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린 지도 한참이 지났다.
백기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옥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본 뒤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복도에 드리운 옅은 노란빛의 조명은 밝음과 어둠을 나누고 있었다.
마치 더 이상 연주하는 사람이 없는 피아노의 흑백 건반처럼.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온기는 언제나 너무도 따뜻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런 온기에 익숙해지고 나니 이렇게 홀로 교정을 걷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기온이 조금은 내려간 듯했다.
백기는 학교 담장 앞으로 걸어갔다.
발목과 손목에 가볍게 힘을 주어 담장을 뛰어넘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한 셈이겠지?"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담장도, 풀과 나무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나뭇잎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저녁 바람에 답을 맡길 뿐이었다.
도시는 고요했다.
특파팀은 이미 모든 대원에게 해산 지시를 내린 뒤였다.
아마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대원들도 지금쯤은 가족의 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늘에서는 혜성 무리가 대기와 마찰하며 불길한 빛을 띤 긴 꼬리를 남기고 있었다.
멀리서는 몇 군데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도 희미하게 보였다.
아마 재해로 파괴된 건물에서 남은 잔해가 타고 있는 것이리라.
백기는 수많은 별똥별이 가로지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오토바이에 올라타 먼 곳을 향해 달려갔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줄곧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그런 확신이 생겨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백기는 언제나 그렇게 믿었다.
그녀를 지키든,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걷든, 혹은 기다리든.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두 사람이 걷는 길의 끝은 결국 하나로 이어질 것이라고.
그녀에게 "그럼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했을 때, 백기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 해도 반드시 자신이 찾아 헤매던 결말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분명 그곳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그녀와 재회하는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면, 언젠가 두 사람은 반드시 미래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백기는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했다.
그때가 오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로 다시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거센 바람이 울부짖었다.
빠르게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자신의 오랜 동반자를 태운 채 상처투성이가 된 도시를 가로질렀다.
백기의 마음속에 있는 바로 그곳을 향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02
당장은 새로운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고 있었지만, 도시가 입은 상처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깨끗하고 널찍해야 할 도로에는 곳곳에 돌무더기와 건물 잔해가 쌓여 있었다. 아스팔트는 갈라졌고, 부서진 가드레일은 길가에 처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이며 번영을 누리던 연모시의 중심가는 이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시민들에게 마지막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꺄아——!"
갑자기 길가에서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건물 꼭대기에 설치되어 있던 거대한 광고 간판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간판을 고정하고 있던 철근이 하나둘 끊어지면서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했다.
백기는 급히 핸들을 꺾었다.
오토바이가 도로 위에 반원을 그리며 방향을 틀었다. 흙먼지가 치솟는 가운데 옆으로 미끄러진 타이어가 지면과 마찰하며 불꽃을 튀길 듯했다.
방향을 바꾼 오토바이는 곧장 고층 건물 아래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그 뒤로는 거센 바람 소리만이 남았다.
위험을 알아차린 시민들은 황급히 달아나 피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추락하는 간판은 너무나 거대했다.
머리 위로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는 도망치는 사람들을 끈질기게 뒤덮고 있었다.
마침내 철근이 더 이상 간판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마지막 철근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간판이 빠른 속도로 지면을 향해 추락했다.
이미 몇몇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고 뜻하지 않은 재앙이 닥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지면에서 솟구쳐 오른 거센 바람이었다.
엄청난 힘을 품은 폭풍이 하늘을 향해 맹렬하게 치솟았다.
"당황하지 말고 탁 트인 곳으로 대피하세요!"
백기가 목소리를 높여 여전히 공포에 질려 있는 시민들에게 지시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날로 변했다.
놀랍게도 거대한 광고 간판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수히 작은 조각으로 잘려 나갔다.
사방으로 불꽃이 튀는 가운데 절단된 금속에서 코를 찌르는 냄새가 퍼져 나왔다.
다시 한번 바람이 일어났다.
바람은 흩어진 파편들을 휘감아 사람이 없는 지면으로 옮겨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기 중에 퍼져 있던 자극적인 가스마저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모든 일을 마친 백기는 그제야 조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에게 구조된 시민들이 하나둘 다가와 자신들을 구해 준 영웅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때 눈가에 아직 눈물이 맺혀 있는 어린 소녀가 백기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소녀는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고마워요, 오빠."
"천만에."
"오빠…… 혹시 며칠 전에 텔레비전에 나왔던 그 지휘관 오빠예요?"
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백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그가 떠나지 못하도록 꼭 붙잡았다.
"……맞아."
"앞으로도 오빠가 우리를 지켜 줄 거예요? 저 별들로부터도요."
소녀는 머리 위의 하늘을 가리켰다.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할 테니까."
백기는 몸을 낮춰 소녀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눈빛에도 한층 다정한 기색이 어렸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
"그리고 아주 대단한 언니도 한 명 있단다. 지금은 이곳에 없지만, 분명 그곳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거야."
"그 언니는 오빠보다도 더 대단한 사람이에요?"
"응.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 내고, 쉽게 해낼 수 없는 일들을 많이 해냈거든."
"그 언니는 요정이에요? 자기 일을 다 끝내면 다시 돌아올 거예요?"
옆에 있던 어머니가 소녀를 살짝 잡아당겼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기에게 계속 질문했다.
"돌아올 거야."
백기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난 그 애를 믿으니까."
소녀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주머니를 뒤적여 사탕 하나를 더 꺼냈다.
"그럼 나중에 그 언니를 만나면 꼭 이거 전해 주세요!"
"그래. 꼭 전해 줄게."
그제야 소녀는 환하게 웃었다.
소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며 멀어졌다.
백기는 미안한 표정을 짓는 소녀의 어머니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조금도 귀찮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뜻이었다.
백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도시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위험 요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도로에 떨어진 기왓장과 벽돌, 돌무더기를 한꺼번에 휘감아 길가에 쌓았다.
공중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건물 잔해들도 잘게 절단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안전하게 처리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도시를 정리하고 지켜 나갔다.
지난 시간 동안 줄곧 해 왔던 다른 일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03
백기가 정신을 차렸을 때, 거리에는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그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돕거나, 도시를 정리하거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이 도시가 바로 전 순간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지휘관님!"
백기가 뒤돌아보았다.
그를 부른 사람은 군복을 입은 청년이었다.
흙먼지로 더러워진 얼굴에는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다.
청년의 주변에도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다.
모두 아직 앳된 얼굴이었고,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동자에는 하나같이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저희는 특파팀 의료부대 소속입니다. 아직 예비 대원이지만, 이번에 지원 요청에 응해 현장에 나왔습니다. 여기서 지휘관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백기 앞에 일렬로 늘어서서 차렷 자세를 취하고 경례했다.
목소리마저 흥분으로 조금 떨리고 있었다.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훈련이 부족해서인지 군인으로서의 자세는 그다지 바르지 않았고 경례도 지나치게 어설펐다.
하지만 백기는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님, 앞으로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백기는 청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긴장을 풀어 주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 너희도 이미 해산 지시를 받았을 텐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인근에는 아직 소규모 피해가 남아 있고, 의료 지원이 필요한 시민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자발적으로 다시 현장에 복귀했습니다."
백기는 동경과 결의로 눈을 빛내는 청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반쯤 진지하고 반쯤 농담하는 말투로 물었다.
"그럼 너희는 대놓고 명령을 어긴 셈이군?"
다른 청년 하나가 자세를 바로잡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휘관님께서도 아직 쉬지 않고 계십니다. 저희도 계속 지원 활동을 이어 가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백기는 살짝 미소 지었다.
"자율적으로 행동해. 시민들에게 의료 지원과 후속 지원을 제공하도록."
"네!"
"너희 자신의 안전도 잊지 말고."
"네!"
"그리고……."
백기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입가에도 조금 더 짙은 미소가 어렸다.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도 조금은 남겨 둬."
혜성 무리가 밤하늘을 불태우며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앞으로 무엇이 닥쳐올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두 손으로 희망의 불씨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이 세계가 끝나지 않기를.
내일이 다시 찾아오기를.
빛이 밤의 장막을 찢고 있었다.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나란히 서 있었다.
백기는 오토바이 옆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껏 지켜 온 것.
그녀가 줄곧 지키려 했던 것.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이 소중히 지켜 온 것은 이 도시와 세계 전체에 관한 일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기도 했다.
그저 크지 않은 공간 하나만 있으면 되는 삶.
아침이면 따뜻한 식사가 차려져 있고, 늦은 밤 돌아오면 자신을 위해 켜 둔 불빛이 기다리는 곳.
그리고 한마디의 인사.
"어서 와."
평범한 날이면 가장 소중한 사람의 손을 잡고, 시간을 마음껏 낭비하는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삶.
매일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매일 저무는 노을을 함께 지켜볼 수 있는 삶.
화면에 표시된 시간은 최근 며칠 동안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그 숫자에 끊임없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백기는 변해 가는 숫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그저 화면에 비친 그녀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그 사람을 향해, 평소라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말들을 조용히 건넸다.
오직 자신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조금만 더 오래였으면 좋겠어."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기까지 조금만 더."
"내일이 오기까지 조금만 더."
화면 속에서 그녀는 더없이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
살짝 흩날리는 순간에 멈춰 버린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치 미풍이 못내 아쉬워하며 어루만진 흔적 같았다.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어 줬으면."
백기는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마지막으로 나지막이 속삭인 말은 밤바람에 부서져 흩어졌다.
그리고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지평선 너머로 흘러갔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혜성 무리는 점점 지표면에 가까워졌다.
마치 아직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수천수만 개의 태양처럼, 뜨거운 빛을 뿜어내며 행성을 불태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별의 파편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불타는 혜성의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파편은 지면에 닿기도 전에 모두 타 버렸다.
그 뒤를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파편이 떨어졌다.
점점 더 많은 작은 파편들이 대기권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마치 선발대가 진격의 나팔을 불며 혜성 무리의 충돌이 곧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듯했다.
혜성 무리가 본격적으로 지면에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북쪽 외곽에서 갑자기 눈부신 섬광이 번쩍였다.
뒤이어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백기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 외곽에서 또다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백기는 망설이지 않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혹시 다른 재해가 발생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곧장 북쪽 외곽으로 달려갔다.
사실 백기도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이런 일을 계속한들 어쩌면 별다른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설령 마지막 1초가 남은 순간이라 해도.
백기는 여전히 이 세계가 그녀가 좋아하던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04
백기는 연모시 북쪽 외곽에 도착한 뒤, 다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를 더 나아갔다.
그러자 땅이 갈라지며 생겨난 거대한 균열이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운석이 충돌해 생긴 구덩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백기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균열을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돌아가려던 순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번쩍이는 기이한 빛을 발견했다.
잠시 망설이던 백기는 직접 내려가 확인하기로 했다.
그는 통신기를 연결하고 습관적으로 정해진 절차에 따라 특파팀에 상황을 보고했다.
"북쪽 외곽에서 정체불명의 거대한 균열을 발견했다. 지금부터 내부 탐사를 시작한다. 추가 지원은 필요 없다."
백기는 보고를 이어 가면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균열은 예상보다 훨씬 깊었다.
머리 위에 펼쳐져 있던 하늘은 이미 가느다란 틈처럼 좁아졌지만, 발아래에는 여전히 끝을 알 수 없는 새까만 공동이 펼쳐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벽면도 점차 달라졌다.
처음에는 흙과 모래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내려갈수록 더욱 단단하고 안정적인, 심지어 금속과 비슷한 질감까지 느껴지는 낯선 물질로 변해 갔다.
균열에 진입한 순간부터 백기의 몸을 감싼 바람은 그를 보호하며 지하 깊은 곳까지 함께 내려가고 있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공기는 점점 탁해졌다.
백기 자신도 얼마나 깊이 내려왔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균열의 바닥은 여전히 아득히 멀리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자 마침내 하늘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빛은 마치 공동에 집어삼켜진 것처럼 아무런 모습도 비추지 못했다.
방향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남은 것은 오직 어둠과 정적뿐이었다.
계속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과 가끔 발밑을 스쳐 지나가는 빛만이 자신이 분명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빛이 나타났다.
어둠의 끝자락에서 빛은 마치 실체를 얻은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액체와 고체의 중간쯤 되는 형태로 출렁이며 흘러갔다.
이따금 빛의 일부가 그 구역의 속박에서 벗어나 위로 솟구쳤다가 이내 흩어져 사라졌다.
아마 백기가 위에서 발견했던 기이한 빛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백기는 이곳이 일종의 불안정한 이공간일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판단했다.
그는 다시 통신 버튼을 눌러 상황을 보고하려 했다.
하지만 이어폰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들려왔다.
이곳의 특이한 자기장 때문인지, 백기 자신도 보고가 제대로 전송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될 듯한 빛의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빛이 일그러졌다.
시야도 기묘하게 뒤틀리고 기울어졌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풍경과 인물들이 백기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오래된 건축물이 세워지는 모습을 보았다.
은하계를 넘나드는 우주선이 출항하는 모습도 보았다.
세계가 얼어붙었다가 빙하가 녹아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은하가 탄생하고, 다시 소멸하는 모습도 보았다.
마치 우주가 깊숙이 간직해 온 모든 정보가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수없이 많은 공간의 연결점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느 곳을 보더라도 눈이 어지러울 만큼 놀라웠다.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 세심하게 관찰하고 연구할 가치가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백기에게는 그런 것들을 살펴볼 시간이 없었다.
어째서인지 그는 자신이 찾는 것이 이곳에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 역시 이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기는 어느 공간의 연결점으로 들어갔다가 다른 연결점을 통해 빠져나왔다.
방향도, 목적지도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장소를 지나고 무수한 광경을 마주했다.
그러다 마침내 주변과는 유일하게 다른 모습을 한 연결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마치 아직 장막을 걷어 내지 않은 그림 같았다.
끊임없이 일렁이던 빛도 이곳에서는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백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쩌면 이곳이 모든 뒤틀림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발걸음을 옮겨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현기증이 지나간 뒤, 눈앞에 거대한 검은 문이 나타났다.
문은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거대한 문에는 복잡한 기호들이 나선형으로 반복되며 새겨져 있었다.
마치 만물의 기원과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으로 이어지는 비밀을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로로 누운 숫자 '8' 모양의 기호였다.
시작과 끝이 서로 어긋나면서도 다시 이어지는 형태였다.
기호의 주변에는 가시덤불과 불규칙한 기하학적 무늬들이 얽혀 있었다.
어디가 시작인지도, 어디가 끝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백기는 손을 뻗어 문에 닿았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거대한 문은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너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돼."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침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백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넌 누구지?"
백기가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나는 모든 것이자, 동시에 허무야."
백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대답이라고 할 수 없는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잠시 생각한 뒤, 그는 다른 질문을 하기로 했다.
"이 문은 뭐지?"
"질문이자, 동시에 대답이야."
"문 뒤에는 뭐가 있지?"
"아직 그걸 말해 줄 때가 아니야. 지금 네게 알려 준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니까."
"네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목소리는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을 남기고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려 했다.
"잠깐……."
"이제 가."
"미래에는 아직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
백기가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힘이 그를 밀어내고 끌어당겼다.
그 힘은 단호하면서도 너무나 손쉽게 백기를 공간 밖으로 내던졌다.
백기는 방금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미처 이해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빠져나온 직후, 그는 이 행성에 무언가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찰나의 순간.
서쪽에서 햇빛이 떠올랐다.
말라붙었던 풀들이 서서히 푸른빛을 되찾았다.
우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백기가 균열 속으로 들어가기 전,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던 바람은……
이제 거센 물결처럼 역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