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去追一只鹿 - 让我拥有你无瑕的灵魂,让我看见你罪恶的 眼神。
사슴을 쫓아서 - 당신의 흠 없는 영혼을 갖게 해줘요. 당신의 죄악스러운 눈빛을 보게 해줘요.
8-1 재 위에서
BOSS, 저 아이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주기락
……
어두컴컴한 복도에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천장의 형광등은 절반 이상 박살 난 채 남은 몇 개만 깜빡이고 있었다.
주기락은 바닥에 널브러진 몇몇 사람의 몸을 넘어섰다. 신발 밑창이 핏자국을 짓누를 때마다 걸음마다 아주 미세한 끈적이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때, B.S. 조직원 하나가 공손히 그의 뒤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B.S. 조직원
BOSS, 실험실 외곽과 내부 모두 장악했습니다. 인원 정리도 대부분 완료됐습니다.
주기락
대부분?
주기락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한기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조직원은 불안하게 입술을 핥고 계속 고개를 숙인 채 보고를 이어갔다.
B.S. 조직원
목표가 핵심 구성원 두 명을 데리고 지하 통로로 철수했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통로가 폭파된 뒤였습니다.
B.S. 조직원
저희가 진입하기 전에 데이터베이스에서 자폭 프로그램이 가동했습니다, 다행히 저지하긴 했지만……
상대방이 말을 멈추다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람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B.S. 조직원
데이터를 완전히 복구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주기락
정보가 꽤 새어나간 것 같군요.
B.S. 조직원
즉시 조사하겠습니다.
주기락은 더 말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었다. 산책하듯이, 잠시 멈췄던 음표가 다시 규칙적인 리듬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주변 환경이 하나씩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짧은 시간 안에 이곳이 벌써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었을 줄은 몰랐다. 역시 사람은 악한 일을 꾸밀 때 가장 부지런한 법이다.
다만 두어 소절을 흥얼거리던 그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어딘가 아직 감각이 조금 부족한 듯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모퉁이를 돌았다. 그때, 눈앞에 거대한 투명 관찰창 하나가 나타났다.
유리벽 뒤에는 그리 넓지 않은 하얀 방이 있었고 십여 명의 아이들이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은 열 살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뼈가 앙상했고 팔에는 주삿바늘 자국과 멍이 가득했다. 어떤 아이들의 몸에는 뚜렷한 수술 봉합 흔적도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유리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분명 알아차렸지만,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주기락의 발걸음이 멈췄다. 원래 느슨했던 입꼬리가 조금씩 굳어지더니, 어떤 곡선도 없는 일직선으로 다물렸다.
마치 무언가가 신경 하나를 갑자기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러자 위장에서 구역질과 혐오감이 밀려올랐다. 그는 즉시 고개를 돌리며 올 때보다 몇 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B.S. 조직원
BOSS, 저 아이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주기락은 이미 몇 걸음이나 걸어나간 뒤였고, 돌아보지 않았다.
주기락
데려가서 검사해.
주기락
문제가 있는 아이들은 남기고, 나머지는 고아원에 맡겨.
복도가 등 뒤로 멀어졌다. 그가 실험실을 나서자 밤이 짙었고 사방은 황량하고 고요했다.
B.S. 조직원들이 가치 있는 “자산”을 차례로 옮기고 나자 불꽃 한 무리가 문득 치솟았다.
유리가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이어졌고 불빛은 주기락의 얼굴 위에 타올라 명멸하는 그림자를 비췄다.
그는 잠시 조용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가에 작은 곡선을 띠었다.
Poseidon을 놓치긴 했지만, 이런 더러운 곳들이 잿더미가 되는 걸 보니 그래도 기분은 좀 나아졌다.
그는 다시 그 선율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뛰노는 불꽃은 완벽한 리듬처럼, 즉흥적으로 그 뜨거움을 선율 안에 버무려 넣었다. 마치 생명이 춤추는 것처럼.
음률은 맞는 것 같았지만 어쩐지 아직도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는 차트 1위를 싹쓸이할 사람이니 이런 반쪽짜리 완성품으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조금 불만스럽고도 자부심 어린 콧소리를 냈다.
역시 혼자 틀어박혀 있는 건 시간 낭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그의 뮤즈를 붙잡아 같이 지냈어야 했다.
뭐 그래도 괜찮았다. 손에 든 급한 일은 대충 처리됐으니 이제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지낼 때가 됐다.
멀리서 화염이 점점 높아지며 밤하늘 절반을 어두운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B.S. 조직원
BOSS, 시간이 다 됐습니다.
주기락은 짧게 대답하고, 마지막으로 그 불바다를 한 번 바라본 뒤 어둠 속에 세워진 차량으로 향했다.
불꽃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고, 그 길고 늘씬한 뒷모습 뒤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냈지만 그가 고개를 돌리게 할 흥미는 더 이상 없었다.
주기락
뮤즈를 초대하러 갈 시간이네.
깊은 밤, B.S.의 복도는 어두운 죽음 같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나는 벽에 바짝 붙어 발소리를 죽인 채, 조금씩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돌아온 뒤 이 시간 동안, 나는 이 세계의 변화와 나 자신의 변화를 점차 확인해왔다.
그 어린 남자아이가 자신은 현 상황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이 수렁 속에서 손 놓고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이제 Black Cabin에 가볼 때였다——세계의 톱니바퀴가 있는 그곳으로 가서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과거 그곳에서 나는 운명을 고쳐 쓴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 안에서 한 줄기 방법이나 희망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계속 앞으로 더듬어 나아갔다. 동시에 모퉁이에 다다르기 전마다 예지 Evol을 움직였다.
훈련하듯, 순찰 인원들을 미리 예측하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가벼운 힘이 어렴풋이 떠오르자 복도 안을 스쳐 지나가는 빛과 그림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그 장면들은 줄곧 반투명 유리 너머에 있는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예지 Evol을 정확하게 사용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미래를 예지하지는 못했지만 길은 내내 텅 비어 있었고, 다른 B.S. 구성원과 마주치지도 않았다.
마음속으로 의하했지만, 깊이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몇 번만 더 모퉁이를 돌면 Black Cabin 홀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탐험 중이에요? 나도 끼워줘!
그 목소리는 경쾌하고 들떠 있었으며 이 상황과는 맞지 않는 흥미를 띠고, 고요한 복도 안에 가볍게 퍼져나갔다.
내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심장은 누군가가 움켜쥔 것처럼 두 번 세차게 뛰었다.
유연
……?!
나는 굳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한 실루엣이 복도 뒤쪽 어둠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다음 순간, 그 사람이 발을 내딛어 그림자 밖으로 나왔다——어두운 조명이 그의 윤곽을 따라 흘러내리며,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짙고 푸른 눈동자를 드러냈다.
주기락이었다.
8-2 인간 세태
사람 마음의 악함에도, 수백 수천 가지 모습이 있다.
8-3 가짜 사탕
그는 마치 옛날 모습을 정교하게 본떠 만들어진 인형 같았다. 아름답고 눈부시지만, 가장 중요한 영혼 한 조각이 빠진.
나는 그 자리에 굳은 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이 기간 동안 줄곧 칩거하며 작업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왜 여기 있는 거지……?
복도에는 등 몇 개만 듬성듬성 켜져 있었다. 그 희미한 빛이 그의 몸 위로 내려앉았는데도, 그의 미소는 여전히 그토록 밝았다. 밤하늘에서 결코 꺼지지 않는 별처럼.
하지만 왜인지 이 거의 완벽한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큼함이 차올랐다.
전에 느꼈던 몇 가지 미묘한 어긋남도, 이제는 전부 답이 나왔다.
그는 마치 옛날 모습을 정교하게 본떠 만들어진 인형 같았다. 아름답고 눈부시지만, 가장 중요한 영혼 한 조각이 빠진.
이런 주기락을 바라보자, 내 목은 점점 더 뻑뻑하게 조여왔다.
내가 한동안 아무 반응이 없자, 주기락이 손을 뻗어 내 코끝을 살짝 건드리더니 기세를 이어 뺨을 살며시 꼬집었다.
주기락
어라, 왜 허니칩 씨가 목각 인형이 된 거야?
그의 손끝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 위에는 조금도 다림질되듯 내려앉지 못했다.
그는 너무 깊이 역할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다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가 더는 이렇게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입만 살짝 열었다가 흩날리던 감정들을 억지로 다시 눌러 삼켰다.
유연
칩거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왜 여기 있어요?
주기락
음……칩거 중이긴 한데, 가끔은 나와서 좀 걷기도 해야 하니까요.
눈을 깜빡이며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내가 더 물을 새도 없이, 이미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고 있었다.
주기락
그래서 이번 탐험 목표는 어디예요! 내가 망 봐줄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이마에 대고, 사뭇 진지한 척 주변을 훑어보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마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푸 하고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의 일거일동이 너무 여러 번 리허설된 연극 같았다. 완벽해서 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유연
기락 씨……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 눈은 더 예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충성스럽고 어딘가 순박하게 귀여운 작은 곰처럼, 마음과 눈동자 가득 나 한 사람만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입가까지 올라왔던 말들은 다시 목 안으로 삼켜졌다. 나는 눈앞의 이 사람을 바라보다가 끝내 찔러 깨뜨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내 웃음이 예전과 똑같아 보이도록 애썼다.
유연
하하, 기락 씨 나 그만 놀려요.
유연
BOSS한테 딱 잡혔는데, 무슨 탐험을 더 해요.
주기락
……!
그는 그 말을 듣고 좌우를 한 바퀴 둘러본 뒤,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몹시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주기락
BOSS? 어디?
주기락
나는 QUEEN 혼자 심야 미니게임 하는 것밖에 안 보이는데~
그 단어가 귀에 떨어진 순간, 내 마음이 세게 떨렸다.
이건 아마…… 주기락이 사적으로 나를 이렇게 부르는 것을 들은 첫 순간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시큰함이 밀려 올라왔다. 나는 얼굴 위의 웃음을 힘겹게 유지하며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기락의 시선도 동시에 한순간 굳었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경쾌했지만, 눈빛은 날카로워 숨을 곳을 주지 않았다.
주기락
응? 내가 잘못 짚은 건가?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턱을 괴고, 명탐정처럼 내 주위를 빙빙 걸어 다녔다.
주기락
설마 나를 찾으러 온 거야? 아니지…… 그랬다면 먼저 나한테 메시지를 보냈거나, 바로 우리 집으로 왔겠지.
주기락
그럼 여기 산책하러 온 건가? 그런데 B.S.에 볼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연
나는……
주기락
……아! 혹시 중요한 정보를 듣고 직접 BOSS한테 보고하러 온 건 아닌가요?
그는 일부러 볼을 살짝 부풀리며 말 한마디마다 아무렇지 않은 웃음기가 둘러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장난스러움과 농담 아래로, 보이지 않는 실 하나가 소리 없이 팽팽해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나를 떠보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대체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사라졌어도,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진짜인지 알 수 없어도 눈앞의 이 사람을 믿고 싶었다.
직감은 내게 말했다. 아무리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도 주기락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주기락의 손바닥을 가볍게 잡았다. 그의 마음속 물결처럼 흔들리는 감정을 달래주고 싶었다.
유연
사실 오늘 밤 내가 여기 온 건, Black Cabin에 들어가고 싶어서에요.
유연
이 세계에 어쩌면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들어가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표정이 찰나 굳었다. 웃음기조차 흐릿한 안개로 덮이는 것 같았다.
주기락
하지만 혼자서 어떻게 가려고요?
유연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블랙박스를 가지고 있어요.
그가 무언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한마디를 덧붙였다.
유연
칩거 중이잖아요.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눈동자 속에 멈춰 있던 웃음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주기락
흥, 지구 중심에서 칩거 중이더라도 당신이 부르면 땅 밑에서라도 뚫고 나와 만나러 올 텐데요.
그는 반대로 내 손을 잡고, 손가락을 맞물렸다. 열 손가락이 거의 빈틈없이 맞물렸다.
주기락
나도 같이 가요.
주기락
어차피 전에도 같이 갔었잖아요. 처음도 아닌데.
그는 아주 가볍게 말했지만 그 안에는 조금도 상의할 여지가 없었다.
주기락
게다가 당신이 직접 말했잖아요, 이 세계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요. 그럼 더더욱 혼자 마주하게 둘 수 없죠.
주기락
혹시……또 반 년 넘게 사라지면 어떡해요?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 그냥 지나치듯 한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 가볍게 내뱉은 말 밑에는, 어딘가 건드릴 수 없는 무게가 눌려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비밀 보물을 여는 열쇠를 움켜쥐고,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공기 중에 익숙한 달콤한 향기가 다시 떠도는 것 같았다. 그의 사탕을 먹게 이끌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살며시 웃음이 났다.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8-4 반걸음의 거리
그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주기락이 먼저 내 손을 이끌어 벽에 바짝 붙이고, 몸을 낮추며 진지한 표정으로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그는 이따금 돌아보며 나에게 “조용히”라는 손짓을 했고, 어느 모퉁이 앞에서는 나를 자기 뒤로 끌어안듯 숨기기도 했다.
우리는 손가락을 열 개 모두 맞잡고, 옷감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붙어 발걸음을 맞춰 나아갔다.
모든 것은 예전과 같았다.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명령에 따르는데도, 그는 굳이 나와 함께 숨어 다니며 이른바 탐험 게임을 해주고 있었다.
그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나와 이런 것들을 하고 있는 걸까?
눈을 내리깔며 서로 꽉 맞잡은 열 개의 손가락 위에 시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친밀한 온기 속에서도, 나는 어떤 말 없는 침묵에 빠졌다.
문득, 그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곧 몸을 돌려 나를 복도 옆 반쯤 열린 문 쪽으로 끌어당겼다.
주기락
쉿, 누가 오고 있어요——
나는 그에게 이끌려 좁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등 뒤에서 살며시 닫히자 주변은 순식간에 새까만 어둠에 잠겼다.
공간은 아주 좁았다. 그의 숨결이 내 머리 위에 내려앉는 것과 다가오는 깨끗한 향기까지 또렷하게 느껴질 만큼.
곧 문밖에서 어렴풋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가까워졌다가, 다시 점점 멀어졌다.
어둠 속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맞닿은 옷감 너머로, 그의 몸이 조금 굳어 있는 듯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보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주기락도 마침 고개를 살짝 돌려 얼굴을 더 깊은 어둠 속에 숨겼다. 나는 잠깐 멈칫했다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유연
……무슨 일 있어요?
그는 입술을 한번 다문 듯했고, 일부러 가볍게 말하는 척했다.
주기락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지금 '적'을 피하는 상황만 아니었으면, 제대로 안아줬을 텐데.
하지만 이 이유가 너무 억지스러웠다. 마치 그 자신도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항상 내 곁에 붙어 있는 그의 팔을 바라보며 마음이 조금씩 시큰거렸다.
분명 코앞에 있고 숨결 속에도 그가 가득했는데 우리는 언제나 한 발 거리에 있는 것 같았다.
예전의 그 은빛 실보다도 더 멀리.
마음속이 쓴맛으로 가득 찼다. 그래도 천천히, 망설이면서 손을 들어 그를 살며시 안았다. 그처럼 가벼운 척 말했다.
유연
괜찮아요. 안아도 별일 없잖아요. 들킬 것도 아닌데.
품 안의 그가 분명하게 멈칫했다. 온몸이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머리 위로 내려오던 숨결도 순간 멈추는 것 같았다.
그의 가슴 속에서 전해지는 심장 소리가 내 귓가를 묵직하게 두드렸다.
이 몇 초의 정지가 거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길게 이어지더니 서서히 어딘가 내가 볼 수 없는 곳에 있던 그를 조용히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올라왔다. 천천히 내 등 위에 내려앉았다.
처음 그 무게는 탐색하듯 가벼웠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조여들었다.
주기락
따뜻하네요.
그런데 왜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걸까.
침묵이 짧게 번졌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때, 그는 티 나지 않게 손을 풀고 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주기락
이제 가요. 밖은 안전해요.
그 눈이 여전히 굽어져 웃고 있었다. 방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후 길에서도 그는 계속 그럴싸하게 적의 동태를 살피며 중간중간 일부러 장난을 쳐 나를 놀라게 했다.
처음 봤을 때보다 평소 내 앞에 있던 '주기락'의 모습에 더 가까워졌다.
나는 마음속에 쌓인 무거운 것들을 일단 한켠에 밀어두며 그와 함께 계속 이 탐험 게임에 맞춰 나아갔다.
몇 번의 모퉁이를 지난 뒤, 우리는 마침내 Black Cabin으로 통하는 홀에 도착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주기락 주머니 속 휴대폰이 문득 진동했다.
그는 꺼내서 한 번 훑어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또 내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기락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금방 다녀올게요.
유연
……
그가 몸을 돌려 휴대폰을 귀에 대고 걸었다. 뒷모습이 어두운 빛 속에 조금씩 삼켜지더니 모퉁이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거의 굳어 있던 내 미소도 천천히 얼굴에서 사라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주기락은 줄곧 내 앞에서 과거의 자신과, 과거 나와 지내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스스로도 그런 자신에게 확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여전히 있는 듯 없는 듯 나에게 능력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약 그 안에서 그가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들을 듣고, 내가 이미 그의 거짓말을 꿰뚫어 봤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유연
……미안해요…… 기락 씨.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한번 돌아보고, 이내 그 검은 상자를 꺼내어 몸 안의 힘을 끌어올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수없이 많은 별빛 같은 점들이 주위에 둥둥 떠 있었다. 끝없는 어둠 속에 부서진 만화경처럼.
톱니 돌아가는 소리가 멈추자, 평온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천천히 울렸다.
??
역시 왔구나.
유연
……
빛무늬가 뛰어오르듯 이어지며 흰색 계단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인도를 따라 허공 끝의 빛나는 문을 바라보았다.
유연
너는 이미 이 순간을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유연
그래서 지난번에 내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거라고 말했던 거야?
??
틀렸어. 나는 정해진 결말을 예측하지 않아.
그의 목소리에서는 많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만함이 배어 있었다.
??
너희는 늘 자신이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네 선택 자체도 하나의 필연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있어?
유연
……너는 여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를 좋아하네.
유연
하지만 정정하고 싶어. 내가 몇 번이고 이곳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미 모든 것이 정해진 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유연
내 선택이…… 언제나 상실을 동반한다 해도.
??
조금 슬프게 들리네.
??
그래도 축하할게. 너는 또 한 번 미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어.
그것은 진심 어린 긍정처럼 들렸다.
하지만 왜인지 나는 그의 말투에서 어렴풋한 자조와 무력감을 들은 것 같았다.
유연
그럼 이 미래에 대해 여기서 일어난 변화도 네 예상 안에 있었어?
공기가 한순간 굳은 듯했다. 공중을 떠다니던 먼지마저 멈춘 것 같았다.
??
이건 네가 세계를 이끈 미리야.
??
그 질문은 나에게 할 것이 아니야.
그는 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을 다시 내게 던져왔다.
과거 여러 번 이곳에 왔을 때, 나는 한번도 편하게 온 적이 없었다. 이 신비한 목소리가 대체 누구인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조차 분명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저런 인도가 있었기에 나는 몇 번이고 선택을 하고, 굳게 앞으로 나아갔다.
비록 그의 말은 언제나 애매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솔직하긴 했다. 나는 문득 어렴풋한 추측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그 어린 남자아이처럼 세계의 변화를 알고 있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역시 변화 속에 있는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유연
여기가 너를 가둔 모양이네.
유연
다음에 만날 땐 직접 모습을 드러냈으면 좋겠어.
서로를 떠보느라 시간을 더 소모하는 것보다 지금은 내게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전까지 톱니바퀴의 규칙이 있는 곳에 도달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그 안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의지로 그곳에 도달하고 싶었다.
곧, 따뜻하고도 뜨거운 힘이 피를 따라 몸을 감쌌다. 망막 위로 떨어진 빛줄기가 문득 떨렸고 사방의 짧은 소란은 이어 고요해졌다.
눈을 뜨자 나는 혼돈 속에 있었다.
수많은 먼지가 입자처럼 흩어져 떠다녔다. 예전에 재처럼 사라지던 톱니바퀴 조각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거의 순수한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아주 작은 소리가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 나왔다. 다시 응집하고, 다시 맞물리는 듯했다.
마침내 그것은 심장이 뛰는 듯한 거대한 굉음으로 모였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소녀의 모습이 Black Cabin에서 사라진 뒤, 그 안에 한 허상이 조용히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 신비롭고 낮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
왔구나.
그 허상은 조용히 한동안 멈춰 서 있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우리 모두 돌아왔어.
침묵이 흐르며, 모든 것을 그림자 속으로 집어삼키는 듯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허무 속에서 한숨 하나가 들려왔다.
??
이 문은 마침내 닫히려는구나.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새 Black Cabin을 떠나 B.S. 홀로 돌아와 있었다.
의식은 아직 방금의 혼돈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시선은 먼저 무언가를 포착했고 갑자기 굳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주기락은 한 손으로 팔꿈치를 붙잡고 다른 손은 턱 아래에 대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침묵하고 있는 듯했지만 살짝 움켜쥔 손끝은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갑자기 홀에 나타난 것을 보자 그 눈동자 속의 초조함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곧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주기락
어쩐지 전화 끊고 돌아왔더니 없어지고……
그는 무의식적으로 내 손목을 붙잡았다. 마치 내가 다시 사라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그 눈 가득한 걱정과 뒤늦은 두려움을 보니 내 마음에도 미안함 섞인 슬픔이 올라왔다.
내가 막 무언가를 설명하려던 순간, 그가 다시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주기락
혹시 그 장소가 갑자기 당신을 빨아들인 거예요?
주기락
아니었다면 분명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을 텐데, 당신이 날 혼자 두고 먼저 Black Cabin에 갈 리 없잖아요.
유연
……
이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는 내 걱정보다도 내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거짓말을 했다.
유연
……응. 원래는 기락 씨를 기다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떤 힘이 나를 빨아들여서……
주기락
……
주기락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고, 그 짙은 푸른빛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내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대신 내 손을 잡았다.
주기락
괜찮아요. 당신이 돌아왔으면.
주기락
어떻게 됐어요? 당신이 원하는 건 얻었나요?
이렇게 우리는 동시에 거짓말하는 두 사람이 되었다. 거짓말로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덧칠하면서.
마치 누구도 그것을 찔러 깨뜨리지 않으면, 여전히 온전한 척할 수 있는 것처럼.
유연
사실 별로 쓸모 있는 정보는 얻지 못했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주기락의 얼굴에는 천천히 달래는 듯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손을 들어 내 이마에 흩어진 잔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주기락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다 잘 될 거예요.
그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8-6 공략 비법
사실 이 세계는 원래부터 계속 이렇지 않았어요?
Black Cabin 홀을 떠난 뒤, 주기락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우리가 왔던 복도를 따라 되돌아갔다.
모퉁이를 돌자, 연구원 복장을 입은 사람이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였고 주기락에게 보고하려는 듯했다.
연구원
BOSS, 관련해서——
주기락
나중에 얘기해.
그는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말투는 무심했지만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 사람은 곧바로 복종하듯 옆으로 물러나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사람을 스쳐 지나갈 때, 그의 눈에 옅은 금빛이 한 겹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얇은 금빛 베일이 홍채를 덮고, 희미하게 일렁이는 것처럼.
내가 저도 모르게 다시 돌아보며 확인하려던 순간 손이 가볍게 잡아당겨졌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하마터면 모퉁이 벽에 부딪힐 뻔했다는 걸 깨달았다. 주기락은 자연스럽게 나를 반대쪽으로 끌어 피하게 했다.
내가 발을 제대로 딛고 다시 돌아봤을 때 복도 끝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하다…… 내가 잘못 본 걸지도 모르지만.
나는 일단 마음속 의문을 눌러두고, 주기락을 따라 BOSS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는 저도 모르게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가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알고 싶었다.
다음 순간, 그는 창가로 가서 먼저 블라인드를 조금 열어 희미한 별빛을 들였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응접용 소파에 앉더니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주기락
당신은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요.
유연
방해되는 거 아니에요? 방금 그 사람, 보고할 일이 있는 것 같았는데.
주기락
걱정 마.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에요.
나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머릿속에는 방금 그 사람이 한없이 공손하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지난번 디저트 가게에서 그는 줄곧 BS를 안정시키느라 바빴다고 말했었다.
지금 보니, 그가 원한 것은 질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복종이었다.
유연
……그래도 방금 그 사람 태도를 보면, BOSS로서의 위엄은 마음속 깊이 박힌 것 같네요.
그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내 말에 맞춰 말을 이었다.
주기락
그럭저럭. 전에 골치 아팠던 일들은 대부분 해결됐어요.
그는 잠시 멈췄다가 말투에 조금 더 진지함을 담았다.
주기락
그러니까 Black Cabin에 가서 답을 찾는 것보다 지금은 나를 더 의지해도 돼요.
주기락
주기락으로서든, BS의 BOSS로서든, 나는 당신을 도울 수 있고, 당신에게 협력할 수 있어요.
그는 살짝 몸을 기울이고 손끝으로 내 미간을 가볍게 쓸었다.
주기락
나는 그런 쓸데없는 일들이 계속 당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방해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계속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게 싫어요.
그의 목소리는 아주 다정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짐을 덜어주고, 내 어깨 위의 무거운 것들을 하나씩 가져가려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자신마저도 충분히 달콤한 공기 한 덩어리로 바꿔버린 것 같았다.
다만 그 공기가 흩어지는 순간, 그가 가진 모든 것도 함께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들을 나도 아무것도 남김없이 그에게 주고 싶었다.
유연
알았어요. 기락 씨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짧은 침묵이 우리 사이에 퍼져나갔다. 사무실 안에는 에어컨이 돌아가는 낮은 웅웅거림만 남았다.
우리가 이런 무언 속에 빠져드는 건 예전에 거의 없었던 일이었다. 그의 내려깔린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뭔가 에둘러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먼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주기락
맞다. 지난번에 이 세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던 거 기억해요?
그는 답을 들은 뒤에도 내 감정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손에 낀 반지를 무심하게 돌렸다.
주기락
나중에 한참을 생각해봤고, 여기저기 알아보기도 했어요.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손끝으로 내 손가락을 문질렀다. 고개를 살짝 들고,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주기락
내 생각엔…… 우리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 걸지도 몰라요.
유연
……너무 복잡하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조금 더 진지해졌고 몸도 내 쪽으로 돌려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기락
사실 이 세계는 원래부터 계속 이렇지 않았어요?
주기락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 안 가리는 사람, 전쟁을 일으켜 약탈하는 사람. 아이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사람, 사냥 게임을 즐기는 사람……
주기락
목적, 속임수. 이런 것들은 예로부터 사라진 적이 없어요. 갑자기 새로 생긴 변화가 아니에요.
그는 말하며 목소리를 낮췄고, 표정은 다시 한 번 부드러워졌다.
주기락
그러니까, 예전에 당신 주변 사람들이 너무 좋았던 거고, 거기다 당신이 반 년 넘게 갑자기 사라졌다가 돌아오니까……
주기락
돌아왔을 때 괴리감이 생기는 게 당연하죠.
그는 손바닥을 펼쳤다. 너무나 단순한 이치를 말하는 것처럼.
그의 입술이 열리고 닫혔지만,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 목소리마저 빼앗아가며.
그리고 그는 내 짧은 침묵을 다른 감정으로 피로 혹은 흔들림으로 해석한 듯했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졌다. 오직 나에게만 들려주는 비밀과 사심을 말하는 것처럼.
주기락
어쩌면 언젠가는 당신은 생각하게 될 거예요…… 저런 나쁜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면 좋겠다고. 그들은 네가 구해줄 가치가 없다고.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투에는 어떤 잔혹함도 없었다. 오히려 한 줄기 다정한 배려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입가에 쓴웃음을 조금 띠었다.
사실 나에게 그런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지쳐서 더는 버틸 수 없던 순간들, 분명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도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순간들.
이 세계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듯했고, 성공했다고 느낀 바로 그 순간에도 몇 번이고 또 다른 좌절을 안겨주었다.
나도 분명 생각한 적이 있다…… 왜?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하는 게 정말 가치 있는 걸까?
주기락의 한없이 맑으면서도 어딘가 유혹적인 눈동자 속에서, 머릿속에 아주 먼 실루엣이 떠올랐다——
모든 세계선에서 실패한 '나'의 집합체.
그녀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구원할 가치가 없는 세계와 사람들에 대해 말했었다.
어쩌면 그 나야말로 방금 주기락이 말한 것처럼, 셀 수 없이 무너지고 상처 입은 순간들 끝에 결국 포기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미 포기라는 결말의 종착점을 보았고, 그때의 나 역시 또 다른 '내'가 될지도 모른다.
유연
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이 세계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유연
예전에 당신이 말했잖아요.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지킨다고. 그 말 때문에, 당신 때문에…… 나는 많은 용기와 힘을 얻었어요.
나는 가볍게, 그의 차가운 손바닥을 잡았다.
유연
기억하죠? 모든 것을 포기한 '나'……저는 그녀가 되고 싶지 않아요.
어쩌면 나와 '나' 사이의 거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사실 한 번도 사라진 적 없고, 언제나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자 주기락의 눈은 오히려 밝아졌다.
그는 마치 공략법이라도 찾아낸 사람처럼 가볍게 손뼉을 쳤다.
주기락
허니칩 아가씨, 혹시 핵심을 놓친 거 아니에요?
주기락
그녀가 당신의 또 다른 면이라면, 당신과 그녀를 합치면…… 가장 완전한 당신이 되지 않나요?
유연
……?
나는 멈칫했다.
주기락
하나는 결연한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용감하고 강한 마음인 거죠.
주기락
둘을 합치면, QUEEN의 가장 완벽한 모습이 되는 거잖아요? 그럼 진짜로 이 세계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 안에는 완전한 내가 비치고 있었고, 마치 그것이 어떤 완벽한 형태인 것 같았다.
주기락
어떡하죠? 당신과 함께 그 순간을 완성하고, 당신과 함께 완벽하게 세계를 구하는 게 너무나 기대돼요.
그의 목소리에는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뜨거운 열의가 실려 있었다.
마치 너무나 오래, 너무나 오래 기다린 사람이 마침내 빛을 맞이한 것처럼.
하지만 그 빛은 정말 따뜻한 것일까?
왜 나는 그의 눈동자 가장 깊은 곳에서, 그 열기와 다정함의 틈새에서, 나를 두렵게 하는 무언가를 보게 되는 걸까.
8-7 꿈속의 별하늘
꿈속의 별은 더욱 멀고 아득하다.
공연 예술 센터
좋아하는 사람이 보고 싶다
팬이 가장 잘 하는 일은, 소식이 없는 날들 속에서 몇 번이고 기대하는 것이다.
소다A
언니, 봤어요? 공연 예술 센터 하반기 일정 나왔어요.
소다B
봤어요. 세 번이나 넘겨봤는데 주기락 이름이 없더라고요……혹시 연극 영원히 안 하는 건 아닐까요?
소다A
원래 그렇게 연극 자주 하진 않았는데, 나올 때마다 다 명작이잖아요. 진짜 재공연 생각 없는 건가요?
소다B
에이, 이 반년은 완전히 음악에만 집중하는 것 같더라고요.
소다B
사실 음악 팬이 제일 많은 거 알지만, 저는 연기하는 걸 더 좋아하는걸요……
소다B
무대에 서는 것이랑 화면 안에서 연기하는 게 달라요!
소다A
맞아요 맞아요. 음악 속의 그는 그냥 주기락이잖아요.
소다A
그런데 영상 속의 그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한테 감동받는 거죠.
소다B
맞아맞아! 아아아아, 진짜 영상 작품에서 또 보고 싶어!!
소다B
야, 나 갑자기 엄청 사악한 생각이 났어.
소다B
신보에 악플 도배할까……음악은 본인한테 안 맞는다는 걸 알면 중심을 옮기겠지!
소다A
으, 그건 좀 비뚤어진 방법 아닌가요.
소다B
그러니까 할 거야, 안 할 거야?
소다A
진짜 효과 있을까요?
소다B
일단 해보지 뭐. 어차피 나는 무고한 눈송이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요.
지하철역
막차
심야의 지하철역은 언제나 조용하다. 하지만 그 마음들은 계속 출렁이고 있다.
행인A
저기요, 지하철 몇 번이나 그냥 보냈는데요.
행인A
다음 거 막차예요. 또 놓치면 걸어서 가야 해요.
행인B
아, 감사해요. 근데 저 일부러 마지막 거 타려고 기다리는 거예요. 어차피 일찍 들어가도 할 일이 없어서……
행인B
그런데 당신은 왜 계속 안 타고 서 있어요?
행인A
아내 기다려요. 오늘 야근이라서 데리러 왔어요.
행인B
……?
행인B
일부러 지하철역 안까지 마중 나온 거예요?
행인A
에어컨 있으니까요. 시원하잖아요.
행인A
게다가 워낙 익숙해서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집까지 걷게 할 수는 없잖아요.
행인B
참 잘해주시네요.
행인A
잘해주는 건지 모르겠어요. 예전에 이런 거 할 때는 마음속에 뭔가 따뜻한 게 있었는데.
행인A
이 반년은 별 느낌이 없더라고요.
행인B
그래도 좋은 거죠. 둘이 함께하다 보면 감정이 서서히 옅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같이 살아갈 수 있으면 된 거잖아요.
행인A
이제 다 왔대요. 열차 앞쪽에서 기다릴게요.
행인B
네, 안녕히 가세요.
합생빌딩
여보세요, 슈퍼히어로 맞죠?
이제부터, 슈퍼히어로는 평범한 사람의 것이다.
"여보세요, 슈퍼히어로 맞죠?"
——완전히 새로운 슈퍼히어로 테마 방탈출·충격 오픈——
이 도시에는 매일 누군가 도움을 구하지만, 슈퍼히어로한테 전화는 영원히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결정했다——직접 하기로.
올해 최대 역작 몰입형 방탈출 《히어로 핫라인》
6인 / 약 20시간 / 하드코어 추리 + 감성 몰입
스토리 소개:
심야에 익명 전화가 연결됐다. 여섯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같은 음성 메시지를 받았다.
"이 도시에 슈퍼히어로는 필요 없어요. 필요한 건 당신들이에요."
"오세요. 평범한 사람도 영웅이 될 수 있어요."
안내사항:
이 극본에는 강렬한 감정 자극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충분한 수분 섭취를 권장합니다. 눈물이 많이 나올 예정입니다!
이 극본의 특성상 평범한 분들이 가장 최적의 경험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외 분들은 게임 경험을 보장드리기 어려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영업시간: 월~일 12:00~02:00 / 합생빌딩 13층 109호
예약 문의: 1XXXXXXXXXX
——망토 없이도,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8-8 블랙 스완
무엇이 “진화”인지는, 내가 정의할 거예요.
하지만 나는 당연히 싫다고 할 수 없었다.
그 때문이든, 방금 공기 중에 맴돌던 Evol 때문이든, 거절할 이유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웃었다.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 내 모습에 잠깐 멍해졌다.
검은 드레스가 몸의 선을 따라 부드럽게 감쌌다. 원단에서 어렴풋한 광택이 흘렀다. 숨을 쉴 때마다 살짝 일렁였다.
팔 위로는 매미 날개처럼 얇은 깃털 사 층층이 겹쳐져 있었다. 마치 다음 순간이면 활짝 펼쳐져 백조의 날개로 변할 것 같았다.
이렇게 딱 맞는 게 내 피부 위에 덮인 두 번째 피부 같았다.
모든 솔기가 촘촘하고 반듯했다. 한 땀 한 땀에 시간의 흔적이 가득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둔 의식처럼 어느 날 나를 위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거울 속에 주기락이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거울을 통해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위의 검은색과 그의 짙은 붉은색 수트 조끼가 이 순간 교차하며 고요하면서도 짙은 색깔을 이루었다.
서로 응답하듯 어두운 밤 속 소리 없는 거대한 공모 같았다.
한참 후, 그가 웃었다. 조금도 감추지 않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그가 손을 들어 손끝으로 내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를 살며시 쓸었다. 부드럽고 거의 경건할 정도로.
주기락
역시, 당신이야말로 내 마음속 진정한 'B.S.'예요.
주기락
나의 Black Swan.
Black Swan——검은 백조.
그는 그녀로 인해 빛나는 선율이 필요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볼 때 그 시선이, 자신도 거의 붙잡지 못할 것 같은 무언가를 받쳐주기를 바랐다.
왜 그런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블랙 스완. 어쩌면 예측 불가능하고, 어쩌면 재앙을 가져올지 모르지만, 동시에 기적이기도 한 존재.
어떻게 해서든 곁에 둬야 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변수이자 존재.
거울 속 그의 눈빛이 어두운 물결처럼 흔들렸다. 묘한 추측 하나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며, 나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연
기락씨…… 아까 B.S. 복도에서……진짜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완벽한 가면에서는 어떤 실마리도 찾아낼 수 없었다.
나는 몰래 입술을 깨물고 한층 더 진지하게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유연
당신은……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거예요?
주기락은 눈을 내리깔고 내 목 장식을 정리해주었다. 손가락 끝의 따뜻함이 저릿한 감각을 불러왔다.
그는 계속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입꼬리의 곡선에 과시하는 것 같은 확신이 담겼다.
주기락
당신과 함께 세계를 구하기 전에 우리를 위한 꼭 필요한 순간 하나를 준비하고 싶어요.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정중한 초대를 건네는 것처럼.
나는 그가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몸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여, 돌아서서 그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렸다.
그는 내 손을 단단히 맞잡고 나를 이끌어 함께 걸어갔다. 힘은 세지 않았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복도 끝에 익숙한 문이 하나 있었다——
주기락이 눈빛으로 내가 먼저 앞으로 나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직접 그것을 열라는 것이었다.
눈앞의 어두운 은빛 문짝을 바라봤다. 어두운 달빛 같았다. 조용히 망설이는 내 모습을 비추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그 뒤에 숨겨진 예측 불가능한 운명이 전부 이 순간 한 가지 생각 안에 담겨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주기락을 바라봤다. 그 깊은 눈동자와 가볍게 부딪혔다.
유연
……
이 순간,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도 같은 곡선을 유지하는데도, 나는 갑자기 결심이 섰다.
유연
기락씨, 나는 문 뒤에 뭐가 있을지 몰라요.
유연
하지만 앞에 무엇이 기다리든, 나는 당신과 함께 걸어갈 거예요.
유연
설령 잘못된 길이라도, 당신 손을 잡고 심연에서 끌어올릴 거예요.
유연
이것만큼은 약속해줘요. 절대 잊지 말아요.
그 순간, 어떤 감정이 그 깊은 바다 속에서 문득 떠오른 듯했다. 하지만 곧 그는 티 내지 않고 그것을 다시 거두어들였다.
주기락
……약속할게요.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손을 문에 대며 정중하게 밀었다.
눈앞에 들어온 것은 높은 돔 천장을 가진, 그리 낯설지 않은 회의실이었다.
긴 테이블 하나가 방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고, 테이블을 둘러싼 열두 개의 의자에는 드물게도 거의 모든 사람이 앉아 있었다.
돔 깊은 곳에서 희미한 빛이 내려와 열한 개의 그림자를 무겁게 그려냈고 공기마저 그 침묵에 젖어 형언할 수 없는 엄숙함과 신비로움을 풍겼다.
익숙한 얼굴이든 낯선 얼굴이든, 그들은 지금 모두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미 오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와 동시에, 그들의 시선도 내게로 향했다.
살피는 시선도 있었고, 적의도 있었으며, 몇몇 눈빛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예전 회의 때처럼 조롱하거나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방 전체에는 억눌린 고요만이 남아 있는 듯했다.
유연
……
나는 저도 모르게 곁에 있는 주기락을 슬쩍 곁눈질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말대로——그는 이미 B.S.를 단단하게 장악한 것 같았다.
주기락이 나를 이끌고 앞으로 걸어갔다. 여유롭고 확신에 찬 걸음으로 긴 테이블의 상석 앞에 이르더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자리한 모든 사람을 차례로 훑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잔잔하고 깊은 바다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옆에 서서, 그 수면 아래에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암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주기락
오늘 여러분을 이곳에 부른 건 한 순간을 함께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주기락이 내 손을 잡으며 자리한 모든 사람을 향해 섰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방 구석구석에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그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나를 바라봤다.
주기락
이 사람은 Black Swan Queen입니다. 오늘부터 그녀는 내가 가진 모든 권한을 가집니다.
주기락
그녀를 보는 것은, 나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주기락
그녀는 나와 함께 B.S.를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이끌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몇 줄기 시선이 무언가를 교환했다. 하지만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잠시 뒤, 모두가 엄숙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가장 공손한 침묵으로, 이 장엄한 선언에 응답했다.
이후 주기락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빛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주기락
QUEEN, 나는 당신의 의지를 최우선으로 하겠어요. 앞에 빛이든 가시밭이든, 당신과 함께 걸어갈 거예요.
주기락
그리고 당신은, 이 순간부터 나와 함께 굳건히 나아가겠어요? 나의 유일한 공범이 되겠어요?
유연
……
이 순간, 나는 다시 느꼈다.
무언가가 그에게서 밀려오고 있었다. 맞잡은 손바닥을 지나 조수처럼 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내 마음을 끈적하게 만들었고, 모든 생각을 둔하고 부드럽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어지게 했다.
내 마음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굴에는 그와 똑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유연
BOSS, 받아들일게요.
그 목소리가 떨어진 순간, 주기락의 눈 밑에서 광적이고도 밝은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가 내 손을 꽉 쥐고, 모두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모든 것이 결정됐다.
열한 명의 주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긴 테이블 양쪽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길어지며, 검은 강처럼 모든 복종과 공손함을 싣고 그에게로 모였다.
주기락은 시선 한가운데 서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이 그 완벽한 얼굴의 윤곽을 날카롭게 그렸다.
주기락
오늘부터——
그의 목소리는 공기 속에 울려 퍼졌고, 무시할 수 없는 관통력을 지니고 있었다.
주기락
무엇이 “진화”인지는, 내가 정의할 거예요.
찰나에,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주기락이 오히려 갑자기 미소를 올렸다. 눈빛 가득 확신과 끊임없이 타오르는 갈망이 담겼다.
나는 그와 함께 고요한 중심에 서 있었다. 주위의 빛과 어둠이 마치 우리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그어놓은 것 같았다.
그 순간, 운명의 톱니바퀴가 이 긴 밤 속에서——
다시……그리고 되돌릴 수 없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8-9 검은 백조 사건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
8-10 에덴동산
이 세계가 나쁘다면 없애버리면 되죠.
모두가 흩어진 뒤, 주신 회의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공기가 느슨해지기는커녕, 더 깊은 무언가가 가라앉으며 나와 그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잠시 백색소음마저 멀어지는 것 같았다. 온 세계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주기락이 긴 테이블 가장자리에 기대며, 몸을 기울여 내 손을 당겼다. 갑자기 웃었다.
주기락
유연 씨, 나 너무 기뻐. 저랑 함께 서주기로 해서.
말하면서 눈이 굽어졌다. 원하는 것을 얻은 아이처럼, 온몸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넘쳤다.
나는 한참 그런 그를 바라봤다. 그도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입꼬리가 무심코 더 올라갔다.
마음이 가볍게 찔린 것처럼 아파왔다. 나는 결국 오래도록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질문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유연
주기락, 진짜로 기뻐요?
그의 속눈썹이 거의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떨렸다. 하지만 미소는 여전히 흠잡을 데 없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눈빛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와 섞였다.
주기락
물론이지. 지금 당신의 눈 안에는 내 모습으로 가득하니까요.
주기락
당신은? 기뻐요?
나는 입을 열었지만 한동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기쁜가……? 이 순간, 나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달콤한 것, 걱정스러운 것, 시큰한 것……
그것들이 풀리지 않는 새끼줄처럼 꼬여 가슴 위에 묵직하게 감겼다. 구분하기 어려웠다.
내 침묵을 읽은 것 같았다. 주기락은 더 캐묻지 않고, 오히려 한 발 더 다가왔다. 더없이 가깝게.
주기락
유연씨, 기뻐야 해요. 그게 내가 당신과 함께하는 의미니까요.
유연
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기락이 우리가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며 손목을 한 번 돌렸다. 나를 그 자리에서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치맛자락이 조용히 물결치듯 펼쳐지는 순간,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도 손에 닿을 듯한 아름다운 미래를 내게 그려주었다.
주기락
나는 당신이 기뻐했으면 좋겠어요. 기쁘게 햇살을 맞고, 기쁘게 맛있는 것을 먹고, 덤으로 세계도 살짝 구하러 가는 거예요.
주기락
그때 모든 사람이 우리를 향해 환호할 거예요. 어둠의 영웅들이 모두의 시선 아래 손을 잡고, 안고, 찬란한 영광을 맞이하는 거예요.
주기락
그리고 그 뒤에는, 우리의 시간이 진짜로 완전하게 서로만의 것이 되는 거예요.
주기락
당신은 내 곡 작업을 함께하고, 나는 당신이 촬영할 때 함께할게요. 당신이 내 곁에 있고 내가 당신 곁에 있는 한, 무수한 영감과 음악이 나올 거예요.
말하다 보니, 마치 그 아름다운 미래가 이미 앞당겨 도착한 것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흩어진 음표들이었지만, 서서히 그 선율이 풍성해지며 텅 빈 회의실 안에 가볍게 울렸다.
자기도 모르게, 그가 내 손바닥을 꽉 쥐며 다른 손을 내 허리 옆에 얹고 첫 발걸음을 이끌었다.
나는 멍하게, 선율을 밟으며 몸이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앞으로, 뒤로, 빙글 돌았다.
그가 나를 이끌어 높은 천장 아래 빛 속에서 하나하나 원을 그렸다. 몸 위의 검은 깃털이 겹겹이 일렁이며 퍼졌다……
마치 진짜 검은 백조가 그의 눈 안에서 천천히 날아오르려는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순간, 나는 오히려 다시 날개를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기락, 사람과 사람이 함께 있는 건 분명 행복하기 때문이지만, 그것만은 아니에요.
서로를 오해하기도 하고, 망설이기도 해요.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서로 반대편에 서기도 해.
그리고 나도 단지 행복하기 위해서만, 당신과 함께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아무리 해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사방은 점차 끌려가듯 허상으로 변했다. 오직 주기락만이 세상의 유일한 초점처럼 선명했다.
방향도 없고, 출구도 없었다. 나는 그만 볼 수 있었고, 그의 박자에 따라 뒤섞이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주기락
유연씨,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행복해지는 건 어려운 일이야.
주기락
그러니까——내가 당신에게 주문 하나를 알려줄게요.
그는 찬란하게 웃으며, 한 바퀴 돌고 나서 그는 내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주기락
명령할게요——
그 푸른 눈동자가 순간 눈부신 빛을 띠었다. 마치 바다 위에서 갑자기 피어난 금빛 불꽃처럼.
공기는 그 순간 끈적하게 변했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우리가 맞잡은 손바닥을 따라 계속 올라왔다. 그렇게 따뜻한데도 거부할 수 없는 속박을 담고 있었다.
주기락
당신은 언제나 행복한 당신 자신으로 있어야 해.
주기락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마치 내 눈을 통해, 눈동자 안에 비친 자신에게까지 닿으려는 것 같았다.
나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자신에게도 명령하는 것 같았다.
내가 행복해지기만 하면, 자신도 행복하다고 믿을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당신이 행복하지 않을 때, 내가 어떻게 그 행복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죠?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젓고 싶었고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유혹은 목소리를 타고 내 가슴으로 번져 발버둥치려는 모든 생각을 가볍게 눌러버렸다.
눈가는 여전히 시큰하고 뜨거웠지만, 입꼬리는 통제할 수 없이 올라갔다.
주기락은 마침내 만족스럽게 눈을 휘었다. 춤은 멈췄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히 붙잡았다.
주기락
유연씨, 이 세상에서 저는 평범한 사람에서 Evolver로 완벽하게 진화한 유일한 아이예요.
주기락
그리고 당신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QUEEN이고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어두운 빛이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주기락
우리 둘만이 같은 세계에 속해 있어요.
주기락
저는 당신의 절대적인 동반자예요. 당신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어요.
그 눈이 너무 진심이어서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를 들었다.
주기락
당신과 나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그려낼 거예요.
주기락
그 전까지는 아무도 이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와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요.
그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마치 나에게 에덴동산 하나를 약속하는 것처럼.
유연
……그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이미 생각해둔 건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동자 속 금빛은 조수처럼 서서히 빠져나가며, 다시 순수하고 흠 없는 푸른빛을 드러냈다.
주기락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어요.
주기락
당신이 나를 창조했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이 영원히 나의 영원한 뮤즈가 되어줬으면 해요——나의 “아담”이 되어줘요.
나는 살짝 멈칫했다.
그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되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유연
……그럴게요.
세 글자를 입 밖에 낸 순간, 주기락의 눈이 한순간 반짝였다.
그는 내 손을 소중히 들어 올려 자기 가슴 위에 올렸다. 옷 너머로 그의 열띤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주기락
그럼 지금부터 세상이 우리를 위해 노래하게 해요.
주기락은 고개를 숙여 이마를 내 이마에 가볍게 맞댔다.
그 한 줄기 숨결이 내 속눈썹을 또렷하게 스쳤다. 따뜻하고 눈치채기 어려운 습기를 조금 머금은 채.
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속에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 세 글자는 내가 자발적으로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한 약속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또 나를 어디로 데려가게 될지도.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밤빛은 여전히 짙었고 새벽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주기락이 열한 주신 앞에서 선언했을 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어딘가가 맞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유연
그런데 기락씨…… 내가 기억하기로 당신은 원래 Evol을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유연
아까 당신이 진화를 정의하겠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정의하려는 거야?
주기락
만약 처음부터 Evol이라는 힘이 없었다면, 이 세계에서 갈등과 분쟁이 훨씬 줄어들지 않았을까요?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일부러 말투를 부드럽게 낮췄다. 마치 차근차근 나를 이끄는 것처럼.
주기락
Evol이 없었다면, 능력 차이 때문에 서로 의심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실험 대상이 되는 사람도 없었을 거야……
주기락
그렇게 많은 조직도, 그렇게 많은 음모도 없을 거고.
그는 잠시 멈추고 시선을 내게로 던졌다.
주기락
당신은 분명 세계를 구할 수 있어요. 하지만 관점을 바꿔 생각하면, 그것 역시 Evol이 재앙을 가져왔기 때문에 억지로 당신에게 떠넘겨진 보상이 아닌가요?
주기락
매번 당신 혼자서 세계를 구해야 하는 거, 지치지 않아요? 괴롭지 않아요? 당신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건가요?
주기락이 말하다 보니 미간이 찌푸려졌다. 눈 속에 안타까움과 분노가 더해졌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해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감히 정면으로 보지 못했던 이기적인 생각을 꺼내놓아도.
나는 여전히 침묵했다.
유연
하지만 Evol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등대 문명처럼 평생 운명을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겠죠.
유연
나는 이 힘을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어요.
유연
그래서 만약 결말이 그렇게 된 거라면, 나는 이 대가를 받아들일 거예요.
유연
그래야 당신의 손을 붙잡을 수 있을 테니까.
공기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주기락은 나를 바라보았고 그 눈동자 안에 미묘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주기락
아니, 그건 별개의 일이에요.
주기락
당신의 힘과 Evol의 힘은 달라요. 그 두 개념을 혼동하고 있는 거예요.
주기락
당신은 여전히 당신만의 힘으로 세계를 구하고, 지키고 싶은 사람을 보호하고, 내 손을 잡을 수 있어요.
주기락
하지만 재앙을 가져온 근원도 처리돼야 해요.
그는 내 손을 가볍게 잡아 올리고, 더없이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주기락
이 세계가 나쁘다면 없애버리면 되죠.
주기락
Evol도 마찬가지예요. 별거 아니에요.

주기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고, 그는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주기락
유연씨,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줘서 정말 기뻐요.
주기락
앞으로는 하고 싶은 말, 알고 있는 것들을 저한테만 말해줘요. 그럴 수 있죠?
그가 내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 당연한 일을 제안하는 것 같았다.
공기 중에는 여전히 있는 듯 없는 듯 Evol이 흐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실처럼 우리 둘을 단단히 묶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숨결이 내 손등 위에 내려앉으며, 아주 가볍고 달콤한 기운이 담긴 입맞춤을 남겼다.
주기락
우리는 운명공동체예요. 나와 당신만이요.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오직 나만 들을 수 있는 속삭임처럼.
이 순간, 우리는 마치 같은 사과 하나를 나누며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을 함께 누리는 것 같았다.
서로가 만든 에덴동산 안에서 영혼이 이어지며 금지된 열매를 함께 맛보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한 초만 더 보면 이 모든 것을 진짜로 믿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시선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그 어둠 너머로 차단됐을 때——
오직 나만의 세계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에덴동산도, 사과도, 그 아름다운 짙은 파란색 눈동자도 없었다.
나 혼자만,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8-11 창세기의 창조
창세신이 말했다. 빛이 있으라!
8-12 그의 우상
왜냐하면 형이 제 우상이거든요! 제가 제일제일 되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 뒤로 무슨 말을 더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기락이 이미 나를 회의실에서 데리고 나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주기락
늦었으니까,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쉬어요.
이 길고 긴 밤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피로가 온몸으로 서서히 퍼졌다. 나는 눈꺼풀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복도 끝에서 다소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젊은 사람이 거의 뛰다시피 다가왔다. 흰 가운의 깃을 제대로 잠그지도 못한 채였지만, 얼굴에는 어떤 억누를 수 없는 흥분이 가득했다.
그의 등 뒤로, 네다섯 살짜리 아이가 따라왔다.
그 아이는 몸에 맞지 않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드러난 팔이 마른 나뭇가지 두 개처럼 가늘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주기락의 발걸음도 즉각 멈췄다.
연구원
BOSS, 지금 늦은 시간이고 제 권한으로는 직접 보고드리면 안 된다는 것도 압니다.
연구원
하지만 제 손에 최신 성과가 있는데, 그 의미가 너무 중대해서, 어쩌면 세계 전체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서……!
상대방이 우리 앞에 멈춰 섰다. 흥분해서 거의 말이 뒤엉킬 지경이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자료 묶음을 꺼냈다. 손가락이 흥분으로 떨렸다.
연구원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진행한 연구 프로젝트입니다. 정식 심사를 거치지 않은 것 알고 있지만, 데이터를 보시면 모든 게 이해되실 거예요!
그가 손을 뻗어 옆의 아이를 잡아당겨 앞에 세웠다. 말투에 뽐내는 듯한 뿌듯함이 가득했다.
연구원
몇 달 전에 Evol 진화 이론에서 새로운 통찰을 얻고, 실험 연구를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원
기존 서류를 전부 정리해봤는데, 솔직히 17년 전의 기술과 식견은 이미 낡았습니다.
연구원
그래서 과감하게 모델을 재구성하고, 근본적으로 완전한 업그레이드를 했습니다!
연구원
그 결과 유전자 공명 검출법을 도입해 더 적합한 실험체를 단계적으로 선별했습니다.
연구원
수차례 실패를 거듭했지만, 이 아이는 특별합니다!
연구원
데이터상으로 이 아이의 각종 생리 지표, Evol 적합도가 당시 BOSS님……
상대방이 갑자기 멈췄다. 어떤 표현에 막힌 것 같았다. 그러더니 말을 다듬어 다시 내뱉었다.
연구원
B.S.에서 유일하게 Evol 진화를 성공적으로 완료한 그 아이와——거의 완전히 일치합니다.
여기까지 말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눈 속의 광기를 감추지 못했다.
연구원
BOSS, 이 아이가 다음 완벽한 진화 성공 사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공기가 그 순간 굳어버렸다.
다음 순간, 맞잡은 손바닥이 갑자기 꽉 쥐어졌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순식간에 전해졌다. 가슴 속에도 무언가가 틀어쥐는 것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의 기운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어떤 것이 격렬하게 몰아치는 것 같았다.
동시에, 익숙한 현기증이 갑자기 밀려왔다.
고요한 빛 속에서, 아무 예고도 없이 어떤 장면이 머릿속으로 충돌했다. 나는 몸이 휘청이며, 몰래 손으로 벽을 짚었다.
거의 같은 순간, 나는 내 Evol이 또다시 수동적으로 발동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낡은 기계가 귀를 찌르는 웅웅거림을 냈고, 작디작은 두 손이 덜덜 떨며 앞으로 뻗어졌다.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그 손을 강제로 작업대 위에 눌렀다.
주삿바늘이 혈관에 꽂히는 순간, 귓가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완전히 울음을 터뜨리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작은 짐승 같은 흐느낌만 새어 나왔다.
장면이 줄줄이 밀려왔다, 하나씩 하나씩——
차가운 실험 캡슐, 눈부신 무영등, 팔 위에 빼곡한 주사 자국들이 깨진 유리처럼 의식 속을 찔렀다.
……이건 누구의 기억이지? 눈앞의 이 아이의 기억일까? 아니면 Poseidon에게 잡혀간 어떤 아이의 기억일까?
내가 그 혼란스러운 장면들 속에서 무언가를 구분하려 애쓰던 순간, 화면 속의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그 아이는 비틀거리며 작은 발판 위에 올라섰고, 시야도 갑자기 높아졌다.
더러운 거울 하나에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어린 남자아이가 비쳤다.
나의 숨이 찰나에 멈췄다——
주기락……이었다.
통증이 심한 듯, 그의 이목구비는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금발은 땀에 젖어 축축하게 이마 위로 내려와 있었다.
그 크고 예쁜 눈이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마치 잠깐 저게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처럼.
그런데 그 작은 몸은, 내내 가볍게 떨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작은 손이 마침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서투르게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다음 순간, 어딘가 상처에 닿은 것 같았다. 온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거의 발판에서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 눈 속은 여전히 멍한 것 같았다. 자신을 떨게 하는 게 무엇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크고 작은 멍들, 수술 봉합 흔적들이 겹겹이 쌓여, 얼룩지고 참혹한 유화처럼 보였다.
어린 시절 주기락
……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완전한 소리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했다.
그의 손가락이 힘을 잃자, 환자복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가 손등으로 눈물을 세게 닦았다. 하지만 닦을수록 더 많이 흘렀다.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눈물들은 계속 뺨을 타고 굴러내려 한 방울씩 작업대의 금속판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잘게 부서진 빛이 되었다.
가장 어두운 곳에 별이 떨어진 것처럼.
어린 시절 주기락
……
그가 작게 흐느끼며, 내 심장도 단단히 쥐어짜여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먼저 이 능력을 멈춰야 했다.
나는 손을 꽉 쥐며, 억지로 의식을 그 장면 속에서 조금씩 끌어냈다.
몰아치는 그 힘이 계속 나를 침범했다. 이마에 서서히 식은땀이 배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계속 시도했다.
거의 온 힘을 다 써냈을 때, 그 눈부신 장면이 마침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멍하게 눈을 깜빡이자, 눈앞이 다시 B.S. 복도로 돌아왔다.
옆의 주기락은,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했던 그 작은 아이가 아니었다.
고개를 숙여 실험 자료를 넘기고 있었다. 안색은 평소 그대로였다. 표정이 흠잡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손마디가 은밀히 힘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늘 완벽하고 공허하던 인형에게, 소리 없이 몰아치는 어떤 감정 아래에서 마침내 아주 가느다란 금이 간 것 같았다.
이 순간, 늘 완벽하고 공허한 인형 같던 그에게, 무언가 소리 없이 격동하는 감정 아래에서, 마침내 아주 가는 균열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어둡고 복잡한 검은 조수가 그 가는 틈을 통해, 서서히 스며 나왔다.
소리 없이, 그를 적시고, 나를 적셨다.
다음 순간, 주기락이 자료를 덮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
주기락
누가 아이를 실험에 쓰라고 허락했지?
연구원의 흥분은 그 순간 얼어붙었다. 얼굴의 핏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연구원
BOSS…… 저는 이 아이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모든 절차는 안전합니다, 게다가……
그는 더듬거리며 손을 뻗어 옆의 아이를 끌어안았다.
연구원
게다가 이 아이의 협조 의지도 아주 높습니다! 완전히 자원한 겁니다! 그래서 과정도 아주 순조로웠습니다.
연구원
어서! 어서 BOSS께 말씀드려!
마침내 허락을 받은 듯, 그 아이는 급히 앞으로 나서 주기락의 손목을 힘껏 붙잡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검고 큰 눈으로 주기락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놀라울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아이
BOSS 형! 저 걱정 안 해도 돼요! 저 진짜 대단해요! 봐요!
그의 목소리는 맑고 들떠 있었고, 공기 속에 퍼진 긴장감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급하게 자기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 가느다란 작은 팔에도 주삿바늘 자국과 멍이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마치 작은 전사가 자신의 영광스러운 훈장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이
형, 저 하나도 안 아팠어요.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렸어요!
아이
왜냐하면 형이 제 우상이거든요! 제가 제일제일 되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엄청 열심히, 엄청 노력했어요!
아이
나중에 의사 아저씨가 제 데이터가 아주 좋다고 했어요. 엄청 대단해질 거래요——
아이
BOSS 형처럼요!
주기락
……
아이
곧 저도 BOSS 형처럼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대영웅이 될 거래요!
작디작은 아이는 고개를 들고 있었다. 눈에는 사람 마음을 찢어놓는 숭배가 반짝였고, 나는 온몸이 통제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온몸으로, 마치 억누를 수 없는 한기가 뼈 사이에서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그 팔 위의 주삿바늘 자국들은 그 아이의 눈에는 상처가 아니라, 꿈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대가 역시 그에게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담금질일 뿐이었다.
눈앞에서 가슴을 곧게 펴고 눈에 빛을 가득 담은 어린 남자아이를 보자 나는 문득 예전 고아원에서 구석에 웅크린 채 떨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앞의 이 아이와 그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잔혹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그가 겨우 네댓 살이라, 실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일까?
아니면 그가 동경하는 BOSS 형이 그와 같은 나이였을 때……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채, 감히 소리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까.
나는 “사랑”의 소실이 이런 장면까지 낳을 줄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위장에서 갑자기 역한 것이 치밀었다.
곁눈질 끝의 그 금빛은 그림자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분명 나와 반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나는 끝내 그에게 시선을 던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마치 온몸이 끝없는 심해 속으로 가라앉은 사람 같았다. 그와 함께, 주변 공기마저 조금씩 뼛속까지 시린 냉기로 젖어 들었다.
아이는 여전히 흥분한 채 자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다 주기락이 가볍게 그의 손을 떼어냈다.
주기락
지금 당장, 네 손에 있는 모든 실험을 멈춰.
연구원
BOSS……!
주기락이 차갑게 시선을 던지자, 연구원은 곧바로 두려워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린 남자아이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는 듯했고 드물게 조금 겁먹은 듯 몸을 움츠렸다.
——그림자처럼, 그 아이들처럼 웅크러들었다.
8-13 우상의 위상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만의 우상이 있다.
8-14 그의 보물
천 년, 만 년이 지나도, 우리는 계속 함께 있어야 해~
주기락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는 자신이 토할 것 같다고 느꼈다.
메스꺼움이 몇 번이고 위장 속을 뒤집어놓았다. 간신히 몸을 곧게 세운 채 화장실로 직진해 문을 닫고 잠갔다.
다음 순간, 그는 비틀거리며 세면대 앞으로 달려가 양손으로 세면대 가장자리를 세게 붙잡았다.
위장은 뒤집혔고 목구멍에서는 경련이 몇 번이고 올라왔다. 그는 남은 의지만으로 버티며 아무렇게나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그런데도 그는 헛구역질 소리가 문밖의 그녀에게 들릴까 걱정하며 입을 죽어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토해낼 수 없었다. 통제 불능에 가까울 만큼 거칠어진 호흡만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와 일그러진 흐느낌 같은 소리로 눌려 나왔다.
관자놀이가 쿵쿵 울렸다. 그는 한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필사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앞에서 튀어 오르는 물줄기를 응시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거의 기억들이 뒤엎어진 해일처럼 언제든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주기락
…………
주기락
…………
그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가 푸르게 변한 뒤에야 그 거센 뒤틀림은 마침내 조금씩 물러났다. 목 안에는 조여드는 둔한 통증만 남았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세면대 가장자리를 짚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주기락
…………
한 방울의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세면대 안으로 떨어진 뒤에야 그는 멍한 듯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빡였다.
더는 여기 있을 수 없었다.
그 뒤, 그는 억지로 찬물을 한 움큼 떠서 몇 번이고 얼굴에 끼얹었다.
차가운 물이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휴지 몇 장을 뽑아 물기를 닦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얼굴빛이 조금 창백한 것 외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주기락은 눈을 감았다. 한참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푸른빛 안에는 무언가가 달라져 있는 듯했다.
그는 곧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소파에 앉아, 주기락이 화장실에서 나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휴대폰을 들고 빠르게 몇 번 두드린 뒤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주기락
Hephaestus, 방금 내가 보낸 것, 처리해.
말을 마치고 그는 휴대폰을 거둔 뒤 소파로 걸어와 앉았다. 침묵도 그가 앉는 움직임을 따라 조금씩 번져나갔다.
그는 끝내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뽑혀나간 사람처럼 오래도록 소파에 가라앉아 있었다.
거실에는 창밖에서 스며드는 달빛뿐이었다. 말없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손바닥을 꽉 쥐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소리 없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곁에 있어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침묵의 소용돌이가 공기를 극한까지 짓누른 뒤 주기락의 목소리가 갑자기 고요함 속에서 울렸다.
주기락
……왜 이런 일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걸까요. 심지어 내 눈앞에서 일어났어요.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 푸른 눈은 앞쪽의 어느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마치 그의 일부가 아직도 그 차가운 복도에 남아 있는 듯했다.
주기락
……내 잘못이야…… 내가 제대로 하지 못했어.
유연
주기락,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주기락
……
주기락
……그 아이에게 미안해요.
그는 내 이름을 가볍게 중얼거렸다. 그 푸른빛 위에는 회색 안개가 덮였고 눈에는 딱 적절한 자책과 고통이 담겨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유연
기락씨, 모든 잘못을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말아요.
유연
당신은 누구에게도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주기락
……
그의 몸이 한순간 굳었다. 곧 천천히 힘을 풀고,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다. 자신이 완전히 내 품에 감싸이도록 내버려두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는 계속 낮게 가라앉은 말투로 자책의 말을 이어갔다——
마치 나 한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독백처럼.
점차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벼워졌고 말은 끊어지며 중얼거림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숨결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잠들었다. 하지만 그리 평온하지는 않았다.
잘생긴 미간과 눈매는 꽉 찌푸려져 있었고, 몸도 어렴풋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주름을 펴주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닿자마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마침 내 손을 피했다.
유연
……
마음이 둔하게 아파왔다. 나는 그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내 몸의 온기로 내가 계속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
그는 스며드는 온기를 느낀 듯 머리를 저도 모르게 가까이 기대왔다. 온기를 원해 다가오는 작은 동물처럼.
이 순간, 그는 마침내 꿈속에서 어떤 경계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이며, 알아듣기 힘든 잠꼬대를 흘렸다.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고,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를 깨워야 할지 망설였지만, 그의 눈 밑에 드리운 다크서클을 보고는 들어 올린 손을 다시 가볍게 내려놓았다.
들은 바로는 꿈은 사람의 즉시 기억을 이어 붙이고 모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나는 그것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를 더 단단히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의식이 가라앉는 순간 사방의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실내 놀이터 안에 서 있었다.
그곳은 어떤 방을 급조해서 만든 어린이 활동 구역 같았고, 놀이시설은 몇 개 되지 않았다.
먼지가 내려앉은 미끄럼틀과 회전의자, 그리고 더러운 볼풀 하나가 전부였고, 모든 것은 죽음 같은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벽에 그려진 만화 그림에는 두터운 먼지가 덮여 있었고, 그 위의 작은 동물들도 빛을 잃은 채, 아주 오래 잊혀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숨 막힐 만큼 답답한 공간의 머리 위에는 아주 작은 창문 하나뿐이었다. 그 좁은 틈으로 바라보이는 것은 회백색 하늘 한 조각뿐이었다.
멍하게 몸을 돌리는 순간, 구석의 한 실루엣이 시야에 갑자기 들어와 숨이 멎을 뻔했다.
그가 벽 구석에 등을 기댄 채, 긴 다리를 웅크리고 머리를 팔 사이에 깊이 묻고 있었다.
색이 바랜 환자복이 헐겁게 걸쳐져 있었다. 드러난 팔이 가늘고 창백했다.
나는 멍하게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시선이 무릎 위에 얹힌 그의 손에 내려앉았다. 온통 멍 자국이었다. 오랫동안 주사를 맞아 생긴 흔적 같았다.
그 순간, 어린 날의 그와 지금의 주기락이 소리 없이 겹쳐졌다.
먼 곳의 고통이 끝없는 강처럼 과거에서 지금까지 흘러들어, 나까지도 함께 아팠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었다.
늘 반짝이던 그 눈동자가 지금은 텅 빈 공허뿐이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망가진 도자기 인형 같았다.
유연
……주기락.
나는 이곳이 그의 기억에 속한 공간이고, 나는 그 안에서 방관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이 진짜 감촉에 닿은 순간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유연
……어떻게?!
그리고 이때, 주기락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유연
기락씨…… 내 말 들려요?
나는 좀 놀라고 기쁜 마음에 그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몇 초가 지나서야, 그 눈이 오랜 여정을 거친 것처럼 겨우 내 얼굴에 초점을 맞추었다.
주기락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눈 속에 조금씩 초조해보이는 내가 비치기 시작했다.
주기락
……
주기락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오래 말을 하지 않은 것처럼 쉬고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곧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미간을 갑자기 불안하게 찌푸리고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려 했다.
주기락
여기 위험해요. 어서 나랑 가요!
유연
뭐? 잠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나를 덥석 붙잡고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바깥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형광등은 계속 지직거리는 전류음을 내며,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나는 그렇게 그에게 이끌려 길을 따라 있는 문을 하나 또 하나 부딪치듯 열고 지나갔다.
그리고 모든 문 뒤에는 똑같이 창백한 실험실이 있었다.
눈부신 무영등 아래, 기계들은 삐삐삐 날카로운 경고음을 냈다.
그때마다 그는 급하게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려 나를 끌고 다음 문을 부딪쳐 열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게서 도망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허둥지둥 달리는 뒷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서서히 찢어지는 것 같았다.
유연
주기락……
그는 내 외침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계속 필사적으로 달렸다. 나를 이 끔찍한 곳에서 데리고 나가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나를 돌아본 뒤, 오히려 더 세게 붙잡았다.
주기락
내가 당신을 지킬 거야! 여기서 데리고 나갈게요!
하지만 이 복도에는 출구가 없었다. 모든 문 뒤에는 똑같은 악몽뿐이었다.
마지막에 그는 나를 데리고 다시 그 놀이터로 돌아왔고, 거칠게 문을 닫은 채 가슴을 심하게 들썩였다.
주기락
무서워하지 말아요. 난 포기 안 했어요. 여기서 먼저 기다려요.
주기락
내가 다시 나가서 살펴볼게요. 반드시 데리고 나갈게요.
그가 다시 문고리를 돌리려는 걸 보고, 나는 서둘러 그를 끌어안았다.
유연
주기락, 나가지 마요…… 나 무서워요.
유연
혼자 있기 싫어요.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평온하게 낮췄다. 언제든 달아날 것 같은 놀란 어린 사슴을 달래듯이.
유연
그러니까 저랑 같이 좀 쉬어요. 힘을 되찾으면 우리 같이 나가요, 응?
주기락
……
그는 멈칫했고, 온몸이 문 앞에 굳은 듯 서 있었다.
긴 침묵은 불안한 기다림으로 변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끌고 그 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그는 더 경계하듯 나를 문가에서 반대편으로 끌어당기고 자신은 벽 모서리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가 다시 두 다리를 웅크리는 모습을 보자 내 마음은 저도 모르게 조여들었다. 그래도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일단은 그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나도 두 무릎을 끌어안고, 조용히 고개를 기울여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마 벽에 등을 기대고 있기 때문인지, 방금 전의 다급함과 두려움은 조금씩 가라앉았고, 그는 다시 천천히 처음의 모습으로 움츠러들었다.
턱을 팔 사이에 낀 무릎 위에 얹고, 고요한 눈만 드러냈다.
그가 천천히 안정되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이어붙인 기억과 그의 반응을 종합해보면 이곳은 쌍엽고아원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주기락은 빛이 닿지 않는 그 그림자 속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그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주기락
다 쉬었어요?
유연
……아니, 아직 다리에 힘이 별로 없어요. 우리 잠깐 이야기나 할까요?
그는 가볍게 대답했고, 공기는 다시 가라앉았다.
유연
무슨 이야기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주기락
……
유연
나한테 묻고 싶은 건?
주기락
……
그는 입을 열었다가 결국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고, 나도 두 무릎을 끌어안아 그 위에 턱을 올렸다.
유연
그럼 당신 얘기를 해봐요.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주기락
어떻게 당신을 여기서 데리고 나갈지요.
유연
그럼 제가 나타나기 전에, 혼자 여기 앉아 있을 때는……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의 시선은 앞의 녹슨 의자 위에 떨어졌고, 잠시 침묵했다.
주기락
모르겠어. 아마 오늘은 왜 아무도 주사 놓으러 안 왔는지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주기락
왜 여기는 이렇게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지……
그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슬픔도 고통도 없이, 거의 마비된 듯한 공백뿐이었다.
기억은 뒤틀리고, 재조합되어, 그의 무의식 속에서 악몽으로 자라났다.
이곳에서 그는 영원히 과거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영원히 자라지 못하고, 그 고통 역시 영원히 끝나지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고, 눈가도 희미하게 뜨거워졌다.
나는 조용히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가능한 한 내 목소리를 차분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유연
기락씨, 걱정말아요. 이제부터 다시는 아무도 주사 놓으러 오지 않을 거예요.
유연
이곳의 모든 건, 이미 다 끝났어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유연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아주 건강하고 안전하게 자랐으니까요.
주기락
……
그는 멍해졌다. 한순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애써 웃고, 그의 무릎 위에 얹힌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두 손은 단단히 맞닿았다. 손가락은 손가락에, 손바닥 아래쪽은 손바닥 아래쪽에 닿았다.
유연
봐요. 우리 손바닥이 이렇게 커졌잖아요.
유연
그리고 당신 손가락은 길고 힘도 세서, 바이올린을 켜거나 피아노를 치기도 정말 좋아요.
유연
코드 칠 때도 굉장히 빠르고, 마술할 때도요!
유연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온 세상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잖아요.
주기락
……
그가 그 두 손을 아주 오래 바라봤다. 눈빛이 멍했다. 뭔가를 열심히 구분하려는 것 같았다.
유연
주기락, 당신과 나는 이미 다 컸어요.
유연
당신은 이미 아주 대단한 어른이 됐어요.
그의 시선은 천천히 올라갔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미간이 문득 조금 풀렸다.
주기락
……그런데 나는 왜 아직 여기 있는 거죠?
주기락
아니,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 거죠?
눈가에 뭔가 촉촉한 것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목이 살짝 메어 왔다.
그 순간, 내 짧은 몇 마디만으로는 그를 이 악몽에서 데려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아까 그가 나를 이곳에서 탈출시키지 못했던 것처럼.
이 모든 것을 바꾸고 싶었다. 여기의 어둠을 전부 그에게서 아주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나는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고, 힘껏 그를 향해 웃음을 펼쳤다.
유연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왜 아직 여기 있는 거죠?
유연
알았다! 여기다가 우리 보물을 숨겨둔 거잖아요!
주기락
……?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단호하게 말했다.
유연
분명 그래요. 왜냐하면 당신은 이런 면에서 엄청 대단한 보물찾기 달인이잖아요.
주기락
하지만 내가 뭘 숨겼는지 기억이 안 나……
유연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유연
그래야 보물찾기의 재미가 있죠.
주기락은 나를 보고, 다시 주변을 보았다. 텅 비어 있던 눈동자 안에 마침내 조금 다른 것이 생겨났다.
그는 확신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정말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주변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바닥을 살펴보고 회전의자와 놀이시설 사이사이도 만져보았다. 마지막에는 몸을 일으키고, 조금 혼란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주기락
……보물 찾기라면, 왜 보물 지도가 없죠?
유연
……
나는 잠깐 굳었다가, 어쩌면 그에게 드디어 호기심과 능동성이 생긴 것 같아 마음도 같이 풀어지며 가볍게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은 이런 때에도 논리가 참 좋았다 나빴다 한다……
그가 낸 난제를 앞에 두고 턱에 손을 괴고 생각하다가 눈가에 벽의 얼룩덜룩한 만화 그림이 스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유연
봐요, 이게 보물 지도잖아요!
나는 빠르게 벽 앞으로 걸어가 손을 뻗어 그 위의 두꺼운 먼지를 닦아냈다. 먼지들은 회백색 빛 아래에서 조금씩 흩날렸다.
금세, 세월에 묻혔던 색들이 다시 생생해지며, 앙증맞은 작은 동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주기락의 눈이 한 번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호기심 있게 걸어와, 이 그림들에서 보물과 관련된 어떤 단서를 찾으려 했다.
주기락
……
그가 다시 천천히 혼란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나도 고민하는 척 추리하기 시작했다.
유연
이 작은 동물들은 색깔이 정말 다양하네. 꼭 볼풀 안의 공들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주기락
……
주기락
음, 여기가 보물 숨기기에 꽤 좋겠네요.
주기락은 볼풀 앞으로 와서 쪼그려 앉고, 손을 집어넣어 뒤졌다.
볼풀공들은 그의 손에 가볍게 밀려나며 와르르 소리를 냈고 알록달록한 파도를 몇 번이고 일으켰다.
시간의 먼지를 뒤집어쓴 빛과 그림자가 그의 눈 밑에 비쳤다. 마치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바다가 마침내 희미한 물결을 띠는 것처럼.
나는 곁에서 기대하듯 웃었지만, 마음은 조용히 조여들었다. 저도 모르게 몰래 기도했다.
……제발, 그가 무언가를 찾게 해줘.
제발 이 회색과 흰색, 그리고 실험실뿐인 세계에 적어도 단 한순간의 아름다움이라도 나타나게 해줘.
그는 참을성 있게 뒤지고 있었다. 나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다 곁의 사람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주기락은 천천히 볼풀에서 손을 빼내고, 조금씩 손바닥을 펼쳤다.
주황색 사탕 두 개였다.
주기락
찾았다.
주기락은 가볍게 웃었다. 내 손을 들어 올려 사탕 두 개를 모두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유연
왜 나한테 다 줘요? 딱 한 사람에 하나씩이잖아요.
주기락
내 보물은 당신 한 사람에게만 주고 싶어요.
주기락
내가 당신을 제일 좋아하니까요.
주기락
그러니까 세상에서 제일제일 좋은 건 전부 당신에게 줘야 해요.
그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티끌 하나 섞이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뜻밖에 새어든 한 줄기 빛처럼.
내가 그런 웃음에 멍해져 있던 바로 그때, 문득 또 다른 얼굴이 지금의 순수함을 대신해 그의 얼굴 위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주기락은 조금 가까이 다가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고, 찬란하고, 눈부신 미소. 다시 태엽을 감은 인형처럼.
주기락
그러니까——떠나지 말아줘요. 응?
그 순간, 모든 것이 현실의 악몽과 조용히 겹쳐졌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아직 웃는 곡선이 남아 있었지만, 눈물은 통제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분명…… 나는당신이 웃고 있기를 바라. 누구보다도 네가 정말 행복하길 바라.
그런데 왜 네가 웃을 때마다, 오히려 내 눈물은 멈추지 않는 걸까.
주기락은 그 눈물들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약속한 순간, 그는 내 손을 잡고 더는 놓지 않았다.
주기락
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백 년이 지나도 변하면 안 돼요.
주기락
천 년, 만 년이 지나도, 우리는 계속 함께 있어야 해~
8-15 보물지도 계획
쉿!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 내가 보물을 거기에 숨겨뒀어!
8-16 흑색왜성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영원히 저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주기락
어젯밤에 좋은 꿈을 꾼 것 같아요. 기분이 훨씬 나아졌어요.
다음 날 아침, 주기락은 아침을 사 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샤오룽바오를 한입 베어 물더니,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기락
음! 이 집 샤오룽바오 진짜 맛있어. 빨리 먹어봐요.
유연
……응.
나는 그가 건네준 젓가락을 받아들었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는 정말 상태가 많이 회복된 것 같았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어제의 그늘을 조금은 씻어낸 듯했다.
집 안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나는 샤오룽바오를 베어 물며 멍하니 있다가 무심코 식탁 모서리를 스친 시선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예전에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애플이는 늘 타닥타닥 달려와서, 나와 주기락 중 누가 먼저 마음이 약해져 향긋한 사람 음식을 조금 나눠줄지 기다리곤 했다.
나는 다시 거실 벽 모서리를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애플이와 Cello의 밥그릇이 놓여 있어야 할 자리도 텅 비어 있었다.
유연
기락씨.
주기락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유연
애플이랑 Cello는 언제 집에 데려올 생각이에요?
주기락
요즘은 아무래도 어렵고, 좀 더 지나봐야죠.
그는 다시 샤오룽바오를 한입 베어 물었다. 방금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유연
근데 이렇게 오래 됐는데……
유연
Cello는 작업실에 있으니까 그래도 자주 볼 수 있다지만, 애플이는요?
주기락
……
이 순간, 그는 마침내 내 말투에서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한동안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 속에서 어둡게 무언가가 움직였다. 마치 한 줄 한 줄의 코드가 빠르게 어떤 정보를 처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주기락은 미소를 지었다.
주기락
마침 별일 없으니까 이따가 애플이 보러 가요.
주기락
생각해보니까 돌아온 뒤로 아직 못 봤잖아요.
주기락
애플아, 누가 왔는지 봐——
주기락이 선글라스를 쓰고 반려동물 하우스 문을 연 순간, 방 안에 있던 강아지 몇 마리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중 가장 빠르게 반응한 금빛 그림자 하나가 거의 구석에서 튀어나오듯 일어나,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애플이
멍! 멍멍——!
애플이는 단번에 주기락에게 달려들었다. 앞발 두 개로 신나게 그에게 매달렸고, 꼬리는 잔상이 생길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주기락이 머리를 다 쓰다듬기도 전에, 애플이는 다시 몸을 돌려 내 품으로 뛰어들어 나를 비비고, 또다시 주기락 곁으로 돌아가더니 더는 떨어지기 싫어했다.
애플이
멍멍멍!
나도 쪼그려 앉아 애플이의 머리와 몸을 쓰다듬었다.
유연
애플이, 밥 잘 먹고 있었어? 왠지 좀 마른 것 같은데……
애플이
멍!
유연
기락씨, 애플이 좀 마른 것 같지 않아요?
주기락
……
잠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나는 궁금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주기락은 한 손에 휴대폰을 쥐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 다른 손은 건성으로 애플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듯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웃는 얼굴로 애플이를 한 번 더 쓰다듬었다.
하지만 애플이는 그가 건성으로 쓰다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전히 기쁘다는 듯 그에게 몸을 비비며,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주기락
이따가 캔이라도 하나 따줄게. 좋지?
유연
……
내가 막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멀지 않은 창밖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팬A
어?! 주기락 아니야?!
팬B
세상에, 세상에, 진짜 그 사람이야!
나는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여러 젊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수군거리며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대담한 팬 몇 명이 종종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흥분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팬C
주기락! 사인이랑 사진 같이 찍어줄 수 있어요?
팬D
제발요, 저 진짜 엄청 좋아해요!
들어오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고 방 안의 강아지들도 따라 짖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주기락이 트레이드 마크 웃음을 지으며, 검지를 들어 입술 앞에 세우고, 모두를 향해 눈을 찡긋였다.
주기락
물론이죠. 대신 밖에 나가서 찍을까요? 여기는 공간이 너무 좁아서 다른 강아지 보러 온 보호자분들께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의 말투는 부드럽고 배려 깊었다. 팬들은 곧바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바깥 공터로 걸어갔다.
애플이
멍멍——!

주기락이 떠나는 것을 보자, 애플이는 본능적으로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주기락이 눈짓으로 문가에서 기다리게 했다.
애플이
멍……
거의 눈에 보일 만큼 나는 애플이의 높이 솟아 있던 꼬리가 천천히 아래로 처지는 것을 보았다.
눈이 시큰해져 나는 쪼그려 앉아 애플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유연
애플아, 조금만 더 기다려.
유연
끝나면 돌아와서 우리랑 놀아줄 거야.
애플이
……
애플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몸을 팽팽히 세운 채, 눈은 줄곧 햇빛 아래의 주기락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 실루엣이 눈부신 빛으로 도금되어, 누구든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밝게 빛났다.
그가 이 사람에게 웃고, 저 사람에게 브이를 하고, 사진 찍고 싶어 하는 팬들의 각도에 맞춰 자세를 취했다. 사인할 때 팔뚝 선조차 완벽하게 보였다.
내가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주기락의 시선이 갑자기 들리더니 인파를 넘어 나와 마주쳤다.
그 순간, 햇살이 더 눈부시게 변하는 것 같았다. 하얗게 그의 윤곽이 흐려지며,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온기도, 감정도 없었다. 침묵하는 백색왜성 같았다.
유연
……
다음 순간, 주기락은 카메라 앞에서 다시 눈을 휘어 웃었다. 태양이 다시 떠오른 듯했고, 방금 찰나는 내 착각이었던 것만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애플이를 더 꼭 안으려 했다. 하지만 애플이는 더는 참지 못한 듯 주기락이 사람들 사이에서 찬란하게 웃음을 터뜨린 순간 그를 향해 달려갔다.
애플이는 주기락의 발치에 달려들어 그의 바짓가랑이에 힘껏 몸을 비비며 아양 섞인 끙끙거림을 냈다.
주기락은 쪼그려 앉아 몸을 숙이고 애플이와 이마를 맞댔다. 사람들은 곧바로 환호성을 지르며, 일제히 휴대폰을 들어 그 장면을 찍었다.
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은 채, 뻗었던 손을 허공에 멈췄다가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강아지가 뭘 알겠어?
강아지는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순수하게 좋아할 뿐이다. 그 사람이 한눈에 자신의 온 마음의 기쁨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하지만 강아지는 모른다. 지금 그 사람의 눈에는, 이미 자신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
아이고——
멀지 않은 곳에서 늙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 한 분이 반려동물 하우스 문 앞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가 희끗희끗했고, 눈썹과 눈매에는 익숙한 자애로움이 담겨있었다.
거의 그 순간, 나는 알아보았다. 그녀는 예전 《X 프로젝트》에서 주기락이 솜사탕을 건네주었던 그 할머니였고, 그의 열성 팬이기도 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사람들 한가운데의 주기락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자애롭고 평온했다. 놀람도 없고, 냉담함도 없었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지팡이를 짚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유연
할머니……!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내 몸 위에 몇 초 머문 뒤,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할머니
너구나……그때 그 아가씨.
할머니
그때는 네가 그 아이의 사장님인 줄은 몰랐지, 허허허.
유연
저를 아직도 기억하세요?
할머니
그럼, 그래도 요즘은 기억력이 점점 나빠져서 말이야. 내가 뭘 하러 가던 참이었더라……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앞으로 걸어가려 했다. 거의 같은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한 가지 질문을 확인했다.
유연
할머니, 왜…… 가서 인사를 안 하세요.
유연
그 사람도 할머니 보면 분명히 기뻐할 텐데요.
할머니는 잠시 멈췄다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할머니
사실…… 난 이미 꽤 오래 관심을 안 두고 있었단다.
할머니
사람이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예전만큼 기운이 없으니까.
할머니
그런데 Kilo가 아직도 활동하고 있었구나? 참 대단하네…… 너희 모두 대단하지.
할머니
그 아이가 계속 잘 지냈으면 좋겠구나. 아가씨도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다시 나를 향해 웃어 보인 뒤, 몸을 돌려 천천히 다음 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저 그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석양빛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주기락은 애플이를 데리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동시에 직원들도 질서 유지를 도와주었다.
이후 그는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 울타리 문을 열고, 다정하게 애플이를 데리고 들어간 뒤, 울타리를 닫았다.
애플이
멍? 멍멍——!
애플이는 이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필사적으로 울타리를 붙잡고 억울한 끙끙거림을 몇 번이고 냈다.
주기락
사장님, 저 이제 충분히 쉬었어요. 다음에 또 보러 올게요.
애플이
우우…… 멍!
주기락이 돌아서서 떠나는 것을 보며, 나는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유연
기락씨, 사실 집에 데려올 수도 있잖아요.
주기락
나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요즘 정말 바빠서 산책도 제대로 못 시키고, 제때 밥도 못 챙겨줘요.
주기락
그리고 봐요. 여기 스태프들도 전문적이고, 애플이도 여기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그가 설명하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유연
하지만 애플이는 당신을 정말 보고 싶어 하고, 당신이 필요해 보여요.
주기락
하지만 나는 애플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까 봐 더 걱정돼요.
그는 단번에 내 말을 막아버렸다.
유연
……
유연
그럼 제가 데려갈게요. 시간 내서 돌볼게요.
주기락
그건 더 안 돼요.
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말투는 여전히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주기락
당신도 일이 많잖아요. 더 신경쓰고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그는 몸을 낮춰 우리 문 너머로 애플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기락
애플이, 착하지.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주기락
내가 그녀와 함께 세계를 잘 구하고 나면 기쁘게 너와 Cello를 모두 집으로 데려갈게. 알겠지?
애플이
……
애플이는 더 이상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든 눈에는 억울함이 가득했고 꼬리는 다시 아래로 처졌다.
그는 무언가를 알아들은 것 같았고 또 그의 말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 같았다.
차에 오른 뒤, 차 안은 아주 조용했다.
주기락은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옆얼굴은 빛과 그림자 속에서 유난히 부드러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려 차창 밖 거리 풍경을 바라보았다. 생각은 점점 더 멀어졌다.
애플이의 끙끙거림, 할머니의 뒷모습. 그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번갈아 스쳐 지나가며 계속 나를 찢어놓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유연
그 솜사탕 할머니, 기억해요?
그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내가 계속 말하라는 뜻을 보였다.
유연
아까 거기 근처에 계시더라고요. 꽤 우연이죠.
주기락
아, 진짜 우연이네. 몸은 아직 정정하셔요?
유연
전부 괜찮으신 것 같았어요. 다만…… 나이가 좀 드셨어요.
주기락
……
그는 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집중해서 핸들을 돌리며 다음 교차로로 들어섰다.
나도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이 침묵이 너무 뚜렷했던 탓인지, 주기락은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빨간불 앞에서 천천히 차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곡선이 떠올랐다.
주기락
괜찮아요. 사람은 항상 오고 가는 거잖아요. 오는 사람이 있으면 언젠가는 떠나는 사람도 있는 거고요.
그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주기락
앞으로 내가 더 노력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게 할게요.
주기락
새로 오는 사람이 떠나는 사람보다 훨씬 많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유연
하지만 그렇게 하면……진짜로 남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주기락
나는 그들이 모두 진짜로 남게 만들 거예요.
주기락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말했다. 이어 그 시선이 내 얼굴 위에 떨어졌다. 그 안에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확신이 담겨 있었다.
주기락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영원히 저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주기락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8-17 거울 속 꽃, 물속 달
건드리지만 않으면 그것은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완벽하다.
구시가지
안정감
애플이는 말을 할 수 없지만, 주기락을 아주, 아주 보고 싶어 한다.
“주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애플이의 최근 상태를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애플이를 면회한 뒤, 반려동물 하우스 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주기락을 복도 끝의 상담실로 안내했다.
내가 따라오는 것을 보자 그녀의 걸음이 살짝 멈췄다. 시선이 내 얼굴에 1초도 채 머물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알아본 듯 자세가 더 반듯해졌다. 그녀는 몸을 살짝 비켜 반 걸음을 내주었다.
“이쪽 여성분도 함께 들어오세요.”
방은 크지 않았다. 벽에는 여러 고양이와 강아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직원은 우리 맞은편에 앉아 파일 하나를 펼쳤다.
“애플이의 최근 전반적인 상태는 괜찮습니다. 체중은 1kg 정도 줄었고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수치가 오히려 애플이에게 더 표준적이에요. 구충과 백신도 제때 진행했고, 건강 면에서는 완전히 안심하셔도 됩니다.”
주기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기락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직원은 황송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아, 그리고 꽤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어요. 저희가 보니까 애플이가 자기 장난감 공을 물고 가서 집 옆에 쌓아두더라고요. 매일 한 번씩 꼭 확인도 하고요. 훈련사 말로는 이게 일종의 대체 행동이래요——원래 의지하던 대상이 곁에 없을 때, 안정감을 어떤 고정된 물건으로 옮기는 거죠.”
그녀는 웃었다. 귀여운 작은 일화를 나누는 것처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나는 듣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져서, 참지 못하고 주기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도 따라서 웃고 있었다.
습광골목
함께 집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약속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유연
기락씨, 다음에는 언제 애플이 보러 올까요?
주기락
음, 생각해볼게요.
이번 주에는 노래를 써야 하고, 다음 주에는 홍보 활동 몇 개에 참여해야 하고, 그다음 주에는……
아마 당분간은 애플이를 보러 갈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유연
……
주기락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그때가 되면 내가 시간을 좀 짜내볼게요.
나도 애플이가 정말 보고 싶거든요. 몇 번이나 꿈도 꿨어요. 애플이가 나왔다고요.
우리랑 애플이, 그리고 Cello가 잔디밭에 앉아 햇볕을 쬐다가, 마지막에는 다 같이 웅크리고 잠드는 꿈이었어요.
꿈속의 꿈이었어요. 특별하죠?
유연
하지만 나는 그게 그냥 꿈으로만 남는 건 싫어요.
주기락
……
주기락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더 줘요. 응?
언젠가는 우리가 애플이랑 Cello를 데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꽃나무로
체면
Evol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 훨씬 편리해진다. 이별을 말하는 것조차도.
여자친구
미안해. 우리 헤어지자.
남자친구
뭐?
여자친구
오랫동안 생각했어.
여자친구
너와 사귄 지난 2년 동안,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어.
여자친구
더 넓은 세상을 본 것도 아니고, 내 인생이 더 풍부하고 멋져진 것도 아니었어.
여자친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각자 출근하고, 주말에는 집에 틀어박혀 드라마를 보고, 가끔 쇼핑몰에 가서 구경하고.
여자친구
하루하루가 복붙한 것처럼 흘러갔어.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남자친구
하지만 그런 생활이 평범하긴 해도, 행복하긴 했잖아……
남자친구
그럼 우리 결혼할까?
남자친구
네가 일상이 평범하다고 느끼는 건, 어쩌면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가 와서 그런 거 아닐까?
남자친구
집도 사고, 강아지도 키우고, 미래도 계획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모든 게 달라질지도 몰라.
여자친구
싫어.
남자친구
……
남자친구
그건 네 마음대로 안 돼. 난 동의 못 해.
여자친구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헤어진 거야.
여자친구
경고하는데, 귀찮게 굴지 마. 안 그러면 Evol 쓸거야.
8-18 공백의 선율
나는 더 이상 그를 따라 웃지 않았다.
주기락
며칠 더 있다가 가요, 응?
반려동물 하우스를 떠난 뒤, 주기락은 다시 나를 곧장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내가 잠시 멍해 있는 것을 보자, 그는 두 손을 모으고 진심 어린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주기락
요 며칠 칩거하며 곡 작업을 했는데, 진도가 영 안 나왔거든.
주기락
그런데 지금은 나의 뮤즈가 곁에 있잖아. 그럼 달라지지. 분명 빠르고 좋게 쓸 수 있을 거야. 부탁해요, 부탁해……
유연
……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몇 번이나 그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슴에 막혀 있던 말들을 한꺼번에 전부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입까지 올라오는 말들을 몇 번이고 억지로 삼켰다.
유연
……물론 괜찮아요.
그렇게 나는 남았다.
주기락도 손에 남은 일들을 모두 처리한 듯했다.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를 끌고 자신의 전용 음악실로 달려 들어갔다.
문을 열자, 오선지와 악보 초안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구겨서 구석에 던진 것들도 있었고, 음표 몇 개만 적고 줄로 가득 그어버린 것들도 있었다.
그도 이 어수선함에 놀란 듯, 급히 폐원고 뭉치를 되는대로 주워 구석에 밀어 넣었다. 그제야 겨우 소파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
주기락
허니칩씨, 여기 앉아요~
주기락
전에 내 신곡이 뭔가 부족한 느낌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 기간 동안 진득하게 고민해봤는데. 한번 들어볼래요?
주기락은 손 가까이에 있던 기타를 집어 들고 바닥에 앉았다. 한쪽 다리를 아무렇게나 구부린 채, 가볍게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맑은 음표가 현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바람이 스친 꽃바다처럼, 알록달록한 물결을 둥글게 일으켰다.
그는 온몸으로 선율 속에 잠겼다. 어깨는 박자에 따라 미세하게 오르내렸고, 유려한 흥얼거림이 입술 사이로 쏟아졌다.
곡의 전주는 매우 부드러웠다. 느긋하고 깨끗했으며, 의외로 그가 과거 작품에서 보여주던 익숙한 리듬이 조금 묻어 있었다.
하지만 듣다 보니, 내 마음 밑바닥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질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 선율들은 어딘가 낯익었다. 과거의 노래들에서 한 구절씩 떼어낸 뒤, 교묘하게 꿰매 붙인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 이어 붙이면, 마치 과거의 그를 맞춰낼 수 있을 것처럼.
아름다운 여운이 조용히 번져 나가자, 그는 고개를 들어 찬란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주기락
어때? 예전 느낌이 좀 나요?
유연
음……근데 왜인지 귀에 익은 것 같아요.
주기락
자주 쓰는 코드가 한정되어 있으니까 익숙하게 들릴 수 있죠~
그는 내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아니면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한 번 더 애써보고 싶어, 조심스럽게 어떤 선율이 그의 예전 어느 곡과 비슷한지 짚어주었다. 그는 다 듣고 나서,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다.
주기락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비슷긴 하네요. 하지만 제 주력 스타일이 이렇잖아요. 괜찮아요, 좀 더 수정해볼게요.
유연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유연
어차피 창작자는 당신이고, 저는 그냥 청중으로서 느낀 것을 말한 것뿐이에요.
주기락
당신은 보통 청중이 아니에요. 세상에서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잖아요. 당신 생각을 제일 신경 써야죠.
주기락이 눈 속의 흐릿한 빛을 거두며, 친근하게 내 코를 살짝 쥐었다.
그러고는 다시 펜을 집어 악보에 이것저것 써 내려갔다. 펜이 계속 내려갔다가 올라가며 허공에 멈추어 다음 음표의 위치를 좀처럼 찾지 못했다.
주기락
……
주기락
……
유연
잠깐 쉬는 게 어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주기락
조금 있다가요. 곧 떠오를 것 같아요.
결국 주기락은 한밤중까지 음악실에 있었다. 저녁밥도 빵 하나 대충 집어먹는 것으로 때웠다.
나는 함께 있으려 했지만, 그가 오히려 나에게 먼저 쉬라고 고집을 부렸다. 침대 맡에 아로마 초까지 정성스럽게 켜두었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지만, 눕지는 않았다.
공기에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달콤한 오렌지 향이 퍼져 있었다. 본래라면 졸음이 몰려와야 했지만, 그 향은 끝내 내 마음 깊숙이 스며들지 못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주기락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한다.
나는 그를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런 혼자의 시간이 그가 자기만의 답을 찾게 해주기를 바랐다.
잠시 뒤, 문틈 사이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거의 선율을 알아들을 수 없는 전자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신시사이저를 목적 없이 누르는 것 같았다. 한 번, 또 한 번. 하지만 끝내 완전한 한 소절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소리들은 조각조각 흘러와 하나하나 바닥에 떨어진 뒤, 더 깊고 더 긴 정적으로 돌아갔다.
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문을 열고 걸어갔다.
복도는 깜깜했고, 음악실 쪽에서만 희미한 빛이 조금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 안에서 그림자가 살짝 흔들렸다. 펜을 집어 든 것 같았다. 책상에 엎드려 뭔가를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종이가 구겨지고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세계가 다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유연
……
나는 눈을 내리깔고 문 옆 벽에 몸을 기댔다.
곧이어 묵직한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여전히 이리저리 맴돌고, 더듬거리며, 몇 번이고 연주되다가 침묵에 빠졌다. 어쩌면 넋을 잃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인지, 손끝이 무의식적으로 건반 끝을 두드리고 있었다.
한참 뒤, 선율은 다시 밤의 소리가 되었다.
그의 손끝은 흑백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듯했다. 뮤트 페달을 밟고 있는데도, 그 소리는 여전히 격렬하고 거세게, 또렷하게 새어 나왔다.
음표 하나하나가 마치 영혼 깊은 곳에서 억지로 파낸 것 같았다. 그가 필사적으로 화음 속에 내리꽂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거칠고 부서지며 끊임없이 날카로운 메아리를 냈다.
한 번, 또 한 번. 끊임없이 억눌린 채 울리고 있었지만 마치 텅 빈 것 같기도 했다.
선율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목소리를 잃은 사람이 억지로 짜내는 비명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대신해 가장 진실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순간, 그것은 마침내 그를 위로하고,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남은 유일한 진짜 출구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를 꾸짖고, 질책하고, 그가 자신을 저버려 이렇게 망가지게 만들었다고 비난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와 그것의 목소리가 서로 뒤섞였다. 울리는 것은 더 이상 음표가 아닌 것 같았다.
절망적인 말들이 한 구절, 또 한 구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손이 높이 들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허공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주기락
……아니야.

마침내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문틈 사이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기락의 손은 천천히 내려왔다. 그는 방금의 단락에서 화음 하나를 골라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고 계속 밀고 나갔다. 하지만 몇 초 뒤, 그는 또 멈췄다.
주기락
역시 아니야.
그는 짜증스럽게 이마에 내려온 금발을 쓸어 올리고, 몇 번이고 다시 시작했다——
같은 단락, 같은 전환점. 그는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매번 핵심 지점에 이르면, 그는 직접 리듬을 끊어버렸다.
주기락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주기락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몸도 점점 더 팽팽하게 굳었다.
그의 열 손가락은 여전히 건반을 죽어라 누르고 있었고 손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등의 푸른 핏줄이 하나하나 도드라졌다.
허리를 굽힌 그 그림자는 피아노 위에 엎드린 채, 오래도록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숨을 죽였다.
주변에는 텅 빈 백색소음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가 산산이 찢어진 것 같았다.
모든 허상은 이 순간 이토록 창백해 보였고, 마치 나에게도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왜…… 왜……
왜 그는 분명 마침내 모든 것을 헤치고 무언가를 찾으려 했는데 겹겹이 벗겨낸 끝에는 텅 빈 것밖에 없을까.
왜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했고, 그렇게 많은 선물과 빛을 받았는데, 지금은 희미한 어둠만 남은 걸까.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 주기락은 문을 닫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 사이에는 더 무거운 골짜기가 가로놓인 것 같았다.
흐느낌 같은 소리가 조용히 울리자 나는 그것이 하는 말도 들은 듯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렇게 계속해서는 안 된다.
다음 날, 나는 여전히 주기락과 함께 음악실에 머물렀다.
그는 때때로 고개를 묻고 악보를 썼고, 때때로 피아노 앞에 앉아 몇 구절을 시험했다. 전체적으로는 어젯밤보다 훨씬 기운 있어 보였다.
저녁이 되었을 때,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비밀스러운 얼굴로 나를 소파에서 살짝 밀어내 방 밖으로 내보냈다.
주기락
잠깐 방으로 가서 쉬어요.
주기락
한두 시간 뒤에, 엄청나게 큰 서프라이즈를 줄게요.
유연
서프라이즈?
그는 내게 윙크했다. 눈 밑에는 흥분된 빛이 반짝였다.
주기락
거의 다 됐거든요. 내가 준비되면, 뮤즈 씨가 첫 번째 청자가 되어줬으면 해요.
그가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자, 내 마음 밑에서도 문득 비가 갠 뒤의 희망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유연
정말? 그럼 알겠어요. 방에서 기다릴게요.
유연
나는 급하지 않으니까 천천히 해요. 몇 시간 더 기다려도 괜찮아요~
나는 그렇게 불안하면서도 기대를 품고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방문이 가볍게 두드려지고, 금빛 머리 하나가 문틈으로 빼꼼 들어올 때까지.
주기락
초연 감상할 준비 됐어요?
유연
준비됐어요!
그는 안으로 들어와, 손에 든 스피커와 악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부드럽고 유려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햇빛을 비추는 맑은 샘물처럼 졸졸 흐르고 반짝이는 물결을 일으켰다.
주기락은 눈을 감고, 전주에 맞춰 가볍게 숨을 들이쉰 뒤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선율을 따라 오르내렸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감겨들듯 부드러웠다. 마치 자기 자신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감정을 온 힘을 다해 해석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 반짝이는 물결 아래에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 음절이 떨어진 뒤, 그는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밝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주기락
어때요? 꽤 괜찮죠?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스스로 웃기 시작했다. 마치 들뜸과 자신감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확신하려는 것처럼.
주기락
역시 당신이 여기 있어야 좋은 음악을 쓸 수 있다니까요.
주기락
당신만 있으면 앞으로 나올 모든 신곡은 한 달, 반년, 심지어 1년 동안 차트를 휩쓰는 것도 문제없을 거예요.
유연
……
나는 더 이상 그를 따라 웃지 않았다.
나는 손을 들어, 허공에서 흔들리던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손바닥이 맞닿은 순간,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거짓말이 오래 이어질수록, 그것을 찢어내는 데 필요한 용기는 더 커지고, 더 많은 아픔을 가져온다.
하지만 거짓말은 결국 거짓말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태양 아래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유연
주기락.
유연
다른 일이라면, 당신이 나를 어떻게 속여도 괜찮아요.
유연
당신은 자신이 아주 즐겁다고 가장해도 되고, 이 세계가 사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가장해도 되고, 우리가 아직 예전과 똑같다고 가장해도 돼요.
이 순간, 나는 마침내 또 다른 잔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눈 속에 있던 빛을, 내 손으로 조금씩 천천히 가려버리고 있었다.
유연
하지만 음악은 안 돼요.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미친 듯이 증발해버리는 것 같았다.
유연
……당신은 당신의 음악에게 거짓말하면 안 돼요.
유연
안 돼요.
8-19 Sunburn
당신은 “■(사랑)”이 뭔지 알죠. 그럼 나한테 줄 수 있어요?
세계가 고요해졌다.
마치 더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밀려오는 듯했다. 짙푸른 바다가 조금씩 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와, 우리 두 사람을 함께 잠기게 했다.
주기락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의 미소는 방금 전의 곡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 눈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가 빠르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먼저 침묵을 깨고 애써 가볍게 웃었다.
주기락
아—— 혹시 이런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어요? 다시 고쳐볼게요.
그가 몸을 돌려 음악실로 돌아가려 하자, 나는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
오늘 밤은 달빛마저 어두워졌고, 방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짓눌렀다.
나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은 내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피할 수 없는 감정 아래에서 목소리는 점점 더 떨려왔다.
유연
당신이 계속 알고 싶어 했잖아요……지난 반년 동안 만든 음악에 무엇이 부족했는지.
유연
내가 말해줄게요.
나는 거짓말을 들춰낸 뒤 밀려오는 통증을 조금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유연
이 세계는……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유연
그래서 당신의 음악도, 당신 자신도……그것을 잃은 거예요.
주기락이 멈칫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동안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연
나도 알아요. 지금 분명 이상하게 들리겠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느낄 거예요.
유연
하지만 사실이 그래요. 돌아왔더니, 이 세계가 변해 있었어요.
유연
모두가 차가워졌고, 서로 멀어졌어요. 하지만…… 당신은 좀 달랐어요.
유연
당신은 계속 내 앞에서 당신 자신을 꾸미고 있었어요. 계속 무언가를 숨기며,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척했어요.
유연
이 모든 것을, 난 다 알고 있었어요.
유연
당신이 나한테 Evol을 쓴 것도요.
말이 끝난 순간, 나는 마치 맑고 선명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가 너무 오랫동안 위장해온 그 가면이 갈라지는 소리 같았다.
주기락은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정지해버린 것 같았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고, 오직 그 두 눈만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지나친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문 채,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차가워진 손바닥을 붙잡았다.
유연
하지만 나도 알아요. 이 모든 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유연
이 세계가 “사랑”을 잃어버린 건 당신이 만든 일이 아니에요. 당신에게 일어난 그 변화들도, 당신이 선택한 게 아니고요.
유연
당신은 나에게 거짓말해도 되고, 자신에게 거짓말해도 되고, 온 세상에 거짓말해도 돼요.
유연
하지만 나는 당신이 당신 자신의 음악에게만은 거짓말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유연
왜냐하면 당신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그건 틀렸다는 걸.
주기락
……
주기락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금세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주기락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주기락
다 괜찮아질 거야. 이 곡을 조금만 더 다듬으면 분명히 히트칠 거예요……요 며칠 상태가 안 좋았을 뿐이에요.
그의 말은 점점 빨라졌고, 눈동자 안에는 거의 절박함에 가까운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주기락
반드시 쓸 수 있어요! 약속할게요!
주기락
예전처럼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낼 거예요. 모두가 좋아하고, 당신도 좋아할 음악을!
유연
그럼 당신은 좋아해요?
주기락
……
그의 목소리는 몇 번이나 쉬어갔다. 마침내 그는 입가에 굳은 미소를 억지로 짜냈다.
주기락
당연히 좋아할 거예요.
주기락
당신이 답을 알려줬잖아요. 내 음악이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라면 다시 찾으면 되는 거잖아요.
주기락
방금 당신 말대로라면, 예전의 나는 그걸 가지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럼 아직 희망은 충분한 거죠!
주기락
난 찾는 건 제일 잘하잖아요. 당신도 찾아냈잖아, 안 그래요?
유연
……
그가 점점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자, 내 마음은 세게 쥐어뜯기는 것 같았고,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주기락은 나를 바라보다가 동공이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당황한 채 내 뺨을 감싸 들고, 몇 번이고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주기락
허니칩씨, 왜 울어요?
주기락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울지 마, 울지 마. 나 믿어주면 안 돼요? 예전처럼 나를 믿어줘요!
주기락
약속할게요. 내가 반드시 가장 빠른 속도로 그걸 다시 찾아올게요. 내일로 약속하면 어때요? 늦어도 모레까지는!
유연
하지만…… 당신은 이미 그걸 잊어버렸어요. 내가 당신이 그걸 잊게 만들었어요……
주기락
내가 어떻게 잊어버려요. 그건 바로——
주기락은 뒤늦게 멈칫했다.
모든 것이 허공에 매달렸다. 그는 그 단어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도착하기도 전에, 그 자신조차 거스를 수 없는 어떤 규칙에 의해 조용히 삭제된 것 같았다.
주기락
그건 바로…… 바로…… 그러니까……
그는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끊어진 사슬처럼, 아무리 해도 자기 자신을 이어붙일 수 없었다.
문득,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꺼져 있던 잿빛 눈이 다시 불붙듯 커졌고, 그는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주기락
당신은 “■(사랑)”이 뭔지 알죠. 그럼 나한테 줄 수 있어요?
주기락
당신은 나를 아주 좋아하니까, 그걸 분명 나한테도 줄 거잖아요. 그쵸?
주기락
그러면 나는 다시 당신이 좋아하는 걸 쓸 수 있고, 당신도 계속 나를 좋아할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다급해졌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더 중요한 일을 깨달은 듯 눈빛이 멍하니 내 몸 위에 굳었다.
주기락
아니, 아니야…… 내가 지금 그걸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아도, 당신은 분명 여전히 나를 좋아할 거죠? 그쵸?
이번에는 내가 멍해졌다. 그리고 그는 내 그 순간의 멈칫거림을, 부정과 회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는 더욱 세게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마치 다음 순간 내가 그를 떠나버릴 것처럼.
주기락
안 돼요. 나를 좋아해야 해요.
주기락
내게 “■(사랑)”이 없어도, 당신은 저를 좋아할 거잖아요.
주기락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워져서 나는 그의 눈 밑에 점점 짙어지는 공포를 선명히 볼 수 있었다.
마지막에 그 푸른 눈동자 위로 갑자기 금빛이 번졌다.
그 빛은 짙고 거세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미친 듯이 타오르며 그를 안팎으로 모조리 집어삼키려는 것 같았다.
거의 눈이 부실 만큼의 금빛이 그의 눈가에서 떨리고 흔들렸다. 오래도록 떨어지지 못한 슬픔 한 줄처럼.
금빛 눈물 같았다.
유연
......주기락.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마음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유연
지금 나에게 명령하려는 건가요…… 계속 당신을 좋아하라고?
주기락의 몸이 떨렸다. 마치 어떤 본능과 맞서 싸우는 것처럼.
주기락
맞아요. 당신은……계속 내 곁에 있어야 해요.
당신의 눈이 필요해요. 당신의 손도, 당신의 마음도.
당신의 기쁨, 당신의 슬픔, 당신의 분노, 당신이 세계에 대해 가진 모든 것이 다 필요해요.
주기락
당신의 좋아한다는 마음, 당신의…… 당신의……
주기락
……너의 “■(사랑)”.
……내가 대체 원하는 건 뭐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의 세계는 너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그녀가 가까이 와서, 채우고, 밝혀주기를 바랐다.
……그녀만은 그를 떠나서는 안 됐다.
이게 “■(사랑)”일까? 그녀를 통해 그것을 되찾은 건 아닐까?
하지만 왜 그는 마치 그녀를 잃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 됐다.
주기락
명령한다——!
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그를 막았다. 목구멍에 걸려, 그의 숨을 꽉 틀어막았다.
……말해......
그녀를 영원히 붙잡아둬. 그녀의 눈이 너만 보게 해. 그녀의 손이 너만 잡게 해. 그녀의 마음이 영원히 너를 좋아하게 해.
말하라고!!!!
너는 항상 그렇게 하고 싶었잖아! 그러니 말해. 그녀를 영원히 네 것으로 만들어!!
주기락은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고, 가슴은 격렬하게 오르내렸다.
몸속의 Evol은 해일처럼 그의 피와 영혼 안에서 미친 듯 부딪쳤다. 누구든 자신에게 고개 숙이게 만들 수 있는 그 힘은 이미 그의 온몸으로 밀려와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그것을 막고 있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랑)”처럼.
갑자기,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기락
“명령한다——절대 그녀를 잊어서는 안 돼.”
주기락
“그녀는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야.”
분명 내가 명령하려던 건 그녀인데.
왜 나 자신에게 명령하고 있는 거지…… 왜?
그 목소리는 고집스럽게 그의 머릿속 깊은 곳에 울렸다. 몇 번이고 지금 이 순간 그의 모든 갈망을 뒤덮었다.
점점, 그의 입술이 마침내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주기락
……명령한다. 나에게서 도망쳐.
주기락의 말이 떨어진 순간, 내 몸은 통제할 수 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손은 아직도 내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천천히, 내 손을 놓았다.
마치 서로에 대한 해방처럼, 나는 강제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와 멀어졌다.
유연
……주기락! 주기락!!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그의 품으로 다시 뛰어들고 싶었다. 나는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도망치고 싶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 나는 몇 번이고 손을 뻗은 것 같았는데, 거센 바닷물만이 밀려 올라와 우리를 조금씩 갈라놓았다.
나는 그 창백하고 고통스러운 얼굴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결국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그저 눈앞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거실 문이 닫히고 자동으로 잠기자, 침실은 죽음처럼 고요해졌다.
그녀가 떠나면서, 그에게서도 무언가를 가져간 듯했다. 그는 텅 빈 눈으로 주의를 둘러보다가 바닥에 흩어진 악보를 바라보았다.
전부 그의 탓이었다.
좋은 음악을 쓰지 못해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주기락은 멍하니 앉아, 얼마 전에 완성한 선율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분명 모든 음표가 더없이 익숙했는데, 지금 이 순간 그것들은 갑자기 너무나 낯설어졌다.
“사락——”
오선지가 힘 빠진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져 떨어졌고 바닥 위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동안 줄곧 가슴속에 막혀 있던 숨이, 마침내 이 순간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다.
차갑고 숨 막히는 조수가 깊은 곳에서 차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장 처음 있던 곳으로 돌아온 듯했다.
익숙한 통증이 다시 몸으로 돌아왔다. 그는 숨 쉬는 법을 잊었고, 자신이 한때 가장 익숙했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방금 그녀는 그녀가 좋아하던 주기락마저도 데려가버린 것이다.
멍하니 있던 사이, 그는 갑자기 작은 실루엣 하나를 보았다.
그 아이는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 조용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아이의 눈에는 그가 비치지 않았지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기락
……결국 또 우리뿐이네.
어린 시절 주기락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주기락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시선을 내렸다. 그 가느다란 팔에는 주삿바늘 자국과 붕대가 가득했다.
주기락
너도 나랑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거야?
주기락
……너도 나처럼,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지, 그치?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펼쳐 보인 채, 목을 조르는 힘이 점점 또렷해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조수가 그의 호흡을 빼앗아가도록 놔두었다.
그는 몹시 지쳤다. 온몸이 아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터무니없게도 알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부정한 그 무언가가 대체 무엇인지.
주기락
너는…… “■(사랑)”이 뭔지 알아?
어린 시절 주기락
……
“주기락”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앞의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눈동자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다음 순간, 그 작은 두 손이 천천히 더 힘을 주었다.
질식감이 서서히 밀려왔다. 주기락은 피하지 않았다. 온 세계가 눈앞에서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너도 모르는구나. 알고 보니 우리 모두 모르는구나.
의식이 완전히 가라앉기 직전, 주기락은 마지막 힘을 다해 천천히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기 손바닥을 그 위에 겹쳐, 그 가늘고 차가운 두 손을 붙잡았다.
주기락
……
주기락
괜찮아. 내가 곁에 있어줄게.
어린 시절 주기락
……
그는 작은 자신이 입을 여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를 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귓가에는 이미 조수가 완전히 차올랐다. 모든 소리는 그 거센 물결 바깥에 가로막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이 세계에는 마침내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느리고, 부드럽게.
그는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떠올렸고, 그녀의 심장박동이 가진 선율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