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향하는 길은 때로 회색지대에 숨어 있기도 하다.
01
복도 깊숙한 곳에서 서로 엇갈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쪽은 안정적이고 힘찬 발걸음이었고, 다른 한쪽은 질질 끄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두 소리는 점차 선명해지더니 마침내 문밖에서 뚝 멈췄다. 다음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백기 대장님, 용의자를 데려왔습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한 삐걱거림이 심문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대원은 건들거리는 태도의 젊은 남자를 호송해 책상 앞 의자에 앉힌 뒤, 백기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용의자가 불평을 늘어놓는 동안에도 백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서류에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마지막 문장까지 모두 읽고 나서야 백기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조사 보고서에는 모든 것이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전상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겉으로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현대 미술가였지만, 은밀하게는 GR의 활동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범죄 자금을 조달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라는 신분을 이용해 여러 집회에서 GR의 영향력을 선전하기도 했다. 심지어 혈액 바이러스 생산 공장의 부지를 선정하는 방안도 그가 제시한 것이었다.
백기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문득 머릿속에 그녀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NW가 자신을 연구하는 데 동의했다.
그 대신 NW는 그녀와 정보를 공유해야 했으며, 또 하나…… 혈액 바이러스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곁에 앉아 있던 대원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사건 기록을 펼치고 심문을 시작했다.
“말해 보시죠. GR의 범죄 자금을 어떤 방법으로 세탁했습니까?”
“…….”
“당신은 여러 차례 집회를 조직해 컴퓨터로 조작한 ‘Evolver가 일반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영상’을 유포했습니다. 사실입니까?”
“…….”
질문이 연이어 쏟아졌지만, 상대는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달린 백열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백기는 그의 시선을 따라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심문실의 조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켜져 있어. 저걸 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지.”
“게다가 면회 신청도 전부 기각됐어. 아무리 시간을 끌어 봐야 네가 기다리는 건 오지 않아.”
심문실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백기는 조금 짜증이 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듯했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이랑 펜을 줘.”
두려움이 생긴 것일까. 전상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곁에 있던 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와 펜을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펜촉이 종이에 닿으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랫동안 팽팽하게 이어지던 대치 상황에 마침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그때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대원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백기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기 대장님, 시청에서 내부 전화가 왔습니다. 협의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백기는 열심히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는 용의자를 한번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문실의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백기는 전화기 앞으로 걸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지나칠 정도로 반가워하는 인사말이 들려왔다.
“백기 대장님,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저는 시청에서 공공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왕…….”
“용건부터 말씀하시죠.”
백기는 침착하게 상대의 말을 끊었다.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생략하시고요.”
“하하하하! 역시 백기 대장님은 시원시원하시군요. 그럼 염치 불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친구 중에 예술가가 한 명 있는데,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특파팀으로 불려 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뚝. 백기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심문실로 향했다. 그러다 몇 걸음 걷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대원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사전에 통보되지 않은 외부 전화는 전부 거절해. 내 승인도 받을 필요 없어.”
등 뒤에서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백기는 심문실의 문손잡이에 손을 얹고 망설임 없이 문을 살짝 밀어 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심문을 담당하던 대원이 전상 앞에 서서 그 ‘진술서’를 움켜쥐고 있었다. 표정에는 다소 화가 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백기가 돌아온 것을 알아차린 대원이 무언가 보고하려 했지만, 백기는 눈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는 대원의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여 종이를 훑어보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이른바 진술서라는 종이에는 아무렇게나 끄적인 낙서 몇 개만 그려져 있었다.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들의 몸에는 일부러 큼지막한 가위표가 여러 개 그어져 있었다. 그들은 추상적인 형태의 불길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모습은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전상은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는 여유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꽤 예술적이지 않습니까? 경찰관 여러분이 천천히 감상하시라고 남겨 두겠습니다.”
“나중에 시간 나시면 제 전시회에도 오셔서 기분 전환이나 하고 가시죠.”
“좋아.” 백기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입꼬리를 비웃듯 치켜올렸다.
“네가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
02
심문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이전에 붙잡았던 말단 조직원들과는 달리, 경매장에서 체포한 고위 간부들은 모두 심문에 대처하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듯했다. 체포 당시 잠깐 당황한 모습을 보였던 그들은 곧 빈틈없는 태도를 되찾았다. 부인하지도, 진술하지도, 협조하지도 않았다. 사건의 진상을 가장 많이 털어놓는 사람에게 선처의 기회를 주겠다고 알려 주었지만, 누구 하나 넘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심문이 끝나 갈 무렵 특파팀 대원들을 비웃는 사람까지 있었다. “죄수의 딜레마? 특파팀에서는 아직도 그런 낡아빠진 심리전을 쓰는 겁니까?”
백기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사건 기록을 덮었다. 그리고 책상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눈앞의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마치 천천히 회전하는, 그 어디에도 빈틈이 없는 완벽한 고리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존의 심문에서 흔히 사용하던 방법으로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할 수 없다. 어쩌면 통상적이지 않은 방법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백기는 손끝을 책상 위에 얹고 불규칙하게 톡톡 두드렸다.
그때 귓가에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기가 눈을 뜨자 사무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당조가 상반신을 안으로 들이밀었다.
“대장님, 벌써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일하셨잖아요. 식당에 가서 에너지 좀 충전하시죠?”
“나는…….”
백기는 반사적으로 거절하려 했다. 계속해서 일했지만 지금은 별다른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문득 시야 한쪽에 책상 모서리에 놓인 휴대전화가 들어왔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 몇 시간 전 그녀에게서 받았던 메시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요즘 바쁜 건 알지만, 밥은 꼭 잘 챙겨 먹어야 해요!!” 강조하는 말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도 된 듯, 문장 끝에는 느낌표가 여러 개나 붙어 있었다.
화면 앞에서 잔뜩 엄한 표정을 지으며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백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그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부드러워졌다. 백기는 휴대전화를 챙기고 당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이미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기에 식당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을 뿐이었다. 백기 일행은 배식 담당 아주머니에게 남아 있는 반찬을 모두 받아 각자 식판을 들고 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막 반찬을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었을 때, 누군가 아직 심문이 끝나지 않은 사건에 관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심문해 봤자 소용없어요. 저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심문 기법을 훤히 꿰뚫고 있다고요!”
“그렇다고 ‘증거’를 조작해서 저들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리려고 하면 오히려 허점이 들통날 수도 있어요. 게다가 그런 건 진술을 유도하는 행위라 심문 규정에도 어긋나고…….”
“누가 조작하겠다고 했어?”
백기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휴대전화 화면에 머물러 있었다.
백기는 간결하게 메시지 하나를 보낸 뒤에야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식판에서 채 썬 감자볶음을 한 젓가락 집어 들었다.
“정석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돌파구를 찾으면 돼.”
03
멀고 가까운 곳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불빛들이 소란스러운 밤거리에 잠겨 있었다. 백기는 네온사인 간판이 즐비한 술집 거리를 지나 익숙한 발걸음으로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에 들어섰다. 웨이터 한 명이 다가오더니 백기를 알아보고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그를 안내해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공간을 지나 클럽 안쪽 깊숙한 곳으로 데려갔다.
부드러운 음악이 공간을 감돌고 있었다. 바깥과 비교하면 어딘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분위기였다. 백기는 느긋하게 바 카운터 앞으로 걸어가 상판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다음 순간,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한 라오피가 온갖 술병이 늘어선 긴 테이블 뒤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마침 백 경관님이 맡겨 두신 술을 꺼내 놨는데, 오늘도 미즈와리로 드릴까요?”
백기가 짧게 대답하자 카운터 뒤에서 곧바로 얼음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기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왜 이렇게 한산하지?”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상하다니까요.” 라오피의 한숨 소리에 술이 졸졸 따라지는 소리가 겹쳐졌다.
“전에는 사업 이야기하러 자주 오던 사장님들이 몇 분 계셨는데, 벌써 며칠째 얼굴을 안 비치시네요…… 지난번에 술도 몇 병이나 남겨 두고 가셨는데, 일단 보관해 드릴 수밖에 없죠.”
“무슨 상황인지 너도 알고 있겠지.” 술을 젓는 막대가 잔 벽에 부딪치던 작은 소리가 뚝 멈췄다.
백기는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으로 맑은 황금빛 술이 담긴 유리잔 하나가 밀려왔다. 잔 표면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백기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제야 라오피가 머리를 긁적이며 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부인하지는 않았다.
“……짐작 가는 게 조금 있기는 한데, 사실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네 ‘짐작’은 언제나 바람의 방향을 기가 막히게 읽어 내잖아.” 백기는 고개를 들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오피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술집 거리에 이렇게 많은 가게가 있는데, 하필 네 클럽만 이렇게 장사가 잘될 리 없지.”
고요한 공간을 따라 음악이 흘렀다. 하프와 플루트의 선율은 느긋하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팽팽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라오피는 카운터를 닦으며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기 대장님도 참, 또 저를 놀리시네요…… 제가 손님들 술을 만들어 드리면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야 별 쓸모 없는 말 몇 마디가 전부예요.”
“게다가 혹시라도 제가 한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이 클럽의 평판은 완전히 망가질 거라고요.”
“확실히 사업이 걸린 문제라면 신중하게 생각해야겠지.” 백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내 친구 중에 요즘 술집 사업에 한번 뛰어들어 보려는 사람이 있어.”
“자금도 꽤 넉넉한 편이야. 혹시 적당한 사람을 알고 있다면 나중에 소개해 줘.”
마침 한 곡의 연주가 끝난 듯했다. 공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백기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라오피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백 경관님. 제가 오늘 아침에 웨이보에서 재미있는 과학 상식 글을 하나 봤거든요. 그런데 그게 꽤 신기하더라고요.”
“어떤 뱀은 꼬리가 거미랑 정말 똑같이 생겼대요. 사냥할 때는 그 꼬리를 땅 위로 드러내 놓고 이리저리 흔든다더군요.”
“방법 자체는 단순하지만, 배가 고파 정신이 없는 새들 중에는 그 유혹을 못 이기고 제 발로 다가오는 녀석들이 꼭 있다는 거죠…….”
“흥미로운 이야기네.” 백기는 손을 살짝 들어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빈 잔을 카운터 쪽으로 밀었다.
“한 잔 더 줘. 이야기도 계속해 봐.”
04
특파팀 회의실에서 토론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원 네다섯 명이 긴 테이블을 따라 나누어 앉아 빼곡한 글씨로 가득 찬 화이트보드를 바라보며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백기가 몸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인 보드마커를 집으려던 순간, 갑자기 통신기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백기 대장님!”
수화기 너머에서 당조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매장에서 발견된 피해자 몇 명을 찾아가 조사했는데, 역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경매장으로 납치되기 몇 달 전부터 사업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더라고요. 그러다가 서등이라는 용의자에게서 은밀한 정보를 듣고는 나쁜 마음을 먹고 탈세를 시도하려 했던 겁니다!”
“……그래서 GR의 그 사람들과 접촉하게 된 거군요.” 대원 한 명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만날 때도 일부러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골랐던 거예요. 그 덕분에 놈들이 손쉽게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거고요.”
백기는 손가락 사이에서 보드마커를 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긴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전에 방문 조사했을 때도 하나같이 그 사실을 숨겼던 거야.”
그는 말을 하면서 화이트보드에 적힌 서등과 피해자들 사이에 선 하나를 그어 연결했다. 백기는 통신을 종료하고 회의실에 있는 다른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너희 몇 명은 지금 바로 나머지 피해자들을 찾아가. 저녁 전까지 진술을 확보해.”
“남은 두 사람은 나를 따라와. 심문실로 용의자를 데려가야겠어.”
대원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각자 흩어졌다. 백기는 두 명의 대원을 데리고 구금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철창 너머에서 GR의 고위 간부들이 경멸하거나 구경거리를 즐기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모두가 이미 이 싸움의 결말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파팀이 헛수고만 거듭하다가 결국 망신스럽게 물러날 것이라고. 그 뒤에 남은 문제는 각자 거액의 수임료를 받는 변호인단이 알아서 처리해 줄 터였다.
백기는 양옆의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 시선은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대원들을 거느리고 복도 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군화가 바닥을 밟을 때마다 확신에 찬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그 발소리는 마침내 가장 끝에 있는 구금실 앞에서 멈췄다.
풍채가 좋은 중년 남자가 문을 등진 채 의자에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구금 기간이 끝나서 이제 어쩔 수 없이 풀어 줘야 하는 모양이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 옆에 벗어 둔 신발을 질질 끌어 신었다.
“그러게 남의 충고를 좀 들었어야지, 백 대장. 진작 내 말을 들었으면…….”
“특파팀에 새로운 증거가 들어왔어.”
백기는 남자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단호하게 끊었다.
“넌 여기서 나갈 수 없어. 서등, 심문실로 가자.”
중년 남자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하지만 곧 다시 입을 굳게 다문 채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기의 말을 들은 것일까.
다른 구금실에서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 갑자기 많아졌다. 그 눈빛에는 조금 전과 달리 무언가를 탐색하려는 기색이 더해져 있었다.
백기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 사이에 작은 균열이 소리 없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05
구금 기간이 연장된 지 사흘째 되는 날.
백기는 심문실 옆방으로 들어가 일방향 유리 너머로 눈앞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예술가’로 활동하던 그 젊은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만 정신 상태는 전보다 눈에 띄게 위축되어 있었다.
“전상.” 심문을 담당한 대원이 엄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떤 경로로 피해자들을 특정하고, 이번 Evolver 경매장으로 넘겼습니까?”
“……경관님, 그건 유도 심문에 해당합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는 자세를 고쳐 앉더니 애써 침착한 척하며 대답했다.
“이번 경매는 정말 저와 아무 상관도 없어요. 저도 속아서 그 자리에 갔던 거라고요…… 그런데 좀 더 좋은 의자로 바꿔 줄 수 없습니까? 앉아 있기 불편한데.”
“상대하지 마. 불편한 감각은 심리적으로 용의자가 심문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백기가 이어피스를 통해 지시했다.
그의 시선은 유리 너머 전상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제보 자료에 적힌 세부 내용을 읽어 줘.”
“두 달 전 밤, 당신은 서등과 함께 사업 협의를 명목으로 피해자들을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인정합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피해자들은 서등의 말에 넘어가 탈세할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그 틈을 타 미술품 경매가 좋은 방법이라고 소개했는데, 사실입니까?”
“…….”
세부 사항을 하나씩 확인하는 추궁이 이어지자 전상은 짜증이 난 듯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백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대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 질문을 계속 붙들고 늘어져.…… 시선과 행동으로 네 옆에 쌓인 사건 기록들이 전부 저 사람과 관련된 단서라는 암시를 줘.”
심문실 안의 대원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이어피스를 살짝 고쳐 썼다. 곧이어 질문이 한층 더 세밀해졌다.
전상은 점점 더 자주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를 눈치챈 듯 초조하게 일방향 유리 쪽을 바라보기도 했다. 백기는 잠시 침착하게 관찰한 뒤 송신 버튼을 눌렀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하지만 너희 중 누군가 입을 열기 시작한 순간부터, 네가 그토록 믿고 있던 죄수의 딜레마는 이미 여행자의 딜레마로 바뀌었어.”
백기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펜을 아무렇지 않게 돌렸다.
“혼자 뒤처진 사람은 자연히 가장 큰 위험을 떠안게 되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지, 아니면 우리가 제시한 길을 선택할지는 스스로 판단해.”
“……무슨 길 말입니까?”
심문실 안의 대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들어온 날부터 말해 줬잖습니까? 사건에 관해 가장 많은 사실을 진술한 사람은 선처받을 수 있다고요.”
방 안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전상의 얼굴에는 갈등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백기는 재촉하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나서야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데려가.”
“안 하겠다고는 안 했잖아요!” 젊은 남자가 움찔했다. 무언가 섬뜩했던 장면이 떠오른 듯, 그는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말했다.
“인정하겠습니다. 서등이 소개한 Evolver에게 돈세탁 방법을 알려 준 건 사실이에요. 그때 제가 미술품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세제의 허점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제의 허점을 이용해 기업의 영업비용으로 처리한다는 거겠지.” 백기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이미 너보다 먼저 진술한 사람이 있어. 네가 계속 설명해 봤자 그 진술을 뒷받침하는 것밖에는 안 돼.”
“선처받고 싶다면 새로운 사실을 더 떠올려 봐.”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했다. 젊은 남자는 순간 멍해졌고, 얼굴에는 다시 갈등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잠시 후, 그는 마침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혈액 바이러스 공장의 부지는 제가 선정했습니다. 당시 수도사업소의 책임자가 딸을 데리고 제 아트 살롱을 방문했는데, 그 기회를 이용해 미술품 한 점을 선물했어요…….”
“전시회를 열면서 시각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동료 몇 명도 알게 됐습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그들을 약물로 통제해 강제로 가담시켰고, 제 작품을 이용해 GR의 자금을 세탁했습니다…….”
간간이 이어지는 진술 속에서 텅 비어 있던 사건 기록이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는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언제나 침착하던 목소리에는 마침내 당황한 기색이 조금씩 묻어나왔다.
“그럼 이제 저는 어느 정도 선처받을 수 있습니까? 혹시…….”
“특파팀에서 너희가 진술한 내용을 종합해 판단할 거야.”
백기가 그의 말을 끊었다. 백기는 송신기를 끄고 이어피스를 통해 심문실 안의 대원에게 지시했다.
“다시 데려가. 다음 심문을 준비하고.”
전상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원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향했다. 심문실을 막 나서려던 순간, 그는 어딘가 억울한 듯 고개를 돌려 일방향 유리를 바라보았다.
“……우리 중에서 누가 먼저 배신한 겁니까?”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서 문이 천천히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