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널 잊지 않았으니, 너 자신도 잊지 마.
01
“루일 형, 들려요? 지금 팀원들이 전부 숲속에 뿔뿔이 흩어졌어요!”
“벌써 체력이 바닥난 사람도 몇 명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전멸할 것 같은데요.”
“맞아요, 루일 형. 몬스터 체력도 거의 다 깎은 것 같은데, 이제 반격하는 게 어떨까요?”
“서두르지 마. 우선 부상자들을 데리고 숨어 있어.”
채팅 채널에서 들려오는 팀원들의 다급한 외침을 들으며 루일은 생각했다. 임시로 결성된 이 던전 공략팀의 대장으로서,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모두가 침착함을 되찾게 하는 것이었다.
“저 녀석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크고 작은 임무를 수없이 경험해 온 루일은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작부터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마지막 한 걸음에서 무너진다는 사실을.
루일은 손끝으로 눈앞의 나뭇잎을 살짝 젖혔다. 지금은 작은 소리 하나만 내도 상대에게 위치를 들킬 위험이 있었다.
이번에 그들이 상대하는 적은 《오디세이》에 새로 추가된 던전의 최종 BOSS, 인간 얼굴을 한 박쥐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날개막이 루일의 머리 위에서 강력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맹렬한 포효는 감히 자신에게 도전하는 나약한 인간들을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는 듯했다.
루일은 하늘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도 이미 손가락으로 스킬창의 첫 번째 칸을 누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Evol과 무척 비슷한 데이터 분석 스킬이 등록되어 있었다.
스킬을 발동한 순간, 아무런 규칙도 없어 보이던 비행 궤적이 그의 눈에는 무수한 데이터로 이루어진 경로로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일의 머릿속에는 정확한 이동 경로가 그려졌다.
그가 지도를 열자 예상했던 이동 경로 위에 팀원 몇 명의 위치 표시가 나타났다. 별자리처럼 흩어진 표시들을 바라보며 루일은 머릿속으로 명확한 공격 경로를 연결했다. 그는 팀 채팅 채널에 각자가 공격해야 할 시점을 빠르게 전송한 뒤 음성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모두 지정한 시간에 공격해. 오래 싸울 필요 없어. 공격한 다음 바로 숨으면 몬스터가 우리 위치를 특정하지 못할 거야.”
“루일 형 말대로 할게요.”
잠시 후, 밤하늘의 불꽃놀이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공격들이 잇달아 터져 나오며 그들의 승리를 알렸다.
“고마워요, 루일 형!” 루일의 주변에서 팀원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랑 고정 파티 할 생각 없어요? 매주 길드 공헌도 꽉 채우는 건 보장해 드릴게요!”
“그건 사양할게.” 비록 우연히 만난 팀원들이었지만 루일은 모두의 친구 신청을 수락했다. “대신 다음에 던전 돌 때 사람이 부족하면 불러.”
루일은 헬멧을 벗자마자 오래전에 타 놓은 인스턴트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쓰긴 했지만 잠을 깨우기에는 딱 좋았다. 그는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거의 습관적으로 자신의 Evol을 펼쳤다. 복잡하고 방대한 데이터가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루일은 그 안에서 지금 이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정보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 무렵 공원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실종됐다. 주인은 수만 위안의 현상금까지 내걸었지만…… 사실 강아지는 줄곧 어린이 놀이 구역에 숨어 있었다. 어떤 학부모가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며 한바탕 불평하기까지 했다.
음, 공원에서 또 누군가 Evol로 물건을 훔친 모양이군. 내일 임무 지시서를 하나 더 내려보내야겠어.
정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언제나 누군가는 알고, 누군가는 모르기 마련이었다.
루일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소식들을 훑었다. 그러던 중 영상 하나가 그의 ‘위험 감지 필터’에 걸렸다.
AI 음성으로 제작된 영상이었다. 귀에 거슬릴 만큼 날카로운 목소리가 《오디세이》 안에서 벌어진 한 싸움을 과장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싸움의 결과, 참가자 중 한 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었다.
“《오디세이》를 이용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그 말에 루일은 바짝 긴장했다. 그는 영상 속 아이디를 단서로 즉시 해당 인물의 주소를 찾아내는 동시에 당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당조, 방금 주소 하나 보냈어. 거기 사는 사람 이름은 장대국이고, 닉네임은 검해호정이야.”
루일은 방금 본 영상의 내용을 떠올렸다. 인터넷을 통해 정말 사람을 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마디 더 당부했다.
“서둘러. 정보가 사실이라면 그 사람은 이미 살해당했을 수도 있어.”
02
일방향 유리벽은 취조실을 서로 다른 두 세계로 갈라놓고 있었다. 취조실에 들어오는 범죄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사람은 긴장했고, 어떤 사람은 오만하게 굴었다.
하지만 지금 취조를 받고 있는 함녕을 바라보는 루일의 미간은 점점 더 깊이 찌푸려졌다. 함녕의 얼굴에서는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고인 물처럼 잔잔한 평온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루일은 어느새 조사 기록지에 질문을 몇 페이지나 적어 놓은 뒤였다.
언제 의식을 되찾았는지부터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까지, 함녕은 모든 과정을 명확하게 설명했다. 시간대도 전부 일치했다.
그때 짜증이 묻어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루일이 돌아보자 풀이 죽은 당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렇게 풀이 죽었어? 취조는 순조로웠잖아?” 루일은 조사 기록을 첫 페이지로 넘겨 빼곡하게 적힌 내용을 가리켰다.
“너무 순조로워서 문제라는 거지.” 드디어 하소연할 상대를 찾은 듯 당조가 참지 못하고 말을 쏟아 냈다. “물어보면 대답하고, 또 물어보면 대답하고. 아주 로봇 같았다니까. 아니면 정보 흐름을 다루는 Evol 능력자들은 원래 다 저렇게 감정을 잘 통제하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루일은 당조에게 눈을 흘겼다.
당조는 평소 보기 드문 루일의 감정 표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의자 하나를 끌어와 루일 옆에 놓고 등받이를 앞으로 향하게 한 채 걸터앉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특파팀에 와서 취조한 사람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거든? 그런데 이렇게 이상한 녀석은 처음이야. 심지어 어린애잖아!”
“어린애가 아니라 범죄 용의자야.”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루일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도 저 애가 이상하긴 해. 이따 백기 대장님이 오시면 몇 가지 꼭 말씀드려.”
“뭘 말씀드리라는 건데?”
루일은 또다시 눈을 흘렸다. 당조는 꼭 이런 순간에 사람을 열받게 했다.
“우리 둘이 지금까지 한 취조가 전부 헛수고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하나는 백기 대장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여자아이의 발소리였다. 간단한 이야기를 나눈 뒤 루일은 방금 작성한 취조 기록을 건넸다. 하지만 심각하게 굳은 백기의 표정을 보니 그 역시 함녕에게 수수께끼 같은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모두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했다. 그때 백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없어. 취조라는 게 원래 하루 만에 끝나는 일도 아니니까.”
“함녕은 이미 우리가 붙잡았으니, 배후의 진상을 밝히는 데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아무리 까다로운 난관이 닥쳐도 백기는 언제나 가장 먼저 나서는 사람이었다. 루일이 오래전부터 그를 가장 존경했던 이유는 바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결단력이었다.
상황은 역시 예상대로 흘러갔다. 백기 대장의 취조에도 함녕의 대답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루일은 백기의 뒤를 따라 함녕을 특파팀으로 이송할 경찰차에 태우려고 했다.
그런데 함녕이 취조실을 나서는 순간, 발을 헛디딘 듯 옆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루일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넘어지려는 함녕의 몸을 붙잡았다.
이 틈을 타 도망치려는 건가?
하지만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손끝에서 강한 전기 충격 같은 감각이 전해졌다. 순간 손에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
“괜찮아?” 백기는 즉시 루일에게서 함녕의 결박된 두 손을 넘겨받았다. 루일은 그저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대장님. 요 며칠 《오디세이》 사건 조사하느라 밤을 좀 새웠어요. 돌아가서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알았어. 무리하지 마.”
루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방금 전기 충격을 느꼈던 손바닥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생각에 잠겼다.
돌아가는 길에 루일은 처음 겪어 보는 피로감을 느꼈다. 두 눈꺼풀이 말을 듣지 않고 자꾸만 내려앉았으며 머릿속은 온통 풀처럼 뒤엉켜 있었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방의 불을 끄는 것조차 귀찮았다.
그렇게 루일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꿈을 꾼 것 같았다.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인 작업대 앞에 자신이 서 있었다. 모니터에는 수많은 데이터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그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독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닌 것처럼.
더 이상 특파팀의 일원이 아닌 것처럼.
03
세상이 빙빙 도는 듯한 어지러움 끝에 루일은 의식을 되찾았다. 동시에 강렬한 구역질이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숙이고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극심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손바닥에 손톱으로 긁힌 핏자국이 몇 줄이나 나 있었다.
루일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옆에 놓인 기계에 선명하게 새겨진 ‘NW’라는 글자가 그 답을 알려 주었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그리고 소매를 걷어 올려 가로로 길게 뻗은 상처를 발견한 순간, 루일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수많은 범죄자의 몸에서 보았던 흔적이었다. 백기 대장이 Evol을 사용할 때만 남는 상처.
나는 왜 의식을 잃었던 거지? 왜 백기 대장님과 싸운 거고, 어째서 NW 시설에 있는 거야?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의문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루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텅 빈 방에는 자신의 침대와 각종 감시 장비만이 놓여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걸린 정기 검사표를 보니 곧 누군가 상태를 확인하러 올 것이 분명했다.
지금 루일에게 가장 좋은 선택은 단 하나,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다시 이불을 덮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척하기로 했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문이 열렸다. 다만 들어온 사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깨어날 수도 있다며? 그런데 왜 아직도 시체처럼 누워 있는 거야?” 듣기만 해도 한 대 때리고 싶어지는 말투였다. 눈을 뜨지 않아도 당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당조가 왔다는 사실에 루일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뇌파 감지 결과, 조금 전에 의식이 돌아온 상태로 확인됐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통보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깨어났는지는 저희 책임 범위가 아닙니다. 죽지만 않으면 되니까요.”
당조 녀석, 저 말을 들으면 분명 열받겠는데.
루일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야! 말을 그따위로 해!” 예상대로 상대방의 무심한 대답은 당조의 화를 순식간에 돋웠다.
“여기 있어 봐야 시간 낭비인 것 같은데, 차라리 나 혼자 있을 테니까 나가. 적어도 눈에 거슬리진 않을 테니.”
그렇게 말하면 상대방도 널 상대하기 싫어할 텐데. 루일은 마음속으로 계속 당조를 타박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지더니 문이 닫혔다. 루일은 이제 방 안에 당조 혼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는 눈을 살짝 떴다. 당조는 침대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문 쪽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야.
루일이 막 손을 뻗은 순간, 팔꿈치에서 뼈가 뒤틀리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순간 균형을 잃은 루일은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방 안에 갑자기 피비린내가 나는데,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어?”
“당조, 너 미쳤어?!”
루일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돌아보았다. 그런데 눈에 들어온 것은 차갑게 굳은 당조의 얼굴이었다. 상대를 철저하게 의심하는 기색이 서린 표정이었다.
“대답해. 넌 지금 대체 뭐야?!”
04
“그러니까 네 말은……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조종당해서 지금까지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게 아니라, 확실하다는 거야.” 루일은 아직도 욱신거리는 손목을 문지르며 당조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상대의 눈빛에 서린 망설임이 느껴졌다. 배신당한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감정이었다.
“누굴 속이려고! 너 요즘도 특파팀에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했어. 매일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모두에게 분석 자료를 보내 줬다고. 정말 조종당하고 있었다면 진작 누가 알아챘겠지!”
루일은 이 말만으로 당조를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고 싶었다. 당조의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의 몸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조종당했던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루일로 위장한 가짜’의 정체가 어떻게 발각되었는지는 이미 자신의 몸에 남은 익숙한 상처가 증명하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교묘하게 위장해도 백기 대장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구나.
“백기 대장님이 너희에게 날 감시하라고 하신 거지? 게다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을 테고.”
“아마 교대로 날 감시하되 특파팀의 현황은 자세히 알려 주지 말고, 조금씩 내 상태를 떠보라는 지시를 내리셨겠지.”
“가짜 주제에 분석은 열심히도 하네.”
루일은 현재 상황을 계속 분석했다. 당조의 못마땅한 표정까지도 예상 범위 안이었다.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간접적인 증거이기도 했다.
당조는 잠시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더니,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두 손을 펼쳤다.
“방금 네가 한 말은 정말 루일 같긴 하다. 솔직히 며칠 전의 로봇 같은 루일을 봤을 때는 네가 분석에 너무 몰두하다가 돌아 버린 줄 알았거든.”
“사실 내가 진짜 루일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난 구분 못 해. 다만 네 혐의가 풀리기 전까지는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것만 알아.”
루일은 당조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특파팀은 내부에 어떠한 불안 요소도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백기만 용납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특파팀의 일원인 자신 역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처분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먼저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지금 자신에게 가장 많은 것은 시간이었다.
“당조, 공책 몇 권이랑 펜 한 상자만 가져다줘.” 루일은 손목을 움직여 보았다.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글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확보한 정보만으로도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제법 많았다.
“용의자 주제에 요구 사항도 많네?”
“게다가 우리가 교대로 감시하고 있는데 Evol도 못 쓰잖아.” 같은 팀원인 당조는 루일이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보라는 게 종이 위에 적힌 데이터만 뜻하는 건 아니잖아. 사람의 행동, 언어, 표정, 심지어 냄새까지 전부 정보의 일부야.”
“잊지 마. Evol을 쓰지 못해도 난 특파팀의 분석관이야.”
루일은 소매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머릿속에는 이미 앞으로의 대책이 세워져 있었다.
“내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05
그 후 며칠 동안 루일은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누가 찾아오든 넌지시 질문을 던지거나 상대의 반응을 살펴 정보를 얻어 냈다. 모두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었기에,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에게 들키는 습관이 있기 마련이었다.
Evol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만큼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조금씩 정보를 쌓아 가다 보니 어느새 루일의 옆에는 공책이 감시 장비만큼 높이 쌓여 있었다.
상대방이 자신을 조종한 목적은 특파팀의 정보망을 얻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감정 표현이 지나치게 기계적이었다는 점도 정체가 발각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대체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좀처럼 알아낼 수 없었다. 루일은 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책상 위의 달력을 바라보았다. 고진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감금당한 나날’을 제대로 파악해 보라면서.
요즘 세상에 전자기기도 없이 지내려니 참 불편하네.
루일은 손을 뻗어 달력의 날짜 하나에 동그라미를 쳤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오늘은 당조가 교대 근무를 올 차례일 듯했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치킨을 들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때 당조는 루일의 취향이 변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조사라며 치킨을 가져왔었다.
그건 대놓고 공적인 권한으로 사적인 원한을 갚은 거잖아!
루일은 손목을 문지르며 침대에서 내려와 몸을 쭉 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일은 즉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온 사람은 백기였다.
“백기 대장님, 저…….” 루일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백기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으면 따라 나와.” 백기는 차갑게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갔다.
드디어 ‘진짜 취조’가 시작되는 건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루일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비볐다.
바로 다음 순간, 강렬한 바람의 칼날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엄청난 굉음에 루일은 귀가 먹먹해졌다. 정말 청력을 잃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환자복 차림 그대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섰다.
“보고드립니다, 백기 대장님. 루일, 복귀를 신청합니다!”
“긴장했어?” 백기의 말투는 루일이 예상했던 것만큼 엄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놀리는 듯한 기색마저 있었다.
“긴장했습니다. 하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습니다.”
“이유는?”
“백기 대장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직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용의자를 함부로 해치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루일은 자신이 백기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유일한 자신감의 근원임을 알고 있었다. 특히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랬다.
“괜찮네. 자신의 신분을 잊지는 않았군.” 백기는 뒤쪽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다들 나와.”
“거봐! 내가 이 루일은 진짜가 확실하다고 했잖아!”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당조를 필두로 한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 루일을 에워쌌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 바로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 테니까!”
“좋은 곳? 어디?”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밥 먹으러 가는 거지!”
뭐? 루일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들이 찾아간 식당은 특파팀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가장 익숙한 단골집이었다. 한밤중에도 손님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실제로는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지만, 루일에게는 이곳에 온 지 무척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루일, 예전에는 네가 장기 자랑을 제일 잘했잖아! 역시 자기 자신이라는 걸 증명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예상대로 먼저 장난을 시작한 사람은 당조였다.
“난 조종당했던 거지, 기억을 잃은 게 아니거든.” 루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잔을 들어 한 모금 크게 마셨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금세 식당을 가득 채웠다. 즐겁기도 했지만 조금은 피곤하기도 했다.
한참 만에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온 루일은 소파 구석에서 마침내 조용한 자리를 찾았다. 물론 그 자리가 조용한 진짜 이유는 백기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일은 술잔을 든 채 조금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뜻밖에도 백기 역시 잔을 가까이 가져왔다.
“무슨 생각 해?”
백기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마치 마음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
루일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자신의 잔도 그쪽으로 가져갔다.
“이 축하 자리가 오히려 진짜 재판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해 봐.”
“……결백을 증명하라는 명목으로 사람들 앞에서 사회성 부족한 사람한테 장기 자랑을 시키는 게 재판이 아니면 뭡니까?”
조금 전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던 상황을 떠올리기만 해도 루일은 저절로 울상이 되었다. 루일이 그런 표정을 짓는 모습은 흔치 않았기에 백기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루일은 약간 오른 술기운을 빌려 아까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대장님, 제가 아직도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을까 봐 걱정되지는 않으십니까?”
“조종당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아니까.” 백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마치 루일이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했다.
“어째서요?”
“특파팀 지휘관의 직감.”
백기의 말투는 가벼웠다. 하지만 루일은 그 말 뒤에 평범한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잔 두 개가 공중에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조금 전까지 한데 모여 떠들썩하게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어느새 이 구석 자리로 모여 있었다. 모두 같은 눈빛으로 자리에 앉은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일은 마침내 백기의 입에서 오랫동안 기다려 온 말을 들었다.
“루일, 복귀를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