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낮은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백기는 문 옆에 선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약 30분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대화가 잠시 끊겼다. 백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낮고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백기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보고서를 들고 있는 젊은 남자였다. 그는 NW 조사과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백기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려 말없이 서류를 넘겼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사무실 안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백기는 눈을 들어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모습은 기억 속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잔뜩 찌푸린 미간과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영원히 녹지 않을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까지.
젊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보고서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이번 사건의 배후는 앞서 발생한 축제 사건과 독감 바이러스 사건의 배후와 동일합니다. 저희는 이 모든 사건이 BLACK SWAN의 계획에 따라 벌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할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남자는 두 사람에게 화면을 보라고 손짓했다. 화면에는 조사과에서 수집한 증언과 물적 증거가 나타나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좀 더 자세히 설명하려던 순간, 백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사상자는?"
백기의 질문에 남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상관을 바라보았다. 상관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고 나서야 다시 보고서를 넘겼다.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백기에게 설명했다.
이번 사건의 인명 피해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중상자는 단 두 명이었고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최고생명과학연구소에서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서 독감 사태도 진정되고 있었다. 현재는 부상자와 그 가족들 모두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은 상태라고 했다.
그제야 백기의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남자는 이어서 조사과가 확보한 증거들을 설명했다. 그렇게 약 15분이 더 흐른 뒤에야 마침내 보고가 끝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나가면서 문을 꼼꼼히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기는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과 긴장감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이제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백기가 아버지를 바라보자, 마침 아버지도 그를 보고 있었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른 뒤 백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특파팀도 BLACK SWAN을 찾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살짝 치켜 올라간 눈빛에는 희미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
"찾아낸다 해도 그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빈껍데기라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백기는 자신을 살피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마침 진화 캡슐 문제도 있으니……."
"그 일에는 네가 관여할 필요 없다."
"그들은 진화 캡슐에 들어갈 적합한 Evolver를 찾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백기는 말을 하다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의 시선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그를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 애를 찾는 게 그렇게 급한 거냐?"
백기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마치 자신의 몸 전체를 으스러뜨리려는 듯한 힘이 들어갔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사람을 보내 조사하실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가는 게 최선입니다."
02
밤이 깊었지만 창밖의 하늘은 불빛을 가득 머금은 채 희미한 온기와 밝은 빛을 띠고 있었다.
백기는 회의장 중앙에 서서 머리 위의 돔형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으로 스며든 얼룩덜룩한 달빛이 바닥에 새겨진 듯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곁에는 NW 제복을 입은 대원들이 한 무리 서 있었다. 남녀 대원들은 갑작스럽게 내려온 이번 임무에 대해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BLACK SWAN 놈들은 진작에 여길 떠났잖아. 설마 우리가 특파팀 사람들을 잡으러 온 건가? 과잉 진화 관리소에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체포까지 할 일은 아니잖아……."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백 대장님에게 물어봐야지……."
말이 끝나자 몇몇 대원들이 일제히 백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시선이 집중된 백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살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사람을 잡으러 온 게 아니야."
젊은 남자 대원 하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뭘 하러 온 겁니까? 설마 저 사람들한테 잡히러 온 건 아니겠죠?"
그 말에 대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말을 꺼낸 남자도 멋쩍은 듯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마. 너희가 잡힐 일은 없어."
백기는 잠시 망설였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그때 갑자기 문밖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회의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백기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왔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백기는 드물게 긴장감을 느꼈다. 짧은 시간 안에 저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쾅!
회의장 문이 바깥에서 거칠게 열렸다. 흰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이를 본 NW 대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렸다. 양측은 금방이라도 충돌할 듯 팽팽하게 대치했다.
바로 지금——
백기는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검은 장갑을 낀 오른손을 꽉 움켜쥔 그는 눈을 감고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그 순간 사방에서 거센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백기를 중심으로 일어난 바람은 점점 더 넓은 공간으로 퍼져 나갔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도, 그 무엇도 봐주지 않았다.
검은 폭풍은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회의장 전체를 휩쓸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거대한 수정 샹들리에가 굉음을 내며 추락했다. 돔 너머에 떠 있는 달마저 그 충격에 흔들리는 듯했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거대한 굉음,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가 뒤엉켰다.
그리고 마침내 회의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모든 것이 진정한 밤의 어둠 속에 잠겼다.
백기는 이를 악물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의 눈에는 결연함과 함께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한 담담함이 어려 있었다.
검은 폭풍이 그의 몸마저 집어삼켰다.
백기는 떨리는 손을 들어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바람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마침내 회의장에 남아 있던 마지막 사람까지 쓰러졌다.
백기는 처참하게 부서진 출입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달빛이 회의장에 남겨진 참혹한 광경을 비추었다.
그때 복도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일사불란한 발소리는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흩어져 들려오는 불규칙한 소리였다.
양기준은 회의장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들어 신호하자 뒤에 있던 네다섯 명이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겁먹은 기색이 역력한 젊은 남자가 양기준 곁에 서서 불안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설마 NW 사람들과 정면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나중에 저쪽에서 따져 물으면……."
"그저 오해가 있었을 뿐이야. 게다가 양측 모두 피해를 입었으니."
양기준은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기가 왜 '실종'됐는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젊은 남자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회의장을 수색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백기를 찾아냈다.
젊은 남자 두 명이 백기의 양쪽에서 몸을 부축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백기를 데리고 양기준 앞으로 다가왔다.
양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밖을 가리켰다.
그 뜻을 알아들은 사람들은 백기를 데리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회의장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양기준은 실내에 드리워진 달빛을 차갑게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03
바람이 불어온 것 같았다.
검은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얼굴을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제외하면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기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흐릿한 흰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귓가에서도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속 진화 캡슐 쪽은 준비가 거의 끝났어. 그의 Evol이라면 상당히 적합할……."
"……진화핵 말이야? 그건 진작에 이미……."
마침내 백기가 눈을 떴다.
흩어진 빛무리가 앞다투어 시야로 밀려들었다. 백기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흰 가운을 입고 보호안경을 착용한 남녀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손에는 자료가 들려 있었고, 그들 앞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서는 숫자들이 끊임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백기는 그제야 눈앞의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새하얀 의자에 묶여 있었다. 다섯 개의 고정 장치가 그의 몸을 단단히 결박하고 있었다.
백기는 고개를 움직여 보려 했지만, 목에도 무언가가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백기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심과 함께 묘한 득의양양함이 어려 있었다.
남자는 백기 앞에 멈춰 서서 빛을 가렸다. 그는 백기를 내려다보며 목에 채워진 장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백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매섭게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빨리 깨어난 거지?"
"주사를 한 대 더 놓죠."
탁자 곁에 있던 여자가 약물 한 병을 찾아 들었다. 이어 주사기를 꺼내 들고 말을 하며 다가왔다.
그녀가 움직이자 백기는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을 볼 수 있었다.
가지런히 늘어선 약물들 옆에는 숫자가 끊임없이 깜빡이는 화면이 있었다. 그 곁에는 자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맨 위에 놓인 사진에는 뜻밖에도 백기의 검은 장갑이 찍혀 있었다!
"너희들——"
백기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주삿바늘이 억지로 그의 목에 꽂혔다.
미세한 통증과 함께 차갑고 저릿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곧이어 걷잡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다.
백기의 의식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두 사람이 또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은 고개를 기울여 백기의 목에 채워진 장치에 표시된 수치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이제 백기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변해갔다.
마치 눈앞에 안개가 드리운 것 같았다. 안개는 이윽고 여러 개의 빛무리로 변했고, 그 빛 하나하나에는 과거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그는 교과서를 품에 안고 복도를 급히 지나가는 한 소녀를 보았다.
자신은 나무에 기대어 서서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자신이 소녀의 손바닥 위에 팔찌 하나를 올려놓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목에 걸린 황금빛 은행잎 장식이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그리고 소녀의 눈물도 보였다.
그녀는 떠나지 말라며 자신을 붙잡으려 손을 뻗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모든 장면이 하나로 겹쳐졌다.
백기는 자신이 지휘실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반드시 가야 합니다."
몽롱하던 감각은 서서히 뼈를 갉아먹는 듯한 고통으로 변해갔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 이 순간, 백기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남아 있었다.
반드시……
그녀를 다시 찾아야 한다.
04
짧은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백기는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말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이윽고 검은 군화 두 켤레가 시야에 들어왔다. 두 명의 감시 요원은 백기에게 수갑을 채운 뒤, 그를 밀고 잡아끌며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백기가 특파팀에서 설립한 과잉 진화 관리소에 들어온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다.
그동안 백기는 매주 한 차례씩 Evol 검사를 받아야 했다. 최근에는 검사 주기가 사흘에 한 번으로 짧아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잦은 검사는 오히려 백기에게 기회가 되어 주었다.
이제 그는 관리소의 구조와 설계를 거의 파악한 상태였다.
NW의 정보에 따르면 가속 진화 캡슐은 분명 이 관리소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백기는 아직까지 그 위치를 찾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백기는 앞서 걷는 감시 요원의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 그의 시선은 줄곧 바닥을 향해 있었다.
많은 조직이 자신들의 비밀을 지하에 감추곤 했다. 특파팀도 그런 관행을 따르고 있는 건 아닐까.
백기는 마치 바닥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해도 진화 캡슐이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을 것처럼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 갑자기 앞서 걷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미처 발을 거두지 못한 백기는 그대로 남자의 발뒤꿈치를 밟고 말았다.
"악! 너——!"
고통스러운 외침과 함께 남자가 돌아섰다.
그가 휘두른 주먹이 백기를 향해 날아왔다.
백기의 눈빛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만으로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거의 반사적으로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들어 남자의 턱을 세게 내리쳤다.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뒤따라오던 다른 감시 요원이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달려들었다.
백기는 상대의 움직임을 곁눈질로 확인하고 손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내리고 일부러 상대에게 제압당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지금 자신의 목에는 이른바 '제어 장치'라는 것이 채워져 있었다.
백기에게 얻어맞은 남자가 턱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듯했다.
"깜짝 놀라 죽는 줄 알았네…… 제어 장치까지 채워 놨는데 어떻게 아직도 이렇게 강한 거야?"
"주파수 대역이 너무 낮은 거 아냐? 좀 높여 봐."
그 말에 감시 요원 하나가 백기의 목 근처로 다가왔다.
띡, 띡.
두 번의 짧은 전자음이 울린 뒤,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괜찮겠지. 최고 단계로 올렸으니까."
백기는 바닥에 꼼짝 못 하게 눌린 상태였다.
귓가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반면 머릿속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잡음이 갈수록 거세졌다.
그 소리에 백기의 신경은 저절로 곤두섰고, 호흡도 점차 빨라졌다.
고통이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흐릿해진 시야에 몇몇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설산 깊은 곳.
기계 팔들이 제멋대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끊임없이 총성이 울려 퍼졌다.
NW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누군가를 가운데에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다 점차 울음기가 섞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백기는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누군가가 심장을 세게 움켜쥔 것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05
백기는 침대에 누워 짙은 어둠 너머로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귓가에 전해지는 진동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희미한 알림음이 한 차례 울린 뒤에야 귀걸이의 진동이 멈췄다. 백기도 그제야 눈을 떴다.
백기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그리고 방금 전달받은 정보를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진화 캡슐에 들어갈 1차 대상자 명단이 나왔어. 네 이름도 명단에 있어."
어쩐지 최근 들어 Evol 검사 횟수가 늘어나고 감시도 점점 엄격해진다 싶었다.
아무래도 특파팀의 준비가 거의 끝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귀걸이에서 또다시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진동이 전해졌다.
백기는 마음을 가다듬고 진동의 흐름에 집중했다.
그는 전달되는 신호를 하나하나 기억하며 한 글자씩 해독하기 시작했다.
이·미·찾·았·다……
순간 백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하지만 오른손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 귀를 살며시 감쌌다.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방 안은 고요했다.
이윽고 미세한 진동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백기는 침대에 앉은 채 멍하니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틀림없었다.
그녀였다.
그 순간, 밀려드는 기쁨이 다른 모든 감정을 씻어 내렸다.
백기의 손끝이 귀걸이에 닿았다.
차가운 기계의 감촉이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이었다.
그녀는 가속 진화 캡슐 연구에 휘말리지 않은 것이다.
깊은 밤, 백기는 마침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습으로 앉아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이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문득, 의식이 흐릿했던 그날 보았던 장면들이 다시 떠올랐다.
어떤 순간에는 소녀가 자신의 곁에서 나란히 싸우고 있었다.
또 어떤 순간에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백기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면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모든 광경이 더없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약물 때문에 생겨난 환각이었을까?
아니면…….
백기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든, 그저 허상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그녀의 앞에 서서, 그녀를 보호하고 지킬 것이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