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승리자는 자기 자신을 이겨 낸 사람이다.
01
피시 앤 칩스. 하나의 음식이다.
여력은 이 음식을 무척 좋아했다. 일부러 조리법을 찾아 집에서 열심히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심심할 때면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다. 심지어 그 이름을 평소 게임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으로 삼을 정도였다.
만들기 쉽고 간편하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여력은 이 음식의 이름을 좋아했다.
‘炸鱼(물고기 폭파)’.
원래 이 말은 폭약을 사용해 물고기를 잡는 행위를 뜻한다. 매우 악질적이면서도 쓸데없이 과한 수단을 동원하는 방식이다. 이후 그 표현이 너무나 절묘하다는 이유로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점차 널리 쓰이게 되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여력은 ‘초보자인 척하면서 진짜 초보자를 괴롭히는 일’을 즐겼다.
예전에는 이런 즐거움을 대전 격투 게임에서만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디세이》가 등장하자 여력은 곧바로 이 게임만의 색다른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격투’였기 때문이다.
정확한 타이밍에 기술을 입력하는 것부터 거리 싸움, 상대의 기술을 받아치는 방법, 연속 콤보, 안전 점프까지…….
격투 게임의 수많은 기술을 《오디세이》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여력은 마치 아직 개발할 여지가 무궁무진한 장난감을 손에 넣은 사람 같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오디세이》의 경기장에 쏟아부었다.
물론 복싱 학원에도 따로 등록했다. 나날이 높아지는 자신의 순위와 점점 발달하는 이두박근을 바라보며 여력은 자신이 꿈꾸던 즐거운 게임이 곧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다만 순위가 높아지자 먼저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도 생겼다.
“3천 위안. 앞으로 하루 동안 진행되는 경기에서는 그냥 지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사장님~.”
고객님의 계좌에 3,000위안이 입금되었습니다. 승낙하자마자 거의 동시에 휴대전화로 입금 알림 문자가 도착했다.
“게임으로 돈 버는 거 정말 쉽네~.”
순위가 높아진 뒤부터는 자신을 찾아오는 전문적인 ‘게임 연출팀’이 생겼다.
그들은 보통 상위 랭커들에게 돈을 건네고 특정 상대에게 일부러 패배하도록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전체 순위표를 조작하는 일은 게임 업계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자신 같은 평범한 플레이어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서 이런 거대한 환경이 달라질 리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마음 편히 돈이나 버는 편이 나았다.
여력은 휴대전화를 침대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그리고 영상을 보며 매일 빠짐없이 하는 준비 운동을 마친 뒤 《오디세이》에 접속했다.
이제 오늘의 먹잇감을 찾아 나설 시간이었다.
초보자용 장비로 갈아입고, ‘피시 앤 칩스’라는 자신의 닉네임을 숨겼다. 그런 다음 초보자들이 좋아할 법한 우스꽝스럽고 귀여운 머리 장식까지 착용했다.
완벽한 ‘경기장 신입’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그는 경기장 주변의 대기 구역을 천천히 거닐며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안 되겠네. 저 사람은 장비만 봐도 레벨이 높은 게 뻔해. 괜히 덤볐다가 역으로 당하면 곤란하지.”
“벽에 기대 있는 사람은 초보자 같긴 한데…… 저 행동을 보니 친구랑 약속을 잡는 중인 것 같아. 아마 대전 신청을 받아 주지 않겠지.”
여력이 풀이 죽은 채 현실을 받아들이려던 순간, 눈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기장이 여기 맞습니까?”
“네, 네, 맞아요. 지도 열어 보면 거기에도 적혀 있잖아요?”
닉네임은 BQ-123.
온몸에는 초보자용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걸어 다니면서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별일이 없는데도 수시로 멈춰 서서 메뉴 버튼을 확인했다.
이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보면…….
틀림없어! 이 녀석은 누가 봐도 완전한 초보자야. 드디어 오늘의 먹잇감을 찾은 모양이다!
02
“형씨, 나랑 경기 한 판 할 생각 있어요? 저 완전 초보거든요.”
BQ-123의 표정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조금 지나서야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듯했다.
“어떻게 하는 건데요?”
“복잡할 거 없어요. 제가 초대하면 수락만 하면 돼요.”
여력은 이 초보자가 마음을 바꿀까 봐 서둘러 초대 버튼을 눌렀다.
‘플레이어 BQ-123이 대전 초대를 수락했습니다. 경기장을 선택해 주십시오.’
“혹시 좋아하는 맵 있어요? 하나 골라 볼래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요.”
눈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초보자를 보며 여력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흥, 역시 초보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각 경기장의 특성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건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말이야.
맵을 선택하는 순간, 주변의 공간이 넓은 술집으로 바뀌었다. 여력과 BQ-123은 경기장 양 끝에 각각 자리를 잡았고, 경기장 상공에는 거대한 점수판이 떠 있었다.
“준비됐으면 정식으로 시작하죠.”
BQ-123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여력도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첫판은 적당히 봐주면서 몇 번 이기게 해 줘야지. 겁먹고 도망가면 곤란하니까. 그런 다음에 이 ‘초보자’를 실컷 짓밟아 주는 거야.
대전 시작!
가볍게 휘둘러진 주먹에서 일어난 바람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거리를 가로질렀다. 여력이 미처 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상태창에는 이미 피해를 입었다는 알림이 떠올랐다.
일격에 사망.
부활한 여력의 머릿속에 가장 그럴듯한 생각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이 자식, 알고 보니 너도 양학하러 온 놈이었구나!
1분도 지나지 않아 피시 앤 칩스는 BQ-123에게 패배했다.
여력은 자신의 뺨을 세게 두드렸다. 희미하게 전해지는 통증 덕분에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저 초보자도 현실에서 격투기를 해 본 사람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너무 방심해서는 안 되겠다.
“이야, 형씨. 생각보다 꽤 잘하네요? 밖에서 뭐 좀 배웠어요?”
그는 짐짓 소매를 털며 방금 전의 대결은 그저 실력을 시험해 본 것뿐이라는 듯한 말투를 취했다.
“네, 복싱을 조금 배웠어요.”
허, 그럴듯하게 연기하네.
하지만 조금 전 단 한 방에 당했던 장면을 떠올리자 손이 저도 모르게 살짝 떨렸다.
이 녀석, 엄청나게 강하잖아. 헬스장 복싱 코치보다도 훨씬 잘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초보자는 어디까지나 초보자다. 게임 세계에서는 단순히 주먹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끝까지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여력의 시선이 오른쪽 세 번째 나무통으로 향했다.
이 맵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저곳에 모든 능력치를 상승시켜 주는 숨겨진 버프가 있다는 것이었다.
저 버프만 손에 넣으면 이 초보자를 짓밟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시작 안 하나요? 아니면 여기서 끝낼 건가요?”
“조급해하지 마요, 형씨. 바로 시작할게요.”
상대의 말투에서 점차 짜증이 묻어나자 여력도 서둘러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맞은편에 서 있는 이 ‘초보 플레이어’는 위치를 살짝 조정했을 뿐이었다. 자세를 보아하니 아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선공을 가하려는 모양이었다.
여력은 미리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대전이 시작되자마자 최대한 빠른 속도로 버프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대전 시작!
대전 시작을 알리는 빛의 장막이 걷히자 여력은 거의 동시에 오른쪽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이번만큼은 여력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여태껏 가장 빠르게 달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예상 밖이었다.
그의 눈앞에 조금 전과 완전히 똑같은 공격이 나타났다.
공격 각도도, 속도도 같았다. 심지어 자신이 미리 대비하고 전속력으로 달려 나올 것까지 계산한 공격이었다.
만약 옆에서 이 대결을 지켜보는 제삼자가 있었다면 여력이 제 발로 상대의 주먹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쿵—!
의심할 여지도 없는 또 한 번의 일격사였다.
다시 부활 지점에서 되살아난 여력은 오래된 격언 하나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람 위에 사람이 있고,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말.
자신은 눈앞의 이 사람에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03
여력은 손바닥을 비비더니 다소 아첨하는 표정을 지으며 상대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형씨는 예전에 무슨 게임을 했어요? 친구 추가 좀 해도 될까요?”
“전에는 게임을 별로 안 했어요. 고수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쳇, 누굴 속이려고.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서 어떻게 나를 반격할 틈조차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이길 수가 있어?
이래 봬도 내가 서버 랭킹 500위 안에 드는 고수라고!
하지만 여력은 기죽지 않았다. 성격이 조금 냉담하긴 해도 이런 실력자를 영입할 수만 있다면 분명 얻을 게 많을 터였다.
“혹시 팀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요? 실력 좋은 플레이어들만 모여 있는 팀인데, 마침 제가 아는 곳이 있거든요…….”
“잠깐만요. 전화 좀 받을게요.”
차가운 목소리가 여력의 권유를 끊었다. BQ-123은 허공의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전화번호가 표시되는 위치였다.
“응, 나야.”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봄날 살랑이는 산들바람 같았다. 방금 전의 차갑고 무뚝뚝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응, 지금 네가 며칠 전에 말했던 그 게임 안에 있어.”
“괜찮아. 바쁜 거 아니야. 마침 임무를 마치고 복귀해서 한번 들어와 본 거야. 이따 퇴근할 때 데리러 갈게.”
상대가 마침내 전화를 끊자 여력은 다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BQ-123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듯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형씨, 생각 좀 해 봤어요?”
“말했잖아요. 관심 없습니다.”
“돈을 벌 수 있다면요?”
여력은 고개를 낮추고 슬쩍 다가갔다. 손바닥을 조금 펼치더니 상대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
“형씨 실력이면 랭킹도 금방 올릴 수 있을 거예요. 그때 우리 팀에 들어오면 경기 한 판에 이만큼이나 받을 수 있다고요!”
“무슨 경기인데요?”
“어라? 관심 생겼어요?”
“계속 말해 보세요.”
“헤헤, 형씨 실력이면 랭킹만 조금 올려 놔도 알아서 돈을 주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올 거예요.”
“이 랭킹은 어떻게 해야 빨리 올릴 수 있죠?”
“계속 이기는 사람이 제일 빨리 올라가죠.”
여력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답을 내놓았다.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적으로 통하는 방법이었다.
BQ-123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망설임 없이 먼 곳을 향해 걸어갔다.
“저기요! 정말 생각 없어요? 적어도 친구 추가라도 해 주고 가요!”
‘BQ-123이 회원님의 친구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화면 중앙에 갑자기 나타난 확인 메시지를 보고서야 여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쳇, 잘난 척은 더럽게 하네. 대화하는 내내 무슨 범죄자 취조받는 기분이었잖아.”
여력은 조금 전의 대결을 떠올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최근 통화 목록에 있는 번호 하나를 눌렀다.
“여보세요? 장 형님이세요? 저 여력이에요.”
“혹시 요즘 우리 쪽에서 의뢰 더 받아요? 경기장 초보자만 노리는 그런 일 말이에요.”
“마침 제가 맡기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서요. 닉네임은 BQ-123이에요. 조건도 별거 없어요. 마주칠 때마다 아주 제대로 박살 내 주기만 하면 돼요. 돈은 걱정하지 마세요. 넉넉하게 드릴 테니까.”
상대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여력은 흡족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날 그렇게 두들겨 패 놓고 그냥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아?
어림도 없지!
04
477위, 플레이어 BQ-123. 사흘 뒤 여력이 랭킹에서 확인한 그의 순위였다.
“진짜 엄청나게 빨리 올라왔네. 벌써 나보다 순위가 높잖아.”
여력은 불쾌한 듯 입을 삐죽이며 상대의 대전 기록을 열어 보았다. 스스로 접속을 종료해 패배로 처리된 십여 판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야말로 연전연승이었다. 그렇게 단숨에 랭킹 상위권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다. 심지어 그 패배자 명단에는 자신들이 속한 팀에서 가장 강한 장 형님의 이름도 버젓이 올라 있었다.
“……장 형님도 상대가 안 됐구나. 그러니까 요즘 그렇게 많은 대형 길드에서 이 사람을 찾고 있지.”
아무 생각 없이 양학할 상대를 찾다가 이런 초보 고수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자 신나게 초보자들을 상대하려던 의욕마저 갑자기 사라졌다. 여력은 적당히 실력이 떨어지는 플레이어 몇 명을 쓰러뜨린 뒤 미련 없이 게임에서 나왔다.
띠링띠링— 여력이 막 접속을 종료했을 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문자 메시지 한 통이었다.
‘늘 만나던 곳으로 와. 연출팀 회의다.’
메시지를 확인한 여력은 침대에서 일어나 털이 복슬복슬한 슬리퍼를 신고 현관으로 향했다.
연출팀이 늘 모이는 장소는 길모퉁이에 있는 카페였다.
물론 여력은 이런 곳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분위기니 운치니 하는 ‘커피’를 마시러 이런 곳에 오느니 차라리 탄산음료를 몇 잔 더 마시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거물들은 하나같이 커피를 유난히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모임 장소도 이곳으로 정해졌다.
어차피 여력은 이런 자리에 와 봤자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였다. 자신도 일종의 행동대원에 불과했으니까.
장 형님을 제외한 나머지는 해킹이나 게임 계정 거래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어차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여력은 그냥 장 형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장 형님, 지난번 의뢰 때문에 고생 많으셨어요.”
하지만 장 형님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고생은 무슨. 어차피 이기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보수 문제는 별개니까, 이번 달 의뢰비에서 절반은 깎을 거야.”
돈을 깎겠다는 말을 듣자 여력은 점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자기가 실력이 부족해서 못 이긴 거면서 왜 나한테 책임을 돌리는 거야…….
그는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가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쓴맛에 그대로 뱉어 버릴 뻔했다.
“네 거는 에스프레소로 주문했어. 맛있지?”
“맛없어요. 써 죽겠네.”
“가끔은 쓴맛도 보고 희생도 좀 해야 돈을 벌 수 있는 법이야.”
“이번에 오프라인에서 해결사들을 섭외하는 일은 너한테 맡기려고.”
여력은 고개를 들어 장 형님의 평온한 눈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도 방금 마신 커피처럼 씁쓸한 기분이 번졌다.
온라인에서 이길 수도 없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없는 상대라면 어떻게든 주소를 캐낸다. 그런 다음 Evolver를 고용해 상대를 호되게 혼내 주고, 순순히 랭킹에서 내려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력은 팀에 들어온 뒤로 이런 수법을 숱하게 보아 왔다.
하지만 여력은 그저 게임을 좋아할 뿐이었다. 애초에 이런 불법적인 일까지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그는 두 손을 펼쳐 보이더니 고개를 젖혀 눈앞의 커피를 단숨에 비워 버렸다.
“어디 가? 아직 돈도 안 나눴는데.”
“장 형님도 저 잘 아시잖아요. 전 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끼지 않아요.”
자신은 그저 게임을 하면서 용돈이나 조금 벌고 싶었을 뿐이다. 플레이어 사이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온라인에서 해결해야 하는 법이었다.
복슬복슬한 슬리퍼만으로는 추운 날씨를 견딜 수 없었다. 여력은 꽁꽁 언 발가락을 이불 속에 집어넣고 곧바로 《오디세이》에 접속했다.
예상대로 그 남자는 오늘도 랭킹전을 치르고 있었다.
‘BQ-123이 회원님의 대전 초대를 수락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05
“며칠 동안 잘 생각해 봐요. 랭킹전은 좀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여력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을 몇 번이나 처참하게 쓰러뜨렸는지 모를 상대와 길가에 서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BQ-123이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간단히 말해서, 랭킹이 빨리 올라갈수록 골치 아픈 일도 빨리 찾아온다는 거죠.”
여력은 최대한 돌려서 자신의 진짜 의도를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귀찮은 일은 상관없어요.”
“형씨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 안에서의 이야기죠. 《오디세이》 밖으로 나가면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다고요.”
“우리 연모시의 치안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을 텐데요.”
좋아. 남의 운명은 남에게 맡기고, 내 걱정이나 하자.
여력은 속으로 한바탕 신랄하게 투덜거렸다. 저런 녀석은 한번 호되게 당해 봐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여력에게는 꼭 해 보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형씨,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렇게 여러 번 얻어맞고 나니까 꽤 분하거든요.”
“크고 작은 대회를 통틀어 나도 나름 게임 고수 소리 듣던 사람이고, 이제 우리도 아는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더는 초보자인 척 안 할게요. 이번에는 제대로 한 판 붙어 보는 게 어때요?”
여력이 상대에게 자신의 닉네임인 ‘피시 앤 칩스’를 처음으로 공개한 순간이기도 했다.
“좋아요.” 상대는 짧고 힘 있는 한마디로 대전 신청을 받아들였다.
확실히 결과는 여력이 상상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이번에는 경기가 시작되고 2분이 지나서야 쓰러졌으니까.
이 정도면 나름 보람 있는 결과 아닐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력의 대전 기록은 어느새 ‘패배’라는 글자로 가득 차 있었다.
상대는 장비에 의존하지도, 스킬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장 단순한 방법만으로 여력이 도저히 맞설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경기장에서 영광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 것이겠지.
그동안 자신이 초보자들을 상대로 저질렀던 행동을 떠올리자 여력은 문득 자신이 영락없는 광대처럼 느껴졌다.
그는 속으로 쓴웃음을 두어 번 짓고는 닉네임을 바꿀 만한 곳을 찾아 돌아섰다.
이제 피시 앤 칩스라는 이름은 그만 써야겠다. 그냥 감자튀김이라고 하지, 뭐.
“잠깐만요. 아직 가지 말아요. 물어볼 게 있어요.”
뒤에서 들려온 BQ-123의 목소리에 여력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 자리에 꼿꼿이 멈춰 섰다.
“됐어요, 됐어! 오늘 하루 종일 형씨한테 살아 있는 샌드백 노릇을 했는데, 아직도 부족해요?”
“싸우려는 게 아니에요. 다른 걸 좀 물어보려고요.”
여력은 BQ-123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망설이는 표정을 발견했다. 그러자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호기심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럼 물어봐요. 이 게임이라면 내가 아주 잘 알거든요.”
“이 게임에서 선물하기 좋은 물건은 뭐가 있나요?”
“예쁜 물건은 꽤 많죠. 남자한테 줄 거예요, 여자한테 줄 거예요?”
“……여자요.”
이런 고수도 알고 보니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었구나!
하지만 며칠이 더 지나자 여력이 걱정했던 일이 결국 벌어졌다.
그는 익숙한 BQ-123이 다시 접속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장 형님 일행과도 연락이 끊긴 듯했다. 무언가 중요한 일로 바쁜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 줬는데. 이래서 남의 충고를 안 들으면 코앞에서 낭패를 보는 거라니까.”
여력은 심심한 듯 게임에서 접속을 종료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았다. 앞으로는 그 플레이어를 다시 볼 수 없겠지.
바로 그때, 익숙한 문자 메시지가 또다시 도착했다.
‘오후 1시. 늘 만나던 곳으로 와.’
여력은 평소처럼 익숙한 슬리퍼를 신고 늘 가던 카페로 향했다.
카페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안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장 형님 외에도 처음 보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저 사람들이 Evolver 해결사들인가…….
또다시 이런 일에 엮이게 될 생각을 하자 여력은 기운이 빠졌다. 그는 카페 입구에 쪼그려 앉아 한 발짝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냥 경기장에서 게임이나 하고 싶은 것뿐인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특파팀에서 수사 중입니다. 관계자 외에는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십시오.”
“특파팀?”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여력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눈 깜짝할 사이, 흰색 옷을 입은 남자가 그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차분한 눈썹이 날카로운 곡선을 그리며 치켜올라가 있었고, 호박색 눈동자에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을 듯한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여력은 입술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입에서 나오는 말마저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기요. 저는 그냥 우연히 커피 한잔 마시러 온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몰라요…….”
“이름은 여력, 올해 스물아홉 살. 직업은 프리랜서. 맞습니까?”
상대가 자신의 개인정보를 너무나 정확하게 읊자 여력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설마 우리 연출팀에서 벌인 일 때문에 특파팀까지 출동한 건가?
여력은 속으로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는 바람에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마, 맞아요. 저예요.”
“Evolver를 고용해 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일에 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여력이 순간 멍해졌다.
“저…… 저, 저는 그런 방법이 있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직접 관여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관여하지 않았다면 다행이군요. 일단 가지 말고 기다리세요. 이따가 같이 경찰서로 가서 진술을 받겠습니다.”
여력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창문 쪽에서 거센 바람이 갑자기 몰아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들이닥치는 강풍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얼핏 보인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까지 자리에 앉아 있던 해결사들은 남자가 들어오는 순간 벌떡 일어섰다.
높이 치켜든 주먹들이 최대한 빠르게 남자를 쓰러뜨리려는 듯 그를 향해 뻗어 나갔다.
하지만 흰색 외투를 입은 남자는 눈앞에 닥친 공격 따위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침착하게 손을 들어 올렸고, 곧이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바닥에 제압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여력의 머릿속에서 지난 며칠간 보지 못했던 익숙한 광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BQ-123과 완전히 똑같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격투였구나. 여력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