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유연
나 왔어요——
집 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오자, 따뜻한 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익숙한 대답 소리는 한참이 지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갔나?
슬리퍼로 갈아 신고, 나는 조금 의아해하며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닥은 그림자가 비칠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옆의 TV 장 위에 어수선하게 널려 있던 잡동사니들도 깔끔하게 구석에 정리돼 있었다. 집 전체가 누군가 꼼꼼하게 청소한 티가 났다.
소파 위로 시선이 닿았을 때서야,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그는 눈을 살며시 감고 있었다. 늘어진 긴 속눈썹이 눈꺼풀 위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운 채,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소파 한쪽에는 몇 벌의 옷이 가지런히 접혀 쌓여 있었고, 그의 두 다리는 조금 불편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혹시라도 그것들을 건드려 흐트러뜨릴까 봐 조심하는 것 같았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이 사람 대체 집안일을 얼마나 한 거야.
마음이 문득 부드러워졌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그가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옷들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손끝이 아직 옷자락에 닿기도 전에, 백기가 가볍게 몸을 뒤척였다. 원래 어깨 위에 내려앉아 있던 햇살도 마침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햇살이 너무 따뜻했는지, 예쁜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속눈썹이 귀찮다는 듯 두 번 파르르 떨렸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다음 순간, 그의 손끝이 이리저리 더듬다가 아무 옷이나 집어 들더니, 가볍게 한 번 털어 얼굴 위에 덮었다. 완벽하게.
머리를 옷으로 뒤집어쓴 모습에 너무 귀여워서, 참지 못하고 살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그가 뭔가를 감지한 것처럼, 몸이 잠깐 멈추더니 좀 멍하게 옷을 걷어냈다.
백기
왔어?
졸음이 남은 그 눈이 나를 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나를 느긋하게 끌어당겨 품 안에 안았다.
백기
왜 깨우지 않고.
유연
며칠 뒤면 또 출장 가잖아. 좀 푹 쉬었으면 해서.
유연
게다가 선배, 많이 바빴던 것 같아서.
백기
네가 집에 없어서, 할 일이 없었어.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감고, 나를 조금 위로 끌어올렸다. 나는 편안하게 그의 몸 위에 포개졌다.
백기
전에 네가 옷장이 꽉 찼다고 했잖아. 그래서 안 입는 옷들을 골라냈어.
백기
어떻게 할 거야?
유연
어떤 건 몇 번 밖에 안 입은 옷들인데, 그냥 버리기엔 좀 아깝고……
말하던 도중,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유연
며칠 전에 무슨 쪽빛 염색 수공예 광고를 본 것 같은데……!
휴대폰을 꺼내 뒤지다 금방 원본 게시물을 찾아내고, 들어서 백기에게 건넸다.
유연
봐요, 쪽빛 염색 천공예 DIY 공방 새로 오픈했대. 메인 문구가 “무엇이든 물들일 수 있고, 헌 것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유연
쪽빛 염색 옷이나 수제 인형도 만들 수 있고, 낡은 옷이랑 오래된 물건도 새롭게 바꿔준대요.
유연
우리 헌 옷 리폼하러 가는 거 어때?
그 호박빛 눈동자가 마침내 천천히 떠졌고, 느릿하게 내 눈을 바라보았다.
백기
그래. 어떻게 바꾸고 싶어?
말투는 무심했다. 하지만 눈 속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따라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연
하고 싶은 건 엄청 많지. 예를 들면 그 실크 가운으로 선배의 수면 안대를 만들어주고 싶어.
유연
쓰면 꽤 편할 것 같거든.
백기
그렇게 번거롭게 안 해도 돼. 안대가 있든 없든 나는 잘 자.
유연
흥흥, 그래도 난 선배가 더 잘 잤으면 좋겠는걸.
내 고집스러우면서도 기대에 찬 눈빛 앞에서, 그는 결국 졌다는 듯 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백기
알겠습니다, 장관님. 가시죠.
쪽빛 염색 공방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맑은 풀과 나무 향이 코끝을 스쳤다.
가지각색의 옷과 폭신한 인형들은 모두 생동감 있는 푸른 무늬로 물들어 있었다. 눈앞 가득한 푸른색이 겹겹이 펼쳐졌고, 연한 푸른빛은 안개 같고, 짙은 푸른빛은 먹물 같았다.
한눈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기대가 조용히 일렁였다. 그래서 나는 백기와 눈을 마주친 뒤, 나란히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01
유연
어쩐지 묶기 염색을 구름 염색이라고도 부른다더니……
유연
정말 이렇게 많은 구름 무늬를 물들일 수 있다니!
백기
저쪽에는 바람 무늬도 있어.
백기
보면, 네가 만든 하늘 같아.
유연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로맨틱한 것 같네요.
유연
선배가 나한테 그렇게 많은 하늘을 선물해줬으니, 이번엔 내가 선배한테 줄게~
백기
그래.
백기
그럼 집에 가서 걸어놓을게. 매일 볼 거야.
유연
안 돼 안 돼, 그건 너무 대충이야.
유연
뭔가 특별한 걸 만들어서 선배 곁에 두고 싶어.
백기
뭐든 좋아.
백기
그래도 너보다는 못해.
02
유연
선생님이 다들 순서대로 접기 기법 연습하라고 했잖아요.
유연
선배는 왜 혼자 몰래 B-7호 작은 비행기를 접고 있어?
백기
선생님이 내준 건 다 끝냈어.
백기
근데 너무 간단해서.
유연
풋...... 선배 엄청 뿌듯해보여요.
백기
풍력 계산상, 이건 네 앞까지 날아갈 수 있거든.
유연
……와! 진짜 날아왔어——너무 멋있다!
유연
그럼 이 작은 비행기는 내가 받을게~
유연
근데 혹시 안에 백 경관님이 하고 싶은 말 같은 거 숨겨놓은 건 아니지?
백기
숨길 필요 없어.
백기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 직접 말해줄 거니까.
(ㄴ아니 ㅁㅊ ...)
03
유연
왠지 선배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네……
백기
집게판은 앞의 몇 개보다 확실히 간단해.
백기
어려운 건 위치를 정확히 잡는 것뿐이야.
백기
그리고 평소에도 이 연습은 해봤고.
유연
응? 뭘?
백기
네 머리핀 꽂아주는 거.
유연
풋……
유연
선배가 매번 내 머리핀 꽂아줄 땐 오늘처럼 능숙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유연
한참 이리저리 대보기도 하고, 맨날 살짝 삐뚤게 꽂잖아.
백기
조금 삐뚤게 꽂으면, 네 볼이 부풀어오르거든. 귀여워 보여서.
유연
아, 그래…… 그래서 일부러 그런 거였다고?!
백기
꼭 그런 건 아니야.
백기
머리핀을 어떻게 꽂아도, 넌 똑같이 귀여우니까.
04
유연
와, 선생님이 방금 작은 꽃 바느질하는 법만 가르쳐줬는데……
유연
옆에 작은 토끼도 만들었어요?
백기
바느질법이 재미있어서 더 해보고 싶었어.
백기
방금 인터넷으로 다른 도안도 좀 찾아봤는데, 이 토끼가 너랑 조금 닮았더라.
유연
이게 어디가 복습이야……
유연
완전히 더 높은 난이도 도전하는 거잖아.
백기
그렇게 어렵지 않아.
백기
그리고 나는 필요한 일에만 도전하는 걸 좋아해.
유연
응? 필요한 일이 뭔데?
백기
꽃이 있으면, 옆에 당연히 꽃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백기
그래야 그림이 귀여워지니까.
05
백기
왜 계속 나를 보는 거야.
유연
선배의 Q버전(sd) 그리고 있거든~나중에 조금 있다가 이걸 안대에 밀랍 염색할 거야.
유연
실수 없게 하려고, 미리 연습하는 중이야.
백기
1, 2, 3……한 번에 30개를 연습했어?
유연
헤헤……그래도 전부 달라!
유연
이건 제복 입은 업무 모드의 선배, 이건 농구할 때의 선배. 저기 입이 빵빵한 건 면 먹고 있는 선배……
유연
어느 게 제일 좋아?
백기
다 좋아.
백기
네 눈에 비친 나면, 전부 좋아.
유연
흥흥,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래도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백기
다음 것.
백기
그래야 네가 나를 더 오래 볼 테니까.
Fin.
마지막에 천이 조금 남아서, 그냥 가위를 집어 들고 나를 위한 안대도 만들었다.
그리고 붓에 염색풀을 묻혀, 그 위에 내 Q버전 얼굴을 조금씩 찍어 넣었다.
유연
다 완성됐다!
유연
우리 하나씩, 딱 커플 세트야~
내가 들뜬 얼굴로 안대 두 개를 나란히 손바닥 위에 올려두자, 백기도 가까이 다가와 들여다보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얼굴이 찍힌 안대를 그에게 내밀었다.
유연
빨리 써봐. 편한지 봐야지.
하지만 그는 받기는커녕, 당연하다는 듯 내 왼손에 있던, 내 얼굴이 찍힌 안대를 가져갔다.
백기
난 이게 더 좋아.
백기
우리 바꾸자.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안대를 머리에 써버렸다. 밤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포슬포슬해졌다.
그리고 부드럽게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에는 활짝 웃고 있는 “나”가 끼어 있었다. 그래서 그 전체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귀여워 보였다.
그래서 나도 참지 못하고 웃으며 “그”를 눈 위에 써보았다.
유연
우리 지금 어릴 때 학교에서 필통을 서로 바꿔 가진 친구들 같지 않아?
유연
다른 친구들이 보기만 해도, 두 사람 사이가 제일 좋다는 걸 알 수 있는 그런 거.
백기
그럼 나는 너랑만 바꿀래.
눈은 분명 가려져 있는데, 심장은 기쁘게 뛰어 어쩔 줄 몰랐다.
유연
그럼 온 세상이 이미 우리 사이가 제일 좋다는 걸 알고 있어도?
백기
온 세상이 뭐야.
백기
온 우주가 알게 해야지.
나는 웃으며 안대를 벗었다. 그렇게 밝고 뜨거운 시선 안에 머물면, 사람은 언제나 한순간 멍해진다. 마치 내가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처럼.
그도 웃으면서 방금 막 염색을 마친 작품들을 내밀었다——
왼손에 든 연푸른색 머리띠에는 하얀 구름 무늬가 가득했다. 맑은 하늘을 면천 안에 구겨 넣은 것 같았다.
오른손에는 풍경이 들려 있었다. 촘촘한 실 끝에는 짙고 옅은 그러데이션의 깃털 몇 장이 매달려, 공중에서 부드럽게 스쳤다.
맑고 빈 듯한 소리는 내가 숨기지 못한 심장박동의 박자 같았고, 그 소리에 나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유연
백기 학생이 이렇게 정성을 보여줬으니까, 나도 선배랑 교환할 게 잔뜩 있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방금 염색한 화분 보호 커버, 헬멧 보관 주머니…… 그리고 부적 하나를 꺼냈다.
천 위의 바람 무늬가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다마치 산들바람 같았다. 그리고 바람 무늬 사이에는 삐뚤삐뚤하지만 유난히 진심 어린 두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평안.
백기가 그것들을 한동안 조용히 바라보다가, 먼저 그 작은 부적을 집어 들자, 나는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유연
선배가 매번 약속을 지키고 무사히 돌아온다는 거 알아. 그래도 나는 늘 걱정하게 돼.
유연
이 걱정은 가벼운 바람이라고 생각해줘. 그것들이 조용히 네 곁을 따라다니게만 해줘.
그는 더없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부적을 조심스럽게 몸 가까운 옷주머니에 넣었다.
백기
그럼 계속 나를 따라오게 할게.
백기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바람이 나를 네 곁으로 데려다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