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줄기 바람은 봄을 향해 불어갈 것이다.
01
오후 5시의 시내 중심가 슈퍼마켓도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인 백기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진열대 사이에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주변의 판매원들은 여전히 오늘의 할인 행사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백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멀지 않은 곳에 놓인 물티슈를 바라보았다. 불과 두 사람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앞으로 반 미터만 더 나아가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는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려 했지만, 지나치게 붐비는 인파 앞에서는 특파팀 지휘관조차 잠시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일찍 올걸.”
경험이 부족하면 이렇게 되는 법이었다. 백기도 퇴근 시간대 슈퍼마켓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리는지 직접 경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코앞에 있는 물티슈와 넉넉하지 않은 시간을 생각하니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사람들 사이의 비좁은 틈을 향해 단호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작은 승리 하나가 탄생했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물건을 사들이는 분위기에 휩쓸린 탓일까. 계산대에 도착하고 나서야 백기는 장바구니에 계획에 없던 물건이 꽤 많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많이 샀는데, 냉장고에 자리가 남아 있을까?
백기는 무심코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로 물어보려다가 오늘 이미 상당히 많은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직 몸이 불편한 데는 없어?”
“오늘은 쉬는 날이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마트에 좀 다녀올게.”
……
오늘은 일이 너무 바빴던 모양인지, 그녀의 답장은 대부분 짧았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오늘 너무 바빠서——”
“다녀와요~ 난 아직 야근 중이에요.”
……
백기는 그녀가 메시지를 보낼 때 어떤 모습이었을지 거의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조금 지치고 피곤하면서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있을 모습.
하지만 백기의 머릿속에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균열 앞에서 그녀의 모습이 희미해지며 서서히 사라져 가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심장을 살짝 움켜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속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는 주변의 떠들썩한 인파 속으로 소리 없이 묻혀 갔다.
“손님, 총 231위안입니다.”
계산원의 목소리가 백기의 생각을 끊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그녀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 지금은 그런 일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
양손에 커다란 봉투 두 개를 든 백기가 슈퍼마켓 밖으로 나왔다. 공기 중에 감도는 서늘한 기운이 따스한 빛을 감싸고 있었다.
날씨가 벌써 추워지기 시작했구나.
백기가 집에 돌아와 물건을 정리했을 무렵에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가 추천해 준 ‘냉장고 정리 요령’을 따라 해 보았다.
하지만 당근과 토마토를 넣을 공간이 도저히 없어 상자에 담긴 음료들 사이의 빈틈마다 끼워 넣어야 했을 때, 백기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전부 집어넣기는 했다.
냄비 속에는 이미 미지근하게 식은 물에 우유 몇 캔이 담겨 있었고, 전자레인지에서는 점차 군고구마 향이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준비는 모두 끝났다. 백기는 그녀가 퇴근했는지 확인하려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바로 그때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으으—— 오늘 행사장에서 하루 종일 바빠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백 경관님, 바로 먹을 수 있는 맛있는 거 없어요?”
백기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당연히 있지. 지금 바로 데리러 갈게.”
어쩌면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짊어져야 할 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것들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녀와 함께, 오직 두 사람만의 평온한 일상을 누릴 시간이었다.
02
“고공 임무에 투입할 인원을 좀 더 늘려 줘. 적합한 사람이 있는지 찾아봐.”
“알겠습니다.”
루일은 콧등에 걸친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빠르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시선 한쪽은 줄곧 백기를 향해 있었다.
“백기 대장님,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인원을 차출하려면 조율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 고공 임무의 부담이 많이 커졌습니까?”
“가능한 한 빨리 실전 작전에 참여시키고 싶어서 그래.”
“특별히 맡길 임무라도 있습니까?”
“아니. 앞으로 고공 임무는 그들이 독자적으로 수행하게 될 거야.”
루일의 손끝이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작업을 이어 갔다.
안경 렌즈에 비친 데이터가 빠르게 흘러갔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잠시 방 안의 침묵을 덮었다.
백기는 자신이 방금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다.
세계 에너지에 관한 NW 측의 연구는 이미 초보적인 결론에 도달한 상태였다. 에너지 팽창의 근원을 끝내 밝혀내지 못한 탓에, 샤오위에는 체계적인 계산을 거친 뒤 최종 해결 방안을 거의 통보하듯 백기에게 전달했다.
소멸의 힘으로 엔트로피 증가에 맞서는 것. 그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 없었다. 백기 자신이 소멸 에너지를 움직이는 매개체가 되어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이는 그가 현재 지니고 있는 Evol 에너지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약해진다는 뜻이었다.
바람은 점차 그의 몸에서 사라질 것이다.
“백기 대장님, 명단을 확인해 주십시오.”
루일이 몸을 옆으로 비켜 화면 앞에 자리를 내주었다. 백기는 고개를 숙여 명단에 적힌 이름들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거의 반사적으로 문제점이 눈에 들어왔다.
“연석은 Evol 능력은 뛰어나지만 성격이 너무 저돌적이야.”
“장립은 경찰학교를 막 졸업해서 경험이 부족하고.”
백기는 명단에 남아 있는 다른 몇 명의 단점도 하나씩 짚어 냈다. 루일이 제시한 명단이 실제로 가장 적합한 인선이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자꾸만 가슴속을 맴돌았다.
작은 불씨 하나만 닿아도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 나갈 것만 같았다.
“우선 두 명씩 조를 짜서 활동하게 해 보자.” 백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의견을 내놓았다. “이 사람들의 최근 실전 평가 기록을 불러와서 서로 잘 맞는지 확인해 봐.”
루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금 전의 명단을 빠르게 정리한 뒤 다시 백기 앞에 띄웠다.
줄곧 굳어 있던 백기의 얼굴이 마침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루일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인원이 부족하다면 계속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정보 데이터베이스는 확실히 강력하니까요. 알고리즘으로 적합한 경력을 갖춘 사람을 얼마든지 선별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경력은 어디까지나 정보일 뿐, 그 사람 자체를 대변하지는 못합니다.”
백기는 루일의 예리함이라면 자신의 뜻을 진작 알아차렸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에도 조금은 여유가 돌아왔다.
“네 말이 맞아. 특파팀의 대원들은 누구 하나 대신할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바로 그렇기에 백기는 자신만이 짊어질 수 있는 책임을 한 번도 마다한 적이 없었다.
사무실을 나서는 백기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훨씬 편안해져 있었다. 그의 뒤에는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이제 그가 마주해야 할 문제는 단 하나뿐이었다.
백기는 휴대전화를 꺼내 너무나도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가 무슨 일이냐는 듯 의아하게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백기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별일 없어. 그냥…… 일이 끝났는데, 네가 많이 보고 싶어서.”
03
연모시 상업 중심가의 한 건물 옥상에는 특파팀 대원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헬리콥터의 회전 날개가 만들어 내는 거대한 굉음이 건물 상공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은 옥상 한쪽 구석에 집중되어 있었다.
범인의 미세하게 떨리는 손 아래에는 Evol로 응집시킨 날카로운 나무 가시가 있었다. 그 끝은 인질로 붙잡힌 어린 남자아이의 목에 단단히 겨누어져 있었다.
“보고합니다. 1층에 있던 용의자들은 모두 제압했습니다.”
“보고합니다. 다른 층에도 숨어 있는 용의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소방팀에 건물 아래로 에어매트를 준비하라고 전달해. 다른 대원들도 저층에서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백기의 시선은 줄곧 정면을 향해 있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 정도 거리에서 범인을 제압하는 데 조금의 의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요구한 사항에 대해서는 특파팀이 돈을 갚지 않은 기업 측과 협의하겠습니다.”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인질을 풀어 주는 겁니다.”
백기는 말로 상대의 주의를 분산시키려 했다. 그러는 사이 발걸음은 조금 전보다 범인에게 더 가까워져 있었다.
“난 그런 거 상관없어! 돈을 떼먹은 그놈들이야말로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난 지금 당장 그놈들한테 복수할 거야!”
범인은 거의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그의 손이 떨릴수록 나무 가시는 어린아이의 연약한 목에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신경이 순식간에 곤두섰다. 대원 몇 명은 이미 총구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끝내 백기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만 더.
범인의 주의는 총을 들 준비를 하는 대원들의 움직임에 완전히 쏠려 있었다. 극도로 긴장한 상대의 상태는 오히려 백기가 사각지대로 들어설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곳은 옥상 가장자리, 조금만 잘못 디디면 추락할 수 있는 위치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기는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기다렸다. 상대를 체포할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을. 그리고 먼 곳에서 불어올 한 줄기 바람을.
백기의 옷자락이 가볍게 들리는 순간, 손끝에서 다시금 익숙한 힘이 느껴지는 듯했다. 멈춰 있던 바람이 다시 백기의 곁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바람은 조금씩 범인의 손가락을 휘감고 있었다.
높은 곳에 올라설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어오는 법이었다.
“작전 개시.”
바람의 흐름이 범인을 완전히 제압한 순간, 백기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상공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대원들이 순식간에 로프를 타고 내려와 범인의 곁에 착지했다. 그들은 범인이 도망칠 수 있는 경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너희들 움직이지 마!!”
도망칠 가망이 없어진 범인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의 팔은 이미 백기에 의해 공중에서 꼼짝할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었다.
곁에 있던 대원들이 어린 남자아이를 데리고 물러났다. 백기가 막 몸을 돌리려던 순간, 등 뒤에서 거칠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더없이 날카로운 가시 하나였다. 가시는 멀리 떨어진 남자아이를 향해 곧장 날아가고 있었다.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백기는 한 걸음에 남자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무 가시가 그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고, 이미 옥상 가장자리에 서 있던 백기의 몸은 순식간에 옆으로 기울어졌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사방에서 몰아쳤다. 백기의 발밑에서 딛고 설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무중력감이 온몸을 감쌌다.
백기는 본능적으로 공중에서 자세를 바꾸었다. 하지만 뻗어 낸 손끝은 번번이 건물 처마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못했다.
무심코 아래를 향한 백기의 시선에 거리가 들어왔다. 지금까지 수없이 내려다보았던 바로 그 거리였다.
하늘이 이렇게나 높았구나.
시간이 다시금 7년 전의 자신과 겹쳐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광경은 바람에 흩날리며 흐릿한 영상으로 변해 갔다.
“백기 대장님, 꽉 잡으세요!”
곁에 있던 대원이 그의 몸을 붙잡아 다시 옥상으로 끌어올렸다. 그제야 백기는 지금껏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가 높이라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04
“백기 대장님, 현장 정리는 모두 끝났습니다. 조금 전 구조한 남자아이도 부모님께 인계했습니다.”
“알았어. 전원 복귀해.”
백기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그가 어떤 심정인지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루일은 떠나기 전, 창가에 서 있는 백기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대원들을 이끌고 멀지 않은 계단으로 향했을 뿐이었다.
그곳에 서 있는 백기의 모습은 여전히 자신감 있고 꼿꼿했다.
백기 대장님은 괜찮아. 그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야.
루일이 떠나며 떠올린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뒤편에서 들려오던 드문드문한 발소리마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백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전 느꼈던 감정이 그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도전 욕구’를 자극하고 있었다.
백기는 발아래 펼쳐진 공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건물의 층과 층 사이에는 돌출되거나 움푹 들어간 구조물이 곳곳에 있었고, 발을 디딜 만한 거대한 광고판도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바람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범인을 데리고 안전한 곳에 몸을 지탱할 자신이 있었다.
바람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자신은 특파팀 지휘관이라는 자리에 걸맞은 책임을 감당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 자리를 지탱하는 것은 단순히 능력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의 기대도 함께 담겨 있었으니까.
백기는 팔의 관절을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이 조금 전 자신이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앞으로는 고공 등반도 일상적인 훈련에 포함해야겠군. 그는 눈을 내리깔고 손바닥 위에서 일렁이는 작은 소용돌이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범인의 습격으로 인해 쇼핑몰 내부의 엘리베이터는 거의 모두 운행을 중단한 상태였다. 현재 운행 중인 것은 꼭대기 층까지 곧바로 연결되는 전망용 엘리베이터 한 대뿐이었다.
백기는 1층 버튼을 눌렀다. 찰칵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눈앞의 풍경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띠링띠링— 아무런 예고 없이 이어피스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신호를 확인해 보니 특파팀 본부에서 걸려 온 연락이었다.
“백기 대장님, 방금 복귀하던 대원들한테 들었는데 하마터면 건물에서 떨어질 뻔했다면서요……? 괜찮으세요? 지원 인력을 좀 더 보내 드릴까요?”
“괜찮아. 작전은 이미 끝났어.”
이어피스 너머에서 당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이번 작전과 관련해서 민원이 몇 건 들어왔는데, 고진이 먼저 처리하러 갔어요.”
“아, 그리고 루일은 돌아오자마자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이번 작전 보고서부터 작성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이송된 범인들은 제가 심문할게요. 대장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확실하게 끝내 놓겠습니다.”
당조의 쉴 새 없는 말소리가 백기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시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부터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감정을 흩어 주는 듯했다.
“평소에는 이런 일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더니, 오늘은 다들 왜 그래?”
“그야 당연하죠. 대장님이 내일부터 마음 편하게 휴가를 보내시게 하려는 거잖아요.”
별생각 없이 내뱉은 듯한 말이었지만, 백기의 가슴속에는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실제로 긴 휴가를 신청해 둔 상태였다. 그동안 특파팀과 NW 양쪽의 일을 동시에 처리하느라 늘 그녀와 함께할 시간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마침내 여유가 생겼다.
백기의 얼굴에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맞다. 대장님! 두 분은 휴가 때 어디로 갈지 정하셨어요? 제가 요즘 괜찮은 곳 몇 군데를 발견했거든요. 이따 보내 드릴게요.”
“좋아. 그럼 마침 잘됐네. 내가 휴가를 떠나 있는 동안 처리해야 할 어려운 사건들도 네가 전부 정리해 둬.”
“대장님, 저 지금 맡고 있는 사건도 몇 개나 된다고요!”
“그래? 그럼 시간을 잘 배분해 봐.”
당조의 절규가 들려오는 가운데, 백기는 미소를 머금은 채 이어피스의 통신을 종료했다. 그는 다시 멀지 않은 곳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해 있었다.
바람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힘일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는 이미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어젯밤 작성하다 만 여행 일정표를 열었다. 그곳에는 이번 장기 휴가를 위한 여행 계획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맛집 탐방부터 교통편까지, 빠뜨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와 함께, 이 세계와 더불어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백기가 처음부터 그려 왔던 미래였다.
05
“대상 적합도 100%, 에너지 안정도 89%, 지속 출력은 전체 에너지의 71%입니다.”
백기가 NW 연구실에서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곁에서 데이터를 검토하던 연구원이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연구원은 먼저 백기에게 연결된 장비를 조심스럽게 해제한 뒤, 약제를 그의 가슴에 주입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통증에 백기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살짝 굽혔다. 그와 함께 몸의 감각도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검사 결과는?”
“모든 기본 지표는 정상 범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소멸 에너지의 안정도는 지난달보다 다시 낮아졌지만, 감소 폭은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이 추세라면 에너지 붕괴 상태를 최대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지?”
“……급격한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모델상으로는 약 50년 정도가 이상적인 예상치입니다.”
50년인가. 누군가 자신의 삶에 남은 시간을 판정해 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백기에게도 묘한 기분이었다.
그는 연구원을 따라 길게 이어진 통로로 들어섰다. 실험에서 발생한 방사 에너지를 제거하기 위해 이 통로는 충분히 길게 설계되어 있었다.
침묵 속에서 이어지는 발걸음이 금속 바닥에 닿을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몇 분을 꼬박 걸은 뒤에야 백기는 통로 끝에 있는 방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비가시광선이 표면을 살균해 모든 실험이 무균 환경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New Weapon의 새로운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백기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연구원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후보자는 확실히 많습니다만, 백기 지휘관님의 데이터에 필적하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습니다.”
“실험상 예상으로는 앞으로 30년 정도가 지나야 적합한 후보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NW의 신중한 성격을 생각하면 이 계획에서 어떤 실수도 발생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터였다.
방 안에 초록색 불이 들어오자 굳게 닫혀 있던 두꺼운 금속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너머에는 개인 물품을 갈아 끼우고 되찾을 수 있는 전환실이 있었다.
이곳을 나가면 오늘의 검사는 정식으로 끝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피험자인 백기는 일상생활에 관한 몇 가지 정기 질문에 답해야 했다. 검사 절차의 실시간성을 확보하기 위해 질문은 매번 백기가 방에 들어온 뒤 컴퓨터에서 무작위로 제시되었다. 연구원은 답변을 기록하는 역할만 맡았다. 눈앞의 전자 화면이 움직이더니 질문이 나타났다.
“지휘관님께서 가장 최근에 드신 음식은 무엇입니까?”
“어젯밤 12시에 먹은 마라치킨.”
백기는 즉시 대답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던 걸까. 옆에 있던 연구원의 미간이 어색하게 찌푸려졌다.
“그 이전 식사는요?”
“……향긋한 타로 케이크 티? 응, 아마 그런 이름이었을 거야.”
연구원은 순간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아, 그리고 샤오위에 지휘관님께서 전에 시간 나실 때 사무실에 한번 들르라고 하셨습니다.”
“시간 없어.”
백기는 연구원에게서 보고서를 건네받아 마지막 장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샤오위에 지휘관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데이터가 다시 떨어지면 반드시 찾아오시라고요.”
“그럼 직접 나를 찾아오라고 해.”
연구원의 표정에 곤란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하지만 결국 옆에 있는 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백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NW 연구실 밖으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백기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백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찬란한 햇살 속에서 그 모습은 두 사람 사이에 소리 없는 다리를 놓아 주는 것만 같았다.
“데리러 왔어요!”
목소리가 닿지 않는 거리였지만, 백기는 그녀의 입 모양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데리러 올 필요 없다고 말해 두었는데. 하지만 백기가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기는 그 말에 담긴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조금씩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바람은 줄곧 그의 뒤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내일이라면, 분명 앞으로도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