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界啊,我会把你变成送给她的最后一颗糖果。
세상아, 널 그녀에게 선물할 마지막 사탕 한 알로 만들어 주겠다.
9-1 절대 명령 (绝对命令)
검은색과 흰색이 세계를 가득 채운 무수한 잡음처럼 격렬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빛의 점들이 하나둘 기다란 선으로 이어졌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서로 얽히는 듯한 선들은 어둠과 빛 사이에 어긋나게 펼쳐진 평행선들을 이루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수많은 장면이 빛의 가루로 부서져 내 주위로 흩어졌다. 그러다가 어느새 내 발밑에서 다시 맞춰지는 것 같았다.
나는 분명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극심한 통증이 여전히 온몸을 휘감고 있었지만, 나는 그 빛들을 향해 계속 손을 뻗으려 했던 것 같다.
그때 무언가 더욱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존재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손길도 느꼈다.
그래서 그것들을 붙잡았다——
순간 끊어져 있던 무수한 선들이 더욱 긴 빛으로 이어지며 어둠 깊숙한 곳까지 뻗어 나갔다——
바로 다음 순간, 무언가가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깊은 밤의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가로등 불빛이 끊임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 빛에 주변 풍경이 기괴하고 아득한 허상으로 길게 늘어졌다.
마치 세상에서 희미한 배경 소음마저 사라진 듯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쳐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숨이 막힐 만큼 적막했다.
돌이킬 수 없는 단호한 의지가 내 다리와 머릿속을 완전히 지배한 것 같았다.
귓가에는 빠르고 떨리는 숨소리만 남아 있었다. 시야는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 명령에 너무나도 저항하고 싶었다. 다시 그 명령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슬펐다. 하지만 그의 명령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악몽처럼 또다시 나를 텅 빈 껍데기 속에 가두었다.
유연
……기락 씨……
주기락
너에게 명령한다……
유연
……기락 씨……
주기락
……나에게서 도망쳐……
산산이 부서지던 그의 모습과 절망에 빠진 얼굴이 여전히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무력하게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의지가 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의식 깊숙이 나를 옭아매고 있던 명령의 쇠사슬이 아무런 예고 없이 사라졌다.
줄곧 명령에 저항하던 몸이 갑자기 속박에서 풀려났다. 그동안의 거센 관성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대로 바닥에 세차게 넘어졌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나는 멍하니 아릿한 통증이 밀려오는 손바닥을 오므렸다——
하지만 거의 다음 순간, 생각할 겨를도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유연
주기락…… 주기락……!
거의 기진맥진한 채 방문을 밀어 열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희미한 달빛이 창턱을 따라 흘러내려 바닥에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악보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혼란스럽게 뒤섞인 음표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이 길고 긴 정적 속에 남은 유일한 메아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예감한 듯 비틀거리며 방문을 하나씩 열어젖혔다.
전화도 몇 번이고 걸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날카로운 통화 연결음만 끝없이 반복될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팔을 늘어뜨렸다. 손바닥에 쥔 휴대폰마저 함께 떨리는 것 같았다.
유연
…………
임실장
……유연 씨?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전화 너머에서 졸음이 묻어나는 하품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주기락이 임실장님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어쩌면 아직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빠진 건 아닐지도 몰랐다.
주기락은 아직 예전처럼 '주기락'이라는 존재를 다시 숨기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은 것이다.
유연
……미안해요, 임 실장님. 이렇게 늦게 연락해서.
나는 바싹 마른 목을 애써 가다듬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려 했다.
유연
……기락 씨가 요즘 계속 작업에만 몰두하면서 곡을 쓰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요. 혹시 실장님은 아는 게 있나 해서……
임실장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요즘은 신인들 맡느라 바빠서 며칠 동안 그 녀석이랑 연락도 안 했거든.
임실장
그런데 유연 씨 요즘 기락이랑 같이 있었던 거 아니야? 전에 나한테 너랑 같이 틀어박혀서 새 앨범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임실장
그것 때문에 이후 일정도 전부 미리 끝내 놨어. 그래서 나도 요 며칠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
유연
……그랬군요.
임실장
너무 걱정하지 마. 또 곡이 안 풀려서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걸 수도 있잖아. 전에도 그런 적 있었으니까. 정 안 되면 날 밝고 다시 연락해 봐.
임실장
그렇지만 기락이도 자기만의 공간은 필요해. 우리가 도와줄 수 없는 일도 많거든. 결국 본인이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거지.
임실장의 말은 다소 냉정하게 들렸지만, 그 안에는 상황을 분명하게 바라보는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위로도 담겨 있었다.
유연
……알겠어요. 고마워요, 오빠.
사실 나는 임실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주기락을 믿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여전히 나를 휘감고 있었다. 결국 나는 깊은 밤에도 쉴 새 없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작업실, 연습실, 비밀 기지, 심지어 우리 회사까지. 주기락이 갈 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모조리 찾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B.S. 조직원
Queen.
새벽빛이 막 밝아 오고 있었다. 하지만 B.S. 건물의 복도에는 차가운 백색 조명이 안쪽 깊숙한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B.S. 조직원 몇 명이 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유연
BOSS는요?
B.S. 조직원
모르겠습니다. BOSS가 나타나신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유연
……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 그들에게 물러가라는 뜻을 전했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힘없이 벽에 몸을 기댔다. 지친 눈을 내리깔고 내 두 손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정해진 미래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 미래 속에서 그의 얼굴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가벼운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어긋나고 뒤섞인 장면들이 눈앞에서 하나둘 피어났다.
나는 간절히 바라고 또 기도하며 끊임없이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햇살은 눈부셨고, 복잡하게 뒤엉킨 수많은 얼굴은 흐릿한 빛과 그림자 속에 섞여 있었다——
그 어디에도 주기락의 모습은 비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이렇게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마음먹고 숨으려 한다면, 여전히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쉽게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런 생각에 낙담하면서도 나는 남은 힘을 짜내 B.S.에 있는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텅 빈 방 안에서 맞은편에 놓인 크고 널찍한 사무용 의자를 바라보았다.
의자 등받이 위로 조명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흐릿한 환영 속에서 그 깊은 눈동자가 다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주기락……
이번에는 또 어디에 숨어 버린 거예요?
이번에는 자기 마음을 어떻게 하려는 거예요?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물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말 한마디 없는 이 싸움에서 어쩌면 우리 둘 다 패배자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이기고 싶었다.
모든 좌절과 운명을 이겨 내고 당신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당신이 수없이 내 손을 잡아 주었던 것처럼.
미래에서 당신을 찾을 수 없다면, 이번에는 과거의 당신을 찾아볼게요.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머릿속의 잡념을 모두 걷어 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힘이 땅을 뚫고 자라나는 덩굴처럼 구불구불 뻗어 나갔다
그 힘은 서서히 주위의 어둠을 걷어 내고 익숙한 사람의 윤곽을 그려 냈다.
나는 멍하니 과거의 잔상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숨소리마저 작아졌다.
주기락은 널찍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눈매를 살짝 내리깔고 있었고, 얼굴에는 미소가 조금도 없었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홀로그램 화면이 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익숙한 거리와 높고 낮은 건물들이 빛을 따라 천천히 펼쳐졌다. 제각기 흩어져 있던 풍경이 점차 이어지며 연모시의 윤곽을 이루었다.
그 사이로 짙푸른 빛이 교차하며 무심한 눈동자까지 환하게 비추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했다. 주기락이 이런 지도를 띄운 이유가 뭘까……
무엇을 하려는 거지?
???
……실험…… 다음 단계……
옆쪽에서 끊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홀로그램 반대편에 피부가 검은 사람이 서 있었다.
——Hephaestus였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소리와 함께 몇 군데의 좌표가 차례로 빛났다. 금빛이 복잡하게 얽힌 도로를 따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중 몇 군데는 내가 알기로 B.S.에 속한 핵심 건물들이었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장소는 평범한 주택가나 상업 지구에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았다.
멀리서 바라보니 그 빛의 점들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물을 이루어 연모시 전체를 뒤덮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주기락이 손을 들어 짙푸른 빛을 흩어 버렸다.
Hephaestus는 웃으며 무언가 말하더니 몸을 돌려 먼저 집무실을 나갔다.
주기락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은 그대로 그의 팔을 통과했다.
과거의 잔상은 물거품처럼 부서져 기억의 은빛 물결 속으로 흩어졌다.
방금 보았던 흔적을 멀리서 바라보며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한 달도 더 전, 어느 날의 광경이었다.
유연
……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유연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기락 씨.
당신에게는 참 많은 비밀이 있었다. 당신의 미소처럼, 당신의 침묵처럼.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들여다봐야 당신이 숨겨 놓은 또 다른 마음들을 볼 수 있을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 눈앞에서 무언가 번쩍였다.
갑작스럽게 강렬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낮고 묵직한 굉음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뒤집히더니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끝없는 추락감이 나를 집어삼켰다. 몸의 한쪽에서 무언가가 거칠게 분리되어 나가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밤바람이 고요한 골목 깊숙이 밀려들었다. 희미하게 누런 가로등 불빛이 바닥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골목 안쪽으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구두 밑창이 몇 번이고 바닥을 스쳤다.
자신이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렇게 계속 걸어가야만 했다.
그때 갑자기 등 뒤의 사각지대에서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치명적인 공격이 그를 향해 곧장 내리꽂혔다.
차가운 바람이 피부를 빠르게 스쳤다. 그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상대는 이미 다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남자는 그의 퇴로까지 미리 계산해 둔 듯했다.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들며 손목을 뒤집어 재빠르게 그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는 그 움직임을 역이용해 상대의 팔을 비틀었다. 그리고 남자가 순간적으로 주춤한 틈을 놓치지 않고 긴 다리를 휘둘러 검은 그림자를 단숨에 밀어냈다.
뼈마디가 어긋나는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도 남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
???
이렇게 강해지다니. 나도 널 못 알아볼 뻔했군.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 그때 구름 사이로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 아래에서 남자의 옷깃에 달린 보석 벌새 브로치가 찬란한 빛을 반사했다.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완전히 탈구되어 축 늘어진 손목을 다시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바람에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 아래로, 달빛만큼이나 차갑고 무심한 아름다운 눈동자가 드러나 있었다.
???
네가 사람을 시켜 우리를 감시한 건 옛 친구들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줄 알았지.
???
그래서 내가 눈치껏 먼저 찾아온 거야.
그는 눈앞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 역시 '그'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의 그를 통해,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 없는 그 그림자를 살펴보고 있었다.
주기락은 죽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였다.
???
성질은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하군.
Helios
할 말 다 했어?
Helios는 눈앞의 남자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비웃음을 한 번 흘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제 갈 길을 걸어갔다.
???
아무래도 네 소꿉장난은 끝난 모양이군.
Helios
넌 정말 내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해?
???
그렇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아.
???
'Helios'는 우리의 동료야.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의 시야에서 상대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차가운 기운을 품은 거센 바람이 곧장 가슴을 향해 들이닥쳤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였다. 기억 속에서 겪었던 그 어떤 공격보다도 빨랐다.
순식간에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남자가 몸부림치며 일어나기도 전에 검은 부츠가 사정없이 그의 가슴뼈를 짓눌렀다. 그대로 벽에 단단히 내리눌러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Helios
뼈를 몇 개쯤 먼저 부러뜨리고 나서 네 이야기를 계속 들어 줘야 하나?
뚜렷한 윤곽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직 냉담하게 상대를 살피는 시선만이 내려꽂혔다.
남자의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렸다. 그런데도 그는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달빛이 상대의 눈동자에 서린 무자비함과 잔혹함을 남김없이 비추었다. 그 눈빛은 기억 속의 사나운 그림자와 완벽하게 겹쳐졌다.
남자는 갑자기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자신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
Helios.
그때였다. 골목 깊숙한 곳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서두르지도 느려지지도 않는 발걸음으로 어둠 속에서 다가왔다.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가로등 불빛 아래로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
오랜만이군.
Helios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는 골목 끝을 냉담하게 한번 훑어보고는 다리를 거두었다.
그들이 올 줄 알고 있었다.
9-2 외딴섬 (孤岛)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작스럽게 밀려왔던 현기증이 마침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귓가에는 날카로운 울림이 여전히 희미하게 맴돌고 있었다. 나는 몸을 지탱한 채 불안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미간이 점점 더 찌푸려졌다.
유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 능력을 너무 자주 사용한 탓일까? 아니면 또 무언가가 내 힘을 자극한 걸까?
하지만 방금은 미래나 과거의 장면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내 몸에 또 다른 변화가 생긴 걸까?
현기증이 일어난 뒤로도 모든 것은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인 듯했다.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허묵에게 방금 겪은 일을 설명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휴대폰을 집어넣은 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우선 방금의 이상 현상은 잠시 제쳐 두기로 했다.
나는 다시 텅 빈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과거의 기억에서 본 바로는 주기락이 어떤 비밀스러운 실험 계획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주기락
오늘부터——
주기락
무엇이 '진화'인지는 내가 정의하겠다.
주신 회의에서 주기락이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가 Evol의 존재를 줄곧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과거의 잔상에서 단편적으로 들었던 실험에 관한 이야기도 아마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숙였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주기락, 당신이 숨겨 놓은 것들은 분명 내가 절대로 알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겠죠.
이리저리 헤매며 마침내 모든 힘을 소진한 끝에 나는 결국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넓은 세상에서 서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마지막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툴게 처음의 장소로 돌아오는 것뿐인 듯했다.
그때는 이미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바람에 날려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악보들을 하나씩 주워 들었다.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정리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유연
……
유연
걱정하지 마. 내가 주기락을 데려올게.
유연
그 사람은 너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듣기 좋은 노래로 완성해 줄 거야.
머릿속에 주기락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감고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기락 씨, 당신이 이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겠죠.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겹쳐진 벽들이 점차 선명해졌고 창가에 비치던 달빛이 시간을 거슬러 다시 바닥에 내려앉았다.
눈앞의 풍경이 완전히 고정된 순간, 세계는 또다시 온통 잿빛과 흰빛으로 변했다.
주기락은 바닥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모습이 마치 잠든 사람 같았다.
하지만 가슴은 거의 오르내리지 않았다. 헝클어진 앞머리가 창백한 뺨에 달라붙어 있었고, 얼굴에 어지럽게 남은 눈물 자국은 또 하나의 부서진 마음처럼 보였다.
세계는 가장 아름다운 인형을 이곳에 버려두었다. 그의 마음과 영혼을 빼앗고, 외로움과 쓸쓸함조차 남겨 주지 않은 채.
유연
……
눈앞의 모습이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나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의 몸을 통과했다.
유연
주기락.
그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잔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혼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분명 나도 그의 곁에 있는데.
유연
주기락.
유연
주기락, 주기락……
나는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그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속눈썹조차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밤바람이 옆에 흩어진 악보들을 들어 올렸다. 종이들이 힘없이 늘어진 그의 손가락을 가볍게 스쳤다.
눈앞의 주기락은 점점 흐릿해지더니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물거품으로 변해 갔다.
그가 나를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품에 안으려 했다.
눈물이 한 방울씩 그의 몸을 통과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뺨에 남은 눈물 자국 하나 닦아 줄 수 없었다. 활짝 벌린 두 팔은 허공을 감싸 안고 있었고, 우리 사이로는 달빛만이 지나갔다.
유연
기락 씨…… 내가 곁에 있어 줄게요.
유연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은 슬프고도 공허한 위로에 불과했다. 그를 위로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과거의 잔상을 향해 건네는 위로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그의 입술 사이로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앞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마치 깊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가까스로 수면 위로 돌아온 것 같았다.
가슴이 고통스럽게 크게 들썩였다. 그는 등을 힘껏 활처럼 구부리며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유연
기락 씨?!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은 격렬한 숨소리와 헛구역질을 하는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그의 눈에서는 생리적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어떤 본능이 그를 붙들고 있는 듯했다.
주기락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그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한때 맑고 환하게 빛나던 그 눈동자는 지금 너무나도 텅 비고 멍해 보였다.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나와 똑같이.
그는 그저 공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현재'에 속한 환영이었다.
그의 눈에는 내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내 뒤에 있는 것은 어둠과 벽뿐이었다.
주기락은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폐한 마음 깊숙한 곳에는 아직 마지막 한 줄기의 희미한 빛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빛이 간신히 그를 다시 숨 쉬게 하고, 목소리를 내게 하고 있었다.
주기락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나는 그의 말을 들었다. 운명에 짓눌려 산산이 부서질 듯한 쉰 목소리였다.
그 뒤에도 무언가 말한 것 같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았다. 마치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남겨 두려는 결심 같았다.
그는 나를 깊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어쩐지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주기락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주기락
……나는 너야.
그 순간 짙고 끈적한 그림자가 벽 모퉁이에서 소리 없이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괴물이 그를 집어삼키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그가 괴물을 삼키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차가운 연못을 본 듯했다.
주기락은 바닥을 짚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단호한 결심을 품은 채 내 몸을 통과해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얼마 뒤 욕실 문이 다시 열렸을 때, 나는 고개를 돌렸지만 그저 슬프게 제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달빛을 스쳤다. 그 아래로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축축한 머리카락 끝이 이마 위로 늘어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공허했던 눈동자는 이제 물결 하나 일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Helios.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순간만큼은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직 완전히 타 버리지 않은 그의 눈동자에서 간신히 남아 있는 작은 희망을 발견했으니까.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이미 온기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나를 꿰뚫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주변에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마치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단숨에 뛰어넘은 듯, 그 바람은 싸늘하게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를 이끌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자신만의 외딴섬을 떠나게 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따라 조용히 걸어갔다.
하지만 발걸음을 옮길수록 '현재'와 '과거'의 장면이 살아 움직이듯 서로 뒤엉켰다. 주변 풍경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끊임없이 Evol을 끌어올렸다.
보이지 않는 장벽은 여전히 단단한 족쇄처럼 내 힘을 일정한 안전 한계 아래로 강제로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가슴속에 자리한 따뜻한 힘을 조금도 남김없이 끌어냈다.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가 엇갈려 버린 과거 위를 걸었다.
새까만 가로수와 화단, 아무도 없는 보도, 이따금 차가 빠르게 지나가는 도로…… 과거의 잔상들이 주변으로 희미한 은빛 궤적을 길게 그렸다.
나는 끊임없이 주위의 모든 것과 연결된 상태를 유지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 밀려왔고, 눈앞의 풍경도 불안정하게 일그러지고 깜빡였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한순간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외로운 뒷모습을 향해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다시는 그를 잃어버릴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기락이 그리 빠르게 걷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역시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온 힘을 쏟아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현실 속 사람들을 비켜 가며 그의 뒤를 따랐다. 고요한 길을 하나 지나고, 다시 또 하나를 지났다.
그러다 텅 빈 사거리를 지날 무렵이었다.
멀리서 달려오던 자동차 한 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새하얗게 빛나는 전조등이 어두운 밤을 가르며 잠깐 동안 거리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우리는 어느새 아주 먼 곳까지 걸어온 듯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빛이 지나간 자취를 따라 바라보았다. 아득히 먼 길 끝에서 또 하나의 당황스럽고도 낯익은 모습이 어렴풋이 비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텅 빈 길모퉁이를 따라 지칠 줄도 모르고 달리고 있었다. 우리가 걸어온 방향의 깊숙한 곳을 향해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나는 멍하니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자동차 전조등의 잔광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온몸이 격렬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운명이 잔인한 장난을 친 듯했다. 나와 당신은…… 또다시 아주 조금 엇갈려 버린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주기락은 이미 한참 멀리 걸어가 있었다. 나는 뻑뻑해진 눈을 멍하니 한 번 깜빡였다.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를 향해 다시 한 걸음씩 나아갔다.
우리는 한 사람은 앞서고 다른 한 사람은 뒤따르며 걸었다.
골목을 지나고, 또 다른 거리를 지나고, 수많은 건물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어디로 가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주기락 자신도 모르고 있을지 몰랐다.
조금씩 새벽빛이 밝아 오며 하늘을 갈랐다. 멀리서 깨어나는 도시의 소란스러움이 밀물처럼 점점 가까워졌다.
아침의 진짜 햇살이 희미한 온기를 품고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내 시야 깊숙한 곳에서 나와 주기락은 여전히 날이 밝지 않는 어젯밤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아침 시장에 가는 노인들, 책가방을 멘 학생들, 바쁜 걸음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 사람들이 끊임없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주변에는 차와 사람이 가득했다. 눈이 부실 만큼 환한 햇살 속에서 오직 그만이 시간에 버림받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과거의 달빛이 넓게 쏟아져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주기락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모두가 바삐 오가고 있었다. 햇살은 그의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지만, 정작 그에게는 닿지 못했다.
오직 그만이 내 기억 속에 남은 환영이었다.
그는 홀로 그곳에 서 있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인 것처럼.
나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 눈동자 깊숙이 일렁이는 감정과 단호한 결심을 바라보았다.
유연
……기락 씨, 이번에도 스스로를 괴롭히려는 거예요?
그에게 내 질문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둠 속에 침묵한 채 달빛이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남김없이 벗겨 내도록 내버려 두었다.
Helios
나를 혐오해.
Helios
……나를 증오해.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마치 시간의 틈을 넘어 내게 건네는 대답처럼 들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그저 텅 빈 햇살만을 손에 쥐었을 뿐이었다.
다음 순간, Helios가 휴대폰을 꺼냈다.
Helios
즉시 D단계를 가동해.
Helios
이유는 듣지 않겠어. 난 행동만 볼 거야.
Helios가 무언가를 더 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의 떠들썩한 소리에 묻혀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휴대폰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인파를 거슬러 걸음을 옮겼다.
그때 눈앞의 풍경이 또다시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이 일대에는 지나치게 많은 기억이 쌓여 있었다. 그 무게를 더는 감당할 수 없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곁을 지나갔다. 낯선 사람들의 기억이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주기락의 모습을 산산이 갈라놓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와 상관없는 장면들을 떨쳐 내려 했다. 하지만 귓가에는 그의 것이 아닌 목소리들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
또 출근해야 하네. 진짜 퇴사하고 싶다……
???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엄마랑 떨어지기 싫단 말이야…… 으아앙!
금빛 햇살이 점점 더 눈부시게 쏟아졌다. 주기락의 모습은 갈수록 희미해졌다.
그의 뒤에 펼쳐진 밤 풍경마저 밀려드는 햇빛에 거의 꿰뚫릴 듯했다——
마침내 햇살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그를 놓쳐 버렸다.
9-3 태평을 가장하다 (粉饰太平)
삶이 상처투성이가 될수록, 사람은 때때로 스스로를 속이는 데 더욱 능숙해진다.
*중앙 광장
현실은 악몽이고, 꿈속이야말로 진짜 인생이다.
동료 A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무슨 좋은 일 있어?
동료 B
헤헤……
동료 A
야, 너한테 말하고 있잖아.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동료 B
어? 나 불렀어?
동료 A
……그럼 씨*, 내가 허공에 대고 말하겠냐?
동료 B
화내지 마, 화내지 마. 딱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니야.
동료 B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서는 좋은 일이 없었지.
동료 B
근데 내 머릿속에서는 좋은 일이 줄줄이 벌어지고 있거든. 헤헤……
동료 A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열이라도 나? 아니면 약을 잘못 먹었어? 웬 헛소리야?
동료 B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 좀 하지 마.
동료 B
나 방금 백일몽을 꾸고 있었거든. 돈 한 푼 안 들이고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지.
동료 A
……너 진짜 어디 아프냐? 한참 뜸 들이더니 결국 한다는 소리가 이딴 거야?
동료 A
백일몽 좀 꿨다고 그렇게 좋아할 일이냐?
동료 B
……넌 몰라.
동료 B
내가 백일몽을 꾸는 시간을 충분히 늘려서 현실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길게 만들면……
동료 B
그때부터는 꿈속이 진짜 내 인생이 되는 거야. 여기서 보내는 '생지옥' 같은 시간은 그저 악몽일 뿐이고.
동료 A
……너 미쳤구나.
동료 B
차라리 미치는 게 낫지. 그러면 하루 24시간 내내 백일몽을 꿀 수 있잖아.
동료 B
꿈속에서는 누구든 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동료 B
난 더 이상 루저가 아니라고.
*카페
이성과 이성의 만남.
-평가만 제대로 한다면 모든 위험은 통제할 수 있다.
소개팅남
임 씨, 주선자분께 이미 들으셨겠죠? 제 세전 연봉은 50만 위안이고, 스톡옵션도 가지고 있습니다.
소개팅남
다만 요즘 같은 경제 상황에서는 현금화가 좀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소개팅녀
알고 있어요. 저는 외국계 기업 인사팀에서 일하고 있고, 세전 연봉은 35만 위안이에요. 대출금을 갚고 있는 방 하나짜리 집도 있고요.
소개팅남
그럼 결혼 후에 제 집에서 살게 된다면, 임 씨의 집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소개팅녀
세를 놓을 생각이에요. 임대료로 대출 상환액을 충당할 수 있으니까, 결혼 후 공동 재산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거예요.
소개팅남
합리적이군요. 그럼 출산과 육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저희 부모님이 아이를 봐주실 수는 있습니다.
소개팅남
다만 부모님께 생활비로 4천 위안 정도는 따로 드리는 게 좋겠죠.
소개팅녀
육아 도우미를 고용하는 편이 좋겠어요. 비용은 조금 더 들겠지만, 가족 간 갈등을 조정할 필요가 없으니 감정 소모가 훨씬 적을 테니까요.
소개팅남
일리 있는 말이군요. 가족 간의 갈등은 아들인 저에게도 영향을 미칠 테니까요.
소개팅남
그런데 전에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실례지만 헤어진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소개팅남
혹시 금전적인 분쟁이 생길 위험이 있는 건 아니겠죠?
소개팅녀
그 사람이 창업에 실패했거든요. 상황을 평가해 본 뒤, 손실이 더 커지기 전에 관계를 정리했어요.
소개팅남
임 씨는 정말 이상적인 분이군요. 최고의 동업자가 될 수 있겠어요.
소개팅녀
고마워요. 그쪽도 마찬가지예요. 이 도시에서는 감정보다 이성이 훨씬 쓸모 있으니까요.
소개팅녀
서로 조금 더 깊이 알아가 봐도 좋겠네요. 다만 한 달을 넘기지는 않았으면 해요. 그 이상은 시간 비용이 너무 커지니까요.
소개팅남
동의합니다. 건배하죠.
소개팅남
건배.
*구도심
사장님은 우리 애기.
-돈은 정서적 만족감을 만들어 내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 중 하나다.
게임 파트너 A
사장니임, 푹 쉬고 내일 아침밥도 꼭꼭 챙겨 먹어야 해요. 잘 자요~
게임 파트너 A
후우, 드디어 쉴 수 있겠네. 피곤해 죽는 줄 알았어.
게임 파트너 B
퇴근했어? 방금 그 손님, 설마 지난달에 너한테 2만 위안이나 써 줬다는 그 '순정 전사'야?
게임 파트너 A
응. 오늘은 게임 한 판도 안 하고, 두 시간 내내 음성 채팅으로 우는 소리만 들어 줬어.
게임 파트너 B
하아, 부럽다.
게임 파트너 B
난 왜 그런 사장님을 못 만나는 걸까? 힘들게 게임할 필요도 없이 정서적 위로만 해 주면 되는 손님 말이야.
게임 파트너 A
그야 당연히 내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예쁘니까 그렇지.
게임 파트너 B
너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내 목소리가 별로라는 거야? 내가 못생겼다고?
게임 파트너 A
난 그런 말 안 했는데? 혼자 찔려서 그러지 마.
게임 파트너 B
하, 너 진짜 돈에 따라 사람 대하는구나. 내가 네 손님이 아니니까 아주 막말이 술술 나오지?
게임 파트너 A
……너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좀 않으면 안 돼?
게임 파트너 B
방금 너한테 천 위안 보냈어. 네 시간으로 치면 20시간어치지.
게임 파트너 B
이제 나한테도 정서적 만족감을 제공해 줄 수 있겠어?
게임 파트너 A
……
게임 파트너 A
당연하죠, 우리 애기.
게임 파트너 A
지금부터 이 시간은 전부 우리 애기 거예요~
9-4 비밀 기지 (秘密基地)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고이따금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시선을 피할 힘조차 없어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몇 번이나 무리해서 능력을 사용한 탓에 기력이 거의 바닥나 버렸다. 그런데도 나는 다시 한번 힘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곳은 너무나 넓었다. 수많은 행인이 지나간 흔적이 뒤엉켜 있어 마치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 같았다.
결국 모든 시도가 헛수고로 돌아갔다.
나는 무거워진 다리를 끌고 천천히 벤치에 앉았다. 피로와 무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다.귓가에 간간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캔버스 가방을 멘 여자아이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가로로 들고 영상을 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거두려 했다. 그런데 눈가에 스친 화면 속 익숙한 로고가 나를 멈칫하게 했다.
《토론자 여러분, 주목하세요》였다.
회사를 떠난 뒤로 나는 이 프로그램을 회사 동료들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화면을 보고 있으니 지금 몇 회까지 방영됐는지조차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여자아이는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토론을 따라 그녀의 눈썹도 때로는 살짝 찌푸려졌다가, 때로는 높이 치켜올라갔다.
나는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마음속의 무언가가 따스한 햇볕을 받아 서서히 녹아드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여자아이가 문득 경계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아이
저, 저한테 무슨 볼일 있으세요?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뒤늦게 내 행동이 조금 무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 미안한 마음을 담아 웃어 보였다.
유연
미안해요. 일부러 훔쳐보려던 건 아니에요. 그냥 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길래……
여자아이
이 예능도 보세요? 요즘 꽤 인기 있긴 하죠.
유연
저는……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하고 싶은 말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결국 그 모든 말은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로만 남았다.
유연
저도 이 프로그램 꽤 좋아해요. 그쪽은요? 재미있어요?
여자아이
그럭저럭요? 저도 인기 있다고 해서 보기 시작했거든요.
여자아이
양쪽 주장도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매회 토론 주제도 꽤 흥미로워요.
여자아이
예를 들면 이번 회는 언론이 범죄자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해야 하는지를 다뤄요. 지난 회는 인터넷에서 각종 커뮤니티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거였고요.
여자아이
근데 양쪽 시청자들이 실시간 댓글로 싸우는 게 진짜 재미있어요.
그녀는 웃더니 다시 재생을 멈춰 놓은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여자아이
이제 이 프로그램이 마지막까지 망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 그러면 또 볼 게 없어질 테니까요.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화면 속 익숙한 세트장을 바라보았다.
회의실에서 수없이 들었던 의견과 수정안들.
그리고 내가 없는 곳에서도 계속해서 뻗어 나가고 있는 세계.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낯선 누군가에게, 어쩌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지켜봐지고 있었다.
유연
그쪽은 어떻게 생각해요? 범죄자의 얼굴을 가려야 할까요? 인터넷에서 그런 규칙들을 따라야 할까요?
여자아이
……글쎄요. 누가 알겠어요.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눈동자 안에서는 여전히 무언가가 조용히 싹트고 있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들고 거리 모퉁이에서 달려오는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자아이
친구가 왔네요. 저 먼저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스스럼없이 작별 인사를 건네고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벤치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머리 위의 햇살이 차갑게 식고 지쳐 있던 몸을 천천히 데워 주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가 내 등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듯했다.
아주 작은 시작점 하나. 아주 작은 힘 하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결정 하나.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벤치를 짚으며 일어섰다.
——어쩌면 조금 더 노력할 수 있을지도 몰라. 당신이 혼자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 나는 아직 알고 싶으니까.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기억 속에서 흔적을 뒤지는 대신, 그가 표시해 두었던 건물들을 하나씩 직접 찾아갔다.
어느새 B.S. 산하의 사업들은 양지의 합법적인 기업부터 음지의 회색지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라나 끝없이 뻗어 가는 나무뿌리처럼……
소리 없이 이 도시의 구석구석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예전에도 수없이 지나쳤던 거리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주기락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왔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
손님, 이곳은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경비실에서 갑자기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앞의 공장을 바라보았다.
회백색 공장 건물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오는 길에 지나친 다른 공업 단지와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좌표가 아니었다면 이곳을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비실 유리창에는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 벽에 설치된 인터폰을 눌렀다.
유연
나를 모르나요? 그럼 나를 아는 책임자를 불러오세요.
인터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머리 위의 감시 카메라에서는 붉은빛이 희미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참 뒤 차단문이 천천히 열렸다. 흰 가운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
안녕하십니까. 이 기지의 책임자, Rhys입니다.
그가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아주 희미한 금빛이 찰나처럼 스쳐 지나갔다.
외국인인가? 내가 더 생각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Rhys
오늘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유연
그건 당신이 물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안내하세요.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반박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상대는 잠시 망설이더니 콧등에 걸친 안경을 밀어 올렸다.
짧은 시간 동안 득실을 따져 본 그는 결국 몸을 돌려 길을 비켜 주었다.
기지 앞쪽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고, 한편에는 차량 몇 대가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었다.
나는 Rhys를 따라 안쪽으로 계속 들어갔다. 그는 출입 카드를 꺼내 한쪽에 숨겨진 문에 갖다 댔다.
금속문이 양옆으로 열리면서 공장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유리 칸막이가 넓은 홀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있었고, 그 안에서는 각종 장비의 표시등이 번갈아 깜박이고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 몇 명이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그들은 걸음이 빠르고 표정이 엄숙했으며 눈동자에는 희미한 빛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에 피어오른 묘한 위화감을 억누르고 계속 그를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티 나지 않게 살폈다.
유연
연모시에는 이런 기지가 몇 군데나 더 있죠?
Rhys
……
그는 잠시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고르는 듯했다.
Rhys
정확한 분포까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Rhys
제가 알기로는 적어도 네 곳 이상은 더 있을 겁니다. 그리고 기지마다 중점적으로 진행하는 실험도 다릅니다.
복도 양쪽에는 굳게 닫힌 금속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문에는 손잡이조차 없었고, 한쪽에 홍채 인식 장치만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의 보안 등급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문들을 힐끗 살펴본 뒤 시선을 거두었다.
유연
이쯤이면 됐어요. 가서 일 보세요.
Rhys
알겠습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혼자 조금 더 둘러보았다.
더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복도에서는 연구원들이 바쁘게 오갔다.
마침내 복도 끝에 멈춰 서서 눈앞의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Rhys가 'QUEEN'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주기락에게 보고할까?
어쩌면 그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아직 모르고 있을지도.
주기락은 숨는 데 너무나 능숙했다.
우리가 서로 그의 정체를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 내 앞에 나타나기를 거부한다면……
내가 아무리 그의 흔적을 뒤쫓아도, 과거의 잔영을 따라갈 때처럼 영원히 그의 뒤만 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음 순간 나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Rhys의 사무실을 찾아냈다.
유연
당신들은 시험을 통과했어요.
내 목소리를 들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서류 한 부가 펼쳐져 있었다.
Rhys는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서류를 정리하고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유연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건 BOSS가 당신들의 실험에 협조하라고 했기 때문이에요.
그의 눈이 순간 밝아졌다. 광기에 가까운 기쁨이 엄숙하던 얼굴 위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Rhys
그거 정말 잘됐군요! 이건 획기적인 진전이 될 겁니다.
Rhys
사실 저희는 이전에도 BOSS께 여러 차례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당신의 최신 데이터를 확보하고 싶어서요. 하지만 좀처럼 승인이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유연
시작하죠. BOSS에게도 알리는 거 잊지 마세요.
거대한 굉음과 함께 비행기 한 대가 공항에 부드럽게 착륙했다.
마중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입국장. 허묵은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서 흘러나온 빛이 그의 깊고 선명한 이목구비를 비추었다.
화면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 한 통이 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발신자 이름에서 메시지 내용으로 옮겨갔다. 눈빛이 잠시 머물렀다.
하지만 이내 휴대전화를 집어넣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는 차 키를 꺼내 차에 올라탔다. 검은색 SUV는 곧 도시의 고가도로를 달리는 차량들 사이로 합류했고, 마침내 경계가 삼엄한 NW 기지 앞에 멈춰 섰다.
기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NW 대원이 허묵에게 경례한 뒤 서류를 건넸다.
허묵은 복잡하면서도 서로 비슷하게 생긴 복도들을 지나 아주 넓은 실험실로 들어섰다.
광활한 공간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유리실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차갑고 삼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잠시 뒤, 침착하면서도 힘 있는 발걸음 소리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
이곳의 모든 사람은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끔한 제복 차림의 백기가 나타났다. 그는 불필요한 인사말도 없이 허묵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허묵
백 지휘관님, 솔직하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의 무심한 시선이 빼곡하게 적힌 실험 데이터를 빠르고 정확하게 훑었다. 곧 허묵이 가늘고 긴 눈매를 들어 올렸다.
허묵
본래 인간의 것이 아닌 힘을 억지로 인체에 부여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허묵
실험체였던 당신이라면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요.
*
안나
후원사에서 보내온 기획안입니다. 확인하시고 서명해 주셔야 해요.
아버지
알겠어요. 수고했어요.
상대가 떠난 뒤 남자는 눈꺼풀을 내리고 책상 한쪽에 놓인 액자를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는 한 쌍의 부녀가 함께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딸이 아버지의 팔에 머리를 살며시 기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자는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조용히 듣는 동안에도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아버지
누군가 내가 이곳에 있기를 '필요로' 하고 있어.
남자가 유독 그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일까. 상대는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몇 마디만 들려올 뿐이었다.
남자는 담담하게 두어 마디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
일을 다 처리하고 나면 다시 연락할게.
9-6 죽음의 선고 (死亡宣判)
눈부신 무영등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주변에서는 각종 장비가 작동 중임을 알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화면 위의 촘촘한 선들이 호흡에 따라 오르내렸다. 연구원 한 명이 고개를 숙인 채 기록을 대조하고 있었고, 가끔 옆에 있는 사람과 몇 마디씩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금속 침대에 조용히 기대어 누워 그들이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일상적인 업무를 묻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유연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죠?
연구원
실시간으로 신체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신체에 어떠한 손상도 입히지 않습니다.
유연
이것 말고도 협조해야 할 절차가 있나요? 수집한 데이터는 어디에 사용되죠?
연구원
네, 있습니다.
연구원
우선 이 데이터를 과거의 표본과 대조한 뒤, 최신 연구 성과에 활용할 예정입니다.
유연
자세히 설명해 보세요.
연구원
먼저 관련 신호 전달 경로의 데이터를 비교하고, 이전에 확보한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 결과를 교차 분석하여……
그는 이 또한 하나의 시험이라고 생각했는지 진지하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 용어가 너무 많아서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유연
……좀 더 쉽고 간단하게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연구원
……그, 그게 이미 가장 쉽게 설명한 겁니다.
유연
……그냥 내가 대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설명해 봐요.
연구원
그건…… 음,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저희가 하는 일은……
그렇게 말하던 연구원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의 말을 금지한 것처럼, 목소리가 허공에서 뚝 끊겨 버렸다.
머리 위의 무영등은 눈이 부실 만큼 밝았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어려 있던 금빛이 잠깐 선명해졌다.
그제야 나는 이 기시감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떠올렸다.
전에 주기락과 함께 B.S. 복도를 걸었을 때도, 어느 연구원의 눈동자에서 옅은 금빛을 본 적이 있었다.
설마…… 아니야.
내 기억으로는 이전에 주기락에게 명령을 받았던 사람들의 눈에는 이처럼 뚜렷한 흔적이 남지 않았다.
나는 의문을 품은 채 연구원들에게 핵심 데이터와 관련된 질문 몇 가지를 조심스럽게 던져 보았다.
예상대로였다. 그들은 '진실'과 관련된 정보에 닿기만 하면 움직임과 표정이 기묘하게 멈칫거렸다.
——마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명령이 그들 안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동안 몸에 붙인 전극 패치의 위치가 몇 차례 바뀌었다.
장비의 웅웅거리는 소리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것이 길고 흐릿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복도 깊숙한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밖의 소란을 뚫고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였다.
어쩐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운명도 똑같은 소리를 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금속문이 천천히 양옆으로 열렸다. 문틈을 따라 새하얀 빛이 밀려들었고…… 그 빛 속에서 외롭고 차가운 은빛이 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장비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졌다. 두꺼운 유리 너머로 마침내 그 눈동자를 마주했다.
빛을 머금은 차가운 푸른 눈. 그 안에는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세하게 눈썹을 내리눌렀다.
비웃는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유연
"찾았어."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거대한 유리벽이 나와 그의 세계를 갈라놓고 있었다. 차갑고 흰 조명이 그의 얼굴 위로 내려앉아, 나를 대신해 그리운 얼굴의 윤곽을 하나하나 그려 주었다.
그가 나타나자 모든 것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심판을 기다렸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찾아온 그 작은 안도감을 누려야 할지, 소리 없이 밀려오는 쓰라린 감정을 삼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길고 긴 정적 끝에 그가 아주 작게 코웃음을 쳤다.
아마도 그는 짐작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한 걸음씩 이곳까지 왔는지. 어떻게 자신을 찾아냈는지.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Rhys도 굳어 버린 분위기를 알아차린 듯했지만 조심스럽게 Helios에게 다가갔다.
Rhys
BOSS, 방금 QUEEN께서 BOSS가 직접……
Helios
봤어.
다음 순간 그는 긴 다리로 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의자 하나를 아무렇게나 끌어다 앉았다.
금속이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자 실험실 전체가 다시 얼어붙었다.
Helios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한 손을 느슨하게 무릎 위에 얹었다.
Helios
뭘 기다리고 있지?
Helios
계속해.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판결이 내려졌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 역시 그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눈을 힘껏 크게 뜨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시큰한 감정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의 묵인 아래 또 다른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밀폐된 실험실 안에 소독약 냄새가 퍼졌다. 그 냄새는 나와 그의 몸에도 스며들었다.
하지만 Helios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그 외딴섬에 자신의 모든 나약함을 버리고 온 듯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어떤 결연하고도 강대한 힘뿐인 것 같았다.
그런데 주기락. 나는 왜 아직도 네가 안쓰러운 걸까? 팔에서 미세한 따끔거림이 전해졌다.
투명한 관을 따라 피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나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유리벽을 넘어 내 몸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소리 없는 명령이자 강요 같았다.
다만 그 명령과 강요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것이었다. 마치 운명이 내린 죄와 벌처럼.
그런데 피가 관을 가득 채우며 차가운 붉은 선을 길게 이어 나갈 때였다. Helios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Helios
전부 나가.
그 말이 떨어지자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즉시 동작을 멈췄다.
그들의 눈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재빨리 채혈 바늘을 뽑고 내 팔에 지혈 솜을 눌러 댄 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물러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실험실에는 나와 그 단둘만 남았다.
Helios
말해 봐. 뭘 하려는 거지?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무런 표정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아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끝없는 말들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쳤다. 그런데 막상 이 순간이 되자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입가에 씁쓸한 미소만 떠올랐다.
유연
내가 어떻게 이곳을 찾아냈는지부터 물어보고 싶지 않아?
Helios
여기까지 온 이유가 네 Evol을 자랑하려는 거였나?
그는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정을 보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건 주기락의 웃음이 아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Helios를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과거에 냉담함 뒤로 숨기곤 했던 망설임을 다시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런 동요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유연
……주기락, 이제 우리 둘 다 알아. 네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신분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거.
유연
그러니까 더는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돼. 나한테 이런 태도로 말할 필요도 없고.
유연
네가 자신의 음악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아. 그리고 그 모든 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도……
Helios
……
갑자기 터져 나온 비웃음이 내 말을 끊어 버렸다.
그의 눈에는 정체를 들킨 사람의 동요도, 무언가를 감추려는 당혹감도 없었다.
예전의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숨기려 했다. 망설임과 갈등을 품은 채 때로는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나를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마치 Helios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지 보고 있는 듯했다.
그가 긴 다리로 한 걸음씩 내게 다가왔다.
바닥을 짓누르는 발소리가 내 심장을 밟는 듯했다. 코를 찌르던 소독약 냄새 사이로 순식간에 짙은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뒤섞였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그를 이루고 있었다.
Helios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모르는 쪽은 너인 것 같은데.
곧게 뻗은 그의 그림자가 정면에서 다가왔다. 그림자는 우리 사이에 남아 있던 빛을 조금씩 집어삼켰다.
내 의지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흐트러졌다. 그 순간 뇌리에 새겨진 '도망쳐'라는 명령이 다시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의 눈동자 앞에서는 숨 쉬는 것마저 완전히 침범당하는 듯했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실험용 의자에 부딪혀 비틀거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더 이상 나를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
차가운 등받이가 등에 닿는 순간, 머리 위에 남아 있던 마지막 빛줄기마저 그의 몸에 완전히 가려졌다.
그는 내게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긴 다리를 들어 내 몸 옆에 있는 장비의 가장자리를 그대로 밟았다.
꼼짝없이 갇혀 버린 좁은 공간에서 나는 그저 고개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그림자가 답답할 만큼 가까이서 나를 뒤덮었다.
Helios
네가 날 찾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가 몸을 숙이며 아무렇지 않게 모든 사실을 인정했다.
Helios
갈 수 있는 곳은 전부 돌아다니면서 며칠 밤낮으로 날 찾아다녔지.
Helios
전부 알고 있었어.
나는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목이 조금씩 조여 왔다.
그의 손에는 분명 단검이 없었지만, 언젠가 목덜미에 닿았던 그 차가운 감촉이 다시금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분명 나는 두렵지 않았다.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어떻게든 도망치라는 외침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나는 이 속박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 아래에서, 내 눈동자에도 복종을 나타내는 금빛이 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Helios
내가 숨어 있는 줄 알았어?
Helios
겁쟁이처럼 껍데기 속에 웅크린 채 네 앞에서 허세나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나?
나는 그의 입을 막고 싶었다.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그만두게 하고 싶었다.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버티게 해 준 무언가가 그의 말 한마디에 단번에 끊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눈가에서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내 눈물 자국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무심하게 내 눈을 마주했다.
다음 순간, 그가 내 턱을 움켜쥐었다. 조금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지금의 나를 더 똑똑히 볼 수 있다는 듯했다.
그리고 나 역시 지금의 그를 영혼 깊숙이 새겨 넣게 하려는 듯했다.
Helios
넌 너무 많은 걸 생각하고 있어.
그가 잔인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장 잔혹한 선고를 내렸다.
Helios
한때는 나도 주기락이었지. 하지만 이제 더는 주기락으로 살 생각이 없어.
Helios
그는 죽었으니까.
9-7 서로를 향한 칼날 (双向的刀锋)
세상이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나는 멍하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눈앞의 사람은 분명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멀리서 들려왔다. 마치 끊어질 듯 이어지며 간신히 귓가에 닿는 것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내 행동은 그가 내게 심어 놓은 의지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Helios는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반걸음 물러섰다. 그는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내 손이 허공에 어정쩡하게 굳어 있는 모습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Helios
네가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
Helios
난 그 사람이 아니라고.
아득한 기억 속에서 들었던 똑같은 말이 다시 울려 퍼졌다. 하지만 시간은 그 말에 예전과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칼날을 새겨 놓았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에는 섬뜩할 만큼 거리낌이 없었다. 그때처럼 무언가를 감추거나 숨기려는 기색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는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을 부정했다. 자기 자신까지도.
세상에서 다시 한번 거대한 둔탁한 울림이 전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온몸이 소리 없는 거대한 고통 속에 잠겨 버린 듯했다.
유연
……그럼 네가 말해 줘. 내가 찾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데?
유연
그 사람은 대체 어디에 있는데?
Helios
너도 죽고 싶은 건가?
그가 장난스럽게 비웃었다. 그의 몸에서는 죽음과 냉기가 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눈앞의 차가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안에 담긴 잔혹함과 결연함을 끝까지 마주했다.
긴 침묵 끝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유연
그럼 죽으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순간 그의 웃음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길고 긴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듯 양쪽 끝에 날이 선 단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붉어진 눈으로 상대를 찌르는 동시에, 반대편 칼날이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것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마치 이렇게 해야만 서툴게나마 서로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상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한 치의 빈틈도 없어 보이던 표정에 마침내 아주 가느다란 균열이 생겼다. 그의 속눈썹이 제멋대로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줄곧 그의 눈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분노를 비로소 똑똑히 보았다.
유연
주기락, 대체 뭐 때문에 화가 난 거야?
유연
내가 너무 늦게 찾아와서 원망스러운 거야? 아니면 내가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Helios
……
그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더는 자신의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유연
주기락!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도망치라는 명령이 끊임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연
……넌 틀렸어.
나는 억지로라도 그의 손을 붙잡고 눈을 마주했다.
유연
주기락, 아니…… Helios. 내가 찾는 사람은 바로 너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였고, 오직 너뿐이었어.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그런데도 억울하고 분한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
나는 다른 손을 몇 번이고 들어 눈물을 마구 닦아 냈다. 그에게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음과 몸이 심하게 어긋나 버린 것 같았다. 내 머리는 도망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에 남으라고도 외치고 있었다.
유연
내가 널 찾아온 건…… 내 대답을 전해 주고 싶어서야.
유연
그때 넌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날 떠나보냈잖아. 하지만 나는 꼭 내 대답을 들려줘야겠어.
Helios
아무도 묻지 않았어.
그가 거칠게 내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손가락 마디가 내 눈물 자국에 닿았다. 마치 눈물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가 고통스럽게 찌푸려졌다. 그는 곧바로 손을 떼더니 나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Helios
쓸데없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
마치 도망치는 것 같았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자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연
네가 꼼짝도 하지 않고 바닥에 누워 있는 걸 봤어. 그리고 다시 일어나 앉는 것도 봤고.
Helios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짙푸른 눈동자 속에서는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듯했다.
유연
나는…… 널 너무나 찾고 싶었어.
유연
그래서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녔어. 네 작업실, 자주 가던 편의점, 네가 좋아하는 공원과 식당……
유연
생각나는 곳은 전부 찾아가 봤어.
나는 그에게 말을 건네면서 한 걸음씩 다가갔다.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거리였다. 그런데도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진창에 빠진 듯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 명령은 마치 저주 같았다.
유연
그러다가 마침내 B.S.에서 널 봤어.
유연
네 사무실에 서서, 네가 도시의 투영 지도를 띄워 놓고 Hephaestus와 무언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봤거든.
유연
맞아. 아직 너한테 말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주변 환경에도 Evol을 사용할 수 있게 됐어.
Helios
그런 얘기엔 관심 없어.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내 그의 앞에 서서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그가 내 눈을 바라보기를 바랐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 글자까지 똑똑히 듣기를 바랐다.
유연
그다음에는 다시 네 집으로 돌아갔어. 거기서도 널 봤어.
유연
네가 일어서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봤어…… 그리고 Helios가 되어 집을 나서는 것도.
유연
나는 계속해서 과거의 네 모습 뒤를 따라갔어. 네가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걸었고……
그의 옷깃을 붙잡은 손끝이 심하게 떨렸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나도 모르게 그를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 그는 또다시 환영처럼 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릴지도 몰랐다.
유연
그날 밤, 난 정말 조금만 더 가면 널 찾을 수 있었어.
유연
하지만 난 너처럼 운이 좋지 않았어. 결국 너와 엇갈려 지나쳤고, 광장에서 네 모습마저 놓쳐 버렸어……
그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죽은 물처럼 고요하던 눈동자에는 거부감이 가득했다.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통제를 잃을 듯한 충동에 휩싸여 다시 내 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바닥이 내 입을 덮는 순간, 나는 그대로 그의 손을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손가락 마디에서 피가 배어 나왔고, 그 피가 내 입술에도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는 마침내 나 역시 자신만큼이나 고집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유연
네가 내 모르는 곳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혼자서 그렇게 멀고 긴 길을 걸어왔다는 것도 몰랐어.
유연
그래서 나도 그 투영 지도에 표시된 장소들을 하나씩 찾아갔어.
Helios
놔!
유연
그곳마다 능력을 사용해 보고 싶었어. 네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었으니까.
유연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다는 건 알았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Helios
그런 얘기엔 관심 없다고!
유연
네 입으로 직접 들려주길 바랐으니까!
나는 그의 말을 전부 무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내 이야기를 듣게 할 작정이었다.
유연
네가 늘 혼자서 많은 걸 결정한다는 건 알아. 그래도 나는 알고 싶어. 네가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전부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
Helios
이제 말 다 했어?
그는 손가락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옷깃을 움켜쥔 내 손을 거칠게 붙잡더니 억지로 떼어 냈다.
이상하게도 나 역시 오기가 생겼다. 나는 다시 그의 팔을 붙잡고 절대로 놓지 않았다.
Helios
너에게 명령한다——
쉰 목소리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거역을 허용하지 않는 강압적인 목소리가 다시 신경을 자극하며 나를 복종시키려 했다.
하지만 영혼 깊은 곳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가 온 힘을 다해 외치고 있었다. 그 외침이 모든 이명을 덮어 버렸다.
나는 떨리는 몸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유연
Helios, 말해 줘——
유연
이런 힘까지 써 가며 널 찾아낸 내가, 너한테는 역겹게 느껴져?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는 마치 내 말에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다음 순간,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가 나를 거칠게 밀어 벽에 눌러 붙였다.
그의 눈동자가 내 시선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분노와 고통이 뒤엉켜 짙은 금빛으로 변하더니, 눈동자 깊은 곳에서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가 그의 안을 거칠게 찢어발기고 있는 듯했다.
그 때문에 그 역시 걷잡을 수 없이 떨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번에도 그가 이긴 것 같았다.
Helios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짙은 안개가 눈동자를 뒤덮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Helios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데?
유연
……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러다 결국 입꼬리를 살짝 당겨 조용히 웃었다.
유연
그 대답은 네가 나한테 해 줘야 하는 거야. 나는 그저 내 대답을 전하러 온 거고.
나는 그의 웃음을 떠올렸다. 눈부시게 빛나던 그 눈동자를 떠올렸다. 수없이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고집스럽게 나의 태양이 되어 주었던 그를 떠올렸다.
유연
Helios…… 주기락. 네가 누구든 상관없어. 어떤 모습의 너라도 괜찮아.
유연
내 기쁨도 분노도, 내 마음도, 그리고 내 '사랑'도—— 전부 너에게 줄 수 있어.
유연
네가 모르는 사이에, 사실 넌 이미 그 모든 걸 가지고 있었어.
Helios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크게 수축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며 내 손을 완전히 뿌리쳤다.
거의 동시에, 조금 전까지 격렬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그는 차갑게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스스로에게 명령하듯, 방금 전까지 드러냈던 모든 감정을 거두어들였다.
Helios
여기에는 이제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
사실 정말로 허둥지둥 도망치고 있는 사람은 그였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다. 단 1초라도 더 머물렀다가는 자기 자신이 완전히 무너져 버릴까 두려웠다.
그의 뒤로 커다란 문이 닫혔을 때, 세상은 이미 무너져 내려 한바탕 거센 비가 되어 있었다.
달빛 아래 펼쳐진 빗줄기는 유난히 창백했다. 끊어진 실오라기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물었다. 이런 자신이 역겹게 느껴지느냐고.
그녀는 말했다. 그가 이미 자신의 ■을 가지고 있다고.
Helios는 오랫동안 고개를 들어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역겨운 괴물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몸뚱이가 그를 끊임없이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계속해서 가라앉다가 마침내 어둠 속에 완전히 잠겨 버렸다.
이 정도면 그녀도 자신을 충분히 혐오하게 되었겠지.
달빛이 물처럼 흐르는 밤. 어느 건물 안에서는 이미 몇몇 어두운 그림자들이 긴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희미한 달빛은 그들 사이에 있는, 깊은 연못처럼 짙은 녹색 눈동자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그 남자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 몸을 숨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 앉은 몇 사람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U
Helios, 너 지금 꼭 누가 죽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헐렁한 면마 셔츠를 입은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받았다.
E
벌써 그렇게 단정 짓지 마. 저건 젊다는 증거야.
E
게다가 앞으로는 정말 누군가 죽을지도 모르잖아.
Helios는 눈꺼풀조차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저 아무렇게나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순간 공기가 조용해졌다. 비에 완전히 젖어 버린 Helios의 옷자락에서는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축축하고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자 시시해진 듯 몇 사람은 시선을 거두고 긴 탁자 끝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남자의 손끝에서는 기이하면서도 위험한 빛무리가 맴돌고 있었다. 그 빛은 손등을 따라 천천히 구불거리며 위쪽으로 뻗어 나갔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느꼈는지, 남자의 손바닥에서 피어오르던 빛이 순식간에 뜨겁게 타올랐다. 찬란한 빛이 공간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Z
시작하지.
9-8 비 (雨)
실험실에서는 연구원들이 여러 실험대 사이를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Helios가 실험을 중단시킨 뒤로는 누구도 감히 내게 다가와 데이터 수집이나 추가 검사를 진행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가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내가 그들의 작업 내용을 지켜보는 것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마 Helios도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실험실 한쪽에 앉아 연구원들이 실험대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은 움직임은 점차 내 눈에 그저 배경의 일부로만 비쳤다.
유연
……
Helios
여기에는 이제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마치 또 하나의, 더욱 잔인한 저주 같았다.
'사랑'이 사라지면서 마침내 그 역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해방시켜 자기 자신과 공모하듯 어떤 결단을 내리게 한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은 대체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내가 당신에게서 그것을 잊게 만든 걸까? 더는 그것을 필요하지 않게 만든 것도 나였을까?
내가 '사랑'을 찾아내기만 하면 눈앞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당신을 찾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그것에 관한 흔적도 단서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피로감이 나를 짓눌렀다. 결국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팔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거대한 현기증이 다시 밀려왔다.
세상이 거칠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의 균형을 잡으려 했다.
바닥에 비친 조명들이 기이한 형태로 일그러졌다. 빛이 길게 늘어나더니 서로 겹쳐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분리감이 다시 나를 찢어발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강하고 거칠었다.
사방에서 무언가가 나를 움켜쥐는 듯했다.
몸을 지탱할 모든 힘이 사라졌다. 쾅 하는 충격과 함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온몸이 분리될 듯한 속도로 추락하는 동안, 모든 것이 내 뒤편으로 미친 듯이 멀어졌다.
그렇게 뒤로 밀려난 풍경은 기괴하고 흐릿한 빛의 궤적이 되었다.
본능적인 공포가 나를 덮쳤다. 나는 무언가라도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손끝에 닿는 것은 텅 빈 허공뿐이었다.
멀리서 들렸다가 가까워지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흔들리며 내게 다가왔다.
놀라서 외치는 사람도 있었고, 내 곁에 몸을 숙이고 무언가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짚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눈앞에 겹쳐 보이던 형상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나서야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렸다.
연구원 몇 명이 긴장한 얼굴로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변은 조금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방금 느꼈던 추락과 분리감이 그저 착각이었던 것처럼.
??
QUEEN, 괜찮으십니까?
유연
저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뜻을 전하려던 바로 그때,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Helios
무슨 일이지?
고개를 들자 멀지 않은 곳에 은빛 머리카락을 한 그가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차갑게 흘겨보았다.
Helios
너희가 그녀한테 실험을 했어?
그의 말에는 노골적인 살기와 난폭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모두가 즉시 몸을 떨며 움직임을 멈췄다.
연구원
QUEEN께서 약 1분 전에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저희는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검사를 준비하던 중……
하지만 Helios에게는 설명을 끝까지 들을 인내심이 없었다.
그는 곧장 내 앞으로 걸어왔다. 미처 끝맺지 못한 말들을 발걸음으로 짓밟듯 다가오더니, 내 손목을 움켜쥐고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는 태도로 나를 반쯤 끌고 반쯤 안다시피 하며 기지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밤바람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얀 달이 하늘 높이 떠 있었고, 붙잡힌 손목에서는 욱신거리는 통증까지 느껴졌다.
유연
잠깐……
하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 문을 벌컥 열더니, 나를 조수석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차 문이 거칠게 닫히며 쾅 하는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Helios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액셀을 힘껏 밟았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분명 떠났던 사람이 왜 다시 돌아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단호한 명령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Helios
말하지 마.
유연
……
엔진이 폭발하듯 굉음을 내질렀다. 강한 가속력에 몸이 뒤로 확 젖혀지자 나는 황급히 옆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세상이 미친 듯이 뒤로 밀려났다. 창밖의 네온사인은 흐릿한 빛줄기로 찢겨 나가며 눈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차체가 갑자기 크게 흔들리며 멈춰 섰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이미 우리 집 건물 앞에 차를 세운 뒤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숨 막히던 분위기도 마침내 풀리는 듯했다.
Helios
내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앞유리에는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득히 멀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유연
Evol의 퇴화를 연구하려는 거라면 내가 필요할 거야.
그가 말한 '진화'와 지금까지의 실험을 연결해 보면, 결국 이 결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말해 주지 않으니 이런 식으로 떠볼 수밖에 없었다.
Helios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유연
……
한동안 차 안은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팽팽하게 맞섰다. 어느 쪽도 한 걸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한참 뒤, 마침내 그의 얼굴에 노골적인 짜증이 떠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Helios
넌 대체 뭘 그렇게 고집하는 거야?
앞유리 너머로 스며든 달빛 아래에서, 그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헛된 믿음에 매달리는 신도를 보는 듯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안에는 갈등 어린 의문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사랑이 빛을 잃으면서 그 역시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는 그 잔해 속에서 가장 차갑고 단단한 조각만을 주워 들었다. 마치 그래야만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Helios가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조적인 코웃음을 쳤다.
이런 질문을 꺼낸 자기 자신이 터무니없이 우습게 느껴진다는 듯했다.
내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자 다음 순간 그는 아예 자신이 차에서 내려 버렸다.
Helios
차는 너 가져.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닫혔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마침내 모퉁이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자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이윽고 눈앞이 온통 흐려졌다.
무언가가 끝까지 팽팽하게 당겨지다가 마침내 끊어져 버린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전부 내 탓이었다. 내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대가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은 탓이었다.
나는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인데.
그와 아주 오랫동안,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었을 뿐인데.
하지만 온 힘을 다한 끝에 나는 이 세상을 또 다른 끔찍한 모습으로 뒤바꿔 놓고 말았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사랑이 없다면, 왜 나 혼자만 그것을 기억하게 남겨 둔 걸까?
차라리 내게서도 사랑을 빼앗아 가지.
그랬다면 이렇게 고통스럽고 슬플 일도 없었을 텐데.
나도 아무런 미련이나 애착 없이, 다른 사람들처럼 미련 없이 냉정하게 떠날 수 있었을 텐데.
유연
……차라리 나도 사랑을 잃게 해 달라고!!!
나도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검고 끈적한 무언가가 사람을 집어삼키는 점액처럼 조금씩 나를 삼켜 버렸다.
나도 지쳐 버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모든 걸 내팽개치고 떠나 버리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큰 소리로 저주하고 싶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싶었다.
차라리 혜성이 찾아왔던 그날 밤에 세상을 멈춰 버렸다면……그랬다면 이제 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을까?
나는 어둠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검은 그림자와 뒤섞여 산산이 녹아들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가 나를 감싸 안았다.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유연”
어차피 그 사람들도 다 잊었잖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아무도 널 탓하지 않을 거야.
어둠이 나를 끌어안고 천천히 깊은 곳으로 가라앉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작은 빛 하나가 내 뺨 가까이에 비쳤다.
너무나 작고 희미한 빛이었다. 이제는 조그만 푸른빛 한 점만 남아 있었다. 마치 세상이 마지막까지 소중히 간직해 온 진심 한 조각 같았다.
주기락
허니칩 씨, 나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할 거예요.
주기락
당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면 언제나 당신의 앞길을 밝혀 줄게요.
하지만…… 기락 씨
당신이 이 세상을 사랑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외롭고 두려워질 수도 있다는 걸 몰랐겠죠.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무언가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나 빨랐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붙잡지 못했다.
다음 순간, 누군가 밖에서 차 문을 벌컥 열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놀랍게도 Helios가 다시 운전석에 올라탄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닦을 틈조차 없었다. 그저 엉망이 된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유연
너, 너…… 뭐 하는 거야?
Helios
비가 와. 우산이 없어.
그는 간결하게 몇 마디만 내뱉더니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그의 얼굴을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리창에 아주 가느다란 빗줄기가 스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바람에 흩어져 버렸다.
Helios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속해.
유연
……
그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하마터면 어이없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나도 모르게 말대꾸가 튀어나왔다.
유연
아까는 차를 나한테 준다며?
유연
그럼…… 비를 피하려고 다시 들어올 거면 적어도 내 허락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Helios
……
그제야 그가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의 팔이 내 몸을 가로질러 뻗어 나오더니 내 옆의 차창을 짚었다.
비좁은 차 안에서 나는 완전히 그의 그림자에 갇혀 버렸다.
희미한 숨결이 눈물 자국이 남은 뺨을 스쳤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Helios
차 키는 나한테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다고.
말을 마친 그는 미련 없이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좌석 조절 레버를 당겨 운전석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그대로 비스듬히 누운 채 다시 눈을 감았다.
Helios
계속 울어.
Helios
대신 말은 하지 마.
유연
……
나는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억지로 눈물까지 멈춰 버린 탓에 이제는 울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마구 닦아 내면서도 억울한 마음에 계속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위로의 말 한마디 없었다. 휴지 한 장 건네주지도 않았다. 그저 영문 모를 딱딱한 말 몇 마디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이곳에 머물겠다고 했다.
나는 거의 마른 상태인 유리창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유연
……비가 어디 온다는 거야.
Helios
직접 내려서 확인해.
그가 기다렸다는 듯 즉시 대답하자, 나는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대신 나도 그를 따라 좌석 조절 레버를 당겨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마치 거센 비에 갇힌 외딴섬 같았다.
그곳에서는 잠시나마 바깥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허락되는 듯했다.
나는 등받이에 옆으로 누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유연
그러고 보니 비가 많이 오네.
그렇게 그의 곁에 누워 있었다. 세상은 더없이 고요했다. 가끔 빗방울 몇 개가 차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한바탕 울고 나니 마음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남은 것이라곤 조금씩 욱신거리는 눈과, 피곤하고 여전히 약간 어지러운 머리뿐이었다.
마침내 나는 그를 바라보는 것도 그만두고 눈을 감았다.
유연
나도 '사랑'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어린아이처럼 제멋대로인 말을 내뱉으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유연
그랬다면 이렇게 슬프지도, 이렇게 무섭지도 않았을 텐데.
유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지, 세상이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걱정하지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풀이 죽어 하는 말을 늘어놓는 동안 Helios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만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마치 정말 비를 피하러 온 사람처럼.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처럼.
유연
기락 씨, 다른 사람의…… 이 세상의 '사랑'을 바라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몰랐어요……
유연
당신도…… 이렇게 힘들었던 거예요……?
나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의지마저 이제는 쉬어도 좋다고 허락해 주는 것 같았다.
어둠이 다시 나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거센 비'가 어느새 찾아온 꿈속까지 스며들었다.
몇 분 뒤, Helios가 눈을 떴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한참 동안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코끝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거센 비를 흠뻑 맞고 온 작은 동물 같았다.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수많은 장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주기락'은 이미 죽었다.
그러니 자신은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 금빛 그림자 역시 오류가 난 코드처럼 미친 듯이 깜박이고 있었다. 산산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합되고, 또다시 끊임없이 파괴되었다.
그녀가 말한 '■'. 너는 이제 그게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어?
아무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차창 밖은 여전히 고요했다.
마침내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곳이라면, 이 비가 조금만 더 오래 내렸으면 좋겠다.
9-10 평범한 삶 (普通生活)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가, 낯선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대는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방 안은 몹시 텅 비어 있었다. 침대 하나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가구나 장식도 없었다. 다만 작은 천창 하나가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유연
……?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눈이 눈에 띄게 부어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기는 어디야? 내가 잠든 뒤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어리둥절한 채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거실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아직 짐을 제대로 풀지도 못한 임시 거처 같았다.
몇 걸음 더 나아가자 복도 끝에 반쯤 열린 방에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소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문틈으로 보니 Helios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차갑고 흰 화면빛이 그의 윤곽을 비추고 있었고, 화면에는 내가 알아볼 수 없는 코드들이 빽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코드와 데이터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눈앞의 이 사람이었다.
Helios
탁자 위에 먹을 거 있어. 알아서 가져다 먹어.
그는 내가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한마디만 던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꽉 움켜쥐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질문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기력이 바닥난 몸 역시 더는 무리하지 말라고 항의하고 있었다.
영원히 돌아보지 않을 것만 같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지금 당장 그와 다투지 않아도 되니까.
텅 빈 거실의 탁자 위에는 크루아상 그림이 인쇄된 종이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파조차 없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바닥에 앉았다.
빵을 베어 물면서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그의 임시 거처인 것 같았다……불필요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고, 어디를 보아도 텅 비어 있었다.
창밖에는 높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도시 중심부 어딘가에 있는 듯했다.
나는 호기심에 창가로 다가가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아 보이는 자동차들이 도로를 따라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높이는 대략 십몇 층쯤 되는 것 같았다.
Helios는 왜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걸까?
줄곧 혼자 행동하고 싶어 했잖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방에서 나온 Helios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탁자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더니 빵 하나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Helios
빨리 먹어.
Helios
다 먹으면 출근시켜 줄 테니까.
유연
……?
너무나 일상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황당하기까지 했다.
유연
……잠깐만. 나 아직 꿈에서 안 깼나 봐…… 꿈속에서는 당신 성격도 좀 이상해졌네.
Helios
내 성격이 어떤데?
유연
말은 엄청 밉게 하고, 삐딱하고, 사람 속 터지게 만들고, 답답해서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나무토막 같은 성격.
Helios
……
Helios는 말문이 막힌 듯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한참 뒤에야 차가운 코웃음을 겨우 내뱉었다.
Helios
그럼 좀 멀리 떨어져 있지 그래?
유연
하지만 넌 나무토막이잖아.
Helios
……
그가 이렇게 말문이 막히는 모습은 드물었다. 웃는 것도 아니고 안 웃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오히려 생생하고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Helios
유감이지만 네 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 나무토막이야.
그 말을 듣자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정말인지 확인하려고 그의 뺨을 콕 찔러 보려는 순간, 그가 허공에서 내 손을 붙잡았다.
손등으로 생생하고 차가운 감촉이 퍼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가늘게 떨었다.
Helios
적당히 해.
유연
……꿈은 아닌데. 그, 그런데 왜……
그는 내 손을 놓더니 고개를 돌려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삼킨 뒤 입을 열었다.
Helios
네가 말하는 '■'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어.
유연
……어떤 사람?
Helios
'■'이 없는 사람.
Helios
네가 스스로 버리면 돼. 다른 사람들과 다를 필요 없어.
Helios
지금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 돼서 평범하게 살아.
유연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그동안 좌절한 말을 수없이 내뱉었지만, 나는 여전히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Helios
여기서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유연
……여기서는 가능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손에 든 빵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유연
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데?
유연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 어제는 나를 두고 떠나기까지 했으면서……
Helios
……
내가 한꺼번에 질문을 쏟아 내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들었다.
Helios
생각이 바뀌었으니까.
Helios
날 찾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날 좋아한다며.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했잖아?
Helios
그럼 내가 남아 있으면 되겠네. 넌 떠나고 싶어질 때까지 머물러.
Helios
어차피 널 내쫓아 봤자 끝도 없이 찾아다닐 테니, 차라리 이러는 게 낫겠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다란 그림자가 내 몸 위로 드리워졌다.
Helios
그렇게 서러우면서 왜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지?
Helios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 네가 하던 프로그램 제작자 일이나 제대로 하면서.
그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사람을 홀리는 속삭임 같았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갈등과 갈망이 그 목소리와 겹쳐졌다.
마치 세이렌의 노래처럼.
유연
……그럼 너는? 넌 뭘 할 건데?
Helios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으면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
Helios는 차를 몰고 빠르게 달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거나 질문을 던져도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줄곧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당연하고 평범한 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굳게 결심한 것 같았다.
차가 회사 건물 앞에 멈춰 섰을 때는 내가 안전벨트를 풀기도 전이었다. 그가 먼저 조수석 문을 열더니 내 손목을 붙잡고 차에서 끌어내렸다.
내가 미처 제대로 서기도 전에 그는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차를 몰고 사라졌다.
유연
……
나는 건물 앞에 바보처럼 서 있었다. 한동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게 그가 말한…… 평범한 사람처럼 살라는 뜻인가?
나더러…… 출근하라고?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직원 몇 명이 나를 알아보았다.
오랜만에 나타난 내 모습이 낯선 듯,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밝은 얼굴과 피곤한 얼굴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뒤섞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 평소와 같아서 오히려 멍해졌다.
평범한 사람의 삶……
나는 Helios가 억지로 내 손에 쥐여 준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료들과 만난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그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이나 평온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웃어 보였다.
유연
다들 좋은 아침이에요. 제가 없는 동안 고생 많으셨죠.
직원들
사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내 얼굴에 잠시 머물렀던 시선을 보고, 퉁퉁 부은 눈이 눈에 띈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살펴보는 시선도, 선을 넘는 질문도 없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에는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매일 반복되는 업무를 시작했다.
그중 내 쪽으로 걸어오던 안나 언니만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안나연
고생 많았어.
다시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나는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연
나연 언니, 우리 아빠는요?
안나연
아직 안 오셨어. 오늘은 아버지 만나러 온 거야?
유연
그건 아닌데, 저는……
사실 나조차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분간 회사를 떠나 있겠다고 했던 내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를.
게다가 아버지에 대한 조사도 백기 쪽에서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결국 나는 요 며칠 조금 한가해져서 회사에 잠깐 들렀다고 얼버무렸다.
안나연
잘됐네. 마침 조금 있다가 《토론자》의 새 토론 주제를 정하는 회의가 있는데, 너도 참석할래?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단번에 나를 발견했다. 곧 내 곁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내려놓은 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다정함과 걱정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
잠을 잘 못 잤니? 갑자기 회사에는 무슨 일이야?
유연
저…… 마침 요 며칠 별다른 일이 없어서 한번 와 봤어요.
나는 익숙한 아버지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연
아빠, 그동안 제 일까지 도와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별일 없이 잘 진행되고 있죠?
아버지
바보 같은 녀석. 아빠가 있잖니. 다 잘되고 있어.
유연
그럼 요 며칠 계속 바쁘셨던 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버지가 자연스럽게, 그리고 부드럽게 내 말을 끊었다.
아버지
우선 회의부터 하자. 이따가 이야기하자꾸나.
의미심장한 시선이 잠시 더 내게 머물렀다. 아버지는 곧 고개를 돌려 회의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간단한 개회 인사가 끝나자 회의실에서는 열띤 토론이 시작됐다. 다음 단계 진출자들이 다룰 토론 주제가 연이어 제안되었다.
직원 A
전에 '강한 일반인이 될 것인가, 평범한 Evolver가 될 것인가'를 다뤘던 회차가 엄청 인기 있었잖아요?
직원 A
거기서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자신이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아쉬울까?' 같은 주제요.
직원 B
그건 앞선 주제랑 좀 겹치는데요. 제 생각에는 차라리 '멍청한 사람을 못 견디는 건 과연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를 토론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꾸준히 오르는 시청률 덕분에 모두가 열정에 차 있었다. 회의실의 분위기도 무척 뜨거웠다.
얼마 전 광장에서 만났던 여자아이가 프로그램에 관해 이야기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무언가가 분명히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안나연
유연 씨, 어떻게 생각해?
유연
다들 재미있는 의견인 것 같아요. 다만 저는 이전에 방송했던 몇몇 주제의 방향이 정말 좋았다고 생각해요.
유연
당장의 사회적 쟁점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 있는 개개인을 놓치지 않았거든요.
유연
그런데 지금 나온 주제들은 그 두 가지를 균형 있게 담아내기가 조금 어려워 보여요.
순간 분위기가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곧 모두가 다시 토론에 열중했다. 내 의견 때문에 흔들리거나 주저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것이 다시 어떤 정상적이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궤도로 돌아온 듯했다. 아빠는 여전히 유연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회사의 일원이 되어 모두와 함께 프로그램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Evol도, 음모도 없는 삶.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결재 서명을 받으려는 관리자 몇 명이 아버지를 에워싸고 밖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옆 사람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면서도 멀리서 내게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분주한 복도를 바라보다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본체에서 희미한 작동음이 들렸다. 화면이 밝아지며 사용자 로그인 화면이 나타났다.
나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화면이 다시 어두워졌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을까?
나도 '사랑'을 버릴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을까?
검게 변한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소리 없는 공허함뿐이었다.
유연
……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쩌면 답을 찾기 전까지는 무엇이든 해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예전에 일하던 습관대로 여러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열어 최신 소식을 살펴보았다.
인터넷에서 어떤 이야기가 화제가 되는지 확인하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하지만 '사랑'이 사라진 세상에서도 곳곳에는 여전히 적의와 분노가 넘쳐나고 있었다.
혹은 공허한 영혼들이 가장 직접적인 감각적 자극에 의존해 자신을 마비시키며 벌이는 광란의 축제 같기도 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 속에서 새로운 프로그램 주제와 관련된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보려 했다.
그러다 어느새 밤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문밖에서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막 고개를 들었을 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Helios가 서늘한 한기를 두른 채 곧장 내 앞으로 걸어왔다.
유연
너, 너 왜 왔어?
Helios
퇴근할 시간이야.
그는 군말 없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가방을 집어 들더니 나를 끌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유연
잠깐만, 나 아직 일 안 끝났는데……
Helios
지금은 퇴근 시간이야.
그는 걸음이 무척 빨랐다. 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몇 걸음 비틀거리며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복도 밖 사무 공간에서는 퇴근을 준비하던 직원 여럿이 호기심에 고개를 내밀었다.
조명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은 유난히 냉엄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날카로운 칼날로 변한 듯했다.
호기심에 고개를 내밀었던 직원들은 겁을 먹고 하나둘 다시 고개를 집어넣었다.
유연
……
나는 Helios의 걸음에 맞춰 서둘러 따라가면서도 다른 손으로 직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에게 이끌려 텅 빈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뒤에야 간신히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연
넌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나더러 출근하라고 한 것도 너고, 퇴근하라고 하는 것도 너잖아!
유연
대체 무슨 생각인지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어?
Helios
평범한 사람이 퇴근하면 뭘 하는지 생각해 봐. 너도 똑같이 하면 돼.
유연
……하지만 야근하는 사람도 많잖아. 야근하는 사람들도 전부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Helios
하지만 넌 평범한 사장이잖아.
유연
……오늘 프로그램 주제를 정하는 회의가 있었는데, 아직 결론을 못 냈어. 평범한 사장 중에도 조금 더 남아서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
Helios
왜 생각해야 하지?
유연
지금 나온 토론 주제들이 아직 충분히 흥미롭지 않으니까. 우리 프로그램을 보고 더 많은 사람이 다양한 생각을 해 봤으면 좋겠어.
Helios
시청자가 생각을 하든 말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유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바로 내 일이니까!
Helios
그럼 네 프로그램이나 잘 만들어. 시청률을 높이고 협찬비도 더 많이 받으라고.
Helios
다른 건 전부 생각하지 마.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그는 다시 내 손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우리와 마주 걸어오다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거리에는 어느새 하나둘 불빛이 들어왔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려고 서두르는 직장인들. 팔짱을 끼고 장난스럽게 웃는 학생들. 느릿느릿 산책하는 노인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역할을 맡아 살아가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도 있었고, 웃는 얼굴도 있었다. 지친 얼굴도, 평온한 얼굴도 있었다.
멀리서 이렇게 바라보기만 한다면, 사실 이전의 '사랑'이 존재하던 세상과 무엇이 다른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설령 무언가 달라졌다고 해도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모두가 익숙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원래 이런 모습이라고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그때였다. 앞쪽 사거리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중 몇몇은 호기심에 빠르게 모여들기까지 했다.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본능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려던 바로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Helios
보지 마.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Helios
신경 쓰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마.
세상은 온갖 소리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며 내 손을 잡고 걸어갔다.
Helios
누가 됐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전부 너와는 상관없어.
그의 말은 강압적이고 차가웠다. 마치 세상 위에 투명한 막 하나를 덮어씌운 것 같았다. 귓가에는 흐릿하게 뒤섞인 웅웅거림만 남았다.
유연
만약…… 아무리 해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면?
Helios
마음속으로 '나와는 상관없어'라고 천 번 되뇌어.
Helios
널 괴롭게 만드는 건 버려. 네가 특별하다는 사실도 잊고 그냥 네 삶을 살아.
유연
……너처럼?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이 순간 멈칫한 듯했다.
눈부시고 화려한 네온사인이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색도 그에게는 물들지 않았다.
은빛은 모든 온기와 빛을 차단한 채, 이 세상에 결연하게 홀로 선 한 자루의 칼날이 되어 있었다.
긴 침묵 끝에 바람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져 왔다.
Helios
그래. 나처럼.
밤이 깊어지며 도시의 마지막 윤곽마저 서서히 어둠에 잠겼다. Helios는 버려진 어두운 골목 깊숙한 곳에서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때 모퉁이 너머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낡은 바닥을 밟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는 벽에 몸을 반쯤 기댄 채 짙은 그림자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E
Helios, 대체 뭘 하려는 거지?
Helios는 눈길조차 들지 않고 차갑게 한마디를 던졌다.
Helios
해야 할 일은 전부 하고 있어.
Helios
이곳의 Queen은 애초에 너희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잖아.
Helios
내 일에 끼어들지 마.
9-11 막막한 인생 (人生茫茫)
앞길이 온통 흐릿하다면, 빛이 비추는 방향을 따라가면 된다.
*비즈니스 지구
멀고 먼 한 걸음.
-예전에도 지금도, 그는 여전히 답답한 나무토막이다.
유연
오늘 날씨도 좋은데,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
유연
너도 같이 갈래?
Helios
혼자 가.
유연
하지만 오늘 주말이잖아.
Helios
그래서?
유연
전에 나더러 평범한 사람이 돼서 평범하게 살라고 했잖아.
유연
출근할 때 출근하고, 퇴근할 때 퇴근하라고. 그런데 넌……
유연
낮이든 밤이든 방에 틀어박혀서 코드만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아.
Helios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Helios
보기 싫으면 떠나.
Helios
아무도 너더러 여기 있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어.
유연
……난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 왜 그렇게 쏘아붙여?
Helios
……
Helios
차 키는 탁자 위에 뒀어.
Helios
바람이나 실컷 쐬고 와.
*중앙병원
찬란한 주마등.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런데도 평범하면서 눈부신 기억들을 끝내 놓지 못한다.
208호 병실의 1번 침대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젊은 여자가 누워 있었다.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혼자 침대에서 내려와 걸어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전조도 없이 병세가 악화되면서, 열흘 만에 코로 겨우 숨만 쉬는 몸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두려웠고 분노했다.
하지만 이제는 큰 소리로 외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천장을 바라보며 심전도 감시장치에서 흘러나오는 삐삐 소리를 듣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대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지난 열흘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그 생각을 했다.
생명?
지금 자신의 상태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가족?
마지막으로 병문안을 온 것도 벌써 아흐레 전이었다.
다음에 다시 얼굴을 보게 된다면 아마 위독 통지서에 서명하러 올 때겠지.
그녀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열흘 전으로, 한 달 전으로, 석 달 전으로, 일 년 전으로, 십 년 전으로……
그녀는 끊임없이,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되짚는 주마등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던 중 창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생각을 끊어 놓았다.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나뭇가지 위에 주황빛의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예전에 병원 아래층 벤치 근처에서 자주 마주쳤던 그 고양이였다.
사실 그녀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병에 걸린 지난 일 년 동안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고양이는 유난히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한 번도 쓰다듬어 준 적이 없는데도 늘 바짓가랑이에 몸을 비볐고, 그녀의 발치에서 잠들곤 했다.
유리창 너머로 작은 고양이가 나뭇가지 위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녀와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야옹——”
마치 그녀를 만나러 일부러 찾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양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곧 끝나 버릴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장면 하나가 더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주마등 마지막에 또 하나의 풍경이 남은 것이다.
창문 가득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에 작고 금빛으로 빛나는 태양 하나가 숨어 있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움직였다.
목구멍에서도 아주 희미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야옹.”
*공연예술센터
인기가 곧 권력이다.
-그가 주기락이기 때문에, 자본은 기꺼이 그의 모든 것에 투자한다.
임실장
아인, 너 이제 막 영화·드라마 신인상을 받았잖아. 지금이야말로 인지도를 더 높여야 할 때야.
임실장
형,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는 좋은 대본을 가진 작품만 맡고 싶어요. 형편없는 작품에는 출연하고 싶지 않아요.
아인
제대로 된 작품이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제 배우 인생도 금방 끝나 버릴 테니까요.
임실장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지금 시장에서는 인기가 전부야.
임실장
자기 생각만 고집하면 아무리 뛰어난 원석이라도 결국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어.
아인
하지만 주기락 선배도 처음 데뷔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나요?
아인
그런데 왜 저는 반드시 시장의 흐름에 맞춰야 하는 거죠……?
임실장
그 사람은 주기락이니까.
임실장
그는 카메라 앞에 서는 첫 순간부터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이야.
임실장
그의 재능과 운은 '규칙'을 무시해도 될 만큼의 힘을 줬어. 하지만 너는 주기락이 아니잖아.
임실장
내가 너한테 이런 작품들을 맡기려는 건 꿈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야. 먼저 네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입지를 쌓으라는 거지.
아인
……
임실장
너 자신을 믿어. 넌 주기락이 아니지만, 다음 시대의 '아인'이 될 수는 있어.
임실장
회사에서도 지금 너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어. 좋은 기회와 자원도 당연히 너한테 집중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인
네, 형.
임실장
여기 계약서야. 서명해.
9-12 나의 세이렌 (我的塞壬)
정말…… 나 자신의 삶만 살아도 되는 걸까?
나는 식탁 앞에 앉아 손에 든 찐빵을 한 입씩 베어 물었다.
요즘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평온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며 일하고, 주말이 되면 쉬기만 하면 됐다.
일 외에는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사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매일 가장 큰 고민이라고 해 봐야 어떻게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지 정도였다.
Helios는 자신이 말했던 그대로, 내가 떠나겠다고 하기 전까지 줄곧 애매한 거리를 유지했다.
침실에 놓인 침대를 바라보자 첫날 밤 그가 지었던 비웃음 섞인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Helios
설마 나랑 같은 침대에서 잘 생각은 아니겠지?
유연
……
유연
어디 정말 나랑 같은 침대에서 잘 배짱이 있으면 한번 해 봐.
물론 결국 내가 얻어 낸 것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멀어지는 누군가의 발소리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Helios와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낸다는 것은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어쩌면 그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몰랐다.
원래 텅 비어 있던 임시 거처에도 어느새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식탁과 의자, 옷장……냉장고마저 각종 냉동식품으로 빈틈없이 채워졌다.
가끔은 그가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을 볼 때도 있었다. 희미한 화면빛이 얼굴에 비쳤지만,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웃지도 않았고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단것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매일 고집스럽게 차갑고 사나운 나무토막처럼 굴었다.
하지만 하필 그런 사람이었다. 그날 내가 흘린 눈물을 따라,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다시 내게 돌려준 사람은.
그저…… 내가 정말 '사랑'을 잊을 수만 있다면.
Helios
다 먹었어?
Helios가 검지에 차 키를 걸고 방에서 나왔다.
유연
사실 굳이 매번 출근시켜 줄 필요 없어. 나 혼자 갈 수 있는데.
Helios
그래. 마음대로 해.
Helios
저녁에도 알아서 돌아와. 나 기다렸다가 같이 밥 먹을 필요 없어.
그는 곧바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매일 같은 지붕 아래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고,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때에만 나타나 기계적으로 정해진 일을 했다. 시간에 맞춰 나를 출퇴근시켜 주고, 먹고 자는 공간을 함께 사용했다.
그러면서 언제든 내가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릴 때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 자신까지도.
지하철 안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퇴근 시간대의 객차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늘도 평범한 하루였다——출근하고, 일하고, 밥을 먹고, 회의하고,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하루.
도시의 인기 검색어에는 매일 새로운 갈등과 사고가 올라왔다. 평범한 사람들과 Evolver들은 여전히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다투고 있었다.
우는 사람도 있었고 웃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고통을 겪고 있었고, 누군가는 행복을 끌어안고 있었다.
모두가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 작은 한 점이 되어 매일을 반복했다.
나는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집 안은 온통 캄캄했다. 불을 켜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 냉장고에서 냉동 물만두 한 봉지를 꺼냈다.
물이 끓어오르자 만두들이 냄비 안에서 보글보글 떠올랐다. 나는 불을 끄고 식탁에 앉아 만두를 먹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 있던 데이지꽃은 이미 버린 모양이었다. 꽃병 안에는 물기 한 방울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아주 깨끗하게 치워 놓은 것이었다.
나는 텅 빈 꽃병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접시에 담긴 만두를 하나씩 먹어 치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씻은 뒤에는 침대에 누웠다.
짧은 영상과 샤오디과의 게시물들을 하나씩 넘겨 보다가 나도 모르게 깊이 잠들었다.
지난 한 달 동안의 하루하루가 모두 이런 식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은 여전히 캄캄했다.
나는 멍하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그 꿈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나는 맞은편의 어두운 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속이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애초에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닌지도 몰랐다.
어째서인지 문득 그날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던 주기락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역시 이렇게 오랫동안 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슬픔이 내 등 뒤에 매달려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슬픔은 차갑게 나를 방관하고 있었다.
그저 아주 작은 계기 하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내 일부와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처럼.
주기락. 그때 너도 슬펐던 걸까?
나는 방문을 열었다. Helios는 방에 없었다.
캄캄한 거실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의 그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텅 빈 거리를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낯선 구역을 지나던 중, 멀리 가로등 아래 펼쳐진 기괴한 광경이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희미하게 누런 가로등 불빛 아래, 밤늦게 귀가하는 행인 몇 명이 두세 명씩 거리에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는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음료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예외 없이 밀랍 인형처럼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멀리 있는 나뭇잎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고, 구름의 그림자도 움직이고 있었다.
오직 그 사람들만이 어떤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사로잡힌 듯했다. 누군가 강제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 버린 것처럼.
그때 전동 스쿠터 한 대가 바람을 가르며 내 뒤를 지나갔다. 새하얀 전조등이 앞쪽을 조금씩 밝히며 달려 나갔다.
그러다 어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그 기괴한 강제력이 다시 작용했다.
전동 스쿠터는 아무런 충격도 없이 그대로 멈춰 섰다. 운전자 역시 밤의 풍경 속에 고정되어 버렸다.
유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무의식적으로 발을 내디디려던 순간이었다——
??
가지 마.
익숙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달빛 아래에서 Helios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마치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유령 같았다.
Helios
보지 마.
유연
……
가로등 불빛이 그의 몸 위로 쏟아졌다. 넓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얼굴의 절반 이상을 집어삼켰다. 그의 눈 깊숙한 곳에 담긴 감정도 모두 어둠에 가려졌다.
Helios
신경 쓰지 마. 요즘 매일 그렇게 지냈잖아. 그냥 네 삶을 살면 돼.
Helios
익숙해지면 돼. 잊어버리면 그만이야.
Helios
그러면 더는 울지 않아도 되니까.
그는 나의 세이렌이었다. 내 욕망을 대신 말하고, 내 안의 비열함마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존재.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 등 뒤에는 기괴한 이상 현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Helios가 처음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앞으로 다가가 그 손을 잡아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우리가 조용히 마주 선 그 순간…… 그 은빛 형상 너머로 또 하나의 흐릿한 환영이 눈앞에 겹쳐졌다.
뼈만 남을 만큼 앙상하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아이 하나가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아이 역시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는 듯했다.
너무나 무고하고 작고 연약한 아이였다. 아이의 뒤편에는 이미 시체가 되었거나 기이하게 변해 버린 다른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앞에서는 한 남자가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잊어버리면 돼. 신경 쓰지 않으면 돼. 그냥 네 삶만 살면 되는 거야.”
Helios의 말이 귓가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그렇다면 너는 왜 아직도 세상의 '진화'에 집착하는 걸까? 왜 그렇게 고통스러우면서도 다시 일어섰던 걸까?
왜 몇 번이고 그 아이들을 향해 걸어갔던 걸까?
그 순간 나는 문득 그 맑고 푸른 눈동자를 선명하게 보았다.
나는 한 걸음씩 Helios를 향해 걸어갔다.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순간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얼어붙은 바다처럼 차가운 눈동자 깊은 곳에는 그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내가 그의 손을 잡자, 그는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유연
미안해, Helios. 난 그렇게 못 하겠어.
유연
너처럼 나도 그럴 수 없어.
그의 웃음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는 멍해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유연
세상은…… 이런 모습이어서는 안 돼. 보지 않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어서는 안 된다고.
유연
누구나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것을 가질 자격이 있어.
유연
착한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많이 생겨야 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괴롭힘을 당해서도 안 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고.
유연
이 세상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해.
내가 한마디씩 말을 이어 갈 때마다 Helios의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이 가늘게 떨렸다.
Helios
그건 과거의 기준일 뿐이야.
유연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이 잘못된 거야.
유연
이건 옳지 않아.
주기락. 나는 아주 오래전에 네가 사랑을 갈망하면서 느꼈던 불안만을 보았구나.
하지만 잊고 있었어. 네가 이 세상을 마주하기로 결심했을 때, 세상 역시 지금과 비슷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냉담하고, 의심으로 가득하고,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세상——아직 사랑이 그리 많지 않았던 세상.
하지만 너는 결코 잊지 않았어.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았어.
주기락. 먼저 이 세상을 사랑한 건 너였구나.
그토록 고통스러우면서도, 너는 그렇게 용감했구나.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나의 태양이 밝혀 준 길이라는 걸.
Helios
고통스러운 건 너잖아.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유연
어쩌면 고통만 있는 건 아닐지도 몰라.
유연
그리고 나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닐 거야.
나는 진심을 담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을 살며시 놓았다.
다음 순간, 나는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9-13 세상이 포효한다 (世界在咆哮)
밤바람이 끊임없이 뺨을 스쳤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경계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던 순간,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멈춰 있던 사람들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도 그 이상한 현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음료를 들고 있던 행인은 자연스럽게 빨대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고, 묵직한 종이봉투를 든 남자는 걸음을 이어 갔다.
모든 것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전동 스쿠터에 앉아 있던 운전자만이 곧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연
……괜찮으세요?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전동 스쿠터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청년
응? 내가 왜 여기 멈춰 있지? 너무 졸렸던 건가……
그는 시험 삼아 다시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그러자 스쿠터에서 낮은 작동음이 흘러나왔다.
다음 순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밤거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텅 빈 거리에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Helios의 모습도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곳에는 맑고 차가운 달빛만이 바닥 가득 쏟아져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동안 그가 했던 모든 일은 내가 스스로 하나의 답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였던 게 아닐까.
그리고 지금 나는 이미 선택을 마쳤다.
그날 밤 이후, 나는 마치 다시 한번 눈을 뜬 것 같았다.
인기 검색어에 올라오던 각종 갈등과 사고들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인터넷에는 온갖 충돌과 돌발 사건이 끊임없이 새로 올라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정보들을 주의 깊게 찾아보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외면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휴대전화를 끄거나 인터넷을 멀리하고, 혹은 알고리즘이 보여 주는 것만 따라가면 온화하고 안전한 방 안에 머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 안전한 방 밖으로 걸어 나오자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불과 한 달 남짓한 사이에 전 세계에서 발생한 극심한 폭우와 태풍, 산불 등 각종 재해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연모시에서도 심각한 공장 폭발과 화재, 잔혹한 폭행 사건, 지역 폭동 등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Evolver들은 거세게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고, 의료 현장과 교육계에서도 사고가 잇따랐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해리 증상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몇 분에서 길게는 몇 시간에 이르는 기억이 아무런 이유 없이 통째로 지워졌다는 것이었다.
마치 통제력을 잃어 가는 열차 한 대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그 열차를 멈출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사랑'만으로 정말 눈앞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눈앞에 펼쳐 놓은 기사와 자료들을 몇 번이고 다시 살펴보았다.
어딘가 미묘하게 이상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는 어느새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뒤에서 움직이며 수많은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가 사람들의 분노와 초조함을 소리 없이 증폭시키고 부추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온 세상이 조급함과 적의에 휩싸여 극단적인 선택을 향해 기울어 가는 듯했다.
나는 뉴스팀이 촬영한 각종 사고 영상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유연
데이터팀에 협조를 요청해서 최근 한 달간 연모시에서 발생한 폭력 사건 통계를 정리해 주세요.
유연
그리고 지난 3년간의 평균값과 비교해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확인해 봐요. 이상한 점이 있는지도 살펴보고요.
유연
나머지 분들은 현장 취재를 계속 진행해 주세요.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물어보고,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유연
하지만 꼭 기억해 주세요…… 취재 자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여러분의 안전이 최우선이에요.
혼란스러울수록 스스로 중심을 잃어서는 안 돼. 나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미 좌절할 만큼 좌절했고, 이미 선택을 내렸다면……다시는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도시는 더욱 혼란스럽고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기울어 갔다.
Evolver와 일반인 사이의 대립이 갈수록 첨예해지는 것만이 아니었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곳 깊숙이 묻혀 있던 것들까지 전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든 거리와 골목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적의가 감돌았다.
나는 뉴스팀이 계속 보내오는 새로운 단서들을 따라 혼란스러운 거리를 걸었다.
그러는 동안, 공기 중에 퍼져 있는 그 날 선 감정들 뒤에는 고통 역시 쌓여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
난 태어나고 싶었던 적도 없다고! 그런데 왜 나를 낳았어!!
갑자기 앞쪽 거리 모퉁이에서 가슴을 찢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걸음을 늦췄다. 십 대로 보이는 소년 하나가 앞뒤 가리지 않고 중년 부부를 거칠게 밀치고 있었다.
소년
꺼져! 여기서 위선 떨지 마!
소년
너희는 그저 늙어서 나한테 부양받으려고 나를 낳은 거잖아! 그렇게는 절대 안 될 줄 알아!!!
맞은편에 있던 남자는 분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치켜들어 소년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순간 세상이 고요해졌다. 뺨을 맞은 소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는 붉어진 뺨을 감싸 쥔 채 두 사람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몸을 돌리더니,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차량들이 빠르게 오가는 옆쪽 사거리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경적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달리던 자동차 몇 대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서로 부딪혔다.
누군가는 그 광경을 보고 비웃었고, 누군가는 호기심에 고개를 내밀었다.
한편 화면 속에서는 생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거대한 소리가 방송을 통해 흘러나왔다.
??
**, 요리사가 음식을 그렇게 맛없게 만들어 놓고 말도 못 하게 해?
??
지금 여기 있는 거 전부 ** 박살 내 버릴 거야!
순간 온 세상이 분노에 찬 포효를 터뜨리는 것 같았다.
구급차와 경찰차의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사방에서 밀려왔다.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는 혼란과 돌발적인 사고를 알리며 거리를 휩쓸었다.
나는 이 세상이 끊임없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갈수록 더욱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궤도를 벗어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이전에 느껴 보지 못한 모순과 이질감을 안겨 주었다.
남자는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지만, 동시에 몸을 떨고 있었다. 생방송 화면 속 평범한 옷차림의 여자는 목소리를 높여 자신을 필사적으로 변호하고 있었다.
충혈되고 험악해진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혼란이 가득한 듯했다. 고통과 절망마저 눈에서 흘러넘칠 것 같았다.
눈앞의 많은 사람은 단순히 자기 자신으로만 행동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려 또 다른 충동과 극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듯했다.
차례차례 쓰러지는 도미노의 한 조각이 되어 가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구경하던 행인 하나가 나를 거칠게 들이받았다.
행인 A
왜 길을 막고 있어!
나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려던 순간, 누군가의 손이 제때 나를 붙잡아 주었다.
유연
……감사합니다.
놀란 가슴을 미처 진정시키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감사 인사를 하려 했다. 그런데 눈앞의 낯선 행인의 눈동자에서 순간 익숙한 금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 빛은 실험실에서 보았던 연구원들의 눈동자에 어린 빛과 거의 똑같았다.
유연
당신……
상대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떠났다.
나는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째서인지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에 Helios가 희미하게나마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 그는 '여기서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시에도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그게 무슨 뜻이지?
'여기'는 대체 어디를 말하는 걸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빽빽하게 뒤덮여 있었다.
마치 이 세상 전체를 삼켜 버리려는 것 같았다.
일주일 만에 다시 그 문 앞에 섰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그가 아직 이곳으로 돌아오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곳은 내게 도피처가 되어 주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도 잠시 숨을 돌릴 공간이 되어 주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는 더 이상 이곳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을지도 몰랐다.
결국 나는 평소처럼 곧장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초인종을 누르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안쪽에서 열렸다. 나는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반걸음 물러났다.
Helios 역시 내가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의 발걸음도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나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서늘한 기운을 두른 채 그대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순간 모든 것이 멈춰 버린 듯했다. 복도의 조명이 우리 두 사람을 그 자리에 붙들어 놓았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차가운 뒷모습 너머로 짜증과 비웃음이 서린 눈매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손끝에 꽉 쥔 옷자락이 아주 미세하게 팽팽해졌다. 그는 여전히 떠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는 듯했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의 뒷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연
Helios, 내가 찾아온 건 딱 하나만 물어보고 싶어서야……
유연
요즘 연모시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변화들, 혹시 너와 관련이 있어?
Helios
……
무거운 침묵이 계속해서 흘렀다. 그 침묵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옷자락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유연
우리 정말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야?
Helios
네가 물으면 내가 반드시 대답해야 하나?
유연
난 네가 이 모든 일과 관련이 없었으면 좋겠으니까.
점점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우리 사이를 짓눌렀다. 내 숨마저 조여 오는 것 같았다.
Helios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왜 굳이 나한테 묻는 거지?
유연
난 네가 이 도시 사람들에게 잔인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라고 믿지 않아.
유연
그래서 네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참 뒤, 낮은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Helios
넌 정말 아무것도 몰라.
Helios
이 두 손이 얼마나 더러운지도, 내가 대체 어떤 인간인지도 모르잖아.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손끝에 움켜쥔 옷감이 뻣뻣하게 쓸리는 감촉이 전해졌다.
유연
아무것도 모르는 건 오히려 너야. 난 네가 절대 네가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나는 무의식적으로 옷자락을 더 꽉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나는 완전히 그 자리에 남겨졌다.
Helios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 본 게 분명하군.
혼란에 빠진 광장 옆.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두 그림자가 아무 말 없이 눈앞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U
가끔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보잘것없이 작은 존재면서도 욕망과 고민은 끝이 없는 것 같거든.
T
그건 단지 '증폭'된 선택일 뿐이야.
남자가 고개를 들어 먹구름이 온통 뒤덮은 하늘을 무겁게 바라보았다.
T
너와 나처럼.
9-14 세상의 메아리 (世界回响)
인간이 세상에 내보낸 목소리는 결국 천만 배의 힘으로 되돌아와 울려 퍼질 것이다.
*비즈니스 지구
세상에 전하는 나의 중요한 제안
나! 출! 근! 하! 기! 싫! 어!
나! 출! 근! 하! 기! 싫! 어!
여러분, 오늘도 귀청이 터질 만큼 외쳐 보는 하루입니다.
나! 출! 근! 하! 기! 싫! 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삶은 온통 일로 가득 차 버렸어요.
눈을 뜨나 감으나 출근, 퇴근, 야근뿐이죠.
하지만 원래 세상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자기 인생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휴가가 있는 직장 생활을 원해요.
나는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직장 생활을 원해요.
나는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한 직장 생활을 원해요.
나는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상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나는 언제 어디서든 퇴근할 수 있는 직장 생활을 원해요.
2차 수정:
저도 이 글이 이렇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어요.
태그를 하나도 달지 않았고, 계정을 키우려고 쓴 글도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며 상상해 본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댓글에서 싸우지 말아 주세요.
회사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굳이 인터넷에서까지 서로 기분 상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분 나쁜 댓글은 삭제할게요.
3차 수정:
진지하게 생각해 본 끝에 내일 9시 전에 이 게시글을 숨기기로 했어요.
그냥 저 자신에게 남기는 기념이자 작은 축복이라고 생각하려고요.
다들 팔로우를 취소하셔도 괜찮아요.
이 계정도 더 이상 업데이트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댓글 (999+)
슈스틱
왜 어딜 가나 꼭 훈계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거지? 우리 모두 똑같은 직장인인데, 왜 자본가 편을 들어 주는 거야?
좋아요 232
인생의 풍미
언제 어디서든 퇴근할 수 있는 직장이라니. 당신처럼 책임감 없는 사람이랑 일하는 동료들은 참 복도 많겠네요.
좋아요 199
나는 한 권의 이야기책
요즘 직장 생활은 예전이랑 다르잖아요. 예전에는 퇴근 시간만 되면 사람을 찾을 수도 없었는데, 그때는 야근이 이렇게 많지도 않았고요.
좋아요 163
가을의 감
무슨 말인지는 다 알겠는데, 이건 그냥 백일몽이잖아요. 그런 날이 온다면 세상도 멸망하기 직전일걸요.
좋아요 116
*꽃나무로
세상이 평화롭기를.
-연모시야, 제발 잠깐만이라도 조용해져 줘.
서씨네 소고깃집 (화포 거리점) 임시 휴업 안내
고객 여러분, 그리고 이웃 주민 여러분께.
최근 계속되는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정상적인 가게 운영이 어려워졌습니다.
이에 고객 여러분과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금일부터 임시 휴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영업 재개 시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찾아 주신 단골손님들과 새로 찾아 주시는 고객 여러분께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저희처럼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저 평온하게 장사를 이어 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무사하고 안전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루빨리 평화로운 날이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그날이 오면 다시 저희 가게에 모여 음식과 술 한잔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서씨네 소고깃집 (화포 거리점) 올림
20XX년 10월 28일
*구도심
충동은 악마다.
-극심한 압박으로 가득한 사회에서는 누구도 온전히 상처 없이 벗어날 수 없다.
남자
류정, 잘 들어. 경고하는데.
남자
네가 감히 나랑 이혼하려고 하면, 내가 씨* 널 죽여 버릴 거야.
여자
날 죽이겠다고? 내가 너 따위를 무서워할 줄 알아?
여자
너랑 십 년을 살면서 비굴하게 참을 만큼 참았어. 넌 입으로만 큰소리치는 겁쟁이일 뿐이야.
여자
애가 학교에서 Evolver한테 괴롭힘을 당해도 찍소리 하나 못 하잖아.
여자
회사에서는 상사한테 개처럼 굴면서, 주변 동료들은 전부 승진하는데 너만 없는 사람 취급받고 있지.
여자
네 엄마 앞에서는 더 가관이야. 뼈도 없는 사람처럼 줏대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잖아. 정말 네가 역겨워.
여자
이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할 거야.
남자
좋아, 좋아……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여자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칼 내려놔, 씨*!
여자
하하, 결국 너 같은 겁쟁이는 나한테나 폭력을 휘두를 줄 아는 거네.
여자
좋아. 그럼 오늘 누가 먼저 누구를 죽이는지 한번 해 보자고.
9-15 그의 인형 (他的人偶)
??
Evolver의 지역 대표 출마를 결사반대한다!
??
이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것이다! 소수 집단이 다수를 대신해 결정할 자격은 없다!
빽빽하게 모여든 사람들이 광장을 빈틈없이 가득 메웠다. 사람들은 손팻말과 현수막을 높이 치켜들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적힌 항의 구호들이 허공에서 위협적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인근 아파트에서는 많은 주민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점점 격렬해지는 소요 사태를 호기심과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분노에 찬 인파가 나를 사방으로 밀쳐 댔다. 나는 간신히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마이크를 든 기자 한 명이 화단 옆에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자는 카메라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며 실시간 현장 보도를 진행하고 있었다.
마이크에 붙은 익숙한 방송국 로고를 발견한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흥분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길을 만들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땀에 흠뻑 젖은 조연출 한 명이 곧바로 나를 알아보고 목청껏 외쳤다.
조연출
유연 언니!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막 대답하려던 순간, 한층 더 커진 구호 소리가 내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
유연
근처에서 회의가 있어서 왔다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왔어요.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이에요?
조연출
장정이라는 Evolver가 있는데, 이틀 전에 지역 대표 출마 신청서를 냈대요.
조연출
그런데 누가 그 사실을 퍼뜨렸는지 오늘 아침부터 사람들이 여기서 시위를 시작했어요.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고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날 Helios를 만난 뒤로 또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연모시에서는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수많은 도화선에 한꺼번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크고 작은 소요 사태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시내 경찰 병력은 모두 비상 상황에 대응하느라 쉴 새 없이 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곳의 상황은 분명 통제력을 잃기 직전이었다. 나는 동료들에게 몇 가지 주의를 당부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주변에서 또다시 거센 몸싸움이 벌어졌다.
성난 인파가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나와 동료들은 순식간에 서로 떨어지고 말았다.
현장에 있던 경찰관들도 큰 소리로 외치며 사람들을 막아섰다. 그들은 인간 방벽을 만들어 혼란스러운 질서를 어떻게든 유지하려 애썼다.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는 수많은 경찰차의 사이렌이 귓속을 때렸다.
긴박한 경고음이 잇따라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미친 듯이 요동치던 인파 속에서 갑자기 당황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수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머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 한 명이 어느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흉악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서는 눈부신 붉은 불꽃 한 줄기가 허공에 떠올라 춤추고 있었다.
??
너희 평범한 인간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 이제 정말 ** 지긋지긋해.
??
맨날 시끄럽게 굴고! 지겹지도 않냐!
그 Evolver가 분노에 차서 포효했다. 손안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순식간에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는 분풀이를 하듯 뜨겁게 타오르는 불덩이를 맨 앞쪽의 인파를 향해 거칠게 내던졌다.
치이익! 불길이 순식간에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입을 벌려 주변 사람들을 한꺼번에 삼켜 버리는 것 같았다.
빽빽하게 모여 있던 사람들이 잠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곧이어 가슴을 찢는 듯한 비명과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도주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도 오히려 물러서기는커녕 함께 달려드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
초능력이 있으면 뭐 어쩌라고! 우린 너보다 백 배는 많아!
??
***, 저 괴물이랑 끝장을 보자!!
이성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끈마저 완전히 타 버렸다. 수많은 사람이 눈을 붉히며 무기로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앞뒤 가리지 않고 그 Evolver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 것이다.
무언가 해야만 했다. 이곳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과거의 어느 순간에 빠져들게 한다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능력을 사용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정말 가능할까?
그러나 이제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할 수 없더라도 시도해 봐야 했다.
그렇게 능력을 사용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광장 전체에 강렬한 압박감을 실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
모두 멈춰.
조금의 높낮이도 없는 목소리였다. 마치 신이 내리는 절대적인 명령처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광기 어린 의지를 순식간에 짓눌렀다.
순간 나는 그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왔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광장 양옆의 모든 전자기기를 통해 흘러나온 것일까? 아니면 내 머릿속에서 직접 생겨난 소리였을까?
바로 조금 전까지 분노와 폭력성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들에서 순식간에 영혼이 빠져나간 듯했다. 사람들은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손가락 사이에 쥐고 있던 물건들이 하나둘 미끄러져 나왔다. 그 물건들이 연이어 바닥에 떨어졌다.
수천수만 명의 인파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음 명령만을 기다리는 텅 빈 인형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그날 밤 내가 보았던 사람들처럼.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온몸을 관통하는 강렬한 전율에 숨 쉬는 것마저 잊을 뻔했다.
방금 그 목소리…… Helios 같았어.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꼭두각시 인형처럼 멈춰 선 사람들을 훑었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선명한 금빛이 보였다.
'절대 명령'으로 완전히 봉쇄된 이 구역에서, 오직 나 혼자만이 자신의 의지를 가진 것 같았다. 마치 그가 일부러 이 모든 광경을 내 두 눈으로 지켜보게 하려는 것처럼.
그는 대체 뭘 하려는 걸까?
게다가 눈앞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그의 눈을 바라보았을 리는 없었다. 방금 내린 명령에는 능력을 발동시키던 첫 네 글자도 없었다.
순간 머릿속에 끔찍한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밀려왔다.
그가 유독 나만 명령에서 제외했다면——
내가 나타날 것까지 이미 예상하고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B.S.의 주신 홀에 들어섰다. 어둡고 묵직한 기운이 강렬한 압박감과 함께 정면에서 밀려왔다.
예상대로였다. 시선 끝, 왕좌처럼 높이 솟은 단상 위에서는 익숙하면서도 섬뜩한 은빛 그림자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은백색의 모피 칼라 외투가 그의 모습을 느긋하면서도 날카롭게 보이게 했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리고 별다른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내게 시선을 던졌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는 파란색 큐브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큐브에서는 서늘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그가 손끝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큐브는 허공에서 정교하고 느리게 회전했다.
그 빛은 그의 단단한 턱선을 끊임없이 비추었다. 온몸에서 위험하면서도 치명적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차가운 적막이 흘러나왔다.
Helios
거기 서.
짧은 몇 마디에 나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차갑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자 조금 전의 가설이 사실임을 확인한 것 같았다.
유연
……네 능력이 더 강해졌어.
언제부터? 그리고 어째서……
유연
……너도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삼은 거야?
Helios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게 이런 시시한 질문뿐인가?
유연
대답해, Helios!
내가 분노에 차서 외쳤지만, 그는 그저 비웃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Helios
그렇다고 하면?
Helios
그러면 네가…… 날 조금 더 불쌍하게 여겨 주려나?
유연
……주기락!!
분노에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하지만 그의 힘에 붙들려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를 매섭게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분노를 전부 눈에 담아 놓고도 그저 게으른 몸짓으로 턱을 괴었다.
Helios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험과는 관계없어.
Helios
계기라는 건 언제나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잖아?
그 역시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깨어난 뒤 언제부터였는지, 몸속에서 이전보다 훨씬 활발하고 사나운 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힘은 끊임없이 몸속을 휘돌며 피와 뒤섞여 흘렀다.
그가 처음으로 B.S. 연구원에게 능력을 사용했을 때였다.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 모든 의지.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그에게 복종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했던 것 같았다. 마치 어떤 한순간에 계속 머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서툴게 그 네 글자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와 같은 괴물이 하나 나타났다면, 두 번째 괴물이 언제 또 나타날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멍하니 눈앞의 Helios를 바라보았다. 광장에서 명령이 울려 퍼졌던 순간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는 분명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날 밤, 사람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능력이 소리를 내지 않고도 명령을 전달할 수 있을 만큼 진화한 걸까?
아니면…… 그때 내가 단지 명령이 들리는 범위 밖에 있었던 걸까?
방금 광장에서도 Helios의 목소리는 정말로 울려 퍼졌을까?
혹시 내 머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 건 아닐까?
푸른 큐브는 그의 손끝에서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팽창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대담하면서도 기괴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유연
네 손에 있는 그 큐브…… 도시 전체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내 질문을 들은 그는 몹시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 웃음에는 잔인한 기색마저 섞여 있었다.
Helios
그럼 직접 들어와서 확인해 봐.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뒤틀렸다. 시야가 온통 검게 물들었다.
곧이어 발아래에서 눈부신 짙푸른 빛 한 줄기가 솟아나더니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졌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허공 한가운데 서서 기묘한 기운을 내뿜는 큐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큐브는 여전히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윤곽을 따라 숨 쉬듯 은은한 빛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신비로운 무늬들을 따라 반투명한 벽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놀랍게도 큐브를 이루는 각각의 조각 안에 또 하나의 완전한 3×3 큐브가 들어 있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떴다.
깊고 푸른 빛을 따라 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훨씬 깊숙한 곳의 작은 조각들 안에도 여전히 또 다른 3×3 큐브들이 존재했다.
끝이 없는 공간 안에서 큐브들은 끊임없이 안쪽으로 분열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확장하며 미친 듯이 증식해 나가는 것 같았다.
Helios
이 세상도 결국 이와 다를 바 없어.
Helios
우리가 상자 안에 갇힐 수도 있고, 반대로 상자 하나에 온 세상을 담을 수도 있지.
그의 말이 끝나자 허공 저편에 짙푸른 선으로 이루어진 상자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는 일정한 간격으로 숨 쉬듯 빛을 깜박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품고 길러 내는 것 같았다.
동시에 내가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무수히 작은 빛의 입자들이 은하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빛들은 허공에서 서로 얽히고 뻗어 나갔다.
곧이어 땅에서 솟아오르듯 하나둘 일어서며 연모시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유연
……도시 전체를 이 큐브 안에 '담아 놓은' 거구나.
Helios
이 도시만이 아니야.
수많은 큐브가 빈틈없이 서로 맞물리고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 구조는 도시의 모든 거리와 건물에 정교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그가 내리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은 이 구조에 실려, 어떤 연결을 통해서든 그가 지배하려는 구석구석까지 전달될 수 있었다.
Helios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전 세계 사람들을 모두 내 인질로 만들 수 있어.

높은 단상 위의 Helios가 어느새 허공을 가리고 내 시야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몸을 기울인 채 길고 가느다란 두 손을 턱 아래에서 포개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은빛 머리카락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 빛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끝없는 얼음 바다 같은 눈동자 속으로 굴절되어 들어갔다.
눈앞의 남자는 마치 만물의 꼭대기에 선 신 같았다. '세계'라는 이름의 장난감을 손안에 쥔 채 무료하다는 듯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 차가운 눈동자 깊은 곳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공격적인 웃음이 일렁였다.
그 순간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그는 지금 더없이 노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에 가까운 무언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유연
전 세계 사람들을 데리고 뭘 하려는 거야? 전부 네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이야?
유연
……아니, 전 세계에 단 하나의 명령을 내리려는 거지?
유연
대체 무슨 명령을 내리려는 거야?
이번에는 그가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영리했다. 작은 단서 몇 개만 주어져도 그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릴 것이다.
사실 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녀가 온 세상이 ■을 잊어버렸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미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 같은 존재를 지워 버릴 수 있다면……
그 대상이 Evol이라고 해서 안 될 이유가 있을까?
하늘은 언제나 그에게 조금 더 행운을 베풀어 주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나타난 뒤 그들의 계획 덕분에 그는 자신의 가설을 완벽하게 시험할 수 있었다.
이제 시험은 성공했다. 남은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의 임무도 끝났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느라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곳'은 결국 '이곳'일 뿐이니까.
[그]는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남겨 두지 않았다.
그러니 이 순간 성공을 거둔 이상, 그 역시 자신의 사명을 끝낸 셈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이미 몇 번이나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 버렸다.
그러니 마지막만큼은 스스로 운명의 결말을 결정해야 했다.
그녀의 고집스럽고 강인한 얼굴을 바라보자 그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는 완전한 악역이 될 생각이었다.
자신의 용사가 마침내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도록.
Helios
내 명령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죽으라는 것이라면?
Helios
넌 날 어떻게 막을 거지?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솟구치던 공포와 불안이 기적처럼 가라앉았다.
유연
그건 절대로 네 명령일 리 없어.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굳건하게 눈을 마주했다.
유연
난 지금까지 줄곧 너를 진심으로 바라봐 왔으니까. 네가 누구인지도 언제나 알고 있어.
유연
못 믿겠다면 나랑 같이 이 세상의 미래를 들여다보지 않을래?
유연
예전에 네가 큐브를 통해 답을 찾았던 때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너에게 또 다른, 더 진실한 답을 보여 줄게.
순간 큐브를 만지작거리던 Helios의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
오랫동안 감정을 억누른 채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던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Helios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문 쪽에서 두 사람이 한 걸음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 위의 조명이 두 사람의 얼굴을 서서히 비추었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중 헐렁한 면마 셔츠를 입은 남자는 전에 연모고등학교 체육관에서 만났던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왜 B.S.에 있는 거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Helios를 바라보았다. 그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먼저 입을 열기도 전에, 다른 한 사람이 가볍고 민첩한 몸놀림으로 갑자기 내게 달려들었다.
??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Helios가 더 빨랐다. 은빛 잔상이 눈앞을 스치더니 그가 이미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상대가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눈부신 형광빛이 Helios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그리고 곧장 내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순식간에 거칠고 막대한 힘이 강제로 깨어나는 듯했다.
무언가를 가로막고 있던 얇은 막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더니 터져 버렸다. 그 힘은 끝도 없이 바깥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눈앞에 보인 것은 공포에 질린 그의 눈동자였다.
나는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익숙하고 강렬한 원심력이 또다시 나타났다.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나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무언가가 다시 나를 잡아당겼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끝없이 추락하는 무중력감이 모든 빛과 소리를 무자비하게 빼앗아 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격렬한 심장 박동이 귓가에서 끊임없이 울렸다.
어떻게…… 또 이런 일이?!
나는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신 홀에는 나 혼자만이 멍하니 서 있었다——
Helios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굳어졌다. 그가 막 손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주신 홀 밖에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T
역시 QUEEN은 오직 하나뿐이군.
그는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침착하게 판정을 내렸다.
E
아무래도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네. 그래도 QUEEN의 특수성을 확인한 셈이겠지.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을 듣자 Helios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순간 그의 몸이 잔상으로 변하더니 체구가 작은 사람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상대 역시 반응이 빨랐다. 옆으로 한 걸음 몸을 옮기더니 날렵하게 새로 나타난 남자의 뒤로 몸을 숨겼다.
날카로운 공격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주변의 공기마저 갈라 버릴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맞은편의 남자는 반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서서 자신을 향해 덮쳐 오는 은빛 잔상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Helios의 공격이 남자의 미간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억지로 힘을 거둔 탓에 그의 손등에서는 힘줄이 선명하게 솟아올랐다.
T
세상일이란 언제나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기 마련이지.
Helios는 그를 차갑게 흘겨보았다. 그리고 손을 거두었다. 손가락이 소리 없이 점점 더 세게 움켜쥐어졌다.
그는 그녀 역시 [그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에 몸을 맡기고 그런 행동을 하고, 그런 말들을 내뱉었던 것이다.
Helios
………………
……어쩐지 무언가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9-16 은빛 그림자 (银色幽影)
나는 텅 빈 홀 한가운데 굳은 채 서서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연
Helios……?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소녀가 내게 어떤 능력을 사용했던 것 같았다.
뜨겁고 끝없는 힘이 몸속에서 제멋대로 자라나는 감각을 분명히 느꼈다. 그리고 뒤이어 그 신비로운 인력이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설마……그 자극 때문에 또 새로운 능력이 생겨난 걸까?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을 전부 사라지게 만든 건가?
터무니없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그때, 멀지 않은 복도에서 B.S. 대원 몇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자 발걸음을 멈췄다. 눈동자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먼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유연
BOSS를 본 적 있나요?
B.S. 대원
없습니다.
유연
……알겠어요. 그럼 방금 B.S.에 두 사람이 들어온 건 눈치챘나요?
유연
한 명은 면마 셔츠를 입은 남자였고, 옆에는 소녀가 한 명 있었어요. 그 사람들을 본 적 있나요?
대원들의 표정이 더욱 의아해졌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B.S. 대원
감시 시스템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확인해 볼까요?
나는 의아한 마음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눈앞의 B.S. 대원들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뭔가 알아내면 알려 주세요.
그 후에도 나는 B.S. 내부를 한 바퀴 더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Helios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유연
……
묵직한 B.S.의 대문이 등 뒤에서 천천히 닫혔다. 고개를 들자 맑고 투명한 석양빛이 하늘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행인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인 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고, 누군가는 무표정하게 갈 길을 서둘렀다.
하나둘 켜진 가로등과 상점의 불빛이 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길가의 가게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 흘러나왔고, 멀지 않은 분식집에서는 튀김 냄새가 풍겨 왔다.
너무나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평온함 속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느껴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조금 전 광장에 있던 동료에게 상황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화면을 켜는 순간, 통화 기록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놀랍게도 부재중 전화 기록은 몇 주 전까지 이어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지금은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황급히 조연출 한 명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조연출
사장님……?
수화기 너머에서 놀라움과 조심스러움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역시 순간 멍해졌다.
유연
효설 씨…… 그쪽 상황은 어떻게 됐어요? 다친 사람은 없어요?
조연출
다친 사람이요? 사장님, 혹시 전화를 잘못 거신 거 아니에요?
유연
……아니야. 지금 어디 있어요?
조연출
회사에 있는데요. 뉴스 자료를 정리하고 있어요.
유연
광장에서 촬영한 자료?
조연출
광장이요?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요? 사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혹시…… 괜찮으세요?
나는 멍하니 전화를 끊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황당한 감각이 밀려왔다.
밤이 소리 없이 마지막 석양빛을 집어삼켰다. 나는 가로등 아래 서서 소셜 미디어의 검색창에 여러 단어를 반복해서 입력했다.
'광장', '집회', '충돌'……하지만 아무리 검색해도 관련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오늘 일어난 사건만이 아니었다. 이전에 뉴스에서 보도했던 각종 충돌과 심각한 재해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나는 자신의 몸을 세게 꼬집었다.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통화 기록에 쌓인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뿐 아니라, 각종 메신저 아이콘에도 붉은색의 읽지 않은 메시지 표시가 가득했다.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수많은 사람이 차례로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답장을 보낸 기록은 무려 한 달 동안 비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손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화면에 음성 통화 요청이 나타났다. 《토론자 여러분, 주목하세요》의 타이틀 스폰서 중 한 곳을 담당하는 책임자였다.
얼마 전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 그녀와 통화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시즌 2의 후원사 권익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었다.
나는 의아했지만 일단 전화를 받았다.
후원사 담당자
유연 씨, 그동안 계속 연락이 안 되더니 드디어 전화를 받으시네요.
상대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의문스러운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
화면을 내리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채팅 기록에는 '상대방이 통화를 취소했습니다'라는 알림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시간을 살펴보니 정확히 2주 전부터였다. 그녀는 사흘에서 닷새 간격으로 한 번씩 내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 기억으로는 마지막으로 후원 문제를 논의한 뒤 그녀에게서 다시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다.
유연
정말 죄송해요. 제가 요즘 조금 바빴어요.
후원사 담당자
사실 그동안 몇 번이나 전화드렸던 건 《토론자 여러분, 주목하세요》 시즌 2의 독점 후원 권익을 미리 확정하고 싶어서였어요.
후원사 담당자
아시다시피 프로그램 시청률이 계속 오르고 있잖아요……
유연
잠깐만요. 후원 문제는 2주 전에 전화로 이미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후원사 담당자
2주 전이요? 그때 제가 전화를 드리기는 했지만, 계속 연결이 안 됐는데요……
침묵이 끝없이 길어졌다.
상대 역시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후원사 담당자
유연 씨, 혹시 지금 통화하기 어려우신가요?
유연
저…… 죄송해요. 조금 있다가 통화할 수 있을 때 다시 연락드릴게요.
식은땀이 등을 거의 다 적셨다. 가벼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뼛속까지 차가운 한기가 밀려왔다.
광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연모시 전체가…… 어쩌면 모든 사람의 기억이 내 기억과 어긋나 있었다.
마치 나 혼자만 그 '존재하지 않는'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Helios
여기서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그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희미하게 울렸다.
이제는 더 이상 '여기'가 아닌 걸까?
나는 그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 임시 거처를 향해 달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끊임없이 뺨을 스쳤다. 막 모퉁이 하나를 돌아섰을 때,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NW 제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내 모습을 위아래로 살피는 동시에 한 손으로 이어셋을 눌렀다.
NW 대원
C조, 목표 확인. 위치는 꽃나무로 거리, 좌표 372, 198.
NW 대원
목표에게 뚜렷한 외상은 없으며, 의식과 생체 징후 모두 정상입니다.
유연
……
나는 불쾌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무시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대원이 다시 옆으로 한 걸음 움직이며 길을 막아섰다.
NW 대원
샤오위에 장관님께서 즉시 NW 기지로 복귀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현재 당신의 최신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유연
지금 당신들이랑 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있을 시간 없어……
나는 화가 나서 그를 밀쳐 내려 했다. 그런데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날카로운 은빛 하나가 갑자기 짙은 밤의 장막을 찢고 날아들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뒤따랐다.
가슴이 철렁할 만큼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NW 대원이 잔상처럼 뒤로 밀려나 몇 걸음이나 비틀거렸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뜻밖에도 어둠 속에 숨은 한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끝을 알 수 없는 짙푸른 눈빛이 아주 빠르게 내 얼굴을 훑었다.
그는 곧 시선을 거두고 단검을 거꾸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유령 같은 그림자가 되어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람 속으로 녹아들었다.
상대는 즉시 뒤로 몸을 굴려 충격을 흘려보냈다. 다시 일어선 순간, 그의 손바닥에 가시덤불이 뒤엉킨 날카로운 칼이 허공에서 만들어졌다.
NW 대원
보고합니다. 기습 공격을 받았습니다.
가시가 돋은 칼날이 밤빛 아래 섬뜩한 냉기를 뿜어냈다. 상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Helios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Helios는 재빨리 몸을 틀었다. 날카로운 가시가 그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그는 단검을 위로 치켜올려 상대의 칼날을 단숨에 받아냈다.
금속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 순간, Helios가 손목을 홱 비틀었다. 짧은 순간 폭발적으로 실린 힘에 상대의 팔이 억지로 옆으로 꺾였다.
남자가 비명조차 지르기 전에 Helios의 무릎이 거칠게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극심한 통증에 남자의 등이 순식간에 활처럼 휘었다.
다음 순간, Helios가 손에 쥔 단검의 손잡이를 날렵하게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NW 대원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남자는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바닥에 곧장 쓰러졌다.
바로 다음 순간, 갑자기 눈부신 빛이 번쩍이며 NW 대원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다시 눈을 깜박였을 때는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좁은 골목에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Helios가 눈을 내리깔았다.
희미한 달빛이 그의 옆얼굴에 내려앉아 차갑고 잔혹한 분위기를 더욱 깊게 드리웠다.
잠시 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소용돌이치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는 평온하게 시선을 고정했다.
유연
방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야……?
유연
아까 주신 홀에서 너희가 갑자기 사라진 건 왜 그런 거야?
나는 다급한 마음에 질문을 쏟아 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유연
……너는 지난 한 달 동안 일어난 일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 우리가……
Helios
알고 있어.
그는 '기억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유연
……그게 무슨 뜻이야?
내 질문에 Helios는 짜증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Helios
……
Helios
그냥 없었던 일로 생각해도 된다는 뜻이야.
지금 그가 나타난 것도 마치 또 다른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떠났다. 길고 짙은 그림자에는 단호한 거절의 뜻이 담겨 있었다.
늘 영문도 없이 나타났다가 다시 홀로 떠나 버린다.
너 역시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는데.
유연
이 답답한 나무토막아!!
나는 더 이상 숨 막히는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성큼성큼 달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연
Helios, 잘 들어! 네가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더 가면 진짜 한 대 때릴 거야!
유연
앞으로 널 볼 때마다 주먹으로 한 대씩 때릴 거라고!!
Helios
죽고 싶은 건가?
유연
어디 한번 해 봐.
Helios는 미간을 깊이 찌푸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발을 내딛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또 하나의 소리 없는 명령이 되어 그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유연
말해 줘.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Helios
……
그의 눈동자는 밤빛에 뒤덮인 것 같았다. 검푸른 바다처럼 깊은 눈 속에서 사람을 익사시킬 듯한 거센 암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유연
제발 말해 줘. 나한테……
??
그러게 말이야.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군.
갑자기 골목 끝에서 낯설면서도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멍하니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면마 셔츠를 입은 남자가 멀지 않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밤빛이 그의 부드러운 청흑색 눈동자를 비추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
오랜만이야, QUEEN.
??
넌 정말 매번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한 달 전, 시공관리국.
궁전처럼 웅장한 공간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찬란한 별빛이 거대한 시계판 위에 겹겹의 빛무리를 드리우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한 명이 거대한 시계의 빛과 그림자 뒤편에서 황급히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주변에서 분주히 일하고 있던 시공 관측자들에게 긴급 지시를 내렸다.
Zero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당장 상부에 보고해!
9-17 꼬마 (小孩)
분명 우리는 조금 전 주신 홀에서 만났었다.
거센 밤바람이 휘몰아쳤다. 어둠 속에 기대어 선 남자와 그 곁의 Helios는 어딘가 강렬한 위화감을 자아냈다. 내 기억 속 장면들과는 도무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면서도, 온화해 보이는 얼굴 뒤에 더없이 위험한 기운을 감춘 남자를 경계했다.
유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
그냥 간단한 칭찬이라고 생각해.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한 사람이 소리 없이 그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남자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
Helios, 예전의 너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너도 우유부단해진 건가?
……예전? 이 사람은 Helios를 알고 있는 건가?
Helios
……
Helios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의 온도가 순식간에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팽팽하게 조여 오는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였다. 그리고 Helios의 어깨 너머로 남자를 몰래 살폈다.
하지만 체육관과 주신 홀에서 잠깐 마주쳤던 기억 외에는, 저 얼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대체 정체가 뭘까? 과거에 B.S.에 몸담았던 사람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중, 남자의 낮고 나직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긴장하지 마.
??
공동의 목표 앞에서는 어떤 변수든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
다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필요가 있겠어. 특히……
??
그녀 앞에서는 말이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사람 형상을 한 무언가가 느닷없이 분리되어 나왔다.
어스름한 시야 속에서 '그'는 두 팔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살짝 흔들더니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비치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어렴풋이 밝혔다.
그 얼굴을 알아본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차갑게 빛나는 은발, 오른팔을 타고 구불구불 이어진 검은 문양, 뚜렷한 이목구비까지. 그는 Helios와 거의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아무리 닮은 얼굴이라도,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차이를 알아차렸다.
유연
당신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 형체가 순식간에 잔상으로 변하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도로에 고여 있던 빗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래로 펼쳐지자, 소매 안에서 칼날 하나가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나왔다.
그는 순식간에 칼을 거꾸로 움켜쥐었다. 몸을 한 번 움직이더니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차가운 칼빛이 내 목덜미 옆에서 번뜩였다.
유연
……?!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은발이 바람에 거칠게 휘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비친 것은 끝없는 살의뿐이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내 목을 베어 내려던 찰나, 누군가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Helios가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긴 뒤, 손에 쥔 단검으로 치명적인 일격을 막아 낸 것이었다.
두 줄기의 차가운 칼빛이 교차하면서, 거의 똑같은 두 사람의 윤곽이 잠깐 드러났다.
……어째서지? 저 남자의 Evol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기억을 추출하는 능력이 아니었나?
Helios는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를 노려보았다. 온몸에서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무서운 분노가 폭발하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남자는 여전히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
이제 생각났어? 이게 바로 내 기억 속의 너야.
Helios
꺼져!
분노에 휩싸인 Helios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고요하던 좁은 골목에 칼날이 서로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너무나 닮은 두 형체가 끊임없이 뒤엉켜 싸우는 바람에, 어느 쪽이 진짜 그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한쪽의 움직임에는 언제나 망설임과 주저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상대의 원초적인 살의 앞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반대편의 공격은 폭풍우처럼 한순간도 쉬지 않고 쏟아졌다. 방어는 완전히 포기한 듯했다.
자신이 다치는 것도, 죽는 것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반면, Helios는 계속해서 방어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빈틈을 노린 상대의 발길질에 그대로 걷어차여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피가 한 방울씩 땅에 떨어졌다. 마치 더는 흘릴 수도 없는 눈물처럼.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내 가슴이 세차게 조여 왔다.
그때, 면마 셔츠를 입은 남자가 살벌한 살기가 감도는 가운데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지난번 체육관에서 만났을 때와는 상황이 좀 다르지?
??
기억의 힘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대해.
??
'기억의 형상화'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어?
그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미간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치 무언가를 가르쳐 주려는 듯, 말투에는 은근한 암시가 담겨 있었다.
??
너라면 아마 똑같이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전히 격렬하게 싸우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
기억이라는 건…… 이겨 내지 못하는 한 결코 잠잠해지지 않거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빛을 머금은 칼날 하나가 거칠게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틀어 피했지만, 머리카락 한 가닥이 잘려 나가 뒤쪽 벽에 박혔다.
??
Helios, 우리는 동료야.
??
그리고 우리의 이상 앞에서는 망설임이 있어선 안 돼.
??
그건 그때 네가 우리에게 했던 말이잖아.
그의 말투에는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옛 친구와 추억을 나누는 것 같았다.
Helios가 몸을 날려 그를 공격하려 했지만, 은발 남자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그를 완강하게 저지했다.
그 남자는 눈앞의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마지막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
QUEEN, 이 모든 일이 정말 우리 모두에게 가치 있는 일이었으면 좋겠군.
그는 첫 만남 때와 똑같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다시 밤바람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순간, 은발 남자는 또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좁은 골목에 칼빛이 어지럽게 번뜩였다. 너무나 닮은 두 형체가 어둠 속에서 쉼 없이 찌르고 반격했다.
차갑고, 피에 굶주린 움직임이었다.
이 살육 속에서 언제나 냉혹하기만 하던 Helios의 얼굴은 단단한 가면이 모두 벗겨진 듯했다. 그 아래로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초조해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Helios
……넌 누구야?
희미하게 그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부서질 듯한 질문이 들린 것 같았다.
그 남자 앞에서 Helios는 다시 벼랑 끝에 몰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아이로 돌아간 듯했다.
길을 잃고, 불안에 떨고,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이.
하지만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됐다. 설령 상대가 환영에 불과하고, 누군가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존재라 해도.
주기락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은 달랐다. 그리고 주기락 역시 그 남자를 달라지게 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런 모습일 리 없었다.
??
'너라면 아마 똑같이 해낼 수 있을 거야.'
남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렸다. 하지만 내게는 저 은발 남자에 관한 기억이 없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전부 주기락이 들려주었던 이야기의 조각들을 맞춰 얻은 것뿐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내 시선이 문득 Helios의 뒷모습에 멈췄다.
——하지만 그에게는 있었다.
그의 기억 깊은 곳에는 그 사람의 가장 진실한 모습이 남아 있었다.
바로 그때, Helios가 사나운 옆차기를 날려 마침내 은빛 형체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다음 순간, 그는 단검을 꽉 움켜쥐었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남자의 목을 겨냥해 거침없이 칼을 내리꽂았다——
그러나 칼끝은 목 바로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멈춰 섰다. 칼자루를 움켜쥔 손가락은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Helios
……!!
Helios가 본능적으로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무언가 감춰져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한 것처럼, 혹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그는 다른 한 손까지 칼자루에 포개 쥐고 몇 번이고 아래로 힘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가 그를 옭아매어, 손을 그 자리에 억지로 붙들어 놓고 있었다.
Helios
……왜…… 대체 왜!!!
거의 동시에 나도 달려들어 칼을 쥔 그의 손을 끌어안았다.
유연
안 돼!
Helios
놔!!
그 순간, 그 말은 나를 향한 것 같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게 외치는 것 같기도 했다.
몸 아래에 깔린 남자는 여전히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Helios의 온몸은 당장이라도 산산조각 날 듯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손끝이 그의 살을 파고들 정도로 그를 꽉 붙잡았다.
안 돼…… 안 된다고……
더는 어떤 결과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온몸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익숙한 이상 감각이 다시 밀려왔다. 주변 공간이 격렬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며 찢기고 갈라졌다. 동시에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흡인력이 나를 집어삼키려 했다.
엄청난 무중력감에 숨이 막혀 왔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그 자리에 의지를 단단히 붙들어 맸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어. 여기서 떠날 수 없어.
나는 반드시 주기락을 도와야 해.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이게' 둘 수는 없었다. 설령 그것이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낸 환영일지라도.
나는 서로 꽉 맞잡은 손을 따라 모든 힘을 한곳에 모았다.
기락 씨, 기억해 내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어떤 눈으로 당신을 바라봤는지, 어떻게 당신의 손을 잡아 주었는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그가 어떻게 당신의 삶에 들어와 당신의 눈에 담겼는지, 그리고 언제나 당신의 앞에서 길을 걸어갔는지.
내 마음이 전해진 순간, 그의 반응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손바닥 아래의 손이 더욱 절망적으로 떨려 왔다.
그는 미친 듯이 내 손을 뿌리치려 했다. 내가 억지로 일깨운 기억을 도려 내 버리려는 것 같았다.
Helios
멈춰!!!
나는 이를 악물고 그의 고함을 무시했다. 거대한 흡인력에 맞서면서도 쉬지 않고 힘을 끌어올렸다.
그가 기억해 내기를 바랐다. 과거의 기억을 대신해, 그 자신이 품고 있던 기억이 눈앞에 나타나기를 바랐다.
의식이 한계에 다다르며 귀를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그때 맞닿은 손바닥을 따라 새벽빛처럼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어,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 순간, 내 것이 아닌 수많은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봄날에 피어나는 생명처럼, 그 감정들이 가슴속을 세차게 스쳐 지나갔다——
따뜻함. 믿음. 그리고 ……동경.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어린아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 은빛 빛무리가 들어왔다. 그때 문득, 아주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항하던 남자는 어느새 몸부림을 멈추고 있었다.
그의 눈에 서려 있던 텅 빈 살의가 그림자처럼 걷혔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다정하고도 너그러운 빛이었다.
그는 눈가가 붉어진 채 온몸을 떨고 있는 Helios를 올려다보았다. 눈매가 살짝 휘어지더니, 다시 한번 부드럽게 웃었다.
이윽고 남자는 짓눌려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멈춰 선 단검 너머로 손을 뻗어——Helios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은발 남자
꼬마야.
은발 남자
네가 나처럼 되려면 아직 800년은 일러.
그 순간, 남자의 몸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부서지며 온 하늘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빛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가느다란 명주실처럼 변해, 나와 Helios의 몸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너무도 찬란하고 눈부셔서, 모든 밤의 어둠을 가려 버릴 만큼.
마치 시공간을 넘어 수년 만에야 전해진, 뒤늦은 포옹 같았다.
어린 남자아이가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옆에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어린 남자아이
……답을 정했어요.
앳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하지만 어딘가 망설이는 기색도 묻어 있었다.
옆에 앉은 아이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남자는 타자를 치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웃으며 아이 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남자
말해 봐.
어린 남자아이
저는……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어린 남자아이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요.
남자는 잠시 멍해졌다.
그는 눈앞의 아이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아이의 이마를 가볍게 톡 쳤다.
남자
네가 나처럼 되려면 아직 800년은 일러.
하지만 어린아이가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남자는 다시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자
넌 그저 너 자신이 되면 돼.
9-18 지난날의 밤하늘 별 (过往的夜星)
마지막 온기를 머금은 빛 한 줄기가 겹겹이 얽힌 명주실 사이에서 떨어져 나와 꺼져 갔다. 잠시나마 빛을 되찾았던 세계는 다시 끝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죽음처럼 고요한 정적 속에서 나는 품에 안긴 사람을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가진 모든 온기로 그를 감싸 주고 싶었다.
이렇게나 가까이 맞닿아 있는데도, 그의 숨결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순간, 나는 그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느 이름을 부르든 그에게 상처를 줄 것만 같았다.
삶을 이야기하든, 죽음을 이야기하든, 모두 그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유연
……이제 그만 자신을 벌해.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도 말고.
유연
……넌 충분히 노력했어. 이미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내가 약해졌을 때 스스로를 위로하던 말들이 뜻밖에도 이 순간 하나로 겹쳐졌다.
Helios가 억지로 멈춰 세웠던 그 시간도 지금은 빛나고 있는 듯했다. 그 시간은 나약해져도 괜찮다고, 잠시 숨을 돌려도 괜찮다고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선택할 기회도 주었다.
주기락, 너를 위로하는 말이 나 자신까지 위로해 줄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나는 고개를 들어 깊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유연
……Helios, 이제 멈추자.
품에 안긴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나 내 품을 벗어났다. 땀에 흠뻑 젖은 은발이 이마 앞으로 어지럽게 흘러내려 두 눈을 가렸다.
땀방울이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흘러 차가운 바닥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Helios
하지만 난 이미 선택을 끝냈어.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잊어버리면 된다. 신경 쓰지 않으면 된다.
그저 자기 삶을 살아가면 된다. 다른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의 노래는 잘 팔릴 것이고, 수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하며 그에게 시선을 보낼 것이다.
그 아이들도 자신이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Evol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엉망이 되든 상관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그녀도.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용서하고, 받아 주었다. 그녀는 그를 좋아했다. 다른 모든 사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를 좋아했다.
과거에 기대기만 해도 그는 너무나 쉽게 그녀의 포옹과 곁을 얻을 수 있었다.
과거에 기대기만 해도 지금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과거의 자신을 통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고통이 활활 타올라 사라지고, 마침내 해방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을 감싸고 있던 명주실을 하나씩 떼어 냈다.
기억은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안전한 보금자리처럼.
그녀처럼.
하지만 그는 고통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의 잘못을 외면할 수 없었으니까.
유연
그럼…… 다시 한번 선택하면 안 될까?
그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을 보내며 묻는 모습을 보았다.
Helios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어.
그는 마지막 남은 명주실 한 가닥마저 떼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내 손을 움켜쥐고 곧장 일으켜 세웠다.
유연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유연
우리 함께 찾아보면 되잖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분명 그의 손을 붙잡고 있는데도, 정말로 그를 잃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연
넌 다시 주기락으로 살아갈 수도 있어. 좋은 노래도 많이 부를 수 있고.
유연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사랑을 되찾아 올게. 그러면……
Helios
그게 언제인데?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비웃음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Helios
어디서? 어떻게 찾을 건데?
유연
……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도 명확한 질문이었다. 그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Helios
하지만 난 '■'에만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가 고개를 들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멀지 않은 육교 옆 맞은편 쇼핑몰 외벽에 걸린 대형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주기락'이 있었다.
화면 속 소년은 여러 무대를 자유롭게 누비며 춤추고 있었다. 교차하는 빛과 그림자 사이로 눈가와 입가에 웃음이 가득 번졌다.
온몸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소속사가 새 앨범을 홍보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영상이었다.
주기락이 데뷔한 이래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순간들을 담은 영상.
Helios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나도 본능적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끝없는 어둠을 넘어, 너만을 위한 유일한 별빛이 될게——'
깊은 밤은 고요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굳세면서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발아래로 넓은 차도가 끝없이 뻗어 있었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자동차 몇 대가 눈부신 전조등으로 흐릿한 빛의 궤적을 남기며 육교 아래를 빠르게 달려갔다.
거대한 전광판에서 쏟아지는 빛이 Helios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태양처럼 눈부신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그가 몸을 돌렸다.
그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자신의 밤하늘 아래에서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불렀다.
Helios
난 그가 될 수 없어.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거대한 전광판에서는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이 그의 모습과 겹쳐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토록 같으면서도 달랐다. 마치 Helios라는 존재가 그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를 도울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몸은 여전히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갔다.
Helios는 무표정하게 손을 들어 총구를 곧장 내게 겨누었다. 마치 자신의 선택을 행동으로 분명히 보여 주려는 것 같았다.
바람이 귓가에서 거세게 울부짖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나는 눈앞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그에게서 도망치라는 목소리가 다시 제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떤 때는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데, 어떤 때는 영혼에 새겨진 듯한 그 명령이 나를 밀어내는 걸까.
다리가 떨리며 저절로 한 걸음 물러나려 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도망치려는 충동에 필사적으로 맞섰다.
유연
어차피 쏘지도 않을 거면서, 왜 이러는 거야?
Helios
내가 쏘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철컥,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며 자신이 정한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갔다.
나는 몇 번이고 도망치려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유연
네가 주기락이 될 수 없다면, Helios 너 자신은?
그가 잠깐 멈칫한 듯했다. 총구는 어느새 내 미간에 거의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유연
넌 나를 내쫓아 봤자 내가 끝도 없이 널 찾아다닐 거라고 했잖아.
Helios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유연
아니. 넌 다른 사람들과 달라.
유연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있잖아! 우리가 함께 뭘 했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고!
Helios
그건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해.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Helios
몇 가지 선택과 시도에 관한 가능성이지.
Helios
[그]가 검증을 마친 뒤에는 내가 더 빨리 그 일을 끝낼 수 있어.
유연
그……?
그 순간, 눈앞에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윤곽이 나타난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명의 Helios가.
서로 전혀 다른 장면들이 눈앞에서 겹쳐지고 찢겨 나가며 지금 내 앞에 있는 그의 얼굴로 이어졌다.
Helios
차 안에서 너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나'가 아니야. 너와 함께 생활했던 사람도 '나'가 아니고.
Helios
네 손을 붙잡았던 사람도 '나'가 아니야.
그것은 일종의 마비였다. 그 세계에서 그가 잠시 망설이며 보여 준 미적지근한 태도.
하지만 이 세계에서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말이 한마디씩 내리꽂혔다.
그의 뒤편에 있는 거대한 전광판에서는……
화면이 점점 더 환해지는 가운데, '주기락'이라는 이름의 금발 소년이 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화면 속 소년은 한 점 그늘도 없는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가만히 손을 뻗었다.
분명 빛도 그였고, 깊은 어둠도 그였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으로 갈라져 나온 것만 같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든.
내가 어떤 주기락을 보았든, 어떤 Helios를 만났든.
그들은 언제나 같은 사람이었다.
유연
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실험실에서 쓰러진 걸 봤어도 화내지 않았겠네? 나를 억지로 끌고 나오지도 않았을 거고?
Helios
안 그랬겠지.
유연
내가 우는 소리를 들었어도 돌아오지 않았겠네? 밖에 비가 온다는 거짓말도 하지 않았을 거고?
Helios
안 그랬겠지.
유연
내가 그렇게 절망적인 말을 했을 때도, 일부러 반대되는 방식으로 그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아니라고 알려 주지 않았겠네?
Helios
안 그랬겠지!
유연
모든 사람을 통제했을 때도, 굳이 나만은 네 앞에 서서 네가 남긴 진짜 답을 마주하게 하지 않았겠네?
Helios
……안 그랬겠지!!
유연
그 모든 게 정말 네가 아니었다고?!
숨이 막힐 듯한 감각이 바닷물처럼 순식간에 심장을 집어삼켰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마지막 질문을 절규하듯 내뱉었다.
총구 너머에 있는 두 눈 역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핏발이 선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얼음처럼 차갑던 그 눈동자에 흉측한 균열이 수없이 생겨났다.
금이 간 틈새를 따라 검고 짙은 무언가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그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마침내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Helios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의 입술 사이로 가벼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Helios
그랬군. 아직 죽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었어.

탕——!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이 밤하늘을 갈랐다.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가 비통할 만큼 짙게 밀려왔다.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려졌다.
총알은 나를 맞히지 않았다. 하지만 결연한 살의를 품은 채 머리카락을 스치며 날아갔다.
그 순간, 정말로 무언가가 총탄에 맞아 사방으로 피를 흩뿌린 것만 같았다.
Helios
이제 전부 죽었어.
그리고 그는 손끝의 힘을 풀어 총의 손잡이가 내 쪽을 향하도록 돌렸다.
Helios
이제 나만 남았어.
총성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와 함께 그의 눈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망설임도 완전히 사라졌다.
Helios
날 막고 싶다면, 기회는 지금 단 한 번뿐이야.
9-19 겁쟁이 (胆小鬼)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흩날렸다. 깊고 푸른 두 눈이 달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깊은 바다는 더 이상 내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조금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은 그 눈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내민 총을 받아 들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총자루의 열기가 손바닥으로 퍼져 나갔다.
다음 순간, 나는 총구를 그의 미간에 가져다 댔다.
유연
이 모든 일에 대해 무슨 생각이 들어?
Helios
……
Helios
나쁘지 않은 선택이군.
그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눈동자 속 바다는 소리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유연
내가 정말 쏠 것 같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가 여전히 그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듯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쩌면 직감적으로, 본능적으로 떠오른 답이 그를 두렵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유연
Helios, 네가 정말 원하는 일을 모두 끝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다음에는 뭘 할 거야?
Helios
……
그 질문은 그 자신도 수없이 되뇌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Evol을 없애 버린다면, 세상은 모두가 바라는 모습으로 변할까?
수많은 비극을 낳은 원인이 어쩌면 Evol이 아닐지도 몰랐다.
죽은 이들은 모두 그가 자신들 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아이답게 살 수 있도록.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바로잡을 수 있도록……
그리고 자신도 하나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설령 '■'이 없더라도, 그는 그녀의 '■'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을.
그러니 어쩌면 그는 끝없는 밀밭을 가진 농부처럼, 몇 번이고 영원히 같은 일을 반복하며 곡식을 거두게 될지도 몰랐다——
그 일은 그를 지치게 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숨 쉬게 해 주고,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그는 그녀가 자신을 한 번만 더 구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역시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자신이 구원받는 것보다 그녀가 구원받는 것이 더 간절했다.
그녀가 더 이상 모든 것을 짊어지지 않도록. 몇 번이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지 않아도 되도록——
설령 가장 잘못된 방법을 써야 한다고 해도.
침묵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말하지 않은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유연
……넌 한 번도 그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구나?
그때 Helios가 다시 가볍게 웃었다.
Helios
난 이 세계의 '진화'를 완수할 거야.
유연
……
유연
여기서 네 목숨을 내게 넘기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겠지.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절대적인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유연
Helios, 내가 널 막는다면 절대로 총알을 쓰지는 않을 거야.
유연
난 당신이 살아 있기를 바라.
그렇게 말하다가 B.S. 주신 홀에 앉아 있던, 그와 닮았으면서도 반항적인 얼굴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유연
그럼 당신이 내 오답이 되어 줘.
유연
하지만 진짜 종착점은 반드시 내가 당신보다 먼저 찾아낼 거야.
네가 나를 위해 놓아 준 잘못된 길들까지도, 마지막에는 우리 두 사람을 이끄는 길잡이로 만들겠어.
태양이 잠시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내가 너의 빛이 될게.
나는 총을 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그저 손에 꼭 쥔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더는 그를 쫓아가기만 해서는 안 됐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더 빨리 앞으로 달려갈 것이다. 늘 어둠 속에 숨는 데 익숙한 이 사람이 몇 번이고 나를 찾아오게 만들 것이다.
나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한 걸음씩 멀어졌다. 육교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소년의 모습이 여전히 그의 뒤편을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은 끝내 눈앞의 사람을 비추지 못했다.
그는 마치 끝없이 펼쳐진 영원한 밤에 완전히 녹아든 것 같았다. 외롭고도 황량한 모습이었다.
나는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멀리 있는 그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유연
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끝까지 말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유연
하지만 다른 '너'한테도 연락해 줄 수 있어? 내가 지금 안전하게 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줘.
그 순간,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그가 갑자기 숨을 멈칫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고요한 밤하늘 아래, 감정을 억누른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Helios
[그]는 걱정하지 않아!
나는 웃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처음 나타났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연
하지만 NW 대원을 쓰러뜨리고 날 도와줬을 때, 네 얼굴에는 분명 초조함과 걱정이 가득했는걸.
그는 말문이 막힌 듯 굳어 버리더니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유연
그리고…… 나도 더는 [그]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
유연
난 계속 앞으로 나아갈 거야.
유연
그러니까…… 네가 먼저 날 찾아오기를 기다릴게.
*
B.S. 주신 홀. Helios는 홀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모든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
주변에는 끝없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오직 그의 손에 들린 마방진처럼 정교한 큐브만이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쉬지 않고 회전하고 있었다.
Helios
그녀는 벌써 '나'를 만났겠지.
Helios
정말 사서 고생하는 걸 좋아한다니까.
그가 아주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순진함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고, 마음속의 어지러운 감정을 감추려는 것 같기도 했다.
이성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1단계 실험은 순조롭게 끝났고, 이곳에서 그가 맡은 임무도 이미 종료되었다.
'이곳'이 닫히기 전까지, 그는 어느 정도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도무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요 며칠 그는 수없이 그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물과 낙담하던 모습을.
그는 미간을 깊이 찌푸리다가 마침내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어둠으로 덮어 버리려 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소리 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
그녀에게서 도망치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또 그녀 앞에 나타난 거야?
??
너도 살아 있어서는 안 돼.
Helios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끈적하고 검은 그림자 덩어리로 변해 갔다.
그것은 계속 부풀어 오르고 뒤틀리더니, 그를 닮은 듯하면서도 닮지 않은 괴물이 되었다.
Helios가 침묵하자 괴물은 흐릿한 웃는 얼굴로 일그러졌다.
그 목소리도 한층 거리낌 없어졌다.
[Helios 목소리]
??
자기 자신 앞에서까지 연기할 필요는 없잖아.
??
인정해. 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겁쟁이야.
??
그녀가 널 부정했으니까 도망친 거잖아. 넌 그녀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어.
??
하지만 날 찾지 못하면 그녀가 울 텐데.
??
사실 이게 바로 나야.
??
난 어떻게 해야 하지?
Helios
알고 있어.
그는 알고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Helios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텅 빈 어둠 속에서 다시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그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기적이 찾아오기 전에 먼저 그를 바라보고, 그에게 미소 지어 주었다. 그렇게 잔인하면서도 다정하게 그를 유혹했다.
몇 번이고 계속 살아가고 싶다는 욕심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강해질수록 괴물은 더욱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부풀어 올랐다——
마침내 그를 남김없이 집어삼킬 때까지.
깊은 밤. 무거운 문이 거칠게 열렸다. Helios가 무표정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문밖의 달빛과 방 안의 어둠이 교차하며 그의 몸 절반 이상을 그림자 속에 감췄다.
그는 폭발할 듯한 살의를 품고 방 안의 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면마 셔츠를 입은 남자는 창가에 앉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Helios
다음에 또 날 떠보려 들 거면, 미리 네 시체 수습할 사람부터 구해 둬.
남자는 곁에 앉은 동료 몇 명을 둘러보더니 온화하게 웃었다.
E
화내지 마. 그건 그저 시간에 관한 선물이었을 뿐이야.
E
게다가…… 지금 네 상태를 보니 그 선물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네.
깊은 속내를 감춘, 떠보는 듯한 시선들이 하나둘 그에게 향했다.
——Helios.
9-21 회백색의 정적 (灰白静默)
거대한 정적 속에서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발아래로 도시가 끝없이 펼쳐졌다. 숨을 죽인 순간, 똑같으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난 두 개의 지평선이 희미하게 겹쳐지더니 더 깊은 곳으로 흘러 사라졌다.
익숙한 도시가 믿기 어려운 모습으로 일렁이며, 서로 닮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은 풍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보려고 애썼지만, 우주에서 떨어진 먼지처럼 허공을 떠다니는 자잘한 빛의 파편들밖에 붙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희미한 빛 한 줄기에 천천히 눈을 떴다.
새벽 햇살이 조용히 벽 모퉁이를 타고 올라와 비현실적인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경적 소리, 빗자루가 가을 낙엽을 쓸고 지나가는 사각거림……
오랜만에 느끼는 일상의 기척이 잔잔한 소음처럼 귓가에 천천히 퍼져 나갔다.
나는 햇빛 아래 쉴 새 없이 오가는 자동차와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귀를 찢을 듯했던 경보음과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떠올랐다. 기억 속의 재난과 혼란이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
마치 똑같은 두 세계가 머릿속에서 서로 부딪치며 서로 다른 장면을 만들어 내는 듯했다. 그럴수록 생각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지친 듯 눈을 감았다 뜨며 뒤엉킨 기억 속에서 무언가 단서를 찾아내려 했다.
……Helios.
그는 이 일에 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과 관계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혼란을 틈타 다른 계획을 진행하고 있는 걸까?
그날 밤 육교에서 헤어진 뒤로 꼬박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기억 속에서 이상하게 느껴졌던 일들의 단서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도시는 놀라울 만큼 평온했고, 회사 동료들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떠보니, 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지난 한 달 남짓 회사에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동료들과 함께 진행했던 프로젝트들마저 내가 전혀 관여하지 않은 방향으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휴대전화에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유연
허 교수님?
허묵
먼저 메시지를 남긴 건 당신인데 왜 오히려 당신이 놀란 것처럼 들리죠?
수화기 너머에서 은근히 나를 살피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제야 처음 어지럼증을 느꼈을 때 허묵에게 메시지를 남겼던 일이 떠올랐다.
유연
……아, 기억하고 계셨구나.
유연
한참 동안 답장이 없길래…… 바쁘신 줄 알았어요.
허묵
제 일로 바빴던 건 맞아요. 하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요.
유연
그럼 지금은 제가 그 '중요한 일'인 거예요?
허묵
……
수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허묵
문자에서 언급했던 어지럼증 말인데요. 그 후로 증상이 나타나는 빈도가 더 잦아졌나요?
허묵
그리고 어지럼증 외에 두통이나 다른 불편한 증상은 없었어요?
그는 내 농담에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곧장 질문을 쏟아 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삼키며 목을 가다듬었다.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뚜렷한 어지럼증은 있었지만, 이전처럼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끌어당기는 힘을 느꼈던 일과 세계가 달라진 듯한 현상까지 덧붙여 설명했다.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마 뒤, 허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묵
지난번 실험실에서 남긴 데이터를 보면, 원래 이런 기억의 혼란이 나타날 이유는 없어요.
유연
그럼…… 무슨 환영 같은 걸까요?
허묵
연모시 전체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환영이 가능할까요?
그는 섣불리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생각에 잠긴 동안에도 그의 호흡은 여전히 차분하고 일정했다.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허묵이 아주 작게 대답하더니,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잠시 후에야 다시 그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허묵
우선은 상태를 계속 지켜봐요. 어쩌면…… 문제가 반드시 당신에게 있는 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허묵
시간이 나면 다시 연락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급히 끊겼다. 그에게는 잠깐 쉴 틈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창밖의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연구소에 가서 몸 상태를 확인하기 전에 나도 뭔가를 더 해봐야 했다. 가능하다면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단서를 찾고 싶었다.
전동 스쿠터들이 경적을 울리며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생각에 잠긴 채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걸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사방이 평온했다. 무표정하거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얼굴만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시야를 가득 채웠던 고층 건물들이 어느새 주택가로 바뀌고 나서야, 나도 모르게 집에서 한참 먼 곳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연
……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화면에는 낯익은 이름이 떠 있었다.
——현동당 상조회 · 임 아주머니.
나는 눈을 깜빡이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진동에 중국식 누각과 평온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기묘한 광기가 서려 있던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다.
휴대전화가 잠깐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화를 받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려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임 아주머니
아이고, 유연아! 드디어 전화를 받는구나. 나야, 현동당의 임 아주머니.
임 아주머니
그동안 연락이 안 돼서 다들 걱정했어. 요즘은 잘 지내고 있니?
목소리에는 오래 알고 지낸 어른 특유의 친근한 걱정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벌써부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유연
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임 아주머니
다음 주 토요일에 또 모임이 있거든. 너랑 시호도 함께 오면 좋겠어서.
유연
……죄송해요. 요즘 저희 둘 다 좀 바빠서요.
임 아주머니
아이고, 그럼그럼. 우리도 다 이해하지. 그 애는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셨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지……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주변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순식간에 모두 사라진 듯했다. 귓속에서 울리는 웅웅거림만이 남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유연
……시호네 집안에 어르신이 돌아가셨다고요?
임 아주머니
어머, 너는 몰랐니?
전화기 너머에서도 아주머니가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임 아주머니
네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말 안 했나 보구나.
임 아주머니
나도 서월 거리의 이웃들한테 들은 이야기야.
임 아주머니
지난번 모임 영상이 우리 단톡방에 퍼졌잖니? 그걸 보고 시호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더라고.
임 아주머니
역시 서월 거리는 인재가 많은 곳이라니까. 어쩐지 그 애도 우리 '도(道)'와 인연이 있더라니……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감탄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내 귀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급히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허둥지둥 연시호의 번호를 눌렀다.
이미 초조해질 대로 초조해진 마음은 끝없이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 때문에 더욱 조급해졌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기사
어디로 가세요?
유연
어……
순간 시호의 집으로 먼저 가야 할지, 서월 거리로 곧장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내가 한참 대답하지 않자 기사가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기사
그래서 어디로 가실 건데요?
유연
……일단 서월 거리로 가주세요.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향냄새와 무언가를 태운 냄새가 뒤섞인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길게 뻗은 돌길 양옆으로 집집마다 처마 아래에 하얀 종이등이 걸려 있었다.
골목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자 새하얀 종이등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그 모습이 무거운 슬픔을 일으켜, 마치 잿빛 안개처럼 거리 위를 뒤덮는 것 같았다.
이따금 종이를 태우고 남은 재가 발치로 흩날렸다. 나는 그 잿더미를 밟으며 한 걸음씩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에는 애도하는 음악과 사람들의 낮은 속삭임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로 시선을 옮기다가 익숙한 한 사람에게서 눈을 멈췄다.
새하얀 빛으로 가득한 거리 한가운데, 연시호는 어두운색 외투를 입고 서 있었다.
팔에는 상을 당했음을 알리는 흰 천을 두르고 있었고, 외투 앞자락은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져 있었다.
그는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조용히 그늘 속에 서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평소와 달리 말없이 서 있는 그 모습을 보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먹먹함이 갑자기 가슴을 파고들었다.
유연
……
목이 자꾸만 메어 와서 한동안 그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었다.
무언가를 느낀 듯 연시호가 고개를 돌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조문객들의 소란 속에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빛과 그림자가 그의 옆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평소의 거침없고 당당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먹구름처럼 가라앉은 침묵뿐이었다.
세상이 멀어졌다. 나는 그 시선에 잠긴 채, 잠시나마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과 단절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9-22 삶과 죽음, 아득히 갈라져 (生死两茫)
애도하는 음악이 흩날리는 종이재와 함께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내가 막 한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연시호는 이미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남자 역시 팔에 검은 상장을 두르고 있었다.
차마 방해할 수 없어 입술을 살짝 다문 채 우선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서 또 다른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다.
전 아저씨가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챙기고 있었다.
그는 곁에 있는 사람들과 이따금 몇 마디씩 주고받으며 연신 한숨을 쉬다가도, 수염을 쓰다듬으며 씁쓸하게 웃곤 했다.
그러다 문득 시야 한쪽에 새하얀 풍경이 들어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오래된 저택 앞에 도착해 있었다.
넓은 마당에는 하얀 장례 천막이 세워져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비닐 천이 요란하게 펄럭였다.
천막 안팎을 오가는 조문객들은 길게 늘어진 검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잔뜩 흐린 하늘 아래 그 모습이 유난히 무겁고 침울하게 느껴졌다.
긴 탁자 위에 놓인 하얀 초는 이미 상당 부분 타들어 가 있었다. 제물 뒤쪽에는 영정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 노인은 머리카락을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있었다.
입술은 살짝 다물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 특유의 인자함이 얼굴에 배어 있었다.
——갈평(葛平).
나는 조문 문구에 적힌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연시호가 예전에 가끔 흘리듯 했던 이야기들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이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만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
아가씨, 조문하러 오셨어요?
탁자 옆에서 제물을 정리하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들고 차분하게 물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제야 뒤에 오는 사람들의 길을 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한 걸음 비켜섰다.
유연
저, 저는……
??
제 친구예요. 지 누나, 제가 안내할게요.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연시호가 말했다. 그는 내게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우리는 소란스러운 사람들을 지나 뒤편의 잡동사니가 쌓인 구석으로 향했다.
연시호
여긴 왜 왔어?
그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더니 무심하게 나를 훑어보았다.
그저 단순히 이유를 묻는 말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떳떳하지 못해서였을까. 선뜻 납득할 만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 갑자기 찾아온 것부터가 다소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흐린 하늘 아래 그의 윤곽은 희미하게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눈가에 가득한 피로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나는 마음속의 어색함을 애써 누르고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유연
네 집안에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어서……
연시호
누가 그러던데?
유연
……그 상조회에 있던 임 아주머니.
연시호
그 사람이 아직도 너한테 연락해?
그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말을 끊었다.
연시호
미리 말 안 해줬다고 원망하지 마. 그 상조회랑은 되도록 엮이지 않는 게 좋아.
연시호
뒤에 GR 잔당이 있을 가능성이 있거든.
유연
GR?!
나는 깜짝 놀랐다.
그날 상조회에서 보았던 일들이 걷잡을 수 없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평범한 사람들의 힘을 모으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Evol에 대한 배척과 적대감이 가득했던 사람들……
그동안 느꼈던 미묘한 불안감과 위화감이 뒤늦게 서늘한 한기로 변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연시호
됐어. 나 아직 할 일이 많아서 너까지 챙길 여유 없어.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문객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연시호
내가 준 정보나 잘 챙겨서 돌아가.
??
이 망할 녀석아, 여기 숨어서 뭘……
그때 전 아저씨가 말을 하며 반대편에서 급히 다가왔다. 그는 그늘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전 아저씨
유연이도 왔어?
전 아저씨
아이고, 마음도 참 곱지. 밥은 먹었니? 자자, 이리 와.
그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손짓하더니, 연시호에게도 몇 마디 재촉했다.
전 아저씨
너도 일 끝났으면 얼른 와서 먹어. 지금 몇 숟갈이라도 안 먹어 두면 한밤중에 배고프다고 해도 밥 차려 줄 사람 없다.
유연
전 아저씨, 저는……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려 했지만, 전 아저씨는 이미 천막 쪽으로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떠나기 전에도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전 아저씨
얼른 와. 다들 바쁘니까.
나는 연시호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전 아저씨를 따라갔다.
고개를 숙인 채 흘끗 본 시야 끝에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잠시 멈춰 섰다.
*
그러더니 그 역시 아무 말 없이 뒤따라왔다.
천막 안에는 십여 개의 둥근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사이에는 음식을 나를 수 있을 만큼의 통로만 남아 있었다.
뜨거운 요리들이 쉴 새 없이 올라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운 슬픔을 잠시 흐릿하게 만들었다.
전 아저씨는 나를 빈자리에 앉히더니 연시호까지 끌어다 내 옆에 앉혔다.
전 아저씨
이 아가씨는 시호 친구야. 갈 어르신을 배웅하러 일부러 찾아왔대.
거의 모르는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몇몇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지만, 맞은편에 앉은 아주머니 한 분은 벌써 내 앞으로 그릇과 수저를 내밀고 있었다.
유연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나는 얼른 받아 들고 감사 인사를 했다. 옆에서 술잔을 돌리던 아저씨도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전에 서월 거리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동네에 자주 오나 봐?
아주머니
아가씨는 무슨 일 해? 우리 시호랑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순식간에 온갖 일상적인 질문들이 쏟아졌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것처럼 친근한 태도였다.
나는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전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허허 웃으며 턱짓을 할 뿐이었다. 나를 구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기에 결국 하나씩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이런 자리인 만큼 다들 말없이 고인을 추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은 짓궂어도 악의라고는 없는 수다를 듣고 있으니, 잔뜩 긴장했던 마음도 서서히 풀어졌다.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온기가 음식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주변의 차가운 공기를 조금씩 녹여 주었다. 다만 옆에서는 줄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연시호는 젓가락에도 손을 대지 않은 채 지루하다는 듯 휴대전화만 넘기고 있었다.
주변의 소란은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태도였다.
전 아저씨도 연시호가 딴생각에 빠져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화를 꾹 참으며 탁자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전 아저씨
얼른 먹어. 밤에는 또 빈소를 지켜야 하잖아.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반찬까지 집어 줘야 먹을 셈이냐?
연시호
먼저 드세요. 전 신경 쓰지 마시고요.
나는 옆에서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연시호의 팔에 두른 상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보통 빈소를 지키는 일은 유가족이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내 시선과 의문을 알아차린 듯, 전 아저씨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젓가락을 든 손을 허공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전 아저씨
이건 우리 서월 거리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불문율이란다.
전 아저씨
옛날에 네 갈 할아버지와 시호의 스승, 그리고 최 할아버지까지. 이 세 어른이 서월 거리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어른들이었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서 가벼운 코웃음이 들렸다.
연시호
또 그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예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가자, 나도 모르게 따라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전 아저씨가 나를 가볍게 눌러 앉혔다.
전 아저씨
놔둬. 우린 우리끼리 얘기하면 되지.
그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전 아저씨
수십 년 전만 해도 세상이 참 어수선했어. 도굴꾼에 밀수꾼까지 판을 쳤지. 서월 거리에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단다.
전 아저씨
그때 그 세 사람이 강경하게 나설 때는 나서고, 달래야 할 때는 달래 가면서 이 거리에 쇠처럼 단단한 규칙을 세웠어.
전 아저씨
그 규칙 덕분에 지난 수십 년 동안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거지.
마침 통로를 지나가던 사람이 전 아저씨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아저씨도 가볍게 답한 뒤 말을 이었다.
전 아저씨
빈소를 지키는 규칙은 시호의 스승이 세상을 떠났을 때 생긴 거야.
전 아저씨
그때 갈 어르신과 최 어르신의 후손들이 서월 거리를 대표해서 화 어르신의 빈소를 지켰지. 고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말이야.
전 아저씨
이제 갈 어르신이 돌아가셨고, 시호는 화 어르신의 유일한 제자이니 당연히 스승을 대신해 예를 다해야 하는 거야.
전 아저씨는 아주 오래된 옛일을 떠올린 듯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전 아저씨
옛날에는 그 세 사람이 거리 입구에 서 있기만 해도, 하늘이 무너져도 대신 받쳐 줄 것처럼 든든했는데.
전 아저씨
휴, 이제 그런 일들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우리 같은 늙은이들밖에 없구나.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저씨가 털털하게 손을 내저었다.
전 아저씨
그만하자, 그만해. 갈 어르신도 이만큼 오래 사셨으니 천수를 누리신 거지. 호상이라고 해야지.
나는 입술을 살짝 다물고 식탁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천막 밖에는 여전히 조문객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살피던 내 눈길이 곧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익숙한 모습에 멈췄다. 연시호는 고개를 숙인 채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앞을 어두운 그림자들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지나갔다.
주변이 소란스러울수록 그가 서 있는 작은 공간에는 좀처럼 걷히지 않는 고독이 더욱 짙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일부러 자리를 뜬 건 그저 지겹도록 들었던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를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낮게 드리운 먹구름이 하나로 이어져 말없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마치 그의 속마음까지 가려 버리려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활기와 온기가 끊임없이 주변을 채웠다.
그 온기로 모든 것을 따뜻하게 감싸려는 듯했지만, 끝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은 아득히 갈라져 있었고, 그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수많은 그리움이 가로놓여 있었다.
어쩌면 그 가운데에는 연시호의 몫도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멀어져, 그 자신조차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오랫동안 이어지는 소란 속에서 홀로 이 기나긴 장례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술잔이 여러 차례 오가고, 하늘이 석양에 붉고 금빛으로 물들 무렵에는 식탁의 분위기도 한층 무르익었다.
요즘 어떤 골동품이 소장할 가치가 높은지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진 어른들 몇몇은 지난날의 호기롭던 시절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노인
뭐니 뭐니 해도 옛날이 좋았지……
관자놀이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술잔을 들었다.
술기운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노인
그때 우리 서월 거리 사람들은 무엇보다 충의라는 두 글자를 중요하게 여겼어.
노인
누가 규칙을 어기면 상대가 누구든 따지고 들었지. 하지만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다들 앞다퉈 도와주려고 했어.
노인
화 어르신이 돌아가셨을 때를 생각해 봐. 거리 사람들이 전부 나와서 배웅했잖아. 해외에 있던 사람들도 얼마나 많이 밤새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는데.
노인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오지 않는 사람은 오지 않고, 뿔뿔이 흩어질 사람은 다 흩어졌지. 우리 같은 사람들만 남아서 옛 규칙을 지키고 있어.
전 아저씨
지난 몇 년 동안 자연재해에 온갖 사건 사고까지 끊이지 않았잖아요. 누구나 사정이 있는 법이죠.
그때 탁자에 앉아 있던 중년 남성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남자
그러고 보니 요즘 봉황 거리 쪽에 현동당 상조회라는 곳이 생겼다던데요.
남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서로 의지한다더군요. 우리 동쪽에서 옥을 파는 가게 사장들도 몇 명 가입했다고 들었어요.
노인
……오합지졸이지! 그런 곳을 어떻게 서월 거리와 비교할 수 있겠나?
노인
그런 데서 위로받을 궁리나 할 시간에 우리 서월 거리의 기풍을 어떻게 지킬지 생각하는 게 낫지!
눈앞에서 의분에 찬 목소리를 높이는 어른들을 바라보며, 나는 국그릇을 든 채 잠시 멍해졌다.
서월 거리와 관련된 기억에는 언제나 이렇게 따뜻하고 생생한 풍경이 함께했다.
세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는데도, 이 오래된 거리는 그런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여전히 고집스럽게 본래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과 유대가 서월 거리 전체를 오래되고 부드러운 고치처럼 감싸고 있었다.
그 고치에도 서서히 구멍이 뚫리고 있을지 모른다. 언젠가는 차가운 바람에 산산이 부서져 흩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바깥에서 밀려드는 침식과 풍화에 온 힘을 다해 맞서며 그 안의 사람들과 사물들을 지켜 주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천막 밖에서 연시호처럼 상장을 두른 중년 남성이 그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연시호는 대답하지 않고 아주 작게 고개만 끄덕인 뒤 그 남자를 따라갔다.
나는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바라보았지만, 결국 따라가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식사를 거의 마친 뒤에야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 안에는 여전히 고인을 배웅하러 온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복도를 따라 걷던 중, 한쪽에서 희미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반쯤 열린 나무 창문 너머로 어두컴컴한 방 안에 서 있는 연시호가 보였다.
방 한가운데에는 골동품을 전시하는 선반이 놓여 있었다.
높낮이를 달리해 진열된 도자기와 옥 장식품들이 그의 몸을 절반 넘게 가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조금 전 상장을 두르고 있던 남자가 서서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나무 상자에서 수기 한 권을 발견했어.
??
예전에 네 스승님과 함께 고문자를 연구하던 시절의 기록 같더라. 스승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아버지가 혼자 이어받아서 몇 년 동안 틈틈이 정리하신 모양이야.
나는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연시호의 스승을 언급하자 발걸음이 멈췄다.
연시호
그래요? 두 분한테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
나도 이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을 거야.
??
대충 훑어봤는데 대부분 고문자 연구에 관한 견해야. 주석도 꽤 많이 달려 있고.
??
보아하니 정리를 마치면 너한테 전해 주려고 하셨던 것 같아. 그런데 나중에는 아버지가 자꾸 깜빡깜빡하시게 돼서……
남자는 몇 마디를 더 덧붙인 뒤, 가장자리가 닳아 해진 서류 묶음을 연시호에게 건넸다.
그리고 방을 나갔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조용히 닫혔다.
연시호
……진짜 귀찮게 하네.
그는 혀를 차며 등을 벽에 기댔다.
그러고는 머리를 세차게 몇 번 흔들었다. 가슴이 오르내릴수록 호흡이 점점 힘겨워졌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숙여 누렇게 변한 원고 뭉치를 꺼냈다.
연시호
……
첫 장에 적힌 글씨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힘차고 굳센 행서체에는 연구를 대하는 노인의 엄격함과 집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붓끝 곳곳에는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과 패기가 배어 있었다.
——우리는 모든 한자에 담긴 의미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연시호는 반사적으로 피식 웃더니 뒷장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십여 장을 넘기자 노인의 글씨가 갑자기 끊겼다.
그다음부터는 단정하고 반듯한 다른 필체가 앞선 연구를 한 줄 한 줄 이어 가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는 여백을 이용해 별도의 설명까지 덧붙여 놓았다. 읽어 내려갈수록 연시호가 종이를 넘기는 속도도 점점 느려졌다.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 사적으로 그다지 교류가 없었고, 때로는 지나치게 엄격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어른이……
오랜 벗이 끝내 이루지 못한 뜻을 완성하기 위해, 그 제자에게 전해 줄 주석을 이렇게 정성껏 정리하고 있었을 줄은.
그 뒤로 넘어가자 글씨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지런했던 줄 간격도 점차 흐트러졌다.
어떤 주석은 쓰다 말고 끊겨 있었고, 몇 줄을 건너뛴 뒤에야 다시 처음부터 이어졌다.
글을 쓴 사람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던 것 같았다.
붓끝을 애써 바르게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글씨가 흐트러져 갔다.
마지막 장에 이르자 주석과 연구 내용은 완전히 흩어진 낱말들의 나열로 변해 있었다. 다만 맨 끝에는 온전한 문장 몇 개가 남아 있었다.
마치 석양이 저물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한 줄기 빛 같았다.
갈 어르신
이제 나이가 들어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구나.
갈 어르신
하지만 여기까지 글을 남기는 지금, 내 마음에는 조금의 후회도 없다.
갈 어르신
역사와 문명은 세상 만물이 변한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갈 어르신
세월은 사람의 육신을 쇠하게 할 수는 있어도,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세상의 불씨까지 꺼뜨릴 수는 없다.
갈 어르신
지나온 모든 날은 우리가 비롯된 곳이며, 앞으로 이어질 머나먼 길 또한 결국 돌아갈 길이다.
갈 어르신
뒤에 오는 이들이 긴 여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처음 품었던 뜻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연시호는 손을 내렸다. 바람이 불어와 수기의 한쪽 귀퉁이를 요란하게 들추었다.
그 바람은 먼지 속에 묻혀 있던 지난날의 기억까지 눈앞으로 끌어왔다.
그는 노인이 예전에 어떻게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쳤는지 떠올렸다.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기대를 담아 자신이 평생 쌓아 온 지식을 세심하게 전해 주던 모습.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늘 사고만 치고 다니는 제자를 조금도 숨김없이 자랑하던 모습.
골칫거리이면서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겼던 제자였다.
그 시절의 서월 거리를 그는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곳의 돌길을 얼마나 수없이 오갔는지 알 수 없었다.
처마 끝이 하늘을 잘라 만들어 낸 풍경은 어느 곳이나 닮았으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바깥세상이 뒤집힐 만큼 변하는 동안에도 이곳 사람들은 늘 한결같은 것처럼 보였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그 중심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안에서 줄곧 살아왔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당연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 당연한 일상 속에서 평범하고 사소한 일들이 제멋대로 자라나도록 내버려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무언가가 그를 거세게 뒤흔들고 있었다.
동시에 그에게서 무언가를 억지로 떼어 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이 서월 거리에서 벌써 십여 년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같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이 얼마나…… 재미없는 일인가.
새롭게 가볼 만한 곳은 그렇게나 많은데, 그는 어째서 번번이 이곳으로 돌아왔을까.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골동품점의 문을 열었을까.
왜?
스승에게 받은 은혜 때문인가?
아니면 뼛속 깊이 스며든 어떤 책임감과 전승의 의무 때문인가?
마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도려낸 것 같았다. 원래라면 굳이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을 그 질문의 답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연시호
……
그는 눈을 내리깔고 손에 든 수기 뭉치를 바라보았다. 석양 아래 비친 글씨들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쉴 새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터질 듯 아팠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초조함과 방황이 밀려왔다.
관자놀이를 짓누르던 통증이 다시 묵직하게 욱신거렸다.
손에 쥔 종이도 구겨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갑자기 손에서 힘을 풀었다.
수기를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넣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유연
……!
방금 그 긴 침묵 속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서 초조하고 불안한 먹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라도 폭우를 쏟아 낼 것 같은 먹구름이었다.
나는 그를 불러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때 몇몇 어른들이 다가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리가 멀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연시호의 미간이 점점 깊게 찌푸려지는 것만은 보였다. 마침내 그는 상대의 말을 끊었다.
연시호
난 내가 해야 할 일만 할 거예요. 나머지까지 책임질 의무도 없고, 그럴 만큼의 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9-23 가까이 있지만 먼 곳 (近在远方)
사람은 늘 무언가를 바라며 살아간다. 그러나 마음에 헛된 욕망이 자리 잡으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보지 못하게 된다.
*서월 거리
혈육의 정에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이익은 거울과 같아서 사람의 속마음을 훤히 비춰 준다.
남자 A
야, 이리 와 봐. 내가 500위안 건다.
갈 어르신네 자식들, 유산 차지하려고 서로 머리 터지게 싸울 게 뻔해. 믿어, 안 믿어?
남자 B
설마. 장례식장에서 밥 먹을 때 보니까 형제자매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남자 A
그때야 돈 나눌 일이 없으니까 우애 좋은 척한 거지.
갈 어르신 명의로 된 오래된 집 두 채가 곧 철거될 예정이잖아. 어느 쪽이든 몇백만 위안은 족히 나갈 텐데?
남자 B
그 사람들도 돈이 아쉬운 형편은 아니잖아.
내 생각엔 결국 다 같이 똑같이 나눌걸. 그래도 다들 사회적으로 체면이 있는 사람들이잖아.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남자 A
그럼 내기할래?
남자 B
그런 걸로 너랑 내기해서 뭐 해? 아무리 이웃사촌이라도 집안 망신은 밖으로 안 내놓는 법인데.
정말 머리 터지게 싸운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온 동네에 떠들고 다니면서 너한테까지 알려 주겠냐?
남자 A
세상에 새지 않는 비밀이 어딨어! 난 알아낼 방법이 다 있다고. 그래서 걸 거야, 말 거야?
남자 B
좋아, 난 판돈 더 올려서 천 위안 건다!
……뭐, 지면 그냥 안 주면 그만이지.
남자 A
너 혼자 뭐라고 중얼거려?
남자 B
아무것도 아니야. 자, 자! 이제 걸었으면 못 물러!
*춘계다원
신의 가호
-부자는 향을 피우고, 가난한 사람은 점을 본다.
자원봉사자 A
어? 너 들었어? 아까 그 참배객이 절에 향화전으로 십만 위안을 기부했대.
절에서 제일 굵은 향도 그 사람이 피운 거래.
자원봉사자 B
그렇게 돈이 많아?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자원봉사자 A
내가 알기로는 AI 연산 기술이랑 대규모 AI 모델을 개발하는 회사 사장이래.
여기 정기적으로 와서 향을 피우고, 하는 일마다 순조롭게 풀리게 해 달라고 신께 빈다더라.
자원봉사자 B
뭐? 최첨단 기술을 다루는 사람도 그런 걸 믿어?
자원봉사자 A
그러니까 말이야. 조금 전까지 코드를 만지던 사람이 곧바로 신 앞에 무릎 꿇고 복을 빌고 있으니.
자원봉사자 B
부자들은 참 별나다니까. 그래도 난 부럽진 않아.
나도 며칠 전에 용하다는 선생님한테 사주를 봤거든. 타고난 재물운이 있어서 삼 년 안에 적어도 A9급은 될 거래.
자원봉사자 A
쯧, 너야말로 전형적인 가난한 사람 팔자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는 거 못 들어 봤어? 부자는 향을 피우고, 가난한 사람은 점을 본다고.
돈 있는 사람들이 향을 피우면서 비는 건 지금 가진 걸 그대로 지키는 거야.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까, 언젠가는 운이 풀릴 거라는 환상이라도 돈 주고 사는 거지.
자원봉사자 B
……
그렇게 말하니까 마음이 너무 쓰린데.
자원봉사자 A
쓰릴 만하지. 그래도 너무 속상해하진 마.
우린 그래도 늘 신을 모시는 곳에서 봉사하면서 공덕을 쌓고 있잖아. 언젠가는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자원봉사자 B
……그것도 결국 또 다른 환상 아니야?
자원봉사자 A
맞아. 하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몸으로 봉사하면서 공덕을 쌓고 운이 풀리길 바라는 게, 돈 내고 점 보는 것보단 낫잖아.
*구도심
공유 자전거
-당장 작은 어려움만 닥쳐도 사람은 제 집 앞의 눈을 치우기 바쁘다.
행인 A
야, 너 거기서 수상하게 뭐 하는 거야?
잠깐, 공유 자전거 안장에 왜 못을 박고 있어?!
이 **, 세상에 불만 있다고 아무한테나 화풀이하는 거야? 당장 그만둬. 안 그러면 경찰에 신고한다!
행인 B
하든가.
마침 가진 돈도 몇 푼 안 남았는데, 경찰서 가면 먹여 주고 재워 주기까지 하겠네.
행인 A
……
진짜 미친놈이네. 대체 이런 짓을 해서 뭐 하려고?
네가 박아 놓은 못에 재수 없는 누군가가 찔린다고 해도, 그걸 네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행인 B
너야말로 ** 미친 거 아냐? 신고할 거면 빨리 하고, 안 할 거면 저리 꺼져.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까불다간 너도 이 못으로 찔러 버린다.
행인 A
그래, 찔러 봐! 어디 한번 찔러 보라고!
너 ** 혼자만 경찰서 가서 먹고 자고 싶은 줄 알아? 나도 병원에 누워서 마음 편히 쉬고 싶거든.
지금 내 근무 시간이야. 네가 내 몸에 손끝 하나만 대도 산재 처리할 수 있다는 거 알아, 몰라?
자, 찔러 보라니까! 나 좀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행인 B
……미친놈. 상대하기도 싫다.
행인 A
이제 안 찌를 거야? 그럼 멀쩡한 공유 자전거 한 대는 남겨 둬. 나 출근해야 하니까.
9-24 하나의 세계선 (一条世界线)
밤이 점점 깊어지면서 빈소에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문객들은 대부분 돌아갔고, 갈씨 집안의 친척들도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탁자에 엎드려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무릎에 턱을 괸 채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사실 진작 이곳을 떠났어야 했지만, 무슨 마음에서인지 연시호와 함께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 역시 드물게 내 존재를 묵인한 채 한쪽 무릎을 세우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평소 날카로운 빛을 띠던 금빛 눈동자는 지금 힘없이 반쯤 감겨 있었고, 그 안에는 좀처럼 볼 수 없던 무기력함이 배어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밤의 정적 속에서는 어떤 말을 꺼내도 공허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달빛이 서서히 기울어 가자, 함께 빈소를 지키던 사람들도 더는 졸음을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의논하더니 교대로 뒤뜰에 가서 쉬기로 했다.
마지막 발소리마저 문밖으로 사라지고, 빈소에는 나와 연시호 둘만 남았다.
차가운 기운과 졸음이 뒤섞여 조금씩 눈꺼풀을 짓눌렀다.
나는 애써 눈을 크게 뜨려고 했지만, 머리가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그때 밤새 침묵하던 옆 사람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연시호
사실 갈 어르신은 나랑 별 관계 없어.
몽롱하던 정신이 순식간에 조금 또렷해졌다. 고개를 돌려 연시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여전히 머리를 벽에 기댄 채였다.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일까. 오히려 그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순간 목이 메는 것 같아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연
알아.
유연
전에도 그분 얘기는 거의 안 했잖아. 그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겠지.
연시호
그런데 넌 왜……
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억지로 삼켰다.
밤바람에 제사상 위의 하얀 초가 일렁였다.
나는 그가 끝내 하지 못한 말을 굳이 이어 묻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유연
아주아주 어렸을 때 일이 생각나서…… 아빠가 아시던 어른 한 분이 돌아가셔서, 나를 이런 곳에 데려오신 적이 있거든.
유연
사실 그때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아. 바람에 비닐 천막이 펄럭이던 소리랑 하얀 천들이 흔들리던 모습만 기억나.
유연
그때 내가 안 들어가겠다고 울면서 떼를 썼더니, 아빠가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어……
옆에 앉은 사람은 줄곧 얕고 고른 숨을 쉬고 있었다.
마치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귀담아듣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흐릿한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두서없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러다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쯤……
연시호가 투덜거리듯 입을 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내 수다에서 이제야 트집 잡을 거리를 하나 찾은 모양이었다.
연시호
네 어릴 적 얘기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
유연
상관없긴 하지. 그래도 이런 곳에 오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유연
삶과 죽음으로 헤어지는 일이 꼭 가까운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잖아.
유연
아무 인연도 없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한밤중에 앉아서 바람에 흔들리는 하얀 천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덩달아 허전해지기도 하니까.
사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이야기하는 편이 침묵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연시호
……
연시호는 아무 대답 없이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는 시선을 마주하자 내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유연
알았어. 그만할게.
말을 마친 나는 일부러 옆으로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러자 연시호가 코웃음을 쳤다. 내 행동이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웃음이 나온 것 같았다.
연시호
네 마음대로 해.
그는 다시 머리를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정말 많이 지쳤는지 그의 호흡은 금세 느리고 고르게 변했다.
밤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바람은 끊임없이 문틈을 비집고 구석까지 스며들었다.
추워서 그런 걸까. 연시호는 이따금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한동안 고르게 이어지던 숨소리도 점차 답답해졌고, 가끔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힘겨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 기척이 자꾸 신경 쓰였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조용히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손가락이 우연히 그의 손등에 닿는 순간, 심상치 않은 열기가 전해졌다.
유연
……?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관자놀이 부근에는 희미하게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숨소리도 한층 거칠어져 있었다.
열이 나는 건가?
낮에도 평소와 달리 유난히 지쳐 보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역시나.
내 손길을 느낀 연시호가 둔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평소의 날카로운 눈빛은 열기에 흐려진 듯 초점이 다소 풀려 있었다. 그의 가슴이 한 차례 크게 들썩였다. 그는 짜증스럽게 코를 찡그렸다.
연시호
넌 또 뭐 하는데.
유연
너 왜 이렇게 뜨거워?
우리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진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연시호의 목덜미에서 깊고 어두운 빛이 잠깐 번쩍였다.
유연
……?
연시호
……
나는 무의식적으로 빛을 발하는 잠자리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무슨 상황인지 몰라 멍해졌다.
내 시선을 따라 연시호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연시호
나 지금 피곤하니까 질문 하나만 받아 줄게.
연시호
잘 생각하고 물어봐.
잠자리눈에 남아 있는 희미한 빛이 피로를 억지로 견디고 있는 그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비추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나는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연
약은 먹었어?
연시호
……
그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
연시호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더니, 그가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잘게 부서진 금빛 눈동자가 유난히 깊어 보였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연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돌아왔을 때도 연시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을 보니 몸이 꽤 괴로운 모양이었다.
나는 근처의 24시간 약국에서 사 온 해열제와 물을 들고 발소리를 죽이며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내 손에 들린 물건들을 흘끗 보았다.
그러고는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연시호
한밤중에 그렇게 돌아다니면 피곤하지도 않냐?
연시호
쓸데없는 짓을 하네.
유연
얌전히 약 먹으면 쓸데없는 짓도 안 할게.
나는 그를 흘겨보며 쪼그려 앉아 해열제 상자를 꺼냈다.
유연
그리고 너 때문에 일부러 다녀온 것도 아니거든.
유연
빈소를 지키는 동안에는 돌아가신 분의 영혼도 그 자리에 머문다고 들었어.
유연
곁에 있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자기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슬퍼하는지 지켜보는데, 그러면 마음 편히 떠나지 못한대.
유연
갈 어르신은 너랑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네 스승님이랑은 각별한 사이였을 거 아냐.
그는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유연
낮에 우연히 들었거든……
눈앞의 이 사람이 자꾸만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나도 괜히 심술이 나서 몇 마디 받아쳤다.
유연
네가 계속 그렇게 무리하면, 갈 어르신이 저세상에 가시자마자 네 스승님부터 찾아가서 이를지도 몰라.
유연
다 큰 녀석이 아직도 제 몸 하나 제대로 못 챙긴다고 두 어르신께 놀림받고 싶어?
나는 그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손바닥을 펼쳐 그 위에 알약을 올려놓았다.
유연
먹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
나도 그를 따라 옆에 털썩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귀만은 쫑긋 세워 그의 움직임을 몰래 살폈다.
연시호
……
연시호는 물 흐르듯 거침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자신을 닮은 구석마저 있어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사람의 행동은 언제나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 같았다.
가슴속에서 피어오른 웃음이 욱신거리는 관자놀이까지 건드렸다. 그는 속으로 욕을 한마디 내뱉었다. 머리가 한층 더 어지러워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희미하게 빙글빙글 돌았다. 손바닥 위의 알약은 오랫동안 날카로운 모서리로 살을 누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지.
멍하니 있는 사이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겹겹의 파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 아득하고 흐릿했다.
유연
평소에는 꼭 고슴도치처럼 굴면서…… 몸은 왜 그렇게 약해? 볼 때마다 열이 나는 것 같아.
유연
열이 나면 좀 쉬기라도 하지, 꼭 무리하려고만 하고……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하고,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비닐봉지가 놓인 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유연
봉지 안에 열 내리는 패치도 있으니까 알아서 찾아 써.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머리를 뒤로 기대고 다시 조용해졌다.
그녀의 숨소리는 금세 고르게 변했다.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이 이미 그녀의 속셈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는 척하는 거냐?
연시호가 눈을 내리깔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전부터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더니, 확실히 좀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찾아온 가벼운 기분도 그의 마음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얇은 옷감 너머, 조금 전 빛을 발했던 가슴께의 잠자리눈에는 아직 희미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이미 며칠 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잠자리눈에 저장된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기록 속에,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들이 끼어들어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난과 혼란으로 도시는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고, 사방에는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달아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장면들은 공교롭게도 최근 한 달 사이의 기록이었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광경을 마주하고, 그 역시 그 장면들이 평행세계의 것일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모든 세계선은 이미 하나로 수렴했으니까.
게다가 그는 강제로 세계선을 도약하려는 시도까지 해 보았다.
그러나 잠자리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로서는 자신의 추측을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
연시호는 뜨거운 숨을 소리 없이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그런데 마침 그녀가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불쑥 마주쳤다.
그녀는 화들짝 굳어 버리더니,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분하다는 듯 눈썹까지 찌푸렸다.
……아, 분해.
하필 딱 걸리다니!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하고, 눈을 꼭 감은 채 계속 자는 척했다.
바로 다음 순간, 옆에서 어이없으면서도 웃긴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시호
야, 그만 자는 척해.
유연
……
나는 억지로 몇 초를 버텼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그러고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의 손바닥을 노려보았다.
유연
누가 할 소린데. 넌 약 하나 먹는 것도 왜 그렇게 꾸물거려……
연시호
그럼 물이라도 줘야 할 거 아냐.
그제야 나는 물병을 줄곧 손에 꼭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둘러 그에게 물을 건넸다. 연시호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알약이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내내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조금 놓였다.
유연
……그래도 열 때문에 정신까지 나간 건 아니네. 약 먹을 줄은 알고.
연시호
네가 하도 떠들어서 귀가 아프니까 그렇지.
유연
이제 아무 소리도 안 낼 거야. 나도 피곤하거든.
연시호
그럼 잘 가. 배웅은 안 한다.
……이 사람한테 다정한 말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머리를 뒤로 젖혀 벽에 기댔다.
아픈 사람하고는 말싸움하지 않기로 했다.
유연
피곤하다고 했잖아. 좀 쉬었다가 갈 거야.
유연
날 밝으려면 아직 좀 남았으니까 너도 잠깐 눈 좀 붙여.
유연
낮이 되면 더 바빠질 테니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으로나마 내 말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가 또 무슨 반박을 꺼내기 전에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유연
나 요 며칠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 이제 진짜 잘 거야. 잘 자.
연시호
……
연시호
누가 물어봤냐?
그가 툭 던진 말이 밀물처럼 몰려오는 졸음 속으로 희미하게 가라앉았다.
잠에 빠져들락 말락 하는 사이, 연시호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는 것 같았다.
연시호
아, 맞다. 확인할 게 하나 있는데.
연시호
이건 내가 너한테 신세 하나 진 걸로 할게.
유연
……쿨……
연시호
……
연시호
……바보.
꿈속에서 연시호가 나를 바보라고 욕한 것 같았다.
바로 다음 순간, 깊고도 눈부신 빛이 느닷없이 내 망막을 비추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뜨려 했다.
그러나 졸음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력이 나를 붙잡아, 어둠 속으로 빠르게 끌어내렸다.
수없이 많은 별빛이 지면 위를 흐르고 있었다.
그 빛들은 시공의 끝에 자리한 거대한 시계판 위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빛의 고리를 비추었다.
이택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차갑고 준엄한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연모시 곳곳에는 셀 수 없이 거대한 시공의 균열들이 숨어 있었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흩어진 작은 틈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계판이 소리 없이 한 번씩 돌아갈 때마다……
어두운 균열들은 끝없이 뻗어 나가기라도 하듯,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이택언
……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던 빛이 그의 윤곽을 밝게 비추었다.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이 상황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법칙 위에 군림하며, 모든 것을 굽어보고 있었다.
9-26 어긋난 기억 (记忆错位)
몽롱한 의식 속에서 어디선가 스며든 찬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눈을 뜨자, 시야 끝에 있는 창문이 어느새 열려 있었다. 바람이 끊임없이 밖에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유연
……
나는 일어나 창문을 닫으려다가 문득 곁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연시호는 어디 갔지?
졸음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방은 어둑어둑했고, 조금 전까지 빈소를 가득 채웠던 근조화환과 밤새 타오르던 촛불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 대신 구석에는 낡은 종이상자 몇 묶음이 쌓여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희미하게 배어 나왔다. 나는 바짝 마른 목으로 침을 삼켰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잠든 사이에 연시호와 다른 사람들이 벌써 빈소를 정리한 걸까? 그렇다면 나는 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지……
유연
연시호?
떨리는 목소리가 방 안에 희미한 메아리를 남겼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함 속에서 점점 빨라지는 내 심장 소리만 유난히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오싹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이렇게 기이한 광경을…… 전에도 겪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 B.S.의 주신 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나는 분명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그때 바깥에서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밤이라 그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문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문고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잠가 버린 모양이었다.
유연
…………
당황한 탓에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속을 울렸다.
나는 억지로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고개를 돌려 활짝 열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정 안 되면 창문으로라도 나가야겠어.
발을 디딜 만한 곳이 있는지 확인한 뒤, 잡동사니가 담긴 상자를 밟고 힘겹게 창문을 넘어갔다.
밤이 내려앉은 서월 거리는 고요했다.
길 양옆의 상점들은 문과 창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낮에는 집집마다 처마 밑에 걸려 있던 하얀 등불마저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도 장례식을 치른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설마 서월 거리의 모든 사람이 한밤중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어나, 장례식에 쓰인 물건들을 몰래 전부 치웠을 리는 없잖아?
미묘하게 현실이 어긋난 듯한 감각이 다시 밀려왔다.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려던 순간, 거리 끝에서 희미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저 방향은…… 연시호의 골동품 가게잖아!
설마 연시호가 가게로 돌아간 건가?
지금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을 따질 겨를도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불빛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침 그때 익숙한 그림자 하나가 골동품 가게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듯했다.
유연
연시호……?
밤이 워낙 고요해서 나는 멀리서 그의 이름을 한 번 불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대로 앞쪽 골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서둘러 뒤쫓았지만,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눈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직감에 따라 그가 평소 자주 다니던 방향을 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널찍한 거리에 도착했다.
누렇게 빛나는 가로등 아래에는 일찍 장사를 시작한 노점상 몇 사람이 벌써 좌판을 펼쳐 놓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따끈한 음식 냄새가 퍼져 있었다.
연시호는 노점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그 역시 나를 발견했는지 이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
연시호
……알았어. 갈 어르신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는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연시호
이 한밤중에 여기서 뭐 해? 몽유병이라도 걸렸어?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무슨 소리야? 너야말로 나한테 말도 없이 가 버리고, 혼자 나를 거기에 남겨 두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앞의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연시호는 그 자리에 앉아 내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눈썹과 눈매에는 방해받아서 귀찮다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연시호
말하다 마는 건 뭐야. 또 잠들었어?
익숙하면서도 얄미운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병색이 완연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강렬한 위화감이 마음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황급히 한 걸음 다가가 그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재빠르게 고개를 옆으로 틀어 내 손을 깔끔하게 피했다.
연시호
야, 뭐 하는데?
유연
너야말로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굴어……
유연
열이 너무 많이 올라서 그런 거야, 아니면 벌써 다 내린 거야?
연시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눈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웃음기가 선명하게 어렸다.
연시호
내가 보기엔 네가 열 때문에 정신이 나간 것 같은데.
그는 손을 들어 내 어깨를 짚더니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뒤로 밀어 우리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접촉은 순식간에 끝났지만 옷감 너머로 전해진 체온은 지극히 정상적인 미지근함이었다.
그의 장난스러운 말투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오히려…… 훨씬 더 무서운 어긋남이 조용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망설이다가 확인하듯 물었다.
유연
연시호, 우리 아까까지 같이 있었잖아. 그렇지?
유연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갈 어르신 빈소에서 같이 밤을 지키고 있었잖아……
연시호
갈 어르신?
그가 꽤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나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연시호
너 언제부터 나보다 소식이 빨라졌냐?
연시호
난 방금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넌 벌써 알고 있다고?
유연
전화……?
조금 전 골동품 가게에서 나와 통화하던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얼음장 같은 한기가 온몸을 덮쳤다.
유연
……방금이라니? 너 낮부터 계속 장례 준비하느라 바빴잖아……
그때 가게 주인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완탕 한 그릇을 내오면서 내 생각을 끊었다.
주인
맛있게 드세요.
연시호도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방금까지 눈에 어려 있던 장난기가 사라지고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나무 가루를 털어 냈다.
그가 나를 무시하고 밥이나 먹으려는 것 같자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성큼 다가가 그의 옆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유연
연시호,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그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완탕 하나를 떠 올려 뜨거운 김을 후후 불었다.
연시호
듣고 있어. 네가 어떻게 갈 어르신 일을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시호
네가 지어낸 이야기는 별로 관심 없어.
유연
……
유연
나 이야기 지어내는 거 아니야. 갈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처음에 임 아주머니한테 들었고, 그다음에……
연시호
그 아줌마가 아직도 너한테 연락해?
그 이름을 듣자 연시호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
연시호
미리 경고 안 했다고 하지 마. 그 상조회랑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야.
연시호
그 뒤에 GR 잔당이 있을 수도 있거든.
유연
…………!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이건 낮에 그가 했던 말이잖아? 말투까지 똑같았다. 이제는 단순히 기억이 어긋나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시간마저 거꾸로 흐른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연시호의 휴대전화 화면이 밝아졌다. 나는 무심코 화면을 바라보았다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날짜는 틀리지 않았다. 시간도 맞았다. ……이제 곧 날이 밝을 참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오히려 연시호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연시호
너 왜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냐?
유연
……내가 겪은 일은 귀신을 보는 것보다 더 심각할지도 몰라.
유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말해도 네가 안 믿을 것 같고……
연시호
일단 말이나 해 봐.
잘게 부서진 금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자 팽팽하게 긴장했던 마음이 이상할 만큼 갑자기 풀렸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유연
상조회랑 그 뒤에 GR이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 너 낮에도 나한테 똑같이 했어.
연시호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듯했다.
연시호
그래. 또?
나는 잠시 말을 고른 뒤, 낮에 일어났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처음에 그는 별 관심 없다는 듯 그릇 속의 완탕만 뒤적이며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잠자리눈이 빛을 발했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젓가락을 쥔 손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것으로 순간적으로 일렁였던 감정을 감춰 버렸다.
연시호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유연
뭐?
연시호
너 예지몽 꾼 거 아냐?
유연
……
유연
그럼 내가 눈을 떴을 때 왜 집 침대가 아니라 서월 거리, 그것도 빈소에 있었는지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연시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눈썹만 살짝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남아 있던 완탕을 몇 입 만에 다 먹어 치웠다.
그는 휴지 한 장을 뽑아 입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시호
무슨 빈소가 있다는 거야. 가자. 직접 보여 줘.
그는 먼저 몸을 돌려 옆 노점으로 가더니, 갓 구워 낸 샤오빙 하나를 샀다.
다음 순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이 그대로 내 품으로 날아들었다.
연시호
길 안내해 주는 수고비야.
연시호를 데리고 활짝 열린 창문 앞으로 돌아왔을 때, 밤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사방은 꿈속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기억 속의 그 장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종이상자만 남아 텅 비어 있는 방 안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설명했다.
유연
낮에는 여기가 갈 어르신의 빈소였어.
유연
그때 조문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고, 옆에서는 지 언니도 이것저것 일을 하고 있었어……
유연
그다음 식사 자리에서는 전 아저씨가 서월 거리의 옛날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셨고……
나는 직접 겪어 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세세한 일들을 쉼 없이 늘어놓았다. 이번에는 연시호도 내 말을 끊지 않았다.
그는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여 방 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림자 속에 가려져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유연
이제는 믿겠지?
연시호는 방 안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가락 끝으로 벽에 묻은 먼지를 문질러 털어 내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연시호
일단 삼 할 정도는 믿어 줄게.
유연
……
눈앞의 연시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지만, 내 마음속의 위화감은 오히려 점점 강해졌다.
왠지 그는 내가 한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무언가를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그가 끝까지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면,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물어보고 싶었다.
유연
연시호, 사실 이런 식으로 기억이 어긋나는 일이 처음은 아니야.
유연
지난 한 달 동안 나와 다른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전부 조금씩 달라져 있는 것 같아.
유연
마치…… 연모시가 두 개 존재하는 것처럼.
유연
그리고 지금의 너를 보고 있으면, 마치 또 다른 연시호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연시호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그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연시호
네가 나를 몇 명의 연시호로 보든 상관없어.
연시호
이제 볼 구경은 다 했으니까, 나도 할 일 하러 가야겠네.
유연
어디 가려고……?
연시호
너한테 알려 줄 의무는 없는데.
말을 마친 연시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서서히 피어오르는 새벽안개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뒤쫓으려 했다.
그러자 연시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내저었다.
연시호
따라오지 마.
연시호
안 그러면 널 따돌리느라 또 머리 써야 하잖아. 귀찮게.
9-28 새벽과 황혼의 경계 (晨昏边界)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하늘 끝에 희미한 새벽빛 한 줄기가 피어오르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 ‘빈소’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이 현실 같지 않은 몽롱함으로 가득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몇 번 희미하게 들려오더니, 이내 고요한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세상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했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평소 아침의 활기와는 어딘가 달랐다. 쓸쓸하고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갈 어르신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대문에는 오래된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문 위 처마는 텅 비어 있었고, 코를 찌르던 향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전 아저씨를 찾아가서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 할까……?
하지만 회사에서 겪었던 일들이 떠오르자, 내딛으려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멈췄다. 아무리 확인해도 결국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유연
……
나는 천천히 손바닥을 펼쳐 몸속에서 조용히 흐르는 힘을 느껴 보았다. 그 기묘하면서도 강렬한 견인력이 아직도 손끝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설마 내가 겪고 있는 이 이상한 일들이 내 능력과 관계가 있는 걸까?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목적지도 없이 걸었다.
그러다 넓게 퍼진 아침 햇살이 정면으로 쏟아지고 나서야, 어느새 서월 거리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넓은 도로에는 차도, 행인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버스 한 대가 조금 떨어진 정류장에 천천히 멈춰 서고 있을 뿐이었다.
낯익은 노선이었다.
우리 집 근처까지 곧장 가는 버스였다.
……일단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집에 가서 푹 자는 게 낫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시야가 흔들렸다.
익숙하고도 강렬한 견인력이 또다시 밀려왔다. 눈앞의 풍경이 기괴한 소용돌이처럼 일그러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옆으로 쓰러질 뻔하다가 황급히 난간을 붙잡고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
유연
……!
몸이 찢어질 듯한 감각이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러자 눈앞의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도로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버스도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정차해 있었다.
방금 전의 광경이…… 극심한 피로 때문에 생긴 어지럼증에 불과했던 것처럼.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버스 계단에 발을 올리자마자 기사가 짜증스럽게 재촉했다.
기사
빨리 타요. 곧 출발합니다.
유연
……
그의 짜증 섞인 태도에 대꾸할 기운조차 없었다.
나는 말없이 휴대전화를 들어 승차 코드를 찍었다. 자리를 찾아 앉으려던 순간,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거리에서 남보랏빛 인영 하나가 버스 뒤쪽 창문 너머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역시 차 안에 서 있는 사람을 알아차렸는지 마침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새벽빛이 두꺼운 구름 사이를 뚫고 쏟아져 내렸다.
그 빛이 옅은 땀에 젖어 있고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그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당혹감이 뚝 멈췄다.
다급하던 발걸음은 오히려 느려지더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망설이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왜 이곳까지 달려왔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연시호
……
나는 그가 한참 망설이다 결국 돌아서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바로 다음 순간, 공기압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성큼 발을 내디뎌 문이 닫히기 직전 버스에 올라탔다.
유연
너, 너 왜 다시 돌아왔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버스가 출발하며 흔들리는 순간, 평소답지 않게 덥석 내 손목을 붙잡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익숙한 박하 향이 순식간에 코끝을 스쳤다.
나는 눈앞까지 가까워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유연
왜 그래?
그 순간, 팽팽하게 긴장해 있던 그의 어깨가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 그러더니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황급히 손을 놓고 우리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방금 전 자신이 이성을 잃었던 순간을 감추려는 듯 일부러 미간까지 찌푸렸다.
연시호
너 방금 나 봤어?
유연
……?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 어리둥절한 얼굴에서 이미 원하는 답을 얻은 듯 고개를 돌려 기사를 바라보았다.
연시호
길가에 좀 세워 주세요. 버스를 잘못 탔어요.
기사
……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바라보더니 인상을 사납게 찌푸렸다. 이내 귀청이 떨어질 듯한 고함이 버스 안에 울려 퍼졌다.
기사
버스를 잘못 타긴 뭘 잘못 타요! 저 아가씨 따라 뛰어온 거잖아요!
기사
그리고 내가 버스 운전하면서 지켜야 할 규칙이 없어요? 당신들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줄 알아요?
연시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는지, 그는 콧방귀를 한 번 뀌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기사가 백미러로 그를 다시 노려보더니 또 한 번 고함을 질렀다.
기사
뭘 멀뚱히 서 있어요! 요금부터 찍어요!!
연시호
…………
연시호는 이를 악물었다.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꺼내 단말기에 갖다 댔다. 삑 하는 소리가 울렸다.
요금을 낸 그는 굳은 얼굴로 버스 문 앞으로 걸어갔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 생각인 듯했다.
버스에 올라탄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의도적으로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가슴까지 답답해졌다.
나는 그를 따라가 맞은편에 섰다.
유연
너는 왜 항상 이렇게 제멋대로야?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설명도 제대로 안 해 주고……
연시호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대체 누군데.
뜻밖의 반박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미처 반박하기도 전에 그가 짜증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연시호
됐어. 그냥 나 안 보이는 사람 취급하면 안 되냐?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말투는 여전히 얄미웠지만, 목소리에는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피로가 배어 있었다. 문득 무언가 깨달은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역시나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연시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을 탁 쳐냈다.
연시호
나 없는 사람 취급하라니까?
유연
……이렇게 멀쩡히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없는 사람 취급을 해.
유연
내가 너도 아니고. 넌 항상 사람 무시하는 걸 좋아하지만.
그의 입술 끝이 살짝 움직였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승객이 몇 명 없는 버스 안에는 한동안 엔진 소리만 울렸다. 그러다 차 지붕 위로 간헐적인 빗방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예고도 없이 내리기 시작한 가랑비가 새벽빛 사이로 흩날렸다. 유리창을 타고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빗물이 풍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아까 손끝에 닿았던 뜨거운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이따금 마음을 콕콕 찔렀다.
여전히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유연
아직 이해가 안 되는 게 많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아.
유연
……네가 어느 쪽 연시호인지 알겠어.
그의 속눈썹이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의 느긋한 태도로 감정을 감췄다.
연시호
어느 쪽인데?
유연
얄미운 쪽.
그 대답에 그는 잠깐 멍해졌다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연시호
그래? 그럼 아직 제대로 못 알아본 거네.
연시호
난 언제나 얄미운 놈이거든.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무언가 가슴을 살짝 찌르는 것 같았다.
유연
그러니까…… 넌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연시호
무슨 뜻인데?
나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무언가를 보여 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어라……?
그가 사 준 샤오빙은 어디 갔지? 내가 갑자기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자 연시호의 눈썹이 더욱 높이 올라갔다.
유연
……어, 네가 사 준 샤오빙이 없어졌어.
유연
아니,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덜 얄미운 쪽의 네가 사 준 샤오빙이야.
연시호는 잠시 멍해졌다. 모순된 내 말을 알아들은 듯 눈동자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괜히 허세를 부리듯 웃어 보였다.
연시호
내가 너한테 먹을 걸 사 줬다고? 그건 내가 할 만한 짓이 아닌데.
유연
그럼 나를 쫓아서 버스까지 달려온 건 네가 할 만한 짓이고?
연시호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때 버스 안에 안내 방송이 울렸다. 차체가 앞으로 살짝 기울더니 정류장에 멈춰 섰다.
연시호가 아무 말 없이 내리려 하자, 나는 재빨리 손잡이를 붙잡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유연
넌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아직 할 말이 남았어.

창밖의 빗줄기는 조금 더 굵어진 것 같았다. 빗방울이 버스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바깥의 소란을 차단했다.
연시호는 내 손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았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었다. 침묵이 흐르는 사이 버스 문이 다시 닫혔다.
버스는 우리를 태운 채 흔들리며 빗속으로 달려갔다.
사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늘 남몰래 초조함을 품고 있는 듯한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까지 조여 왔다.
그가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마침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연
연시호, 항상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필요 없어.
유연
널 잘 모르는 사람은 어차피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유연
하지만 널 잘 아는 사람은…… 네가 그렇게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어.
지금의 너에게는 그 모든 것이 짜증스럽고, 저도 모르게 밀어내고 싶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사람이 지금의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건 과거에 겪어 온 모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결코 역사를 기록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 역시 줄곧 너만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쏟아낸 것 같았다.
가슴이 가볍게 들썩였고, 몸도 덩달아 긴장했다. 빗방울이 빽빽하게 버스 지붕을 두드렸다.
연시호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갈등과 거부감이 뒤엉켜 있었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세워 둔 ‘경계’를 내 고집대로 넘어선 뒤, 그 눈동자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유연
……알아. 넌 아마 내 도움이 필요 없을 거야. 연시호니까. 결국 네 나름의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유연
그러니까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끝까지 생각해 봐.
유연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때까지. 더는 자기 자신과 싸우지 않게 될 때까지.
유연
모든 걸 밀어내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에는 아까 이 버스를 쫓아왔던 것처럼 네 마음을 따라 다시 달려오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연시호는 줄곧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중요한 무언가를 제대로 짚어 낸 것 같았다.
어느새 버스의 안내 방송이 다시 울렸다. 다음 정류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유연
정류장 다 왔어.
그때 연시호가 문득 피식 웃었다.
연시호
정말 모르겠네. 네 눈에 내가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건지.
유연
그럼 그것도 머리가 터질 때까지 한번 생각해 봐.
공기압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버스가 천천히 정류장에 멈춰 섰다.
빗물을 머금은 바람이 순식간에 차 안으로 밀려들었다.
연시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촘촘히 내리는 빗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연시호
글쎄, 내키면.
연시호
어쩌면 정말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지.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 너머로, 허공에 흩어지는 그의 마지막 말은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말은 분명히 그곳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버스는 계속 흔들리며 달렸다.
어느덧 비가 그쳤고,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도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나는 버스에서 내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어가 멈춰 섰다.
지금 이 순간, 안개처럼 흐릿하기만 했던 상황을 조금은 이해할 실마리가 잡힌 것 같았다.
아직 제대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천천히 손을 오므리고 눈을 감았다.
가슴속에서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순간……
익숙한 감각이 다시 나를 덮쳤다
마치 온몸을 찢어 버릴 듯한 강렬한 견인력이었다.
같은 시각, 도시의 반대편.
연시호가 Elysion의 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직원 몇 명이 지난밤의 흥청거림이 남긴 흔적들을 치우고 있었다.
그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에 있는 은밀한 룸의 문을 열었다.
Cronos는 가죽 소파에 앉아 졸린 듯 하품을 했다.
Cronos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나 잠들 뻔했어.
어두운 조명 아래, 연시호의 가슴께에 있는 잠자리눈은 아무런 빛도 내지 않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연시호는 Cronos의 말을 무시하고 벽에 기대어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연시호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연시호
그동안 내가 너희한테 넘긴 정보가 얼마나 많은데. 이제 너희도 약속을 지킬 때가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