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역할이든 저마다의 삶이 있다.
01
평범한 ‘보드게임 매장’ 직원인 평상의 일상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매일 매장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NPC’ 역할을 하는 것 외에도, 사장의 지시로 다른 매장의 게임 시나리오를 체험하러 가는 일이 잦았다. 명목상으로는 시장 조사였지만, 실제 목적은 어떻게든 참고할 만한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몸은 녹초가 될 만큼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보람 있는 일이었다. 하늘을 떠다니는 풍선도 언젠가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아, 오늘 일도 드디어 끝났다…….”
하루 일과를 마친 평상은 침대에 반쯤 누워 심심한 듯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온 평화도 휴대전화의 알림음이 울리는 순간 산산이 깨졌다.
“평상아, 이틀 뒤까지 《오디세이》 게임 체험 보고서 하나 준비해 줘. 이번 ‘광란의 밤’ 이벤트에 관한 거야.”
“내가 어렵게 네 장비에 베타테스트 참가 자격을 받아 놨으니까 오늘 밤에 서둘러 체험해 봐.”
“열심히 해. 잘하면 연말 성과 평가에도 반영해 줄 테니까.”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음성 메시지를 듣자 평상은 입안의 컵라면마저 맛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성과 평가에 반영해 준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일을 끝내지 못할 경우 월급이 깎인다는 뜻이었다.
평상은 옆에 표시된 시간을 힐끗 보았다. 곧 ‘광란의 밤’ 이벤트가 시작될 참이었다.
그는 서둘러 헤드셋을 착용했다. 눈부신 백색광이 번쩍이고 지나가자 어느새 《오디세이》의 게임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광란의 밤…… 어디로 들어가야 하더라…….”
시스템 화면을 열자 예상대로 ‘광란의 밤’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길상촌’이라는 게임에는 현재 시간대에 참가할 수 있는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본 게임에는 일부 공포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편함을 느끼실 경우 즉시 게임을 종료해 주십시오.
안내 음성을 들은 평상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공포 장르를 무척이나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전 사장의 메시지를 떠올리자 억지로 정신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공포 게임을 체험하는 것보다 월급이 깎이는 쪽이 훨씬 더 무서운 이야기처럼 들리니까.
플레이어 ‘떠밀려 온 오리’님, 길상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먼지가 흩날리는 자갈길 너머로 구불구불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가 희미하게 보였다.
시작하자마자 플레이어를 마을 밖에 던져 놓다니. 이것도 몰입감을 높이는 방법 중 하나인가?
평상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 게임 내 정보창을 열어 보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마을 주민’이라는 신분과 별다른 내용도 없는 개인 임무였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투표를 제외하고는 이번 게임의 승패에 그가 관여할 일이 별로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 평상의 유일한 바람은 이번 게임이 제발 너무 무섭지 않기를, 그리고 하루빨리 체험을 마치고 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걸음을 재촉할수록 이 좁은 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말라붙은 버드나무가 길가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여러 갈래로 뻗은 나뭇가지는 앙상하게 마른 팔처럼 보였다.
우지끈.
발밑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선명한 소리가 들린 순간, 평상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느꼈다.
날카로운 자갈이 팔을 긁고 지나가며 옅은 핏자국을 남겼다. 땀으로 흐려진 시야에는 몸 옆에 수북이 쌓인 하얀 물체들만 보였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기자 밭에는 낡은 묘비들이 이리저리 쓰러진 채 흩어져 있었다.
그 광경은 평상의 신경을 거세게 자극했다. 그는 황급히 땅을 짚고 일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거센 바람이 등 뒤에서 휘몰아쳤다. 마치 산속을 떠도는 처절한 울부짖음 같았다.
막연한 공포는 이미 평상의 이성을 모조리 집어삼킨 뒤였다.
그러다 누군가 어깨에 손을 얹는 감촉이 전해졌다.
“실례합니다. 길상촌은 이쪽으로 가면 됩니까?”
눈앞에 나타난 것은 젊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플레이어를 나타내는 아이디가 떠 있었다.
BQ123.
다행이다. 드디어 사람을 만났어.
평상은 마음속으로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하얗게 질렸던 얼굴에도 조금씩 혈색이 돌아왔다.
“저는 여행하러 온…… 배낭여행객입니다. 당신은요?”
“저는 이 마을 사람이에요.”
평상은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그러다 자세히 살펴보고서야 조금 전 자신이 백골로 착각했던 물체가 사실은 하얗게 바랜 마른 나뭇가지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앞으로 가면 길상촌이 나와요.”
“우리 마을에 외지인이 찾아오는 일은 흔치 않은데요.”
평상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설정을 떠올린 뒤 눈앞의 남자에게 마을의 단층집들을 가리켜 보였다.
“고맙습니다.”
남자는 등에 멘 배낭을 가볍게 추스르고 마을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평상도 마을 구석에서 낮고 작은 단층집 하나를 찾아냈다.
게임 설정상 그곳이 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이었다.
넓은 방 안에는 탁자와 긴 의자 외에 침대 하나만 외롭게 놓여 있었다.
하지만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평상에게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하다. 역시 이불 속이 제일 안전해.
먼지가 잔뜩 쌓인 창문 너머로는 문 앞에서 기괴하게 흔들리는 허수아비의 모습만 희미하게 보였다.
텅 빈 방 안은 음산하고 습기가 가득했다. 평상이 불안한 마음에 이불 속에서 몸을 떨 때마다 침대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평상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오래 고통받느니 차라리 한 번에 끝내는 게 낫지!
제발 누가 와서 나 좀 빨리 죽여 줘!
02
다음 날 아침, 추위에 잠에서 깨어난 평상은 절망적인 기분에 빠졌다.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자신을 죽여서 탈락시켜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체험 보고서도 당당하게 적당히 분량만 채워서 즐거운 마음으로 사장에게 제출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처럼 존재감 없는 평범한 마을 주민은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니 살해당할 확률도 극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참가자는 마을 사당으로 집합해 주십시오.”
갑자기 울려 퍼진 확성기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했다. 평상은 멀리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게임 진행 순서대로라면 다음은 투표 시간일 것이다. 어젯밤 누군가 먼저 탈락하기는 했을까?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은 기와집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었는데, 겉모습만으로는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 다만 어느 집에서는 그 음산한 작은 허수아비가 사라진 것 같았다.
이게 바로 마을 주민의 삶인가? 날이 어두워지면 눈을 감고, 그 뒤로는 온 세상이 조용해지는 거지.
평상은 마을 회관으로 걸어가면서 어떻게 발언해야 늑대인간의 눈에 띄어 죽임을 당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하지만 어젯밤에는 이불 속에 숨어 무서워하기 바빴던 탓에 딱히 이야기할 만한 정보도 없었다.
어느새 마을 회관의 커다란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안에는 사람들이 북적이며 모여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어제 자신을 깜짝 놀라게 했던 BQ123도 있었다.
에라, 어떻게든 되겠지.
낡은 문턱을 넘기 직전, 평상의 머릿속에 대담한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차라리 늑대인간인 척해 볼까? 다른 사람들이 투표로 날 탈락시키게 만드는 거야!
하지만 생각과 실천 사이에는 언제나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속으로는 늑대인간 행세를 해서 이 게임을 끝내고 싶었지만, 막상 발언할 차례가 되자 말을 더듬거리기만 했다. 결국 별다른 반응도 끌어내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이미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평상은 자신의 체험 보고서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외지인을 속이고 비밀 광산을 지켜라’라는 임무가 남아 있었다. 어쨌든 할 일이 하나쯤은 있는 셈이었다.
조금 마음을 가라앉힌 평상은 마을 중앙으로 걸어갔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차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탐색할 테니, 자신은 그저 가만히 앉아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면 되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마른 나뭇가지에 가끔 내려앉는 까마귀들 외에는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평상은 길가에 놓인 삽을 집어 들고 땅을 마구 쿡쿡 찔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시야에 사람 그림자 하나가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어제 마을에 들어올 때 만났던 BQ123이었다.
“당신이네?”
“왜 단서를 찾으러 가지 않는 거죠?”
심심해서 땅이나 파고 있는 평상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BQ123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 건 당신들 같은 외지인이나 하는 거지. 난 안 해요.”
“난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이 마을은 손바닥 보듯 훤하거든.”
직업병이 발동한 것일까. 평상은 시스템에서 제공한 배경 이야기만으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평범한 마을 주민 역할에 몰입했다.
그는 길가의 돌의자에 털썩 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영락없이 동네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요? 어제는 이 마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던데요.”
“원래 겁이 많은 성격이라 어쩔 수 없어요.”
“그럼 조금 전 촌장님이 말씀하신 저주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군요.”
“당연하죠. 그런 건 피하기에도 바쁘니까요.”
평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BQ123과 눈을 마주쳤다. 상대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서린 날카로움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 플레이어, 말투도 제법 그럴듯하네. 게임에 꽤 몰입한 모양이야.
그는 고개를 숙여 두어 번 기침한 뒤 바짓단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뒤쪽 숲을 가리켰다.
“조사하고 싶으면 뒷산으로 가 봐요. 그쪽은 온통 황무지에 버려진 무덤뿐이라 음기가 아주 강하거든요.”
“뭔가 수상하고 기괴한 걸 찾고 싶다면 아마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죠.”
평상은 최대한 실감 나게 설명했다.
BQ123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BQ123은 뒷산이 아니라 멀리 있는 사당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 처음 시도한 ‘속이기 작전’이 실패할 것 같자 평상은 황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뒷산에는 안 가요?”
“안 갑니다. 정보 알려 줘서 고마워요.”
BQ123이 공중에서 손을 가볍게 흔드는 모습을 보며 평상은 자신의 ‘속이기 작전’이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없이 진흙 바닥을 몇 번 밟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남아 있었다.
마을 주민 노릇도 참 쉽지 않네.
03
또 하루가 지나갔다. 마을에서는 플레이어 두 명이 추가로 탈락했다. 물론 그중에 평상은 없었다.
회의에서도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마을 주민의 입장이었다. 화제가 그에게 머문 시간은 고작 30초 남짓이었다. 곧 사람들의 관심은 다시 범인이 누구인지로 옮겨 갔다. 심지어 그가 선량한 주민이라는 사실까지 확인되면서, 이제 사람들은 그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선량한 주민인 평상은 또다시 게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한 표를 던졌다.
그는 사당 문 앞에 서 있었다. 눈앞의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소맷자락을 스치는 음산한 바람이나 느끼며 충실한 구경꾼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떠밀려 온 오리.”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평상은 잠시 멍해졌다. 상대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자신의 게임 아이디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BQ123이네.
평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이틀 동안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별로 마주칠 일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이 사람하고는 자주 얽혔다.
“왜 불렀어요?”
“요 며칠 저주 때문에 소란스럽잖아요. 촌장님이 다들 조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보고하라고 하셨어요.”
“네, 알겠어요.”
어차피 개인 임무가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주어진 추가 줄거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과는 별 관계가 없을 것이다. 있어 봐야 심부름 몇 가지 정도겠지.
하지만 BQ123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에는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외지인치고는 마을 일에 꽤 관심이 많네요?”
“배낭여행객이니까요.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소문도 많이 듣게 마련이죠.”
“쳇, 어차피 비밀 광산 때문에 온 거면서.”
평상은 턱을 치켜들고 까치발까지 들었다. 영락없이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토박이 주민의 모습이었다.
“잘 들어요. 비밀 광산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니까, 당신들도 왔던 곳으로 돌아가요.”
“아무런 근거 없이 소문이 생기지는 않겠죠. 분명 발단이 있을 겁니다.”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요. 배경 설정에 안 나와 있거든요.”
느닷없는 대답에 BQ123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이내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을 주민 연기는 꽤 그럴듯하게 하시네요.”
“무슨 소리예요? 난 진짜 이 마을 주민이라니까요.”
어쨌든 평상은 평범한 마을 주민 역할을 끝까지 충실하게 수행하기로 했다. BQ123도 그 설정을 받아들인 듯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죠. 당신도 나한테 뭔가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평상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상대에게 손짓했다. 모처럼 얻은 토박이 주민의 이점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침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알려 드릴 수 있겠네요.”
BQ123은 잠시 생각하더니 평상의 곁으로 다가왔다.
“여기저기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 안전할 겁니다.”
멀어지는 BQ123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평상은 마음속으로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난 마을 주민이라 어디 돌아다닐 수도 없다고!
04
또다시 무사히 아침을 맞았다.
평상은 낡은 솜이불을 기분 좋게 걷어 젖히다가 하마터면 자신이 집에 돌아온 줄 착각할 뻔했다. 창밖에서 시끄럽게 울어 대던 까마귀 소리는 이제 알람 소리처럼 ‘듣기 좋았고’, 원래는 음산하기만 했던 아침 안개도 오히려 산골 마을 전체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 주는 것 같았다.
물론 문 앞에서 바람을 따라 흔들흔들 움직이는 허수아비 인형만 신경 쓰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정도면 게임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그는 조용히 시스템 화면을 열고 개인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는 편이 나았다.
장작 백 개 패기, 마을의 닭 전부에게 모이 주기, 그리고 오래전부터 수리하지 않아 낡아 버린 마을 우물 고치기.
밝고 쾌활한 청년에게 주어진 임무답게, 역시 이름값을 하는군.
평상은 말없이 집 안에서 장작 패는 도끼를 꺼냈다. 그리고 문 앞에 쌓인 장작을 하나씩 내리쳐 반으로 쪼개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집 앞에서 한가롭게 장작을 패고 새들에게 모이를 주며 시간을 보냈다. 주변에서 무언가를 찾아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야, 그 벽돌 좀 그만 뒤집어! 오전 내내 사람들이 뒤집어서 아주 닳아 없어지겠다!”
“거기 너, 너, 너! 우리 집 닭장에 들어가지 마! 거기에 뭐 숨겨 놓을 만한 게 있겠냐?”
평상은 자기 집 앞 흙언덕 위에 높이 서서 다른 플레이어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는 마을 주민이라는 역할과 완전히 하나가 된 듯했다.
마침내 마을의 닭들에게 전부 모이를 주고 나자 평상은 지친 몸을 이끌고 길가의 국숫집 노점에 앉았다.
“소고기 국수 나왔습니다~!”
“사장님, 저 아직 주문 안 했는데요?”
“그 국수는 제 것 같은데요.”
평상이 고개를 들었을 때, 탁자 맞은편에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BQ123? 이상하게 당신이랑은 자꾸 마주치네요?”
“그러게요. 참 우연이네요.”
평상은 말없이 자기 앞에 놓인 국수 그릇을 상대 쪽으로 밀어 주었다. 그런데 그릇에서 은은하게 풍겨 오는 고추기름 향에 그만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콜록! 생각보다 매운 걸 잘 먹네요?”
“그럭저럭요. 외지인들이 아무래도 매운 걸 좀 더 잘 먹는 편이죠.”
평상은 손을 내저어 공기 중에 퍼진 매운 냄새를 쫓아냈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마을 곳곳에서 BQ123과 자꾸 마주쳤다. BQ123이 마을 안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있을 때면 곁에는 늘 여자아이 하나가 따라다니기도 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BQ123에게는 분명 소속된 진영이 있을 것이다.
게임이 여기까지 진행되면서 남은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 걸까?
평상은 BQ123을 힐끗 올려다보며 손에 든 젓가락을 무심하게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웬일로 한가하게 국수를 먹고 있어요? 찾던 물건은 이제 안 찾아요?”
“찾아야죠. 그래도 배가 고프면 밥은 먹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찾는 물건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거라면요?”
“그렇다면 계속 찾아야죠.”
고요한 낮은 탁자 주변에는 국수를 길게 후루룩 들이켜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BQ123의 대답은 비밀 광산에 관한 이야기 같기도 했고, 다른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가령 평상의 마음속에 줄곧 자리 잡고 있던 막막함 같은 것 말이다.
“선량한 주민 진영이 이기기를 바란다면 저를 따라 투표해도 됩니다.”
더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앞으로 평상이 훨씬 수월하게 게임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BQ123의 눈을 바라보던 평상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냥 됐어요. 당신이랑은 제법 친해졌지만, 난 누구 편에도 설 생각이 없거든요.”
“그럼 지금은 뭘 하고 싶은데요?”
“지금은 그냥 마을 어귀에 있는 오래된 우물을 고치러 가고 싶어요.”
“그것도 괜찮겠네요.”
그렇게 생각하자 평상은 허리를 곧게 폈다. 입가에서도 평소의 풀이 죽은 기색이 사라져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줄곧 ‘투명인간’처럼 존재감 없이 지내 왔던 것이 오히려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밝고 쾌활한 청년은 어째서인지 모르게 항상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법이라고.
평상에게 이번 게임의 시나리오는 조금 지루했지만, 그렇다고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 나서는 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별다른 재미도 없는 수리 작업을 전부 마친 뒤, 그는 자신의 ‘공포 내성’을 단련해 보기로 했다.
평상은 마을 어귀의 오솔길에 섰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첫날 자신을 깜짝 놀라게 했던 그 길에 다시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덤벼라, 작은 흙비탈! 덤벼라, 마른 나뭇가지!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으니까!
그는 제자리에서 무릎을 높이 들어 올리며 몇 차례 준비 운동을 했다. 이따가 상황이 심상치 않으면 조금이라도 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말이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운동을 하던 평상은 깜짝 놀라 비틀거리다가 하마터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아니, 당신은 왜 또 귀신처럼 내 등 뒤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뒤에 서 있는 BQ123을 바라보던 평상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자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왜요? 여자친구는 아직 못 달랬어요?”
“네. 그래서 바람 좀 쐬러 나왔습니다.”
“기분 전환하러 이런 데를 오다니, 장소 한번 제대로 골랐네요.”
“무슨 뜻이죠?”
“귀신이 좀 많거든요.”
익숙해진 덕분일까. BQ123을 보면 왠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는 거리낌 없이 농담을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미안하지만 배낭여행객은 전부 무신론자라서요.”
“괜찮아요. 사실 나도 귀신은 안 믿거든요.”
“그런데 그 저주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탈락했으니, 슬슬 믿어 봐야 하나 싶기도 하고요.”
평상은 길가의 작은 돌멩이를 아무렇게나 걷어찼다. 고요한 황혼 속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는 곁에 선 BQ123을 힐끗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드리운 그림자가 그의 이마에 얼룩덜룩한 무늬를 남기고 있었다.
“의심 가는 사람은 있어요?”
“난 낮에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평범한 주민이고, 밤에는 눈 감고 아무것도 못 보는데요.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사람이 있어야죠.”
“그래도 이제 남은 사람이 얼마 없잖아요. 한 표 한 표가 중요하지 않겠어요?”
평상은 BQ123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점점 저물어 가는 석양이 상대의 몸에 드리운 빛을 절반쯤 가리고 있었다. BQ123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저 입술을 가볍게 움직였을 뿐이었다.
“전에 우리 쪽에 합류하라고 했던 제안은 아직 유효합니다.”
“에이, 공교롭게도 난 정반대예요. 내일 당신한테 투표하려고 했거든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평상은 상대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제가 늑대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늑대인간이 아니라고 믿는 쪽에 더 가까워요. 그러니까 그냥 내가 기권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당신이 투표로 탈락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난 마지막에 늑대인간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거든요.”
평상은 BQ123을 향해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선량한 주민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자 BQ123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 표, 잘 선택하셨네요.”
두 사람이 오솔길을 떠나자 곧이어 밤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상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관전’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말없이 게임 종료 버튼을 눌렀다.
침실의 커튼이 바깥의 빛을 가리고 있어 방 안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평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문서에 오래전부터 생각해 둔 제목을 적었다.
존재감 없는 투명인간의 《오디세이》 여행기.
한동안 정신없이 글을 써 내려간 끝에 그는 마침내 홀가분한 기분으로 기지개를 켰다.
어찌 됐든 이제야 겨우 사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장면들 때문에 좀처럼 문서를 닫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쓴 글을 몇 번이고 다시 꼼꼼히 읽어 보았다.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딘가 한 문장이 빠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번 문서의 제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답이 문득 너무나도 분명해졌다.
평상은 여러 사장님을 위해 적어 놓았던 형식적인 인사말을 두 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체험 보고서의 맨 마지막에 굵은 검은 글씨로 한 문장을 덧붙였다.
모든 시나리오에는 밝고 쾌활한 청년 한 명쯤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