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사랑)의 총아
미래는 두려움으로 맞설 것이 아니고 과거는 그리워하기엔 부족하다.
6-1 초대장
"발신자: 이택언."
편집감독A
유연 대표님, 이건 토론 프로그램 게스트 후보 명단입니다. 비즈니스팀에 평가 조사를 맡겨뒀어요.
편집감독A
이 몇 명은 화제성도 좋고 가성비도 나쁘지 않아요. 캐릭터 설정안은 비고란에 적어뒀습니다.
유연
우선순위 조정해주세요. 관련 전문 배경이 있는 게스트부터 먼저 정리해서 30분 안에 저한테 주세요.
유연
그리고 업계 전문가 선별 결과도 부록으로 붙여서 섭외 예정 게스트 명단에 넣어주세요.
제작B
유연 언니, 장소 쪽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효과가……
유연
예상만큼 완성도가 안 나온다는 거죠?
유연
고은 씨한테 몇 명 받아서 바로 현장으로 보내 직접 소통하게 해주세요. 세부 사항은 조금 조정할 수 있지만 전체 일정에 영향이 없어야 해요.
편집감독C
사장님, 저희 쪽은 화예 금융센터 관련 후속 보도를 계속 추진해도 될까요?
편집감독C
이건 5분 전에 정부에서 발표한 공고예요. 경제특구로 특별 승인된 그 작은 섬이 곧 정식으로 운영에 들어간다고 해요.
유연
진행하세요. 최대한 빨리 인터뷰 원고 작성해서 저한테 확인받고, 오늘 퇴근 전까지 화예 쪽에 전달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유연
그 전에 먼저 화예 담당자 쪽 분위기 파악해두고 최신 진전 있으면 언제든 저한테 공유해 주세요.
유연
아, 그리고 법무팀 쪽에도 화예가 최근에 다른 소송 걸린 거 없는지 다시 확인해달라고 해주세요. 필요하면 리스크 평가도 하고요.
유연
여론 쪽은 몇 명 더 붙여서 지켜보게 하고 개입이나 유도가 필요한지 판단해 주세요.
오후의 햇빛이 창문 위로 눈부신 빛을 접어냈다. 도시는 여전히 분주했다. 희미하게 차들의 소음이 들려왔다.
점심시간이 이미 지나고 나서야 나는 조금 지친 모습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문이 잠기는 순간, 그제야 소란과 처리해야 할 일들을 잠시 문밖에 남겨둔 것 같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들이 하나씩 결정을 기다렸다. 나는 한순간도 멈추지 못하고 여러 곳을 오갔다. 충실하고 바쁜 시간이었다.
토론 프로그램 관련 일은 안정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고아원 아이들에게도 위험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역외 금융센터도 점차 완공되어가고 있었다. 적절한 홍보와 사전 분위기 조성이 시급했다——금융과 관련된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변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익숙한 통증이 흐릿한 장면들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나는 미간을 살짝 문지르며, 이런 갑작스러운 광경들에 점점 더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지난번 화재처럼 긴급한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또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 불안정한 상태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여러 일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어, 몸을 빼기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결국 프로그램이 얼마나 큰 영향을 가져올 수 있을까. 사실 나도 마음속에 확신은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저 나에게 속한 어떤 닻을 단단히 붙잡고, 나만의 어떤 대답을 완성하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역외 금융센터에 관해서는……머릿속에 저도 모르게 익숙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결국 나는 웃으며 내 머리를 가볍게 콕 찔렀다.
유연
이상한 능력아, 조금만 더 기다려. 이 일들 다 해결하고 나면 반드시 시간 내서 제대로 처리할 테니까.
"똑똑——"
갑작스럽게 들려온 노크 소리가 흩어지던 생각을 끌어당겼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연
무슨 일이에요?
웨이웨이
사장님, 연모시 금융감독기관의 푸 총재라는 분이 사장님을 찾는 전화를 주셨어요.
유연
……푸 총재?
나는 저도 모르게 예전에 이택언 사무실에서 그와 날카롭게 대치하던 사람, 그리고 Zero의 기억 속에서 봤던 "시공관리국"의 혼란스러운 장면을 떠올렸다.
심장이 반 박자 멈추는 것 같았다. 곧바로 머릿속에서 경보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왜 나를 찾는 걸까?
내 안색이 조금 무거워진 것을 본 건지 웨이웨이가 확신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웨이웨이
전화 돌려드릴까요? 아니면 안 계신다고 할까요?
유연
……
유연 제작사와 금융감독기관 사이에는 아무런 왕래가 없었다. 이 푸 총재가 공적인 일로 나를 찾을 이유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다소 위험한 사람이 이렇게 당당하게 회사 전화로 연락해온 이상 섣불리 거절하면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저울질한 끝에,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일단 연결해주세요.
푸 총재
유연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지난번 이 총재님 쪽에서 대표님 시간을 몇 분 빌리고도, 계속 인사드리러 올 틈이 없었네요.
푸 총재
최근 화예가 작은 섬에 세운 경제특구가 드디어 운영을 시작했고, 곧 포럼도 열 예정이에요.
푸 총재
아마 대표님 쪽에도 이미 초대장이 도착했겠죠?
전파를 타고 전해지는, 제멋대로 친근하게 구는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눈앞에 그 보석 벌새 브로치가 반사하던 차가운 빛이 다시 스치는 듯해, 나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경제특구 초대장? 그게 뭐지?
나는 머릿속으로 경제특구 관련 자료를 빠르게 훑었다. 확실히 초대장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아직 화예 측에서 이 일을 전달할 시간이 되지 않은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확인할 기회도 시간도 없었다. 이 사람 앞에서 빈틈을 보일 수도 없었다.
그가 금융센터에 실제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인 것 같았기에, 짧게 생각한 뒤 나는 예의 바르고 신중한 태도를 꾸며냈다.
유연
푸 총재님께서 갑자기 그 일을 꺼내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푸 총재
별건 아닙니다. 마침 제 쪽에 아직 몇 자리가 남아 있어서요.
푸 총재
제 손에 두고 쓰지 않는 것도 낭비라, 유연 대표님께 작은 호의를 드리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푸 총재
화예는 지금 분명 포럼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을 테니까요. 혹시 정말 무슨 누락이 있다면, 예비 방안 정도는 될 수 있겠죠.
내 미간은 점점 더 깊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래도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유연
우선 그 "혹시"라는 상황 자체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점은 둘째 치더라도요.
유연
유연 제작사는 모든 돌발 상황에 대한 자체 대응책을 갖추고 있습니다.
유연
푸 총재님의 호의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전화 너머에서 상대가 아주 가볍게 웃었다. 이 대답이 예상 밖은 아니었다는 듯했다.
푸 총재
어떤 것은 하나 더 있는 편이 하나 부족한 것보다 낫죠. 초대장은 이미 유연 제작사의 비즈니스 메일로 보냈습니다.
푸 총재
나중에 이 총재님 만나시면 제 대신 안부 전해주시죠.
푸 총재
바쁘실 테니 이만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거의 전화가 끊기는 것과 동시에 메일 수신 알림이 제멋대로 내 화면 위에 떠올랐다.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마음속 불쾌감이 계속 피어올라 부풀어갔다.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온 타이밍과 말투 모두 나를 불편하게 긴장시켰다.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화예보다 한발 먼저 도착한 그 초대장도 유난히 불쾌했다.
나는 메일을 열어보지 않았다. 잠시 생각한 뒤, 익숙한 번호 하나를 눌렀다.
길게 늘어지는 대기음이 귓가에서 한 번씩 울렸다. 이 시간을 더 길게 늘여놓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어디를 바라보지 않았다. 컴퓨터 화면에서 번진 빛이 부드러운 빛무리를 만들어냈다.
세계가 '사랑'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이 기다림의 대기음에도 어쩌면 이유가 붙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은 여전히 가볍게 내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
"뚜——"
"뚜——"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긴 건지, 아니면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이 기다림이 모든 것을 길게 늘린 건지.
유연
하아……
계속 "통화 중" 화면만 유지되는 것을 보며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위겸한테 전화해야겠다.
혹시 모르니, 그의 메일에도 한 통 보내두자. 언젠가는 보겠지.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통화가 끊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통화 중"이라는 글자가 갑자기 통화 시간으로 바뀌었다——
다음 순간, 종이가 넘어가는 차가운 사각거림과 함께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귓가에 내려앉았다.
이택언
말하세요.
인사도, 질문도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한마디만으로도, 나는 조금 놀라 멍해질 만큼 기뻤다.
유연
와, 어떻게 받았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상대는 내 말에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심지어 눌러두지 못한 약간의 불쾌감마저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택언
……그럼 끊겠습니다.
유연
잠깐, 잠깐만요. 진짜 중요한 일로 전화한 거예요.
나는 그가 정말 전화를 끊을까 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유연
방금 금융감독기관의 그 푸 총재가 갑자기 저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손끝과 종이가 스치는 미세한 잡음이 순식간에 멈췄다.
옷감이 스치는 아주 작은 소리 뒤로 짧고 또렷한 "딸깍" 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울렸다. 아마 그가 만년필 뚜껑을 닫은 것 같았다.
이택언
계속하세요.
유연
일부러 저한테 "인사"를 하러 온 것 같았어요. 그리고 포럼 초대장도 보내왔고요.
유연
자기 쪽 자리를 이용해서 경제특구 섬에 오라고 했어요.
이택언은 바로 말하지 않았다. 한참 뒤, 극도로 억제된 숨소리 하나가 돌아왔다.
머릿속에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어떤 골치 아픈 일을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 떠올랐다.
이택언
알겠습니다.
이택언
그는 특수한 신분입니다. 지나치게 접촉하지 마세요.
이택언
이 일은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당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짧고 단호했다. 말이 끝난 뒤 다시 들려온 서류 넘기는 소리마저 조금 더 빨라져 큰 압박감이 전해왔다.
이택언의 기분은 상당히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마주하고 있자니 나 역시 그와의 거리를 어떻게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망설인 끝에, 나는 그래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연
당신이 말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이택언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계속하면 됩니다.
유연
하지만 그 사람 위험한 거 아닌가요? 조금 주의해야 하지 않아요?
이택언
함부로 추측하지 마세요.
그가 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참지 못하고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유연
저한테 숨길 생각 하지 마세요.
유연
저는 Zero라는 사람의 기억을 봤어요.
유연
푸 총재가 "시공관리국"이라는 곳에 간 것도 알아요.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고 "미래를 보겠다" 같은 말도 했고요.
유연
그 사람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요.
그쪽에서 서류를 넘기던 소리가 또 멈췄다. 그러더니 조금 더 길어진 한숨이 낮게 전해졌다.
이택언
방금 말했듯이, 그는 특수한 신분입니다.
그의 말투가 조금 전보다 느려졌다. 마치 인내심을 억지로 눌러가며 너무나 당연한 것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이택언
그가 "미래"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굳이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요.
이택언
하지만 아직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이상 일단은 불안정 요소 정도로만 봐도 됩니다.
이택언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이택언은 앞서 내놓았던 결론을 다시 반복했다. 더 이상 상의할 여지는 없어 보였다.
유연
……알겠어요. 이해했어요.
이택언
네. 금융센터 홍보 관련 일은 이미 배정해두었습니다.
이택언
늦어도 내일이면 화예 쪽 사람이 당신 회사와 연락해 구체적인 홍보 방안을 논의할 겁니다.
이택언
관련 안건은 굳이 저한테 따로 보여줄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확인한 뒤 진행하면 돼요.
이택언
끊겠습니다.
유연
자, 잠깐만요……
이미 너무 여러 번 들어 익숙해진 한숨 소리가 다시 전해졌다. 그의 인내심도 조금씩 바닥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택언
할 말이 있으면 한 번에 하세요.
유연
이택언, 왜 자꾸 한숨 쉬어요?
이택언
당신은 왜 자꾸 내가 한숨 쉴 말을 합니까?
이성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내게 어이없어 웃음이 나온 것 같은 말에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전화 너머의 그가 이미 완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나는 서둘러 헛기침을 하고 "한 번에 말하기"를 시작했다.
유연
요즘 많이 바빠요? 일은 순조롭게 되고 있어요?
유연
그 경제특구 섬은 듣기에는 굉장히 대단해 보이던데 왜 푸 총재가 화예보다 먼저 저한테 초대장을 보낸 거예요?
유연
당신이 바빠서 잊은 건가요?
수화기 너머가 잠시 고요해졌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고, 어떤 움직임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는 유리창 밖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만 있었다. 거리가 만들어낸 공백은 나로 하여금 그의 모든 것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택언
알면서 묻지 마세요.
한참 뒤, 확실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이택언
경제특구에 관해서는 당신이 알아야 할 일이라면 화예 쪽에서 자연히 알려줄 겁니다.
이택언
초대 문제도 잊고 말고 할 일이 아닙니다.
이택언
IR 부서는 원래 참석자의 중요도에 따라 순서대로 초대장을 보냅니다. 아마 아직 당신들 차례가 오지 않았을 뿐이에요.
유연
……그러니까 유연 제작사는 당신한테 푸 총재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거네요.
이택언
전략적 협력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이택언
게다가 당신들 회사는 "참석자"라기보다 원래 "협력사"로 분류되는 편이 더 맞아요.
이택언
초대장이 필요합니까?
이택언의 딱딱한 말 속에 아주 희미해서 착각처럼 느껴지는 감정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말을 너무 빨리 끊었고, 그 잡음은 너무 옅어서 자세히 판단할 수 없었다.
유연
알겠어요……
이택언
이번엔 더 묻고 싶은 일 없습니까?
유연
지금은 없어요. 나중에 다른 특수한 상황이 생기면 또 전화할게요!
그는 "음" 하고 대답하더니, 깔끔하게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에는 통화 기록 화면만 남았다. 더 이상의 조작이 없자 자동으로 잠기며 새까맣게 변했다. 그 위로 침묵한 얼굴 하나가 비쳤다.
"띵동——"
알림음이 예고 없이 울렸다. 뜻밖의 메일 알림 하나가 화면을 밝혔다.
——"제목: 화예 전략적 협력 파트너 참석 초대."
나는 멍하니 발신자란을 바라봤다. 심지어 내가 뭔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었다.
"발신자: 이택언."
6-2 비즈니스 포럼
비즈니스 회담 포럼, 도대체 무엇을 "회담"하는 걸까?
6-3 뜻밖의 재난
지금 뭘 하고 있든 두 시간 뒤에 화예로 와요. 프런트한테 얘기하면 바로 내 사무실로 안내해줄 거예요.
이택언이 처리하겠다고 했으니 나도 쓸데없이 일을 키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만일을 위해 조금은 조사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최대한 많은 정보를 파악해야 지나치게 수동적인 상황에 놓이지 않을 테니까.
Zehn
보스? 오랜만이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전화는 거의 즉시 연결됐다. 목소리는 기억 속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랑'이 사라지며 찾아온 변화는 이미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Zehn도 예외는 아닐 것이었다.
유연
오랜만이에요, 요즘 잘 지내요?
Zehn
저야 뭐 안 좋을 게 있나요?
Zehn
이번엔 뭘 시키려고요?
그는 가볍게 말을 넘기며 말투는 능숙하고 익숙했다. 예전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던 약삭빠른 기운도 더해졌다.
나는 입술을 살짝 다물고 푸 총재에 대한 간단한 상황을 설명했다. 최대한 광범위하고 조용하게 이 사람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했다.
Zehn
뭐 문제야 없는데, 들어보니 작업량이 적지 않네요……
Zehn
요즘 내 쪽에도 다른 일이 제법 있어서요. 보스가 급하게 해달라면 조사 비용이 좀 올라갈 것 같아요. 선불도 좀 받을 수 있으면 좋고요.
가볍게 두 번 웃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미안한 척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말은 거기서 멈춘 채 내가 받아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이런 열정적이고 속물스러운 말들이 귀에 들어오자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났다.
유연
……얼마를 원하는데?
Zehn
역시 보스는 시원시원하다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계속 잘 맞을 수밖에 없지!
그는 유난히 신이 나서 바로 숫자를 불렀다. 주저함이라고는 없었다. 아마 진작부터 머릿속에 금액을 정해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전화를 끊으며, 마음속 허한 감정도 함께 눌러 담았다. 이 감각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긴 했지만 잔잔하고 촘촘한 통증은 여전히 소리 없이 찔러왔다——
어쩌면 그게 익숙해지지 말라는 신호인지도 몰랐다.
컴퓨터 화면 위로 나를 태그한 메시지들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음 할 일들을 처리하라는 신호였다.
눈을 살짝 감고 깊은 숨을 몇 번 들이쉬고는 업무 프로그램 맨 위에 떠 있는 토론 프로그램 장소 관련 단체 채팅방을 열었다.
지금 불분명한 상황이 많긴 하지만 내가 한 걸음씩 해나갈 수 있는 일도 적지 않았다.
우선 할 수 있는 일부터 끝내자.
시간은 바쁜 와중에도 계속 흘렀다.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멈춰주지는 않으니까.
Zehn에게서는 좀처럼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도 업무 중간중간 내 능력을 사용해보며 미래의 한 조각이라도 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아무리 집중해서 푸 총재에게 주의를 기울여도 의미 있는 장면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힘은 마치 엉망으로 뒤얽힌 실타래 같았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건 흐릿하고 텅 빈 길 하나뿐이었다.
유연
……역시 섬에 올라간 뒤 그 사람 가까이서 다시 시도해봐야겠네.
대충 점심을 먹고 할 일 목록을 열었다.
포럼 원탁 회의 홍보 방안은 한 차례 더 보완을 마쳤고 토론 프로그램의 주요 스폰서 여러 곳도 확정됐다.
동시에 최근 몇몇 경제 프로그램의 출연진과 포럼 참석자가 겹치는 부분이 있어 화예 측과 입장을 통일할 필요가 있었다.
유연 제작사는 이번 포럼의 가장 중요한 홍보 창구이자 오프쇼어 금융 센터와 경제 특별 구역을 포함한 모든 단독 정보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다——
당연히 손에 쥔 자원이 최대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순서대로 후속 배치를 해나가고 있던 찰나 유영이 갑자기 문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유영
사장님, 또 유명 폭로자가 연락 왔어요. 협업하면서 포럼 내부 정보를 좀 더 얻을 수 있냐고요.
유영
평소엔 경제 뉴스에 관심도 없던 분들인데 이번이 이 기간 동안 벌써 다섯 번째예요.
유영
저희가 최근 포럼 분위기를 엄청 잘 띄웠다는 증거 아닐까요!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며 눈까지 반짝였다. 나도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유연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내보내는 정보는 몇 번 더 확인해줘요.
유연
상대방 태도가 어떻든 화예와 확인된 부분만 공개하고요.
유연
지금이 중요한 시기니까, 신중하게 가는 게 좋아요.
유영
알겠어요!
그때 문 앞에서 한참 기다린 것 같은 비즈니스팀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비즈니스팀
저희도 얘기해도 될까요?
비즈니스팀
요즘 새로운 협력사들이 문의를 많이 해오는데요. 규모랑 상관없이 다들 대표님과 직접 얘기하고 싶다고 고집합니다.
유연
제가 협력사마다 다 시간을 낼 순 없어요.
유연
목록을 정리해주세요. 제가 추릴 테니까 나머지는 정식 절차로 진행하게 해줘요.
비즈니스팀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직접 연락이 안 된다고 하니까 몇몇은 협력 이야기를 아예 접겠다고 번복한 분들이 있어요.
비즈니스팀
그런 경우는 계속 따라가야 할까요?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왠지 모르게 좀 이상했다.
협력사 입장에서 프로듀서와 먼저 이야기를 나눈 뒤 협업 여부를 결정하고 싶어 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이 느낌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유연
일단 따라가지 말고 사람들만 기록해뒀다가 나중에 내가 자세히 볼게요.
비즈니스팀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자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어떤 암류가 은근히 흘러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도 Zehn한테 알아봐 달라고 해야겠다.
각종 일정으로 빼곡한 오후가 또 하루 지났다. 새로운 회의를 마치고 나서야 겨우 숨 한 번 돌릴 수 있었다.
포럼든 토론 프로그램이든 이런저런 일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웃돈을 한 번 더 얹어준 뒤에야, Zehn에게서도 꽤 유용한 소식들이 도착했다.
푸 총재에 관한 정보는 여전히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전부 정리해서 보내줬다.
이 사람은 금융 감독 기관 소속으로 본명은 푸청장(傅承章). 직책이 딱히 높은 편은 아닌데 여러 기업의 업무 심사와 후속 관리 분야를 담당하고 있었다.
여러 기업인과 왕래가 있긴 했지만 딱히 깊은 관계는 없는 것 같았다. 개인 정보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깔끔하고 평범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협업 상담'을 하러 왔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Zehn이 최근 우리 회사와 나 개인을 검색하고 언급하는 정보 흐름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고 했다.
구체적인 이유에 대한 확실한 결론은 없었지만 어쨌든 뭔가 진전이 있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나름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천천히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이택언'이라는 세 글자에 놀란 채로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허둥지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유연
……이택언?
이택언
지금 뭘 하고 있든 두 시간 뒤에 화예로 와요. 프런트한테 얘기하면 바로 내 사무실로 안내해줄 거예요.
차갑고 단호한 말투였다. 그 압박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유연
……네?
"뚜뚜……뚜뚜……"
상대방은 내 의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끝내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몇 초짜리 통화 기록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예전이든 지금이든 이택언이 이렇게 여지를 두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 어떤 의문도 허용하지 않는 식으로.
마음속에 쏟아지는 의문과 불안을 억누르며 나는 이후의 모든 회의와 상담 일정을 즉시 취소했다.
일단 자본가가 하라는 대로 화예에 한번 가보자.
화예에 도착하자마자 비서가 바삐 다가와 말도 없이 나를 바쁜 인파를 피해 이택언 전용 엘리베이터로 곧장 안내했다.
그는 사무실 문 앞에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을 완전히 무시하고 주변 사람들의 의아한 눈빛과 불평에도 아랑곳없이 바로 문을 두드렸다.
비서
이 총재님, 도착하셨습니다.
더없이 간결한 "들어와요"가 문 너머로 전해졌다. 무게감 있고 감정이라고는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비서가 문을 열어주며 살짝 허리를 숙여 들어가라고 했다.
등 뒤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소란을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온도까지 몇 도 더 내려간 것 같았다.
이택언의 사무실은 지난번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엄숙하고 정갈했다.
서류가 가득 쌓인 책상 너머에서 그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수트 차림으로 두꺼운 서류 묶음을 고개를 숙인 채 넘기고 있었다.
페이지가 넘어갈 때 그의 손끝에서 나직한 사각거림이 들려왔다. 이택언은 말이 없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의 얼굴 위에 멎었다.
잠잠한 눈썹 사이에 살짝 미간이 모인 흔적이 보였다. 눈 아래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충혈된 실핏줄 몇 가닥이 있었다.
이택언이 마지막 장을 넘기고 손을 들어 서류를 책상에 가볍게 탁탁 두드려 맞춰 정리하더니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에는 피곤한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오직 내가 저절로 숨을 멈추게 되는 압도감만이 있었다.
이택언
직접 보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목을 살짝 들어 보고 있던 것을 밀어냈다. 시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차갑게 내 위에 머물렀다. 어딘가 살피는 눈빛이기도 했다.
나는 확신 없이 두 걸음 앞으로 나갔다. 완전히 가까이 가기도 전에 커다란 글자들이 눈에 박혔다.
"일반인이 Evolver가 되는 열쇠?" "그녀가 바로 QUEEN"……
글자들이 일부러 굵고 크게 강조되어 있었다. 'Evol'과 'QUEEN'이라는 단어 아래에는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다. 노골적이고 악의적으로 정보를 눈앞에 펼쳐놓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에 관한 대량의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각도, 다양한 장소에서 찍힌 사진들이 빈틈없이 나를 담고 있었다.
시선이 그 서류 뭉치 위에 굳어버렸다. 손끝부터 차가운 기운이 번졌다.
유연
……이게 뭐예요?
다소 망설이며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뭔가 단서를 잡으려 했지만 차갑게 굳은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이택언은 두 손을 맞잡아 책상 위에 놓았다.
이택언
누군가 이 서류들을 나한테 보내왔어요.
이택언
사흘 안에 요구하는 금액을 지불하지 않으면 이 정보를 각 플랫폼에 폭로하겠다고 했어요.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내 머릿속이 한순간 하얗게 됐다.
나는 거의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이택언이 내뱉는 말들이 이 세계를 내가 믿기 어려운 어떤 형태의 현실로 바꿔나가는 걸 그대로 받아냈다.
한참 뒤에야, 스스로도 황당하게 느껴지는 결론을 더듬으며 말했다.
유연
누군가가……내가 QUEEN이라는 걸로 당신을 협박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택언
명백하죠.
이택언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반쯤은 동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고요.
이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고 황당했다. 이런 정보가 이런 방식으로 내 삶에 튀어들어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Evol 핵심 정보는 늘 철저하게 통제되어 왔다. 다양한 조직과 세력들이 극단적이긴 해도 결국 그 정보만큼은 자기들 손 안에 꽉 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무엇이 이 철통같던 상자의 뚜껑을 열어버린 걸까?
나는 이택언을 바라보며 손끝을 손바닥 안으로 꾹 눌러 박았다.
유연
나를 부른 거면 이미 처리한 거겠죠?
이택언
그렇게 둔하진 않군요.
담담한 짧은 말이 깔끔하게 떨어졌다. 그는 다시 눈을 내려 책상 위 다음 서류로 시선을 옮기더니 턱을 가볍게 문 쪽으로 향했다.
이택언
후속 상황은 직접 알아서 처리하세요.
이택언
가도 됩니다.
6-4 보이지 않는 구석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눈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이택언의 말이 우리 사이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이미 어떤 간결한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이렇게 선명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지금 이 순간의 이택언은 정말로 아주 높고 높은 곳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구름 속으로 가려질 만큼.
그는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게 나를 묘하게 슬프게 했다.
그는 마치 '사랑'을 계단 삼아 한 걸음씩 하늘 끝까지 올라간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랑'이 사라지자 그는 혼자 거기 남겨진 것처럼 보였다.
짧은 침묵 끝에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결연하게 손을 뻗어 앞으로 나갔다. 그 협박 서류 묶음을 집어 들고 그 자리에서 바로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의 서류 더미에서 시선을 떼어 의아한 듯 나를 흘끗 보았다.
이택언
여기서 볼 겁니까?
유연
당신 앞에서 보고 싶어서요.
그의 미간이 조금 더 좁혀졌다. 공기 속의 위압감도 그 순간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책상 위에 가볍게 얹혀 있던 손가락이 살짝 구부러졌다. 비서를 불러들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작은 중간에 멈췄다. 결국 가볍게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마치 모든 감정을 한순간에 차단해버린 것처럼.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옆에서 새 서류를 꺼내 펜 뚜껑을 열고 검토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 한순간에 모든 감정을 다시 막아낸 것처럼.
나는 그의 이 일련의 '시의에 맞지 않는' 작은 행동들을 바라보며 묘하게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정말로 너무 어이가 없지만 나와 무언가를 증명하는 데 시간을 쓰고 싶지도 않아서 결국 포기를 선택한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살짝 굽히며 무의식적으로 참고 있던 숨을 놓았다.
이택언 앞에서 이렇게 긴장됐던 감각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 폭로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웠다.
알기 쉬운 방식으로 QUEEN과 CORE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었고, 첨부된 도표와 데이터 중에는 눈에 익은 것들이 적지 않았다.
동시에 문장 곳곳에서는 CORE가 Evol을 “촉발”하는 작용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설득력 있으면서도 지극히 선동적이었다.
이런 내용을 작성할 수 있었다면 정보의 출처는 분명 그 조직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정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는지 이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지. 일단 공개됐을 때의 장면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류를 다시 가지런히 모으는데 이택언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이택언
다 봤습니까?
유연
네.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종이의 여백에 잠시 더 머물렀다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연
돈을 준 건가요?
이택언
줬죠. 그리고 원금과 이자를 합쳐 원금의 두 배가 되는 것도 받아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손에 든 파일 역시 다시 한 장 넘어갔다.
이택언
이 정보든, 나를 찾아온 그 사람이든, 전부 내 방식대로 깨끗하게 처리했습니다.
이택언
빠진 게 없는지 다시 확인하도록 사람도 붙여뒀고요.
말투는 여유로웠고 만년필이 서류 위를 긁는 소리도 마찬가지로 가볍게 흘러갔다.
이택언
이런 건 당신이 고려할 필요 없습니다.
유연
하지만 그 사람들은 원래 저를 직접 찾아왔어야 해요.
이택언
하지만 내가 당신보다 돈이 많습니다.
그는 그것이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듯했다. 유난히 간단하고 직접적인 말이 내 앞에 떨어졌고 심지어 손에 든 펜도 멈추지 않았다.
이택언
당신은 화예의 홍보 창구입니다. 적어도 최근 이 기간 동안은 내 이익이 당신과 고도로 묶여 있습니다.
이택언
이런 상황에서는 제작자 한 사람인 당신을 협박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를 직접 찾아오는 편이 낫겠죠.
이택언
더 직접적이고, 더 가치가 있으니까요.
이택언
그러니 당신이 나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이택언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가는 상대라면 당연히 그런 선택을 했을 겁니다.
그가 눈을 들어 시선을 내 쪽으로 던지며 내가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풀어헤쳐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안의 이해득실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서.
그는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가이고 나는 잠시 곤경에 처한 우수한 협력 파트너. 마치 그것뿐인 것처럼.
유연
그럼 당신이 저를 도와준 건 그냥 우리가 요즘 이익으로 깊게 묶여 있어서만이에요?
이택언
당신 방식대로 이해해도 됩니다. 모든 걸 나에게 확인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손에 든 만년필의 유려한 필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다음 줄을 향해 나아갔다.
이택언
이런 걸 나에게 확인할 시간에 당신 자신의 안전을 더 생각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택언
당신이든 나든 최근 처리해야 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이택언
당연히 돌발 사건은 적을수록 좋죠.
문 밖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비서가 이번 면담 시간이 끝났다고 알려주는 소리였다.
정말로 세계에 의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흘러가며, 언제나 가장 적절한 순간에 끝나야 할 일에 마침표를 찍는 듯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가 뭔가 더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협박 서류 묶음을 집어 들고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알겠어요.
회사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한 시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다.
사무실 밖에는 여전히 바쁜 사람들의 소리와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는 오후의 햇살에 잠긴 도시가 그대로였다.
모든 게 유난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화예에서 가져온 서류 묶음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그 '폭로'와 '내막'이라는 글자들 위에 시선을 잠시 머물렀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편한 감정을 누르며 서류 속 데이터 도표들을 사진으로 찍고 문서들을 파일 봉투에 담았다.
문서가 너무 많은 기밀 정보를 담고 있는 데다가 일반인들이 Evol을 얻도록 선동하는 암시까지 담겨 있었다. 잠시 생각한 끝에, 샤오위에 번호를 눌렀다.
유연
당신들 NW에 정보 유출 문제가 있어요. 일반인 중에 내가 QUEEN이라는 걸 알고 정보 거래까지 한 사람이 있어요.
전화가 막 연결되는 순간 나는 바로 말을 던졌다.
이 데이터들이 NW와 관련이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신중한 것이 낫겠다 싶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더 주도적으로 많은 것들을 파악해나가야 했다.
샤오위에
그렇게 죄 묻는 것처럼 올 필요는 없어.
샤오위에
정말로 무섭다면 언제든지 NW 실험실에 와서 지내는 것도 환영합니다.
유연
그 실험실 사람들이 더 무섭기도 하지 않나요.
말하는 사이 검은 그림자 하나가 사무실 안으로 슬쩍 들어왔다.
샤오위에
당신이 아는 걸 그쪽에 넘겨요.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전화가 깔끔하게 끊겼다.
나는 손에 든 파일 봉투를 내밀었다. 그림자는 다시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조용한 천장을 바라보며 머릿속을 계속 돌렸다.
왜 세계가 “사랑”을 잃은 뒤 내 신분까지 정보 위기에 빠지게 된 걸까?
BS나 NW 같은 조직 안에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충성과 신뢰, 심지어 어떤 이상이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설마 그것들까지 영향을 받은 걸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눈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폭로자 관련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 다시 Zehn에게 전화를 걸었다.
NW와 이야기를 했으니 BS 쪽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Zehn
보스? 왜 벌써 전화했어?
Zehn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는 쓸 만한 소식 못 줘. 혹시 또 급하게 해달라는 거야?
주기락은 아직 폐관 중이었다. 이런 일로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는 Zehn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고 정리해둔 것을 그의 이메일로 바로 보냈다.
유연
한 사람 더 알아봐줘요.
유연
가격은 좀 더 쳐줄게요. 대신 잔금은 일이 끝난 뒤에 지급할 거야.
또 한 번 돈을 쏟아붓자 Zehn의 효율은 확실히 높아졌다.
Zehn:
우리 이 총재님 확실히 솜씨가 좋으시네.
Zehn
일을 아주 깨끗하게 처리했어. 나는 이번 협박 금액도 못 찾았고, 협박과 관련된 소문도 조금도 못 찾았어.
Zehn
그 폭로자에 관해서는…… 경찰에 끌려간 뒤로는 더 이상 별다른 소식도 없고.
Zehn
보스가 알고 싶다면 더 “공식적인” 루트를 찾아봐야 할지도 몰라.
유연
알겠어요. 그 외에 눈에 띄는 다른 건 없어요?
Zehn
다른 거라면……좀 더 파고들면 'Evol 획득'이나 'QUEEN'과 관련된 정보들이 조금씩 나오긴 해요. 다만 너무 흩어져 있어서 출처를 바로 찾기는 어려워요.
Zehn
그래도 보스 안심해. 내가 꽤 오래 조사했는데 관련 소식 속에서 보스 이름은 보지 못했어.
상황이 여전히 말끔하게 정리됐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 정도 결과면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유연
알겠어요, 이번에도 수고했어요.
Zehn
당연하지! 요즘 폭풍이 오기 직전 같은 분위기니까 보스도 조심해.
예상치 못한 걱정에 마음이 살짝 따뜻해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히히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Zehn
그러니까 남은 잔금 말인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깔끔하게 송금하고 그의 신나는 환호성도 무시한 채 전화를 끊었다.
노을의 마지막 빛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았다. 밤의 네온사인이 서서히 도시를 접수해갔다.
마치 출렁이던 어둠의 그림자들이 마침내 밤을 틈타 나와 먹잇감을 찢어 삼켜버릴 순간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6-5 익명자의 광란
어차피 너도 악의를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를 필요가 없으니까.
지하철역
초등학생들의 잡담
천진난만한 어린 말은 사람을 절로 미소 짓게 하고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든다.
초등학생A
너 커서 뭐 되고 싶어?
초등학생B
당연히 스트리머지. 대리 플레이 맡기고 아무나 막 욕하고! 얼마나 재밌어!
초등학생A
쳇. 수준 낮아.
초등학생B
그럼 넌 뭐 될 건데?
초등학생A
당연히 Evolver가 되는 거지
초등학생B
네 부모님 둘 다 일반인인데 네가 무슨 Evolver가 돼.
초등학생A
혹시 모르잖아? 애니에서는 갑자기 특수 능력 얻고 그러잖아?
초등학생A
어쩌면 나도 주인공일지도 몰라!
초등학생B
그럼 나도 Evol 가질래.
초등학생B
그때는 인터넷 선 타고 들어가서 그 핵 쓰는 놈 머리를 바로 터뜨려버릴 수 있겠네!
초등학생A
너는 진짜 머릿속에 게임밖에 없구나! 가망 없다!
초등학생B
오늘 밤에 너랑 배그로얄 안 해준다.
초등학생A
미안해요, 형. 형 과자 먹을래? 반 나눠줄게.
강천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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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ncertifiedNews
QUEEN이라는 뜬구름 잡는 소식 들어본 사람 있음? 무슨 아주 특수한 Evol이라는데 모든 사람이 Evol을 얻을 수 있게 해주고, Evol을 강화할 수도 있다던데.
제 정보 소스는 꽤 믿을 만한데 더 이상 정보가 없어서요. 혹시 아는 분 있으면 얘기해주실 수 있음?
DOuKnowthat · 3일 전
그럼 나도 세상에는 세계를 진화시켜 전 생물 Evolver화 시대에 진입하게 만드는 슈퍼 Evol이 있다고 하겠다. 이 게시판 이름의 News가 무슨 뜻인지 알긴 하냐?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데 함부로 글을 올리네.
>LKdajle 원글 작성자 · 3일 전
모르면 네가 나가. 이제는 커뮤니티 예절까지 가르쳐줘야 하냐?
>washBRIAN · 3일 전
강화가 아니라 촉발이야. 특수 Evol이 아니라 유전자고.
>>DOuKnowthat · 3일 전
??? 어디서 온 AI가 아니다 맞다 하고 가르치고 있어?
SHEMMEWE · 3일 전
나도 QUEEN 얘기는 들어봤는데 글쓴이가 들은 거랑은 좀 달라. 듣기로는 다른 Evolver가 자기 능력을 바꾸게 할 수 있다더라. 일종의 변환기 같은 거지.
그리고 그 사람이 영상업계에서 일한다는 얘기도 들었어. 업계 특성상 고위층 거물들이랑 사적으로도 많이 알고 지내고 이미 암암리에 꽤 강한 세력을 만들어놨대.
>>hummingvhense · 3일 전
어머~ 여러분~ 연모시에도 자기들만의 프리메이슨이 있대요~ 우후~ /눈굴림/ /눈굴림/ /눈굴림/
>LKdajle 원글 작성자 · 3일 전
영상업계라…… 나 뭔가 조금 감이 온 것 같은데…… 너희 혹시 들어본 적 있
>>SHEMMEWE · 2일 전
글쓴이 어디 감? 왜 말하다 말아?
>>washBRIAN · 2일 전
……글쓴이 뭔가 알아낸 것 같은데.
구시가지
명확한 가격표
때로는 가짜 정보가 진짜 정보보다 훨씬 안전하다.
양아치A
너 요즘 왜 그렇게 수상하게 굴어? 술 마시러도 안 오고.
양아치A
돈 벌 만한 길 있으면 나한테도 좀 말해줘야지?
양아치B
꺼져, 씨*. 내가 진짜 돈 벌 수 있으면 아직 여기 있겠냐?
양아치B
근데 말 나온 김에 너 유연 제작사랑 관련된 소문 들은 거 없어?
양아치A
……그게 뭔데?
양아치B
영상 회사야! 멍청아. 걔네 프로그램 본 적 없어?
양아치A
……무슨 정보가 필요한데?
양아치B
아무거나. 특히 그 제작자에 관한 거.
양아치B
응? 너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왜 그래?
양아치A
으…… 갑자기 배가 좀 아픈데. 나중에 말해줄게.
양아치B
하? 뭐야……
6-6 한순간의 선택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당신이 짊어질 일은 아닙니다.
포럼 날짜는 하루하루 가까워졌고 토론 프로그램 촬영도 점차 일정에 오르기 시작했다.
홍보, 프로그램, 협력사, 조율 일정…… 모든 항목이 정해진 시점에 맞물려 있어 조금도 느슨해질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그 기괴하고 현란한 Evol의 세계와 상식을 넘어선 기적들에서 멀어져 더 현실적인 땅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저 내가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일 뿐이라는 것을.
내 주변에 NW 대원이 보호를 맡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이택언도 그 정보를 깨끗하게 처리했다고 말했지만 떠도는 소문 같은 정보들은 계속 나를 경계하게 만들었다.
심야의 거리는 고요했다. 이따금 차 헤드라이트가 밤을 가르고 지나가다 더 깊은 밤이슬 속으로 녹아들었다.
머릿속에는 낮 동안 본 각종 대본과 회의의 잔상이 아직도 맴돌고 있었다. 나는 조금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천천히 집을 향해 걸어갔다.
“탁, 탁, 탁……”
내가 앞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에서 일정하게 따라오는 발소리에 신경이 무의식적으로 긴장했다.
그저 내가 예민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을 위해 나는 일부러 방향을 바꿔 다른 밝은 큰길 쪽으로 걸어갔다——
멀리 아직 문을 닫지 않은 편의점이 보였다. 나도 손을 주머니 안으로 넣고 손끝을 신고 화면 위에 올려두었다.
뒤따라오던 발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온몸을 긴장시키고 편의점 방향으로 큰 걸음을 옮기며 통화 버튼을 누르려 했다——
??
수상하게 뒤에서 뭘 하는 거예요?!
기운차고 우렁찬 여성의 목소리가 갑자기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옷감이 스치는 소리와 짧고 어수선한 몸싸움 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중년 남자의 통증 섞인 욕설이 고요한 밤을 찢었고 모든 긴장된 분위기도 함께 흩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가로등의 차갑고 흰빛 아래, 캔버스 재킷을 입은 여성이 날렵한 자세로 한 남자를 바닥에 단단히 제압하고 있었다.
어딘가 낯익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눈을 들어 나를 보는 순간 나는 곧바로 현장의 조명 담당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연
류 선생님?!
류 선생
이 남자 알아요? 수상하게 당신 뒤를 따라오길래 볼수록 이상해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에 들어간 힘을 조금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세 그대로 더 단단히 눌러붙였다.
유연
모르는 사람이에요. 방금 저도 바로 신고하려고 했어요…… 고마워요!
류 선생
별거 아니에요~ 호신술 배운 게 헛되지 않았네요. 장비도 괜히 들고 다닌 게 아니었고요.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겉으로는 아담해 보이는 몸 안에 무한한 힘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매번 혼란스러운 현장 속에서도 그녀가 질서정연하게 완벽한 조명 방안을 내놓는 것처럼 사람을 더없이 안심하게 만들었다.
신고를 하고 진술까지 마친 뒤 류 선생은 계속 내 곁을 지켜주었다. 심지어 일부러 우리 집 현관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류 선생
그럼 난 먼저 갈게요.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일찍 쉬어요.
유연
네, 선생님도 조심히 가세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류 선생
별일 아니에요. 대신 프로젝트 잔금 정산할 때 저 잊으면 안 돼요?
그녀는 시원하게 웃었다. 예전에도 매번 일을 해결할 때 지어 보이던 그 웃음과 꼭 닮아 있었다.
지금처럼 “사랑”을 잃은 상황에서 이 반쯤은 진심이고 반쯤은 농담인 말에도 어쩌면 몇 분의 진심이 스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 역시 예전처럼 그녀와 함께 웃고 싶을 뿐이었다.
보아하니 NW가 말하는 “안전 보호”는 정말 긴급한 순간이 되기 전까지는 나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안전을 그들에게 맡겨둘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회사 밖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 때마다 반드시 누군가와 동행했다.
가끔 야근이 깊은 밤까지 이어질 때면 차라리 편집실 소파에서 대충 하룻밤을 보냈다.
그런 날들이 몇 주 동안 이어졌다. 또 하루의 이른 아침 나는 회사 스태프와 함께 프로그램 스튜디오에 일찍 도착했다.
스튜디오 안에는 기본 작업등 몇 개만 켜져 있었고 드문드문 보이는 몇몇 사람의 그림자가 곳곳에 흩어져 각자 맡은 일을 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든 현장 도면을 넘기다가 멀리서 스튜디오 뒤편 구석에 있는 류 선생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캔버스 재킷을 입고 있었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깔끔하게 걷어 올린 채 조명 한 세트 앞에 서서 각도를 조정하고 있었다.
유연
류 선생님, 일찍 오셨네요.
나는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라는 걸 확인하더니 살짝 멈칫했다가 뒤늦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유연
왜 그러세요? 뭐 곤란한 부분이라도 있어요?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요.
류 선생
괜찮아요. 작업 끝나면 이틀 정도 더 휴가 낼 거예요.
류 선생
……아, 그러고 보니 보조 무대 조명안 다시 한번 대표님이랑 맞춰보고 싶었어요.
유연
말씀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녀를 따라 무대 뒤쪽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놓인 그녀의 노트북 옆으로 가서 몸을 숙이고 화면 속 조명안을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무언가가 뒤에서 갑자기 내 입과 코를 덮었다. 달콤하면서도 코를 찌르는 냄새가 순식간에 퍼져 숨을 타고 곧장 폐부까지 밀려들었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져 머릿속이 “윙” 하고 텅 비었다. 본능적으로 큰 소리로 도움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무언가를 내 입 안에 밀어 넣어 내 목소리를 완전히 틀어막았다.
등 뒤의 힘은 놀라울 만큼 강했다.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고 온몸에서도 힘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왜?
그녀의 환한 웃음이 갈라진 흔적 조각들로 변한 듯했다. 나는 슬픔 속에서 그녀의 손을 붙잡고 싶었지만 더는 그럴 힘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식이 혼란스럽게 가라앉기 직전, 아주 낮고 망설임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미안해요.
스튜디오는 여전히 텅 비고 조용했다. 어느 구석에서 짧은 몸싸움이 있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
J99, 여기는 J91. 수신하면 응답하라.
J99
수신완료. 말해세요.
J91
목표가 습격당했습니다. 습격자는 목표 회사의 조명 담당자입니다.
J91
수법은 조잡하고 목표의 생명에는 현재 위험이 없습니다. 지금 이동 중입니다. 개입이 필요합니까?
어둠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거대한 항공 운송 케이스 안에 집어넣는 모습을.
J99
계속 관찰해라. 목표의 생명 안전을 보장하고 적당히 미끼를 풀어라.
짙은 먼지와 금속 냄새가 온 숨결을 가득 채웠다. 코와 목 깊은 곳에서 건조하고 따가운 통증이 계속 밀려왔다.
혼란스럽던 의식이 서서히 나를 깊은 물 속에서 건져올렸다. 몸 아래로 미세한 진동이 끊임없이 전해지고 기계 작동음이 희미하게 귓가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려다 옆으로 누운 채 손발이 가늘고 단단한 무언가에 단단히 묶여 있다는 걸 알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힘겹게 눈을 떴다.
주변은 여전히 완전한 어둠이었다. 좁은 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와 세상의 모든 윤곽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귓가에 그 낮은 "미안해요"가 아직도 어렴풋이 맴도는 것 같았다.
역시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다.
그 빛의 틈을 바라보며 무겁게 생각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망감이 어둠과 함께 나를 가득 채웠다.
앞으로는 가까운 사람에게도 항상 최악을 먼저 대비해야 하는 걸까? 모든 사람에게 의심의 눈빛을 보내야 하는 걸까?
말없이 눈앞의 어둠을 응시했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지금 묶여 있다는 것 외에 다른 부상은 없었다.
아마 상대방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 소통하고 탈출할 기회가 생길 것이었다.
또한 NW 대원들도 주변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이런 일이 생겼으니 이론적으로는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지금 그들은 더 많은 잠재적 위험을 캐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들도 처리당한 걸까?
류 선생의 이번 행동은 그녀 개인의 판단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던 걸까?
어둠 속에서 시간이 유독 길게 늘어졌다. 나는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적절한 기회를 기다렸다.
갑자기 몸 아래의 지지대가 세게 멈추더니 강한 관성에 그대로 튕겨나가 앞쪽에 세게 부딪혔다.
눈앞이 하얗게 됐다. 옆구리에도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어렴풋이 어수선한 소리가 어둠의 틈새를 통해 들려왔다. 나는 이를 악물며 고통에서 나오는 신음을 목구멍 속으로 눌러 담고 온몸을 경계 태세로 세웠다.
희미한 '딸깍'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더니 다음 순간 눈부신 빛이 예고도 없이 어둠을 찢어버렸다.
본능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빛을 등진 채 이택언이 서 있었다. 얼굴 절반이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하늘빛에 얇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보기 좋게 뻗은 눈썹은 살짝 내려앉아 그의 윤곽을 더 깊고 또렷하게 만들었다.
그 고요한 눈동자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마치 투명하고 눈부신 흑요석 한 조각처럼 세계의 모든 침묵과 빛을 거두어 담고 있는 듯했다.
바닷바람이 그가 느슨하게 손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흔들었고 그의 옷자락을 거세게 부풀렸지만 그 사람을 조금도 흔들리게 만들지는 못했다.
한 손을 내 위에 짚은 채 나는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내가 지금까지 트렁크 안에 묶여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택언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태가 나아 보이는군요.
날카로운 입술선이 살짝 열리고 닫히며 담담한 감상이 던져졌다. 다음 순간 바닷바람과 함께 흩어질 것 같은 말이었다.
나는 너무나 익숙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이 순간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다.
마치 그 먼 천사가 다시 한 번 내 앞에 내려온 것 같아 코끝이 갑자기 시큰해졌다.
마음속에는 너무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수많은 말들은 결국 억울함 어린 한마디 속으로 막혀 들어갔다.
유연
……도대체 얼마나 나쁜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택언
최악입니다. 당신은 내 예상에 제대로 들어맞는 일이 드무니까요.
이택언
특히 요즘은.
유연
……저도 충분히 조심하려고 했어요.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썼다. 하지만 석양이 너무 눈부신 탓인지 자꾸 그의 얼굴이 번져 보였다.
순간, 차라리 내가 본 사람이 이택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랬다면 그가 내 초라한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아도 됐을 테고 나는 그의 앞에서 계속 허세라도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유연
……왜 직접 여기까지 왜 온 거예요……
이택언
……관광입니다.
얼굴 가득 생동감 있는 무력함이 담겼다. 눈썹이 한 치 더 내려앉고 눈빛도 한층 깊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 모든 파문을 지워버리고 “이 총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택언
사후 처리하러 왔습니다. 그럼 뭐겠습니까?
그의 시선이 내 몸 위를 아주 잠깐 훑고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 큰 남자 하나가 공손하게 사선 절단기를 건넸다.
칼날이 내 손목에 닿았고 또렷한 소리와 함께 줄곧 신경을 찌르던 팽팽한 조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몸을 숙이자 그의 그림자는 원래의 그늘을 대신해 내 몸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체온이 맞닿은 순간, 나를 건드린 그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칫한 듯했다.
조금 힘을 주자 그는 나를 트렁크에서 안아 꺼냈다.
이택언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 하지 마세요.
이택언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당신이 짊어질 일은 아닙니다.
단단하고 익숙한 심장박동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는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를 받치고 있던 팔은 망설이듯 한순간 더 머물렀다가 그제야 완전히 떨어졌다.
그제야 나는 주변에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일곱, 여덟 대나 막아서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류 선생은 멀지 않은 곳에서 두세 사람에게 제압당해 있었다.
류 선생
당신들한테 나를 막을 권리는 없어! 이건 폭행이잖아! 놔!
처절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을 뚫고 내 귓가에 전부 닿았다.
이택언도 멀리서 그녀에게 시선을 한 번 던졌고 햇빛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어두운 눈동자는 유난히 침침하고 차갑게 보였다.
잠시 후, 그 시선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방향을 틀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이택언
경찰에는 신고했습니다. 타세요.
6-7 핵심 자산
당신은 화예의 가장 중요한 홍보 창구이고 금융센터의 후속 전략 배치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바닷바람은 짭짤하고 떫은 습기를 머금고 얼굴을 향해 불어왔다. 손목에 케이블 타이에 묶였던 자리가 아직도 은근히 쓰라렸다.
이택언은 나보다 먼저 운전석에 올라타고 차문을 닫았다.
류 선생님의 울부짖는 소리는 여전히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바닷바람에 헝클어져 있었고 늘 시원시원하던 얼굴에는 눈물과 모래가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미행하던 사람을 날렵한 동작으로 바닥에 제압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다시 이택언의 차를 한 번 바라보았다. 짧게 망설인 뒤, 그래도 류 선생님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몸을 낮춰 쭈그려 앉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연
왜 그랬어요?
류 선생
……왜냐고요?
창백하고 갈라진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닫혔다. 그녀는 눈을 들어 힘겹게 고개를 받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류 선생
당신 토론 논제에도 있었잖아요. 왜 나한테 물어요?
류 선생
이 세상에서 더 강하고 더 힘 있어야 더 잘 살 수 있잖아요.
말하는 사이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온몸이 살짝 떨리며 그 무한한 힘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처럼 작게 쪼그라들었다.
류 선생
세상에 Evolver가…… 왜 나 하나 더 있으면 안 되는 건데요……
거센 바닷바람이 그녀의 말 끝을 찢어놓았다. 하지만 그 억울하고 절박한 말투는 선명하게 내 귀를 찌르고 들어왔다.
류 선생
……당신처럼 특별한 사람은 이해 못 하겠죠.
유연
선생님에게 저는 특별한 사람인가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다시 몇 번 몸부림쳤다.
류 선생
당신이 사람에게 Evol을 얻게 해줄 수 있는 그 핵심 아니었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를 QUEEN으로 지목한 문서는 이미 차단됐을 텐데.
Zehn 쪽에서도 아직 근거 없이 떠도는 정보는 있지만 더 이상 나를 명확하게 지목하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유연
어디서 들었어요?
내 다급한 질문에 그녀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시선을 두어 번 피한 뒤에야 더듬거리며 어떤 커뮤니티 이름을 말했다.
류 선생
처음에는…… 사실 나도 별로 믿지 않았어요.
류 선생
거기 적힌 말도 애매하고 흐릿해서…… 처음엔 별로 신경 안 썼어요……
그녀는 훌쩍 코를 들이마셨고 말투는 갈수록 더 흐트러졌다.
류 선생
그런데 며칠 전에 그 게시글이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지워졌어요!
류 선생
그리고 당신이 정말 평범한 사람이고 이 모든 것과 아무 상관도 없다면 왜 누군가가 당신을 감시하고 뒤쫓겠어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다시 급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류 선생
저는 당신한테 진짜로 어떻게 하려던 게 아니에요! 그냥 조금만 도와달라고 하려던 거예요!
류 선생
아주 조금만, 당신이라면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나는 그냥 조금만 더 잘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의 목소리가 한 마디씩 내 귀로 떨어졌다.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키며 눈빛에는 집착 어린 간절함이 가득했다.
바닷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눈앞의 모든 것이 회백색의 안개처럼 뒤엉기는 것 같았다. 가슴이 꽉 비틀렸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경계들이 어느새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풀려버린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귀 뒤로 넘겨주고는 쓸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유연
……미안해요.
차문을 열자 차 안의 익숙한 가죽 냄새가 원래 콧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바다 비린내를 밀어냈다.
이택언은 운전석에 앉아 휴대폰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주식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듯했다.
이택언
다 물어봤습니까?
의외로 그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별다른 의문도 담기지 않은 질문을 담담히 던졌을 뿐이었다.
석양과 바닷바람이 창밖을 스쳐 지나가며 그의 윤곽을 더 날카롭고 차갑게 눌러냈다.
유연
네, 다 물어봤어요.
아마 마음이 이미 무거웠기 때문인지 입을 열었을 때 나온 내 말에도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이택언이 가볍게 나를 흘끗 보더니 수납함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줬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었다가 내 휴대폰과 집 열쇠라는 걸 알아챘다.
이택언
그녀의 차에서 찾았습니다.
이택언
찾은 건 이것뿐입니다. 다른 소지품은 경찰이 처리할 겁니다.
그의 말투는 평온했고 오른손은 이미 시동을 걸어 차가 안정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었다.
열쇠에는 먼지가 조금 묻어 있었고 휴대폰 케이스에는 몇 줄의 긁힌 자국이 생겨 있었다. 화면에도 금이 하나 더 가 있었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손가락으로 무의식적으로 그 열쇠 뭉치를 움켜쥐었다. 금속 모서리가 손바닥에 옅은 붉은 자국을 남길 때까지.
오전의 햇빛이 차창을 통해 들어와 그의 옆얼굴 선을 더욱 또렷하게 비추었다.
이택언의 손은 느슨하게 핸들 위에 얹혀 있었고 시선도 줄곧 앞을 향해 있었다. 표정은 거의 어떤 파문도 읽히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자동차 엔진이 부드러운 저음을 냈고 그 소리 때문에 오히려 차 안은 유난히 조용하게 느껴졌다. 원래도 조금 답답했던 분위기를 더 무겁게 눌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이 침묵을 깨뜨렸다.
유연
……제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이택언
누군가 당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미리 대비책을 세웠습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앞쪽 도로 위에 안정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이택언
폭로자가 찾아왔을 때 나는 사람을 시켜 당신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 출퇴근 동선, 주변 사람들의 신원을 전부 한 번 걸러보게 했습니다.
이택언
그리고 당신 근처에서도 여러 방면의 상황을 더 주의해서 살피게 했고요.
그 말 속의 너무나 당연하다는 뜻에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연
계속 제 주변에 사람을 붙여둔 거예요?
이택언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으니까 모든 경호원에게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당신 생활에 영향을 주지도 말라고 했고요.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눈빛도 잠시 가라앉았다.
이택언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겁니다. 일이 벌어진 뒤에야 뒤늦게 수습할 수밖에 없었죠.
그의 말투에는 여전히 기복이 없었고 내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았다.
이택언
당신에게는 당연히 당신 나름의 판단과 자존심이 있습니다.
이택언
나에게도 그것을 존중할 만큼의 자본은 있고요.
그는 짧게 내게 시선을 던졌다가 곧 다시 도로에 집중했다.
나는 입술을 다물며 바로 받아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이택언이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입꼬리를 살짝 들었다. 차가운 기운이 아주 얕게 스쳤다.
이택언
그런데 요즘은 누군가 당신의 정보를 가지고 나를 협박하더니 이번에는 아예 당신을 납치해 갔군요.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떤 터무니없는 골칫거리를 평가하는 듯했다.
이택언
유연 대표님은 정말 인기인이시군요.
유연
그래서 직접 온 거예요?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스스로도 어떤 대답이 가장 충분한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택언
가능했다면 나도 다른 일을 하러 갔을 겁니다.
이택언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이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의 이성은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분해하고 다시 명확히 분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시간이 들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하지만 또 하나의 작지만 확고한 목소리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분명히 생각해야 한다고.
지금이 아니더라도 이것은 그냥 방치해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그의 곁에는 모든 그럴듯한 변명을 꿰뚫고 언제나 그를 바라보는 투명한 눈동자가 있었으니까.
이택언
당신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중심으로 삼아 계획하고 거래하기에 충분히 중요한 사람이에요.
이택언
당신은 화예의 가장 중요한 홍보 창구이고 금융센터의 후속 전략 배치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택언
내가 이렇게 할 가치가 있습니다.
날카롭고 공리적인 말이 차 안을 울렸다. 너무 빠르게 너무 당연하게 내뱉어져, 마치 너무도 자명한 판단처럼 들렸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스스로를 설득하는 말처럼도 들렸다.
차가 부드럽게 교차로를 지나쳤다. 바다 위로 반사된 햇살이 그의 눈 속에서 한순간 번쩍이다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택언
말이 나온 김에. 며칠 뒤, 나는 먼저 섬에 올라가 사전에 이야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택언
당신도 나와 함께 갑시다.
그는 반박할 수 없게 결론을 내 앞에 던져놓았다. 마치 통보처럼.
이런 일이 벌어진 이상 그가 이렇게 결정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것도 내가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이 두 글자가 조금 싫어졌다.
이택언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효율이 되고 역할이 되고 차갑디차가운 것이 되었다. 마치 나 역시 그 차가운 일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유연
저는 그런 것들 때문에 당신이 저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싫어요.
유연
이택언이랑 류 선생님은……다른 사람이잖아요.
차 안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나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랑”을 잃은 것은 이택언의 본의가 아니었고 굳이 말하자면 내가 만들어낸 어떤 잘못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그를 탓하고 있었다.
유연
미안해요.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나는 갑자기 손을 뻗어 그의 차량용 오디오를 켜고 싶어졌다. 아무 클래식 음악이나 틀어서 어색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넘어 메울 수도 없는 이 공백을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손을 움직이기 전에 그의 목소리가 먼저 떨어졌다.
이택언
말은 메시지가 아닙니다. 취소할 수 없어요.
이택언
당신이 말하는 중요함과 다름은 확실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택언
하지만 그건 내 문제입니다. 당신이 대신 생각할 필요도 없고 더더욱 사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앞길을 바라보며 우리를 그가 시야에 담고 있는 곳으로 혹은 그보다 더 먼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이택언
지금은 불확실한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택언
리스크, 변수, 돌발 상황. 작은 실수 하나가 추가적인 문제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이택언
어떤 일이든 대비책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나도 모든 일에 대비책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는 마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 같았다. 급류 같은 구름의 흐름이 언제든 그를 떨어뜨릴 것 같은데도 그는 줄곧 허공의 구름 끝 위에 서 있었다——
어쩌면 그 자신조차 아직 분명히 생각해내지 못한 어떤 이유를 위해.
또 한 번 커브를 돈 뒤 그는 손을 뻗어 오디오를 켰다. 바흐의 소나타가 차 안으로 흘러들었다.
이택언
섬에 올라가는 일에 관해서 정말 원하지 않는다면 연모시에 남아 있어도 됩니다.
이택언
보호를 신청하고 절차대로 진행하면 됩니다.
이택언
하지만 효율로 보자면 나는 이미 최적의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딱딱하게 말을 건네왔다. 말투 안에는 어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숨어 있었다.
이택언
당신이 결정하세요.
그런 그를 바라보자 줄곧 마음에 쌓여 있던 무언가도 조용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택언은 내 눈에도 더 선명한 모습이 되어가는 듯했다. 아마 그도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멈추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고 참지 못하고 그를 조금 놀려보고 싶어졌다.
유연
정말 제가 결정해도 돼요?
그는 말을 멈추고 곧장 나를 노려보았다. 이상하게도 예전에 푸딩이 더 욕심을 부리며 생선 말린 걸 하나 더 달라고 할 때면 그가 늘 보이던 표정이 떠올랐다.
유연
갈게요, 갈게요, 알겠어요, 알겠어요.
이택언
원하지 않는다면 안 가도 됩니다.
유연
가요, 갈게요. 저는 이 총재님 곁에 있는 게 좋으니까요——
잔잔한 선율이 졸졸 흘러나왔다. 멜로디는 겹겹이 앞으로 나아갔고 피아노의 주선율과 첼로가 서로 주고받으며 우리 사이에 부드러운 선율을 쌓아 올렸다——
마치 그의 눈도 몰래 살짝 휘어진 것 같았다.
6-8 “밤길” 괴담
혼자 밤길을 걸으면 무섭지 않아요?
6-9 지척의 천리
사람은 언제나 눈앞의 상황을 기준으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매번 지나간 기준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이택언과 함께 움직이는 게 확실히 더 안전했다. 게다가 우리 회사도 미리 섬에 가서 현장 준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납치 얘기는 꺼내지 않고 나연 언니에게 최대한 간략하게 상황을 공유했다.
그녀는 흔쾌히 이해해주며 이번 변동에 맞춰 섬 방문 인원 배치와 일정을 조율해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이틀 뒤, 나는 이택언과 함께 경제 특별 구역을 위해 새로 건설된 섬에 도착했다.
눈앞에 완공됐거나 아직 공사 중인 빌딩들이 즐비한 광경을 바라보며 이택언의 야망과 선견지명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멀리 뻗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따라 섬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로 들어갔다. 최상층 스위트룸은 넓고 환했으며 좌우로 열린 문 너머로 대칭을 이루는 서재와 침실 두 세트가 어렴풋이 보였다.
이택언은 외투를 현관 옷걸이에 툭 걸어두고 짐을 들고 왼쪽으로 걸어가더니 손을 들어 반대쪽을 가볍게 가리켰다.
이택언
당신은 저쪽을 쓰세요.
유연
그러고 보니, 당신이 여기 있으면 푸딩은 어떡해요?
이택언
집에 있어요. 돌봐줄 사람 따로 고용했고요.
유연
……여기 이렇게 넓은데 데려올 생각은 안 했어요?
이택언
푸딩은 고양이입니다. 새로운 환경에 가면 스트레스를 받아요.
이택언
그리고 예전에도 내가 푸딩을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진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깔끔하게 캐리어를 내려놓고 서류가방을 서재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하지만 내게 계속 물을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마치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그는 저 높은 곳의 '이 총재'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명확한 경계가 그어졌다.
이택언이 바쁘다는 건 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그 바쁨을 직접 목격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그는 나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공간의 일부를 함께 나눠 쓰는 화분 하나 혹은 우연히 들어온 한 줄기 햇살 같았다.
이택언
분석은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결론만 말하세요. 이 일, 당신들 쪽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까?
이택언은 거실 소파에 기대앉아 두 손을 깍지 낀 채였다. 태블릿의 차가운 빛이 그의 얼굴을 더욱 냉엄하게 만들었다.
이택언
처리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처리할 수 없다면 이어받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있습니까?
이택언
내가 질문을 하나씩 하게 만들지 마세요.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조금 버벅거리기 시작했고, “곡선”, “단기 변동” 같은 말만 반복했다.
이택언
됐습니다. 논리를 정리한 뒤 다시 연락하세요.
“삑”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그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거의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회의가 곧바로 연결되었다.
이택언
우선 결론부터 간단히 말하세요. 시간 낭비하지 말고.
“시간”, “논리”, “효율”, “결과”…… 이런 단어들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들을 계속 압축했다.
때로는 그것들이 그의 미간에 맺힌 매듭으로 꼬이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고압으로 뭉쳤다.
이택언
사고 방향에 문제가 많습니다.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군요.
“삑.” 또 하나의 회의가 끝났음을 알리는 듯했다. 그리고 곧바로——
어딘가 귀에 익은 호칭이 들려와 나는 저 멀리 힐끗 바라보았다.
화면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대는 예전에 이택언과 배 위에서 내기를 했던 남자인 것 같았다.
그들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때로는 낚시를 하러 가거나 이택언이 속으로 상대의 골프 실력을 조용히 혹평하게 만드는 골프 약속도 잡곤 했다.
자오 총재
이 총재님, 이번엔 변무팀을 아주 제대로 꾸려오셨군요.
두 사람의 말투에는 온기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팽팽하게 맞서는 기색이 감돌았다.
이택언
자오 총재님이 만반의 준비를 하셨으니 저희 쪽도 당연히 진지하게 임해야죠.
나는 그가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입가에는 오만한 곡선을 올린 채, 고압적이고 단호하게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계약의 세부 조항을 다투는 모습을 보며 한동안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즈니스 자리에는 분명 법무팀과의 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택언이 몇 번이고 비즈니스 쾌거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렇게 법무팀에 압박을 넣는 것만으로 가능했던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누군가와 반쯤 농담처럼 풍수 이야기를 나누고 상대의 골프 실력을 놀리고 어떤 브랜드의 털 제거 브러시가 좋은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상대에게서 같은 정도의 신뢰와 호의를 얻기도 했다.
비즈니스 협상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언제나 협상 테이블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업계로 뻗어 있는 협력자들도, 단지 그가 “화예의 이 총재”이기 때문에만 함께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오만하고 심지어 비정하기까지 한 이 눈도, 예전에는 살짝 휘어지며 거의 어쩔 수 없다는 듯 상대에게 배를 뒤집은 푸딩의 사진을 보여주곤 했었다.
그 회의가 끊긴 뒤, 방에는 마침내 짧은 휴식이 찾아왔다.
그는 화면을 잠그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곧 커피머신이 보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은은한 향기가 점점 온 방 안을 채웠다.
이택언은 눈을 내리깔고 손에 든 컵을 바라보며 조용히 우유를 넣고 커피를 따르고 고르게 저었다.
마치 한순간에 자신만의 휴식 의식을 끝낸 뒤, 아무 빈틈도 남기지 않고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을 수 있는 사람처럼——
화예의 총재로서, 다음 의사결정 지시를 내리기 위해.
시간은 이 작은 섬 위에서도 끊임없이 돌아갔다. 하루하루의 바쁨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분명 같은 지붕 아래 있는데도 나와 이택언이 함께하는 순간은 점점 더 적어졌다.
그의 생활은 극도로 규칙적이었다. 아니, 더 규칙적이 되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매일 수많은 회의와 상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사람 같았다.
그는 여전히 주방에 들어가는 시간을 남겨두고 갖가지 식재료를 귀찮아하지 않고 손질했다.
때로는 여전히 고요한 밤 아래, 통유리창 옆에 서 있기도 했다. 다만 그 침묵하고 곧은 뒷모습은 어떤 방해도 환영하지 않는 듯했고, 오직 대지 위의 불빛들만이 그의 곁에 머물렀다.
나는 멀리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런 방식으로만 그와 같은 밤빛 속에 녹아들 수 있는 것처럼.
또 한 번의 깊은 밤, 그는 영상 회의를 끊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협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입가에 떠올렸던 그 작은 웃음을 거두고 이미 꺼진 화면을 평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별빛 몇 점이 희미하게 떠 있었고 야자수 잎은 밤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만큼 또 이렇게 멀리서 발걸음을 멈췄다. 원래는 방으로 돌아가 쉬려고 했지만 알 수 없는 충동에 결국 이택언 앞까지 걸어갔다.
그는 잠시 멈칫한 듯했고 뒤늦게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유연
방금 그 회의…… 조금 많이 몰아붙이는 것 같았어요.
이택언
내 태도가 충분히 강경하고 정확하지 않다면, 상대가 왜 화예와 협력해야 합니까?
그의 말투는 너무나 당연해서 나는 한순간 그 자리에 말문이 막혔다.
유연
왜냐하면…… 당신의 판단, 당신의 인품과 명성을 믿으니까요?
이택언
내가 지금 내 태도로 그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유연
하지만 당신은 예……
이택언
“하지만 예전의 나는 이러지 않았다”, 맞습니까?
그는 회의 중 논리가 맞지 않는 안건을 끊어내듯 내 말을 끊었다. 동시에 다시 태블릿을 집어 들고 메시지 몇 줄에 답했다.
이택언
당신도 이 세계가 변했다는 걸 알고 있잖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예전과 다를 수밖에 없죠.
이택언
설령 세계가 변하지 않았더라도 한 번 정하면 영원히 통하고 조정할 필요 없는 전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택언
사람은 언제나 눈앞의 상황을 기준으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매번 지나간 기준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이택언은 자신의 목소리를 낮고 느리게 눌렀다. 마치 내가 원래 알고 있어야 할 상식을 진심으로 인내심 있게 가르쳐주려는 듯했다.
이택언
누군가는 내가 충분한 결단력을 갖추길 바랍니다. 누군가는 내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길 바라죠. 당신은요?
이택언
당신은 내가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이택언
당신이 계속 찾고 있는 “예전의 이택언”은 대체 “누구”입니까?
그 순간 나 역시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 중 하나가 된 듯했다.
이택언의 말투는 분명 부드러워졌지만 나는 오히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눈앞에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다정한 얼굴, 고민하던 얼굴, 지친 얼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
마지막에는 그것들이 전부 가장 생생한 한 얼굴로 변하는 것 같았다. 사랑으로 가득한 눈을 가진 얼굴로.
그 눈에는 많은 세계가 담겨 있었고 작디작은 그와 작디작은 나도 담겨 있었다.
나는 침묵하다가 결국 단단히 고개를 들었다.
유연
저는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길 바란 적 없어요. 하지만 과거의 당신을 반드시 찾아올 거예요.
한때 당신이 저에게 말했던 것처럼. 물러서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면서.
이택언
그런 것까지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말투에는 숨기기 어려운 초조함이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손끝에 따뜻한 감촉이 닿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갑자기 머릿속을 덮쳤다.
눈앞의 모든 것이 흐릿하게 뒤틀렸고 뒤섞인 빛과 그림자가 조금 낡고도 따뜻한 장면으로 응결되었다.
햇빛이 푸른 잎 사이로 쏟아지고 이택언은 나무 아래 서 있는 듯했다. 그는 손을 뻗어 나무줄기를 쓰다듬으며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자세히 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장면을 더 또렷하게 보려 했지만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눈앞에 있는 것은 그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아직 조금 휘청이는 내 몸을 받치고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혹시 내 Evol이 또 무의식적으로 발동한 걸까? 이건 이택언의 어느 순간에 있던 과거일까?
내가 조금 멍해 보였는지 이택언은 내 이마의 온도를 재보았다.
이택언
저혈당입니까? 아니면 최근에 수면이 부족한 거예요?
이택언
섬의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유연
괜찮아요…… 아마 병은 아닐 거예요.
머릿속의 그 푸르고 무성한 나무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장면 속 햇살도 너무나 따뜻해서 허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 내 몸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유연
예전에 어떤 공원에 간 적 있어요?
이택언
얼마나 예전 말입니까?
유연
음…… 어쩌면 예전이 아닐 수도 있고……
이택언
최근에는 없습니다.
내가 선뜻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는 일단 대답을 내어준 듯했다.
이어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더니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내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이택언
당신은 정말 모든 “돌발 상황”의 집합체군요.
유연
저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리고 저 괜찮아요. 조금 쉬면……
이택언
그 말의 신뢰도는 매우 의심스럽네요.
그는 거의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내 어깨를 누른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침대에 제대로 눕게 했다.
이택언
내일은 스스로 상태를 보고 쉬세요. 병원이 어디 있는지는 압니까?
유연
알아요. 저 진짜 바보는 아니거든요.
이택언
……
이택언은 오히려 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말하려다 만 기색에 얇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결국 가늘고 긴 일직선으로 다물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자 내 눈앞에는 방금 보았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어쩌면 지금 꺼내기에는 조금 맞지 않을지도 모를 질문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유연
우리 돌아가면 저랑 중앙공원에 한 번 가줄 수 있어요?
그는 침묵한 채 시선을 내 얼굴 위에 잠시 더 머물렀다. 마지막에는 그저 나를 위해 방의 불을 꺼주었다.
이택언
일단 일찍 쉬세요. 나는 조금 뒤에 회의가 하나 더 있습니다.
마지막 영상 회의가 끊긴 뒤 이택언은 말없이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에서 나온 따뜻한 물이 그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그는 멀리 있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지금은 이미 그가 평소 잠드는 시간보다 30분 늦어져 있었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조깅을 나가야 했고, 5시 반에는 직접 아침을 만들어 먹어야 했으며, 6시부터는 새로운 하루의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일정은 마땅히 그에게 확신을 주어야 했다. 금융센터의 모든 것도, 자신이 이전보다 더 견고한 기반을 쌓고 있음을 확신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는 자신을 강하고, 선견지명이 있으며, 리더십과 재력을 갖춘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몇몇 협력 관계를 계속 유지시킬 수 있었다.
단순한 기업인, 하나의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모든 것은 그의 절대적으로 오류 없는 판단을 따라 가장 올바른 길 위를 걸어가야 했다.
유연
“하지만 예전의 당신은……”
유연
내가 과거의 당신을 찾아올 거예요.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가 불쑥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를 통해 그는 어딘가 자신의 과거 그림자 같은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나 판단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작고 세밀한 시선들과 점점 쌓이는 피로가 끊임없이 그에게 상기시켜주는 것 같았다——
일은 본래 이런 것이 아니었다고.
그는 예전에는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이렇게까지 강경하고 오만해질 필요도 그렇게 많은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던 것 같았다.
이택언은 욕실에서 나와 머리를 말렸다.
그는 빨리 잠들어 쉬어야 했다. 완벽한 신체 관리 역시 그가 보여주어야 할 상징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잠에 빠져들기 전 투명하고도 고집스러운 그 눈이 다시 한 번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그에게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6-10 다만 머릿속의 그 목소리는 여전히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만일을 대비해 나는 그래도 섬의 병원에서 한 번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역시 가벼운 과로와 수면 부족 말고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포럼 개최일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조용하던 작은 섬에도 직원들과 손님들이 차례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소란은 모든 것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도, 이택언도, 더욱 바빠졌다.
우리는 서로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예전'에 대한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마치 지금 당장 합의점을 이끌어낼 수 없는 주제를 암묵적으로 잠시 내려두기로 한 것처럼.
이택언의 전화 회의는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났고, “감독기관”과 “푸 총재”라는 두 단어도 그의 입에서 점점 더 자주 등장했다.
심지어 그가 그 사람을 언급할 때마다 말과 말 사이에 어딘가 의미심장한 치켜세움이 담겼다. 마치 푸청장이 정말로 경제 특별 구역이 순조롭게 추진된 공신인 것처럼.
이게 비즈니스 세계의 관례적인 표현이라 해도, 그는 원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가려서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더욱이 무의미한 인사치레에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가 굳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는 걸까?
저녁 식사 시간, 나는 마침 고층 레스토랑에서 혼자 식사하고 있는 이택언을 보았다. 별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냈다.
유연
이 총재님, 혼자 식사하세요?
그는 말없이 나를 흘끗 보더니 계속 우아하게 자기 접시 위의 오리 가슴살을 썰었다. 딱히 나가라고 하지는 않았다.
곁에 있던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왔고 나는 바로 이택언과 같은 요리를 주문했다.
유연
요즘 계속 푸청장 얘기가 들리던데요. 아직도 골치 아픈 거예요?
그는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적당히 소스를 조금 찍고 그 오리 가슴살 한 조각을 천천히 씹어 삼킨 뒤에야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택언
당신이 직접 조사하지 않았습니까?
유연
……겉으로 드러난 정보 말고는 사실 아무것도 못 알아냈어요.
조금 민망해진 나와 달리 그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택언
당신은 조사할 수 있는 건 이미 전부 조사했습니다.
유연
그럼 요즘 당신이 하는 영상 회의랑 전화들은……
나는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목소리도 낮췄다.
유연
그 거물들을 통해서 좀 더 상황을 파악하고 그다음에 그 사람을 처리하려는 건가요?
하지만 이택언에게는 조금의 “보안 의식”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태연하게 자신의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이택언
말하는 걸 보니 내가 뭘 하려는지 꽤 잘 아는 것 같군요.
유연
구체적인 건 당연히 모르죠. 그래도 당신을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으니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요.
유연
그래서 제 추측이 맞았나요?
이택언
이 일은 당신과 관계없습니다.
유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와 아주 잘 아는 척을 했고 예전에는 일부러 저한테 초대장도 보내왔잖아요.
유연
그리고 요즘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그 사람 이야기를 할 때도 딱히 저를 피하지 않았고요.
유연
그건 당신도 제가 이걸 알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뜻 아닌가요?
이택언
그럼 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그렇게 많이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택언
이 일은 당신과 관계없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반복했다. 말투는 아까보다 한층 더 딱딱했다. 마치 내가 그가 꽤 불쾌해하는 경계선을 밟은 듯했다.
그 위압감에 나도 순간 답답해졌다. 모든 것을 오직 그가 결정할 수밖에 없는 듯한 느낌은 유난히 불편했다.
나 역시 조금 성질이 올라 아예 당당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저와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당신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유연
당신은 대표님이고, 당신의 행동과 결정은 저에게도, 유연 제작사에도 영향을 줘요.
유연
그러니까 당신은 저에게 책임을 져야 하고 저를 안심시켜줘야 해요.
대단히 억지스러운 말을 엄청나게 당당하게 늘어놓았다.
이런 명분 있는 말이야 누구든 할 수 있지 않나?
이택언은 잠깐 멈칫하더니 나한테 기가 막혀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 같았다.
이택언
……내가 당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요?
유연
당연하죠. 그것도 반드시요.
잘라 말하며 증명하듯 힘차게 고개까지 끄덕였다.
아까보다 더 짙은 침묵이 우리 사이를 흘렀다. 그는 말이 없었고 나도 한 치 물러서지 않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결국 그는 손을 들어 미간을 꾹 누르고 곁에 있던 화이트와인 잔의 다리를 잡았다.
이택언
패가 무엇이든 판에 끼어든 이상 반드시 베팅을 해게 됩니다.
이택언
베팅을 해야 한다면 손에는 반드시 칩이 있어야 하고요.
이택언
그렇게 되면 모든 것에는 개입하고 조작할 여지가 생깁니다.
잔이 다시 테이블 위에 놓일 때 가벼운 소리가 났다. 마치 더 깊고 먼 곳에 있던 무언가도 함께 내려앉은 것 같았다.
이택언
그가 푸 “총재”인 이상, 그에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신분과 자원이 있고 그 자리가 가져오는 규칙도 지켜야 합니다——
이택언
설령 본인이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요.
그의 사고를 따라가자 머릿속에서 뒤엉켜 있던 실타래가 마침내 하나의 실마리를 드러낸 것 같았다.
유연
그러니까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유연
겉으로 드러난 그의 신분을 노려서 큰 판세 자체로 그를 묶어두면 더는 당신에게 간섭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는 거군요?
어두운 눈동자 속으로 거의 동의에 가까운 파문이 스쳐 지나갔다.
이택언
설명할 건 이미 다 설명했습니다.
이택언
그리고 이틀 뒤면 자연히 결과가 나올 겁니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그래도 기분은 가벼웠다. 어쨌든 이택언과의 이런 “줄다리기”에서 나도 작은 승리를 거둔 셈이었으니까.
유연
좋아요…… 그럼 “영업 기밀”이라고 생각할게요.
유연
이택언, 정말 대단하네요!
나는 조금 유치하게 그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그리고 거의 더없이 즐겁게 그 순간 그의 복잡미묘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다음 요리가 식탁 위에 올라왔고 이택언도 곧바로 밖으로 드러난 작은 표정들을 모두 거두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이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도 조금씩 그 생생한 눈동자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레스토랑을 나섰을 때, 저녁빛은 이미 고층 빌딩의 유리창을 통해 눈앞에 온통 펼쳐져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화려한 조명이 층층이 펼쳐지고 있었고 은은한 음악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것이 내일 포럼 개막을 위해 준비하는 라이트 쇼 리허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너무나 많았지만 이런 장면을 보자 마음은 언제나 조금 가벼워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는 이택언의 손을 붙잡았다.
유연
이택언, 우리 가서 봐요!
사실 볼 만한 것도 없었다.
이택언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원래 이런 행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업체도 이미 오래전에 효과 시연 자료를 보여주었다.
휴식 시간 자체가 귀한데 이런 곳에 쓰는 것은 완전히 낭비였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걸음을 옮겨 조금 들뜬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갔다. 마치 그것이 정말 놓쳐서는 안 될 좋은 풍경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건 그답지 않았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또 하나의 질문이 뒤따라왔다.
정말 그답지 않은 걸까?
하지만 동시에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도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택언
그래, 예전의 너라면 이렇게 했을 거야. 그녀와 함께 이런 무의미한 일을 했겠지.
“예전.”
또 “예전”이었다.
그는 “지금”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속일 수 없었다. 하지만 좋고 나쁨을 담지 않은 단어 하나에 감정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오색찬란한 빛이 그들 앞의 길을 밝혔다. 옆의 벽면에는 각 시간대의 시계가 차례로 늘어서 시간을 가장 체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열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 걸음씩 그를 이끌고 표준시의 차이를 하나하나 거슬러 온 세계를 건너갔다.
그리고 마치 어떤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손바닥에는 다른 사람의 온기가 졸졸 전해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느리고 서툴게 맞물려 들어가며 똑딱이는 작은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의 시간이 움직이는 소리처럼.
그리고 그가 깨닫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유연
이택언, 내일이면 포럼이 시작되잖아요. 혹시 긴장돼요?
이택언
그게 긴장할 일입니까?
유연
좋아요. 긴장하는 건 저 혼자뿐이었네요.
이택언
그렇다고 내가 당신과 같이 긴장해줄 수는 없잖습니까.
삐죽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는 며칠 동안 보류해두었던 그 화제가 사실 한 번도 정말 지나간 적 없다는 것을 더없이 선명하게 깨달았다.
그녀의 모습이 언제나 그의 옆에 비스듬히 있었다.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것처럼.
문제는 정말 해결된 걸까? 눈앞에서 얻은 것은 정말 그가 원하는 것일까?
그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하나의 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왜 그녀가 당연하게 그에게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자신이 반드시 말해줄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머릿속의 그 목소리는 여전히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이택언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요.
찬란한 빛이 그의 눈동자에 비쳤고 그녀의 미소도 함께 밝혀주었다.
다만 “원래 그랬다”는 것은 결코 그의 유일한 기준이 아니었다.
6-11 성대한 회의 전야
태양이 다시 떠오를 때 모든 것이 새로운 이정표로 들어설 것이다.
01
동해만
운항 변경 안내
즐거운 여행 되시고 협의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연모 여객 서비스 유한회사
안내 말씀
발표 시간 20xx-xx-xx 0920
승객 여러분께 안내드립니다. 연모시 국제금융센터 건설 정상회담 개최 기간 동안 시민 여러분의 이동 편의를 위해 내일부터 매일 연모시 부두—연모 경제특구 부두 노선의 운항편을 여러 차례 증편합니다. 당사 공식 계정 및 홈페이지에서는 내일 오전 7시부터 해당 노선 승선권을 사전 판매할 예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운항 시간표 및 당일 운항표를 클릭해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연모시 수상 운항은 기상 상황 및 파도 변화에 따라 수시로 조정될 수 있습니다. 임시 운항 변경으로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연모 여객” 공지를 계속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02
유연 제작사
모든 것은 평소처럼
한낮 아래에서는 별다른 이상도 없고 대체 불가능한 것도 없다.
직원A
흑흑, 사장님 안 계신데 왜 우리는 아직도 이렇게 바쁜 거야……
직원B
우리가 바쁜 거랑 사장님 본인이 있느냐 없느냐가 무슨 상관인데…… 해야 할 일이 사장님 없다고 자동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직원A
이 포럼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직원B
너 그만 울어. 우리 쪽 토론 프로그램이야말로 지금 한창 바쁠 때라고!
직원B
게다가 이 기세라면 2기 3기까지 하는 건 거의 확정일 것 같은데……
직원A
하아…… 일이 없고 안 뜨는 것도 안 좋지만 일이 너무 많고 너무 잘 떠도 안 좋네……
직원B
하자, 하자! 일은 언젠가 끝나겠지——
직원A
그런데 너희 쪽은 왜 요즘 조명 선생님을 몇 명이나 빌려갔어?
직원B
하아…… 그 얘기만 나오면 머리 아파.
직원B
너 류 선생님 알아?
직원A
알지. 우리 현장에서 이름난 조명 선생님이잖아. 혼자 두 사람 몫은 하는 분.
직원B
요즘 그분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당분간 일 못 한다고 해서 여기저기서 사람을 긁어모으는 중이야.
직원B
그리고 그분은 혼자 둘 몫이 아니라 적어도 지금 기준으로는 셋 몫이었어.
직원A
……그럼 너희는 진짜 골아프겠네.
03
연모 경제특구
빛이 닿지 않는 곳
그의 시선을 따라간다면 어쩌면 같은 미래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연
이택언,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유연
확실히 예쁘긴 하지만 설마 자기네 회사 라이트 쇼에 넋을 빼앗긴 건 아니죠?
이택언
당신은 진짜 모든 가능성 중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걸 골라내는 재주가 있어요.
이택언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유연
무슨 생각인데 그렇게 오래 해요?
이택언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유연
네네, 대표님은 제일 신비롭고, 식견이 높고, 멀리 내다보시죠.
이택언
……
유연
이택언, 괜찮아요. 사실 말해줘도 돼요.
유연
혹시 정말 저랑 같이 내일 개막식 때문에 긴장하고 있는 거예요?
유연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다 잘될 거예요.
이택언
……
유연
웃었죠.
이택언
맞습니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걸 보면 웃지 않기가 어렵죠.
이택언
됐습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돌아가죠.
이택언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 오늘은 일찍 쉬어야 합니다.
6-12 협상 테이블
여러분, 화예는 각 측과 함께 연모 경제특구 건설의 새로운 국면을 계속 열어가고자 합니다.
포럼이 정식으로 막을 올린 아침, 섬 전체가 북적이고 소란스러워졌다.
마침내 패가 테이블에 펼쳐졌다. 모든 칩이 차례로 테이블 위에 올라왔고, 플레이어들은 자리에 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메인 회장인 광장 역시 이미 화려하고 성대하게 꾸며져 있었다. 의전 차량이 연이어 들어왔고, 미디어 구역에는 장총과 단포 같은 카메라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뜻밖에도 양기준이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경제특구라면 반드시 연모시청도 관여했을 테니, 그가 이곳에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와 멀리 떨어져 있기로 했다. 괜히 문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개막식이 정식으로 시작되었고, 금융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높은 단상 위에 앉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이택언은 정교하게 재단된 정장을 입고 정중앙에 오만하게 앉아 있었다.
사회자가 차례로 내빈을 소개했고 이미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리허설을 마친 개막식은 절차에 따라 하나씩 진행되었다.
손에 든 순서표를 보지 않아도 다음에는 이택언이 포럼 주최 측 중 한 사람으로 무대에 올라 축사를 할 차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회자
다음은 이번 포럼의 첫 번째 순서입니다——
사회자
연모시 금융감독기관의 푸 선생님을 모시고 축사를 듣겠습니다.
유연
……?
나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고 반사적으로 손에 든 순서표를 확인했다.
흰 종이 위 검은 글씨에는 분명 이전에 편성된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푸청장이 첫 번째로 축사를 하게 된 걸까?
하지만 단상 위의 이택언은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 나는 생각에 잠겼다.
높은 단상 위에서 남자는 점잖고 여유로운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벌새 브로치는 차가운 빛을 반짝였다.
푸청장
내빈 여러분, 그리고 언론 관계자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푸청장
이번 국제금융센터 건설 포럼에 초청받아 여러분과 함께 연모시 금융 발전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논의하게 되어 매우 영광입니다.
푸청장
고품질 발전은 언제나 우리 모두의 공동 목표입니다.
푸청장
자본시장은 대국적 흐름에 복무하는 체제와 메커니즘을 구축해야만 스스로의 규범화와 안정, 그리고 장기적인 발전을 더 잘 실현할 수 있습니다.
푸청장
바로 화예를 대표로 하는 기업들이 등장하고 각종 계획과 제도의 정착에 전력을 다해 협조하고 지원해주었기에 시장의 효율적인 순환이 한층 더 촉진될 수 있었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고 거창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이번 포럼을 빌려 화예를 어떤 모범으로 세우는 듯했다.
나는 단상 위 푸 총재의 넘쳐나는 찬사를 바라보며 마음속이 복잡했다.
푸청장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창구이자 새로운 허브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번 포럼이 원만한 성공을 거두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더 전문적이고, 더 예민한 감각을 지닌 기업가들이 그의 발언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택언은 여전히 자기 자리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 입가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고 마치 한 편의 희극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분명 그 역시 카드 테이블 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더 깊고 먼 막후에 서서 모든 흐름과 발전을 조정하는 듯했다.
사회자
푸 선생님의 축사에 감사드립니다. 이어서 이번 포럼의 주최 측 중 한 분인, 화예 총재 이택언 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이택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정적인 걸음으로 단상 앞으로 향했다.
조금 전의 푸 총재와 달리 이택언이 앞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 회장 전체가 몇 분은 더 조용해진 듯했다.
모든 소란과 웅성거림이 그의 등장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길을 비켜주는 것 같았다.
이택언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이택언
이번 국제금융센터 건설 포럼의 개막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택언
오늘 참석하신 분들이라면 모두 감지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전 세계 경제 구도는 깊은 조정기를 지나고 있으며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택언
우리는 과거와 전혀 다른 많은 기회를 보고 있으며 동시에 수많은 도전에도 직면해 있습니다.
그의 말은 빠르지 않았고 목소리는 침착했다. 불필요한 포석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이택언
연모 경제특구의 설립은 바로 연모시청 및 관련 감독기관이 현재의 정세에 내놓은 강력한 대응이자 각 기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택언
또한 여러분이 화예를 인정하고 지지해주신 덕분에 연모시 오프쇼어 금융센터 역시 순조롭게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일부러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떤 뜻이 담긴 듯 몸을 푸 총재가 앉은 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였다.
이택언
동시에 이 자리에 계신 모든 기업인 여러분도 깊이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이택언
강력한 국제금융센터는 지역 자원 배분 능력과 글로벌 금융 영향력을 높이는 중요한 지렛대입니다.
이택언
오늘 이 포럼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것 역시 복잡한 정세 속에서 각 측이 적극적인 대화와 협력, 그리고 미래를 향한 선택을 했다는 중요한 증명입니다.
이택언
화예는 업계 선도 기업으로서 미래 정세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에 대응함에 있어 언제나 상호 협력과 공동 이익, 위험의 공동 대응과 수익의 공유를 관철해왔습니다.
이택언
그리고 신기술과 새로운 사상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협의하여 새로운 규칙을 세우고 시장 나아가 전 세계 금융 시스템에 신뢰를 부여할 것인가——
이택언
이는 화예와 여러분 모두가 새로운 변화 속에서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이자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이택언
연모시청의 발전과 특구 계획을 전력으로 지원하는 것과 관련하여 화예는 다음 네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지 않았고 쓸데없는 포장이나 수식도 많지 않았다.
단상 아래의 기업가들과 거물들은 어디에서 왔든 하나같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치 모든 야심과 계산이 그의 앞에 놓이는 순간 전부 다시 정리되고 배열된 뒤, 존속과 폐기, 경중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택언
여러분, 화예는 각 측과 함께 연모 경제특구 건설의 새로운 국면을 계속 열어가고자 합니다.
이택언
감사합니다.
이택언은 몸을 돌려 자기 자리로 향했다. 마치 이미 가장 화려한 막을 내린 사람처럼.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금융센터의 설립을 하나의 기원점으로 삼아 모든 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개막식이 끝난 뒤에도 회장의 조명은 여전히 밝았다. 그러나 인파는 이미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사, 탐색, 서로 주고받는 명함들은 수면 아래 숨어 있는 암초 같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이후의 인터뷰 일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한 사람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를 본 순간, 나는 티 내지 않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푸청장은 여전히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익숙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걸음은 확신에 차 있고 여유로웠다. 마치 처음부터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푸청장
지난번에는 미처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푸청장
듣기로는 전에 대표님 쪽에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이제는 다 잘 처리되었겠지요?
가볍게 던진 “해프닝”이라는 말은 너무 많은 일을 가리킬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 나 역시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탐색인지 아니면 어떤 도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모든 추측을 마음속에 눌러둔 채 똑같이 애매한 말로 받아쳤다.
유연
푸 총재님께서는 일도 많으실 텐데 저 같은 프로듀서 한 명의 상황까지 신경 쓰실 줄은 몰랐네요.
푸청장
유연 대표님은 아무 프로듀서가 아니시니까요.
푸청장
중요한 프로젝트들이 적지 않게 대표님과 관련되어 있으니 신경 쓰지 않기도 어렵습니다.
나는 숨이 살짝 조여들었다. 능력을 써서 그의 기억을 들여다볼까 생각하던 찰나 위겸과 화예 임원 몇 명이 곧장 이쪽으로 걸어왔다.
위겸
푸 총재님, 실례합니다. 특별 구역 후속 배치와 관련된 몇 가지 세부 사항이 있어서 이 총재님이 따로 자세한 말씀을 나누고 싶으시다고요.
겸손하고 정중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말 속에 담긴 기세는 거절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딘가 이택언 본인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
푸 총재는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손을 저었다. 시선도 거의 주지 않았다.
푸청장
“사소한 세부사항”이라면 굳이 지금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까?
푸청장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이야기하면 되겠죠.
위겸
하지만 곧 해외 프로젝트를 담당하러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직 국내에 계실 때 관련 세부사항을 최대한 마무리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공기가 순간 굳었다.
푸청장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늘 여유롭던 외피에 처음으로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위겸이 적절한 타이밍에 살짝 놀란 척을 해 보였다.
위겸
아직 말씀을 못 들으셨나요?
위겸
경제 특별 구역이 순조롭게 추진되는 데 핵심적인 지원을 해주셨잖습니까.
위겸
윗선에서는 그만큼 역량이 출중하시니 해외 협업 관련 업무 전체를 총재님께 전담시키면 어떻겠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몸을 숙였다.
위겸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 절차를 확인하지 않고 섣불리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위겸
감독기관의 절차는 저희보다 더 엄격하니 아마 모든 부분이 확정된 뒤에 공식 통보가 되는 것 같습니다.
푸청장의 안색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그제야 시선이 위겸 위에 내려앉더니 그를 통해 이 모든 일의 배후에서 오랫동안 조용히 판을 짜온 어떤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내 위를 한 번 훑고 지나갔다. 결국 다시 미소를 올렸다.
푸청장
참 공교롭군요. 유연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려 할 때마다 작은 변수가 생기니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좋은 일에는 시련이 따른다는 뜻이겠죠.
약간 어두워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승진시켜서 해외 업무를 맡기는 것으로 내보낸다……
이택언이 단시간 안에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인 것 같았다.
무영등의 하얀 빛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공기 속에 소독약의 자극적인 냄새가 퍼져 있었다.
고급 연구원 몇 명이 실험실 한켠에 서 있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등은 곧게 세운 채 끝까지 논리적으로 맞섰다.
연구원
Evol…… Evol이야말로 미래입니다…… 진화의 유일한 방향입니다——
주기락
물론이죠. 그것은 B.S.의 가장 중요한 신념이니까요.
하지만 다음 순간, 그 금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굽어졌다. 그 안에는 어떤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주기락
명령합니다. 당신들은——내 지시에 따르고 절대 배신하지 마세요.
6-13 찬사가 넘쳐흐르다
당신은 그저 그의 위업과 이름을 찬양하기만 하면 된다.
01
상업지구
경제 포럼 생중계
안녕하세요, 금융 지식 미니 강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시야를 넓혀봐요~
스트리머
안녕하세요~ 여러분, 최근 국제금융센터 건설 포럼 기간이죠. 저 핑도 여러 일정에 참여했는데요~ 오늘 방송에서는 이번 포럼에 대해 여러분께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스트리머
어떤 분이 질문해주셨네요——“특구가 밤낮없이 공사를 해서 완공됐고 준공 시간이 예상보다 20%나 단축됐다던데 그럼 포름알데히드는 어떡하나요?”
스트리머
하하하하, 이분 꽤 잘 아시네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빌딩을 실제로 사용하기 전에 관련 Evolver를 불러 공기 정화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화예의 결단과 실력이죠! 현장에 오는 분들이 국내외 유명 기업가들인데 당연히 건강도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요?
스트리머
자, 그럼 이제 오늘 방송의 “메인 요리”를 정식으로 올려볼게요! 먼저 이 총재님의 개막식 발언을 중심으로 이번 포럼의 가장 큰 주제인——“대화, 협력, 규칙, 신뢰”를 자세히 분석해보겠습니다.
스트리머
우리가 알다시피 이번 포럼에 초청된 업계는 굉장히 폭넓습니다. 투자 업계뿐 아니라 실물 산업의 거물들과 해외 은행가들도 대거 참석했죠! 여기서 우리는 화예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각 업계의 거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모두 함께 이후의 전망과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는 겁니다.
스트리머
이때 “규칙”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합니다! 모두가 함께 이야기하는 내용은 자연히 서로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 어떻게 모두가 만족하고 윈윈할 수 있는 안정적인 새 규칙을 만들 것인지겠죠.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화예를 필두로 한 수많은 기업들이 이제 현재 시장에는 새로운 기반이 필요하며 새로운 동맹 집단을 구성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스트리머
핑이를 팔로우하고 지식의 장벽을 허물며 내 주변의 경제 속으로 들어가봐요——
02
중앙대로
번영의 시작점
축하하고 감탄하라. 화예의 결단 아래 이것이 바로 최고의 시대다.
연모시 국제금융센터 건설 포럼 개막
여러 국가의 기업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새로운 기회를 논의, 금융 구도의 향방에 광범위한 관심 집중
최근 연모시 국제금융센터 건설 포럼이 경제특구 휘펑 회의센터에서 정식으로 개최되었다.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 온 기업가, 금융기관 대표 및 업계 인사들이 포럼에 모여 산업 협력, 자본 연계, 기술 역량 부여, 지역 협력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심도 있는 교류를 진행했다.
참석자들은 대체로 글로벌 경제 환경이 계속 변화하고 금융시장의 연계가 끊임없이 깊어지는 배경 아래, 연모시 국제금융센터 건설 포럼이 업계 간 교류와 상호 참고를 강화할 뿐 아니라 향후 금융 정세 변화를 관찰하는 중요한 창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포럼에서 드러난 정책 방향, 협력 신호, 시장 기대는 앞으로 한동안 지역 자본 배치, 금융 자원 선호, 그리고 산업망 상하류의 협력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포럼 기간 동안 여러 주제 포럼과 원탁 대화 등의 행사가 동시에 진행될 예정이며 연모시가 금융 자원 집결, 산업 서비스 고도화, 국제 협력 확장 측면에서 지닌 강한 흡인력을 충분히 보여줄 것이다.
03
연모 경제특구
행사장 한켠
회색빛 안개가 피어오르는 시간,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결정하기에 충분하다.
기업가A
이거 참 공교롭네요. 푸신실업의 뤼 총재님 아니십니까?
기업가B
오, 당신은…… 성허투자의 셰 총재님이시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기업가A
화예의 이번 포럼은 참 알차게 준비했네요. 어르신까지 발걸음을 하셨으니까요!
기업가B
하하하하, 이 총재님이 초대장을 보냈는데 안 올 수가 없죠.
기업가B
저도 얼마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시장 환경이 점점 불균형해지고 있고, 금융 생태계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요.
기업가B
그래도 결국은 모두가 한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업가A
맞습니다, 맞습니다. 금융 생태계가 무너지면 실업률이 높아지고 그다음에는 사회 민생 안정이라는 난장판을 수습해야 할 테니까요.
기업가A
그 단계까지 가면 안팎으로 살이 한 겹 벗겨질 겁니다.
기업가B
허허, 요즘은 기술 발전도 빠르니 이제는 당신들 젊은 사람들의 세상이죠.
기업가A
뤼 총재님 말씀이 과분합니다. 실업 산업이 없으면 저 같은 투자하는 사람은 방향을 잃죠.
기업가A
최근 AI와 인공지능 관련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듯이 저도 운 좋게 이 방면의 사례를 적지 않게 맡았습니다.
기업가A
사실 저는 예전부터 뤼 총재님을 매우 존경해왔습니다. 다만 좋은 협력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쉬웠죠.
기업가A
마침 포럼에서 뵙게 되었으니 염치 불고하고 총재님의 귀한 시간을 조금 빌려 제 최근 프로젝트 사례를 공유드리고 싶습니다. 귀사에서 이후 전환이나 확장을 생각하신다면 참고 자료 정도로 여겨주시면 됩니다.
기업가B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조금 뒤에 포럼이 하나 더 있어서요. 셰 총재님, 혹시 오늘 밤 시간 괜찮으십니까?
기업가B
저희 오랜 친구 몇 명이 모여 식사하려고 하는데 바쁘지 않으시면 함께 오시겠습니까?
기업가A
물론입니다, 꼭 가겠습니다!
6-14 권한을 부여하는 자
그들이 바라보는 '이택언'은 누구인 걸까?
경제 특별 구역의 공식 현판식과 함께 모든 것이 시동 버튼을 눌렸다.
사적인 감정과 의문들은 이 거대한 파도 앞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섬의 소란과 분주함이 이른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계약 테이블 앞의 플래시 불빛이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했다.
서류들이 펼쳐지고, 전달되고, 서명됐다. 의례적인 악수와 미소가 카메라 앞에 겹겹이 쌓이며 다음 주간지나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위해 떠났다.
유연 제작사는 화예의 가장 큰 홍보 창구로서 업무량도 한순간에 정점으로 치솟았다.
나는 거의 내내 화면과 진행표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의 의미는 하나하나의 마디로 축약됐다.
오후, 이어폰으로 편집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편집감독A
대표님, 약 10분 후에 이 총재님과 국제 금은 시장 협회 담당자 몇 분이 광장을 차로 지나가실 예정이에요.
편집감독A
다음 행사장으로 이동하시기 전에 몇 분간 인터뷰 시간을 내주신다고 해요.
편집감독A
원래 계획대로 저희 쪽에서 기자 몇 명이 협회 담당자분들을 인터뷰하고, 대표님이 이 총재님을 인터뷰하시는 건가요?
유연
맞아요. 현장 모든 분들 장비랑 상황 다시 한 번 확인해줘요.
짧게 몇 마디를 더 전달하고 근처에서 역시 소식을 들은 다른 미디어들도 삼엄하게 대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 끝에서 검은 차량 행렬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나는 다른 통신 채널을 열었다.
유연
차량 행렬 오고 있어요, 현장 집행 팀 준비해요.
유연
준비——
축포 소리가 터지며 오색 조각들과 금박이 흩뿌려졌다. 알록달록한 풍선들이 하늘로 가볍게 떠오르며 눈앞을 화사하게 물들였다.
차량 행렬이 마침내 앞에 도착했다. 부드러운 제동음과 함께 맨 앞 차가 멈춰 섰다. 차창이 천천히 내려가며 안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이택언이 차 안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짙은 회색 체크 수트가 차 안의 따뜻한 붉은빛 가죽 시트와 대비되어 한층 차갑고 엄숙하게 보였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 중인 것 같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질문을 정리하며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유연
이 총재님,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유연
지정학적 변화, 공급망 재편 등 글로벌적 불확실 요소들을 고려할 때……
유연
이번 회의 이후 연모시의 향후 발전에 대한 전망을 간략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택언
연모시는 향후 몇 년간 전체적인 경제 성장 속도가 다소 둔화될 수 있으며 성장의 질이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이택언
따라서 방금 끝난 회의든, 경제 특별 구역의 설립 자체든, 모두 이 흐름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택언은 당연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녹음기의 빨간 불이 천천히 깜빡이며 그의 유려한 말 한마디 한마디를 빠짐없이 담아냈다.
인터뷰가 일단락되자마자 "감사합니다"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오랫동안 기다리던 다른 미디어 기자가 끼어들었다.
기자A
이 총재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기자A
앞으로 몇 년 안에 화예가 전체 금융 시장의 방향타가 되어 업계의 길을 제시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다소 과장된 질문에 나는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화예가 아무리 탄탄하고 강하다 해도 한 기업이 시장 전체의 흐름을 좌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기자B
이 총재님, 더 많은 국제 기업들이 경제 특별 구역에 입주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연모 경제 특별 구역이 새로운 세계 금융 핵심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의미입니까?
기자C
이 총재님 안녕하세요. 화예의 향후 전략이 연모시 금융 산업 전체의 행동 강령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십니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모든 사람의 눈에서 비슷한 맹목적인 열망과 간절함이 보였다.
그 순간, 그들이 충분히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확실한 답을 기대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도시를, 이 특별 구역을, 심지어 눈앞에서 여전히 출렁이는 이 국면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려줄 누군가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바라보는 '이택언'은 누구인 걸까?
이택언
단일 기업이 시장을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경제 특별 구역이 설립된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택언
개막식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회와 위험이 공존할수록 새로운 규범과 기준이 더욱 필요합니다.
이택언
화예는 더 많은 기업들과 함께 관련 규칙을 논의하고 만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이택언은 이미 그 질문들에 응답하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모두가 기대하는 그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따르기만 하면 됐다. 성공하면 모두가 기뻐하고 실패해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인파는 점점 더 열기를 띠었다. 마치 나만 고집스럽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모든 것이 변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도 계속 생각을 조정해서 가장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이었다.
하지만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실패한다면 이택언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순간, 이택언은 마치 가장 큰 도박꾼처럼 변한 것 같았다. 변화무쌍한 운명과 미래와 함께 패 테이블에 앉아서.
그 대가는 무엇일까?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그가 눈을 들어 나를 한 번 봤다.
이택언
또 묻고 싶은 게 있습니까?
그는 드물게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자리에서 나는 지나치게 사적인 질문들을 꺼낼 수 없었다.
고작 한순간 망설이는 틈 사이로 옆에 있던 다른 매체들이 다시 밀려들었다. 우리 사이에 생긴 그 아주 작은 멈춤의 여백을 채워버렸다.
그는 고개를 숙여 손목 시계를 한 번 보더니 다시 차가운 외피를 둘러쓰고 차창을 올려 운전기사에게 계속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차량 행렬이 천천히 멀어졌다. 차체가 조금씩 인파와 불빛에 삼켜지며 그를 모든 헤드라인 사진에 등장할 화예의 이 총재로 실어갔다.
바쁨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업무와 인터뷰 사이의 짧은 간격에만 나와 이택언의 시선이 한 순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조차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잠깐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날짜가 하루하루 지나갔고 포럼도 마침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화면 위에 확정된 폐막식 중계안을 보며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피곤한 하품을 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이택언은 아마 또 어딘가에서 응대 중일 것이다.
잠시 생각하다, 방을 나서 호텔 꼭대기 층 전망대로 향했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그런데 문을 밀어 열자마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난간에 얹고 조용히 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화려한 네온과 빛의 너머 더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높은 곳의 바람이 그의 옷자락과 이마 위의 잔머리를 가볍게 날렸다. 그 실루엣은 여전히 꼿꼿하고 단정했다. 마치 어떤 것에도 정말로 휘어질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멀리 빛이 찬란했지만 전부 그와는 멀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마치 어떤 거대하고도 소리 없는 고독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순간, 이택언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무언의 신뢰에서 더 명확한 기호와 지표로 변해갈수록 그는 강력하기 그지없는 화예 총재 이택언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달빛이 은은하게 그의 윤곽도 함께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래, 내가 되찾으려는 건 그저 평범한 시민 한 명이었다.
비범하면서도……그토록 평범한 이택언.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먼 곳을 향하던 그 시선이 먼 곳의 빛을 담은 채 조용히 나에게 내려앉았다.
너무 지쳐서인지, 아니면 밤이 너무 찬란해서인지, 그 짙은 눈동자에도 어렴풋이 허기진 듯 피곤한 빛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내가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다시 아래의 광장으로 돌렸다. 마치 어떤 말없는 허락 같았다.
밤하늘이 고요히 나를 조용히 들어올려 구름 위로 그의 옆으로 데려다주는 것 같았다.
유연
……푸청장 일은 일단 마무리된 거예요?
이택언
시간 벌기 정도라고 봐야겠죠.
이택언
이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계속 더 조사해야 합니다.
유연
이택언, 요즘 정말 많은 일을 해왔고, 이제 포럼도 끝나가는데, 당신이 원하던 걸 이뤘다고 생각해요?
이택언
내일 전담 기자 인터뷰 일정이 있어요.
익숙한 빈정거림에 나는 저도 모르게 눈매를 휘었다. 웃음기가 그의 눈 속에 떨어지자 그의 눈빛에도 어딘가 따뜻한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어서 그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더니 오래도록 침묵이 이어졌다.
어떤 대답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한숨 하나가 밤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택언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요 며칠 동안 그의 결연하고 무게감 있는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왔다. 지금 이 가볍게 떠도는 말이 허공에 걸려 오히려 나를 멈칫하게 했다.
이택언
다만 어떤 골칫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더군요.
그가 멍하니 있는 내 모습을 흘끗 보더니 입꼬리가 살짝 풀리며 느긋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안에 담긴 것이 농담인지, 못마땅함인지 아니면 정말로 아주 조금의 안도인지, 나는 도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내가 미처 더 묻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택언은 전화를 끊은 뒤 다시 내게 시선을 던졌다.
이택언
다른 질문이 있다면 포럼이 끝난 뒤에 물어보세요.
이택언
내가 당신을 섬에 데리고 왔으니 돌아갈 때도 겸사겸사 데려다주겠습니다.
이택언
나는 뒤에 회의가 하나 더 있습니다. 갈게요.
그는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밤과 불빛이 여전히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천천히 거대하게 펼쳐지는 도면 같았다.
모든 것이 선명해지기 전까지 그는 아직 스스로가 흔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6-15 인터뷰 문답
만약 유명인을 직접 인터뷰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질문을 하겠어요?
6-16 독재자 테스트
당신은 독재자가 될 용기가 있나요?
6-17 소원이 잘 이루어지는 곳
전 세계 소원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장소를 모집합니다!
6-18 자라난 흔적
이게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대답입니다.
어쩌면 모든 것이 마침내 한 단계의 끝을 맞이했기 때문인지 연모시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졌다.
창밖의 풍경이 점점 익숙해졌다. 이택언이 말했던 “포럼이 끝난 뒤에 물어봐도 되는” 질문들을 하려면 언제 시간을 잡아야하나 생각하고 있던 찰나 차가 멈춰 섰다.
빼곡한 도심 고층 빌딩들 사이로 풍성하고 짙은 초록이 햇살 아래 넓게 펼쳐져 있었다. 분수 한 귀퉁이도 어렴풋이 보였다.
눈앞의 점점 익숙해지는 풍경을 보며 마음속 어떤 짐작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중앙공원? 여기 볼 일이 있었어요?
이택언
당신이 오고 싶다고 한 곳 아닙니까.
그는 자연스럽게 안전벨트를 풀고 시동을 끈 뒤 차문을 열었다. 말투가 마치 당연한 일을 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그 갑작스러운 두통이 아직도 신경 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나무 아래 서 있던 흐릿한 장면도 아직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다.
유연
그때 결국 허락한 거였군요!
이택언
아닙니다. 내려요.
그는 제멋대로 차에서 내렸다. 마치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처럼.
풀과 흙 냄새가 코를 가득 채우며 남아 있던 바다 냄새를 조금씩 지워갔다.
공원 안에 뛰어놀거나 산책하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훨씬 적었다. 훨씬 고즈넉했다.
주위의 나무들만이 여전히 조용히 서 있었다.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듯.
하지만 나무들은 예전보다 더 높아졌을 것이었다. 새 가지도 이미 많이 뻗었을 것이고.
내가 새겨둔 그 글자들도 나무껍질이 아물면서 모양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익숙한 경로를 따라 중심 호수 옆 글자를 새겨둔 그 나무 앞에 이르렀다.
"모두 평안하고 건강하기를"——나와 이택언, 두 사람의 필체가 섞인 새김 자국이 눈앞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한 획 한 획을 눈으로 세밀하게 더듬었다. 변한 게 있는지 보고 싶으면서도 진짜로 달라진 게 보일까 봐 두려웠다.
유연
……이 소원이 대체 언제쯤 이루어질지 모르겠네요.
곧이어, 아주 가벼운 “음” 하는 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이택언
쉽지 않죠. 그러니까 다음엔 이루어질 수 있는 소원으로 바꿔요.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세계는 한순간 소리를 잃었다.
유연
그 안에 글자 하나는 이택언이 바꿔 넣은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택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무는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며 원래도 깊은 그의 눈을 더욱 어둡게 감쌌다. 그의 표정이 더욱 읽히지 않았다.
유연
예전에 당신은 미래에 갔었죠. 십 년 뒤로 가서 모두 잘 지내고 있고 나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줬잖아요……
유연
그렇지 않아요?
유연
그러니까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건 이루어질 수 있는 소원 아닌가요?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입 밖에 꺼낼 수 있는 말을 계속 고르는 것 같았다. 나뭇잎조차 바스락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를 대신해서 대답을 내놓는 것처럼.
이택언
하지만 미래는 이미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이택언
지금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고 모든 것이 확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택언
당신의 소원도 포함해서요.
긴 공백 끝에 그가 입을 열면서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찰나에 시야 속의 모든 것이 녹아들듯 뒤엉키는 빛깔로 변했다.
우리는 분명 움직이지 않았는데 주변의 모든 것이 무한히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만물이 수천 개의 시계 문자판으로 재편성되며 똑딱거렸다. 겹치고 교차하며 오직 하나의 긴 길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그 길은 끝없이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 앞에서 예고도 없이 무너지더니 흐릿한 혼돈의 파편으로 흩어졌다——
기억하거나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이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챘다.
이택언이 한 번 보여준 적 있었던 '미래'였다.
그가 내 손을 놓고 익숙한 걸음으로 그 끊어진 경계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는 원래 Evol을 자주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를 너무 많이 확인하러 왔던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이택언
여기는 계속 이렇습니다.
낮고 무거운 말이 천천히 귓속으로 들어왔다. 눈앞의 허무를 바라보며 가슴이 살짝 가라앉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연
하지만 '불확실'도 '가능성'이 될 수 있잖아요.
이택언
당신의 불확실함과 고집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확실'하군요.
유연
……그거 참 영광이네요.
그는 내 맥 빠진 반격을 무시하더니 아주 가볍게 한 번 웃었다. 어떤 인정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택언
이론적으로는 이 기간 동안 나는 이미 적지 않은 준비와 배치를 해두었습니다.
이택언
포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계약도 체결되었습니다. 정세는 더 명확해지고 리스크 대응 능력도 더 강해졌어야 합니다.
이택언
모든 것이 더 “좋아지거나” 적어도 더 안정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앞을 바라보며 두 팔을 가슴 앞에 끼었다. 마치 섬의 전망대에서 풍경을 내려다보던 그 밤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택언
하지만 어쩐지 여전히 무언가가 조금 부족합니다.
이택언
늘 조금씩 부족합니다.
그는 몸을 돌려 나를 마주했다. 시선은 곧장 내게 내려앉았다.
이택언
전에 이게 나답지 않다며 목적을 이뤘냐고 물었죠.
이택언
그 말들을 포함해 당신의 많은 질문에 대해 나는 사실 답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택언
정말로 모르니까요.
끝없이 이어진 시계판은 시간처럼 우리 발아래에 끝없이 뻗어 있었다. 우리는 세월의 거센 흐름 속에 서 있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두 개의 멈춰 선 바늘 같았다.
나는 멀리 그림자 속에 잠긴 그를 바라봤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꽤 여러 번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지금처럼 솔직하고 심지어 약간의 지친 해방감까지 담긴 눈빛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택언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 먼저 충분히 강경한 판단을 내리고 그다음 당신을 데려가 그 방향이 옳은지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택언
하지만 당신에게는 어쩌면 그게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택언
그래서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택언의 입에서 “모르겠다”는 말을 듣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늘 옳은 것 같았다. 늘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늘 충분히 빠르고 충분히 멀리 걸어갔다.
마치 그래야만 어떤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들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제 모든 분주함과 피로, 탐색과 확인의 끝에서, 그는 결국 크게 한 바퀴를 돌아 뒤늦은 대답 하나를 내놓았다——
솔직하고도 평범한 얼굴 하나를 드러낸 채.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반 걸음 걸어갔다.
마치 초침이 문자판을 밀듯 고요한 시간의 흐름에 아주 가벼운 울림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내가 그것을 제대로 분간하기도 전에 더 선명한 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왔다.
그도 서로 마음이 통한 것처럼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아니면 마침내 모든 사람들 앞에 저 멀리 서 있는 것에 지쳐버린 것 같기도 했다.
이택언은 평온하고 단호하게 문자판 절반을 가로질러 곧장 내 앞으로 걸어왔다.
이택언
이게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대답입니다.
분침과 초침이 나아가는 똑딱 소리가 강물처럼 모여들었다. 마침내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를 그의 눈 속으로 비춰 넣으며.
나는 마찬가지로 솔직하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유연
이택언, 이번에는……아마 내가 부족한 게 뭔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유연
그건 “사랑”이에요.
그의 평온한 눈 밑에 그 단어가 복잡한 파문을 일으켰다. 놀람이기도 했고 의문 같기도 했다.
유연
이 세계는 “사랑”을 잃었어요.
6-19 세월의 시선
그리고 내일을 넘길 수 있다면 그다음 하루도 아주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이택언이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눈빛 속으로 짧은 공백이 스쳐 지나갔다.
이택언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습니다. 설명해보세요.
마음이 한 순간 텅 빈 것 같았다.
그는 언제나 사랑 속에서 자랐다. 사랑 속에서 자라 안정적이고 온전하게 성장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오히려 원래는 사랑에게 깊이 편애받던 이 사람에게 내가 무언가를 설명해야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나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른 뒤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연
“사랑”은…… 아주 복잡한 거예요. 아름답기도 하지만 많은 고민과 문제를 가져오기도 해요.
유연
객관적인 설명도 있긴 하지만 정확한 정의를 하나 내려주기는 어려워요……
유연
하지만 아주 중요해요. 다만 이 세계가 잠시 잃어버렸을 뿐이에요.
이택언은 아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는 두 팔을 가슴 앞에 감싼 채 손끝으로 팔꿈치 안쪽을 한 번씩 두드렸다.
이택언
그러니까 그게 세상이 변한 이유라는 거군요.
이택언
하지만 이렇게 추상적인 개념이 모든 것을 더 안정시키는 토대가 된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유연
저도 금융은 늘 차갑고 이익으로 가득한 것 같아서 “사랑”과는 조금 거리가 먼 업계라고 생각했어요.
유연
하지만 당신 말처럼 지금 모든 것이 조금 이상하게 변했잖아요.
유연
……당신까지도 많이 지쳤고요.
이택언
내가 지쳐 보입니까?
그는 순식간에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고양이가 자신의 위협성을 보여주려는 듯 한순간 털을 곤두세운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전에 그가 자주 미간을 찌푸리고 차가운 기색을 드러냈던 것도 사실 지금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마치…… 어떤 허세 섞인 무장처럼.
유연
네. 많이 지쳐 보여요.
유연
예전의 당신은 그렇게 강경하고 강한 사람처럼 보일 필요가 없었어요. 지쳐도 됐고 망설여도 됐어요.
유연
그냥 이택언이기만 해도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믿을 이유가 충분했으니까요.
이택언
……일부러 나에게 상기시키는 겁니까?
유연
걱정하는 거예요, 바보.
그는 내 말에 분명 말문이 막힌 듯했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눈꺼풀이 한 초 더 감겼다. 감정을 다시 정리해서 눌러 담는 것 같았다.
이택언
당신의 설명은 지나치게 포괄적이라 참고할 가치가 별로 없는 것 같네요.
그는 막무가내로 화제를 다시 본론으로 돌렸지만 내 말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저 생각에 잠긴 채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택언
하지만 당신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이택언
지쳤는지 아닌지와는 관계없이 최근 처리해야 할 일과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예상보다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택언
예전엔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던 것들도 이제는 더 많은 준비와 계획이 있어야 실현됩니다.
이택언
또 원래는 내가 줘야 하는 것인데 줄 수 없는 것들도 있어요.
이택언
이 모든 것이 꽤 불편합니다.
그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그동안 쌓여 있던 무거운 것들을 그 숨과 함께 내보내는 것 같았다.
이택언
그래서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유연
그러게요, 이택언……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택언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당신입니다.
이택언
나는 별다른 조언을 줄 수 없고 당신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의 입에서 다시 '모르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깨어난 뒤 처음으로 차갑기만 한 “해결”보다 그가 “도와준다”는 말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아직 확정된 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와 함께 고민하는 이 감각이 그의 외로움과 내 외로움을 조용히 흩어주는 것 같았다.
유연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유연
그것도 역시 “모르겠다”예요?
이택언
미래는 혼란스럽습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이택언
하지만 적어도 내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압니다.
이택언
그리고 내일을 넘길 수 있다면 그다음 하루도 아주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안정적인 내일 하나하나로 한 걸음씩 미래의 모습을 다져가는 것이었다.
영원히 혼돈이라면 그의 오늘 하나하나로 그 미래를 정의하겠다는 것이었다.
시공은 침묵했다. 사람의 짧은 한마디로 갑자기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같은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마음을 받아내고 떠받치기에는 충분했다.
유연
……고마워요, 이택언.
이택언
좋은 말이야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
유연
하지만 당신은 그냥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나는 눈매를 휘며 사뭇 진지하게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유연
오프쇼어 금융 센터를 설립했고 경제 특별 구역을 만들었고 많은 것들이 안정을 유지하도록 노력했잖아요.
이택언
그건 제 계획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한 겁니다.
유연
그게 뭐 어때서요? 그래도 여전히 굉장히 대단하고 좋은 일이에요.
유연
“사랑”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지키고 있어요.
그의 존재가 이토록 단단하고 풍요롭기 때문에 사라진 사랑조차 빼앗아갈 수 없는 토대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무너져가는 세계를 붙들어 맬 수 있었다.
내일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을 수 있는 건 이를 악물고 버텨낸 오늘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이런 그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택언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몸을 돌려 내게 손바닥을 내밀 뿐이었다.
이택언
됐습니다. 잡담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는 돌아갈 시간입니다.
시공은 다시 그의 의지에 따라 흐르고 변했다. 시야의 끝에서 한 줄기 틈이 찬란한 문이 되어 돌아갈 길을 가리켰다.
이택언은 자연스럽게 내 손목을 잡았다. 세계는 흘러가는 색채에 부드럽게 감싸였다.
눈 깜짝할 사이 공원은 여전히 고요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나무줄기에 새겨진 그 소원을 바라보았고 마음속에는 조금 더 확신이 생겼다.
유연
이택언, 이 소원은 이루어질 거예요.
유연
제가 방법을 찾아서 꼭 이루어지게 할 거예요.
그는 말없이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결국 그 나무 앞으로 걸어가 그 역시 손을 뻗어 천천히 그 글자 위를 어루만졌다.
낙엽은 가득 찬 햇빛을 싣고 그의 주위로 사각사각 떨어져 내렸다.
허공에 떠 있던 흐릿한 장면과 눈앞의 광경이 서로 섞이고 겹쳐지며 선명해졌다.
나는 멍하니 눈앞의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기묘한 떨림이 일었다.
과거는 오랜 추격 끝에 마침내 미래를 향해 흘러들고 고리처럼 서로 맞물려 손에 닿을 수 있는 현재가 된 듯했다.
이택언은 눈을 내리깔고 그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그리움 같기도 했고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이 순간 또 무엇을 보았을까?
우리가 나눈 이 조각은 “예전”이 된 뒤, 또 어떤 “앞으로”를 향해 이어질까?
지금의 나는 모든 미래를 선명하게 볼 수 없고 이 질문의 답도 알지 못한다.
다만 다시 돌아보는 날 그날의 햇살도 지금처럼 좋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택언의 입가가 아주 가볍게 올라갔다. 그가 미소 짓던 무수한 순간들처럼.
이택언
그럼 잘 해봐요.
유연
저한테 할 말이 그게 다예요?
이택언
뭘 더 듣고 싶은데요?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시선을 그 푸른 나무 쪽으로 돌렸다.
유연
괜찮아요, 사실 당신이 말하지 않은 것들도 다 알아요.
유연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어쩌면 우리 사이에는 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것이 선명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입을 열었다.
이택언
일은 사람이 하기 나름입니다.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 건조한 말투에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지금의 맑은 날씨가 더욱 밝아지는 것 같았다. 용기가 가득 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내 전화도 울렸다.
화면 위에 너무 많은 읽지 않은 메시지가 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쉰 뒤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유연
고마워요, 이택언. 오늘 당신이 저와 함께 여기 와줘서 정말 기뻤어요.
유연
저 갈게요. 회사에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서요.
유연
당신이 자기 관리는 잘할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좀 쉬고 푸딩이랑도 같이 있어줘요.
이택언
당신의 당부가 조금 많군요. 먼저 본인부터 실천하고 말해요.
이택언
가요. 시간은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지는 않으니까.
그의 깊고 오래된 시선 속에서 나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이런 식이었다. 더듬으면서도 생각하면서 나아갔다.
그리고 언제나 한 줄기 시선이 내 뒤에 머물렀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발아래 한 걸음 한 걸음이 이전보다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등 뒤의 시선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가려는 미래를 향해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