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하건추는 병으로 특파팀에서 은퇴한 뒤, 연모시의 그다지 번화하지 않은 작은 거리에 서점을 열었다.
가게를 찾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서점으로 돈을 벌 생각도 없었다. 그저 마음 편히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며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날도 그는 평소처럼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가게 입구로 향했다.
그는 문밖에 '금일 휴업'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고는 다시 서점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늘진 곳의 책장에 등을 기댄 채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창밖 거리에서 한 젊은이가 서점을 향해 다가오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건추의 Evol은 무척 특별했다.
일정한 범위 안에 있는 다른 생명체와 시각과 청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 능력 덕분에 그는 이전 세대 특파팀의 '눈'이 되어 수차례 부하 대원들을 완벽하게 지휘하며 작전을 수행했다.
은퇴한 뒤에도 그때의 신중함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건추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부터 새와 길고양이까지, 그곳을 지나는 모든 생명체가 그의 눈이 되어 젊은이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
하건추는 그 젊은이를 알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앞을 지나가는 것이기를.
하건추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젊은이는 서점 문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산들바람이 그의 이마를 덮은 잔머리를 살짝 흔들자, 그 아래로 굳은 의지가 깃든 호박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젊은이는 문밖에 걸린 휴업 팻말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문을 가볍게 두드린 뒤 고개를 조금 숙이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발걸음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마치 책과 먹물 향기로 가득한 이 고요함을 자신도 깨뜨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는 햇빛을 밟으며 서점 안으로 들어섰지만, 입구에서 더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하 대장님, 실례하겠습니다.”
젊은이는 하건추의 옛 호칭을 부르며 인사했다.
단호하고 침착한 목소리에 하건추는 어쩔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건추는 마음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책장 뒤의 그늘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눈앞의 젊은이는 먼 길을 달려온 듯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깨를 꼿꼿이 펴고 있었지만 피로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마치 소리 없는 어둠이 그의 주위를 조용히 휘감고, 햇빛 아래에서도 조금씩 그를 잠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건추는 이 젊은이를 알고 있었다.
백기.
특별행동대의 대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임 대장이자, 특파팀 역사상 최연소 총지휘관이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앞으로 찬란하게 빛날 날들이 무수히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가 자신처럼 관에 한 발을 걸친 늙은이를 찾아올 필요는 없었다.
“백기 군, 우리가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이렇게 은퇴한 늙은이를 찾아와 인사해 주니 나야 반갑네. 뭐라도 마시겠나?”
하건추는 고개를 숙이고 계산대로 걸어가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이번 만남을 그저 선배와 후배가 나누는 정겨운 담소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백기가 입을 열었다.
“하 대장님, 저는 제야의 변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담담하게 흘러나온 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감추려는 기색도 없었다.
그 말은 마치 치명적인 총알처럼 곧장 하건추를 향해 날아들었다.
02
고요한 공간에는 차를 따르는 소리만 가득했다.
하건추는 백기의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는 따라 놓은 차를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너머로 백기의 얼굴이 조금 흐릿하게 보였다.
“그 사건은 이미 4년 전에 종결되지 않았나?”
하건추는 주머니에서 조금 찌그러진 담뱃갑을 꺼냈다.
“당시 군부와 특파팀이 폭동을 일으킨 Evolver들을 현장에서 여럿 체포했잖아. 내 기억으로는 자네도 그때 지원을 나갔을 텐데. 더 조사할 게 있겠나?”
그는 백기가 줄곧 손대지 않은 찻잔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백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쪽에서 갓 보내온 신선한 찻잎으로 우린 차야. 한번 마셔 보게.”
백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찻잔을 스쳐 지나간 시선은 결국 하건추의 얼굴에 머물렀다.
“당시 제야의 변 진압 작전에서 도망친 Evolver 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 순간 창밖에서 요란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를 감추려 애쓰던 서점 안의 평온이 순식간에 깨졌다.
하지만 백기는 여전히 침착했다.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가 당시 사건에 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믿었나?”
“이 사건에는 아직 의문점이 많습니다.”
백기는 하건추의 말투에 섞인 비웃음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여전히 당당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은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제야의 변 관련 기록을 보면, 당시 현장 상황과 체포된 범죄자들에 관한 자료가 전부 '그쪽'으로 이관되었습니다.”
“게다가 사건에 연루된 관계자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발령받거나 실종되었고, 심지어 사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아 있는 자료에는 그저 'Evolver 폭동 행위'라는 문구만 있을 뿐입니다.”
“정말 이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참 질문도 묘하게 하는군.
하건추는 속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추궁에 가까웠다.
하건추는 당시 작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특별한 Evol 능력 덕분에 후방에서 어느 정도 지원과 도움을 제공했었다.
“그래서 내게 무엇을 알아내고 싶은 건가?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그 작전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어.”
“하지만 하 대장님은 분명 무언가를 '보셨을' 겁니다.”
백기의 얼굴은 역광에 가려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도 언젠가는…… 하 대장님 밑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 말에 하건추는 하마터면 들이마신 담배 연기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는 눈앞의 젊은이를 더욱 자세히 바라보았다.
집요하면서도 확고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잘난 체하거나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정확하고 치명적이었다.
하건추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면서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거야.”
그는 백기가 끝내 손대지 않은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차에서는 이미 김이 사라졌고, 희미한 온기만 남아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한 가지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건 흔한 일이지. 하지만 적당한 때에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해.”
“제야의 변은 이미 오래전에 종결된 사건이야. 이제 모두가 그 사실을 받아들였어. 굳이 더 파헤칠 필요는 없네.”
“NW 측에서 저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백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 사건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겠죠.”
“그들이 자네를 감시하기만 한다는 건, 자네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다는 뜻이지.”
하건추의 단호한 대답에 백기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무언가와 씨름하는 듯 하건추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하건추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찬란한 햇살이 가득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엄 형사를 만났지?”
그 순간, 백기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몸도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내가 더 분명하게 말해 줘야겠나?”
“엄 경관 말이야. 줄곧 제야의 변을 조사해 온 그 노형사. 왼팔을 잃은 사람 말이지.”
“자네는 겉으로는 아직 그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미 만났어.”
“그를 만난 뒤 당시 제야의 변에 관한 이야기와 엄 형사의 추측을 들었겠지. 그래서 마음이 흔들렸고, 그다음에는 자네의 그 '여자 사람 친구'를 찾아갔을 테고…….”
“그만 말씀하십시오.”
백기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그의 두 손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하지만 하건추는 그저 담배 연기를 차분하게 내뿜을 뿐이었다.
“이 세상에 영원히 감출 수 있는 비밀은 없어.”
“자네에게는 아직 기회도 많고, 앞으로 살아갈 날도 많아.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말일세.”
“엄 형사는 직장도 잃었고, 팔도 잃었어. 가족도 잃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었지.”
“자네까지 그렇게 될 필요는 없어.”
마치 마지막 판결이 내려진 것처럼, 공간 전체가 죽은 듯 고요해졌다.
오랜 침묵 끝에 하건추의 귓가에 백기의 낮은 물음이 들려왔다.
“대장님도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신 겁니까?”
03
하건추는 백기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백기가 서점을 다녀간 다음 날, 그의 휴대전화 화면에 발신 번호가 표시되지 않은 전화가 걸려 왔다.
“하건추, 요즘 어떻게 지내나?”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불쑥 귓가에 들려오자,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하건추는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작게 움직이는 소리마저 지금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듯했다.
“뭘 그렇게 긴장해?”
수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웃었다.
“그냥 서점 장사는 잘되나 싶어서 전화한 거야.”
“혹시 찾아와서는 안 될 사람이 다녀간 건 아니겠지?”
하건추는 눈을 가볍게 깜빡였다.
“어제 특별행동대에 새로 부임한 대장 있지 않습니까. 백기라고, 아시죠? 그 친구가 한번 찾아왔습니다. 저한테 조언을 좀 구하러 왔다는데, 아시다시피 제가 뭐 가르쳐 줄 만한 게 있겠습니까.”
“눈도 별로 좋지 않아서 그냥 차나 한잔 마시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래도 그 젊은 친구, 참 괜찮더군요. 보기만 해도 능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 꽤 괜찮은 친구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그저 안부를 주고받는 평범한 전화 통화인 것처럼.
전화를 끊은 하건추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책을 펼쳤다. 하지만 글자가 단 한 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책을 거칠게 탁자 위에 내던지고 눈을 감았다.
백기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이 제야의 변을 파헤치고 있었다.
당시 엄 형사가 지명수배자가 되었을 무렵, 하건추의 시력도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그는 이를 핑계로 자신의 Evol 능력까지 영향을 받았다고 둘러대고 특파팀을 떠났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하건추의 시선은 도시 곳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눈을 따라 빠르게 옮겨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백기를 찾아냈다.
백기의 뒤에는 여전히 감시자가 따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백기는 포기하지 않고 음지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원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다만 엄 형사와는 다시 접촉하지 않은 듯했다. 아마 두 사람만의 특별한 연락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제법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날부터 하건추는 계속해서 백기의 행적을 쫓았다.
백기는 당시 제야의 변에 참여했던 경찰관 몇 명을 찾아갔다.
하건추도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 채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뿐인 사람들이었다. 사건의 내막 같은 것은 알 리 없었다.
하지만 백기는 집요하게 당시 임무 수행 과정에서 수상했던 점을 물었다.
순순히 협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전봇대에 앉은 참새의 눈을 통해 하건추는 백기가 어느 집에서 쫓겨나듯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유가족의 얼굴에는 분노가 역력했다. 백기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당시 작전에서는 적지 않은 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유가족들에게 그 죽음은 슬픈 일이었지만, 끝내 명예로운 희생으로 받아들여진 일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회의 치안과 평화를 지키고 특파팀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백기는 그저 사건에 관해 알아보고 조사하는 것뿐이었지만, 유가족들의 마음에는 아무래도 불편한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차갑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백기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빛은 눈부실 만큼 찬란했고, 그의 그림자는 발밑에 바짝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이 세상 어디에도 어둠이 숨어 있을 곳은 없다는 듯이.
한참이 지나서야 백기는 고개를 들고 몸을 돌려 떠났다.
며칠 동안 계속된 방문에도 백기는 아무런 단서나 유용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하건추는 넓은 길을 홀로 천천히 걸어가는 백기를 바라보았다.
마주 오는 행인들은 모두 그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백기는 과거 엄 형사가 걸었던 길을 다시 걷고 있었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향하는 방향을 거슬러, 홀로 반대편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하건추는 능력을 거두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 형사가 무슨 이유로 위험을 무릅쓰고 백기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경험이 백기로 하여금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랐다.
제야의 변에 관한 조사를 그만두는 것이 결국 그에게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 그에게는 미래가 남아 있었으니까.
04
백기의 조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을 지켜보던 하건추는 결국 서점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백기도 제야의 변을 조사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 이전에 접촉했던 정보원들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입막음을 당할까 두려워, 위험한 선을 넘기 직전에 모두 발을 빼버렸다.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정보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고 처세에 능했다.
백기도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더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약속했던 보수를 지급한 뒤, 다시 혼자서 조사를 이어 나갔다.
백기가 찾아간 곳은 4년 전 폭동이 처음 발생했던 장소였다.
연모시 외곽에 자리한 다소 낡은 옛 거리였다.
당시 Evolver들이 처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했고,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때문에 Evolver들은 자신의 능력을 숨긴 채 평범한 사람인 척 군중 속에 섞여 살아가거나, 자신과 같은 Evolver들을 찾아 한데 모여 그들만의 공간을 이루곤 했다.
그리고 이 거리 역시 당시에는 거의 Evolver들만 드나들던 장소 중 하나였다.
그들이 그곳에 모여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가 전해지는 사이, 결국 이곳은 ‘Evolver 폭동의 발원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백기는 출입이 통제된 철조망을 뛰어넘어 거침없이 거리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온통 불에 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깨진 기왓장과 너덜너덜해진 옷가지들이 새까맣게 그을린 땅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적막한 공기 사이로는 이따금 쥐가 무언가를 갉아 먹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도 백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건추는 그 모습이 의외였다.
설마 무언가 알아낸 건가?
하건추가 자신이 무엇을 놓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던 바로 그때, 백기가 갑자기 움직였다.
그는 건물 벽 근처의 사각지대로 몸을 피하더니, 뒤쪽의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순식간에 몇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느닷없는 공격에 백기를 미행하던 남자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 찰나, 거센 바람이 갑자기 휘몰아쳤다. 남자는 바람에 휩쓸리더니 다음 순간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다.
상대 역시 상당한 훈련을 받은 사람인 듯했다.
그는 즉시 공중에서 무게중심을 바로잡고 순식간에 손에 든 총의 장전을 마쳤다.
하지만 백기가 그보다 빨랐다.
백기가 쏜 탄환은 정확히 남자의 손바닥을 꿰뚫었다. 이어 남자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백기는 빈틈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상대에게는 숨 돌릴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백기의 공격은 매번 정확히 관절을 노렸고, 몇 차례의 공격 끝에 남자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모든 동작이 한 호흡에 이어졌다.
하건추는 백기가 마침내 미행자를 처리했으니 이제 무언가 행동에 나서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백기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까마귀 한 마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까마귀의 눈을 빌리고 있던 하건추의 시선과 백기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하 대장님.”
백기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는 이제 감시 카메라가 없습니다.”
하건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서랍에서 새 유심 카드를 꺼내 전화기에 넣고, 일련의 번호를 눌렀다.
“자네, 사람을 그렇게 두들겨 패도 되는 건가?”
“누군가 저를 미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뿐입니다. 자기방어를 위해 먼저 손을 쓴 거죠.”
백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빛에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을 듯한 날카로운 기세가 서려 있었다.
“다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물어보는 걸 깜빡했군요.”
하건추는 눈앞의 백기를 진심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백기에게는 능력도, 실력도, 판단력도 있었다.
얼마든지 찬란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엄 형사처럼 살아가려는 걸까.
쥐처럼 어둠 속에 숨어, 허망한 정의와 진실을 찾아 헤매다가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할 그런 삶을.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건추의 마음속에서 정체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흔들림 없이 빛나는, 한 점 흐림 없는 호박색 눈동자가 그를 견딜 수 없을 만큼 초조하게 만들었다.
“자네는 꼭 그 빌어먹을 사건을 끝까지 파헤쳐야겠나?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해서 그래? 영웅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
“내가 말해 주지. 나는 지금까지 정의로운 사람을 숱하게 봐왔어. 그중에는 입으로는 ‘정의’니 ‘수호’니 떠들어 대면서, 정작 사람이 할 짓이 아닌 일을 저지르는 자들도 있었지.”
“요즘 CORE를 조사하는 사람이 많지 않나. 자네도 그걸 조사하면 안 되는 건가? 이 세상의 미래를 좀 바라보란 말일세. 이미 죽은 사람들을 붙잡고 대체 뭘 하겠다는 건가!”
“과거를 올바르게 마주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백기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더없이 확고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진실을 찾아야 한다면.”
“그 사람이 저여도 되는 거 아닙니까.”
05
결국 하건추는 백기가 각종 감시 카메라와 감시망을 피해 서점 뒷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안내했다.
“자네, 겉으로는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경찰관들과 Evolver 유가족들을 찾아다니는 척했지만, 실제 목적은 따로 있었던 거지?”
하건추는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시선은 백기를 향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하 대장님, 그렇게 물으시는 건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이 녀석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하건추는 서둘러 부인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마음속 저울이 조금씩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그는 백기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었다.
창밖에서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저는 경찰학교에서 지원 인력으로 파견된 학생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외곽에서 도주하는 Evolver들을 제압하는 일만 도왔습니다. 명령을 수행하는 것. 그때 제가 한 일은 그것뿐이었습니다.”
잔잔하게 떨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하건추는 백기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백기는 과거 제야의 변에 지원 인력으로 참여했을 당시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나중에 폭동 가담자로 지목된 사람의 가족들이 특파팀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자식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은 채 흐지부지 끝났다고 합니다.”
“그 뒤 제가 특파팀에 들어오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제야의 변은 현재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실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걸요.”
“어쩌면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구도 실제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최후를 맞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폭동 가담자라는 오명을 짊어진 채 죽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요.”
백기는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았다.
“저는 그곳에서 죽은 Evolver 중 한 사람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폭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남겨진 가족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차별받다가 살던 셋집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결국 정신까지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하 대장님.”
“그 사람들이 정말 그런 결말을 맞아야 했던 겁니까?”
하건추는 갑자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아 온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일에 직접 뛰어든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과 고통, 반대와 마주해야 할 터였다.
어쩌면 절망까지 겪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향하는 방향을 거슬러 걸어야 할 것이다.
하건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눈앞의 백기에게서 그는 과거 엄 형사에게서 보았던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니, 그때조차 보지 못했던 것들이 그에게는 더 많이 있었다.
하건추는 이제 엄 형사가 왜 백기를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앞으로도 햇빛 아래를 당당히 걸어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럼에도 하건추는 결국 백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네가 졌군.”
문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책장 뒤편에서 한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를 발견한 백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엄 경관님……?!”
백기는 곧바로 하건추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엄 경관님이 그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던 것도…….”
하건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려 항복한다는 뜻을 내비쳤을 뿐이었다.
백기는 다시 엄 형사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저를 만나셨던 것도 절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나.”
엄 형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제 자네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됐어.”
“저는 돌아갈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건추는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짙게 쏟아지는 빛 속에 선 백기는 한 점 거리낌 없이 당당하고 굳건했다.
마치 그 무엇도 그를 무너뜨릴 수 없고, 그 무엇도 그를 더럽힐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가세. 우선 자리를 옮기지.”
하건추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기와 엄 형사를 이끌고 서점 안쪽의 비밀스러운 방으로 향했다.
세 사람의 그림자는 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어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모습은 마치 빛을 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