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불멸의 휘장이 될 뿐이다.
01
오늘 사격장은 어딘가 한산했다.
차가운 백열등이 둥근 빛무리를 드리우는 가운데, 진옥곤은 천으로 권총 한 자루를 몇 번이고 닦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사람들에게 온화하고 느긋한 성격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오직 두 손으로 총기를 만질 때만 열정이 타오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총은 만지면 차갑기만 한 물건이지만, 저격수로 활동하던 시절의 그에게 총은 그 무엇보다 뜨겁고 충직한 전우였다.
Evol 특수경찰에서 퇴역한 뒤, 그는 자연스럽게 사격장 교관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그렇게 오래된 친구들과 계속 함께하게 된 것이다.
총기를 다루는 일에는 높은 집중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최근 진옥곤은 자주 정신이 딴 데로 향하곤 했다.
그는 손에 든 총자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는 어느새 화환으로 둘러싸인 흑백사진 한 장이 나타나 있었다. 사진 속 남자는 늠름한 얼굴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위에 걸린 검은색 글씨는 반듯하게 적혀 있었지만, 어쩐지 핏빛이 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장은국 동지를 깊이 애도합니다.’
천장에 달린 조명등이 한 차례 흔들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옥곤은 허전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 들어 이런 기묘한 광경을 본 것은 벌써 다섯 번째였다.
하지만 미처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훈련장 입구의 문이 열렸다. 오늘의 첫 손님 두 명이 도착한 것이다. 갈색 머리의 청년이 곁에 있는 여성을 위해 문에 달린 커튼을 걷어 주고 있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따스하고 부드러웠지만, 눈매에 서린 날카로움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진옥곤은 서둘러 마음속에 피어오른 알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고 두 사람을 맞이하러 나갔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이 실탄 사격장의 총기 교관입니다. 두 분의 사격 체험을 안내해 드릴 테니 저를 따라오시죠.”
퇴역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눈앞의 청년에 관해서는 그도 어느 정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백기. 현직 특수행동대 대장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전적도 눈부신 인물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진옥곤은 두 사람에게 사격장 내부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백기가 총기에 정통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진옥곤은 직업적인 원칙에 따라 두 사람에게 기본적인 총기 지식을 설명했다. 여성은 이런 실탄 사격장에 거의 와 본 적이 없는 듯했다.
베레타 87과 영화에 나오는 베레타 92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오늘 훈련에서는 베레타 87만 사용할 수 있는지 등 크고 작은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진옥곤이 막 대답하려던 순간, 백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설명하려는 것 같았다. 진옥곤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젊은 청년에게 설명할 기회를 넘겨주었다.
“체계적으로 실탄 사격을 배우는 건 처음이니까 소구경 권총으로 시작하는 게 익숙해지기 쉬울 거야. 반동도 비교적 작아서 손도 덜 아프고.”
그렇게 말하는 백기의 목소리는 마치 부드러운 바람 같았다. 소문으로 듣던 냉정하고 빈틈없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맞아요, 아가씨. 한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죠.” 진옥곤은 멀지 않은 곳의 사격장을 가리켰다.
“좀 더 큰 총기를 사용해 보고 싶다면 저희 사격장에는 소총도 있습니다. 다만 가장 기본적인 공기소총 사격도 표적까지의 거리가 10미터는 됩니다.”
“초보자에게 10미터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베레타 87을 사용해 보고 감각이 잘 맞는다고 느껴지면 그때 공기소총도 시도해 보세요.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면 오히려 좌절감이 커질 수 있으니까요.”
그녀의 얼굴에는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곧 기운을 되찾고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보자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이니까 긴장하지 마.”
백기의 호박색 눈동자에 부드러운 빛이 어렸다.
“그리고 베레타 87은 구경이 작다고 얕볼 만한 총이 아니야. 총열과 슬라이드가 일체형으로 설계된 구조가 굉장히 고전적이면서도 뛰어나거든.”
“이런 설계 덕분에 안정성이 좋고 사격 정확도도 높은 편이야.” 백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다리를 건너는 것과 비슷해. 다리가 안정적이고 넓을수록 건너기 쉽잖아. 베레타 87은 권총 중에서도 건너기 쉬운 다리 같은 거야.”
자칫 지루하게 들릴 수 있는 총기 지식이었지만, 백기는 생생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었다.
진옥곤은 문득 백기가 사격 교관으로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실탄 사격장이 아니라 특수경찰 부대에서 말이다.
그는 다시 총기 등록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반쯤은 호기심으로, 반쯤은 대화를 이어 가려는 마음으로 백기에게 무심코 질문 하나를 던졌다.
“평소에는 어떤 총을 좋아합니까?”
“루거 마크 IV.”
하지만 진옥곤은 백기의 대답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질문을 던진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기묘한 광경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02
“평소에는 어떤 총을 좋아해?”
그 기묘한 광경 속에서 장은국도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것 같았다. 당시 갓 만난 새로운 동료의 질문에 그는 웃으며 총기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어떤 총이든 상관없다고, 자신은 무엇으로든 100미터 밖에 있는 적의 가슴을 정확하게 맞힐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훗날 그는 그 말을 실제로 증명해 냈다. 장은국이 엄호 사격을 펼치는 동안 그는 은폐된 장소에서 길게 뻗은 조준경 너머로 적을 겨누었다.
그렇게 수많은 범죄의 온상을 무너뜨렸다. 두 사람은 마치 가장 가까운 전우처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것 같았다.
그러다 마침내…… 그 흑백사진이 자신의 눈앞에 걸리게 되었다.
……아니야!
마치 한밤중에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진옥곤은 섬뜩한 충격을 받았다. 장은국은 옆 분대의 분대장이 아니었던가?
그는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지난번 전우 모임에도 참석했고, 두 사람은 멀리서 서로 얼굴을 본 적도 있었다.
오랜 군 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은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단편적인 장면들에 담긴 감정은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 탓에 진옥곤은 지금까지도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환하게 빛나는 백열등이 눈을 조금 따갑게 했다. 진옥곤은 속으로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때 백기와 그녀가 선택한 총기가 사격장으로 운반되어 왔다. 진옥곤은 일단 마음속의 의문을 억누르고 조금 전의 화제를 이어 갔다.
“루거 마크 IV라…… 실전에서 사용하기에는 확실히 좋은 총이죠. 다만 저희 사격장에서는 소지 허가를 받을 수 없는 총기입니다.”
“그렇겠죠. 원래 총기 관리는 엄격하니까요.” 백기는 이해한다는 듯 대답했다.
진옥곤은 자신의 직무에 따라 그녀에게 총기 소지와 관련된 규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백기도 때때로 설명을 덧붙였다.
이후 백기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에게 총을 잡는 방법과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의 자세와 조작 방법이 충분히 정확해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직접 쏴 보지 않겠습니까?” 진옥곤이 턱짓으로 과녁을 가리켰다.
“아뇨.” 백기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사거리가 좀 더 긴 총을 써 보고 싶습니다.”
“티카 T3x는 어떻습니까? 저희 사격장의 특색 있는 총기인데, 한번 사용해 보시겠어요?”
백기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티카 T3x는 핀란드에서 제작한 전술용 총기로, 상업용 실탄 사격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총기 중에서도 손맛이 가장 뛰어난 축에 속했다.
총기가 운반되어 오자 백기는 그것을 건네받아 들어 올렸다.
장전. 발사.
표정은 어딘가 대수롭지 않아 보였지만, 과녁의 정중앙에는 선명한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열 발을 모두 발사하고 나자 모든 탄환이 정확히 과녁의 중심에 명중해 있었다.
진옥곤은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백기의 시선은 조준경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의 사격은 대부분 손에 익은 감각과 직감에 의존하고 있었다. 마치 과거의 자신처럼. 조준하는 습관이 몸에 완전히 배어 있는 사람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이었다. 수천, 수만 번의 훈련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저렇게 여유롭게 사격할 수 없었다.
“역시 백기 대장답군요. 장 형님이 당신 실력이 저를 따라잡을 정도라고 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 순간, 진옥곤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백기 역시 총을 내려놓고 그를 깊이 응시했다.
그 순간 진옥곤은 말문이 막혔다. 백기의 눈에 어린 의아함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이 친숙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 같은 기억의 단편들 속에서 자신이 보았던 장면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달빛이 흐릿하게 비치던 어느 밤. 그는 장은국과 함께 오프로드 차량 옆에 앉아 많은 술을 마셨다.
그러다 두 사람의 대화에 백기의 이야기가 등장했다.
장은국은 손을 내저으며 총을 겨누는 시늉을 했다.
“그 녀석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군. 바렛 M82A1을 들고는 탕! 탕! 두 발을 쐈지!”
“적의 차량 안에 있던 운전수와 저격수를 정확하게 맞혔어. 덕분에 그때 작전이 그렇게 순조롭게 끝난 거야.”
“제법이군. 듣고 보니 거의 내 실력을 따라잡은 것 같은데?”
장은국의 눈매에는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거봐, 내가 지휘하는 병사가 얼마나 뛰어난지!
달빛이 작은 술잔 속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머리 위의 차가운 백열등으로 변해 있었다.
진옥곤은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흰빛이 감도는 사격장이 펼쳐져 있었다. 백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망설이던 진옥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조금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백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진옥곤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전역증을 꺼내 백기에게 건넸다.
“제 이름은 진옥곤입니다. 503 특수부대 제42군 제8사단 제16연대에서 저격수로 복무했습니다.”
“혹시 4년 전, 코드명 ‘팔콘’이라는 총기·폭발물 범죄 소탕 작전에 참가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때 작전을 지휘했던 사람의 이름은 장은국입니다.”
03
백기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진옥곤은 멋쩍게 웃었다.
“이렇게 여쭤보는 게 좀 뜬금없기는 합니다만, 그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요즘 들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조차 알 수 없는 장면들이 자꾸 머릿속에 스쳐 지나갑니다.”
진옥곤은 턱을 긁적였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따져 보면 절대 일어났을 리 없는 일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렇다고 없었던 일이라고 하기에는 그 장면들이 주는 느낌이 너무나 생생하고요.”
“최근 인터넷에서도 자신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람들이 꽤 많더군요.”
백기는 신중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 일과 당시의 작전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최근 제가 자주 보는 장면 속에서 저와 장은국은 오랫동안 함께한 전우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느 사고로 순직했죠.”
“하지만 제게는 그 일에 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들 속에서는 당신도 장은국과 아는 사이인 것 같더군요. 그래서 혹시 무언가 아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물론 본인에게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무턱대고 찾아가는 건 너무 성급한 행동인 것 같아서요.”
진옥곤은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자신 특유의 느긋하고 망설임 많은 성격이 또다시 드러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백기의 시선이 잠시 멈춘 듯했다. 하지만 백기는 결국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총을 그에게 건넸다.
“사실인지 아닌지 고민하기보다는 지금 눈앞의 일에 집중하는 게 낫습니다.”
“정말 마음에 걸린다면 직접 확인해 보세요. 사실이 답을 알려 줄 겁니다.”
백열등 아래에서 백기의 눈동자는 조금 어둡게 보였다. 빛과 그림자가 드리운 그의 수려한 얼굴은 마치 조각상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진옥곤은 단단하고 차가운 총자루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그러다 서서히 총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다시금 익숙한 의욕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진옥곤은 옆 분대에 있던 친분 있는 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바탕 안부를 주고받은 뒤, 그는 적당히 화제를 돌려 장은국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분대장은 요즘 어떻게 지내나?”
“장은국 말이야? 그 사람은 여전하지. 며칠에 한 번씩 학생들한테 국방 교육이나 해 주면서 아주 편하게 잘 지내고 있어.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은 왜 물어?”
전우의 대답에 진옥곤은 마음이 놓였다. 그는 곁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고 수면에 떠 있는 찻잎 부스러기를 후후 불었다.
“말도 마. 요즘은 무슨 이유인지 자꾸만 몇몇 사람이 생각나더라고. 그 사람도 그중 하나고.”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루 형님도 나한테 비슷한 말을 하더군. 어찌나 신기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던지.”
“이렇게 하자고. 일요일에 시간 한번 잡아서 옛 전우들 다 불러 모을게. 혼자 생각만 하는 것보다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겠어?”
“하하! 그거 좋지! 자네들도 못 본 지 한참 됐으니 그때 만나서 실컷 옛날이야기나 하자고.”
전화를 끊은 진옥곤은 쓴웃음을 지으며 차를 한 잔 더 따랐다. 장은국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장면들이 그저 착각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근거 없는 걱정도 이제 그만해도 될 것이다. 다들 시간이 날 때 전우들에게 부탁해 식사 자리나 한번 마련하면 된다.
예전에는 서로 잘 몰랐더라도 앞으로 알아 가면 되는 일 아닌가.
진옥곤은 아침 바람을 맞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활기찬 발걸음으로 직장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사격장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04
청소 직원이 부서진 장비를 수레 가득 싣고 와서 물었다. “진 씨, 이건 다 뭐예요? 아직 필요한 물건인가요?”
진옥곤은 쪼그려 앉아 장비의 잔해를 손으로 뒤적였다. 그 안에는 탄두 몇 개가 섞여 있었다. 누군가 고의로 파손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 장비는 대체……. 그는 부서진 외장 케이스 한쪽을 뜯어 보았다. 안쪽에는 안테나 몇 개가 숨겨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어딘가 눈에 익은 전자 부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옥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의 작전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장비는 특정 구역으로 전자기파가 침투하는 것을 억제하는 차폐 장치와 비슷했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바로는, 이런 장비는 Evol을 차단하는 데 사용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사격장 안에 Evol 차단 장치를 설치해 놓았다니!
만약 무슨 사고가 생겨 누군가에게 파괴되지 않았다면, 그는 끝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일단 창고에 넣어 둬요. 절대 버리지 말고!” 그는 그렇게 한마디를 남기고 서둘러 총기 보관실로 달려갔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지문 인식을 해제하고, 열쇠를 꺼내 자물쇠 구멍에 끼워 돌렸다.
일련의 과정을 마치고 나니 숨마저 조금 가빠져 있었다.
사냥총, 산탄총, 저격총…….그는 총기 목록과 대조하며 한 자루씩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총기와 탄약, 부속품 모두 빠짐없이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장비를 설치한 사람의 목적은 실탄 총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애초에 장비를 설치한 사람은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이런 짓을 벌인 걸까?
진옥곤은 비록 사격장 교관일 뿐이었지만, 매일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누군가 그의 눈을 피해 사격장 안에 이토록 커다란 장비를 들여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가 아니라면…….
그의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했다.
얼마 전, 사격장에서는 한 차례 내부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었고, 그중 어떤 인부가 전자 장비 몇 가지를 들여왔던 것도 같았다. 다만 그때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의 체격은 확실히 평범한 공사 인부 같지 않았다.
정말이지 너무 부주의했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큰 허점을 내주고 말다니!
진옥곤은 곧바로 사격장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경찰에도 신고했다.
그렇게 한바탕 일을 처리하고 나자, 누군가 사격장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곧장 입구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사격장에 사정이 생겨서 당분간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진옥곤은 찾아온 사람이 백기라는 것을 알아보고 미안한 기색으로 손을 내저었다.
“알고 있습니다.” 백기는 곧장 그에게 다가왔다. 표정이 진지했다.
“어젯밤 저 때문에 이곳에서 사고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사격장에도 피해를 끼쳤고요. 당분간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서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단도직입적인 설명에 진옥곤은 마음을 놓았다. 백기의 신분과 직업을 생각하면 여러 복잡한 일에 얽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캐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의하라고 일러 두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진옥곤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장비를 설치한 사람이라면 조금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얼마 전에 사격장 내부 공사를 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니 공사 인부들 가운데 체격이나 분위기로 봐서 뭔가 훈련을 받은 듯한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그는 당시 상황을 백기에게 설명하며 함께 소파에 앉아 수사과 경찰관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비슷한 군 생활을 경험한 덕분에 두 사람에게는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다. 한번 대화를 시작하자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진옥곤은 백기가 총기 이야기를 할 때면 의외로 말이 많아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MCX도 분명 괜찮은 총이죠. 다만 모래바람이 부는 환경에서는 고장이 나기 쉽고, 총열 길이가 같은 AR 계열보다 무게도 많이 나가서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진옥곤은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백기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자네가 아직 학교에 다닐 때부터 소문은 들었어. 사격 수업에서는 언제나 1등이었다지? 그때 난 이런 생각을 했지. 재능은 꽤 있는 녀석이지만, 진짜 실력은 실전에서 증명해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 자네가 쌓아 온 실적과 공적을 보니…… 이제는 충분히 혼자서도 제 몫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증명됐군.”
칭찬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백기는 듣자마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걸 증명하려고 쌓은 실적은 아닙니다.”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진옥곤은 화를 내기는커녕 옅게 미소 지었다. “이 녀석아, 내가 자네더러 혼자 싸우는 영웅이 되라는 줄 알아?”
“혼자서도 제 몫을 한다는 건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야. 정말로 혼자 남게 되었을 때도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뜻이지.”
백기는 진옥곤을 바라보며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흙처럼 묵직하면서도 단단하게 쌓여 온 세월이 그들을 지금의 모습으로 빚어 놓았다. 그 안에는 고통과 피땀, 그리고 말없이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주었던 수많은 얼굴이 스며 있었다.
“백 대장, 자네가 나라면, 그 정체 모를 장면들 때문에 장 형님을 만나러 가겠나?”
사실 진옥곤은 그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설령 그 장면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 해도, 전우를 잃어 본 군인이 자신 하나뿐일 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치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 백기가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조금 오므리고 어깨를 굳히는 모습을 애써 못 본 척했다.
“미안하네.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황급히 건네려던 사과를 가로막았다. 백기는 아득한 그리움이 어린 눈길을 먼 곳으로 향했다. 어쩌면 그 시선은 먼 곳보다도 더 멀리 있는 어딘가에 닿으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05
그로부터 며칠 뒤, 전우들의 모임은 금세 성사되었다. 장소는 장은국의 집으로 정해졌다.
문을 두드리자 장은국과 전우 몇 명이 마중을 나왔다. 낯익은 얼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던 진옥곤의 마음에 오랜만에 편안함이 찾아왔다.
“어서 오세요! 들어오세요! 명사수라는 명성은 진작부터 들었습니다. 차를 좋아하신다고 해서 특별히 좀 준비해 뒀으니 한번 드셔 보세요.”
장은국은 웃으며 진옥곤을 소파로 안내하고 차를 한 주전자 우려냈다.
“야, 장 형님!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야? 나한테는 저렇게 정성 들여 준비해 준 적 없잖아?”
“진 동지는 우리 집에 처음 오셨잖아. 제대로 대접해야지! 누구나 너처럼 맨날 우리 집에 와서 술이나 얻어 마시는 줄 알아?” 장은국도 웃으며 맞받아쳤다.
전우 한 명이 독한 백주 두 병을 꺼내 왔다. 몇 사람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자 대화에서도 점차 어색함이 사라졌다.
장은국은 술잔을 가득 채워 진옥곤의 잔에 부딪쳤다.
“진 동지, 사실 오늘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놀랐습니다. 기쁘기도 하고요.”
술기운이 적당히 오른 진옥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왜요?”
“요 며칠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우리 둘이 아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전우였던 것 같고, 제가 소총으로 엄호하는 사이 진 동지가 저격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아내는 제가 군 생활을 너무 그리워해서 착각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생각해 보면 그때 반 배정 시험에서 제가 배탈만 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같은 반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장은국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 생각엔 이것도 다 인연입니다. 하늘이 우리가 이제야 친구가 되도록 정해 놓은 거죠.”
진옥곤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중년이 되고 보니 전우 몇 명과 함께 술 한잔하고 이야기나 나눌 수 있으면, 더 바랄 것도 없더라고요.”
“웃기고 있네! 말은 자네가 제일 많이…… 술은 제일 적게 마시면서!” 전우 한 명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밀었다.
진옥곤도 웃으며 몇 마디 받아친 뒤 술잔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자, 한잔합시다! 긴말은 안 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전부 이 술잔에 담았으니까요.”
“건배!”
술을 한 잔 비운 진옥곤은 생각했다. 그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장면들이 떠오른 것도 어쩌면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덕분에 오랜 전우들과 다시 모일 수 있었고, 장은국이라는 친구도 새로 사귀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진짜였고, 서로에게 느끼는 정 또한 진짜였다. 그리고 그 진실한 시간은 언젠가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낼 것이다.
밤이 점차 깊어졌다. 장은국의 집을 나설 때, 진옥곤은 다음에 언제 다시 만날지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밤바람을 맞으며 뒷짐을 진 채, 좁은 길을 따라 비틀비틀 걸었다.
그러다 문득 먼 곳을 바라보던 백기의 옆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손에 쥐고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법이다.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