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작은 진실이라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01
“샤오총, 샤오총! 도착했어. 장비 챙겨서 내릴 준비 해.”
귓가에 들려오는 동료의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눈부신 햇살 덕분에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임무 수행 중에 조는 행위는 엄연히 금지되어 있었다. 방금도 그저 평소처럼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을 뿐이었다. 감식과 직원이라면 거의 누구나 이렇게 한다. 잠시 후 시작될 조사에서 조금이라도 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어젯밤에는 법의학 관련 드라마를 보느라 새벽 한 시까지 깨어 있기도 했다.
각종 장비를 싣기 위해 감식과의 승합차는 크기가 상당했다. 창문마저 다른 공무 차량보다 조금 더 넓었다.
나는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초등학교 정문과 그 안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동료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란 동료는 입에 물고 있던 펜까지 떨어뜨렸다. 다행히 내가 재빨리 손을 뻗어 받아 냈다.
“갑자기 왜 찌르고 그래?”
“오늘 증거 수집 조사는 학교가 문을 닫는 시간에 맞춰서 하는 게 아니었어?”
“응. 대장님 말로는 그렇게 정밀한 감식이 필요한 건 아니고, 실종된 아이가 학교에 남긴 물건들을 수집하는 정도래.”
“실종자는 어린애인데,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대. 정황상 가출했다가 납치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이번에는 꽤 대대적으로 움직이는 모양이야. 특파팀이 직접 수사를 지휘한다니까. 우리는 보조만 맡는 거고.”
“특파팀? 이번 사건에 Evol 능력자도 연루된 거야?”
“그렇지. 안 그러면 학교 같은 곳에서 단둘이 증거를 수집하다가 지쳐 죽을걸?”
옆자리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불평을 들으면서도 내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잠시 후 사용할 각종 감식 장비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학교처럼 복잡한 환경에서는 지문 채취용 분말이나 다른 흔적 조사 방법을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감식 상자에 들어 있는 장비 중 상당수는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증거물을 수집하는 고된 작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어깨와 목을 가볍게 풀었다.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량이 서서히 학교 후문 주차장으로 들어가 멈춰 섰다.
감식 상자를 어깨에 메고 막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옆에 있던 동료가 만화 곰 캐릭터가 그려진 천 한 장을 내밀었다.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동료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 품에 안긴 감식 상자를 가리켰다.
“이걸로 좀 감싸. 안 그러면 이따 학교 안을 돌아다닐 때 애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질문할걸?”
“……이걸로 감싸면 효과가 있긴 해?”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제복을 힐끗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동료가 워낙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결국 천을 받아 들고 감식 상자에 몇 번 둘러 감았다.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네.
아저씨, 그 곰돌이 가방은 어디서 샀어요~?
아저씨, 경찰 제복 진짜 멋있어요~!
귓가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완전히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아이들은 멀찍이 서서 나를 구경하기만 했다. 하지만 내 손에 들린 곰돌이 무늬의 천 가방을 발견하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재촉해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어쨌든 지금은 임무가 우선이었다.
교사 건물 아래에 도착했을 때, 이번 수사를 담당하는 대장이 다른 팀원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려는 참이었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대열의 맨 뒤에 섰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회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았다. 이번 실종 사건에 관한 설명이 대부분이었다.
내 임무는 ‘샤오자’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학생의 관련 물품을 회수하고, 그 학생이 학교를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과 관련된 단서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대장은 특히 이번 수사에서 특파팀 요원들과 협력해야 하므로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수첩을 덮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대장의 형식적인 훈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마침내 길고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멀지 않은 교무실 문 앞에 어딘가 낯익은 모습이 나타났다.
“손 선생님, 이번 실종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백기입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특파팀의 백기.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02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내 곁을 지나 교실의 자기 자리로 달려갔다. 나는 눈앞의 두 사람이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백기는 이미 나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시청 감식과에서 나오신 분입니까?”
처음에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내 제복을 확인하자 나를 향하던 날카로운 시선도 조금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네, 백기 대장님. 이번 증거물 수집을 담당하게 된 샤오총입니다.”
평소 사무실 구석에 앉아 있기만 하던 나는 이런 ‘높으신 분’과 대화해 본 경험이 없었다. 피할 수도 없는 대화였기에 최대한 모자챙을 눌러쓰고 상대방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가 내게서 무언가를 알아차릴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아마 이 몸에 배어 있는 본능적인 반응일 것이다.
백기는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와 옆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이분은 손 선생님입니다. 실종된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시죠. 필요한 게 있으면 이분께 여쭤보세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손 선생님은 마흔이 채 되지 않아 보였지만 벌써 몸에 살이 조금 붙기 시작한 모습이었다. 은색 안경테에는 두꺼운 렌즈가 끼워져 있었고, 눈빛에서는 누가 봐도 선생님다운 분위기가 풍겼다.
손 선생님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둥그스름한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교무실 안쪽을 가리켰다.
“수사관님, 저쪽이 제 책상입니다.”
“샤오자가 실종되기 전에 제출한 숙제 공책이랑 일기장, 시험지가 전부 책상 위에 있어요.”
“다만 일이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져서 미처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직접 찾아보셔야 할 것 같네요.”
“괜찮습니다.”
나는 선생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 뒤 백기의 옆을 지나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손 선생님, 그럼 성녕과 샤오자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교무실로 들어가기 직전, 복도에 서 있던 백기가 손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녕. 내 기억이 맞는다면 몇 달 전 발생한 Evol 능력자 관련 사건에서 등장했던 이름이었다. 당시 감식과에서는 미성년 Evol 능력자가 《오디세이》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 사건은 아직 정식으로 종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특파팀은 어째서 평범해 보이는 이번 실종 사건에 개입한 것일까?
책상 한구석에서 성녕과 샤오자의 일기장이 겹쳐 놓인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답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장갑을 끼고 옆에 촬영용 카메라를 설치했다. 지금부터 다루는 물건들은 모두 증거물에 해당했다.
손에 든 일기장을 넘기며 어지럽게 쓰인 글씨 속에서 최대한 유효한 단서를 찾아보았다. 정해진 줄에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삐뚤빼뚤 적힌 글씨들 외에, 샤오자의 숙제 공책에서는 낙서처럼 그려진 작은 만화도 발견했다. 단순한 선으로 그린 그림이었지만, 한 아이는 얼굴이 단정하고 수려했으며 다른 아이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일기장을 계속 넘기던 중, 나는 종이가 뜯겨 나간 자리에 남은 고르지 않은 흔적을 발견했다. 바로 앞장에는 샤오자와 성녕이 함께 ‘무언가를 하러 가자’고 약속했다는 내용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톱니처럼 들쭉날쭉한 종이의 찢긴 자국을 여러 장 촬영했다. 그런 다음 일기장을 가지런히 덮어 증거물 봉투에 넣었다.
교무실에서의 증거 수집은 일단락되었다. 계획대로라면 다음에는 교실로 가서 단서를 찾아야 했다.
장비를 정리하고 막 떠나려던 참에, 백기가 손 선생님을 데리고 교무실로 돌아오는 모습과 마주쳤다.
“손 선생님,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앞으로 새로운 정보가 생기면 즉시 경찰에 연락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이어서 교실에서도 간단한 조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학생들이 질서를 지킬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손 선생님이 승낙하자 백기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음에는 교실에서 증거물을 수집할 예정이죠?”
“갑시다. 같이 가죠.”
건물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이 복도를 스쳐 지나갔다. 나뭇잎들이 쉴 새 없이 바스락거렸다.
03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인 시간이라 복도는 유난히 조용했다.
나는 백기와 손 선생님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세 사람 사이에는 묘한 거리감이 흐르고 있었다. 앞장서 걷던 손 선생님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경찰로서의 본능이 말해 주었다. 그것은 경계심으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나는 그런 눈빛을 두 부류의 사람에게서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하나는 취조실에 들어온 범죄자였고, 다른 하나는 아직 체포되지 않은 범죄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끝에 도착하자 뚜렷한 소란이 귓가에 들려왔다. 창문 너머로 학생 몇 명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이 없는 교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자, 두 분. 여기가 저희 반입니다. 제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설명하겠습니다.”
손 선생님의 등장은 소란스러웠던 교실에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조금 전까지 한껏 떠들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마치 영화 속에서 생쥐들이 고양이를 마주친 장면 같았다.
손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위엄이 넘쳤다. 조금 전 백기 앞에서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모습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나는 백기의 뒤로 두어 걸음 다가갔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줄곧 교단 위에 선 손 선생님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백기 대장님, 이따 제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을까요?”
나는 목소리를 낮춰 물으며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 상관들은 윗사람을 모실 때는 표정과 기색을 잘 살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쳤으니까.
하지만 백기는 눈썹을 살짝 움직일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쉽게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 조금 섞여 있었다.
“평소대로 현장 감식을 진행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방금 표정을 보니 이미 무슨 단서라도 발견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백기는 고개를 저었다. 잔뜩 모여 있던 미간도 조금씩 펴졌다.
“그냥 손 선생님이 교단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예전 선생님과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얼마 지나지 않아 손 선생님이 우리를 교실 안으로 불렀다. 학생들은 모두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 눈빛에 가득한 호기심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자, 그럼 이제 두 경찰관님을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손 선생님이 교단에서 내려오자 백기가 곧바로 그 자리에 올라섰다. 반 전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쏠렸다.
“다들 걱정할 필요 없어. 몇 가지만 물어볼 테니까 아는 사람은 손을 들고 대답해 줘.”
“너희는 성녕을 알고 있니?”
“평소 반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냈어? 친한 친구는 있었니?”
백기의 질문은 간단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활기가 돌던 교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피부가 까무잡잡한 남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녕은 평소에 말도 별로 안 하고, 반 애들이랑 노는 것도 안 좋아했어요.”
“보통 구석에서 혼자 게임기를 가지고 놀았어요.”
“걔 아빠가 술주정뱅이라는 건 다들 알아요. 그래서 샤오자 말고는 아무도 성녕이랑 놀려고 하지 않았어요.”
“얼마 전에 《오디세이》가 나온 뒤로는 성녕이 학교에도 거의 안 나왔어요. 그러다가 샤오자도 안 나오기 시작했고요…….”
“그럼 마지막으로 그 아이들을 봤을 때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니?”
“어, 없었어요. 저희도 나중에 손 선생님한테 듣고서야 알았어요.”
그 말을 들은 백기가 내게 샤오자와 성녕의 자리를 확인해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두 아이의 자리는 모두 맨 뒷줄에 있었지만 서로 붙어 있지는 않았다.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책상 위에 이상한 낙서가 잔뜩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다른 아이들이 장난으로 그려 놓은 것 같았다.
나는 증거 수집을 위해 사진을 찍은 뒤 백기와 함께 교실을 나왔다. 손 선생님은 남아서 수업을 계속 진행했다.
백기는 복도 난간에 몸을 반쯤 기댄 채 서 있었다. 난간 아래로는 학교 농구장이 보였다.
나는 방금 촬영한 사진을 건넸다. 백기는 두어 번 훑어보더니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그 밖에 특별한 증거물은 없었습니까?”
“일기장에 아이들이 그린 삽화가 조금 있었습니다.”
“그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니까, 그런 그림도 단서가 될 수 있겠네요.”
“주의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때 나는 백기의 시선이 줄곧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백기 대장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손 선생님과 원래 아는 사이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처음 뵀습니다.”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몇 분이 흐른 뒤에야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증거 수집을 일찍 마치고 쉬도록 하세요.”
백기가 떠났다. 복도를 스치던 바람도 멎었다.
이제 남은 것은 손 선생님이 수업하는 목소리뿐이었다.
04
“얘들아, 수업 끝났다. 오늘 숙제 잊지 말고.”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오늘은 날씨가 화창했다. 하지만 수업을 마친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교안을 가볍게 털고 찻잔을 든 채 교무실로 돌아갔다.
창밖에서 들려오던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조금 전 나에게 질문하던 두 경찰관도 이미 떠났을 것이다. 나는 도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기라는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찻잔 안에서는 구기자 열매가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물도 어느새 옅은 노란빛으로 변해 있었다.
오늘 경찰이 여럿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본 탓인지 교무실 선생님들의 대화는 평소보다 한층 활발했다. 내 앞자리에 앉은 여선생님은 아예 몸을 돌려 백기라는 경찰관이 아직 미혼인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나는 당연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 아마 백기 경관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을 거라고도 알려 주었다. 조사 도중 여자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일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법이었다.
막 찻잔을 집어 들려던 참에 앞자리 선생님이 휴대전화가 울린다고 알려 주었다. 확인해 보니 ‘오늘 저녁에는 광둥식 구이 요리가 먹고 싶어요’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분명 앞자리 선생님도 그 문자를 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웃으며 혹시 재혼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요즘 우리 집에 머무는 아이가 하나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오후 6시 15분.
내가 퇴근하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묘지로 향해 아내와 아이를 추모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학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간다. 그곳에서 길가에 있는 가게에 들러 참배할 때 쓸 꽃다발과 사탕을 산다. 묘지 정문으로 들어가 마흔네 개의 계단을 오르면 왼쪽 두 번째 자리에 그들의 무덤이 있다.
묘비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다만 내 이름만은 여전히 붉은색으로 남아 있었다. 언젠가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면서.
이것은 내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하루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내 마음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내 마음은 이미 그들과 함께 저 아래에 묻혀 버렸는지도 모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참배를 마쳤다. 나는 집 앞의 광둥식 구이 전문점에 들러 문자에 적혀 있던 음식을 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기는 손에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먹음직스러운 향이 풍겼다. 무게도 제법 묵직했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이었다.
집 문을 열자 침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안경을 쓴 남자아이가 방에서 성큼성큼 뛰어나왔다.
“손 선생님, 너무 늦으셨잖아요!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요.”
아이는 큰 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내가 손에 든 음식을 들어 보이자 그제야 조용해졌다. 아이는 곧장 음식을 낚아채더니 식탁에 앉아 손으로 집어 먹기 시작했다.
“아, 맞다. 손 선생님, 오늘 경찰이 학교에 왔다면서요? 무서워서 아직 돌아갈 용기가 안 나요. 조금만 더 숨겨 주시면 안 돼요?”
“사흘만 더요. 아니, 일주일만요! 성녕이랑 연락만 닿으면 바로 나갈게요. 약속할게요.”
아이는 입안 가득 기름진 음식을 넣은 채 말하고 있었다. 나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 태도였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에서 책임감이 솟아올랐다.
“물론이지. 학생을 돕는 건 선생님의 의무니까.”
“그러니 다 먹었으면 이제 여기서 나가 주렴, 샤오자.”
05
나는 밤에 교안과 시험 문제를 검토하는 일이 잦았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이기도 했지만, 밤의 고요함 역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교재에 중요한 부분을 표시하고 공책에 적힌 문제들을 끊임없이 수정했다. 내 기준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조정하는 것이었다. 다음 시험에서 학생들에게 낼 문제들이었다.
밤 10시 20분. 시험지의 마지막 문제까지 준비를 마쳤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손전등 불빛이 순식간에 얼굴을 비췄다.
낮에 학교에서 수사를 진행했던 백기 경관이었다. 그의 뒤에는 몇 사람이 더 서 있었다. 그중에는 내 교무실 책상을 조사했던 경찰관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 어린 얼굴 하나가 숨어 있었다.
조금 전 우리 집을 떠났던 샤오자였다.
“백 경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눈앞의 상황에도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 안쪽을 가리키며 미소 띤 얼굴로 백기에게 물었다.
“손 선생님, 선생님께는 미성년자의 이동의 자유를 불법으로 제한한 혐의가 있습니다.”
“사건은 아직 수사 중이지만, 조사에 협조해 주셔야 하므로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드라마에서 그다음에 어떤 절차가 이어지는지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백기는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내 의문을 알아차린 듯하더니,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선생님은 Evol 능력자 범죄자가 아닙니다. 저희가 찾아온 것도 조사에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조사가 끝나면 담당 부서로 신병을 인계하겠습니다.”
나는 백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파팀 요원들은 언제나 Evol 능력자가 연루된 범죄만을 담당했다. 다시 말해, 눈앞의 백기 경관은 단순히 샤오자의 실종 사건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백 경관님, 궁금한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것이라면 당연히 대답하겠습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잘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 가족들의 묘에 다녀왔고, 저녁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시험 문제를 준비하고 있었지요.”
“납치 사실은 인정할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제 행동은 기껏해야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것에 해당합니다. 납치라고 할 수는 없지요.”
경찰의 눈에는 그저 뻔뻔한 변명으로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굳게 믿고 있었다. 다행히 백기는 더 이상 추궁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화제를 돌렸다.
“정식으로 신병을 넘겨 체포 절차를 진행하기 전에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백기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샤오자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유가 뭡니까?”
나는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투가 잠시 달라진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저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선생님과 샤오자는 모두 Evol 능력자가 아니며, Evol의 지배를 받은 흔적도 없습니다.”
“게다가 샤오자의 진술을 보면, 오히려 선생님께서 자발적으로 그 아이를 집에 머물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이유는 아무리 찾아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학생을 돕는 것이 선생님의 의무 아닙니까?”
나를 바라보는 백기의 눈빛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하지만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게 이유입니까?”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
백기는 잠시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뒤에 서 있던 경찰관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우선 특파팀으로 데려가. 취조가 끝날 때까지 누구도 이 사람과 대화하지 못하게 해.”
이런 결과가 찾아오리라는 것은 오늘 낮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떠나기 전, 나는 고개를 돌려 거실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소파 위에 놓인 가족사진 속에서는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지금의 나도 행복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