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특파팀 특별행동대 대장 백기는 임무 수행 중 명령에 불복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사실이 확인되어, 금일부로 특파팀 내 모든 직무와 임무를 정지한다.
백기는 직무 정지 통지서를 몇 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사물함에 가지런히 개어 놓은 경찰 제복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뒤 문을 닫았다.
점심시간이 한창일 때를 놓친 탓에 그가 샤오린 국숫집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빈자리가 넉넉했다.
백기는 이곳의 단골이었다. 주인은 그를 알아보고 친근하게 맞이했다. 백기는 메뉴판을 빠르게 훑어본 뒤 조금 불편한 목을 가다듬으며 고추기름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하려 했다.
그런데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산들바람이 길모퉁이의 풍경을 흔들었다. 맑은 종소리와 함께 그녀가 웃으며 해주었던 당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목이 안 좋을 땐 매운 거 먹으면 안 돼요. 맑은 국물도 맛있거든요.
백기는 순간 멍해졌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기억을 붙잡으려던 찰나, 주인의 웃는 얼굴이 눈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늘 먹던 대로 고추기름 국수로 드릴까요?”
백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맑은 국물로 주세요.”
“백 경관님이 오늘은 입맛이 바뀌셨나 보네. 좋습니다!”
주인은 조금 놀란 듯하더니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맑은 국물 국수 한 그릇! 금방 내드릴게요.”
주인은 메뉴판을 거두고 음식을 준비하러 갔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두 번 진동했다. 백기가 화면을 켜자 고진에게서 메시지 두 통이 와 있었다.
‘임무가 방금 끝났는데, 벌써 간 거야?’
‘당분간 혼자 움직일 때는 조심해. 무슨 일이 있으면 늘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우리는 언제나 네 뒤를 지켜줄 테니까.’
서로에게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들이었다. 백기는 고진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백기는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내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수가 나왔다. 백기는 국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몸을 살짝 멈칫했다.
“사장님, 국수 맛이 바뀌었나요?”
“맞아요. 요즘 새로운 맛을 연구하고 있거든요. 국물에 들어가는 재료를 좀 바꿨죠. 그런데 경관님은 늘 매운 것만 드시지 않았어요? 맑은 국물 맛이 바뀐 것도 알아차리시네요?”
백기는 잠시 멍해졌다. 확실히 그는 이곳에 올 때마다 고추기름 국수만 주문했다.
그렇다면 맑은 국물 국수는 언제 먹어 본 걸까?
분명 그녀가 갈비탕 국물은 진하고 감칠맛이 나서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맛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에게도 한번 먹어 보라며 권했었는데……
백기는 자신이 또다시 그녀를 떠올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맑은 국물 국수를 먹었던 때가 언제인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최근 들어 이렇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억들이 점점 더 자주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그 기억들은 때때로 따스한 깃털처럼 마음을 스치며 살며시 간지럽혔다. 그렇다고 거슬리거나 짜증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온기의 한 자락이라도 붙잡으려 할 때마다 기억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렸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만을 남겼다.
연모시로 돌아온 뒤 그녀와 이곳에 온 것은 분명 단 한 번뿐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녀와 이곳에서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함께 먹는 일이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오랜 세월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지난날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국수를 먹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백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백기는 상념을 거두고 그릇에 담긴 국수를 남김없이 먹었다.
02
욕실 안에는 반투명한 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탄탄한 몸을 희미하게 가리고 있었다. 적당히 따뜻한 물줄기가 몸 곳곳에 남은 흉터를 타고 흐르며 백기의 몸을 조금씩 적셔 갔다.
며칠 전, 백기는 엄씨 성을 가진 노형사를 만났다. 퇴직한 그 형사는 한쪽 팔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기는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상대의 눈빛에 서린 날카로운 기운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그것은 마치 수없이 두드리고 벼려 낸 칼날이 먼지와 흠집 아래에 감춰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제야의 변을 조사하는 데 있어 그 형사와의 짧은 만남은 무엇보다 중요한 단계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백기가 해야 할 일은 그녀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녀를 NW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에 두고, NW의 모든 시선이 그녀가 아닌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해야 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엄 형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야 했다.
백기는 계획의 세부 사항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허점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로 간과할 수 없었다.
머리에 남은 거품을 깨끗이 씻어 낸 백기는 물을 잠그고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문질렀다. 옷을 걸친 뒤 수건을 다시 걸이에 걸어 두려던 순간, 그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그토록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머리를 감았으면 물기를 꼼꼼히 닦아야 해요. 너무 세게 문지르지 말고 살살 닦아요. 머리카락도 소중히 다뤄야 하니까……
물기가 얼마 묻지 않은 수건이 다시 그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길고 곧은 손가락에 힘을 뺀 백기는 기억 속의 다정한 손길을 조금은 서툴게 흉내 냈다. 수건을 머리카락에 가볍게 누른 채 조심조심 문질렀다.
백기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은 어느새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마치 주어진 임무 하나를 무사히 끝낸 사람처럼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백기는 집을 나섰다.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행적을 지켜보는 눈이 하나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백기는 무엇 하나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한다면, 얼마든지 당당하게 보여 주면 그만이었다.
백기는 미리 조사해 둔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버려진 건물이었다. 이처럼 외지고 황량한 장소라면 자신을 감시하는 자들도 지나치게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백기는 먼지와 모래가 가득 쌓인 낡은 계단에 발을 들였다.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부서진 콘크리트 창틀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백기는 천천히 걸었다. 깨진 유리 조각에 반사된 햇빛이 이따금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며칠 전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과 그때의 눈빛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백기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향한 믿음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어느새 두 사람을 단단히 이어 준 특별한 인연이 있었고, 그 덕분인지 백기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녀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마침내 옥상에 도착한 그는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온기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찬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그때 기억을 닮은 파편들이 또다시 그를 휘감았다.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바로 곁에서 터져 나왔다.
사방으로 튀어 오른 유리 조각들이 차가운 빛을 반사했지만, 어느 하나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거센 바람이 백기와 그의 품에 안긴 그녀를 휘감은 채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백기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서워?”
그는 그녀의 눈에서 조금이나마 망설임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굳은 의지와 믿음만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한 번도 무서웠던 적이 없다고.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와 함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부서진 풍경도 점차 흩어져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백기는 여전히 폐건물의 옥상에 서 있었다. 방금 전의 모든 것이 잠깐 스쳐 지나간 착각에 불과했던 것처럼.
백기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너무도 익숙해 이미 외우고 있는 그 번호를 눌렀다.
03
모든 일은 차근차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백기는 옷장에서 평소 잘 입지 않던 정장 한 벌을 꺼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창고로 향해 구석에 처박혀 있던 스팀다리미를 찾아냈다. 거의 사용한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백기는 설명서를 보면서 조금 서툰 손길로 정장의 주름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폈다.
그가 이렇게 격식을 차려 입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찾아가야 할 중요한 가정이 있었다.
얼마 전, 정보원이 제야의 변에서 희생된 사람의 유가족에 관한 정보를 가져왔다. 백기가 지금 만나러 가려는 사람은 바로 그 희생자의 가족이었다.
백기는 거울 앞에서 정장을 단정하게 매만진 뒤 경찰 배지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앞으로 자신이 내딛는 모든 걸음이 이 배지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랐다.
백기는 크고 작은 위문품을 양손에 들고 슈퍼마켓을 나섰다.
산들바람이 불어오자 은은한 백합 향기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백기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길모퉁이에 작은 꽃 노점이 있었다. 꽃통에 꽂힌 백합들은 싱싱하게 피어 있었고, 새하얀 꽃잎에는 옅은 분홍빛이 감돌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업무용 빌딩의 대형 전광판에서는 옛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홍보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차가 요란하게 달리는 소리에 백기의 생각이 문득 먼 곳으로 향했다.
따스한 햇살 아래, 그녀가 미소 지으며 단 한 송이의 백합을 자신에게 내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꽃이 처음부터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청년, 꽃 사려고요? 누구 만나러 가면서 선물할 거라면 백합이나 카네이션이 좋아요.”
백기가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본 꽃집 주인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백기는 백합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럼 카네이션 한 다발 주세요.”
백기가 외진 주택가에 들어섰을 때, 소박한 마당 안쪽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쉰 목소리였지만 다정하고 따뜻함이 묻어났다.
어린 여자아이가 흔들목마에 앉아 앞뒤로 몸을 흔들며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포근한 햇살이 마당 안에 느긋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어느 평화로운 오후의 아름다운 꿈처럼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백기는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노인이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 나서야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백기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노인은 적잖이 놀랐다. 심지어 그를 반기지 않는다는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백기는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몇 걸음 물러나 노인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노인이 어느 정도 진정하자 찾아온 이유를 솔직하게 밝혔다.
노인은 그동안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똑같은 질문을 품고 자신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진실을 알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다른 속셈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파팀을 믿지 않았고, 자신을 찾아오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 노인은 애써 무덤덤하고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눈빛 깊은 곳에는 지울 수 없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백기는 주머니 속 경찰 배지가 점점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이 노인도 한때는 진심으로 믿었을 것이다. 언젠가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 오리라고.
하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사이, 희망의 작은 불씨마저 서서히 꺼져 버린 것이리라.
백기는 주머니 속 경찰 배지를 움켜쥐었다. 배지 표면의 살짝 돌출된 무늬가 손바닥을 세게 눌렀다.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정신이 더욱 또렷해졌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초심을 이루기 위한 올바른 길이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조직의 입장이 진실을 밝히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그는 진실을 선택할 것이다.
그의 사명과 책임은 이 도시를 지키는 것,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었으니까.
노인의 집을 떠났을 무렵에는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백기는 인적 없는 거리를 쉬지 않고 걸었다.
제야의 변에 감춰진 진실은 흩어진 퍼즐 조각과도 같았다. 진흙과 핏자국 속에 묻혀 있던 조각들을 하나씩 파헤칠수록, 거대하고 피로 얼룩진 음모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백기는 앞서 이 사건을 조사했던 사람들이 결국 왜 포기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던 열정일수록 오히려 쉽게 꺼지기 마련이었다. 무엇인가를 알아내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까.
모든 사람이 두려움 없이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시덤불과도 같은 깊은 절망 속에서 다시 햇빛이 비추는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그의 사명은 처음부터 이 도시 사람들을 위해 빛을 밝히는 것이었다.
백기는 반드시 답을 찾아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지금껏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놓지 않고 버텨 온 사람들을 위해서도.
04
“백기야(小白), 일어나 봐.”
멀고 희미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점차 또렷해졌다. 백기가 천천히 눈을 뜨자 하건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졸 거면 앉아서 졸지 말고. 며칠 전에 서점에 있던 야전침대를 여기로 옮겨 놨으니까 그걸 써. 너 쓰라고 가져다 놓은 거야.”
백기는 둔하게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자신이 지금 하건추의 서점에 있는 비밀 공간에 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옆에 놓인 시계를 흘끗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나 잠들어 있었다.
방금 전의 일들은 모두 꿈이었던 모양이다.
요 며칠 잠이 부족해서인지 최근에 겪었던 일들이 자꾸만 꿈에 나타났다.
하건추는 보온병에 물을 조금 부었다. 그러다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책상 위의 자료를 집어 들려는 백기를 곁눈질하더니 손을 뻗어 서류 뭉치를 빼앗았다.
“됐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안 해도 돼. 무슨 일이든 일단 배부터 채우고 얘기하자.”
그제야 백기는 식탁 위에 도시락 통이 몇 개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엄 형사도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세 사람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하건추의 요리 솜씨는 확실히 훌륭했다. 백기는 새콤달콤한 탕수갈비를 연달아 세 조각이나 먹었다.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모습을 좋아하기 마련이었다. 하건추는 웃으며 백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백기야, 설마 너도 평소에 엄 형사처럼 라면밖에 끓일 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정곡을 찔린 백기의 손이 멈칫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난처한 기색이 얼굴에 스쳤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무언가를 변명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계란 프라이랑 채소도 넣을 줄 압니다.”
자신과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 엄 형사가 무릎을 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건추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음식도 좀 먹어야지. 일도 그렇게 힘들게 하면서 먹는 것까지 소홀히 하면 쓰겠어?”
두 중년 남자가 한마디씩 주고받는 사이,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편안해졌다.
백기는 줄곧 팽팽하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따뜻하고 감칠맛 나는 닭고기 수프에서 뽀얀 김이 피어올랐다. 밤의 한기를 몰아내는 그 온기는 마치 어느 가정에서나 저녁 식탁에 올릴 법한……
옅은 수증기 너머로 백기는 주방에 서 있는 그녀를 본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문 뒤에 걸려 있던 앞치마를 내려 환하게 웃으며 그의 허리에 둘러 주었다. 도마 위에는 채소가 가지런히 썰려 있었고, 가스레인지에 올려진 냄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 대장님의 말대로 자신도 새로운 요리를 몇 가지 배워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기회가 된다면 그녀에게 요리를 가르쳐 달라고 해 봐야겠다.
그때는 부디 냄비를 태우는 사고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눈치 빠른 엄 형사는 백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역시 젊음이 좋다며 감탄했다.
백기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고기를 먹는 척하며 입가에 번진 미소를 슬쩍 거두었다.
“젊을 때는 여기저기 경치도 구경하고 인생을 즐길 줄 알아야지. 매일 자신을 기계처럼 굴리면서 쉬지도 않고 일만 해서는 안 돼.”
하건추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백기를 바라보다가 옆에서 말없이 앉아 있는 엄 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어떤 선택을 하든, 나중에 후회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마치 무언가를 추억하는 듯하기도 했고, 지난날의 후회를 떠올리며 한숨짓는 듯하기도 했다.
05
세 사람은 하건추가 준비한 네 가지 요리와 국 한 그릇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배를 든든히 채운 뒤 식기를 정리하자 식탁 위에는 다시 서류들이 가득 펼쳐졌다.
“이건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수집한 자료야. 제야의 변 당시 일어났던 Evolver 폭동 사건과 관련된 유가족 명단이지.”
엄 형사는 노트북에서 파일을 열어 백기와 하건추 쪽으로 화면을 돌렸다.
빽빽하게 채워진 표에는 여러 가지 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백기는 알고 있었다. 이것들은 단순한 데이터나 문서가 아니었다. 제야의 변 이후 종적을 감춰 버린 사람들이 남긴 가장 소중한 흔적이었다.
엄 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직접 찾아다니며 조사했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이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더 물어봐도 유용한 정보는 얻기 어려울 거야.”
진실이 그렇게 쉽게 손에 들어오리라고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백기도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이 도시가 사리사욕과 이해관계 때문에 또다시 어둠에 물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번영이라는 허울 좋은 겉모습으로 만신창이가 된 현실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서 이미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병폐를 그대로 방치하는 일도.
“그래도 시도해 봐야 합니다.”
화면에 표시된 파일 복사 진행 막대가 조금씩 차오르다가 마침내 끝에 도달했다. 그 빛이 백기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비쳤다.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낙담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들이 모든 걸 감출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실제로 일어났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기 마련이니까요.”
여전히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진실이 밝혀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건추와 엄 형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다시 백기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에는 한층 깊은 감정이 어려 있었다.
마치 이 젊은이에게서 지난날 자신들이 품었던 날카로운 기개와 초심을 되찾은 것 같았다.
파일 복사를 마친 백기는 새로운 자료 한 부를 꺼내 두 노형사 앞에 내려놓았다.
“사실 오늘 찾아온 데에는 두 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기묘한 기억의 파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백기는 줄곧 의문을 품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일들을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다른 비밀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붙잡은 작은 단서들을 따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조사를 시작했다.
“이건 제가 특파팀에 있을 때 열람했던 사건 기록 중 일부입니다. 두 분은 저보다 특파팀에서 오래 근무하셨으니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 자료들에 문제가 없는지요.”
백기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기록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하건추와 엄 형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료를 받아 들었다.
두 사람은 서류를 한 장씩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모든 자료를 검토할 수 있었다.
하건추가 그중 한 페이지를 펼쳤다.
“다른 사건들은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없지만, 이 두 사건은 내가 담당했던 거야. 보관된 사본이나 보고서 모두 문제가 없어.”
엄 형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의 미간이 더욱 깊게 좁혀졌다.
이 자료들에 적힌 정보가 조작되지 않았다면, 기록된 내용이 실제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사실’들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다른 걸까?
잘못된 것은 자신의 기억일까, 아니면 사실 그 자체일까?
백기는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밖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정상적’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감춰 놓은 것처럼.
백기가 여전히 의문을 떨쳐 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챈 엄 형사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알고 싶은 게 있다면 계속 조사해 봐. 방금 자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어떤 일이든 실제로 일어났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고.”
백기가 서점을 나섰을 때는 이미 자정이 훌쩍 지나 있었다.
연모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백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밤의 차가운 바람이 온몸의 감각을 더욱 또렷하게 일깨웠다.
그는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기억’들을 단순한 착각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도, 이 세계가 본래 지니고 있어야 할 모습도.
어느 쪽이든 지금과 같은 모습이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블랙이의 전조등이 두 번 깜빡였다.
백기는 헬멧을 쓰고 가속 손잡이를 돌렸다. 엔진 소리가 고요한 한밤중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싸늘한 달빛이 어둠 속에 숨겨진 구석구석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마치 밤길에서 바람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인도하며,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위험과 진실을 찾아가도록 이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는 아무것도 특별할 것 없는 구석에야말로 먼지에 뒤덮인 흔적들이 남아 있는 법이었다.
어둠 속에서 진실을 조금씩 찾아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먹잇감이 되어 홀로 그 어둠 속으로 잠입하는 것이었다.
그와 그녀가 살아가는 도시는 지금보다 더 밝고 따뜻해야 했다.
그곳은 백기가 경찰이 된 첫날부터 반드시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곳이었다.
그는 반드시 진정한 빛을 되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