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백기가 연모시 경찰청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호기심 어린 시선도 있었고 경계하는 시선도 있었다.
연한 색 청재킷은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져 있었고, 갈색 머리카락은 이마 위로 흘러내려 반항적인 눈매를 드러냈다. 그는 누구 하나 바라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강한 위압감을 풍겼다.
어떻게 보아도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겉모습부터 분위기까지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며칠 전, 백기는 갑작스럽게 연모시 경찰청에 발령받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인사였던 탓에 그에게 지급할 적당한 제복조차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백기는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사복을 입고 근무하는 사람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고위직 자제라는 추측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백기는 그런 오해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편이 자신의 본래 목적에도 유리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백기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자신에게 임시로 배정된 자리로 걸어갔다.
그때 젊은 경찰관 한 명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가와 두툼한 서류 봉투를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백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백 경관님, 국장님께서 앞으로 이 사건을 맡으라고 하셨습니다."
백기는 서류 봉투를 받아 열어 보고 몇 장을 훑은 뒤, 고개를 끄덕여 그만 가봐도 좋다는 뜻을 전했다.
청년은 자신이 예상했던 질문이나 도움 요청이 나오지 않자 잠시 멍해졌다.
백기는 고개를 들어 그를 한번 훑어보고는 무심한 투로 물었다.
"다른 용건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처음에는 트집을 잡을 생각이었던 청년은 어째서인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머쓱하게 물러났다.
그제야 주변에서 그를 살피던 시선도 사라졌다. 백기는 다시 손에 든 사건 기록으로 눈을 돌렸다.
며칠 전, 한 여성이 관할 경찰서에 찾아와 자신이 ‘공간 이동’을 했다고 신고했다.
신고자의 진술에 따르면, 평소처럼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어느 장소를 지나던 순간 갑자기 십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낯선 광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마치 그사이에 놓인 거리가 접혀 버린 것처럼.
경찰은 사건을 조사했지만 충분한 증거나 단서를 확보하지 못해 일단 수사를 보류했다.
그런데 이후 며칠 동안 서로 다른 관할 경찰서에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는 신고가 잇따라 접수되었다.
결국 이 기묘한 사건은 경찰청으로 넘어왔고, 이제 백기의 손에 맡겨진 것이었다.
Evolver가 연루된 범죄 사건이다.
백기가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여기저기 흩어진 사건 보고서를 끝까지 살펴본 뒤 손가락으로 책상을 몇 차례 두드렸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옆 사람에게 툭 한마디를 던졌다.
"현장 좀 다녀오겠습니다."
옆자리의 경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이미 시원스럽게 멀어져 가는 뒷모습뿐이었다.
경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역시 낙하산은 다르다니까. 쯧쯧, 참 자유로우셔."
02
일주일 전, 버려진 건물 안에서 아직 작동하고 있는 엘리베이터가 일정한 속도로 지하 깊숙이 내려가고 있었다.
불안정한 전류 탓에 엘리베이터 천장의 조명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통신 신호가 완전히 끊기기 전, 백기는 이어폰을 통해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총을 뽑아 들고 가장 먼저 밖으로 나섰다.
백기는 엘리베이터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특파팀 대원 한 명이 전원 스위치를 켜자 차갑고 흰 조명이 공간 전체를 밝히며 실험실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급하게 철수한 탓인지 실내는 온통 어질러져 있었고, 미처 가져가지 못하거나 폐기하지 못한 서류와 잡동사니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백기는 서류들을 잠깐 훑어보고는 곧장 방 한쪽 구석에 있는 메인 컴퓨터로 향했다. 이미 누군가 암호를 해독하고 삭제된 파일들을 복구하는 중이었다.
"상황은 어떻지?" 백기가 물었다.
특파팀 대원은 각종 데이터와 자료를 빠르게 불러오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핵심 데이터 일부는 완전히 삭제됐습니다. 그래도 몇몇 파일은 복구할 수 있습니다."
백기는 복구된 파일들을 살펴보고 그것이 Evolver를 대상으로 한 실험 보고서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보고서에 기록된 날짜는 십여 년 전부터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BLACK SWAN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동안 대체 이런 실험을 얼마나 많이 벌여 온 것일까.
"잠깐."
백기가 갑자기 대원의 작업을 중단시켰다. 그의 눈빛에 날카로운 기색이 스쳤다.
"이 명단을 추출해."
얼마 지나지 않아 숨겨져 있던 명단이 화면에 나타났다. 빽빽하게 나열된 이름들 사이에서 백기는 자신의 기억 깊숙이 새겨진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유연.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백기는 갑자기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눈빛마저 크게 흔들렸다. 몇 차례 숨을 고른 뒤에야 겨우 평정을 되찾은 그는 그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의 파일을 열어 봐."
화면이 한 번 깜빡이더니 가장 먼저 그녀의 대학 시절 증명사진이 나타났다. 그리 길지 않은 파일에는 그녀가 다닌 학교와 학업 이력, 가족과 친구들, 물려받은 회사에 관한 정보까지 담겨 있었다. 그녀의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이 차가운 문자로 바뀌어, 사생활은 조금도 보호받지 못한 채 BLACK SWAN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백기는 파일을 한 줄 한 줄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읽을수록 그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가 애써 세월 속에 묻어 두었던 기억들마저 흔들리기 시작하는 듯했다.
6년 전, 백기는 Evol이 각성하면서 연모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년 전이 되어서야 BLACK SWAN의 행적을 추적하며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2년 동안 그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잠재적인 위험이 그녀에게까지 미쳐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그녀가 살아가는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그 위험은 처음부터 그녀의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03
특파팀이 비밀 실험실을 파괴한 이후, BLACK SWAN은 연모시에서 더욱 빈번하고 과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은밀하게 벌어지는 Evolver 범죄도 끊이지 않았다.
"너희도 Evolver 아니야?! 그런데 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거야?!"
거센 바람에 휩쓸려 바닥에 쓰러진 남자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람들을 향해 분노에 차 소리쳤다.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발을 들어 남자의 등을 짓밟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그를 다시 바닥에 눌러 놓았다.
바로 그때, 백기의 이어폰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두 번 들리더니 긴급한 연락이 들어왔다.
"중심대로 인근에서 이상 징후 발생."
"알았다."
백기는 통신을 끊고 이제 막 Evol에 각성한 남자를 부하들에게 넘긴 뒤, 홀로 에너지 파동이 감지된 장소로 향했다.
교차로에서는 조금 전 기이한 교통사고가 가까스로 저지된 참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모여 있던 행인들은 앞서 벌어진 이상한 광경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사고를 일으킨 택시가 현장을 떠나자 구경꾼들도 서서히 흩어졌고, 길가에는 한 여자만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도시의 상공에 갑자기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백기는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수많은 빗방울이 그의 곁으로 떨어졌다가 바람에 밀려 흩어졌다. 지상에서 벌어진 일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유난히 침착했으며, 날카롭게 벼린 듯한 빛이 서려 있었다.
백기의 시선이 빠르게 현장을 훑었다. Evolver 한 명이 막아 낸 교통사고, 동기를 알 수 없는 택시 운전사, 그리고…… 피해자.
그 순간, 백기의 시선이 멈췄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간신히 죽음을 피한 그녀가 허리를 굽혀 바닥에 흩어진 과자들을 주워 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인지 어느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려다보니 지상의 사람은 작은 점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백기의 기억은 이미 그 작은 형체 위에 그녀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 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그가 조종하는 바람도 마음속의 동요를 아는 듯 코트 자락을 거세게 펄럭이게 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동안 많은 것이 변한 그녀의 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6년이라는 세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지만, 백기의 기억은 여전히 오래전 그 쓸쓸한 밤의 도서관에 머물러 있었다. 다만 그날의 세세한 기억들은 얇은 안개가 드리운 것처럼 흐릿해져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백기는 이어폰의 통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지휘본부에 보고했다.
"특파팀 B-7. 연모시에서 에너지 파동 발견. 좌표는 이미 발송했다."
거의 곧바로 지휘본부에서 지시가 내려왔고, 백기는 이에 응답했다.
"목표 확인. 최대한 신속히 조치하겠다."
백기의 시선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그녀가 길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BLACK SWAN의 명단을 떠올렸다. 순간 그의 눈빛에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
이제 그녀의 Evol이 각성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둘러싼 평온한 일상도 머지않아 깨질지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오랫동안 그녀와 유지해 온 거리만으로는 더 이상 그녀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04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이른 아침, 커튼 틈새로 스며든 한 줄기 빛이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을 비추었다.
백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한쪽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채 꿈속에서 보았던 혼란스럽고 단편적인 장면들을 떠올렸다. 불길이 사납게 번지던 방, 익숙한 학교 옥상, 폭발이 휩쓸고 간 폐허와 눈부시도록 선명한 핏빛……
그녀를 다시 만난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백기는 마음을 가다듬고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지자 남아 있던 잠기운이 씻겨 나가고 정신도 더없이 맑아졌다. 그러자 과거에 그 남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까지 귓가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백기, 그녀도 너처럼 특별한 존재야. 그녀의 삶은 평온할 수 없는 운명이야."
"네가 정말 그녀를 지킬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
쏴아아 쏟아지는 물소리가 이른 아침의 고요 속에서 유난히 소란스럽게 들렸다. 백기는 고개를 들고 물줄기를 그대로 맞았다. 물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오래된 상처와 새로 생긴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는 몸을 지나 배수구로 사라졌다.
한참 뒤, 백기가 눈을 떴다. 그의 눈빛에는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반드시 그녀를 지킬 거야."
백기는 물을 잠그고 수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머리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오자 탁자 위에 놓아둔 휴대전화의 알림등이 소리 없이 두 번 깜빡였다. 정보원이 보낸 메시지였다.
백기는 메시지를 빠르게 훑어본 뒤 연락처를 열어 번호 하나를 찾았다. 통화가 연결되자 그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전에 말씀드린 밀착 취재 제안 말입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이 노리는 사람이 그녀라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가장 안전할 터였다.
한 시간 뒤, 백기는 정보원이 제공한 단서를 따라 조문로 옆의 한 골목으로 향했다.
그런데 학교 정문이 눈앞에 나타난 뒤에야 이곳이 연모고등학교 근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새로 단장한 듯한 교문을 한번 바라보았지만, 추억에 잠겨 모교를 둘러볼 생각은 없었다. 곧장 정보원이 알려 준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비교적 외진 골목으로, 한쪽 끝이 번화한 상점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신고를 접수한 관할 경찰서에서도 이미 주변을 조사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골목의 감시 카메라는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날 고장 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 미리 계획하기라도 한 것처럼.
상황을 파악한 백기가 그곳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혹시…… 백기니?"
백기가 고개를 돌리자 마흔에서 쉰 살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마른 얼굴을 한 남자였다. 백기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누구인지 떠올렸고, 뜻밖의 만남에 조금 놀라 물었다.
"아직도 여기서 가게를 하세요?"
"그럼. 정말 너였구나. 아까는 내가 잘못 봤나 했어."
기억 속에서 늘 말수가 적었던 남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왔니?"
백기는 굳이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임무 때문에 왔어요. 조사할 게 있어서요."
중년 남자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물었다.
"그럼 지금 정말 경찰서에서 일하는 거야?"
백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백기에게 물었다.
"벌써 점심때인데, 국수 한 그릇 먹고 갈래?"
백기는 고개를 저어 거절하려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바다 분식은 그가 몇 년 전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보다 훨씬 넓어져 있었다. 문을 마주 보는 벽면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작은 쪽지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백기는 벽을 가볍게 훑어보았고, 그러자 과거의 몇몇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예전에 자주 앉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몇 분 뒤 주인이 붉은 고추기름을 얹은 수타면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연한 노란빛의 면 위에는 선명하게 붉은 고추기름이 덮여 있었고, 그릇 가장자리에는 마늘싹과 고수, 얇게 썬 소고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김과 함께 피어오르는 향기는 기억 속 그대로였다. 익숙한 향이 코끝에 닿자 백기는 금세 허기를 느꼈다.
"한번 먹어 봐. 전보다 맛이 좀 나아졌나."
중년 남자는 조금 쑥스러운 듯 웃으며 덧붙였다.
"너도 정말 오랜만에 먹는 거지?"
"향이 좋은데요."
백기는 그렇게 대답하고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입에 넣었다. 여전히 익숙한 맛이었다. 잔뜩 굳어 있던 입가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누그러졌다.
그때 근처 연모고등학교에서 쉬는 시간 음악이 들려왔다. 곧 점심시간을 맞아 학교에서 나온 학생들이 식당으로 몰려들면서 백기의 주변도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익숙한 색깔의 교복과 그 위에 달린 표식을 보니 모두 연모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작은 식당과 어울리지 않는 백기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걱정거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었다.
백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는 남아 있던 면을 금세 다 먹어 치우고 계산대에 돈을 놓은 뒤 가게를 나섰다.
"그럼 그렇게 하죠. 오후 한 시 반에 꽃시장 입구에서 뵙겠습니다."
백기는 피해자 한 명과 만날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곧바로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강 국장님?"
"백 팀장 맞죠? 전에 말씀하신 사건 밀착 취재 건 말인데요. 오늘 오후 한 시에 PD가 경찰서로 찾아갈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백기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옅은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05
한낮의 연모시. 도시의 주요 도로에는 차량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검은 오토바이 한 대가 뜨거운 열기를 가르며 차량 사이를 빠르게 질주했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백기의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바람은 그의 곁을 맴돌며 좀처럼 떠나지 않는 듯했다.
연모고등학교에서 경찰청까지는 제법 먼 길이었다. 그 길을 달리는 동안 지난날의 일들이 하나둘 백기의 머릿속에 떠오를 만큼.
비가 내리던 어느 저녁,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던 모습.
도서관에서 먼지가 내려앉은 채 놓여 있던 《바이런 시집》 한 권.
핏자국이 묻은 편지 한 통.
피아노 선율 속에서 은행잎이 하늘 가득 흩날리던 오후.
그리고…… 그가 가장 희망을 잃었던 시절, 그의 삶에 나타난 한 소녀.
백기의 표정이 문득 부드러워졌다. 오랫동안 억눌러 두었던 감정이 그 순간 한꺼번에 풀려나오자, 낯설 만큼 거세게 밀려왔다.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거의 잊혀 가던 장면들은 마치 누군가 손을 뻗어 그 위에 쌓인 먼지를 닦아 낸 것처럼 선명해졌다. 어제 일처럼 생생할 정도였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 자신도 한때 한여름의 햇살처럼 뜨거운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을 거의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오후 1시, 연모시 경찰청.
백기는 경찰모를 손에 든 채 서두르지 않고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멀리서부터 평소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왕 경관의 장황한 수다가 들려왔다. 그 사이사이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제대로 모르는 듯한 그녀의 맞장구가 섞여 있었다.
"내가 듣기로는 말이야…… 제대로 배운 것도 없는 고위직 자제라던데. 아주 귀한 집 도련님이지. 생각해 봐, 윗선에 백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있는 줄 알아? ……우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백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키는 예전과 별 차이가 없었고, 포니테일로 묶지 않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려 있었다. 백기는 뒷이야기를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여전히 그 생기 넘치는 모습 그대로였다.
왕 경관의 이야기가 점점 터무니없어지자 백기는 곧장 말을 끊었다.
"왕 순경, 지금 누구더러 도련님이라는 거지?"
왕 순경은 깜짝 놀랐고, 그녀 역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기억 속의 그 맑은 눈동자가 다시금 백기와 마주쳤다.
마치 기울어진 세월을 건너온 듯, 지난날의 풋풋한 감정이 너무도 쉽게 그의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한때 점점 멀어져만 가던 거리는 마침내 시간 속에서 접혔다. 모든 기억과 장면이 제자리를 찾아 눈앞의 그녀와 서서히 겹쳐졌다.
백기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두려움과 자신을 낯설어하는 눈빛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유연, 나 기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