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화창한 오후, 바다 분식의 문 앞에 달린 풍경이 맑게 울렸다.
젊은 남자 두 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고진
다시 이곳에 와 보니까 어때?
질문을 받은 남자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젊고 잘생긴 얼굴에는 날카로운 기백이 서려 있었고, 시선은 멀리 창밖을 향해 있었다.
백기
별로 달라진 건 없어.
맞은편의 고등학교, 널찍한 교차로, 교문 앞에 무성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까지.
어느 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닳고 낡은 테이블과 의자, 새로 바뀐 메뉴판, 교문 앞에 걸린 새로운 현수막은 모두 그에게 시간이 흘렀다는 흔적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고진
맞은편 고등학교에 한번 가 볼래?
그제야 백기가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백기
그럴 필요 없어.
그는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손에 쥔 열쇠를 가볍게 던졌다가 받아 내기를 반복하자, 열쇠가 허공에서 뒤집히며 은빛 궤적을 그렸다.
고진은 눈치껏 화제를 바꿨다.
고진
너도 연모시로 돌아온 지 며칠 됐잖아. 어때, 지낼 만해?
백기
나쁘지 않아.
고진
돌아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사건 몇 개를 해결했잖아. 이제 특파팀에서는 네가 완전히 전설적인 인물이 됐다고.
백기
그 정도로 대단한 일이야?
백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하지만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고진은 호탕하게 웃으며 백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진
자자, 오늘은 특별히 네 복귀를 환영하려고 마련한 자리잖아. 다른 사람 얘기는 그만하자고. 우리 둘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나중에 내가 해결하기 까다로운 사건을 맡게 되면 네가 좀 도와줘야 한다?
백기
특파팀이 언제부터 친분으로 일하는 곳이 됐지?
백기는 고진의 말을 가차 없이 받아쳤다.
그러고는 옆쪽 벽에 붙어 있는 쪽지들로 시선을 돌렸다.
손님들의 메시지가 적힌 쪽지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수없이 교체되어 왔다.
오래된 쪽지가 떨어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쪽지가 붙었다.
02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가게 주인이 국수를 들고 나왔다.
고진은 백기 앞에 놓인 우육면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국물 위에는 고추기름이 두껍게 떠 있었다.
고진
너 아직도 그렇게 매운 걸 잘 먹어……?
백기
넌 그 호들갑 떠는 버릇 언제쯤 고칠 거야?
백기가 어이없다는 듯 고진을 흘겨보자, 고진은 머쓱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백기의 매운 음식 실력이 주인에게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 모양이었다.
주인은 갑자기 탄성을 내지르더니 백기를 알아보았다.
주인
자네, 예전에 맞은편 고등학교 다니던 학생 아니야? 생각해 보니 벌써 5년 만이네…… 예전에 우리 가게 우육면을 제일 좋아했잖아. 기억나나?
고진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방금 백기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부드러운 기색이 스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백기
기억합니다. 그때는 먹으러 올 때마다 고추 말고도 산초기름을 조금 많이 넣어주셨죠.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주인
녀석도 참.
그때 가게 안에는 백기와 고진 외에 다른 손님이 없었다.
오랜만에 옛 단골손님을 만난 주인은 반가운 마음에 백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인
그럼 그때 자네랑 자주 같이 오던 여자애도 기억하나? 그 애도 요즘 종종 찾아와. 자네처럼 얼얼하고 맵게 만든 우육면을 즐겨 먹지. 아, 맞다! 요즘은 무슨 유명 PD가 됐다던데? 아주 대단해 보이더라고!
주인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백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백기
그 애가 자주 오나요?
주인은 잠깐 생각하더니 곧 대답했다.
주인
아주 자주는 아니고, 가끔씩 들러. 가게에 손님이 없을 때면 꼭 거기에 앉곤 하지. 그래, 바로 자네가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 말이야.
백기는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한 입 먹었다.
그러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고진은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백기
내 기억에는…… 예전엔 매운 걸 잘 못 먹었는데.
주인은 백기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여전히 옛 추억에 잠겨 있었다.
주인
생각해 보면 이 작은 가게도 참 오래 운영했어. 졸업하고 나서도 이 국수 한 그릇 먹겠다고 다시 찾아오는 학생은 그 여자애하고 자네밖에 없다니까.
바로 그때였다.
가게 입구에 달린 풍경이 갑자기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주인의 이야기가 그 소리에 끊겼다.
03
나는 바다 분식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 백기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밖에서 불어온 미세한 바람이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흩날렸다.
백기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그의 얼굴을 반쯤 비추고 있었다. 눈가와 눈썹 끝에도 햇살이 내려앉아 은은한 온기가 감돌았다.
미처 뒷걸음질 치기도 전에 주인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주인
유연 씨, 마침 잘 왔네! 방금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주인은 백기가 앉아 있는 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혼자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인
오늘이 무슨 좋은 날인지 모르겠네. 자네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찾아오다니.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백기의 시선이 곧장 나를 향했다.
그 시선이 얼굴에 닿자 이상하게도 뜨겁게 느껴졌다.
아득한 기억이 밀려왔다.
나는 오래도록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해 두었던, 누구에게도 쉽게 굽히지 않던 그 소년을 떠올렸다.
피아노 연습실에서 내가 연주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소년.
바람에 흰 셔츠가 나부끼는 가운데 나를 향해 손을 내밀던 소년.
백기가 나를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백기
왜? 모르는 척하려고?
그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묻어 있었다.
백기는 옆 의자에 팔을 걸친 채 앉아 있었다. 사람을 두렵게 만들던 날카로운 기세도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결국 그에게 다가가 맞은편의 빈자리에 앉았다.
주인
뭘 먹을 텐가? 오늘도 늘 먹던 걸로 줄까?
나는 막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백기 앞에 놓인 우육면을 발견했다.
그러자 곧바로 말을 바꿨다.
유연
저는 차슈면으로 주세요.
주인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나와 백기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진 역시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 했다.
나는 그를 향해 매섭게 눈빛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본 백기가 나지막이 웃었다.
백기
나랑 단둘이 있는 게 그렇게 무서워?
살짝 놀리는 듯한 그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백기는 찻잔에 차를 따라 내 앞에 놓아주었다.
백기
내가 다시 연모시로 돌아온 게 많이 놀라웠어?
그의 말투는 평범했다.
마치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유연
처음에는 조금 놀랐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나는 백기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에 든 찻잔을 들어 그에게 살짝 내밀었다.
유연
지난번 특파팀에서 만났을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차 한 잔으로 축하할게요. 선배가 5년 만에 돌아와 특별행동대 대장으로 승진한 걸요.
백기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가볍게 웃더니 자신의 찻잔을 들어 내 잔에 부딪쳤다.
맑고 경쾌한 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백기
너도 축하해. 일류 프로듀서가 됐잖아.
유연
……고마워요.
마침내 주인이 국수를 들고 나타나면서 우리의 대화가 끊겼다.
주인
고추 양념은 더 넣어줄까?
나는 막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백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얘는 안 넣어도 돼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괜히 오기가 생긴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고추 양념통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백기가 먼저 양념통을 붙잡았다.
허공으로 뻗은 내 손은 그대로 어정쩡하게 멈춰 버렸다.
순간, 주위의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04
고진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백기 승진 이야기하고 있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잔을 들고 백 대장의 앞날을 축하하는 건 어때?
백기
국수를 먹으면서도 입을 못 다물겠어?
유연
잠깐만요. 말 좀 하지 마세요.
나와 백기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뜻밖에도 그의 깊어진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문득 떠올랐다.
예전에도 우리는 여러 번 이렇게 입을 모아 비슷한 말을 하곤 했다.
백기는 마침내 고추 양념통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백기
매운 걸 못 먹으면 억지로 먹지 마.
손목을 감싼 그의 손은 뜨겁고도 강한 압박감을 주었다.
아무리 손을 빼내려 해도 빠지지 않았다.
나는 조금 화가 나서 백기를 노려보았다.
유연
특파팀의 관할 범위가 언제부터 이렇게 넓어졌어요?
그런데 백기는 내 말을 듣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눈가에 한층 밝은 웃음기를 띠었다.
쨍그랑——!
갑작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에 떨어진 식초병이 여러 조각으로 깨지면서 순식간에 가게 안에 시큼한 냄새가 퍼졌다.
주인은 멋쩍은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까부터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해하던 고진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진
사장님, 가만 계세요! 제가 대신 사 올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진은 이미 문밖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가게 안에는 나와 백기, 단둘만 남았다.
내가 더 이상 고추 양념통을 집으려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모양인지, 백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백기
더 늦기 전에 먹어. 국수 다 식겠다.
아무래도 백기가 지켜보는 앞에서 국수 한 그릇을 다 먹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인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유연
지금 우리 입장을 생각하면 아직 한 테이블에 앉아서 밥을 먹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선배 생각은 어때요?
백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들어 자신의 국수 그릇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햇살을 머금은 눈동자에는 따스한 온기가 어려 있었다.
백기
내가 좋아하던 국수를 올 때마다 시켜 먹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 봐야 별로 설득력이 없는데.
나는 순간 민망해졌다.
분명 주인이 백기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준 것이 틀림없었다.
유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특별행동대 대장님께서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실 줄은 몰랐네요.
나 역시 물러서지 않고 백기를 마주 보며 받아쳤다.
햇살 속에서 작은 먼지들이 우리 사이를 떠다니고 있었다.
백기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한 손은 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다른 손은 테이블을 짚었다.
그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백기
내가 돌아온 순간부터 넌 이미 특파팀의 조사 대상 명단에 올라가 있었어.
그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백기
너에 관한 일은 내가 하나하나 전부 조사해서 알아낼 거야.
눈앞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갑자기 사라졌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백기는 이미 분식집을 나간 뒤였다.
귓가에는 서늘한 바람을 타고 전해진,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 있는 한마디만이 남아 있었다.
백기
다음부터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 눈을 아무리 크게 부릅떠도 기세가 더 세지는 건 아니니까.
나는 분한 마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숫값이라도 계산하려고 했지만, 주인에게서 백기가 이미 계산을 마쳤다는 말을 들었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불어와 창밖의 은행나무를 흔들었다.
황금빛 은행잎이 흩날리며 바닥을 노랗게 물들였다.
기억 속의 소년은 이제 풋풋했던 모습을 벗어던졌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기백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불어가는 바람처럼.
고고한 외로운 늑대처럼.
유연
백기 선배, 돌아온 걸 환영해요.
전화 통화 · 사건 수사(查案)
백기
나야, 백기.
유연
선배? 무슨 일이에요?
백기
최근 특파팀에서 초능력 범죄와 관련된 불법 거래소를 수사하고 있어. 어제 용의자들을 한 무리 체포했는데, 그들이 진술한 주소가 네 회사 근처야.
유연
네?
백기
요 며칠 사이에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어? 아니면 수상한 Evolver를 만난 적은?
유연
없어요…… 그런 일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 불법 거래소가 그렇게 심각한 곳인가요?
백기
S급에 해당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도 없어.
유연
그럼 선배도 꼭 조심하세요.
백기
……응.
유연
저한테 따로 연락한 건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어서예요?
백기
……아니. 아직 단서가 충분하지 않아서 거래소를 배후에서 운영하는 사람을 특정하지 못했어. 네 회사는 보안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경비를 좀 더 강화하는 게 좋겠어.
유연
네…… 알겠어요.
백기
뭔가 단서를 발견하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