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칠흑 같은 밤하늘에 하현달이 높이 걸려 있었다. 이따금 흘러가는 구름이 달빛을 흐릿하게 번지게 하면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나무문이 밀려 열렸다. 회색 군복 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밀봉된 서류 한 부를 들고 있었고,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공손하게 건넸다.
"중장님, 유감스럽게도 그의 유전자에서는 Evol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서류를 받아 봉인을 뜯고 내용을 잠깐 살펴본 뒤 물었다.
"확실한가?"
회색 군복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남자는 미간을 깊이 찌푸리더니 손을 내저어 그를 물렸다.
회색 군복의 남자는 거수경례를 한 뒤 방을 나가 나무문을 닫았다. 모든 것이 다시 고요해졌고, 바닥에는 곧게 드리운 달빛만이 차갑고 쓸쓸하게 남아 있었다.
백기는 꿈을 꾸었다. 거센 바람에 휘말려 만 미터 높이의 하늘까지 솟구쳤다가 순식간에 아래로 내던져지는 꿈이었다. 몸이 허공에 붕 뜨는 듯한 감각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백기는 벌떡 일어나 작은 베개를 품에 안고 서둘러 엄마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방 앞에 도착해 보니 문이 잠겨 있었다. 안에서는 희미하게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문이 워낙 두꺼워 온몸을 바짝 붙여 보아도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빠가 돌아온 것이다!
백기는 더없이 기뻤다. 전에 엄마가 말해 주기를, 아빠가 놀이공원에 데려가 꼬마 비행기를 태워 줄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백기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리던 대화 소리가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완전히 멎었다. 곧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백기는 갑자기 앞으로 쏠리는 몸을 황급히 바로잡으려 했지만, 결국 눈앞에 서 있던 남자의 다리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며 반가움에 활짝 웃었다.
"아빠!"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귓가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야, 왜 일어났니?"
위엄 있는 남자는 백기를 떼어 옆으로 밀어 놓고 아무 말 없이 떠나 버렸다. 엄마는 백기를 품에 안아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뒤 다시 방으로 데려갔다.
"엄마, 아빠는 왜 이렇게 빨리 가?"
백기의 질문을 들은 온영은 온몸을 흠칫 떨었다. 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백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다정하게 대답했다.
"아빠는 많이 바쁘시거든. 일이 다 끝나면 돌아와서 우리 백기랑 놀아 주실 거야."
엄마의 말을 들은 백기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빠는 대체 언제쯤 일이 끝나는 걸까?
백기는 계단에 앉아 1층 홀에서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문득 그런 의문을 품었다.
02
백기는 자주 엄마와 함께 아빠를 기다렸다. 하지만 매번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깊이 잠들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어느새 자신의 작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백기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다다다 엄마에게 달려가 다급하게 물었다.
"엄마, 어젯밤에 아빠 왔어?"
온영은 대답하는 대신 몸을 낮춰 어린 백기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녀의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백기야, 이제 곧 형이 될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아침밥도 혼자 먹는 법을 배워야 해."
그 말을 들은 백기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를 보지 못한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엄마는 음식을 만들 때마다 여전히 세 사람 몫을 준비했다. 백기는 그게 이상해서 음식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엄마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엄마는 그 말이 옳다며 웃으면서 칭찬해 주었지만, 곧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엄마는 아빠 몫도 준비해 둬야 하잖니."
"왜?"
"아빠는 일하느라 많이 힘드시니까. 집에 돌아왔을 때 맛있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으면 기뻐하실 거야."
온영은 눈을 곱게 휘며 참을성 있게 설명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백기는 자신에게 ‘아빠’라는 두 글자가 더없이 낯설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글씨를 배울 때조차 유독 그 두 글자만은 다른 글자보다 훨씬 쓰기 어려웠다. 백기는 공책에 쓴 ‘爸’ 자를 지우개로 문지르다가 풀이 죽었다.
온영은 백기의 공책을 받아 들고 의아해했다. 어째서 그 부분만 새까맣게 엉망이 되어 있는 걸까.
백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영은 새까맣게 번진 자국과 연필을 세게 눌러 쓴 흔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녀는 백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 주었다.
"괜찮아. 엄마가 가르쳐 줄게."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기는 다시 아빠를 만났다. 그때 엄마가 말했던 ‘동생’도 태어난 모양이었다. 작은 이불에 싸인 아기는 기운이 없어 보이는 엄마 곁에 누워 있었다.
백기는 침대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자 이불 속에 있는 작은 아기가 겨우 눈에 들어왔다.
아기는 조금 신기한 모습이었다. 온몸을 가느다란 번개가 감싸고 있는 듯했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으면서도 아주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백기는 손을 뻗어 작은 아기에게 인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맞은편에 있던 남자가 재빨리 그를 밀쳐 냈고, 백기는 저도 모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곧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대지 마."
03
키가 순식간에 10센티미터나 자란 백기는 이제 걸핏하면 ‘왜?’라고 묻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작은 얼굴에는 언제나 무뚝뚝한 표정이 어려 있었고,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동생의 손을 잡고 있을 때면 누구도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 덕분에 두 아이가 너무 예쁘다며 안아 보려고 다가왔던 어른들도 몇 명이나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온영은 아마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라며 미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백기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학교에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있는 어린 동생보다 훨씬 성가신 여자아이가 학교에 있었는데, 그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백기에게 달라붙었다.
백기의 이야기를 다 들은 온영은 그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그 애는 우리 백기가 좋아서 같이 놀고 싶은 거야."
동생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자신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난 걔가 싫어. 같이 놀기도 싫고."
"어머, 왜?"
"너무 귀찮고 시끄러워. 맨날 내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고, 내 공책에 낙서도 해. 자꾸 소꿉놀이만 하자고 하고. 난 그런 거 싫어."
온영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우리 백기는 어떤 친구가 좋아?"
백기는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반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가 딱히 없는 것 같았다. 다들 너무 귀찮게 굴고 울기도 잘했다.
백기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동생 같은 애."
"난 동생 같은 애가 좋아."
백기는 자신의 대답을 더욱 확신하듯 두 번이나 반복했다. 온영은 흐뭇한 마음으로 백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앞으로도 둘이 계속 사이좋게 지내야 해."
백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형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듯한 모습이었다.
엄마와 약속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동생을 좋아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후로 백기는 맛있는 것이나 재미있는 것이 생기면 언제나 가장 먼저 동생을 떠올렸다.
다른 아이들이 재잘거리기만 해도 저절로 미간을 찌푸리던 백기였지만, 동생이 끝없이 쏟아 내는 ‘왜?’라는 질문 앞에서는 한없는 인내심을 보였다.
그렇게 백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자란 동생에게 형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백기는 평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04
"괴물! 괴물이야!"
백기가 모래 놀이터로 급히 돌아왔을 때, 또래 아이들이 한데 모여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백기가 아이들을 밀치고 들어가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동생이 애써 씩씩한 척하며 그를 맞았다.
"형! 나 잘했지? 나 굉장하지!"
백기가 고개를 숙여 살펴보니 동생의 옷에는 누군가 밀치고 잡아당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얼굴에는 가느다란 핏자국이 희미하게 보였고, 손가락 사이에는 아직도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백기는 황급히 동생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 옆에서는 얼굴이 멍투성이가 된 남자아이가 몸을 움찔거리며 외치고 있었다.
"괴물! 저 괴물 죽여 버려!"
"맞아! 괴물이야!"
"우린 괴물이랑 안 놀아! 빨리 가자!"
"거봐, 역시 괴물이라니까. 하하……"
그 순간 백기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가장 크게 떠들던, 자신보다 머리 반 개는 더 큰 남자아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바닥에 쓰러뜨렸다.
아이들의 비웃음이 뚝 그쳤다.
백기는 그대로 쓰러진 아이 위에 올라타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닥쳐!"
온영은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동안에도 머릿속이 새하얬다.
병실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는 얼굴 곳곳에 상처를 입은 백기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동생은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채 침대 곁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가슴이 쥐어짜이는 듯 아파 왔다. 온영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몸을 숙였다. 백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진 뒤 고개를 돌려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프니?"
동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아버지가 병실 문을 열고 곧장 들어왔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백기를 한번 바라보았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동생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밖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러자 온영이 다급히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백기가 다쳤어요."
"놔."
남자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하지만 온영은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남자를 더욱 세게 붙잡았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려 있었고, 그 안에는 희미한 애원마저 담겨 있었다.
"어찌 됐든 그 아이도 당신 아들이잖아요……"
남자는 온영의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의 말투에는 한 치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내게 아들은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당신도 잘 알 텐데."
05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백기가 자신의 삶에 아버지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거의 잊어버릴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아버지는 마침내 이 저택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면서 한 가지 소식도 함께 가져왔다. 동생을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백기는 머릿속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충격에 휩싸여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온영은 남자의 앞으로 돌아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얘기 좀 해요."
백기는 엄마와 아빠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아버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을 뿐이었다.
"쓸모없어…… 어떤 모습…… 그 애는…… 될 수 없어…… 내겐 그런 건 필요 없어……"
지난 몇 년 동안 백기는 아버지와 거의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에게는 달랐다.
아버지는 동생을 대할 때도 여전히 차가운 모습이었지만, 백기는 그 눈빛이 자신을 바라볼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있었다. 아버지가 동생을 데려가려는 것은 동생에게 자신에게는 없는 어떤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에게 냉대를 받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에도 아버지는 동생을 데려가지 않았다. 그저 다시 오랫동안 모습을 감추었을 뿐이었다.
"난 아빠 따라가기 싫어."
동생은 백기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형이 손으로 만들고 있는 작은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백기가 동생의 유치원 졸업 선물로 특별히 준비한 것으로, 벌써 며칠째 만들고 있었다.
"형, 그냥 내가 아빠한테 말할까? 아빠 따라가기 싫다고."
백기는 동생을 한번 바라보고 물었다.
"왜? 너 맨날 아빠랑 놀고 싶다고 졸랐잖아."
"그래도 난 형이 더 좋아. 형이 훨씬 멋있거든!"
동생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더니 덧붙였다.
"게다가 난 형이랑 엄마도 지켜 줘야 한단 말이야!"
백기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네가 날 지켜 줄 필요는 없어."
그러자 동생은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느다란 팔을 들어 올리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두고 봐! 나도 크면 형이랑 엄마를 지켜 줄 수 있을 거야. 날 얕보지 말라고!"
백기는 마지막 날개까지 조립한 뒤 완성된 비행기를 동생에게 건넸다.
"다 만들었어."
"우와, 진짜 멋있다!"
동생은 작은 비행기를 손에 들고 방 안을 뛰어다녔다.
백기는 등 뒤에 감춰 두었던 새 책가방 하나를 꺼냈다.
"이제 곧 새 학기가 시작되네. 너도 이제 다 컸어."
"응! 형, 그럼 이제 우리 같이 학교 다니자. 응?"
백기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약속이야!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
"응, 약속할게."
그날도 백기는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하지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언제나 달려 나와 자신을 맞아 주던 작은 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도록 동생이 나타나지 않자 백기는 엄마 곁으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동생은?"
온영은 반찬을 집어 들던 젓가락을 허공에 멈췄다. 그녀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동생은…… 아빠를 따라갔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기는 동생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작은 책가방과 비행기만이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백기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작은 비행기를 집어 들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온영은 백기의 발치에 쪼그려 앉아 아직 다 낫지 않은 얼굴의 상처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한없이 비참하고 모든 것에 실패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온영은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아빠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다만……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서…… 아빠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거야……"
그 말은 백기를 달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백기는 아직 ‘말 못 할 사정’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가족보다 더 중요한 일이야?"
온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가족을 지켜야 하거든."
백기는 언젠가 동생이 근육 하나 없는 팔을 들어 보이며 자신들을 지켜 주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앳된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백기는 두 팔을 뻗어 온영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엄마가 자신을 달래 주던 모습을 흉내 내며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엄마, 슬퍼하지 마. 앞으로는 백기가 엄마를 지켜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