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새하얀 안개가 거리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나무 위로 내려앉은 눈은 이제 막 돋아나려던 새싹마저 짓눌렀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겨 놓았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백기는 길 양옆에 늘어선 나무들이 모두 은행나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늦가을이었다면 이 길에는 황금빛 은행잎이 가득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백기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문득 얼마 전 누군가 놓고 간 은행잎 팔찌와 그 소녀가 떠올랐다.
그녀와 만난 것은 고작 두 번뿐이었다. 그런데도 최근 들어 백기는 자꾸만 그녀와 관련된 일들을 떠올리곤 했다.
사실 처음에는 '예지 Evol'이라는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능력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가 그의 손을 붙잡았을 때, 기묘하고 신비로운 힘이 갑작스럽게 밀려들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미세한 통증과 멍하니 굳어 버린 소녀의 표정을 보고 나니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백기의 미래를 보았다.
백기는 그녀가 대체 무엇을 보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쳤을 뿐이었다.
충격과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 의혹까지. 온갖 감정이 그의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은 생각은 단 하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가 Evolver라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은 NW뿐 아니라 그 어떤 세력에도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었다.
백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능력이 발각되는 순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끝없는 이용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뿐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낯선 사람의 미래를 이토록 걱정하는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능력을 숨겨 주었다.
가을이 오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그녀를 구하기로 선택한 것도, 그녀의 Evol에 관해 더는 깊이 파고들지 않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래야만 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때 갑자기 치직거리는 전류 소리가 울렸다. 통신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의 회상을 끊어 놓았다.
"목표의 위치가 확인됐다. 목표의 위치가 확인됐다."
백기는 은행나무 가지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발밑에 얇게 쌓인 눈을 밟으며 걸음을 옮기는 순간,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목표가 연모고등학교에 잠입했다."
02
백기가 연모고등학교에 도착했을 때, NW 대원들은 학교 전체를 봉쇄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모여든 시민들이 학교 맞은편에서 수군거리고 있었고, 그중에는 휴대전화를 꺼내 쉴 새 없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복을 입은 대원 몇 명이 그 모습을 발견했지만 제지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들은 통제선을 설치하는 한편 통신기로 분주하게 무언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백기는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지나 곧장 교사 근처로 향했다. 텅 빈 건물을 한 차례 훑어본 뒤 물었다.
"사람들은 전부 대피했나?"
서류를 들고 있던 여성 대원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손에 든 자료를 넘기며 대답했다.
"거의 다 대피했습니다. 계속되는 폭설로 학교가 휴교한 지 오래라 원래부터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백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 들었다.
"거의 다?"
되물음을 받은 대원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2분대에서 명단을 대조해 인원을 확인했는데…… 한 명이 부족합니다."
"인질이군."
백기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런 상황은 이미 너무나 익숙했다.
"놈이 학교에 들어온 목적은 분명해."
"그럼 저희는 어떻게……?"
"봉쇄는 그대로 유지해. 2분대는 남고, 나머지는 2인 1조로 나눠서 실종자를 찾아."
백기는 간단히 지시를 내린 뒤 서류를 덮어 옆에 있던 대원에게 건넸다.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대원들을 바라보던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발견하면 즉시 나한테 보고해."
자료에 따르면 이번 작전의 표적은 힘을 강화하는 유형의 Evol을 보유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Evol 범죄자를 체포하는 데까지 NW가 출동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그 Evolver가 소지한 무기 때문에 NW도 사건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암시장에서 유통되는 총기류뿐 아니라 독가스탄까지 있었다. 이것이 그가 학교에 숨어든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무엇보다 NW를 압박하는 데 민간인의 안전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었으니까.
백기가 앞장서서 걸었고, 키가 조금 작은 남성 대원 한 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가장 큰 교사를 지나 다른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에 건물이 하나 더 있었네요……."
남성 대원은 이리저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백 대장님, 연모고등학교 출신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1년 다니다가 NW에 합류했지."
백기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건물 입구의 계단을 올라섰다. 그리고 뒤따라오던 대원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멀지 않은 작은 정원을 가리켰다.
"넌 외곽을 맡아."
백기는 평소 자신의 과거에 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성 대원은 이 기회에 몇 가지 더 물어보며 궁금증을 풀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임무를 배정받을 줄은 몰랐다.
그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알겠습니다."
앞서 지나온 교사에 비하면 눈앞의 건물은 훨씬 아담했다.
유리창 너머로 내부의 모습도 희미하게나마 들여다보였다. 어떤 방에는 체육용품이 가득 쌓여 있었고, 다른 방에는 실험 기구나 미술 도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백기는 위층으로 올라가며 건물을 수색했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복도의 유리창에도 옅은 김이 서려 있었다.
백기가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은행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은 유난히 은행나무가 자주 눈에 띄는군…….
백기는 나무를 힐끗 바라보았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몸을 돌려 수색을 계속했다.
건물의 구조는 단순했다. 꼭대기층의 옥상을 제외하면 모두 5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층마다 방이 네 개씩 있었다. 대부분 학생들이 사용하는 활동실이었다.
5층에 발을 들이는 순간, 백기는 예민하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 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있다.
눈발이 천천히 흩날렸다.
백기는 복도 왼쪽 끝에 있는 음악 연습실을 바라보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미닫이문이 빈틈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창밖을 한 번 살펴본 뒤 방향을 틀어 옥상으로 향했다.
03
권총 한 자루, 단검 한 자루, 독가스탄 두 발. 방독면은…… 아마 없을 것이다. Evol은 근력 강화형.
백기는 방금 확인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정리했다. 그러고는 통신기를 꺼내 들고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밀어 열었다.
"발견했다. 동쪽 활동관, 5층 음악 연습실."
백기는 간결하게 위치를 전달한 뒤 통신기를 옆에 툭 던져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권총 상태를 꼼꼼하게 점검하기 시작했다.
옥상에는 다른 곳보다 훨씬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새하얀 눈송이가 검은 군복 위로 내려앉았지만 이내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백기는 옥상 가장자리에 서서 오른손에 낀 검은 장갑을 벗었다.
살을 에는 눈보라 속에서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안에 서린 날카롭고 서늘한 기운은 마치 눈밭에 우뚝 선 늑대를 연상케 했다.
백기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연모고등학교를 감싸고 있던 적막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백기는 창틀 가장자리에 안정적으로 발을 디뎠다.
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도, 뺨에 생긴 상처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음악 연습실 구석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장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10분 후, 5층 음악 연습실 앞.
미닫이문이 열렸다.
조금 전까지 백기와 함께 움직였던 키 작은 남성 대원이 대열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총을 겨눈 채 긴장한 표정으로 안을 살폈다. 공기 중에 이상한 가스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알아본 순간, 다시 숨이 턱 막혔다.
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들이 차가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눈과 피가 뒤섞여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붉은 핏자국은 창가에서 시작해 방 한구석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한참을 찾아 헤맸던 인질은 그 구석에서 머리를 감싸 쥔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무언가를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이번 작전의 표적이 바닥에 꼼짝 못 하게 제압당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바닥에 바짝 눌려 있었고, 코끝에 걸친 안경은 절반이나 깨져 있었다. 잔뜩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드러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린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숨을 들이켜게 할 정도였다.
백기는 문을 등진 채 남자를 바닥에 눌러 제압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대원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여기저기 찢어진 외투와 손끝을 타고 떨어지는 핏방울, 그리고 조금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뿐이었다.
설마 혼자서 저 남자를 제압한 건가?!
근력 강화형 Evolver는 원래부터 제압하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게다가 이번 표적은 여러 종류의 총기와 무기까지 소지하고 있었다. 안전을 고려한 NW는 이번 작전에 무려 네 개 분대를 투입했다.
그런데 백기는 혼자 힘으로……
키 작은 대원은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따르던 대장, 그리고 윗선으로부터 은밀히 감시하라는 명령까지 내려진 그 '위험인물'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문득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윗선의 사람들이 백기를 '병기'라고 부르는지.
04
"그 사람 상태는 어때?"
백기의 목소리가 들리자 음악 연습실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기의 상처는 이미 간단한 처치를 마친 상태였다. 왼쪽 뺨에는 그리 크지 않은 거즈가 붙어 있었다.
인질을 진정시키고 있던 여성 대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별로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질이 갑자기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남자는 몸에 두른 담요를 꽉 움켜쥐고 그 안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는 백기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마치 괴물이라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여성 대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백기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 서둘러 남자를 데리고 나갔다.
그들이 백기의 곁을 지나칠 때, 대원의 귀에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괴물……."
백기에게도 그 말이 들렸다.
하지만 그는 그저 창가에 놓인 피아노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티 하나 없이 새하얗던 피아노에 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순백의 표면에 남겨진 핏자국은 몹시 이질적으로 보였다.
"깨끗이 정리해."
그제야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가 작은 남성 대원은 백기에게 다가갔다. 한참을 망설이며 말을 고르던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백 대장님,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백기는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실제로도 방금 있었던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익숙해졌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백기는 지금까지 수많은 범죄자의 손에서 사람들을 구해 왔다.
그중에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사람도 있었고, 두려움이 가시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백기의 힘을 직접 목격하고 나면 모든 Evolver를 괴물로 여겼다.
그때 갑자기 한 대원이 허둥지둥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통신기에서는 아직도 희미하게 치직거리는 전류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 대장님! 방금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또 도주범인가?"
"아, 아닙니다. 시민들이…… Evolver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
방 안에 있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창밖에서 눈이 내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사락사락 흩날리는 눈 소리는 마치 수많은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언쟁을 벌이는 것 같았다.
백기는 다시 장갑을 끼고 아무렇게나 자신의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
"가자."
05
이렇게 심한 고통을 느낀 것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이런 고통을 겪었던 건…… 아마 연모고등학교에서의 사건 때였을 것이다. 당시 백기는 근력 강화형 Evolver에게 머리를 세게 얻어맞았었다.
하지만 이번의 고통은 그때와 조금 달랐다.
머리가 터져 나갈 듯했다. 불길에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백기의 의지를 무너뜨렸다.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조차 희미하게밖에 볼 수 없었다.
가까스로 무언가를 알아보려는 순간, 날카로운 힘이 다시 한번 그의 의식을 집어삼켰다.
"NW717 폭주 발생. 위험도 잠정 B등급으로 판정. 제압 및 회수 준비."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울음기가 섞인 여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녀는 몇 번이고 백기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백기가 바닥에 쓰러지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를 빙 둘러쌀 때까지도 그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 불쑥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소녀가 필사적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왔다. 그녀는 떨리는 두 팔을 활짝 벌려 백기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기의 의식은 몽롱했다.
눈앞으로 수많은 장면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스쳐 지나갔다.
그는 마치 좁은 물속에 갇힌 물고기 한 마리가 된 것 같았다. 귓가에서는 기계 장치가 똑딱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그러다 갑자기 새가 되어 날아올랐다가 새까만 사냥총에 맞아 추락했다.
수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차가운 실험실.
몸에서 피가 조금씩 빠져나가던 감각.
그리고 두려움에 질린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
그때 백기는 조금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Black Swan Queen이 바로 여기에 있었군."
Queen.
백기는 자료에서 그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BLACK SWAN이 줄곧 찾아다니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눈앞을 가로막고 선 소녀의 몸은 작고 가냘팠다.
그러나 곧게 뻗은 목과 어깨, 반듯하게 세운 등에서는 그녀의 완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누군가가 자신의 뒤에 숨는 대신 이렇게 앞을 가로막고 서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비켜."
"NW의 계획 수행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사살한다."
주변의 소음이 점점 커졌다.
백기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뒷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검은 구멍 같은 총구가 갑자기 소녀의 이마에 바짝 들이대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당당히 들었다.
"저는 이번 폭설 사건을 해결할 핵심 인자예요. 저는……."
그녀의 말이 뚝 끊겼다.
백기가 손을 뻗어 차가운 손바닥으로 소녀의 손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설산이 너무 추워서였을까. 소녀의 손도 무척 차가웠다.
그 순간 백기는 문득 후회했다.
왜 그녀와 함께 조사하러 가겠다고 했을까.
"……NW717, 회수 조치에 따르겠다."
백기는 가까스로 힘을 짜내 그 말을 내뱉었다.
소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백기는 그녀의 목덜미에 팔을 둘러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손끝에 차가운 팔찌 하나가 닿았다.
백기는 생각했다.
그때 챙겨 두길 잘했어.
그녀에게 돌려줘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