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탄하고 탁 트인 길은 대개 장애물을 넘어선 뒤에야 나타난다.
01
머리 위의 불빛이 누군가의 손에 흔들렸다. 눈부신 빛이 굳게 감긴 두 눈을 향해 가까워졌다.
백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속눈썹을 타고 떨어지며 시야를 흐릿하게 물들였다. 그는 천장 한가운데에 매달려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경찰학교 제복 아래로는 살갗이 군데군데 찢겨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여 시야를 붉게 물들인 피를 털어낸 뒤, 방 안에서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네다섯 명의 인영을 훑어보았다.
오늘 아침 임무를 수행하던 중, 그는 뜻밖의 매복 공격을 당했다. 험악한 솜씨를 지닌 몇 사람이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다. 백기는 곧바로 반응해 민첩하게 몸을 뒤집으며 뒤로 도약했고, 눈앞의 상대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하지만 그 순간 목덜미에 무언가 찔린 듯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고, 곧이어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이 어두운 방에 수갑이 채워진 채 갇혀 있었고 Evol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지금, 그를 심문하던 사람들도 상당히 지쳐 보였다.
“다른 쪽으로 접근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고작 어린놈 하나인데 입까지 저렇게 무거우니, 아무리 물어봐도 알아낼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저 녀석은 아주 어릴 때부터 경찰과 함께 임무에 투입됐어. 얕봐서는 안 돼.”
백기는 정신을 집중해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몰래 Evol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무래도 주사제의 약효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지난 몇 시간의 인내가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서 줄곧 방 밖을 순찰하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차출된 듯, 이제 바깥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밧줄에 쓸려 피가 맺힌 손목을 살짝 움직였다. 겉으로는 통증 때문에 몸을 비트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움직임이 상대의 주의를 끌었다. 어둡고 잿빛을 띤 빛이 번뜩였다. 순간 백기의 온몸에 뼛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통증이 일었다. 마치 셀 수 없이 많은 얼음송곳이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듯했다. 극심한 고통에 그는 끝내 낮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힘겹게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의자에 앉아 냉혹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는 아직 한 줄기 냉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네가 지금 침묵할 수 있는 건 아직 네 의지가 너를 배신하기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너도 누구보다 잘 알 거다. 그렇게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는 걸.”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더욱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백기는 고개를 떨구었다. 땀과 뒤섞인 피가 오뚝한 콧등을 타고 흘러내려 굳게 다문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그는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가볍게 기침했다.
“좋아. 말하지…….”
우두머리는 독사처럼 음산하고 침착한 눈으로 백기를 노려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 하나가 백기에게 다가왔다. 바로 다음 순간, 백기가 불현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호박빛 눈동자에서 위험한 빛이 번뜩였다. 마치 어둠 속에 도사린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 같았다.
그는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날아차기가 다가온 남자의 얼굴에 정확히 꽂혔다. 백기는 그 반동을 이용해 몸 전체를 뒤로 크게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힘을 견디지 못한 밧줄이 순식간에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당기는 힘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튕겨 돌아갔다.
그 찰나에 백기의 두 손은 이미 밧줄의 매듭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그는 그 기세를 이용해 무릎을 굽혀 벽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달려드는 덩치 큰 남자를 덮쳐 쓰러뜨렸다. 두 발이 바닥에 닿기도 무섭게 주먹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백기는 재빨리 몸을 반 바퀴 굴려 돌아서며 뒤에서 기습해 오는 상대를 단숨에 쓰러뜨렸다.
불과 몇 차례의 공방 끝에, 달려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단단하고 차가운 물체가 그의 뒤통수에 바짝 닿았다.
철컥. 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또렷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그가 순간적으로 망설이는 사이, 더 많은 사람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백기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는 다시 묶였다. 그리고 앞선 저항의 대가로 더욱 잔혹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우두머리의 Evol은 백기의 몸에 끊임없이 무언가가 관통하는 듯한 고통을 안겼다. 한 차례의 통증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고통이 잇달아 밀려왔다.
“슬슬 궁금해지는군. 네 몸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과연 네 의지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백기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굴하지 않는 듯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나도 궁금하군. 대체 어느 정도까지…… 해야…… 내가 나 자신을…… 배신하게 될지.”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오직 침묵으로 잔혹한 폭력에 맞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 가운데, 백기는 등 뒤에서 느리고 힘 있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테스트 통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우두머리도 Evol을 거두었다.
백기는 순간 멍해졌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교관님.”
몸을 옥죄던 구속이 풀리자 백기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의 눈앞에서 누군가가 어둠을 벗어나 걸어 나왔다. 차갑고 엄격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
바로 그의 교관이었다.
“백기, 축하한다. ‘섬봉(歼蜂)’ 시약 실험의 비밀 테스트에 통과했으며, 시약 번호 A1B의 실험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다.”
“실험에 참여하는 데 동의하겠나?”
02
백열등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맑고 투명한 유리창 대신 금속 벽면이 둘러쳐진 방 안에서, 백기는 벽에 기대어 무심한 눈길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곳은 ‘섬봉(歼蜂)’ 시약 실험을 위한 교육실이었다. 학생 몇 명이 서로 떨어진 자리에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시험에 선발된 사람이 자신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인원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번 실험이 생각보다 훨씬 험난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 교실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경찰 제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들어와 교단에 섰다.
백기는 강인한 인상의 남자를 눈에 띄지 않게 살폈다. 남자는 여러 색깔의 시약이 담긴 유리 시험관들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예비 선발 시험에 통과한 것을 축하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훨씬 더 가혹한 시험을 치르게 될 거라는 사실도 알려 드려야겠군요.”
“제 이름은 왕일입니다. 섬봉 시약 실험의 초기 참가자 중 한 명이죠. 이번에 학교에서 도입한 시약 실험은 제가 감독하고 지도할 예정입니다.”
왕일은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의 표정에 무거운 기색이 더해진 뒤에야 설명이 이어졌다.
“몇 달 전, 여러분의 선배 한 명이 임무 중 실수로 적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는 수많은 기밀을 누설했고, 그 결과 우리 측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왕일이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한층 무거워져 있었다. “조사 결과, 적이 최신형 ‘진실 혈청’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약물은 사람의 의지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신경계에 영구적인 손상까지 입힙니다. 결국 우리 대원은 다시는 전선에 복귀할 수 없게 되었죠.”
백기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에도 왕일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인간이 지닌 가장 귀중한 특성은 끊임없이 단련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섬봉 시약 연구소는 이미 수년 전에 설립되었습니다. 하지만 몇 달 전 발생한 사건을 계기로 적이 독성 약물의 사용 범위를 확대했다고 판단했고, 이에 경찰학교에서도 실험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설명이 끝나자 백기와 다른 학생들은 의학 연구실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독성 약물에 대한 내성을 기르기 위해 개발된 시약을 지급받았다.
“저는 이번 실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경과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시험관 속 초록색 액체가 기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백기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젖혀 단숨에 마셨다.
그는 실험대에 몸을 눕혔다. 시간이 흐르자 통증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밀려드는 파도처럼 고통이 조금씩 몸을 뒤덮더니, 이윽고 그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누군가 살갗을 한 치 한 치 벗겨 내는 듯했다. 백기는 입을 크게 벌렸지만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 것은 의식이 점점 더 또렷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신체 부위마다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고통에 못 이겨 허우적거리던 손가락이 무심코 움켜쥔 바람의 감촉마저 느껴졌다.
“지난번 작전에서 너희가 압수한 약물은 어디에 보관했지?”
실험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연구원은 고문 상황을 재현하며 질문을 던졌다. 심문하는 말투로 이미 한계에 몰린 백기의 사고를 뒤흔들려는 것이었다.
백기는 추위에 떠는 사람처럼 몸을 웅크린 채 가늘게 경련했다. 그는 질문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 몸에서 일어나는 임상 증상을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대퇴골, 경골 부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 통증 지수…… 8단계. 흉추와 복강…… 둔통…… 지수 9단계.”
그러나 이것은 고통의 시작에 불과했다. 통증이 극에 달했을 때는 손가락을 살짝 굽히기만 해도 팔 전체가 으스러지는 듯한 격통이 몰려왔다.
“약물이 어디 있는지만 말하면 더는 아프지 않을 거야.”
그 말은 마치 한 줄기 갈대와도 같았다. 고통의 깊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백기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머릿속이 끝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말할게…….”
하지만 두 글자를 내뱉은 순간, 백기는 이를 악물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몸이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와중에 입을 열어 버린다면, 그가 지켜 온 신념마저 바닥에 내던져져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짓밟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일 터였다.
그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자신의 영혼마저 몸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이 사이로 비릿한 피 맛이 번져 왔다.
그동안 임무를 수행하며 겪었던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백기는 온몸을 흠칫 떨었다.
A1B는 강도를 완화한 시약에 불과했다. 이 첫 번째 관문조차 통과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모든 것을 어떻게 굳건히 지켜 낼 수 있겠는가.
그의 눈앞에 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피아노 선율을 실은 한 줄기 바람처럼, 소녀는 고통에 시달리는 그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더 이상의 대화를 끊었다. 연구원이 아무리 회유해도 그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마지막 한 줄기의 통증마저 사라졌을 때, 모든 기기에 표시되던 곡선도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교육생 백기. A1B 시약 1차 실험 완료.”
03
첫 번째 실험을 겪고 나자, 백기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실험을 거듭하며 한 걸음씩 자신을 단련해 나갔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관문을 고통스럽고 힘겹게 돌파했다.
다만 실험이 진행될수록 연구실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찾아보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백기는 그들이 무슨 이유로 포기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만큼은 절대로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 백기는 시약을 건네받고 왕일에게 이번 실험의 주의 사항을 듣고 있었다.
그때 왕일의 시선이 백기가 들고 있는 시약으로 향했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백기, 나는 오래전부터 자네를 지켜봤네. 자네는 훌륭한 실험 참가자야. 실험 진도도 가장 빠르고.” 왕일은 턱을 살짝 당기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네. 하지만 어떤 고통은 인내하는 것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백기는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면으로 마주할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바라는 건 한 가지뿐이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절대로 잊지 말게.”
백기는 시약을 복용하고 나서야 왕일의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귓가에 총성이 교차하며 울려 퍼졌다. 의식이 가라앉았다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사이, 누군가 백기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멍하니 있지 마! 대장님이 독에 당하셨어. 네가 대원들을 지휘해서 철수시켜!”
백기는 흠칫 놀랐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후위조는 엄호해! 나머지는 신속히 철수한다!”
우박처럼 거센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빗방울은 진흙투성이 땅에 크고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고, 그 위를 군화 밑창이 잇달아 짓밟고 지나갔다.
백기는 빗소리를 엄폐 삼아 소대를 이끌고 여러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들은 무사히 작전 기지로 복귀했다.
차가운 바람을 따라 핏자국이 섞인 흙탕물이 실내로 흘러들었다. 대원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대장을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대장님이 H3C형 독성 약물에 중독되셨어. 최대한 빨리 해독제를 투여해야 해.”
“백기, 약품 보관소 위치는 너만 알고 있어. 나랑 같이 가서 대장님이 드실 약을 가져오자!”
“우선 대장님께 응급처치를 해. 나머지는 물자를 보충하고 이 자리에서 대기해!”
백기는 간단히 지시를 내린 뒤 몸을 돌려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굵은 빗방울이 온몸을 세차게 때리고 귓가에서는 강풍이 울부짖었다. 백기는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전력으로 달려 약품 보관소 앞에 도착했다.
“시간이 촉박하니까 나도 같이 들어갈게. 둘이 나눠서 찾으면 더 빠를 거야.”
동료가 손짓으로 약품을 나눠 찾자고 신호를 보냈다.
백기는 손가락으로 비밀번호 잠금장치를 건드렸다.
잠금장치의 화면이 켜지더니 형광빛을 띤 초록색 숫자들이 나타났다. 비바람 속에서 그 숫자들은 기묘할 정도로 선명하게 빛났다.
그 순간, 백기의 손끝이 문득 멈칫했다.
“뭘 망설이는 거야? 더 꾸물거리면 늦는다고!” 동료가 그를 재촉했다.
백기의 마음속에 희미한 위화감이 피어올랐다.
그는 비밀번호 입력 화면에서 시선을 떼어 동료의 얼굴로 옮겼다.
한번 움직임을 멈추자, 마음속에 싹튼 위화감의 씨앗은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로 자라났다. 넓게 드리운 그 그림자가 백기의 온몸을 뒤덮었다.
“왜 날 그렇게 쳐다봐? 빨리 들어가. 내가 여기서 지키고 있을 테니까.”
동료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기는 말없이 상대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침내 비밀번호 입력판에 올려 두었던 손을 거두며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약품 보관소는 관리자 이외의 사람이 들어가서 약품을 찾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
“나도 안에 들어가면 신청서를 제출할 뿐이야. 관리자가 직접 약품을 조회하고 꺼내 주면, 나는 창구를 통해 받아 가는 거지.”
“특경 대원이라면 누구나 이 규정을 알고 있어.” 백기의 목소리에는 서리가 내려앉은 듯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런데 네가 그걸 모른다는 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게 전부 환상이라는 뜻이겠지.”
바로 다음 순간, 총성이 울려 퍼졌다. 빗소리가 바람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눈앞이 빙글빙글 뒤집히는 듯한 현기증이 밀려온 뒤, 백기는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다.
그는 가까스로 버티며 실험 보고를 마쳤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시계의 시침이 이미 반 바퀴 넘게 돌아가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은 뒤 문밖으로 나섰다.
04
실험실 건물을 나서던 백기는 도중에 로비에서 왕일과 마주쳤다. 왕일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벌써 깨어났나?”
늘 팽팽하게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마침내 조금 누그러졌다. “앉게. 자네와 이야기할 게 있어.”
왕일은 백기의 옆에 앉아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요 며칠 자네 교관과 자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네. 대략 어떤 상황인지도 알게 됐고.”
왕일은 백기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내년에 졸업하지. 학교에서 진행하는 시약 실험도 졸업과 동시에 끝날 거야.”
“자네는 내가 지금까지 본 실험 참가자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뛰어나네. 졸업한 뒤에도 이 실험에 계속 참여할 자격이 충분해.”
그 말을 들은 백기의 눈에 드물게 놀란 기색이 어렸다. 일은 그 모습을 보고 표정을 조금 더 누그러뜨렸다.
“오해하지 말게. 자네를 괴롭히려고 이러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정식으로 제안하기 전에, 자네에게 더 많은 사실을 알려 줄 의무가 있네.”
백기는 아무 말 없이 왕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일은 과거 작전에서 포로로 붙잡혔던 특경 대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들려주었다.
그는 이미 진정한 짐승 같은 인간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목격한 적이 있었다. 들이 사용하는 고문의 수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한계보다도 더욱 잔혹했다.
법과 도덕이 무시되는 순간, 인간은 야수보다 훨씬 흉악해질 수 있었다.
백기는 왕일이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토록 잔혹한 수단으로 폭력성을 표출하고 공포를 조장하지.”
“하지만 한 가지를 잊고 있어. 그들이 도전하는 대상은 단순히 경찰이라는 집단만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왕일의 시선이 백기를 향했다. “이 길은 결코 쉽지 않네. 그렇기에 우리는 자네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더 큰 책임을 짊어지고 실험에 참여해 주기를 바라지.”
“물론 계속 참여할지, 그만둘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사에 달린 일이야.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하겠네.”
백기는 손가락을 느슨하게 오므렸다. 그동안 수차례의 실험을 거치며 시약이 자신의 몸에 안겨 주었던 고통이 떠올랐다.
그러한 고통은 지금 이 세상에서 언제든 다시 겪게 될 수 있었다. 백기는 그 고통을 미리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실제 임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수를 줄이고 싶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실험이 계속되는 한, 저도 끝까지 참여하겠습니다.”
왕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칭찬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좋아, 백기. 사실 자네는 이 실험에 아주 적합한 사람이야.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내가 보기엔 자네는 고난을 겪을 때마다 그 끝에 얻는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더군. 무감각하게 고통을 버티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자세지.”
“나는 수많은 동료가 거듭되는 임무 속에서 점차 무감각해지는 모습을 봐 왔네. 그들은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시작했고, 마침내 고통 자체를 경시하게 되었지.”
“그렇게 하면 확실히 더 쉽게 버틸 수는 있어. 하지만…….”
왕일의 목소리가 다소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고통 자체를 느끼는 감각을 잃어버리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도 공감하기 어려워지네. 그러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 길에 들어섰는지조차 점차 잊게 되지.”
“결국 그들은 그러한 변화로 인해 죽음에 빠져들고 말아.”
“그러니 그 고통을 기억하게. 그리고 이겨 내게.” 왕일의 목소리가 백기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05
백기가 눈을 떴다. 머리 위로 펼쳐진 창공에는 움직임을 멈춘 혜성이 고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NW의 야외 실험 기지에 서 있었다. 얼마 전, 공간 통로 실험이 한 차례 끝났다. 몸에 가해진 부담이 지나치게 컸던 탓인지, 의식이 흐릿한 사이 처음으로 섬봉 시약 실험에 참가했던 때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백기는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뒤에야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침착하게 방금 전 실험 과정을 되짚어 보았다. 이번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만 이전과는 무언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희미하게 들었다.
그의 Evol과 그 문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이 강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밀어내는 힘을 상쇄하기에는 부족했다.
몇 번 더 시도한다면 상황이 한층 나아질지도 몰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유리벽 너머의 연구원들에게 보고했다. “통로의 균열이 내 접근을 거부하고 있어. 다시 하지.”
입을 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몹시 쉬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대에서 시작된 통증을 신호로, 온몸 곳곳에 퍼져 있던 크고 작은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펴며 피로와 통증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사이 연구원들은 단말기 반대편에 있는 샤오위에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장관님, 반발력이 지나치게 강합니다.”
“출력을 높여서 다시 시도해.”
전자 신호를 통해 전달된 샤오위에의 목소리는 다소 왜곡되어 더욱 차갑고 냉혹하게 들렸다.
“백기는 방금 한 차례 실험을 마친 상태입니다. 현재 신체 상태로는 곧바로 다음 실험에 투입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장비에도 냉각 시간이 필요합니다.”
연구원은 손에 든 자료를 대조한 뒤에야 답변을 이어 갔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했을 때, 다음 실험은 최소 30분 후에 진행할 것을 권장합니다.”
단말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샤오위에는 잠시 판단을 내리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백기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내 몸 상태는 고려하지 말고, 장비를 다시 가동하려면 얼마나 걸리지?”
연구원은 조금 망설이며 백기를 바라보았다. “15분입니다.”
백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럼 15분 뒤에 재가동하지.”
곧이어 샤오위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백기 대장이 그렇게 말한다면 준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연구원은 곧바로 몸을 돌려 조작 패널을 다루기 시작했다.
다만 백기의 상태를 살피는 그의 눈빛에는 어느새 한 줄기 경탄이 더해진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굉음과 함께 장비가 다시 가동되었다. 장비는 백기에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하며 그의 힘을 증폭시켰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출력도 더욱 높아진 상태였다.
찰나의 순간, 잠잠해졌던 통증이 모조리 되살아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백기는 Evol을 일으켰다. 바람으로 공간을 찢어 나가자 감각은 한층 예민해졌고, 그에 따라 몸에 가해지는 고통도 계속해서 커졌다.
그럼에도 그의 등은 단 한순간도 굽혀지지 않았다.
이것은 오직 그만이 이겨 낼 수 있는 고통이자, 지금 그가 무엇보다 먼저 완수해야 할 임무였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몇 번이고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성공하면 그녀를 만나러 갈 것이다. 사실은 자신도 무척 아프다고. 하지만 그녀가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괜찮다고. 그렇게 그녀에게 말할 것이다.
홀로 꿋꿋이 맞서고 있는 그의 머리 위, 드넓은 창공에서 공간이 찢어지며 거대한 틈이 벌어졌다. 그 안에서는 가시덩굴이 무성하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