蝴蝶效应 나비 효과
你扇动翅膀,引发了我命运的海啸。
당신이 날갯짓을 하자, 내 운명에 거대한 해일이 일었다.
10-1 두 개의 세계 (两个世界)
차들이 도로 위를 오갔다. 눈부신 태양은 미동도 하지 않는 듯 거리에 온기를 내리쬐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거의 같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세계를 바라보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곳은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과 달랐다.
나는 길가에 선 채 고개를 숙여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오전 9시 46분.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하지만 확인하지 않은 전화와 메시지 기록은 하나같이 낯설었다. 그중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있었다——
사흘 전, 허묵에게서 온 전화였다.
분명 며칠 전 허묵과 통화한 뒤로 계속 이상한 점이 없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전화를 놓쳤을 리 없었다.
뉴스 화면과 웨이보 실시간 검색어도 소리 없이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덮어쓰거나 바꿔 놓은 것처럼.
유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Evol을 사용할 때마다 느껴지던 그 미묘한 힘은 또 무엇일까?
이 세계에 또 새로운 변화가 생긴 걸까? 아니면 누군가 이 세계에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나는 차갑게 식어 가는 손을 꼭 쥐었다.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인적이 드문 길모퉁이로 걸어간 뒤, 익숙하게 몸속의 Evol을 발동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음 순간 익숙한 인력이 빠르게 나를 덮쳐 왔다.
혼란스럽고 거센 힘이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저 멀리서 보이지 않는 손이 끊임없이 나를 힘껏 잡아당기는 듯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부름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지만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망설이거나 저항할 틈도 없이 몸이 갑자기 홱 잡아당겨졌다. 나는 그 힘에 이끌려 혼란스러운 방향으로 빠르게 추락했다.
거대한 원심력이 온몸을 휘감았다. 애써 눈을 뜨려고 했지만 눈앞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혼돈만이 펼쳐져 있었다. 검은빛과 흰빛이 과다 노출된 영상처럼 쉴 새 없이 번쩍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한순간에 지나간 듯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조금 전 그 길모퉁이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멀리서는 여전히 차들이 달리고 있었고, 태양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얼떨떨한 채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유연
9시 47분.
모든 것이 정상적인 궤도를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오늘도 반복되는 것처럼.
나는 휴대전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몇 초가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를 열었다.
허묵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는 어느새 목록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 있었다. 뉴스와 실시간 검색어에서도 몇몇 화제의 검색어가 슬그머니 바뀌어 있었다.
거의 같은 시간에, 거의 똑같은 세계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세계에서 서로 다른 선택과 행동으로 인해 갈라져 나온 평행세계처럼.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답을 본능적으로 부정하고 싶었다.
분명 오래전에 모든 세계선을 하나로 수렴시켰다. 그 뒤로도 여러 사건을 겪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세계선이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설마 내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바람에 규칙이 또다시 바뀐 걸까?
하지만 예전에 세계의 톱니바퀴를 파괴했을 때조차 세계선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이택언과 함께 보았던 그 혼돈의 미래가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말 평행세계라면…… 이전의 나에게는 평행세계 사이를 이동하는 능력이 없었던 것 같은데.
게다가 Helios의 태도를 보면 그는 분명 이 일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대비까지 해 둔 듯했다.
유연
……
온갖 정보가 머릿속에서 복잡한 그물처럼 얽혀 들었다. 나는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히고 최근에 벌어진 일들을 차분히 되짚어 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런 현상이 처음 나타난 곳은 아마——
유연
B.S. BOSS의 사무실!
당시의 광경이 점점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기묘하고 갑작스러운 견인력은 방금 경험한 것과 거의 똑같았다.
나는 당시의 상황을 되짚다가 점점 신경 쓰이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유연
……설마 그때 이미 다른 세계로 넘어갔던 걸까?
뒤늦게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만약 그때부터 이미 세계 사이를 이동하고 있었다면……
그 뒤 B.S. 실험실에서도, 헬리오스가 내게 마방진 큐브를 보여 준 뒤에도, 장례식장에서도, 버스 정류장 옆에서도…… 그리고 방금까지.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 힘이 나타났던 횟수를 세어 보고, 휴대전화의 메모장을 열어 하나씩 적었다.
여섯 번.
BOSS의 사무실에서 시작해 나는 모두 여섯 번 세계 사이를 이동했다.
잠시 생각하다가 망설이며 고개를 들었다——
유연
그렇다면…… 지금 이쪽이야말로 내가 처음 있던 세계인 걸까?
세상은 고요했다. 누구도 내게 답을 알려 줄 수 없었다.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안나연
유연 씨, 지금 바빠요?
안나연
오늘 회사에 중요한 손님이 오셨는데, 널 만나고 싶다고 하셔. 시간 괜찮으면 잠깐 와 줄래요?
10-2 혼돈 상태 (混沌态)
혼돈 뒤에 남는 것은 혼미함뿐. 다시는 날이 밝지 않는다.
*중앙 광장
권선징악
-법을 벗어난 정의.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선다.
Evolver A
야, 너 요즘 Evol 쓸 때 뭔가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 안 들어?
Evolver B
예전 같지 않다고? 혹시 힘이 잘 안 나오는 것 같고, 능력이 약해진 느낌이 들어?
Evolver A
맞아, 맞아! 뭐야? 너도 그래?
Evolver B
응. 그런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야.
Evolver A
나도 친구 몇 명한테 물어봤는데 다들 그렇다더라.
Evolver A
아, 씨*! 대체 무슨 일이야?! 설마 누가 우리 Evolver들을 노리기 시작한 건가?
Evolver A
바이러스? 정신 조종? 독이라도 풀었나?!
Evolver B
모르겠어. 그래서 Evolver 전문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볼 생각이야.
Evolver B
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너도 갈래?
Evolver A
……그런 사립 병원은 검사비가 꽤 비싸지 않아? 난 일단 안 갈래.
Evolver A
그냥 Evol을 좀 더 열심히 단련해 보려고. 많이 쓰다 보면 다시 강해질지도 모르잖아.
Evolver B
그런데 네 Evol은 공격형 아니었어? 연습하기 좀 어렵지 않나?
Evolver A
요즘 세상도 뒤숭숭하잖아? 이참에 악당들이나 혼내 주러 다녀야겠어.
Evolver A
나쁜 놈들이 보이면 죽도록 패 버리는 거지.
*녹색 광장
세계의 종말
-누군가에게는 매일이 세상의 종말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저는 200년 뒤의 미래에서 왔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 말을 황당하게 생각하리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끝까지 읽어 주세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여러분의 생사가 달려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이제 석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석 달 뒤에는 끔찍한 자연재해가 연이어 닥치고, 사람들은 좀비처럼 변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전 세계 인구의 80%가 사라집니다.
제가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께 알리는 이유는 미래에서 왔다고 해도 저 역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 혼자의 힘으로 결말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한번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이 글을 보셨다면 꼭 기억해 주세요.
재난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경각심을 갖고 대비한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살아남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미래도 그만큼 달라지는 셈입니다.
기억하세요. 석 달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아직 석 달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댓글 (56)
망원경
저 사람이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믿을래, 아니면 내가 진시황이라는 말을 믿을래?
좋아요 32
세계 최고의 궁수
나도 미래에서 왔어. 내가 예언하는데, 사람들은 졸리면 자고 싶어질 거야.
좋아요 29
나는 리모컨
이런 재미없는 글은 20년 전에도 봤는데. 옛날 유행이 다시 돌아온 거야?
좋아요 20
momo는 출근하기 싫어
아침에 눈뜨자마자 이런 글을 봤을 때의 무력감…… 누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좋아요 10
분홍빛 소원
잘됐네. 연모시뿐만 아니라 세상도 드디어 멸망하는구나.
좋아요 9
*구도심
가장
-살아남기 위한 방법에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아빠
지하실은 전부 준비해 뒀어.
아빠
비축 식량이랑 물, 재배 구역에 발전기까지. 필요한 건 다 갖췄어.
아빠
앞으로 3년 동안 밖에 나가지 않아도 우리 세 식구가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을 거야.
엄마
무슨 소리야? 밖에 나가지 않는다니?!
엄마
우리보고 계속 지하실에서만 지내라는 거야? 원래 비상시에 대피하려고 마련한 곳 아니었어?
아빠
아니.
아빠
지금 연모시는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아빠
나중에 물자가 부족해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살아남으려고 무슨 짓이든 할 거야.
아빠
우리가 자꾸 밖에 나다니다 보면 은신처가 들킬 위험이 커져.
아빠
그러니까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는 한 발짝도 밖에 나가선 안 돼.
엄마
상황이 계속 나아지지 않으면 어떡해? 정말 햇빛도 들지 않는 지하실에서 3년을 보내자는 거야?
아빠
필요하다면 3년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라도 버텨야지.
엄마
하지만……
아빠
그만해.
아빠
이 집의 가장은 나야. 네가 이래라저래라할 일이 아니라고.
10-3 능동적인 선택 (主动选择)
누군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나연 언니의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회사 간의 정상적인 업무 협의라면 상대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에 QUEEN에 관한 정보가 유출된 일이 있었다. 이택언이 이미 수습하긴 했지만, 류 선생님의 일까지 생각하면 본능적으로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유연
유연 회사와 협력하려는 분인가요?
안나연
네. 사실 유연 씨 아버지께서 이미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그런데 들어 보니 그쪽은 유연 씨를 만나러 온 것 같더라고요. 최근 회사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눈치고.
안나연
그러니까 시간 되면 유연 씨가 직접 나와서 응대하는 게 좋겠어요.
잠시 가라앉았던 의구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연
상대가 누구인데요?
안나연
본인 소개로는 세계유전자기구의 현 회장이라고 하시던데.
유연
?!
유연
세계유전자기구요? 현 회장이라고요?!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까지 높아져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바람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멋쩍게 웃어 보인 뒤 다시 골목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 머릿속은 온통 의문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유연
세계유전자기구 회장이 우리랑 협력하겠다고요? 그것도 저를 만나러 왔다고요? 왜요?
안나연
사실 난 유연 씨가 요즘 바로 이런 일 때문에 바쁜 줄 알았는데……
안나연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건 아닌가 보네.
평소와 달리 안나 언니까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게 우스워서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유연
그래도 그렇게 중요한 분이라면 최대한 빨리 회사로 갈게요.
유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전해 주세요.
나연 언니의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은 나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다시 멈춰 섰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Evol을 발동했다.
인력을 따라 이번에는 한층 익숙하게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
휴대전화 화면에 안나 언니의 부재중 전화가 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안나연
유연 씨, 오랜만이네. 지금 바빠?
안나연
오늘 회사에 중요한 손님이 오셨는데, 연모시를 떠나기 전에 유연 씨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셔.
안나연
유연 씨가 몇 달째 회사에 나오지 않긴 했지만, 지금 시간 괜찮으면 잠깐 들를래?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고는 전에 회사에 출근했던 일이 이쪽 세계에서 벌어진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세계의 상황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람들의 선택은 많은 것을 소리 없이 바꿔 놓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를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자 예상대로 안나 언니는 조금 전과 거의 같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만약 저쪽 세계가 나의 출발점, 그러니까 원래의 세계라면——이쪽 세계는 대체 뭘까?
당장은 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연 언니가 다시 의사를 묻자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리 내가 세계 사이를 이동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몸은 하나였다. 두 사람으로 나뉠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어느 한쪽 세계에서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 회장이라는 사람이 대체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연
알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쪽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 아무래도 가기 어려울 것 같아요.
유연
그분께는 아버지와 직접 이야기해 보시라고 전해 주세요.
안나연
……알겠어요. 그래도 회사 일도 잊지는 마. 방향이 너무 많이 틀어지면 나중에 다시 바로잡는 데 시간도 힘도 더 들 테니까요.
유연
알아요. 그래도 저는 언니랑 다른 직원들의 판단을 믿으니까요.
유연
가끔씩 짠 하고 나타나서 일 잘하고 있나 확인할게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스스로에게도 힘을 북돋아 주는 것 같았다.
유연
걱정 마세요. 저도 열심히 할게요.
전화를 끊은 뒤 나는 다시 능력을 사용해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 저쪽 세계로 돌아갔다.
휴대전화의 뉴스와 허묵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를 확인해 지금 어느 세계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런 다음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옷차림을 정돈하고 곧장 회사로 향했다.
이쪽 일을 마치고 나서 허묵에게 다시 전화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바쁜 걸음으로 회사 안에 들어섰다. 도시 곳곳에서 돌발 사건이 갈수록 잦아지는 탓에 회사도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직원들은 《토론자》의 촬영을 계속 진행하는 한편, 각종 화제와 사건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현재 상황에 맞춰 토론 주제를 조정할 필요가 있을지도 논의 중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사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다만 표정이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눈썹 사이에도 희미하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표정이 무의식적으로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버지
천천히 와도 되는데. 그 손님은 꽤 인내심이 많은 분 같더구나.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아버지가 내가 오는 것을 그다지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연
그래도 대단한 분이라고 하셨잖아요.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아버지
그분도 마침 그 시간을 이용해 쉬고 싶으셨을지 모르지.
아버지는 농담하듯 말하고는 덧붙였다.
아버지
해외에서 연모시에 도착하신 지 얼마 안 됐거든. 아직 시차 적응 중이시란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다른 세계에서 나연 언니는 그 손님이 연모시를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었다.
결과만 보면 별 차이가 없는 듯했지만, 많은 일이 이미 서로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버지
방금 그분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래도 너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하시는구나.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아버지는 나직이 말을 이어 갔다. 어렴풋이 한숨을 내쉬신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
잠시 후에 아빠가 같이 들어가 주면 좋겠니?
유연
그럼 당연히 좋죠.
유연
상대가 워낙 대단한 분이라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거든요. 아빠가 옆에 계시면 훨씬 든든할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도 컸다.
게다가 아버지에게도 무슨 문제가 있다면 이번 일은…… 좋은 미끼가 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
바보 같은 녀석. 넌 이런 일도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잖니. 그래도 네가 필요하다면 아빠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자랑스러움이 살짝 묻어나는 목소리에 오히려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아버지에게……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갔을 때, 마침내 그 '중요한 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예순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관자놀이에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섞여 있었고, 몸에는 정교하게 재단된 검은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금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는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뒤로 넘겨져 있었다. 다만 나를 발견하고 온화하게 미소 짓자 풍기는 위압감이 조금 누그러졌다.
??
안녕하세요, 유연 씨. 당신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드디어 만나 뵙는군요.
노인은 인자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동행한 통역사는 노인의 친근한 말투까지 그대로 살려 말을 전해 주었다.
??
저는 세계유전자기구의 현 회장인 이선 무어입니다. 무어 박사라고 불러 주셔도 좋습니다.
이선 무어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 기쁘군요.
유연
무어 박사님, 정말 죄송해요. 이렇게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요.
나는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노인은 신사적이면서도 힘 있게 내 손을 잡고 악수했다.
이선 무어
제가 미리 약속도 잡지 않고 찾아왔으니, 이렇게 무사히 만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운이지요.
이선 무어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열정적인 미소 뒤에는 날카로운 시선이 숨어 있었다. 나를 살피는 듯한 기색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우리가 다시 응접실에 자리를 잡자 노인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선 무어
현재 세계유전자기구는 여러 연구소 및 병원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더 많은 유전자 샘플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시드 프로젝트를 다시 추진하기 위해서지요.
이선 무어
당시 저희는 계획을 완수했습니다만, 세계가 '역행'하면서 그 성과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노인은 조금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말투에는 비난이나 불평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이선 무어
그래도 데이터라는 것은 세계와 함께 갱신될 가치가 있으니까요.
이선 무어
'시드 프로젝트'는 장기 사업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유연 회사와 다시 협력해 프로젝트의 영상 기록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선 무어
과장이 아닙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유연 회사만큼 저희에게 적합한 회사를 다시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확신에 찬 말에 오히려 내가 조금 쑥스러워질 정도였다.
유연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계유전자기구와 협력할 수 있다면 저희에게도 영광이에요.
유연
다만 이렇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으니 저도 두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유연
이전에 저희가 함께 일한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국내외의 다른 제작사들이 이 일을 해낼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유연
왜 하필 저희 유연 회사인가요?
유연
그리고…… 왜 지금인가요?
노인은 내 질문을 듣고도 조금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 무어
우선 저희는 이미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유연 회사는 맡은 일을 거의 완벽하게 해냈지요. 그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선 무어
게다가 유연 회사는 프로그램 제작 경험이 풍부합니다. 대형 프로젝트에서 보여 준 성과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요.
이선 무어
무엇보다 귀사 뒤에는 화예라는 든든한 뒷받침이 있지 않습니까.
이선 무어
처음에 저희가 유연 제작사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이선 무어
두 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사실 지난 2년 동안 저희도 다시 협의를 진행하느라 오랜 시간을 들였습니다.
이선 무어
종말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평소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이선 무어
그래서 이미 프로젝트를 재개했음에도 협의 과정에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선 무어
그리고 또 하나, 훨씬 시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노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묵직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이선 무어
설마 귀사의 초빙 교수인 허 교수가 아직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선 무어
현재 모든 Evolver의 에너지가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응접실에서 노인은 소파에 앉아 홀로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선 무어
오늘은 제가 때를 잘못 맞춰 찾아온 모양이군요.
이선 무어
그런데 표정을 보니 제가 직접 올 줄은 예상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아버지
그저 생각지도 못했을 뿐입니다……
아버지
당시 서버가 공격당하는 일을 겪었던 책임자가 이제는 현 회장이 되어 있을 줄은요.
남자의 말에는 은근한 비꼼이 담겨 있었지만, 노인은 눈썹만 살짝 치켜올렸다.
이선 무어
저는 그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던 기관이나 조직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아무 서버나 그런 수준의 공격을 받는 것도 아니고요.
이선 무어
그나저나 오래전 일을 이렇게 여러 번 끄집어내시는군요…… 그동안 별다른 새로운 소식이 없었던 겁니까?
노인은 미소를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의 빛이 비스듬히 그의 등 뒤로 쏟아져 들어왔다. 역광에 가려진 얼굴이 어둠 속에 잠겼다.
이선 무어
저도 이제 젊은 나이는 아닙니다. 역사의 흐름을 따라잡으려면 조금 더 서둘러야겠지요.
이선 무어
인류를 위해 제가 이룩한 업적 하나쯤은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PD A
방금 찾아보니까 조금 전에 들어가신 미국 분, 세계유전자기구 회장인 것 같던데?
PD B
와, 씨*. 진짜야? 그렇게 대단한 곳에서 회장이 직접 왔다고?
PD B
그런데 우리 사장님도 안 계시잖아. 이러다 일이 무산되는 거 아냐?
PD C
에이, 사장님 아버지도 사장님이지. 이런 큰 프로젝트에 돈까지 걸려 있는데 마다하실 리가 있겠어?
PD C
우리는 야근할 준비나 하자고.
편집자
그러게. 요즘은 늘 나오는 뻔한 문제들 말고는 별일도 없어서, 야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을 지경이야.
PD B
난 지금도 괜찮은 것 같은데. 시청자들도 이제 《토론자》를 매주 챙겨 보는 필수 프로그램처럼 생각하잖아.
몇 사람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함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한 사람이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 언제부터인가 서 있던 인물을 발견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서둘러 다가갔다.
PD A
허 교수님, 언제 오셨어요?
PD A
아까는 오신 줄도 몰랐네요.
허묵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손에 든 서류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허묵
괜찮아요. 전에 프로듀서님께 드리기로 했던 자료를 전하러 왔을 뿐이니까요.
PD A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저희 사장님이 계속 회사에 안 나오셔서요.
PD A
급한 일이시면 직접 전화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허묵
……그런가요? 때가 좋지 않았군요.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무심코 응접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는 조금도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10-5 실패한 데이터 (失败的数据)
무어 박사를 배웅하고 돌아섰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멀어져 가는 차량을 바라보던 나는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 세계로 막 돌아와 백기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백기
Evol의 힘이 약해졌어.
당시에도 그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상황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 이 문제가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나서야 뒤늦게 그 심각성을 깨달았다.
설마 전 세계의 Evol에 문제가 생긴 것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한편으로 Helios의 능력은 그의 설명대로 오히려 더 강해졌다…… 대체 왜일까?
그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이 모든 일이 '사랑'의 소실과도 어떤 특별한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머릿속에 의문이 점점 쌓여 갔다. 휴대전화에 남아 있는 부재중 전화를 내려다보며 나는 손을 꼭 쥐었다.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직접 만나 보는 편이 더 확실할 것이다. 결심을 굳힌 나는 아버지께 간단히 인사를 드리고 회사를 나섰다.
아버지
얘야, 모든 일을 혼자 짊어지려고 할 필요는 없단다.
유연
걱정 마세요, 아빠.
뒤돌아보자 아버지는 역광 속에 서 계셨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버지
그래, 다녀오렴. 천천히 가고.
처음부터 허묵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허묵 생명과학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최근 주로 최고생명과학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조금 전 만났던 무어 박사를 떠올리며 연구소 정문을 나선 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역시 그 회장이 연모시를 찾아온 목적은 단순히 유연 회사와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무어 박사가 떠난 시간을 떠올려 대략적인 이동 시간을 계산해 본 뒤, 택시를 불러 최고생명과학연구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마주친다면 조금 더 떠볼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최고생명과학연구소의 로비에 들어서자 방문객 등록을 담당하던 직원은 나를 알아보고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원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연구원
안녕하세요. 유연 씨 맞으시죠?
연구원
허 교수님께서 미리 말씀해 두셨어요. 유연 씨가 찾아오실지도 모른다고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이것까지 허묵이 예상했다고?
나는 놀라움을 애써 감추고 얌전히 연구원의 뒤를 따라 어느 실험실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연
저기…… 혹시 오늘 무어 박사님이 다녀가셨나요?
연구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계속 실험실에 있었거든요. 유연 씨가 오시면 안내해 드리라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유연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빈틈없는 답변을 듣고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연구원이 줄곧 실험실에 있었다면, 적어도 무어 박사는 허묵의 실험실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일까?
??
이번 데이터도 별로 좋지 않군요.
그때 익숙하면서도 냉담하게 평가하는 목소리가 불쑥 내 생각을 끊었다.
고개를 들자 멀지 않은 복도에 넓은 유리벽이 나타났다.
유리 너머 실험 구역에서는 허묵이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한 채 한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며 화면에 표시된 복잡한 도표와 모형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손 옆에는 빼곡한 숫자들이 적힌 표가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파일명에 적힌 Evol, 활성도, 촉매 같은 몇몇 단어뿐이었다.
연구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교수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유연
……아, 잠깐만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허묵이 화면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연구원에게 고개를 돌려 미소 지었다.
유연
괜찮아요.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조금 기다리면 돼요.
연구원
하지만 이 실험은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미리 말씀하셨는데……
유연
정말 괜찮아요. 제 일도 그렇게 급한 건 아니니까요. 하시던 일 보셔도 돼요.
연구원
……알겠습니다.
연구원은 더 권하지 않았다. 내 뜻을 확인한 뒤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멀리 있는 허묵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침착해 보였다. 하지만 손을 움직이는 모습과 미세하게 좁혀진 눈매에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면을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멈출 때마다 그는 표에 적힌 숫자 한 줄을 지워 나갔다.
지워진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데도 허묵은 잠시 움직임을 멈출 뿐이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들을 다시 검토하는 것 같았다.
허묵
다시 한번 해 보죠.
그런 광경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마침내 허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지는 않지만 묘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실험실에 울렸다.
허묵
1조는 플라스미드 발현 상태를 다시 확인해 주세요. 2조는 현재 조건을 바탕으로 자극 강도를 재조정하고 프라이머를 다시 설계하세요.
말이 끝나자 이미 분주하면서도 질서 있게 실험을 진행하던 연구원들의 움직임이 한층 바빠졌다.
자잘한 움직임에서 나는 소리와 기계의 낮은 진동음이 뒤섞였다.
단조롭고 지루한 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숨어 있는 듯했다.
수없이 반복되는 시도 속에서 시간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이번 일 분과 다음 일 분 사이에는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매번 실패와 재시도로 이어졌다. 결국 이번 일 분도, 다음 일 분도 똑같이 실패한 시간이 되어 갔다.
누군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컴퓨터 화면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또 누군가는 데이터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계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허묵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러 차례 실험을 거쳐 나온 결과를 마주하고도 침착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다음에 조정할 실험 조건과 방안을 제시했다.
하나씩, 또 하나씩. 한 번, 또 한 번.
나는 멀리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치 나의 시간도 그들과 함께 이 순간에 조용히 멈춰 선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허묵이 담담하게 자료를 정리했다.
허묵
다들 지금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먼저 돌아가세요.
허묵
아무래도 연구 방향을 다시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허묵
그동안 나온 데이터도 정리해 주시고요. 수고 부탁드립니다.
곳곳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모두 이런 일에 이미 익숙한 듯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연구원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실험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허묵은 필요한 지시를 마치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혼자서 또 한 차례 시도를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연구원들이 하나둘 실험실 밖으로 나왔다. 아까 나를 안내했던 연구원도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내가 아직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란 듯했다.
연구원
아직도 기다리고 계셨네요. 벌써 시간이 꽤 지났는데요.
유연
이제 실험이 끝난 건가요?
연구원
네. 하지만 허 교수님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실 것 같습니다.
그는 유리벽 너머를 한번 돌아보고 다시 내게 말했다.
연구원
실험실 입구 쪽에 의자가 있는데, 거기 앉아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유연
그래도 괜찮을까요?
연구원
네, 괜찮습니다.
이제 실험실에는 허묵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고민하고 생각에 잠겼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여전히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했다.
세상은 한없이 고요했다. 이곳에서는 생각하고 망설이고, 심지어 실패하는 데에도 충분한 시간이 허락되어 있었다.
'사랑'이 사라진 세계인데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미지의 영역과 진리를 향한 길을 고집스럽게 걷고 있었다.
이곳에는 작고도 독립적인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진 듯했다. 사람을 괴롭히는 온갖 요소는 모두 바깥에 남겨 두고, 오직 하나의 답을 향한 순수한 추구와 탐구만이 존재하는 세계.
나는 문밖에 서 있었다. 실험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나와 그 세계를 갈라놓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곳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딘가로 이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금씩 앞으로 향했다. 그러다 슬그머니 문가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의 낯설고 난해한 데이터와 저 멀리 화면에 표시된 복잡한 도표를 바라보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런 세계에 있다면 나 역시 본능적으로 생각을 이어 가며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이곳 사람들처럼 포기하지 않고 나만의 답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 앞을 가만히 바라보며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을 되짚었다.
혼란은 끊임없이 쌓이고 겹쳐져 더욱 거대한 검은 안개가 되어 갔다.
수많은 장면과 정보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어쩌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저 구석에 앉아 초점 없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지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의 시선이 오래도록 내게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리자 깊고 어두운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허묵
저를 만나러 온 줄 알았는데, 실험실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러 온 거였나요?
담담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조금 멋쩍게 웃었다.
유연
만나러 온 건 맞아요. 다만 아까 교수님을 봤을 때는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허묵
왜죠? 당신을 위해 시간을 비워 뒀는데요.
유연
그게……
나는 고개를 들고 잠시 생각하며 조금 전의 광경을 떠올렸다.
유연
교수님을 방해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저도 함께 빠져 있고 싶었거든요.
유연
그래서 저도 같이 생각했어요. 교수님을 찾아온 이유도 생각하고, 제가 왜 여기 있는지도 생각하고…… 이것저것 정말 많이 생각했어요.
유연
그런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머릿속이 저절로 텅 비어 버린 것 같더라고요.
내 대답을 들은 허묵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 전 실패한 실험 결과를 보았을 때보다도 반응이 뚜렷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깊은 눈빛으로 나를 잠시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스크와 장갑을 벗으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허묵
당신이 저를 찾아올 줄 알았어요.
유연
무어 박사님이 저를 찾아왔다는 걸 알고 계셨기 때문인가요?
허묵
왜 그렇게 생각하죠?
유연
음…… 그냥 직감이에요.
유연
그 박사님이 나타난 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아서요. 교수님이라면 신중하게 대응하실 것 같았거든요.
허묵
저를 꽤 잘 아는 것처럼 들리네요.
유연
그냥 직감일 뿐이에요. 허 교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가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눈에 조금이라도 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허묵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던가요?
유연
'시드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할 예정이라면서 유연 회사와 협력하고 싶다고 했어요.
유연
그리고 제 초빙 교수님이 Evol 에너지가 계속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걸 잊으신 모양이라고 넌지시 말씀하셨고요.
허묵은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허묵
그 일이 많이 신경 쓰이나요?
유연
Evol이 약해지는 일이요? 아니면 교수님이 저한테 알려 주지 않으신 일이요?
예상대로 그의 기다란 눈매가 다시 가늘어졌다. 거기에 약간의 짜증스러운 기색까지 더해졌다.
조금 전 실험실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허묵
답하고 싶은 쪽에 답해도 됩니다.
유연
그럼 사실 둘 다 신경 쓰여요.
나는 솔직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지만 오히려 허묵이 반걸음 물러섰다.
허묵
그건 그저 이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의 현상이자 상태일 뿐이에요. 관련된 문제가 생긴다면 자연히 알게 되겠죠.
허묵
오늘처럼요.
대답을 한 것 같으면서도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유연
……그래도 계속 이 문제를 연구하고 계셨던 거죠?
허묵
원래부터 제 연구 과제 중 하나였으니까요.
현재의 에너지 감소 현상을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조급함도 답답함도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정말 자신이 말한 대로 하나의 현상이자 상태일 뿐인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 무언가를 부정할 수도 없고, 의심하거나 흔들릴 이유도 없다는 듯했다.
그런 허묵을 바라보자 마음속에서 또다시 무언가가 거세게 밀려올랐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초조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허묵
당신의 보호막이 사라졌군요.
하지만 허묵은 내가 그 감정을 붙잡아 볼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유연
……네. 그것도 제가 교수님을 찾아온 이유 중 하나예요.
유연
그러고 보니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때는 저도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거든요.
허묵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나는 어지러운 마음을 잠시 가라앉혔다——그리고 최근에 벌어진 일들을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나 내게 Evol을 사용했던 사람들부터, 어느 순간 평행세계가 하나 더 생겨난 것처럼 보이는 현상까지.
그리고 내가 두 세계 사이를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도.
허묵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내게 갑자기 Evol을 사용했던 낯선 두 사람을 언급하자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유연
설마 예전부터 짐작하고 계셨던 거예요? 제 능력이 불안정했던 게 누군가의 의도적인 개입 때문일 수도 있다고요?
허묵
아직 배제하지 않았던 가능성 중 하나였을 뿐이에요.
허묵
다만 실제로 그런 가능성이 어느 정도 확인된 것 같군요.
허묵
계속 이야기해 주세요.
어쩌면 그가 여전히 혼자서 검증하고 있던 일부터 먼저 물어봐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시 생각한 끝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두 세계 사이를 이동했다는 판단과 횟수를 계산한 과정까지 설명을 마치자 그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허묵
……사흘 전인가요?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더 떠올린 듯 생각에 잠겼다.
유연
네? 아, 맞아요. 다른 세계에서는 교수님이 제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 전화를 주셨을 거예요.
유연
그런데 이쪽 세계에서는 저쪽의 교수님보다 일주일 뒤인, 그러니까 사흘 전에 전화하셨어요. 완전히 다르죠.
허묵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 깊이 머물렀다.
유연
그러고 보니 전에 저한테 전화하셨던 건 무슨 일 때문이었어요?
허묵
……
허묵
별일 아니에요. 지금은 이미 확인이 끝난 사소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옅은 안개를 조용히 드리우듯 그 이야기를 덮어 두고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허묵
질문에는 전부 답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겠어요.
허묵
이제 돌아가세요.
그의 담담한 말을 듣고 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연
……갑자기 나타난 평행세계에 꽤 관심을 보이실 줄 알았는데요.
허묵
궁금하긴 하죠. 다만 지금은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이 있어서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앞에 일그러진 공간이 불쑥 빛을 내며 나타났다.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마저 생략하려는 모양이었다.
허묵
그 문제는 나중에 시간을 들여 살펴볼게요.
그렇게 말한 허묵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내디뎌 접힌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유연
……자, 잠깐만요, 허묵!
10-6 실패와 문제 (失败与问题)
이미 깊은 밤이었지만 길게 뻗은 해안선을 따라 여전히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출렁이는 바다 위로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비쳤다.
고층 빌딩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고, 곳곳에서 연모시와 비슷한 빠른 생활의 흐름과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밤의 어둠 저편으로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긴 다리가 하늘을 가르듯 뻗어 있었다. 그 끝에는 수평선 너머 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섬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람이 멍하니 굳어 있는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에 눈앞의 허묵도 한층 냉랭해 보였다.
유연
여기는……
허묵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늘고 긴 눈으로 내가 꼭 붙잡고 있는 자신의 옷자락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서둘러 손을 놓았다.
허묵
질문에는 이미 전부 답한 줄 알았는데요.
유연
그게, 저는 그냥……
말을 꺼내는 동안에도 등 뒤에서 공간이 다시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망설일 틈도 없이 나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다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유연
교수님이 뭘 하고 계신지 궁금한 건 맞아요. 그렇다고 정확히 무슨 일을 하려는지 캐묻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몹시 모순적인 말이었다. 나조차 지금의 혼란스럽고 충동적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실험실에서 거듭 시험하고 실패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예전에 허묵이 내게 능력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던 장면도 떠올랐다. 이제는 그때의 일을 조금 더 넓은 시야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연
교수님이 뭔가 막히는 문제를…… 아니, 어려운 일을 겪고 계신 것 같아서요.
유연
그리고 교수님이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마주하는지 정말 알고 싶어요.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요.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을 어떤 마음으로 마주하는지, 또 원하는 목표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허묵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으려고 애썼다.
막막함과 충동이 한데 뒤섞여 밀려왔다. 그 감정에 휩쓸리면서도 오히려 길을 잃고 헤매는 내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유연
지금은 혼란스럽고 복잡한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어요. 하지만 예전처럼 저까지 그 혼란에 빠지고 싶지는 않아요.
유연
그래서 저는……
나는 허묵이 하는 일을 직접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애써 말을 골랐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더 자연스럽고 그럴듯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연
……선생님을 보고 싶어요.
결국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소매를 꼭 붙잡고, 작지만 솔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나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냉담한 교수님이 나를 연구소로 도로 보내 버릴까 봐 걱정됐다.
허묵
누가 보면 제가 당신을 괴롭히는 줄 알겠군요.
유연
그럼 제가 다 했다고 말할게요.
유연
제가 교수님을 괴롭히고 있는 거라고요.
허묵
굳이 남에게 괴롭힘당하는 사람이라는 평판까지 얻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담담한 말투에는 은근한 놀림이 묻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가 나를 살피는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허묵
받아들이기 싫은 광경을 보게 될까 봐 두렵지는 않나요?
그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린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굳은 마음으로 똑바로 섰다.
유연
교수님이 제게 보여 주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신다면요.
허묵
당신을 제지하는 것도 제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밤바람이 그의 오만한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역시 조금은 양보하기로 한 것 같았다.
허묵은 내가 붙잡고 있던 소매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내가 손을 놓자 그는 혼자 앞장서서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서둘러 뒤따랐다.
연구원 A
허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허묵
이쪽은 상황이 어떤가요? 관련 유전자의 전사 효율은 높아졌습니까?
깊은 밤, 나는 허묵을 따라 여전히 환하게 불이 켜진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실험실 사람들도 무언가를 실험하고 있었다. 허묵과 미리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인지 그가 나타나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연구원은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흘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허묵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연구원 A
3차 유도 실험이 막 끝났습니다.
연구원은 그렇게 말하며 알록달록한 피크 그래프로 가득한 화면을 허묵에게 보여 주었다.
허묵
결과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군요.
연구원 A
네. 그동안 저희는 CRISPRa와 유사한 시스템을 이용해 전사 활성화 인자를 유전자 클러스터 부근으로 표적 전달하는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연구원 A
해당 영역의 메틸화 수준을 낮추는 동시에 염색질의 접근성을 높이려 했죠.
연구원 A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그래프를 보면 이 방법으로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재빨리 몇 가지 그래프를 더 불러와 허묵에게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잘 아는 분야도, 내가 속한 세계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곳의 실험 역시 난관에 부딪힌 듯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도표를 보며 앞으로의 실험 방향을 논의할 뿐이었다.
유전자 군집? 활성화 인자? 이것들도 허묵이 진행하는 Evol 연구와 관련이 있는 걸까?
한참이 지나서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던 대화가 끝났다.
허묵은 상대방과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나를 데리고 실험실을 나섰다.
허묵
가죠. 다음 장소로.
유연
……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 나를 가볍게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낯선 복도에 오후의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얼떨떨한 채 눈을 깜빡이다가 유리창 너머로 아직 붉게 물들지 않은 단풍나무를 바라보았다.
허묵은 멈추지 않았다. 익숙한 걸음으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더니 이번에는 곧장 문을 열었다.
나는 그를 따라 안을 들여다보다가 이곳의 실험실이 최고생명과학연구소보다도 훨씬 넓다는 사실에 놀랐다.
거대한 장비 하나가 낮게 웅웅거리며 작동하고 있었다. 벽에 설치된 화면에는 3차원 구조도가 끊임없이 새로 나타났다.
붉은 선과 푸른 선이 서로 얽혀 있었다. 마치 인간에 관한 복잡한 비밀을 그려 내는 것 같았다.
꽤 젊어 보이는 외국인 연구원 한 명이 허묵의 방문을 알아차렸지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허묵
교수님, 세포 모델의 피크 값은 높아졌습니까?
연구원 B
음…… 저희는 원거리 인핸서와 핵심 프로모터의 접촉 빈도를 높이기 위해 조절 회로를 증폭하려 했습니다.
연구원 B
그런데 모델이 계속 불안정합니다. 현재 분석으로는 문제가 아마……
낯설고 어려운 전문 용어들이 외국어로 오가니 더욱 알아듣기 힘들었다. 허묵이 나타나자 연구원 두 명이 더 다가왔다.
그들은 금세 화면 앞에 모여 깊은 토론에 빠져들었다. 허묵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장비에서 나오는 빛이 그의 눈에 반사되어 유난히 또렷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 빛이 그를 이곳에만 머물게 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이번에는 배양 접시들이 줄지어 놓인 광경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허묵
전에 세포의 에너지 공급 상한을 높이는 동시에 신호 지속 시간을 늘리려 한다고 하셨죠.
허묵
그 방향의 연구는 계속 진행 중인가요?
연구원 C
네. 하위 신호 전달 경로를 증폭할 수 있는 조절 인자도 함께 찾고 있습니다.
허묵
제 기억으로는 멕시코의 한 연구소에서도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텐데요.
연구원 C
맞습니다. 저희 두 연구소가 함께 진행하는 과제입니다……
창밖에는 희뿌연 하늘빛이 도시를 짓누르듯 드리워져 있었다. 멀리 보이는 템스강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잔물결이 일었다.
허묵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가 풀어야 할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그 뒤에도 나는 허묵을 따라 여러 실험실을 더 방문했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세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연구 단지가 되는 듯했다. 이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허묵과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같거나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미지의 세계에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허묵은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정오의 따스한 햇살이 몸 위로 내려앉자 나도 슬슬 피로가 몰려왔다.
건물 앞에는 넓은 녹지가 펼쳐져 있었고, 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나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허묵은 나를 가볍게 훑어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계속 걸었다.
허묵
피곤하다면 언제든 그만둬도 됩니다.
유연
괜찮아요. 저는 선생님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는 단호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연
그런데 허 교수님이 하루를 이틀처럼 쓰실 수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햇살이 너무 좋았기 때문일까.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는 감각도 무척 신기했다. 나는 저 멀리 하늘 끝을 바라보았다.
유연
……그런데 시간을 계속 거슬러 간다면 아주 오래전으로도 돌아갈 수 있을까요?
허묵
그럴지도 모르죠.
허묵
하지만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제가 찾는 것 역시 과거에 있지는 않고요.
무심하지만 단호한 말이었다. 그 말은 지금의 허묵처럼 흔들릴 수 없는 진실을 내게 거듭 일깨워 주는 듯했다.
빛과 시간이 함께 그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그 모습은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 나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허묵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나는 다시 한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는 허묵이 연구원들과 이야기를 마친 뒤에도 서둘러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신 실험실에 딸린 듯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도서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조명 아래 긴 나무 책상들이 은은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여러 서가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느새 자료와 책 몇 권을 빠르게 골라 든 허묵을 돌아보았다.
허묵
오늘 논의한 내용과 데이터를 정리해야 해서요.
자리에 앉자 허묵이 오늘 처음으로 자신이 하려는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내 귓가로 몸을 기울였다.
허묵
게다가 이곳에는 장서와 학술지 자료가 아주 풍부합니다.
허묵
유전자와 관련된 분야는 결국 제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요. 아직 잘 모르는 내용도 많습니다.
유연
……
그렇게 솔직하게 인정하는 허묵의 말에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허묵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유연
……
잠시 생각하던 나는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을 하고 말았다.
유연
그럼 지금부터…… 새로 공부하시려는 거예요?
허묵
아무래도 그럴 생각인 것 같군요.
유연
……
허묵
제가 당신이 기억하는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놀란 것 같네요.
유연
……그걸 어떻게 비교해요!
살짝 놀리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유연
저는 그냥 선생님이 세상에 있는 지식은 전부 알고 계신 줄 알았어요.
허묵은 잠시 멈칫한 듯했다. 하지만 이내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조금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허묵
제가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세계는 너무나 지루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여 진지하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비스듬히 들어온 빛이 그의 몸을 덮었다. 마치 말없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세계는 다시 고요해졌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그리고 흩어진 햇살이 내려앉는 소리만이 남았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고요함 속에서 나른한 졸음과 따스한 기운이 함께 나를 감쌌다.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왜 이런 곳에 와 있는 걸까?
허묵에게서 대체 무엇을 찾으려는 걸까?
의문은 이름 모를 감정을 따라 마음속에서 자라났다. 그것은 내 의식을 계속 잡아당기며 또 다른 새로운 질문들을 끝없이 만들어 내는 듯했다.
그때 시야 한쪽에서 흰 종이 한 장이 내 앞으로 밀려왔다.
유연
……?
허묵
궁금한 게 있으면 적어 보세요.
고개도 들지 않은 채였지만 그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내가 또다시 놀란 눈을 하자, 그제야 허묵이 고개를 돌려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허묵
질문이 아주 많아 보이는 얼굴이거든요.
햇살을 받은 흰 종이가 환하게 빛났다. 나는 옆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한 허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종이와 함께 건네준 만년필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
"어떻게 교수님은 이렇게 끈기 있게 책을 읽으실 수 있을까?"
"어떻게 교수님은 실패한 데이터를 보고도 낙담하지 않으실까?"
"어떻게 교수님은 왜 새로운 지식을 배울 때도 저렇게 여유로우실까?"
"지금 Evol 에너지가 정말 계속 감소하고 있다면, 시간이 부족해질까 봐 걱정되지는 않으실까?"
"어떻게 교수님은 언제나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종이에 적힌 질문들을 보자 나 스스로도 참 바보 같은 질문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질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머릿속에 무언가가 조금 더 또렷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나는 다시 무심코 글을 적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평행세계'. 어둠 속에서 보았던 미래. 정체를 알 수 없는 채 나타나거나 다른 것으로 바뀐 건물들. 내 앞에 나타나 Evol을 자극했던 낯선 사람들.
고등학생 자살 사건, 실종된 사람들, 포세이돈, 고아원의 아이들, 상조회, 계속해서 감소하는 Evol 에너지……
나는 이런저런 일을 한참 동안 적어 내려갔다. 그 모든 사건이 종이 위에 핵심 단어로 정리되고 나자 눈앞에서도 조금 더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사건들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을 연결하는 무언가가 분명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나는 ‘사랑’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위에 나열한 모든 사건이 반드시 사랑의 소실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결국 이곳이 내가 도달해야 할 지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옆에 물음표를 하나 더 적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사랑을 되찾아야 할까?
이 질문은 이전에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건이 하나둘 터질 때마다 이 거대한 문제를 잠시 피할 여유가 생겼던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을 나무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한다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속수무책인 자신과 오랫동안 마주 앉아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무력감이 온몸을 뒤덮을 만큼 긴 시간 동안.
그런데 지금 나는 드물게도 차분한 마음으로 흰 종이 위의 물음표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옆에 있던 누군가가 종이를 가져갔다.
미처 되찾기도 전에 허묵이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곧 그 시선이 내 얼굴로 향했다. 종이에 적힌 순진한 질문들이 떠올라 귀가 저절로 뜨거워졌다. 나는 황급히 종이를 도로 가져왔다.
하지만 허묵은 그저 가볍게 웃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꺼운 책과 자료들을 각각 원래 자리에 돌려놓더니 내게 나가자는 뜻을 보였다.
허묵
그 질문들은 제게 하려고 적은 줄 알았는데요.
밖에는 여전히 햇살이 눈부셨다. 그 덕분인지 살짝 놀리는 듯한 목소리도 한결 가볍게 들렸다.
유연
……그냥 질문들이 좀 바보 같아서요.
허묵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이에요.
빛 속을 걷는 허묵에게서는 조금도 비웃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허묵
하지만 종이에 적힌 질문들에는 답해 드릴 수 없겠군요. 제게는 모두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특별한 이유가 없거든요.
허묵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편이 좋겠네요.
유연
그게 같은 이야기 아닌가요?
허묵
아니요. 그건 당신 자신의 문제니까요.
그 순간 허묵은 내게 또 다른 관용과 평온함을 보여 주는 듯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함께 앞을 바라보았다.
허묵
그리고 당신이 나열한 다른 핵심 단어들에 대해서는, 그 사건들 사이의 관계를 찾아야 할 겁니다.
허묵
어떤 일도 결코 다른 일과 완전히 동떨어져 존재하지는 않으니까요.
나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숙여 종이에 적힌 단어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다 잠시 생각한 끝에 종이를 들어 올려 허묵에게 ‘사랑’이라는 글자를 가리켰다.
유연
그럼 선생님은 이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허묵
아무것도 없는 이 빈칸에 대해서는 제 의견을 말하기 어려울 것 같군요.
유연
……?
나는 눈을 깜빡이며 종이 위에 적힌 ‘사랑’이라는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거대한 두려움이 순식간에 온몸을 휩쓸었다.
유연
여기…… 여기에 적힌 글자가 안 보이세요?
허묵
무엇을 적었나요?
유연
저는……
유연
한 글자를 적었어요. ‘사랑’이라는 글자요.
허묵
……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다. 허묵은 내가 가리키는 곳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허묵
정말 철저하게 사라진 모양이군요.
허묵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그는 아무것도 없는 곳을 깊이 바라보며 담담하게 판단을 내렸다.
나는 그것으로 이 문제에 관한 답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허묵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허묵
그 ■라는 글자는 어떻게 쓰는 건가요?
유연
……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등 뒤로 따스한 기운이 퍼졌다. 그 온기와 나른함이 뒤섞여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허묵은 냉담하면서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덮었다.
손바닥 아래 닿은 차가운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검지를 움직여 허공에 한 획씩 글자를 써 내려갔다.
삐침, 점, 점, 삐침, 점, 가로갈고리, 가로획, 삐침, 가로삐침, 파임.
열 개의 획.
찬란한 햇살 아래에서 그 글자는 투명하게 흩어져 사라졌다.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너무나 가볍고 허무한 것이었다. 그 존재조차 텅 빈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허묵의 손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내 손을 마주 잡고 조금 전의 열 획을 한 획씩 다시 써 내려갔다.
허묵
이렇게 쓰는 게 맞나요?
유연
……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그의 눈에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 안에서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진지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유연
네. 이제 선생님도 그 글자를 쓸 수 있게 됐어요.
허묵은 말없이 방금 글자를 썼던 곳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허묵
당신은 왜 자신이 그것의 소실에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오랜 침묵 끝에 오히려 그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유연
그건……
유연
예전에 처음 혜성이 찾아왔을 때, 모든 사람의 기억이 세계가 앞으로 나아가는 에너지가 되었잖아요.
유연
그리고 마지막에 혜성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 기억들도 모두에게 돌아왔으니까요. 그래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의 이유도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유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허묵
그건 개별적인 사례일 뿐입니다. 절대적인 답이 될 수는 없어요.
허묵
아니면 세계가 기존 궤도에서 벗어나던 순간을 다시 재현해 검증할 수도 있겠죠.
유연
그건 대가가 너무 커요.
유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게다가…… 저한테는 그럴 힘도 없고요.
반사적으로 부정한 뒤에야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사실 허묵은 그저 하나의 사고방식이자 접근 방법을 제시해 준 것뿐이었다.
나는 서둘러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유연
그래도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게요.
유연
고마워요, 허 교수님.
허묵
저는 별말 하지 않았는데요.
유연
그래도 선생님은 전에 '사랑'이라는 개념을 부정하셨지만, 제가 가려는 길까지 부정하지는 않으셨잖아요.
그의 깊은 눈동자에서 무언가 모순된 감정이 일렁이는 듯했다. 허묵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허묵
사실 지금 당신이 직접 그것을 새롭게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유연
새롭게 정의한다고요?
허묵
당신의 눈에만 존재하고 다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그 개념에 새로운 정의를 부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죠.
허묵
방금 우리가 나눈 대화도 이른바 ■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어요……
허묵
그리고 제가 당신을 ■한다고요.
나는 멍하니 굳어 버렸다. 그가 담담하게 내뱉은 말은 마치 세상이 내게 커다란 충격을 가한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코를 찌르는 그 냄새가 나는 듯했다. 순간 나조차 '사랑'이라는 이름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그것은 허묵의 입에서 공격성이 강하거나 활성도가 높은 새로운 물질처럼 변해 버렸다.
그래. 왜 안 되겠어?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허묵조차 그것의 존재를 인정했으니까.
유연
……아니요……
하지만 나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유연
방금 있었던 일은 선생님이 좋은 스승이고, 훌륭한 연구자이며,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유연
하지만 아마 선생님은……
유연
저를 사랑하는 건 아닐 거예요.
이 몇 마디를 꺼내는 데 온 힘을 다 써야 하는 것 같았다.
허묵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역광 속에 선 채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허묵
그런가요? 저는 방금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도 꽤 괜찮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이 모두 가려졌다. 허묵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미지의 존재가 된 듯했다.
허묵
그러고 보니 서로 똑같은 세계가 둘이라면……
허묵
방금 제게 '■'라는 글자를 쓰는 법을 가르쳐 줬으니, 다른 세계의 '저'에게도 가르쳐 주는 걸 잊지 마세요.
10-8 遥远回音 머나먼 메아리
그 순간, 나는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묵은 참 공평하고 배움에도 열심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배운 것은 다른 세계의 자신도 빠짐없이 배우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졸음에 머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햇살은 느릿하게 쏟아져 내리며 시간도, 그의 그림자도 함께 멀리 늘여 놓는 듯했다.
그래도 나는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유연
당신은 참 많은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허묵
세상에는 수많은 규칙과 변화가 존재하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살아가며 무수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은 상자 안의 것들에도 여러 변화를 일으키죠.
허묵
그 과정 자체는 새로울 게 없지만 충분히 흥미롭죠.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가 고개를 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특유의 오만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허묵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요.
이런 허묵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의 그에게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금방이라도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다만 아직은 그것을 정의할 적절하고 정확한 말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 낯선 나라의 거리를 지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다시 모퉁이를 하나 돌았을 때였다. 눈앞의 좁은 골목에서 햇빛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어두워진 시야 탓에 다른 감각들이 한층 예민해졌고, 희미한 종이와 잉크 냄새가 풍겨 왔다.
나는 무심코 곁에 있는 사람을 붙잡았다. 졸음에 흐릿했던 정신이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유연
……!
유연
이번 연구실은 이렇게까지 비밀스러운 곳인가……?
허묵
어쩌면 지금까지의 연구실들이 너무 평범했던 걸지도 모르죠.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희미한 빛을 내는 광점 몇 개가 반딧불이처럼 눈앞에 흩어졌다. 그 빛은 내 앞에 놓인 거대한 서류 캐비닛도 희미하게 밝혀 주었다.
허묵의 손에서 퍼져 나온 광점을 따라 회색 서류 캐비닛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캐비닛은 방 안쪽 깊숙한 곳까지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캐비닛은 다소 낡아 보였지만 주변에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수시로 청소하고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눈에 보이는 곳에는 창문도, 시계도 없었다. 멀리 있는 두껍고 굳게 닫힌 문마저 시간의 비밀을 몰래 가둬 놓은 것처럼 보였다.
유연
여긴 연구실이 아니잖아요!
내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허묵은 그저 입꼬리만 살짝 올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가장 가까운 캐비닛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들고 고개를 숙여 읽기 시작했다.
내 궁금증을 풀어 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그를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직접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다 서류 색인이 표시된 금속 명패 아래에서 작은 영문 글씨를 발견했다.
Global Genome Organisation
'세계유전자기구'?
나는 순간 멈칫하며 본능적으로 곁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태연한 그의 얼굴을 보고는 의문을 다시 속으로 삼켰다.
여기가 세계유전자기구의 자료실인가? 그런데 허묵은 왜 이런 방식으로 이곳에 온 걸까? 찾는 자료라도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도 그를 따라 서류 몇 개를 무작위로 꺼내 펼쳐 보았다.
대부분 실험 기록이었다. 방대한 검사 데이터와 유전자 샘플로 보이는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었고, 간혹 복잡한 염기서열 도표나 분석 보고서도 끼워져 있었다.
어려운 전문 용어와 수식, 알파벳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몇 줄을 겨우 읽어 보았지만 금세 내 이해 범위를 벗어났다.
전체적으로 오래전의 기록들로 보였지만 허묵은 무척 진지하게 읽고 있었다.
유연
여기 있는 건…… 전부 오래된 연구 자료 같은데.
허묵
중요한 건 어떤 관점에서 생각하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했느냐죠. 혹은……
허묵
어떤 상상을 했느냐일 수도 있고요.
그의 시선은 서류에 머물러 있었지만, 마치 기나긴 시간을 넘어 아득히 먼 곳들에 닿아 있는 듯했다.
과거는 하나하나의 계단이 되어 쌓였다. 그 안에 오류가 있든 실패가 있든, 그는 그 모든 것을 성공과 함께 자신의 발아래 놓인 디딤돌로 삼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차분히 자료를 살펴보았다.
이곳의 어려운 지식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나 자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자료를 뒤지는 데에도 조금씩 방향이 잡혔다.
한눈에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 자료들은 내려놓고 살펴보다가, 마침내 어느 서가에서 중국어로 작성된 자료 뭉치를 발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놀랍게도 20년 전 연모시 최고생명과학연구소에서 작성한 자료였다.
뒤에는 초대 소장인 '천전(陈振)'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글씨는 희미하게 바래 있었다.
그런데 자료를 넘기던 중 어딘가 낯익은 설계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득한 기억이 문득 메아리처럼 되살아났다. 나는 이 설계도를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이것을 둘러싸고 여러 세력이 수많은 갈등과 대립을 벌이기도 했다.
가속 진화 캡슐.
나는 멍하니 설계도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연
허 교수님, 여기……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곳 아니에요?
허묵
들키면 아마 곧장 감옥으로 보내지겠죠.
유연
……
그는 너무나 담담하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그런데도 이곳에 오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사이 허묵은 자료를 내려놓았다. 읽기를 마친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캐비닛 안쪽에서 낡은 비디오테이프 몇 개를 골라 들더니 익숙한 걸음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재생기로 향했다.
딸깍. 작은 소리와 함께 작동하기 시작한 기계가 자료실의 적막을 깨뜨렸다.
얼룩덜룩한 화면에 갑자기 눈송이 같은 잡음이 나타났다. 희미한 지직거림은 점차 노이즈가 가득한 영상으로 안정되었고, 아득한 과거의 모습이 천천히 되살아났다.
화면 속에는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외국인 남성이 커다란 칠판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정장을 입고 앉아 있는 청중을 향해 열정적이면서도 진지하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귀에 들어오는 말은 몹시 낯설었다. 내가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건 'gene', 'expression' 같은 몇몇 단어뿐이었다.
무슨 학술 포럼에서 진행한 강연인가?
미처 질문하기도 전에 허묵은 빨리 감기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 사람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빠르고 흐릿해졌다. 칠판의 수식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고, 이어지던 목소리는 날카롭고 끊어지는 잡음으로 변했다.
그는 연달아 비디오테이프를 갈아 끼웠다. 화면의 내용도 그때마다 달라졌다. 연구원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강연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고, 여러 사람이 시끄럽게 토론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허묵은 그렇게 한 장면씩 빨리 감으며 테이프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나도 조용히 곁에 서서 그와 함께 복잡한 수식들이 한 줄씩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수많은 연구자가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장면도 함께 바라보았다.
그러다 또 다른 비디오테이프가 재생되었을 때였다. 오랫동안 평온했던 허묵의 눈빛이 문득 미세하게 흔들렸다.
화면에는 패기 넘치는 젊은 연구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그들의 몸 위로 쏟아졌다. 노이즈와 화면의 왜곡을 거쳐서도 옅은 금빛은 여전히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연구원 A
이런 것도 찍어야 해? 우리 그냥 뜬구름 잡는 얘기나 하고 있는 거잖아.
연구원 B
재미로 찍어 두자는 거지! 게다가 우린 낙관주의를 실천해야 하잖아.
연구원 B
어쩌면 몇십 년 뒤에 이걸 다시 봤을 때, 지금 하는 이 '꿈같은 이야기'들이 전부 현실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연구원 C
맞아, 맞아. 게다가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나중의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 수도 있잖아……
연구원 C
최소한 젊은 시절을 추억하는 데는 쓸 수 있을 테고!
연구원 A
좋아. 그럼 누가 먼저 시작할래? 미래의 우리에게 꿈의 출발점 하나쯤 남겨 봐.
연구원 D
그럼 내가 할게! 오랫동안 생각해 봤는데, 난 역시 이곳에 남아서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 분야를 계속 깊이 연구하고 싶어.
연구원 D
다들 더 크고 먼 곳을 향해 나아갈 테니, 누군가는 여기 남아 착실하게 기초를 다져야 하잖아.
연구원 C
라오화, 포부도 크셔라. 나는 오히려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연구원 C
어때요, 닝 교수님? 연모시로 돌아가면 우리 연구소에서 가장 먼저 무슨 프로젝트를 할까요?
??
당연히 다들 지금 하고 있는 연구부터 계속 마무리해야죠.
카메라가 살짝 흔들리더니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심지어 일부러 얼굴을 클로즈업하기까지 했다.
그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췄다.
부드러운 눈매로 웃고 있는 여성이 화면에 나타났다. 목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걸친 실험복은 그녀의 모습을 우아하고 온화하게 보이도록 했다.
화면에는 흐릿한 노이즈가 가득했고 목소리마저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모습만큼은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언젠가 내 기억 속을 스쳐 지나간 사람이었다. 허묵의 꿈속에서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사람.
나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리고, 말없이 평온하게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얼룩진 화면의 빛이 그의 얼굴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짙고 깊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영상을 멈추지도,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시간을 함부로 방해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와 함께 화면 속 아득한 옛사람을 바라보고 싶었다.
닝 교수
저 개인적으로는…… 중국에 있는 학자들과 협력해서 유전자의 발현과 발현 양상에 관한 연구를 더욱 깊이 진행하고 싶어요.
닝 교수
여러분도 저와 함께 이 연구를 발전시켜 나가고 싶다면 정말 영광일 거예요.
그녀는 차분하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나긴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닝 교수
그런데 전에 맥스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어딘가에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연구원 B
또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만든 보도일지도 모르죠.
닝 교수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어요.
닝 교수
도대체 무엇이 그런 특별한 능력을 발현시키는 걸까요? 그리고 개인마다 나타나는 능력에도 차이가 있을까요?
닝 교수
관련 단백질의 합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요?
닝 교수
더 나아가, 그것과 관련된 개체의 형질이 겉으로 발현되는 양상까지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을지…….
닝 교수
그 특별한 유전자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까요?
연구원 C
그런 능력이 정말 존재한다면, 좋은 일일까요?
닝 교수
그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에요.
그녀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마치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유롭고 기발한 미래를 상상했다. 화면에서 명멸하는 빛은 오래된 필름 속 장면처럼 다채롭고 몽환적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상상은 미래를 향해 끝없이 펼쳐졌다.
그러나 화면 밖의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하지만 혈연을 넘어, 광활한 세상 어딘가에서 그들을 서로에게 이끌어 준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그를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길을 밝혀 준 그 사람의 모습을 따라 어떤 답을 찾아 나서게 했다.
그에게는 어떤 위로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손끝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번져 왔다. 그가 말없이 보내는 시선도 함께 느껴졌다.
허묵
지난번 실험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군요.
허묵
이번에는 또 제 어떤 점이 당신을 슬프게 한 겁니까?
유연
……그냥 조금 안타까워서.
어린 천재에게도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을 것이다.
아마 그는 그 궁금증들을 그녀에게 털어놓았을 테고, 그녀는 분명 웃으며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그의 마음에 또 다른 씨앗을 심어 주었겠지.
두 사람이 여전히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안갯속에서, 분명 서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가 홀로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앞에 앉아 있어야만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연
그렇지만…… 지금의 교수님이 아쉬워하지도, 외로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게 오히려 당신에게 좋은 일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유연
그냥…… 전 이 모든 게 너무 슬퍼요.
영상이 끝나고 화면이 고요해졌다. 세상이 다시 조용해지자 심장이 뛰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유연
그래서 교수님의 손을 잡고 싶었어요.
허묵
만약 제게 필요하지 않다면요?
유연
필요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유연
하지만 앞으로 언제든, 어떤 이유에서든…… 교수님이 문득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해지고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면……
유연
그때 이 순간을 떠올려 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서툴지만 진심을 다해 그의 손을 꼭 잡고, 진지하게 눈을 마주쳤다.
유연
기억해 줬으면 해요. 내가 교수님의 손을 잡아 줄 거라는 걸. 교수님을 혼자 외롭게 두지 않을 거라는 걸.
그의 눈빛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과 혼란이 가득했다. 마치 전혀 알지 못하던 미지의 존재를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처럼. 그 역시 조용히 숨을 죽인 채 말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것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초조하게 느껴졌다. 무언가가 성장통처럼 혈관을 따라 퍼져 나갔고, 그를 움직여 내 손에서 자신의 손을 거두게 했다.
허묵
정말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그 비정상적인 데이터를 기록해 두도록 하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비디오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이윽고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유연
교수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조금 있다가 돌아올게요.
유연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저 혼자 두고 가 버리면 안 돼요, 알겠죠?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유연
갑자기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생각났거든요. 그러니까 반드시 기다려야 해요!
유연
꼭 기다려 주세요!!
유연
안 그러면 저 혼자 감옥에 잡혀간단 말이에요!!!
이번에는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곧바로 몸속의 Evol을 움직였다.
익숙한 힘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날카롭게 번뜩이는 얼음빛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반응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얼음 송곳은 내 눈앞에서 멈춰 섰고, 이내 작은 얼음 결정으로 변해 허공에 흩어졌다.
예상했던 대로 낯익은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고, 눈에는 아직 경계하는 기색이 남아 있었다.
허묵
당신이 왜 여기 있나요?
그의 주변에는 아까보다 훨씬 많은 자료와 비디오테이프가 높이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이곳에서 더 오랫동안 조사를 진행한 모양이었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그는 오늘 나와 함께했던 모든 일을 똑같이 해냈을 것이다.
자신의 길을 따라 끊임없이 나아가면서.
더 빠르게, 지칠 줄도 모르고.
그리고 방금 보았던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역시 이미 시청한 자료들 사이에 조용히 놓여 있는 듯했다.
나는 앞으로 다가갔다. 허묵의 얼굴에 희미하게 드러난 냉담함과 거부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차가운 손을 살며시 잡았다.
유연
당신이 여기 혼자 있는 게 싫어서요.
이기적이어도 좋았다. 혼자만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더라도. 이미 놓쳐 버린 한순간이라도. 잠깐의 위로에 불과하더라도……
나는 모든 세계의 당신이 그것을 가졌으면 했다.
10-9 失格底色 (실격의 바탕색)
삶은 끊임없이 회전하고, 세상만사의 온갖 모습은 흐릿하게 뒤섞여 유화 물감처럼 번져 간다.
*강천 골목 (江川巷)
나의 꿈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똑똑한 사람이다.
아이
엄마, 나 나중에 과학자가 되고 싶어!
엄마
어, 펑!
엄마
어머, 앞사람이 정말 좋네. 계속 좋은 패만 넘겨주잖아.
아이
엄마……
엄마
왜? 엄마 마작하는 거 안 보여? 저리 가서 놀아.
아이
……엄마, 이거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야. 부모님이랑 자기 꿈에 관해 이야기해 보래.
엄마
숙제라고? 그럼 말해 봐.
엄마
거기 빨리 패 좀 내! 뭘 그렇게 고민해? 답답해 죽겠네.
아이
엄마, 나 나중에 과학자가 되면 안 돼?
엄마
응? 무슨 과학자?
아이
나, 나도 잘 모르겠는데…… 과학자가 되면 돈을 엄청 많이 벌 수 있대!
엄마
그래, 돈만 잘 벌면 됐지. 쯔모!!
엄마
어휴, 오늘 패가 아주 잘 들어오네.
엄마
자자, 한 판 더 하자!
아이
엄마……
엄마
또 왜? 아까 이야기 다 했잖아?
엄마
얼른 저리 가. 또 와서 귀찮게 하면 오늘 저녁밥 없어.
*호텔
인생의 동반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수많은 요소가 필요하다.
A
누구세요?
B
저는 류이의 배우자예요.
B
긴장할 필요 없어요. 불륜 상대를 잡으러 온 건 아니니까. 오늘은 당신과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 왔어요.
A
무슨 이야기요?
B
당신이 원하는 게 돈이라면 그 사람과 헤어져요. 그 사람이 쓰는 돈은 전부 제가 주는 거니까요.
B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게 애정이라 해도 그 사람과 헤어지세요.
A
당신 같은 세 번째 상대 말고도 네 번째, 다섯 번째 상대까지 제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A
……결국 돌고 돌아 하는 말이 그 사람과 헤어지라는 거네요?
A
좋아요. 얼마 줄 건데요?
B
백만 위안.
B
적다고 생각하면 오십만 위안을 더 얹어 줄 수도 있어요.
B
하지만 그것도 부족하다면 그 돈을 다른 방법에 써서라도 두 사람을 갈라놓겠어요.
A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세요?
B
그럭저럭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제게 행운을 가져다주거든요.
B
제 운 좋은 인생을 위해서라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사람을 곁에 두겠어요.
*연모공항
백일몽
-자유의 끝에는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백만이 펼쳐져 있는 듯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수많은 의문을 발견하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QUEEN이라는 존재 자체와는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행동에는 충분한 일관성이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끝맺은 어제의 일들을 좀처럼 내려놓지 못했다.
고집스럽고, 천진하고, 망설이다가도 단호해지는 사람.
마치 모든 모순과 이치가 그녀의 몸과 눈동자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그녀는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걸까?
그러나 '가엾다'는 말은 어딘가 정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안타까워하는 걸까?
하지만 '동정'이라는 말 역시 그녀의 눈에 담긴 모든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그것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무언가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을 뻗어 그의 심장을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은 감각.
그는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아직 '기나긴 시간'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했던 지난날, 그 고통은 늘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녀를 바라보는 매 순간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그 고통에 익숙해졌다.
한때는 그 고통이 서서히 옅어지고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믿었던 순간……
거대한 공백이 그를 뒤덮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동안 고통이 사라졌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새 그의 호흡과 신경이 되고, 몸속을 흐르는 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작 고통이 진정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세상은 다시 그에게 아무것도 없는 공백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제법 통쾌하기까지 했다.
마치 어떤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과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후,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공백은 여전히 그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내는 시선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떠보는 말 한마디, 거듭 던지는 질문 하나하나가 그 공백을 허물고, 뚫어 버리려는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10-10 试探 (떠보기)
나는 그의 손을 잡은 채 앞서 다른 세계의 허묵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는 똑같은 표정을 지었고, 똑같은 대답을 했다.
다만 눈앞의 허묵에게서는 조금 더 복잡한 기색이 엿보였다.
재생기의 화면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옅은 흰빛을 내뿜었다. 화면은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는 강당의 모습에 멈춰 있었다.
그는 화면을 바라보면서도 곁에 앉은 내가 두 세계에서 겪은 일을 설명하는 데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나타난 또 하나의 세계, 어지럼증과 견인력, 보호막이 파괴된 일, 그리고 그를 따라 여러 연구실을 돌아다녔던 일까지.
허묵
……그러니까 내 전화를 받았다는 거군요.
유연
맞아요. 그때 어지럼증이 나타난 뒤에야 교수님께 문자를 보냈어요. 그러니까 교수님이 저한테 전화를 거신 것도 그 후였죠.
허묵
그럼 다른 쪽의 나는 왜 전화했는지 말해 주던가요?
유연
그냥 ‘이제 확인이 끝난 사소한 일일 뿐’이라고 하셨어요.
나는 일부러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가 천천히 내 얼굴로 향했다.
유연
……왜 그러세요?
허묵
……
허묵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아하니 정말 확인은 끝난 모양이네요.
허묵
그를 만나러 가지 않은 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이것도 뜻밖의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딘가 담담한 비웃음이 섞인 말투로,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유연
역시 교수님은 이 모든 걸 금방 받아들이시네요.
허묵
다른 쪽의 나는 많이 놀라던가요?
유연
그렇진 않았어요. 교수님처럼 침착했죠.
유연
어느 세계에서든 교수님의 천재적인 두뇌는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 같아요.
허묵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이를테면……
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었다.
허묵
정말 서로 평행한 두 세계가 존재한다면, 왜 그 두 세계를 통틀어 당신은 한 명뿐일까요?
유연
……저도 그게 궁금해요.
유연
하지만 예전에도 QUEEN이 없는 세계에 가 본 적은 있어요.
허묵
그렇지만 당신의 설명대로라면, 지금 저쪽 세계는 연모시와 거의 완전히 똑같은 평행세계일 텐데요.
허묵
그런데 왜 그곳에는 당신이 없는 걸까요? 또 당신은 무엇을 통해 두 세계 사이를 ‘도약’하고 있는 거죠?
그는 말을 하는 동안 줄곧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몸을 비스듬히 돌려 한쪽 팔을 내 등 뒤에 짚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숨결이 내 얼굴을 스쳤다. 깊고 그윽한 눈동자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유연
저, 저도 모르겠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결국 그가 내 뒤에 뻗어 놓은 팔에 완전히 기대고 말았다.
허묵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는 데 너무나 능숙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그가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이렇게 나를 휘감아 오는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허묵
이곳과 저곳이 서로 다른 두 세계이고, 당신이 처음 있던 곳은 저쪽이라면……
그의 그림자가 나를 완전히 뒤덮었다. 나는 그의 그늘 안에 갇혔고, 내 모든 반응은 숨김없이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
허묵
당신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정의할 건가요?
허묵
하나의 가능성? 아니면 존재해서는 안 될 환영?
유연
……
유연
저, 저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저 어느 세계의 교수님도…… 지금 같은 때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허묵
그 모든 게 의미가 있을까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허묵
……당신은 원래 내 곁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나타나 나를 위로하고, 곁을 지켜 줬죠……
허묵
만약 나에게도 당신이 필요해서, 이쪽 세계에 붙잡아 두고 싶어진다면.
허묵
당신은 남아 줄 건가요? 아니면…… ‘나’의 곁으로 돌아갈 건가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웠다. 과거의 허묵과 완벽하게 겹쳐지는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지금 눈앞에 있는 그만의 모습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유연
……그럼 교수님은 제가 곁에 남기를 바라세요?
유연
‘만약’이라는 말은 빼고요.
그 순간, 허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았고, 그 모습은 내 눈에 속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빛으로 남았다.
우리는 줄곧 서로에게 어떤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서로의 눈에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는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 미지의 것이 위험인지 진실인지, 혹은 둘 다인지 알 수 없었기에 우리는 서로를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유연
……제가 조금 전에 교수님께 위로가 되긴 했나요?
유연
그랬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그랬다면 제가 이곳에 나타난 건 의미가 있는 거예요.
유연
하지만 저는 잘못된 것도 바로잡고, 이 모든 혼란을 일으킨 원인도 찾아낼 거예요. 설령……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서로 얽혀 들었다.
유연
교수님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더라도요.
허묵
아주 흥미로운 대답이네요.
그의 눈동자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마치 내가 훌륭한 답안을 완성한 것 같았다.
그러자 그는 조금 전 끝맺지 못한 질문을 미련 없이 접었다. 그의 기색도 어둠 속에서 일렁이던 물결이 잦아들듯 가라앉았다.
그는 다시 한번 나에 대한 관찰을 마친 듯했다. 이미 충분히 떠보았으니 더는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유연
교수님은…… 두렵지 않으세요?
허묵
시간은 귀중하니까요.
그는 담담하게 재생 버튼을 누르고 다시 앞서 보던 자료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나와 허묵 사이에 존재하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어떤 차이를.
세상에서는 언제나 온갖 일이 일어났다. 그 일들은 끝없이 우리를 휘말리게 했고, 우리는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일을 해결해야 했다.
나는 늘 그 흐름에 이끌려 들어갔다. 눈앞에 나타난 단서를 쫓는 데 익숙했고, 그러다 결국 나 자신까지 그 속에 완전히 빠져들곤 했다.
하지만 허묵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언제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늘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잠시 그의 주의를 흩트리거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뜻밖의 일이 생기더라도, 그는 조금 살펴보는 데 그친 뒤 곧바로 자신의 길로 돌아왔다.
이전에는 그를 한눈팔게 했던 뜻밖의 일들 중 상당수가 나와 관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방해’가 모두 사라지자, 그는 다시 가장 순수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직 자신이 정한 목적지만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으로.
유연
정말 부러워요, 교수님.
나도 모르게 그 탄식이 입 밖으로 흘러나와, 탐구가 이어지는 공간에 내려앉았다.
줄곧 가슴속에서 일렁이던 감정은 그제야 뚜렷한 정의와 이름을 얻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영상 속 장면에 머물러 있었다.
허묵
부럽다고요? 뭐가 부러운 거죠?
유연
교수님은 진정한 천재니까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 온 힘을 다해도 닿을 수 없는 높이.
유연
교수님은 복잡한 일도 핵심을 한눈에 꿰뚫어 보시잖아요. 많은 걸 빠르게 이해하면서도 언제나 의심하고 부정할 줄 아세요.
유연
스스로 내린 결론을 뒤집는 일조차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것 같고요.
천재와 천재 사이의 거리마저,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만큼 아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단순히 머리가 좋고 재능이 뛰어난 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본심을 변함없이 지키는 의지와 열정을 품고,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유연
저는 영원히 교수님처럼 될 수 없겠죠.
유연
그런데도 많은 순간, 교수님처럼 되고 싶었어요.
셀 수 없이 고개를 숙여 스스로를 탓하고, 결국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원망할 수밖에 없을 때마다 나는 허묵처럼 되고 싶었다.
지금 이런 말은 제멋대로이고 나약하게 들릴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야말로 가장 무의미한 것일지도 몰랐다.
유연
……죄송해요. 제가 정말 많이 피곤한가 봐요. 쓸데없는 푸념을 늘어놨네요.
허묵
그래서요?
허묵은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비웃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세 글자로 이루어진 짧은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허묵
나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 다음에는요?
허묵
몇 번이고 생각을 거듭하다가, 자신이 가는 길에 더 많은 문제와 더 큰 어려움이 거듭 나타난다는 걸 깨달은 다음에는……
허묵
그다음은요?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학생처럼 그 자리에 서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 일어난 거대한 변화는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 했고, 결국 그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나름대로 애써 무언가를 해 왔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멍하니 허묵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유연
……만약 두 개의 평행세계가 나타난다면, 교수님은 가장 먼저 어떤 질문을 하실 건가요?
마지막 비디오테이프가 끝까지 재생되고, 가볍게 되감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묵의 얼굴은 어른거리는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마침내 자료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든 그의 표정은 오만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허묵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유연
왜…… 그런 세계가 나타난 이유나, 누가 이런 일을 일으켰는지부터 알아보려고 하지 않으세요?
허묵
그래서요?
그는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허묵
질문은 결국 결과에 작용해야 해요. 이 현상은 분명 흥미롭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기도 하죠.
허묵
이것이 세계 자체의 현상이라면, 세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변화와 규칙, 새로운 흐름이 나타난 것일 테고요.
허묵
그것이 내가 가려는 길과 겹친다면, 나도 기꺼이 시간을 들이겠죠.
허묵
반대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라면, 그 사람 역시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텐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허묵
그것이 중요한지 아닌지는 결국…… 나에게 필요한가에 달려 있어요.
가늘고 긴 눈매에는 오만할 만큼 확고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는 세계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효율적이고, 냉정하게.
그리고 ‘나’는 그 모든 판단이 뻗어 나가는 출발점이자 중심이었다.
나는 눈앞의 그를 한참 동안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손을 굳게 쥐었다.
유연
열심히 배워 볼게요.
그는 더는 대답하지 않고 모든 자료와 비디오테이프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허묵
혼자 왔으니, 떠날 때도 누구도 데려가지 않는 편이 좋겠네요.
공간에 주름이 일었다. 어둠 속에서 그가 고개를 돌렸다.
허묵
두 세계를 오갈 때 물건도 가져갈 수 있나요?
유연
……아마 안 될 거예요. 휴대전화에 저장된 정보와 화면까지 바뀌니까요.
그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잠시 낮은 소리를 흘렸다. 이번에는 익숙한 공간의 뒤틀림이 그의 주위를 감쌌다.
흐릿해진 빛 속에서 그의 윤곽이 사라지고, 텅 빈 자료실에는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허묵
그렇다면 ‘나’에게 전해 줘요. 가장 최근에 발생한 시공간 접힘 현상의 지속 시간은 4.3초였다고.
10-11 다가오는 사냥꾼 (猎人逼近)
힘에 이끌리는 감각을 느끼며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여전히 그 자료실이 있었다. 마치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다만 재생기에서는 여전히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익숙한 사람도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것이 내가 ‘출발점이 있는’ 세계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내가 돌아온 기척을 들었는지, 허묵이 잠시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시선을 보내더니 이내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가 정말 약속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자신이 하던 일을 마저 끝내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목표로 향하는 길에 그저 ‘겸사겸사’ 하는 일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허묵
그쪽의 내가 전해 달라고 한 말이 있나요?
그는 거의 사실을 확인하는 듯한 담담한 말투로 질문을 던지며, 곁에 놓인 마지막 비디오테이프를 재생기에 밀어 넣었다.
유연
……그것까지 짐작하셨어요?
허묵
나 자신에 대한 간단한 판단일 뿐이에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를 앞뒤 사정과 이유는 건너뛰고, 필요한 핵심으로 곧장 향하는 것.
나는 그 모습을 감탄스럽게 바라보다가 부러움과 체념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유연
가장 최근에 발생한 시공간 접힘 현상의 지속 시간이 4.3초였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유연
교수님은 뭔가 계산하고 계신 건가요?
허묵
……맞아요.
그는 더 설명하지 않고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무언가를 확인했다는 확신이 한층 짙어졌다.
비디오테이프의 재생이 끝나고 나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세계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없이 모든 것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허묵
이쪽 일은 끝났어요. 가죠.
모든 것이 지극히 평범한 일처럼 흘러갔다.
다만 우리가 접혀 있는 시공간의 구간으로 들어섰을 때, 허묵은 다시 한번 눈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고요한 오솔길에는 선선한 밤바람이 불었다. 바람에는 희미한 습기와 풀밭의 향기가 묻어 있었다.
계속된 이동과 능력 사용으로 피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는 눈조차 제대로 뜨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보니, 곁에 있는 사람은 또다시 새로운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아무래도 다음 목적지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다른 것에는 조금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유연
……아무리 시간이 촉박하고 Evol 에너지가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사람은 잠을 자야 하잖아요.
작게 중얼거린 말에 그윽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러나 허묵은 곧 다시 골목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허묵
적당한 시간을 찾아 수면 문제도 해결할게요.
아무래도 천재 중의 천재가 되려면 강철 같은 의지뿐 아니라 강철 같은 몸도 필요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가려다가, 시야 끝에 어렴풋이 나타난 초췌한 인영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마치 밤의 어둠에 홀려 사로잡힌 취객처럼 보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허묵의 곁으로 조금 더 바짝 다가갔다.
어지러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비틀거리던 외국인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지독한 술 냄새도 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달려온 사람처럼 이마에 흐른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서로 들러붙어 있었다.
무척 다급한 모양인지, 구겨진 셔츠에 이미 얼룩이 잔뜩 묻어 있다는 사실조차 신경 쓰지 못하는 듯했다.
남자는 우리를 보자 잠시 멈칫하더니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발걸음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우리 곁을 지나던 순간 몸이 기울며 쓰러져 왔다.
유연
조심하세……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나를 감싸 안는 힘에 이끌려 옆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멍하니 바닥에 넘어진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허묵은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유연
……
나는 멀어지는 허묵을 바라보다가 뒤에 쓰러진 남자를 돌아보았다. 결국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몸을 돌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유연
저기, 괜찮으……
그 순간, 더러워진 옷깃 아래에서 금속성의 반짝임이 갑작스럽고도 눈부시게 드러났다.
무언가를 가리기 위해 여며 놓았던 듯한 셔츠의 깃이 넘어지면서 벌어져, 그 아래에 감춰져 있던 물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남자의 목에는 금속 고리가 단단히 채워져 있었다. 그것에서는 아주 먼 과거의 것이면서도 익숙한 냉기가 느껴졌다.
이건…… 사냥꾼 게임의 폭발 목걸이야.
서늘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뒤통수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피로와 무감각이 모조리 사라졌다.
바로 그때 남자도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 그는 몸을 버둥거리며 간신히 일어나더니, 허둥지둥 골목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나는 거의 굳어 버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방금 본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차가운 금속 고리는 여전히 눈앞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고리가 내 목까지 조여 와 숨을 막는 듯했다.
그 게임이 다시 되살아난 걸까? 언제부터……?
분명 등대는 이미 사라졌는데, 어째서……
잿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가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세계로 막 돌아왔을 때 그가 했던 말도 다시 귓가에 울렸다.
Joker
만약 내가 다시 너를 게임 속으로 던져 넣는다면, 너는 새로운 변형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설마…… 아주 오래전부터 그 게임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던 걸까?
마치 때에 맞지 않는 대답이라도 하듯, 오솔길 반대편 모퉁이에도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옷깃은 여전히 목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달빛은 목 부근의 금속에서 반사되는 빛을 조용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방금 달아난 남자가 멀어지는 방향을 힐끗 살피더니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쫓으려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다음은?
뒤쫓아 간 다음에는 무엇을 하려는 거지?
자료실에서 나를 바라보던 허묵의 시선이 다시 한번 먼 곳에서 내게 향하는 듯했다.
나는 너무 쉽게 수많은 일에 이끌려 다녔다. 정말 헌터 게임이 다시 진행되고 있는 걸까? 이전에 Joker는 등대를 위해 그 게임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내가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셀 수 없이 많은 질문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다. 그 질문들은 내가 직접 써 내려갈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하며 계속 허묵의 뒤만 따라다닐 수는 없었다.
‘사랑’이 사라진 지금, 이 거대한 물음에 마주한 나 역시 눈앞의 구체적인 질문 하나하나와 마주해야 했다.
그사이 허묵은 이미 제법 멀리 걸어가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알아차렸는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유연
하고 싶은 일이 많아도…… 괜찮을까요?
허묵
그런 질문에는 굳이 정해진 답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는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어떤 선택과 가능성을 함께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허묵
중요한 건 결국 하고 싶은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이에요. 달리 말하면…… 얼마나 욕심을 부리고 싶은가의 문제겠죠.
유연
……
유연
방금 그 사람의 목에서 사냥꾼 게임의 목걸이를 봤어요.
유연
그걸 잘못 알아봤을 리는 없어요.
밤바람 속에서 나는 허묵의 눈을 바라보았다.
유연
‘사랑’이 없는 이 세계에서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많은 상황이 더욱 나빠질 거예요.
유연
그러니까 저는 반드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해야겠어요.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 나를 깊이 응시했다.
허묵
왜죠?
유연
왜냐하면…… 제가 그걸 봤으니까요.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는 없어요.
나는 많은 힘을 들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지금은 마음속에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일들을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나 역시 내가 보게 된 모든 일을 진지하게 마주해야 했다.
유연
물론 제 힘만으로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요.
유연
하지만 오늘 교수님을 따라다닐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유연
저도 열심히 생각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꼭 찾아낼게요.
허묵
……
그녀는 너무 어리석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힘으로 수많은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데.
허묵은 달빛에 잠긴 눈앞의 인영을 깊이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에게서 비롯된 색채가 어두운 밤마저 물들이는 듯했다.
어쩌면 이것은 선량함에 가까운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순진함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그녀는 오래전에 이미 그에게 그 힘에 관해 설명했고, 실제로 그 힘을 발휘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정작 자신은 그 힘을 충분히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허묵
사실 당신은 이미 그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사용한 적이 있어요.
유연
……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허묵은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오늘 그는 이미 상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을 너무 많이 했다.
그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했다. 하루 종일 그녀는 그렇게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온전히 몰두하려 애썼지만, 언제나 그 시선만은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겹겹이 감춰 놓은 모든 것을 꿰뚫고 들어와, 더없이 순수하게 자신을 해부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녀가 차마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는 대상에는 그 역시 포함된 모양이었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다시 부풀어 오르며 그를 옥죄었다.
그는 자신 역시 그 시선 안에 놓여 있음을 느꼈고, 그 사실이 다시금 견딜 수 없이 거슬렸다.
공교롭게도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원래 그는 다음 목적지에 가기 전에 그녀를 어떻게 떼어 놓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니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허묵은 몸을 돌렸다.
유연
허 교수님, 고마워요.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세상의 흑과 백이 다시 한번 그를 향해 뒤집혀 밀려드는 듯했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여전히 그녀의 선택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의 목에서 그 목걸이를 발견한 순간부터, 그는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묵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빛바랜 달빛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왜 돌아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한동안 그 자리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다시 한번 능력을 사용한 탓에 마침내 그에게도 약간의 피로가 밀려왔다.
애초에 이번 이동 경로를 이렇게 짠 것 자체가 또 다른 시험이기도 했다.
그녀가 합류한 덕분에 꽤 괜찮은 변수도 생겼다.
허묵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이어 가며 어느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나이가 지긋한 연구원 한 명이 이미 한동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허묵을 발견하자 손을 흔들었다. 세월은 그의 얼굴에 수많은 흔적을 남겼지만, 비디오테이프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미소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원로 연구원
허허, 지금도 이 연구 주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
허묵은 노인을 따라 문턱을 넘어 서재로 향했다.
원로 연구원
그 당시에는 기술적인 난관에 많이 부딪혀서 연구를 잠시 중단하기로 했었지.
원로 연구원
사실 여기에 남아 있는 것도 당시 기록을 적어 놓은 수기 원고들뿐인데, 정말 지금 자네들이 하는 연구에 도움이 되겠나?
허묵
모든 실패에는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허묵은 손을 뻗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서류 뭉치를 집어 들었다.
이미 누렇게 변한 종이에는 인쇄된 데이터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옆에 손으로 적힌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글을 쓴 사람이 남긴 생각 하나하나를 충실하고 세밀하게 기록해 놓은 글씨였다.
그는 서류를 조심스럽게 넘기다가 그중 한 권의 연구 기록장을 펼쳤다.
속표지에는 단정한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 이름이 다시 공기 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닝푸즈(宁芙之)."
허묵이 아파트를 떠나 공원에 도착했을 때,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은 이미 굳어 버린 먹덩이처럼 짙어져 있었다.
미풍이 호수 표면에 잔물결을 일으켰고, 물결은 몇 점의 불빛을 잘게 부수어 반사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노인 한 명만이 벤치에 조용히 앉아 눈앞의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묵은 그의 곁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방문객에 노인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
오랜만이구나.
노인은 허묵을 찬찬히 살펴본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노인
자네를 허 교수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295호라고 불러야 할까?
허묵
……
허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에 노인은 가볍게 웃었다.
노인
자네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알고 있네.
노인
Evol의 힘이 약해졌지.
노인
지금 같은 추세로 계속 약해진다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머지않았을 게야.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무거운 밤의 어둠이 고층 건물 옥상을 뒤덮었고, 그 속에 두 사람의 흐릿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중 한 사람이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 하지만 그가 반응하려는 순간, 차가운 바람의 칼날이 두 사람이 몸을 돌리려던 방향을 가로질러 날아들었다.
군화가 바닥을 딛는 발걸음에는 서늘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다가온 사람의 시선이 두 사람 중 한 명에게 향했다.
백기
너, 나랑 좀 가야겠다.
10-13 주도권 (主动权)
연모시로 돌아온 뒤, 나는 우선 푹 잠을 잤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Zehn에게 연락해 사냥꾼 게임과 관련된 단서를 전하고, 평소의 두 배에 달하는 보수도 함께 송금했다.
Zehn
사냥꾼 게임? 그거 몇 년 전에 끝난 거 아니었어요?
유연
저도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그래서 관련 정보를 더 찾아보고 확인해 줬으면 해요.
Zehn
걱정 마세요, 사장님. 돈도 제대로 받았으니 이 몸이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소식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에도 연모시에서는 보이지 않는 암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Helios는 더 이상 특정 구역의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명령하지 않는 듯했지만, 뉴스에서는 온갖 갈등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이따금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고요함을 찢고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어느새 혼란과 공존하고, 그 혼란에 익숙해져야 하는 일상으로 들어서고 있는 듯했다.
무언가를 파괴하는 속도는 그것을 복구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쪽 ‘연모시’의 상황은 상대적으로 훨씬 안정적이었다. 마치 이 사건들이 이쪽 세계에만 생겨난 작은 균열인 것처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나는 다른 세계의 Zehn에게도 똑같은 조사를 의뢰했다.
Zehn
사냥꾼 게임이요? 갑자기요? 사장님은 왜 뜬금없이 그게 궁금해진 거예요?
유연
뜻밖의 일이 좀 있었거든요.
평온하기만 한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어렴풋이 어떤 거대한 힘이 나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것이 선택에서 비롯된 힘인지, 운명의 힘인지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며칠 뒤, Zehn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링크 하나였다.
낯선 인터넷 주소를 바라보자 불길한 예감이 순식간에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링크를 눌렀다. 그 순간, 여러 카메라의 시점으로 분할된 화면들이 동시에 눈앞에 펼쳐졌다.
숲속에서는 누군가가 끊임없이 달리고 있는 듯했다.
이따금 사람들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로질렀고, 그들의 눈에는 흉포한 광기와 핏빛이 가득했다.
욕설, 공격, 도주와 추격…… 차갑고 무정한 화면은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모든 패배와 승리를 집요하게 확대해 보여 주고 있었다.
때로는 선혈이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가, 광란의 축제를 과시하듯 즐겁게 닦여 나갔다.
나는 분노로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구역질이 날 만큼 끔찍한 화면 위로 베팅과 실시간 댓글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그저 게임 방송이나 영화 속 장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한가한 시간에 즐기는 소소한 오락거리이자 즐거움에 불과한 것이었다.
몇 분 뒤, Zehn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Zehn
사장님, 제가 보낸 링크 열어 보셨죠? 설마 이 죽음의 게임을 정말 다시 시작했을 줄은 몰랐네요.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특별한 비난이나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유연
어디까지 알아냈어요?
Zehn
정보가 그리 많지는 않아요. 아까 보낸 링크도 한참을 우회해서 겨우 입수한 거예요.
Zehn
사이트 주소가 굉장히 빠르게 바뀌거든요. 정해진 시간 안에 베팅하지 않으면 주소가 완전히 무효가 되고요.
Zehn
게임이 진행되는 장소도 여전히 철저하게 숨겨져 있어요. 그래도 예전에 도시 전체를 무대로 게임을 벌이기 전까지 발각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다시 시작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Zehn
어쩌면 지금은 한층 발전해서 경험도 더 많아졌을지 모르죠.
유연
……
나는 침묵에 잠겼다.
결국 Zehn에게는 일단 여기까지만 조사해 달라고 했다. 조사를 계속하다가 그마저 이 위험한 게임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아닐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휴대전화에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 통화가 연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백기
용건만 말해.
간결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감추지 못한 피로가 희미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유연
……괜찮아요? 목소리가 많이 지쳐 들리는데요.
백기
용건 없으면 끊는다.
유연
잠깐, 잠깐만요! 신고하려고 전화한 거예요!
나는 그가 정말 다음 순간 전화를 끊어 버릴 것 같아 다급하게 붙잡았다.
유연
우연히 사냥꾼 게임에 관한 정보를 발견했어요! 그 게임이 다시 시작된 것 같아요. 지금도 베팅과 생중계가 진행되고 있어요!
유연
영상 링크도 보내 놨어요. 그런데 일정 시간 안에 베팅하지 않으면 접속할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고 나서야 그의 대답이 천천히 들려왔다.
백기
알았어.
유연
……생각보다 별로 놀라지 않네요.
지금의 백기라고 해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이상했다.
문득 어떤 추측이 머릿속을 스쳤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유연
……혹시…… 이미 알고 있었어요?
백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말없는 긍정처럼 느껴졌다.
백기
특파팀은 모든 사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백기
너는…… 됐어. 어차피 말려도 듣지 않을 테니까.
백기
네 몸은 잘 지켜.
내가 더 말하기도 전에 백기는 전화를 끊었다.
조용해진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백기가 이미 이 일을 조사하고 있었다면, 게임이 다시 시작된 시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전일 것이다.
Joker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언제나 세계의 규칙에 관심을 두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다시 게임을 개최했다면 분명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Joker 역시 천재였다.
그렇다면 그동안 그는 어떤 답을 얻었을까?
그리고 나는 이 과정에서 어떻게 나 자신을 보호하고, 내 능력으로 사건의 흐름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줄곧 허묵의 말을 곱씹었다.
‘사랑’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이르게 될지도 생각했다.
마침내 나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유연
일단 회사부터 가자.
유연
아니지…… 지금은 세계가 두 개니까 회사를 두 번 가야겠네.
회의실에서는 모두가 《토론》의 준결승 토론 주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유연
저도 후보 주제가 하나 있어요. 관련 자료도 어느 정도 제공할 수 있으니 한번 검토해 보세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일제히 내게 향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유연
다들 사냥꾼 게임 기억하시죠?
유연
몇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충분히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해요.
유연
이번이 ‘생사를 건 진출전’이라면, 이런 주제를 다뤄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유연
사냥꾼 게임에서 사냥꾼과 베팅 참여자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용서받을 수 없는가.
나는 줄곧 프로그램, 더 나아가 미디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해 왔다.
기록하고, 표현하고, 전달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일들이었다.
무언가를 당장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디어는 대중의 눈이기도 했다.
원래라면 구석진 곳에 감춰져 있었을 일들을 대중의 시야 안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일은 널리 알려야 하고, 정의롭고 용감한 사람들은 칭송받아야 한다.
그리고 죄악과 잘못이 숨어 있는 어두운 구석에도 빛을 비춰, 그 실체를 똑똑히 드러내야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선택하고, 저마다의 답을 얻을 것이다.
분명 무언가는 달라질 것이다. 비록 아주 조금일지라도.
회사를 나온 뒤, 나는 샤오위에에게 전화를 걸었다.
샤오위에
이번엔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QUEEN 아가씨께서 친히 연락을 다 하셨을까?
유연
그냥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전에 상관께서 제 안전을 지키도록 사람을 보내셨다고 했잖아요. 아직도 임무는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거죠?
샤오위에
그건 네가 왜 그렇게 자주 사라지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느냐에 달렸지.
샤오위에
NW가 네 전담 경호원은 아니니까.
그가 냉소를 흘리는 듯했다. 하지만 다른 세계에서처럼 곧바로 병사들을 보내 나를 ‘모셔 오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이쪽 세계를 떠나 있었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일까?
그래서 내가 다시 나타나면 늘 행적을 파악할 수 있었던 걸까?
유연
샤오위에 장관님 말씀을 들어 보니, 임무는 아직 잘 수행하고 계신 모양이네요.
샤오위에
물론 NW 관찰실이라면 언제든 널 환영하지. 밖에서는 기껏해야 죽지 않도록 지켜 주는 수준이니까.
유연
그랬다가는 오히려 성가셔질 사람이 따로 있을 텐데요.
유연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장관님.
나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이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NW도 이번에는 실컷 이용해 보자.
나는 집 근처 공원으로 가서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미래 역시 더욱 정확한 시점까지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단 1분이라도 좋았다.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반드시 갖춰야 했다.
그래, 나는 허묵이 부러웠다. 그와 같은 안목과 지혜,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싶었다.
나는 몸속에서 끊임없이 일렁이는 힘을 느꼈다. 내가 불러내자 그 힘은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차분한 빛으로 고동쳤다.
익숙한 견인력이 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 힘을 애써 밀어내고, 가볍고 부드러운 빛 속으로 온전히 정신을 집중했다.
미래는 허망하고 아득했다. 서로 구별할 수 없는 물결처럼, 장면들은 끊어졌다가 불쑥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가벼운 빛 속에서 수많은 장면이 끊임없이 번쩍였다.
나는 몇 번이고 그 빛에 다가가며, 빛과 나 사이의 거리를 더듬고 느꼈다.
흐릿한 세계 속에서 제멋대로 뒤엉켜 있던 길고 짧은 선들이 조금씩 내 손끝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빛점이 짧은 순간 서로 이어졌다.
지나가던 고양이가 배를 드러내고 드러눕는 모습.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지는 모습.
아이가 실수로 아끼던 장난감을 망가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
미래의 장면들에 조금씩 희미한 시간의 눈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점이 정확해질수록 내 힘도 훨씬 빠르게 소모되었다.
그리고 내가 보았던 장면들은 모두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그 순간, 안도감과 두려움 중 어느 쪽이 더 큰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이 벤치에 앉아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일주일이었을까, 열흘이었을까. 아니면 보름이 넘었을지도 몰랐다.
끊임없이 도약하는 장면들 탓에 나는 어느 정도 시간 감각을 잃어버렸다.
달력의 날짜만 계속 넘어갔고, 그와 함께 내 손안에 들어오는 힘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러다 흐릿한 검은 그림자 속에서 잿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를 발견한 순간, 나는 알았다.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10분 뒤, 여러 날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랬다. 그날 도망치던 남자의 목에 설치된 몰래카메라를 통해 내 모습이 화면에 담겼던 것이다.
생중계를 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를 발견했을 것이다. 당연히 게임의 주최자인 Joker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가 나타난 시점은 내 예상보다 확실히 늦었다. 특파팀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나는 그를 살피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반응을 떠보았다.
유연
이번에도 직접 나를 게임 속에 던져 넣으러 온 거야?
Joker
아니. 넌 확실히 그런 역할은 아니야.
은빛 곡선 하나가 내 발밑을 가로질렀다. 빛은 내 주변의 허공으로 끊임없이 뻗어 나가며 넓어졌다.
Joker
준비와 연산을 위한 시간은 끝났어. 이제 검증해 볼 수 있겠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은빛 곡선을 넘어 어느 홀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공기 중에는 알 수 없는 습기가 감돌았다. 사방을 둘러싼 회색 돌벽은 답답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데 익숙하고 가느다란 빛의 경로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가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등대가 사라지지 않은 건가?
하지만 자세히 생각할 틈도 없이, 보이지 않는 묵직한 압박감이 사방에서 밀려왔다.
공기가 점점 끈적하게 변해 갔고, 머리에도 팽창하는 듯한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호흡을 따라 내 혈액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고, 그 영향으로 몸속의 힘이 다시 희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연
……무슨 짓을 한 거야?
Joker
네가 기다린 것도 그 답이 궁금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어떤 가설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유연
궁금한 건 맞아. 하지만 네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도 궁금해.
유연
아직도 ‘세계 모형’을 검증하고 있는 거지?
Joker
그 모형은 이미 달라졌을 거야.
그는 고개를 돌려 주변 벽에 나타난 빛의 경로를 바라보았다.
Joker
그들이 남긴 데이터와 이론을 통해 세계의 모형이 한때 원뿔 형태였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리고 세계는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지.
Joker
과거에는 ‘인력’이 작용해 세계가 일종의 자의식을 지닌 것처럼 시간을 압축하거나 뒤쫓을 수 있었어. 차원이 상승하면서 불안정한 상태가 되기도 했고.
Joker
많은 변화가 무질서해 보인다고 해서, 그 안에 규칙이 없다는 뜻은 아니야.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한 걸음씩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몸을 살짝 숙였다.
Joker
세계를 변화시키는 ‘법칙’은 과연 무엇일까?
Joker
네가 이 세계에 만들어 낸 새로운 모형은 또 어떤 모습일까?
차가운 눈동자에는 호기심 어린 탐색의 빛이 가득했다. 나는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여러 번 보았는지도 몰랐다.
유연
사실 나도 모른다고 하면 믿겠어?
유연
나는 그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세계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했을 뿐이야. 네가 말하는 규칙이나 모형이 뭔지는 몰라.
그는 차갑게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Joker
새로운 모형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세계 전체의 구조도 언젠가는 붕괴할 거야…… 이전처럼 말이지.
Joker
그런데 지금은 상당히 안정적으로 보여. 그리고 넌 그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군.
Joker
그러니 너 자신을 통해 계산해 보겠어.
나는 잠시 멍해졌다. 머리가 점점 무거워졌지만, 이를 악물고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버텼다.
유연
……어떻게 계산하겠다는 거야?
Joker
이건 겨우 시작일 뿐이야.
Joker
결국 마지막으로 활성화되기를 기다리는 등대는 바로 너니까.
10-14 광기와 진압 (疯癫与镇压)
미친놈.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이토록 현기증이 날 만큼 끈적하게 느껴지는 공기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그는 여전히 Evol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유연
……너, 정말 나를 등대 취급하는 거야!
유연
설마 나도 변신이라도 해서 Evol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방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Joker
검증하려면 여러 가지 시도가 필요한 법이니까.
유연
……그럼 시험해 보고 아무런 결과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이 게임을 멈출 거야?
Joker
이 게임에는 다른 쓸모도 있어.
역시 미친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눈앞에 선 그의 눈빛은 맑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의심해 본 적도, 그 어떤 것의 심판을 두려워한 적도 없는 듯했다.
나는 Joker를 바라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 결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유연
너 같은 사람에게도 세계는 분명 어떤 답을 내놓겠지.
유연
하지만 그 답을 주는 사람은 절대로 내가 아닐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익숙한 무중력감이 갑작스럽게 밀려들었다. 보이지 않는 견인력이 미친 듯이 나를 휘감고 잡아당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다만 공기가 조금 맑아졌고,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사람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두 세계의 존재는 나 역시 이용할 수 있었다.
두 세계를 오가며 도망칠 수도 있었고, 지금처럼 상황을 예측하기 어려울 때 귀중한 정보의 격차를 확보하는 데 이용할 수도 있었다.
Joker가 이쪽 세계에는 없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나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머무를 수 없었다.
그가 능력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은 게임 구역이 분명 이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를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그러다 길게 뻗은 통로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가 줄곧 지하를 헤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 위에서는 때때로 먼지와 모래가 흔들려 떨어졌다. 밖으로 드러난 녹슨 배관에서는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져 어두운 웅덩이 위로 떨어졌다.
공기 중에 가득하던 코를 찌르는 쇠 냄새는 점차 구역질이 날 만큼 짙은 피비린내로 변해 갔다.
통로 양옆의 문은 아무리 힘을 써도 열리지 않았다. 모두 막다른 길인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통로 끝에서 격렬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일단 위험한 장소에서 벗어나려던 순간, 등 뒤에서도 축축하고 끈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빛 속에서, 마치 피 웅덩이에서 막 건져 올린 듯한 ‘시체’ 하나가 멀지 않은 곳의 식물 뒤에 서 있었다.
끈적한 피가 그의 옷자락과 손끝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뚝, 뚝.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그늘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자 걸음을 멈췄다.
핏발이 선 두 눈이 나를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몹시 두려워하는 듯하면서도,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어딘가 음험하고 잔혹한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목을 훑었다. 그러더니 기괴한 미소를 드러냈다.
??
넌 플레이어가 아니구나? 그럼 네가 날 죽여 봤자 소용없어……
??
하지만 네 비명이 충분히 볼만하다면, 큰손들이 내게 후원금을 보내 줄지도 모르지.
바로 다음 순간, 회백색의 암석층이 그의 발목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암석은 순식간에 갑옷처럼 온몸을 단단히 감쌌다.
옷에 묻어 있던 피는 돌의 갈라진 무늬를 따라 계속 흘러내렸다.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유연
……
나는 슬쩍 한 걸음 물러섰다.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최대한 거리를 벌리면서 주변 상황도 조용히 살폈다.
다른 세계로 ‘도약’하기 전에, 한계까지 몇 가지를 더 확인해 볼 수 있었다.
??
겁먹지 마. 후원금을 받기 전까지는 널 죽이지 않을 테니까.
??
사람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피를 흘릴 수 있거든.
유연
네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건지, 어떤 경위로 이 게임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무슨 이유가 있든……
유연
이런 죄악의 게임 때문에 사람답게 사는 법까지 잊지는 마!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단단한 암석으로 뒤덮인 몸에서 날카로운 돌가시들이 하나둘 솟아나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돌진했다.
나는 도망칠 수 있는 한계 거리를 계속 가늠했다. 동시에 힘을 움직여 언제든 견인력을 따라 다른 세계로 ‘도약’할 준비를 했다.
그 순간이었다. 눈부신 빛의 밧줄 하나가 오랫동안 숨어 있던 독사처럼 그의 등 뒤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빛의 밧줄은 거칠게 굳어 버린 그의 석화된 몸을 사납게 휘감았다.
이어서 엄청난 힘이 그를 뒤로 내던졌다. 그는 그대로 돌벽에 세게 처박혔다. 콰앙!
굉음과 함께 그의 몸에서 수많은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빛의 밧줄 반대편은 한 NW 대원의 손에 차갑게 움켜쥐어져 있었다.
유연
……!
역시 NW는 내가 나타나는 순간마다 내 위치를 파악할 방법이 있었어!
대원은 바닥에 웅크린 채 비명을 지르는 청년을 혐오스럽다는 듯 힐끗 바라본 뒤, 내게 시선을 돌렸다.
NW 대원
유연 씨, 저희와 함께 돌아가 주십시오.
유연
지난번에 NW 사람들을 때린 건 죄송해요. 그리고 이번에 구해 주신 것도 정말 감사하고요.
유연
하지만…… 저와 함께 이곳에 계속 머물러 주시지 않으면, 제가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보여 드릴게요.
NW 대원
……
정중한 말투로 건넨 협박에 NW 대원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그는 당장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곧장 바닥에 쓰러져 있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그의 몸에는 부러지고 남은 돌가시들이 가득했다. 얼굴은 극심한 공포로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고, 눈물이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
죽이지 마…… 때리지 마……
그다음 순간,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기억이 밀물처럼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인 듯했다.
어둡고 축축하며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지하실. 뚱뚱한 중년 남자가 몇 명의 남자를 데리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버지
10위안에 열 대. 마음대로 때리쇼. 죽을 만큼 패도 상관없으니까 화풀이하고 속 시원해지는 데 집중하면 돼.
아버지
우리 아들 Evol이 몸을 돌로 바꾸는 거라서 맷집이 좋거든. 웬만해서는 다치지도 않아.
남자
좀 깎아 주쇼. 이 샌드백은 때리면 손바닥까지 얼얼해서 별로 재미가 없단 말이야.
아버지
그럼 10위안에 열다섯 대! 이 이상은 안 돼!
아버지
조용히 해라. 울부짖지도 말고, 가시를 꺼내서 사람 다치게 하지도 마.
아버지
안 그러면 내가 널 물에 빠뜨려 죽여 버릴 테니까.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과거에서 의식을 억지로 떼어 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청년은 여전히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듯했다.
‘사랑’이 사라지기 전부터, 그는 이미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왔다.
고통은 사람의 의지를 무너뜨리고 존엄성까지 파괴한다.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영혼은 서서히 변형되고 뒤틀린다. 그러다 결국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몇 배나 더 잔혹하게 다른 사람에게 가하기도 한다.
대체 이 세계는 어느 순간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걸까?
나는 손끝에 힘을 모았다. 그리고 청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미래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울려 퍼지는 폭발음 속에서 나는 다시 그에게 눈을 돌렸다.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담지 않았다.
유연
나는 네가 누군지 알아.
나는 몸을 숙여 그의 목걸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목소리를 낮춰, 처음으로 미래에 관한 거짓말을 했다.
유연
그리고 네 미래도 볼 수 있어.
유연
이 게임에 계속 참가하면 넌 이틀 뒤 밤에 죽을 거야.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
……?!
청년은 공포에 질려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 눈에는 의심도 가득했다.
유연
믿지 못하겠다면, 1분 뒤에 폭발이 일어날 거야.
멀지 않은 곳에서 우르릉 하는 폭발음이 울렸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낯설면서도 익숙한 또 다른 감정을 발견했다.
공포였다.
유연
나를 따라와서 내 일을 도와줘. 그럼 네 미래를 바꿔 줄게.
유연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이 용서받는 건 아니야. 넌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게 될 거야.
나는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연
네가 갈 길은 스스로 선택해.
일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풀렸다. NW 대원의 ‘도움’까지 받으며 이런 식으로 ‘협박’한 끝에, 나는 두 사람을 더 ‘내 편’으로 만들었다.
유연
사실 이 게임의 모든 것은 Evolver들을 서로 싸우게 해서, 여러분이 방출하는 Evol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한 거예요.
유연
이 ‘가시로 이루어진 8자’ 문양 보이죠? 근처에 이런 문양이 새겨진 석판이 하나 있어요. 그 석판이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는 거예요.
유연
그곳에는 Evol 에너지가 아주 많이 모여 있어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서 한층 노골적인 무언가가 드러났다. 하지만 공포 역시 여전히 그들의 숨통을 죄고 있었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향해 오는 듯했다. 목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수많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 얼마든지 봐.
유연
세 사람은 함께 움직이세요. 서로를 지키면서 더 많은 참가자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세요.
유연
그래야 여러분도 살아남을 수 있어요.
정보와 동료. 이 죄악으로 가득한 세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널리 퍼뜨리고 활용할 가치가 있었다.
내 힘만으로 게임 전체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없다면, 이 게임 속에 존재하는 욕망들까지 끌어들여 내 목적을 위해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된다.
임무를 나누어 준 뒤, 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그 역시 게임에 짓밟힌 사람처럼 보였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주위에서는 높낮이가 제각각인 물기둥들이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능력의 세기도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앞서 했던 방법을 다시 사용했다.
NW 대원이 그를 제압한 순간, 기억을 읽는 Evol을 사용했다. 그러나 곧 굳어 버렸다.
익숙하면서도 기괴한 흰색 가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통에 찬 남자의 비명이 기억 속에 남은 유일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회백색 실험실. 누군가가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무언가가 끊임없이 그의 몸속으로 주입되고 있었다.
??
사흘 뒤 N8로 보내. 능력의 안정성을 시험해 봐야겠어……
……이게 뭐지? 이 남자의 기억은 지나치게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아래에 붙들려 있던 남자가 다시 힘을 폭발시켰다.
그 충격에 우리는 그대로 튕겨 나갔다. 나는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혼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자 깊은 한기가 밀려왔다.
분명 Joker의 헌터 게임인데, 어째서 Poseidon의 실험이 나오는 거지……?!
불길한 예감은 점점 더 짙어졌다. 남자가 폭주하면서 머리 위의 석조 기둥들도 끊임없이 무너져 내렸다.
유연
빨리 가요! 이 사람, 뭔가 이상해요!
너무 이상했다. 나는 그때부터 지하 통로를 돌아다니며 일부러 능력이 불안정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실험을 당했던 장면과 기억이 조작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는 한층 더 차가운 글자 하나를 발견했다.
‘NW’.
그 남자의 눈빛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생기 없이 죽어 있었다. 그는 마치 오직 제거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피비린내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눈앞에 나타나는 죄악을 그저 하나씩 제거해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는 여전히 불안정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내 곁의 NW 병사를 차갑게 제압해 바닥에 쓰러뜨린 순간, 나는 재빨리 그를 향해 마취침을 발사했다. 아주 짧은 틈이 생겼다.
유연
도망쳐요!! 우리는 저 사람을 이길 수 없어요! 빨리 뛰어요!!
나는 소리치면서 재빨리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죽음이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온 듯한 감각이 이전보다 훨씬 생생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기억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그의 상태라도 조금 더 관찰하고 싶었다. 두 세계가 존재하기에 찾아낼 수 있는 기회였다.
어둠 속에서는 방향조차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본능에 의지해 달리다가 마침내 어느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돌벽에 등을 기대고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숨소리마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을 세게 틀어막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마치 떠도는 유령처럼 주변을 끝없이 배회했다.
그러다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한 듯, 마침내 다시 멀어졌다.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애써도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꼭 맞잡았지만, 눈앞에서 그 손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두려워하지 마. 일어나.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나의 초라한 모습을 두드려 댔다. 내 나약함을 똑똑히 보게 만들고, 포기하라고 유혹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마치 운명마저 그 유혹에 동참하듯 목소리를 냈다.
??
사실 당신은 그냥 떠나도 됐어.
10-15 한 번의 이별 (一次别离)
*습광골목 (拾光巷)
엉망인 인생
-이 세상에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똑같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친구 A
……야, 너 또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거야?
친구 A
진짜 못 말리겠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왜 자꾸 네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거야?
친구 A
예전에는 그렇게 뛰어나고 의욕도 넘치던 애가……
친구 B
하하하하! 내가 예전엔 그렇게 괜찮았어? 난 기억도 안 나는데.
친구 B
그보다 너 말이야. 그렇게 날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면, 너도 똑같이 비참한 인생이 좀 나아지냐?
친구 A
널 불쌍하게 본다고?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친구 B
그럼, 나의 구세주님.
친구 B
그러니까 부탁인데 내 눈앞에서 좀 사라져 줄래? 안 그러면 술을 너랑 나눠 마셔야 하잖아. 나 꽤 인색하거든.
친구 A
……너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구나.
친구 A
이제 다시는 네 일에 참견하지 않을게. 네 마음대로 해.
친구 B
잘됐네. 나야 바라던 바지.
친구 A
그래? 그런데 넌 왜 울고 있어?
친구 B
내가 울어? 너무 기뻐서 그런가 보지. 행복의 눈물이야.
친구 A
……그렇구나.
친구 A
그럼 앞으로 알아서 잘 살아.
*구시가지 (旧城区)
슈퍼맨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어른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는다.
여동생
오빠, 아빠는 왜 아직도 안 와?
오빠
아빠는 돈 벌러 가셨어.
여동생
하지만 난 아빠가 보고 싶은데. 아빠가 만들어 주는 돼지고기 조림도 먹고 싶고.
오빠
우리 동생 착하지. 며칠만 더 기다리면 아빠가 돌아오실 거야.
여동생
……그럼 아빠랑 통화하고 싶어.
오빠
아빠는 지금 휴대전화를 쓸 수 없어서 전화도 못 해.
여동생
왜? 아빠는 어디에 있는데?
오빠
나도 몰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게임을 하러 간다고만 하셨어.
오빠
그 돈을 벌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큰 집에서 살고, 더 좋은 차도 탈 수 있대.
오빠
우리가 갖고 싶은 장난감도 아빠가 전부 사 오실 거야.
여동생
우와, 아빠 진짜 대단하다!
오빠
당연하지. 아빠는 슈퍼맨이니까.
여동생
맞아! 우리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슈퍼맨이야! 손바닥에서 불도 뿜는 슈퍼맨!
여동생
그럼 나도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야겠다. 아빠가 돌아오시면 기뻐하시게!
*중앙 관광 빌딩 (中心观光大厦)
공백기
-공백기와 일자리, 두 가지를 반드시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사 담당자
대학을 졸업하신 해인 11월부터 12월까지 경력 공백이 있으신데, 그동안 무엇을 하셨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원자
대학을 졸업한 해요? 저 졸업한 지 벌써 10년이나 됐는데요.
인사 담당자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기간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서요.
지원자
……그때는 아마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인사 담당자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지원자
10년 전 일이라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지원자
다만 그다음 해 초부터는 계속 정상적으로 근무했고, 지난주에 퇴사했습니다.
지원자
그 사이 9년 동안은 경력 공백이 전혀 없었습니다.
인사 담당자
알겠습니다. 다만 저희 회사는 직원의 계획 수립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경력과 활동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원자
……알겠습니다.
지원자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때는 계속 이력서를 제출하면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지원자
음료를 만드는 것 외에도 관련 계정의 운영과 관리를 담당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세한 설명이 됐을까요?
인사 담당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 담당자
그럼 오늘 면접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인사 담당자
관련 소식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10-16 내려다봄과 응시 (俯瞰与审视)
언제 나타났는지 허묵이 내 앞에 있었다.
그는 내 앞에 반쯤 쪼그려 앉아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살펴보았다. 그 눈에는 놀라움도, 걱정도 없었다.
유연
교수님이 왜 여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놀랐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어떤 추측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유연
……혹시 아까부터 계속 저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긍정처럼 느껴졌다.
허묵이 어떻게 내 위치를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NW 사람들에게 방법이 있다면, 허묵이라고 불가능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내가 벌인 일련의 시도와 행동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타나지도, 방해하지도 않은 채. 마치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의 관찰 대상이었던 것처럼.
유연
……이 게임이 줄곧 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허묵
알고 있었어요.
유연
그럼 이곳에…… 실험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세요?
허묵
생각하는 순서가 반대예요.
나는 멍하니 그의 말을 들었다. 서늘한 기운이 서서히 온몸으로 퍼졌고,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유연
그 말은…… 저 사람들이 사냥꾼 게임의 장소를 이용해서 실험을 검증하고 있다는 거예요……?
빛은 어둠을 갈랐다. 하지만 빛이 비춰 드러낸 것은 어쩌면 더욱 흉측한 얼굴을 한 진실일지도 몰랐다.

허묵
그들을 ‘사람’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안 돼요. 그들 자신조차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요.
허묵
이런 사람들은 예전에도 존재했고, 지금이라고 드문 것도 아니에요.
그의 시선이 나를 단단히 붙잡았다. 조금도 피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했다.
허묵
그들을 죄악이라고 표현할 건가요? 아니면 극단적이고 광기 어린 이단아? 미치광이들이라고 부를 건가요?
허묵
정말 당신이 맞서야 할 상대가 그들인가요? 이런 사람들이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이 존재할까요?
그는 세계를 하나하나 분리해 보였다. 마치 그의 눈을 빌려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는 시야를 내게 보여 주는 것 같았다.
허묵
이제 깨달았나요? 당신이 맞서야 할 상대는 Joker도, 실험을 하는 사람들도, 실험을 당한 사람들도 아니에요.
허묵
그들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 있어요. 증식하고 전염되는 힘이죠. 그 힘은 그들을 더욱 순수하게, 더욱 본능에 가까운 존재로 만들어요.
유연
……호기심인가요?
허묵
아니요. 기대하는 것을 그려 내는 상상력이에요.
인간이 품는 기대와 상상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만드는 벽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상상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기도 한다. 그것은 선악을 가리지 않고 미지의 영역을 찢어 길을 낸다.
유연
……그것만으로도 파괴가 일어날 수 있는 건가요?
허묵
순수함은 그 자체로 가장 직접적인 폭력이니까요.
어둠 속에서 허묵은 등불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만으로는 모든 것을 밝힐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역시 모든 것을 밝힐 생각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오만하고 무심하게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내게 보여 주었다. 마치 세계가 마땅히 존재하는 자신의 모든 모습을 내게 드러내는 것처럼.
사실은 곧 진리다. 그와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한 치의 자비나 동정도 없었다.
다만 빛이 그의 깊고 그윽한 눈동자에 닿자, 그 안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암류도 엿볼 수 있었다.
유연
왜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거예요?
그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손끝은 내게 아주 가까이 있었지만, 끝내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허묵
어쩌면…… 당신도 내가 그리는 어떤 상상 속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이것은 그가 숨김없이 드러내는 폭력이었다. 운명보다 한발 앞서 어둠 속에 한 줄기의 빛을 열어 두고, 그저 나의 선택과 대답을 기다리는 것.
유연
……제가 맞서 싸우려는 그 힘 안에 교수님도 있는 건가요?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등불이 꺼졌다. 세계는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고, 허묵 역시 그 어둠의 일부가 되었다.
허묵
아마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안에 있었을 거예요.
그 순간, 세계는 어두워졌지만 나는 오히려 그의 눈에서 무언가를 더 선명하게 본 듯했다.
나는 다시 한번 깊은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곱씹으며 몸을 숨기고 있던 모퉁이를 빠져나왔다.
어두컴컴한 통로 곳곳에서는 희미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 중에 밴 피비린내는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여러 차례 오가며 읽어 두었던 기억들을 더듬어 사람들을 피해 갔고, 계단을 따라 거대한 지하 건물 밖으로 나왔다.
높은 곳에 있는 플랫폼에서는 먼 곳까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저 멀리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하지만 발밑의 건물 안에서는 훨씬 많은 사람이 한 방향으로 모여들고 있는 듯했다.
내가 퍼뜨린 정보를 들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욕망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다른 수많은 장소에도. 그 안에는 나의 욕망도 있었다.
모두가 저마다 이루고 싶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밤하늘 아래에서 나는 고개를 돌려 허묵을 바라보았다.
유연
Evol 에너지가 계속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실험을…… 여러 가지 행동을 하고 있는 거죠?
Evol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분명 예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기존의 균형을 더욱 많이 무너뜨릴 것이다.
허묵은 그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마치 내가 문제의 정답을 맞혔다는 듯했다.
그의 등 뒤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안에는 부풀어 오르고 흉측하게 일그러진 수많은 상상이 숨어 있을 것이다. 거대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그것들은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느껴졌다.
유연
하지만 저는 제 힘이 얼마나 작은지 잘 알아요. 갑자기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될 수도 없고요.
유연
그런 제가 어떻게 이 사람들과 맞서 싸워야 할까요?
유연
……교수님 같은 천재와는 어떻게 맞서야 할까요?
그가 가볍게 웃은 듯했다. 다만 멀리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허묵
이곳의 많은 사람이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어요.
허묵
그런데 당신은 방금 꽤 잘해 내지 않았나요?
그가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검은 인영 몇 개가 갑자기 튀어 올랐다. 날카로운 살기를 품은 그들이 허묵의 등 뒤로 곧장 달려들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미처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허묵이 느긋하게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거대한 파도처럼 소리 없이 밀려 나갔다.
다음 순간, 허묵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들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날카롭고 투명한 얼음기둥 하나가 응결되었다.
자잘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얼음 끝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치 어두운 밤에 피어나는 하얀 불꽃놀이 같았다.
눈부시게 펼쳐지는 얼음은 소리 없이 그 모든 악의를 얼려 버렸다. 그 자리에는 깨끗하고 순수한 이채만이 남았다.
몽환적이면서도 차가운 얼음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빛은 허묵의 초연하고 오만한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수많은 음모와 도발이 너무나 쉽게 무너져 버렸다.
허묵은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오만하리만큼 태연하게 나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보여 주고 있었다.
달빛 아래 얼음 조각들이 다채롭게 반짝였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망설이고 있는 내 눈도 볼 수 있었다.
준비하는 동안 온 힘을 다해 생각하고 얻어 낸 답. 하지만 그 답으로 허묵 같은 사람에게도 맞설 수 있을까?
유연
……교수님은 제가 한 일이 그저 잔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 줄 알았어요.
미래를 이용해 참가자들을 속였다. 내가 가진 중요성을 이용해 NW 대원의 도움을 얻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 Joker의 목적을 알린 뒤 힘을 미끼로 그들을 유인했다.
허묵
힘을 가진 사람들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두려움을…… 그리고 의심을 가르쳤죠.
차가운 기운이 우리 주위에 가득했다. 순수하고 투명한 얼음 결정들은 평범한 자의 티끌조차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맑았다.
허묵
자료실에서 당신의 질문에 답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잘해 낼 줄은 몰랐어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마침내 허묵의 이끌림 속에서 어떤 답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연 무엇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걸까? 그저 힘일까? 아니면 그보다 단순하고 순수한 무언가일까?
힘은 세계에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그리고 힘을 향한 두려움은 세계를 얼마나 먼 곳까지 나아가게 할 수 있을까?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동시에 무언가를 더욱 굳게 붙잡게 되었다.
힘이 없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세계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한 힘이다——
힘을 가진 모든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면, 선한 사람들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힘을 가진 사람들을 장악하는 것.
악을 영원히 막아 낼 수 없다면, 적어도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모든 목적이 내가 원하는 답으로 향하게 만들겠다.
유연
교수님, 혹시 알아요? 어쩌면 바로 사랑의 소실 때문에 Evol 에너지가 줄어들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허묵
아주 흥미로운 가설이네요. 하지만 그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걸 어떻게 믿게 할 생각이죠?
유연
그들이 믿게 만들 필요는 없어요……
유연
‘의심’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허묵의 눈빛에 점점 더 짙은 흥미가 떠올랐다. 그 눈동자 속에서 나는 내 모습을 보았다.
유연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에는 허묵 교수님, 단 한 분만 계셔도 충분해요.
허묵
나를 믿게 만들고 싶은 건가요? 어떻게요?
그가 가볍게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달빛을 대신해 나를 감쌌다.
허묵
이미 사라진 추상적인 존재, 그리고 어쩌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일시적인 현상.
허묵
그런 것에 내 시간을 들일 가치는 없어요.
유연
아니요. 저는 이미 교수님의 의심을 얻었어요.
유연
‘사랑’에 관한 보고서도 이미 존재하고 있고요.
유연
저는 그저 교수님의 행동에 새로운 ‘정의’를 ‘붙여 주기’만 하면 돼요.
그는 잠시 멈칫한 듯했다. 그러더니 한층 더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허묵
이것도 ‘나’에게 배운 건가요?
유연
아마 이런 점에서는 교수님이 언제나 아낌없이 가르쳐 주시는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유연
의심해 보세요, 교수님.
호기심을 가진 모든 사람이 나와 함께 사랑을 찾게 하자.
10-18 마지막 실험 (最后一场实验)
그 후, 허묵은 다른 세계의 자신에 관해 내게 확인했다.
내가 그쪽 허묵과 타국에서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는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이더니, 나를 데리고 사냥꾼 게임의 현장을 떠났다.
나는 곧바로 특파팀에 상황을 전달했다. 그 잔혹한 지하 건물 안에서 적어도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랐다.
유연
저쪽 세계에서도 신고해야 하고, 그쪽 교수님께도 방금 생각해 낸 방법을 알려 드리려고요.
유연
어쩌면 두 세계에서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선택과 방향이 더 많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허묵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연구소 안으로 걸어갔다.
허묵
그럼 나중에 결과를 꼭 가져와 줘요.
유연
결과요?
나는 의아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허묵의 태도를 보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능력을 사용해 견인력을 따라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
그쪽 특파팀에도 전화를 걸어 신고를 마친 뒤, 나는 밤중에 우뚝 서 있는 연구소를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허묵을 만나면 답을 알 수 있겠지.
아명
허 교수님을 찾으시나요?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접힌 쪽지 한 장을 내게 건넸다.
아명
교수님께서 일주일 전에 말씀을 남기셨어요. 이곳에서 실험을 하실 예정이니, 유연 씨가 찾아오면 이걸 전해 달라고요.
유연
……실험이요?
나는 허묵이 찾아갔던 여러 실험실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종이에 적힌, 교외로 보이는 주소를 바라보았다.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도 눈앞에는 고요한 숲만 펼쳐져 있을 뿐,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유연
교수님?
나는 어리둥절한 채 오솔길을 따라 숲속 깊이 걸어갔다. 불빛이 보이거나 실험실이 있을 법한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걸음을 옮기던 중, 갑작스럽게 엄청난 한기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인 순간, 눈앞의 숲은 이미 눈으로 뒤덮인 설림으로 변해 있었다.
거센 눈보라가 하늘을 가득 메우며 휘몰아쳤다. 천지는 온통 새하얗게 물들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느껴졌다.
유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허묵에게 전화를 걸면서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듯했다. 눈보라가 그의 뒷모습을 가렸고, 그 모습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나는 그를 따라잡고 싶었지만, 갈수록 거세지는 눈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공간이 또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자 황금빛 밀밭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찬란한 햇살이 사방에 쏟아졌다. 방금 전의 눈보라는 마치 내가 꾼 환상처럼 사라져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익숙한 한 사람이 저 멀리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에는 황금빛 윤곽이 드리워져 있었다. 온통 따스한 색채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는 오직 혼자였다.
아무도 없이 외롭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유연
……허묵.
그가 무언가를 들은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저무는 태양이 그의 등 뒤에 걸려 있었다. 역광에 얼굴이 흐려졌고, 그의 모습은 거의 투명하게 느껴졌다.
그 후에는 나 역시 어느새 체스판 위에 발을 디뎠다가, 빛 한 점 없는 바닷속에 잠겨 버렸다.
나는 다급하고 혼란스러운 걸음을 옮겼다. 세계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언제나 홀로 걸어가는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아득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허묵
QUEEN 유전자에 대한 반응 검사…… 이전의 불안정한 증폭과 비교해, 현재는 증폭 양상과 강도 모두 무질서한 혼돈 상태를 보이고 있어……
허묵
유전자 발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표현형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어.
허묵
그녀보다 문제가 있는 건 Evol 샘플 자체야…… 현재 에너지가 고강도로 증폭되는 완전 진화 개체의 사례도 마찬가지고.
허묵
Evol이 가져오는 진화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재정의여야 해. 정의 자체에 결함이 있다면 진화 역시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어.
허묵
에너지의 강도는 계속 비가역적으로 감소하고 있어…… 그녀는 자신이 대가를 치렀다고 했지. 이 감소 현상 역시 그 대가 중 하나일까?
허묵
새로운 궤적과 규칙이 탄생하는 건 본래 엔트로피 감소의 결과여야 해…… 그런데 지금도 에너지는 대량으로 빠르게 방출되는 게 아니라 계속 감소하고 있어…… 궤적을 유지하는 데에도 여전히 에너지가 필요한 건가?
허묵
Evol이 정말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두 가지 모두 유전자 발현에서 드러날 수 있을까?
허묵
어쩌면 과거의 환경을 전면적으로 재현할 수 있을지도 몰라…… Evol이 지금도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상태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거야.
허묵
……유전자를 속이는 것……
그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교차하며 바뀌는 세계 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사유 자체가 이 세계를 이루는 본질인 듯했다.
바닷물이 그의 탄식을 덮쳤다.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그의 그림자를 뒤덮었고, 체스판 위의 말들은 그의 발걸음에 따라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유전자 발현'.
그가 하는 말은 그때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보았던 여자의 말과 달랐다 하지만 미간을 찌푸린 표정만큼은 너무나 닮아 있었다.
허묵은 정말로 ‘사랑’을 의심해 봤던 거구나.
그렇다면 이곳은 대체 무엇일까? 또다시 허묵의 실험으로 만들어진 특수한 모의 환경인 걸까?
교수님의 상상 속에서 세계의 진리는 어떤 얼굴로 나타날까?
그리고 교수님은 자신의 진리를 위해 무엇을 바쳐야 할까?
그가 세계에 던지는 질문을 따라 나 역시 머릿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모든 것이 따뜻하면서도 차가웠다. 무언가가 그와 함께 빠르게 고동치며 낮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쿵쿵.
쿵쿵.
내 심장 소리인가? 온갖 감각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어, 지금의 나는 둔해지고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눈보라가 밀밭을 뒤덮었다. 그리고 익숙한 그 모습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온몸에 눈을 뒤집어쓴 채 서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길을 걸어온 여행자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연
……교수님?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마치 흩날리는 눈 속에 함께 얼어붙은 것 같았다.
나는 그 역시 지금까지 스쳐 지나온 수많은 환영 중 하나일까 봐 너무나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가 천천히 발을 들어 한 걸음씩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가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그의 속눈썹 한 올 한 올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의 몸에는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차가운 손끝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마치 그가 아주 오랫동안 눈보라 속에 서 있었던 것처럼.
허묵
왔군요.
유연
……괜찮아요? 저를 오래 기다렸어요?
허묵
어쩌면 아주 오래 기다렸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당신이 나타나니, 그렇게 오래 기다린 것 같지도 않네요.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마치 내 몸 위로 내려앉는 또 하나의 눈송이 같았다.
유연
여기는…… 어떻게 된 거예요?
허묵
지금은 잠시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가 고개를 숙였다. 깊고 그윽한 눈동자에는 온통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허묵
나는…… 당신이 이곳의 혼란을 발견하면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유연
그럴 리가요. 교수님이 여기로 찾아오라고 하셨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죠.
유연
게다가 여기가 너무 이상해요…… 교수님 목소리도 여러 번 들리고, 교수님 모습도 계속 보였어요. 너무 걱정됐어요.
허묵
……
그는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쉬는 하얀 입김이 이따금 내 눈썹과 눈가를 스쳤다. 그 때문인지 지금 그의 모습은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허묵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허묵
아니면 대답 대신…… 당신을 안아 주는 편이 좋을까요?
내가 멍하니 굳어 있는 사이, 조금 차갑고 뻣뻣한 두 팔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따스함과 한기가 동시에 온몸을 감쌌다. 어딘가 현실 같지 않은 다정함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평소와 달리 솔직하면서도 서툴렀다. 나는 이것이 위장인지, 아니면 또 다른 시험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내가 꾸는 환상일지도 몰랐다.
허묵
몸이 많이 굳어 있네요. 지금의 나는 당신을 안을 수 없는 건가요?
유연
……그런데 지금의 교수님은 왜 저를 안고 싶으신 거예요?
세상에는 온통 눈이 흩날렸다. 마치 심장 뛰는 소리만이 남은 듯했다.
허묵
내 머리와 몸이 모두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허묵
왜냐하면…… 당신의 모습이 보였으니까요.
10-19 온몸으로 세계를 향해 (以身向世界)
천지는 고요한 흰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를 끌어안은 사람은 이토록 가까이 있었지만, 그 품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수많은 침묵과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아마 이것 역시 그의 실험일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실험의 일부일 테고.
그를 꼭 끌어안아야 할까? 아니면 이 환상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러야 할까?
지금 내가 망설이는 것마저 그가 관찰하는 대상일까? 그가 조금 전에 했던 대답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랑이 말을 잃은 것은 나에게도 의심을 가져다준 듯했다.
그 의심 때문에 나는 이 자리에서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너무나도 생생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를 조심스럽게 마주 안았다.
손끝에 닿은 그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그 역시 이런 접촉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나를 감싼 두 팔이 다시 조금 더 단단히 조여 왔다.
온 세상에 서리와 눈이 가득한 가운데, 오직 그만이 온기를 품고 있었다.
허묵
따뜻하네요.
귓가에 가벼운 탄식이 들려왔다. 길게 이어지는 한숨 같은 그 목소리에 나 역시 저도 모르게 그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마치 언제나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사람을.
이 모든 것이 그의 실험이자 관찰의 일부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와 서로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가 허묵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서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또다시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 잔인한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난 뒤, 나는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교수님…… 또 스스로에게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허묵
……
허묵은 눈보라 속에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허묵
나는…… 아주 특별한 감각을 느꼈어요.
허묵
당신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감각 때문에 줄곧 당신이 보였어요.
허묵
그런데 막상 당신을 만나자 그 감각이 사라진 것 같았죠. 대신 평온함, 뜨거움, 차가움 같은 감각으로 변했어요……
허묵
모든 것이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데, 당신은 그 혼란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 같아요.
그의 손은 몹시 차가웠다. 그 손이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허묵
지금의 내 모습이 ‘■(사랑)’인가요?
바람 소리가 하마터면 그의 말을 집어삼킬 뻔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코끝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유연
그건 한때 존재했다가 사라진 것일 뿐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다시 검증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유연
……Evol 에너지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가요?
허묵
두 현상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요.
유연
그럼 그 검증에는 교수님의 사적인 바람도 담겨 있나요?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린 듯했다. 그리고 나를 깊이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망설이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방식으로 말없이 부정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허묵
그렇다면 지금의 내 모습이 ‘■(사랑)’인가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보라 속에서 같은 질문을 다시 한번 반복했을 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허묵이 웃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묵
역시 뇌 신호를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네요. 유전자를 속일 수도 없고, 심지어 당신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조차 얻어 낼 수 없으니까요.
나는 순간 굳어 버렸다.
그제야 뒤늦게 그가 자기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줄곧 유전자와 관련된 온갖 지식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자기 몸을 대상으로 실험하기 위해서.
유연
교수님……
허묵
지금은 더 이상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는다는 그 뇌 영역을 기억하나요?
허묵
그 영역이 과거에 보였던 활동을 재현했어요.
그의 눈빛은 불꽃처럼 강렬했지만, 그 안에는 무정할 만큼 냉담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허묵은 자신이 기대하는 것을 향해 가장 단호하게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잔혹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결연함을 내게 보여 주었다.
유연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세요?!
유연
만약 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교수님은……!
그 순간, 눈보라가 더욱 거세졌다. 그 바람은 내 분노를 한층 더 고립되고 무력한 것으로 만들었다.
휘몰아치는 것은 눈보라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장면들이 혼란스럽게 뒤집히며 밀려왔다.
수많은 세계의 파편이 동시에 서로를 짓누르고 겹쳐지는 듯했다. 마치 세계가 붕괴한 뒤 남은 화면의 잡음처럼, 파편들이 미친 듯이 번쩍였다.
허묵은 부서진 그림자들 한가운데 서서 눈앞의 모든 것을 담담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인 듯했다. 그의 손끝에서 빛이 나타났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는 모양이었다.
허묵
더 혼란스러워진 것 같네요.
그는 조용히 결론을 내렸다. 동시에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이 혼란스러운 공간은 허묵의 Evol 때문에 생겨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Evol은 스스로에게 가한 실험 때문에 혼란에 빠져 폭주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 몹시 이상했다. 지금 그의 모습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위화감이 깃들어 있었다.
허묵은 자기 자신에게 잔인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연
……교수님은 자기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 무모한 위험을 감수할 분이 아니잖아요.
유연
……아니.
나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러자 허묵이 몇 번이고 했던 말과, 몇 번이고 세계를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유연
교수님은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 질문을 듣자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마치 제자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만족한 선생님 같았다.
문득 다른 세계에서 이곳으로 ‘도약’하기 직전, 허묵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유연
다른 세계의 교수님이 결과를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유연
그분은 교수님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계셨던 거죠…… 왜요?
허묵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깊은 눈동자 속에서는 어두운 물결이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허묵
가요. 그리고 ‘나’에게 전해 줘요.
허묵
결과는 실패였고 —— 이 길은 잘못됐다고.
허묵
하지만 어쩌면 내게는 무척 특별한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유연
……그게 무슨 뜻이에요?
무언가 잘못된 것이 내 판단을 흐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허묵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한 조각의 눈이 되고, 바닷물 한 방울이 되고, 밀밭에서 흩날리는 밀 이삭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함으로 변해 갔다.
그는 자신의 모습조차 유지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도 마치 어떤 자유를 얻은 듯했다.
유연
……제가 뭘 잘못한 거예요?! 그 질문들의 답은 또 뭔데요?!
유연
제가 뭘 놓친 거예요? 왜 교수님은……
따뜻한 기운이 내 주위를 감쌌다. 가장 단순한 포옹처럼.
그가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지금 이 손을 놓으면 영원히 그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유연
……말해 줘요, 교수님.
그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그 안에는 온통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무언가가 그 눈동자 속에서 번지고 자라나고 있었다.
과거 그가 나를 바라보던 수많은 순간의 눈빛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 역시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듯했다.
허묵
처음에 내가 건 전화, 받지 못했었죠?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처음 휴대전화에서 발견했던, 그가 남긴 부재중 전화 한 통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점차 사라져 갔다. 세계에는 오직 밝고 새하얀 빛과 그의 마지막 목소리만이 남았다.
허묵
나도 당신이 보낸 문자를 받았으니까요.
10-20 사심 (私心)
그랬다. 그 역시 그녀의 문자를 받았다. 이상한 어지럼증을 느꼈다고 적혀 있던 바로 그 문자였다.
그렇다면 그 시점에는 세계에 아직 이상이 생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에게는 문자를 받았던 기억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처음 세계를 넘나들기 시작한 지점은 B.S.의 사무실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어지럼증을 느꼈을 때가 세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일 가능성이 높았다.
모어 교수는 연모시의 혼란 때문에 도착 일정을 미뤘다. 그리고 그 기간은 정확히 일주일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소한 선택들이 세계에 서로 다른 모습과 방향을 만들어 낸 것이다.
시공간 접힘에서 발생한 미세한 시간 차이——다른 세계의 자신도 그녀의 설명을 듣고 전화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이 핵심적인 정보를 전달한 것이겠지.
저쪽 세계가 바로 그녀의 출발점이었다.
그렇다면 이쪽 세계는……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생겨난 복제된 세계인가?
허묵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17년 전의 그들이 사용했던 방법과 비슷했다. 진짜 옛 터를 감춰 놓았던 것과도 같았다.
다만 그때는 거울상이었고, 이번에는 완전한 복제라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 세계의 시공간성과 선택의 분기를 늘리기 위해서인가?
그들은 수렴되어 버린 세계선을 다시 열려는 것일까?
그제야 그는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드러난 의미를 조금이나마 음미할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몰랐다.
덕분에 가장 위험한 방법을 검증해 볼 기회를 얻었으니까.
좋은 일이었다.
아니. 본질적으로는 역시 그녀 덕분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특별했다.
두 세계를 연결할 수 있었고, 그녀가 가져온 정보 덕분에 이쪽과 저쪽의 자신 모두 빠르게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운명의 나비가 날개를 펄럭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어떤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운명을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진실한 반응. 진실한 실패. 설령 그 끝에 파멸과도 같은 진짜 죽음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그런데도 허묵에게는 여전히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었다.
세계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고, 눈보라도 더욱 거세졌다. 그는 드물게 피로를 느꼈다.
인위적으로 자극받은 신경 신호가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심장에도 간헐적인 통증이 일었다.
갈망과 평온을 동시에 품은 욕구가 이따금 그를 뒤흔들었다. 그 욕구는 그를 일어서게 만들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이곳에 태연하게 누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했다.
허묵
이것이 ‘■’이 뇌에서 일으키는 반응과 비슷한 것일까요?
하지만 그는 이 반응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일련의 조작과 촉진 과정으로 인해 모든 것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다.
그래도 결과는 저쪽에 전달되었다.
이 역시 좋은 일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마지막 눈빛이 떠올랐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까?
가슴에서는 통증이 간헐적으로 밀려왔다. 그러나 동시에 무언가 충족된 욕망이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내 실패를 완수했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당신의 얼굴까지 보았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것만으로도 죽음은 평온한 얼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아직도 당신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눈앞에 그녀가 자신의 손을 붙잡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서툴지만 진실한 마음이 담긴 눈동자도 보였다.

그때 문득, 나풀거리며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죽은 듯 고요한 세계에서 나비는 너무나 연약하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으로 보였다.
나비는 그의 꿈속에서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이상한 생명체였다.
그녀처럼.
허묵
나를 위로하러 온 건가요?
??
……허묵……!
허묵
……아니면 당신도 이 눈 속에서 나와 함께 잠들고 싶은 건가요?
허묵
어쩌면 당신 역시 내 환각일지도 모르겠네요.
??
……허묵!!
허묵
……그런데 왜 아직도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요?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물었다.
나비가 그녀의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유연
허묵!!!
눈밭에 누워 있는 허묵은 돌아갈 곳을 잃은 낙엽 한 장 같았다.
그는 이미 모든 힘을 잃어버린 듯했다.
그저 허둥지둥 달려와 자신의 곁에 주저앉는 초라한 내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꼭 붙잡아 따뜻하게 해 주려 했다.
허묵
나는 당신을 떠올려서는 안 됐어요. 당신도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고요.
평온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호기심과 혼란이 떠올랐다. 마치 운명에 질문을 던지는 듯한 표정이었다.
유연
하지만 교수님을 여기 혼자 둘 수는 없어요.
그는 여전히 자신의 꿈속에 있는 듯했다.
아무도 없는 눈보라 속에. 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댔다.
그의 눈동자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었다.
유연
허묵, 저는 지금 교수님의 꿈속에 있어요.
허묵
하지만 나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유연
왜요?
허묵
당신은 내 운명을 망가뜨릴 테니까요.
나의 선택 밖에서, 나의 기대에 새로운 망상과 두려움을 더하고, 나의 상상 속에 당신이라는 존재를 보태니까.
분명 거부하고 싶으면서도 여전히 궁금했다. 여전히 손을 뻗어 닿아 보고 싶었다. 마치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수수께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유연
하지만 꼭 그렇게 거창한 일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유연
이 꿈속에는 교수님과 저, 둘뿐이니까요.
차갑고 무심하던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마침내 무언가가 끊임없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에 드디어 내 모습이 비쳤다.
허묵
당신이…… 나를 외롭게 하니까요.
뇌는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었다. 전기 신호와 화학 신호가 끊임없이 정보를 전달했고, 결국 그 역시 굴복하게 만들었다.
먼 곳에서 바닷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바닷물은 설원을 덮으며 그가 알지 못하는 풍경을 펼쳐 놓았다.
나는 눈시울이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참지 못하고 그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유연
교수님은 정말 거짓말쟁이예요.
유연
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부터…… 아니, 처음부터 이 세계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그랬기에 그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지칠 줄도 모르고 자기 자신마저 하나의 가능성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는 너무나 똑똑했다. 아주 작은 단서만 있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낼 만큼.
그는 알고 있었다. 다른 세계의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허묵의 힘을 안정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를 끌어안는 것밖에는.
허묵은 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진지하게 느끼려는 듯했다.
어쩌면 내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어떻게 자신을 찾아냈는지 묻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저 서툴게 다시 달려왔을 뿐이었다.
끊임없이 이 세계를 헤매며 그의 모습을 찾아다녔을 뿐이었다.
그러다 그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허묵
이 단 한 번뿐인 경험도 꽤 흥미롭네요.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투과해 어딘가 훨씬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허묵
예전에 내가 당신을 바라볼 때마다,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요?
허묵
지금 느끼는 이것도 ‘■(사랑)’은 아닌 것 같지만요.
파도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밀려온 바닷물이 설원을 부드럽게 스쳤다. 마치 침식하는 것 같기도, 끌어안는 것 같기도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작은 눈사람 하나가 외롭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묵도 내 시선을 따라 그 눈사람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 역시 어쩔 도리가 없는 듯했다.
그는 이토록 생생하고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허묵이었다. 짓궂으면서도 고집스러운 그 바보.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유연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작은 눈사람 곁으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곁에 쌓인 눈을 모아 그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눈사람 하나를 더 만들어 세워 놓았다.
유연
이제 저 눈사람도 혼자 바다를 바라보는 게 아니에요.
나는 웃으며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뒤통수에 붙어 있던 센서들을 모두 떼어 냈다.
그런 다음 조금 전처럼 그를 다시 품에 안아 일으켰다.
유연
그럼 지금 저를 바라볼 때도 아까와 똑같은 기분이 드세요?
그의 머릿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각의 여운이 여전히 맴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다시 조용하고 평온해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다시 차가운 눈밭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랫동안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속한 바다가 그의 발치로 밀려왔다.
바다는 마치 한 끗 차이밖에 나지 않는 곳에 있으면서도, 더없이 멀리 떨어진 세계 같았다.
바다 너머에는 심연이 있었다.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떤 따스함도 느껴졌다.
그 온기가 그를 유혹하는 듯했다.
그녀의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게 만들었다.
유연
교수님, 지금은 어떤 감정이 드세요?
허묵
어쩌면…… 아쉬움일지도 모르겠네요.
무언가가 바로 지척에 있는 세계에 존재하는 듯했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어떤 먼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 자신과 파멸을 대가로 바쳐서야 겨우 다가갈 수 있었던 진리의 경계. 그러나 그는 그곳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같은 길을 다시 걸을 수도 없었다. 다시 한번 시도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단 한 번뿐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아름다움이 그의 손안에 있었다.
허묵
괜찮아요. ‘나’ 역시 다른 길을 따라 언젠가 이곳에 도달할 거라고 믿으니까요.
그러니 이 순간의 감각만큼은 다른 세계의 자신에게 전해 주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는 마침내 졸음을 느꼈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그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멀고도 아름다운 모습. 마치 운명의 나비 같았다.
마침내 어둠마저 그녀와 함께 그를 끌어안았을 때,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유연
교수님이 찾아낸 이 모든 것이 정말 ‘사랑’이면 좋겠어요.
눈보라가 마침내 멎은 듯했다.
10-22 무르익는 결실 (酝酿的果实)
숲이 마침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을 때, 이 실험도 끝을 맞이한 듯했다.
나무 사이로 금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햇살이 쏟아져 내려, 겹겹이 우거진 가지와 잎사귀를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저 멀리 여명이 밝아 오며 대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허묵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는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고, 지나치게 많은 힘을 소모한 상태였다. 그의 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평온하게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유연
그렇게 오랫동안 애썼으니까, 이제 푹 자요.
나는 그의 눈썹과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손을 내려놓았다. 병원을 나온 뒤, 구석진 곳에서 힘을 발동해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처음 출발했던 세계로 돌아갔다.
나는 처음부터 잘못 알고 있었다.
새벽빛이 도시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나는 다시 허묵의 연구소를 찾았다.
실험실에 들어서자 허묵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유연
교수님, 정말 대단한 거짓말쟁이네요.
그를 보자 나도 모르게 분한 마음이 들어 이를 악물었다.
유연
다른 세계의 교수님한테도 한마디 했으니까, 교수님도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유연
두 분 다 똑같으니까요.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이내 오만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허묵
나는 당신을 속인 적이 없어요. 아마 ‘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허묵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내용을 가볍게 훑어보더니 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었다.
허묵
당신의 모습을 보니, ‘나’는 실패한 모양이군요.
허묵
확실히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방법이지만, 결과를 검증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죠.
나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그저 평범한 배양 접시 하나, 흔하디흔한 실험 표본 하나를 소모한 일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어쩌면, 그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기꺼이 자기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유연
만약 이쪽이 다른 세계였다면, 그 실험을 한 사람은 교수님이었겠죠.
그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명백한 인정에 가까웠다.
무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정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채.
허묵
어디, 이야기해 보세요.
유연
……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가늘게 떴다.
유연
……교수님은 아주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어요.
유연
제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 감정 때문에 자꾸 제 모습이 보였다고요.
유연
그리고 모든 것이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울 때도, 제가 있으면 그 혼란이 가라앉는 것 같다고 했어요.
허묵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턱을 살짝 들었다. 마음속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승리감이 피어올랐다.
유연
그리고 외로움을 느꼈다고도 했어요.
허묵
……
무언가가 그의 견고한 평정심을 깨뜨렸다. 평소보다 확연한 불쾌감과 초조함이 드러났다. 마치 어린 여우가 다시 털을 곤두세운 것 같았다.
허묵
당신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유연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교수님이 스스로 허락한 거예요.
유연
‘사랑’에 반응하는 뇌의 활동을 직접 재현한 것도 교수님이고요.
허묵
……
나는 그의 눈 속에서 어떤 감정이 본능적으로 싹트고, 격렬하게 번져 나가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호기심을 자극하고, 분노까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 마치 그 실험을 직접 한 사람이 자신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허묵
그렇군요. 그렇다면 실패했더라도 ‘나’는 몇 가지 결론을 얻은 모양이네요.
그는 고개를 숙여 서류에 무언가를 적었다.
유연
그 밖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물어보지 않을 거예요?
허묵
이미 결과가 명확해졌으니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생략해도 되겠죠.
허묵
게다가 당신도 그 이상은 알지 못할 테니까요.
나는 잠시 멍해졌다. 애써 부리던 허세를 그가 단숨에 꿰뚫어 본 것이다.
사실 그랬다. 허묵이 센서를 떼어 낸 뒤, 마지막으로 말한 감정은 그저 아쉬움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짐짓 여유로운 척 턱을 들고 그를 떠보았다.
유연
꼭 그렇지만도 않을 텐데요?
돌아온 것은 가볍고도 오만한 웃음소리뿐이었다. 그는 마지막 글자를 적어 넣은 듯 서류를 덮었다.
차가운 눈동자에는 탐구하려는 빛이 담겨 있었지만, 그보다 짙은 것은 무심함이었다.
허묵
나라면 그런 단 한 번뿐인 순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을 테니까요.
허묵
결론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직 ‘나’만의 답이겠죠.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결국 이번에도 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대가 허묵이라면 지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얻으려는 승리가 반드시 그를 이기는 것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연
다른 세계가 그렇게 혼란스러운 것도, 그 세계를 만들어 낸 사람이 어떤 답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겠죠.
허묵
그곳은 혼란스러운 유원지나 다름없어요. 누구도 주도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서류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묵
하지만 내가 당신이라면 그 세계에서 더 많은 가능성과 실패를 검증할 방법을 찾아볼 거예요.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처럼 그 세계를 그저 우연히 존재하게 된 하나의 ‘만약’으로 여길 수 없었다.
나는 눈앞의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마음속에 맴돌던 질문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유연
만약 교수님이 줄곧 믿고 추구해 온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면요? 앞길이 막막하기만 하다면……
유연
모든 노력이 결국 물거품이 된다면요? 평생을 바쳐 증명해 온 것이……
유연
그저 하나의 오류에 불과했다면요.
나는 진지하게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유연
그렇다면 교수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는 잠시 멈칫한 듯했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에서 오만함도, 분노도 사라졌다. 그곳에는 마치 자비와도 같은 평온함만이 남아 있었다.
허묵
그렇다면 그 ‘오류’를 진리 앞에 바치겠어요.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찰나, 그가 바라보게 될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그곳에 진리가 있을까?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어떤 답을 얻게 될까?
이 모든 것 역시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만약’에 불과했다.
본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 가정이 실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역시 반드시 다른 길을 통해 그곳에 도달할 것이다——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먼 곳까지.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가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를 부추기고, 미묘하게 그의 궤도를 어긋나게 하며, 심지어 본래의 방향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선택이었다.
끊임없이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예측할 수 없는 반응과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선택.
하지만 그 역시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자신이 가하는 폭력 앞에서 그녀가 선택하도록 만들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모든 것이 서로 얽혀 버린 듯했다. 이제는 어느 쪽이 처음 날갯짓을 시작한 나비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허묵이 시선을 내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유난히 호기심 어린 눈빛을 띠며 내게 질문했다.
허묵
만약 모든 변화를 일으킨 근원이 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허묵
이 세계에서 최초의 나비가 처음으로 날개를 움직이게 한 것이 있다면.
허묵
당신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유연
……
나는 눈을 깜빡였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어떤 답이 마음 깊은 곳에서 저절로 떠올라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유연
‘사랑’이겠죠.
그가 멈칫한 사이, 나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역시 차갑기만 한 손끝을 잡았다.
유연
제가 이 글자를 쓰는 법을 알려 줄게요.
두꺼운 유리벽 너머로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복도로 쏟아지는 조명 아래, 한 남자가 건네받은 보고서를 펼쳤다.
기괴한 흰색 가면에는 창백한 빛이 어렸지만, 그 아래에 감춰진 의미심장한 미소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Poseidon
허묵이 ‘A-I’를 연구하고 있다고? 게다가 그게 Evol 에너지의 감소와 관련이 있다는 거야?
Poseidon
호오? 그게 뭘까?
끝없이 이어진 회색 공간에 차가운 백색 조명이 드리워져 있었다.
실험복을 입은 남자가 실험실에서 나와, 곁에 있던 NW 병사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
이게 뭐지?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듯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서류를 펼쳐 내용을 훑어보았다.
???
‘A-I’……? 조사해 봐.
세계 곳곳에서 이와 비슷한 목소리들이 잇따라 들려왔다.
수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어느 과학자
응? ■(사랑)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