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한밤중, 젊은 남자가 인적이 드문 골목을 돌아 아직 영업 중인 작은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식당 홀을 그대로 지나 가장 안쪽에 있는 별실로 향했다. 밤늦도록 이어지는 카드 섞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딜러 자리에 앉은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카드를 뽑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손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차가운 총구가 남자의 관자놀이에 바짝 닿았다.
“이 판은 언제 끝나지?”
백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에는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겁에 질려 문밖으로 달아났다. 도망칠 곳이 없어진 남자는 갑자기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백기를 향해 휘둘렀다.
백기는 남자의 손목을 붙잡아 힘을 빼놓고 다른 손으로 수갑을 꺼내려 했다.
그 순간, 불현듯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치면 안 돼.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해서도 안 돼.
그렇게 하면 누군가가 몹시 슬퍼할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 사람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한순간 정신이 흐트러진 사이, 남자의 손에서 번뜩이던 칼날이 백기의 엄지와 검지 사이를 베고 지나갔다.
통증과 함께 흩어졌던 정신이 다시 또렷해졌다.
백기가 손바닥에 살짝 힘을 모으자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부서진 탁자와 의자를 휩쓸어 올렸다.
남자의 눈빛에도 공포가 서리기 시작했다…….
3분 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남자는 두 손에 수갑이 단단히 채워진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살려 달라고 빌고 있었다.
백기가 남자를 별실 밖으로 밀어내자 밖에서 대기하던 동료가 다가와 그를 경찰차로 연행했다.
식당 홀에서는 조금 전까지 손뼉을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던 어린 여자아이가 눈앞의 광경에 놀라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어머니가 달래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 무서워하지 마. 저 아저씨는 나쁜 사람을 잡는 특수경찰이야. 우리를 지켜 주러 오신 거란다.”
아이는 백기를 한 번 바라보더니 오히려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백기는 미안한 듯 아이의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식당 입구에 놓인 인형뽑기 기계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가장 커다란 인형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생일 축하해.”
백기는 커다란 캐릭터 인형을 아이에게 건네준 뒤 몸을 돌려 식당을 나섰다.
한 시간 동안 이어진 심문은 사람을 녹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조는 기지개를 켜며 정리한 진술서를 들고 백기의 사무실로 향했다.
깊은 밤인데도 사무실 안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당조는 문을 세 번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시험 삼아 문을 밀고 들어간 그는 뜻밖의 광경에 깜짝 놀랐다.
책상 뒤에 앉은 백기는 사건을 조사하거나 공무를 처리하는 중이 아니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백기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오랫동안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당조는 다가가 화면을 힐끗 바라보았다.
얼마 전 특파팀이 Evolver 회사의 프로듀서를 체포했다는 기사였다.
당조는 백기의 눈앞에서 손을 두어 번 흔들며 물었다.
“백 대장, 이거 몇 개로 보여요?”
백기가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자 그제야 당조는 안심했다.
하지만 백기의 손에 피딱지가 앉은 상처를 발견하자 다시 머리가 아파졌다.
대체 무슨 일이 그렇게 중요하길래 상처를 치료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거야?
그는 정리한 진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백기를 붙잡아 의무실로 이끌었다.
“아무리 몸이 쇳덩이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이렇게 혹사하면 못 버텨요.”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아 며칠만 잘 관리하면 나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조는 백기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에 붙잡은 범인은 그다지 위험한 상대도 아니었다.
백기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허무하게 다친 걸까?
당조가 몇 마디 더 물어보려던 순간, 백기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02
새벽 4시.
24시간 편의점의 점원이 하품을 하며 벽에 걸린 TV 광고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을 그렇게 흘려보내던 중, 경쾌한 전자음이 울리며 자동문이 천천히 열렸다.
젊은 남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점원은 정신을 차리고 어서 오시라고 인사하려다가 눈앞의 손님이 낯익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근처 아파트에 살며 이 편의점에 자주 들르는 단골이었다.
가끔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누군가 말을 걸어도 늘 차가운 말 몇 마디로 거절하곤 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편의점에 올 때마다 컵라면이나 즉석 도시락만 사 간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점원은 망설임 없이 즉석식품 진열대로 향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정말 자기 몸을 조금도 챙기지 않는다니까…….
백기는 허리를 숙이고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음식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듯 포장지에 표시된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있었다.
표고버섯 맛 컵라면은 맛이 없다.
특파팀 앞에 사는 길고양이는 작은 생선포보다 소시지를 더 좋아한다.
다치면 안 된다.
혼자 위험에 빠져서도 안 된다.
아무 말 없이 떠나서도 안 된다.
또다시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일상에 낯선 경험들이 하나둘 끼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에게 또 다른 기억이 공유된 것 같았다.
두서없이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은 가늘고 긴 실 한 가닥으로 꼬여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아무도 모르게 그 실을 살짝 잡아당기곤 했다.
백기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즉석식품을 향해 뻗었던 손을 무의식적으로 거두고, 그 옆에 놓인 채소가 좀 더 많이 들어 있는 제품을 집어 들었다.
계산대에 선 백기는 옆에 다육식물 화분들이 한 줄로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희 편의점과 연모시 환경보호협회가 함께 진행하는 공익 행사입니다. 화분이 하나 팔릴 때마다 판매 금액과 동일한 금액을 환경보호 기금으로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어요.”
젊은 손님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점원은 눈치껏 설명을 멈추고 나머지 상품들의 바코드를 찍었다.
“전부 56위안입니다.”
영수증이 출력되자 점원은 도시락과 함께 백기에게 건넸다.
그런데 그때, 백기가 막 새싹이 돋아난 작은 화분 하나를 가리켰다.
“이것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
집으로 돌아온 백기는 외투를 세탁기에 집어넣고 예약 세탁과 건조를 설정한 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기에서 세찬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희뿌연 수증기가 순식간에 욕실 안을 가득 채웠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 덕분에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백기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상처를 빨리 치료해야 해.
'그녀'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순간, 백기는 다시 멍해졌다.
——'그녀'가 누구지?
그리고 자신은 왜 그 사람의 감정을 이토록 신경 쓰는 걸까?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자 세탁기에서 '띵'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백기는 머리를 닦으며 세탁기로 다가갔다가 그제야 자신이 세탁 세제 대신 표백제를 잘못 넣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동안 세탁기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전원 플러그를 뽑고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몰골이 된 외투를 꺼냈다.
그렇게 한바탕 일을 마치고 나자 문득 조금 전 편의점에서 산 작은 화분이 떠올랐다.
점원은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두면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새싹이 돋아날 거라고 했다. 키우기도 무척 쉽다고 했다.
백기는 화분을 베란다에 놓았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다육식물은 하루에 물을 몇 번 줘야 할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착각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일을 전에 한 번 겪어 본 것 같다'는 익숙한 감각이 또다시 밀려왔다.
“나 대체 뭐 하는 거지……?”
백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조금 짜증스러워진 그는 휴대전화를 한쪽으로 던져 놓고 아예 침실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가을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깊은 밤, 창밖에서는 빗방울이 조용히 나뭇잎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도 아주 작고 희미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백기는 눈을 떴다.
창밖을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천장을 비추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백기의 마음속에 문득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그는 어렴풋이 느꼈다.
지금껏 아무리 애써도 붙잡을 수 없었던 기억은 단순히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03
모처럼 한가로운 주말을 맞아 당조는 특파팀의 친한 동료들을 불러 모아 훠궈를 먹기로 했다.
막 훠궈 육수를 주문했을 때, 육일이 문득 양심에 찔렸는지 백기도 부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백기가 오랜만에 쉬는 날인데 자신들 같은 녀석들을 만나고 싶어 할 리 없었다. 당조는 제 분수를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그럼 내가 전화해 볼게.”
한편 다른 특수경찰 대원들은 홍보부의 정 대원을 위로하고 있었다.
정 대원은 지난주에 연인과 헤어진 뒤 며칠째 유난히 마음이 약해지고 감정도 예민해진 상태였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이별 노래만 들어도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조는 연락처 목록을 열고 최근 백기가 보였던 이상한 모습들을 떠올렸다.
딱히 남의 사생활을 캐묻기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직감적으로 백기에게 무슨 고민이 있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변화는 분명 그 여자가 나타난 뒤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당조가 조금이라도 알아보려고 하면 백기의 살벌한 눈빛에 가로막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당조는 정 대원을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더욱 확신에 찬 결론을 내렸다.
——백 대장님도 계속 감정을 억누르기만 하고 풀어놓지 않으면 속병이 나고 말 거야.
당조는 종업원에게 맥주 두 다스를 가져다 달라고 한 뒤 백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 대장님, 좋은 저녁입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일부러 귀찮게 해 드리려는 건 아니고요. 고 대장님이 저희한테 소기름 훠궈를 쏘신다는데, 오실래요?”
“아, 거절부터 하지 마시고요.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그래요. 네, 지금 당장이요…… 엄청 급한 일입니다.”
당조는 깜짝 놀란 고진을 향해 히죽 웃어 보이고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이어 갔다.
“저도 운동장 돌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니까요. 정말 일이 있어요.”
30분 뒤, 백기가 미간을 찌푸린 채 훠궈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를 발견한 젊은 특수경찰 대원들은 곧장 젓가락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일렬로 섰다. 하마터면 백기에게 경례까지 할 기세였다.
당조는 싱글벙글 웃으며 종업원을 불러 식기 한 벌을 더 가져다 달라고 했다.
“백 대장님, 오셨어요?”
백기는 당조를 한 번 바라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무슨 급한 일인데?”
“정 대원이 실연했거든요. 대장님도 오셔서 위로 좀 해 주시라고요.”
“…….”
깜짝 놀란 정 대원은 손을 마구 내저으며 더듬더듬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당조는 그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조용히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너무 상심하지 마.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잖아.”
당조는 정 대원의 어깨를 토닥였다.
“게다가 누구나 마음속에 한 사람쯤은 품고 있는 법이지. 안 그래요, 백 대장님?”
그 말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정 대원은 순식간에 울던 것도 잊어버렸다.
고진은 즉시 허리를 꼿꼿이 세웠고, 다른 사람들도 재빨리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하나같이 고개를 홱 돌려 백기를 바라보았다.
백기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다만 온몸에서 맥주잔 속 얼음보다도 차가운 냉기가 쉬익쉬익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백기도 함부로 자신을 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당조는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마음이 아주 느긋해진 그는 겁도 없이 계속 물었다.
“백 대장님, 왜 갑자기 말씀이 없으세요?”
“왜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예전에 특훈받을 때 사진을 봤어요.”
당조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전에 저한테 ‘당조, 손 떼!’라고 소리치셨던 그 아가씨 맞죠?”
“……당조!”
“네, 네! 여기 있습니다.”
당조는 백기의 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 주었다.
“백 대장님, 사실 요즘 대장님 상태가 별로 안 좋다는 건 저도 눈치챘어요. 그런데 워낙 속마음을 남한테 털어놓지 않으시잖아요. 그래서 제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죠.”
“술을 마시면 진심이 나온다는 말도 있잖아요. 오늘은 술도 넉넉하게 준비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든, 그동안 속에 꾹 눌러 담아 뒀던 말이든 시원하게 털어놓으세요.”
당조는 고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죠, 고 대장님?”
술잔이 몇 차례 오가는 동안 당조는 끝내 백기를 취하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먼저 잔뜩 취해 버렸다.
그러고는 예전에 특훈을 받을 때 백기에게 당했던 '죽음의 훈련'을 다시 한번 끄집어내 한바탕 하소연까지 늘어놓았다.
결국 계산도 백기가 했다.
고진이 다가와 백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요즘 별일 없지?”
백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설마 저 녀석 말을 진짜로 믿는 거야? 입만 열면 허풍인데.”
고진은 백기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딱히 걱정할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아.”
“그래도 당조 녀석 말 중에 하나는 맞아.”
“사람이 계속 감정을 억누르기만 하면 언젠가는 속병이 나기 마련이야.”
05
특파팀의 집중치료실.
수액이 플라스틱 관을 따라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백기는 깊고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수많은 꿈을 꾼 것 같았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게 만드는 악몽이 아니라, 이대로 계속 잠들어 있고 싶어지는 꿈들이었다.
하지만 긴 꿈을 꾸고 깨어나면 대개 마지막 꿈 하나만 기억에 남는 것처럼,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흐릿하면서도 익숙한 얼굴 하나뿐이었다.
백기는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취가 풀리며 밀려오는 통증 덕분에 정신이 한층 또렷해졌다.
당조와 고진은 백기가 자신들에게 알리지 않고 헌터 게임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소에도 혼자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백기에게 익숙했기에, 이번에도 그저 무슨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며칠 사이, Evolver 암살 사건에는 새로운 진전이 있었다.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한 것이다.
백기는 사건이 이대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그쪽' 고위층까지 개입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행동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또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있어요.”
당조는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최근 발생한 암살 사건에서 사정이 좀 특이한 증인을 확보했거든요. 아무래도 기억을 읽을 수 있는 Evolver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아요.”
당조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런데 전 그런 능력을 가진 Evolver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요. 백 대장님은 혹시 아는 분 계세요?”
원래대로라면 두 사람은 업무상 필요한 교류 외에는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함께 거리를 나온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기분 전환을 위해서였고, 둘째는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Evolver 암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에게서 단서를 얻을 길이 막혔지만, 백기는 별다른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 쪽이 유난히 마음에 걸려 하는 듯했다.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했다며 미안해하기까지 했다.
오후의 번화한 거리.
백기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그녀가 웃으며 건네는 어묵꼬치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곁을 걷고 있을 때면 자신을 괴롭히던 일들이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야기에 응했다.
마치 두 사람이 예전에도 이렇게 나란히 거리를 걸으며 목적지 없이 한가롭게 돌아다닌 적이 있는 것처럼.
그녀도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을까?
백기는 마음속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런 생각들을 잊어버리려 했다.
먹거리 골목을 벗어나자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행인들은 앞다투어 교차로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백기는 우산을 펼쳐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려 했다.
노란 납매화가 빗속에서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향기와 색채,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의 기척까지.
모든 감각이 한층 선명해지며 이 순간의 기억을 이루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백기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복잡한 감정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그녀의 손이 우연히 자신의 손에 닿을 때.
아득히 오래된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이런 말투로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이런 모습으로 그의 손을 잡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한때 그의 힘이 되어 준 적이 있었다.
그가 마음속 깊이 감춰 두었던 감정들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보듬어진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뜨거운 기운이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자 길가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천천히 차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행인들이 이따금 백기의 어깨에 부딪쳤다.
백기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빗속에 비친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서로 다른 두 순간이 기묘하게 겹쳐지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에도 자신의 심장이 그녀를 향해 이토록 서툴고 격렬하게 뛰었던 것만 같았다.
그때 그녀가 문득 몸을 돌렸다.
백기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우산을 접고 버스 정류장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모녀를 가리킨 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듯 눈빛으로 그의 의사를 물었다.
백기는 거의 생각할 것도 없이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그녀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하늘을 뒤덮은 빗방울이 세차게 쏟아졌다.
발밑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그의 등 뒤로 높이 솟구쳤다.
마치 빗물이 온몸에 스며들듯,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더 깊이 젖어 드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백기는 깨달았다.
기억이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던 그 시간에도 자신은 이미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외투로 만들어 낸 비좁은 공간 안으로 이따금 비바람이 들이쳤다.
재회가 서로의 나아갈 방향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그녀와 함께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