀 대원들이 있어서 그리고 열정 넘치는 수많은 동료들이 함께해 줘서 다행이었다.
그 모든 사람들 덕분에 지금 이 순간이 이렇게 찬란할 수 있었다.
나는 직접 그들 사이에 뛰어들 수는 없었지만, 주변에서 분주히 움직이거나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드는 동료들과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백기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요란한 음악 소리 속에서 허리를 숙여 내 입가에 귀를 가까이 가져왔다.
유연
선배, 정말 고생 많았어요——!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내 입가에 번진 미소가 그의 입가에도 번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입술이 가볍게 포개졌다.
유연
선배도 가서 좀 즐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백기
지금도 너랑 같이 즐기고 있잖아.
그러더니 그는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동그란 케이스를 흔들어 보였다.
케이스를 열고는 머리카락에 무언가를 쓱 붙였다.
백기
한예준이 줬어. 나도 분위기 좀 내보라고.
백기
어때, 이제 좀 어울려?
머리카락에 더해진 선명한 푸른색 포인트와 이마에 두른 헤어밴드가 어우러져, 지금의 백기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멋스러웠다.
유연
너무 완벽한데요! 그래도 저는 선배가 조금 더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백기
……?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백기의 손을 잡아끌어 중계 부스 밖으로 뛰어나갔다.
우리는 빽빽한 인파 속으로 들어가 멀리 무대를 바라보았다.
대형 스크린에 연주자의 모습이 나타나자, 순간 하늘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백기의 눈이 단숨에 밝아졌다.
그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유연
헤헤, 집에 앨범이 그렇게 많은 걸 보고 이런 좋은 기회에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말 성공할 줄은 몰랐네요.
유연
선배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제 사심이 가득 담긴 특별한 사람에게요.
나는 웃으며 손에 든 원격 조종 장치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음표 모양의 풍선들도 고개를 까딱이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감미롭고 깊이 울려 퍼지는 선율이 뜨거운 열기 속에 번져가며 현장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음악
“This is the time for yourself to be free”
"지금이야말로 네가 자유로워질 시간이야."
음악
“You gotta follow your heart”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해."
음악
“This is the time in your life and it’s never too late.”
"네 인생에서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이야. 결코 늦지 않았어."
점점 커지는 드럼 소리 사이로 백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이거 준비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유연
그럼 지금 이 순간 마음껏 즐겨요~ 제가 준비한 보람이 있도록요.
유연
This is the time for yourself to be free~
지금이야말로 자유로워질 시간이야~
좋아하는 것을 바라보는 백기의 얼굴을 보니 나도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유연
다만 조금 아쉽네요. 더 가까이 갈 수는 없어서.
백기
지금도 충분히 좋아.
백기는 웃으며 내 손을 잡아 높이 들어 올렸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음악
“This is the time for yourself to be free”
"지금이야말로 네가 자유로워질 시간이야."
백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 순간에 있어.
음악
“You gotta follow your heart”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해."
백기
그리고 나도 이 순간에 있고.
멀리 떨어져 있어 조용히 숨어 있는 듯했지만, 그 순간은 한여름에 활짝 피어난 꽃처럼 생기로 가득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 남몰래 지금 이 찰나를 즐겼다.
멀리서는 오랜 친구들이 다시 만났고, 아름다운 음악은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성대한 공동의 추억을 새겨 넣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팔을 높이 들고 모든 것을 잊은 채,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었다.
음악
“You gotta follow your heart”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해."
한여름은 찬란했고, 햇살은 눈부시게 빛났다.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한껏 들떠도 좋은 순간이었다.
음악에 불타오르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눈 깜짝할 사이 햇빛과 황혼마저 모두 태워버렸다.
밤이 되자 잔디밭 곳곳에 흩어진 인파와 불빛이 또 하나의 별 가득한 밤하늘을 만들어 냈다.
많은 사람들이 악기를 들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음악은 사람들의 밤 이야기가 되었고, 밀려오는 파도와 어우러지는 합주가 되었다.
그때 작은 픽업트럭 한 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본 나는 웃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연
와, 선배 이건 어디서 구했어요?
백기
우리도 분위기 좀 내보자.
백기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하늘 가득한 별빛이 담겨 있었고, 그 안에는 나도 함께 담겨 있었다.
바닷가를 따라 난 작은 길에는 밤바람이 느긋하게 불어왔고, 밤바다는 고요하고 부드러웠다.
멀리 바라보니 행사장의 불빛이 반짝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서로 다른 곡조들이 뒤섞이며 밤의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차창에 기대어 옆에 앉은 백기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말은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바람이 그의 이마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흔들고, 얇게 번진 달빛이 온몸을 감쌌다.
그 모습은 낭만이라는 말을 눈앞에 그대로 펼쳐놓은 것 같았다.
마침내 차가 바닷가에 멈춰 섰다.
백기는 내 손을 잡아끌고 미리 자리를 깔아둔 트럭 적재함에 나란히 앉았다.
유연
우리 백기 씨, 준비를 아주 철저히 하셨네요~
백기
나도 너한테 기타를 연주해 주고 싶었어.
백기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연주하려는 건 아니야. 기타는 빌린 거지만, 연주는 너 혼자만 들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마술이라도 부리듯 트럭 적재함 뒤에서 어쿠스틱 기타 한 대를 꺼냈다.
밤하늘 아래, 그의 유연한 손가락이 기타 줄 위를 자유롭게 오갔다.
손끝에서 밝고 경쾌한 선율이 피어났다.
맑고 투명한 음표들이 가볍게 이어졌다.
마치 해변을 부드럽게 두드리는 또 하나의 파도처럼, 밤을 수놓는 선율이 되었다.
유연
이 곡은 또 언제 연습했어요?
백기
아주 오래전에. 그런데 그동안 마땅한 기타가 없었거든.
유연
그럼 이번에 빌린 기타가 정말 좋은가 봐요.
백기
꼭 그런 건 아니야.
그는 웃으며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
백기
그냥 지금은 모든 게 딱 좋은 것 같아서.
자유롭고 걱정 없는 선율이 밤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능숙한 손가락이 기타 줄 위를 거침없이 오갔다.
분명 기타는 한 대뿐인데도, 여러 개의 선율이 함께 춤추는 것 같았다.
일부러 기교를 뽐내는 연주가 아니었다.
그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들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유연
이 곡은 제목이 뭐예요?
백기
Longing. 그리움이야.
지금 그의 목소리마저 깊고 그윽한 또 하나의 노래처럼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흠뻑 빠져 저도 모르게 눈을 살며시 감았다.
이윽고 더욱 길고 부드러운 선율이 긴 바람처럼 다시금 조용히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리움 같기도 하고, 아득한 곳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마음 같기도 했다.
나는 두 손을 뒤로 짚고 몸을 살짝 기울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밤이 나를 더욱 깊이 품어주도록.
마지막 음표가 울리고 사라진 순간이었다.
갑자기 멋진 저음이 귓가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백기가 베이스 기타를 어깨에 메고 트럭 적재함에서 뛰어내려 있었다.
날렵한 손가락이 현 위를 정확하고 경쾌하게 튕기며, 역동적이면서도 느긋한 선율을 만들어 냈다.
지금의 그는 조금 전까지 천천히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인이 아니었다.
요란하게 튀어 오르는 불꽃이자, 거침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되어 있었다.
드럼 비트가 받쳐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모든 리듬을 지배하는 사람은 바로 그였으니까.
낮은 음역의 진동은 마치 대지의 심장이 울리는 소리 같았다.
유연한 손가락이 베이스 줄 위를 튕기고 뛰어다니며, 순식간에 밤 전체를 뜨겁게 달구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
온몸에 리듬이 새겨진 것만 같아서, 나도 참지 못하고 픽업트럭에서 뛰어내렸다.
멀리 있는 무대는 이미 조명이 꺼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온 은하수가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백기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 같았다.
자유분방하게 올라간 입꼬리.
느긋하면서도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한 선율은 끊임없이 내게 그의 모습과 오직 그만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거침없고, 제멋대로였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바닷가에서, 내 앞에 있는 익숙하면서도 또 다른 그 사람——
지금은 무언가를 증명해야 할 일도, 누구와 경쟁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이 순간 나를 위해 자연스럽게 연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조금은 잘난 척하며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하늘 가득한 별빛이 그를 바라보며, 나를 미치도록 설레게 하는 사람을 환하게 비추었다.
유연
백기! 나 선배한테 완전히 빠졌어요!
나는 모든 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내 마음을, 그를 향해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전해주고 싶었다.
백기는 그저 웃었다.
연주는 멈추지 않은 채 긴 다리로 한 걸음 다가와, 한층 가까워진 거리에서 느긋한 선율과 강렬한 진동을 나누었다.
그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베이스는 그의 느긋하면서도 거침없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그 안에 담긴 자유분방함과 유혹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나 역시 그의 손끝에서 튀어 오르는 음표가 된 것 같았다.
매혹적인 밤 속에서 그와 함께 흔들리고, 리듬을 타며 춤추었다.
그 선율은 내 혈관 속으로 파고들어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덕분에 나는 그가 온몸의 피가 끓어오를 만큼 격렬하게 감정을 쏟아내고 해방되는 순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나와 백기 둘만의 음악 페스티벌이었다.
그 황홀함에 취해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그리움 때문일까.
이미 그런 감정에 익숙해졌고, 스스로 그리움을 마주하고 달래는 일에도 능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지금, 백기가 이렇게 눈앞에 있었다.
내 심장과 같은 거리에,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나는 그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곁에 있어 줘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입맞춤에 잠겼지만, 그 말만큼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백기는 무언가 눈치챈 것 같았다.
그는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마치 내 눈동자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려는 듯 바라보았다.
백기
무슨 말 하고 싶어?
나는 그를 바라보다 입꼬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유연
선배가 너무 멋있어서요. 정말 미칠 만큼 멋있어요.
유연
이제야 왜 사람들이 음악 페스티벌을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시간'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말을 듣자 어째서인지 그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투명하던 구름이 서서히 무거운 윤곽을 드러내는 듯했다.
결국 백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번 나를 빠져들게 하는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폭풍우가 몰려오기 직전처럼, 심상치 않은 울림을 품은 선율이었다.
5장
다음 날에도 음악 페스티벌 현장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동료들도 이제 그만 현장 감독 노릇을 하라며 나를 떠밀었다. 다른 스태프들과 교대해서 페스티벌 분위기를 좀 즐기라는 것이었다.
나도 더는 사양하지 않고 백기의 손을 잡아끌어 물놀이 구역으로 달려갔다.
담당자
유연 씨, 누가 당신을 찾던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 한 명이 달려오더니 내 귓가에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담당자
진명 쪽 사람이 꼭 한번 만나야겠대.
유연
……
유연
알겠어요.
나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상황을 가늠해 보고, 자외선 차단용 겉옷을 걸친 뒤 백기에게 웃어 보였다.
유연
저 잠깐 일 좀 처리하고 올게요. 선배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유연
금방 돌아올게요.
백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임시 작업실 근처에 이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나를 발견하자 난처하면서도 비위를 맞추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
유연 선생님…… 그래도 직접 뵙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서요.
유연
동 선생님, 이 일은 몇 번을 이야기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요.
남자
그래도 최소한 이유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 선생님 쪽과도 협업하시면서요. 저희도 장비나 인력 면에서는 전혀 뒤지지 않는데요.
유연
장비나 인력 때문이 아니에요.
남자
그럼 이유가 뭡니까?
끈질기게 이유를 캐묻는 상대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연
동 선생님, 저희도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저도 굳이 말을 너무 매정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유연
다만 장비나 인력 때문이 아니라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 없어요. 그래도 꼭 이유를 들어야겠다면……
나는 그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차갑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유연
유연 회사의 대표인 제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유는 그게 전부예요.
유연
이제 선생님도, 선생님 회사 대표님도 충분히 알아들으셨나요?
풀이 죽어 돌아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린 순간, 아까 분명 얌전히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백기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떠들썩한 인파가 그의 등 뒤로 펼쳐져 있었지만, 백기는 그 모든 소란과 뚜렷한 경계를 긋고 있는 듯했다. 주변의 모든 것을 밀어내고 소음마저 잠재우는 것 같았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기운까지 감돌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했다. 그의 시선에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낯선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백기 앞으로 걸어갔다.
유연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잖아요?
유연
우리 돌아가면 아까 그……
백기
저 사람, 전에도 여러 번 적극적으로 접근했지?
담담한 목소리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백기는 남자가 떠난 방향을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 내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짙은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유연
알고 있었어요?
백기
네가 직접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어.
유연
……그냥 공급업체 한 곳을 거절한 것뿐인데요?
백기
그걸 묻는 게 아니야.
그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백기가 불쾌해하고 짜증스러워한다는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음악은 쉴 새 없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나는 한동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백기는 내 손을 잡아끌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임시 숙소로 돌아갔다.
임시로 마련한 작은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바깥에서 뜨겁게 울려 퍼지는 음악의 진동만이 희미하게 전해졌다.
대낮이었지만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은 온통 캄캄했다. 그 어둠이 내 모습과 함께 마음속에 감춰둔 감정들까지 숨겨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희미한 빛은 여전히 백기의 눈동자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그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찔려야 하지? 오히려 이상하게 구는 건 눈앞의 이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백기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유연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유연
말했잖아요. 계속 적극적으로 접근하던 공급업체를 거절한 것뿐이라고요. 뭘 더 물어보고 싶은 건데요?
백기
왜?
유연
그쪽이 적합하지 않으니까요!
백기
그 이유 말고.
그는 다시 한번 차갑게 말했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가 격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을 받고 있자니, 마치 남몰래 지켜주려 했던 마음을 정작 그 당사자에게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그저 내 방식대로 백기를 지켜주고 싶었을 뿐인데, 혹시 내가 지나치게 나섰던 걸까?
그를 지켜주고 싶으면서도, 그 때문에 백기가 불쾌해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 봐 걱정됐다.
복잡하고 확신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음속을 가득 채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백기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나를 자신과 벽 사이에 꼼짝없이 가두었다.
백기
말해.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거의 낯설게 느껴질 만큼 강한 압박감이 숨결마저 짓누르는 듯했다.
유연
서, 선배…… 그렇게 무섭게 굴지 마요. 조금 무서워요.
백기
무서워?
그의 건조한 손바닥이 내 턱을 받쳤다. 조금도 피하거나 숨을 수 없게 만드는 손길이었다.
백기
그럼 저 사람을 거절한 이유부터 말해봐.
백기
그리고 어젯밤에 끝내 하지 않았던 말도.
백기
전에 내가 집에 없을 때를 이야기하다가 멈췄잖아. 원래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가 거리를 좁히며 내뿜는 뜨거운 숨결에 본능적으로 몸을 떨고 말았다.
유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백기
네가 거절한 건 계약업체 하나뿐이 아니잖아.
백기
시도 때도 없이 네게 걸려 오는 전화들도 있고.
백기
네가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인맥을 만들려고 접근하는 놈들,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겠다고 떠드는 인간들도 있지.
백기
더 말해줘?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만 크게 떴다.
백기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는 대부분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빴다. 물론 그의 신분 때문에 내 안전을 지키려고 사람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자세한 사정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의 그는 마치 오랫동안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맹수 같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앞에서 또 다른 위험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유연
선배…… 전부 알고 있었어요?
백기
네가 직접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어.
유연
제가 일을 잘못 처리한 건가요?
백기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웠다. 바다 위에는 먹구름이 빽빽하게 드리워져 있었고, 마치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에 맞춰 언제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는 백기를 보고 있자니 나도 답답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미 전부 알고 있으면서 나보고 대체 무슨 말을 더 하라는 걸까?
결국 나도 고집이 솟구쳐 눈을 부릅뜨고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유연
그럼 선배는요? 선배는 왜 그렇게 급하게 돌아온 건데요?
유연
저를 만나려고 서둘러 돌아오고 싶었을 거라는 건 알아요. 음악 페스티벌에서 문제가 생길 거라는 얘기도 들었고요. 하지만 정말 그게 이유의 전부예요?
유연
백기, 제가 선배가 집에 돌아오길 기다리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요.
유연
이렇게 큰 음악 페스티벌에서 정말 위험한 일이 생긴다고 해도, 특파팀에 지휘관이 선배 한 사람뿐인 것도 아니잖아요.
유연
선배도 한번 말해봐요.
이번에는 백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울려 퍼지는 빠른 음악은 지금 내 어지럽고 조급한 마음과 꼭 닮아 있었다.
백기의 입술이 점점 굳게 다물리는 것을 보자, 나도 화가 치밀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유연
선배, 이건 불공평해요!
유연
선배도 할 말이 없다면 저도 더는 할 말 없어요!
나는 있는 힘껏 백기를 밀어내고 방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거스를 수 없는 강한 힘이 나를 단숨에 끌어당겼다.
백기
그럼 말하지 마.
밖에서는 음악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모든 감정이 거칠게 맞물려 오는 그의 입술과 치아 사이에서 부서졌다.
한여름의 열기는 또 다른 적나라한 모습으로 변해 내 몸에 바짝 맞닿았다.
거의 순식간에 그는 내 숨결을 모조리 앗아갔다. 통제력을 잃은 감정에는 무언가를 쏟아내려는 듯한 거친 기세가 실려 있었고, 그는 거침없이 점점 더 깊이 파고들었다.
축축하게 얽혀 드는 혀에 혀뿌리까지 저릿해질 지경이었다. 그가 스친 곳마다 짙은 흔적이 남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뒤로 물러나려 할 때마다 등 뒤를 감싼 손바닥이 더욱 강하게 나를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입술과 혀가 거의 하나로 포개졌는데도 여전히 부족한 듯했다.
말로도 부족하고, 거리도 부족하고, 입맞춤으로도 부족했다.
지나치게 낯설 만큼 공격적인 그의 집요한 움직임이 몇 번이고 이어지는 동안, 어둠 속에서는 무언가가 미친 듯이 자라나고 뒤엉키고 있었다.
미세한 감촉마저 어둠 속에서 몇 배로, 또 몇 배로 증폭되었다. 축축하게 젖은 소리가 새어 나오는 신음을 끊임없이 삼키며 머릿속에 요란하게 울리는 유일한 소리가 되었다.
세상은 숨 막히게 덥고 뜨거웠다.
온몸에 힘이 풀려 거의 축 늘어졌지만, 백기는 몇 번이고 내 허리를 들어 올리며 더욱 깊이 입을 맞췄다.
유연
으응…… 선배…… 이러면 안 돼요……
백기
안 된다는 말은 안 돼.
백기
피하지도 마.
하지만 미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은 모두 그에게 삼켜져, 가늘게 떨리는 신음이 되어 거친 숨결과 뒤엉켰다.
백기는 짓궂게도 몇 번이고 몸을 꼿꼿이 세우며 내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까치발을 들고 있던 발끝이 서서히 바닥에서 떨어졌다.
백기가 나를 더욱 좁은 품 안에 가두면서 세상마저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듯했다. 나는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거의 매달리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거침없이 쏟아지던 애정 어린 요구는 점차 달래듯 가볍게 입을 맞추는 행동으로 바뀌었다. 마치 그제야 감정을 가라앉히고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같았다.
백기
넌 왜 항상 이렇게……
낮고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마치 뼛속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온 한숨 같았다. 억눌러도 감출 수 없는 감정이 심장에서부터 뒤통수까지 퍼져나가, 온몸이 떨릴 만큼 아릿하고 저릿한 감각을 남겼다.
백기
……정말 미치겠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한층 격렬해진 선율이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가득 채웠다.
음악은 순식간에 절정에 이르렀고 거센 비바람처럼 모든 장벽을 뚫고 나를 휩쓸었다.
요란하게 울리는 리듬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란을 자아냈다. 사람들의 함성과 외침은 내 목소리마저 삼켜버리는 듯했고, 나 역시 그 속에서 함께 흔들렸다.
음악에 맞춰 짙고 축축한 소리가 끊임없이 높아졌다 낮아지기를 반복하며, 점점 더 거침없는 반주가 되어갔다.
나는 그를 있는 힘껏 깨물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다시 그가 만들어 내는 리듬에 휩쓸려, 정신이 아득해지는 또 다른 황홀경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세상은 온통 흐릿해졌고,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드는 것 같았다.
어느새 희미하게 남아 있던 빛마저 사라져, 내 눈에는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호박색 눈동자만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대답을 전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더욱 깊이, 끝없이 깊이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영혼 깊은 곳까지 핥아 올리는 듯한 감각에 온몸이 곤두설 때까지, 마음속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 때까지.
하지만 너무 깊었다. 자기 자신마저 삼켜지는 것 같았고, 마치 온전히 그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듯했다.
유연
……선배…… 나 좀 내려줘요……!
백기
못 하겠어……
백기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백기
나도 모르겠어……
거세게 밀려오는 음악 속에서 그가 조금씩 더 깊이 다가올 때마다, 어떤 소유욕이 격렬하게 커지고 부풀어 올랐다.
백기
나도 어떻게 해야…… 널 사랑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
백기
……사랑해…… 널 사랑하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선율은 갈수록 격렬하고 거칠어졌다. 거의 통제력을 잃은 듯한 거침없는 움직임은 사람들의 비명을 따라 몇 번이고 더 높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마침내 눈부시게 번쩍이는, 온몸이 떨리는 듯한 새하얀 공백이 펼쳐졌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다음 곡의 비트가 다시 울려 퍼졌다——
조금의 휴식도 없이, 음악은 다시 시작되었다.
5장 — 마음의 교차
너무 심하게 굴었다.
눈앞에서 깊이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백기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속으로 끊임없이 자책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어지럽혀진 모든 것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여기저기 남은 짙고 옅은 흔적들을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그 자국들은 너무나 선명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없이 일깨우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됐는데.
백기는 손을 뻗어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찌푸리고 있는 미간을 부드럽게 펴주었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곳에 입을 맞췄다.
백기
……미안해.
바닷바람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간헐적으로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 소리는 낮고 묵직한 잡음처럼 울렸다.
날이 밝을 듯 말 듯한 새벽빛이 서서히 밤하늘에 스며들고 있었다.
백기는 바닷가에 앉아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온몸을 적시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어쩌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그토록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모호해서, 백기 자신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려는 눈빛이 싫었다.
말을 삼킨 채 침묵하는 모습도 싫었다.
그리고 남몰래 자신을 지켜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정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도 싫었다.
백기
'너야말로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있잖아. 너도 그녀한테 늘 그렇게 해왔으면서.'
바닷바람이 너무 시끄러워서인지,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짜증 나.
그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걸 다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했기에, 언제나 말없이 불필요한 마찰을 피해 왔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너무나 용감하고 다정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밤,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그의 영혼을 끌어안아 주었다.
그를 온순하게 만들고, 평온하게 해주었다.
줄곧 그렇게 해온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백기
……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백기는 화면을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귓가에서는 하품 섞인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고진
전부 불었어. 처음에 우리가 조사했던 내용이랑 거의 차이 없어.
백기
그럼 계속 진행해.
고진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다니까 그랬잖아. 여긴 다들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백기
됐어. 나도 알아서 하고 있어.
전화 너머에서 고진의 투덜거림이 한동안 이어지더니, 이내 정상적인 보고로 돌아갔다.
백기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가, 참지 못하고 돌멩이 하나를 주워 바다에 던졌다.
'풍덩.'
무언가가 자신의 마음속에도 함께 떨어진 것 같았다.
고진
……대충 이 정도야. 앞으로 진행되는 일 있으면 그때그때 알려줄게.
고진
아, 졸려 죽겠다. 난 집에 가서 잘 거야!
백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몇 번이고 생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수평선 너머로 떠오른 햇빛이 눈부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백기
……크흠…… 너…… 너 혹시…… 크흠…… 싸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망설이는 마음 때문인지, 말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작아졌다.
아니나 다를까.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전화 너머에서 폭발하듯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귀가 아플 정도였다.
고진
하하하하하! 네가 그렇게 허겁지겁 돌아간 게, 알고 보니 싸우러 간 거였냐?!
고진
하하하하! 야, 덕분에 잠 다 깼다!
백기
다, 웃, 었, 어?
고진
아니, 앞으로 백 년은 더 웃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고진의 거침없는 웃음소리에 백기는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이 꼭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고진
빨리 해결하는 방법이 궁금한 거야, 아니면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궁금한 거야?
백기
빨리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
고진
야, 꺼져. 그건 그냥 지름길로 가겠다는 거잖아.
백기
……그럼 일단 빨리 해결하는 방법부터.
고진
그거야 쉽지. 네 여자친구 꼭 끌어안고 뽀뽀하고, 또 뽀뽀해. 그러면서 '자기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이번에 확실히 반성했어. 미안해, 자기야.' 하면 되지.
백기
너나 꺼져.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백기는 왜 하필 이런 엉터리 책사에게 조언을 구했는지 진심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동시에, 백기는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을 이렇게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대로 없었던 일처럼 넘어갈 수도 없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무척이나 중요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그를 답답하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간절히 갈망하게 했다.
고진
해결하고 싶으면 원인부터 찾아. 십중팔구 네가 문제일 테니까, 네 안에서부터 문제를 찾아보라고.
백기
……
백기는 다시 한번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바다 저편에서는 찬란한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춰주는 것 같았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녀에게서 무엇을 얻고 싶은 걸까?
백기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작은 숙소를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와 반대 방향에 드리워진 그늘 속으로 걸어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됐다.
그저 한 번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 너무나 쉽게 그녀의 다정함과 순응을 얻으려 해서도 안 됐다.
그는 반드시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생각해 봐야 했다.
6장
……백기, 이 나쁜 자식.
관객들의 함성 속에서 마지막 공연의 음악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잔뜩 굳은 얼굴로 중앙 제어실 뒤편에 서서,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처럼 백기가 쉬는 날이었고, 이렇게 특별한 음악 페스티벌까지 열렸는데.
나는 그저 우리 둘 다 즐겁고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길 바랐을 뿐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걸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백기가 신경 써야 할 일과 골칫거리만 더 늘어날 뿐이지 않을까?
백기와의 관계 때문에 내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을 테고, 나 역시 나만의 방식으로 다른 속셈을 품은 사람들이 알아서 물러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백기도 언제나 나를 위해 말없이 많은 일을 해주잖아.
그런데 내가 똑같이 하는 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바람만이 쉴 새 없이 불어올 뿐, 어디에서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점심 무렵, 화를 꾹 참고 방을 나선 뒤로 나는 백기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딘가에서 깊고 짙은 시선이 줄곧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그 시선 역시 주인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백기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고집을 꺾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마지막 곡이 끝나고, 사람들은 마음껏 열광했던 그 세계에서 하나둘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일동
건배!!!
밤이 되자 모든 스태프가 무대 철거를 시작하기 전, 우리끼리 작은 뒤풀이를 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각 분야의 스태프들 사이를 오가며 잔을 부딪치고 축하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백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밤바람이 사람들의 흥겨운 노랫소리를 실어 날랐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프로듀서로서 해야 할 역할을 다했다.
그러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조용히 무리를 빠져나왔다.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선을 따라 멀리까지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부드러운 파도가 몇 번이고 해변으로 밀려왔다.
한동안 하늘과 땅 사이에는 오직 파도와 바람 소리만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멀지 않은 해안가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빌려온 픽업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한 손에 뚜껑을 딴 맥주캔을 들고 있었다——
방금 전 우리가 뒤풀이에서 마시던 바로 그 맥주였다.
이 사람은 나타나지도 않더니, 우리 뒤풀이 맥주까지 몰래 가져왔네.
바닷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렸고, 달빛은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눈앞의 풍경이 조금 흐릿해졌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고집스러운 마음이 남아 있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바닷바람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음악 페스티벌에서 일을 벌이려던 놈 말이야. 너 때문에 그랬던 거야.
유연
……네?
나는 잠시 멍해졌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그저 백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백기
누군가 일부러 널 노리고 있었어. 네가 만든 행사만 골라 문제를 일으켜서 널 무너뜨리려고 했던 거야.
유연
……왜요?
백기
너라는 프로듀서가 마음에 안 들었나 봐.
백기
테러를 일으키려던 것도 아니고, 거대한 조직이 배후에 있었던 것도 아니야. 나와도 전혀 관계없어—— 오직 너 개인을 노린 일이었어.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한발 물러선 듯한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
백기
그래서 최대한 빨리 돌아오려고 했던 거야.
백기
특파팀의 능력은 믿어. 상황을 지켜봐 주는 사람들도 많았고.
백기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어.
백기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와서 네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어. 이 일도 내가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고.
백기는 맥주캔을 차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백기
원래는 이 일을 너한테 말할 생각이 없었어.
백기
어차피 내가 해결했으니까. 사실 그전에도 이런 일들을 남몰래 여러 번 처리했었고.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멀고도 가까운 수많은 일들이 그 순간 호박색 눈동자 깊은 곳에 스며드는 듯했다.
백기
하지만 이건 잘못된 거야.
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은 언제나 미덕이 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칭찬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상대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어쩌면 그저 자신이 이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백기
오히려 내가 널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어.
유연
저는 그냥 선배가 저 때문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했을 뿐이에요!
백기
내가 너한테 부담을 주지 않았다고?!
유연
당연히 안 줬죠!
백기
전부 부담이었잖아!
백기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냈다.
백기
넌 내가 네 곁에 있어 주길 바라잖아!
백기
내가 자주 곁에 없으니까, 이제는 내가 없는 상황에 익숙해져 버렸어. 많은 일을 혼자 처리하는 것에도 익숙해졌고!
백기
너한테 접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누구보다 네가 잘 알잖아. 그런데도 날 지켜주고 싶어서, 내가 그 인간들 때문에 화내는 게 싫어서 혼자 감당하고 있었던 거잖아!
백기
나한테 말하면 부담이 될까 봐 두려웠던 거잖아. 날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백기는 나를 대신해 내 마음과 망설임을 하나하나 입 밖으로 꺼냈다.
그가 하는 말마다 수없이 많은 침묵의 밤들이 비쳐 보이는 것 같았다.
백기는 내 앞으로 걸어왔다.
피할 수 없을 만큼 곧게 마주하는 눈동자에 내 모습이 선명하게 담겼다.
흐릿해진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유연
맞아요. 전부 맞아요. 선배 말이 틀리지 않았어요. 저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유연
가끔은 악몽도 꿔요. 선배가 저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 꿈, 제가 모르는 곳에서 선배가 사라지는 꿈을요.
유연
그 철창이 나오는 꿈도 꿔요. 그런데 거기에는 저 혼자밖에 없어요.
유연
무서워요. 걱정되고요.
모든 두려움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하지만 뜨거운 두 손이 내 뺨을 감싸, 더는 그 마음을 피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유연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제게 부담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정말 단 한 번도요.
유연
전부 제가 원해서 하는 거예요. 선배가 제 곁에 없는 것에 비하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요.
선배는 내게 자유로움이자 불꽃이었고, 이 세상에서 내가 평온을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건 그저 나만의 작고 소박한 영웅심일 뿐이었다.
유연
그래서 이런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말로 꺼내는 순간 인정해야 하고,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하잖아요.
유연
하지만 이런 일들은 해결할 수 없잖아요.
백기
그럼 해결하지 마.
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밝은 달빛이 번지고 있었다.
백기는 그 흐릿한 장막을 부드럽게 걷어내듯 내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의 모습이 다시 눈앞에 드러났다.
백기
오늘 하루 종일 생각했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고, 해결할 방법도 찾지 못했어.
백기
그래서 계속, 계속 생각했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무슨 낯으로 널 만나러 가야 하나 싶기까지 했지.
백기
그런데 방금 널 보는 순간, 마침내 알게 됐어.
백기
난 원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틀렸어.
백기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알아야 한다는 거야.
백기
살다 보면 답이 없는 일도 있어. 하지만 난 그런 순간에도 너와 함께하고 싶어.
달빛 아래에서 백기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너도 알잖아. 사실 난 사랑하는 사람끼리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잘 몰라.
백기
그저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널 사랑하고, 너와 함께해 왔어.
백기
하지만 사실 가끔은 너한테 어떻게 잘해줘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는 입꼬리를 씁쓸하게 움직이며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백기
난 너한테 미안한 게 많아. 내가 제대로 해주지 못한 일도 너무 많다고 생각해.
백기
그렇다고 많은 걸 포기할 수도 없어.
백기
그래서 널 나처럼 두려움에 익숙해지게 만들었어. 강해져야 하는 것에도 익숙해지게 했고, 나 때문에 너까지 남몰래 날 지키게 만들었지.
백기
그리고 항상 혼자 몰래 눈물을 흘리게 했어.
백기는 언제 흘렀는지도 모를 내 뺨의 눈물에 입을 맞췄다.
달빛이 그의 얼굴에 은은하게 번졌지만, 눈물 때문에 그 모습은 몇 번이고 다시 흐릿해졌다.
유연
하지만 그런 건…… 전부 제가 원해서……
백기
하지만 난 원하지 않아.
그의 손끝이 내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백기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어렸을 때…… 난 사람들이 침묵하고 참아내는 모습을 많이 봤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많다는 것도 알았고, 원래 그래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왔어.
백기
하지만 아니야.
백기
그것도 사랑의 한 모습이겠지. 하지만 난 너와 나까지 그런 모습으로 사랑하길 원하지 않아.
너와 함께한 모든 시간은 내게 연인 사이의 사랑이 무엇인지, 나만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려면 반드시 희생해야 하는 순간도 있고, 침묵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소리 없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닳게 만들고, 그녀의 강인함을 또 하나의 갑옷으로 바꾸어 그녀를 옭아매고 침묵하게 한다면.
백기
난 네가 침묵하는 것도, 참아내는 것도, 애써 이해심 많은 척하는 것도 원하지 않아.
백기
난 너의 전부를 원해.
백기
너의 불안도, 두려움도, 마음도. 영혼 깊은 곳까지 전부 내게 보여줘. 내가 그곳까지 차지할 수 있게.
유연
……그럼 선배는요?
백기
나도 전부 너한테 줄게.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결코 흔들리지 않을 맹세 같았다.
백기
전부 다 너한테 줄게.
백기
그러니까 넌 두려워하지도 말고, 도망가지도 마.
유연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니에요?
백기
응. 하지만 넌 날 사랑하잖아.
유연
선배도 저 사랑하잖아요.
백기
응, 사랑해.
백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해.
그는 너무나도 찬란했다.
마치 오직 나만을 위해 떠 있는 달 같았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은 채 살짝 깨물었다.
바로 다음 순간,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나를 덮쳐왔다.
눈앞이 빙글 도는 사이, 어느새 백기는 나를 푹신한 매트 위에 눕히고 있었다.

백기
나 충분히 반성했어.
그는 한 손으로 내 목덜미를 단단히 받치고, 내 몸을 자신의 품 안에 완전히 가두었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 뜨거워서 달빛마저 타오르는 것 같았다.
유연
그럼 전부 저한테 줘요.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말해줘요.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그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뜨거운 숨결은 내 얼굴의 윤곽을 따라 조금씩 스쳐 갈 뿐, 예상했던 따뜻한 감촉은 좀처럼 내려앉지 않았다.
흐릿하게 눈을 뜨자 백기가 상체를 살짝 일으킨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짓궂은 웃음이 가득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몸을 다급하게 끌어당겼고, 그 바람에 그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지기 싫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에게 홀려버린 걸까.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다리를 굽혀 그의 팔에 살짝 문질렀다.
다시 몸을 숙이던 백기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긴장하며 굳어졌다.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달랑거리며 아래로 떨어져 내 옷의 리본에 얽혔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을 따라 다급하고도 묘한 소리를 냈다.
백기
너 못된 것만 배웠네.
유연
그것도 선배한테 배운 거겠죠.
백기
그래? 그럼 이걸로는 아직 부족하겠네.
내 귀 뒤를 감싸고 있던 팔이 갑자기 조여왔다.
나는 그의 팔을 더욱 힘껏 움켜쥐었다.
심장박동보다도 격렬한 떨림이 손끝에 전해지는 듯했다.
뜨겁고, 또 뜨거웠다.
팔 보호대를 착용한 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가 내 귓바퀴를 야릇하게 문질렀다.
마치 피부 위에 보이지 않는 불길을 남기는 것처럼, 잇따른 전율이 온몸을 타고 마음 깊은 곳까지 번져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조여 그의 몸을 감쌌다.
미처 내쉬지 못한 숨결은 다음 순간 촘촘히 이어지는 입맞춤에 삼켜졌다. 조금의 틈도 허락되지 않았다.
쇄골에서 뺨으로, 다시 코끝에서 입가로.
파고든 혀끝이 몇 번이고 같은 자리를 따라 움직이며 핥고 어루만졌다.
한 번, 또 한 번.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했고, 자신의 흔적을 새기는 것 같기도 했다.
밤바람이 멀리서 울리는 희미한 드럼 비트와 음악의 여운을 실어 왔다.
그 소리는 아득한 바다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 끊임없이 높아졌다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픽업트럭에서는 낮고 미세한 삐걱거림이 들려왔지만, 이내 바람 속으로 삼켜졌다.
바람은 점점 습기를 머금었다.
그 바람이 나를 떠받쳐 공중에 띄우는 것 같았고, 시야에는 축축하고 뜨거운 물안개가 한 겹 드리워졌다.
눈앞 가득 펼쳐진 은하수가 흔들리며 호박색 눈동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곳이 나만의 우주가 되었다.
백기
느껴져? 나 여기 있어.
백기
네 마음속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해줘……
백기
그곳도 내 것이었으면 좋겠어.
그의 손끝이 내 복부를 따라 천천히 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뜨거운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통제할 수 없는 전율이 몇 번이고 일어났다.
멀리 있는 무대와 주변의 조명도 모두 꺼져 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오직 그의 모습만이 남아 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거친 숨결 사이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는 내 이름을 가장 아름다운 음표처럼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는 손을 뻗고 싶었다.
그를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손에 잡힌 것은 흐르는 구름 같기도 했고, 타오르는 불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격렬하게 흔들리다가 그 속에 녹아들었고, 무심코 옆에 있던 등불을 건드려 꺼뜨렸다.
백기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단단히 맞물렸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내 영혼 전체를 차지해 가고 있다는 것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내 안에서 더 이상 상대의 흔적을 지울 수 없고, 눈앞의 사람을 결코 잊을 수 없게 될 때까지.
백기
무서워하지 마.
파도가 바다를 두드리며 야릇한 물보라를 흩뿌렸다.
백기는 내 다리를 들어 올리고 발목을 움켜쥔 채 내 위로 몸을 지탱했다.
그는 내 몸 위에 있으면서도, 마치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나와 밤하늘의 은하수 사이에 자리한 그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진 빛이 은은하게 번져갔다.
짙은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온전히 감싸 안는 듯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멈춰 세우려는 것처럼.
유연
……그럼 선배는요?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물러서거나 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강하고 깊게 다가왔다.
백기
난 이미 오래전에…… 너 없이 살 수 없게 됐어.
백기
네가 없는 삶은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나는 그에게 붙잡힌 내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내 손가락을 단단히 맞잡은 그의 손길도 느껴졌다.
온 세상이 그의 존재와 흔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에나 그가 있었다.
온통 그뿐이었다.
유연
선배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는 너무나 거침없었고, 자신이 원하는 영역을 차지하는 데에도 능숙했다.
하지만 동시에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사람을 매혹시켜, 자기 자신까지 기꺼이 그에게 내어주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처럼, 더욱 절대적인 확인과 내맡김이 이어졌다.
백기
그럼 내 전부를 너한테 맡길게.
백기
세상 그 무엇도, 설령 삶과 죽음이라 해도…… 우릴 갈라놓을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